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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여수 특강 / 성경과 한국교회 / 요한복음 1:14 / 210830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요한복음

여수 특강 / 성경과 한국교회 / 요한복음 1:14 / 210830

정인순 2021. 8. 31. 16:15

 

음성1                      음성2

 

녹취:오용익

여수특강 성경과 한국교회(요 1:14) 210830A - 이 근호목사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오늘의 교재는 <뒤에서 본 한국교회> 이 책은 1996년도에 초판이 나왔고요. 이 책은 대장간에서 나온 것인데 그 전에 등불출판사에서 나온 이것이 먼저입니다. <성경과 한국교회> 이 책이 1987년도에 나왔어요. 그 내용을 그대로 다시 낸 거예요.

뒤에서 본 한국교회를 강의하면서 두 가지를 제 나름대로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요. 첫째는 이 책이 1987년도에 쓴 내용인데 지금도 동일한가, 하는 겁니다. 지금 여기서 나온 그 이야기를 지금도 동의할 만한가, 그 문제와 두 번째는 이 내용대로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가.

이게 1987년도니까 거의 몇 년 전입니까? 거의 35년 정도가 되었지요. 35년 전에 이 내용을 책으로 냈습니다. 추천사에 보면 “총신대학원 철학박사 신성종” 이런 것도 들어 있고 그래요. 추천하신 분에 대해서는 별로 ‘아, 큰일 날뻔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인데요.

오늘 이 책을 다 보면서 중요한 포인트를 짚어 갈 겁니다.

281쪽에 ‘집필후기’라는 것이 있지요. 제일 끝에 있는 대목부터 제가 그대로 읽어보겠습니다.

“결국 하나님에 관한 싸움이다. ‘어떤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냐’는 문제이다. 인간들의 머릿속에 미리 들어가 있는 하나님은 악마가 넘겨준 신이다.”

악마가 이미지를 만든 그 신이지요

“하지만…”

인간들 속에 보편적으로 들어 있는 하나님과 이 땅을 직접 방문하신 그 하나님과의 대조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 사건이 터져버린 거예요. 십자가 사건입니다. 십자가 사건이 터졌다는 말은, 인간들이 알고 있는 하나님과 직접 이 땅을 방문하신 하나님이 결코 갖지 않았었었다. 그걸 말해주는 거예요. 그래서 집필 후기에 보면,

“하지만 이 땅을 직접 방문하신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다. 이 땅에 오신 그분이 바로 참 하나님이시다. 그분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의 본질도 제대로 정립이 된다.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부르고 섬기고 찬양하고 선교에 열중한다고 해서 교회가 아니라 모여 있는 구성원들의 정신구조가 중요하다. 아이러니컬하게도 교회 자체만을 생각하는 자들의 모임은 교회가 아니라 종교 클럽에 불과하다. 오직 그리스도만 생각하는 자들의 모임이 교회이다.”

교회가 교회를 생각하게 되면 이것은 교회가 아니고 그리스도만 생각하면 교회고, 그런 뜻입니다.

“하지만 이들이 교회라는 명칭의 종교 클럽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현 세상의 죄성을 더욱더 노출시킨다.”

주님께서 종교 클럽으로부터 소외당했지요. 그렇게 해서 이 세상의 죄성을 더욱더 노출시킨다. 이 말은 뭐냐하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죄를 피해서 선한 것, 착한 것, 정의로운 것, 전부 다 악한 데서 도피해서 선한 것을 추구한 그 집합체가 그 당시의 최고의 하나님을 섬기는 단체였잖아요. 유대인의 회당이 그렇잖아요. 그렇지요.

악을 피해서 선한 것들은 다 집결한 곳 그게 그 당시 회당이었는데 예수님은 바로 그들에게 십자가 사건, 살해당한 사건이 생김으로 말미암아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인간이 생각하지 못한 그 죄의 마지막 모든 죄성은 다 모이는 곳이 바로 교회라 그 말이지요. 그래서 교회에서 온갖 종교적인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지요.

“인간은 자신이 지닌 종교욕에서 온갖 종교적 아이디어를 늘 방출해 낸다. 예수님은 이런 것들을 일체 저주한다. 하지만 종교시장은 이런 종교인들만 생존하도록 허용한다. 즉 기독교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종교인들을 찾고 또한 그들을 통해 신과 메시아를 배우려 하는 것이다. 직업 종교인들은 인간들이 원하는 종교 취향과 분위기와 맞아 떨어지는 쇼를 늘 생각해 내고 제공할 준비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인류 역사는 이런 종교가들의 가식적인 쇼와 더불어 황혼을 맞이할 것이다.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다. 하지만 종교적 활동만이 이 허무함의 최후를 화려한 낙조로 바꾸어 준다.”

여기 뭐로 바꾸나요? 화려한 낙조로 바꾸지요. 화려한 낙조, 여수 밤바다, 저녁노을이라든지 목포 낙조가 아주 아름답지요.

“서글픔의 극치이다. 지옥에 가까이 다가선 신비 체험을 마치 천국에 가까이 다가선 신비체험인양 바꾸어 준다.”

거의 지옥에 다 왔는데 자기는 교인들은 거의 천국에 다 왔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직업 종교인들은 이것이 인류에게 할 수 있는 최후의 봉사로 알고 있다. 연극은 끝나간다. 그동안 쭉 인류를 속여온 종교극 무대장치도 이제는 철거 되어야 될 순간이다.”

이렇게 해서 이 책은 끝나요.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은 교회가 무엇이냐, 하는 그 내용입니다. 끝을 먼저 이렇게 보고 그다음에 11페이지에 ‘1. 교회의 본질과 시대의 위치’가 나오지요. 12, 13페이지에, 인간들이 하나님이면 하나님 예수님이면 예수님을 쳐다본다는 거예요.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 당시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쳐다봤잖아요. 당신은 누군가, 하고 쳐다봤지요.

그런데 쳐다보는 그 인간을 누가 쳐다보느냐 하면, 주님이 쳐다봅니다. 13페이지에 나옵니다. 여섯 번째 줄에 “그냥 웬일인가 하고 구경만 한다. 그 광경이 현재 자기를 향한 하나님의 최종 판결이다. 그 정도로 인간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없는 인물들이다.”

처음에 책을 지을 때 그냥 서술형이라서 반말 형태로 했거든요. 그래서 이것도 반말로 되어 있어요. 이것은 다른 강의나 수련회에서 한 내용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은 주님을 분석하기 위해서 쳐다보는데 그렇게 쳐다보면서 주님으로부터 인간들은 판결을 받게 되어 있어요.

인간은 주님이 왜 오셨는지, 주님이 판결하러 오셨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저분이 과연 믿을만한 분인가? 내 인생에 과연 도움이 될만한 분인가? 내가 저분 믿게 되면 나에게 어떤 이익이 있을까?’를 생각하잖아요. 생각하는 그 생각 자체가 주님의 판결 대상이 된다 그 말입니다.

“네가 나를 보고 지금 무슨 생각하고 있는지 그거 보고 내가 너 심판할 거야.”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주님을 쳐다볼 때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면, 우리가 천국 가는 특별통로가 될 수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주님을 보면서 ‘아, 저분이야말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 생각 자체가 주님으로부터 판결받는 대상이 되는 거예요. 예수님 당시에 많은 무리들이 소문 듣고 예수님에게 왔잖아요. 인간은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을 평가하는데 자기가 평가하면서 자기들이 예수님을 평가하는 그 평가에 대해서 주님께서 평가한다는 생각을 그들은 느끼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자기가 택한 백성들에게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 그들이 원치 않는 것을 집어 넣습니다. 예를 들면 중풍병자가 주님 찾아왔을 때 병 고치러 왔는데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뭐라고 했지요?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막 2:5) 이렇게 했지요. 이것은 전혀 예상 못한 거예요.

그래서 택한 백성들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생각한 주님을 주님 쪽에서 교정해 주셨다는 거예요. 내가 주님을 생각할 때 이런 식으로 주님과 좋은 관계 유지하면 되겠다 하는 그 생각을 주님 쪽에서 그걸 바꿔주신 거예요. “그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그것은 네 일방적인 사고방식이야. 그게 바로 죄야.” 그렇게 교정시켜 주는 거예요.

14페이지에 보게 되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하라” “하지 말라”를 제가 언급을 했는데요. “하라, 는 인간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구원이 역사안에서 그 지향하는 바가 어디를 목표로 하고 있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 말라, 는 것은 인간의 무능력과 오해의 범죄의 기반이 어디서부터 도출된 것인지를 밝히는데 목적이 있다.”

주님께서 하라, 하지 말라, 하심으로 말미암아 너의 모든 출발은 하나님 보시기에 해서는 안 된다, 부터 출발을 했다. 출발을 했고, 주께서 하라고 하시는 것은 인간으로서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그런 목표 있잖아요. 그 목표를 주께서 제시하는 겁니다. 하라, 도 달성하지 못하고 하지 말라, 는 그것도 자체적으로 인간은 수정하거나 반성할 수 있는 능력은 없고 결국은 인간의 무능력성을 그대로 붕 뜨게 만드는 거예요.

그게 15페이지 중간에 나옵니다. “제대로 가르치자면 이렇다. ‘여러분은 이제 예수를 믿게 되면 자신의 원초적인 죄가 다 드러납니다다. 그리고 그 배후에 악마가 여러분을 항상 조종하려고 하고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자신이 바로 이러한 존재인 것을 날마다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 믿고 회개할 생각을 하면 안 돼요. 반성할 생각하지 말고 다 드러내야 돼요. 사람들이 직장생활 처음 하는 사람이라든지 또는 개인적으로 교육을 받는 어떤 관계에 있어서, 만약에 영어 과외나 수학 과외를 할 때 우리 선생님이 얼마나 화를 잘 내는지를 알아서 선생님이 묻게 되면 애가 답변을 이런 식으로 하잖아요.

애가 먼저 짐작을 해서 “제가 이런 답을 하지만 선생님 보시기에 이것도 틀린 답이겠지요? 선생님, 공부 너무 못해서 죄송해요.” 라고 잔소리 듣기 전에 먼저 자신을 낮추고 들어가잖아요. 그런 짓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자기 죄를 들춰내는 것이지 반성하라고 주께서 이야기하신 것이 아니에요. 반성한다는 이것은 일종의 자기 의를 포기 못 하겠다는 인간의 본성이지요.

지금 주님은 반성을 원하고 회개를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가 찾아내지 못한 네 원초적인 죄를 내가 찾아줄 테니 그냥 고맙소, 그냥 고맙게 여기면서 여기서 사시면 되는 거예요. 매사에. 자꾸 주님의 마음을 맞춰드린다는 생각을 그런 주제넘은 짓을 하면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주님의 마음을 맞추려고 시도하는 이것은 인간이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얼마나 훌륭하냐, 하는 것을 과시하는 용도로서 그런 식으로 타인을 다루잖아요.

그 태도를 감히 하나님 앞에 가지면 안 됩니다. 18페이지 보면, “교회란 무엇인가?” 19페이지, 사도행전 7장 38절의 말씀이 있는데 거기에 무슨 용어가 나오느냐 하면 ‘광야교회’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구약에는 교회가 없습니다. 구약에 교회가 없는 이유가, 교회는 모든 인간은 구원될 수 없음이 확정되고 난 뒤에 그때 나타나는 것이 교회거든요. 교회는 그냥 부르심을 입었다. 그렇게 보면 돼요. 원어가 어떻고 그런 식으로들 하는데 그냥 쉽게 말해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에요. 호출하는 거예요.

호출할 때 멀쩡하게 살아 있는 사람을 호출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죽었다고 규정된 사람을 호출하는 겁니다. 그런데 주님이 나를 호출할 때는 나는 이미 죽은 자로 규정되었다, 라는 사실은 호출받아야 알 수 있는 사실이에요. 호출받지 아니하면 ‘뭐 가능성을 보고, 나의 탤런트 보고 했겠지’ 자꾸 이런 생각을 해요.

그게 천주교의 교리거든요. 천주교의 교리가, “인간은 타락했지만 인간에게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뭐냐 하면 하나님 보시기에 그래도 거룩고 의와 성품의 씨앗은 남아 있다.” 그게 천주교 교리입니다. 그래서 천주교가, 불신자도 천당 간다, 하는 이야기를 자꾸 하는 이유가, 본인이 아직 몰라서 그렇지 나중에 연옥에 빠지면 그때 정신 차려서 ‘아이고, 잘못됐습니다.’ 하고 회개할 때 그래도 얼추 착한 사람들은 천국으로 보내준다는 거예요. 그러니 천주교는 천국이 뭔지 몰라요.

천주교는 뭐냐 하면, 지옥 갈 인간들이 구상해 낸 천국을 천주교는 천국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지옥 갈 인간들이 지옥을 생각하니 너무 암담하잖아요. 그래서 지옥에서 빠져나와서 착한 사람들끼리 모인 단체를 염두에 두는 거예요. 그것을 천국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부를 필요도 없지요. 자기가 알아서 양심 가지고 성당 나오면 되니까.

그러면 천주교 말고 기독교는 뭐냐? 기독교도 똑같지요. 똑같은 거예요. 기독교가 성경대로 하는 것, 복음대로 하는 것을 왜 무서워하느냐 하면, 하나님이 불러준 사람이 몇 명 안될까 봐 걱정이 되는 거지요. 만약에 어떤 교회 교인이 천 명이 된다면 그중에서 하나님께서 직접 진짜 성령 줘서 불러낸 사람이 두 명이라면 결국은 계산해보면 998명을 다 돌려보내야 되잖아요. 그 일을 못 하겠다는 거예요.

그거 해버리면 돈 내서 지은 예배당 이 큰 것이 텅텅 비게 되니까요. 이것은 자동적으로 비대면 예배가 되어버리지요. 목사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래도 택한 백성만으로 해서는 안 되고 택하지 않은 사람들도 복음을 전하면 혹시 아느냐, 택해줄지도 모른다, 이렇게 하는 그 자체가, 그 사고방식 자체가 본인이 신자가 아니라는 것을 들통 낸 겁니다. ‘아, 내가 주의 일을 방해하고 있구나.’ 하는 것을 아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설명하고 싶은 것은 광야교회라는 것, 스데반 집사가 광야교회라고 했는데 스데반집사님이 그 이야기할 때 근거가 19페이지에 보면 사도행전 7장 51, 52절에 나와 있어요.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그것은 뭐냐 하면, 이스라엘 자체가 선지자나 의인들을 죽였다는 거예요. 이스라엘 자체 내에 하나님의 진짜 신약에서 말하는 성도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어떻게 살아왔는가? 그들은 오히려 이스라엘한테 죽임을 당한 식으로 이스라엘 역사는 전개되었다는 거예요. 그 이스라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그 의인들을 가지고 광야교회라고 하는 거예요.

스데반집사가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 이런 설교를 한 것은 그들에게 회개하고 구원받으라고 설교한 것이 아니고요. 교회는 주님의 손에 달렸지 인간들이 땅에서 어떤 형식을 갖춘다고 교회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스데반집사는 명확하게 이야기한 거예요.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아주 적절한 조치를 당했지요. 그게 뭐냐 하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최후의 설교에요. 광야교회 이야기하고 돌아가신 겁니다. 돌아가셨다는 말보다는 이 땅에서 떠난 겁니다. 떠날 때 뭐라고 했겠어요? ‘잘 먹고 잘 살아라.’ 하고 떠나겠지요. ‘그래 내 말대로 그대로 됐네.’ 하고 떠난 거지요.

광야교회의 의미는 뭐냐 하면, 19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나오지만 예수님이 살해당했다는 그 사실은, 그 당시 유대인들의 일시적 흥분의 발로가 아니라 이것은 주님께서 교회 되게 한 주님의 원칙, 주님께서 거기에 집어 넣어준 필연적 원리원칙이 되는 거예요. 일시적인 흥분의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그러니까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죽인 유대인들도 일시적인 감정의 흥분의 발로가 아니고 그래야만 한다는 거예요. 성도라는 것은 바로 그러한 수모를 당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겁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죽음을 시간적으로 거꾸로 보고 있기 때문에. 그게 20페이지에 나옵니다. 위에서 네 번째 줄에 “예수 그리스도가 주가 되었다는 입장에서 구약을 시간적으로 거꾸로 보고 있는 것이다. 과연 그렇게 보니 다음의 놀라운 사실이 발견되었다. 즉 예수님의 죽음과 고난당한 아브라함, 요셉, 모세, 여러 선지자가 서로 연관성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다(행 7:1-53).”겁니다.

그래서 20페이지 중간에 “스데반은 이것을 통해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기쁨으로 참여하는 자기와 자기 동료들의 무리라고 규정하고 구약의 이스라엘을 광야교회라 불렀던 것이다.” 이걸 광야교회라 했다는 말이지요. 이걸 몇 년도에 썼다고요? 1987년도 5월.

그러니까 20페이지에서 광야교회라는 것은 뭐냐 하면, 세상이 다 끝났을 때 교회 이름이 광야교회가 되어야 됩니다. 핍박을 받고 목숨을 잃은 자의 무리. 스데반집사가 이런 이야기하는 것이나 요한계시록에서 성도를 지칭하는 것이나 어떻습니까? 똑같잖아요. 다 어디서 나왔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에서 똑같은 운명, 똑같은 처지에 오늘날 성도들이 놓여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말은 성도들이 뭘 하고 안 하고 전혀 상관없이 구원받은 거예요. 착하고 안착하고, 그것은 전혀 상관없는 거예요. 구원에 착하고 안 착하고 그것은 전혀 상관없는 겁니다. 내가 무엇을 할까, 하고 천국 백성 되는 것하고 아무 상관 없는 거예요. 그냥 너 있는 자리에서 주님이 당한 핍박이나 맞아라, 그거예요.

그래서 21페이지에 보면 출애굽기 19장 4절에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를 업어내었다. 이 독수리 날개로 업었다는 것은 독수리 날갯죽지에 얹혀서 구원된 거예요. 독수리 날개는 요새 말로 하면 드론쯤 되겠지요. 드론에 얹혀서 구원된 거예요.

그렇다면 구원의 주체자가 성도 본인이 아니지요. 본인의 행실 이런 것과 전혀 상관없는 거지요. 드론에 얹혔으니까. 드론은 오늘날 같으면 성령이지요. 드론에 얹혀서 구원된 겁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영을 성령이라 합니다.

22페이지에 밑에서 열째 줄, “하나님은 모세를 지도자로 뽑아 세우시고 법궤와 통해 그들과 함께 고난의 길로 나서시는 것이다”라고 되어 있어요. “떨기나무와 불꽃, 시내산의 뇌성과 번개, 모세의 십계명, 불기둥과 구름기둥, 만나와 메추라기, 이 모든 것은 하나님 자신이 만든 피조물을 손수 동원하시거나 또는 그 피조물의 형태로 자기를 표현하시는 방식이 되시니……” 천사를 보낸 거지요.

“……보이지 않고 영원하신 분이 시간적이고 제한적이며 유한한 것에 갇혀 있는 모습이다.” 이게 바로 광야교회의 구성환경입니다. 광야교회가 독수리 날개를 타고 구원받는다 해서 성도 어깻죽지에 갑자기 천사의 날개가 돋아나서 추석 명절에 집에 가다가 차가 막히니까 날개 펴서 ‘불신자들 고생해라. 나는 천사처럼 날아서 고향에 갈래.’ 이런 식은 없어요.

만원 버스에서 같이 고생하고 심지어 차표도 못 구해서 발 동동 구르고요. 이 피조세계의 혹독한 삶에 그냥 갇힌 채로 자신의 광야교회 됨을 다 드러내는 겁니다. 특별혜택은 일체 없습니다. 특별혜택은 없어요. 봐주는 것도 없습니다. 이게 광야교회에요. 그러니 교회가 굉장히 광야스러워요. 황폐한 모습이지요.

23페이지에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사실 안식일은 인간이 범죄 한 후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체제로 재정비되어 계약의 형태로 십계명 속에 주어진 것이다.” 시간이 계명 속에 들어온 겁니다. 시간이 계명 속에 들어오게 되면 모든 시간은 계명과 연결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의 율법을 위한 시간의 흐름’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23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 “안식일의 취지는 제7일에만 국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전 날에 다 내포되어 있다. 그런데 제 7일을 쉼으로써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하나님과 언약 상대에 놓여 있음을 확인하고 자기를 위한 삶에서 해방된다. 결국 예배도 하나님의 낮아지심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6일의 노동 가운데서 인간의 연약과 죄 때문에 자신들은 새 창조의 과업을 수행하지 못했음을 안다.”

날마다 매일같이 6일 동안 일하면 6일 동안 열심히 일하는 것이 결코 나의 구원에 보탬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6일 동안 체험을 하라, 그 말입니다. 그리고 7일에 희망을 두고. 안식일의 그 시간이 나중에 신약에 오게 되면 그 모든 율법을 누가 이루십니까? 예수님이 이루었지요.

예수님은 안식일을 이뤘잖아요. 그러면 안식은 언제냐, 가 아니라 안식일은 누구십니까, 에요.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 되는 겁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예수님을 보면서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은 나를 구원할 수 없는, 오히려 구원을 훼방질하고 방해하는 그런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아셔야 되는 겁니다.

그게 23, 24페이지 이야기에요. 그다음에 28페이지에 보게 되면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예수님은 3년 동안 열두 제자를 철저하게 데리고 다니셨는데……3년동안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신 것은 제자들의 자질에 기대를 걸어서가 아니라 반대로 인간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자격자가 못됨을 선택을 통해서 만방에 알리기 위함이다.”

제자들이 자기들이 예수님의 최측근이라 했지만 그게 구원받는데 아무 소용없었다 하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제자들을 옆에다 두고 계신 것이었어요. 34페이지, 진도 나가는 즐거움이 있어야지요. 위에서 네 번째 줄, “성령론적 창조론은 이제 기독론적 성령론으로 성령께서 인간 역사에 직접 관여하는 바탕이 된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기독론적 성령론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 중심의 성령론을 말하거든요. 성령론적 창조론은 뭐냐 하면, 예수님 오시기 전에 이 창조세계가 성령님의 주관하에 있었다는 것이 성령론적 창조론이에요.

창조를 이야기할 때 예수님 이전에는 성신을 집어 넣어서 설명을 해야 된다. 그 이야기입니다. 그게 시편 104편 31절의 말씀, “여호와의 영광이 영원히 계속할찌며 여호와는 자기 행사로 인하여 즐거워하실찌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성신의, 성령의 활동인데 그 성령의 활동을 영광의 보증금 또는 선불금, 먼저 값을 치렀다는 거예요, 값을 치르고 그 성령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주가 되게 하심으로서 먼저 성령을 받은, 보증금을 받은 자만이 그리스도 중심으로서 새로운 세계로 만들어진다. 그 이야기를 합니다.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 하면, 이 세상에 교회에만 주께서 일하는 곳이 아니라 교회 바깥에도 성령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한 겁니다. 그렇게 해서 35페이지에 새로운 피조물이 나옵니다. 새로운 피조물이라 하는 것은 그냥 해방자에요, 해방자.

어떤 해방이냐? 밑에서 네 번째 줄에 “죄로부터 해방”이에요.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롬 6:11) 죄로부터 해방이라는 이 사실을 우리가 전파하기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거예요. 죄로부터 해방을 이야기 안 하면 핍박을 받을 일이 없잖아요.

“죄로부터 해방이며, 죽음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히 2:15) 죽음으로부터 해방된 자유함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나 이미 죽었어, 하고 같은 말이에요. “마귀로부터의 해방이며” 마귀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마귀를 편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엡 2:2).” 집 살 때 귀신들린 집을 헐게 사세요. with a 귀신, 이제는 귀신과 함께 사는 삶. 여기도 각 방마다 귀신들이 많이 살고 있지요. with a 귀신. with a evil, 악마와 더불어 사는 삶. 아주 해방감으로 살 수 있는 거예요. 직장 가면 귀신들이 많잖아요. 직장상사부터 해서 전부 다 귀신들이잖아요.

그걸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거예요. 상사가 무슨 이야기 하거든 ‘아멘 믿습니다.’ 이렇게. 그다음에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이다” 귀신, 마귀들은 세상 문제 가지고 우리를 쫄게 만들지요. 주눅 들게 만들고 ‘너는 이제 큰일 났어. 너 이제 인생 망쳤어.’ 이런 식으로 하는데 그런 이야기와 더불어 즐기면서 살 수 있어야 돼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빌3:20)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애 키우는데 “엄마, 성적이 또 내려간 것 같아.” 엄마가 그런 이야기를 즐겁게 들을 수 있어야 돼요 . “학생회장 떨어졌어.” “잘 떨어졌어.” 그런 이야기를 즐겁게 듣고 할 수 있어야 돼요. 그게 바로 모든 순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이 내가 자유인이고 해방인이라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벌어진 일이에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멀리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그러니까 이런 정신이 갖추어져 있다면 구태여 아프가니스탄이나 파키스탄 선교사로 갈 필요도 없고 국경 없는 의사회 그런 일 안 해도 상관없습니다. 왜? 가까운데도 다 마귀 일인데 굳이 마귀를 찾겠다고 멀리 남수단까지 가서 톤즈 보고 울지 말라고 할 필요도 없고요. 그렇잖아요. 꼭 밀림에 들어가야 마귀를 만나요? 밀림에 있는 마귀는 진짜 토속종교에서 말하는 귀신이에요.

토속종교에서는 주로 밀림에 귀신들,마귀들이 많아요. 밤에 들짐승 우우우우~ 하고 우는 소리 들리지요. 귀신은 바로 가까이에 있어요. 귀신과 결혼했고 귀신과 함께 자식을 낳았고 귀신과 함께 직장생활하고, 그 모든 곳에서 전부 다 귀신들과 함께 살잖아요. 친밀한 귀신, 오늘 강의제목을 친밀한 귀신이라고 할까?

41페이지에 보면 초대교회는 뭐냐? 열한번째 줄에 “초대 교회에서 떡 떼는 일이나 주의 만찬은 같은 의의를 지닌다. 예수님께서 처음 한 덩이의 떡에서 조금씩 12조각을 떼어서 제자와 함께 식사를 한 것은(마 26:26) 이로써 우리 모두는 원래 하나에서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보여주신 행위인 것처럼 초대교회는 이 만찬의 예식을 행하므로 우리는 모두 교회라는 한 덩어리의 떡에서 나누어진 한 뿌리의 형제임을 새삼 인식하게 된다.”

초대교회에서 주의 만찬은 예수님께서 처음 한 덩어리의 떡에서 조금씩 열두 쪽을 떼어서 제자들과 함께 식사한 거예요. 이로써 우리 모두는 원래부터 하나에서 출발한 겁니다. 따라서 단독적으로 자기를 떼 내면 안돼요. 떼 내서 나는 해방되었다, 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진짜 귀신들이 와서 막 팹니다.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있는 채로 마귀로부터의 해방, 귀신으로부터 해방, 죄로부터 해방이지 단독으로 내가 떼어져 나와서 덤벼라, 이런 식으로 싸우면 진짜 덤빕니다. 자기만 얻어맞지요. 단독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몸과 지체로 연결된 상태에서 마귀로부터의 해방, 죽음으로부터의 해방, 세상으로부터의 해방입니다. 우리가 성도라고 너무 기분에, 감정에 취하면 안 됩니다. 사실이 중요한 거지요.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시며 가라사대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마 26:26)

45페이지 아홉째 줄에 “고난이 깊으면 깊을수록 주님을 더욱더 잘 알 수 있다.또한 하나임을 인식한다(행 7:54-60).” 고난, 세상과의 차이 남을 고난이라 합니다. 고난은 고생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요. 몸 아프고, 힘들고, 생활비 없고, 그게 고난이 아니라 세상과의 깊은 마음이 통하지 않는 상태, 말은 주고받는데 각자 자기 말하는 상태, 그런 상태입니다. 모닥불 피워놓고 새벽까지 이야기하는데 각자 자기 이야기하고 나중에 쓰러져 자는 상태, 서로 말이 안 통하는 그게 고난이에요.

그래서 수십억 재산 가져도 고난 받을 수 있어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4장 10절이지요. 사도바울이 이런 말 하니까 자기가 고난 안 받으려야 안 받을 수가 없지요. 이게 무슨 뜻인지 알겠어요? 이걸 조선일보에 한번 내 볼까요?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요.

불교의 경전에 나오는 이야기는 이해가 되지만 이런 이야기는 교회 다니는 사람도 이해 못해요. 예수 믿는 사람은 이해하는데 교회 다니는 사람은 이해 못 한다니까요. 교회 다니는 사람은 “등록하시면 천당 갑니다.” 그런 것은 이해해요. “성만찬 하시고 세례받으시면 천당 갑니다.” 그런 것은 이해하는데 “우리가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이것은 딱 봐도 뭡니까? 신내림이잖아요, 신내림. 이거 신내림이에요.

“항상 예수 죽인 것을 몸에 짊어짐은……” 뭐 진짜 등짝에 누가 붙은 것 같아요. 성령이 붙어 있잖아요. “예수의 생명도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뭐 우리 몸에 기껏 나타나 봐야 알레르기 반응 같은 것, 두드러기,이런 것 나잖아요. 종기. 그런데 그것 말고 예수의 생명이 우리 몸에 나타나고 있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아까 제가 이야기한 것은 다 잊어버리고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이런 생활 합니까?” 또 이렇게 아까 강의 그렇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 까먹어 버리고 “그러면 우리는 이 생활을 어떻게 실천에 옮깁니까?” 이렇게 하는데 제가 분명히 하라, 하지 말라, 하는 그것을 하지 말라 했지요.

이것을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하라, 하지 말라, 그것은 구약식이고요. 이것은 구약이 아니고 부르심을 입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을 각오하라, 이 말입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날 때 기뻐하고 좋아해라, 춤춰라, 그 말입니다.

53페이지 드디어 ‘1. 창세기와 한국교회’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것은 무슨 물입니까 굉장히 맛이 오묘하네요. 주의 생명이 같이 있는 생명수에요? 열한번째 줄 “첫번 안식일은 하나님의 하신 일에 하등의 하자나 잘못이 없다는 것을 선포하는 날이다. 만약 이후에 조금이라도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인간의 책임임을 아울러 말해준다.”

첫 번 안식일, 첫 번째 안식일이 생긴 이유가,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마지막에 인간을 만들어놨기 때문에 만약 그 이후에 조금이라도 창조에 잘못이 있다면 이 모든 것은 인간책임이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인간을 마지막에 만든 거예요. 왜냐하면 만약에 인간이 잘못을 해버리면 마지막 창조된 모든 것이 와르르 다 무너집니다.

게임에 보면 카드쌓기 하는 게임 있지요. 카드를 쌓는데 위는 건드려도 괜찮지만 밑에 있는 것을 빼버리면 와르르 다 무너지잖아요. 인간이 죄를 지었다 하는 것은, 이 세상은 인간과 더불어 소멸되어야 될 세상이다. 인간이 자기가 잘못해놓고 이 세상 환경이 어떻고, 온난화가 문제가 되고, 탄소발생률이 문제가 되고, 이런 식으로 자꾸 자기가 이 세상에 대해서 책임져야될 것 같은 생각을 하는 자체, 수습이 안 되는데도 기껏 할 수 있는 것이 허겁지겁 수습하자, 가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의 전부예요. 수습하자.

54페이지, ‘창세기와 한국교회’ 이런 식으로 제목을 붙인 이유가요, 이 책 제목이 ‘성경과 한국교회’잖아요. 원래 제목이. 이게 뭐냐 하면, 창세기는 이렇게 이야기하는데 한국교회는 이렇게 간다. 서로 대비하기 위해서 <성경과 한국교회> 해놓고 본론에 들어가면 ‘1. 창세기와 한국교회’ ‘2. 출애굽기와 한국교회’ 해서 마지막 요한계시록까지 ‘요한계시록과 한국교회’ 이렇게 설정한 겁니다.

그래서 한국교회를 볼 때 성경을 먼저 보고 봐야 된다. 그 말입니다. 54페이지 중간에 보면 “생명나무는 먹을 수 있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는 먹어서는 안된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 선악과를 알게 되면 창조행위가 흙으로 돌아가서 무효가 된다는 거예요. “먹으면 흙으로 돌아가 창조행위가 무효가 되고 만다.” 그러니까 선악지식에 대한 금지만 부각이 되는 거예요. 왜 그렇게 하게 하시는가 하면 마귀를 잡기 위함입니다.

모든 것을 허용하되 선악지식만은 금지되어 있다는 것을 부각함으로 말미암아 마귀를 잡아버리는 거예요. 왜 마귀는 선악지식을 아니까요. 거기에 도전했으니까요. 그래서 마귀는 인간을 인질로 잡아버렸어요. 선악과를 알게 해서 하나님이 날 치고 싶다면 하나님이 스스로 만든 인간을 치는 꼴이 되니까 이래도 좋으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한꺼번에 다 잡습니다. 악마와 그리고 그 추종하는 인간들을 다 잡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악마로 왕이 되게 하고 그 왕을 잡는 새로운 왕이 등장함으로써 그때 등장하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왕국이 등장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왕이 되는 나라가 등장하는 거예요. 마귀가 그 짓 안 했으면 하나님 나라, 라는 것은 없지요.

마귀가 그 짓 했기 때문에 마귀 나라 왕국을 치는 요건 하에 생긴 것이 하나님의 나라에요. 하늘나라라고 다 하늘나라 되는 것이 아니고 하늘나라 되는 바탕이 인간이 범죄해야 된다는 것이 하나의 조건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그때부터 창세기에 죽 나오는 것이 뭐냐? 하나님 나라를 만드는 거예요.

56페이지 제일 위에 언약이 등장하는데 너는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하라는 겁니다. 왜? 인간적인 핏줄이나 출생이 아닌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할례 언약이 등장하는 거예요. “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행한다는 것은 인간의 핏줄과 무관한 자만이 은혜의 땅에서 번성할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7이라는 창조 너머에 있는 추가적인 하루 1, 2, 3, 4, 5, 6, 7을 부정해버리는 그다음의 하루 그게 8일, 그 8일은 육을 죽여버리는 겁니다. 인간의 핏줄, 인간의 남성 생식기의 껍데기를 잘라버리니까요. 인간의 핏줄을 부정함으로서 생겨나는 나라, 할례받는 자만이 가능한 나라 그게 하늘나라입니다.

그래서 창세기의 요셉 이야기라든지 모든 이야기가 항상 부정한 것을 더불어 이야기해요. 요셉의 형들은 요셉을 팔아먹었다. 부정이지요. 부정하고 난 뒤에 그다음에 그 부정한 자에게 추가적인 은혜,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어서 자기 아버지 어머니와 형제들을 다 살렸더라. 항상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어요.

세상 나라를 뭉개고 천국이 오는 거예요. 천국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뭉개는 작업을 통해서 천국이 생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세상 나라라는 것이 꼭 필요한 거예요. 우리 육이라는 게, 육의 품성이 꼭 필요한 거예요. 그다음에 63페이지 ‘2. 출애굽기와 한국교회’ 오늘 강의를 들으시는 여러분은 오늘 이 두 시간을 통해서 성경 다 떼는 거예요.

63페이지 중간에 보면 노예를 만들어요. 의도적으로 하나님께서 노예를 만듭니다. 노예를 만드니까 히브리인들의 특징은 이 세상에 주인공이 아닌 자가 되어버렸어요. 이 세상에 종속된 노예 생활을 하고 있어요. 이게 의미가 굉장히 깊은 건데요. 이 세상 주인이 따로 있고 억지로 그 주인의 명령을 따라야 될 노예가 또 따로 있는 거예요.

하나님은 어느 쪽을 구원하느냐 하면, 그 노예를 주인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을 공격하기 위해서 그 주인으로부터 핍박을 받는 자를 새로운 나라로 만들어버리면 새로운 나라를 통해서 이 세상을 유일한 세상으로 간주했던 자에 대해서 공격이 가능해져 버려요. 그들에 대한 심판이 가능해지지요. 그래서 언약 맨, 히브리인들을 노예로 만들어버립니다. 노예의 특징은 뭐냐? 이미 주인에게 시달리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냥 언약의 하나님만 쳐다볼 수밖에 없어요. 자기 힘으로 사는게 아니지요.

64페이지 밑에서 아홉째 줄에 “하나님께서 히브리민족을 끄집어낸 것은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는 차원이 아니었다.” 출애굽기 3장 1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정녕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히브리민족을 끄집어낸 이유가 그들 구원 위주가 아니고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긴다는 거예요. 하나님을 섬긴다는 이것은 자기가 지성으로 이성으로 깨달은 그 하나님이 아니고요. 실제로 자기가 이 세상에서 처참하게 망가지고 눌리는 그 체험을 의도적으로 유발하신 그 하나님을 섬기게 되는 겁니다.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이렇게 고생하게 하신 그 하나님을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섬기는 거예요.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지요. 이것은 웬수잖아요, 웬수. 자기를 망하게 하고, 자기 자신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살 희망과 여지를 완전히 없애버린 그자를 자신의 구원자로 섬기는 겁니다. 마치 다윗이 밧세바를 만나고 난 뒤에 ‘밧세바 네가 없었으면 나의 구원은 없다’는 식으로. 내 아들 솔로몬도 없었다, 하는 식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65페이지에 보면 이런 게 있어요. 위에서 두 번째 줄에 봅시다. 제가 책을 구성하면서 성경과 한국교회라고 했지요. 성경 이야기하고 그 뒷부분에 한국교회는 이 성경과 완전히 다른 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대비시켜서 보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노예같이 힘든 경제구조에서 돈의 압력으로부터 구원받기 위해 여호와 하나님을 이용하려 든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숨통이 트이면 여호와를 다시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마치 구약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는 짓을 교회 교인들도 그대로 하고 있는 겁니다. 십분 쉽시다.


여수특강 성경과 한국교회(요 1:14) 210830B - 이 근호목사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66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 지금 ‘2. 출애굽기와 한국교회’ 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건져냄’을 당한 인물이다. 그의 인생은 물에서 시작된 셈이다. 그는 죽음과 신생을 물을 통해서 경험했다.” 모세가 보았던 믿음의 세계, 모세가 믿음의 세계를 보았다 했는데 사실은 본게 아니고 출생부터 그걸 체험을 시작한 거예요. 멀리 본 게 아니라 이미 시작이 된 거예요. 자기 인생 자체가.

모세라는 말, 모세는 물에서 건짐을 당했잖아요. 물은 바로 죽음이지요. 죽음에서 신생을 경험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멀리 본 게 아니고 벌써 나의 존재 자체가 소망의 세계, 믿음의 세계가 개시가 된 겁니다. 성도도 똑같은 입장이에요. 교회가 있다는 그 자체가 이미 천국이에요. 교인들이 천당 가는 것이 아니고 교회 자체가 천국이에요. 마치 모세의 삶 자체가 믿음의 세계의 개시가 된 것처럼 똑같은 입장입니다. 모세가 물에서 건져낸 것같이 이스라엘도 어디서 건져내는가? 홍해 물에서 건져냄을 당한 겁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한 것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첫 열매고 그다음에 모든 성도들도 예수님이 가신 그 코스 그대로 그걸 반복해 버리지요. 개구리 왕이 하는 짓을 그 뒤에 개구리 졸개들도 똑같이 따라 해야 되는 것처럼 주님이 하신 그 일을 똑같이 해야 되지요. 죽었다가 살아난 것처럼 성도도 죽었다가 그대로 살아나는 겁니다.

죽었다, 하는 것은 선악을 따지는 세계와 더불어 죽어 있다가 너는 선악 세계를 따지지 않는, 잘잘못을 따지지 않는 생명 주심의 세계로 옮겨지는 그 일이 예수님처럼 성도들도 똑같이 그 뒤를 그대로 반복해서 그 환경속에 들어가게 되는 겁니다.

72페이지 ‘3. 레위기와 한국교회’ 레위기는 죽음과의 동행 또는 심판자와의 동행. 73페이지, “성막 제도의 재료는 비록 애굽에서 가져온 것들이지만 하나님의 희생 제사에서 나온 그 피뿌림을 통해서 거룩하다고 인정받는다.” 하나의 물체인데 물체에다 물질을 튕기고 뿌려주니까 이게 거룩이 되어버린 겁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뭐냐 하면, 인간의 육신은 예수님의 피뿌림으로 성도가 되는 원리를 레위기에서 보여주는 겁니다.

그 당시 레위기에서는 실제로 모세가 양의 피를 뿌렸잖아요. 그건 어디서 출발하느냐 하면, 바로 유월절에서 출발하는 겁니다. 유월절에 실제로 문설주에 피를 발랐지요. 그 구조가 확대가 되어버려요. 그러고 보니까 오늘 칠판에 하나도 안 썼네요. 유월절 피 구조가 확대 또는 확산되는 거지요.

양의 피는 물질인데 이 물질을 문설주에 바르는데 이 문설주도 물체지요, 물체와 물질이 만나서 하나님께서 물질을 살려냅니다. 이런 식으로 점점 확대가 되게 되면 이 구조가 더 확대되면서 복잡해 집니다. 복잡해 지면서 양적인 확대 확산이 새로운질, 성질을 유발합니다. 양적 확대가 새로운 질을 유발하게 되어 있어요.

세상 철학에서는 이걸 마르크스의 ‘변증론적 유물론’이라 하는 거예요. 양적 확대가 질적 생산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이스라엘 자체가 그래요. 이렇게 확대되면서 율법이 늘어난다. 율법이 늘어나면서 점점 더 복잡해지는데 율법이 늘어나는 계기가 뭐냐 하면, 억울한 의인의 죽음입니다.

억울한 의인의 죽음이 이스라엘에 새로운 질을 가져다 줍니다. 희생이라는 의미가 양의 희생이었는데 점차 이게 뭐로 바뀌느냐? 인간의 희생으로 전환 되는 과정을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지요. 의인의 죽음 또는 선지자의 죽음. 모세 말 안 듣는 것들이 제사 다 드리고 제물 다 바치고 십일조 하는데 의인은 죽고 선지자는 죽어 나가지요.

그러한 과정이 이스라엘에 율법이 점점 더 추가되면서 인간으로 하여금, 이스라엘로 하여금 율법이라는 그 죄의 지적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인간은 거기서 탈피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레위기는 죽음과 더불어서 동행한다. 죽음과 동행한다.

오늘날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자, ‘4. 민수기와 한국교회’ 75페이지. 중간에 보면 “사람 죽이는데 대범한 자들이 이미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있다. 이들은 쫓겨나야 될 대상이다. 누가쫓아내는가?” 쫓겨나야 될 대상과 쫓아내는 이스라엘의 질적인 차이를 민수기가 보여주는 것입니다. 한쪽은 언약궤가 있고 한쪽은 언약궤가 없고.

그다음에 77페이지 중간에 보면 “거룩이란……” 성경 전체에서 중요한 테마 중 하나가 나와요. “거룩이란 양의 개념이 아니고 영역개념이다.”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거룩이란 계속 착하고 거룩한 것을 많이 많이, many many, 끌어모아서 거룩이 되는 것이 아니고, 성화론처럼 자꾸 쌓는 것이 아니라 어떤 영역에, 어떤 공간에 속해 버리면 그 자체적으로 거룩이 되는 개념이에요.

이게 바로 민수기에 나오지요. 언약 안에 있으면 그 자체가 새로운 영역을 구성하게 되니까요. 민수기에서. 그 언약궤가 저 많은 군사와 무기를 갖고 있는 이방 민족을 이깁니다. 그렇게 되어 있어요.

그 다음 81페이지, ‘5. 신명기와 한국교회.’ 제일 위에 보면 “신명기는 받은 율법을 재천명함으로써 인간에게는 구원받는 문제보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우선이라는 점을 일깨워 주는 책이다.” 이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에게 구원받는 문제가 되어버리면 구원받는 문제는 사적 문제, 개인적 문제거든요. 구원이라 할 때는 반드시 앞에 생각하는 것이 ‘나의 구원’이 생각나잖아요. 구원할 때 나의 구원이라는 말이지요.

이런 개념은 신명기에서는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다 죽으니까. 홍해 건너온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다 죽으니까요. 이것은 개인 구원이 하나님 일의 목표가 아니고 그 뒤에 뭐라고 되어 있어요?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우선이다.”

하나님의 영광과 거룩이 우선이라는 것은 신명기에서는 뭐로 이야기하느냐?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곳이 약속의 땅이지 네 이름이 거하는 곳이 약속의 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름이 약속의 땅의 주인공으로 서려면 그 하나님의 이름 앞에서 누구 이름은 제거되어야 되겠어요? 나의 이름은 아예 포기하라. 나의 개인적 구원을 포기하는 거예요. 이게 신명기에요.

나의 개인적 구원을 포기하는 자가 구원받은 사람이에요. 지금껏 나를 위해 살았잖아요. 그런데 십자가라는 것이 뭡니까? 자기를 뭐하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제거하는 거예요. 어느 인간도 자기를 제거할 수 없는데 성령의 힘으로 나를 제거해버리고 제거하시는 분의 나라에 감히 우리가 들어가는 겁니다.

그런 취지에서 82페이지 밑에서 여섯 번째 줄 보면, “애굽에서 먹던 양식이나 일상적인 식량을 제공해주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사람이 사는 것이 떡만으로 사는게 아님을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이제는 옛날 애굽에서 먹던 양식 말고 내가 주는 새로운 양식을 먹으라, 가 아니고요. 그러면 또 개인적이 돼요. 사적이 된다고요.

그게 아니고 이걸 네가 떡이라고 여기지 말고 그냥 말씀이라고 봐라, 그 말이에요. 말씀이 네 안에 들어온 것으로 여기면서 만나를 먹으라는 거예요. 만나는 인간이 배고프다고 준 게 아니고요, 일주일의 어떤 텀, 안식일 빼놓고는 늘 오게 되어 있어요. 스케줄대로 주어집니다.

만나 배급 스케줄이 주님의 일방적인 안식일 타이밍 맞추기 위해서 주는 것이지 네가 배고프다고 주는 것이 아니거든요. 너 배고픔보다 주님의 스케줄에 맞춰야 되는 것이 주의 백성에 합당한 요소다, 그 말입니다.

그 비슷한 것이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이루어집니다. 내 살과 내 피를 마셔야 한다. 네가 원하는 오병이어는 말고 내가 주는 내 살과 피를 먹어라. 그래야 네가 영생이 있는 겁니다. 그런데 너는 맨날 나에게 올 때 떡 주세요, 또는 고기 주세요, 내가 원하는 것을 달라고 할 때 그것은 바로 육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육에서 못 벗어나는 거지요.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주시는 것을 원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이지요. 그래야 주도권이 내 위주가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바뀌게 되면 내 이름은 주님 앞에 삭제가 되고 주의 이름이 나에게 주도권을 쥐게 되는 겁니다.

‘6. 여호수아와 한국교회’ 87페이지 여호수아에서 정복전쟁이 실패가 되는데요. 아이러니하게 재미있는 것은 인간이 손대서 실패함으로 말미암아 뭐가 오히려 부각이 되느냐 하면, 이 영토는 순전히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주시는 땅인 것이 강조가 돼요. 하나님이 그냥 주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하는 행세가 하나님 일에 방해된다는 요소도 같이 벌어지게 만들어요.

그러니 죄 지으셔야 돼요. 그러니까 죄를 짓는 이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죄짓는 것을 감사해야 돼요. 왜냐하면 죄를 지을 때마다 내가 가고자 하는 나라가 내가 원하는 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늘, 그때마다 환기되고 새롭게 새롭게 우리에게 느껴지게 되는 겁니다.

87페이지 보면 “전리품을 누가 훔쳐갔기 때문이다” 전리품을 누가 훔쳐갔지요? 아간이 훔쳐갔잖아요. 그렇지요. 여리고 성에서 훔쳐갔거든요. 아간 입장에서는 여리고 성만 차지하면 됐잖아요, 하는데 여리고성은 일부고요. 여리고 성의 전쟁은 정복 전쟁, 모든 약속의 땅을 차지할 때까지 아직 끝나지 않았어요.

여리고 성의 정복의 정책은 인간이, 이스라엘이 뭘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이스라엘 자체를 소유할 때 전쟁은 끝나는 겁니다. 주님이 나의 전부를 지배할 때 전쟁은 끝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는 거예요. “너는 말이야. 네가 사나 죽으나 내 거야.” 할 때 주님의 나에 대한 전쟁은 끝났습니다.

그 전쟁의 느낌은 ‘휴~ 끝났구나. 아, 이제 내 소망은 끝났구나.’ 이렇게 되지요. ‘7. 사사기와 한국교회’ 92페이지에 보면 기드온이 전쟁하고 난 뒤에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사사기 8장 22, 23절에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그러니까 여호와가 다스린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 뭘 굳이 집어넣어야 돼요? “내가 당신을 다스리지 않습니다. 내 아들도 다스리지 않습니다.”라는 말을 한다는 것은, 기드온이 백성을 다스리고 아들마저 세습적으로 다스린다면 그것은 세속나라가 되는 거예요. 세습이 되니까. 특정 인물이 전체 이스라엘을 다스리게 되면 이것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이 되는 것이 아니고 이방나라와 똑같이 되어버리는 거예요.

그 뒤에 보나 마나 나오겠지요. 97페이지 셋째 줄 보면 “십자가를 보여주지 못하는 장로는 장로가 아니며 십자가를 보여주지 못하는 목사는 목사가 아니다.” 이 말을 왜 합니까? 방금 이야기했던 다스림, 인간의 다스림이 있으면 그 교회는 교회가 아니다 그 말이지요.

96페이지 중간에 보면, “은사가 바닥났음에도 계속 목사를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처음에는 주님을 위해 죽으려고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으나 이제는 평생 자기를 살리는 고착된 직업과 직장으로 목회에 임한다.” 지금 목회자, 목사 되지도 않은 인간이 1987년도에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예요. 은사가 바닥났는데 왜 자꾸 목사를 하느냐는 거예요. 은사가 바닥났는데.

그러니까 회사 사장으로서 괴로운 것 중 하나가 뭐냐 하면, 직원의 기술력이 바닥이 났어요. 새로운 제품과 생산에 그 노동자의 노동력은 더이상 필요치 않아요. 필요하지 않는데 정규직이니까 계속 있겠다는 거예요. 사표 안내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고집을 부리거든요. 사장 입장에서는 월급을 줄 수가 없지요. 왜? 제품생산의 그 가격을 형성하는 노동력에서 네 노동력은 더이상 필요치 않은 거예요.

예를 들어서 모든 한국의 애들이 유튜브 보고 피아노를 배운다면 피아노 교사가 더 이상 필요합니까, 필요 없습니까? 필요치 않지요. 그런데 피아노 가르친다고 돈 내라고 하면 이것은 강도고 도둑이지요. 노조 만들어서 데모한다고요. 노조 데모가 문제가 아니에요. 더 이상 그 노동력이 필요가 없다니까요.

인터넷 통해서 말씀 듣는데 목사가 설교해주겠다고 하니 “오지 마세요. 인터넷으로 말씀 들을 테니 안 오셔도 됩니다.” 아주 공손하게 사양해도 기어이 설교하겠다고 들이밀어요. 안 듣겠다는데, 당신 설교 안 듣겠다는데. 뭐 어쩔 건데? 이게 바로 사사기입니다. 이게 사사기에요.

성경이 무서운 책이지요. 95페이지 중간에 한국교회가 자기 교회를 “더 키우기 위해서 그들이 생각해 낸 아이디어는 걸출한 영웅을 기획상품을 대대로 판촉에 나서는 것이다.” 그것이 뭐냐? “인격과 설교가 출중한 인물을 당회장으로 모시고 있는 교회니 한 번씩 왕림해 주시기 바랍니다.”

인격과 설교가 출중한 인물, 인격이 출중한 인물을 내가 본 적이 없어요. 목사치고 인격이 출중한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설교를 재미나게 하는 사람은 본 적이 있는데요. 박영선 목사나 이런 사람은 있는데 인격이 출중한 사람은 지금껏 내가 등불 들고 찾아도 없어요. 왜? 없어야 되고, 인격이 출중해버리면 그 사람은 마귀입니다. 주님을 가려요.

그러니까 교회가 주님을 가리는 교회가 되는 거지요. 99페이지, ‘8. 룻기와 한국교회’ 99페이지 중간에, “상속의 귀중함을 룻은 알았다.” 룻은 하나님이 약속한 상속은 어떤 경우라도 하나님이 책임지고 연속시킨다는 사실을 이방 여인, 모압여인이 눈치챈 거예요. 그래서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1:16) 룻은 모압이라는 중소기업을 버리고 대기업을 선택한 거예요. 하나님이 운영하는 대기업, 하나님이 책임지는 상속, 그게 룻기지요.

그다음에 102페이지 ‘9. 사무엘상과 한국교회’ 105페이지에 보면 사무엘상 12:19절, “모든 백성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당신의 종들을 위하여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우리로 죽지 않게 하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죄에 왕을 구하는 악을 더하였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105페이지에 나오는 사무엘상 12장 19절의 이 이야기 같으면 이스라엘 백성은 이미 왕을 구했잖아요. 구해놓고 사무엘을 통해서 또는 하나님을 통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것은 바로 죽을 죄에 해당되는 거예요. 왕을 구하는 게.

그래서 제가 이 책을 쓰면서 한국교회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느냐 하면, 지옥 갈 짓을 한 거예요. 우리의 영적 지도자를 원한다는 자체가. 하나님을 믿는 게 아니고, 주님을 믿는 게 아니고 목사를 믿고 있어요. 그러면 여기서 사무엘의 역할은 뭐냐? 왕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그 의식과 그 생각을 연속시키는 조건 하에 합당한 왕을 등장시키는 역할에 사무엘이 관여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상에 보면 사울 왕은 조금만 잘못이 있어도 그걸 핑계 삼아 당신은 끝났어, 하고 찢어버리지요. 찢어버리고 반대로, 사무엘하를 보면, 다윗이 무슨 짓을 해도 당신이 왕입니다. 왜? 당신은 죄인의 괴수이기 때문에. 당신을 통해서, 인간은 근원적으로 죄에서 태어났다는 것을 왕을 통해서 증거하기 위해서 당신은 왕이 꼭 되어야 되는 분입니다.

살인하고 간음한 자만이 왕이 되어야 돼요. 그리고 그 다윗의 족보, 혈통을 통해서 누가 오 느냐? 메시아가 오잖아요. 메시아는 죄인을 통해서 메시아가 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 당시 바리새인들은, 메시아는, 하늘나라는 거룩하기 때문에 의인을 통해서 온다고 생각한 겁니다.

죄인을 통해서 구원자가 나타난다는 사실 인간의 아이디어 속에는 없어요. 그러니까 참된 교회란 인간들의 사고방식과 얼마나 달라야 하는지, 예상밖에 달라도 보통 달라야 되는 것이 아니겠지요. 성도라면 세상 보는 눈이 완전히 바뀌어야 되는 겁니다.

110페이지 ‘11. 열왕기와 한국교회’ 나라가 두 조각 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10페이지 중간에 보면 “세습제가 제대로 이루어지고 북쪽 나라는 힘에 의한 혁명(쿠데타)이 계속된다.”그러니까 진짜 언약의 나라는 굳이 힘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남쪽 유다나라를 통해서 보여주는 거예요.

정통성을 상실한 나라는 이처럼 힘을 가지고, 권세를 가지고 압박을 하고 그것으로 힘을 모아서 하늘나라 백성이 되려고 하는 그 시도가 바로 열왕기를 통해서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111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보면 “솔로몬이 받은 물질적 축복은 솔로몬의 행실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윗 언약에 의해서 준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오늘날 뭐와 같으냐 하면, 내가 구원받은 것은 내 행실이 아니라 십자가에 근거해서, 십자가에 근거해서 준 약속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십자가만 자꾸 자랑하는 거예요. 내가 아니고 십자가, 내 행실이 아니고 십자가, 라고 십자가만 자랑하는 겁니다. 문제는 그렇게 하다가 교회에서도 쫓겨난다는 거예요.

113페이지 보면, 제가 일제시대까지 거론해 놓았어요. 네 번째 줄에 “일제시대 때는 종말론이 문제였다.” 왜? 우리나라가 일제의 압제에 있지만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한민족을 살릴 것이다, 한 겁니다. 그래서 애국가도 뭐라고 되어 있느냐?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나님도 아니고요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

오래 살아 뭐 할건데? 뭘 만세까지 해요. 지겹지도 않나 몰라. “오늘날 교회는 성령론과 교회론이 문제가 된다. 항상 ‘이런 식으로 하니까 잘 먹혀 들어간다.’ 하면 그 곳에 문제가. 왜냐하면 거룩이 없이도 되는 목회는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엘리야나 엘리사 시대가 아니다. 지금은 어떠한 성향의 선지자가 요구되는 시대인가? 한탕주의를 경계하고 급속부흥을 비난하는 선지자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했고요. 부흥을 비난하는 선지자가 필요하다.

그다음에 114페이지 ‘12. 역대기와 한국교회’ 위에서 두 번째 줄 “선조들의 실수와 사단의 유혹(대상 21:1) 그 와중에서도 믿어보자고 노력한 흔적들로 이어져 온 이스라엘은 결코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망하지 않는다.” 그리고 아홉째 줄 “이 세상 나라는 흥망성쇠가 있어도 다윗의 나라는 영원하고, 국가의 형식은 사라져도 본질은 끊어지지 아니한다”

그게 뭐냐 하면, 바로 물질적인 성전이 하늘로 올라가요. 성전중심, 다윗언약 중심의 나라는 영원히 망하지 않는 나라, 라는 뜻으로 역대기가 있습니다. 116페이지 ‘13. 에스라와 한국교회’ 중간에 보면 “70년의 포로 생활을 통해 율법의 범 우주적 성격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제 율법은 이스라엘 민족만의 율법이 아니라 율법의 범세계적인 율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율법의 그 범 우주적 성격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만천하에 흩어버려요. 한데 모이지 말게 흩어버려요. 흩어 버리면 흩어져 버리는 가운데서도……, 흩어졌잖아요. 그것을 다시 끌어 모을 때 옛날처럼 잘하라고 끌어모으는 것이 아니고 이제는 이미 완료된 상태에서 온전하다는, 완전하고 의롭다는 원칙을 가지고 다시 끌어모아요.

그럴 때 그들은 법에 의해서 율법의 완성에 의해서 구성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117페이지 밑에서 다섯 번째 “구약의 모든 형식은 모형이고 그림자에 불과하다(히 8:5)”

119페이지 ‘14. 느헤미야와 한국교회’ 보면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에스라는 유다와 베냐민 지파만을 제사직에 참여시키는데(4:1; 10;9 11;5)……” 이것은 뭐냐 하면, 다윗언약 때문에 그래요. 다윗언약이 유다지파거든요. 베냐민은 유다지파의 보조역할을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것은 다윗언약에 의해서 완성된 거룩과 레위지파에서 말하는 거룩에서 유다지파, 레위지파가 실패한 것을 완성 시키는 새로운 지파로서 유다지파가 등장합니다. 그게 다윗언약의 실체였다, 그렇게 생각하시고 여러분이 로마서 1장 3절에 보면 메시아가 누구에서 나왔습니까? 다윗의 혈통에서 나오지요. 또 히브리서 7장에 보면 레위지파를 버리시고 또 레위지파 말고 다른 지파를 세우셨으니 그게 유다지파입니다.

“우리 주께서 유다로 좇아 나신 것이 분명하도다 이 지파에는 모세가 제사장들에 관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없고 멜기세덱과 같은 별다른 한 제사장이 일어난 것을 보니 더욱 분명하도다”(히 7:14,15)

에스라 느헤미야가 맥을 같이 하고 있는 겁니다. 122페이지 ‘15. 에스더와 한국교회’ 124페이지 밑에서 세 번째 줄에 에스더는 이 한 줄로 정리될 수 있어요. “에스더에게는 미모만 은혜가 아니라 목숨도 은혜였다.” 미모 여러분에게 해당되는 이야기입니까? “미모만 은혜가 아니고 목숨도 은혜였다.” 이걸 달리하면 목숨을 자기의 미모만큼 사랑한 여자, 주의 주신 생명을.

‘16. 욥기와 한국교회’ 125페이지, “욥기의 주제는 시련이 있건 없건 관계없이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피조물에 불과한” 것을 감사한다면 그게 성도다. 욥기 내내 욥이 이야기하는 것이 짜증을 내잖아요. “왜 하필 저에게……” 그건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그런 거예요. 왜 하필 저에게.

만약에 주님이 너보다 더 망가진 모습으로 올 때는 어떻게 하려고요? 그래서 나중에 욥이 재를 뒤집어쓰지요. 재를 뒤집어쓴다는 말, 재는 요새 말로 비료지요, 비료. 재 속에는 칼륨이라는 요소가 있어요. 화학적으로 K. 인과 질소, 칼륨, 그 세 가지가 비료의 3대 요소지요. 그 재를 뒤집어써요. “나는 그냥 비료에 지나지 않습니다.”

126페이지 넷째 줄에 “하나님께서는 시련 없는 친구보다 시련을 당하는 욥을 더 생각하신다.” 시련의 유무가 하나님의 기뻐하는 기준이 아니라 시련 없는 친구보다 시련 당하는 욥을 더 생각해 준다는 뜻으로 여기라는 말이지요. 아, 너무 가혹하지요. 시련 없이 태평한 친구보다 시련받은 너에게 내가 관심 둔다는 것을 네가 알아라, 그 말입니다.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고 예쁜 자식 매 하나 더 치는 셈이 되지요. 그래도 아파요. 엄마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알지만 맞는 이태는 아파요. 참, 모든 인간이 마찬가지잖아요.

그다음 129페이지 ‘17. 시편과 한국교회’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찬미-고난-찬미’의 순서가 나옵니다. 진짜 하나님의 영광, 그 영광은 중간에 어떤 과정을 거쳐야 되느냐? 나를 버려도 찬미가 되는, 앞의 찬미는 나에게 잘해줘서 찬미합니다, 하고 두 번째 고난은 뭐냐 하면, 이 고난 속에서 다윗의 실수가 나오고, 다윗의 부족함이 나오고, 불평이 나온다고요.

그런데 따지고 보니까 아까 욥하고 똑같은 거지요, 주께서 관심을 두니까 제대로 찬미가 나와요. 잘되어서 찬미 말고 피조물이라는 그 인식 자체로 만도 얼마든지 찬미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시편에서 보여줍니다. 그래서 시편은 다윗이 자기가 실수하고 자책하는 구절이 많이 나옴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찬미는 절대로 수그러들지 않지요. 더 풍성해지는 거예요.

시편의 끝부분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 잡혀가잖아요. 자기 죄 때문에. 바벨론에 포로 잡혀가면서 바벨론에서 제대로 된 뭘 하느냐? 찬미를 해요. 제대로 된 찬미를 한다고요. 131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에 나오지요. “땀을 흘리며 뿌리는 자”가 아닙니다. 땀을 흘려서 뿌리는 것은 이 세상 노동을 의미하고, 이 세상의 형편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열매를 웃으면서) 기쁨으로 거두리로다.”(시 126:5) 눈물을 흘리며 뿌리는 자. 눈물을 흘린다는 말은 세상에 대한 미련은 이제는 없다는 뜻이지요.

그다음에 132페이지 ‘18. 잠언과 한국교회’ 위에서 여섯 번째 줄 “신앙생활은 지혜있는 생활이지 무리나 오기의 생활이 아니다.” 자기의 본성을 그대로 노출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지혜로운 생활이에요. 그래서 132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 “이 도성의 거리와 골목에서 시범을 보이며 낮은 모습으로 우리의 아픔과 당황스러움을 체휼하시고 이해해 주신다.”

이 말은, “너는 은혜를 받을 자격도 없는데 지금 은혜를 받고 있는 것을 감지덕지 여겨라. 그게 지혜다.” 그 말입니다. 그다음에 ‘19. 전도서와 한국교회’ 일곱째 줄 “전도서의 저자는, 허무는 허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창조자를 찾게”(12:1) 한다. 이 말은 이 세상에 대한 허무의 느낌이 없으면 창조자에게 관심도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다음에 139페이지 ‘20. 아가서와 한국교회’ “아가서의 주제는, 사랑이란 상대를 아름답게 보는 마음”이다. 야, 이거 참 끝났지요. 구원의 시작은 내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좋게 보는 거예요. 앞으로는 평생 살면서 그 이유를 찾아가고 그걸 느껴야지요.

“이래도 좋게 보십니까?” “그래!” 할 말이 없지요. “제가 이런 짓을 해도 사랑하십니까?” “그래!” 이렇게 하는 거예요. “왜 그렇습니까?” “내가 만들었거든” 141페이지 ‘21. 이사야와 한국교회’ 밑에서 일곱 번째 줄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비천한 신분에 있는 처녀의 몸에서 왕을 출생시키겠다고 하신다(7:14).”

왕은 있되 그 왕은 비천한 몸에서 태어납니다. 142페이지 위에서 네 번째 줄에 “처녀의 몸에서 태어난 자식은 하나님의 분노의 자식이다.” 하나님이 이렇게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분노의 뜻을 나타내는 자식. 그래서 이사야는 이스라엘도 망하고 이방나라도 망하고 다 망해버리지요. 그 망하게 한 이방 나라 민족의 왕이 오히려 메시아가 된다는 이야기(이사야 40-48장)가 이사야에 나옵니다.

146페이지 ‘22. 예레미야와 한국교회’ 세 번째 줄 “진정 하나님의 약속은 사라지고 마는가?” 하나님의 약속은 과연 이스라엘이 붕괴됨으로서 사라지느냐 하는 문제에요. 147페이지 여섯 번째 줄 “70년의 포로생활에서 돌아온 후에 세워질 나라는 참된 왕에 의해서 운영될 것이다.” 70년 후에 올 것이다. 참된 왕이 참된 이스라엘을 몰고 올 것이다. 그게 예레미야죠.

그래서 148페이지 위에서 여덟 번째 줄 “여기에 비해 참 선지자는 종말을 종말 그대로 전한다. 그래서 사람들로 하여금 왜 하나님이 인간을 포기했는지 이유를 알고 있어야 한다.” 종말을 그냥 거침없이 따지지 말고 외쳐 버려라. 왜? 종말이 있어 줘야 그다음에 진짜 메시아와 이스라엘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에. 종말이 없는데 무슨 메시아가 필요하겠어요?

151페이지 ‘23. 예레미야 애가’ 위에서 다섯 번째 줄 예레미야애가 3장 33절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신 것이 본심이 아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고생 좀 해라. 각오해라. 너무 짜지 말고. 나도 그렇게 고생했다.” 그 말이거든요.

155페이지 ‘24. 에스겔과 한국교회’ 중간에 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155페이지 제일 위에 보면 “에스겔서는 하나님의 신과 영광의 이동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책이다.” 인사이동, 성전 가지고 이동시키는 겁니다.

158페이지 위에서 두 번째 줄에 “성전과 신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신전은 장소성에 사활을 걸지만 성전은 장소성과 관계없다. 장소성과 관계없이 모임 위주라고 중간에 나와요. “성경에서 말하는 성전이란 장소 위주가 아니라 모임 위주이다. 성전은 곧 사람들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합류해 계신 모임이다.” 장소나 건물, 숫자, 이런 것 가지고 마귀한테 시험받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그다음에 160페이지 ‘25. 다니엘과 한국교회’ 161페이지에 70이레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일곱 번째 줄 “70이레로 확정된 인류의 나이는 사라져 가는 제국의 뒷모습이다.” 인류의 나이는 이미 나왔어요. 인류의 나이는 70이레로 확정되었습니다. 사라져가는 제국의 뒷모습이에요.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세상 여수고 대구고 서울이고, 이 모든 세상은 사라져가는 제국의 뒷모습이에요.

서부영화에 그런 것이 있잖아요. 기차가 황야를 달리는데 중간에 무법자가 나타나서 기차를 끊어버리지요. 그렇게 끊어버리면 기차 끝 장면만 보이잖아요. 그 끝 장면을 아듀, 그냥 보내버립니다. 무법자가 권총 들고 “잘가라. 이 나쁜 놈들아.” 하고 보내버려요. 이 세상을 떠나보내는 거예요. 시간과 더불어, 역사와 더불어 빠이빠이, 하는 겁니다. 그게 새로운 나라, 오늘날로 오게 되면 이 세상과의 빠이빠이,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163페이지 ‘26. 호세아와 한국교회’ 호세아 6장 6절에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163페이지 위에서 일곱 번째 줄 찾았습니까? 이 말은, 나는 번제도 제사도 다 하나님을 아는 일을 방해했다 그 말입니다. 왜냐하면 반복되는 형식이니까. 형식을 반복시키니까 이게 계속 방해하는 거예요. 예배도 습관되니까.

166페이지 ‘27. 요엘과 한국교회’ 위에서 다섯 번째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야 한다고 했다(2:23)” 이것은 뭐냐 하면, 불가능한 이야기에요. 옷이야 찢고 또 사면 되잖아요. 백화점이나 옷가게 가서. 옷은 찢을 수 있어요. 그냥 성격으로 “아이고, 나 같은 인간은 안돼,” 하고 찢을 수 있다는 말이지요. 꼭 술 끊는다 해놓고 그다음에 무슨 핑계를 대서 오늘만 마셔야 되겠다, 하는 사람 있잖아요. 인간의 마음은 자기의 마음을 찢을 수가 없다는 겁니다.

마음을 찢으라 했잖아요. 주의 말씀이거든요. 신약에 오게 되면 성령께서 “내가 찢어줄게, 내가. 너 자신을 부정하게 해줄 게.” 그런 뜻입니다. 168페이지 ‘28. 아모스와 한국교회’ 위에서 열 한 번째 줄 보면 “너희가 이르기를 월삭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곡식을 팔게 하며 안식일이 언제나 지나서 우리로 밀을 내게 할꼬”(8:5)

바로 그만큼 이 사회 자체에 대해서 종교가 그냥 막연하게 취미가 되고 반복적인 습관으로 전락하고 만다는 그 과정을 필히 우리가 거쳐야 돼요. 우리 자신도. 40년 믿었느니, 50년 믿었느니, 내가 목사 한지 몇 년이니, 주께 통하지도 않는 그것을 우리가 경험하고 거쳐야 돼요.

자, 170페이지 ‘29. 오바댜아 한국교회’ 밑에서 세 번째 줄에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의 해결사가 아니라 자기 고통에 대해서 예민하”십니다. 우리 고통에 대해서 신경 쓰는 것이 아니고 너는 내 고통 신경 쓴 적 있나, 하고 되물으시는 하나님입니다.

171페이지 ‘30. 요나와 한국교회’ 제일 밑에 보면 “죽음의 바다에 빠진 요나는 자기 형벌에 들어간다. 저주의 깊이가 그렇게 깊을 줄을 몰랐다.” 하나님의 심판이 이론하고 실제하고 이렇게 충격적인지 몰랐다 그 이야기에요. 요나서 수요 설교할 때 했지요. 요나가 알고 있는 하나님과 실재의 하나님이 아직까지 요나에게 다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장차 메시아 올 때 십자가 지신 그분이 다 가르쳐주지 요나는 아무리 고생해도 주의 뜻을 다 모른다는 뜻이에요.

‘31. 미가와 한국교회’ 174페이지. 선지자도 매수당하는 거예요. 밑에서 네 번째 줄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3:5) 선지자 말고 가짜 선지자들이 주도권을 쥐는 거지요. 그런 시대에요.

177페이지 ‘32. 나훔과 한국교회’ 위에서 세 번째 줄에 “인간은 인간을 압제할 수 없다.” 그 다음 178페이지 ‘33. 하박국과 한국교회’ 밑에서 세 번째 줄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겠다”(창 12:3) 의인의 등장이지요. 그러니까 구원은 의인이 등장될 때 이미 구원이 진행되는 거예요.

이 말은, 내가 의인 되는 것이 아니고 의인이 와서 의인을 믿도록 하게 되면 그게 바로 복을 내리는 것이고 의인을 아는 것이 복이고 의인을 못 알아보면 그것이 저주가 된다는 말이 하박국이에요. ‘포도주가 있건 없건 외양간에 소가 많건 적건 그런 것은 신경 쓰지 마라. 중요한 것은 누가 의인이냐.’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180페이지 ‘34. 스바냐와 한국교회’ 다섯 번째 줄, 우상을 섬기는 것 “무릇 지붕에서 하늘의 일월성신을 경배하는 자와 여호와께 맹세하면서 말감(우상이거든요)을 가리켜 맹세하는 자……”(1:5), 그러니까 양다리 걸치는 자 주께서는 알아챈다 그 말입니다.

182페이지 ‘35. 학개와 한국교회’ 성전이 없다는 말은 더 이상 이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다. 떠나버린다. 하나님이 떠날 수도 있는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이 학개 선지자, 학개와 한국교회.

그다음에 185페이지, ‘36. 스가랴와 한국교회’ 스가랴는 제사장과 왕직을 동시에 겸하여 모든 다윗언약을 수행하시는 분이 메시아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제도가 필요 없지요. 제사장직과 왕직을 한 분이 다 쥐고 있으니까. 그걸 실효성 있게 보여주니까.

그다음에 187페이지 ‘37. 말라기와 한국교회’ 여섯 번째 줄 “잘못된 선택 사상은 잘못된 계약론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다.” 잘못된 선택 사상은 제대로 선택에 의해서 망한다는 이야기. 말라기 첫 장에 그게 나와요. 선택이 나옵니다. 선택은 하나님이 아는 선택과 네가 다르다는 겁니다.

그래서 188페이지 밑에서 두 번째 줄 세례요한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례 요한으로 하여금 도끼 이야기가 나오도록 만든 그런 선택론은 소용없는 구원론이다. 세례요한은 스스로 선택된 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리라’고 말했다.”(마 3:10) 잘못된 선택을 찍어버리는 겁니다.

그다음에 신약성경입니다. 신약성경은 간단해요. ‘1. 공관복음과 한국교회’ 194페이지에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일을 하러 오신 분이다. 이것 한마디로 끝나는 거예요. 신약성경의 예수님은 사람들이 원치 않는 일을 하시는 겁니다. 그래야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니까요. 내가 원하는 대로 해주지 않는 주님이 진짜 주님이에요.

그래야 내 믿음으로 믿지 못하고 주님 주신 선물로만 연결이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믿을만 해서 믿어버리면 그것은 가짜에요. 내 믿음을 차버리고 내 믿음에 부합되지 않는 메시아일 때, 그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이 메시아인 것을 아는 것은 다른 데서, 하늘에서 믿음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 오시고 그다음에 오순절에 누가 오신다? 성령이 온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194페이지 다섯째 줄 “인간들의 원초적 죄에 대해서……” 그냥 죄가 아니고 ”원초적 죄에 대해서 용납하지 않고 나무라시는 분인 것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도 매일같이.

197페이지 위에서 다섯 번째줄 “예수님은 사단에게 시험받는 경우에 단식이라는 고통하에서 이루어진다.” 죽는 자리에서 비로소,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그 살아 있는 힘이 얼마나 더러운 힘인 것을 자기가 죽는 자리에서나 눈에 보이는 거예요. 같이 살겠다고 할 때는 안보여요. 자기가 죽을 자리에서 비로소 이 세상은 믿을 만한 곳이 못 된다는 것을 안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악마가 무슨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208페이지 ‘2. 요한복음과 한국교회’ 211페이지에 요한복음과 한국교회 성령을 이야기하면서 여섯 번째 줄에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 16:8) 그것이 뭐냐 하면, 211페이지 중간에 “독생자의 영광은 성도 스스로 날마다 자기의 죄의 깊이를 더욱더 실감하고 자인할 때만 이루어진다.”

독생자의 영광을 기준으로 해서 그렇게 성령께서 책망을 하십니다. 나보고 잘못했다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를 네가 관심이나 두고 있는가에 근거해서 책망하는 거예요. 네 영광 말고 독생자의 영광에 관심 두고 있는가를 기준해서 우리를 책망하신다 그 말입니다. 똑바로 하라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고요. 독생자의 영광이 제대로 된 영광인 것을 네가 혹시 잊어버리지 않았는가 싶어서 책망하는 거예요.

214페이지 ‘3. 사도행전과 한국교회’ 보면,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오른손의 위력의 결과로 이루어졌기에, 그 오른편에 앉게 되신 우리 예수님을 통해서 성도도 동일한 부활의 위력이 나타날 대상이 된다고 보고 있다.”

사도행전 2:32, 33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 오른편의 확장, 오른편의 자리는 무슨 자리냐 하면, 주의 이름이 왕이 되시는 자리에요.

그 자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자기 백성을 강한 능력으로 데려오시는 일을 하시는 자리가 왕의 자리에요. 왕이니까 자기 백성을 알아봐요. 성령을 보내셔서 자기 성을 끌어당기는 일, 그게 주의 오른편 능력의 자리에요. 그래서 주의 백성을 솎아내는 그 작업이 사도행전이에요.

220페이지 ‘4. 로마서와 한국교회’에서 이야기할 것은 로마서 4장 25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그것으로 끝이지요. 범죄한 자 때문에 죽은 십자가가 범죄한 자를 의롭게 만드는 십자가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으면 할 수 없어요.

223페이지 ‘5. 고린도전서와 한국교회’ 다섯 번째 줄에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2:2) 224페이지 밑에서 열 번째 줄 “그런즉 누구든지 사람을 자랑하지 말라 만물이 다 너희 것임이라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나 생명이나 사망이나 지금이나 장래 것이나 다 너희의 것이요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요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니라.”(3:21-23) 225페이지에 밑에서 열 번째 줄 “아름답지 못해 보이는 것이 더욱 아름다움을 얻는다.”(12:23) 다 같은 이야기에요.

230페이지 ‘7. 갈라디아서와 한국교회’ 232페이지 위에서 세 번째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원수, 곧 악마의 본질이다. 십자가를 모독하고 하나님의 계획에 차질이 나도록 흠집을 내고자 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가 빠졌습니다. 226페이지 ‘6. 고린도후서와 한국교회’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11:4)하는 데가 있다는 거예요. 사도바울이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 다른 성령, 다른 복음 전하는 데가 반드시 나온다는 거예요. 그게 마귀인 줄 알아라, 그 말입니다.

그다음에 234페이지 ‘7. 에베소서와 한국교회’ 밑에서 여섯 번째 줄에 “교회의 참모습은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것이며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끝. 231페이지 ‘9. 빌립보서와 한국교회’ 237페이지 넷째 줄 “빌립보교회의 고난은 오히려 재림의 날에 자랑할 것을 제공한다(2:16).” 밑에서 네 번째 줄 “환경이 변하여 천국 되기를 바란다면 소망이 없다.” 너 자신이 오히려 고난을 감사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야 된다 이 말입니다.

238페이지 ‘10. 골로새서와 한국교회’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중간에 “즉 우리의 생명이 간직되어 있는 곳을 사랑하고”(3:1) 우리의 생명은 여기서 찾지 말고, 땅에서 생명 찾지 말고 위에서 찾으라 그 말입니다. 241페이지 ‘11. 데살로니가 전서와 한국교회’ 중간에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5:16-18) 이게 바로 주의 뜻이라. 주의 뜻이란 뭐냐 하면, 주님이 하신 것에 대해서 기뻐하고, 주님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고, 주님이 하신 것에 대해서 계속해서 고백하라는 겁니다.

243페이지 ‘12. 데살로니가 후서와 한국교회’ 적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거예요. 세상이 좋아하는 것을 제공하는 것이 적그리스도고요. 246페이지 ‘13. 디모데전서와 한국교회’ 247페이지 봅시다. 밑에서 다섯 번째 줄에 “지도자는 특정한 사람에게 봉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바른 교회와 말씀을 유지하기 위한 파수꾼이다.” 사람보고 해서는 안 된다 그 말입니다. 248페이지 ‘14. 디모데후서와 한국교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3:16) 뭘 받는다? 핍박을 받는다. 그게 십자가의 연속성입니다.

251페이지 ‘15. 디도서와 한국교회’ 네 번째 줄에, 하나님의 친 백성은 성령이 새롭게 하신 능력이다. 백성 자체가 능력이다, 그 말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3:5)

253페이지 ‘16. 빌레몬서와 한국교회’ 일을 할 때 억지로 추진하지 마라. 형제라고 해도 억지로 밀어붙이지 말고 서로 대화하라 그 말입니다. “주의 일이라고 해서 남의 의견을 무시하고 막무가내로 밀어붙이는 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깨는 일이다.” 255페이지 ‘17. 히브리서와 한국교회’ 제일 밑에 “신앙이란 결국 진공 속을 지나가는 화살이 아니다.” 신앙생활 한다는 자체가 껄끄럽다 그 말입니다.

257페이지 ‘18. 야고보서와 한국교회’ 야고보서의 특징은 여섯 번째 줄에 나와요. 세상이 추구하는 것은 욕심이다. 모든 은사는 좋은 것은 하늘에서 온다는 것. 밑에서 일곱 번째 줄 “즉 하나님의 은사가 아닌 이 세상 것을 추구하는 것이 바로 욕심이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서는 사랑만이 나온다. 그러나 욕심에서는 경쟁이 나온다.”

260페이지 ‘19. 베드로전서와 한국교회’ 위에서 세 번째 줄, 네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다. 너는 썩지만 네 속에 있는 씨는 썩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1:23) 다시 부활한다는 뜻이에요.

261페이지 ‘20. 베드로후서와 한국교회’ 참, 베드로후서 재미있어요. 위에서 여섯 번째 줄에 내가 전한 것은 공교히 만든 소설이 아니다. 실제상황, 이게 실제라 그 말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이 소리는 우리가 저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서 나옴을 들은 것이라”(1:16-18)

264페이지 ‘21. 요한일서와 한국교회’ 265페이지 봅시다. 중간에,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3:10) 네 것 내놓지 말고 공짜로 받은 사랑을 내놔라. 그런 뜻이지요. 267페이지 ‘요한이서와 한국교회’ 사랑은 계시 범위 내에서만, 계시만 나타내는 것이 사랑이다. 다섯째 줄 “즉 무기준에 의한 사랑이 아니라 계시의 범위 내에서 계시만을 남기는 사랑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바로 이 계시에 의해서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는 뜻이에요.

그다음에 268페이지 ‘23. 요한삼서와 한국교회’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된다. “이러므로 우리가 이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1:8)

그다음에 269페이지 ‘24. 유다서와 한국교회’ 이단들이 등장할 때 그들은 뿌리가 없다고 여겨라. 네 번째 줄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의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에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12, 13) 아주 촐랑대고 가볍다고 여기면 돼요. 대표적으로 허경영 같은 사람입니다. 가볍잖아요. 가벼운 사람들 이단들의 특징이에요.

그다음 271페이지 ‘25. 요한계시록과 한국교회’ 이제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즐거운 고통뿐이다. 이게 요한계시록이에요. 즐거운 고통이에요 세상은 안 알아주니까. 274페이지에 그걸 가지고 여자의 무슨 자손? 여자의 남은 자손, 용이 이들을 향하여 공격하는 겁니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12:17)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독생자의 영광으로 오셨는데 우리는 멋대로 상상한 예수, 하나님 아직도 붙들고 있지 않습니까. 주여, 그것마저 우리가 지내온 죄인 것을 발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