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미가 5:5-6 / 작을지라도 본문
작을지라도
2022년 5월 4일
본문 말씀: 미가 5:5-6
(5:5)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5:6)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한 지점으로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이 와중에서 인간이 주님과 만나는 방식이 나옵니다. 그 방식은 우리 인간들이 좋아하는 것에 의해서 도리어 처절하게 짓밟아 주는 방식입니다. 이게 은혜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실망하고 세상이 어떤 속성과 성질을 갖고 있는지 직접 체험케 하는 방식입니다.
앗수르라는 대제국은 그 당시 거칠게 없는 막강한 나라였습니다. 감히 대적할 나라나 민족이 없이 큰 나라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런 나라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그것은 모든 인간들의 선망이 되는 조건들을 갖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이스라엘이 극히 작은 나라에 해당됩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기보다 더 큰 나라를 마주하게 됩니까? 그것은 이스라엘을 만드신 하나님의 속성이 세상 나라가 추구하는 것과 전혀 같은 유가 되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속성이 미가 5:2에 나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그동안 이스라엘이 역사 속을 통과하면서 이스라엘의 왕되시는 하나님의 성격을 잃어버렸습니다. ‘작을지라도’라는 취지를 망각하고 그 대신이 여타의 나라나 민족들처럼 큰 힘을 원했습니다. 즉 왕은 ‘작음 속에 태초의 원리’를 담는 식이라면 이스라엘은 주변의 강대국의 삶의 방식을 선호했습니다. 특히 앗수르라는 나라는 치를 떨 정도로 잔인하게 전쟁을 치르는 나라입니다.
이런 앗수르의 나라의 존재에 대해서 이스라엘 왕들은 무척이나 부러워했습니다. 특히 아하스왕은 유별하게 그 나라의 통치와 종교를 추종했습니다. 열왕기 16:3-4에 보면, “이스라엘의 여러 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따라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들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하스왕은 앗수르 나라의 도움을 받고부터는 아예 여호와 제단을 한 쪽으로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다 앗수르 방식의 제단을 건설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아하스 왕이 앗수르의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제단을 보고 아하스 왕이 그 제단의 모든 구조와 제도의 양식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냈더니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 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대로 모두 행하여 제사장 우리야가 제단을 만든지라 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와 제단을 보고 제단 앞에 나아가 그 위에 제사를 드리되 자기의 번제물과 소제물을 불사르고 또 전제물을 붓고 수은제 짐승의 피를 제단에 뿌리고 또 여호와의 앞 곧 성전 앞에 있던 놋제단을 새 제단과 여호와의 성전 사이에서 옮겨다가 그 제단 북쪽에 그것을 두니라”(왕하 16:10-14)
이 앗수르 땅은 옛날 ‘특이한 사냥꾼의 고향’입니다.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창 10:8-10)
물론 이스라엘에도 많은 목자와 군왕들이 생겨났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작을지라도’의 취지를 마음을 담고 있지 않았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의 특징을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의 정신적 지주라는 목자나 전쟁을 하는 군왕들은 하나님의 평강을 제공해주지를 못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은 인간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을 위한 나라입니다. 소년 다윗은 골리앗과 싸우면서 이 취지를 잘 보여주었습니다. 즉 ‘나의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주의 일’이라서 인간이 걱정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는 일인 겁니다. 사람이 자기와 상관해서 일이 벌어지만 벌써 화를 내거나 욕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태초요 근본이신 분 쪽으로 빨려들어가는 중입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감당못할 제일 큰 센 법은 시간입니다. 아무리 인간이 설쳐대고 활발하게 활동해도 시간은 인간의 모든 것을 무너지게 만들어버립니다. 이렇게 되면 모든 것이 허망하게 됩니다.
남은 것은 ‘주님의 지시’ 뿐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에 인간이 관여할 필요없이 주님 자신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평강도 주님 자신의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평강을 소지할 권한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10:34-36에 보면,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나사로 가정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는 장례식에 나타났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깨서 진작에 오셨으면 나사로가 안 죽을 수도 있다고 아쉬어합니다. 하지만 마르다, 마리아가 오해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평강이나 부활이나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생명이고 부활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즉 참으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자는 세상 앗수르같은 막강한 권력들이 성도를 협박하고 위협해도 그냥 덤덤하게 입을 다물면 됩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그 모든 일이 다 주님의 일이 인간의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상호작용으로 인간은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에게 중풍병 나아보겠다고 온 자가 졸지에 예수님에게 죄사함을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마 9:2) 이 시간과 세월 안에서 인간은 가만 있어도 항상 ‘과거와 더불어 사라진 존재’가 됩니다.
인간은 자진해서 자기를 잃거나 상실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건져내시는 이스라엘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들이 ‘작을지라도’로 취지에 입각해서 기존 인간들의 앗수르 정신을 짓밟아 버리는 식으로 주님은 그들과 만나십니다. 즉 세상 모든 일이 ‘나와 상관없는 일’로 전환시켜 주시는 겁니다.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시 8:2) 자기 일이 아니니 ‘나의 평강’을 따로 소지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평강 속에 덮혀지게 됩니다. 이것이 쉬지 않고 세상으로 인해 밟혀지는 은혜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 가신 길만이 보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7강-미가 5장 5-6절(작을지라도)22050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미가 5장 5-6절까지입니다.
미가 5:5-6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궁들을 밟을 때에는 우리가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켜 그를 치리니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앗수르 사람이 우리 땅에 들어와서 우리 지경을 밟을 때에는 그가 우리를 그에게서 건져 내리라.”
이스라엘 나라가 이렇게 강대국과 상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말은, 왜 이스라엘은 소수냐? 왜 이스라엘은 작은 나라고, 왜 이스라엘은 무기도 변변치 못한 그런 나라를 하나님께서 택하셨는가? 그 이유는 5장 2절에 지난 시간에 했습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찌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없었던 나라 이스라엘을 만들어내는 그 주인공 자체가 바로 작음을 표상함으로 등장합니다. 약함을 표상함으로 드러납니다.
그런데 그 약함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2절 끝부분에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의 본질은, 껍질 말고 본질은 태초에 있고 근본 태초에 계시는 분 곧 하나님이 되시는 겁니다. 하나님이 하나의 나라의 왕이 되는 거예요.
보통 그런 영화도 있지만, 말썽꾸러기 학생들의 볼때기를 쥐고 선생님이 “느그 아부지 머하시노!” 이런 것 있지요. 느그 아부지 머하시노. <친구>라는 영화에 나오지요. “우리 하나님 우리 아버지는 근본인데요? 태초인데요? 우리 아버지는 하나님인데요!”
여러분, 과연 그 고백이 즐겁고 편안한 가운데 서슴없이 나올 수 있습니까? 이거 안 나오면 그동안 신앙생활 뭐 했어요? 자기 아버지가 누군지, 자기의 구세주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바들바들 떨면서 이 세상 사는 것, 그것은 바로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성도를 강한자와 일부러 맞딱뜨리는 인생을 살게 하셨습니다.
여기 강한자의 명칭이 6절에 나오지요. 앗수르, 이 앗수르 나라는 강하고 그리고 성질도 굉장히 포학해요. 그리고 전쟁할 때 인정사정 봐주지 않습니다. 그들이 지나가게 되면 완전히 껍질 발가벗겨진 것처럼 싸그리 다 죽여버려요. 16세기 몽골군대, 칭기스칸 부대처럼 다 죽이듯이 그들이 와서 잔인하게 사람들 다 죽이는 거지요.
그 앗수르 국가의 성격은 누가 그렇게 잔인하게 만들었는가? 하나님이 그렇게 잔인하게 만들었어요. 왜 그렇게 잔인하고 막강한 군대냐? 그것은 인간 자체 내면에 인간이 뭔가 부러워하는 게 있고 나도 저것을 가졌으면 하는 속마음이 있습니다. 누구나 인간이라면 나는 저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하는 그것을 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직접 실재적으로 가시화시켜서 등장하는 나라가 앗수르 나라에요. 거칠 것이 없지요. 초월적 막강한 힘을 지닌 나라입니다.
오늘 본문 6절에 보면 “그들이 칼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리라.” 이 말은 뭐냐 하면, 그 무시무시한 앗수르 군대가 이스라엘 쳐들어왔을 때 그들이 잠시 이스라엘을 정복하는 것처럼 곧 함락하는 것처럼 하셨지만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나온 메시아께서 도로 역전해서 6절에 있는 대로 “앗수르 땅을 황무케 하며 니므롯 땅의 어귀를 황무케” 하는 그러한 일을 앞으로 벌이게 될 것이라고 그렇게 예언한 겁니다.
여기에 앗수르 이 나라가 도대체 뭘 인간들이 맘속에 갖고 있고, 누구나 갖고 있던 자기의 기대감을 현실화시켜낸, 역사적으로 실재화시키고 현실로 그들을 드러낸 그 속마음이 바로 니므롯이라는 지명으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창세기 10장 8절에서 9절에 보면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처음 영걸이라.” 영걸, hero, 영웅이지요, 임영웅은 아닙니다, 영웅이라, 영웅, “그가 여호와 앞에서 특이한 사냥군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은 특이한 사냥군이로다 하더라.” 특출하다는 말이에요. 감히 평범한 보통 일반인들이 바라볼 수도 없을 정도로 특출한 영웅은 옛날부터 신의 힘을 부여받은 자에게 해당되는 겁니다.
그러니 이 니므롯이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그냥 희대의 영웅이다, 라고 보시면 됩니다. 영웅이라는 것은 평범한 인간이 해내지 못하는 것을 이 영웅은 해낼 때 인간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인간들은 선망의 대상을 바라보면서 바라보는 본인의 마음속에 ‘나도 저 사람처럼 남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었으면 얼마나 좋겠냐’라는 이러한 기대처럼 되기 위해서 어떤 기회를 붙잡기 위해서 피곤한 인생이지만 그래도 한방, 훅 한방이 올 수도 있지 않겠느냐, 라는 그런 바램으로 그런 희망을 가지고 꾸역꾸역 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나도 영웅이고 싶다는 거예요. 교회 가면 교회 영웅, 기도하면 기도 영웅, 헌금이면 헌금 영웅, 우리 교회 하고 아무 상관 없는 이야기지만 뭐 공부면 공부 영웅, 인물이면 인물 영웅, 모든 것이 영웅이 되고 싶은 거예요.
여수에서는 돈 자랑하지 말고,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 하지 말고, 벌교에 가서 주먹 자랑 하지 마라, 그런 옛날 말이 있어요. 일제 때 일본 수출 기지가 여수에 있었기 때문에 돈이 많이 되었고, 그 돈 때문에 깡패도 많았고, 여자들 인물들도 그 일대에 들끓게 되니까 일제 때 거기가 어떤 희망처럼 경제활동이 활발해지니까 사람이 살맛이 나잖아요.
남들로부터 넘볼 수 없는 어떤 대상, 아이돌이라 하지요, 영웅, 우상, 나의 우상, 그게 국가적으로 따지면 권력과 힘과 무력이 강대하고 잔인하고 잔혹하기까지 한 이 앗수르, 이 앗수르에 대해서 왜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는 방식이 이스라엘을 통해서 제시될 수 있도록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그렇게 조치를 하신 겁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은 근본적으로 자기가 영웅이 되고 싶고 최고가 되고 싶거든요.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한테는 무슨 대상이냐 하면 치료의 대상이에요. ‘아이고, 얘 맛 갔다. 보통 정신병자 아니구나.’ 오히려 대단한 인물이 되고, 영웅이 되고, 스타가 되고, 성공한 인물이 되겠다, 할 때 하나님께서는 “네가 베들레헴 에브라다의 정신을 잃었구나. ‘극히 작을찌라도’ 거기 하나님의 근본과 태초의 비밀이 거기에 담겨 있으면 되었지 왜 세상에서 영웅 좋아한다고 우르르 그 영웅 따라 가느냐?” 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망한 이유가 영웅을 길러내고 영웅처럼 국가를 운영하는 데 필요한 그 힘, 그 god, 그 하나님을 이스라엘이 부러워해서 그쪽 하나님을 섬긴 거예요. 앞에 사는 부잣집이 절에 가니까 나도 같이 부처 믿으면 부자 되는 줄로 알고 있는 거예요. 똑같은 그런 바람을 형성하고 있었던 겁니다.
여기서 좀 깊이 들어가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뭐냐? 이스라엘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간다는 것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모든 일어나는 일은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요. 그러니까 욕조의 배수구 같은 거예요. 물 빠질 때 물이 천천히 빠지는 것 같지만 나중에는 얼마 안 남으면 쑥 하고 빠지잖아요.
세상 모든 것이 하나의 토네이도 같은 바람이라면 그것이 빠져 들어가는 그 지점이 베들레헴 에브라다에서 출생한 그분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그분을 만나는지, 어떻게 만날 수 있을까? 참, 교회 다니면서 진짜 하나님을 어떻게 만납니까, 궁굼해요.
여기에 앗수르를 동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뭘 원하는지를 아시고 자기가 선망하고 원하는 그 사람한테 완전히 사기당하게 만드는 겁니다. 돈에 속고 사랑에 울고. 사랑에 배신당하고 돈은 돈 대로 빼앗기고. 나는 진심을 다했는데 그는 나에게 상처를 주네. 하나님의 방법은 뭐냐? 앗수르를 통해서, 네가 그토록 좋아하는 앗수르를 통해서 우리 자신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이스라엘이 파괴되는 이유도, 앗수르 나라를 이스라엘 왕들이 너무너무 좋아했습니다. 열왕기하 16장 10절에서 16절 상당히 긴 내용인데요. 열왕기하 16장 전체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아하스 왕 때에 그 왕은 앗수르라는 나라를 너무 좋아했어요.
그래서 앗수르 종교에는 사람을 제단에 불로 태워죽여서 신에게 바치는 그것을 본받았습니다. 6장 3, 4절에 보면 “이스라엘 열왕의 길로 행하며 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내신 이방 사람의 가증한 일을 본받아 자기 아들을 불 가운데로 지나가게 하며 또 산당과 작은 산 위와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제사를 드리며 분향하였더라.”
아하스 왕이 그렇게 했어요. 이 아하스 왕이 앗수르를 얼마나 좋아했던지요. 이 아하스 왕은 남쪽 유다나라 왕입니다. 그런데 이 유다나라 왕이 북쪽의 이스라엘이 쳐들어 왔을 때입니다. 북쪽 인민군이 남쪽에 쳐들어온 것과 똑같아요. 쳐들어왔을 때 그는 하나님께 도움을 원치 아니하고 앗수르에게 구원을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앗수르에게 예물을 보냈더니 9절에 앗수르 왕이 아람나라를 쳐서 유다나라를 건져줬거든요. 8, 9절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앗수르 왕이 그 청을 듣고 곧 올라와서 다메섹을 쳐서 취하여 그 백성을 사로잡아 길로 옮기고 또 르신을 죽였더라.”
이렇게 건져주고 난 뒤에 10절에 “아하스왕이 앗수르 왕 디글랏 빌레셀을 만나러 다메섹에 갔다가 거기 있는 단을 보고 드디어 그 구조와 제도의 식양을 그려 제사장 우리야에게 보내었더니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돌아오기 전에 제사장 우리야가 아하스왕이 다메섹에서 보낸 모든 것대로 단을 만든지라.”
그냥 단을 하나 새로 만든 정도가 아니고요, 기존에 있던 여호와의 단을 전부 다 옮겨 놨어요. “필요 없다. 저리 가! 여호와 신 필요 없어.” 왜? 여호와 신을 믿으니 무슨 소용 있습니까? 떡이 나옵니까, 밥이 나옵니까, 돈이 나옵니까? 아무것도 안 나오지요. 하나님이 지켜줘야 되지 않습니까? 지켜주기는커녕 여호와가 지켜주는 것이 아니고 바로 앗수르 종교가, 앗수르 신이 지켜주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를 지켜주는 그 앗수르 신에게 갈아 타기 하는 겁니다. ‘야, 저쪽 신이 실효성이 있다. 실리가 있다. 같은 믿음이라도 효과 있는 신을 믿어야지 효과없는 신을 여호와 백날 믿어도 무슨 소용 있느냐?’
그래서 명령을 해서 모든 제단을, 여호와 단을 치워버리고 그 뒤에 20절까지 나오는 이야기가 그 이야기에요, 다 치워버리고 그 자리에 앗수르 제단을 세웠습니다. 바로 호세아 7장 1절에 보면, 인간이 이처럼 어떤 영웅을 되게 좋아하는 그 병든 것에 대해서 호세아 7장 1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을 치료하려 할 때에 에브라임의 죄와 사마리아의 악이 드러나도다.”
하나님이 치료를 해주시는 것, 하나님 쪽에서 자기 백성을 만나는 방식은 그들이 선망하고 사모하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주선한 이방 사람,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이게 박살나야 될, 파괴되어야 할 요소인 것을 치료하시면서 그걸 들추어내는 방식을 사용하시는 겁니다.
“너 앗수르 좋아했잖아. 앗수르한테 한번 당해봐.” 그 방식이에요.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방식이 뭐라 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방식은,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 하는 방식은, 우리가 댔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우리가 크게 우리 자신이 낭패를 당하는 일로 의도적으로 조성하는 방법이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는 방식입니다. 어떻게 뭐 기분 좋아졌습니까?
이삭을 사랑했던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방식은 하나님이 “이삭 네 아들을 죽여라.” 얼마나 급진적이고 인간의 능력으로서 도저히 감당하지 못 하는 일을 주께서는 하시지요.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이 중풍병을 고치러 왔습니다. 중풍병을 고치러 왔는데 주님께서는 중풍병을 신경 쓰지 않고 죄사함을 얻게 했어요. 중풍병 들렸는데 중풍병 낫는게 문제가 아니라 죄사함을 얻는 거예요.
중풍병은 나을 수가 있지만 이 죄사함은, 죄사함 받을 수 있는 방법은 인간에게는 없습니다. 인간은 무슨 생각하느냐 하면, 착해야 죄가 약간 감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있지요. 그러나 죄다 있는 죄는, 죄가 한꺼번에 훅 사라지는 그것은 인간의 생각에서는, 인간의 마음에서는 도저히 생겨날 수 없는 횡재를 한 거예요. 그 사람은.
중풍병 안 들렸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러니까 매일같이 중풍병 걸리고 고질병 걸리는 것이 복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우리가 문제 삼는 것은 문제 거리도 안 돼요. 정작 우리는 우리 문제가 뭔지를 몰라요.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베들레헴 에브라다가 아닙니다. 이 세상 앗수르에요. 거대국가, 강력한 국가, 영웅이 되는 겁니다. 이 고질병 우리 스스로 고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을 통해서 어떤 식으로 고쳐지는지가 이사야 37장 8절에서 13절에 나옵니다. 역시 거기 또 앗수르가 나와요. 앗수르의 랍사게라는 왕이 있는데 그 왕에게서 파견받은 산헤립이라는 장군이 있어요. 그 장군이 유대나라를 치기 전에 약을 올리고 협박하는 장면입니다.
이사야 37장 12절에 “나의 열조가 멸하신 열방 고산과 하란과 레셉과 및 들라살에 거하는 에덴 자손을 그 나라 신들이 건졌더냐” 이게 지금 센헤립이라는 장군이 지금 협박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이 유다 나라야! 소문에 듣기는 너희들이 여호와를 섬긴다면서? 내가, 우리 앗수르 군대가 쳤던 모든 민족가운데 그들이 섬겼던 신들이 우리 신한테 다 패배당한 것 너희들이 소문들어 알잖아. 그런데 그 여호와가 어떻게 너희들을 구원할 수 있겠느냐?”라고 협박을 하는 거예요.
18, 19절에 보면 “여호와여 앗수르 왕들이 과연 열국과 그 땅을 황폐케 하였고 그들의 신들을 불에 던졌사오나 이들은 참 신이 아니라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 뿐이요.” 이렇게 히스기야가 기도를 하는데 22절에 “여호와께서 그에 대하여 이같이 이르시되 처녀 딸 시온이 너를 멸시하며 조소하였고 딸 예루살렘이 너를 향하여 머리를 흔들었느니라.”
여기에 이런 앗수르 그 쪽에서 파견한 장군이 하나님을 조롱할 때에 여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뭐였는가 하면, 이 히스기야가 어떻게 그들을 대처했느냐 하면, 그냥 아무 소리 하지 말라고 했어요. 아무 소리 하지 말라.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무덤덤하게 그 협박에 대하라. 무덤덤하게.’
왜냐하면 이 일어난 모든 일은 이 히스기야 왕에 의하면, 이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여호와 하나님 자신에 관한 일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전부 다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가게 되어 있어요. 그 말은, 같은 말인데 모든 일어나는 일은 그 한 지점에서 나왔던 그 취지가 펼쳐지게 되면 이 세상 어떤 구석구석이라도 다 전개되게 되어 있어요.
그러니까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또 오늘날 성도 입장에서는 성도가 뭐냐 하면, 주님과 관계되는 것만 나오는 게 바로 성도거든요. 그래서 성도는 그런 협박 공갈, 앗수르 같은 것이 왔을때에 그거하고 나와 무슨 상관있느냐, 아무 상관이 없지요. 그러니까 답변하지 마라, 입 다물고, 거기서 무슨 소리 하든지 간에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인간은 어떤 일이 일어나도 초조할 권리가 없습니다. 왜? 자기 일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여러 가지 법을 지켜야 된다, 뭐 무슨 법이 제일 센 법이냐,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에는 시간보다 더 센 법은 없어요. 왜냐하면 시간은 흘러가면 전부 다 허물어지고 망가지게 되어 있어요. 이건 뭐 지키고 안 지키고 관계없어요.
옛날 노래 잘했던 인기 있는 사람도 나이 들면 노래하려니 소리도 안 나오고요, TV에 못 나올 정도로 얼굴이 다 흉측해 버렸어요. 시간을 누가 이깁니까? 다 허망한데. 그렇다면 남아 있는 것은 뭐냐? 하나님의 지시만 남아 있어요. 하나님의 지시만. 산헤립, 랍사게, 이것들 그때 반짝 힘 있다고 잘난 체 하는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어디까지 범죄할 수 있느냐를 그들을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사람이 왜 범죄하느냐 하면, 사람이 무섭기 때문에 범죄하는 거예요. 사람이 무섭기 때문에 범죄하는 거예요. 사람이 왜 무서우냐? 사람들 앞에 나를 지키려 하니까 그게 무서워서 욕 나오지요. 사람이 무슨 일이든지 자기와 상관있으면 욕 나와요.
여러분은 성도기 때문에 평생 욕이라는 것은 해본 적이 없잖아요. 해본 적 없지요. 화를 내신 적이 없잖아요. 성도기 때문에, 다 내일과는 상관없는 주의 일이기 때문에 화내거나 욕해본 적 없지요? 갑자기 내 인상이 왜 그래요?
이 말은, 주님의 지시가 없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주님의 지시가 없는 사람을. 자기가 자기 지시만 있는 사람들이 영웅을 시도하고 영웅 되기를 선망하지만 그것은 시간이라는 법 앞에서 자동 허물어지게 되어 있어요. 블랙홀이 되어 있다고요. 빨려 들어가고 있어요. 시간 속에 빨려 들어가서 나중에 소멸되고 없어요.
여러분, 과거 어디 있습니까? 집의 사진첩에나 있지 여러분의 과거는 없어졌어요. 이미. 시간이 다 없애버린 거예요. 시간이. ‘고맙다, 시간아!’ 시간이 얼마나 고마워요. 늘 자기의식 해가지고 벌벌 떨 수밖에 없으니까, 벌벌 떠니까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하는 행함이 뭐냐? 그걸 죄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걸 범죄라고 이야기해요, 범죄.
세상에 범죄치고 자기 안 지키려는 범죄자 봤습니까? 하나님의 방식은 우리가 평소에 뭔가 문제성이 있고 정신병자 되었으니까, 베들레헴 에브라다의 그 ‘작다’는 취지 안에 태초가 계시고 하나님 계시니까, 우리를 만나줄 때 아주 처절하게 우리를 짓밟아 주십니다. 그게 은혜에요. 처절하게 짓밟아 주세요.
“너는 초조할 권한 없다. 너는 걱정할 권리 없어. 네가 뭔데? 내가 언제 네 안에서 네 이야기 나오라 하더냐?” 나는 이렇게 버텼습니다, 그 이야기 하라고 성도된 게 아니에요. “주께서 이런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 이야기 나와야 돼요. 그 이야기!
그러면 주님의 지시는 오늘 본문 5절에 보면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주님이 평강을 해주는 게 아니고 주님 자체가 평강이에요. 주님만 평강이에요. 주님만 여유로와요. 다른 사람은 불안, 초조에요. 그 주님은 비록 작을찌라도, 약할찌라도 평강이 그 안에 조밀하게 다 압축되어 있습니다.
힘이 있어서 평강이 아니에요. 힘이 없어도 평강할 수가 있어요. 왜? 주님의 일은 아버지의 일이니까, 하나님과 약속한 약속이기 때문에. 마태복음 10장 34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즉 “화평? 너희들이 뭔데 화평을 줘야 돼?”
요한복음 11장에 예수님께 마르다 마리아 자매 나사로 집에 갔습니다. 갔는데 요한복음 11장에서는 오빠 나사로가 기둥 같은 오빠가 죽어 장례를 치르기 때문에 그 장례 치를 때 그때 예수님께서 그 집에 가셨습니다. 그럴 때 그 언니 마르다가 굉장히 속상해하면서 예수님께 진짜 욕 아닌 욕을 한 거지요. “제가 분명히 언질 줬잖아요. 아플 때 그때 일찍 오시라 했잖아요.”
속에 막 이런 게 있었을 거예요. ‘그동안 우리가 주님한테 해준 게 얼만데 왜 우리를 특별대우 안 해주십니까? 우리가 얼마나 가까이에서 모셨잖아요. 최측근이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 아쉬울 때 안 왔습니까? 우리 오빠 죽어가는데 빨리 오시라 했는데도 왜 안 오셨습니까?’
주님께서 일부러 안 왔거든요. 일부러, 일부러 안 갔습니다. 벌써 마르다가 초조합니다. 마르다가 불안해요. 주님, 주님, 맨날 주님 찾았는데 뭔가 주님 만나는 방식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님 이용해서 영웅이 되고, 예수님 이용해서 자기가 잘됐다, 이익을 얻었다는 그걸 내심 노리고 있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마르다가 “오빠가 죽었습니다.” 하니까 요한복음 11장 25, 26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걸 마르다가 오해해 가지고 “그 부활을 주셔야지요. 그 생명을 주셔야지요.” 자기한테 달라는 거예요.
주님의 뜻은 ‘내가 생명과 부활을 준다는 게 아니라 내가 부활이고 내가 생명이다.’ 그 말이지요. ‘너는 내 앞에서 좀 없어져 줘. 시간의 법에 의해서 사라져 줘. 내가 부활이고 내가 생명인 것을 쳐다보는 그걸로, 네가 그동안 살아온 것은, 네 오빠 살아온 것은 오빠 일이 아니고 바로 예수님 나의 일이고 내 일의 전개였고 확산이었다.’ 그 말이지요. 왜 깔대기 속의 한 지점으로 빨려 들어갈 줄을 몰라요? 마르다, 마리아, 나사로가.
소매 긴 빨랫감 세탁기에 넣어 보세요. 나중에 세탁 끝나고 보면 소매 다 배배꼬여서 한 뭉치로 모여 있잖아요. 꼭 세탁 많이 해본 사람같이 이야기하지만. 많이 해보지는 않았습니다. 나의 나 됨, 풍부한 나의 나 됨은 주께서 세탁기에 집어넣어 버리면 이게 꼬여가지고 이 표면적이 하나의 선이 돼요. 새끼 꼬듯이 한쪽으로 빨려들어간다고요.
내가 이렇게 면적이 있으니까 ‘주님, 나한테 뭐해줬습니까? 부활 주세요, 생명 주세요, 천국 보내주세요……’ 확 꽈버려야지. “너는 없어져야 돼.” 너는 없어져야 된다고요. 시간이 그래서 고마운 거예요. 뭉개지게 해주고 사라지게 해주는 겁니다. 나는 죽고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확대되는 겁니다. 그게 성도입니다.
애초에 내가 버티고 있으니까 맨날 나의 일이에요. 맨날 나의 일 아닙니다. 모든 것이 주의 일입니다. 그게 바로 성도가 주님을 만났을 때……,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앗수르가 와가지고 유다나라를 작살내요. 이스라엘을 박살 냅니다. 그렇게 좋아했던 그 나라가 도리어 그 나라한테 배신당하게 만들어버리지요.
그러면 앗수르가 누구냐? 강대국, 물론 강대국도 앗수르입니다만, “네가 앗수르야, 네가! 네가, 세상을 좋아하고 세상에서 출세 성공하기 바라는 네가 앗수르고, 네가 영웅이고, 네가 니므롯이었다는 거예요. 창세기 10장에 니므롯 그 자리가요, 무슨 자리냐 하면, 바벨탑 쌓았던 그 자리에요. 영웅 자리에 탑을 쌓는 법이에요, 영웅 자리에.
누가복음 15장에 탕자 나옵니다. 탕자가 참 행복이 뭐냐 하면, 자기가 아무리 망해도, 어떤 경우를 당해도 다시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겁니다. 그 자리가 뭐냐? 아버지의 집. 아무리, 아무리 험한 꼴을 당해도 돌아갈 자리가 있습니다.
자, 설교 처음으로 돌아가 봅시다. “느그 아부지 머하시노!”라고 질문했지요.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신데요. 우리 아버지 하늘에 계시고 저와 함께 계신데요.” 이렇게 돌아갈 자리 안에, 예수님 안에, 하나님 안에 있게 되는 것, 그게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 만드는 최종 목표점입니다.
내가 그동안 내 주인이었는데, 내 일은 어디까지나 나의 일인데, 나의 자존심과 나의 명예와 관련된 나의 일인데 주께서는 그걸 아주 지독한 악마의 병으로 간주해서 치료해주시려고 하는 겁니다. 치료할 때는 내가 미처 몰랐던, 내가 이런 더러운 병이 있었구나, 를 끄집어내는 방식을 사용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으로 하여금 지독하게 세상 사람들한테 모멸감과 모욕감을 당하게 하는 방식으로 주께서는 사용하십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에게는 앗수르였습니다.
마태복음 10장 다시 보게 되면 34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또 다른 구절에 보면 누가복음 12장 49절에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이 불이 이미 붙었으면 내가 무엇을 원하리요.”
그래서 10장 38절에 유명한 말씀 나오지요.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물론 그 당시 인간들 그리고 어떤 인간도 이것은 이룰 수 없는, 성립될 수 없는 지시입니다.
이 아하스 왕이 앗수르 나라를 너무 좋아해서 그대로 본 따서 ‘우리가 앗수르 같은 신, 앗수르 같은 방식으로 신을 섬기면 우리가 앗수르 같은 강대국이 될 것이다.’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사야 7장 17절 20절에 보게 되면, 이사야가 앗수르에 반해버린 아하스에게 이야기합니다. 11절 먼저 보면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께 한 징조를 구하되 깊은데서든지 높은데서든지 구하라.” 하니까 자기는 안 구하겠대요. 자기는 하나님의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 12절에 “아하스가 가로되 나는 구하지 아니하겠나이다 나는 여호와를 시험치 아니하겠나이다 한지라.”
아하스 왕은 이미 앗수르에 매료되었기 때문에, 그게 자기의 통치이념이 되었기 때문에, 통치이데올로기 이념이 되었기 때문에, 통치법칙이 되었기 때문에 다른 법칙은 씨도 먹히지 않는 거예요. 이게 환자입니다. 이게 병든 거예요.
이게 오늘날 우리 모습, 우리 일상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거예요. 우리가 평강을 새삼스럽게 원한다는 말은 아직 우리가 안 깨어졌다는 뜻이에요. 우리는 깨어져 버리면 내가 평강을 가질 자격도 없고 그럴 권한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평강은 주님 자신이 평강이에요. 주님 자신이 평강이에요! 우리가 평강해서 뭐하는데요?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자 하게 되면 맨날 만나는 것이 앗수르의 횡포, 앗수르의 횡포만 매일 직장생활을 통해서 가정생활을 통해서 만나게 될 겁니다. 좀 가졌다고, 좀 잘났다고, 많이 안다고, 그리고 권력 있다고 얼마나 갑질을 해대는지요. 참 서럽지요. 여러분, 서럽지 않습니까?
서럽게 느끼는 여러분이 여러분만 못한 사람에게 갑으로 이미 등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강한 자에게는 굽신거리지만 못한 자에게는 어렵게 하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 하는 이것은 도저히 인간에게는 성립이 안 되고 성령이 와야 가능하고요.
왜냐하면 성령은 십자가의 영이니까. 십자가의 영이라는 것은 내가 뭘 할까요, 가 아니라 내가 뭘 할 하등의 존재 자체가 안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십자가 지는 것을 무슨 아골골짜기에다, 굶어 죽고, 아프고, 병들고, 아주 처참한 그런 것만 생각하는데 진정한 십자가는 참 평안합니다. 마음에 원하지도 않는 고요가 찾아오고요, 평강이 찾아와요.
자, 다시 오늘 본문에 들어가 봅시다. 본문 미가 5장 4절에 “이 사람은 우리의 평강이 될 것이라.” 그 근본이고 태초고 하나님이신 평강이 이제는 그들에게 들어오는 절차가 앗수르가 그들을 일단 칩니다. 그러면 그들은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 어떠한 능력은 없습니다.
여기서 그들의 목자, 종교적이고 정신적인 지도자지요, 목자, 그리고 군왕들, 그들의 왕, 방백들, 공무원들 그동안 뭐했습니까? 뭐 했어요? 아무 짝도 소용없지요. 요런게 어려워요. 무슨 뜻이냐 하면, 세상 모든 일이 하나의 물 빠지는 욕조처럼 뱅뱅 말려서 사라지는 그러한 과정 속에 있는데 그러면 그 속에서 인간과 인간들의 상호작용은 어떤 효과가 있느냐? 효과 없어요.
부모하고 딸하고 서로 친하게 지낸다. 자기 구원에 무슨 도움이 됩니까? 시부모하고 며느리가 잘 지낸다. 그래서, 그래서 천국 갑니까? 형제간에 우애 있어라. 형제간에 우애 있어서 천당가는 거 나 못 봤습니다. 부모한테 효도해라. 효도해서 구원받습니까? 인간 대 인간의 상호작용은 아무 상관도 없어요.
여기서 주님의 작용이 압권입니다. 주님의 작용이 뭐냐 하면,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을 일으킨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목자는 정신의 지도자고 군왕은 외부의 적을 치는 거예요. 그런데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 전에 이스라엘 유다나라에서는 일곱 목자 있어도, 여덟 군왕 있어도 아무짝도 소용없었어요.
왜? 그들은 뭐냐? 베들레헴 에브라다의 그 ‘작을찌라도’의 취지를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저 강해야 강대국을 이긴다, 그것만 생각했지 왕과 목자가 자기 십자가를 져야 된다는 사실, 자기 십자가는 희생한다는 뜻은 아니고요, 나는 별 볼 일 없다, 나는 무능하다, 모든 일은 주께서 알아서 하신다, 그런 자세로서 봉사하는 자세가 되지 않으면 그것은 제대로 된 목자나 왕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그 예가 뭐냐 하면, 바로 유명한 소년 다윗입니다. 그냥 다윗이 아니고 소년 다윗, 아주 성숙 된 인간이 아니에요. 미성숙된 인간이 누굴 이기는가? 골리앗을 이겼거든요. 다윗은 시편 8편에서 이것을 이렇게 극단화시킵니다. 뭐냐 하면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을 하늘 위에 두셨나이다.”
2절에 보면 “주의 대적을 인하여” 자, 주의 대적을 인하여, 라고 할 때 그러면 ‘이스라엘도 어떤 무기를 만들든지 어떻게 하겠지.’라고 생각하겠지요. 다윗은 그것이 아니에요. “주의 대적을 인하여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심이여”
어린아이, 젖먹이가 무슨 힘이 되겠습니까? 그런데 그 힘이 극한, 극도로 힘이 없는 것이 태초의 힘, 하나님의 힘, 모든 것을 한 지점으로, 심판주 되시는 예수님으로 끌어당기는 힘은 인간의 힘을 쏙 뺀 그 상태에서 주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상황이라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주님이 우리를 어떻게 만난다고요? 우리로 하여금 다 큰 어른이라도 젖먹이와 어린아이 취급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어린아이. “나는 너한테 어떤 힘도 요구한 일이 없어. 내가 알아서 하는 것 다 알지?” “알지요” 이게 바로 주님과의 만남이에요.
그게 바로 뭐냐? 자기가 어떤 내세울 게 없으니까, 능력이 없으니까 평강이 안 올래야 안 올 수가 없어요. 꾸역꾸역 자기 자존심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는 게 아니잖아요. 자기만의 어떤 구상한 일, 이것만은 꼭 이루어야 될 그런 일이 없어졌잖아요.
그러니까 남은 것은 주님이 주신 평강만 남은 거예요. 그것이 십자가 안에 있는 상태입니다. 어떻습니까? 지금 여러분의 현 상태지요? 현 상태라니까 또 주무시는 상태 말고 현 상태지요. 지금껏 살아온 것이요 기적입니다. 그보다 더 놀라운 일은 지금껏 내가 살려고 애썼는데 그 죄 있잖아요, 그 죄가 깡그리 다 용서받았다는 것.
일곱 목자 여덟 군왕은 전에 철저하게, 일곱이니 여덟 자체가 밟은 데를 또 밟아주고 밟은 데를 또 밟아주는 거예요, 철저하게 사람 하나에 일곱 목자와 여덟 군왕이 밟아준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세상에 대해서 성공과 출세, 왕, 영웅화, 나 자신이 위대하게 되려는 그것을 고맙게도 밟아주고, 밟아주고, 부숴주고, 깨주고, 꼼짝 마라, 해주시는 그 은혜, 그 은혜로 인하여 우리는 평강을 얻게 될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멀쩡한 오빠가 죽어서 화나는 나사로 가정에서도 주께서는 평강을 주셨습니다. 주님 자신이 평강이 되셨던 것을 그들은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만의 평강, 나만의 행복 주께서 짓밟아 주시고 주님이 생명이고 주님이 부활됨을 기뻐하고 감사하는 어린아이 같은, 젖먹이 같은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 > 미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미가 5:10-15 / 심판하시는 하나님 (0) | 2022.05.18 |
---|---|
미가 5:6-9 / 앗수르와 남은 자 (0) | 2022.05.11 |
미가 5:1-4 / 가장 위험한 곳 (0) | 2022.04.28 |
미가 4:9-13 / 해산의 고통 (0) | 2022.04.20 |
미가 4:6-8 / 바뀐인생 (0) | 2022.04.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