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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344강, 345강) 아름다움과 추함, 저항 210316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344강, 345강) 아름다움과 추함, 저항 210316

정인순 2021. 3. 17. 08:08

344강 음성 동영상

345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하림

344강-YouTube강의(아름다움과 추함 아가 2:11)20210316-이 근호 목사


제344강, 제목은 ‘아름다움과 추함’. 성경에서 아름다움을 생각할 때 창세기 1장 그리고 2장이 후딱 생각나죠. 창세기 1장에 보면 “심히 좋았더라”, 아름답다는 뜻이죠.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이 자기 아내가 될 그 여자를 보고 굉장히 만족스러워합니다. “내 살 중의 살이요 내 뼈 중의 뼈라” 참 아름다움의 극치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정하시면 됩니다. 아름다움은 완성이고 추하다는 것은 그 아름다움에서 빠진 것, 미완성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아름답고 완성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이 완성이 시간이 가면서 미완성이 되는 게 아니고 완성된 그 상태를, 완성의 깊이를 더 뿜어내기 위해서, 완성의 범위를 좀 더 확대시키기 위해서 여기에 추함을 동원시켰습니다. 추함을 곁들임으로 말미암아 완성이 훼손된 것이 아니고 완성의 깊이가 더해지고 넓이가 더해지고 크기가 더해지고 그 정도가 더해지는 겁니다.

마지막에 최절정의 아름다움이 다 드러날 때까지 그 중간 과정에 걸쳐있는 것이 바로 시간입니다. 이 시간을 통해서 자연이 아름답다는 것이 퇴색하고 이제는 이 자연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추해보이는 이 세상 안에 완성, 아름다움은 내재되어 있고요. 그 내재되어 있는 것이 꽃이 만개하듯이 완전하게 다 드러났을 때 그 만개할 때까지 시간이 스톱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죠.

그래서 이렇게 보면 시간은 마치 물에 흠뻑 젖은 개와 같습니다. 개의 몸에 물을 흠뻑 젹서놓게 되면 개는 아주 주저없이 몸을 흔들어서 자기 몸에 붙어있는 물기를 다 바깥으로 튕겨내죠.

우리 성도가 아름답게 산다는 것은 시간에 자기 생각을 얹지 않는 겁니다. 시간에 아무것도 얹지 않아야 돼요. 물 젖은 개가 털어내듯이 시간은 하나님의 것만, 아름다운 것만 담기 때문에 인간의 자기 생각이 얹혀져버리면 쓸데없이 시간이 무거워집니다. 인생살이가 무거워지는 이유가 내 생각이 너무 많이 가미되어서 그렇습니다. 털어버리면 되는데. 그러면 가볍거든요.

그러니까 인생살이가 즐거우려면 시간이 흐르는 그것을 시간만이 흐를 수 있도록 내어버려두는 것이 가장 인생을 편하게 사는 방법입니다. 시간 위에다가 아무것도 나의 것을 얹어놓지 않는 거예요. 나의 욕망이나 나의 기대나 나의 계획이나 나의 스케줄이나 이런 것을 얹어놔 버리면 시간 그 자체를 즐기지 못합니다, 편안한 마음으로.

조급해지죠. 빨리 빨리, 자꾸 빨리 업적을 남겨야 되고 실적을 거둬야 되고 성과를 얻어야 되고...... 그런 쓸데없는 짓거리를 하며 사서 고생하는 이유가 시간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조치에 의해서 완성으로 지금 잘 가고 있는데 인간들이 욕심을 내서 나의 욕망을, 욕심을 이루기 위한 시간으로 억지로 끌어당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아이를 아이로 보지 않고 조기에 어른을 만들려고 애쓰는 거예요, 엄마들이.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울 때는 다윗 나름대로의 어떤 전쟁방식이 있단 말이죠. 있는데 이 사울 왕이 어른들이 입는 갑옷을 소년 다윗에게 입혀버립니다. 다윗은 입고 좀 걸어보다가 여지없이 후딱 벗어버리죠.

주님의 하는 일, 그리고 거기에 병행되어 있는 주님의 시간에 그냥 인간들의 요소를 거기다 실어버리고 담게 되게 되면 결국 인간들이 자기 좋으라고 시간을 활용하는 것밖에 되지 않죠. 이것은 주님의 뜻이 드러나는 시간이 아니고 자기 욕망을 그냥 현실화시키고 보겠다는 억지스러운 인생살이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을 쭉 오게 되면서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시간이 어떤 것도 거기에 대해 치장되지 않고 순수한 시간이 그대로 노출될 때 그것이 아름다운 겁니다.

구약에 솔로몬의 아가 2장 11-13절까지 보게 되면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진행하는 그 아름다움에 사랑하는 여인아 거기에 같이 참여하자 거기에 같이 포함시키자’ 이 말입니다. 시간이 시간답게 흐르고 있는 거기에 사랑하는 그 여자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아름다움은 시간이 스스로 하나님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만의 계획에 우리가 그냥 같이 합세하는 것, 이것이 바로 아름다움의 극치라는 거예요.

정말 그 본문을 다시 읽고 싶습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어요? 인간들이 계획한다고 겨울이 일찍 오고 늦게 오고 그런 것 없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 새 노래하라고 인간들이 협박 공갈했습니까? 아니잖아요. 왜 인간은 이렇게 못 삽니까? 왜 억지를 부리죠? “비둘기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새가 울고 싶어 우는데 우리가 요구하거나 재촉한 적 없잖아요.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듯이 사랑하는 나의 어여쁜 자여 거기에 합세하자” 이게 바로 아름다운 여인에게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시간에다가 인간의 요소가 얹히면 안 된다는 거예요. 담겨버리면 하나님의 순수한 그 가벼움이 날라가버리고 나의 아주 간절함 그리고 나의 탐욕스러움이 추함으로 거기에 담기게 되는 겁니다.

끝으로 예레미야 17장 9절에 보면 이런 말씀 나옵니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죠. 아까 아가 할 때 만물 나왔죠. 비둘기, 무화과나무, 겨울 그리고 꽃, 만물이잖아요. 그런데 인간은 아름답지를 못해요. 추해요. 더러워요. 수상합니다. 괴물이 덮친 거예요. 그래서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 추한 것은 인간의 마음이다. 누가 이것을 능히 알리요.

바로 성도를 주님이 아름답게 보시는 것은 완벽해서가 아니라 자기가 완벽하게 부패했다는 것을 완벽하게 알 때 그것이 하나님의 계획이기 때문이기 때문에 그 성도는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아름다운 겁니다.


345강-YouTube강의(저항 디모데후서 3:8)20210316-이 근호 목사


제345강, 제목은 ‘저항’. 저항이라는 것은 보통 인간들이 인간에 대해 저항하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네 눈에는 그 사람이 그냥 일반 인간으로 보이냐, 배후에 하나님이 있다 이렇게 나와 버립니다. 그러면 선지자에게 저항하는 것은 곧 누구에게 저항하는 것이냐 하면 바로 하나님 앞에 저항하는 겁니다.

선지자에게 물 한 그릇을 대접하면 선지자의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예수님이 이런 말씀하셨잖아요. 제자에게 물 한 그릇 주면 제자의 상을 잃지 않는다. (마태복음 10장 41-42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그 말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면서 이미 자신에게 연결된 사람들, 구약에서는 많은 선지자들을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드러내셨고 신약에는 성도, 성령 받은 성도를 통해서 예수님이 자신의 모세혈관 또는 뿌리에 난 잔가지들을 이 세상에 성령을 줘서 쫙 깔아놓은 거예요. 그러니까 저 말단세포까지 신경조직이 다 가 있는 것처럼 성도를 건드리는 것은 곧 주님을 건드리는 그런 구조로 그리스도의 몸이 이 땅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성도가 혼자라는 생각을 안했으면 좋겠어요. 혼자라는 생각을 안했으면 좋겠고 더 나아가서 성도가 자기 일을 자기가 결정 안했으면 좋겠어요. 항상 주님의 지시에 따라서 움직여야지 자기 생각을 해버리면 반드시 자기의 위신과 명예와 영광을 항상 챙기게 되어있어요. 인간은 너무나 나약하기 때문에 인간의 욕망이 너무 많기 때문에 주의 일이라는 명분을 갖고 돌아보면 전부다 자기 위신과 체면과 경제적인 혜택을 노리고 하는 짓들이 되는 겁니다.

분명히 제가 모세혈관부터 해서 미세한 신경조직까지 주님이 성도에게 퍼져 있다면 우리가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 이것은 혼자 책임지려고 그렇게 아등바등 애를 쓸 필요가 없는 겁니다. 그 점이 상당히 중요해요.

그래서 이러한 저항을 생각할 때 제일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누구냐면 바로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입니다. 가인은 누구한테 저항했느냐 하면 아벨한테 저항했죠. 자기 동생이니까 만만하다 이거죠. 그런데 그 배후에 하나님이 관여할 줄은 상상도 못한 겁니다. 하나님을 건드린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창세기 4장을 보면서 아벨 입장에서는 섭섭한 이야기지만 하나님께서는 아벨을 가인의 정체, 배후에 있는 악마를 들춰내기 위한 미끼용으로 아벨을 사용하신 겁니다. 거기에 대해서 아벨이 굉장히 뭐 마음적으로 섭섭하게 생각했겠습니까?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섭섭한 것이 아니고 그것을 아벨의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아벨은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다. 믿음으로 제물을 드렸다면 아벨이 드린 그 제물과 아벨의 남은 운명이 일치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쉬워요. 성도는 자기 이름으로 살지 않고 주의 이름으로 살죠. 그러면 성도의 운명은 이미 결정 났습니다. 오로지 주님의 운명을 드러내기 위한 이 세상에 미끼용으로 사용되어지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성도는 자기가 결정할 자기 운명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가 없어요. 그 관계를 히브리서 11장에 근거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모든 사람들 보면 ‘믿음으로... 믿음으로... 믿음으로...’ 되어 있죠? 그 ‘믿음으로’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는, 성도는 이 땅에 저항세력과 맞닥뜨려야 되는 운명에 놓여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성도는 자기 이름으로 사는 게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살기 때문에 주의 이름이 주가 되시기 위해서 필요했던 그 저항세력들이 있거든요. 그 저항세력에 공히 이 성도도 같이 공동체험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바울 같은 경우에도 그러한 저항세력을 얻었느냐? 얻었죠. 디모데후서 3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 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그렇게 되어 있죠. 그리고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 보면 거기에 “구리 장색(구리를 가공하는 기술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그러니까 성도는 세상이 주님을 대적한다는 그 증거를 발췌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성도를 자꾸 세상에 갖다 붙이는 거예요. 물어, 물어. 하는 것처럼 자꾸 미끼로 사용하시는 거예요. 이것을 굉장히 섭섭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섭섭하게 여기면 그것은 믿음이 아니죠. 그것은 주의 이름이 아니고 내 이름으로 내 위신으로 살겠다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세상을 어떤 식으로 볼 것인가에 대해서 지금 사도바울이 표준적으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겁니다. 사도바울은 항상 세상을 볼 때에 주님이 다녀가신 장소라고 기준을 정했어요. 이건 변함이 없습니다.

주님이 다녀간 세상. 우리는 아직 주님 곁에 가지 않고 이 자리에 주님 뜻에 의해서 남겨졌다. 그렇다면 우리의 사명은 뭐냐. 도대체 세상이 어떤 더러운 세상이기에 하나님을 죽이냐, 그것을 찾아내는 임무로써 모든 일과를 맞닥뜨리는 거예요. 모든 일과, 스케줄이 그걸로 이미 짜여져 있어요.

중학교, 고등학교 때 여러분 시간표를 누가 짭니까? 교무실에서 다 짜죠. 교실에 가면 쭉 붙어 있잖아요. 좀 똑똑한 학교 같으면 한자로 붙어져 있고 그렇지 않은 곳은 한글로 되어 있고. 국영수 쭉 나온 거 봤죠? 이렇게 도표. 월요일에 가서 그거 보면 아이고 토요일 언제 오나 싶죠. 체육이 언제 들었나 체육만 찾고 음악 미술 그런 거 찾잖아요.

그 스케줄이 우리가 정한 게 아닙니다. 이미 우리 운명은 주님이 이 땅에서 어떤 수모를 당했는가, 우리는 그 다음 차례로 당하라고 이 땅에 있는 거예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주식을 하나 했는데 갑자기 주식이 대박 났다 할 때 친구가 전화해서 “야, 너 주식 쪼끔 한 2만주 넣었다며? 그게 대박 나서 오십 배가 늘어가지고 갑자기 너 갑부 됐다며?” 막 전화 올 때 그 때 이제 주의해야 돼요. 그 때 주의해야 돼요. 그 때 자랑질 하면 안돼요.

우리한테 있지도 않은 이야기를 예로 드는 겁니다. 그런 걸 자랑 하지 말고 그걸 보고 부러워하는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다녀가실 때 세상의 정체를 주님께서는 “뭐 던져놓은 주식이 대박 났어.” 하고 주님과의 공동체험을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런 공동체험은 좀 탐이 나죠. 그냥 뭐 땅 하나 던져놨는데 백배 오른다든지.

그럴 때 세상은 어디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는가. 이게 바로 저항입니다. 우리는 저항 받으라고 이 땅에 사는 거예요, 저항 받으라고. 이 사고방식 자체가 달라도 너무 다른 거예요. 그걸 인생 살면서 온 몸으로 만끽하셔야 돼요. 그게 바로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는 확정된 운명의 성도입니다.

아벨 이야기 다시 드릴게요. 아벨은 제사 드렸는데 그 제사의 운명처럼 예수님의 운명처럼 형한테 맞아 죽었습니다. 어차피 우리는 맞아 죽으나 늙어 죽으나 이 땅에 죽기는 마찬가지지만 우리가 할 일은 이미 정하자. 할 일은 뭐냐.

우리 주님을 세상은 왜 그토록 미워하고 싫어했는가를 우리가 하나님께서 만나게 하시는 모든 사람들을 통해서 경험케 하는 것, 이것이 우리 성도의 시간표 스케줄이에요. 이래놓고 하나님, 도대체 제 일이 뭡니까, 제 사명은 뭡니까? 묻지 마세요. 우리는 이미 그걸로 정해놓은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