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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스가랴 4:6 / 이스라엘 쪼개기 / 210218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4:6 / 이스라엘 쪼개기 / 210218

정인순 2021. 2. 19. 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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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공은주

안양20210218A슥4장6절(이스라엘 쪼개기)-이 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스가랴4장6절 제가 읽습니다. “그가 내게 일러 가로되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 이러하니라 만군의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스룹바벨, 이스라엘의 대표입니다. 이스라엘의 새로운 대표자가 스룹바벨입니다. 실제적 인물이지요. 실제적 인물. 실제적으로 그런 인물이 있다는 뜻이에요. 실제적 인물. 예수님이 실제적으로 있는 것처럼 스룹바벨이 실제로 있었던 겁니다.

이스라엘을 대표할 때에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에게 이야기한 것이 이스라엘 전체한테 이야기하는 겁니다. 스룹바벨은 이스라엘 속성을 대변해주고 있으니까. 그러면 이스라엘 속성은 오늘 이 스가랴4장6절의 말씀에 의하면 두 가지 요소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뭐냐 하면 영의 요소와 또 하나는 육의 요소지요. 그렇지요.

이건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여기는 신이라 했지요. 다른 번역에 보면 영으로 되어있고 신은 괜찮아요.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신으로 되어있다. 육은 뭐라고 되어있습니까. 힘으로 묘사되어있고, 능력 또는 능으로 묘사되어있지요. 그럼 이스라엘은 뭐냐 하면 두 가지 요소가 결합된 겁니다. 두 가지 요소가. 그런데 이 결합됐다. 말은 쉬운데 이게 난해한 게 아니오, 아니오라 했다 말이죠. 힘 아니요, 능력 아니잖아요. 그러면 우리 생각에는 인간의 힘 빼고, 능력 빼고 하나님의 신으로 밀어붙이면 되는데 이스라엘이.

왜 아니오, 라고 하면서 영과 육이 서로 대치가 되고 반대가 되면서 어떻게 그게 결합이 가능 하느냐 하는 겁니다. 한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 어떻게 그게 결합이 가능 하느냐 말이에요. 요즘 신약으로 답변하면 이렇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성령을 받게 되면 영에 속한 사람 맞지요. 고린도전서2장에 나오는 말씀처럼. 영을 받으면 영에 속한 사람인데. 영의 속함인데. 왜 육적인 요소가 결합이 가능 하느냐 이 말이에요. 똑같은 질문이에요.

이게 같이 사이좋으면 결합이 되는데 사이좋은 게 아니고 아니요, 라고 했다고요. 힘 아니요, 능력 아니요, 이 말은 뭐냐 대립관계에요. 대치관계란 말이지요. 이걸 더 알기 쉽게 말씀해 볼까요. 남편 복음 모르고 아내 복음 아는데 어떻게 부부가 됩니까. 어떻게 한 가정이 됩니까. 복음 모르는 남편 한 번 답변해 보세요. 어떻게 가능하지. 그 가능한 것은 간단해요. 경제적 이해관계로 엮어졌기 때문에 그래요. 경제적 이해관계. 딱이지 뭐. 인간은 태어나면서 전부 다 재물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에 이해관계 때문에 그런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어차피 한 평생 같이 살다가 죽으면 따로 갈 길이 달랐다. 서로 갈 길이 다른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렇게 영과 육이 된 것은 이게 결국은 뭐냐 하면 영원히 영은 영의 세계, 천국이지요. 영의 세계. 육은 영원한 저주의 나라. 지옥으로 갈음하는 그걸 갈라내는 분류하는, 분류가 되는 원천적 바탕나라에요. 원천적 바탕나라.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진다 이 말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나라로 쪼개기 전에 이스라엘 내부에서 이래서 이쪽은 천국이고, 이래서 이쪽은 지옥이라는 구체적인 본질을 유일하게 알려주는 나라가 이스라엘 나라에요. 여기에 대한 확실한 근거는 창세기1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선택할 때에 우리 같으면 아브라함아! 내가 너를 선택했다. 니 복 받았다. 그 이야기로 끝내면 되는데 창세기12장에는 그렇게 하지 않고 아브라함을 인정하는 쪽은 복을 받되, 아브라함을 인정하지 않는 쪽은 어떻게 됩니까? 저주 받는다. 저주 받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주께서 하십니다.

여기3절에 보면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그 다음에 그것으로 멈추면 얼마나 분위기 좋아요. “아브라함아?” “예” “내가 너 선택했다.” “감사합니다.” “니 복 받았다.” “예, 감사합니다.” 그 이야기로 그걸로 끝내면 좋겠는데, 뭐라고 하느냐 하면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뭐한다? 저주를 내린다. 이 말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왜 이 세상이 인간들이 저주 받아야 될 본격적인 그 이유에 대해서 설명을 아브라함을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겁니다.

지옥 가되, 지옥 가야될 설명을 택한 자. 택한 민족. 택한 이스라엘을 통해서 설명을 해주시겠다는 겁니다. 지옥가도 그냥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지옥갈만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복음 모르는 남편이 지옥 가는 것은 그 남편은 모르지만, 믿는 사람입장에서는 믿는 사람이 이스라엘이니까, 영적인 사람이니까, 영적인 사람에 비출 때 아, 저 양반은 지옥갈만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지옥 갈만해서. 그러면 이건 뭐냐 복음을 아는 내가 당신을 미워해서 지옥 가는 게 아니고, 내가 누굴 미워한다고 지옥 가는 게 아니고, 주님이 미워하는 거예요.

그럼 이 말은 뭐냐 하면 내가 주님을 사랑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주님이 그냥 이유도 모르겠어요. 그냥 내 나라로 오래. 그걸 뭐냐, 그냥 불러주심. 불러내심. 불러주심보다 불러내심이 더 좋아요. 불러주심이 되면 이건 보이스, 말의 응답이 있어야 되잖아요. 불러내심은 완전 죽은 자를 깨운다는 하나님의 적극적인 조치가 가미되어있습니다. 일어나! 일어나! 그냥 쳐들어오는 거죠. 사도바울에게 그냥 쳐들어오듯이. 그냥 쳐들어오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영적인 나라다. 맞는 말이에요. 이스라엘 자체가 영적인 요소가 있으니까. 하나님의 신의 요소가 있으니까. 영적인 나라다. 그 말은 맞고, 내용은 뭐냐 하면 영적인 나라가 영적인 나라를 위하여, 영의 영의됨을 위하여 주님의 약속의 나라 됨을 위하여 필히 필수적으로 지옥 갈 요소도 같이 겸비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야 이스라엘의 자체적인 힘이나 능력으로 그들이 구원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아야 그게 이스라엘이지요. 이스라엘로 제대로 이스라엘이 거기서 또 나오는 거예요.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는 겁니다.

인간적인 이스라엘과 영적인 이스라엘로 쪼개지기 이전에 구약에서는 하나의 이스라엘 되고, 그 다음에 신약에 오고 예수님 오시게 되면 진짜 참 이스라엘과 거짓 이스라엘로 구분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12제자 보낼 때 숫자가 몇 명입니까? 열둘이지요. 12라 하는 것은 누구의 아들 숫자냐 하면 야곱의 아들 숫자에요. 야곱의 이름이 나중에 무슨 이름으로 바뀌느냐, 이스라엘 이름으로 바뀝니다.

그러니까 자식이 열두 명이라 하는 것은 야곱적 요소가 완성된 야곱적 요소가 오게 되면 자식을 창조하듯이 생산하듯이 바로 나 예수가 새로운 이스라엘 창조하겠다. 새로 만드시겠다는 겁니다. 어제 수요일날 그런 이야기했지요. 이스라엘은 우리가 들어가는 나라가 아니고 이스라엘은 새로 만들어지는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은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은 없어요. 만들어져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런데 그 만들 수 있다는 것은 내가 나를 만들면 나는 복제가 되기 때문에 그 만드는 주도권이 나한테 있기 때문에 그건 제대로 만들어진 게 아니지요.

진공청소기를 만들 때 만든 사람이 회사에서 만들게 아닙니까. 그럼 진공청소기는 어디서 나왔는가. 만든 사람이 있겠지요. 내가 만약 구원받았다. 그럼 누가 구원했어? 내가 예수 믿고 내가 기도해서 구원받았다. 그럼 내가 나를 만든 셈이 되지요. 바로 그 일을 누가 했는가. 이스라엘에서 이미 일어났었어요.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서 내가 하나님이 원하는 이스라엘을 만들겠다고 이스라엘을 본인들이 그토록 노력하고 애쓰고 사고방식이 그런 사고방식으로 간 겁니다.

그런데 오늘 아까 스가랴4장6절 보니까 뭡니까. 사람의 힘으로 되지 않고 사람의 능으로 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어 있잖아요. 그럼 아까 처음에 강의 다시 시작해봅시다. 되지도 않는 걸 왜 붙여놨느냐. 그럼 아예 잘라내지 되지도 않는 걸 왜 붙여놨는가. 구원받는 것이 사람의 힘이나 능력으로 안 되기 때문에 붙여놓은 거예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이스라엘 소속된 사람이 본인들이 아무리 열망하고 아무리 기대하고 구원을 희망해도 내가 구원받는다고 해서 구원 받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그게.

천국가고 싶어서 어떤 시도를 해도 이게 인간의 힘에 속하고 시도가. 인간의 능에 속하기 때문에 어떤 시도도 이건 불가능하다. 실패로 끝난다.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러면 진짜 이스라엘은 천국 가는 이스라엘은 누가 가는가. 이게 스가랴에서는 앞에 누가 붙어요? 스룹바벨이 있지요. 스가랴4장10절 읽어보겠습니다. “작은 일의 날이라고 멸시하는 자가 누구냐 이 일곱은 온 세상에 두루 행하는 여호와의 눈이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음을 보고 기뻐하리라” 다림줄이 스룹바벨의 손에 있잖아요. 다림줄이.

어제 수요일날 다림줄 했지요. 제목은 다림줄 한 게 아니고 건축학개론 했지만. 납득이 나오는. 그 다림줄을 아모스 7장7절에서는 누가 쥐고 있는가, 여호와 하나님이 다림줄을 잡았는데, 여기는 보다 구체적인 인물이 등장합니다. 스룹바벨. 이 말은 하나님의 약속이 드디어 서서히 이 땅에 실제적인 어떤 특정인물로 실제적 인물로 등장한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그냥 하늘에 계시지. 그냥 하나님이 계시면 되는데. 실제로 온다는 거예요. 실제로.

여러분, 여러분 자녀들이 만약에 결혼을 한다. 집사님은 어떤 가수한테 축가를 듣고 싶어요? 권투 잘하는 알리. 하여튼 유명한 가수. 어떤 축가가 듣고 싶으냐. 예를 들어서 김범수라는 가수의 축가를 듣고 싶다. 그러면 김범수의 노래를 틀면 되지요. 그런데 실제로 김범수가 온다면. 얼마나 놀라겠어요. 놀라는 동시에 얼마면 돼? 저 가수 부르는데 얼마를 줘야 돼? 이러지요. 그 다음부터는 돈 걱정이 들어오지요. 그렇지요.

내가 열심히 해서 율법 지키고 말씀 지켜가지고 하나님 보고 싶다. 하늘나라 가야지. 이럴 때는 우리한테 별 심적인 부담이 없어요. 그런데 내가 가기 전에 먼저 그 하나님이 직접 우리 코앞에 눈앞에 등장한다면 얼마나 심적으로 큰 부담이 되겠습니까? 심지어 베드로도 못 알아봤지요. 그렇게 따라다녔지만. 왜냐 하면 베드로가 여전히 힘과 능력의 기대를 걸고 한 거예요. 기대 건 것을 이걸 가지고 두 자로 ‘예상’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상.

인간은 늘 예상해요. 예상을 같은 뜻으로 상상한다. 인간은 늘 상상한다. 뭘 상상하느냐 하면 신을 상상해요. 그래서 이스라엘이 육적으로 망한 이유가 뭐냐 그들의 신이 그들이 생각하는 여호와가 우상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망한 겁니다. 실제로 나타나보면 아무도 안 믿을 하나님인데 나타나지 않았다는 그 이유 때문에 맘껏 고상하고 거룩하고 경건한 모든 아름다운 것과 고상한 것은 전부 다 높은 하나님께 다 집중시켜 놓고 나에게서 나오는 그 아름다운 양심의 아름다운 것과 고상한 것들을 집대성시켜서 그것을 그 신을 섬긴다면 결국은 신과 나 사이에는 연결고리가 형성된다고 자기가 자부하는 거예요. 이건 자아의 확장이지요.

여러분들이 시편에 보면 얼마나 많은 고상한 가사들이 나옵니까. 그 시편을 이스라엘은 지금도 어릴 때부터 달달 외워요. 그 시편을. 이스라엘에 가면 그 통곡의 벽에 가게 되면 그 이스라엘 사람들이 머리에다가 납작한 모자를 쓰는 이유가 모든 것이 하나님이 지켜보시고 하나님의 아래에 있고 하나님의 지배 아래에 있다는 뜻을 모자에 담아서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걸 보고 어떤 기독교의 신자가 하는 말이 우리도 저랬으면 좋겠다는 거예요.

내가 예상하고 내가 상상하는 하나님께 내가 정성과 지성과 목숨과 뜻을 다하여 접근해 가는 이 자체가 뭐라고요? 이게 바로 육이에요. 이게 인간이 나올 수 있는 힘이고 능력입니다. 이게 바로 종교입니다. 이게 바로 교회에요. 교회가 이런 시스템을 가동시켜서 교회를 부지하고 경영하고 있는 겁니다. 관리하고 있는 거예요. 인간의 신에 대한 상상력을 밑천으로 해서. 당신들 하나님 알잖아. 하나님은 당신들보다 월등하게 순수하지요. 당신은 죄인이고 못났고. 죄인이고 못났지만 순수한 신을 향하는 그 마음을 집대성해서 하나님께 칭찬받고 사랑받는 교회됩시다. 촛대 옮기지 않는 교회. 촛대를 옮기지 않는 교회가 됩시다. 그게 목사들의 공략, 전략입니다. 인간의 상상력을 전부 다 끄집어내는 거예요.

그런데 오늘 스가랴4장6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힘으로 안 되고 능력으로 안 되잖아. 안 된다는 말은 인간의 예상과 상상 그 바깥에 있다는 거예요. 인간의 능력과 상상력 바깥에 있다는 거예요. 자, 강의를 다시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은 영과 육의 요소 두 가지 요소로 결합이 되어있어요. 결합이 된 이유는 결국은 이게 갈라서게 되어있고 쪼개지게 되어있다는 겁니다. 쪼개지게 되어있어요. 하나의 나라가 둘로 쪼개지는 거예요. 두 개로 쪼개질 때 사이좋게 쪼개지지 않아요. 육이 영을 공격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렇게 공격하는 영의 세계를 이스라엘 자체는 상상해 본 적이 없어요. 우리가 하나님의 택한 사람이기 때문에 택한 민족은 다른 민족에 없는 영적인 요소가 있어서 영적인 요소와 내 속의 영적인 요소와 하나님이 잘 조화되고 결합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의 다른 나라를 제치고 그 나라 많은 가운데 하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된 그 지점이 바로 이스라엘 안에 오신 거예요. 왔을 때, 서로 사이좋게 하나님과 결속이 잘 됐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이 적대적 관계였다는 것이 드러나는 거예요. ‘우리가 존대하거나 섬길 수 있는 그러한 존재들이 아니구나! 우리가.’ 내가 만들어낸 신은 우리가 마음껏 섬기되 내 착함을 긍정해 주는 신은 마음껏 섬기되 근원적으로 나를 모독하는 신은 내가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이에요.

나를 모독하는. 나를 부정하는 신은 우리가 용서가 안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아주 극단적인 말을 했어요. “니는 악마의 자식이다.”라고. 네 애비는 악마라고. 극단적인 말을 했다고요. 그 극단적인 말을 우리가 감내하고 감당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본문 스가랴4장6절에서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된다는 이 말은 너희들이 행하지도 못할 존재라는 거예요. 행하지도 못할 존재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 이미 죽은 자가 뭘 행하느냐. 죽은 자가.

죽은 자에게서 나오는 것은 못한다가 나오는 게 아니고 죽음이 행하지요. 이거 어려운 말이에요. 죄가 행하고, 죽음이 행하는 거예요. 우리를 갖고 노는 겁니다. 죄와 죽음과 악마가. 내게서 나오는 것은 죄만 행해요. 주님께서는 우리의 육을 닦달 내는 게 아니고 우리를 장악하고 있는 악마를 닦달 내는 겁니다. 우리가 행하는 것은 우리 뜻이 아니고 우리 속을 장악하고 있는 안티십자가. 십자가의 반성향을 갖고 있는 그 괴물이 그동안 이스라엘 내부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바로 아까 나왔던 다림줄. 다림줄은 신약에 오면 두 자로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다림줄은 신약에 오면 율법입니다. 마태복음5장에서 예수님께서 일점일획이라도 이 다림줄은 양보가 없다. 봐주기도 없어요. 일점일획이라도 다 이루지 아니하면 내가 값을 너희에게 찾겠다. 이리 나오거든요. 마태복음5장에. 형제간에 서로 거래관계가 있을 때 하나라도 다 갚지 못하면 옥에 집어넣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5장에서 기억나지요.

5장에 보면 만약에 길에 갔다가 만약에 송사하는 관계가 되어버리면 만약에 화해하지 않으면 옥에 가두어버린다. 호리라도 다 남김없이 갚기 전에는 결단코 나오지 못하리라. 25절, 26절. 율법을 항상 늘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지 아니하면 어디 아래에 있다? 갈라디아서에서 어디 아래에 있다고 했습니까? 저주아래 있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항상 지켜서 저주아래 있지 말라는 뜻이 아니고, 사도바울의 그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러니까 율법대로 살아라, 그런 뜻이 아니고. 로마서3장에 보면 율법을 준 것은 안 되는 것을 안 되는 거 맞지! 라고 확인 작업에서 율법을 준 거예요.

다시 내 능과 내 힘과 내 상상력과 예상으로서는 천국은 어림도 없다는 것을 율법 앞에서 니가 그걸 자인하라 이 말이지요. 용서받지 못할 자라는 것을 자인하는 그 순간이 용서가 주도권을 갖고 우리를 장악하는 순간이에요. 내가 용서를 확보하는 게 아니고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용서가 못난 인간을 확보해서 용서가 용서답게 마음껏 능력을 발휘하는 거예요. 용서의 위력을 발휘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용서 안에는 용서를 이루게 한 그 값과 용서의 무게가 동일하기 때문에 그래요. 같은 무게로 들어가거든요.

내가 용서를 부정하고 싶어도 예수님 십자가 피 흘리고 죽었다가 사흘 만에 부활한 것이 사실이라면 내 용서는 내 용서가 부정해도 소용없어요. 용서는 그대로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용서를 부정하지 말고 십자가를 부정하려하면 부정하라 말이지요. 십자가 부정 안 되면 그 값을 부정하지 못한다면 나중에 치매 걸려서 나 용서 받았느냐, 안 받았느냐 그런 거 자기 기분, 느낌, 그런 느낌 같은 느낌 신경 쓰지 마세요. 십자가가 눈앞에 보이면 그걸로 끝이지 그게 용서했던 값이에요. 인생을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십자가가 있다면 그 어려움조차도 용서가 용서답게 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나한테 벌어진 사건입니다.

육이 영을 장악할 때, 그 이스라엘이 망한 이스라엘이지만, 영이 신이 육을 지배할 때, 그 이스라엘은 천국 가는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은 육과 영이 함께 있는 걸 이제 아시겠지요. 아시겠지요, 하고 돌아서면 뭐? 뭔데? 그동안 뭐 들은 거 있어? 이리 되지요.

함께 있다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이스라엘이 이스라엘 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지 우리의 뜻이 아님을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서 ‘아! 우리의 육은 가짜 이스라엘을 양산하는구나!’ 라는 것을 그걸 통해서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통해서 주님의 사심과 주임의 구원하심이 은혜로만 다가오고 이게 내 구원이 내 일이 아니고 주님의 일이구나. 내가 사는 것도 주님의 일이라는 것을 아는 겁니다. 그게 바로 이스라엘을 이스라엘답게 드러내는 겁니다. 이젠 아시겠지요. 이제 함께 있는 걸 아시겠지요.

왜 반대되는 게 있어야 되느냐, 그것은 우리의 구원보다 주님의 심판이 우리의 존재보다 앞서기 때문에 그래요. 심판은 아버지와 아들이 창세전부터 계획한 거고, 그 계획을 계획답게 실행하기 위해서 재료로서 우리가 이 땅에 나중에 태어난 거죠. 창세기1장이 나중이 되어버린 거죠. 우리가 나중에 태어난 겁니다. 이렇게 생각하던 저렇게 생각하던 하여튼 하나님의 일에는 차질이라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렇게 아셨으니까 이제부터 하는 말 잘 아시겠지요.

육은 뭐냐, 육은 복음이 안 나오는 게 육입니다. 복음이 안 나오는 것. 십자가가 안 나오는 것. 스룹바벨의 다림줄이 안 나오는 것. 하나님의 요소가 나오지 않는 것. 그게 바로 육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요소가 안 나오고, 대립된 요소가 안 나오고, 뭔가 신에 대해서 나온다는 것은 그것은 뭐냐 하면 본인이 자신을 상상한 겁니다. 예상한 겁니다.

그래서 이 육의 요소를 이제부터 제가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 한 번 적어볼게요.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를 두 가지로 하겠습니다. 하나는 세속적 모습으로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 그 다음에 종교적인 모습으로. 또는 경건한 모습으로. 영적 모습으로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 영적 모습으로 복음이 안 나오는 경우, 어떻게 영적인데 복음이 안 나오지. 이게 가능해요. 아까 왜 가능하냐 하면 인간의 상상 속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하여튼 다른 민족 생각하지 말고 이스라엘 그들이 여호와를 섬겼지만, 그들이 섬긴 여호와에서 매 맞지요. 그들은 나름대로 영적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하나님은 전혀 영적이 아니고 세속적이 된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영적이 되려면 어떻게 되느냐, 저희들이 망하고 난 뒤에 나온 결과를 봐야 돼요. 망하고 난 뒤에 나온 결과. 미리 알 수가 없어요. 성도가 안 죽고 복음 받아들이는 경우는 없어요. 일단 맞을 건 맞고, 얻어터질 건 얻어터지고, 죽을 건 죽고 난 뒤에 다시 보게 되면 ‘아! 내가 죽는 것이 이게 복음의 절차 속에 주님이 죽음 됨을 드러내는 절차 속에 필수였구나!’ 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람이 그냥해서는 영적인지는 몰라요. 그냥 영적인 것으로 예상하지만, 항상 그건 파토 나는 겁니다. 이 어려운 말을 쉽게 해서 첫 번째는 이걸 한 번 봅시다. 소위 종교적, 영적 경건의 모습으로 복음이 아닌 경우를 쉽게 하기 위해서 제가 복음 성가 가사 하나를 제가 알려드리겠습니다. 제목은 <세상에서 방황할 때> 세상에서 방황할 때, 가사를 보면.

세상에서 방황 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네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 받을 수 있나요
벌레만도 못한 내가 용서 받을 수 있나요

많은 사람 찾아와서 나의 친구가 되어도
병든 몸과 상한 마음 위로 받지 못했다오
예수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주소서
의지 할 것 없는 이 몸 위로 받기 원합니다

이 죄인의 애통함을 예수께서 들으셨네
못자욱 난 사랑의 손 나를 어루만지셨네
내 주여 이 죄인이 다시 눈물 흘립니다
오 내주여 나 이제는 아무 걱정 없습니다

내 모든 죄 무거운 짐 이젠 모두 다 벗었네
우리 주님 예수께서 나와 함께 계신다오
내 주여 이 죄인이 무한 감사드립니다
나의 몸과 영혼까지 주를 위해 바칩니다

내 맘대로 고집하여 온갖 죄를 다 저질렀네, 하거든요. 저질렀네, 이리돼요. 여기서 말하는 죄는 무슨 죄죠? 그러니까 이게 무슨 죄냐 이 말이지요. 한 번 보세요.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그러니까 이 가사를 보세요.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를 섭섭히 여기지 말고 좀 진작 알 걸. 이러면 안돼요. 방황이라는 말을 쓸 때는 진짜 복음을 알고 난 뒤에 무엇이 방황인가를 뒤늦게 아는 거예요. 술집에 왔다, 갔다하고 그게 방황입니까? 교회 다니는 건 방황 아니었었어요? 그러니 가사 내용을 보게 되면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다. 이 가사를 할 때 상상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나는 교회도 안 다니고 우리 아버지, 엄마는 장로님, 권사님인데 교회에 가서는 장로, 권사지 집에서 맨날 싸우는데 그게 꼴 보기 싫어서 나는 반항기로 해가지고 나는 교회 안다녔다. 그걸 자기 임의대로 그걸 뭐로 보느냐 하면 방황이라 보는 거예요. 아버지, 엄마 일부러 약 올리기 위해서 나쁜 친구 술 마시고 담배 피웠다. 그걸 방황이라 본 거예요. 지 맘대로 해석하는 거예요. 그게 방황이라는 거예요. 그게. 지 맘대로. 신학교가라고 막 서원기도 했는데 일부러 삐져가지고 태권도 원서내고. 싸움질하고. 집에서는 경건한 큰 일하는 목사 되라고 니 어릴 때부터 기도 했다하는데 자기는 실용음악가가지고 트로트대회에 나오고. 이런 거. 그걸 방황이라고 보는 거예요. 방황. 그래가지고 길거리에서 고구마 팔고 하다가 나중에 우승해서 잘되어서 40억 벌고 이런 거. 히어로 영웅이라.

세상에서 방황할 때, 나 주님을 몰랐네. 이리 됐거든요. 가사가. 내 맘대로 고집하며 온갖 죄를 다 저질렀네. 그 다음에 노골적으로 육적이 나와요. 예수여! 이 죄인도 용서받을 수 있나요. 무슨 염치가 이런 염치가 다 있어요. 점점 더 주님을 이용하겠다는 것밖에 안되거든요. 지금 뭡니까? 자기를 개선하려하는 거예요. 옛날에 부모 말 안 듣고 교회 안 다녔던 그 질이 뚝 떨어진 수준 낮은 나를 만회하려는 겁니다.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용서받고 이제 정신 차리고 마음잡고 바르게 살면 주님 저 천국에 넣어주실 거죠? 이게 상상이에요. 이게 예상이에요. 이게.

거래도 무슨 저런 거래가 있어요. 지금 뭐가 빠졌어요? 본인이 본인을 모독을 안 하고 있습니다. 그저 마음 낮추고 겸손한체하고 눈 까라 하면 눈 다 깔고. 이렇게 하면 보내 줄 겁니까? 이보다 더 낮게 가라하면 더 낮게 가겠습니다. 아프카니스탄 가가지고 죽으라 하면 죽겠습니다. 이게 객기고 오기에요. 이건. 이건 신앙도 아닙니다.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그 사실을 모르잖아요. 차라리 방황할 때가 더 낫지. 인간들이.

안티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십자가에 대해서 발작하고, 십자가에 대해서 거부하는 겁니다. 뭐냐 하면 인간의 육적이라 하는 것은 어느 누구도 근원적으로 나를 모독하지 말라는 거예요. 내가 낮추면 낮추고, 복음이라면 복음대로 다 믿을 테니까 그런 행동을 하는 그 자체마저도 제발 모독하지 말라는 거예요. 그게 바로 언젠가도 말했지만, 그걸 스냅사진 찍어야 돼요. 그게 악마에요.

악마란 근원적인 자기 의가 악마가 떠날 때는 뭐냐 근원적인 내가 떠날 때가 악마가 떠날 때에요. 나의 의가 떠날 때입니다. 종교적 힘으로 자기를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방금 한 것은 영적으로 보이는 복음을 전혀 모르는 사람이에요. 이스라엘 내부에 이런 파들이 굉장히 많은 파가 있어요. 경건파. 쿰란공동체 경건파. 에센파라 하거든요. 세속과 다르면 천국 갈 줄 알고. 세상에서는 돈 좋아하지만, 우리는 돈 거부해. 하여튼 반대로 살게 되면 된다는 겁니다. 거꾸로 살면 된다는 거죠. 거꾸로 살아도 주도권은 누가 쥐고 있습니까? 내가 나를 거꾸로 뒤집는데 그게 거꾸로 입니까. 하나의 요령이지요.

그 다음에 세속적으로 복음을 모르는 경우는 여기서 육은 뭐냐 하면, 영으로는 “나를 모독하지 말라.”라면 육은 뭐냐 하면 “나를 위로해 주세요.” 에요. 나를 위로해 달라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교회에 가서 목사한테 위로 받는다고 하지만, 교회 안가도요, 세상 적으로 문학적으로 시적으로 굉장히 위로 받을 데가 많아요. 음악으로. 흘러간 팝송으로 위로받고. 꼭 종교적 아니라도 같은 또래의 같은 역경을 겪어온 사람들. 역전의 용사들 모이면 서로 위로가 돼요. 과거 이야기해가면서.

그 위로 받는 하나의 경우 역시 노래 하나 나옵니다. 남들은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이게 얼마나 아름답거든요. 살아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노래 한 마디 그 문학적인 표현 하나 하나가 공감을 자아냅니다. 텅 빈 하늘 밑 불빛은 켜져 가고 옛사랑 그 이름을 아껴 불러보네. 너무 소중했던 기억이기 때문에 그냥 함부로 안 부르고 애써 아끼면서 불러보는 거예요. 찬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우다 후회가 또 화가 난 눈물이 흐르네. 누가 물어도 아플 것 같지 않던 지나온 내 모습 모두 거짓인가. 이 문세가 불렀던 옛사랑이란 가사에요.

이제는 그리운 것은 그리운 대로 내 마음에 둘 거야. 억지로 그리움을 안 그리웠다. 이렇게 억지로 하기는 힘들어. 그리우면 그리운 대로 내 마음에 둘 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나는 대로 내버려 두듯이. 사랑이란 게 지겨울 때가 있다. 늘 한 번 뜨거울 때만 있는 게 아니고 가끔 쉬어가는 테마도 대목도 있잖아요. 내 마음 고독이 너무 흘러 넘쳐. 봄에 푸른 잎이 푸른 잎처럼 옛사랑 그대 모습 영원 속에. 이거 위로 안돼요?

위로 받으려고 교회 갈 때 벌써 이 자체가 세속입니다. 위로 받기 위해서. 이 문세 노래 하나 옛사랑 이거 열 번 들으면 은혜 받아요. 왜 인간은 이렇게 세속적으로 육적으로 왜 이렇게 되느냐, 그러면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4장, 능으로 안 되고 힘으로 안 된다고 했잖아요. 힘으로 안 되고 능으로 안 되지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야 될 것은 뭐냐, 도대체 힘의 한계, 인간의 한계입니다. 힘의 한계, 능의 한계가 무엇인가를 제가 열 개로 한 번 정리해 봤습니다. 인간의 한계, 나의 한계지요. 나의 한계. 인간의 한계에서 나를 아는 것. 인간의 한계에서 나를 아는 거거든요. 그 한계를 열 가지로 적어봤습니다.

첫째로 절대적인 것은 없다. 인간은 절대적인 게 없어요. 왜냐 하면 본인이 절대적이기 때문에. 본인이 절대적이에요. 다만, 절대적이라 하면 이용할 뿐이지요. 하나님은 절대적이다. 복음은 십자가는 절대적이다. 그러면 내 절대적인 것에 그것 달랑 갖고 오면 되네. 이런 생각이죠.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중에서도 최고조의 절대. 무한대 중에서 최종 무한은 역시 나에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두 번째는 중학교가가지고 읍내에 중학교에 다니니까 그 누나는 잊게 되고 교회에도 더 큰 교회에 가니까 그 자기 시골 교회의 누나는 촌스러워요. 어디 견줄 대를 견주어야지. 어딜 갔다가 견주어. 정확한 것은 없다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정확한 게 없으면 뭐냐, 세 번째로 정확하다는 말을 표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유용하다로 봐야 돼요. 인간은 유용한 거뿐이에요. 인간은 유용한 거뿐입니다.

네 번째 인간은 절대가 없고 정확한 것이 없고, 유용할 것뿐이니까 유용을 위해서 뭐하느냐 하면 연결망을 꾀한다. 연결. 남편이 집에 퇴근해가지고 주말되어가지고 직장 안가고 집에 쉬면 매일 전화만 붙들고 있는 거예요. 잘 있나? 잘 있나, 무슨 뜻인 줄 알아요? 혼자 술 먹기 심심하니까 같이 술 먹자는 이야기에요. 혼자는 술 맛이 안나. 같이 술 먹자고 핑계대기 위해서 연락을 취하는 거예요. 그 연락을 취하는 연락망이 그게 내가 하는 유용성 속에 어디까지나 이렇게 포함이 되는 겁니다. 자기가 절대적이니까. 정확한 것은 없고. 내 유용함.

이렇게 술친구 걸쳐놔야 혹시 내가 아쉬울 때나, 내가 나중에 직장 잘릴 때 혹시 나 소개해 줄 수 있는 돈독한 친구. 돈보다 친구가 낫다는 거예요. 노래에. 참. 연결만 취해요. 연결만. 연결만이니까 이게 허상이죠. 허상. 연결 취하다가 사기 당해라. 매일 보증 서다가 망했다는 거예요. 연결 때문에. 어릴 때 잘 살았는데 왜 이렇게 고생했습니까. 우리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서서. 매일 나오는 이야기야. 우리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 섰대. 보증을 잘못 선 게 아니고 같이 투자를 했지요. 왜 말을 투자를 했다고 안하고 보증을 잘못섰다고 하느냐 말이죠. 지가 은근히 욕심내가지고 연결 친 친구가 잘된다고 하니까 돈 투자한 거예요. 지만 투자했습니까. 일가친척 다 끌어 모았지요.

왜 이 유용성에서 뭐가 나오느냐, 창의성, 창조성이 나오니까. 절대적인 것은 없고 내가 절대적이니까 절대적인 나의 존재를 더욱더 절대화시키는 방법은 자꾸 연락을 취하는 거예요. 연락을. 그 연락을 다섯 번째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느냐 이렇게 표현합니다. 생태적인 환경과 상호작용을 한다. 굉장히 어려운 표현이지요. 생태적인 환경. 예를 들어서 상호작용을 한다. 쉽게 말해서 늘 친구 사귄다, 그런 뜻이에요. 이게.

상대가 있음에 내 존재감을 느끼는 거예요. 상대가 없으면 나는 자폐증에 빠져버린다. 왜냐하면 인간의 두뇌의 시냅스 세포는 새로운 창의성을 위해서 새로운 자극을 요청하게 되어있거든요. 자극이 오게 되게 되면 이 신경세포가 새로운 기억을 창출하기 위해서 기존에 새로운 것만 받아들이고 기존의 것은 밀어내는 경향이 있어요. 그래서 생태적 환경은 뭐냐 하면 오브젝트 대상, 대상을 자꾸 구애, 사랑을 구하듯이 찾아다니는 거예요.

여섯 번째 이렇게 상호작용을 통해서 유용성이니까 나를 위한 실제 구성에 나가지요. 나를 위한 현실구성. 나를 위한 현실구성이니까 너를 위한 현실구성은 아니지요. 남편이 사회생활 많이 하게 되면 이건 아내의 현실을 구축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의 현실을 구축하기 위한 시도고요, 아내는 니는 내 옆에 붙어있으면 된다. 시다발이처럼 늘 붙어있으면 된다. 이리 보는 거예요.

아내의 현실은 내 현실을 추구하는 순간 아내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너는 나한테 복속되면 그만이야. 내 니 먹여살려줄게. 다만 내가 하는 짓에 대해서는 일절 입 다물고 있어라. 내가 구성한 현실 속에 너를 넣어줄게. 그리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일곱 번째가 자기를 행위 주체자로 강조한다. 이렇게 생태 상호작용의 관계를 통해서 자연적인 결론을 자기를 행위 주체자라는 거예요. 아까 스가랴4장6절, 힘으로 되지 않고 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은 주님께서는 우리 자신을 밀어내는 거예요. 행위 주체 자니까.

여덟 번째, 그러다보니까 자꾸 자기가 행위의 주인공이 되어야 되니까 자꾸 평생을 통해서 뭐하느냐 평생 하는 게 리허설이에요. 자꾸 리허설만 한다. 저거 쑤셔보고, 이거 해보고, 저거 해보다가 리허설하면서 그 다음에 아홉 번째 자연에 없는 것을 인공적이지요. 나 중심의 현실을 창의한다. 창조한다. 자연에 없는 건데 내가 힘과 능으로 해서 새롭게 만들어진 그 안에서 나는 사는 재미와 보람과 즐거움을 느끼는 거예요.

식구가 네 식구 같으면 네 식구 전부 다 캡슐이 네 개에요. 7살 먹은 애는 7살 나름대로의 7년 동안 살아온다고 얼마나 고생했습니까. 자기 환상 속에 잠겨있는 거예요. 열 살 때 인생고비 있지요. 스무 살 인생고비. 고비일 때마다, 아홉 번째 자연에 없는 거, 타인에게도 없고, 나만의 고유의 것. 나만의 고유의 것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개성이라 하지요.

나만의 개성 있는 현실 속에 잡히는 사로잡혀있는 망상 속에 있는 자아도취의 세계. 자아도취에 빠지지요. 자아도취에 빠져야 이게 바로 자기만의 천국 아닙니까. 두뇌의 도파민이 그런 거 도와준다, 이야기하고 있어요.

열 번째 되게 도면 마지막에 뭐냐 하면 나는 그 안에서 자기 세계 안에서 나는 없고, 기하학을 만드는 구조적인 세계만 있는 거예요. 나의 세계만 있고 자기가 만든 세계에 자기가 거기서 아이스크림처럼 녹아서 살아지는 거예요. 이게 악마가 만든 환상이죠. 그 세계를 위해서 자기가 만든 세계에 의해서 자기가 스스로 종이 되고 노예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돈을 벌 예상한 사람이 돈을 잃어버리면 그 돈 벌었던 과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남은 대책은 뭐냐 자살이지요. 인기 좋았던 인기인이 옛날 인기 없어질 때 마지막 남은 카드는 뭐냐 그 인기 있는 현실을 위하여 과감하게 자결합니다. 명예스럽게. 그렇게 하는 말이 후회 없다. 이리 하거든요.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머리 깎고 중 된다든지. 이게 전부 다 나를 버리고 내가 하고 선택한 세계만을 남길 때 나는 후회 없이 살았다. 이리 되는 거예요.

이게 인간의 한계지요. 그럼 인간은 뭐냐 그 한계를 통해서 뭐냐 나라는 것은 내가 곧 신이고 내가 절대자라 하는 거예요. 이게 이스라엘에서 다른 나라에서 되는데 어디에는 용납이 안돼요? 스룹바벨한테 걸린다든지, 이스라엘 속에 걸렸다 하면 이것이 바로 너의 한계, 너의 힘과 능력이 왜 하나님께서 안 받는지를 그들은 실제적으로 현실적으로 그들은 멸망이란 사태를 통해서 그게 드러나야 되지요. 10분 쉽시다.


안양20210218B슥4장6절(이스라엘 쪼개기)-이 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하겠습니다. 꼭 비단 대중가요란 노래 음악 그런 것뿐만 아니고 미술이라든지 연극이라든지 그런 것이 위로가 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육의 특징은 나를 알아주는 거예요. 나를 알아주는 것. 나를 인정해주는 것. 으샤 으샤해 주는 거거든요. 그럼 나는 뭐냐, 나는 기억의 다발이에요. 내가 그런 노래나 음악으로 또는 가까운 일가친척의 옛날의 헤어졌던 사촌과 만나서 즐겁다는 말은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내 기억과 새로운 기억이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친근성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그게 내가 아직 안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겁니다.

나의 절대성, 나의 고귀함, 나의 가치를 늘 옆에서 그것을 찬미하고 그걸 칭찬해주고 격려해줄 때 우리는 위로를 느끼는 겁니다. 그럼 위로가 하는 결국은 뭐냐 악마의 마귀라 할 수 있지요. 너를 절대로 끝까지 너를 포기하면 안 돼! 막이 있는 거예요. 만약에 그 막이 떨어져나가면 마포대교에서 자살하지요.

그 마지막다운 막 같은 거. 자기의 과거의 기억과 유사성을 갖고 있는 겁니다. 행복했던 가정 이런 모든 게 하여튼 기억의 그게 그 안에서 나라는 것을 아까 뭐했다? 현실화시킨 거예요. 이게 착각인데. 착각이라도 좋아요. 왜? 나의 절대성이 되는 조건하에는 그걸 착각이든 허상이든 뭐라고 욕해도 나는 그걸 나를 위해서만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에.

나는 그 현실 없이는 내가 나의 절대성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그걸 이렇게 할 수 있어요. 모든 공간을 내 의미로 다 뻗어나가 채웠다. 모든 공간을. 내가 아는 모든 공간을 내 의미로 나와 관련된 상호작용이라 했지요. 상호작용. 다 의미로 가득 채운 거예요. 그럼 여기는 뭐가 없습니까? 빈 공간이 없지요. 빈 공간이 없습니다. 전부 다 나를 위한 공간이기 때문에.

그러면 하나님의 신, 하나님의 성령, 하나님의 영은 뭐냐, 빈 공간을 새로 만들어버려요. 내가 점유한 나의 현실, 포함되지 않은 다른 공간을 만들어버립니다. 다른 공간을 만들어버린다는 말은 그 공간에는 비어있겠지요. 나는 지금 꽉 채워져 있어요. 내가 꽉 채워진 내 채움에 대한 이 내용이 무용지물이 돼요. 무용지물. 아무짝도 소용없는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겁니다. 내가 나를 건사하고 나를 지키려하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그 새로움 앞에서는 쓰레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걸 신약에서는 그냥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다, 라고 하는 겁니다. 죄인 중에 괴수다.

지난 강남강의에서 그런 이야기했습니다. 그 중풍병자가 특이성을 갖게 된 것은 중풍병자가 예상하지 못하는, 중풍병자가 예상한 것은 뭐냐, 내가 중풍병이 없어지는 낫는 걸 바라지요. 그런데 거기에 죄사함이 들어왔다는 말은 꽂혔다는 말은 결국 나는 그 죄사함을 꽂히기 위해서는 나는 중풍병을 낫겠다는 시도 자체도 뭐가 되느냐 하면 죄가 되어야 돼요. 죄가 되어야 죄사함이 의미가 있잖아요. 그게 뭐냐 창조보다 더 낫다는 그게 뭐냐 하면 새로움이에요. 새로움.

십자가의 반복은 우리에게 새로움을 줍니다. 그 새로움을 위해서 우리는 계속 육적이어야 돼요. 십자가 안 것까지도 나의 영역에다가 집어넣어서 십자가 아는 것까지 테두리 쳐서 그걸 나의 세계로 절대화시키는 그런 육적인 작업이 또 시작되는 거예요. 나 복음 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서 성령께서 어떻게 한다? 또 빈 공간을 만들어요. 이건 몰랐지롱. 새로운 빈 공간을 만들어버립니다.

그러면 복음 안다고 우겼던 그것이 하나의 딱딱하게 굳어져버린 죽은 사물체가 되지요. 죽은 게 되어버립니다. 복음 알고, 십자가 알고 한 이런 나라는 인식 자체가 그건 생동감이 전혀 없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글을 쓸 때 자기의 무너진 내용을 쓰는 것과 정답을 쓰는 것과 그리 차이가 나요. 설교할 때 정답을 이야기하는 그것은 설교라 할 수 없어요. 무너져 내린 것을 써야 돼요. 무너져 내린 그것을.

정답이야 뭐 십자가마을에서 한 정답사하지요. 정답 얼마나 잘한다고요. 새로움이 없으면 새로운 글이 안 나옵니다. 새로운 글도 안 나오는데 억지로 쓴다. 이건 내 알아줘! 밖에 안 나와요. 나의 세계, 나의 가상세계, 내가 존대하는 그 세계, 니도 같이 존중해 주오! 그런 뜻이거든요.

십자가는 우리를 심판하는 행위 자체가 우리를 용서하는 행위고 그것이 긍휼하심 행위입니다. 우리가 확보된 나의 세계를 늘 새롭게 심판 때려주는 거예요. 얻어맞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깨지는 즐거움이 있어야 돼요. 육에 대한 환상은 영이 아니면 누가 깨겠습니까. 그래서 성령은 어떻게 깨느냐 하면 근거가 십자가 영으로서 깨어버려요. 십자가라는 것은 인간의 한계선 그 바깥에서 인간 전체를 심판주가 심판했던 그 결과물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너희들의 모든 시도, 현실구축, 아까 열 가지 있지요. 인간의 한계. 그 인간의 한계는 십자가 앞까지 도달되는 거예요. 십자가 앞까지. 제가 어제 들었던 이야기인데. 수요일에 참석하신 그 분께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신입사원을 뽑았어요. 한 명 뽑는데 300명이 왔다는 겁니다. 서류심사 300명이 왔다는 거예요. 요새는 어느 대학 출신이고 느그 아부지 뭐하시노? 이런 거 하나도 안 묻는 답니다. 서류적인 것으로서는 모든 걸 가리고 사회복지사 갖고 있는 사람만 뭐든지 원서 낼 수 있는 그 한 명 뽑는데 300명이 왔어요.

면접을 봅니다. 면접을 보는데 5명이 면접을 보는데 면접 보는 사람들은 막 4년 초년생이지요. 대학 졸업하고 이제 사회복지사1급자격증이 있으니까 그 관련된 과 졸업해가지고 시험 쳐서 합격해가지고 그런 사람들인데 면접을 봅니다. 이 면접관이 묻지요.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면 잘 합니까? 물었어요. 그러니까 이 면접 보는 사람도 답답한 게 잘하는 사람을 뽑는 게 아니에요. 떨어질 사람을 뽑는 거예요. 배제하면 나머지는 남는 사람이 되니까. 한명 만 남으면 돼요. 300명 왔으니까.

개인감정 없는데도 미안스러운 거예요. 목적이 얼마나 훌륭하냐가 아니라 떨쳐내는 것에 급급하다는 것을 현실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질문을 하지요. 사회생활 잘하려면 어떻게 하느냐 하니까, 어떤 사람은 눈치를 잘 봐야 됩니다. 면접관이 신났지요. 대번 하나 추려낸 거예요. 어떤 지원자는 말하기를 “저는 절대로 원장 말씀대로 저는 안 듣습니다.” 이런 식으로. 그걸 듣던 원장이 빼야 돼. 빼버렸어요.

그러면 면접관이 원하는 답변은 이거에요. 시간을 지키고 내게 주어진 일은 책임감 있게 다합니다. 요런 말만 하면 돼요. 그런 말한다고 다 합격되는 건 아니지만 사전에 잘릴 일은 없다 이 말입니다. 사전에 잘릴 일은 없거든요. 이건 뭐냐 하면 직장을 구한다는 것은 나의 절대 세계를 허무는 거예요. 나는 내 고유의 나를 위한 시간 따로 있고 내 세계 지키고 싶은 내 세계 있지만, 그 돈이란 것이 나보다 더 세. 더 정확히 말할까요. 내가 꾸미고 싶은 내 이 현실을 누가 박살내는가. 돈이라는 자본주의가 박살내요. 나의 세계를 돈이 들어오면 내가 고이 고이 평생 아름답게 고상하게 했던 이 세계가 여지없이 박살납니다.

참, 이 세상 고맙지요. 어느 인간이든 자기가 착하고 바르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선악과를 따먹었으니까 악을 버리고 선을 취하는 것. 본인이 생각해도 흐뭇한 거예요. 나 같은 이 착한 사람, 선한 사람, 천사 같은 사람 있으면 나오라고 그래. 나와 보라고 그래. 이게 자기의 의에 부합되는 자아상이거든요.

그런데 무엇이 용납이 안 된다. 한 자로. 돈이에요. 돈. 예수님 시험할 때 첫 번째 시험이 뭐였습니까? 돈이었지요. 떡이었지요. 돈, 떡, 재물, 소유물, 이게 소박한 나의 현실을 작살냅니다. 그러면 그 취업하는 사람은 일단 나중 취업되고 볼 일이지요. 내가 취업되고 본다는 것은 내가 취업한 내가 원장 말을 듣지 않습니다. 하는 말은 그렇게 말한 지원자는 뭘 모르느냐 하면 내가 이 회사에 오더라도 나의 고유의 것은 포기할 마음이 없습니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런데 시간 지키고 바르게 하겠습니다. 라는 뜻은 무슨 뜻입니까. 내가 더 나은 나를 위해서 잠시 나의 세계를 접겠습니다. 그런 뜻이지요. 이게 아까 말한 요령부리는 거예요. 요령부리는 겁니다. 사회생활 그리하는 거예요. 자기 부인을 하는 거예요. 사회생활은 꼭 십자가에서 자기 부인을 하는 것이 아니고 돈 앞에 자기를 부인하는 생활. 이게 사회생활입니다. 돈 앞에서 자기를 스스로 부인하는 생활.

일단 벌고 보자. 다시 잃어버린 나를 만회하고 찾으면 될 거 아니냐. 그러나 직장생활해보세요. 마귀가 그렇게 싶사리 우리가 이 세상을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지요.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그럼 다른 직장 알아봐야지요. 그게 아까 뭐한다? 연결을 꾀한다. 연결을 취한다. 직장생활하면서 쉬는 시간에 눈치봐가면서 뭐한다? 주식 투자를 한다. 하나의 개미가 되어서 해본다. 이건 직장 그만뒀을 때 내가 사업할 밑천 얻기 위해서 주식투자를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말은 내가 책임 있게 다하겠습니다. 해놓고는 딴 짓하고 있는 거예요. 회사 측도 그걸 알고 있는 겁니다. 이걸 무슨 현상이냐, 이걸 가지고 이 이야기가 일반 회사 이야기를 제가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니에요. 이게 소위 교회 영적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게 무슨 현상이라 하느냐 하면 레임덕현상이라 해요. 레임덕. 들어봤습니까. 국정 후반기에 권력이 누수가 되어버려요. 초반에는 딱 잡았는데 나중 끝에 되게 되면 민정수석하고 법무부장관하고 싸우고 있어요. 이게 레임덕 현상이에요.

대통령이지만 관여 못해요. 권력의 장악력이 점점 더 약해져버리는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처음에 교회에 나왔을 때 울고 불고 찬송가 손들고 나옵니다. 있잖아요. 천부여! 손들고 옵니다. 그 때는 레임덕이 없어요. 주여! 이 몸 주님께 다 바치겠습니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이 몸, 주님이여 받을 수 있거든 받으세요. 주를 위해 살겠습니다. 주를 위해 살리라. 내가 방황할 때, 가사에도 나와요.

그런데 한 5년, 10년 하면 레임덕 현상이 일어나는 거예요. 육적이 영적 세계를 완전히 전부다 찢어 놔버린 거예요. 교회 와서도 지 자존심 챙기고 남한테 안 지려하는 그 현상. 이 이야기를 왜 하느냐, 바로 이스라엘이 진짜 영적 이스라엘, 육적 이스라엘을 구분 지을 때 레임덕 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올 때 어떻게 땅에 들어왔는가, 전혀 그런 생각 못하고 일단 들어왔으면 내 직장이고, 내 거라고 본 거예요. 나의 꿈을 실현시킬 장소다. 이리 보는 겁니다. 육이 영을 장악하려한 거예요. 내가 하나님을 장악하려고한 겁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을 내 손에 있으니까 자기 내부는 영적인 아주 고상한 거룩한 영적인 세계라고 착각한 거예요.

그런데 아까 외부에 이스라엘 바깥에 있는 이방 민족에 뭐를 갖고 있다? 내 능으로, 힘으로 했으니까 그들은 어떤 인간의 능력이 발휘되고 인간의 힘이 발휘돼요. 그게 부러운 거예요. ‘아~~ 하나님 믿다가 이게 완전히 거지꼴 나겠다.’ 이런 생각이 막 드는 겁니다. 내가 영적인 사람이 되어야지, 복음으로 살아야지, 라는 그 레임덕. 내 복음을 장악하는 내 권력이 누수가 생긴 겁니다. 이게 벌써 그게 틈이 벌어진 거예요. 틈이.

그러면 이 구약에서 이스라엘이 이렇게 망해버렸다는 말은 신약에 오게 되면 신약의 복음에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이 구약처럼 망하는 경우는 두 번 다시 일어나겠습니까? 안 일어나겠습니까? 안 일어나게 조치하겠지요. 왜, 인간의 육이라 하는 것은 한계가 뻔히 구약을 통해서 이미 다 노출됐잖아요.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하나님과 인간이 둘 다 고유한 실체가 있는 한 결코 이건 만날 수 없다. 하나가 될 수 없다. 이것이 분명히 드러났어요. 나도 살고 주님도 살고 이건 있을 수가 없어요. 나는 죽고 주님은 내 안에서 살아나는 것. 그게 절대적이에요. 나는 죽고 주님은 살아나는 거예요.

그러면 우리가 알아서 요령 부려서 알아서 주님 저 죽었습니다. 라고 할 때 그게 죽은 걸까요? 죽은 척을 하고 있는 겁니까? 죽은 척을 해서 나를 죽은 상태에서 따로 내가 나를 살수 있다면 죽은 척도 할 수 있다. 아니 죽은 척이 아니고 진짜 죽으라면 죽을 수 있습니다. 하는 그것도 꼼수에요. 꼼수. 그냥 사시면 되는데 내가 예수님 앞에 원하는 십자가의 삶, 자기 부인의 삶을 살겠다는 것도 어디에 해당되느냐 하면 나의 힘과 나의 능에 해당돼요.

아까 했지만 죽은 자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럼 뭐냐 뭘 감사하고, 뭘 찬미하느냐, 세상이 주의 뜻대로 계획대로 돌아가는 것에 대하여 찬미하면 되지요. 주의 계획대로. 그 다음에 나올 문제는 계획이 뭐냐는 거예요. 계획이. 주의 계획이 뭐냐,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이 망하는 겁니다.

내가 망하는 것에 대해서 내가 흔쾌히 받아들이는 정도가 아닙니다. 흔쾌히 감사할 수 있어야 돼요. 내가 망하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서 중국집에 데려가 가지고 자장면 시킨 사람 천국가고 짬뽕 시킨 사람 지옥 보낸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쾌히 자장면을 선택하겠지요. 그러면 그건 자장면 먹는 게 아닙니다. 내 능과 힘으로 자장면 먹은 거예요. 아 이 예가 괜찮네. 지금 이야기해 놓고.

내가 좋아서 자장면 먹는 게 아니고 주님이 자장면 좋아한다니까 내 힘과 능을 가동시킨 거예요. 동원시킨 거예요. 주님께서 자장면이냐, 짬뽕이냐 하는 것은 너희들은 원래 짬뽕 먹게 되어있기 때문에 짬뽕 먹어서 망해버려라 이 말이거든요. 그럼 우리가 할 일은 뭐냐 짬뽕 먹으면 돼요. 짬뽕 먹으면 뭐가 우리한테 살아나느냐 하면 짬뽕 먹는다 하면 지옥 간다는 주의 뜻이 짬뽕 먹는 우리를 통해서 발현되잖아요. 그러면 그게 감사고 그게 하나님의 영광이 된다 말입니다.

왜, 그게 주님의 존재와 내 존재를 비교하는 게 아니고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함이기 때문에. 십자가라는 것은 이미 나를 망한 존재로 인정한다면 그걸 극구 부인해서 안 망하려고 할 게 아니라 십자가만 드러낼 수 있다면 언제든지 망할 수 있는 거죠.

그런데 내 힘으로 내 능으로 안 망해도 그냥 살아도 이미 십자가에 의해서 규정된 거예요. 망했다! 짬뽕이나 먹어라. 그럼 짬뽕 먹으면 되지요. 전혀 어렵지 않지요. 굉장히 쉽습니다.

그런 경우가 사도행전19장에 나옵니다. 19장하기 전에 비유 하나를 들겠어요. 아버지께서 가족들 모아놓고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오늘 저녁상을 차린다. 선언하고 직장하고 퇴근할 때 내가 저녁상을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차린다. 딱 했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구약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버지 올 때 쯤 되어가지고 심판주 올 때 되어가지고 아버지 좋아하는, 아버지는 뭐 좋아하더라? 아버지는 피자 좋아하더라. 피자.

이건 여담인데요, 이건 성경에도 관계없는 여담인데. 지난 주일날 이렇게 인제 주일학교 설교를 하려고 하는데 제 아내가 귓속말로 내 책상에 피자 있으니까 집에 갈 때 삐딱 들지 말고 옆으로 잘 들으라는 거예요. 으쌰! 피자인 줄 알고 좋다했거든요. 나중에 딱 보니까 피자가 아니고 파이였어요. 아내가 말 실수한 거예요. 피자, 피 들어가니까 어떤 호도파이를 만들은 거예요. 그래서 이게 뭐냐 하면 내 현실이 작살났다 이야기하려고. 피자가 왜 맛있느냐 하면 과거에 피자를 먹어본 기억이 내 안에서 대조를 하기 때문에, 무슨 이야기하려고 이런 이야기를. 아무튼 아버지가 피자를 좋아한다 해가지고 큰 딸은 피자 준비하고 그 다음 둘째 딸은 아버지는 치킨 좋아한다고 치킨 준비하고 가만히 보니 내 좋아하는 이야기만 계속하는데. 세 번째는 단팥죽 좋아한다고 준비하고. 이리 죽 한 거예요.

아버지는 또 해물탕 좋아한다고 엄마는 해물탕 준비하고. 아버지는 딱 와가지고 짜자잔! 아버지는 퇴근해가지고 딩동댕~~해서 들어왔다 말이죠. 아버지가 막 화를 내는 거예요. 다 치워라! 나는 내가 갖고 온 피자로 만들겠다. 그게 뭐냐 처음 출발할 때 뭐라고 했느냐 하면 오늘 저녁은 내가 좋아하는 음식을 하겠다고 했거든요. 음식을 하겠다는데 식구들이 그걸 듣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을 자기 힘으로 능으로 미리 친히 준비를 한 거예요.

그런데 아버지 뜻은 그게 아니고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내가 준비해서 내가 먹을 때 니가 거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에 같이 동참하라고 내가 그 소리한 건데 아버지가 피자 좋아한다고 니가 피자를 사와? 니가 사온 피자는 내가 받는다? 안 받는다? 안 받는다고 확 치워버린 그 사건이 무슨 사건이냐, 십자가사건이에요.

일체 우리의 육에서 나온 힘과 능은 안 받습니다. 우리의 종교나 경건은 안 받아요. 이제 확 이해되지 않습니까. 인생 바르게 사는 거 받지를 않습니다. 그게 스룹바벨입니다. 스룹바벨 속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망했습니다. 망한 게 당연합니다. 가 요소가 담겨 있는 인물이 스룹바벨이에요. 우리는 바벨론에 잡혀가도 합당합니다. 외부에서 그러니까 일본에서 돌아온 조선사람 이거든요. 일본 유학 갔다 온 사람 이리 보면 돼요. 우리가 일제시대때 어떤 사람은 강점기라고 하는데 새로운 용어는 다 싫어해요. 무조건 나는 강점기 아니에요. 일제시대에요. 무조건.

일제시대때 일본의 통치아래 있었던 그 시절에 대해서 통치할 만하다고 내 내부가 작용되어있는 사람으로 새로운 성전으로 만듭니다. 스룹바벨에 의해서. 무슨 줄로 해서 다람줄. 다림줄은 두 자로 뭐라 했습니까? 율법. 양보 없는 율법이에요. 이 율법이 다림줄이 완성되면 뭐냐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모든 인간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간단하잖아요. 성경이 이렇게 보니까 굉장히 간단하지요. 그런데 우리의 육신이 있다 말이죠. 우리의 육신은 아까 육신의 열 가지 봤지요. 육신은 어떻게 하냐 육신에서 납득이 되는 그것만 뭘로 본다? 유일한 현실, 이것을 가지고 공간 점유. 이 세상에 있는 것을 공간점유에요.

공간점유가 되기 위해서 여기서 뭐냐 하면 선택과 인간은 분별력을 작용해요. 선택과 분별. 과거의 나와 닮은 것과 내 과거의 나를 인정해주는 것과 인정하지 않는 것. 이걸 분별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 목사 당신 지금 북한 김정은 만나러 갈래?” “아니” 이거 뭐예요? 분별하는 거죠. 북한 가서 고구마 삶아먹을 일이 있어요. 내 과거에는 하루 세끼 고구마 먹는 거 싫어. 감자 먹는 거 싫어. 그러면 뭐를 배척합니까? 북한 김정은 만나는 거 어떻게 됩니까? 나는 선호하지 않지요. 좋아하지 않지요. 그러면 이 공간은 어떤 공간이냐, 내가 원하는 공간과 내가 배척한 공간, 그걸 플러스 합쳐보면 내가 아는 현실의 전부잖아요.

당신 지옥 갈래? 천국 갈래? 지옥 싫어 천국가고 싶어. 이건 뭡니까? 내가 아는 천국에 내가 가는 모습이 과거의 내 위주의 현실과 합치되지요. 그런데 내가 지옥 불 그것도 한 번 들어가면 못나오는 이게 문제인 거예요. 사람이 희망이 없으면 못사는데 그것도 10년 살다가 정신 차리고 나오면 그래도 지옥가도 희망은 있잖아요. 지옥가도 희망이 없어요. 복음이 없는 사람은 복음이 없는 정도가 아니고 희망이 없어요. 희망이.

안타깝지요. 아, 애먹이는 남편이야 지옥 가는 거 속이나 시원하지만, 내 자식은 딸이나 아들은 어쩔 건데. 지 딴아 희망이라 하는 것은 가짜고, 허구거든요. 지 밖에 모르는 거지만. 그거 말고 주님이 준비하신 성경에서 말씀 있는 이 천국. 거기서 아무 대책도 없는 거예요. 그럼 뭐 복음 이야기하면 듣기 싫다! 시험 준비해야 돼. 나는 나니까. 이러고 있다고요.

어제 수요일에 마태복음 22장 혼인잔치 이야기했잖아요. 혼인잔치 이야기에서 왜 즐거워야 될 결혼잔치가 완전히 살육의 현장이 되었는가 이건 뭐냐 하면 나는 밭 샀다. 소 샀다. 상업차 어디 출장가야 된다. 나는 내 장가가기도 바쁘다. 라고 하는 자들이 왜 무참하게도 임금에 의해서 혼인잔치 주체자한테 살육을 당해야 되느냐 하면 그 사람은 혼인잔치에서 주안점은 뭐냐 하면 여성으로서 갖는 신부로서 갖는 행복이 핵심요소가 될 때 천국의 혼인잔치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거든요.

그런데 내가 밭을 사고 내가 소를 사고 내가 출장가 버리면 주인공이 뭐냐 그 사람은 자기가 누구, 누구의 여자가 아니에요. 자기는 지금 남성상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자기 개성을 발휘하고 있다고요. 그러니까 혼인잔치 때 작살내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누가 기뻐요? 작살내는 그 임금님이 주체 자가 되게 기쁜 혼인잔치 날이 되는 거예요.

변사또 생일잔치할 때 춘향이 작살내야 그 기쁨이 배가 되는 것처럼. 이게 바로 심판주의 지금 하실 계획입니다. 사람들은 그걸 횡포로 보지만. 지금 신약 때에 이 구약을 보는 이유는 스룹바벨이 누구냐 하면 그 당시의 예수님으로 보시면 돼요. 예수님의 영이 임했다. 그러면 예수님의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너그는 이미 죽었어!” 내용이 포함돼 있는 거예요. 그게 십자가 사건의 의미입니다. 죽은 자한테는 아무것도 받는다? 안 받는다? 헌금이고 기도고 아무것도 안 받아요. 본인이 답답해서 한다고요. 답답하든 말든 안 받아요. 안 받든 말든 나는 하겠다는 거예요. 하든지 말든지.

하나님이 원하는 예루살렘은 여성성을 지니고, 그거는 태어날 때부터 독자적으로 갖고 있던 남성성으로서는 자신의 행함이나 능으로 할 수 없는 거예요. 철저하게 모든 인간은 구원되지 못한다, 를 그걸 명확하게 해주는 그 영이 무슨 영이냐 십자가에서 하는 성령입니다. 성신입니다. 니는 죽은 놈은 아무것도 못하고 활동하는 것은 누구만 활동한다? 성신이 활동하고 성령이 활동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계획대로 차질 없이 이루어진다, 를 니가 찬미할 수 있는 그러한 안목이 있느냐를 보는 거예요.

그 안목은 바로 성령을 받아야 알 수 있어요. 왜, 성령은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에 비로소 밝혀지는 게 성령의 일이고, 성령은 모든 것이 종결되고 난 뒤를 볼 수 있는 눈이 성령의 눈이기 때문에 그래요. 확정적이에요. 절대적이지요. 확정적, 절대적이 없어버리면 우리는 또 시도하게 돼요. 고개를 쳐들고 어제보다 더 나은 내일. 이런 거 있잖아요.

그래서 사도행전19장 이제 봅시다. 사도행전 하는데 되게 길다. 사도행전19장11절, 12절.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아까 우리가 한 거 복습해 봅시다. 인간은 예상하지요. 예측합니다. 자기의 영역을 넓히는 것을 멈추지를 않아요. 세상의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내가 판단하는 나의 공간으로 점유되어야 되니까. 아~ 싫어. 아~ 나한테 오지 마! 싫어. 아! 저건 내가 원해. 나한테 오라. 한명 뽑는데 한명 왔다고. 아~ 시시해. 300명 왔다고. 아~ 합격되어야 되겠어. 이리 되거든요.

왜, 300명 와서 한 명 합격되는 것과 한 명 왔는데 한 명 합격되는 것, 미달되는데 합격되는 것과 50:1의 합격되는 것과 어느 것이 나를 절대성을 보장해 주는가, 센데 가야 되지요. 이게 뭐냐 현실 판단이에요. 어떻게 판단한다. 내 절대성을 준해서 현실을 판단하고 분별하는 거예요. 버릴 것은 버리고 얻을 것은 얻는 것.

그래서 이건 나로 꽉 차있는, 저건 내가 버린 거니까 나는 탐 안내. 나의 것으로 꽉 차있는 내 의미로 꽉 차있는 그 현실. 빈 공간이 없어요. 빈 공간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 뭐가 나타났습니까? 빈 공간이 나타났지요. 예상 못했어요. 미리 예상 못했습니다. 바울이 손으로 희한한 능력을 행하고 심지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니까 그 병이 나았어요.

그건 그 현장에서 새롭게 알게 된 거에요. 새롭게 알게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새롭게 알게 된 것을 가지고 그걸 구경하는 관찰자들 중에 어떤 사람이 있느냐, 자신의 과거에 인간은 자기의 기억이 자기 자아잖아요. 자아니까 새로 일어난 새로운 게 굉장히 무척 좋아보였던 겁니다. 좋아보였으니까 자기가 자기 공간이 알고 있는 공간 바깥에서 무슨 빈 공간 새로움이 채워졌지요. 그러면 인간은 어떻게 하느냐, 그 빈 공간에 채워진 것을 다시 내 공간 안으로 집어넣으려고 하겠지요. 그럼 비교하겠지요. 아~ 저거 괜찮네. 나도 그 능력 있으면 좋겠다. 하겠지요.

그러면 사도바울의 손수건과 앞치마 이건 사람 몸도 피부도 아니에요. 사도바울의 피부도 아니고 아예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병이 낫는 희한한 일이 벌어졌다 말이지요. 그러면 사람은 그걸 보면 어떤 욕심이 육신으로부터 자동적으로 등장하겠습니까? 내 손수건으로도 남들이 병이 낫는다면 이 손수건을 똑같은 손수건을 대구 서문시장가가지고 열 장을 사가지고 내가 코침을 바르고 내가 세탁기에 돌려버리면 거기서 능력은 계속 살아있어서 이왕이면 보다 많은 사람이 병에서 나아서 예수 쪽으로 오게 되면 하나님이 보시기에 얼마나 잘했다. 이득이다. 우리 장사 잘하고 있네. 라고 칭찬해 줄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겠지요.

그 생각이 왜 드느냐 하면 과거에 이미 그 생각을 갖고 있었단 뜻이에요. 나의 존재의 가치가 하나님께 인정받기 위해서 무슨 짓도 할 수 있습니다. 내 가치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위로 받고 호응 받고 나의 절대성이 나만이 인정하는 게 아니라 남들까지 나의 절대성을 인정한다면 내가 무슨 짓을 못하리오. 그게 바로 예수님이 광야에서 당했던 몇 번째 시험? 마태복음에서 두 번째 시험이에요. 니가 여기서 뛰어내려라. 사람들은 너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해 줄 것이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시험했다는 말은 이미 마귀 안에 마귀가 예수님에게 하고 있는 모든 인간이 그 마귀의 시험에 전부 다 넘어갔다는 뜻이에요. 너도 마찬가지다. 니가 별거냐. 이미 그 안에는 여러분들도 저도 포함되어있고 이미 넘어간 거예요. 유튜브 조회 수 팍팍 좋아요! 막 올라와 보세요. 갑자기 기분이 막 업 된다니까요. 전날에 20명 봤는데, 요번에 이천명 봐보세요. 기계가 잘못됐나. 50만명. 강다니엘 그런 사람한테는 수천명, 수천만명이 되겠지요. 방탄 소년단 말이지요. 나는 방탄복도 없다. 지금.

그걸 한꺼번에 잃어보세요.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강남강의 할 때 제가 그렇게 했잖아요. 100미터 올라갔는데 높이 50미터 했지요. 사람이 그만큼 힘들게 인생을 살아왔으면 우리는 뭘 확인하고 싶어 하느냐 하면 바닥에서부터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높게 올라왔는가를 본인이 확인하고 싶어요. 교회를 다니면 다닌 만큼 이게 뭐가 되느냐 하면 이게 성화론이 절로 생긴다니까요. 성화론이.

내가 50년을 다녔으니까 뭔가 달라졌는가는 확실한데 어디까지 얼마나 달라졌는가 그 높이를 보고 싶은 겁니다. 이 높이의 공식이 되는 그게 수학공식에 뭐하고 했습니까? 사인. 수학한지 너무 오래돼가지고. 사인은 빗변에 높이를 하는 거예요. 내가 얼마나 높이 왔는가를 확인하는 순간 또 똑같은 마음 때문에 뭐냐 하면 이렇게 대단했는데 한순간에 추락하면 안 되겠지. 라는 공포가 달려오겠지요.

이게 바로 아까 이야기한 경건을 위장한 속물입니다. 세상에서 방황했다. 세상에서 방황했다고 이제는 그 세상 생활에 안 들어가겠다고 하는 그것이 바로 아직도 방황하고 있는 중이에요. 뭘 기대해요. 뭘 기대하겠어요. 지금보다 더 나은 나를 향상된 나를 기대하겠지요. 그건 뭐를 모독하는 겁니까. 안티그리스도. 십자가. 십자가를 모독하는 거예요. 전혀 지금 복음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자꾸 예수님을 본받으려고 하고, 사도바울을 본받으려고 해요.

자, 사도행전19장 해봅시다. 저렇게 하니까 그 뒤에 그걸 보고 하니까 13절 악귀도 나갔더라. 이에 돌아다니면서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 대해서 주예수를 불러서 말하되, 아~~ 이거 주 예수를 부른다는 거 굉장히 중요한 대목인데, 이건 뭐냐 하면 그 브랜드 상표와 내용물이 다른 거예요. 그런데 사람들은 몰라요. 내용물은 주변이 시커머니까 내용물은 모르고 뭘 보고 사느냐 하면 상표보고 사겠지요. 브랜드보고 사겠지요.

예수 이름으로 자기 몸에다가 예수 이름으로 거기다가 상표 떼어가지고 거기다가 붙이는 거예요. 주님이 봤으면 상표법 위반이에요. 그거. 자기 내용물이 뭔지도 모르고 본인의 상표로 붙이는 거예요. 왜? 남한테 인정받는 것이 나한테 유리하다는 자기의 과거의 자아생활이 기억이 내 두뇌 안에 활성화되어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두뇌는 판단하잖아요. 판단하고 결정하고 선택하고. 그게 자아가 공명화되어서 자아가 성립되거든요. 절대적이지요. 그러나 정확한 건 아니에요. 정확하고 절대적인 건 없지만, 무슨 성이라 해요? 정확성이 아니고 무슨 성. 유용성. 유용성이란 말은 앞에 뭐가 붙지요. 누구한테 유용하냐. 누구한테 유용하겠어요. 나한테 유용하지요.

그런데 그 자아가 없는데요. 두뇌는 자아가 없어요. 왜,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두뇌를 공부하면 할수록 뭘 느끼느냐, 나마저도 절대성이 아닌 걸 아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보이지 않는 미지의 X에요. 두뇌를 연구하는 사람은 미지의 X를 감지하는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괴물이지요. 괴물.

나마저 굴복시키는 그 모순의 괴물. 다만 우리는 나는 돈 좋아하고 인기 좋아하고 세상 좋아하고. 그 괴물이 시키는 대로 그저 움직일 뿐인데 그 괴물이 누구인지는 정체는 나는 모르겠고. 다만 그 괴물이 나하고 너무 친하게 익숙하게 기억에 박혀있기 때문에 그 괴물이 시키는 대로 나는 나다. 하는 것으로 살 수밖에 없지요. 쉽게 말해서 자기밖에 모르는 거죠. 아까 쉬는 시간에 자폐증 환자라고 했는데, 자폐증 빼세요. 그냥 환자에요. 그냥 환자입니다.

날 때부터 인간은 이단이라니까요. 인간은. 날 때부터. 그래서 여기 등장하는 사람이 어떤 유대인이 사도바울에 일어난 희한한 현상, 그러니까 빈 공간이지요. 인간이 예상 못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 그걸 좋아할 때 우리가 이 마술사를 욕할 문제가 아니에요. 우리는 항상 성화론처럼 이 위에서 얼쩡거리지 말고 십자가라는 것은 항상 바닥이에요. 바닥부터 시작하고 이 일은 누가 일하는가, 성령이 일하고 주님이 일하신 거예요. 주님의 계획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십자가 안에 어제의 십자가, 오늘의 십자가, 내일이면 내일의 십자가, 항상 십자가. 나는 죽었음을 확인하는 쪽으로 결과가 주어져야 돼요. 항상 바닥이라. 사인곡선이 성립되지 않아야 돼요. 이게. 탄젠트도 물론 성립되지 않아야 되고. 성립되지 않기 위해서 자꾸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서 십자가를 통해서 또 다시 박살나는 경우를 되풀이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그 다음에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그 다음이에요. 그렇게 하니까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15절은 우리가 잊지 말자고 한 목소리로 이야기합시다.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세상에 우리 바깥에 또 다른 현실, 영적 현실이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눈에 보이는 공간, 시간, 이게 전부인줄 알았는데 내가 나를 평가하는 게 나의 평가가 전부인 줄 알았는데 다른 공간이 있었어요. 악마가 그걸 알고 있었습니다. 니는 예수계에 속한 인물도 아니고 너는 놀라운 사실은 우리 같은 인간 성정을 갖은 바울인데 니는 사도바울에 속한 인간도 아니야. 라고 누가 이야기해요? 귀신이 악마가 이야기해요. 악마가 뭘 인정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은 지금 죽어도 어디 간다? 천국에 갈 사람이라는 것을 누가 지금 증언하고 있습니까? 악마가 증언하고 있어요. 악마가.

예수님과 바울은 같이 붙어있다는 겁니다. 이건 악마가 증언하고 있어요. 악마도 다 쓸데없는 게 아니지요. 악마가 뭐를 증거 하느냐 하면 사도바울이 손수건과 앞치마가 이것이 사도바울의 힘이나 능에서 나온 것이 아님을 악마가 증언하고 있어요. 악마가.

사도바울이 이건 내가 한 거 아니야. 내가 한 게 아니야. 백날 해도 소용없어요. 내가 안했다 해도 그것도 믿음직한 게 못돼. 겸손을 위장한 교만일 수가 있거든요. 그게 아니고 그냥 세상 돌아가는 것이 증언해준다니까. 사도바울이 악마하고 돈 거래 있었습니까. 니 내할 때 니 증언해달라. 그런 거 없었거든요. 사도바울은 그냥 살뿐이에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은 결과적으로 오늘 강의의 결론입니다.

결과적으로 뭐냐 하면 결과적으로 모든 게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고백하는 거예요. 고백하는 거. 뭘 하자는 게 아니에요. 움직이면 돌아보면 그것이 마태복음5장의 달성이요, 마태복음6장의 그 나라의 의가 되고, 마태복음7장에 개나 돼지에게 복음 전하지 말라한 일이 되었고, 돌아보면 좁은 길로 가는 거고, 이건 내가 좁은 길로 가겠다가 아니라 내가 돌아보면 다 주의 지시에 의해서 주께서 자기 천국 현실을 우리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열심히 차질 없이 자기 천국을 이루어오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하는 말이 니 힘도 아니고 니 재주도 능력도 아니라 이건 하나님의 성령, 십자가의 완성에 의한 전개로서 결과물로 오늘날 니가 여기 있다. 그게 스룹바벨이에요. 그 당시에 스룹바벨이에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뭐 사도바울은 워낙 진짜 신앙이 대단하고 워낙 사도니까 그 정도 수준 되니까 우리는 뭐 흉내도 못 내겠지만, 일반인이야 어떻게 그렇게 사도바울처럼 살겠습니까?” 라고 또 싶지요. 이건 내가 하는가. 생각이 들 수도 있어요.

그럴 때 다시 한 번 데살로니가전서2장13절을 한 번 봅시다. 여기는 사도가 나오는 게 아닙니다. 교인들이 나와요.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그 다음에 다 같이 시작.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스톱입니다.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이게 가능합니까. 이게 가능해요?

이게 어떻게 설명이 불가합니다. 저 사람이 어떤 말을 들을 때 성경 말씀이나 무슨 말을 들을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아니하고, 사도의 말을 사도가 분명히 하고 있는 걸 눈앞에서 다 알면서도 사람의 사도 당신의 말이 아닙니다. 라고 믿어지는 게 이것이 인간의 힘이나 능으로 될 일이냐 말이지요.

그러니 사도바울만 위대하고 사도바울만 귀신이 알아주는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다는 그것이 귀신이나 누가 봐도 그 사람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에요. 예수님께.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리 되어있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말은 내가 말씀을 지킨다는 말이 아니고 지키고 자시고 할 것 없이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서 여기서 역동적으로 지금 되게 바쁘게 지시하고 활동하고 있고 성과를 내고 있다는 거예요. 이건 유독 믿음 좋다는 사도에게만 국한되는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천국 가는 보통 사람들, 야~ 천국 가는 보통 사람들 말이 안 어울린다. 천국 가는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이 아니에요. 보통 사람이 아닌 게 꼭 이런 소리해요. 나는 보통~ 사람입니다.

돈을 벌라 합니까. 뭐 예배당을 지으라 합니까. 주님께서는 뭐냐 하면 그냥 내말을 할 때 사람의 말로 듣지 않고 주의 말씀 받아들이는 거. 이것이 우리의 능력으로서는 불가능하고 성령이 임해야 가능한 일입니다. 성령이 임해야. 아~ 그러면 됐지. 뭐 꼭 큰 교회 다녀야 됩니까. 내 자체가 이미 교회고 내 자체가 십자가 꽂혀가지고 날마다 주의 말씀 듣습니다. 해놓고는 돌아서면 또 육신이 높네. 그걸 나는 이 정도야. 그걸 또 자기의 절대성을 위한 자기 잘남을 위한 그걸로 딱딱하게 굳어내는 이 육신. 그 다음 또 작살내지요.

또 주의 말씀 들어옵니다. 그래서 성도의 특징은 계속해서 주의 말씀이 한 번이 아니라 쉬지도 않고 주의 말씀이신 개 짖는 것도 주의 말씀으로 들리고. 전부 다 주의 말씀. 술 먹고 사람 짓을 못하는 짐승 짓을 하는 인간도 성도의 입장에는 그게 주의 일로 주의 행하심으로 받아들일 정도입니다. 모든 만사가 주님의 활발하게 활동하심. 일하심으로 다 받아들이는 거예요. 한시도 주의 지시에서 떠나 본적이 없어요.

아침에 밥 먹으면서 “주여, 죄 짓습니다.” “그래, 그게 죄야.” 하는 것도 주의 말씀으로 들리는 거예요. “주여, 제가 샤워하는 것도 주의 죄짓는 겁니다.” “그래, 그게 죄짓는 거야.” 라고 들리는 주의 말씀.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 처음에 제자들이 그 말을 이해 못했습니다.

자, 끝으로 말씀하고 마치겠습니다. 고린도후서11장에서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이 스가랴에 나오는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둘로 쪼개지기 직전에 이스라엘이 있잖아요. 바벨론에 포로 잡혀서 박살나기 이전까지 이스라엘. 그게 육적과 영적 요소가 같이 있는 것처럼 그 당시 고린도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과거로 끝난 게 아니에요. 지금도 마찬가지에요. 지금도 사적으로 개인적으로 마찬가지에요.

여기 고린도후서11장에 보면 4절에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자, 교회되기 3가지 상품이 나왔지요. 하나는 뭐냐, 예수 이야기하면 교회된다. 또 하나는 성령 이야기하면 교회된다. 또 하나는 복음 이야기하면 교회된다. 할 때 그 복음이 그 복음이 아니고 그 성령이 그 성령이 아니고, 그 예수님이 그 예수님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럼 너희들은 뭐냐 13절에,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다. 사탄이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 것에 유념하시기 바랍니다. 악마가 악마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아요. 그럼 악마를 어떻게 분간하느냐. 자기를 모독할 줄을 몰라요. 자기를. 왜, 아까 너무 성화 많이 되어가지고.

자기 모독하면 추락된다는 거예요. 추락하라는 거예요. 주께서. 매일같이 우리보고 추락하라는 겁니다. 세리나 강도나 거지가 되라는 거예요. 우리보고. 신앙의 연수 채우지 말고. 그거 채운다고 아무 소용없고.

그래서 이게 필요해서 날마다 우리는 주의 말씀이 사람의 말이 아니고 주의 말씀으로 들려지도록 말씀이 우리한테 작용하도록 거짓과 참이 구별되도록 정말 자기를 모독하는 것도 지옥 갈만한 존재라는 것을 날마다 확인해주는 그것. 그것만이 십자가가 살아있는 주의 이스라엘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옛날이나 지금이나 주의 원칙에는 한결같고 변함이 없음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어서 감사합니다. 어떤 일이라도 결과적으로 우리 힘과 능으로 하지 않았음을 오직 주께서 하셨고 성령께서의 자기 작품인 것을 자기를 부인하는 가운데 기쁘게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