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누가복음 7:22 / 납작한 존재 / 210928 본문
녹취:홍민희
강남-누가복음 7장 22절 (납작한 존재) 210928a-이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누가복음 7장 18절부터 하겠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이 이 모든 일을 그에게 알리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그들이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세례 요한이 우리를 보내어 당신께 여쭈어 보라고 하기를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더이다 하니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시며 또 많은 맹인을 보게 하신지라”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알리되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
방금 읽었던 18절부터 23절까지 내용을 한 문장으로 한번 크게 한번 쓰겠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을 주신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되 말씀을 전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주신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주께서 말씀을 이렇게 주게 되면 내가 말씀 전하는 자로 자격이나 된 냥 그렇게 오해를 해요. 말씀을 주시는 분도 가치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나도 얼추 가치 있는 사람이라고 아마 하나님께서 그렇게 생각한다는 거에요. 이게 엄청난 오산이고 오해입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주시되 네가 말씀 전하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말씀은 누가 전하느냐? 예수님 한분으로 됐습니다. 끝났어요. 충족되었어요. 말씀 전하는 자는 주님이라는 것을 증거하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내가 말씀 전하는 게 아닙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우리에게 주는 것은 나는 말씀 전하는 자로 자격이 미달이고 탈락이라는 것을 알려주면서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내가 더 살아서 말씀을 전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이 말이죠. 나는 주님의 동업자가 아니에요. 동업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이거는 말씀뿐만 아니고 우리가 인생을 이 땅에 살아가는 이유도 성도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더 살지 말라고 하나님께서 살려주시는 거에요. 성령 안 받으면 이 말을 알아듣겠습니까? 세례 요한이 예수님에게 제자들을 보내서 자기 쪽에서 점검을 해보는 것을 용납하라고 해주는 거에요. 주님께서는 나 너하고 말 안 해. 너하고 말 안 해.
만약에 세례 요한이 이미 주님한테 요청했잖아요. 요청을 한 것에 대해 예수님이 답변을 해버리면 세례 요한의 요청 자체가 하나님 보시기에 뭔가 값어치가 있는 것처럼 오해될 여지가 있어요. 내가 질문하니까 답변하더라. 아 주님은 나를 인정해주는구나. 이렇게 되는 거에요.
그래서 23절에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은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은 당연히 복 있는 자로 그 모든 오해를 주님께서는 철폐해버리고요. 너는 복 받을 자격이 너한테 있다는 생각부터가 주님께서 찢어버리는 거에요. 그걸 인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복이라고 하는 것은 나로 인하여 실족하지 아니하는 것. 이 말은 내가 하는 모든 것은 네가 기대한 것과 전혀 맞지 않을 것이다. 그런 뜻이에요.
더 알기 쉽게 말해서요. 주님께서는 나의 구원을 방해하면서 나를 구원해요. 우리 자신을 구원합니다. 사람들이 성령이 주는 기쁨이란 뭐냐 하면은 내 뜻대로 안 오게 하시는 기쁨, 여러분 아십니까? 내 뜻대로 안 되게 해주는 기쁨. 이것은 성령 받은 사람만 느끼는 기쁨이에요.
분명히 양재역에서 18번 마을버스가 올 때가 됐는데 안 오는 거에요. 예를 들면. 안 오는데 가만 보니까 8자 말고 다른 숫자도 간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에 이것은 일단은 주님께서 내 뜻을 물리치잖아요. “네 뜻은 무엇이냐?” “8자 달린 마을버스 오는 것입니다.” “그래?! 그럼 절대 네 뜻대로 안 해줄게.”
주님께서 일하신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 뜻을 거부하는데서 주님의 살아있음을 비로소 우리는 체험할 수 있는 거에요. 주님이 진짜 계신가 안계신가는 나를 그 맥주 빈 칸 밟을 때 와자작 하고 밟아 버릴 때 그 때,‘ 주여 진정 살아계신 것 맞군요’ 그 때 그 기쁨은요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요. 헤아릴 수가 없어요. 그 때 그 기쁨은 돈으로 살수가 없어요. 이처럼 살아 있는걸 바보처럼 그걸 몰랐을까. 이처럼 살아계신 계신데.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 자신을 이렇게 항상 밟아버립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인간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아시기 때문에. 그래서 18절부터 20절까지 세례 요한 쪽에서 하는 말이 당신이 오시는 메시아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우리가 점검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 이렇게 할 때에 주님께서 22절에 “네가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가서 전해라”
해서 가서 보고 들은 것이 뭐냐 하면은 21절에 마침 그 때에 예수께서 질병과 고통과 및 악귀 들린 자를 많이 고치셨거든요. 그 때에. 이렇게 결제 서류 올리듯이 세례 요한한테 갖다 바치는 게 아니고 너희들이 와서 보아라. 봤는데 둘이 와서 봤잖아요. 본 것을 22절에 요한에게 이야기합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먹은 사람이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이렇게 돼있거든요.
소경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은 ‘봄’이에요. 뒤에 나오는 봄이에요. 소경은 못 봄이거든요. 뒤에 봄이 나오거든요. 앉은뱅이의 뜻은 ‘못 걸음’이거든요. 그런데 앉은뱅이가 걷는 겁니다. 소경은 그 스스로가 뭐냐 하면은 이렇게 돼요. 못 보는 사람이에요. 못 보는 사람과 소경은 이퀄(=) 같이 됩니다. 못 보는 사람을 소경이라고 해요.
만약에 여기다가 보는 사람을 소경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이퀄이 안 됩니다. 등식이 성립이 안되는 거에요. 세례 요한이 말하는 메시아, 내가 아는 메시아가 세례 요한은 등식이 이퀄이 되기를 원해요. 주님께서는 이퀄을 주님 쪽에서 거부해버리는 겁니다.
주님 쪽에서 거부하게 되면 세례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그 순간부터 메시아와 한패가 되는 겁니다. 메시아 편에 선 사람이 돼요. 소경이 못 본다는 것이 인간들의 당연한 진리거든요. 인간의 진리는 못 보는 것을 소경이라고 했단 말이죠.
세례 요한은 소경은 못 보는 것이 당연하지 라고 했던 속에 여기 세례 요한 있었다면 주님께서 이 세례 요한을 어디로 불러내느냐 하면은 예수님 자기 쪽으로 불러내는 거에요. 자기 쪽으로. 그렇게 세례 요한이 그렇게 예수님께 요청을 했다 이 말이죠. 이 세례 요한 자리에다가 성도를 집어넣읍시다.
그러면 인간은 성도가 된다 또는 성도가 될 가능성이 있다 이래버리면 이것은 주님 생각이 아니에요. 인간은 성도가 아닌 거에요. 인간은 성도가 아니고 성도는 인간이 아닌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예수님 입장에서 인간이라면 성도가 아닌 자를 인간이라고 해요. ‘성도가 아닌 자’.
다시 말해서 천국에 못가는 자가 인간이에요. 인간 중에 천국에 갈 사람 있다 못 갈 사람 있다가 아니라 아예 인간 자체가 천국에 못 갑니다. 여러분들이 이 점을 이해를 하셔야 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이야기하겠습니다. 사람들이 세례 요한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보통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용감한 사람이라고 이해해요.
세례 요한은 용감하다. 얼마나 용기가 있느냐. 용기 있는 사람 이렇게 하잖아요. 세례 요한은 용감한 사람이 아닙니다. 하늘나라에 용감한 사람 필요 없습니다. 하늘나라에 용감한 사람이 필요한 게 아니고 뭐냐 하면은 솔직한 사람이 필요해요.
성도는 용감한 사람이 아니고 솔직한 사람이에요. 목격자나 증인에게 필요한 것은 용감이 아니고 오지랖 떠는 게 아니에요. 뭐냐? 솔직한 거에요. 자기 자신에서 솔직하고 주님에게 솔직하고 세상에 대해서 솔직한 사람이 성도입니다.
솔직할려면 전에는 여기 있었는데 예수님 때문에 이쪽으로 바뀌었다는 그 방향성을 자기가 내부에 그 방향적인 이동요소가 품고 있어야 돼요. 어떤 점에서 솔직해야 되는가? 모든 인간은 성도가 아니잖아요. 성도가 없는 거에요. 성도가 아니면서 하나님의 천국 백성 성도가 될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 말은 인간에게 뭐를 지향한다? 바라본다. 뭘 원하느냐 하면은 바로 행복 또는 기쁨, 희극. 인간들은 행복과 희극을 원하고 있어요. 잘 되기를 원하고 있어요. 그러나 주님께서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을 뭘로 바꿨느냐 하면은 비극의 화신 또는 비극적인 인물. 비극의 대표적 인물로 삼아버렸어요. 주님께서.
세례 요한의 그 말로가 어떻습니까? 이중에 세례 요한의 말로에 같이 동참하고 싶은 사람 손들어보세요 하면 아무도 없어요. 비극도 그런 비극이 없습니다. 세례 요한을 비극적 인물로 성경에서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으로 하여금 천국과 이 세상은 끊어져 있다는 것을 세례 요한으로 보여주는 거에요. 왜냐하면 세례 요한은 선지자니까. 선지자니까.
선지자는요 예언을 해야 되는 사람이거든요. 그러면 선지자에게 특히 구약을 지나서 신약에 온 선지자는 뭐냐 하면은 그 예언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은 재앙이 들어 있어요. 재앙. 비극. 이 세상의 재앙이 들어 있다고요. 사람들은 그 재앙에 대해서 재앙을 이야기하면 그걸 대비하면 되지 않겠느냐 보통 그렇게 생각하잖아요. 성경 보는 사람들도.
그런데 이걸 알아야 돼요. 선지자가 재앙을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재앙을 피할려고 하지요. 재앙을 피하는 그 방식이 재앙을 앞당기게 되어 있습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1980년도 우크라이나에 체르노빌이라는 마을이 있었는데 그 우크라이나에 그 원자핵로가 터져가지고 즉각적으로 그 현장에서 죽은 사람만 56명이고 나중에서 전부 다 이사갔지요. 그게 아주 무시무시한 원자력 발전소가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보여줬잖아요.
그런데 그 다큐멘터리를 찍는데 한 농장에 평범한 한 러시아 농장 사람은 이사를 안 갔어요. 왜냐하면 그 사람 눈에 보기에 방사선 보이지 않고 그냥 얼마 전까지 살았던 자기의 산과 들과 하늘과 바람 조금도 자기한테는 변함이 없는 거에요. 세상에서는 방사선 노출된 것이 재앙이라고 하는데 그 사람은 방사선이 눈에 안 보이는데 무슨 재앙이냐 이렇게 해가지고 살아남았어요. 아무 탈 없이 지금도 잘 살고 있답니다.
세례 요한이 재앙을 이야기하는 것은 그 재앙을 받고 재앙에서 어떻게 모면해 볼까 노력을 할 때 그게 바로 재앙을 가중시키는 거에요.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졌다. 바이러스가 퍼졌다. 사람들 마스크 쓰고 살아볼라고 하지요. 그 마스크 하는 것은요 단지 안 죽는 것이 아니고 약간 일찍 죽느냐 늦게 죽느냐 그 차이뿐이에요.
이거 해서 오래 사느냐 이거 안 해서 그냥 일찍 죽느냐. 그래서 미국에 어떤 사람은 이거 안 해요. 왜냐 하면은 이왕 약간 차이 나는 것 마스크 쓰고 오래 가는 것보다도 벗고 화끈하게 짧고 굵게 한번 하고 싶은 대로 해변가에서 해수욕도 하고 죽고 싶다고 마스크 안 쓰는 겁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옴으로써 이 세상은 전부 다 처음부터 어떤 사람이냐? 전부 다 강박증에 눌려서 살아왔다는 게 티가 나버렸어요. 어떤 강박증이냐 하면은 죽음의 중압감. 죽음의 중압감이 이 지구상에 어느 한곳이라도 빠짐없이 다 누르고 있다는 마치 대기압처럼 누르고 있다는 게 티가 났어요. 강박증. 강박증을 다른 말로 하면 이게 정신병입니다. 정신병.
코로나가 옴으로써 말미암아 평소에 일상 생활도 정신병으로 강박증으로 살아왔다는 게 티가 나버린 거에요. 그렇게 국가 말 안 듣더니만 코로나 터지니까 전부 마스크 다 쓰고. 죽음의 중압감에서 사람들이 뭐냐 하면은 이거는 둘로 나눠요. 하나는 뭐냐. 자체적으로 보호막을 보호막 형성에 평생을 여기에 매달립니다. 보호막.
이게 자체적 보호막인데 이걸 가지고 뭐냐. 고립적인 보호막. 모든 인간은 스스로 고립된 보호막을 생성합니다. 그것이 뭐냐 중압감을 요청했고 이게 강박증으로 이어지는 거에요. 자기만 달랑 보호하면 되는 거에요. 자기만. 캡슐처럼. 자기만 보호하면 인생 된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본인이 보호막을 쳤기 때문에 본인이 보호막을 찢을 가능성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안되지요. 보호막이 중압감을 주니까 이 보호막이 튼튼할까 안 튼튼할까, 매일 아침 그것만 점검하면서 하루 일과가 시작되거든요. 내가 지키는 보호막이. 그러니까 자기 보호막에 자기가 정신병 걸린 거에요. 그 안에 갇혀 사는 겁니다. 스스로.
이 보호막을 뭐라고 하느냐. 이 강박증을 유발하는 이 자체적인 스스로 고립적인 이 보호막을 뭐라고 하느냐. 이걸 가지고 환상이라고 합니다. 환상. 환상. 자, 환상은 자기를 지켜주는 유일한 보호막이고 이게 있어줘야 뭐냐 하면은 내가 장차 희망이 생겨요. 희망은 삶의 동력을 줘요. 삶의 동력을 준다고요.
여러분들이 할머니나 주부들이 고추 빻기 위해서 방앗간에 고추를 가지고 가잖아요. 그 빨간 마른 고추를 가지고 부피 이만한 것을 들고 가가지고 빻아주세요 하고 가지고 온다고요. 가져다 놓고 집에 그냥 갑니까? 방앗간에 기계가 막 돌아가면서 그걸 빻을 거 아닙니까.
그러면 다 집어넣고 그 다음에 뭐냐 하면은 그릇 가지고 받아내야 되지 않습니까? 코 따갑다 하면서도 그걸 지켜봐야지요. 언젠가 내가 투자한 그것이 내가 기대한 결과로 나오는 것을 그 그릇이 있어야 돼. 그 그릇이 뭐냐? 미래의 나의 자아상이에요. ‘자아상’. 받아야 될게 아닙니까 이걸. 나 몰라라 하면 귀한 고춧가루 바닥에 다 떨어지는데 버려지는데. 버리는데. 그걸 받아야 되지 않습니까. 평생을 했으면 뭔가 대가가 있어야 되지 않습니까.
보통 60 넘은 엄마들이 농담 삼아 진담 섞인 농담을 해요. 농담처럼 들리게 하지요. 안 들킬려고. 나 너 키운다고 고생 많이 했다. 이제는 네가 나 먹여 살려라. 웃으면서 웃음 뒤에 진심 있다고. 이게 뭐냐 하면은 딸이나 자식이 뭐냐 마른 고추거든요. 고추를 넣었으니까 이제는 자아가 빈 그릇이니까 그걸 받아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래야 그동안 삶의 보람을 얻을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제가 주일 낮 설교하면서 인간은 파탄이라는 말을 했거든요. 파탄. 그 파탄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은 딸이 진심으로 엄마 조금만 기다려. 내가 성공해서 엄마 따박따박 생활비 다 보낼게. 이랬던 딸이 얼마 전에 엄마 나 남자 생겼어. 내가 돈 좀 벌었긴 벌었지만 이 돈 엄마 줄지 말지 남자친구하고 의논해야 돼.
이렇게 나온다면 그 낭패감. 그 절망감. 그 섭섭함. 아이고 자식은 소용 없어 소용 없어. 다 소용 없어. 키워줬더니만 남자한테 다 뺏기게 생겼네. 이게 뭐에요. 자기 애 낳으면 애 키워달라고 한 달에 30만원 주고 애 키워 달라고 분명히 또 올거고. 인간은 자기의 보호막, 자기의 희망과 환상에 이미 정신병이 되어있어요.
그래서 이 환상이 만들어 내는 환상의 구조를 뭐냐 하면은 이것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현실’. 현실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느냐. 자기 희망도 들어 있는 현실이에요. 현실은 꿈꾸는 거에요. 꿈. 꿈에는 환상이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늘 딴 건 다 포기해도 포기 못하는 게 뭐냐. 환상을 포기 못해요. 인간은 절대로 환상을 포기 못합니다.
잘 될 거야 이렇게 노래하면서 늘 꿈과 환상을 포기를 못합니다. 그게 삶의 동력입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언젠가는 희망 있을 것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례 요한을 어떻게 다루십니까? 행복과 희망의 인물입니까? 아니면 비극의 인물이에요? 비극의 인물로 만든 거에요. 세례 요한을.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을 선지자로 딱 찝어서 사용하시는 이유는 이 세상의 프레임이라고 하는데요. 프레임, 액자 또는 달리 이야기하면 박스. 내가 아는 환상이 만든 박스 있잖아요. 현실 박스. 박스 해봐야 70,80. 많이 해봐야 90,100. 백살 살면서 꾸려낸 내가 임의로 뽑아낸 나의 꽃다발 같은 환상이 있잖아요. 프레임. 그 프레임보다 더 큰 프레임. 더 큰 범주의 현실을 하나님께서는 세례 요한에다가 실어서 보여준 겁니다.
그리고 말합니다. 세례 요한이 보여주는 현실이 네가 너무나 자체적인 보호막으로 네가 수집한 그 환상의 현실보다 더 월등하다는 겁니다. 더 월등하다. 고정된 고립적인 보호막과 그 하나의 대비 반대가 된다면 주님이 씌워준 프레임이라는 말이 어렵다면 박스, 상자. 씌워준 세계 현실의 범주, 이걸 주는 겁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에게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출생의 비밀이 있어요. 세례 요한에게 출생의 비밀. 세례 요한의 출생의 비밀이 있는데 그건 아버지와 사가랴라는 제사장 아버지와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비극의 인물이죠. 마지막에 비극의 인물이잖아요. 그럼 그 안에 비극이 내장되어 있어요. 내부에 장착되어 있다고요. 점점 더 비극이 커지게 되면 세례 요한의 종말이 되는 거에요. 세례 요한의 마지막 인생 모습이 되는 거에요.
그 비극적인 인물을 하나님께서 성령의 예고에 의해서 이 땅에 태어났다는 말은 이 세상이 진정 들어야 될 진짜 현실은 희극이 아니고 행복이 아니고 뭐였다? 비극이 너의 처지에 딱 맞다는 거에요. 이 비극이. 그렇다면 세례 요한은 선지자잖아요. 선지자라면 선지자 뒤에 누가 있습니까? 메시아 있지요. 메시아의 세계가 바로 세례 요한의 비극적인 삶을 통해서 메시아 삶을 대행해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겁니다.
세례 요한의 비극이 될려면 세례 요한의 인생을 통해서 세례 요한도 뭘 겪어야 되느냐 하면은 단절. 자기 생각을 하나님께서는 거역한다는 거부한다는 그러한 기회가 부여되어야 돼요. 세례 요한도. 내가 선지자다. 내 뜻대로 하면 하나님이 도와주겠지. 이게 아니고 뭐라고 합니까?
19절 “요한이 그 제자 중 둘을 불러 주께 보내어 이르되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 하라 하매” 지금 세례 요한이 이런 이야기하는 것은 지금 확신이 서지 않는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모르겠다는 거에요. 그 모른다는 것. 그 모른다는 것을 경유해야 돼요 우리가. 모른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은 세례 요한 나름대로의 이 땅에 살면서 어떤 박스, 프레임이 있을 거 아닙니까. 내가 만든 모든 것들은 이건 참된 진짜 현실이 아니고 그냥 허구고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경우를 만나야 돼요. 누구하고?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예수님과 만난다는 것은 내가 주님 앞에 저 앞으로 잘 될까요? 못 될까요? 천당 갈까요? 지옥 갈까요? 라고 질문하는 그것조차 우리한테는 권한과 자격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해야 돼요. 제가 주일날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절망하는 것도 무의미하다고요. 우리가 절망할 자격 없습니다. 뭐를 절망해. 네가 절망 안 하기를 기대하는 그런 자격이 있습니까? 없는데요.
여러분들이 킬빌이라는 영화를 혹시 본적 있습니까? ‘킬빌’. 여자 킬러가 이소룡 츄리닝 입고 설쳐대는. 자기 원수를 오야붕부터 전부 다 일본 칼로 전부 다 죽이는 그 영화. 그 영화가 유명해요. 킬빌. 아주 그 영화가 너무너무 인기 있었고 재미있어요. 오직 성령으로 충만한 여러분들한테는 보지도 않았겠지만.
거기에 끝 장면에 보면 뭐가 있느냐 하면은 이게 있어요. 오지심장파멸술. 이게 뭐냐 하면은 그 여자가 일본 무술을 했기 때문에 한꺼번에 5개의 신체의 맥을 급소를 한꺼번에 일격을 해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그 얻어맞은 자가 가만있으면 건강하게 잘 있어요. 가만있으면. 그런데 5발자국을 걷게 되면 심장이 한꺼번에 파괴가 돼서 죽는 거에요.
얻어맞고 가만히 있으면 사는데 자기가 꼼지락 거리면서 자기 꿈을 위해 뭔가 움직이면 그다음부터는 이게 심장 자체가 다 파괴되는 거에요. 결정적파괴술. 이걸 주인공 여자가 이소룡 노란 줄무늬 츄리닝 입고 설쳐대는 겁니다.
인간은 환상이 있기 때문에 내가 잘 되는 환상이 있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를 못하고 자꾸 꼼지락 움직여요. 기도할까요? 헌금할까요? 자꾸 움직여. 그거 왜 움직입니까? 재앙을 안 당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거에요. 재앙을 안 당하기 위해서 움직이니까 주님께서는 이 오지심장파괴술을 했기 때문에 이미 너는 죽은 자로 타격을 줬거든요.
죽은 자로 타격을 줬는데 자기는 죽은 자 될 이유가 없다고 우기면서 자꾸 움직이는 거에요. 주께 영광 돌린다고. 그게 예언된 재앙이에요. 그러니까 찾아오는 거에요. 세례 요한의 의미는 뭐라고 했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줌으로써 말씀을 못 전하게 한다는 거에요. 말씀을 줌으로써 말씀을 못 전하게 한다. 주께서는 말씀을 주시되 말씀을 못 전하도록 말씀을 주시는 거에요.
그것은 뭐냐 하면은 주님은 자기 백성을 구원할 때 구원을 방해하면서 구원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생각한 구원을 자꾸 그걸 비켜나가요. 거기에 대해서 세상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 이게 경기여고 교가에 나와요. 가사에.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 가락은 모르겠습니다만 가사에 그게 있어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지금 뭐를 놓치고 있느냐 하면은 자기가 죽음에 쫓기고 있는 정신병자라는 것을 지금 자기가 놓치고 있는 거에요. 정신병자는 자체적으로 고립적인 자기 보호막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에 계속 괜찮아 보이는 환상을 있는 대로 다 자기한테 끌어당겨요. 계속 수집하는 거에요.
그래서 제가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제가 4단계로 해가지고 한번 적어보겠습니다. (1)인간은 환상 없이는 못산다. 아침에 눈만 뜨면 환상이 시작됩니다. 시작! 아침에 눈뜨면 환상 시작. (2)모든 환상은 세상이 제공해 준 것이다. 인간이 내가 원한다는 게 내가 원하는 게 아니고 세상이 미리 갖고 있는 그것을 내가 욕망해요.
아 저 옷 좋아 보인다. 옛날에 유명한 배우 오드리 햅번 있거든요. 그 오드리 햅번 머리 해 달라고 사람들 다 오거든요. 얼굴은 오드리 햅번이 아니고 무슨 오드리 햅번 스타일이 어울립니까. 그런데 그 이쁜 얼굴에 어울리는 오드리 햅번 헤어스타일이거든요. 그런데 그게 환상으로 돌아온 거에요. 그게 안 되면 밥맛이 없어지는 거에요. 왜? 사람은 환상 없이는 못 사니까요.
밥맛도 자기 환상에 자기 욕망에 맞춰줘야 이게 그 다음 밥맛이 생기는 거에요. 이 모든 게 세상에 기존에 이미 있는 거에요. 기존에 있는 것을 환상으로 끌어당겨서 그래서 (3)인간들은 세상 없이는 못산다. 이게 본능이에요. 못산다. 인간들은 세상이 진실이에요. 세상에서 태어났고 죽어도 세상 안으로 죽는 것을 당연시 여깁니다.
그러니까 이 눈에 보이는 세상은 이 환상의 세상은 태어나면서 이미 이 세상은 영안실이에요. 본인의 무덤입니다. 이 세상 자체가. 그런데 살아보니까 세상의 좋은 것은 자꾸 생기고 그걸 제 때 제 때 끌어 모으니까 여기서 4번째 중요해요.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4)눈물이 난다. 특히 가을철에. 흑흑. 눈물이 나요. 10월의 마지막 날에 부르면 눈물이 나요.
자기가 좋아했던 여자가 환상이에요. 자기가 좋아했던 남자도 환상이었습니다. 자산 100억대 말고 재산 100억대 있는 사람. 그런 사람이 실제로 이 땅에 있으니까 재산 100억 있지 키 크지 잘생겼지 성격 좋아 보이지. 그런 사람 있잖아요. 이정재. 이정재는 재벌하고 사귄다는 소문이 있으니까. 이게 뭡니까. 눈물이 나는 거에요. 이정재 사귈 만큼 자기가 얼굴이 됩니까? 아니면 돈이 됩니까? 안되니까.
결혼하고 자기 옆에 누운 남편 보고 ‘인간아 인간아 너 누구야?’ 낯설어 보이는 거에요. ‘누구세요 아저씨’ 내 환상에 안 맞아요. 내 환상에. 여자도 마찬가지에요. 깔끔 떨고 그야말로 백설공주, 오드리 햅번으로 여겼는데 결혼하자마자 자기 것도 아니고 남편 고등학교 츄리닝 입고 돌아다니고. 그것도 그냥 입는 게 아니고 한쪽은 걷어서 한쪽 다리는 또 걷네. 바쁜데 왜. 그냥 살자 되는 대로 살자. 이미 결혼했는데 뭐 무를 수도 없고. 둘 다 지금 환상에 불만족스러워요. 둘 다 강박증 둘 다 정신병자.
그래서 주님 보시기에 이러한 인간들에 대해서 주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인간들은 끝까지 어리석다. 인간은 중간에 어리석은 게 아니라 끝까지 어리석어요. 끝까지. 담배 피우는 사람은 담배꽁초 떨어지잖아요. 처리할 데 없어서. 담배 피우는 사람뿐만 아니고 인간 존재 자체가 쓰레기를 남깁니다. 쓰레기를 남긴다는 것은 인간 자체가 쓰레기라는 거에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인간을 비극으로 확정지었기 때문에 누굴 보내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을 보내요. 세례 요한이 뭐냐 하면은 쓰레받기, 쓰레기와 쓰레받기.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비슷하게. 쓰레기와 쓰레받기. 세례 요한은 남들 보기에는 비극적 인물이에요. 그런데 세례 요한이 주님을 알고부터는 어떻게 했느냐 하면은 오늘 제목을 이걸로 정했습니다. 이익과 손실에 대해서 전혀 상관없는 존재가 본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이익과 손해’.
자, 이익과 손해를 전혀 생각할 필요가 없는 존재라면 이걸 제목을 제가 이렇게 정해봤습니다. 5자로. ‘납작한 인간’. 안에 자기의 고유의 내용물이 전혀 들어있지 않아요. 자기만의 고유의 내용물이 들어있지 않아요. 납작한 거에요. 3차원이 있으면 안에 공간이 생기는데 공간이 없이. 대구의 유명한 만두가 뭐냐 하면은 납작 만두에요. 안에 내용물이 없어요. 그런데 맛있어요. 납작 만두가 납작해요. 납작한 존재. 그걸 다른 말로 하면 앙꼬 없는 존재. 아예 앙꼬가 있을 필요가 없는 존재.
그러니까 나한테 이익이다 손해다 가 세례 요한한테는 사치에요. 그게 뭔데? 그게 뭐야? 이게 세례 요한의 출생의 비밀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이 땅에 나타날 수가 없는 사람이에요. 왜? 세례 요한의 엄마가 아이를 못 낳고 부부 간에 자식이 없는 거에요. 자식이 없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에 없음이 세례 요한의 본래의 자기 자리가 돼요. 없음이.
환상의 세계가 없는 사람이 진짜 현실의 세계의 사람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면서 아까 경기여고 교가 가사를 이야기했는데 다시 한번 불러 볼게요. ‘착하고 참되고 아름다워라’ 했잖아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 이렇게 되어버리면 기준이 뭐냐? 있음이 돼야 돼요. 있는 내가 참되고 있는 내가 착하고 있는 내가 아름다워야 될 그걸 강요받게 되는 겁니다.
그럼 안 참하고 안 착하고 안 아름다우면 뭐가 들어오느냐 하면은 바로 죽음이 주는 저주의 중압감을 우리가 느끼지 않을 수가 없는 거에요. 참되고 착하고 아름다워라가 순수하지 않고요. 이래야 내 내용물, 내가 평생 이렇게 살았다 내 환상을 죽을 때까지 내 환상을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자기 보호막을 환상으로 내 환상 속에 들어온 그 환상을 바깥에 있는 환상으로 프레임을 만들어가지고 그걸 지키고 싶은 거에요.
그게 안 되니까 아까 무엇이 흐른다 했어요.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요. 그 눈물이 흐르는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우리는 보통 슬프다고 이야기하잖아요. 성경은 슬프다고 하지 않고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악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기 신세 우는 걸 가지고 악한 자로 봐요. 아 이거 고집 세네 이렇게 봐요. 야 이거 환상 이거 안 빼앗길려고 이거 봐라 이거. 애쓰는 거 봐라.
애들 그런 애들 있지요. 자기 뜻대로 안되면 찔찔 울면서 엄마 품에 안기지요. 누나가 안 줘. 막 이렇게 울지요. 누나 보기에 동생이 슬퍼 보입니까? 독하게 보입니까? 아 저거 쪼만한 게 저거 독하네. 성경을 해석하는 사람들 많이 보고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인데 그 사람들의 다 들으면서 자꾸 실망할 수밖에 없는 실망 자체도 안되지만 미흡한 게 하면은 왜 없음이 본래 자리라는 생각을 왜 안하는지. 내가 있는데 바르게 착하게 하고 싶다는 거에요.
내가 경기여고 다니지도 않으면서 착하고 참되고 아름답고 자꾸 그걸 추구하는 거에요. 이렇게 겸손하고 이렇게 나를 비웠습니다. 그거는 세례 요한의 자리가 아니야 하나님 편의 자리가 아니잖아요. 아까 다시 해볼까요? 소경은 어떤 자다? 눈 못 보는 자가 소경이잖아요.
그러니까 이 세상이 그래서 문제가 되는 거에요. 소경은 보고 소경이 보는 자가 되는 거에요. 소경이 보는 순간 그 소경은 이제 이 세상에서 왕따 당합니다. 네 왜 봐? 너 안 봐야 되는데 왜 보는 거야? 우리의 환상의 세계에서는 소경은 못 보는데 네가 왜 봐?!
그때 소경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요한복음에 나오지요. 요한복음 9장에 나오잖아요. 나는 안 볼라 했는데 누구 때문에? 거기 예수님이 개입하잖아요. 예수님이 개입한다고요. 그러면 예수님하고 소경된 자하고 같이 뭐냐 하면은 세례 요한도 마찬가지이지만 이 세상 사람이 아니죠. 그러면 뭐냐? 없음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이죠. ‘없음의 세계’. 없음의 세계에 존재하는 거죠.
그래서 성경해석 할 때 없음의 세계인 것을 인지하는 식으로 해석하시기 바랍니다. 나 같은 것은 납작 만두가 되고 앙꼬 없어도 괜찮고요. 자기 고유의 것이 없어버리면 이익이다 손해다가 결정할 수 있는 기준자체가 아예 없어요 이게. 바짝 말라있다니까요. 내게 있어야 뭐 아이고 손해봤다 이익봤다 하는데 이게 아예 없는데요.
우리가 자기 것을 갖는다는 것은 환상을 갖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뭐냐 세례 요한아 네가 소경이라고 생각해봐라. 네가 절뚝발이라고 생각해봐라. 그리고 그 다음에 뭡니까? 쭉 나오지요. 그 다음에 네가 문둥병이라고 생각해봐라. 네가 귀머거리라고 생각해봐라. 네가 죽은 자라고 생각해봐라.
그러면 죽은 자, 귀머거리, 소경 그리고 절뚝발이, 가난한 자 전부 다 뭐냐 하면은 이 환상의 있음, 환상으로 가득 찬 세계, 환상의 있음에서 점차점차 무슨 흔적을 보여주냐 하면은 없음의 세계의 징후를 보여주는 사람들이 이 사람이에요. 왜? 없음의 있음의 경계선에서 있는 것은 무조건 복이고 없는 것은 무조건 저주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는 이 세계에 경계선 바깥으로 저 변두리로 쫓겨나고 있는 중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래서 세례 요한도 마지막은 있음에서 뭐로 변했습니까? 그냥 죽지 않아요. 그냥 늙어 죽으면 조용하게 없어지잖아요. 확실하게 있다는 것이 얼마나 권력적으로 있고 얼마나 예수님께 대들면서 있느냐를 보여주는 거에요.
반발은 짐승이 하는 게 아닙니다. 반발은 인간만이 할 수 있어요. 인간만이 신에게 반발해요. 다른 것은 악마 빼놓고 다른 것은 반발할 줄 몰라요. 인간만이 반발한다고요. 그 인간 중에 누가 포함되어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포함되어 있잖아요.
태어날 때부터 이 자체가 위기거든요. 세상 없이는 못 산다고요. 틈만 나면 찔끔찔끔 눈물 흘리면서 아이고 여보 왜 먼저 갔어. 결국 왜 나 놔두고 먼저 가느냐. 나이 80넘은 분이 왜 남편 먼저 갔어. 결국 이것은 남편 욕하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뭐냐 하면은 하나님께 반발하는 거에요. 네가 뭔데 내 남편 데리고 갔느냐. 내 남편 나에게 환상이었다. 주님 뭐라고 하는 줄 알아요? 환상인데 왜 그렇게 싸우고 바가지 긁었어?
우리 자신이 환상이라는 뜻이에요 우리 자신이. 왜? 우리 자신을 있음으로 이해하거든요. 그냥 있는 게 아니고 앙꼬가 있는 내용물이 있는 평생에 나는 고춧가루를 받아 낼 빈 그릇으로 자기를 이해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환상인 것을 우리 자신이 그걸 알 수가 없습니다. 진짜 킬빌한테 한 대 진짜 오지심장파멸술을 한번 받아봐야 아 이미 내가 죽었구나.
말씀 전하고 까불면 까불수록 점점 나는 갑자기 환상을 쫓아가고 은혜 받아야 할 텐데 잘 되야 할 텐데 이상한 환상을 또 끄집어내는 거에요. 이 세상 모든 환상은요 성도한테는 이미 성도한테는 있음의 세계에요. 있음의 세계는 성도한테 성도가 되기 이전의 저쪽 세계에요. 그래서 첫째 시간 마지막을 이 단어로 마치겠습니다. 이쪽과 저쪽. 바로 성경 해석하는 사람은 이걸 구분을 못해요. 이쪽 저쪽을 구분을 못하고 이쪽 세계에서 잘 될려고 하는 거에요.
10분 쉽시다.
강남-누가복음 7장 22절 (납작한 존재) 210928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합시다. 이익과 손해에 대해서 세례 요한은 아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본질이 없음이니까. 이 땅에 환상의 세계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이 땅에서는 그 내가 살려고 한다면 한번 적어볼게요. 내가 살려고 한다면 환상을 살려야 한다.
꿈과 이상과 희망을 계속 그걸 살려내야 거기에 내가 딸려서 사는 거에요. 꿈과 희망이 없다면 인간은 살 이유가 없습니다. 현재 한국은요 매일 40명 자살합니다. 1등입니다. OECD 나라중에 1등 했어요. 1등인 게 한 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중에 1등이 매일 40명 죽어요.
왜 죽겠어요? 복음 때문에 죽습니까? 지 풀에 자기 정신병에 중압감을 못 이겨서 죽어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주일 날 설교에 이야기한 것 중에 중요한 게 뭐냐 하면은 환난이란 내가 감당할 수 없는 것. 고난도 같은 말. 복음적 의미를 가진 고난이라는 것은 내가 감당할 수가 없는 거에요. 환난을 만약에 내가 감당이 되어버리면 이 사람은 저주받습니다. 주님 주신 고난에 대해서 내가 손 쓸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구원받아요.
왜냐하면 이 환난으로 인하여 내가 무능력한 자로서 제대로 달라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 내가 내 구원에 대해서도 내가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는 순간 그 순간이 주께서 정말 원했던 구원의 진짜 구원받은 사람의 모습이에요.
그래서 하나님과의 화해, 성경에 화해 많이 나오지요. 화목, 화해. 화해란 뜻은 뭐냐? 로마서에도 많이 나오지만 이건 뭐냐? 나의 비극을 내가 받아들이는 것. 이게 화해입니다. 나의 비극이 아니고 사실은 주님의 비극인데 일단 비극을 내가 받아들이는 거에요. 이게 바로 세례 요한의 마지막 모습이 이거였습니다.
‘하나님이여 저에게 왜 이런 고난을’ 뭐 이런 거 없어요. 제가 옥에 갇히다니 이런 거 없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따지지 않기 때문에 이게 비극인지 희극인지 본인도 따질 필요가 없는 거에요. 그래서 이 비극적인 이 세례 요한의 삶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이 삶은 율법적이다. 율법적. 율법적이다 라는 말을 여러분들이 잘 알지요. 율법적이라는 말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니고 “우리 입을 막고 저주 아래 두게” 하십니다. 로마서 나오지요. 3장 19절.
왜?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은 세례 요한 같은 존재가 등장해야 아! 성경에서는 저렇게 하는구나. 의인은 하나도 없다 쪽으로 가야 이게 성경해석 제대로구나. 나에게서 일절의 환상이나 기대나 희망을 만약에 갖는다면 내 자체가 환상이에요. 허구적 ‘나’에요. 실제하지 않는. 가짜 ‘나’를 진짜 ‘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꿈속에서 여러분들이 등장할 때에 여러분이 주인공으로 등장할 때 여러분 나이가 주로 몇 살 때였습니까? 꿈속에서. 제가 그 장담하건데 여러분들의 기억이 최고조로 올라갈 때 그때 얼굴 모습이 꿈에 유지될 거에요. 여러분들의 기억이 가장 왕성할 때의 모습. 그럼 뭐냐 하면은 20대에서 30대 그 모습이. 나이가 지금 70이 되고 80이 되도. 내 모습은 항상 20대 30대 그 후반. 꿈은 진짜 개꿈이죠.
이 말은 뭐냐 하면은 가장 자기가 이상적인 것이 될 때 스탑하고 싶은 거에요. 그게 스탑이 되면서 몸은 늙어가고 후패해가지만 발악을 하는 겁니다. 지금 내가 좀 못해도 그러나 꿈에는 내가 항상 잘난 존재로서 멋있는 존재로서 유지가 되니까 그 맛에 사는 거에요. 그 맛에. 물론 아주 예민한 사람도 있긴 있어요. 점점 더 30대부터 그래프가 내려가는 걸 보고 짜증이 나서 예수님처럼 33살 때 돌아가신 김광석이란 가수가 있어요. 점점 더 멀어져.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눈물 찔찔 흘리면서.
세례 요한이 등장함으로써 성경해석은 이미 이렇게 돼야 돼요. 성경해석 어떻게 돼야 되느냐 하면은 환난의 때가 오는 게 아니고요 지금이다 지금! now! 지금이 환난. 그 환난의 때가 지금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지금이 환난 때라면 주님께서는 모든 환난을 다 겪었잖아요. 주님께서.
결국 주님 앞서 온 세례 요한은 뒤에 오실 예수님이 겪어야 될 환난을 그걸 다 겪으심으로 말미암아 세례 요한이 비극적인 모습으로 세상 끝장냈다면 바로 그 비극적 세례 요한의 가는 그 모습은 앞당겨서 예수님의 비극을 앞당겨서 보여주는 거에요. 그래서 요한복음 1장에 보면 나보다 앞섰다 했어요.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온 모든 것은 자기보다 앞선 분의 베끼기. 그걸 복사하기. ‘복사’.
보통 회사에서 직원들 보고 서류하나 복사하라 하면 보통 오래된 사람들은 복사 그 22페이지 그 면만 하면 돼? 이렇게 하거든요. 그런데 처음 와가지고 어리버리 해가지고 긴장해가지고 프린트하라고 하는데 현재 면만 22페이지만 복사하면 되는데 이거 뭐 전체 면 해가지고 15년 동안 했던 서류가 왕창. 계속 나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습니까.
실제로 다른데 정신 팔리면 그런 실수할 때 있지요. 여러분들도 그렇지요? 35페이지만 하면 되는데 1페이지부터 해가지고 다 한 거에요. 허둥지둥 해가지고 마지막에 그냥 컴퓨터 꺼버리고. 우리가 복사할 복사 내용은 창세기 전부터 마지막까지 복사가 나와요. 우리는 현재만 보고 싶은데. 우리 조상 선악과 따먹은 것부터 이야기 다 나옵니다.
우리 안에 성경책 한권이 다 복사되어 나옵니다. 압축해서 인생을 살아요. 마지막 이미 영광스럽게 하셨느니라 까지. 미리 아신 자를 부르시고 부르신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 모든 주께서 들어오셔서 주의 나라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존재하는 사람을 이 세상에 저주스런 세상 속에 만들어내시는 그 작업이 우리의 응축된 인생 가운데서 복사 되서 나온다 이 말입니다.
이게 내 인생이 아니지요. 이게 세례 요한이 세례 요한의 인생이 아니고 주님의 인생입니다. 예수님도 우리와 똑같이 완전하게 죽었어요. 세상적으로 봤을 땐 끝났어요. 왜냐하면 죽으면 그걸로 끝이에요.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 없으니까. 예수님은 그걸 몸소 그대로 다 받아들였어요. 나 죽었다. 게임오버. 끝났어.
끝났는데 끝났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기 위해서 3일간의 텀을 줍니다. 정확하게 하면 48시간 더 되지만. 3일 동안 틈을 줘요. 텀을 줘가지고 죽었지? 확실하게 죽은 거 맞지? 분명히 죽었지? 살아나는 것은 얼토당토지? 제자들이나 누가 봐도 이건 죽은 거에요.
뭐 한 두 시간 있다가 깨어날까 기대했는데 두 시간 뒤에도 아무 소식 없어요. 하루 지나면? 하루 지나도 소식 없어요. 이틀 지나도 소식 없어요. 그러면 모든 인간은 포기하는 거에요. 이게 어떤 기능이다? 율법적 기능이에요. 율법적 기능. 너는 너한테 손을 떼라는 겁니다. 아직 나한테 내가 내 인생에 관여해서 뭔가 착하게 살면 구원에 희망하겠다.
그건 네가 안 죽었다는 뜻이에요. 십자가 죽는다는 말은 하면서도 실눈 뜨는 거 있죠. 이렇게 뜨고 있잖아요. 주여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하면서 말은 되게 많이 해. 죽었습니다. 죽었습니다. 말을 하지 말라는 거에요. 말을 하지 말아라. 왜? 말하는 그 시간이 네 시간이 아니고 예수님 시간이니까요. 예수님 시간이기 때문에 말하지 말아야 되고 그 때 말이 나온다면 그건 주님이 주시는 말이 돼요. 주님의 말이 내 말을 죽여버리는 거에요.
그래서 저는 우리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 따로 나 따로가 아니라 성령 받은 사람은 세례 요한처럼 된 사람은 이걸 저는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주님의 회로. 주님의 연결된 전선. 끊어질 수가 없지요. 또는 주님의 단말기. 모니터. 그걸 성경에서는 고상하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아. 이게 모니터거든. 모니터에 그리스도의 형상.
그리스도의 형상은 예수님처럼 얼굴 이렇게 생긴 게 아니고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이 그 모니터에서 나타나게 하는 거에요. 우리 인생을 통해서. 죽었다가 살아난 사건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있지만 사실은 없는 쪽에 속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면서 살아남을 설명해요.
하나님의 화해, 화목이라는 것은 뭐냐? 그 비극을 받아들이는 겁니다. 그러면 나는 죽은 자가 되지요? 죽은 자가 되는데 살아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게 뭡니까? 죽음 그 이후에 주님의 하신 일, 그게 모니터로 되가지고 나 죽었는데 또 살게 해주시네. 또 살게 해주셨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겁니다.
우리 아까 제목으로 납작한 인생이라고 했는데. 그게 주님께서 이미 죽었다가 사셨고 세례 요한도 예수님보다 먼저 일찍 경험했고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니까. 우리도 예수님이 먼저 계신 분이고 세례 요한 입장이니까 우리가 예수님 지금 죽었다가 살린 분이 일하고 계실 때에 환상을 깨고 진짜 현실로 우리와 함께 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저는 이것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이게 뭐냐 하면은 여운. 주님의 여운. 그걸 의성어로 이야기하면 ‘왕왕왕왕왕왕~~~’ 이런 거에요. ‘왕왕왕왕~~~’ 알지요? 메아리치는 것. 닐 다이아먼드가 불렀던 노래. Sweet Caroline 이 있어요. 레드삭스 야구팀이 8회만 되면 그걸 떼창을 해요. 미국의 프로야구 팀.
떼창을 하는데 닐 다이아먼드가 불렀던 Sweet Caroline 노래에 이런 Hands, touching hands Reaching out, touching me, touching you. Sweet Caroline 왕왕왕~~~ Good times never seemed so good. so good. so good. so good. 나와요.
Caroline 이라는 노래는 케네디 대통령의 딸을 이야기합니다. 닐 다이아먼드 어릴 때 달콤한 그 딸이 말 타는 모습을 보고 작곡했다는 거에요. 이건 뭐 구원하고 아무 관계없는 얘기고. Sweet Caroline~~ 왕왕왕~~~ 나중에 시간되면 그 노래 한번 들어보세요. 떼창 한번 들어보세요. 이게 계속 노래를 살려주는 거에요. 비어 있잖아요. 비어 있는데 여운을 남겨서 왕왕왕 살려주는 거에요.
우리나라 가스펠송도 그런 거 있지요. 가스펠송도 그런 거 있어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실로암할 때 “오 주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실로암 내게 주심을” 그러면 군인들이 각!개!전!투! 이래요. 논산훈련소에서 3천명이 떼창을 부르는데 실로암이 군가잖아요. 군가처럼 되어버렸어요. “영원한 사랑 속에서 떠나지 않게 하소서” 이 노래 할 때 왼발! 왼발! 왼발! 한쪽은 그 노래 부르고 한쪽을 운을 띄워준다고요.
그렇게 주께서 하시는 이유가 뭐냐? 이쪽과 저쪽을 구분하기 위해서 하는 거에요. 그럼 그 구분을 왜 하느냐? 주님께서 그렇게 구분하셨어요. 주의 왼쪽과 주의 오른쪽 마태복음 25장에 마지막 심판할 때에 분명히 이쪽과 저쪽을 나눴어요. 왼쪽에 있는 자들은 염소, 오른쪽에 있는 것은 양. 이게 무슨 뜻일까요? 누가 와야 나눠진다는 거에요. 누가 와야.
그러니까 아까 경기여고 교가 가사 참되고 착하고 아름답게 이거 뭡니까? 이 편 저 편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혼자 도 닦으면 되는 거에요. 혼자 도 닦으면. 혼자 도 닦으면 도 닦았다는 증거로 뭐 줍니까? 복 준다는 거에요. 그 경기여고 교가나 오늘날 교회나 다를 게 뭐가 있어요?
주님 자체가 이 편 저 편 나누기 위해 왔다면 우리도 이 편 저 편 나누는 기준점으로 우리를 주께서 새 사람 만든 거에요. 그러니까 자체적으로 이익이다 하나의 경계선. 선이 없는데 무슨 이익이 있습니까? 그냥 두 조각 나누는 기준으로 있으면 되지요.
다시 말씀드릴게요. 이 세상에 용기 있는 사람이 필요 없고요. 용감한 사람 필요 없어요. 용감한 형제 필요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솔직한 것. 있는 그대로 이야기합니다. 그게 증인 노릇이에요. 있는 그대로 아는 그대로. 주님께서 충분하게 나를 못났다고 이야기해줬어. 어느 정도로? 절름발이, 소경 그 다음에 죽은 자, 귀머거리.
이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인간 구실 못한다는 거에요. 저주받은 모습이죠. 그게 이 땅의 우리의 모습이고 하나님 일의 시발점입니다. 있는데 없어도 그만인 존재. 도대체 우리가 참 이것까지 겸손해야 돼. 진짜 이정도 겸손할려면 도 닦는다고 주여 주여 하지 말고 아예 이익과 손실이 나한테는 의미 없어야 돼. 이익과 손실이. 납작한 인간이 되야 돼.
이 세상은 거래한다고 했지요. 내가 하면 뭐 해줄렵니까? 맨날 이 세상은 이런 식이에요. 딸아 내가 너한테 해줬잖아. 너 나한테 뭐 해줄래? 맨날 이래. 자식도 그렇고 모든 것이. 전부다 주고 받고 주고 받고.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개나 소나 개 돼지나 이런 것은 주님한테 반발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한테 반발하는 작자들은 누구밖에 없느냐? 인간밖에 없습니다. 인간밖에. 돼지에 귀신 들어오니까 돼지가 어디 갔습니까? 전부 다 물로 다 들어갔잖아요. 반발하는 게 아니고. 그냥 바다 속으로 다 빠졌잖아요.
자, 그 다음에 봅시다. 22절까지 했습니다. 22절까지. 23절에 보면 “누구든지 나로 인하여 실족치 않는 자는 복이 있도다” 그러니까 모든 인간은 실족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실족하지 않는 현상이 일어난다면 그건 진짜로 땡잡은 것이다 에요. 따라서 이 말씀은 율법적이에요.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니까 딱 우리의 모습이에요. ‘아 내가 이런 자였구나.’ 내 것 챙기다 보니까 주님의 말씀이 무슨 뜻인지 실족할 수밖에 없고 실족한다는 것은 자빠지고 엎어졌다는 거에요. 문지방을 넘지를 못하는 거에요. 저는 복음 아는 사람을 안다고 이야기하면 속으로 그걸 생각을 해요.
나는 복음을 압니다 할 때 그렇다면 당신은 문지방을 넘었습니까 라고 속으로 묻고 싶어요. 내가 심판자가 아니니까 구원자가 아니니까. 뭐냐 하면은 선악체제에서 생명나무에 문지방이 있는데 로마서 9장에서는 문지방이고 하지 않고 걸림돌이라고 해요. 걸림돌, 십자가라 했어요. 십자가. 엎어지는 것.
선악체계에서 생명나무 체계로 넘어 왔습니까? 선악체계는 주인공이 나입니다. 생명체계는 뭐냐 하면은 나는 주님의 전선 또는 주님의 회로에요. 그냥 주님 앞에 삐죽삐죽 나와 있는 회로라니까요. 이걸 또 달리 표현해 볼까요? 주님의 톱니바퀴. 주님의 물려있는 톱니바퀴. 톱니바퀴는 저절로 못 돌아가요. 핵심부위가 돌아가야 톱니바퀴가 옆에서 같이 돌잖아요. 우리는 톱니바퀴에요. 이것이 어려우면 말을 바꾸겠습니다.
주님의 기계. 기계 앞에 뭐 형용사가 붙으면 냉정한 기계. 우리교회. 오지랖 떨지 않는. 냉정한 기계. 기계 같애. 어제 대전강의 하면서 물었던 것을 여러분한테도 마찬가지로 물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인데 같이 한번 모여 볼까? 대전 강의 들은 사람은 벌써 웃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인 줄 압니다.
우리 같이 신앙 형제니까 같이 모여 이렇게 한번 모이고 말씀 나눠볼까? 할 때 복음적으로 나누고 이게 사도행전의 구현이다. 서로 떡을 떼며 이렇게 하다가 결국은 드디어 본색이 나오는 게 뭐냐 하면은 치료비 다 끌어왔는데 돈 10만원 비네. 그 이야기 나올 때 본색이 드러난 거에요.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인간의 있음’에서는요 복음이 돈.
이 말은 돈이 있어야 그 다음에 복음이 있듯이 인간의 있음에는. 이걸 애써 감추면 안 됩니다. 그래서 교회 나올 때 복음은 분명히 아는데 항상 다크써클. 뭔가 얼굴이 어두운 채 나온다는 것은 100% 돈 문제입니다. 백퍼에요 백퍼. 백퍼에요. 내 환상을 내가 유지 못해서 지금 고민에 빠져있는 경우입니다. 이제는 자리 필만 하지요? 족집게지요? 문제는 간단해요. 사자 머리 박사 아니라도 다 알아요.
인간의 모든 문제는 돈 문제입니다. 어린애 빼놓고 돈 문제에요. 돈이 자존심이기 때문에. 복음 거론하는 것은 그것은 감추기 위한 핑계입니다. 그 이야기가 몇 절에 나오느냐? 지금 관계없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24절부터 나오는 이야기에요. 25절 보겠습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이냐 보라 화려한 옷을 입고 사치하게 지내는 자는 왕궁에 있느니라”
예수님 말씀이나 세례 요한의 모든 존재. 지금 뭘 보느냐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어떤 인물을 주목해라. 그 인물이 무슨 기능이라고 했어요? 율법적 기능을 가지고 있지요. 그 율법적 기능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모든 인간이 그 사람 앞에 설 때에 결국은 내가 저 사람처럼 되지 못한다는 자기의 죄성을 드러내게 되어 있다 이 말이죠.
율법이라는 입을 막고 어디 아래 있다? 저주 아래 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율법이잖아요. 그 사람 앞에 안 서면 나는 괜찮은 사람 되는데 그 사람 앞에 서 버리면 갑자기 여기서 괴리감이 생기고 격리가 생기는 거에요. 갈라짐이 생기는 거에요. 이쪽과 저쪽이 성립이 되는 거에요.
성경에 여러 가지 개념 가운데서 어려운 개념 중에 하나가 왼쪽과 오른쪽 이야기입니다. 왼쪽과 오른쪽을 하나님께서 구분 짓겠다고 이야기했지요. 왼쪽은 지옥이고 오른쪽은 천국입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 두 쪽이 있다는 말은 그러면 하늘나라에도 어떤 이해가 있어서 지상에 반영이 되면 이해가 되거든요. 그렇지요?
그런데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홍해 건너올 때에 미리암 찬양 가사에 이런 게 있어요. “주의 오른손의 능력으로 저 하나님의 원수를 이겼습니다” 라고 한 거에요. 그러면 이 하나님의 원수, 악마지요. 원수의 존재, 원수가 등장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왼쪽과 오른쪽을 나누는 일을 하는 것이 원수가 등장해야 아는 거에요.
그러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오른쪽, 왼쪽은 없어요. 우리 입장에서는 우리 하나가 결국 나로부터 말미암아 나에게 돌아오거든요.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도 결국 전부 다 내 생각으로 되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걸 주일날 ‘푸앵카레 추측’이라 한 거에요. 지구를 농구공을 묶었던 밧줄을 밧줄만 농구공 빼놓고 밧줄만 잡아당기면 결국 한 점으로 모인다는 것. 이게 수학자의 주장입니다. 한 점으로 모인다 이 말이죠.
점으로 모인다는 것이 방해되는 것이 뭐냐. 안에 구멍이 생기면 이 점으로 못 모이고 한쪽만 턱 걸치고 저쪽은 마저 포섭하지 못하고. 그러면 십자가 없는 사람은 십자가 백날 이야기하고 십자가 백날 생각하고 주님만 생각해도 결국 마지막은 뭐냐? 십자가 믿는 것은 난데. 주님 생각해온 것도 난데. 하나님 영광을 위해 희생한 것도 난데.
나로부터 시작해서 결국 그 회로가 어디로 갑니까? 백날 돌아다니고 돌아다녔는데 결국 오는 것은 나다 이 말이지요. 로케트를 쏘아 올렸는데 우주 끝까지 다 가봤어요. 다 가보고 마지막 도달되는 게 뭐냐 하면은 자기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자기 프레임, 자기 범주가 내 범주가 나를 못 벗어나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불교에서는 부처님 손바닥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에요. 부처가 곧 나니까. 내가 부처하고 하나가 되니까.
그래서 대전 두 번째 강의에서 제가 그런 질문을 했거든요.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나를 어떤 식으로 부정할 것인가 한번 답변해보라고. 옆에 계신 어떤 여자 목사님한테 물었습니다. 후딱 내가 답변해야지요. 안하면 또 미안해서 답변했지요. 그 답변이 뭐냐 하면은 성령께서는 우리의 육에 관한 모든 죄 있잖아요. 그걸 우리에게 되돌려준다는 거에요. 구원받은 자에게 되돌려줘요.
네가 이런 인간이었다. 네가 인간이었으니 네가 너 밖에 모르는 것을 그때부터 어떻게 해라? 감사하고 즐거워하고 끝까지 너의 너 됨을 나는 나밖에 모른다는 것을 제발 지켜다오. 제발 그걸 유지시켜다오. 하나님 앞에 그런 소리하지 말고 하나님 믿던 말든 다 나 좋아라고 믿는다는 지나간 시절의 육적인 그 모습을 내가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우리는 뭐냐 하면은 저쪽 편을 내 쪽에서 두 쪽으로 나누어졌다는 것을 내 쪽에서 실현이 가능한 거에요.
나인데 저쪽에 있는 나와 왼쪽에 있는 나와 오른쪽에 있는 나가 이렇게 구분된다는 게 이미 얼마나 큰 복입니까. 이건 공부한다고 나오는 거 아니거든요. 이 구원받은 내가 구원받지 못한 나를 보고 날마다 놀리는 거에요. 돈 좋아하잖아?! 더 해! 자식 최고 아니야?! 더 해. 뭐 이웃을 사랑하고. 왜 네가 하는 육적 행세를 아닌 척 하느냐? 해 봐. 해. 해도 괜찮아.
왜? 이미 우리는 오른쪽에서 보고 왼쪽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주의 원수 안에 들어 있기 때문에 주의 원수는 오른쪽 왼쪽 없어요.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로 돌아오는 거에요. 자기가 부처고 자기가 신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신이거든요.
그래서 아까 첫째 시간 마지막에 이야기했잖아요. 세례 요한의 모든 존재 자체가 율법적이란 말 이제 이해하시겠어요? 율법적이다라는 말은 우리가 흉내 내거나 따라하지 마. 예수님이 모델이 되어서 세례 요한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는 말. 이런 성경을 해석한다는 자체가 해석이 더 어려워요. 그것도 어렵고.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앞섰다.
무엇이 어려우냐가 아니라 왜 굳이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뭐냐 그 이유를 모르는 거에요. 좀 우리가 아는 이야기 좀 하지. 내 뒤에 오시는 분은 나보다 앞섰다는 말을 굳이 그 말을 우리 사람들에게 하는 그 의도가 뭐냐. 의도가. 너희 소경이다 이 말이에요.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뜻이에요. 주님이 사람을 새로 만들어야 되지 기존의 인간은 성도가 아닙니다.
아까 처음에 했지요. 인간은 뭐가 아니다? 성도가 아닌 거에요. 이 말은 성도는 무엇이 아니다? 인간이 아니고 좀비죠. 유령이죠 뭐. 그래서 세례 요한이 지금 뭘 경험하느냐 하면은 예수님도 마찬가지고 우리도 마찬가지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옮겨온 경험이 모델 케이스가 되는 거에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 있다는 것은 왼쪽, 오른쪽이 있다는 것은 개인 구원을 말하는 게 아니고 여기서 무엇을 발생시키느냐 하면은 원수를 발생시켜요. 원수. 이게 문제는 나의 원수가 아니에요. 나의 원수가 아니에요. 주님의 원수입니다. 그런데 원수인데 만약에 세례 요한이 구원받지 않았다라면 오른쪽도 없고 왼쪽도 없고 나는 나 하나 단일성이 있고요.
이 단일성은 주님 보기에는 뭐와 함께 있어요? 하나님의 원수와 함께 있는 거에요. 원수가 시키는 대로 있는 거에요. 따라서 원수가 요구하는 것을 지금 예수님이 이야기합니다. 25절 다시 보면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자, 본다는 것은 내 속에 있는 욕망을 의미하지요. 욕망. 가만 있어도 사람들은 모든 걸 보는 게 아니에요. 그냥 봐도 대부분을 못 봅니다.
오시면서 가로수 나뭇잎 본 적 있습니까? 안 보잖아요. 뭐 볼 것도 아니고. 사람이 어떤 마음속에 지향이 있어야 그게 눈에 들어오게 되어있어요. 그게 다 후보감이 되어 다 놓치게 마련이에요.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이 있잖아요. 그것처럼 자기가 관심 있는 것만 보는데 그 관심 있다는 말이 뭐냐? 그 사람이 관심 있다가 아니라 내가 환상을 보충하기 위해서 미흡함을 채우기 위해서 관심 있게 두루두루 주의 깊게 보는 거에요. 관심 있게.
지금 카메라 고장 나가지고 휴대폰으로 하잖아요. 그러면 여기 카메라 있네 이렇게 하면 갑자기 어?! 응?! 갑자기 관심 확 돌아가겠지요. 그런데 자기 집 카메라 가게 하는 사람은 카메라 10개 있어도 별로 관심 없습니다. 똑같은 풍경을 봐도 그 사람이 지금 어떤 현실 안에 자기 나름대로의 환상 속에 살고 있는가가 같은 버스, 같은 기차를 타고 창문을 봐도 목사는 뭐만 보느냐 하면 시골 교회 철탑만 봐요.
신학생들 다니면서 아 나 저기 시골 교회도 갈 수 있는데. 취직시켜주면 가는데. 나 욕심 없어. 나 한 200만원만 있으면 되겠어. 나 욕심 하나도 없어. 200만원만 있으면 되겠어. 차타고 가면서 아이고 저 교회 아름답다. 저거 봐라. 계곡에 시골 교회 야~ 그 교회 교인들이 얼마나 괴물인지 생각 안하고 예배당만 이쁘게.
서울에 큰 교회 보면서 야~~38년 된 교회. 그 교회 빚이 140억인 줄도 모르고. 이 교회 부교역자만 시켜주면 내가 마누라한테 큰 소리 칠텐데. 걱정하지 마라. 월급 나온다. 그러니까 모든 신학생들 관심사가 뭐냐? 교회에 관심 있어요. 교회. 절에 보살은 뭐에 관심 있습니까? 어디가 아늑한 절간인가 그것만 보는 거에요.
그래서 묻는 거에요. 주께서는 지금 너는 무엇을 보느냐고 지금 질문했잖아요. 오늘 26절에서. “그러면 너희는 무엇을 보려고 나왔더냐” 그런데 25절에 뭐냐?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왔더냐 하고 현재 너희들의 야망과 욕망과 환상의 세계에서는 부드러운 옷 입은 사람을 네가 마다하지 아니하고 화려한 옷 입은 사람을 사치하는 사람을 네가 거부하지 않는다.
왜? 너는 나의 원수 된 이 세상에서 같이 한통속이 되어서 돌아가기 때문에. 그들의 목표는 이미 왼쪽 오른쪽이 아니라 두 패가 아니라 하나로 고정되어 있습니다. 나도 저처럼 사치스럽고 저처럼 화려하고 옷 입고 부드러운 옷을 입고 한번 잘 살아보자.
대전 강의에서 그런 표현했습니다만은 진짜 부잣집 마나님들 나오잖아요. 보게 되면 일단 백설공주 옷을 하늘하늘한 원피스 입고 백화점에서 가서 쇼핑을 하는데 균형이 맞아야 돼요. 균형이 중요해요. 한쪽만 쥐고 오는 게 아니에요. 10개쯤 쥐어줘야 랄랄랄라~~~이렇게 올수가 있다고요. 폼이 나거든요. 그래가지고 틱 하고 차 열고 트렁크에 넣고 아이고 오늘 하루도 힘들었다. 힘들지요. 쇼핑해보세요 배고파요. 허기진다니까요. 쇼핑한다고요.
부자 살기가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힘듭니다. 그런데 힘들지만 나의 욕망, 환상을 원수가 움직이는 욕망에 완전히 빠져가지고 다른 것은 실패로 간주해요. 인생 실패자로 보기 때문에 이미 골인합니다. 왼쪽 오른쪽이 없어요. 그냥 가는 거에요. 그냥. 그런데 누가 나타났습니까? 세례 요한이 나타난 거에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하나의 선택지를 줘버려요. 세례 요한 볼래? 왕궁 볼래? 라고 주께서 시비조로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세례 요한 보러 어디로 나왔습니까? 광야로 나왔지요. 이 광야에 나와야 애굽 나라가 왼쪽으로 보여요. 버릴 패. 아 나 큰일 날 뻔했다.
애굽 나라의 특징은 유월절 어린양의 피가 이게 무의미한 동네라는 사실이에요. 유월절 어린양의 피는 뭐냐? 결정적 하나님의 결정적 심판 기준이거든요. 피를 보고 넘어간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우리하고 의논 안하고 일방적으로 만들어낸 기준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나는 그 따위 기준 없어도 나는 내 환상 속에서 살 수 있다고 우기는 동네에요.
교회라도 예수님의 피 중심이 되지 못하고 교회 부흥 중심이 되어버리면 그 교회는 원수의 전당이에요. 최종적인 것은 그런 교회가 교양과 상식을 주는 그런 교회 최종점은 뭐냐? 당신은 당신의 환상과 목표를 주께서 이루어주십니다. 그게 설교의 핵심 내용입니다. 아니라고요? 당신은 좋은 나라 천국에 갈 수 있습니다 이게 핵심 내용이에요. “너는 원수야” 라는 말을 안 해요.
사람이 자기 구원받을려고 교회 왔다는 것을 뻔히 장사 한 두 번 합니까 다 아는 이야기인데요. 자기도 모르는 채 천당 간다고 하니까 이게 말이 돼요? 내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분명히 규정을 해야 되고 기준은 뭐냐? 유월절 어린양 피입니다. 내가 거지가 되든 사기꾼이 되든 교도소 전과 10범이 되든 선악체제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지 아니면 그 문턱을 넘었는지.
그 문턱은 걸림돌이라서 모든 인간은 넘을 수 없는데 성령이 오면 나는 이미 선악체제에 따라서 죽는 게 아니고 선악이란 의식을 갖고 있는 그 자체가 주님 보시기에 저주 대상인 것을 아는 자만이 이미 건너온 사람만이 그걸 알아요. 건너 온 사람이. 내가 내 단도리할 것은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는.
그러니까 부자 마나님들이 쇼핑백 10개 들고 균형 맞춰서 랄랄랄라라~~~하고 이렇게 오지마시고 우리는 쇼핑백 하나도 없어도 혼자서 랄랄라~~~할 수 있단 말이죠. 약간 미쳤지만. 남들이 보기에 돈이 없어서 완전히 갔구나. 돈 없다 보니 완전히 돌았구나. 욕하든 말든. 그냥 사는 것 자체가 하나의 단선으로 사니까 양쪽으로 왼쪽 오른쪽이 다 보이니까 볼라고 봅니까?
성령께서 하게 하시니까 넘어온 사람만이 넘어온 사람을 알아보거든요. 안 넘어온 사람은 자기로 돌아가고 있는 중이고 넘어온 사람은 돌아갈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거죠. 그냥 예수님의 피만 증거하면 되니까요. 그래서 세례 요한을 꽂아준 이유를 이제 아시겠지요? 세례 요한이 온 이유를. 선택. 자 골라잡아라. 어디로 왔다고요? 광야로 왔지요. 광야에 오니까 애굽이 어떤 나라인 것을 아는 겁니다.
왜? 올 때 그냥 온 게 아니고 문턱을 넘어섰거든요. 그 문턱이 뭐냐? 산 사람은 도저히 넘어 올 수 없는 문턱이에요. 바다 물을 건너온다는 게 말이 돼요? 그래서 제가 어떤 때 그런 강의 했어요. 홍해는 갈라지지 않은 채 이스라엘은 통과했습니다. 그걸 아는 사람은 이스라엘 중에 딱 두 사람밖에 없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우리는 홍해를 건너온 게 아니고 건널 수 없는 곳을 건너온 거에요. 이건 말이 안 되는 거에요. 인간은 죽음에 막히게 되어있거든요. 죽으면 나도 없으니까. 그동안 평소에 나를 위해서 살다가 내가 죽어버리니까 이제부터 ‘나’라는 게 의미 없어졌잖아요. 그 ‘나’의 의미 없음을 내가 건너온 거에요.
왼쪽에 있는 ‘나’와 오른쪽에 있는 ‘나’가 그렇게 차이가 이제 비로소 노출되는 거에요. 기존의 ‘나’는 아담에서 나온 ‘나’이고 주 안에 있는 ‘나’는 주님이 만들어 낸 새로운 주님의 ‘나’고. 성령으로 만들어 낸 ‘나’에요. 잉태치 못한 잉태된 ‘나’에요. 그러니까 내가 이제 할 일은 계속 누구만 구박하면 돼요? 나를 구박하면 돼요. 자기를 부인하는 게 성도의 일평생입니다.
나는 얼마나 못됐는지. 오늘도 못됐다 해 놓고 오늘도 또 새로운 못됀 짓을 하는 시간을 주께서 벌게 해주셔서 살았습니다. 얼마나 못됐게요. 얼마나 못됐게요. 어제 좀 못됐다고 해도 오늘도 더 못됐어요. 어떻게 해도 내 중심을 벗어날 길이 없어. 길이 없으면서도 싱글벙글 싱글벙글. 내가 감당할 수 없기에 주께서 감당해주셨잖아요.
그러니까 주께만 영광이 되고 거기에 나의 솜씨나 나의 실력은 거기에 끼어들지 않으니까. 세상에 이런 복을 보지 않고 믿게 됐으니 우리한테 이런 복을 도대체 왜 주십니까? 잘난 사람 주지 왜 나한테 이런 복을. 잘난 사람 얼마나 많은데요. 이 세상에 잘난 사람 훌륭한 사람 얼마나 많습니까. 문재인, 윤석열, 이재명, 홍준표. 얼마나 잘난 사람 많아요. 그중에 제일 잘난 사람 허경영. 공중부양 다리 막 들고 1억 준다는 사람들. 자기 돈도 아닌 게. 얼마나 잘난 사람 많습니까.
제가 어느 강의에서 그런 강의했지요. 예수님은 대선 후보가 아니고 우리의 왕이라고요. 백성이라서 왕이 선택하지 백성이 왕을 뽑는 게 아니라고요. 광주 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어요. 조금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너희가 뭘 보려고 나갔더냐. 그 선택을 우리에게 맡기지요. 광야에서. 그러니까 왕궁에 사는 사람이 좋으냐? 그걸 네가 네 환상의 목표로 삼느냐? 아니면 광야에 있는 세례 요한을 네 삶의 목표로 삼느냐. 묻습니다.
그러니까 26절에 광야까지 나왔으니까 주님의 취지를 알지요. “너희가 무엇을 보려고 나갔더냐 선지자냐 옳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보다도 훌륭한 자니라. 선지자 보다 너 나은 자니라” 이것 설명 필요합니다. 구약에 많은 선지자들 있지만 선지자보다 더 제일 큰 선지자가 뭐냐. 마지막 선지자 세례 요한이 제일 큰 선지자거든요. 그 이유가 뭐냐? 예수님보다 조명발을 더 많이 받아서 그래요.
왜냐? 언약은 더 키워지니까. 자라나니까. 가장 숙성된 언약에 가장 가까이 근접하게 포진되어 있습니다. 전기는 약하지만 전선이 가까이 있으면 강하잖아요. 세례 요한이 큰 자니라. 그런데 그 다음에 나온 말이 뭡니까? 28절에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지극히 작은 성도가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고 생각하는데 그런 뜻이 아니고 이 세례 요한보다 더 큰 이가 예수님 본인이라는 거에요. 본인. 예수님 본인이에요. 그리고 성도는 뭐냐? 여자에서 태어난 자가 아니에요. 성도는 예수님에게서 태어난 거에요.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태어났는가? 예수님이 원수를 원수 아무도 이겨내지 못하는데 그 원수를 주님이 친히 이겼다는 전리품, 결과물로 만들어 낸 것이 성도에요.
성도는 본인이 성도되고자 해서 성도된 것이 아니고 주님의 성과물이에요.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끝났다. 세리와 창기가 너보다 먼저 간다. 세리와 창기가 나쁜 짓해서 천국간 게 아니에요. 산다는 자체가 인간은 남한테 피해를 주니까요. 산다는 자체가요. 살면 쓰레기 나온다고 했지요. 쓰레기가 안 나오고 살 수가 없어요. 양치질 하고 숨 쉬는 것도 남한테 악취를 주니까. 피해를 주잖아요.
인간은 존재하는 자체가 거기서 쓰레기가 계속 나오고 그 쓰레기 나오고 자기는 괜찮다고 우기고. 그런 겁니다. 납작만두같은 인간들이. 오늘 제목 뭐한다고 했습니까? ‘납작한 존재’. 그걸로 밀어 붙이겠습니다.
주님께서 성령으로 만드신 거에요. 성령으로. 그런데 성령으로 만든 대상은 반드시 육이어야 성령의 의미가 살아요. 주님의 십자가 의미가 사는 거에요. 내가 구원받았다는 성도가 아닙니다. 십자가가 나타나야 돼요. 십자가가. 아까 유투브 동영상 첫 번째 강의가 그거였습니다.
전에는 여기인데 여기 되었다 할 때 그 이동하는 것. 이동경로가 나타나야지 내가 구원받았다가 나타나버리면 이거는 나로부터 해서 나로 말미암아 나로 가는 것 자기 부정이 안 되는 거에요. 여기 지극히 작은 자라도 큰 이유가 예수님 자신이 세례 요한보다 크기 때문에 그렇고 예수님의 생이 마감되기 때문에 그래요.
그러면 물어봅시다. 세례 요한이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죄인이지요. 그럼 세례 요한은 본인이 하는 말에 대해서 본인이 지켰습니까? 못 지켰습니까? 못 지키는 거에요. 율법적 기능은 본인이 한 말은 본인이 지킬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세례 요한 선지자의 말씀을 누가 이루었습니까? 예수님이 다 이루지요.
그러니까 유일한 선지자라면 예수님이 유일한 선지자에요. 선지자로부터 나오는 ‘왕왕왕~~~’ 제가 왜 그렇게 말하느냐 하면은 세례 요한을 위대하게 하지 말고 오늘날 우리도 세례 요한과 똑같은 입장에 있다는 겁니다.
Sweet Caroline 이라고 주님께서 외치면 다른 사람은 왕왕왕~~~~ Good times never seemed so good. so good. so good! 아주 좋다 이 말입니다. so good. 나중에 한번 찾아보세요. 우리는 따라하는 거에요. 주님을 따라하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어요. 뭘 따라한다? 주께서 어디에서 어디로 갔다는 것을 따라하는 거에요.
주님은 저주받았는데 주께서 아버지께서 그를 살렸다 하는 것처럼 내가 저주받은 사람 맞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 피가 살렸습니다. 유월절 기준을 계속 왕왕왕~~~. so good. 좋다는 말이죠. so good. 이 달콤한 캐롤라인. 왕왕왕~~~맞습니다. 아멘아멘아멘 하는 것처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사람이 한 것 말고 주께서 하신 일을 우리가 생각해보았습니다. 오직 주께서 하신 일만 우리에게 남게 하여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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