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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욥기 14:18-22 / 절망 속의 해답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욥기

욥기 14:18-22 / 절망 속의 해답

정인순 2020. 10. 4. 16:24

음성 동영상 Youtube

 

절망 속의 해답

이근호

2020년 10월 4일

 

본문 말씀: 욥기 14:18-22

(14:18)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14:19)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 버리나이다 이와 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14:20)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 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14:21)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14:22)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욥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해답도 얻어내지 못해서 절망적입니다. 자기 몸이 아픈 것도 괴로운 일이지만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께서 해답만 주신다면 자신이 희망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마저 하나님께서 답변이 없기에 욥은 절규합니다. 욥의 이러한 절규는 오늘날 모든 인간의 내부를 말해줍니다.

모든 인간들은 삶에 해답이 없습니다. 듣고자 해도 모르고 아예 얻고자 하지 않기에 모릅니다. 심지어 복음을 들어도 돌아서면 “모르겠다”가 됩니다. 그 이유는 사적인 굴레가 자신을 뒤집어 씌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지식을 아무리 습득해도 모두 사적인 영역을 넓히는데 소모할 뿐입니다.

사적인 영역을 그대로 붙들고 있으면서 그 어떤 해답을 하나님께서 제공해도 그들은 ‘모르겠다’로 일관될 뿐입니다. 우리 인간은 사적인 고유 세계를 못버리게 됩니다. 시작점을 항상 자기 이야기에 둡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 마감의 상태를 알 길이 없습니다. 강을 그릴려면 두 개의 둑이 필요합니다.

하나의 시작점이 있다면 맞은 편 도착지점에는 마감되는 상황이 있어야 합니다. 이 마감은 어떤 상태가 되는지를 인간들을 알 길이 없습니다. 시작과 끝, 둘 다를 알아야 사람들은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구약 때에는 그냥 욥의 이러한 몸부림조차 예언이 됩니다. 장래 신약 때의 완성 속에는 이런 내용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신약 때의 내용이 단지 추가적인 해답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절망하고 있는 인간 자체를 문제 삼게 됩니다. 즉 인간은 사적 영역을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지경의 극한을 구약에서 나타내고 있습니다. 전도서 1:6에 보면,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라고 되어 있고, 이것조차 무심하고 무의미한 움직이다는 것을 전도서 1:14에 말씀하십니다.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 즉 사람들이 절망 속에서 해결책을 찾고자 하는 것이 본능이기는 하지만 다 무의미하다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바람이 어디서 나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길이 없듯이 세상 만사가 다 그러하다는 겁니다.

바람이나 강물이나 모든 자연 변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인간들은 자신의 굳건한 사적인 집착이 해답을 훼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적인 것을 깨고 공적으로 나아가는 방법은 없을까요? 신약에서 보면, ‘하나됨’에 대해서 어떤 과정을 거치게 됨을 말하게 됩니다. 교회의 하나됨이란 사람들이 각오와 단결로서 성사될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철저하게 다 다릅니다. 아무리 오랜 시간동안 알고 지내도 인간은 끝까지 따로 삽니다. 따로 생각합니다. 타인이 내 생각을 못 알아주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인간들에게 공히 같은 요소가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궁극적인 해답에 대해서 ‘모르겠다’는 태도를 보인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자신들이 각자의 자리에게 죽어가면서 왜 죽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하나됨을 전제 조건으로 모든 인간은 다 죽여버립니다. 소위 은사나 기능에 대해서도 전제 조건이 ‘본인의 죽음’입니다. 사람들이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이나 모두 죽음에 대해서 단지 ‘파괴’되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습니다.

죽음이란 바위가 침석당하고 물이 증발하는 식으로 인생이 마감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참여되지 못하는 것을 ‘죽음’이라고 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모든 인간들이 한결같이 하늘을 향해 요청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생을 달라”입니다.

이러한 하소연은 시대를 넘어서고 지역을 넘어서서 모든 인류의 한결같이 소망입니다. 이구동성들은 모든 인간들은 한 목소리를 냅니다. 합창을 합니다. 인간들의 사소한 행위와 행동이나 말까지도 ‘우리에게 영생을 허락하소서’라는 심보를 담고 있습니다. 왜 인간들은 신을 향하여 한곁같이 영생, 혹은 천국, 혹은 구원을 요청할까요?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창세기 3장에서 생명나무를 차단시킨 것을 악마가 너무나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마는 배후에는 인류를 부추깁니다. 영생나무로 나아가는 길을 차단한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모든 인류가 나서서 하나님의 영생차단을 철회하라고 시위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런 시도의 바탕에는 ‘나의 것’에 대한 조금의 손실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마음이 설치되어 있습니다. 나의 것이 다치지 않고 그런 나가 영생을 획득하겠다고 나서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집단적 소원에 휘말릴 필요가 없는 겁니다. 문제있는 자아를 그냥 방치하면서 영생을 줄 수는 없는 일입니다.

교회의 하나됨이란 바로 모든 성도들이 이미 십자가 사건에 합류되어 죽은 자가 될 경우에 다양하게 하나님의 은사가 주어지는 것으로 증명됩니다. 이처럼 은사가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도리어 교회는 하나됨에 변화가 없습니다. 은사 안에 들어 있는 동일함은 모두 그 각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서 모두 '죽은 자'가 될 때 가능합니다.

이처럼 해답이란 사적인 영역을 고집하는 바로 그 사실이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죽어져야 가능합니다. 진리의 시작점은 ‘인간의 죽음’입니다. 약속대로 이 땅에 오신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다윗에게 주신 약속의 완성입니다. ‘다윗의 약속’이란 친히 하나님께서 이 땅에 나타나셔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신다는 겁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정작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이를 고대하는 그들은 그분을 어떻게 대우했습니까? 마가복음 15:17에 보면,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왕이라고 자칭한 것을 조롱하기 위해 ‘가시로 만든 면류관’을 임금의 관이라고 씌었습니다.

하지만 요한계시록 14:14에 보면,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이한 낫을 가졌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이 쓰신 가시 면류관을 본인들에게 쓰게 되는 자만이 주님의 황금의 면류관에 합세가 됩니다.

시작도 주님이시오 끝도 주님이십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영생을 얻을 자격이 없는 우리가 죽은 자라는 사실을 먼저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51강-욥기 14장 18~22절(절망 속의 해답)20201004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4장 18~22절입니다. 구약성경 774페이지입니다.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 버리나이다 이와같이 주께서는 사람의 소망을 끊으시나이다,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고 쫓아 보내시오니,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 오직 자기의 살이 아프고 자기의 마음이 슬플 뿐이니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욥의 이야기는 한마디로 ‘모르겠다’입니다.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고, 세상이 누군지 모르겠고,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겠고,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사실은 우리가 주일날 복음 듣고 저 유리문, 저 유리문이 문제인데, 문만 열고 나가면 모르겠다는 겁니다. 유튜브 방송 다 듣고 돌아서면 모르겠다는 겁니다.

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고, 앞으로 어떻게 될지도 모르겠고, 도대체 내가 누구인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세상은 물론 아는 게 없고요. 허송세월 보내고 있지 않나 하는 느낌이 들지요. 이 모든 욥의 고백이나 오늘날 우리의 고백이 전부 다 사적인 것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적인 거. 사적으로 벗어날 수가 없어요.

아무리 기업을 사업을 크게 해도 어디까지나 나의 것이잖아요. 나의 것을 넓히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까 내 것을 알겠는데 그 밖에는 전혀 모르겠다는 겁니다.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나의 것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세상 것에 대해서 탐을 내지 않을 정도가 되면 모르는데 그것이 아니라 아무리 내 것을 가지고 있어도 저 내 것 밖에 있는 그 다른 것에 대해서 탐이 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이 사적인 것이 찢어져야 하죠. 사적인 것이 찢어져야 하는데 사적인 것과 하나님이 생각하는 공적인 것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사적인 것은 항상 내 것만 있으면 된다고 여기는 것이 사적입니다. 그런데 강을 그릴 때는 두 개의 둑을 그려야 해요. 그래야 강이 그려지거든요. 하나의 둑은 알아요. 내가 여기 있다는 거.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하나의 둑은 아는데 나머지 둑을 모릅니다. 그걸 모르겠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가운데서 하나님의 활동이 강처럼 어떻게 활동하는지를 모르게 되는 겁니다. 이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할 필요는 없어요. 그 구약에 보면 최고의 지혜자, 아이큐 280쯤 되는 사람 있어요. 최고의 지혜자 이고 전도서를 지은 사람, 수많은 책을 자기가 쓰고 또 공부를 한 사람, 세상에 나온 책들은 거의 다 섭렵하고 생물학부터 해서 모든 학문에 다 도사인 사람, 그 사람은 바로 하나님이 직접 지혜를 준 솔로몬입니다.

그 솔로몬이 전도서를 쓰면서 1장부터 하는 이야기가 모르겠다는 겁니다. 모르겠다. ‘내가 모르면 너희는 당연히 모르는 거야’가 되는 거예요. 안다고 하지 마라. 모르겠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것이고 그게 제대로 현실을 본 것이다. 모르기에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기에 더 이상 나에 대해서 의지하거나 나에게 기대를 하지 않는 겁니다. 왜? 모르기 때문에.

개코도 뭘 알아야 기대를 하죠. 나에 대해서 내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고 있는데 내 운명도 모르고 있는데 나에게 뭘 기대해요. 뭘 꿈을 꿉니까. 차라리 모르고 있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 속 편하지요. 전도서 1장 6절에 보면 “바람은 남으로 불다가 북으로 돌이키며 이리 돌며 저리 돌아 불던 곳으로 돌아가고”라고 나오는데 바람은 왜 자꾸 어지럽게 돌기만 하느냐는 말이죠. “바람아, 너 가는 곳이 어디야? 너 어디서 나왔어”라고 물어볼 수도 없고.

그러니까 바람이 어디서 나오는지도 모르고 어디로 가는 것도 모르고 솔로몬은 그렇게 지혜가 있고 공부를 많이 했지만,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1장 14절에 보면 “내가 해 아래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본즉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다”라고 하며 어디로 가는 것도 모르고 어디로 오는 것도 모르고 사적인 나만 있으니까 이거 잡고 저거 잡고 어떤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아요. 잡아봐야 그냥 새어 나가는 거. 평생 그러고 사는 거예요. 모든 인간이.

그게 바로 사적으로 사는 인간의 한계성입니다. 개인적으로밖에 모르는. 교회 왔는데 나 천당 갈지 지옥 갈지 모르겠어요. 목사님에게 “나 어떻게 살아요”라고 물어도 모르겠어요. 며칠 전에 어떤 분이 메일로 질문을 했는데 그 질문을 제가 소개해드릴 테니 여러분이 속으로 답변을 해보세요.

“목사님, 교회는 전부 다 하나 된 몸입니다. 하나인데 하나님이 은사를 주셔서 어떤 사람은 목사, 어떤 사람은 장로, 어떤 사람은 장로로 이렇게 되었다고 성경 말씀에 그렇게 나오는데 고린도전서, 에베소서에 나오는데, 그렇다면 집사가 장로 하는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집사가 목사 일을 하면 반칙입니까?”라는 것이 질문이에요.

하나님이 은사대로 다 구분했는데 목사는 목사, 장로는 장로, 집사는 집사, 감독은 감독대로 다 구분했는데 집사가 섬기는 일만 해야 하는데 설교해야겠다고 나서고 성만찬 하겠다고 나서고 장로처럼 치리하겠다고 나설 때 이걸 용납해야 하는지 당신의 은사는 그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하지 말라고 해야 하는지 밀어내야 하는지 이게 질문입니다.

그분에게 감사한 것이 성경을 보고 그냥 보는 것이 아니고 복음을 그냥 알기만 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 적용시킨다는 거예요. 과연 그런가 하여 세상에 있는 변화와 자기가 알고 있는 말씀과 이렇게 연결시켜 본다는 겁니다. 그것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질문이 바뀌었습니다. 교회는 하나인데 하나가 다양한 은사를 받은 것으로 질문 하셨는데 사실은 인간은 다양합니다”라고. 다양함부터 출발해야 해요. 내가 모른다는 것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사람은 아무리 교회 나와도 몸이 다르기 때문에 각자 따로 놉니다. 같은 교회 30년 40년 같이 교회 다녀도 남입니다. 부부도 남인데 같은 교인들은 말할 것도 없죠.

남이에요. 결코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일 수 없어요. 오히려 하나이기를 고대한다면 자기가 상처를 받아요. 저 사람은 내 남편이고 저 사람은 내 아내인데 왜 내 마음을 몰라줄까. 이렇게 시작한다면 여러분들은 사적인 한계에 사로잡혀 있는 겁니다. 사적인 한계에 사로잡히면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나오는 답변은 이겁니다. 모릅니다. 우리는 나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모르는 거예요.

강둑이 둘 다가 있어야 하는데 하나밖에 없으니까 강이든 뭐든 흐르는 게 없어요. 그냥 나만 계속 밀어붙이는 거예요. 1을 가지고 계속 밀어붙이는 겁니다. 아마 질문하신 분은 이런 생각으로 질문했을 거예요. 아무리 주의 종이고 기름 부음을 받았던 들, 참기름인지 무슨 기름인지 모르겠지만, 기름 부음 받은 주의 종이고 교회를 대표해서 치리한다는 장로로 직분 받을 때 거창하게 이웃교회까지 와서 안수 때리고 했는데 그걸 보면서 일반 교인이나 집사들이 하는 생각이 뭐냐 하면 저 사람은 특별히 장로 은사 목사 은사를 받았기 때문에 집사가 과연 거기에 토 달수 있을까. 그건 못하지. 그건 하나님만이 하시지 감히 나같은 평신도 집사가 어떻게 대드느냐. 만약에 대든다고 치면 그 장로 측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를 치리하거나 가르칠 은사도 없는 주제에 어디 입을 놀려”라고 나오면 너무나 성경적이기 때문에 반박에 여지가 없는데 반박의 여지는 없고 입은 떼고 싶고 이런 때는 어떻게 하면 좋을지 그런 취지로 질문하신 거 같아요.

저의 답변은 어떤 인간도 하나 되었다고 하는데 하나 된 것은 나의 사적인 취지를 붙들고 있는 한 그것은 성경 해석이 되질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모든 인간은 각자 놀아요. 하나 됨이 없어요. 평생 자기가 태어난 그대로 자기 만으로만 살아갑니다. 그래서 남에게 훈계한다든지 성경적으로 징치를 할 때는 어떤 관점이냐 하면 나는 바르게 신앙생활 하는데 너는 못 하니까 징치하고 싶죠. 따지고 싶고. 그런데 집사니까 참자는 식으로 되는데 그런 생각은 잘못된 겁니다.

모든 인간은 다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이 당연하고 유일한 현실입니다. 그런데 왜 달리 보이느냐 하면 내가 나에 대해서 나만 알고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저 사람이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다르구나 하는 결론을 사적인 이상은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지금 욥도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사적인 것에 잡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모른다고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내 마음을 전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여기 21절에 보면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라고 하면서 하나님은 내 사정을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오늘 본문과 똑같아요. 그러면 하나님의 하나 됨은 뭐냐. 하나 됨이 없는데 왜 하나 됨이라고 했는가. 하나님께서는 그 집사 장로를 전부 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여버렸어요. 하나 됨을 죽인 거예요. 하나 됨을.

나의 하나 됨을 죽여버린 겁니다. 나의 사적인 것을 죽여버린 거예요. 시작이 시작으로 우리가 생각했는데 우리가 마감을 몰라요. 시작은 나로 시작했는데 우리가 압니다. 우리가 한평생 어떻게 살았는지를 아는데 끝을 몰라요. 그 끝을 모르면 바람이 부는 것은 맞는데 바람이 어디로 가는지를 몰라요. 그러면 전도서대로 우리는 모르는 자예요.

모르는데 하나님께서 알게 하시는 것은 뭐냐 하면 그렇게 모른다 안다를 따져 봐야 결국 너는 죽는다는 겁니다. 네가 죽는다는 것을 분명히 너 자신을 알아도 죽고 네가 복음에 대해서 몰라도 죽고, 죽는다는 것, 그게 바로 하나 됨이에요. 하나 됨. 그 증거가 마가복음 15장 17절에 보면 나옵니다. 마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릴 때 위에 푯말에 뭐라고 썼느냐면 ‘유대인의 왕’이에요. 이스라엘의 왕, 택한 백성의 왕으로 죽었어요.

마가복음 15장 17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관을 썼어요. “예수에게 자색 옷을 입히고 가시 면류관을 엮어 씌우고” 유대인의 왕은 관을 쓰기 마련인데 그 관이 무슨 관이냐 하면 가시 면류관입니다. 가시 면류관은 사람들이 조롱하듯이 희롱하듯이 예수님에게 머리에다가 “자칭 왕이여 당신은 이게 어울린다”라고 하면서 가시 면류관을 씌워주었습니다. 죽으라는 거죠. 너같은 것은 필요 없다는 뜻입니다.

온갖 희롱을 다 하면서 가시 면류관을 씌웠습니다. 여기서 이스라엘 왕은 이스라엘 유대인들은 그들의 왕이 그들이 씌워준 가시 면류관을 쓴 것을 그들은 목격해야 해요. 왕으로 오신 분이, 모든 것을 아시는 왕. 왕이라고 하는 것은 솔로몬이 받았던 다윗 언약에 의하면 새로운 이스라엘 만드는 그 당사자가 왕이에요. 좀 설명이 필요하겠죠.

하나님이 다윗 언약, 다윗 약속에 의하면 노아 언약은 방주 만드는 것이고 아브라함은 자신의 자손이 복의 근원이 되는 것이고 모세 언약은 시내 산에서 받은 율법이 바로 모세 언약이고 다윗 언약은 뭐냐 하면 하나님 자체가 이 땅에 왕으로 직접 내려오신다는 왕래하신다는 거예요. 다윗의 자손으로 다윗의 혈통으로 이 땅에 직접 오시는 것이 바로 다윗 언약이에요.

그 다윗 언약으로 오신 분이 누구냐, 완성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왕으로 오셨어요. 그러면 왕으로 오셨다는 것은 뭐가 있다는 말인가 하면 그 왕을 왕으로 알아듣는 백성들이 만들어져야 한다는 것이 당위적으로 반드시 따라오는 겁니다. 그러면 유대인들을 메시아를 왕으로 한결같이 외쳤던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예수님에게 뭘 씌웠느냐 하면 가시 면류관을 씌워서 조롱했단 말이죠. “너는 아니야”라는 거죠. 이건 제가 처음에 이야기했던 것처럼 ‘모르겠다’입니다. 네 자로 ‘모르겠다’.

모르면서 그들이 메시아를 기다리고 어떤 장차 올 둑, 하나의 마감이 되는, 최종 완성이 되는 둑을 기다린다는 말은 그 둑은 인간적으로 말해서 이런 겁니다. 인간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치는 함성이 있어요. 합창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저에게 영생을 주옵소서”예요. 영생을 주옵소서. 세상에 대해서 인간에 대해서 사람들은 모른다 하는데 성경은 그 모르는 것을 알려줍니다.

너희들이 요구하는 것은 딱 하나이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옵소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옵소서. 천국을 주옵소서. 왜냐 하면 하나님께서 영생을 창세기 3장에서 거부했기 때문에 그래요. 하나님이 거부한 것을 달라는 겁니다. 이게 얼마나 악마적입니까. 그것도 이구동성이에요. 뭐 민주당, 열린우리당, 국민의 당, 관계없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 230개국 나라 모든 인간, 지금껏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역사에 등장한 모든 인간이 단 하나의 목소리를 내었습니다. “신이시여, 우리에게 영생을 주옵소서. 영원한 행복을 주옵소서. 천국을 주옵소서. 구원을 주옵소서”라고.

왜 악마가 인간 배후에서 그걸 부추겼습니까. 하나님께서 안 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에요. 생명 나무 가는 길을 차단했다는 것을 악마가 이미 알고 있어요. 하나님의 뜻이 있어서 거부한 그것을 악마는 거부했기 때문에 우리는 대들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모든 인간을 전부 다 하나의 군대로 합세해서 2억만의 군대를 동원해서 “영생을 달라고 외쳐라”라고 부추기는 거예요. 우리에게 영생을 줘야 당신은 하나님답다는 거예요. 거기에 우리가 같이 편승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요. 우리는 너무나 개인적이고 사적이니까.

모르겠다고 하지 마시고 뭘 얻고 싶은데 모르겠느냐를 스스로 물어보세요. 내가 뭘 얻고 싶은데 내 뜻대로 안 되는가를 스스로 물어보란 말이죠. 그것은 천국 가는 거고, 영생 얻는 거고, 구원받는 거예요. 그러나 그렇게 영생 달라고 했던 유대인이 우리를 대표해서 뭘 씌웠냐 하면 가시 면류관을 씌워준 거예요. 이건 절망이죠. 가시 면류관을 씌운다는 것은 ‘당신은 실패해라. 당신은 실패해야 마땅한 인간이다. 당신이 뭐라 해도 우리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다’라는 겁니다.

그 실패하는 본문이 오늘 욥기 14장에서 욥이 대신해서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보겠습니다. “무너지는 산은 정녕 흩어지고 바위는 그 자리에서 옮겨가고, 물은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 버리나이다”라는 이것이 욥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세계에서 이해하는 죽음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죽음이란 돌의 침식과 물의 증발처럼 그런 것으로 알고 있어요. 돌이 세월에 깎이고 물이 증발하듯이.

죽음이라는 것도 결국 시간 따라 결국 죽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죽어가면서도 왜 왜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예요. 죽어가는 현상은 느끼는데 모르겠다는 겁니다. 욥은 좌절하면서도 계속해서 하나님 앞에 자꾸 이야기하면서 말을 하면서 모르겠다에 머물지 않고 알고 싶다는 겁니다. 그 해답을 알고 싶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오늘 본문 20절에 보면 “주께서 사람을 영영히 이기셔서 떠나게 하시며”라고 주님께서는 사람을 이렇게 조져놓고 버려놓고 이제는 훌쩍 떠나시려고 하느냐는 뜻이고 “그의 얼굴빛을 변하게 하시고” 얼굴색을 파랗게 질리도록 하시고 모르도록 만들고 “쫓아 보내시오니”라고 해요. 이건 마치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이 생명 나무 근처에 못 가게 만들고 인간을 무참히 저주의 땅으로 쫓아내는 것과 보내는 그 모습을 그대로 반영해주지 않습니까. “가거라”라고 소리치는 하나님은 그런 하나님이라는 겁니다.

자기가 만들어 놓고 쫓아내 버리고 우리로 하여금 대책이 없게 만들고 뭐 어떻게 해야 우리가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주께서 우리에게 대책 주신 적 있습니까? 없잖아요. 우리보고 어쩌라고. 이런 식의 하소연을 지금 욥이 하고 있는 겁니다. 해답을 주셔야지. 해답을. 왜 이렇게 사는 게 팍팍하고 힘듭니까.

나훈아는 이야기했어요. 살다 보면 알겠지. 지금 자기 나이가 74세입니다. 살 만큼 살았어요. 몰라요. 살아봐도 몰라요. 세월 간다고 알 것 같으면요. 참, 우리가 하루하루 보내잖아요. 오늘도 달력 10월로 넘겼어요. 9월에는 몰랐는데 10월 되어서 알았던 게 뭐 있습니까? 없어요. 추석에 성묘 가서 ‘아이고 추석 잘 보냈다’라고 하면서 그걸로 끝나지 전부 다 사적인 거예요. 사적인 거.

근원적인 해답은 인간에게는 없으니까 우리 같으면 그냥 대충 살라고 하겠는데 욥은 그게 아니고 해답을 달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이 지경 만들어 놓으신. 우리보고 어쩌라고 우리는 해결책도 없는데 정답도 없는데 우리보고 어떻게 살라는 말입니까 라고 하며 요청하는 이 모습. 그 모습에 부응해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셔서 가시 면류관을 쓰신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나(예수님)처럼 이렇게 되어야 마땅하다는 겁니다. 가시 면류관 쓰자는 말이죠. “네가 모른다고 하는데 네 눈에 뭐가 보이냐?” “가시 면류관 보입니다. 그것도 우리가 뒤집어씌운 가시 면류관이 보입니다”라는 그게 바로 강둑의 시작이에요. 욥 사적인 것부터 시작하지 말고 예수 그리스도부터 시작해야 해요. 이게 다양성으로부터 시작하면서 인간은 나밖에 몰라요.

그러나 그 나밖에 모르는 그것이 죽어야 해요. 사실은 우리가 써야 할 가시 면류관, 찔리고 아파하고 그 흐르는 피로 우리는 죽어 마땅한 거예요. 모르겠다는 것도 죽어가는 자들이 하는 하소연에 불과한 겁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미 줬어요. “자 시작하자. 우리는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영광스러운 메시아”라고 하니까 “아니, 그렇게 하지 말고. 성질이 급하구나. 그렇게 하지 말고 가시 면류관부터 시작하자. 너희들이 모르겠다 하는 그것은 너희들이 건방져서 그렇다. 메시아를 만나도 하나님이 오셔도 너희들은 저 인간은 죽여야 한다고 하면서 나에게 가시 면류관 뒤집어씌웠다. 왜 씌웠느냐. 저분은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영생을 주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부터 시작하자”

하나님은 영생을 주러 오셨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이 거절했어요. 우리에게는 뭔가 참된 진리를 거절하는 힘이 있어요. 이것부터 시작해야 해요. 우리는 바깥에서 정답을 주면 낚아채면 내가 산다고 생각하는데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정답을 줬는데 그 정답을 우리가 우웩하고 토해내 버렸어요. 우리는 거부했습니다. 평소에 우리가 말씀을 얼마나 찾습니까. 안 찾지요.
얼마나 기도합니까. 기도 안 하지요. 왜? 얼추 밥 먹고 살만하니까.

제가 어느 날 운동을 하는데 어떤 나무를 지나가는데 갑자기 이상한 현상이 있어서 다시 돌아가서 봤어요. 보니까 모든 가지는 가만히 있는데 그 한 가지가 멈추지 않고 계속 흔들리는 거예요. 근래 운동하다가 그걸 발견했어요. 다른 가지는 안 움직이는데 바람이 불면 다 같이 움직여야 하는데 한 가지만 바람도 안 부는데 계속 흔들렸어요. 아마 구조적으로 그렇게 흔들린 거 같아요.

지금 우리가 오늘 본문을 보면서 다른 사람은 그냥 살아요. 집에 밥 있겠다. 뭐 그냥 살면 돼요. 물론 어떤 사람은 집에 쌀 열다섯 포대기 있었는데 굶어 죽었어요. 신문에 나왔어요. 굶어 죽어서 집에 가보니까 집 창고에 쌀이 열다섯 포대기 있어요. 이유가 정신병자라 밥할 줄 몰라서 죽었어요. 우리가 살만하니까 죽는 겁니다. 모르겠다고 외치면서 죽어가고 있는 거예요.

주께서 이미 주셨는데 가시 면류관을 줬거든요. 우리는 뭘 원하느냐 하면 금 면류관을 원했는데 가시 면류관을 주신 거예요. 제가 여러 번 써먹었지만, 다시 써먹으면 옛날 서양 동화에 매일같이 황금 거위 알을 낳는 거예요. 그래서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매일같이 조금씩 황금알을 낳으니까 초조하고 지겨운 거예요. ‘에이, 잡아버리자’라고 마음먹고 황금 거위를 잡아버리면 그 안에 금덩어리 있으리라 생각하고 잡았거든요. 아무것도 없어요. 너무나 보통 거위였습니다. 그때부터 황금알 없어요.

예수님이 영생 준다고 하니까 모르겠는 거예요. 예수님이 갖고 있는 영생이 어떻게 나에게 오는 지 모르겠는 거예요. 잡아버리자. 잡아 보니까 아무것도 없어요. 우리 쪽에서 정답을 알고자 하는 이게 주제넘고 건방진 일인 겁니다. 사적인 것은 사적인 것을 유지하면서 이 사적인 것을 영생 얻고자 할 때 이게 이 자체가 사달 난 거예요. 이게 잘못된 거예요.

해체되어야 하는데 이게 깨져야 하는데 깨질 생각 안 하고 붙들 생각하는 거예요. 94살 살아도 붙들 생각하고 96살 살아도 붙들 생각하는 거예요. 나중에 우리 자신도 장담 못 해요. 96살 되어서 휴대폰 도둑질할지 우리도 장담 못 해요.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TV보고 하면서 배우세요. 얼마나 인간은 개인적인지. 똑같아요. 해답도 모르고 정답도 모르면서 ‘아이고, 내가 열심히 고생해서 이만큼이라도 살았습니다. 자식 잘 키워놨습니다’라는 이런 이야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이야기가 없어요.

80세 넘은 사람이랑 이야기하면 맨날 1.4 후퇴 이야기, 맨날 나 때, 나 때, 커피라떼도 아니고 나 때는 어떠했다는 이야기, 전부 자기 때 이야기. 그게 해답입니까? 해답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우리같이 살아 보려고 애를 썼습니다. 옛날 개그에 이런 유행어 남긴 사람이 있어요. “반갑구먼! 반갑구먼!”이라고 하는 유행어 있거든요. 그 사람이 나이 53세에 안산 대부도에서 차 안에서 자살했습니다. 그걸 보고 사람들은 그 사람 이름대로 갔다고 이야기했어요. 이름이 뭐냐 하면 ‘조금산’이에요. 쪼금만 산 거예요. 이름이 ‘길게산’ 같으면 오래 살 건데.

그 사람은 해답이 없어요. 그 사람만 자살입니까. 지연된 자살이 오늘날 많이 있잖아요. 해답 없이 살아가는 사람. 내 것 있으면 그걸로 되었지 뭐가 답답해. 전혀 답답해하지 않는 사람. 그러나 욥을 보세요. 욥은 해답 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욥의 소원대로 욥의 예언대로 장차 메시아가 오셨습니다. 오셨는데 시작점을 갈아치웠어요. 시작점을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가시 면류관으로 바꾼 겁니다.

가시 면류관 뒤집어쓴 그 자리가 그 장소가 십자가거든요. 그래서 주님께서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다른 말은 너의 위에 가시 면류관을 뒤집어쓰고 살아라. 그게 네가 진리로 가는 시작점이다. 가시 면류관 쓰고 시작해라. 그러면 마지막은 뭐냐 요한계시록 14장 14절에 “또 내가 보니 흰 구름이 있고 구름 위에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가 앉았는데 그 머리에는 금 면류관이 있고 그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가졌더라”라고 나옵니다.

금 면류관, 황금의 면류관은 우리가 지금 이 상태로 쓸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가시 면류관에 참여된 사람에게만 금 면류관을 주신 영광에 합류가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이 크게 잘못한 것은 죽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에요. “돌을 닳게 하고 넘치는 물은 땅의 티끌을 씻어 버리나이다”라는 이런 없어지고 파괴되는 이것이 죽음이 아니라 진짜 죽음은 주님의 사적인 것에 합류되지 못하는 것이 죽음이에요.

주님의 가시 면류관이, 저 면류관이 내가 써야 할 면류관이라는 것을 알고 “주여, 제 머리에 가시 면류관 씌워주시옵소서”라고 하며 합류되지 못한 이것이 해답이 없는 사람, 죽음을 모르는 사람, 이유도 모르는 사람, 맨날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이에요. 이미 주님께서는 일거에 해답을 줬습니다. 가시 면류관에 참여된 자만이 영광의 면류관에 참여한다. 합류한다.

주님께서는 해답을 모르겠다는 그 욥의 외침에 반응하셔서 그 예언대로 마지막 때에 정답인,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아나, 여기 있다. 생명” 그것은 네가 받지 말고 가시 면류관 씌워서 죽은 자에게만 제공되는 생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온 인류가 긴긴 역사대로 영생 달라고 불멸의 존재 되게 해달라고 외쳤던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 건방지고 하나님의 조치에 대항하는 마귀 짓인 것을 저희들이 깨닫게 해주시고 사적인 이 보가 무너져서 주님의 공적인 가시 면류관이 우리 속에 들어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