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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역대상 10:13 / 빈 자리 / 220708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역대상

역대상 10:13 / 빈 자리 / 220708

정인순 2022. 7. 9. 08:26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한윤범

20220708a 울산강의-역대기상(12강) 10장 13절 : 빈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역대상 10장하겠습니다. 10장 1절에,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이 싸우더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다가 길보아산에서 죽임을 받고 엎드러지니라 블레셋 사람이 사울과 그 아들들을 추격하여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아비나답과 말기수아를 죽이고 사울을 맹렬히 치며 활 쏘는 자가 사울에게 따라 미치매” 그렇게 돼 있지요.

블레셋 사람과 이스라엘 사람이 싸운다. 성경에서는 무엇과 무엇이 싸우는지를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인간 대 인간의 싸움, 이것 아닙니다. 성경에서 인간과 인간의 싸움은 인정하지 않아요. 인간 대 하나님의 싸움, 이것도 성립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끝까지 밀어붙이는 것은 악마 대 주님의 싸움, 이게 정답입니다. 인간은 들러리에 불과합니다.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일어나는가? 나와 남과의 싸움으로 드러납니다. 나와 남의 싸움은 누가 이기든 간에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습니다. 악마 대 주님의 싸움이 악마도 보이지 않고 구약은 주님을 ‘하나님의 이름’이라 해요. 같은 걸로 ‘여호와’라 하는데, 악마 대 하나님의 싸움은 여기서 대리전쟁이 일어나요. 주님에 속한 나와 악마에 속한 나, 이 싸움만 있어요. 구약에서 이 싸움밖에 없어요. 대리전쟁입니다.

주님에 속한 나와 주님께 속하지 않은 나 아닌 남과의 싸움, 성경에서 유일하게 이 싸움밖에 없어요.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은 아무 의미 없습니다. 누가 이기든, 누가 지든 상관없는 거예요. 그래서 성경에서는 인간 승리 같은 이런 건 없습니다. 나의 승리가 없어요. 왜? 대리전쟁이기 때문에 주님의 승리지 나의 승리라는 게 아예 없습니다. 인간 승리 없습니다.

또 뭐가 없느냐 하면 인간 실패도 없어요. 인간 승리 없으면 인간 실패도 없습니다.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악마의 실패를 언급하는 겁니다. 쓸데없이 인간 승리를 외친다든지 인간 실패를 외친다든지 이거는 성경과 아무런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 이런데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대리전쟁이라는.

구약에서 성경에서 나라고 하는 것은 주님의 대리자로서의 전쟁, 이걸 이스라엘이라고 합니다. 여기 남에 해당되는 오늘 역대상 10장에서는 이게 어떤 나라냐 하면 블레셋이란 나라가 대리전쟁으로 붙게 돼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특징은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이 있어요. 언약궤, 또는 언약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블레셋은 뭐가 없느냐 하면 언약이 없어요, 율법이 없어요. 그걸 오늘 본문에서 4절에 이렇게 돼 있습니다. “자기의 병기 가진 자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저 할례 없는 자가 와서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 할례 없는 자. 할례라 하는 것은 율법에 속한 겁니다. 율법에 속한 자. 율법이 없는, 할례 없는 다른 말로 언약이 없는 자가 나를 찌르게 되면 그다음 뭐라고 돼 있느냐 하면 그다음에 사울 왕이 실수를 하고 있어요.

누구를 모독하느냐 하면, 나를 욕되게 한다. 지금 사울 왕이 어디서 잘못이냐 하면 지금 이스라엘 왕은 대리전쟁이에요. 자기 전쟁이 아닙니다. 인간 승리 아닙니다. 자기 전쟁 아니에요. 오늘 강에서 여러분들이 핵심적으로 먼저 알아야 될 것은 주님과 대리자 이스라엘 사이에 전쟁할 때 필수적으로 뭘 남겨주어야 하느냐 하면 여기에 빈자리, 주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빈자리가 반드시 형성돼야 돼요.

이 빈자리에 이스라엘이 건방지게 들어가면 안 돼요.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에 이스라엘은 무엇의 대리전쟁이냐? 빈자리를 대신해야 되는 전쟁을 해야 돼요. 빈자리니까 이거는 아무것도 없음이 되겠지요. 아무것도 없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이스라엘은 전쟁을 해야 돼요. 주님과 인간 사이에 빈자리가 있다, 이걸 증거하기 위해서 전쟁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런데 사울 왕의 잘못은 뭐냐? 이 빈자리에 들어가선 안 될 자리에 사울 왕 본인이 들어간 거예요. 본인 들어가 버리면 말로는 주님을 위한 전쟁이지만 사실은 자기를 위한 전쟁이 돼버립니다. 빈자리에 나의 명예와 나의 자존심으로 꽉 차있으니까요. 꽉 들어있어요. 어떻습니까? 오늘날 현대인들이 살아가는 모습과 똑같지요.

교회 나와서 철야기도하고 열심히 충성하고 또는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사는 것, 오늘도 열심히 사셨잖아요. 피곤에 쩔어서 열심히 사셨잖아요. 누굴 위해서? 정답은 빈자리를 위해서. 내가 들어가선 안 될 자리, 내가 거기서 비켜서 쳐다볼 자리, 내가 거기 발을 들여놓으면 절대로 안 되는 자리, 그럴 때 내가 누구의 대리자라는 게 성립이 돼요.

만약에 나에게 뒷배에 뒤 배경에 빈자리가 없으면 나의 전쟁이 됩니다. 김 씨 같으면 김의 전쟁, 박 씨 같으면 박의 전쟁, 최 씨는 최의 전쟁, 그렇게 돼요. 항상 빈자리를 남겨둬야 돼요. 그 빈자리를 비어내게 비어있음을 드러내기 위한 결사적인 싸움을 해야 돼요. 그 빈자리에 어떤 인간의 가능성도 섞이면 안 된다는 그 빈자리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 인생은 싸움터로 부름 받은 거예요. 성도 같은 경우에.

그러면 사람들은 왜 그 빈자리를 자기가 채우려고 하느냐? 이게 왜 빈자리여야 하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게 있었어요. 그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따먹지 말라고 한 거예요. 알게 하는 나무, 따먹지 마라. 선악에 대한 지식, 네가 거기에 발 들여놓으면 안 돼. 네가 저주받아,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 했는데 인간이 따먹었단 말이죠. 따먹었으니까 인간이 스스로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 자신의 지혜와 지식을 게워낼 수가 없어요. 토해낼 수가 없어요. 너무 아니까, 너무 똑똑하니까. 선악, 선악 정도는 이거는 내가 어릴 때부터 완전히 도통했다고 각자들 자부하거든요. 무엇이 선인지 악인지 그 정도는 알아야 내가 인간 대우 받지, 이런 식을 살아간다 이 말이죠.

무엇이 선이고 무엇이 악인지 인간이 알면 안 돼요. 그런데 알게 나고부터는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느냐 하면 선악 가운데서 자꾸 선을 선택하고 악을 배제하는 뭔가 선택을 해요. 선택을 할 때는 결정을 해요. 마음의 결정을. 선택 결정할 때 그 전제가 되는 게 뭐냐? 자기 의지가 동해서 자기 의지가 발작을 일으켜서 선택을 하는데 선택할 때는 선을 선택하고 악을 버리는 식으로 배제하는 식으로 선택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이 똑똑하니까 제 말 들으면 뭔 뜻인지 아시겠지요. 어떤 말을 제가 하고 싶냐 하면 인간이 선택한 그 선은 내가 선악과 따먹었다는 것이 악하다는 것을 뺄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문장 어렵지요. 내가 선택하는 나는 선택하겠어, 악은 버리겠어, 라고 선을 선택하는 선택 안에 나는 하나님의 지시를 어기고 선악과 따먹은 이거는 악하다는 그 자체를 자기가 선택하겠어요, 선택하지 않겠어요? 선택하지 않습니다. 이왕 따먹고 이왕 아는 것 바르게 살면 되지, 이런 식이에요.

아무리 선택하고 아무리 결정해도 원래 하나님이 원했던 인간의 자리로 되돌아갈 수 없는 이런 서글픈 운명에 놓여있습니다, 인간은. 그리고 인간은 자기가 선과 악 중에서 악을 택하는 게 아니고 늘 선을 택하는 착한 것, 옳은 것만 택하는 이것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죽었다 깨나도 부정하지 못해요. 이게 비극이에요.

지금 사울 왕, 역대상 10장이 뭐냐 하면 다들 집에서 읽어봤지요. 역대상 10장의 이야기는 뭐냐? 사울의 죽음이에요. 하나님께선 사울의 죽음을 부각하고 있는데 사울이 왜 죽는가? 자기가 옳은 쪽을 옳다고 여기는 것을 선택해서 죽었어요. 특화된 죽음이죠. 항상 바른 선택, 항상 옳은 결정 그것이 자기를 점점 더 저주의 나락으로 저주받는 쪽으로 추락, 또 추락하게 만들었습니다. 나의 올바른 선택이. 바보등신처럼 살면 되는데 그게 안 돼요. 인간은 바보등신 같이 되질 않아요. 항상 유리한 쪽으로 나한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선택하게 돼 있어요. 내가 손해가 되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있다가도 없고 죽은 데서 살았구나, 그 이야기를 보고 하나님 저는 없는데 주께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저는 마땅히 죽어야 되는데 주께서 살려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과 일치되는 선택을 하려고 하는데 요한복음 12장 25절에 보면 주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게 그게 아니에요. 나는 없는 데서 만들어졌습니다, 그 고백을 요구하는 게 아니에요. 죽었지만 주의 영으로 삽니다, 그 고백을 주께서 요구하는 게 아닙니다.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 주께서 요구하는 건 단 하나에요. 너를 미워하라, 에요. 나는 없는 데서 만들어졌어. 부모가 날 낳았어. 그걸 고백하는 데 굳이 자길 미워할 필요 없지요. 나는 죽어야 돼. 하지만 주께서 날 살렸다, 이것 고백하는 게 굳이 나를 미워할 필욘 없겠지요. 그러나 요한복음 12장 25절에서 뭐냐? 누구든지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너희에게 생명이 없느니라. 자기를 미워하지 아니하면.

왜 하나님께서 이것, 이것 알아라. 저것, 저것 알아라. 성경 몇 독해라. 몇 명 전도하고 헌금은 얼마씩 해야 되고, 그런 걸 이야기하는 게 아니고 영생과 관련되어서 자기를 미워하라는 꼭 집어서 미워하라와 영생을 왜 결부시키느냐? 그 이유가 인간이 아무리 해도 해내지 못하는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인간은 맨날 자기 유리한 쪽으로 선택해서 결국 저주받아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인간의 진 모습, 진짜 자기 모습을 사울 왕이 아니면 누가 우리에게 제대로 알려줍니까?

사울 왕의 본문 이야기는 사울 왕에게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고 모든 인간들은 사울 왕처럼 사울 왕의 인생을 반복하는 인생이라는 그 이야기하려고 역대상 10장 사울 왕 이야기한 거예요. 모든 인간은 완전히 사울 왕 빼박이다. 뭐 교회에서 말썽부리다 졸지에 죽은 그런 사람들, 사울 왕이다, 하지 마세요. 모든 인간은 사울 왕입니다. 그리고 사울 왕은 항상 자기가 모독 받는 것을 용납하지 않아요. 왜 모욕 받고 모독 받는 걸 싫어하느냐? 나는 평소의 나를 미워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삼장법사 두 번째 제자 이름이 뭐지요? 돼지? 저팔계. 그 돼지 노래에 이런 게 있어요. 왜 나를 미워하나. 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나. 싫어하느냐고 반문하는 자체가 그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사울 왕이다. “왜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지요? 기분 나빠요.” 기분 나빠하는 네 모습 보고 내가 기분 나쁘다. 인간은 싫어함을 받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그게 우리들 인생입니다. 사울 왕 인생=우리들 인생. 간단하지요. 토정비결 같은 것 보지 마세요. 타로 점보지 마세요. 이미 결정 났어요. 사울 왕으로.

주님은 우리의 존재 자체를 싫어하는데 나 자신만 거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미움 놈 더 밉상 받게 돼 있어요. 하나님한테. 안 그래도 미운데 미운 받을 짓 사서 해. 세상 모두가 나를 미워해도 나는 내 자아는 나를 미워하지 않습니다. 전 이걸 장애자라 합니다. 여러분들 문제 있는 사람들, 장애자들 범주를 더 깊이 생각해보세요.

이 세상은 경제공동체에요. 경제공동체에서 모든 인간은 장애자입니다. 이미 사는 이유, 목표가 돈과 결부됐기 때문에 그 자체가 장애자에요. 의미도 없고 사는 이유도 없어요. 그냥 돈에 끌려갈 뿐입니다. 머리 좋고 능력 있어서 돈을 번다. 이게 능력 있고 기술 있고 머리 좋아서 돈을 번다. 그렇다면 머리 나쁘고 기술도 변변치 않고 성격도 안 좋은 사람이 돈을 못 번다. 둘 다 장애자에요. 경제공동체 자체가 인간을 이렇게 장애자로 만든 거예요.

팔다리 없고 귀머거리에 절뚝발이 그 사람들이 난 주님으로서 감사해요, 이러면 되는데 그 사람들이 뭘 요구하느냐 하면 왜 우리를 보호하지 않느냐, 이렇게 나오거든요. 우리를 보호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느 기준에서 그러느냐 하면 왜 멀쩡한 사람은 돈 버는데 우린 돈 못 벌어 가난하냐. 경제공동체 기준에 준해서 자기 자신을 다시 평가하는 것, 그 정신머리 자체가 장애자에요.

돈이 사람이 기준이 아니잖아요. 그런데 경제공동체에서는 돈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아니라고 하면 이 공동체에서 추방되어서 너는 정신적으로 문제 있다는 정신적 장애인으로 규정을 해버려요. 대세니까 돈 위주로 살아가는 게 이 세상의 대세입니다. 사람의 품위와 인격, 사람의 가치는 돈으로만 측량이 돼요. 저울에 인간 놓고 그쪽에 돈 놓아서 월급 얼마 받느냐로 그 사람의 가치가 결정된다니까.

여러분 우크라이나가 돈이 많습니까, 러시아가 돈이 많습니까? 러시아가 돈 많잖아요. 돈 많은 쪽이 돈 없는 쪽을 공격해서 전쟁을 일으키는 거예요. 국가 대 국가 전쟁만 그런 게 아닙니다. 커피점 내는 것, 할머니 슈퍼마켓 앞에 대형마트 들어서 보세요. 장사 문 닫아야 돼요. 같은 치킨 집해도 대기업 브랜드로 인테리어 멋있게 한 치킨 집이나 커피 전문집과 나이 칠십 넘어서 바리스타 자격증 따서 그 앞에 가게 내봐야 장사 될 리가 있습니까? 안 되지요.

그럼 사람들은 장애인이 아니라면 장사 안 되면 손해 보면 장사 안 하면 되지, 이러면 장애자 아니에요. 경제공동체의 공통 의식에 빠져나오면 괜찮은데 어느 인간치고 그 경제공동체에서 빠져나올 위인이 어디 있습니까? 없지요. 선과 악에서 선이라는 것은 돈으로 측량될 때 돈 많은 것이 선이고 돈 없는 가난한 것은 악이 되는 겁니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고 쉽게 생각해서 사람들이 하는 일은, 자기 좋게 하는 일을 해요. 이걸 진리라고 여기고 이걸 선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들 성경 안 보지요. 성경 봐도 무슨 말인지 모르지요. 이미 뉴스 굳어졌어요. 사람들이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 이게 진리라고 이미 본인이 확정 먹고 들어가니까 성경 들을 것 뭐가 있어요. 이게 선악체계인데요.

선악체계는 뭐냐 하면 따먹지 말라 하는 것은 비어있어야 돼요. 비어있을 자리에 시건방지게 지가 발을 들여놓은 거예요. 아담이 누구한테 사주 받고? 악마한테 사주 받고. 그래서 이미 악마한테 사주 받은 입장에서 나의 전쟁은 없습니다. 진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하는 전쟁은 내가 경제공동체에서 돈 많이 벌게 하고 몸 건강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로 하여금 악마와 우리 사이에 관계를 관여됨을 끊어버리는 전쟁, 끊어버리 게 해주시는 것 이게 바로 사랑이에요.

“네가 어지간히도 농락당했잖아. 너도 지겹지 않냐. 악마한테 그렇게 당해놓고. 그러니까 이제는 악마와 그만 사귀어라. 많이 사귀었잖아. 이제 악마와 관계 끊어라.” 악마는 인간에게 지식 줬고 지혜를 줬어요. 네가 알고 있는 정보량과 지혜와 지식을 총동원해서 너의 바른 선택이 너의 인생을 성공적인 인생이 되게 한다. 이게 바로 악마가 우리에게 계속해서 농락하면서 가르쳤던 교훈입니다.

거기에 비해서 생명책에 주님은, “내가 너한테 인생이란 걸 선물해줄게. 네가 하지도 않았는데 홀로 내가 다 한 것을 너한테 배급해줄게. 그걸로 살아.” 그 배급한 것이 뭐냐 하면 오늘 본문 10장 4절에 그 중에 하나가 할례에요.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언약을 우리한테 집어넣어주죠. 마치 죽어가는 사람 링거 맞게 하는 것처럼. “자 누우세요. 팔 걷고 두 시간 동안 빼면 안 됩니다.” 간호사가 이야기할 때 거기서 누우면 영양제 쑥쑥 들어오잖아요.

그러면 되는데 우리가 영양제 주사를 내 품에다 품고 이렇게 오지랖 떨면 안 된다 말이죠. 영양제 주사는 선물이기 때문에 내가 손대면 안 돼요. 영양제 주사에 주스 넣고 물 넣고 이러면 안 돼요. 일반 환자들이 영양제 주사에 어떤 게 들어가는지 알 수 있습니까? 함량이 어떻고 공장에서 만들어야지 우리가 거기서 물 좀 더 넣고 우리가 바리스타도 아니고 커피 타듯이 이러면 안 돼요.

무엇이 섞였든지 우린 모르지만 사울도 몰랐어요. 이스라엘도 몰라요. 무엇이 섞였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간에 영양제 주사 링거 안에 들어있는 것이 우릴 살린다, 이게 바로 이스라엘이 표출해야 될 하나님의 증거입니다. 구약에서는 그 링거 액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 몰라요. 그러나 신약에 오면 그게 드러나요.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에게 영생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자기희생이었습니다.

사울 왕의 잘못은 백성들의 더러운 것을 자기가 그걸 닮지 않았다는 거예요. 자기가 희생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은 더러운 것을 자기가 스스로 담았어요. 그게 뭐냐 하면 율법을 요구해놓고 율법을 넘어섰습니다. 왜냐? 율법에 보면 더러운 것을 만지지 말라. 뭔 뜻이냐 하면 율법을 네가 손대면 더러워지고 율법을 제공하신 율법 만드신 제정하신 하나님이 율법을 건드리면 그 율법이 정답이 돼요.

그러니까 율법은 우리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손대지 말라고 준 거예요. 모든 법은. 그러면 윤리도덕은 뭡니까? 이거는 마귀가 준 거죠. 선악체제에 의해서. 착하게 살면 네가 복을 받고, 이게 뭐냐? 윤리도덕이거든요. 착하게 살면 복을 받고. 자, 복에 어떤 게 들어가겠어요? 복 안에 가난이 들어가겠습니까, 들어가지 않겠습니까? 안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이게 사기인 거예요. 복 안에 내 몸 아픈 게 들어가겠습니까? 안 들어가지요. 그러니까 이게 사기인 거예요. 이게 잘못인 거예요. 윤리도덕 배후에 악마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악마가 준 양심이란 것 가지고 마치 신자도 아닌데 제대로 된 훌륭하고 착한 신자처럼 행세했습니다. 그래놓고 기도를 하던 헌금을 하던 이건 누구의 전쟁이겠습니까? 만약에 김 씨라면 누구의 전쟁이겠어요? 김의 전쟁이에요. 옛날 재일교포가 싸웠던 영화에 <김의 전쟁>이라고 있었어요. 아베에 총 쏜 사람이 김 씨 아닌지 몰라.

인간은 나의 전쟁이에요. 세상이 욕하고 하나님이 나를 욕한다 할지라도 나는 절대로 나를 욕하지 않으리라. 그 일념으로 평생토록 모든 것을 선택하고 결단 내렸고 결정하고 그런 식으로 자기의 행동에 나선 거예요. 배운 가락이 그것밖에 없잖아요. 아는 게 이것밖에 없고 할 줄 아는 게 나 지키는 것밖에 없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그러니까 대리전쟁을 하라 이 말입니다. 너의 전쟁 하지 말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자질과 능력을 믿어서 준 게 아니고 얼마나 무능하다는 것을 너무나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동행하신 거예요. 오늘날 주님이 우리와 동행하시는 것은 우리가 인간 같지도 않기 때문에 동행하시는 겁니다. 제대로 해내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래서 하나님은 세리와 창기와 강도와 못난 자들의 주님이 되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주님이 되는 겁니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의 공통점은 그들 곁에 뭐가 있느냐? 빈자리가 있다는 거예요. 여러분의 빈자리 뭡니까? 또 그 빈자리에 강아지로 채우는 것 아닌지 모르겠어. 강아지로 고양이로 채우지 마시고요 여러분의 빈자리는 비워두세요. 어떤 아주머니는, “나의 빈자리는 사랑하는 남편이 있어요.” 남편은 빈자리 값을 못해요. 남편은 지 생각하기 바빠서. 아내 이용하기 바쁘지 뭐가 빈자리 값을 합니까.

우리 곁에 주님이 계셔서 철딱서니 없는 우리가 한평생 살면서 우리는 늘 죄만 짓거든요. 죄 지은 그 더러운 죄를 주께서 빈자리를 마련해놔야 그 죄가 빈자리에 계속 이게 넘어와요. 이렇게 보면 돼요. 사울이 죽은 것은 사울의 그릇이 죄가 흘러넘쳤기 때문에 죽은 거예요. 특수한 죽음입니다. 일반인이 죽는 보편적 죽음이 아니에요, 지금.

사울 왕은 왕의 자리에요. 왕의 자리는 하나님의 빈자리를 확실하게 드러내는 자리에요. 사무엘상 11장을 제가 요약해보겠습니다. 사울이 왕 되기 전이었습니다. 왕 후보감인데 단독 후보지요.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인정하지만 백성들은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던 그때 그 시절 여기서 길르앗 야베스라는 동네가 있어요. 이게 요단강 동쪽 지역입니다. 지금은 요르단 쪽이지요. 요단강 서쪽은 지중해 쪽이고요. 지금의 이스라엘이고요. 요단강 동쪽에 있는 길르앗 야베스에요.

그 사람들이 있는데 그 밑에 있는 암몬 사람들이 침범을 했어요. 침범하니까 야베스 대표자가 나서서 아부를 했지요. 좋게, 좋게 갑시다. 우리 힘없는 것 아시지 않습니까. 우리가 원하는 것 해드릴게요. 이렇게 하니까 암몬 사람들이 시건방져서 내가 너희의 오른 눈을 다 빼야 너희와 언약하리라,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한 겁니다. 그러니까 야베스 장로들이 우리 이스라엘을 구원할 자가 없느냐, 하고 사울을 찾아왔어요.

사울을 찾아오니까 그 소리를 듣고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힘이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아서 시시하고 어쭙잖고 제대로 하는 것도 없고 그런데 암몬 저쪽은 큰소리치고 잘나고 무력이 세니까 그들은 절망에 빠져서 울고 있을 때에 사울이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이게 중요해요. 요새 같으면 성령이 임한 거죠. 하나님의 신이 임해서 소 두 마리를 들고 와서 확 찢으면서 내가 앞장설 테니까 만약에 내가 앞장서지 않으면 소를 찢어버리듯이 내가 찢어버리겠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한 지파마다 삼만 명씩 군대 내서 총 유다 지파는 삼 명, 다른 지파 합쳐서 삼십삼만 명이 군대를 조직해서 사울 왕을 따르니까 그제야 암몬 사람들이 혼 줄이 나서 11절에 보면, “암몬 사람을 치매 남은 자가 다 흩어져서 둘도 함께한 자가 없었더라” 그리고 난 뒤에 백성들이 사무엘에게 사울이 왕 값을 못한다는 게 누구야? 우리가 알아서 죽이겠습니다. 이렇게 대단한 영웅을 누가 함부로 폄하하고 무시했습니까? 이렇게 분위기가 역전된 거예요.

그래서 15절에, “모든 백성이 (언약궤가 있는) 길갈로 가서 거기서 여호와 앞에 사울로 왕을 삼고 거기서 여호와 앞에 화목제를 드리고 사울과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거기서 크게 기뻐하니라” 여기서 하나님의 신이 임했어요. 그러니까 사울 옆에 빈자리가 있었던 거예요.

선악체계는 내가 아는 걸 총동원해서 내가 익혀 공부한 것, 경험한 것, 체험한 것, 내가 알고 있는 기억 속에 있는 걸 다 모아서 힘으로 나를 지키는 무기로 만들기 위해서 힘을 응축해서 그것으로 자기에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것이 선악체계라면 배후에 악마가 그렇게 조종했다면 생명체계는 승리가 불가능하다고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이 할 수 있는 일이고 하나님의 신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이에요.

여러분들이 성도라면, 실례되는 말인데 불쑥 튀어나왔어요. 여러분이 성도인 줄 알지만 성도라면 매일을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하나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게 아니고 이게 나와야 합니다. 더 쉽게 이야기해서 자기가 희생했다는데 나만 모르고 희생했다는 남들의 평가가 있는 그런 상황, 나는 희생한다고 생각 안 하는데 남들이 희생했다고 여겨주는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네가 하는 일은 사람으로 할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사람으로 그 일을 할 수 있지? 너 지금 하나님과 함께 계시지, 그렇게 노골적으로 이야기할 사람 없지만 인간이 할 수 없는 일이 나와야 돼요.

그게 아까 뭐라고, 그걸 뭐냐? 실컷 살면서 주부로서 또는 가장으로서 또는 직장에서 하면서 항상 저녁 늦게 노을이 질 때 오면서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오늘 하루 종일 일했던 나를 미워하는 고백, 이것 성령 없는 사람은 이게 안 됩니다. 나를 미워하는 이런 일, 있을 수 없어요. 성령 없는 사람은. 추석이나 명절 때 일가친척 모였을 때 평소 나한테 감정이 안 좋던 아랫동서가 형님은 어머님 그렇게 모십니까, 이렇게 되바라지게 나이 어린 동서가 그렇게 할 때 여러분들의 큰 며느리로서 어떻게 답변하면 됩니까?

“그래 내가 미워.” 너는 뭐 해줬노. 이게 한두 번 와서 봉투에 십 만원 넣고 끝내놓고. 난 옆에서 병원 다 돌봤다, 이렇게 하지 말고, “내가 하는 일이 다 미워. 한 달에 용돈 백만 원밖에 못 주는 것도 밉고, 요양병원 가면서 업어서 가는 것도 밉고, 요양병원에서 전화 왔다 하면 새벽 두 시에도 달려가는 내가 미워. 어머니 아프다고 옆에서 비싼 전복죽 끓이면서 내가 어머니를 얼마나 원망했다고. 그래 동서 잘 지적했어. 나는 미운 형님이야.” 이러면 동서가 뭐라고 하겠어요? 나는 어머니 한다고 했는데 백만 원이 돈이 가, 이러면서. “세상에 형님은 인간도 아닙니다.” 그렇지 인간도 아니지. 사람으로선 그럴 수 없지요.

이게 인간으로선 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처럼 죽으세요. 저주받고. 딱이에요. 딱 우리 인생이 사울 왕 인생이에요. 자기의 명예와 자기 체면을 위해서 계속해서 거기에 합당한 선택만 골라서 하는 존재, 사울입니다. 내 자리는 나로 채워졌어. 나의 잘남으로 채워지고 나의 의로움으로 채워지고 나의 훌륭함으로 내 자리를 응축해서 함축해서 꽉꽉 채워놓은 이 사울 왕, 이게 바로 오늘날 우리 모습 아니고 누굴 말합니까? 이게 남의 이야기에요? 우리 이야기지요.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은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한다고요. 내가 싫어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에요. 내가 좋아하는 일만 해요. 그래서 누군가 나에게 다가오면 마음속으로 한 판 붙을까? 이게 나의 전쟁이에요. 한 판 붙을까? 아니고 우리 아들이 이번에 승진해서 뭐 어떻고. 무심코 니 아들은 뭐하노, 이것과 똑같은 거거든요. 우리 아들은 이번에 손자 봤다. 너 손자 없잖아. 이것 하나 있어. 끄집어내서 계발해서 너는 손자 없지. 돈은 없어도 손자는 있잖아. 이렇게 이게 평소에 우리는 본능적이에요. 윤종신의 <본능적으로>라는 노래.

본능적으로 툭 튀어나는 게 뭐냐? 안 지려는 거예요. 나의 전쟁이에요. 그러나 그 결과는 결국 죽음이에요. 그것도 결국은 자기의 명예를 못 찾고 찾아 먹지도 못하고 죽어버리는 거예요. 이걸 뭐냐? 동영상을 앞으로 빨리 돌려보세요. …했습니다, …했습니다, …했습니다, 하지만 빨리 돌려보면 마지막에 뭡니까? 죽었다. 아이고, 아이고. 나는 죽어 있는데 우리 아들들은 부좃돈 받고. 외삼촌 와서 술 먹고 나자빠지고.

내 죽은 줄 알았지. 눈 뜨고 다 볼 거야. 보게 되면 나만 죽었지 남들은 전부 다 자기 좋은 일, 편한 일만 하고 있어. 그러니까 죽기 전에 인간 대 인간으로 반갑다 친구야, 백날 만나봤자 각자 자기 좋은 일만 챙기면서 그렇고 그런 관계에요. 가족도 마찬가지고요 부부도 마찬가지고요 다들 마찬가지에요. 그러니까 우리는 예수님의 일대기만 알지 말고 사울 왕의 일대기를 충분히 조사해봐야 됩니다.

그러면 왜 이 사울 왕의 죽음이 특수하게 하나에 예시된 어떤 조교처럼 시범조로 죽음을 언급해야 되는가? 이것 때문에 그렇습니다. 법의 존재는 위반해봐야 안다. 위반할 때 드러난다. 법이란 게 거미줄 같은 거예요. 비 오고 난 뒤에 운동할 때 앞에 뭐가 있지요. 돌아보면 거미줄이 비가 오면 초롱초롱 물방울 맺히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나이 들어 노안 오면 그냥 거미줄이란 거미줄은 다 헤치고 갑니다. 거미줄 잘 안 보입니다.

이 세상은 경제공동체기 때문에 앞에 누가 오든 내 뒤로 누가 가든 어떤 일을 하던 악수를 하던 그 사람 재산은 얼마나 수입은 얼마나 될까, 신수가 훤하네. 차에 보니까 뒤에 골프채 있네. 좀 사는 모양이다, 이런 것, 사업하는 사람들의 돈 얼마 벌지도 않으면서 아우디를 타요, 아우디. 동그라미 네 개 있는 아우디 타고 완도 가서 죽잖아요. 일가족이. 왜 이런 짓합니까? 허세와 허풍이잖아요. 왜 합니까? 경제공동체기 때문에. 남한테 보일 때 좀 신용도가 높아 보여야 단골이 될 수 있다는 그런 경제적 이득 전략 때문에 이런 짓하거든요.

경제선만 보이지 법은, 하나님의 법이란 것은 하늘에서 온 거예요. 모세가 하늘에서 받은 거예요. 하늘의 그물망, 오늘 제목으로 적절한 것 같은데. 하나님이 이 땅에 걸쳐놓은 그물망은 눈에 안 보입니다. 안 보이는데 언제 보이느냐? 위반할 때 이게 드러나요. 개인은 자기 일을 해요. 자기 일을 하기 때문에 법은 뭐냐? 이건 주님의 일이거든요. 주님의 일을 우리가 언제 느끼느냐? 내가 나의 일만 정신 팔렸다가 그것이 감전되듯이 주의 일과 충돌을 일으킬 때 아아 이 세상은 주의 일이 촘촘하게 완전히 깔려있구나. 깔려있는 거예요.

영화 <미션 임파서블 1> 보면 주인공 톰 크루즈가 비밀 반도체 같은 중요한 인류를 멸망시킬 수 있는 그것이 악한에게 넘어갔을 때에 어떻게 들어갑니까? 자외선이 깔려있는 그 공간에 벌건 줄이 깔려있을 때는 그 틈사이로 빠져나간다 이 말이죠. 이거는 경제공동체에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저 사람은 부도 맞을 것 같아, 저 사람은 믿지 못해, 저 사람은 믿을 만 해.”

막 쇼를 부르듯이 하지만 이 하나님의 법은 그냥 은혜로 주시는 햇빛, 은혜로 주시는 공기, 그리고 밤에도 뛰고 있는 우리의 심장 주신 하나님의 은혜, 호흡(우리의 생명은 호흡에 있다 했어요) 이런 것은 진짜 숨이 막히고 병원에 입원해봐야 이 두 다리 관절이 내 다리 아니구나, 걷지도 못하고 부목 집어봐야 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구나. 위반해봐야 그 동안 하나님 주신 은혜를 얼마나 개 무시했는지를 병원에 입원해봐서 아는 거예요.

제발 퇴원만 하게 하신다면 빨리 속병 낫고 관절 나으면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주의 영광을 위해 하겠습니다. 병원 7층 병상 704호실에선 잘 이야기하지 밑에 내려다보면서 저 인간은 나보다 못한 인간인데, 하고 멀쩡한 것에 대해서 분노 느끼지요. 막상 퇴원해서 병원 문 나서서 아스팔트 걸어보세요. 다 잊어버립니다. “병원비 너무 나온 것 아닌가. 의료보험과에 전화해봐라. 보험금 맞아? 보험회사 전화하고. 남는 게 없네.” 경제공동체로 다시 돌아선다니까요.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 왕을 보내서 왜 사울 왕을 보내느냐? 사울은 왕이거든요. 그 점을 설명해볼게요. 자, 사울 왕이 특수한 죽음이 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셔서 왕이 된 겁니다. 자 여기서 어려운 것은 두 가지입니다. 사울 왕이, ①왕입니까? ②사울 왕은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까? 어느 게 맞습니까? 왕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거예요. 사울 왕은 왕의 자리를 차지하면 안 돼요.

죄인은 성도의 자리를 본인 소유화시키면 안 돼요. 성도의 자리, 성도 되게 하는 성령이 임한 자리는 바로 자리 곁에 빈자리로 주의 성령이니까 주님의 자리로 따로 빈자리로 남겨져야 돼요. 사울이 암몬을 이길 때는 무엇으로 이겼다 했어요? 칼로 이겼어요, 뭐로 이겼어요? 하나님의 무엇이 임해서 삼십만 대군을 끌어 모았습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했지요.

오늘날 성령이 우리로 하여금 계속 성도 되게 신자 되게 하는 힘이 그 성령에서부터 계속해서 주입돼야 됩니다. 어떻게 주입되고 어떤 원칙을 갖고 있는가, 그건 10분 쉬고 합시다.


20220708b 울산강의-역대기상(12강) 10장 13절 : 빈자리
(강의:이근호 목사)


하나님께서 사울 왕을 죽임으로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게 아니고, 사울 왕을 죽임으로서 원래 이스라엘로 되돌렸습니다. 왕이 없어졌으니까 왕 자리를 비어있게 되죠. 그렇게 해서 사람들은 사울 왕이 왜 죽었느냐에 대해서 백성들은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어요. 이것이 장차올 예수님의 모습과 똑같은데요.

세상이 이렇다면 예수님이 오셔서 가셨잖아요. 자, 소위 신학이라는 게 뭐냐 하면 성경으로 인간의 이성으로 논리를 짜깁기 한 게 신학이에요. 신학적으로 보게 되면 이렇게 돼요. 순서가 천지를 창조하셨다. 원주 특강할 때 이 그림을 그렸는데, 천지를 창조했다. 그런데 인간이 범죄 하고 난 뒤에 타락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성령 안에서 예수 안에 있는 성도라 했다. 그리고 그다음에 이 성도가 나중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영광스럽게 된다.

이게 성경을 볼 사람들, 또 성경을 연구하는 신학자들, 교수들, 목사들 전부 다 성경에서 이걸 끄집어내서 이것을 여러분들이 이해하시고 공부하시면 구원 받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창조, 타락, 예수님 안 성경 그대로입니다, 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건 지식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이거는 자기를 미워하거나 자기를 부인하는 게 아닙니다.

성경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예수님 오셨다가 가셨다는 거예요. 예수님 오셨다가 사라졌어요.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얼추 살만한 세계라고 생각했는데 예수님이 왔다가 감으로서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예수님이 없는 세계가 돼요. 이걸 강남강의에서 제가 했는데 예수님이 없는 세계를 지옥이라 합니다. 아무리 잘 먹고 잘 살고 편안하고 뜨거운 물 나오고 에어컨 잘 켜도 예수님 없는 세계가 지옥이고, 천국은 살기 좋은 나라가 아니고요 예수님 계신 곳이 바로 천국이에요.

제가 이야기하는 창조, 타락, 예수님, 영광은 이걸 누가 쳐다보고 있느냐 하면 내가 쳐다보고 있다고요. 자기 부인이 안 되고 내가 쳐다보고 있다고요. 하나라도 더 알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소실되지 않고. 이건 뭡니까? 본인들이 여기 있으면 주님이 떠남으로써 자동적으로 우리는 어디 속합니까? 지옥에 속하고 지옥에 속한 자들이 창조, 타락, 예수, 영광 이것 아는 종교놀이, 교회친목 백날 해도 주님 안 계신데 지옥이지 뭐.

그래서 주님 가시고 난 뒤에 여기 종교에서 교회에서 뭘 만드느냐 하면 구원 되지도 못할 예수를 만들어요. 어떤 예수? 이런 것 배우시면 구원 받는다고 가르치는 예수를 가짜 예수, 있지도 않은 예수를 여기다 가득 채웠단 말이죠. 있지도 않은 하나님을. 예수님 왔다 갔는데요.

사울 왕이 왕으로서 백성들의 복종을 강요했어요. 그래서 백성들은 뭐라고 생각했느냐 하면 저 사울 왕이 하는 일이 이게 다 우리 이스라엘을 위해서 사울 왕이 희생적이고 헌신적으로 왕 노릇한다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울 왕이 그 나라에 하나님의 법을 실시한다고 율법에 보니까 이스라엘은 박수무당, 신접한 여인, 점치는 것, 혼을 불러내는 초혼자 이런 자들을 모조리 다 멸절시켜버렸어요. 왜? 하나님이 그러라고 하니까 멸절시켰다고요.

사람들은 그것을 사울 왕이 하나님의 법대로 준행하는 이스라엘 왕이 왕답게 제대로 지금 하나님의 신앙적으로 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기 사무엘상 28장에 보니까 거기에 사울 왕이 자기가 명령해서 내쫓으라고 했던 신접한 여인을 사울 왕이 본인이 찾고 있습니다. 어디 갔노, 이 신접한 여인? 엔돌이란 지역에 신접한 여인이 있는데 사울 왕이 찾아가요.

사울 왕이 자기가 한 일이 있었거든요. 무당들은 죽여 버려요. 자기가 명령했기 때문에 지도 미안했는지 변장을 해서 사울 왕 아닌 척하면서 갔습니다. 신접한 여인이 그야말로 신접한 여인이라서 모를 리가 있습니까. 당신은 지금 나를 속이고 있습니다. 딱 보면 다 아는 거예요. 신접한 여인이 요구하는 건 그겁니다. 임금님, 제가 하나님의 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이라는 그쪽 조직에서 내가 빠져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무너진 거죠. 아까 누가 이야기했지요. 하늘에 빵꾸난 것처럼 비가 왔다고. 그게 오늘 핵심입니다. 하늘에 빵꾸가 난 거예요.

하나님의 율법대로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신접한 여인을 용납하면 안 되잖아요. 빼야 되는 거예요. 빠져야 되는 거예요. 그걸 누가 명령했는가? 왕의 자리에 있는 사울 왕이 그걸 명령했잖아요. 그런데 사울 왕이 지금 누굴 따라가고 있습니까? 자기가 처분한 신접한 여인이 너무나 아쉬워서 나 그쪽 동네에서 놀래. 그쪽 동네가 내 구미에 맞아. 찾아오는 거예요.

어떤 교회에 복음대로 말씀대로 목사가 주님을 증거한다, 복음을 증거한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실상 목사가 진짜 떠나간 주님이 그리우면 본인도 그 길 따라 가야지요. 주여 빨리 저를 주의 증인으로 죽게 하옵소서, 그렇게 나가야 되는데 그런 식으로 설교해야 될 텐데 빠져나간 예수님은 난 모르겠고 지금 사람들이 예수를 원하고 있으니까 그들이 원하는 예수를 전하기 위해서는 내가 예배당을 만들어서 거기서 교주 노릇해야 되겠고 목사 노릇해야 되겠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주님이 빠져나간 나머지 사람들이 생각하는 메시아, 신은 악마가 이야기한 메시아고 신이거든요. 그런데 백성들은 여기에 호응하고 있는 거예요. 그 호응을 해줘야 그들이 나를 목사로 인정해주고 거기서 생활비가 따박따박 나올 수 있단 말이죠.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이게 어려운 이야기인데.

신접한 여인, 무당이죠. 점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이스라엘에 억지로 들어온 겁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자생적이에요? 어떻습니까? 점치고 궁합보고 관상보고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나 그런 사람 있으면 골치 아파. 그런 사람 있으면 누가 쫓아냈으면 좋겠다, 이런 마음입니까? 가만히, 가만히 우리끼리 교회는 교회고 딸 시집보내는데 궁합은 봐야지. 가만히, 가만히 저희들끼리 음성적으로 노골적으로 그것을 좋아하고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그러나 실생활에서 앞일을 모르니까 불안하고 두려운데 뭔가 도사가 있어서 우리의 앞길을 알아서 미리 액운을 제거하면 좋겠다. 그거는 인간의 마음속에 누구든지 담겨있는 마음이에요. 인간에게는 왜 이런 행운을 찾고 점치는 것을 원하고 있고 궁합보고 장래 사주팔자를 보고 싶어 하느냐? 그거는 그거에요. 두 번 다시 내 인생 실수하지 않기 위해서.

사람은 매일 지난번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모든 정력을 매일매일 다 쏟아 붓습니다. 그럼 실수를 줄이면 뭐가 남는가? 나의 가능성, 내가 어느 정도로 대단한 존재인가를 매일같이 확인하는 데서 자기의 삶의 기쁨을 얻고자 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것 아니면 우리가 왜 사는 데요? 이것을 이렇게 줄일 수 있습니다.

나의 인생이 모독 받지 않는 차원을 찾아다닌다. 내 인생이 누구로부터도 모독 받지 않도록 환경, 차원, 그런 영역, 세계 그걸 찾아다니는 거예요. 그래서 블레셋이 쳐들어왔을 때 이스라엘 왕으로서 사울은 대항할 자신이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왕 하는 일이 뭡니까? 백성들의 재산과 목숨을 보호하는 게 자기 책무잖아요. 그걸 해낼 자신이 없는 거예요. 왜? 블레셋이 너무 막강한 군대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그래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체면과 왕으로서 소유된 자기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딜 찾아갑니까? 전에 율법에 의해서 지가 왕이라는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제거했던 신접한 여인의 삶의 차원, 환경에 자진해서 찾아가는 거예요. 이거는 바로 신접한 여인을 저주해서 빼버린 그 저주의 자리를 이스라엘 왕이 자진해서 그걸 원해서 자발적으로 그걸 찾아가고 있어요. 그 저주의 세계를.

그래서 역대상 10장 13절 보겠습니다. 누가 읽어보세요. “사울의 죽은 것은 여호와께 범죄 하였음이라 저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키지 아니하고 또 신접한 자에게 가르치기를 청하고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저를 죽이시고 그 나라를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돌리셨더라” 아멘.

그릇이 있는데 죄가 모아지는 그릇인데 그릇이 한도가 차버렸어요. 한도가 차니까 그게 독특한 특수한 죽음으로 사울이 왕이 해야 될 기능을 다 보여준 겁니다. 처음에 죄가 다 차지 않을 때는 안 죽였어요. 창세기 14장에 보면 애굽에 있던 히브리인들이 고생을 해도 이게 대기상태에 있어요. 왜 대기상태냐? 약속의 땅에 있는 열 족속이 죄가 다 그릇에 차질 않았어요. 죄가 더 부풀어 올라야 돼요. 그때까지 기간이 사백삼십 년, 또는 사백 년 대기하고 있다고 저쪽에서 죄가 드디어 거품내면서 부글부글 거릴 때 애굽에서, 고! 하나님께서 모세 불러내서 내 백성으로 가서 저 약속의 땅을 차지하라고 타이밍이 그렇게 맞춰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냐? 처음에 이야기한 대리전쟁이에요. 나의 전쟁 아닙니다. 내가 힘들다고 복 주는 게 아니에요. 우리가 몸 아프다고 건강해주는 게 아닙니다. 그게 때가 있어야 돼요. 나는 건강하고 싶고, 나는 부자 되고 싶어요. 하지만 “Calm down, Calm down. 가만있어, 가만있어. 아직 때가 안 됐어. 기다려, 기다려.” 강아지한테 쉿, 하는 것처럼. “가만있어. 지금 때가 아니야.”

개인적으로는 열심히 기도해서 뭔가 빨리 가정이 화목하고 돈도 많이 벌어서 예수 믿고 잘 됐다는 소릴 듣고 싶은데 이건 내 스케줄이고, 주님 스케줄은 그게 아니에요. 주님 스케줄은 우리가 몰라요. 알면 우리가 거기에 자꾸 내 가능성을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끄집어내서 이게 탈인 거예요.

사울의 죄가 뭐냐 하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이게 바로 죄가 되는 겁니다.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해야 되는데 할 수 있는 일을 했어요. 블레셋이 막강한 군대를 끌고 이스라엘을 쳐들어왔을 때 사울이 자기가 할 수 있는 걸로 대처하려고 나선 것, 이게 잘못이라고. 이스라엘이 자기 나라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지요.

우리가 확보한 성도란 자리, 주의 백성 자리, 이거는 내 게 아니에요. 주님의 소유입니다. 그럼 우리가 성도가 아니라면 뭐냐?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거든요. 우리는 이 땅에 죄인이고 성도의 자리는 따로 있고 성도의 자리는 누구 것이냐 하면 예수님의 것이에요. 생각해보세요. 이 땅이 있는데 예수님이 왔다가 가졌잖아요. 예수님 있는 곳이 뭡니까? 천국이죠. 내가 있으면 내가 혼자 있으면 천국 아니에요. 아무리 잘 먹고 잘 살아도 천국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 돼요.

그런데 함께 있는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세상을 떠나버린 분이거든요. 세상에 누가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살고 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은 뭐냐? 나를 떠난 분이에요. 나를 떠난 분이 뭘 만들었느냐 하면 성도라는 자리를 만들어요. 거룩한 백성이란 자릴 만들어놨어요. 나를 떠난 분이. 이 성도 자리가 다가옴으로서 주님은 나를 떠날 수밖에 없다는 죄인의 모습으로 드러나게 하시는 겁니다.

베드로가 고기 잡고 있을 때 예수님이 다가오셨잖아요. 베드로가 밤새 고기를 못 잡다가 예수님이 오른편에 그물 던지라 하니까 배가 침몰할 정도로 그득하게 잡았습니다. 그때 베드로가 한 말이 뭡니까? 주님 동업합시다, 이렇게 나온 거예요? 역시 우리 주님, 우리 교회에 오세요. 우리와 함께 신앙생활, 이랬습니까?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 주께서 하신 말이, “네가 이제부터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왜? 사명이 사명답게 고스란히 유지되려면 그 사명은 주님한테 매여 있어야 돼요. 사명의 끝자락이 손잡이가 주님한테 있어야지 사명의 끝자리를 내가 쥐고 있으면 안 돼요. 이거는 신앙인이 아니고 종교인입니다. 흔히 말하는 교인이에요. 교인은 주의 능력을 자기의 꿈과 포부, 세상적인 탐욕을 위해서 예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에요.

뭐 희망을 갖자, 뭐 어떻다, 하면 됩니다, 못할 것이 없느니라, 할 수 있거든 무슨 말이냐 능치 못할 게 없다. 능치 못할 게 없다는 게 뭐냐? 아까 자기를 미워하는 것, 우린 못했는데 성령 임하니까 하잖아요. “형님, 정말 그러기 있어요?” "그래 내가 밉니다. 내가 못난 며느리야." 이게 어떻게 가능해요. 능치 못한 능력 아닙니까. 인간이 하지 못하는 것.

성도가 이스라엘이란 죄인에게 오게 되면 여기에 성도의 자리가 뭐로 만들어지느냐 하면 예수님 자기 피로 만들어집니다. 예수님의 흘린 피로 만들어지기 때문에 죄인이 죄인으로서 들어와야 비로소 뭐가 보이느냐 하면 예수님이 보이는 게 아니고 예수님이 흘린 피가 보여요. 예수님이 보이면 이건 신비주의고 미친 사람이죠. 피가 보여야 된다고요. 예수님 보기를 원합니다. 그건 기도원에 가서 찾고요.

예수님 봐서 뭐하는 데요? 보니까 키가 1미터 78쯤 되고 인물도 훤하고. 그거는 이정재지, 이정재. 참 그건 이정재라니까. 상 받은 <신세계> 주인공. 예수님은 마리아 닮았어요. 보통 인간과 똑같이 닮았다니까요. 예수님의 피입니다. 예수님 동영상 남아있는데 보자. 고고학자고 동영상 남아있어도 그것 소용없어요. 예수님의 피에요.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게 아니고 예수님의 피가 우리로 하여금,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죄인임을 추동, 자극을 시키는 겁니다. 사울 왕이나 너나 똑같다. 실제로 똑같고요. 맨날 자기한테 유리한 쪽으로 선택하는 것, 사울 왕이나 우리나 똑같지 않습니까. 죄인 되게 하셔서 피와 결합하게 되면 피가 계속 피 되기 위해서 뭐가 필요하냐 하면 자원이 필요해요. 소재가 필요하다고요.

원자력발전소의 소재가 뭡니까? 우라늄235, 플루토늄이 원자력발전소의 소재가 되는 겁니다. 그게 재료가 되듯이 주님은 죄인이 필요한 거예요. 의인 필요 없고 죄인을 부르러 온 거예요. 그런데 인간은 만만치 않거든요. 지 잘난 맛에 살기 때문에 안 돼요. 그래서 율법을 줘서 위반시키는 겁니다. 십계명 줘서 어느 계명 하나 지킨 계명 없게 만들어요. 주님한테 다 계획이 있습니다. 얼마나 치밀하시고 완벽하신지.

제가 언제 그런 설교했습니다만 인간이 잘 돼서 안 망한 인간이 없다고. 사람들이 잘 되게 되면 인간은 필히 망하게 돼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힘들어서 뭘 해도 자기가 고생하고 희생해서 하나님께 복을 받았다 할지라도 그게 그다음 날 명예가 돼요. 내가 고생한 덕분에 하나님이 이렇게 사랑해줬다. 그게 자기가 죄인 됨에서 벗어나서 명예로운 인간 돼버립니다. 성공한 인생이 돼버려요.

그러면 이거는 뭐냐? 그런 인간은 누굴 찾는가? 사울이 찾는 신접한 여인이 주장하는 그러한 신, 신접한 여인을 찾는 백성들이 찾는 메시아, 예수, 하나님, 삼위일체 그런 것과 새로운 차원을 마련해요. 저주받은 차원이지요.

사무엘상 28장을 보겠습니다. 이걸 봐야 오늘 역대상 10장에 나오는 여호와께 범죄라는 게 뭐냐, 그것을 알 수 있습니다. 28장 보시면서 대략적으로 우선 전체적인 그림을 그리겠습니다. 하나님 주신 율법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주셨어요. 시내 산이 있다면 구름이 있고,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만났을 때 처음에는 율법을 모세로 네가 본 대로 들은 대로 전하라, 돌 판 들고 나가라, 보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뭐냐? 모세와 하나님이 계약해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함께 내려오는 식으로 이스라엘을 이끌게 돼 있어요.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율법을 못 지켰다, 언약이 깨졌다는 것이 확인됐기 때문에. 그때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고 결국은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했어요.

그 이름이 있는 곳에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잘 안 보이니까 밤에는 불기둥. 이 구름기둥, 불기둥 자리가 어떤 자리냐 하면 성막이 있는데 25미터, 50미터 이 성막에 지성소 있는데 이 자리가 접점 지점이에요. 하나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여기서 피어올라요. 그래서 이 주변에 장막, 텐트를 칩니다. 이건 회막이고, 텐트를 쳐서, 어떤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총 250만 된다고 하는데 그건 몰라요. 하여튼 남성만 육십 만인가 그렇지요. 애 많이 낳았으니까 250만 되지 않겠는가 하는데.

이 접점 지점에서 이게 주도적이에요.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야 가자, 이렇게 하는 게 아니고 구름기둥이 움직여요. 움직이면 가야 돼요. 그다음에 밤중에도 새벽 2시 46분에도 불기둥이 움직이면 자다가도 5분대기조 비상 걸려서 텐트 걷어서 따라가야 되는 겁니다. 주의 이름에 종속되지요. 종속되면서 주의 이름에서 펼쳐진 망, 이게 율법의 그물망이 쫙 펼쳐집니다.

이 율법의 특징은 처음에 준 율법으로 끝이 나지 않아요. 무슨 일거리 있고 사건 생기면 추가적인 율법이 계속 추가가 돼버려요. 그러니까 처음에 열 문제 나와서 열 문제 다 맞췄다, 그것 안 됩니다. 맞추면 스무 문제 나와요. 그것 맞추면 서른 문제 나옵니다. 못 지킵니다. 끊임없이 나와요, 끊임없이.

위반 사건이 생기면 위반 사건에 준해서 또 다시 위반 사건에 파생된 법이 거기서 새끼 치듯이 나오는 거예요. 그것 왜 그렇게 하느냐? 어떤 인간도 율법과 율법 사이는 강력한 전기가 있어서 끄트머리 작은 율법 하나 건드리게 되면 전체 율법을 다 위반한 게 돼요. 그러니까 호랑이 코털 하나 건드리면 사실은 털 하나잖아요. 우리가 양적으로 가벼운 코털 하나 뽑았을 뿐인데 덩치가 일어나서 누구야 내 코털 뽑은 사람이, 그렇게 나오지요.

부분을 건드렸는데 전체가 다 일어나요. 네가 하나를 어기면 전체 율법을 다 위반한 게 돼요. 이것은 바로 인간들로 하여금 여기서 뭐를 생산한다? 예수님의 피를 계속 생산하는 재료를 인간 쪽에서 제공하는데 그게 뭐냐? 죄입니다. 그래서 사울 왕이 지옥 갔습니까, 라는 질문은 적절치 않아요.

지옥이냐, 천국이냐 어디 갔느냐 하는 것은 사울 왕이 개인적 죽음을 죽은 게 아니고 언약적 죽음이기 때문에 사울 왕은 지옥 갔다고 하지 않고 언약을 위반하면 지옥 간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울 왕은 언약을 대변하는 거예요. 언약의 요소 가운데 뭐가 있느냐 하면 언약을 지키면 축복을 받고 언약을 어기면 저주를 받는다. 이 저주 기능을 사울이 대신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울 왕이 저주받는 것은 전체적인 언약의 명예, 주의 이름의 명예, 언약의 체면에 손상 갑니까, 손상 간 게 아니에요? 전혀 손상 간 게 없지요. 괜히 건드려서 감전당해서 죽었다는 말은, 여기 전기 흐른다는 것을 오히려 확인해주고 증명해주는 거거든요.

사무엘상 29장에 거기에 사울 왕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과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게 왜 하나님께 범죄가 되는지, 이게 왜 하나님께 묻지 않았던 일이 되는지 그것을 우리가 봅시다. 성경 중에서 여러 가지 어려운 것 중 하나가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라. 진짜 이것은 애매하지도 않아요. 모호해요. 흐릿해요. 그리고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나 무슨 뜻인지 몰라요.

이상하게 정답인 것 같은 느낌은 드는데 이걸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는 게 하나님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를 몰라요. 그때는 아는 방법은 이렇습니다. 이건 하나의 요령이니까 잘 보세요. 주님의 지시에 따라라. 이건 마태복음 8장에 백부장이 하는 말이, 주께서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나이다. 예수님께서 이만한 믿음 처음 봤다. 아브라함 백성들 천국에서 다 나오라 해. 네가 들어가라. 대단한 믿음이죠. 네가 천국 차지할 거야. 나머진 다 나가라 해.

그러면 주님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는데 주께서 언제 저보고 가라 했습니까? 그때 오후 10시 몇 분이었지요? 어디서 가라 했습니까? 주께서 가라 하셨다는 것이 내가 꾸며낸 가라, 거짓말로 내가 심리적으로 조작해냈다는 것을 증명할 방법이 뭐냐? 이건 내가 조작한 게 아니야, 라고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뭐냐? 또 증명할 방법이 있다 해도 그게 먹혀들겠나, 남들한테 납득이 될 이야기냐? 계속 이거는 아주 정립하기가 곤란한 거예요.

그럼 어떻게 하느냐? 일단은 내가 내 시키는 대로 해보는 거예요. 이거는 우리 아기 참 잘해요. 이거는 뭐 너무 잘해요. 내가 나를 시키는 것, 이것 빼놓고 없잖아요. 오늘 교회 가볼까? 그래 가보자. 내가 나를 시켰잖아요. 내가 나를 시킨 것 아니고 이것 빼기 나머지가 주께서 시킨 겁니다. 참 쉽지요.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평소에 모든 행동이 내가 나한테 명령한 거예요. 내 두뇌가 팔다리에 명령하거든요.

그럼 이걸 빼기 해버리면 주님이 내게 시킨 것은 뭐가 돼요? 몇 퍼센트입니까? 0퍼센트, 아무것도 없어요. 아무것도 없다, 이게 있는 겁니다. 제가 말을 절대로 어렵게 한 것 아닙니다. 아주 쉽게 한 거예요. 성경에 쉬지 말고 기도하라 했지요. 모든 기도는 무슨 기도냐 하면, 성도의 기도는 회개의 기도 외에는 다른 기도가 없어요.

우리는 죄인이기 때문에 죄인의 기도는 무엇과 대조가 되고 비교가 되느냐 하면 지금도 아버지 우편에서 기도하시는 예수님의 기도와 대조가 돼요. 죄인의 기도는 나 잘 되기 위해서 달라는 기도밖에 할 수 없어요. 내 형편이 어렵습니다, 몸이 아픕니다, 애가 어떻습니다, 우리 환경이 어떻고, 교회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도와주세요. 국가와 민족과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저 사람은 구원해야 되겠습니다. 저 사람 구원되도록 도와주세요.

굉장히 건전해보이고 신앙적으로 보이고 진짜 성경대로 하는 그런 기도하면 뭐합니까? 모든 게 달라는 기도인데요. 자, 달라는 기도가 뭐냐 하면 기도하는 내가 이 지점에 있지요. 그러면 주께서 달라고 했으니까 주님의 응답이 어느 쪽으로 집합돼야 된다? 내 쪽으로 와야 되겠지요. 그러면 기도하는 내용이 응답받아서 내 쪽으로 오게 되면 나는 내가 살아야 됩니까, 죽어야 됩니까? 둘 중에 하나인데. 응답을 내가 실천 주체자가 살아 있어야 돼요, 죽어 있어야 돼요? 살아 있어야 돼요.

살아 있으면 나는 뭐가 되느냐 하면 나를 미워할 수 없고 남은 죽어도 나는 멀쩡해야 돼요. 결국 우리의 기도는 뭐냐? 살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살되 가치 있게 살게 해달라는 기도에요. 그 외에는 우리 기도의 본색이죠. 그러면 이 원리를 그대로 적용시켜보는 겁니다. 주의 지시를 어떻게 따릅니까? 일단은 기도를 해요. 그러면 기도는 뭡니까? 내 이기주의적 기도밖에 안 나오죠. 결국 그 기도는 무슨 기도다? 내가 이것밖에 안 되는 무슨 기도? 회개의 기도의 바탕을 마련하게 되지요. 참 쉽지요. 억수로 쉽지요.

자, 여러분 사무엘상 28장에서 사울 왕이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물어물어 찾아갔는데 여기서 상상해봅시다. 다음 중 사울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는가? 주관식을 어려워서 안 내요. 객관식만 내요. ①참아야 하느니라. 내가 이스라엘 왕인데 비율법적 행동, 비신앙적 행동은 안 돼. 참자. 그래서 참았다. ②참다, 참다 1개월을 참다가 도저히 못 참겠다. 내려가자. ③금방 내려갔다. 몇 번입니까? 그때는 이번이죠.

이게 28장 6절에 보면 나옵니다. 핑계거리를 만들어서 내려간 거예요. 금방 내려간 게 아니고. 그러니까 무슨 말이냐 하면 사울은 이미 내려가기로 결심이 났어요. 그래놓고 하나님이 뭐라 하면 뭔가 변명거리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변명이 뭐냐 하면 하나님이 나한테 지시를 안 했잖아요, 이게 변명이에요.

제가 지금 여러분들에게 설교합니다. 여러분 성령의 지시를 따르세요. 하나님이 지시한 대로 해야 성령의 열매를 맺고 성도입니다, 라고 설교하고 손 털고 나는 집에 갔다 이 말이죠. 남아있는 교인들이 고민이 된 거예요. 주의 지시대로 따라야 되는 것은 옳다고 전부 다 아멘 했고, 오케이 맞는 말인데 어떻게, How, 뭐 어쩌라고? 어떻게 하면 지시대로 하는 건데요?

그러면 여기서 일주일 동안 기도해봅시다. 지시에 따를지. 일주일 동안 기도하고 드디어 행동에 나섰습니다. 주의 지시입니까, 주의 지시 아닙니까? 주의 지시 아니지요. 자, 일주일 동안 기도했습니다. 주의 뜻입니까, 주의 뜻 아닙니까? 주의 뜻이지요. 왜? 일주일 동안 변명거리를 만드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피 흘리게 되는 재료가 되는 죄가 되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기도했다는 그 의로움과 그것이 사실은 결정은 지가 다 해놓고 주님 앞에 궁시렁궁시렁 거릴 수 있는 거리를 나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가 막 살지는 않았습니다. 내가 신앙적으로 살려고 얼마나 노력했는지 주께선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저런 변명거리를 만들어내는 이것 모든 인간의 주특기에요. 이것 없는 인간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막 가는 인간은 없어요. 교회 안 나와도 양심은 있거든요.

내가 어릴 때부터 사회에서 올바른 가정 같으면 엇나가지 않았습니다. 맨날 소년원, 교도소 간 인간들 이건 나의 범죄가 아니라 사회의 법이다. 이건 맨날 주장하잖아요. 변호사들 그런 주장하고. 그 사람 생각하면 차라리 불쌍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 어려울 때 누가 돌봤습니까? 아무도 돌보지 않고 이제 와서 그 사람 범죄자 된 것 누가 그 사람을 욕하겠습니까.

또 요한복음 8장 동원해서 죄 없는 자가 돌을 쳐라. “판사님, 참착해주시기 바랍니다. 이제 청년인데 그래도 한 번 실수했다고 이렇게 교도소 가면 되겠습니까. 반성하고 있으면 한 번 봐줍시다.” 그럼 판사도 알아서, 알았습니다. 네가 음란비디오 만들어서 그렇게 유포한 것 이제 네가 반성문, 반성문을 이백 장을 쓴 게 아니고 이백 번을 썼어요. 썼으니까 내가 징역 42년 형에 처한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징역이든 무기징역이든 사형이든 진짜 회개하고 반성하는 청년 같으면 그걸 어떻게 받겠습니까? 분노로 받겠어요, 감사로 받겠습니까? 감사로 받겠지요. 이게 바로 뭐냐? 피가 내 앞에 있다는 증거에요. 주님께서 오죽 우리가 숨겨놓은 내가 모르고 있는 그 지독한 나의 이기성과 악마성이 얼마나 독했으면 주님께서 잔소리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예수님의 고귀한 자기 생명을 버려야 이게 해결 날 문제거든요.

이게 지금 우리의 실제 사명 문제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무슨 이야기냐 하면 불의한 청지기 이야기에요. 횡령한 사람이에요. 아주 노골적으로 횡령한 사람이에요. 사장이 나를 밉게 봐서 쫓아낸다 하니까 그전에 다른 고객들, 회사 거래처와 이야기해서 내가 장부조작해줄 테니까, “당신 우리 사장한테 얼마 있어요?” “이천만 원.” “그럼 천만 원 까줄게. 이렇게 해줄 테니까 내가 퇴직하고 난 뒤에 나한테 잘해줘.”

이렇게 횡령한 사람, 주님도 이야기했어요. 주님도 이 사람에게 앞에 이걸 붙여요. ‘불의한’ 청지기. 불의한테 이 사람이 뭐냐 하면 불의한 건 맞는데 주님께선 뭐냐? 옳게 행동했다는 거예요.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불의’하고 ‘옳다’ 의와 동급이에요(불의=의). 이퀄이에요. 이걸 어떻게 설명해요? 이렇게 설명해야 돼요.

불의한 건 불의한데 불의한 당사자가 옳다고 본인이 그렇게 해석하면 안 돼요. 해석은 주님이 하는 거예요. 나쁜 일은 누가 한다고요? 불의한 청지기가 하고, 옳다고 한 것은 누가 해석한다고, 누가 평가했다고요? 주님이 평가합니다. 이 방식 외에는 주님 가신 그 나라에 갈 수가 없어요. 이 방식 외에는 천국에 못 갑니다. 이게 복음이에요.

“주님이 나보고 옳다고 했어. 난 옳은 일 한 거야.” 어디서 주둥이를…, 어디서 건방진 말을 합니까? 아니에요. 해석은 주님 몫이에요. 우리가 주님 몫을 한다고 내가 그걸 그대로 나 잘한 짓했다고 으스대고 까불면 안 됩니다.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죄밖에 없어요. 그러나 우리가 해내는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해요. 불가능한 일은 못합니다.

사울 왕은 이미 신접한 여인을 만나기로 다른 대안이 없으니까 다른 가능성이 없으니까 자기가 왕의 자리를 차지한 게 아닌데 자기가 왕의 자리를 차지해버렸어요. 첫 번째 강의 때 분명히 했지요. 왕의 자리는 빈자리에요. 주의 자립니다. 빈자리입니다. 그건 예수님의 자리에요. 예수님의 자리는 우리 성도의 자리가 아니에요. 우리는 그에 죄인으로 다가서는 거예요.

왜? 예수님이 흘린 피에 언약의 다 이루심을 이루심답게 드러내기 위해서는 우리는 죄인으로서 다가가는 거예요. 우리의 그릇에 죄가 넘쳐서 넘쳐나는 거예요. 그래서 로마서 5장에 보면 죄가 넘쳐나매 무엇이 넘친다? 하나님의 은혜가 넘침이 이 넘침입니다. 옛날 첫 아담이 망했던 것, 우리는 못 빠져나가요. 문제는 뭐냐? 새로운 아담이 옛날 아담에 속한 사람에게 뭔가 주는 겁니다.

아까 그림을 다시 그려볼게요. 이 그림, 강남강의 때 한 건데 다시 해보면, 주님 오셨다가 떠났지요. 떠나신 주님께서 여기에 성령을 통해서 주님이 여기 계셔버렸어요. 성령 안에서. 성령 안인데 바깥의 모습은 뭐냐? 십자가로 보이고 안에는 성령 안, 이게 천국 안이에요. 그렇다면 여기는 뭐냐 하면 현실이 있고 현실1, 이거는 현실2 이걸 중첩이라 해요.

누가복음 17장 22절 말씀,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가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그럼 천국을 어떻게 끄집어냅니까? 천국은 나의 죄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한 죄를 통해서 비로소 천국이 우리에게 발산되게 돼 있어요. 천국은 상당히 인간을 건드려야 천국이 나와요. 이게 포도원비유입니다.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 먼저 품삯을 주지요. 아침 열 시에 온 사람, 열두 시에 온 사람, 오후 세 시에 온 사람, 오후 다섯 시에 온 사람들에게 품삯을 줄 때 오후에 제일 나중에 온 사람에게 품삯을 줬지요. 제가 설교할 때 이렇게 했잖아요. 품삯을 받은 자가 자기 품삯을 받았어요, 아니면 주인님의 은혜를 받은 겁니까? 주님의 은혜를 받았지요. 그 사람은 알아요. 그게 은혜인줄. 내가 하루 품삯을 받을 쨉이 못 되는 걸 본인이 알아요.

예수님의 피는 예수님이 장난 친 게 아니고 정말 내가 그만큼 못 됐고, 그만큼 불가능하고 구원이 안 되기 때문에 흘린 피라는 것을 본인은 알고 있는 거예요. 그 피가 피되기 위해서 우리는 뭘 합니까? 살아가면서 주의 말씀을 통해서 사울 왕의 죽음이 곧 나의 죽음을 대리한다는 사실을 발견해야지요. 왜? 우리는 하고 싶은 것만 하니까 이런 버릇을 못 고치니까. 우리는 아쉬우면 기도하고 안 아쉬우면 기도 안 하는 사람이고, 우린 배부르면 자기 자랑하고 어려우면 주께 엎드려 철야하고.

우리는 상당히 이기주의에요. 내 가족중심, 내 교회중심, 우리 국가중심 뭐든지 내가 박혀있는 내 중심 동심원으로 욕심이 퍼져나가는 거예요. 이거는 못 고칩니다. 아니 고치겠다는 발상 자체가 나빠요. 고치지 말라고 이 육신을 주신 거예요. 그리고 아직까지 고쳐서 더 지을 죄가 남아있다고 오늘도 주께서는 우리에게 생명을 연장시켜주었습니다. 죄가 있는 곳에 피가 있으라고. 얼마나 감사할 일이에요.

왜냐하면 죄 지으라고 살게 해줬으니까 평소에 우리 주특기가 그것밖에, 내 위주로 살아가는 그 외에는 다른 재주가 없어요, 우리는. 남을 구제해도 지 자랑하게 돼 있고, 오른손이 하면 왼손 다 들통 나게 돼 있어요.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그 말씀을 통해서 또 다시 우리는 이게 불가능한 내가 죄에서 벗어나는 게 내 힘으로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또 다시 감사거리가 생긴 버린 겁니다.

그리고 그게 피로써 이미 완료가 됐기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죄를 더욱더 죄인 되게 하신 거예요. 또 마귀한테 속아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의인이기 때문에 의만 위해 삽시다. 이런 마귀한테 이제는 여러분 안 속을 거죠? 이때는 서울말 써야 돼. 두 번 다시 안 속을 거죠? 성령의 열매 맺는다고 또 되도 않은 일 안 할 거죠, 이제. 성령의 열매는 회개하는 그자체가 성령의 온유와 자비와 화평과 양선이에요.

항상 십자가를 경유해야 나는 죄인으로 드러나고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드러날 때 나는 십자가 외에는 아무것도 자랑할 게 없다는 사도 바울의 고백에 같이 튀어나오게 돼 있어요. 사도 바울이 내가 율법으로 흠이 없으나 나는 죄인 중의 뭐라 했습니까? 죄인 중의 괴수로다. 뭐 자신만만하게. 주께서 잘라내시려면 잘라내 주세요. 주가 원하신다면 저 자르세요.

그렇지 않아도 우리 육신은 서서히 연세가 많은 분들은 지금 무너져내려가고 있습니다. 기억력도 안 좋고 머리도 빠지고요. 나중에 늙어서 운전도 못하고요. 모든 것이 자꾸 짜증도 나고 화가 나고 그래요. 전에는 말을 해도 공손하게 말했는데 나이가 들면 한 마디, 한 마디 전부다 가시가 돋은 것 같아. 갱년긴가? 오늘 제목을 갱년기라 할까요?

육신이 본인 마음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그냥 내비두세요. 원래 그러다가 쓰레기통 들어가면 되니까요. 다 이루었기 때문에 비워있기 때문에 우리 자신의 역할은 이제 말씀에 입각해서 무엇이 죄인가, 내가 왜 사울인가를 아는 그것만 남아있는, 아주 즐거운 일만 남아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복음이 증거 돼야 되는데 우리가 나 잘난 것, 내 의가 증거 되지 않게 하옵소서. 의가 증거 되더라도 그것이 바로 숨겨진 나의 죄인 것을 또한 증거 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오늘 제목은 [빈자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