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욥기 12:18-25 / 뒤집는 하나님 본문
이근호
뒤집는 하나님
2020년 8월 9일
본문 말씀: 욥기 12:18-25
(12:18) 왕들이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12:19)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 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12:20) 충성된 사람들의 말을 물리치시며 늙은 자들의 판단을 빼앗으시며
(12:21) 귀인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12:22) 어두운 가운데에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12:23) 민족들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민족들을 널리 퍼지게도 하시고 다시 끌려가게도 하시며
(12:24) 만민의 우두머리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에서 방황하게 하시며
(12:25) 빛 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 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진리란 이미 확정되고 고정되었습니다. 진리는 인간들 끼리 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는 하나님이 조치인 심판과 관련 있습니다. 창세기 18:24-25에 보면, “그 성중에 의인 오십이 있을지라도 주께서 그 곳을 멸하시고 그 오십 의인을 위하여 용서치 아니하시리이까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이심은 불가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균등히 하심도 불가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공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고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기 뜻을 개진하면서 ‘진리’를 다듬고자 합니다.
이처럼 진리는 하늘과 땅의 만남에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렇게 진리가 나타나면 그 진리는 그냥 가만히 있는 게 아니라 이 지상에서 기준에 따라 심판을 감행합니다. 비-진리를 방치하지 않게 말입니다. 이는 곧 실제적으로 진리가 진리답게 지상을 향하여 적용하신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이는 욥입니다. 욥은 자신의 고통 가운데 있으며, 이 고통은 본인의 죄로 생긴 고통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이점과 모순없으신 하나님과의 관련성을 지어볼 때 나타날 수 있는 결론은 딱 하나입니다. 기존의 모든 인식을 뒤엎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지향성이라는게 있습니다.
그냥 인간들이 가만히 사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방향성, 목표성을 두고 생각하고 움직이는 겁니다. 이것이 진리가 나오는 쪽이 아니기에 하나님께서 뒤엎는 겁니다. 인간 세계의 방향이 진리와 반대방향으로 전개됩니다. 그렇다면 욥이 당한 고통의 의미는 무엇이겠습니까? 인간들이 지닌 삶의 왜곡된 방향성으로 욥의 고통을 해석을 못한다는데 있습니다.
마치 신약에서 십자가 지신 예수님을 사람들이 해석을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나름대로 하나님에 대해서 온갖 미사어구를 사용하여 극대의 찬양을 올려드리려 합니다. 이는 지식 따로 몸 따로이기 때문입니다. 즉 인간들은 자신의 몸의 성향을 제대로 모르고 있습니다.
지식으로 하나님을 묘사하고 구성하고 표현한다 할지라도 몸은 극히 속물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뒤집기를 하는 것들을 보세요. 인간의 몸이 자연스럽게 추구하는 것들입니다. 왕, 제사장, 방백, 권력자, 충성된 자, 늙은이 같은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을 위해 생겨난 것들이 아니라 몸이 스스로 발생시킨 것입니다.
인간사회란 이런 것들을 선호하면서 경쟁하고 투쟁하고 연합하고 협작합니다. 하나님 따로, 내 몸이 산다는 것 따로 인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하나님의 뒤집기 시도가 단순히 지식이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적으로 지상에 나타났을까요? 진리란 하늘과 땅의 만남이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시므로서(요 1:14) 진리는 친히 몸으로 이 세상에서 활약하게 되었습니다. 세상은 하나님의 뒤집힘, 즉 심판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기다려 세상아! 내가 가서 둘로 쪼개 줄테니!”라는 식입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마리아는 예수님을 임신하게 됩니다. 자, 무엇과 무엇으로 둘로 쪼개느냐 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욥은 자신의 고통을 기준으로 해서, 고통의 의미를 아는 쪽과 그렇지 못한 쪽으로 갈라집니다. 이는 곧 아브라함이 걱정하던 것처럼, 의인을 악인과 같이 심판을 받게 되는 모순을 피하는 식으로 심판이 감행됩니다. 그 방법은, ‘의인이 없어서 심판받는 게’ 아니라 도리어 ‘의인이 한 명 나타나므로서’ 심판이 시행할 수가 있게 된 겁니다.
즉 인간들의 이해에 의하면 의인 따로 죄인 따로 가 아니라 의인이 먼저 죄인들로부터 심판을 받게 하므로서 인간의 이해성 자체를 하나님께서 심판해도 아무런 하자가 없게 하십니다. 더 이상 인간쪽에서 하나님에 대해 이러쿵 저러쿵 시비걸 소지를 아예 없애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일방적으로 하나님쪽에서 심판을 감행할 수가 있는 겁니다.
누가복음 1:51-55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나옵니다.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그 종 이스라엘을 도우사 궁휼히 여기시고 기억하시되 우리 조상에게 말씀하신 것과 같이 아브라함과 및 그 자손에게 영원히 하시리로다 하니라”
여기에는 단어들, 즉 ‘교만’이나 ‘권세있는 자’ ‘비천한 자’이나 ‘주리는 자’나 ‘부자’라는 개념이 인간들이 이해도와 전혀 상관없는 단어들이 된 겁니다. 교만한들을 흩어신다고 되어 있는데 이는 교만한 자가 따로 설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서 새롭게 발생되게 됩니다. 즉 누구는 상대적으로 교만하고 누구는 겸손한 자가 아닌 겁니다. 인간들이 자신을 규정할 수 있는 사전조치를 무산시켜버립니다.
심판을 대비한 그 어떤 조치도 소용없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의인이 아니라 이미 ‘의인’에 해당되는 최종분이 출현했기에 나머지는 당연히 쓰레기로 드러나야 하는 법입니다. 따라서 교만함이란 예수님 빼놓고 모든 이에게 해당됩니다. 마치 오늘 본문에서 고통이 욥 한 사람에게만 주어졌기에 비로소 하나님의 뒤집기를 욥의 입에서 나오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따라서 이 원리가 적용되는 환경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스스로 교만이 아니라 겸손을 추구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겠다는 모든 시도가 교만으로 드러납니다. 왜 그런고 하니 누가복음 1:54에 나오는 ‘긍휼’이라는 작업을 무산시키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긍휼’이라는 아무런 값없이 구원하는 것을 뜻합니다.
이 값없음에 인간적 요소가 스며들어서는 아니됩니다. 인간들 끼리 상호 비교해서는 ‘너는 교만하고 나는 상대적으로 겸손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소용없습니다. 더군다나 교만하지 않고 겸손한 기준을 인간들은 의인이 아니라 구성할 능력이 없습니다. 오직 예수님의 행하심 모든 것이 겸손일 뿐입니다.
죄인이 죄인이라고 한다고 해서 ‘겸손’하다는 칭찬을 받을 입장은 아닙니다. 권세와 부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 진정 비천한 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두가 다 부자와 권세욕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즉 인간은 스스로 자기 구원을 포기할 마음을 갖고 있지 않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오직 예수님의 성품만이 구원의 근거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예수님의 몸과 우리 몸을 늘 비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43강-욥기 12장 18~25절(뒤집는 하나님)20200809 이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12장 18~25절입니다. 구약성경 772페이지입니다.
“열왕의 맨 것을 풀어 그들의 허리를 동이시며, 제사장들을 벌거벗겨 끌어가시고 권력이 있는 자를 넘어뜨리시며,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 방백들에게 멸시를 쏟으시며 강한 자의 띠를 푸시며, 어두운 가운데서 은밀한 것을 드러내시며 죽음의 그늘을 광명한 데로 나오게 하시며, 만국을 커지게도 하시고 다시 멸하기도 하시며 열국으로 광대하게도 하시고 다시 사로잡히게도 하시며, 만민의 두목들의 총명을 빼앗으시고 그들을 길 없는 거친 들로 유리하게 하시며, 빛없이 캄캄한 데를 더듬게 하시며 취한 사람같이 비틀거리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람들이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 생각할 때 자꾸 명상이라든지 지식이라든지 논리라든지 그런 것을 동원해서 하나님을 정립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신의 몸이 취하고 있는 이러한 현실 세계, 그걸 실존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몸이 매일같이 감당해야 하고 뭔가를 요구받는 대로 움직여줘야 한다는 이 현실에 대해서는 따로 이것을 관리하려고 합니다.
예를 들어서 자신은 자신의 욕구대로 움직이면서 ‘하나님, 그래도 지식으로는 잘 정립되어 있습니다. 염려하지 마세요. 하나님에 대해서는 내가 이런 식으로 알고 있습니다’라는 그런 것으로 핑계를 대려고 해요. 그러면서도 오늘 18절부터 쭉 나오는 왕의 권세에 대해서 우리가 부러워하고 제사장에 대해서 겁을 집어먹고 권력 있는 자에 대해서 선망하고 빌붙으려 하고 덕을 보려 하고 또 늙은 자의 지혜가 탐이 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하나님을 인정하면서도 우리의 몸은 육신은 오늘 본문 22절에 보면 어두운 곳으로 가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점에 대해서 성경을 볼 때 자신은 해결책이 없어요. 성경에서 해결책이라고 내세우는 것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지점이 해결책입니다. E.T라는 영화에 보면 아이들이 손가락끼리 서로 만나게 하는 것처럼, 미켈란젤로의 그림에서 보면 아담이 비스듬히 누워있는데 할아버지 하나님이 와서 손가락을 대면 흙에서 아담이 나오는 것처럼 하늘과 땅이 직접 연결이 되어야 거기에 해답이 있는 겁니다.
거기서 해결책이 나오는데 창세기 18장에 보면 아브라함이 등장하고 그다음에 우리는 무엇을 보느냐 하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어떤 말을 주고받는지 그 내용에 신경을 써야 하죠. 아브라함이 이런 이야기 합니다. 아브라함의 논리는 이거예요. “여기에 의인 50명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멸망시키지 않으실 거죠?”
‘왜냐 하면 의인 50명이 있는데 그 도성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해버리면 그 의인들이 희생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의로운 하나님이 의로운 의인을 심판했다는 모순에 빠지니까 설마 그 모순적인 행동을 모순 없으신 하나님께서 하실 일은 없으실 거니까요’라고 생각하면서 “의인 50명만 있다면 멸망 안 할 거죠?”라고 묻고 하나님이 “안 할게”라고 하니까 그러면 45명, 40명,...이렇게 줄여가는 기도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바로 하늘과 땅의 해결점인데 신약에 오면 이게 바뀌어요. 의인이 있기 때문에 멸망 당하는 겁니다. 의인이 없어서 멸망 당하는 것이 아니고 신약에 오게 되면 이미 의로움이 나타났기 때문에 단 한 명의 의인이 나타났기 때문에 나머지들은 다 떨어버리는 거예요. 털어 내는 겁니다.
태풍 지나가고 난 뒤에 또는 큰 불나고 난 뒤에 TV에 나오는 주변을 살펴보니까 다 쓰레기죠. 분명히 큰 불나기 전에는 쓰레기가 아니고 정리정돈 되어있어서 깔끔하고 깨끗하다고 했는데 비가 오고 태풍이 싹 지나가니까 어디 쓰레기 치울 엄두가 안 나죠. 따라서 세상은 그냥 쓰레기였어요.
그동안 인간이 애써서 자기 생존 구역을 깔끔하게 해보려고 치울 대로 치우니까 깨끗해졌는데 다시 하나님께서 큰불 줘버리면 산에 있는 나무 조각부터 해서 온 쓰레기가 다 떠내려옵니다. 그 길에서 담배꽁초 줍는 거 아무 소용 없어요. 큰비 오게 되면 담배꽁초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원래 쓰레기장이었구나.
인간이 뭔가 선을 행한다는 것은 그건 뭔가 자기가 선한 티를 내기 위해서 자기 동그란 구역만 깨끗하게 해놓고 어떻게 선하다고 티를 내고 싶은데 하나님의 권력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 한 사람만 오게 되면 네가 손대지 않더라도 나머지는 다 쓰레기 취급해서 다 없애는 겁니다. 그 가는 와중에 욥이 있는 거예요.
아까 설교 전에 어떤 분이 질문했죠. ‘시간은 왜 있습니까?’라고. 시간이 있는 것은 십자가를 향하여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을 몰고 그 십자가로 달려가기 위해서 시간 속에 겸손하게도 언약이 시간을 만들었는데도 불구하고 겸손하게도 그 시간 속에 언약이 시간에 따라서 변화되는 낮아짐을 보이시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분명히 육신을 만드셨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인간의 몸을 입고 왔어요. 이것은 인간의 몸 따로 인간의 지식 따로 하나님을 생각하는 그런 것은 인정하지 않으시겠다는 겁니다. 네 몸을 한 번 굴려봐라. 하나님은 어디 있느냐고 자꾸 골방에 앉아 기도하지 말고 네가 세상에 나가서 돈 벌어가면서 한번 살아봐라. 시집가서 한번 살아봐라. 장가가서 한번 살아봐라. 애 한번 낳아봐라. 그게 얼마나 나를 쓰레기로 만드는지를, 이 세상이 나를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를. 그냥 도 닦는 식으로 하나님 안다는 것이 하나님 아는 것이 아니거든요.
그렇게 일단 살아 보니까 내가 생각하고 고상하고 순수하고 순결한 하나님과 실제로 내 몸이 추구하는 것은 여기 나오는 열왕과 권력이었습니다. 그리고 제사장이었습니다. 제사장의 특징이 뭐냐 하면 남을 판단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이에요. 남을 판단하는 것을. 여기에서 제사장이 재판장이죠. 17절에 보면.
열왕, 왕도 비슷하게 최종 권력자로서 판단하는 거죠. 이렇게 판단을 할 때 그냥 권력없이 판단을 하게 되면 이건 무시당하겠죠. 그래서 궤변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 결말이 없는 것을 궤변이라고 합니다. 논리를 전개하는데 “그래서 결론이 뭐냐?”라고 물으면 “몰라”라고 대답하는데 그건 궤변이 되는 거예요.
아무리 고상한 논리를 취해도 정답을 제시하지 않으면 하늘과 땅에서 유일하게 제시한 그 결론이 없으면 그 인간은 무슨 철학을 하고 무슨 공부를 해도 결론 없는 인간은 본인이 결론을 모른다는 뜻이거든요. 해답을 모른다는 뜻입니다. 그건 궤변론자예요.
‘그러면 우리가 정답을 알면 되지 않느냐’라고 하는데 설교를 다시 할게요. 내 몸이 어떤 결론이 있으면 그 결론에 대해서 내 몸이 아낌없이 거기에다 던져 넣어야 해요. 그게 결론답고 해답 답지요. 해답은 이것이라고 유창하게 이야기해놓고 자기는 싹 몸을 빼놓고 자기는 몸 편하고 자기는 살려고 살짝 빼는 거, 그것은 비겁한 짓이죠. “주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습니다. 피로 구원받습니다”라고 목사가 이야기했으면 그 목사가 교회 같은 것은 생각하지 말아야 하죠. 생계 수단이 되니까. 생각하지 말아야 해요.
예수님의 피에 나는 죽겠다고 나서야지 ‘예수님 피 증거 해서 교회 생기면 교회에서 생활비 나오고...’라는 이런 건 궤변도 아니고 괴담이에요. 괴담. 그런데 왜 그렇게 목사가 교회를 붙잡으려고 하는가. 권력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본문 19절에 보면 “권력이 있는 자를”이라고 나오는데 일종에 그게 권력이에요.
제가 전에 이야기했잖아요. 사람이 돈이 아쉬워서 목사 하는 것이 아니고 권력이 아쉬워서 목사 하는 거예요. 이 마이크가 권력의 마이크 폭력의 마이크가 된다는 거예요. “내가 까라면 까”라는 식으로 마이크가 폭력을 외치는 마이크가 된다고요. “아멘 안 해? 내 말에”라는 식으로. 제가 지금 여러분에게 하는 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라고 할 때는 “아멘”을 준비하고 있으란 거죠. “믿습니까?”라고 할 때는 “아멘”이 딱딱 화답이 되어야 해요.
신천지 이만희가 설교할 때 보셨지요. 이건 미친 것도 아니고 정말 아무것도 아닌데 아멘 할 준비가 되어있어요. 유니폼 입고 여자는 한복 입고 남자는 흰색 옷 입고. 도대체 그게 무슨 짓이에요. 그런데 도대체 사람들이 거기에 왜 가느냐면 그게 그리웠던 거예요. 내가 권력의 일부가 되는 것이 그리웠던 거예요.
작은 교회는 그걸 채워주지 않습니다. 영 시답지 않아요. 거기에 서너 명 모였는데 그건 뭐 내 욕망에 영~~ 성이 차지 않아요. 수천 명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거예요. 그런 교회가 서울에 많아요. 신천지뿐만 아니고 많습니다. 그 사람은 큰 집단이 자기가 내 몸이 추구하는 권력의 가현체인 것이, 눈으로 확인된다는 것이 즐거운 거예요.
예수님을 믿으면 복 준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고요, 예수님 믿으면 예수 믿는 사람이 얼마나 많아졌는지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다수가 진리라는 것을 남에게 많은 숫자로 증명하고 싶어요. 내가 거기에 기여하고 있다는 내 가치를 얻고 싶은 겁니다. 외로운 건 싫어요. 남에게 무시당하는 것도 싫고, 따돌림당하는 것도 싫고, 성경에는 넓은 길 가지 말고 좁은 길 가라고 하는데 좁은 길 싫어요. 찾는 자가 많은 곳에 참여하고 싶어요. 8월 15일 광복절에 광화문에 모이자고 하는데 비나 몽땅 와라. 거기에 모여서 뭐 할 건데요. 왜 모여야 하는데요? 그런 식으로 모이면 안 돼요.
전에 수련회 할 때 수련회 하면서 제가 섬뜩할 정도로 인상 깊은 대목을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그걸 그림으로 그려본 적도 있는데 그게 바로 마태복음 8장에 나오는 귀신들린 모습이에요. 귀신들린 자를 설명하면서 내가 거기에다 그림을 그렸어요. 사람을 얇은 만두피로 그려놓고 그리면서 제가 벌벌 떨었다는 거죠. 너무 섬뜩해서.
만두피처럼 사람 모양 그려놓고 거기에다 약 2000명의 귀신을 그려 넣은 거예요. 그려 넣어 보니까 악마의 몸에 기생하는 기생충. ‘나’라는 악마의 외피에 귀신이 2000마리, 군대가 꼭 2000마리라는 뜻은 아니지만, 여하튼 2000마리나 들어있는 귀신이 괴물이 한목소리를 내면서 내 몸을 갖고 노는 겁니다. 인생이라는 것이.
귀신이 말하는 목표가 있어요. 그건 뭐냐 하면 “제발 예수님이여, 늦게 오소서. 우리를 멸할 심판자여, 제발 등장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라는 거죠. 그 점에 대해서 마태복음 8장에서는 그렇게 하지만 욥기에서는 아직 신약이 아니니까 그 정도까지는 모르고 그냥 신약 욥에서는 ‘엎어버린다, 뒤집어 버린다, 인간들이 추구하는 본성과 반대로 움직인다’라는 정도로 욥이 이야기합니다. 그런 정도로.
그러면 ‘그런 정도로’라는 말이 우리는 성에 안 차지죠. 성경에서 하늘과 땅이 해답을 주려면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야 해요. 만남이 몸이 되어야 한다고요. 그 몸은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몸 가지고 보여주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우리는 해답이라고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바로 그 점이 나와 있습니다.
누가복음 1장에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에서 임신해서 나왔어요. 이 말은 인간의 몸에서 임신 되는 것은 예수님 같은 언약과 무관한 오히려 언약에 반대하는 그러한 아이들을 계속해서 자식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았다고 할 수 있어요. 배가 지나가면 가만히 있던 바다가 뱃머리 때문에 갈라지는 것처럼 예수님이 나타나고 그 몸이 나타났다는 것은 우리는 그 해답을 갈라진 틈을 통해서 그 해답을 발췌해야 합니다.
예수님 가는 곳에 해답이 있어요. 예수님 가는 곳에. 오전에도 누군가가 그런 질문 했잖아요. 나사로가 아프니까 예수님께서 잠자고 있다고 하시면서 가자고 하니까 제자 중에 도마가 ‘우리도 죽으러 가자’라고 한 것처럼 제자들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가는 곳에 뭔가 해답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고 우르르 따라가는 거예요. 그렇게 따라가 봤자 십자가에서 전부 다 뿔뿔이 헤어지지만 어쨌든 예수님 가는 곳에 해답이 있습니다.
세상에 번뜩거리는 네온사인이 해답이 아니에요. 그리고 TV에 나오는 드라마나 예능이나 인기 있는 사람들이 해답이 아니에요. 임영웅이가 해답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해답은 이 땅을 쪼개는 자에게 해답이 있어요. 그렇게 쪼갤 때 그 쪼개는 기준을 우리가 파악하면 되는 겁니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마리아가 임신하고 나중에 찬양하는데 찬양 대목이 45절부터 54절까지 나옵니다.
여기에 보게 되면 “그 계집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 능하신 이가 큰일을 행했는데 그분이 바로 주님이시고”라고 하면서 그다음에 51절에 보면 “그의 팔로 힘을 보이사 마음의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고”라고 나오는데 해석을 잘해야 합니다.
교만한 자를 흩으시기 때문에 여러분, 우리는 교만해야 합니다. 교만해야 해요. 왜냐 하면 교만에는 한도가 없기 때문에 그래요. 낮춰도 낮춰도 그게 교만이에요. 만약에 여기 51절에 교만한 자를 물리친다고 하니까 흩으신다고 하니까 교만하지 않은 자가 되려고 한다면 그 기준이 교만이에요. 왜냐 하면 우리는 빠져나갈 구멍이 없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해도 교만이에요. 오히려 부작용이 등장합니다. 교만한데 주님보기에 하나님 보시기에 ‘저 이만하면 교만 안 한 거죠. 되었죠? 하나님 편 맞는 거죠?’라고 우기는 샘이 되는 겁니다. 그건 제자들의 과오를 우리가 되풀이하는 것이 되거든요. 교만한 자를 흩으신다면 이 말씀대로 한다면 우리는 기쁘게 내가 아무리 낮추고 뭘 해도 그게 교만이라고 규정 받는 즐거움이 있어야 해요. ‘너는 교만한 자다’ ‘오케이’라고 받아들여야 해요.
그래야 주께서 자를 것이 있을 게 아닙니까. 자를 게.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그 복음대로 나에게 구성을 해 보는 거예요. 어떤 드라마를 짜고 구성을 해보는데 구성을 하고 자기 안에 꾸역꾸역 다 집어넣은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그 허구와 헛방, 내가 만든 건 다 없어지고 오히려 나는 예수님 생각 안 하게 되고 나는 나만 생각하게 되고 세상만 생각하게 되고 나는 그야말로 내 입장만 생각하고 우기는 잘난 체하는 그것만 들통났을 때 그 절망감은 어떻게 감당하시렵니까? 어떻게 감당하실래요.
우리교회 교인들은 이미 알기 때문에 괜찮아요. 내가 믿음 없다는 걸 알게 된 이것이 주의 성령의 뜻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요. 그러나 그렇지 않고 인위적으로 조작해 내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성도라면 그 조작된 문을 뜯어냅니다. 그래야 쓰레기가 되니까. 쓰레기가 안 되면 우리 자신이 우상이 되거든요.
그다음에 보면 52절에 “권세 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라고 나오는데 ‘아, 이건 나에게 해당이 안 되네. 우리는 권세 전혀 없고 우리는 비리비리 살아가는데’라고 하지 마세요. 권세는 누구나에게 선망의 대상입니다. 권세가 없을 때는 권세 있는 자를 욕하지요. 그런데 만약 우리가 권세를 쥐었다면, 대학교 때 공부도 안 하고 데모만 하는 인간들이 권세를 쥐고 나면 쥐나 개나 전부 다 ‘그다음 차례가 내 차례 아닌가. 여섯 명 사표 냈는데 그다음 나 안 부르겠는가’라고 생각하며 전부 다 권세를 탐내고 있는 거예요.
권세를 안 해볼 때는 권세 자가 공격의 표적이 되고 나의 원수가 되지만 막상 내가 권세를 가진다면, 지금 우리와는 아무 해당 사항이 없는 거 같은데, 만약 출세했다면 ‘주여 이때를 위함입니까’라고 하면서 그걸 유지하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그걸 유지하려고. ‘그래. 이 권세가 나다워. 진짜 내가 원했던 진짜 나다운 모습이 바로 이거였어’라고 생각하죠.
교회에서 “너는 전도사만 해라”라고 하면 막 욕하고 화를 내요. 목사 자리도 하나의 권세 자리가 되고 말았어요. 언제 전도사에서 목사 될까를 노리고 있다고요. 특히 독일 교회는 더 심해요. 한국은 안 그렇지만 독일 교회는 그게 아주 심해요. 아예 목사 될 사람 전도사 될 사람 따로 구분 짓고 시작을 하거든요. 평생 그건 60세가 되어도 전도사예요. 그건 마치 하사관이 50 넘어도 계속 소위 안 되는 것처럼. 굳어져 버린 겁니다.
사람이 누구를 공격한다는 것은 되고 싶어서 공격하는 거예요. 내가 되고 싶은 것을 남이 들어섰다는 것이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작용하기 때문에 ‘내 자리를 네가 가져?’라고 질투심으로 공격하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자를 남이 낚아채서 결혼해 보세요. 전에는 버려놓고 또 버린 게 아까워서 난리죠.
권세 있는 자를 내쳤다는 것은 내가 나를 치지 마세요. 제발 나를 벌주지 마세요. 그것도 나를 속이는 거예요.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악마의 자존심에게 충분히 속아야 해요. 평생을 통해서 속아 넘어가야 해요. 우리 자신이. 선악과 따먹은 자체가 위반인데 자꾸 선악 가지고 위반을 극복하려고 해서는 안 된단 말이죠.
그다음에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라는 말씀 있는데, 와~~ 이 말씀 주의해야 합니다. 비천한 자는 없어요. 우리는 전부 다 권세를 호시탐탐 노리는 사람이기 때문에 비천한 자는 주께서 그렇게 만드시는 분이 있어요. 주님 외에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고대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비천한 사람이에요. 주님 외에는 예수님이 날 불러 주는 그날 외에는 아무것도 소망하지 않는 사람이에요.
히브리서 13장 14절에 보면 “우리가 여기는 영구한 도성이 없고 오직 장차 올 것을 찾나니”라고 나오는데 이것을 그냥 지식이 아니고 몸으로 흠뻑 다 젖은 사람들, 정말 이 세상에는 미련없는, 권세 있어도 미련없는, 말씀에 흠뻑 젖은 사람들, 그런 사람에게 주님이 보이겠죠.
그다음에 “주리는 자를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라고 나오는데 부자는 없습니다. 60억 가진 부자는 100억 가진 부자보다 가난한 거예요. 인간은 부자를 계속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에게 결정적인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긍휼이 여기신다는 겁니다. 여기서 긍휼이 여기신다는 것은 대가를 안 받는다는 겁니다. 값없이 너희를 구원한다는 겁니다. 값없이.
이것이 바로 신약에 결정적 최종적인 해답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서 연결된 움직이는 연결선이에요. 예수님 자체가 해답이에요. 길이고 진리고 생명입니다. 욥은 아직 거기까지 되지 않았고 욥이 느끼는 하나님이 뭐냐 하면 이상하게 이걸 뒤집는다는 하나님이에요. 왜냐 하면 욥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게 되었거든요. 아프고 가진 것 없고 병들었고 그런데 하나님은 나와 함께 있다는 것을 느끼고.
그것에 비해서 세상은 나와 함께 있는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그들에게 진짜 하나님을 가지고 질책하고 있는 욥, 우리는 그 본문을 보고 신약의 누가복음을 보아서 서로 연결시키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미 해답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 해답을 이용할 생각을 하지 말게 하시고 우리가 주님에 의해서 친히 다루어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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