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빌립보서 4:18-20 / 향기로운 제물(내가 없음) 본문
빌립보서 4:18-20 향기로운 제물
이근호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입니다. 이 사람이 로마까지 와서 옥에 있는 사도 바울에 선물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대해서 사도 바울은 ‘제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쁘시게 받을 만한 제물’이라는 겁니다. ‘제물’은 레위기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하나님의 제사의 핵심 사물입니다.
특히 ‘향기로운’라는 말이 붙는 것은 불로 몽땅 다 태우는 번제일 경우에 자주 언급됩니다. “너는 그것을 그들의 손에서 취하여 단 위에서 번제물을 더하여 불사르라 이는 여호와 앞에 향기로운 냄새니 곧 여호와께 드리는 화제니라”(출 29:25)
자연물의 속하면서도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서 채택이 되면, 하나님께서 그 더러운 자연물이라는 한계를 철폐하시고 기꺼이 받아주시는 겁니다.
레위기 4:31에 보면, 향기로운 제물로 인해 ‘죄사함’까지 가능합니다. 그러나 마가복음 12:33에 보면, “또 마음을 다하고 지혜를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 또 이웃을 제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 전체로 드리는 모든 번제물과 기타 제물보다 나으니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향기로운 제물이 되느냐 여부는 신약에 보면 물질보다 마음에 달렸다고 보고 있습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 죽어도 좋아’라는 마음가짐이 하나님께서 유일하게 좋아하시는 하나님의 제물 기능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최종성을 두지 않고 다른 곳에 최종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것은 그만큼 자기를 포기할만한 가치를 발견했을 경우를 말합니다.
눈에 들어오는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사도가 전하는 복음의 가치에 미치지 못하기에 기쁨으로 사도 바울을 돕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 현상을 세상 권세마저 돌파한 결과로서 일어나는 살아계신 예수님의 솜씨라고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활약상이라고 보는 겁니다.
내가 없음
2010년 10월 25일
본문 말씀: 빌립보서 4:18-20
(4: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4:19)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4:20)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사도 바울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해 왔습니다. 그리고 그 마감된 결과를 제시합니다. 그것은 바로 성도의 모든 것, 그 자체가 인간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었던 겁니다. 그 시작은 출애굽기 33:19-23에서 비롯됩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또 가라사대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즉 은혜와 긍휼이란 막연하고 모호한 것이 아니라 이 지상에서 구체적 요건을 갖추게 됩니다. 그것은 택한 백성을 손을 눌려서 고정시키고 모든 활동은 주님 홀로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 예가 광야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광야란 황폐한 곳입니다. 그러나 자연상황만 황폐한 것이 아닙니다.
거기를 통과하는 인간들 자체로 정신적으로 황폐합니다. 계속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을 해댑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이 불편하고 불쾌하다는 것 때문입니다. 바로 이 원인은 그들은 스스로 ‘내가 여기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질상 진노의 자녀’가 오늘 본문처럼 ‘향기로운 제물’이 되려면 여기에 방해가 있어야 합니다.
즉 ‘주의 일’은 ‘인간의 있음’으로 훼방받고 방해받으면서 나오는 겁니다. 그냥 하늘에게 은혜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향기로운 제물이 되는 겁니다. 왜 그래야하느냐 하면 ‘인간의 있음’ 자체가 실은 악마의 조작된 현실관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우주에게 진정 ‘있음’은 인간이 아니라 예수님에게만 해당되는 개념입니다.
그 증거가 마가복음 15:33-34 에 나옵니다. “제육시가 되매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하더니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벌건 대낮에 갑자기 깜깜해지는 것은 오직 예수님에게 변고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이 예수님의 자리를 대체해 들어가서 자연현상을 변동 시킬 다른 위인은 없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은 이 세상에서 있으나마나 하는 존재라는 겁니다. 전혀 대자연의 갑작스런 변동에 영향을 줄 수 없는 존재인 겁니다. 곧 ‘없는 존재’입니다. ‘있음’은 주님이 차지하고 계십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대든 것은 자신의 그런 입장을 생각하지 못해서 그러합니다. 광야는 황량한 곳입니다. 즉 무엇이라도 ‘없는’ 곳입니다. 그 없음에 인간도 한몫해야 합니다. 있음은 오직 ‘만나’ 뿐입니다. 만나는 ‘생명의 말씀’입니다.(신 8:3/요 6:48-49) 만나만이 촘촘히 매일같이 내려 약속의 땅과 연결되어 소개합니다.
땅에서 그 어떤 원망의 소리를 하더라도 상관없이 말입니다. 홍해를 건너온 그 많은 사람들은 광야에서 광야의 사람답게 다 죽었지만(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만나는 여전히 약속의 땅까지 이어집니다.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열매를 먹었더라”(수 5:12)
이것은 모세로 하여금 손으로 고정시켜 놓고 일방적으로 주님께서 일하신 은혜와 긍휼을 심는 방식입니다. 이번에 여리고성 함락에서도 이 원리가 그대로 적용됩니다. 여리고성의 인간들이 얼마가 되었든 상관없이 그들은 모두 이스라엘이 불게 되는 심판의 나팔소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단순히 그것이 벽돌 정도 무너진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 자체를 없애버린 전쟁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 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수 6:26)
그 와중에서 기생 라합 가정을 살리시는 것은 여분의 것이요 우수리입니다. 이는 바로 당연히 없어야 됨에도 불구하고 기적적으로 죽음 가운데 부활처럼 구원받는 자들이 생겨나는데 바로 이들이 ‘향기로운 제물’같은 존재들입니다. 그래서 ‘향기로운 제물’은 인간들의 ‘있음’의 방해 속에서 나타나는 겁니다.
만약에 인간들이 스스로 ‘있다’고 여긴다면 이는 결코 자신을 ‘근원적인 진노의 자녀됨’을 출발점으로 삼게 됩니다. 즉 자신이 여기 살아있고 행함에 대해서 의미를 뽑아내려고 시도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그 사람은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말씀, 즉 “너희 쓸 것을 풍성하게 채우시리라”는 실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로서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하늘에게 내려준 율법의 개념에 합치할 수 있는 행위를 내놓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향기로운 제물’이란 주님의 일로서만 성사될 수 있습니다. 그 예가 요한복음 6:9-13에 나옵니다. “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여기에는 ‘도시락’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의 도시락을 말씀하시는 것은, 정작 실효성 있을 듯한 도시락은 전혀 없음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즉 쓸모있는 인간은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리스도만 그 현장에 존재하지 다른 이들은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존재’의 가치에 해당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남게 되는 12광주리’가 생겨납니다. 그것이 바로 새 이스라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인하여 생겨난 천국 백성입니다.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의 적이 패망하기를 기도했다면 신약에서 우리 주님이 우리 자신을 이긴 것에 대해서 찬미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인간의 능력으로 깨달아 알 수 없는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여기 없고 주님만 이 현장에 계심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36강-빌 4장 18-20절(내가 없음)201025-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빌립보서 4장 18-20절입니다. 신약성경 321페이지입니다.
빌립보서 4:18-20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찌어다 아멘.”
사도바울이 그동안 줄곧 빌립보서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한 그 경로를 따라서 오늘 본문까지 왔어요. “내게 한 것이 하나님 앞에 너희들이 바치는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 이것까지 왔습니다.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대상이 누구냐 하면,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에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데 오늘 본문에 보게 되면 이 사람들이 거침없이 사도바울에게 “필요한 것들을 쓰세요”라고 여러 가지 풍부한 것들을 제공했습니다.
제공했고, 사도바울이 여기에 대해서 오늘 본문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게 바로주의 일이야. 너의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다.” 향기로운 제물에 관한 구약의 평가는 주께서 하게 하셔서 주의 지시에 따라서 이루어진 주님의 일이 되는 겁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분명히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복음에 들어오니까 복음이 너희를 이렇게 만들었구나, 하나님이 향기로운 제물로 만들었다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사람의 일만 하던 인간들이 이제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제시한 그 개념, 향기로움 또는 제물, 이런 하나님 쪽에서 구약의 이스라엘에 제시했던 그 개념에 합치되는 딱 맞는 어떤 현상이 일어났다는 거예요.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이에요? 본질상 진노의 자식인데요.
하나님의 평가에 의하면 진노의 대상인데 하나님께서 제시한 그 율법의 개념에 부합되는 인간이라고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었던 자들이 어떻게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그 의미에 부합되는 그러한 현상이 일어났다는 그 말이지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또 그 전에 복음을 줄곧 전하면서 결국 마지막은 이처럼 인간이 하나님의 향기로운 제물이 되고, 그 사람이 하는 모든 것이 주의 일이 되는 여기까지 마감되는 이런 현상이 일어나야 된다는 것, 이것을 빌립보서 오늘 본문에서 이야기하고 있지요.
이것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지, 제가 광주강의 초반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낮 열두시였는데요. 십자가에 달리고 운명할 때쯤 되니까 그 벌건 대낮이 갑자기 어둡게 되었어요. 광주강의 초반에 강의 그렇게 시작했어요. 갑자기 어둡게 되었을 때에 이게 무슨 변고냐, 라고 제가 운을 던졌습니다.
벌건 대낮이 갑자기 어둡게 되려면 도대체 어떤 일이 있을 때나 이러한 현상이 일어나느냐, 라고 제가 질문을 던지면서 괄호 속에 어떤 일이 있어야 되는가, 그것은 그 다음구절을 보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는 변고가 있을 때 이 대자연은 호응을 해서 벌건 대낮도 캄캄한 어두움이 되었다. 그런데 이것은 뭘 뜻하느냐 하면 우리 자신은 이 땅에 있으나 마나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이 대자연이 호응하는 것은 지금 우리보고 호응하는 것이 아니거든요. 따로 계시다는 말이지요. 따로. 주님 때문에 태양이 태양빛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뭐꼬, 이렇게 되는 거예요. 도대체 우리는 뭐예요? 왜 있는 거예요? 아무 쓸모 짝도 없는 거예요. 그래서 복음을,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고 제가 여러 번 합니다,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는데 하나님의 향기로운 제물로 전환 되었다, 라는 이 과정 속에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가능하거든요.
그러면 복음은 뭐냐 하면, 이 땅에 인간은 없다는 거예요. 인간은 없다. 제일 이게 어려운 난제에요. 내가 여기 없는 것을 주께서 증명해주신 거예요. 내가 여기 없다는 것을. 왜? 있어봤자 벌건 대낮이 어두운 밤이 안 되기 때문에 그래요. 세상의 모든 근심걱정, 세상 모든 문제가 어디서 비롯되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음에 내가 속고 있기 때문에 생긴 겁니다.
내가 여기 없는데, 여기 없어요, 없는데 자꾸 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 있는 내가 하나님 어떻게 섬기고, 잘 믿고, 어떻게 봉사하면 됩니까,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근본적으로 내가 없다는 생각을 우리는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요.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나로부터 해서 이 세상 전부가 악마에 의해서 조작된 거거든요. 악마에 의해서 조작된 세계를 복음은 그걸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주자는 겁니다.
그러면 원래 이 땅에서 악마의 조작에 의해서 내가 있게 되었다면 원래 주인이 있다는 말을 나에게 쓸 것이 아니고,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원래 주인에게만 ‘있다’가 돼요. 주인에게만 ‘있다’가 된다는 것이 그 주인이 뭐냐 하면, 그리스도거든요.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만 ‘있다’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만 ‘있다’가 되면 우리는 있음에서 빠져나가야 돼요. 우리는 없음이 되는 겁니다.
이걸 있으나마나, 있으나마나 그것이나 없음이나 같은 뜻이에요. 없는 거예요. 내가 없으면 의미도 없는 거예요. 내가 아프거나, 죽거나, 다치거나, 가난하거나, 부하거나, 그런 것도 없는 겁니다. 내가 있다고 생각하니까 성경을 아무리 봐도 이게 향기로운 제물로 일치가 되지를 않습니다. 그냥 본질상 진노의 자녀 그대로 가고 있는 거예요.
아무리 용을 써도 소용없는 거예요. 제가 광주강의를 자꾸 언급을 하는 이유는, 그게 너무 난해해서 그런 거예요. 그 다음에 나오는 이야기가 자리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리가 뭐냐 하면, 마리아 마르다가 오빠 나사로와 함께 세 식구가 본인의 자리에요. 우리가 있는데 우리의 가정이라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지금 오빠가 시름시름 아프니까 오빠의 그 위치가 위태로운 겁니다.
오빠가 빠져버리면 세 식구라야 자리가 되는데 빠져버리면 두 식구밖에 남지 않기 때문에 이것은 온전한 자리가 되지를 못해서 후다닥 예수님에게 전갈을 보내서 예수님 보고 오라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고 난 뒤에 왔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마르다가 화가 나서 예수님 붙들고 “제가 부르실 때 바로 진작 오라고 했잖아요. 왜 이제 왔습니까? 진작 왔으면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고 닦달 낼 때에 주님께서 하시는 뜻은 뭐냐 하면, “너는 네 자리 보전이 중요 하냐? 내가 여기 있다는 위치가 중요하다.”는 거예요.
자, 자리는 뭐냐 자리라는 것은 여기 내가 있음에 펑퍼짐한 평면을 가지고 자리라고 해요. 위치라 하는 것은 뾰족한 바늘 같은 겁니다. 자리가 없어요. 순간적으로 어떤 점을 찍으면서 위치하고 있는 거예요. 너는 네 자리가 중요하냐, 예수님 여기 계시는 위치가 중요하냐, 를 묻는 겁니다. 요한복음 11장에서.
주님이 말합니다. 요한복음 11장 25, 2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그 말을 하는 내가 중요해 네 오빠가 중요해?”라고 묻는 거예요.
마르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잘 봉양했지만 그것은 유사종교 같은 거예요. 예수님 이용해서 내가 이 땅에 있으니까 있으면 여기 펑퍼짐은 자리가 있을 것이고 이 자리보전을 위해서 주님이 필요하다고 예수를 믿고자 봉사한 거예요. 내 자리가 주님을 쳐다봐야 될, 주님을 주목해야 될 주님의 위치를 가리고 있는 겁니다. 내 자리가.
나는 나를 쳐다보면 안돼요. 나는 자리를 주장하지만 주께서 인정하는 위치라 하는 것은 천국의 위치는 예수님을 주목해야 천국의 위치지 나를 쳐다보는 것은 천국이 아니거든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를 쳐다봐서 뭐할 건데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를.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 모든 문제는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거예요. 우리는 위치가 없어요. 위치가 없는데 이게 악마가 조작을 한 겁니다. 우리를 뒤에서 앞장세운 거예요. 자꾸만 우리를 뒤에서 밀어낸 거예요. ‘네가 있으니까 있는 너 어떻게 잘 관리해야지.’
오늘 본문에서 참 멋진 말씀이 19절에 나옵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라고 되어 있거든요. 야, 이것은 모든 인간을 빌립보교인을 비롯해서 모든 인간을 사도바울이 지금 놀리고 있는 중입니다. 이렇게 놀리는 거예요. “너희가 하나님께 봉사하고 십일조하고 섬겨봐라. 하나님께서 채우는지 안 채우는지 한번 봐라. 채워주실까?”라고 묻는 겁니다.
내가 교회에 헌금 백만 원 했는데 두 달 내에 2백만 원, 3백만 원, 또 3십 배 곱하기 하면 3천만 원이지요. 6십 배는 6천만 원, 100배는 아이고 1억이 되네. “하나님께 드리면 채워줄 것인가 네가 한번 해 봐라.” 지금 사도바울이 놀리고 있는 겁니다. 여러분, 채워질까요? 턱도 없는 소리입니다. 그런데 채우시리라, 라고 했다고요.
만약 이게 채워지는 것을 기대한다면 그 사람은 없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 자리보전하고 싶어 하는 거예요. 예수님 합해서 우리 자리가 천국가고 싶은 거예요. 내 자리를 포기를 못한 거예요. 내 자리라는 것은 내가 있고 그 다음에 자리까지 확장시킨 겁니다. 주님을 쳐다보지 않고 궁극적으로 나와 내 자리를 쳐다볼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사도바울은 지금 놀리고 있는 거예요. “네가 여러 가지 나에게 보조한 만큼 그 빈자리가 있을 것 아니야? 그 빈자리 주께서 채우시는지 네가 한번 확인해 보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허겁지겁 확인해보려고 시도할 때 너는 이미 말려 들었어, 이 복음에 말려든 거예요.
자기는 주님만 계시고 나는 없다고 여겼던 것이 채우시리라, 하는 이 말 한마디에 ‘그러면 한번 채워볼까? 그러면 점도 재미로 본다는데 재미로 채우는가 한번 볼까?’ 라고 나오는 순간 다시 한 번 없어진 내가, 다시 한 번 내가 생기면서 내 자리도 같이 덩달아 만들어지는 겁니다.
지금 여러분, 무슨 이야기하는지 이해하시겠어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에게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니까 사도바울의 복음을 따라왔어요. 사도바울이 휙 돌아보면서 “야~, 이만큼 따라왔어? 그러면 이 너머는 못 보지? 이 너머까지 보이게 해줄까? 네가 넘어설 수 있겠어? 네가 감당하겠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흔히 교회에서 서로 형제자매라고 이야기하잖아요. 그런 형제자매 때려치우고 네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해 본적이 있느냐 말이지요. 당신이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제자매’는 너무 들었어. 짜증나. 그거 다 때려치우고 네가 그리스도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생각해본 적이 있습니까? 뭐 엄두 안 나지요. 내가 그리스도다. 말 같은 소리를 해야지
그리스도가 너무 과격하고, 너무 도발적이고, 너무 경솔하고, 권위를 모독하는 것처럼 느껴집니까? 그러면 거기다가 뒤에 살짝 하나 붙여보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하하, 그것은 용납되지요. 당신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다, 라고 생각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의 몸도 거짓말입니다. 수작부리지 마세요. 안 믿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라고 될 때 그리스도의 몸도 같이 거기서 파생개념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그리스도의 몸 되어서 그리스도까지 나갈 생각은 하지 마세요. 성경을 보실 때에 진노의 자녀에게 사도바울이 복음을 전했으면 어떤 변화가 있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악마에 의해서 조작된 것이고 이게 허망한 허상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돼요.
주님께서는 내가 아쉬운 것이 아니고 주님은 인간을 아쉬워한 적이 없어요. 전혀 인간이 필요치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 그냥 그리스도에요. 그리스도 몸에서 그리스도로 나아갈 생각하지 말고 그리스도에서 그리스도 몸으로 파생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어떤 집사님이 걸어오거든 그것은 그리스도 몸이 걸어온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그리스도 형제, 자매가 걸어온다 생각하지 마시고, 그냥 그리스도자체가 걸어온다고 생각하자 그 말입니다. 그 자체가.
너무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그리스도 권위를 무시하는 일이 되지 않습니까, 하지만 여러분, 그 정도 광기도 없어서 무슨 신자가 되겠어요? 이것은 광기거든요. 제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떤 엉터리 박사가 무엇을 발명하려고 애쓰다가 드디어 발명했다고 착각을 한 거예요. 약을 먹으면 투명인간이 되는 약을 발명했다고 자부한 거예요.
투명인간이 되었으니까 이걸 가족들에게 시험을 해봐야 될 것이 아닙니까? 자기는 분명히 투명인간이 되었어요. 이 약을 먹으면. 옛날에 그런 비슷한 영화도 있었는데. 먹고 나는 저 사람을 보지만 주위사람들은 절대로 내가 안 보인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래가지고 식구들에게 실험을 해보는 겁니다. 눈앞에서 팔을 막 내두르고 흔들어 보는 거예요.
식구들은 바빠서 자기 아버지가 미친 박사라는 것을 알고 장난친다고 여겨서 “어? 여기 아무도 없네.” 한 거예요. 그게 장난을 치는 것인 줄도 모르고 박사 자기는 “때려 봐, 때려 봐” 이런 식으로 해도 가족들은 거기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여기고서 가만있으려고 했는데 자꾸 “때려봐 때려 봐” 하니까 진짜 때리니까 얼얼한 거예요.
이게 예수 믿고 성도되려고 온갖 노력을 다한 겁니다. 성경 말씀대로 믿습니다, 믿씁니다, 쌍시옷 까지 넣어가면서 온갖 노력을 다 했는데 이게 엉터리박사에요. 엉터리신자에요. 그 원인이 어디 있느냐 하면,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내가 부인할 수가 없는 거예요. 미치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의 몸이 되고 그리스도가 되어야 되는데 이게 안 돼. 이게 되지를 않아요. 그러니까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내가 그리스도 몸이다, 그리스도다, 억지를 부리니까 실제로는 그게 전혀 먹힐 리가 있습니까? 이게 돈키호테지요. 돈키호테, 광인이에요. 미친 거예요.
중국의 어떤 무예의 고수가 우주의 온갖 물리적인 기를 다 받아서 나는 우주의 기를 받고 싸움 1등이다,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실제로 우리나라 태권도 고수한테 돌려차기 한 방 맞고 뻗어버렸어요. 나 태주한테 맞았는지 하여튼 맞고 뻗었어요. 이게 뭐예요? 이게 5십년 6십년 교회 다녔는데 이게 뭐예요?
내가 있음에 내가 속아 넘어간 거예요. 내가 나에게 미혹된 거예요. 천사의 돌려차기 한방에 쭉 뻗어버린 겁니다. “너 아니야. 너 향기로운 제물 아니야. 너 본질상 진노 그대로야. 너 아무것도 아니야. 너 성도 아니야.” 세상에, 교회 와서 신자도 아니면서 신자인척 하는 것은 어떤 지경이냐 하면요.
독도가 누구 땅이냐? 독도가 일본에서는 자기네 땅이거든요. 독도는 자기 땅이라고 하고 싶어요. 일본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한국이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하고 일본은 자기 땅이라고 하고, 일본 사람들이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느 정도냐 하면, 독도라는 바위섬이 바위인데 바위가 스스로 말을 해서 “독도는 일본 땅!” 이라고 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그 정도에요. 이게 말이 안 되지요.
바위가 무슨 말을 해요? 주님이 무슨 말을 합니까? 네가 성도라고 무슨 말을 합니까? 우리가 있어버리면 주님은 없는 존재거든요. 없는 존재가 무슨 입을 벌려서 너는 성도다, 너는 천국 간다, 무슨 말을 합니까? 말을 해도 있는 내가 나에게 설득을 시켜야지요. 최면 걸어야지요. 이건 유사종교입니다. 신앙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동안 기도하고, 그동안 헌금하고, 설교하고, 강의하고, 이거 아무 말 잔치에요, 아무 말 잔치.
신자도 아니면서 신자인척 하려고 하니까 어떤 말이라도 해야 되는 거예요. 어떤 잘사는 최고급 계층, 우리나라 엘리트만 모이는 잔치판에서 허접해서 재산도 없으면서 공짜로 옷만 입고 참석한 사람에게 뒤에서 어떤 사람이 “야, 쟤도 우리나라에서 잘나가는 유수한 기업가들과 아는 사이였어?” 자기는 그걸 속이고서 왔는데. 그러니까 “그냥 보고만 있어.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그런데 속이고 참석한 그 사람은 ‘저 사람들하고 나하고 친하다는 티를 내야 돼. 아무 말이나 해, 아무 말이나 해. 그러면 무슨 말을 할까?’ 해서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남산위의 소나무가 철갑을 두른 듯……” 하하, 웃고나 있고. <스타트 업>이라는 드라마 제 2회에 그런 내용이 나와요. 그냥 아무 말 잔치에요. 기도하고, 헌금하고, 설교하고, 전도해도 주님한테 먹히지도 않는 아무 말 잔치에요. 차라리 애국가 부르는 것이 나아요.
이 속임수를 여러분이 언제까지 할 참입니까? 이거 들통 안 날까 싶어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이 없는 존재로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의 몸이 있지 아니한 것은 하나님께서 없는 존재로 확정짓기 때문에 그래요. 이것은 우리 개념이 아니고 우리를 보시는 주님의 개념입니다. 그리스도 몸이 아닌 자는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으로 쳐주시는 거예요. 실제로 있어봐야 없어지고요.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 출애굽기 33장에 나옵니다. 출애굽기 33장 22절에 보면 모세가 장막에 있을 때 일이거든요.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반석위에 모세를 두고 하나님께서 손으로 모세를 덮었어요.
그러면 모세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움직이기는 누가 움직이느냐 하면, 주님이 움직이신 거예요 그 상태를 19절에 보면 “나는 은혜 줄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그렇게 되어 있다고요.
하나님께서는 긍휼과 은혜를 구체적인 어떤 요소로 굳혀 놓아서 이 땅에 제공되는 겁니다. 막연하고 모호하게 은혜와 긍휼이 아니라 긍휼과 은혜를 어떤 덩어리 어떤 체제를 만들어서 지상에 딱 시범조로 모세에게 보여준 거예요. 무엇이 은혜고 무엇이 긍휼이냐? 주님의 손으로 모세를 고정시키고 모든 활동을 주님이 활동하는 그런 상태를 은혜라고 하고 그런 상태를 긍휼이라고 확정지었습니다. 그 개념을 확정지었어요.
그거 아니면 은혜도 아니고 그거 아니면 긍휼도 아니에요. 마치 모세를 없는 것처럼 여겨서 있어서 활동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이 있어서 활동하는 거예요. 그게 내 이름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런 일이 벌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모세가 이스라엘에 있음으로서 그런 일이 있었다면 이스라엘 전체는 뭐냐? “가만 있거라. 내가 다 할 게.” 이게 긍휼이고 이게 은혜입니다.
내가 원한 것을 주는 것이 은혜고 긍휼이 아니에요. 내가 하나님께 달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내 소원 들어주는 것이 은혜고 긍휼이 아니고 은혜와 긍휼은 네가 뭘 기도하든 뭘 하든 “그냥 입 다물고 가만있어, 일을 해도 내가 해.” 그러한 조합, 그것이 은혜와 긍휼입니다. “왜 내가 그렇게 가만히 있어야 됩니까?” 나는 없는 존재가 되는 그것이 은혜고 긍휼이기 때문에 그래요.
분명히 나는 있는데. 거울 앞에 내가 있잖아요. 있는데 주님께서는 이걸 없다고 간주해주시는 그것이 은혜고 긍휼이에요. 자꾸 있어버리면 걱정이 돼요. 내가 내 걱정이 된다니까요. 내가 있어버리면 염려가 돼요. 내가 있어버리면 내가 나중에 지옥가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된다고요. 이게 원인이 뭐냐? 악마가 조작해서 내가 없는데 악마는 자꾸 내가 있다고 나한테 설득시키고 있는 겁니다.
은혜 받을 때 5분 동안 은혜 받고 6분 째는 내가 생겨버리고, 맨 날 이식이에요. ‘나 어떡해, 어떡해?’ 맨 날 어떻게 해, 나 지옥가면 어떻게 해, 지옥이 문제가 아니고 네가 있다는 것이 문제인데 자꾸 내가 여기 없다는 생각을 못하고 자꾸 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출애굽기에 이스라엘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광야를 지나게 되면 광야라는 것이 무슨 상태, 상황이냐 하면, 사람을 살리는 것이 아니고 만나의 취지를 살리는 곳이 광야에요.
만나내림의 연속성이 약속의 땅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광야입니다. 여호수아 5장 12절에 보면 “그 땅 소산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라고 되어 있어요. 약속의 땅에 도착했을 때 그들은 그동안 40년 동안 내렸던 만나는 그쳤어요. 40년 동안 사람은 끊어졌어요.
처음 홍해를 건너왔던 이스라엘 백성 다 죽었습니다. 40년 동안 건너왔던 사람들이 두 사람 빼놓고는 다 죽었어요.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다 죽었거든요. 사람은 죽었어도 만나는 안 죽었어요. 만나의 취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필요한 임시적 인간들이 누구냐? 애굽에서 불러낸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이 말은, 광야 자체가 환경적으로 황폐해야 되고 그 황폐한 광야에 부합되도록, 합치되도록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원망을 해야 되는 거예요. 정신적으로 황폐한 인간이어야 하는 겁니다. 광야라는 것을 통과하게 되면 어떤 인간이 하나님께 불평 안 할 인간이 누가 있습니까?
인간은 자기가 인생이 사는 것이 불편하면 뭐든지 원망하게 되어 있어요.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안 받아준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광야입니다. 그렇게 불만하고, 그렇게 불평하고, 그렇게 뱀한테 물려죽어도, 열 번이나 하나님을 배역해도 만나는 한결 같이 만나에요. 계속해서 매일같이.
만나를 가지고 신명기 8장에 보면 생명이라고, 만나가 생명의 말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생명을 생명 되게 하기 위해서는 그냥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방해꾼들이 있어줄 때 그 방해꾼을 능가해서 등장하는 것이 생명이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 하나님께서 향기로운 제물이라고 하는 것은 네가 방해했다는 거예요.
하나님의 복음을 방해했기에 생겨난 열매가 뭐냐, 결실이 뭐냐? 네가 향기로운 하나님의 열매가 되는 거예요. 우리 역할이 그 역할이에요. 악마에 의해서 조작되고 왜곡된 몸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걸 사용하시는 것은 온갖 훼방과 방해와 무시와 멸시를 당했던 바로 그 주님에 의해서 그리스도 몸으로, 그리스도 지체, 몸……, 좋지요.
그런데 이제 지체 몸 빼고 이야기 합시다. 네가 나의 그리스도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예수님이 겪었던 십자가의 동일한 경로를 네가 나와 함께 있어 통과했다는 겁니다. 이 빌립보 교인들아, 내가 복음을 줄 때 이 복음 들으라고 준 것이 아니고 이 복음이 실제로 너에게 작동을 했기 때문에 네가 향기로운 제물이 되었다는 겁니다.
네가 거기서 한 것 뭐가 있느냐? 없지요. 내놓을 것이 없지요. 내가 없으니까. 처음에 있다고 여겼을 때는 사도바울 막 도와줬지요. 그러나 나중에 복음을 보니까 이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나를 사용하신 거예요. 하나의 심부름꾼으로. 마태복음 21장에 보면, 여러분들이 들어보면 아, 유명한 말씀 나올 거예요.
3절에 보면 나귀 이야기입니다. “만일 누가 무슨 말을 하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보내리라.” 그래서 제자들이 와서 생면부지의 나귀주인에게 “나귀 있습니까? 나귀 주시오.” 하니까 주인이 어처구니없어서 “당신들이 뭔데 우리 집의 나귀를 왜 달라고 해? 맡겨놨나? 왜 달라고 하는데?” 하니까 “주께서 쓰시고자 한다.”
주님께서 쓰시고자 한다는 겁니다. 나귀보고 한 이야기일까요, 제자들보고 한 이야기일까요? 제자보고 한 거예요. “제자들은 어차피 있어도 다 내 몸이 될 거야. 내게 복속될 거야. 너는 네 것이라는 것이 없어. 네 힘으로 그게 안 되지? 되게 하실 거야. 왜? 모세를 현장에다 고정시켜 놓았으니까. 너는 보지 마. 안 봐도 돼. 보지 마. 내가, 내가, 내가 너를 타넘고 모든 일들을 다 할 거야.”
이게 긍휼이고 은혜라. 네가 구원받는 것은 하나님의 긍휼이고 은혜로 가야 그게 천국백성이 되는 거예요. 은혜와 긍휼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세팅되어야 돼요. 내가 없는 존재로 세팅 되어야 됩니다. 우리가, 성도들끼리 서로 도와주고 하게 되면 “아이고, 자매님, 아이고 형제님, 이런 귀한 것을 다 주십니까?”
형제님, 자매님, 물론 그런 용어가 성경에 나옵니다만 그거 형제, 자매, 다 떼버리면 뭐냐? 어떻게 네가 나에게 이런 귀한 것을 주십니까, 계속 너와 내가 살아 있어버려요. 이게 너와 나가 안 죽고 계속 살아 있어 버린다고요. 그러면 그것은 본질상 진노의 자녀지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라 하는 것은 진노 받을 악마가 우리로 하여금 너, 나를 이 땅에 분명히 영원히 있음으로 꽂아놓았거든요. 내가 있으면 내 자리가 있을 것이고 그러면 예수님이든 하나님이든 다 나 좋으라고 믿게 된다, 그 말이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도 아니고 하나님의 긍휼도 아니에요.
그것은 광야에 한번 들어가 봐야 돼요. 광야에 들어가 보면 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있음은 원망과 불평으로 작용한다. 이게 광야상황에서 확연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면 죽어 마땅한데 이상하게 만나는 안 죽네. 우리가 죽어 마땅한데 만나는 이 땅에 무슨 일이 벌어져도 상관없이 만나가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그만큼 원망했으면 “이제는 집에 가” 할 텐데 만나는 계속 어떤 방향을 향하여 일관되게 가고 있어요. 그 방향은 어느 방향이냐? 안식의 땅으로 갑니다. 그래서 만나는 안식일에는 오지를 않아요. 그게 방향을 말해주는 겁니다. “만나의 목적은 안식에 있다. 지금 너희가 가는 그 땅이 안식의 땅이다. 그것은 주의 이름이 있는 땅이다.”
주의 이름은 모세에게 “가만있어. 내가 은혜 줄자에게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만 긍휼 주겠다.” 하는 하나님의 일방적인 자기의지를 이 세상을 향하여 확연하게 확정시킨 그 세계 그것이 바로 천국입니다. 은혜 받지 않은 사람은 못 들어오고 긍휼을 받지 않은 사람은 못 들어와요. 내가 있는 사람은 못 들어와요. 나는 그리스도만 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어야 하는 겁니다.
이 몸뚱아리는, 이 육신은 그리스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그리스도가 위치해 있음을 보여주는 거예요. 내 자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렇게 되면 이 세상에서는 자꾸 있다고 우기는데 어떻게 합니까? 그 있음은 이 세상에서 나 있고 너 있고, 숫자로 1, 2, 3, 4……, 현재 세계 인구는 75억이거든요. 75억 개가 있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렇게 보지를 않습니다.
이사야 37장 36절에 보면 “여호와의 사자가 나가서 앗수르 진중에서 십 팔만 오천인을 쳤으므로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본즉 시체 뿐이라.” 다 죽었어요. 공동운명체로 만들었어요. 1로 만들었어요. 너, 나, 하면 2고 나는 나고 너는 남이고, 이렇게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전부 다 하나로, 통으로 묶어버려요. 하나님의 천사가 죽여 버리는데 한 날 한 시에 다 죽어버렸어요. 애굽의 백성들도 마찬가지고, 애굽의 유월절도 마찬가지고. “네 눈으로 보기에 네가 있으니까 너하고 나하고 달라 보이지? 똑같아 내 눈에는 똑같아.” 같은 멸망의 운명공동체에요. 이 사실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말해줍니다.
여리고성을 맞닥뜨리면서 벌어지지요. 여리고성 정복할 때 여호수아 6장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리고성을 돌아요. 보통은 하루 한 바뀌 돌고 안식일에 일곱 바퀴를 도는데 16절에 “일곱번째에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때에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외치라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 성을 주셨느니라.”
그 성에 숫자가 몇 명이든 하나님 보시기에는 몇 명이 있다가 아니라 성 하나로 봐요. 대나무묶음처럼, 노끈으로 묶듯이. 오늘 아침에 우리교회 쓰레기 비웠는데 50리터 쓰레기봉투에 비웠거든요. 거기에 온갖 것 다 들어 있어요. 그러나 쓰레기봉투 안에 전부 다 한 묶음이에요. 쓰레기차가 거기서 뭐 뽑아내고 그러지 않아요. 통째로 가져가잖아요. 인간으로 있음, 인간 있음 자체가 통으로 다 묶여서 하나의 운명이 됩니다. 하나의 운명으로 처리됩니다.
나팔을 부는데 여리고성의 어떤 인간도 나팔의 범주를 못 벗어납니다. 빰빠라밤~, 나팔 불어버리면 그 나팔소리로 인하여 나팔 부는 쪽과 나팔소리 들어야 될 쪽과 완전히 구분되어 버리지요. 이 나팔은 바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천사가 불었던 그 나팔소리에요. 시내산 위와 시내산 밑이 구분되듯이 나팔 부는 쪽 이스라엘 쪽과 나팔소리를 들어야 될 여리고성 내의 사람들과 완전히 구분되어서 서로 다른 운명과 팔자로 완전히 잘라져버립니다.
그러면 이쪽 이스라엘은 너, 나가 아니라 여기는 하나님이 계시는 곳이지요. 하나님의 몸으로 살아 있는 것들이에요. 이스라엘은. 그리고 놀라운 사실은 그 여리고 성에서 무너져야 되는데 여기 예외가 나옵니다. 이 이야기는 굉장히 긴 이야기인데 길게는 못 합니다. 짧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할 때 우수리, 여분, 나머지를 만들어요. 이스라엘이 전쟁할 때 어떻게 하느냐? 붙이심의 전쟁을 하고 붙이실 때 진멸하게 되어 있어요. 진멸할 때 갓 태어난 아이까지 다 죽여 버립니다. 인권 같은 것 없어요. 하나님전쟁을 할 때는 인권 같은 것 통하지 않고 다 죽여 버립니다.
왜? 없는 것을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주의 일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 자체가 은혜고 긍휼이기 때문에. 이쪽 이스라엘 입장에서 은혜와 긍휼이 뭐냐? “거 봐. 방금 있었지?” “있었습니다.” “어떻게 됐지?” “없습니다.” “없는 게 원래 네 자리였어. 본질상 진노의 자녀, 그들은 없는 거야.” 따라서 나는 없다고 본다, 그 말입니다. 있다는 것은 뭐냐? 그리스도의 몸, 하나님의 이름의 몸만 있어요. 다른 것은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사실을 이스라엘이 전쟁에 승리하면서 잊어버립니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성에 누굴 준비하느냐? 기생 라합을 준비해서 우수리, 여분의 것이 튀어나오게 만들었지요. 그 우수리, 여분의 것이 이스라엘의 본질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되새기게 하는 겁니다.
그리고 여호수아 6장 26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그 때에 맹세로 무리를 경계하여 가로되 이 여리고성을 누구든지 일어나서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장자를 잃을 것이요 문을 세울 때에 계자를 잃으리라 하였더라.”
성을 쌓게 되면 성이 무너지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네 혈육이 혈족의 몸이 죽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일은 성을 이야기하든 무슨 이야기를 하든 항상 우리 몸 자체가 이게 없는 몸, 끊어져야 될 저주받은 몸, 본질상 진노의 몸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면서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 모집에 나서시는 거예요.
“다시는 성을 세우지 마라. 네 자식이 죽는다.” 자식은 인물이지요. 성은 벽돌이지요. 벽돌을 이야기하면서 인물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해가 빛을 잃는다. 해는 태양 이야기지요. 아니에요.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 모든 자연변화가 누구와 연계되어 있느냐? 너야?” “아닙니다.” “그러면 너?” “아닙니다.” “누구?” “예수님의 십자가.” “그렇지.”
예수님 중심으로 모든 것이 연계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너는 빠져. 나는 여기 있다고 하지 마. 그런 소리 하지 마.” 주님이 여기 계십니다, 고 이야기해야 돼요. “주님이 육체 안에 계십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라는 말이지요. 내가 여기 있다, 하지 말고요.
나중에 여러분들이 점심때 식사할 때 내가 밥을 먹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여기서 밥을 먹습니다, 라고 이야기를 해야 되는데 이게 너무 비실용적이고 너무 길어요. 그러면 그 때는 그냥 내가 밥 먹는다, 하면 돼요. 그냥 내가 밥 먹는다고 이야기해도 그 마음의 내용은 주께서 여기서 밥을 드신다.
어떤 사람이 물을 가져다주시면 주님께서 한발자국 두 발자국 나한테 다가와서 물을 건넨다. 주님이 물을 건네고 주님이 물을 건네받는다, 라고 생각하세요. 이것은 광기를 넘어선 광기에요. 돈키호테를 넘어선 돈키호테입니다. 이건 미친 거예요. 주님의 사랑에 미친 겁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을 때 해가 빛을 잃었다는 자체도 미친 거예요. 왜 지구보다 멀리 떨어진 태양이, 빛이 오는데 8분 걸린다는 멀리 떨어진 태양이 왜 빛을 잃어요? 말 되는 소리를 해야지요. 그래서 우리는 내가 여기 있음에 여기 있는 내가 말 되는 소리만 우리는 교회 와서 주워 먹었어요. 주워들었다고요. 그래서 더욱더 진노의 자녀 만들어요. 교회 와서 더욱더 진노의 자녀된 거예요. 내가 나 설득하는데 분주했어요. 나를 없앨 생각을 안 한 거예요.
시편 20편 5절에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여기서 너라는 것은 주님입니다.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이것은 뭐냐 하면, 지금 시편에 나오는 수백 군데 구절이 주께서 적들이 승리하지 않고 우리 쪽이 승리하게 해 달라는 이런 내용, 시편의 수백 군데라는 말이 모자라요. 시편전체가 적은 우리한테 패배하고 우리 이스라엘 하나님의 이름이 함께 하는 우리가 승리케 하옵소서, 하는 기도가 시편 내내 나옵니다.
거기에 대한 찬미의 내용이 시편의 내용이에요. 이게 구약입니다. 그런데 신약하고의 차이점이 뭐냐? 신약은 “주님이 나를 이긴 것을 찬미케 하옵소서. 내가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깨닫게 해주신 주님의 승리 나는 주님 앞에 져버리고 주님이 내 안에서 승리하신 것을 우리가 찬미케 하옵소서.” 이게 신약이에요.
하나님께서 그냥 우리에게 복주는 것이 아니고 십자가를 통해서 복주는 이유가, 십자가가 얼마나 물어 뜯겼습니까? 십자가가 만약에 어떤 먹잇감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독수리처럼 달라붙어서 예수님에게 조롱이란 조롱은 다하고 무시 다 했어요.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한테 이야기하는 것은 딱 한가지였습니다. “우리가 여기 있다는 것을 좀 증명, 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있다는 것을 증명해 달라, 우리가 여기 있는 내가 좀 납득이 되도록 설득이 되도록 되는 이야기를 해 달라, 하나님섬기고 당신을 믿는 도리를 다 해 줄 테니까 제발 내가 여기에 천국갈 수 있다는 것을 설득을 해 달라, 당신소리 답답해서 못 듣겠다.”
하지만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야기한 것은 “네가 없다는 것을 내가 증명할게. 그렇게 말하는 네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게. 독도는 말을 못한다는 것을 내가 증명할게.” 그게 주님의 뜻입니다. “네가 말하는 것은 네가 아니라 네 속의 성령이 말하는 것을 내가 증명해줄게.” 사도행전 마지막에 네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알지를 못합니다.
다시 오늘 본문으로 돌아와 봅시다. 본문으로 돌아와서 사도바울이 자기에게 풍족한 것을 제공했다고 굉장히 고마워하는데 우리도 사도바울 여기 있었으면 많이 도와줄 건데, 그렇게 생각하지요. 그게 빌립보서 2장 30절에 대해서 잊어버려서 그래요.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그냥 몇 푼 도와주고 헌금 해주고 이정도가 아닙니다. 사도바울에게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도와줬다고 되어 있어요. 왜, 왜 도와 줍니까? 본인이 없거든요. 본인이 없고 본인이 그리스도거든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도와주는데 까짓 거 목숨이 뭐 대수입니까? 몇 푼 도와주는 거요, 쓸 것 도와주는 거요, 그것이 뭐 향기로운 제물이 된다고요? 아니에요. 제물이라는 것은 죽음과 엮여야 제물이 돼요.
다시 말해서 빌립보교인들이 모세는 아니지만 복음을 들을 때 복음의 능력으로 은혜가 왔을 때 이건 마치 옛날에 “모세 너는 가만있어. 내가 일 다 할 거야.” 라는 그 주의 이름의 현장성 실제 살아 일하심을 그대로 지금 복음 안에서 그 능력을 만끽하고 있었던 거예요. 내가 뭘 해도 내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본인이 알아요. 본인이 알아서 본인이 너무 즐거운 거예요.‘아, 나는 없는데 이상하게 나한테서 능력이 나오네.’ 이런 식이에요.
데살로니가전서 2장 8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주고받는 것이 돈 몇푼이나 음료수 정도가 아니고 목숨이 왔다 갔다 해요.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카드 빌려주고 그 정도가 아니고 아예 목숨이 왔다 갔다 해요. 목숨이! 이게 뭐냐 하면, 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할 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내가 있다, 가 아니라 내가 없다는 것을 전제로 우리가 남의 집에 갈 때 “아이고, 우리 집에 다 오십니까?” 무슨 우리 집이 있어요? 내 집이 어디 있어요? 내 집은 없어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 집에 들어간 거예요.
“아, 그것은 메타포고 비유고.” 메타포나 비유가 아니고 이게 실제라니까요. 예? 자칫하면 우리가 돈키호테 될 수가 있습니다. 엉터리 박사가 될 수 있어요. 성도도 아니면서 성도인체하고 온갖 노력을 다 한 셈이 돼요. 그래서 제가 아까 그랬잖아요. 사도바울은 지금 사람을 놀리고 있다고요.
“네가 네 존재를 기어이 빠져나가려고 파닥거리는 모습이 우습구나.” 그렇게 되는 거예요. “한번 노력해봐. 안 돼. 성령이 안 오면 안 돼, 인간아! 네가 백날 해봐야, 백날 60년 교회 다녀봐야 네 존재가 여기 있음이 있는 한 이것은 안 돼!”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은. 그것을 지금 놀리고 있는 거예요.
왜? 구원은 사도바울 본인의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본인은 긍휼을 입었고 본인은 은혜를 입은 거예요. 마치 모세처럼. 내가 나 된 것은 내가 아니오, 하나님의 은혜라 했잖아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내가 나 된 것은 은혜입니다. 이 말은 뭐냐 나는 내가 없음을 증명해주니 너무 감사합니다, 하는 뜻이에요. 내가 여기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가 위치해 있는 거예요. 이게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 결과에 대해서 지금 말씀드리는 겁니다. 복음을 알았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복음을 안들 그게 무슨 소용이 있어요? 실제적으로 능력이 임해야지요. 복음의 능력이 임해야지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지만 베드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베드로전서 4장 10,11절에 보면 “각각 은사를 받은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너로 말미암아 영광 받는 것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는다. “네가 한 것이 아니야. 네가 없으니까 네 일도 없어. 오직 있는 것은 주의 일밖에 없어.” 왜? 주께서 쓰시니까요. 주의 일만 있는 겁니다.
끝으로 요한복음 6장 13절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 두 바구니에 찼더라.” 열두 바구니 바로 새로운 이스라엘은 이렇게 구성된다는 겁니다. 은혜와 긍휼로만 구성된다는 겁니다. 그들이 아무것도 없는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뭘 로 보여주느냐 하면, 어린애 도시락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어린애 도시락은 존재로 보이냐? 비존재다. 어린애 도시락을 들고 5천명을 향해서 “여기 도시락이 있어요, 없어요?” 어떤 사람은 주님의 취지를 모르고 거기 도시락이 있네요. 그러면 주님께서 다시 보여줍니다. “여기 어른 도시락이 아니고 애들 도시락입니다. 자, 이 현장에 도시락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습니다. 아무도 없습니다.” “바로 그겁니다.”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어린애 도시락을 제시하는 것처럼 우리 몸이 태어난 것은 내가 여기 없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서, 주님이 있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해서 우리가, 이 몸이 1천구백 몇 년도에 여러분의 주민등록의 날짜대로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거예요. 없는 것으로, 끝까지 없는 것으로, 끝까지 주님이 있는 걸로.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몸이 되는 능력, 그게 백성으로서의 담력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남은 조각이 열두 조각. 극악한 우리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주의 은혜와 긍휼의 능력이 얼마나 큰지, 죄가 있는 곳에 은혜가 넘쳐서 기어이 우리를 주님의 그리스도 몸 되게 해주신, 백성 되게 해주신 하나님 은혜를 영원히 찬미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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