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욥기 38:34-38 / 의미의 관통 본문
의미의 관통
2022년 3월 6일
본문 말씀: 욥기 38:34-38
(38:34)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 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38:35)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38:36)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38:37)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38:38)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
하나님께서 욥과 대화하시면서 인간이 수집할 수 없는 정보를 가지고 들이대십니다. 이것은 인간들이 자연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바라보고 있는지를 미리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자연을 보면서 그 누구라도 부정하지 못할 절대 진리를 찾고자 합니다. 그래서 그들이 내린 결론은 이러합니다.
이 세상은 눈에 보이는 실체와 눈에 보이는 정신으로 구성되어 있다. 실체는 손에 만져지지만 정신은 생각(사유)로 되어 있기에 보이지 않는다. 이 실체와 정신이 결합된 것이 세상에 따로 떼내져 있는 각종 동식물들이요 그 중에 인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 정신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인간들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먼저 선수치듯이 욥에게 다음과 같이 알려줍니다. “내가 여기 있다.”(35절)가 본 내용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들의 자연에 대한 탐구는 결국 ‘내가 여기 있음’을 확인하고 증명하고 싶은 것이 동기가 되는 겁니다. ‘내가 여기 있다’면 그냥 고요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끊임없이 타인들로 하여금 ‘내가 여기 근사하게 있음’을 인정해달라는 식입니다.
알아달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사랑’이란 타인으로 인하여 ‘내가 여기에 의미있게 있음’으로 의식하는 겁니다. 즉 있으나마나 하는 존재는 되기 싫다는 겁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자신이 예상한 인생살이가 박살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실망해서 아무도 모르는 곳에 홀로 살고 싶어합니다.
모든 관계를 끊고 모든 연락을 끊고 세상 살이를 홀로 새로 시작하려고 합니다. 한적한 작은 도시에 가서 하청맡아 생산하는 소규모 중소업체에 들어가서 온종일 작업복 입고 묵묵히 일합니다. 참으로 홀로 사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고된 나날을 보내면서, 사람은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내가 기계야 사람이야? 이런 사람으로 사는 게 아니야. 기계로서 사는 것이 과연 살아있다고 할 수 있을까” 참으로 자기 삶이 한심스러울 겁니다. 고생하는 것보다 더 견디기 어려운 것은 무의미일 겁니다. 따라서 이 기계의 삶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 누군가가 자기를 알아주기를 원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누군가가 나를 주목하는 그 의미있는 시선으로 나는 그 안에서 살 맛을 누리는 겁니다. 봐주는 사람이 있기에 더욱 더 삶에 매진할 수가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이것은 모든 의미의 종결이 인간에 두는 바가 됩니다. 즉 내가 행복하고 내가 만족하면 세상은 괜찮은 세상인 것처럼 오해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연 자체는 그러지 않습니다. 자연은 인간들처럼 의미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마감되지를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들이 자연을 보면서 자꾸 놓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게 일상의 선택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차를 몰로 내리막길로 치닫는데 마침 차 브레이크가 고장나고 말았습니다.
차는 걷잡을 수 없이 아래로 돌진합니다. 그런데 앞에 보이는 두 갈림길에서 불행스러운 상황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쪽 길에서는 연로한 부부가 파란불에 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법규를 지키면서 건너고 있는 겁니다. 그런데 다른 길에는 무단으로 길을 건너는 어린아이들 5명이 있습니다.
자 운전자는 어느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할까요? 2명의 목숨입니까 아니면 5명의 목숨입니까? 법규를 지킨 자를 희생할 겁니까 아니면 법규를 준수하지 않는 불법자를 희생시킬 겁니까? 이처럼 우리네 인생사란 늘 암담한 선택지를 마주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우리 인간을 몰아세웁니다.
그 이유는, 이 대자연의 의미가 인간에 의해서 중도에 차단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원래 대자연은 하나님의 뜻을 잘 아는 인간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운영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제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는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인간들은 로마서 3:10에 의하면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가 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곧 인간은 그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운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현실을 보여시는 겁니다. 자기 딴에 한다는 것이 기껏 “최선을 다했노라” 뿐입니다. 늘 이 소리만 반복할 뿐입니다. 즉 인간에게는 몰라도 되는 지식이 초기에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선과 악을 아는 지식입니다.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나의 의로움’이 어떤 선택을 통해서 보장받을 것인가 입니다. 이왕 존재하는 것, 주위로부터 우수하고 훌륭하고 의로운 자로서 존재하고 싶은 겁니다. 악은 멀리 두고 선은 가까이 두고 살고 싶은 겁니다. 그 어떤 일을 하더라도 욕얻어 먹는 것은 사양하고 싶은 겁니다.
이것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의 원칙에 정면으로 충돌되는 삶의 태도입니다. 매사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들을 마주하면서 인간은 한 시도 자신의 정당성을 포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인간들은 모순으로 되돌아 받는 결과를 마주하게 됩니다. 절약하는 것을 선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절약을 하게 되는 소비가 줄고, 소비가 줄면 기업의 생산이 위축되고, 그렇게 되면 기업은 인건비를 줄이기 위해 직원들을 줄이고, 직원들이 퇴사하면서 절약했던 그 절약으로 자신의 가장이 실직자가 되는 모순이 됩니다. 나의 선함이 나의 손실로 돌아오는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인간이 최종 의미로 마감될 수가 없습니다.
의미는 관통되어야 합니다. 인간을 뚫고 관통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 일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이 소개하는 세상의 지혜와 총명은 마태복음 16:2-4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요나의 표적 밖에는 보여줄 표적이 없느니라”
번개를 주관하시는 분은 가나안 땅의 바알도 아니요 헬라의 전능한 신 제우스도 아닙니다.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을 쫓아내시고 그 자리를 대신 채우게 하신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선악 지식에 따라 일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독수리가 먹이를 찾아내어 먹을 때, 먹이감의 악함을 보는 게 아닙니다. 그냥 먹는 겁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구원은 그저 사랑하는 자는 천국에, 미워하시는 자는 일방적으로 지옥에 보내시는 겁니다.(롬 9:13) 이것이 온 우주의 최종 의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나 위주로 사는 모습이 얼마나 십자가를 모독하는 일이지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125강-욥기 38장 34~38절(의미의 관통)220306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8장 34~38절입니다. 구약성경 798페이지입니다.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누가 지혜로 구름을 계수하겠느냐 누가 하늘의 병을 쏟아, 티끌로 진흙을 이루며 흙덩이로 서로 붙게 하겠느냐”
하나님과 더불어서 일하시는 분은 이 세상에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인간치고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아서 하나님 뜻대로 움직이는 인간은 없습니다. 하나님 따로 인간 따로 예수님 오시기 전까지 모든 인간은 그렇게 살았습니다. 물론 구약 때도 하나님의 성령을 미리 받은 사람이 있어요. 선지자. 선지자의 일생이 온전한 일생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일생이 온전하다면 로마서 3장 10절에 나온 말씀인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라는 말씀과 배치가 됩니다. 맞지를 않습니다. 물론 선지자들이 그때마다 관여하셔서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 선지자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뜻에 부합된다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다윗도 하나님의 성신이 임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한 것이 다윗이 잘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시편 52편에서 다윗은 자기의 그 행동에 대해서 선지자가 와서 자기가 지적받게 됩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쪽에 있고 나단 선지자가 맞은 편에 있다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위치를 그 순간만큼은 나단 선지자 앞에 죄인으로 내세우는 겁니다. 다윗 자신도 성신을 받은 것 맞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일하실 때 다른 선지자에게 성신을 줘서 성신 받은 다윗을 지적하도록 조치하신 거예요.
그것은 자체적으로 나는 나로 완전하고 내 행함으로 구원 받는 것이 일체 이 세상에는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을 구약을 통해서 보여줍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죠. 지팡이 가지고 얼마나 하나님의 일을 많이 했습니까. 그러나 모세의 한계는 느보산에서 죽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의 땅을 보기만 했지 들어갈 수가 없었다는 겁니다. 모세가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모세의 약속이 들어가는 거예요. 모세라는 인간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들어가는 겁니다.
모세라는 인간은 그저 말씀이 띄워 올린 풍선같은 것이고 말씀의 주도하에 움직였을 뿐입니다. 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 5절에 보면 “또한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러니까 일꾼으로만 일한 거예요. 어느 회사나 가계에 들어갈 때 ‘여기 주인장 나와’라고 하지 ‘여기 주인장은 빼놓고 사환 나와’라고 말하는 일은 별로 없지요.
손님에게 무슨 문제가 있으면 ‘너랑 이야기 안 해. 주인장 나와’라고 주인을 불러내지요. 모세는 그냥 사환입니다. 그러면 사환 되는 모세가 ‘네가 나를 무시하느냐’라고 할 수 없어요. 오늘날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고 하나님의 사환입니다. 구체적으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환이고 종이 되는 겁니다. 우리 자신의 일을 하라고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그냥 대선투표만 하라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란 말이죠.
우리는 다른 분과 연관성을 갖고 있어야 해요. 나를 최종 의미의 마감으로 해서는 안 되고 나를 중간재로 사용해야 합니다. 나 말고 나를 뛰어넘는 분과 관련성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이걸 아주 어렵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 자연은 해와 달, 별, 들풀, 꽃, 채소 그리고 모든 들에 있는 곤충이나 짐승같은 이 자연물은 자연물 그 자체로써 하나님의 종으로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이 자연에 자기 목적을 부여하고 말았어요. 그 자연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했지만, 자신을 최종 의미자로 여기면서 이제는 나 말고 다른 이는 없다고 하는 거예요. 내가 좋은 것이 진리라고 이렇게 자기로 스톱(Stop)된 겁니다. 기차역 가보면 선로가 지나가는데 어떤 선로는 서울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선로도 있지만 어떤 선로는 가다가 둔덕이 있어서 막아 놨어요. 아마 열차 수선하기 위해서 그렇게 따로 철로를 깔아 놓은 것 같아요.
그처럼 내가 최종 마감재가 되어서 내가 좋으면 이건 하나님의 진리이고 내가 좋으면 좋으신 하나님이라는 건 말도 안 되죠. 우리는 나를 뚫고 지나가서 하나님께 닿는 일관된 하나님의 의미 층이 있어서 그것이 나를 관통하고 지나가는 겁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목적이 되어버렸어요. 그것을 바로 정신이라고 하는 겁니다.
인간의 정신. 옛날부터 사람들은 신을 찾아가기 위해서 이 세상을 둘로 나눴어요. 이 세상은 실체가 있고 정신이 있다는 겁니다.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것, 자꾸 이어지고 이어지고 하는 거, 쭉 늘어나고 늘어나는 연속성을 갖고 있는 것과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그렇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고 또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뭐냐 하면 생각하는 겁니다. 그걸 어려운 말로 사유한다고 합니다. 생각하는 이 정신이 있다는 겁니다.
그럼 인간은 뭐냐 하면 생각하는 것과 눈에 보이고 만져지는 이 근육질을 합쳐서 이걸 인간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그건 맞네. 그건 반박이 안 되네. 그건 우리끼리 진리라고 하면 되겠네’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만약 그런 말을 옳다고 생각한다면 지금 제가 던지는 질문에 속으로 답변을 한 번 해보세요. ‘내가 살기 위해서 할 수 없는 일이란?’ 이 질문. 이 질문 자체가 모순을 갖고 있어요. 내가 살기 위해서 할 수 없는 일이란.
이 질문과 ‘내가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 아닙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 어떤 짓이라도 다 하니 지금 질문은 납득이 돼요. 그렇게 살아가고 있으니까. 그런데 그게 아니고 ‘내가 살기 위해서 할 수 없는 일이란?’ 우리는 내가 살기 위해서 할 수 있는 일만 찾다 보니까 할 수 없는 일은 내 사는 것과 관계없다고 이미 밀어놓은 거예요. 그 밀어놓은 거, 밀어버린 거, 내 쪽에서 치워버린 거, 그건 바로 내 쪽에서 수집되지 않은 정보가 지금 수집된 정보를 진리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하나님께서 욥을 대하는 방식이 그 방식입니다. ‘네가 이런 것을 알고, 이런 것을 아느냐?’라고 하신다는 것은 인간들이 자연을 보면서 필요한 것들만 수집했고 그렇게 모아놓은 그 정보를 가지고 내가 살아있는 것은 정당하게 살아있는 것이다. 왜? 아니까. 아는 자만이 정당하게 살 권한이 있다고 이렇게 나오는 거죠. 그것은 인간을 더 이상 정신이라는 것이 일방적인 자기 목적이기 때문에 정신이라는 것은 주님 앞에 인정을 받지 못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람이 있는데 20~30대 청춘을 돈에 속고 사랑에 울고 하면서 박살 났어요. 그런 사람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너무나 자기가 알던 서울에서의 20년 세월이 너무 한탄스럽고 지긋지긋해서 모든 관계를 아는 친척들 다 끊어버리고 조그만 시골에 가서 중소기업에 들어가서 ‘나는 세상 모르겠고 그냥 나만 살래’라는 식으로 그 사람이 시골에 있는 조그마한 하청 중소기업에 취직했다고 칩시다.
그래서 작업복을 입고 아침 8시에 출근해서 저녁 6시까지 일을 하는데 말이 6시지 돈 더 받으려면 잔업 하고 저녁 7~8시까지 계속 일 하면서 매일같이 산다고 칩시다. 그럴 때 가끔은 과거에 사랑했던 사람들이 생각나지만, 지금은 다 옛날 일이고 현재는 작업복 입고 매일 똑같은 일만 할 때 본인을 과연 사람으로 간주하겠습니까? 기계로 간주하겠습니까?
‘내가 인간이 아니고 기계구나’라고 인간은 기계로써 자신이 기계라서 너무 좋다고 하는 그런 인간은 없어요. 그러면 인간은 뭘 원하느냐. 인간이 원하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원하게 되면 35절처럼 되어버려요. “네가 번개를 보내어 가게 하되 그것으로 네게 우리가 여기 있나이다 하게 하겠느냐” 인간은 모든 관심사와 의미가 나 여기 있음을 누가 좀 주목하고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번듯하게 살아있음을 누가 좀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서울에 있던 자식이 장가가더니만 도대체 촌에 있는 부모에게 소식도 없고 연락도 없어요. 그럴 때 부모에게는 자식이 함께 있는데 늘 마음으로 자식이 함께 있는데 서울로 장가가고 취직한 자식들은 부모가 안중에 없어요. 그저 5년에 한 번씩 와서 ‘보일러 놔드릴까요?’라고 하면서 보일러만 놔주면 다 끝인 줄 압니다. 그럴 때 자식으로부터 연락 왔으면 좋겠다든지 ‘어머니 동네는 산불 안 났습니까?’라는 전화라도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이 들지요.
이 모든 것이 부모가 자식에게 하지 자식이 부모에게 먼저 하는 경우는 우리교회 빼놓고는 없습니다. 좀 부끄러우실지도 모르지만. 전부 다 자기 살 궁리에 바쁘게 되어있지요. 그런데 사람이 외롭고 모든 게 다 망가져 버렸을 때 뭘 찾게 되어있느냐 하면 그때부터 자기 삶의 의미와 목적, 다시 말해서 내가 마냥 이렇게 기계처럼 살 수 없다는 거죠.
어떤 사람 보니까 나이가 78세인데 결혼 정보회사에 결혼하려고 정보 보내는 사람을 봤습니다. 어떤 영화배우인데. 남자는 나이가 71, 여자가 78세니까 연하랑 결혼한 거죠. 그렇게 결혼정보회사에서 만나게 해줬어요. 자기가 78이라고 83세쯤 하는 연상이랑은 할 수 없잖아요. 그러니 사람이 외로울 때 마음 같으면 뭐 사람이 혼자 살다가 죽으면 그만이지 뭘 같이 사느냐고 그러겠지만 막상 혼자 사는 그 모습이 진짜 사는 모습 같으면 괜찮은데 이게 아무 변화 없는 권태롭기 짝이 없는 기계가 되는 거예요.
인간은 열정과 권태 사이에 존재한다고 하거든요. 너무 열나도 문제고 너무 심심해도 문제고, 그때 사람들이 ‘내가 여기 있다’라는 생각을 하는 거죠. 누가 나를 좀 사랑해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한마디로 말해서 자기 사랑의 절정입니다. 인간은 그냥 존재하지 않고, 기계로도 존재하지 않고, 그냥 내 사랑을 그리워하고 누가 나를 사랑해줄지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살아가는 거예요. 직장 다니면서 돈 벌지만, 그 돈 때문에 살아가는 것은 아니에요.
돌아서 눈 감으면 잊을까
정든 님 떠나가면 어이해
발길에 부딪히는 사랑의 추억
두 눈에 맺혀지는 눈물이여
이제와 생각하면 당신은
내 마음 깊은 곳에 찾아와
사랑은 기쁨보다 아픔인 것을 나에게 심어주었죠
사랑했어요 그땐 몰랐지만
이 마음 다 바쳐서 당신을 사랑했어요
이젠 알아요 사랑이 무언지 마음이 아프다는 걸 (김현식, ‘사랑했어요’)
사람이 ‘아프다, 힘들다, 어렵다’라고 하는 것은 뭔가 노리고 있다는 겁니다. 나는 나 혼자 산다고 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아요. 뭔가 아파요. 뭔가 채워주기를 원합니다. 뭔가 빈자리로 놔두고 그 자리에 누가 와서 채워주는데 그게 바로 내가 여기 있음을 알아주는 그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내 곁에 누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이러한 인간의 근본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본문 34절에 보면 “네 소리를 구름에 올려 큰물로 네게 덮이게 하겠느냐” 네가 소나기가 오도록 할 수 있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35절에 번개죠. 번개는 전류를 말합니다. 이 하늘에 있는 전류를 보내서 전류를 만들어서 ‘거봐, 전류가 나에게 치잖아’라고 네가 우길 수 있느냐는 겁니다. 36절에 보면 “가슴 속의 지혜는 누가 준 것이냐 마음 속의 총명은 누가 준 것이냐” 제가 설교 처음에 이야기한 것이 이겁니다. 우리 속에 지혜와 우리 속에 총명은 나를 최종 마감재로, 나의 의미의 종결자로 삼으라고 우리에게 지혜랑 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럼 여기에 대해서 해답이 있어야 하는데 해답은 뭐냐. 예수님이 누구인가 대해서 우리에게 지혜와 총명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 통하는 지혜와 총명이 중간에 악마로 인하여 막혀버렸어요. 인간 쪽에서 찾아갈 때 인간의 지혜와 총명 자체가 한계에 이른 겁니다. 제가 두 가지 예를 들어볼 테니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할지 판정을 내려보세요.
어떤 사람이 내리막길에 차를 몰고 가는데 브레이크가 갑자기 고장 났어요. 차는 멈춰지질 않습니다. 길은 가파른 내리막길입니다. 스톱을 해야 하는데 이게 무슨 난리인지 길 앞에 횡단보도를 걷고 있는 연로한 노부부가 있는데 파란불 신호를 잘 준수하면서 길을 걷고 있어요. ‘아이고, 피해야겠다’ 싶어서 반대쪽을 보는데 무단횡단을 하는 철없는 아이 다섯 명이 그렇게 길을 건너고 있습니다.
차는 둘 중 하나를 박아야 해요. 어느 쪽을 박겠습니까? 법규를 지키는 2명을 죽일 것인가, 법규를 지키지 않은 아이 다섯 명을 죽일 것인가. 딜레마에 빠진 겁니다. 여러분들이 선악 체계까지 동원해서 생각해 보세요. 어차피 죽이는 것은 마찬가지이고. 죽일 때 어느 쪽이 나의 정당성을 더 보장해 줄 것인가 판단해야죠. 인간은 자기가 최종 의미이기 때문에 내가 그래도 양심은 지켰다고 하든지 그래도 이 정도는 착한 구석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쪽으로 인간은 행동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아이 다섯이 날아가 버린 거죠. 자기는 최선을 다했다는 겁니다. Best Do It! 맨날 인간은 입에 달린 비겁한 변명이 최선을 다했다는 말이죠.
단편 소설에 나오는 어떤 부부가 있는데 남편이 아내를 너무 사랑해서 부인 생일에 부인의 고운 금발의 머리를 빗어주려고 자기의 시계를 팔아서 비싼 빗을 하나 샀어요. 남편이 미리 생일 선물로 이거 사준다고 하면 될 건데 뭐 또 나름대로 서프라이즈 하려고 이야기도 안 하고 빗을 샀는데 아내는 남편 시계 줄 사주려고 자기 금발을 홀라당 깎아서 팔아 시계 줄 사줬어요. 나중에 서프라이즈 하려고 서로의 선물을 보여주니까 둘 다 아무짝도 소용없는 그런 선물을 주고받았어요.
여기에 대해서 부부는 너무나 사랑해도 하나님은 인간의 부부 사랑을 돌보아줄 의무는 하나님께 없습니다. 왜냐 하면 최종 마감이 인간의 행복에 있는 것이 아니고 복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일이 실제 일어난다면 우리가 그 부부에 대해 조언할 수 있는 것은 뭐냐 하면 ‘둘이 안 맞으니 헤어져라’라는 이런 결론에 도달하죠. 경제적인 문제도 그래요. 절약하게 되면 소비가 줄어들어서 내가 다니는 회사에서 생산이 증가 되지 못해서 우리 집에서 절약한 것이 내가 회사에서 쫓겨나는 계기가 될 수 있어요. 경제적인 모순이죠.
이게 바로 경제학에서 합성의 오류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변수를 합성해보니까 내가 의도한 취지와 다른 결과들을 낳는 겁니다. 인간 세계는 그저 최선을 다하고 인간은 선택하고 가장 지혜로운 선택을 다 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누구에게 배워야 하느냐 하면 독수리에게 배워야 해요. 인간은 선악으로 따지잖아요. 선악으로 따지지 않는 것이 뭡니까. 독수리잖아요. 어떻게 아느냐. 독수리가 먹이를 잡을 때 그 먹잇감이 악하기 때문에 잡아먹는 것이 아닙니다. 이 지혜를 우리는 독수리에게 배워야 해요. ‘이 악한 놈, 내가 정의의 사자로 너를 응징하겠다’라고 하면서 암탉을 잡아먹고 먹잇감을 먹는 것이 아니에요.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최종 의미가 선악을 아는 나로 마감되기 때문에 어떻게 변명하느냐 하면 ‘너는 나에게 당해야 해. 너는 분명히 나쁜 짓 한 게 있어. 너는 당해도 할 말 없어. 원망하려면 하나님께 원망해’라는 식이에요. 그러나 독수리가 먹이를 먹을 때는 그런 것이 없습니다. 이 말이 뭐냐 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할 때 이유가 없어요. 이유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는데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저 사람을 버릴 때 이유가 없어요. 그냥 사랑해서 구원하고 저 사람은 그냥 미워해서 버리는 겁니다. 마치 독수리가 먹이를 채가듯이. 주님은 자기밖에 몰라요. 자기 하시는 일을 영광스럽게 하기위해서 그냥 피조물 되는 인간을 골라잡을 뿐이에요. 너는 무조건 오고 너는 무조건 가. 이것이 인간들 보기에 얼마나 불합리합니까. 그 불합리로 생긴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따라서 인간들의 신들은 다 우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번개 치는 이야기 나오는데 성경에서는 번개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지만 B.C 600년경에 그리스에서 번개 치는 것은 누가 하는 것이냐면 제우스 신의 주특기예요. 제우스의 번개 치는 그 능력을 보고 그리스인은 전능하신 제우스라고 했어요. 인간은 번개를 못 치는데 번개가 일어나니까 그 원인을 규명해야지 않습니까.
과학적으로 발달 되지 않는 상태에서 그걸 규명해 보는데 규명이 안 되니까 이건 제우스 신이 심술부린 것이다. 그럼 그 제우스 신은 어디서 수입된 것인가. B.C 600년 그 이전에, 대략 1000년 전에 가나안 땅에 바알 종교가 있어요. 그래서 성경은 약속의 땅, 옛날부터 모든 인간의 지혜와 총명이 처음부터 생산되는 그 원천지를 약속의 땅으로 삼고 이스라엘을 거기에 들어가서 살게 하신 거예요. 대조하고 비교하라고.
인간이 자기의 원천, 자연의 원천, 우주의 원천을 과연 인간이 지어낸 지혜와 총명으로 뚫어낼 수 있는지를 확인해 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은 알아요. 그게 여호와 하나님, 주의 이름을 위해서 세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을. 하지만 가나안 땅의 원주민들은 인간의 지혜와 총명의 집결자들은 그리고 욥기에 나오는 이방인은 그걸 몰라요. 왜 번개가 내리는지, 왜 비가 내리는지.
‘그럼 이스라엘은 압니까?’라고 물으신다면 이스라엘은 알아요. 시편 147편 8~9절에 “저가 구름으로 하늘을 덮으시며 땅을 위하여 비를 예비하시며 산에 풀이 자라게 하시며, 들짐승과 우는 까마귀 새끼에게 먹을 것을 주시는 도다”라고 나오고 147편 7절에 “감사함으로 여호와께 노래하며 수금으로 하나님께 찬양할찌어다”라고 나옵니다.
모든 흩어진 인간들의 의미를 다 치우고 그것을 이스라엘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집결시키는데 그 여호와가 신약에 오면 누구냐 하면 바로 주 예수님이에요. 여호와이신 주와 예수님과 드디어 그 실체가 드러난 겁니다. 여호와는 주님, 그 주님은 예수님, 예수님이 바로 여호와였어요. 주의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숨어있는 하나님이시죠. 그러면 예수님은 나타난 하나님이시죠.
전혀 어렵지 않죠. ‘그럼 하나님 믿고 예수님 믿으면 되겠네’라고 하시면 그건 아니죠. 하나님 믿고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믿어야죠. 그냥 하나님을 믿으면 제우스 신이나 그냥 다른 신 믿는 것과 똑같은 거예요. 동양의 신 믿고 서양의 제우스 신 믿고 여호와 믿고 이건 완전히 잡동사니죠. 그 잡동사니 신이 엉터리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불연속성인 끊어짐을 이야기할 때 그건 십자가 자신 예수님이십니다.
이게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도들의 설교였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을 믿을 때 ‘아, 나는 몰랐구나. 내가 엉터리였구나. 나는 모든 의미를 내 행복과 내 존재함에 내 가치로 종결시켰구나’라고 깨닫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복음으로 “의인은 없다니 하나도 없다”라는 말씀이 나에게도 적용이 되어야 하는 구나. ‘나는 의인이 아닙니다. 나는 무식합니다. 나는 나밖에 모릅니다’라는 것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냥 하나님이 아니라 십자가를 앞장세운, 십자가를 지신 이유를 앞장세우신 그 하나님, 그게 바로 욥이 구약에서 약간은 알았더라도 온전히는 몰랐고 신약에 오면 성령 받은 성도는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십자가 지신 나사렛 청년이 바로 나타난 하나님이라는 사실, 이게 바로 지혜이고 총명이고 이게 하나님과 관통된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진리를 알았으니 이제는 더 이상 걱정하지 말고 당당하고 마음껏 외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세상의 지혜에 꿀리지 말고 세상의 과학과 철학에 기죽지 말고 도리어 관통되지 않는 그들의 지혜를 꾸짖을 수 있는 저희들의 십자가 지혜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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