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욥기 35:1-8 / 모순 본문
모순
이근호
2021년 12월 12일
본문 말씀: 욥기 35:1-8
(35:1)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35:2)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35:3)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35:4)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35:5) 너는 하늘을 우러러 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35:6) 네가 범죄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35:7)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35:8)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욥은 자신의 선이 전혀 자기에게 이익으로 돌아오지 않음에 대해서 불만을 갖고 있다고 엘리후가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엘리후는 자기 의견에 입각한 정답을 내어놓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하는 그 어떤 일도 하나님과 무관하다는 겁니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욥과 욥의 친구들 사이에는 누구는 어쩔 수 없이 악인이 되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욥과 욥의 친구들의 공통점은 그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한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그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점 때문에 이 상황에서 모순이 발생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욥에게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아니하였으면 모순이라는 것을 발생하지 않습니다.
욥이나 친구 모두는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하나님이 선하다고 믿는 자신들도 악할 리가 없다는 점에 모두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즉 선한 하나님께서 선하게 작용하셔서 우리 같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선하시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된 것을 선한 하나님에게 감사하게 되고, 이 감사를 올리는 자신들도 선한 자들이 된다는 논리입니다.
욥에게 난데없이 고통이 오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다소 엉뚱하게 보이지만 친구들 가운데서 가장 선한 욥에게 고통을 줘버리니 여기서 분쟁이 발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하다시는 점을 유지해야 하고, 그런 선한 하나님께서 매사가 선하게 작용하신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 인정하는 자들도 선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욥도 그런 하나님을 선하다고 인정해 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친구들 입장에서는 자기네들이 여전히 선하기 위해서는 고통을 당하는 욥은 선하지 말아야 하는 겁니다. 선하지 말아야 하는 욥이 계속 본인은 선하다고 우기니 욥의 친구들은 욥에게 화를 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욥에게 화를 내는 욥의 앞선 세 친구도 엘리후가 보기에 동일한 잘못으로 여겨집니다. 즉 선한 하나님이 믿는 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인해 무조건 선해야 한다고 우기는 점에서 욥이나 욥의 세 친구나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엘레후의 주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인간들의 세계에서 그 어떤 일이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을 통해 인간은 자신의 선함을 증명하는 근거로 삼아서는 아니된다는 겁니다. 이점이 신약에 오면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세계에 모순으로 나타난다’입니다. 하나님께서 모순되게 오시는 이유는, 이미 인간들이 잘못된 주장에 억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는 선악과 과실을 따먹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모든 것이 다 뒤죽박죽이 되었습니다. 예레미야 17:9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고 되어 있습니다. ‘누가 능히 알리요’라는 말씀이 들어있는 것을 보아 인간의 능력으로 어느 인간도 자기 마음에 잘못되어 있음을 받아드릴 자가 없다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어떻게든 선한 하나님을 선한 분으로 자신의 마음의 역량을 총동원해서 변증하려고 시도합니다. 신약에 오면, 인간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삐뚤어진 마음이 티를 내는 계기가 된다는 겁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롬 1:21-22)
인간의 마음이 왜곡되는 것을 말릴 그런 조절의 능력은 인간의 마음 안에는 없습니다. 결사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엄하고 경우 있고 참되고 모든 것을 판정내릴 권한이 있음을 변호하려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변호하려는 의도가 나쁜 짓으로 하나님에게 발각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님을 알리려는 겁니다.
누가복음 19장 13절에서 27절까지에 나오는 내용은 열 명의 종에게 열 므나를 맡기시고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기 위해 자신은 멀리 갔다오시는 이야기입니다. 첫째 종은 한 므나를 가지고 열 므나를 남겼다고 보고하자 왕이 되신 분은 그 종에서 10 고을 제공합니다. 둘째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다고 하자 왕이 되신 분은 5 고을을 그 종에게 줍니다.
이와 같은 논조는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지니게 되는데 그 관점의 차이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어떤 평가를 내리는지를 소개하십니다. 세 번째 종은 왕이 되신 그분에게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눅 19:20-21)
즉 세 번째 종은 왕의 왕됨을 본인으로서는 충분히 인정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 세 번째 종은 본인이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전혀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엄하고 무서운 하나님, 그리고 없는데서 있게 하시는 왕임을 인정한다할지라도 바로 이러한 하나님상이 이점을 인정한 자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그 세 번째 종은 몰랐습니다.
이것이 모순입니다. 모순이란 동일한 고백을 했다할지라도 그 고백을 듣는 당사자의 결정은 그 고백에 의해 전혀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겁니다. 도리어 왕은 이런 고백을 하는 것 자체를 문제 삼습니다. 왜냐하면 고백하는 자는 그 고백으로 인하여 자기 정당성을 부정할 근거를 갖추지 않고 있다고 판정내리시기 때문입니다.
즉 세 번째 종은, 종 자신 자체가 왕의 소유인 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자신의 소유를 왕의 것으로 인정하게 되면 종 자신 자체는 아무 탈이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겁니다. 주님은 인간 자체가 달라지기를 원하신 겁니다. 그 세 번째 종은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는 조치의 대상이 됩니다.
즉 자신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이 있는 자는 더 받겠고, 자기 자신 자체가 주님의 것이라는 생각이 없는 자는 있는 것까지도 주님의 것으로 귀속됩니다. 이와 비숫한 경우가 누가복음 10:30부터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입니다. 사마리아인은 결코 선한 자도 아니요 자비를 베푼 자도 아닙니다.
그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자비롭다, 선하다는 평가는 어디까지나 주님의 몫이지 그 사마리아인이 본인에게 붙이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모순은 인간의 자기 판단을 끝까지 옳을 수 있다고 우기는데서 비롯됩니다. 인간들 자체가 모순되니 주님께서도 ‘죽는 하나님’이라는 모순된 모습으로 나타나신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모든 것이 주님의 일에 얽혀있음을 인정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
녹취:송민선
113강-욥기 35장 1~8절(모순)211212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5장 1~8절입니다. 구약성경 793페이지입니다.
“엘리후가 말을 이어 가로되 네가 이것을 합리하게 여기느냐 네 생각에 네가 하나님보다 의롭다 하여, 이르기를 유익이 무엇인고 범죄한 것보다 내게 이익이 무엇인고 하는구나, 내가 너와 및 너와 함께 있는 네 동무들에게 대답하리라, 너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 네가 의로운들 하나님께 무엇을 드리겠으며 그가 네 손에서 무엇을 받으시겠느냐,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
엘리후가 답을 할 때 자꾸 물음을 당하는 식으로 말을 던지는 이유는 그동안 욥과 욥의 친구들이 많은 말을 주고받았잖아요. 그것을 일거에 싹쓰리해서 밀어붙이는 거예요. 그것은 우리가 의논해서 우리의 의논 가운데 어떤 새삼스러운 결론을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결론은 이미 났다는 겁니다. 결론이 이미 난 이상은 여러 가지 질문이나 답변같은 것이 이게 시간 낭비이고 정력 낭비이고 소용없는 겁니다.
엘리후가 내는 결론이 뭐냐 하면 인간이 하는 어떤 일에 대해서 하나님은 상관없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철저하게 자기 죄를 고백했습니다. 자기의 진솔함으로 자기 죄를 회개했다면 이 자체가 자기의 진솔함과 솔직함으로부터 회개했으니까 어떤 미덕을 끄집어내는 거예요. ‘나는 이런이런 점이 잘못되었습니다. 솔직하게 인정합니다’라고 끄집어냈을 때 솔직하게 자기 죄를 회개하는 것은 미덕(아름다운 덕)이 되고 이 미덕은 처음부터 그 사람 속에 있었다는 것이 티가 난 거예요.
그렇다면 나는 잘못되었다는 것이 성립이 안 됩니다. ‘나는 잘못되었다’라고 말하는 순간 잘못되었다는 그것이 자기 미덕을 뽑아내는 하나의 구성 재료가 되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진정 잘못된 것이 아니고 ‘나는 이처럼 아름다운 사람이다’라는 것을 자랑질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사람이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엘리후가 볼 때 어떤 말을 끄집어내도 나 잘났다는 내 자랑밖에 안 된다는 것이 엘리후의 결론입니다. 얼마나 예리합니까?
엘리후가 보기에 욥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여기 오늘 엘리후가 인용한 대로 내가 착한 일 한 것이 하나님께 어떤 이익이 되는지 그걸 모르겠다는 거예요. 더 나아가서 내가 착하다는 것이 하나님에게 분명히 이익이 된다면 그 이익이 착한 나에게도 분명히 이익이 떨어져야 하는데 나는 분명히 나의 착한 일이 하나님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왜 이익이 없느냐는 겁니다. 욥이 이야기하는 거예요.
바르게 살면 인생이 힘들지 않아야 하는데 왜 바르게 사는데, 힘이 드느냐는 욥의 이야기를 엘리후가 나름대로 ‘가만있어 봐. 내가 정리해 줄게. 욥 네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네가 이익을 얻기 위해서 착한 일 했다는 본색을 노출된 것밖에 더 되겠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익이 없는데도 굳이 내가 착한 일 할 필요가 있냐는 너의 의로움마저 너의 이익 거리로 삼는구나, 욥아’라고 엘리후가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모든 이야기가 지금 여러분들이 욥기 여기까지 따라오신다고 고생 많이 하셨거든요. 그런데 이 모든 이야기가 하나로 결론이 안 나는 이유가 사람들이 ‘하나님 있다’라는 이것 때문이에요. 사람들이 네가 있고 내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도 있다고 시작을 해버리니까 너 좋고 나 좋고 하나님마저 좋고 세 영역이 다 좋게 가려고 하니까 이게 아귀가 안 맞아요. 아귀가.
그런데 욥이 고난 오기 전까지는 아귀가 맞았어요. 내가 잘 먹고 잘사는 것은 그만큼 착한 일을 많이 했기 때문에. 그리고 거기에 준해서 나는 인정해, 너 착한 거 인정해, 그러니까 너 복 받는 거 인정해, 욥 네가 착하고 복 받는 것이 부러운 것이 아니고 나는 너에게 복을 준 하나님이 계심에 대해서 흐뭇해. 이렇게 전부 다 의견에 아무런 충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최고로 착하고 착한 욥에게 지독한 고통을 줘버리니까 그다음부터는 나, 너, 하나님 사이에 아귀가 안 맞기 시작한 거예요. 이것이 다 조각조각 나버린 겁니다. 첫째, 하나님은 나쁜 일 한 적 없다. 두 번째, 그 착한 하나님을 믿는 나는 하나님은 선하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나쁘지 않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욥만 남아요. 그러니까 욥을 윽박지르는 거예요.
이 애꿎은 시련을 누가 당했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그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에게 당한 거예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에 정치와 사상을 통치하고 주도하는 파가 두 파가 있었습니다. 그게 사두개인과 바리새인이에요. 바리새인은 예수님 오시기 전에 140년 전에 마카비 혁명이라고 해서 헬라 이방민족이 예루살렘을 통치했을 때 강력하게 저항해서 목숨 바쳐 다시 예루살렘을 탈환해서 거기서 하나님의 율법대로, 문자 그대로 지키고자 서약한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국수 보수주의자, 쇄국 정치한 사람들입니다. 철저하게 율법대로 산 사람들이 바리새인들이에요.
그런데 사두개인은 뭐 하는 사람들이냐면 권력을 탐하는 사람이에요. 성전을 보호하려면 외세에 대해서 적당하게 권력적 타협을 해야 한다. 줄 거 주고 받을 거 받아들여야 이 성전 제사라도 남아있을 것이 아니냐는 것이 사두개파들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천사 안 믿고요, 부활도 안 믿고, 현재 눈에 보이는 이 성전 제사, 이 역사적 사실과 메시아가 접촉될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사두개인은 사독이라는 다윗 당시 제사장인데 이 사독 계열의 핏줄을 잇는다고 해서 사두개파예요.
그러면 그 뒤에 로마가 와서 예루살렘을 지배할 때 여기서 각자 자기 성향들이 노출되었어요. 바리새파는 절대로 헬라적이고 이런 신문물을 받아들이면 안 된다고 버티면서 폼페이우스 로마 황제에 반대해서 바리새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체포되어서 2000명이 십자가에 달려 죽었습니다. 로마는 정치범에 대해 가혹하게 처리하거든요. 시범 조로 보이는 거예요. 까불면 이렇게 맞는다고. 바리새인들이 이러다 죽었고 본디오빌라도가 성전에서 성전 돈을 가져가니까 그거 반대하다가 또 죽었지요. 아킬라오라는 분봉왕에게 제사 폐지하면 안 된다고 까불다가 또 죽었지요. 그러니까 바리새인 입장에서는 그 당시에 유대 민중들에게는 아주 존경을 받는 파예요. 사두개인은 권력이 우선이니까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받아드릴 것은 받으면서 그저 성전 제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고요.
누가 봐도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너무나 철저하게 잘 지키기 때문에 존경에 마지않고 하나님의 적이라고 간주 되는 그 이방 민족에 대해서는 같이 대들고 예수님 오시기 전에 200년 전부터 치열하게 전투했던 그러한 순교자들 반열에 속한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성경에 하나님은 너 자체가 세속이라는 겁니다. 바리새인 너희들이 세속이라는 겁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보면 내내 그런 거예요. 문제는 너희들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문제가 된다는 겁니다. 차라리 이방 민족이 낫다는 겁니다. 성령 세례받은 이방 민족이 완전히 너희들보다 더 도사예요. 하나님을 제대로 알고 있는 거예요. 이방 민족이 성령을 받으니까 이방 민족이 하는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인간이 시도하는 어떤 것도 하나님과 아무 상관 없었다는 것이 백일하에 드러났어요.
인간이 하는 어떤 종교적인 것도 하나님은 안 받으신다. 끝! 뭐 문제 있어요? 뭐 문제 있습니까? 네가 범사에 종교성이 많구나. 이 종교성이 문제예요. 종교성이. 인간이 신을 믿고 안다는 것이 문제인 거예요. 신을 믿지 않는 종교는 없습니다. 다 신을 믿어요. 다시 말씀드리자면 이렇습니다. 나 있고, 너 있고, 하나님 있고. 하나님 선하신 거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나 선한 거 알고. 그러면 너만 문제네?
하나님이 선하다고 할 때 이게 정답일까요? 그게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다 공통으로 다 인정하거든요. 하나님은 선하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오신다. 그건 하나님을 존재로 인정하게 되면 누구나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틀렸고 엉터리예요. 이걸 인간의 힘으로 무슨 수로 알겠어요? 알 재주가 없습니다. 그게 뭐가 문제냐 하면 하나님의 일은 인간들 보기에 모순되게 일한다는 사실을 그들은 상상을 못 한 겁니다.
그들은 인간이 납득되게 일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납득되게. 본인이 선악과를 따먹었으면 인간은 선악에 의해서 하나님께서는 선한 분이라고 하면 하나님이 되게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여기는데 오히려 정답은 그 반대였습니다. 인간들의 선한 것은 그건 선함이 아니라고 주께서 마지막에 찾아오시거든요. 예레미야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예레미야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여기 ‘알리요’라고 나옵니다. 내 마음이 처음부터 썩었기 때문에 썩은 마음 가지고 하나님 거론하고 예수님 거론하고 십자가 거론하는 자체가 더럽고 부패한 것이라는 걸, 어느 누가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알 사람이 누가 있느냐는 겁니다. 누가 알리요.
알 사람이 없지요. 인간은 자기에게서 못 벗어나니까. 하나님은 모순되게 왔기 때문에 인간들이 아무리 모순되게 오실 분이 아니라고 억지를 부리는데 실상은 모순되게 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인간은 이유도 모르는 채 심판당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미국 워싱턴주에서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400명이 은퇴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왜냐 하면 코로나 때문에 돌아다니면 일단은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했던 사람이 지금 코로나로 많이 죽었고요, 많은 사람이 지금 은퇴를 고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아이들은 그 이유를 몰라요. 왜 올해는 선물이 안 오는 지. 마지막에 오시는 하나님은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모든 사람을 같이 죽자는 물귀신 작전으로 임하는 하나님이에요. 모든 인간은 내가 ‘하나님은 선합니다’라고 하는 그 말, ‘그 입 다물라’가 되는 거예요.
그렇게 하나님 선하다고 하지 말고 나는 죽었다고 이야기하란 말이죠. 왜? 하나님이 죽었으니까. 제가 언젠가 이야기했죠. 제작자가 죽어버렸는데 제작자가 만든 제품도 같이 죽어있는 거예요. 창조주가 죽어버렸는데 창조된 우리도 마땅히 죽은 존재잖아요. 이 논리가 뭐 어려운 논리예요. 질문해야 해요. 왜 죽어야 하는데 아직 살아있습니까. 이렇게 질문을 반대로 해줘야 해요. 복음은 그렇게 전파되는 겁니다.
바로 그 이야기가 엘리후는 운만 띄워놓았는데, 인간은 아니라고, 어떤 일도 하나님과 상관없다고 하는데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 예를 들었지만 “너는 하늘을 우러러보라 네 위의 높은 궁창을 바라보라, 네가 범죄 한들 하나님께 무슨 영향이 있겠으며 네 죄악이 관영한들 하나님께 무슨 관계가 있겠으며”라고 나와 있고 특히 8절에 보면 아주 뛰어난 사고를 하고 있어요.
“네 악은 너와 같은 사람이나 해할 따름이요 네 의는 인생이나 유익하게 할 뿐이니라”라는 이 말씀을 제가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나쁜 짓 한다고 햇빛이 달라집니까, 아니죠? 그러면 제가 과학 하는 사람에게 묻고 싶어요. 당신이 지금 연구하는 것과 달과 무슨 관계 있습니까? 당신이 해가 떠 있다고 말하는 것과 당신이 출생하는 것과 무슨 관계가 있어요? 관계없잖아요. 아무 관계 없어요. 인간이 하는 것은 정작 해의 존재 달의 존재와 아무 관계 없는 거예요.
그러면 그 과학자가 약이 올라서 해와 달과 관계있는 사람이 누가 있나? 이렇게 물을 거예요.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예수님이에요. 예수님 십자가 달리실 때 해가 빛을 잃었어요. 예수님께서 풍랑을 잠잠하게 했습니다. 이 세상은 이 세상 모든 피조물과 유일하게 총괄적으로 관계하시는 분이 누구냐 하면 예수님밖에 없고요, 놀랍게도 우리 성도가 예수님과 관계있는 사람이 된 거예요.
성도가 뭐냐 하면 성도란 매일같이 주님과의 관계성을 토로하는 내놓는 사람이 성도입니다. 홀로, 혼자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쉽게 말해서 내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 주님의 허락 없이는 안 일어나는 일이에요. 내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 제가 지금 볼펜 두 번 돌렸지요? 이거 주님 아니면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에요. 주님이 내 손모가지 부수어버리면 이거 못합니다.
내가 언제 죽는다, 죽는다, 이런 말 하지 마세요. 주님이 허락하시면 오늘이라도 죽습니다. 너무 초조해하지 마세요. 오늘 죽입니다. 곧 갑니다. 곧 가니까 너무 지루하다고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뭐 제가 보내드리는 것은 아니지만. 발걸음 하나하나를 세고 머리카락도 세시거든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카락 우두둑 빠져있다고요. 주께서 다 뽑아내신 겁니다. 세상에 어느 것 하나 주님의 허락 없이 된 일이 없습니다.
이건 병원에 입원해보면 알아요. 그렇게 타박타박 잘 걷던 걸음이 다리 관절 나가서 아파 집에 있으면요 ‘나는 왜 못 걷느냐’라고 대번에 나와요. 그동안 걸은 것도 주의 은혜인 줄 아시기 바랍니다. 왜 못 걷냐 하지 말고. 죽으면 그것도 못 걸어요. 죽으면 걸을 수도 없잖아요. 병원 입원도 안 되죠. 죽었는데. 내가 움직이는 하나하나가 기적입니다. 주님의 사랑이고요. 이게 놀라운 것은 내 착한 일과 상관없다는 사실. 예수 믿는 것과 상관없다는 사실.
주께서 일방적으로 다가와 버려요. 방금 한 이 이야기가 누가복음 19장에 비유로 나와 있어요. 열 므나 비유인데요. 19장 11절부터 시작해서 27절까지 이어져요. 너무 길죠? 길 때는 제가 줄이죠. 열 므나 이야기인데 한 므나가 10데나리온입니다. 요새로 하면 남자 성인 일당 요새 10만 원 주기 때문에 한 므나는 100만 원쯤 보면 됩니다. 어떤 왕이 자기 종들을 불러 가지고 열 명의 종에게 전부 다 한 므나씩, 그러니까 100만 원씩 다 준겁니다. 어떻게 장사하는지 보려고 다 줬어요.
16~17절에 보니까 “그 첫째가 나아와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임금이 그만한 권세가 있으니까 능력 있으니까 줍니다. 18절에 보니 “그 둘째가 와서 가로되 주여 주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라고 하니 ‘너도 잘했다. 다섯 고을 줘라’라고 나오는데
주님이 이 비유를 만드시는 것은 어느 대목에서 인간들은 자신이 모순된다는 사실을 까먹어버리고 ‘이거 괜찮네. 내가 열심히 충성하면 내가 이거 얻겠네’라는 자기 생각, 내가 노력한 대로 뭔가 얻을 수 있다는 모순되지 않는, 주의 일에 내가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거짓된 사고방식이 어느 타이밍에서 이게 들어가는가를 하나의 덫처럼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면 21절에 나옵니다. 20절부터 보겠습니다.
“또 한 사람이 와서 가로되 주여 보소서 주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여기 보면 왕이 엄한 사람이라는 것을 본인이 알고 있어요. 계속 보면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 당신의 전지전능함을 믿는다는 거죠. 그런데 22~24절의 평가가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판단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을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은을 은행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변리까지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러니까 한 므나 갖고있는 악한 종이라는 평가를 받은 그 사람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왕의 입장, 주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이익이 될까 손해가 될까, 무엇이 나에게 모순되지 않는 왕일까를 생각하면서 뭔가를 받은 거예요. 므나라고 할 수도 있고 우리는 우리 몸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어요. 우리의 이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거든요. 주의 것을 받았을 때 우리는 이것으로 어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쪽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손해가 되지 않는. 그러면서도 뭐라고 생각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판단하시고 심판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엄하게 심판하신다.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자기는 그냥 도로 드리면 되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한 겁니다. 자체적으로 어떤 모순이 없죠. 왜냐 하면 충분하게 하나님의 권위를 높여 주었으니까 자기에게는 모순이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이 사람이 다른 사람과 차이점은 다른 사람은 주님의 지시가 담겨있는 몸으로 므나로 생각한 거예요.
이 몸 자체가 나의 정당성을 보여준 것이 아니고 내 몸을 주신 주님의 정당함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몸을 보여줬다는 생각을 칭찬받는 종들은 했는데 이 사람은 끝까지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했느냐 하면 빼앗아 가버려요. 이 므나는, 이 돈은, 이 몸은 네가 가지고 있을 자격이 없다고 빼앗아 가버려요.
그리고 26절에 “주인이 가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이게 바로 모순된 거예요. 다시 말씀드릴까요?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주님이 주님의 것으로 있다고 하는 자는 더 받겠고 이건 주께서 주었기 때문에 나의 것이라고 여기는 자는 그 ‘나의 것’이라는 것을 주께서 인정하지 않으시니 없는 것이 되고 그 없는 것조차도 나중에 빼앗겨버리는 거예요.
말하는 내가 더 어렵다. 말씀드리는 제가 더 어려운 거 같아요. 주의 일과 나와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에 우리가 존재하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여기서 엔진이 가동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힘이 이 안에서 가동되는 거예요. 따라서 여기서 나는 이런 일을 했다든지 이게 이익이라는 생각을 아예 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그게 아침에 이야기한 사적 공간과 공적 공간의 차이점이에요.
마지막으로 한가지 예를 더 들고 마치겠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게 되면 유명한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나와요. 어떤 사람이 강도 만나서 옷을 빼앗기고 얻어맞아서 그냥 죽어갑니다. 수요일 날 설교에 의하면 이건 연극 무대예요. 하나의 그림 안에 다 들어있어요. 연극무대에서 사람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면 강도 만난 역할을 한 겁니다. 연극 무대에서. 역할은 역할이지만 좀 아프고 서럽겠지요.
난데없는 교통사고 같은 그런 거예요. 강도 만난 역할을 한 거예요. 음주운전 차에 받힌 교통사고 난 역할을 한 겁니다. 여러분도 다 해봤잖아요. 주차위반이나 과속 역할. 이렇게 누워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누가 가느냐 하면 레위인 그냥 지나가고, 제사장 그냥 지나가고, 세 번째 어떤 사마리아인이 여행하는 중에 그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겨서 기름과 포도주 부어서 임시처방해놓고 그다음에 요새 같으면 병원에 입원시켜서 비용은 자신의 카드로 긁어서 지불한 거예요.
이렇게 오지랖 떠는 역할을 한 겁니다. 이 이야기를 하시면서 주님이 묻습니다. 무대에 세 명 세워놓고 ‘누가 자비를 베풀었느냐’라고 하신 거예요. 지금 사마리아인은 자비를 베푼 적이 없어요. 왜냐 하면 자비를 베풀려면 처음 이야기한 것처럼 내가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 사마리아인은 그냥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지 내가 선하고 자비고 그건 주님 소관이지, 하나님이 하실 문제지 내가 거기에 그런 개념을 집어넣을 이유가 없는 거예요. 그 이야기 하시는 거예요. 주님께서 지금 이 이야기를 통해서.
그런데 지나가는 사람은 계산하는 겁니다. 저 사람 도와주면 내 돈 나갈 거고 나는 지금 바쁜데 그냥 가겠다. 그러니까 제사장이나 레위인들은 뭘 생각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을 생각하는 거예요. ‘전능하신 하나님이여, 선하신 하나님이여, 엄하신 하나님이여, 제가 저 사람을 도와줘야 마땅하지만 지금 제사 드리는 시간이고 예배드리는데 바빠서 그냥 가야 할 것 같습니다. 봐주시겠죠?’라는 이런 통밥 굴리는 이 자체가 바로 자기 생각하기 때문에 이건 자비를 논할 가치도 없어요. 그런 인간에게는 주께서 가차없이 심판하러 우리 예수님이 오신 겁니다.
인간 자체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모순되어요. 모순되어야죠. 왜?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요. 따먹지 말라는 것을 따먹었으니 이거는 문제 있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문제 있음을 주님 쪽에서 문제 있음을 가져와요. 문제 있는 쪽이기 때문에 주님 쪽에서도 문제 있어서 주님의 문제 있음의 모순이 인간의 모순을 극복하고 나서 나중에 보니까 주님이 모순으로 오신 이유가 우리 쪽에 모순이 있기 때문에, 잘못되었기 때문에, 해결 안 되기 때문에 문제 있는 모순으로 오셨구나. 그게 바로 주님의 해결점이구나. 그게 바로 십자가라는 모순입니다.
그냥 이방 민족에게 ‘피 흘림을 믿어라. 그러면 용서한다’라는 것이 얼마나 인간의 모든 철학과 과학과 지혜를 묵사발 내는 엄청난 지혜죠. 제가 하는 말은 그냥 사세요. 그냥 막사세요. 막삽시다. 그게 주님 보시기에 착하고 충성 된 종이라고 칭찬을 받을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떤 이익을 노리고 미래에 괜찮은 보상을 노리고 은근히 주의 일을 계산하는 저희들의 본성, 이 자체가 참 문제라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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