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아이의 세계 / 220213 본문
아이의 세계 220213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오늘은 제목이 ‘아이들을 축복하신 예수님’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그 당시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굉장히 무시를 당했어요. 왜냐하면 어른이 못 됐다는 이유 때문에, 미성숙하죠. 미성숙하다 하는 것은 아직까지 사람 값을 하려면 세월이 많이 남았다는 뜻입니다. 말할 상대가 아니고, 같이 상종할 대상이 아니다. 이 세상에 세상의 모든 일은 이미 성숙된 어른들의 세계예요. 어른들에 의해서 세상은 개발하고 발전하고 모든 것이 활동이 움직여지는 것이지 애들이 기관차 운전하는데 다섯 살짜리가 기관차 운전해 보세요. 운전 되겠습니까? 성가시죠. 좀 더 배우고 오너라, 더 커서 오너라, 이렇게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아이를 무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떤 사회에 보탬이 되는 도움이 되는 일을 하려면 많은 시관 속에 숙련이 돼야 되고 지식과 지혜가 축적이 돼 있어야 줘야 돼요. 철없는 애들한테 나라를 맡길 수 없습니다. 대통령 하는데 19살짜리가 대통령 나오면 이거는 누가 찍어 주겠어요. 안 되죠. 나이 56세 넘어도 찍어줄까 말까 한데 19살 먹은 애가 뭘 알겠어요.
그래서 하나의 어른들이 이렇게 애들을 무시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이 세상이 어른의 세계입니다. 어른의 세계지 아이들의 세계가 아니거든요. 그런데 어른의 세계가 발전하고 발전하고 잘 되는 거, 그래서 그 발달하고 발전해서 그래서 그 방향이 어느 쪽이죠? 지옥이죠. 어른들이 이 세상에서 잘 되게 하고 애들아 어른만 믿어, 아빠만 믿어, 잘 되게 해줄게, 잘 되게 해줄게, 해줄게, 해놓고 그 방향은 어느쪽 방향이냐? 그 벡터가 점점 더 어디로 가느냐? 지옥 쪽으로 방향이 힘과 방향이 합치면 벡터라고 해요. 그 벡터가 힘 방향으로 가는 거예요. 벡터라는 말을 하는 것은 이게 움직이는 걸 표현할 때 그렇게 표현하는 거예요.
뭔가 그 움직임이 힘이 실린 움직임이 방향이 천국이 아니고 지옥 쪽으로 방향을 트는 이유가 애들이 합류돼 있는 그 하나님의 천국의 요소를 어른이 됐다고 해서 그걸 완전히 그걸 짓밟아버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른이 됐다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그만큼 쇠퇴한다, 더 나쁜 쪽으로 가고 있다, 드디어 인간의 본색은 드디어 감출 수가 없구나, 그걸 더 노골적으로 드러내는구나, 그게 어른 세계예요. 사람이 세월을 살면 살수록 죄가 더 짓게 돼 있지 선을 더 행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는 게 아닙니다. 다음에 잘 할게요, 다음에 잘할게요. 이종범이 야구 잘한 거 다 알죠. 근데 이종범이 나이 한 70되어서 야구 해보세요. 야구가 되는 가요? 허재가 농구 잘하죠. 허재가 농구 3점 넣어보라 하니까 3점 빽도 받지도 못하고, 사람이 나이 들면 나이 들수록 뭔가 쇠퇴하고 무너지고 있고 허물어지고 있고 망가지고 있는 거예요.
여기 그러면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면 여러분들이 감 잡을 거예요. 중요한 것은 얼마나 그 사람이 재능이 많으냐, 해낼 수 있는 능력이 대단하냐가 출중하냐가 아니라 어느 방향이십니까, 지금 어디로 가시는 거예요? 이거 401번이에요? 601번이에요? 버스의 노선이 다르듯이 하나님은 노선을 보지 네가 지금 나이가 서른도 안 되었는데 천국으로 와? 이런 거 없습니다. 서른 안 돼도 천국 갈 수 있고요 태어난 지 두 달 돼서 천국 갈 수도 있고요, 주께서 방향이 천국 쪽이라면 주님께서는 그 방향을 귀하게 보시는 겁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11장을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11장 25절 워낙 성경을 안 찾다 보니까 전부다 가만히 듣기만 듣는데 그냥 들으세요. 하던 대로 하세요. ‘그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하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여기 지혜롭고 슬기 있다고 유명한 것을 주님께서 부정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 지혜 있어라 슬기로와라. 노벨상 타라. 하지만 그게 천국 가는 거하고 무슨 관계있는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국가의 발전에 기여해라 좋아, 좋아. 기여해. 하지만 천국은 그쪽이 아니고 어느 쪽이냐 하면 어린아이 쪽이에요.
어린 나이가 이 그림에 나와 있잖아요. 어린 나이의 특징들이 여러 가지 있는데요. 특징들을 나열하라면 어린 나이의 특징은 멀리 보지 못하고 좁게 보고, 자기 멋대로 자기 마음대로고. 자기의 그 갖고 있는 생명력이라고 하는데 약동하는 생명력, 생명력이고 굉장히 단순하지요. 배고프면 밥 달라 하고 아프면 아프다고 이야기하고 점잔 빼는 게 없습니다. 애가 한 2개월 돼서 점잔빼면 그거는 병드는 거예요. 오은영 박사한테 가야 돼요. 심리적으로 뭔가 잘못된 겁니다. 애가 지금 6개월밖에 안 되는데 애가 배고파 젖을 달라 하는데 내가 젖을 달다 하면 엄마 아빠가 맞벌이 하는데 얼마나 마음도 심적으로 하는지 이것까지 계산해버리면 그거는요 그러면 안 돼요. 애는 젖 달라 하면 달라고 해야 돼요. 응애 응애 울면서 젖 달라고 해야 해요. 엄마가 어디 집에 나가도 그런 관계없어요. 무조건 붙들고 젖 달라고 하는 거예요. 왜 그런 믿음이 없냐 이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게 어린애잖아요. 어린애 같으면 어린애는 이게 선일까 이게 악일까 그런 것도 계산하지 않은 게 어린애예요.
어린애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함축하게 되면 이렇습니다. 의존적이다. 기대는 거, 의존하면서 조금도 미안해 할 줄 몰라요. 애한테 엄마가 밥해 주면 애가 그 밥을 그냥 먹으면 되는데, 어머님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감당하고 은혜를 어떻게 보답할고. 엄마 은혜 갚지 마세요. 어머니의 은혜에 보답한 게 아입니다. 보답해버리면 은혜가 다 죽어버려요. 그 가치가. 그냥 얻어먹으라고 자식 되게 해준 거예요. 하나님께서. 부모한테 효도하지 마세요.
월급 타가지고 아빠 엄마 내복 사주지 마세요. 니 내복이나 사 입으세요. 부모한테는 해주는 게 아닙니다. 부모가 돌려받으면 부모가 부모 값을 못하는 거예요. 그걸 가지고 앵벌이라고 하는데 자식을 앵벌이 시키면 안 돼요. 자식은 동업자가 아닙니다. 한쪽은 일방적으로 달라고 해야 되고 한쪽은 일방적으로 주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거예요. 그만큼 그 책임감을 느끼면서.
왜냐하면 애가 그냥 공짜로 얻어먹을 때 부모는 거기서 아이의 원초적인 생명을 발견합니다. 그래 우리도 하나님 앞에 저렇게 얻어먹었잖아. 햇빛과 공기를 무상으로 얻어먹었잖아. 애의 그 어떤 체면 차리지 않는 그 모습을 통해서 원래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친히 키우신다는 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아버지 다움을 어린애를 통해서 발견하는 겁니다. 그게 인간들이 가지고 있는 슬기보다 더 놀라운 슬기라는 것이 인간의 지혜보다 더 놀라운 지혜입니다. 그 지혜의 최종적인 것은 주님께서 모든 자기 백성을 어린애로 취급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무능력자로 취급해버려요. 너는 구원받는 데 천국 가는데 전혀 니가 하는 솜씨와 능력과 지식은 소용없다. 무능력자야. 무능자로 딱 해놓고 그 다음에 유일한 능력자이신 예수님께서 그 다음에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 제자들을 어린아이로 삼으시고 취급하시고 너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해주시고 친히 십자가에 달려서 십자가에 죽습니다. 죽으면서 뭐라고 하냐 하면 내가 적들이 나를 치면 너희들은 다 도망가리라. 그 말씀대로 예수님 딱 치니까 제자들이 나는 살아야지 해서 도망 다 가버렸어요. 도망 다 갔을 때 그래야 된다는 거예요. 주님 따르겠습니다. 다 필요 없어요. 강제로 다 내보내요. 내 빼놓고 예수님 자기 빼놓고 다 내보내요.
그러니까 애가 6개월 되고 또 하나는 애가 두 살인데 아빠 엄마가 사업하다가 뭐 사업 안 될 때 두 살 먹은 애가 “아버님 제가 있지 않습니까? 제가 거지가 되더라도 아버지의 회사 빚은 제가 갚겠습니다.” 이래 나오면요 아버지가 “니 빠져. 가만있어라.” 어린애가 어린애다워야지 어른 이야기에 왜 끼냐 말죠. 우리의 구원은요 예수님과 아버지 간의 문제예요. 우리가 낄 자리가 아닙니다. 낄낄빠빠라 하잖아요.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지라고. 우리의 구원은 주님의 소관입니다. 주님께서 모든 근거를 마련하지 우리가 내 착한 일을 해서 좀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착한 일 하지 마. 그냥 빠져 있어.
하나님의 의로 구원받은 것이지 내 의로 구원받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그냥 철딱서니 없는 어린애예요. 주님 앞에 주는 걸로 그냥 놀면 되는 거예요. 십자가 지시고 그 다음에 주께서 제자들에게 친히 찾아와서 잘 있었느냐 안부 전하시고 내가 너희를 사랑하리니 그 사랑으로 너도 남한테 전하라. 요한복음 21장에 그렇게 당부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주께 받은 사랑 십자가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전달하면 그게 바로 천국백성다운 참된 모습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아무것도 할 게 없음을 도리어 감사하게 하시고 기뻐하게 해주시고 내 구원 받는데 내가 아무 기여한 것이 없음을 도리어 찬양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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