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스가랴 2:5 / 로드킬 / 200709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스가랴

스가랴 2:5 / 로드킬 / 200709

정인순 2020. 7. 10. 09:3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공은주

안양20200709a슥2장5절(로드킬)-이 근호 목사

스가랴2장입니다. 천사의 활동에 대해서는 구조적으로 파악해야 돼요. 구조적이라 하는 것은 구조를 딱 생각하게 되면 거기에 틀에 다 맞도록 되어있습니다. 2장1절~5절에 보면,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측량줄을 그의 손에 잡았기로 네가 어디로 가느냐 물은즉 그가 내게 대답하되 예루살렘을 측량하여 그 너비와 길이를 보고자 하노라 하고 말할 때에 내게 말하는 천사가 나가고 다른 천사가 나와서 그를 맞으며 이르되 너는 달려가서 그 소년(스가랴)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예루살렘은 그 가운데 사람과 가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성읍이 될 것이라 하라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불로 둘러싼 성곽이 되며 (불성곽이 된다는 말은 어떤 외부 침입도 다 방어해 낸다는 겁니다.) 그 가운데에서 영광이 되리라” 요렇게 되어있지요.

이것을 구조적으로 설명하려면 구조를 맞춰나가야 되는데요. 혹시 이 집에 삼성전자 직원들이 갑자기 주문하지도 않았는데 전자제품 주문하게 되면 아저씨 둘이 와가지고 설치하지요. 한 사람이 설치하고 난 뒤에 딩동~ 눌러가지고 “잘 작동되는지 서비스 보러 왔습니다.” 하는 것처럼, 천사 둘이 교대로 스가랴에게 들이닥치는 겁니다. 그럼 그 구조적으로 한다는 말은 뭔 뜻이냐 하면, Subway. 어디서 들어본 적 있어요? 샌드위치 프랜차이즈지요. 서브 웨이 샌드위치. 빵이 이리 있고 작대기 빵 이 사이에 뭔가 야채나 고기를 집어넣습니다. 집어넣으면 샌드위치 빵이 이렇게 형성이 됩니다.

둘이 왔다는 것은 스가랴를 둘로 쪼갠다고 보면 돼요. 서브웨이의 샌드위치처럼 둘로 쪼개가지고 중간에다가 천사의 활동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천사의 활동을. 그러면 샌드위치 되는 거죠. 이게 바로 뭐냐 하면 관통이에요. 관통. 천사가 와서 내 인생을 관통을 해버립니다. 관통하게 되면 우리 성도는 스가랴가 성도기 때문에 선지자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가 두 조각나고 두 조각나서 그 하나의 본드처럼 두 조각인데 다시 하나가 돼요. 다시 하나가 됩니다.

그러면 이 중에 뭐가 포함이 되었는가 하면, 영적 요소가 포함된 채 다시 하나로 봉합이 되어버리지요. 봉합이 되는 거예요. 이런 서브웨이 샌드위치 말고 제가 옛날에 먹던 옛날의 빵 보름달이라는 빵이 있어요. 샤니에서 나온 보름달도 있고 요건 빵 조각에다가 곰보 비슷한 게 있고요, 밑에는 하얀 크림이 있지요. 이걸 좀 냉장에 보관하면 크림이 막 새어나옵니다. 하얀 게 막 손에 묻고 하지요. 50년 전에 나온 빵이에요. 지금도 나오고 있어요. 크림 삼분의 일이 딱 들어가게 되어있지요.

그러면 이 사람이 성도가 만약에 크림빵, 보름달 빵이라면 성도가 어디에 가든지 무엇이 흘러나오겠습니까? 하얀 크림이 흘러나오겠지요. 서브웨이 샌드위치 입 벌리고 먹으면 입 작은 사람은 안에 속에 있는 거 다 튀어나옵니다. 다 흘러버리지요. 다 튀어나오지요. 스가랴는 선지자입니다. 선지자이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의해서 구성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천사가 지상을 방문하게 되면 성도를 재료로 해서 구조적으로 활동하게 되어있어요. 구조적으로 활동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면 성도 입장에서는 혼자 있는 게 아니지요. 홀로 있는 게 아니에요. 스가랴2장을 우리가 보고 있는데요. 스가랴2장을 보고 있으면서 참, 이 성경을 가지고 그냥 실천을 하려고 하는 사람한테는 딜레마가 되어버려요. 난감하지요.

왜냐하면 이 스가랴2장처럼 살려면 아무리 용을 쓰고 애를 써도 소용없어요. 왜냐하면 천사가 안 오면 끝나기 때문에. 천사가 안 오면 끝나거든요. 그러면 이 스가랴2장에 대해서 이건 누구의 이야기냐 하면 스가랴 사적인 이야기가 되어버려요. 우리하고 상관없는. “아이구, 스가랴 좋겠다. 영적인 천사를 만나서 좋겠네. 아이구, 신앙생활 저절로 되겠네. 이렇게 뭐 질투하면서도 부러워하면서도 그건 나하고 상관없어.” 이렇게 밀어낼 수가 있어요. 그러나 이건 구약이다 말이죠.

구약에는 개인적으로 있던 것이 신약에는 집단적으로 이루어집니다. 구약에 개인적으로 왔던 그 상황이, 상황이라 하지 말고 아까 구조했으니까 그 구조가 개인구조가 신약에서는 집단구조로 찾아오게 되어있어요. 집단구조로. 제가 이렇게 말로 하는 것 보다 성경 본문 찾아보면 더 확실하겠지요.

사도행전10장13절에서 14절 봅시다. 베드로에게 천사가 나타났어요. 베드로가 기도하는 가운데서 지붕에 올라갔는데 시간은 제육시. 육시니까 점심 때 쯤 됐는가, 시장하여 먹고자 함에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하늘이 열리고 한 그릇이 내려오는데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에 매여 땅에 드리웠더라. 그 안에 땅에 있는 각색 네발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또 소리 있어 가로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할 때 베드로가 못 먹습니다. 이리 된 겁니다.

베드로가 배가 고플 타이밍을 노려가지고 하나님께서 베드로보고 비몽사몽간에 꿈도 아닌 것이 현실도 아닌 것이 이렇게 주어지는 겁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이 활동하는 구조를 지금 우리는 구축하고자 합니다. 베드로가 할 때, 먹어라. 못 먹습니다. 먹어라. 못 먹겠다. 왜 못 먹느냐 하면, 율법에 의해서 먹을 수 없는 것들이 보자기에 싸여서 내려왔기 때문에 못 먹습니다. 되어있는 거예요.

이게 바로 신약의 상태에요. 개인적으로 스가랴는 유대인입니다. 이스라엘이에요. 개인이 율법을 지니고 있지요. 그래서 스가랴는 자기 구조가 뭐냐 하면 율법구조에요. 그렇다면 눈치 챈 사람도 있겠지만, 율법과 율법 사이가 갈라지고 여기에 새로운 서브웨이 샌드위치처럼 갈라지고 그 위에 하나님의 율법과 상관없는 것이 여기에 관통하면서 여기에 정착하게 돼요. 들어온다 이 말이지요. 요 사이에 율법과 율법이 갈라진 사이에 그냥 들어온 겁니다.

그런데 들어온 것이 이게 들어와야 선지자가 되거든요. 선지자의 특징은 뭐냐, 율법의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구조가 뭐냐 하면 율법은 인간으로서는 미완성이에요. 미완성 가운데 뭐가 들어옵니까? 율법의 완성이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어디에 주도권이 있느냐 하면, “나는 율법대로 못 살았어. 어떻게?” 하는 것이 주도권이 아니고, 율법완성을 여기에 이미 장착하고 있는 거예요. 지니고 있는 거예요. 율법완성을 지니고 있는 겁니다.

이걸 가지고 신약에서는 뭐냐 하면 영적 존재라고 하는 거예요. 영적 존재. 영적 존재는 신비로운 게 영적 존재가 아니고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영적인 상황이 들어와 버리면, 영적 상황의 특징은 뭐냐 하면 시간의 끝. 시간의 끝 그 다음. 끝의 끝. 시간의 끝의 끝. 시간의 끝의 그 다음에 있는 상황이 주어지게 돼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구원된 겁니다. 언제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구원된 겁니다.

요 똑같은 원칙이 베드로에게 온 거예요. 사도행전에 베드로는 뭐냐 하면 구약과 신약이 겹치는 과도기적 인물이에요. 베드로가. 그래서 사도바울한테 추궁당한 겁니다. 갈라디아서에서. 추궁 당한 거예요. 베드로 생각을 들어보면요, 일리가 있어요.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주셨다. 율법을 주면서 그냥 준 게 아니고 율법의 완성이 되어야 복을 받는다. 신명기에. 율법이 완전해져야 복을 받는다. 따라서 너희들은 이 율법을 지켜라, 고 되어있어요. 지켜라. 순종하라. 몸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하여, 정성을 다하여,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도 이야기했고 베드로도 그걸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 베드로 입장에서는 무슨 생각을 하느냐, 구조적으로. 율법이 끝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율법의 완성이 온다. 라는 것이 베드로 입장에서는 상식입니다. 율법이 끝나고 난 뒤에 율법의 완성되시는 분이 온다.

그런데 율법이 끝나기 전에 미리 주님께서 율법의 완성된 게 주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다는 말은 본인이 복음을 전할 만큼 대단하고 완벽하고 흠이 없는 자가 아니라 도리어 완성이 옴으로서 자기가 대외적으로 대인관계에 있어서 흠이 있는 사람이 되어버린 거예요. 흠이 있는 사람.

하나님께서 왜 그렇게 하느냐 하면 율법 전한다고 핑계대로 자기 행동의 완전함과 옳음과 자기 잘남을 율법이라는 명목으로 전해버리는 오류를 차단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이걸 쉽게 하면 우리는 늘 주님에게 당해야 한다. 그래야 이게 복음이 나와요. 늘 나부터 주님한테 늘 당해야 돼요. 당해야 될 이유가 나는 나의 완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의 완전을 추구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내가 죄가 없어야 복을 받으니까. 사적을 욕망을 포기 못하고 율법과 나의 결합으로 내 잘되기를 바라는 그것이 계속 펄펄 살아있는 거예요.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이걸 오히려 역으로 가는 거예요. “주님, 저 성도입니다. 차마 이건 못하지요.” “먹어라.” 이리 되는 거예요. “제가 이걸 먹어버리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율법이 다 폐기됐다고 그들이 그렇게 아주 방탕에 빠질 것이고 혼선에 빠질 것인데 내가 그 책임을 어떻게 감당합니까?” 주님께서는 “그냥 먹어라.” “그냥 먹어라.” “나는 니 못난 속에 잘난 내가 들어가겠다.”

그래서 이 베드로의 입장에서는 과도기적인 입장에서는 베드로에게는 개인이 있잖아요. 그런데 베드로가 복음을 전한다고요. 사도바울도 마찬가지고 복음을 전해요. 지난 낮 설교에 우리가 빌립보서를 보면서 사도바울이 마치 자기가 과거 이야기하는 것처럼 이야기하지요.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나는 율법에 흠이 없고 나는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고, 그리고 나는 하나님 앞에 열심히 있어서 교회를 핍박한 자다. 그런 이야기를 했어요. 그랬던 사도바울이 고린도전서9장에서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고린도전서9장20절,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굉장히 여기 구조가 복잡해요. 이것을 이렇게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나는 율법 없는 사람 이방인에게는 나는 율법 없는 사람으로 다가선다.” 가 아니에요. 율법 있는 사람한테는 율법 있다고 다가서는 게 아니고, 율법을 이야기하는 사람에게는 율법 없는 사람으로 다가가고, 율법이 없는 사람한테는 율법이 있는 사람으로 다가가는 거예요. 반대지요. 이유가 뭐냐 하면, 조금이라도 나를 증거 할까봐. 나 자신은 중간에 서브웨이로 쪼개졌는데 이게 쪼개졌는데 복음으로 봉합된 것임에 불구하고 마치 내가 알아서 복음을 가져온 것처럼, 내가 알아서 복음을 관리하고 있는 것처럼 이렇게 착각하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율법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복음은 항상 그쪽을 공격해요. “율법 없는 게 자랑이다. 인간아!” 이런 식으로. 그게 바로 복음이고, 율법 있는 자한테는 “율법 있는 게 자랑이다. 인간아!” 이런 식으로 공격을 하는 겁니다.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인간이 어떻게 구원받고자 하는 것은, 구원받고자 하는 그 자체가 이게 천사의 왕림을 무효로 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알아서 잘 할 것 같으면 외부에서 올 필요가 없잖아요.

누군가가 율법 없는 자에게는 율법 있는 자가 와가지고 닦달내고, 율법 있는 자는 율법 없는 자가 와가지고 “니 아직도 졸업 못했나?” 이런 식으로 닦달 내어서 내가 하늘나라로 가고자 하는 계단을 천국의 계단을 밟아가는 이 모든 시도가 헛방이고 부질없는 짓임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계단으로 올라가려면 쪼개져야 되는데 인간은 본인의 동질성이란 주체의 동질성 때문에 안 쪼개지고 점점 더 단단해지려는 거예요. 쪼개지고 쪼개지면 완전히 해리되고 해체돼요. 고체가 액체 되어 버린다고요. 흘러내려야 돼요. 아무것도 없어야 된다 이 말이죠. 이러한 이치내의 근원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창세기3장에서 구조가 되어있는데, 그 창세기3장 구조를 잠시 말씀드리고 질문하나 던질게요. 어떤 질문을 던지느냐 하면, 일단 창세기3장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을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시고 동쪽으로 쫓아냈지요. 에덴동산 동쪽이라면 동쪽 길을 하나 마련하고 이게 동쪽 길에서 떨어지면 이게 뭐냐, 근본 토지가 되는 겁니다.

이 토지는 말이 토지지, 저주가 열기를 뿜어내는 저주가 쉬지 않고 움직이는 거예요.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우리 말 안 듣듯이 이 땅의 저주는 우리가 잠재울 수가 없어요. 우리말을 안 들어요. 이건 주님의 말을 듣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종의 딸꾹질 심한 사람은 딸꾹질을 멈추라고 한다고 멈추지 않잖아요. 내 마음 따로 자기 몸 따로 놀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이 땅은 땅의 본성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우리가 나무란다고 잠잠해질 땅이 아닙니다.

저주 없는 곳은 이 땅에 없어요. 인간들이 일부러 저주 없는 곳을 만들어내지요. 그게 뭐냐, 지하벙커. 지하벙커나 아니면 한적한 곳에, 부자들이야 신종 코로나 있으니까 미국의 부자들은 외딴섬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에다가 저택을 만들어놓고 드론이 있어가지고 전화해가지고 음식 같은 걸 배달해가지고 그들은 지금 한적한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부자들은. 돈은 많겠다 음식 시켜먹는 거예요. 먹고 즐기는 거죠.

그러나 이 땅에는 어느 곳에 가도 저주 없는 곳이 없어요. 토지가. 제가 질문하는 것은 이겁니다. 에덴동산에서 내보내놓고 여기에 용역인지 모르지만, 경비요원들을 천사를 통해서 경비요원들이 지킬 때, 제가 질문하는 것은 이 사람들이 불칼을 가지고 지키는데 한 자리를 지키는 것이 아니고 두루 돌아요. 두루 돌면서 교대 근무로 돌면서 지키는데 왜 지키느냐 하는 겁니다. 그게 질문입니다. 왜 지키느냐? 음식 먹고 난 뒤에 토해서 올라오면 안 되겠지요. 식도에서는 그걸 막는 장치가 있지요.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막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뭐냐 하면, 이게 기본 구조인데. 천사의 세계와 인간 세계는 뭐가 있느냐 하면 여기에 불 심판이 있는 겁니다. 불 심판이. 아까 스가랴 다시 한 번 봅시다. 스가랴2장 5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그 사면에 불 성곽이 된다고 했지요. 불 성곽. 그러니까 지금 오늘 본문 내용이 이거에요. 본문 내용이 뭐냐 하면, 천사 둘이 와서 천사1, 천사2가 와서 뭘 하느냐 하면 처음에는 척량기사가 와요. 척량기사. 두 번째는 설계도에서 실무자가 오게 됩니다. 건축. 이렇게 만든 것은 요 경비요원들이 만든 불 심판을 지상에다가 심어버리는 역할을 하는데, 심을 수 있는 그 도성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 예루살렘으로 하는 거예요. 예루살렘 또는 다른 말로 하면 시온. 이렇게 계획을 잡았다는 거예요. 여기에.

2장 전체에 보면 다 그렇게 되어있어요. 예루살렘 되어있지요. 그 다음에 10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이라 되어있지요. 시온의 딸아. 천사의 계획은 여기다가 구조를 만드는데, 지상에 있는 자기 백성 속에다가 이 구조, 이 구조적인 요소를 집어넣는 거예요. 그럼 백성들은 사적인 것이 아니고 집단구원이니까 신약에는. 백성들 모은 곳이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걸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거예요. 예루살렘으로.

여러분이 가장 이해하기 가장 쉬운 단어로 제가 표현한다면 이게 뭐냐 하면 주님께서 이 땅에 박아 넣은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겁니다. 성도 자체가. 성도 자체가 율법의 완성되는 요소를 박아 넣음으로서 기준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로 되어 있느냐 하면 천국과 지옥이 중첩된 것이 샌드위치에 요소로서 우리 안에 들어오는 거예요. 심판의 기준이라는 것은 이 사람은 천당 가고, 이 사람은 지옥 간다. 의 기준으로서 자기 백성 만들기에 나선 거예요.

측량을 한다는 말은 숫자 헤아림을 그렇게 헤아리는 거예요. 측량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에 예루살렘을 건설한다는 것은 벽돌 하나, 하나가 사람의 숫자 하나, 하나라는 말이지요. 144,000을 짓기 때문에. 열 두지파 열 둘 이라는 그 헤아림이 있잖아요. 1, 2, 3, 4,...12이 뭐냐 하면 그게 하나의 문을 형성하고 문에 필요한 벽돌, 건물을 형성하는 거예요. 스가랴에다가 이렇게 해서 천국 가고, 이렇게 해서 지옥 간다는 고 중심 되는 기준을 주께서는 박아 넣어버립니다.

그러면 전에 창세기3장에서 중심 되는 기준, 그러니까 생명나무를 보호하기 위해서 생명을 생명답게 보호하기 위해서 저주 받은 인간은 생명나무에 온다, 못 온다? 올 수 없도록 박아 넣은 그 경비요원들의 그 기능을 이제 누가 하느냐 하면, 오늘날 신약 성도들이 그 기능을 하는 거예요. 이래 봐도 용역회사 직원들이에요. 천국의 용역회사 직원들이라고요. 이 기능을 하는 거예요.

기능을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이겁니다. “와 봐야 소용없다.” 불가능성이지요. 구원 불가능성. 구원 불가능성을 마음껏 외치는 겁니다. 본인은 구원 받아놓고 구원 불가능하데. 참, 성도의 팔자가 이런 팔자에요. 본인은 멀쩡하게 구원받아 놓고 인간 구원 받지 못한데요. 어떻게 애를 쓰나 노력해도 구원되지 못한답니다. 스가랴가 얼마나 욕 얻어먹겠어요. 스가랴가.

왜 구원받지 못하느냐 하면, 여기에 구원되려고 불 화염검에 찾아온 사람들이 전부 다 왜 찾아오느냐 하면, 천국가려고 하는 이유가 나한테 필요하기 때문에 그래요. 나한테. 나한테 필요하기 때문에 이것이 구원이 안 되는 거예요. 이 구원이라는 것, 이 천국이 나한테 필요한 천국, 나한테 필요한 구원, 지옥이라는 그 고통을 끝내 피하고 싶어서 내게 유리하다 싶어서 그렇게 해서 성경보고 찬송하고 교회 나오고 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구원이 불가능한 겁니다.

옛날 개그콘서트에 그런 코너가 있었어요. 어떤 뚱뚱한 여자 신입 대학생이 대학 들어오니까 어떤 멋있는 선배가 기타치고 있더란 말이죠. 기타 치는 곡목은 김광석이 불렀던 서른즈음에 그 노래를 부르는데. 여자가 막 이렇게 해가지고 자기에게 오라고 춤도 추고하거든요. 그러나 관심을 안보이니까 땡! 탈락! 하는 거예요. 그 오빠가 놀리듯이 아휴~ 아쉬워라. 아이구~ 아쉽다! 하는 그런 대목이 있거든요. 세상 사람들은 모든 시작을 샌드위치가 아니에요. 그냥 빵 덩어리에요. 그냥. 딱딱한 바게트라. 딱딱한 바게트로 살기 때문에 복음 모른다 해도 땡! 탈락! 해도 아쉽지도 않아요. 그 사람들은.

시편2편3절 잠시 보겠습니다. 개그콘서트 코너까지 하나도 버릴 게 없어요.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여기 웃는다는 말은 앞에 ‘비’자 하나 더 들어가야 돼요. 그냥 웃는 게 아니고 킁~ 콧방귀 뀌는 거예요. 비웃는 거예요. 세상 관원들이 교회 소모임 모이면 벌금이 얼마? 삼백만원. 이렇게 할지라도 성도는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이게 비웃는다.

왜 모이지 말라고 하느냐 하면 모이게 되면 병에 걸리고 병에 걸리면 왜 안 되느냐 죽거든요. 그들은 그들의 일은 안 죽는 게 일이거든요. 안 죽는 게 일이에요. 그러나 생명나무 입장에서 보면 벌써 이미 이 토지에 산다는 자체가 이미 죽어있는 겁니다. 죽어있으면서도 안 죽겠다고 하는 것이 이게 완전히 이건 대 사기꾼에게 사기 걸린 거예요. 이건. 크게 사기 걸린 거예요. 이렇게 보시면 되는 겁니다.

아버지, 어머니 사고로 돌아가시고 자식들은 그 아버지, 어머니가 생명보험에 들은 걸 모르고 그냥 아버지 장례 치렀다 말이죠. 엄마가 보험에 들었다는 것을 모르고 그냥 사는데 어느 날 보험회사에서 와가지고 “아이들아, 나한테 잘 보이면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되면 돈 줄게.” 이렇게 했을 때 애들은 어떤 낯선 아저씨가 와서 돈 준다 하니까 시키는 대로 다하는 거예요. 나중에 알고 보니까 이건 뭘 행함으로서 얻는 게 아니고 이미 주도록 되어있는 거잖아요. 이게 사기에 말려든 거라고요.

인간은 이미 이 저주받은 토지에 사는 인간들은 구원을 받도록 되어있는 게 아닙니다. 구원을 받도록 되어있는 것이 아니고 천사의 기능, 다시 말해서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천국이 있음을 알려주는 그런 기준의 기능자에요. 기준의 기능자지, 집단구원이 그거에요. 집단적으로 시온 또는 예루살렘 시민이 되는 것이지 내가 원하는 내가 살길을 찾아서 주께서 복음주시고 예수님 보내신 게 아니거든요.

그런데 니가 이렇게 하면 구원된다는 것은 지금 그 악마의 사기꾼들이 교회를 통해서 사기치고 있는 겁니다. 장난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도행전에 보면 어떤 사람은, 사도바울이 성령으로 일하니까 어떤 사람은 돈 주고 “얼마면 돼?” “얼마면 되겠어?” 이러고 있다 말이죠. “얼마면 성령 주겠습니까?” 이게 뭐냐 하면 꼭 자기중심이다. 꼭 자기중심이거든요. 그런데 아까 사도행전10장에서 베드로는 뭐냐 하면 본인이 뭐 되고자 하는 것이 아니에요. 오히려 본인은 처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율법을 고소하기 때문에 나는 못 먹겠다. 이건 내 구원받는데 지장됩니다. 라고 하는 거예요. 그 베드로의 고백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인간들의 평소의 고백이에요. 그게.

평소는 하나님을 생각하던, 예수님을 생각하던, 나한테 이익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계속 갖고 있었던 겁니다. 나를 일꾼으로 용역회사 경비사원으로 주께서 나를 고용한다는 생각을 못하고 내 회사를 내가 차리는 거예요. 내가 사장되고. 내가 회장되고, 내가 이사되고. 나를 재벌2세로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계속 자기 생각밖에 안돼요. 자식이 재벌2세 되려면 아버지, 엄마는 재벌 되어야 되거든요. 자기가 재벌2세가 되지 말고 재벌2세하고 시집가면 되지. 인턴으로 취직해가지고 계단에 커피 들고 가다가 우연히 마주쳐가지고 재벌2세하고 결혼하면 되잖아요.

성도가 보기에는 이 땅에는 저주뿐이에요. 이 땅에서 내가 사는 방법은 땡! 탈락! 이에요. 내가 잘 살 수 있고 구원되는 어떤 여지도 이 땅에 없습니다. 그래서 천사가 와서 심어줘야 되는 거예요. 이 땅에는 없으니까. 이 땅에서 율법 지켜서 구원받는 게 아니에요. 목사가 시키는 대로 한다고 구원받는 게 아니고 없어요. 없고, 위에서 서브웨이 샌드위치처럼 중간에 알갱이를 속에 심어줘야 돼요.

심어주게 되면 나는 두 조각나지요. 나의 주체는 갈라지면서 주도권은 나에게서 날아가 버렸어요. 내가 앞으로 이렇게 하겠다, 저렇게 하겠다. 하는 자체가 없어요. 왜냐, 베드로는 율법에 의하면 율법을 위반했거든요. 베드로가. 왜? 먹지 말라는 율법을 본인이 어겼으니까. 그런데 베드로는 이야기할거예요. 내가 먹으려고 한 게 아니고 주님이 시켰다! 시켰다! 이리 되는 거예요. 바로 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주께서 시켜버리면 내가 따로 어겼다. 안 어겼다. 를 말을 입을 다물으라 이 말이지요.

나는 율법을 어겼습니다. 안 어겼습니다. 율법을 어겼다. 안 어겼다. 말을 한다는 것은 아직도 내가 따로 살고 싶은 거예요. 개인 구원에 대해서 내가 성공하고 싶은 거예요. 탈락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에요. 그게 깨져야지. 그게 깨져야 돼요. 생명나무 가는 길을 막았다. 불로서 막았다. 그래서 시온산에 위가 화산이에요. 불붙은 산이에요. 인간들은 들어오지 못하도록. 그런데 주께서는 모세를 시내산까지 불붙는 화산 위로 올라가지요. 올라가면 모세가 경험한 것은 뭐냐 하면 저는 이걸 제목으로 할까. 로드킬.

이쪽 숲과 도로 새로 났고요, 이쪽 숲에서 고라니 한 마리 건너오다가 아무것도 없다고 여겼는데 건너오다가 차에 완전히 작살나서 온 몸이 찢어지지요. 찢어지고 난 뒤에 시체를 이쪽 맞은 편 숲에다가 툭 던져 놓으면 이게 바로 성도의 팔자 아닙니까. 아무도 없는데 주님한테 로드킬 당했어요. 나는 고라니다. 멀쩡한 고라니가 죽은 고라니 됐는데 이쪽에서는 바로 생명마저 이겨내는 부활의 힘이 작용하거든요. 죽었던 고라니가 이쪽에서는 살아있고 이쪽에서는 죽어있고. 그 사이에 십자가라는 로드킬이 일어난 거예요. 십자가 로드킬이 있는 거예요.

건널 때는 만만하게 봤지요. 교회 와서 찬송 부르고, 삼위일체 배우고, 제자훈련하면 되는 줄 알았지요. 건너오다가 진짜 주께서는 “먹어라!” 하면, “저는 그거 못합니다. 나 성경 좀 압니다. 그걸 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까라 하면 까라.” 그게 완전히 나보고 옛날의 나. 단단히 뭉쳐진 나. 그걸 해체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었습니다. 못난 내 안에 잘난 천사의 업무가 주어지는 거예요.

그런 그게 천사보다 더 위대한 게 못났음에도 불구하고 영생을 얻는 표준모델이 되기 때문에 위대한 거예요. 죄인으로 불구하고 의인만 간다는 천국에 들어가니까 천사들이 부러워하는 거예요.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보면 천사가 나타났을 때 사도요한이 절하니까 천사가 거부하는 거예요. “왜 그러십니까? 오히려 당신이 더 부럽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천사의 몸으로 오신 게 아니에요. 하나님은 죄 있는 육신의 몸으로 왔다는 말이 무슨 뜻이에요? 이게 하나님의 계획안에 포함되어있는 거예요. “너희 죄인 되기 싫지. 내가 죄인 될게. 내가. 너희들이 싫어하는 죄인 될게. 너희 지옥가기 싫지. 내가 갈게. 내가 지옥 갈게. 같이 죽자! 그러면 내 있는 곳에 너희도 함께 있을 것이다.”

이게 바로 스가랴에 나오는 새롭게 구성된 시온, 예루살렘도성이 그렇게 마련된 겁니다. 스가랴는 이제 죽었어요. 천사가 와서. 스가랴는 이제 할 일은 고난 받는 것 밖에 없어요. 실컷 욕 얻어먹는 것 밖에 없어요. 왜? 율법을 고수하는. 다른 사람은 율법을 지켜야 된다. 율법은 저만큼 있으니까 우리는 조금씩 계단 밟듯이 조금씩, 조금씩, 심화학습해가지고 더 정교하게 지켜야 된다. 하는데 스가랴는 벌써 끝났어요. 다 끝나버렸다.

다른 사람은 뭐냐, 토끼에요. 토끼. 토끼인데 거북이는 이미 태극기 벌써 다 뽑아버렸어요. 오늘 제목을 토끼와 거북이할까. 로드킬이 더 멋있다. 이미 도달해버렸어요. 욕본다. 야들아! 니하나 몸 건지기 위해서 니가 벌벌 떠는 거 보니까 욕본다. 나는 그런 식이 아니고 이미 구원 받아버렸는데. 주께서는 이런 방법이 있다는 것은 이건 예수님이 오시게 되기 때문에 그 방법이 구약의 스가랴로서 미리 그게 예시가 된 거예요.

예수님이 죄된 육신의 몸으로 오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에게 이런 현상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스가랴 니 이리와! 심판받아. 그걸로 끝나는 거예요. 천사가 와서 스가랴를 쪼개어서 중간에 박아 넣었다는 말은 바로 스가랴의 하나의 그 경우가 장차 올 모든 예루살렘의 백성들의 경우를 먼저 앞서 보여주는 겁니다. 여러분이 모세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시지요? 모세라는 말이 구원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의미를. 어디로부터 건저 냄이거든요. 어디서부터냐 하면 물에서부터 건저 냈다는 거예요. 물.

그러니 모세가 물에 들어간 이유가 그 당시의 애굽의 바로왕이 지시를 한 거예요. 소그룹 모이면 삼백만원 벌금. 이렇게 지시를 해서. 여자는 살려두되 남자는 다 죽여라. 그 지시가 먼저 있었고 그 지시가 없었더라면 자기 엄마, 아빠 품에서 얼마든지 재롱부리면서 살 수 있어요. 그러니 평범하지 않고 핍박을 받는 겁니다. 그게 아까 봤지만 다시 말씀드리면 세상의 모든 어떤 세상에 저주 받은 세상, 땅의 토지 저주가 어떤 힘을 구축하는데 그 힘이 뭐냐 하면 기름 부은 자의 관계를 끊고자 하는 식으로 그들은 어떤 활동성을 드러내요. 어떤 속성을 드러낸다고요. 속성을.

나라가 중요하냐, 교회가 중요하냐, 교회 소그룹 모임이 중요하냐, 나라가 중요하냐, 나라는 뭐냐 하면, 저주 받은 자의 성곽이거든요. 성곽. 스가랴식으로 하면. 하나의 캐슬이라 말이죠. 집합체 또는 공동체. 국가 공동체를 말합니다. 국가 공동체에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공통점을 뽑아내야 돼요. 공통점. 왜 이들은 하나로 묶여서 사는 걸 그리 좋아하느냐의 공통점. 그러면 새로운 시온 또는 예루살렘. 신약의 교회는. 무슨 공통점이 있느냐, 이 두 공통점이 첨예하게 대립되어야 되지요. 스가랴에 의하면.

이쪽의 공동체는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혈통에서 나오고 혈육에서 나왔어요. 요번 수련회에서 혈육 강조 많이 할 겁니다. 혈육의 실체를 밝힐 거예요. 혈육의 실체를. 미리하면 안되는데. 룻은 초반부터 혈육이 끊어져요. 두 개 끊어집니다. 한 개 끊어지고, 두 개 끊어지고. 이 두 개를 여자가 어떻게 점프해서 잇느냐, 그 과정이 룻의 이야기에요. 혈육이 끊어져요. 혈육은 혈육을 단단히 묶기 위해서 그들은 도성이라는 도시를 만드는 겁니다.

여기서 뭐냐 하면 법이 주어지는데 법에 순응해요. 법에 순응하는데, 이 저주받은, 생명나무가 없음에 따라서 이미 죽음이잖아요. 생명나무가 없는 곳이기 때문에 죽음이에요. 죽음인데 나름대로 죽음을 거부하고 살았다는 흉내를 내기 위해서 그들은 안 죽으려고 애를 쓰는 겁니다. 그러니 법이라 하는 것은 법안에 내용이 뭐냐 하면 “이렇게 하시면 안 죽습니다. 우리 가운데 공동체 가운데 들 죽습니다. 소규모 모임을 모이지 않으면 늙어죽겠지만 코로나 때문에 죽지는 않습니다.”라는 것에 대해서 공통점이 뭐냐, 전부 다 이구동성으로 동의했다는 사실이에요. 동의했다.

그러니까 나라에 어떤 법이 딱 오게 되면 개인은, 국민은 그걸 평가하는데 뭐냐, 저 법이 나한테 생존에 유리할 것인가, 불리할 것인가, 유리하면 따라주고, 불리하면 안 따라주고 이리 되는 겁니다. 나라의 법을 거부해도 거부하는 제스처가 수상해. 음흉해. 사적인 자기 하나 목숨 건지겠다는 거예요. 만약에 나라의 법이 더 심하게 하면 강남에 돈 있는 사람은, 홍콩 같은 경우에 법이 한 번 강화하게 되면 어디로 튀려고 합니까? 돈 있는 사람은 어디로 갑니까? 영국으로, 대만으로, 미국으로 튈 생각하는 거예요. 돈 있는 사람이에요. 따라서 유동자산이 있는 사람이에요. 그러나 홍콩에 집 한 채밖에 없는 사람은 그거 팔면 다 날아가 못 산다니까요. 죽으나 사나 그 동네에 살아야 돼요. 그러나 여윳돈이 있는, 유동자산이 있는 사람은 해외 펀드나 해외은행에 주식을 사논 사람은 이거 포기해도 영국가 살 수 있는 겁니다.

결국 인간은 이 나라, 이 세상 나라라는 것은 개인주의가 뭘 모였다? 목적이 뭐다? 더 살기 위해서. 그거뿐이에요. 그거뿐입니다. 크게는 국가지만, 작게는 가정도 마찬가지지요. 돈 안 벌어주는데 왜 살아요. 돈 안 벌어주는데 왜 삽니까. 살기 위해서. 로드킬 당하려고 사는 게 아닙니다. 로드킬은 하늘의 작품이지요. 내 작품이 아니에요. 내가 불가능해요. 내가 불가능하거든요. 불가능하기 때문에 우리가 불가능한 그 방법을 주께서는 우리 안에다가 심어버린 거예요.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만 이야기할 수 있을 뿐이에요. 구원된 사람은. 다른 얘기할 수가 없어요.

“그럼 니 생각은 뭐냐?” “나는 살고 싶어.” “그런데 왜 안 해?” “내 안에 불가능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까.” 나는 자꾸 가능성을 시도해요. 가능성. 어떻게 하면 살 궁리가 있는가, 어떻게 하면 돈 벌 궁리가 있는가. 자꾸 생각한다고요. 틈만 나면. 신문 길가에 파는 거 해가지고 그저 뭐 적당한 거 적게 일하고 돈은 좀 되고, 수시로 내놓을 수 있는 거 찾고 있고. 그것만 찾는데. 이건 나의 가능성은 두 빵조각처럼 계속해서 살아있는 거예요. 우리는 천사가 아니에요. 죄인이에요. 죄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안에 있는 알갱이가 빛이 나는 거예요. 이게 신약에 오게 되면 나는 세리와 창기를 구원하겠다는 그 구조하고 딱 맞아떨어져요. 강도. 별 볼일 없지. 바로 인간 아니지. 천당 간다! 바리새인보다 먼저 가. 바리새인들은 이게 찌그러지지 않았어요. 아주 단단해요.

그 어떤 사람이 포항에 가가지고 포항 중앙동에 가가지고 해초해물 칼국수를 시켜가지고 먹어봤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사람이 백종원입니다. 골목 상품 살린다고 가봤거든요. 여러 가지 해물 들어갔는데 아무리 먹어도 해물 맛이 안나요. 왜냐하면 이 사람이 해초 해물 칼국수를 하려면 해물도 냉동해물 말고 살아있는 거 그 때 그 때 해야 되고 해초 칼국수도 시중의 시제품 사지 말고 지가 해초로 해서 밀가루 넣어서 해야 되는데 아무리 봐도 해초 해물 맛이 나지를 않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께서 성도라는 것은 뭐냐 하면 이 불가능의 맛이 나야 돼요. 주께서 우리 성도를 가지고 할 때 불가능의 맛이, 인간은 적응 못하지요. 불가능이지요. 왜냐하면 자기는 살고 싶은데 주님께서는 죽게 만들었으니까.

그냥 사는 것. 나만 사는 것. 이것만 나와야 되는데 이상하게 뭐가 나오느냐 하면 분명히 나는 내 성질대로 성깔대로 내 이기주의 내 돈만 챙기는데 이상하게 내가 관리할 수 없는 다른 맛이 나는 거예요. “천국과 지옥은 내가 이렇게 애쓴다고 가는 게 아니야. 인간아!” 라고 그 다른 천국의 맛이 우러날 때 그거 맛 집입니다. 그게 맛 집이에요. 더 쉽게 말씀드릴까요. 어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 사람이 골목시장에 나오는데. 그 사람이 20대는 가수한 사람이고, 이제는 뭐하다가 뭐하다가 망해가지고 이제 식당 차린 거예요. 그 모습을 보면서 여러분들은 뭘 느낍니까? 이상하게 일반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줘요.

아침에 일어나서 식당 와가지고 정리하고 점심식사시간에 한 번 바쁘고 그 다음에 오후에 런치타임 쉬고 커피 한잔 해가지고 먹고 그게 사람 사는 거지 거기서 뭐 이상한 걸 발견하겠습니까. 그러나 성도는 이상한 걸 발견하는 빠졌다는 것을 발견해야 돼요. 그게 뭐냐 하면 천국과 지옥의 맛이 안 나요. 그 일상 삶에서. 안 믿는 남편들 혹시 있으면 안 믿는 남편들 보세요. 일상을 보세요.

천국은 이런 곳이고, 지옥은 이런 곳이라는 맛이 우러나지를 않아요. 그냥 일상에요. 시작도 내 편한대로 끝까지 내 편한대로. 그저 우리 혈육적인 우리 가정. 나아가서는 우리나라. 이런 것만 생각해요. 하여튼 교인들은 지만 생각해가지고 모이지 말래도 꼭 모이더라. 이런 이야기.

그래서 그게 뭐냐 하면 성경은 이렇게 이야기해요. 이미 천국 가기 전에 천국의 모습을 보여야 그게 성도라 하는 겁니다. 이게 스가랴에요. 스가랴 안 죽었어요. 살아있으면서 완성의 모습. 의가 완성된 천국의 모습을 스가랴에 몸을 통해서 이동하면서 움직이니까 스가랴는 기준이 되는 겁니다. 그 당시에 메시아가 되는 거죠. 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으니까.

오늘날 성도가 이렇게 파종 또는 산종. 산종이라 하는 것은 흩어져서 씨앗을 뿌리는 거예요. 온 각처에 성도가 있는 이유는 그 지점에서 이미 미리 온 심판에 기준 노릇을 하는 거예요. 용역회사. 두루 두루 도는 화염검의 경비요원으로서 그 자리에 있게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땅에 마지막 때 선지자지요. 성도가. 선지자인 거예요. 우리가 알아요. 그들과 똑같은 걸 알아요. 알아요.

나도 죽기 싫고 돈 좋아하는 걸 다 알지만, 다른 요소가 추가적인 요소가 있다고요. 추가적인 요소가. 그러면 이렇게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눈치채가지고 비웃지요. 비웃으면 그게 바로 시편2편3절을 우리가 본의 아니게 실천한 게 되고 순종한 게 되고, 순종 안 했는데 순종하게 만들었고, 그게 주님의 말씀이 우선되는 것. 드러내게 하는 거죠. 그럼 그 말씀이 뭐냐, 요거하고 첫째 시간 마치겠습니다.

요것도 제목으로 괜찮은데요. 주의 말씀과 우리의 육신, 죄 있는 육신과 결합하는 이유가 뭐냐 이거에요. 주님의 부지런함. 쉬지 않고 일해요. 지금도. 우리만 살뜰히 놀고 있지, 주님은 굉장히 부지런한 거예요. 식당 주인이 자기 가게 운영할 때 부지런해보이지요. 주님은 더 부지런해요. 우리는 잠잘 때 주님은 주무시지도 않고 졸지도 아니하십니다.

갈 사람과 안 갈 사람을 갈라내는 이 작업을 어느 지점, 어느 한 순간도 멈추지를 않았어요. 그러면 그 작업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자신이 거주지가 하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이 되게 하는 겁니다. 교회만 성전이 아니에요. 우리의 거주지가 왜 그러느냐, 이 거주지에서 우리는 육적인 알약을 먹거든요. 그런데 그 거주지에서 우리는 주님이여, 좀 주님 찾아오지 마시고 나 그냥 오늘 좀 쉴래요. 성경도 안보고, 기도도 안하고 나 오늘 좀 쉴랍니다. 하는 그 순간에도 주께서는 부지런히 우리로 하여금 낯선 영성을 떠오르게 만들어요. 떠오르게 만들어요.

다시 말해서 우리로 하여금 일상의 생활을 그냥 하지 않도록 부지런히 우리를 가지고 우리의 요원 역할을 하도록 부추깁니다. 10분 쉽시다.


안양20200709b슥2장5절(로드킬)-이 근호 목사

인간은 자기 거주지가 곧 성전이라고 이야기하는데 두 가지 의미를 거기다가 담겨있어요. 뭐냐 하면 나의 절대자 됨을 나의 거주지에서 확인할 수 있어요. 나의 거주지에서. 내가 나의 제단이 되는 겁니다. 나를 섬기는 거예요. 인간은. 이것이 일상의 종교화. 일상은 뭔가 종교라는 말은 뭔가 하면 항상 믿음으로 움직인다는 거예요. 믿음으로 움직인다. 어린애부터 노인네까지 한시도 믿지 않고 움직이는 그게 없어요. 전부 다 믿어요. 뭘 믿느냐 하면, 나를 믿어요. 나를 믿으니까 믿음의 대상이 나가 되고 믿음의 주인공도 내가 되고.

내가 된 것을 잘 확연하게 보여주는 것이 나만의 거주지가 돼요. 또는 나만의 공간. 내 방. 그 방에 꾸며 놓은 것은 뭐냐, 나를 위한 제단 꾸미기가 되는 겁니다. 나의 지성소가 되지요. 나의 지성소. 바로 나의 지성소가 되기 때문에 여기서 상상되고 있는 모든 생각되는 것은 그것은 바로 우상이 됩니다. 우상이란 말은 언약이 없는 신을 우상이라 합니다. 언약이 없는 신. 언약이 없는 신이 우상이 되는 거예요. 언약이라 하는 것은 이건 특수한 자에게 특수하게 주어지기 때문에 다른 사람은 언약이 없는 상태가 되잖아요.

언약이 없어도 나는 하나님을 믿겠다. 그게 우상입니다. 그러면 ‘언약이 오게 되면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에다가 더 추가하면 되겠네.’ 하고 생각했던 것이 그게 안일하게 생각한 자가 누구냐 하면 야곱이었어요. 야곱은 아버지로부터 하나님의 축복이 약속이 왔다 하니까 아버지의 약속을 아들이니까 형보다 내가 따내겠다고 생각한 거예요. 언약과의 만남에 자신의 열성과 행함과 속임수가 가미가 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야곱이. 그게 야곱이에요.

그런데 야곱이 로드킬 당해야 이게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야곱이 죽어야 돼요. 죽기 전에 먼저 야곱부터 시작해야 돼요. 시작을 야곱부터 시작해야 돼요. 그것 때문에 이 스가랴가 언제 주어졌느냐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스라엘이 나라가 없을 때 주어지는 거예요. 나라도 없고, 성전도 없고, 진작 개코도 하나님과 접촉되는 것이 완전히 차단된 것, 불가능이죠. 불연속성이지요. 하늘과 땅이 완전히 이스라엘에서 완전히 끊어졌을 때 그게 기회가 되는 거예요.

주의 언약이 어떻게 부지런 떨면서 일하시는가, 우리가 놀면 신앙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신앙이 없는 거잖아요. 내가 아무것도 안하면 신앙이 안 된다고 하는 자체가 줄을 잘못서고 있는 거예요. 줄을 잘못 받고 있는 거예요. 헛것을 지금 잡고 있고, 거기에 우리가 사기를 당한 겁니다. 노력해야 뭐라도 건진다고 여기는 그 주장에 잘못 건드린 거예요. 없는 거예요. 죄를 버리고 선을 택하는 게. 이게 실수라는 생각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사도행전 10장에 먹어라. 주께서 나를 테스트하는구나! 나의 이 때가 나의 얼마나 율법대로 사는 걸 보여 줄 절호의 찬스다. “안 먹습니다. 주님!” “사양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놀고 있네. 니가 지금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네. 헌집 다오. 새집 줄게. 두껍아! 두껍아! 이 두껍이 같은 인간아! 헌집 줘. 새집 줄게.” 그놈의 헌집에다가 우리의 모든 일심 자존심을 다 갖다가 거기다가 투자를 했어요. 내 일생의 운명을 다 걸어놔 가지고 거기다 다 투자한 거예요. 그러니까 도박장에서 모든 코인을 거기다가 다 부은 거예요. 내 헌집에다가. 다 실어 넣었어요. 이거 깨지면 나 자살한다. 이거 까지.

그렇게 집어넣었잖아요. 주님께서 그걸 몽땅 달래요. 그게 바로 야곱이 갔던 과정 속에 보여주지요. “야곱아! 니는 나한테 다 깨어져야 돼!” 깨어지고 난 뒤에 주어진 것은 뭐냐 하면 내가 하나님께 대적이 된다. 적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적한테는 일만의 자비나 그런 거 없지요. 적한테는 하나님의 공격만 있을 뿐이지 적한테 어떠한 배려도 없음을 알잖아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적을, 나를 적을 만드신 그것이 바로 야곱은 뭐로 이해했느냐 하면 바로 언약으로 이해한 거예요. 언약의 절차로 이해한 거예요.

주님께서 친하게 지내는 것이 절차가 아니고 친하게 지내는 척했지요. 사실은 흉내 내기었고 실제로는 하나님을 이용해먹겠다는 야심이 들어있었던 것을 주께서는 놀랍게도 그걸 들추어내게 하셨어요. 나보다 더 센 자를 내가 이김으로서 비로소 나의 육의 한계를 들추어낸 거예요. 일부러 하나님은 야곱한테 짐으로 말미암아 “기껏 니가 노렸던 것이 이거였지? 이게 너의 다였어. 그래 져줄게. 니 하나님 이겼다고 이름 붙여줄게.” 하나님을 이겼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적대적 관계에 나는 살고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겁니다.

적이 아니면 이기고 지고 라는 게 없잖아요. 하나님을 이겼다는 자체가 나는 내가 있는 그 위치와 위상이 이미 생명이 없는 생명나무가 없는 곳에서 나는 거기서 아등바등 살아보려고 그만큼 애를 썼다는 뜻이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저주받는 인간의 그 대표자로서 언약을 통해서 나는 대표자로서 거기서 들춰진 거죠. “너, 나와! 이 저주 받아야 될 인간 모습 그대로 니가 보이게 되어있어.” 그런 야곱에게 주님께서 그런 한 인간의 한계를 보여준 야곱에게 주께서는 야곱을 다시 살려주잖아요. 브니엘이잖아요. 나는 죽었는데 살았다. 고 지명이 브니엘이에요. 브니엘이 뭐냐 하면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그러면 이 브니엘은 뭐가 되느냐 하면, 브니엘은 야곱의 제단이 되는 겁니다. 야곱의 거주지가 되는 거예요. 거주지 있고, 야곱이 사는 것이 아니고 야곱이 가는 곳에 야곱의 거주지가 같이 보조적으로 따라 가는 겁니다. 하늘나라 있고, 예수님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예수님 가는 곳이 하늘나라에요. 예수님의 몸에서 하늘나라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겁니다. 늘 숨어있는 모습으로.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이름을 이스라엘이라 해가지고 이스라엘 이름으로 자기한테 그걸 자기 영역으로 받아줘 버리지요.

그러면 이것은 뭐냐, 하나님은 바로 하나님의 사자 이름의 희생을 주께서 받아준다. 그런데 그 희생은 반드시 희생되어야 될 대상자가 있을 게 아닙니까. 그게 바로 하나님이 지정한 선택한 언약의 백성, 이름이 야곱이라고 하는 또는 다른 말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의 백성을 다시 동반시켜서 하나님께서는 받아주는 거예요.

야곱을 받아준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받아주는 것이고, 이스라엘을 받아준다는 것은 없는 이스라엘을 있게 하게 하신 하나님 자신의 피, 희생의 피를 하나님이 다시 도로 거둬들이는 거예요. 하나님으로 시작한 일을 하나님이 도로 거둬들이면서 거기서 딸려 들어온 것이 뭐냐 하면 바로 언약을 심어놓은, 언약을 새겨놓을 대상자가 뽑혀 나왔는데 그것이 바로 하늘나라의 경비요원들. 하나님의 백성들이지요. 그걸 시온의 딸이라고 합니다.

스가랴2장 10절에 보게 되면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와서 네 가운데에 머물 것임이라”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라. 라고 되어있지요. 왜 시온의 아들이 아니고 딸이냐, 라고 할 수 있는데. 이 논리는 좀 복잡해요. 복잡한데, 이렇게 생각하면 간단해요. 시온이라 하는 것은 시편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시온은 하늘나라로 보시면 됩니다. 이걸 왜 하늘나라로 보느냐 하면 다윗에게 주신 언약. 다윗언약에 결정체, 완성체로서 시온이 라는 것이 성립됩니다. 다윗언약이 성취되지 않으면 시온은 안돼요. 시온은 되지를 않습니다. 만약에 다윗언약을 다윗의 후손 혈통에 있는 이스라엘이 지키려고 한다면 이 시온은 어떤 시온이냐 하면 파괴될 수 있는 시온. 이 땅에서 파괴된다는 말은 이 땅에 있는 불신자나 시온이나 동일한 성질을 갖고 있다. 공동체를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이 섞어 넣어버린 거예요. 갈아서. 이쪽에 없게, 하늘나라에 없게, 땅에 그냥 같은 편이야! 하고 집어넣는 겁니다.

이 시온이 천장이 구멍 뚫릴 수 있겠어요? 없겠어요? 진짜 시온은 구멍 뚫릴 수 없잖아요. 그런데 인간들이 시온을 고대하고, 기대하고, 기획하고, 만든다면 이건 구멍 뚫리는 거예요. 시온이 구멍 뚫린 영화가 있는데 그게 무슨 영화냐 하면 <매트릭스>에요. 3번째 시온이 구멍 뚫립니다. 매트릭스 영화 아십니까. 컴퓨터 정보가 실체가 되어서 인간세계를 지배하는 세계. 인공지능 자체가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가지고 인공지능을 만든 인간을 지배하는 영화 매트릭스에요. 매트릭스 평한 것만 해도 수천 개 나와 있어요. 그만큼 어려워요. 매트릭스 나온 영화는 삼위일체 용어들이 나와요. 주인공은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고. 삼위일체라는 이름도 있고. 성부, 성자, 성령의 활동을 이렇게 이야기한 겁니다.

야곱이 있다면 그 야곱을 천사가 와서 관통했다고 보면 돼요. 하나님께서 얍복강에 야곱이 있으면 그냥 쉬도록 놔두면 되는데 괜히 정체를 감추고 찾아온 거죠. 빛 조명을 저 뒤쪽으로 하고 어떤 사람이 걸어오는데 조명 시설이 그 사람 앞에 있는 게 아니고 뒤쪽에 있다면 그 등짝은 환하게 밝겠지요. 조명이 비춰서. 밝은 만큼 상대적으로 앞에 누군지가 정체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시커멓게 되어버려요. 드라마나 영화 촬영 기법이 그런 게 있지요.

뭔가 다가오는데 가까이와도 그 사람이 누군지 모르겠어. 분명히 움직이고 나한테 접근한다는 건 아는데 모르는 거예요. 그러니 하나님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그렇게 오게 한 거예요. 접근하여 온 거예요. 그러니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려운 말로 야곱은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안다고 생각했잖아요. 안다고 생각하는데 미지의 타자가 등장하면 타인이 등장하게 되면 자신의 됨을 그 타자에게 모든 걸 퍼붓게 되어있어요. 그러면 그 사람이 나한테 당한 그 모습은 나의 숨겨진 나의 내재적인 모습이 타인에게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계기가 되는 겁니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주께서 이웃을 만나게 하는 거예요. 사람을 만나게 하는 거예요. 혼자 있을 때는 다 본인이 천사들이에요. 행동도 참 조심히 하는데. 그런데 우연히 길을 간다든지 또는 직장에서나 또는 거리에서나 모임에서나 누구하나 말 잘못했다. 그러면 막 그 사람한테 퍼붓지요. 막 퍼 부우면 그 사람이 당황하기도 하고 막 반박 일어나겠지요. 그러면 그 사람 등짝 뒤에 조명이 비치고 그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지을 때 그 표정을 유발한 주인공이 누굽니까? 나잖아요. 내가 퍼부우니까 그 사람은 얼굴이 일구러지면서 반항하고 반발했잖아요. 그 사람의 변화가 나로 인한 변화다 말이죠. 그러면 내 요소가 그 사람한테 결합되어서 등장하는 거예요.

장사하시는 분 잘 알잖아요. 아이구, 이쁘십니다. 하면 갑자기 얼굴이 환해져가지고 한 개 살 거 두 개 사잖아요. 그게 나로 인한 요소라니까요. 내가 유발자에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계기로서 계속해서 누구를 만나고 경우를 당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지금 아브라함 경우도 그렇고, 야곱도 그렇고요. 누구를 만나느냐, 천사를 만난다고요. 천사는 범주 외에요. 천사는 내가 다룰 수 있는 범주 밖이라 말이지요. 나의 영역에 내가 있다면 다른 사람 만나서 구축된 자아성이 이 영역 바깥에 어떤 인물, 조명만 뒤에서 비추지만 얼굴은 시커멓게 누군지 모릅니다. 나를 달려오지요.

이렇게 올 때, 만약에 이 분이 나에게 무슨 언급을 한다. 언급이란 말 알지요. 말을 어떻게 주는 것. 언급을 하게 되면 그것이 바로 나에요. 이것은 하나님이 보시는 나 모습입니다. 신약에서는 이 분이 뭘 앞장세우느냐 하면 십자가를 앞장세우고 오지요. 십자가를 앞장세워서.

십자가에서 앞장세우게 되면 여기에 십자가는 두 종류가 등장해요. 옆에 십자가 또 있어요. 어느 십자가인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이쪽에 강도1, 강도2가 있다면 이쪽의 강도1은 예수님에 의해서 내가 알던 강도의 내가 아니라 주님의 사랑받기로 되어있는 주님을 증거 하기로 되어있는 주님의 낙원을 함께 공유해야 될 대상으로 본다는 사실을 본인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알아버렸습니다.

이것은 내가 평소에 내가 알고 있는 걸 믿는 믿음이 아니고 내가 아는 믿음을 박살내면서 차고 들어온 낯선 믿음이 나한테 꽂혀버린 거예요. 그래서 뻔뻔스럽게도 강도인 주제에 뭐라고 합니까? 주님 나라에 들어가게 해 달라. 아이~ 참, 뻔뻔스러움 100점. 옆에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여전히 믿음이 있는데 뭘 믿느냐 하면 내가 이 땅에서 천사 만나기 전에 다시 말해서 초월자 만나기 전에 내가 그렇고 그런 인간들을 만나면서 구축한 그 믿음의 소유자. 나름대로 신앙인이지요. 나를 믿는 신앙인으로서 강력합니다.

뭐라고 요구하느냐 하면 “당신이 정말 초월자라면 당장 나를 이 십자가에서 풀어주면 믿어줄게.” 이리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불신자의 강도의 특징은 뭐냐 하면 내가 믿는 내용과 내가 그리는 천국과 끊어지지 않고 연결되어있다고 착각하고 있는 겁니다. 참, 이거 보면 오늘날 대부분의 교인들이 지금 지옥 간다는 것을 티를 팍팍 내고 있어요.

내가 스스로 부인하지 못하고 나는 잘난 존재로 여겼던 그 잘난 존재에 입각해서 연속적인 이미지가 뭐냐 하면 천국이지요. 내가 천국 안가면 누가 천국 가. 이리 되는 거예요. 계속 가능성, 가능성으로 유지되는 겁니다. 왜 그렇게 쓰느냐 하면 나도 살고 너도 살고가 아니고, 나도 살고 나도 또 살고. 말로는 나도 좋고 하나님도 좋잖아요. 이렇게 하잖아요. 자기를 안 좋게 여기지 않으려고 하는 거예요. 나도 좋고, 내가 예수님 믿으면 예수님도 좋고 나도 좋지요. 이런 식으로 교회 다니는 거예요. 좋은 나는 항상 좋아져야 된다고 지금 우기고 있는 겁니다. 그걸 믿는 거예요. 그게 바로 그 사람 거주지가 자기의 종교를 섬기는 제단이 되는 겁니다. 지성소가 되는 겁니다. 믿음이 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걸 불타게 만들었어요. 성전을 없애버렸습니다. 누가 없앴느냐, 바벨론이 없앤 게 아닙니다. 앗수르가 없앤 게 아니고 하나님이 자기 집을 방화한 거예요. 방화범이 본인의 집을 본인을 불살라버렸어요. 그리고 난 뒤에 불 탄 자국에서 나온 게 뭐냐, 시온입니다. 시온. 불타지 않으면 나오지 않는 것이 시온이고, 천사가 말하는 예루살렘이었어요. 그래서 불탔기 때문에 측량을 다시 한 거예요. 측량을.

에스겔에 보면 성전 측량 나오지요. 그걸 다시 한 이유가 성전이 없기 때문이에요. 없는 이유는 이스라엘 자기 백성이 언약을 위반했기 때문에 인간에 의해서 위반당할 언약은 더는 내가 제공하지 않는다. 내가 제공하는 것은 인간이 아무리 닦달내고 협박, 공갈치고, 무순다 할지라도 부서지지 않고 영원한 성전. 영원한 제단은 내가 장차올 메시아와 더불어서 새로 주어지는 거예요. 메시아와 더불어서.

그러니까 다윗언약은 다윗이 지켜야 되는데 못 지켰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망했고요. 새로 올 성전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는데 다윗의 자손인데, 다윗의 자손으로 와서 성전을 세울 때, 이 다윗의 혈통이나 노선은 이거 이야기할 때 항상 내가 철도선을 이야기해요. 철로가 죽 있는데, 사람들은 이 기차를 타고 가면서 앞이 막혔고 지옥으로 통한다는 사실을 봐도 안 보여요.

그래서 어떻게 되느냐 하면 마태복음1장 족보에 보면 족보에서 다른 족보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족보에서 다른 족보로. 이게 마태복음1장의 족보거든요. 이방여인을 통해서, 이방여인을 통해서라는 것은 남편이 누구냐 하면 이방인이라는 뜻이에요. 남편이 이방인이에요. 이방여인의 남편인데. 남자있고, 여자 있는 순서가 아니고. 지금 시온의 딸 설명합니다.

이 지상에서는 여자로만 작용해요. 남편은 어디 있느냐, 하늘나라에 계셔요. 숨어있어요. 그래서 시온의 딸이에요. 시온이 생산한 딸. 오직 딸로만 이 세상에 등장하고 여자로만 등장하지 남자로서는 없다는 겁니다. 남자 되던 여자 되던 구원받은 사람은 여성. 여성화에요. 남편은 하늘에 있으니까. 그러니까 따라갈 때 이건 어디 가느냐, 아내가 어디 가야 되겠어요? 남편 따라 가야지요. 남편 있는 곳에 가야지요.

그러니까 남편이 먼저 하늘나라에 가있고, 하나님 우편에 가있고, 여자는 여보! 하면서 여보 하던지 아버지 하던지 간에 남편 있는 곳으로 가야지요. 이게 성령의 철로 깔려가지고 올라가는 겁니다. 올라가면서 이 땅의 것과 이 사이에 얼마나 격차가 많은가를 생생하게 증거 하는 거예요. 격차가 벌어졌다. 가능성과 불가능성은 절대로 이게 화합되지 않고 섞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 언약의 원칙은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지요. 아무리 이스마엘이 착하고 이쁘게 생겨도 주께서는 땡! 탈락!이에요. 혈에서 나왔다는 이유 때문에 그냥 땡! 탈락이에요. 어떤 사람이 이삭이라는 말은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이스마엘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스마엘 이라는 빵을 한 조각 있는 빵을 두 조각 내 가지고 이삭이 하늘 약속이 없어도 여기에 집어넣어서 샌드위치 만드는 거예요. 이 속 알맹이가 주도권을 쥐고요.

그래서 성도라 하는 것은 죽어서 천당 가는 게 아니에요. 이미 천국에 오지 아니하면 천국 못갑니다. 이미 천국의 요소가 나와야 돼요. 갈라디아서 이거 여러분들이 아시지만, 요거는 중요하기 때문에 잊지 말라고 한 번 찾아봅시다. 6장8절,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지요. 요 본문을 가지고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찾아가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부지런 떨면서 장사하는 그냥 평범한 장사하는 사람들, 특이한 것도 없고 그냥 평범해요. 이 말씀 딱 던져보세요. 한 번 비교해보라는 말이지요. “장사 왜 하십니까?” “살기위해서 했습니다.” “본인이 썪어질 것을 반복한다는 생각을 못 듭니까?” “다들 이렇게 살아가는데요. 다들.” 다들 그렇게 살아가거든요. 육을 위해서 계속 육과 자기 가족과 자식을 위해서 그렇게 살잖아요. 뭘 더 원합니까? 이렇게 평범하게 사는 게 전부지. 이게 전부라는 거예요. 이게.

그런데 그게 야곱에 의하면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예수 믿고 장사하지 말까요. 아니요. 장사를 하시되 조미료 팍팍 치시고 하세요. 하시는데 겹치는 부분이 있어야 돼요. 천국의 요소 또는 영적 요소. 천국과 지옥은 어떤 기준에 있는가를 그것이 겹치는 요소가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그게 어떻게 일어나느냐 하면 오늘 스가랴 2장 본문을 하게 되면 예루살렘을 이제 건립을 하는 겁니다. 천사가 건립을 하는 거죠. 그 당시는 구약이기 때문에 토지를 벗어나지 않아요. 모든 용어가 개념이 땅은 안 벗어나고 땅 중심으로 이렇게 해요. 땅에다가 예루살렘을 짓고 성전을 짓습니다. 어떤 요소가 나오느냐 하면 이 예루살렘이 그냥 예루살렘이 되어버리면 이건 아무 영적인 요소가 나오지가 않아요. 그런데 여기에 뭐가 등장합니까? 이방나라한테 포위당하게 만듭니다. 이방나라한테.

오늘날 성도의 삶이 딱 그겁니다. 그러면 졸지에 예루살렘은 이질적인 것이 돼요. 상당히 낯설지요. 그리고 예루살렘 본인이 본인에 대해서 낯설어요. “주님, 내 인생 전에처럼 물어주세요.” 돌아갈 수 없어요. “전에처럼 살게 해주세요. 예수 몰랐던 시절. 교회 안다녔던 시절. 남들처럼 식당해가지고 그냥 칼국수나 해초 맛 전혀 나지 않는 해물 맛 전혀 나지 않는 칠천 원이나 받아먹는 그런 식당이나 해가지고 그냥 하루, 하루 그냥 남들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게 해주세요.” 라고 해도 소용없습니다.

예수님하고 같이 친하게 지냈던 마리아가 시집가려고 모아났던 평생의 향수를 옛날에는 향수가 재산이었거든요. 아가씨에게는 재산이었어요. 그거 팔아서 시집 지참금으로 삼고 결혼 준비금으로 삼고 그걸 한꺼번에 예수님 발 앞에 다 던져버려요. 요한복음12장에 나와요. 예수님의 죽음이 내 삶보다 바꿀만한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을 달리하면 내 안에 어떤 귀한 것도 예수님의 생명나무 보다는 덜 가치 있다는 겁니다. 따라서 향수는 그동안 내가 가치 있다는 것을 부지런히 모았는데 이 향수는 내가 가치 있는 게 아니고 주님이 더 가치 있음에 쓰이라고 그걸 갔다 소모한 거죠. 이것은 곧 향수를 소모한 것이 아니고 본인을 소모한 거예요. 주님 앞에. “주님이여, 주님의 향수가 되어서 주님 말씀할 때마다 그저 거기서 나오는 비말이 되게 하옵소서.” 재채기 나오는 침 튀김이 되게 하옵소서. 요새 비말도 새로운 용어 나오지요. 비말(날아 흩어지거나 튀어 오르는 물방울)맞지요. 주께서 할 때마다 하나의 작은 물방울로 족하게 하옵소서. 그런 태도로 가지는 거예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걸 알고 내가 이 마리아를 앞으로 니가 복음 전하면 제2, 제3, 제4, 제5의 무수한 n의 마리아가 계속해서 나오도록 나는 일할 거야. 왜냐하면 예수님의 장례식에서 나온 성령이기 때문에. 주님이 죽으셔야 나올 성령을 받는 사람들. 죽으셨다는 것. 죽으심의 의미를 품고 그 죽으심을 같이 중첩해서 포개지는 인간들을 주께서는 바이러스처럼 비말로 전부다 퍼트려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표현을 이렇게 했어요. 이 여인이 하는 것이 앞으로 복음 전하는 모든 일에 이 여인의 요소가 다 가미되어 있을 것이다. 그 여자는 나와 더불어 같이 죽었다. 내 장례식에 향수병으로 참여한 여자가 바로 마리아라는 여자에요. 이것은 흉내 낼 수가 없어요. 흉내 내서는 안 되고 그럴 필요도 없어요. 그러면 이 작업을 주께서 필히 성도인 우리에게도 하는데 그럼 주께서는 우리한테 어떻게 작용하는가, 너희 집에 향수병 있나? 샤넬 뭐 있나? 이리 찾지 않아요. 천사 요원 둘이 와가지고 잠시 검문 있겠습니다. 향수병 찾고, 발 앞에 던지고 이런 거 안 해요.

뭐하느냐 자신의 위상과 자리를 우리 안에 마련해 주십니다. 우리 안에. 우리 안에 마련해 주는데 요 우리 안이 뭐냐 하면 내가 가장 나다움을 붙잡게 되는 그 현장에다가 성령을 통해서 고 해필 그 자리를 찾아서 주님의 새로운 위상과 자리를 거기다가 심어 넣는 거예요. 요걸 네 자로 뭐라고 하느냐, 임플란트라고 하는 겁니다. 임플란트.

기존의 이빨 뿌리까지 뽑아버리고 거기다가 다른 뼈를 이식해가지고 굳어놓고 거기다가 가짜 이빨을 탁 꽂아서 얹어놓으면 되거든요. 얹어서 조이면 되잖아요. 자리를 내 자리가 아닙니다. 주님이 거할 자리를 우리 안에 박아 넣은 거예요. 박아 넣고 미국가든지 소련가든지 러시아가든지 북한가든지 관계없이 그 임플란트는 계속 그 자리에 갖고 있는 거예요. 이게 예수님의 시.공간이다 말이죠. 함께 있는 거예요. 내 안에 주님 있는 거예요.

그걸 제가 강남강의에서 뭐라고 했습니까? 박신양의 사랑이지요. “내 안에 니 있다!” 이 말은 니 안에 너 없다는 뜻이겠지요. 니 내 안에 너 있다. 니가 하는 일이 아니고 니가 부지런히 식당일 해도 너의 부지런함이 아니고 나의 부지런이에요. 식당 하라고 인도했고 부지런히 칼국수 팔라고 주께서 부추겨서 그 일을 하게 하신 거예요. 노는 것도 주의 일입니다. 아픈 것도 주의 일이고. 어쨌든 간에 더 이상 나다움을 끄집어낼 최종의 그 자리가 강탈당했어요. 빼앗겨버렸어요. 전에는 내 자리였었는데. 전에는.

주님 자리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면 이걸 한 번 보세요. 아까 예루살렘 바깥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이방나라 있다고 했지요. 요걸 개인화시켜봅시다. 내 자리가 있었는데 내가 내 제단이 있었는데 내 영광의 내 제단의 자리를 주께서 침노해가지고 그걸 점령을 했고 그것을 성소 예루살렘으로 만들어버렸지요. 그러면 이 예루살렘이 내 속에 있는 예루살렘 작은 나의 예루살렘이 기능을 하려면 바깥에 있는 나의 성질은 뭐가 있느냐, 이방 나라 성질을 그대로 발휘해야 되지요.

말로만 주님 앞에 원망하고 닦달내고, 원망하는 방법은 기도지요. 기도하는 척하면서 원망하는 거예요. “주여, 이럴 수는 없습니다.” 이런 식으로. 짜증내고, 울고불고 또 한탄하고, 벌벌 떨고 무서워하고. 이방 나라를 또 이방나라를 포위해가지고 본인이 견딜 수 없고 어떻게 해결할 길이 없어요. 그러면 닦달 내는 것은 뭐냐 하면 주님 앞에 원망하지요. 원망할 수밖에 없어요.

“주님은 너무 내 기도를 들어주지 않습니다. 나는 혼자 바쁜데 주님은 그냥 노십니다.” 하는데 주님은 안 놀았어요. 주님의 주님 됨을 불가능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래야 천국과 지옥이 기준이 되니까요. 이 사람처럼 되지 않으면 지옥가기 때문에. 지옥과 천국의 기준 노릇한다고 우리로 하여금 늘 어제 수요 예배에서 이야기했지만, 늘 실패의 자체를 목표로 삼는 거예요. 따지고 보면 그쯤은 배짱 편한 일이 없어요.

사람이 사는 게 불편하고 힘든 이유는 성공이라는 신화의 거기에 그 미신에 빠져서 그래요. 성공할 이유가 없는데 성공하는 이유는 내 안에 내가 있기 때문에 내 안이 나를 자꾸 조종해요. 그 안에 내 안에 옛날에 누가 있었느냐 악마가 그냥 나 혼자 있었던 장소가 아니고 마귀가 “니는 절대자 되어야 돼!” 자꾸 나를 격려하면서 나를 나의 지성소를 마귀가 만들었어요. 이게 같이 살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떤 경우라도 자기 오기만 챙기고 살았던 겁니다. 그런데 그 악마의 자리를 주님께서 차지해서 침투해가지고 그걸 점령을 해버린 겁니다. 야곱이 이스라엘된 것처럼. 임플란트가 된 거죠. 임플란트 했는데 갑자기 뿌리부터 아프기 시작하네. 임플란트 했는데 아파. 뭘 놓쳤느냐 하면, 주님의 희생을 노치고 주님의 용서와 주님의 거저주시는 사랑을 다 까먹어버렸어요. 희생과 용서와 사랑을.

그래서 주님께서 이걸 회생하는 방법은 바로 이방 민족과 잘 통하는, 세상과 잘 통하는 나의 본성을 그대로 내둠으로 말미암아 그들로 하여금 이방 나라한테 처절하게 실망스러운 실망당하고 정말 진짜 사기당하는 일을 벌이게 만들어요. 옛날처럼 내 자존심 챙기다가 사기 당하거든요. 내 자존심 때문에 사기 당하거든요. 돈 뺏기고, 남한테 욕 얻어먹고, 그런 나의 의 챙기다가 그렇게 혼나게 만들어요. 이 세상에서. 이 세상은 꼭 있어야 돼요. 내가 혼나야 다시 임플란트 쪽을 보게 되기 때문에, 기회가 되기 때문에 세상에 있다는 것을 너무 서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2장 4절 봅시다. “예루살렘에 사람이 거하리니 그 가운데 사람과 육축이 많으므로 성곽 없는 촌락과 같을 것이라.” 성곽 없는 촌락이라는 말은 뭐냐 하면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이제 성 넘어 까지 민가가 퍼졌다는 겁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주께서 충분하게 만족시켜 준다는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불이 성체가 되어가지고 불성곽이니까 불이 지켜주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지켜주니까 그 에덴동산의 동쪽처럼 접근을 못하고 지켜주는 거예요. 6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에 내가 너를 하늘 사방에 바람 같이 흩어지게 하였거니와” 자, 이게 아까 제가 말씀드린 것처럼 언약을 지키는데 있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인간적인 방법으로 언약을 지키니까 주께서는 성전을 불태워버리고 거기에 약속의 땅에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쫓아내버렸어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약속의 땅이라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자리이고, 위상입니다. 약속이 위상이에요. 자리 위상. 여기에는 누가 계셔야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 주님의 이름이 계시는 곳이 약속의 땅이에요. 그렇다면 주의 이름과 공통점을 유지하지 않으면 이 땅에 살수가 없어요.

이방민족들이 열 족속이 쫓겨난 이유는 이 약속의 여호와 하나님과 공통점이 없기 때문에 추방했거든요. 그러면 약속의 땅이 이스라엘이 있고, 갈리리 사해바다가 있다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단강 건너가서 살게 되면 항상 이건 뭐냐, 주님과의 공통점을 드러낼 책임이 있어야 됩니다. 이거 안 드러내면 주변에 누가 있느냐 하면 이방 나라들이 있어요. 제일 위에서부터 보면 에돔, 암몬, 모압, 아람, 블레셋, 이 전체가 이쪽은 이방 해양민족. 이 전체가 딱 세파트가 공격 채비를 차리고 달려들 준비를 하는 거예요.

이 세파트 개들이 울부짖는 개들이 결국은 뭐냐, 아까 이야기한 우리 임플란트 하고 있는 주님의 계시는 그곳을 하고 있는 우리의 육적인 모습을 그대로 지리적으로 보여주는 거예요. 그러면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에 대해서 고맙게 여기면, 고맙게 여긴다는 말은 희생에 대해서 희생답게 이해한다고 있다는 거예요.

희생이 뭡니까? 나는 못났는데 희생 덕분에 누린다. 이게 희생이잖아요. 이게 천국이고. 그래서 성도는 미리 천국에 와있어야 돼요. 죽어서 가면 안 되고 미리 천국이 중첩돼 와있어야 돼요. 고마움이 있어야 돼요. 고마움이. 고마움이라는 것은 그 앞에서 나의 의, 나의 잘남은 용납된다? 안 된다? 일체 허용이 안돼요. 아~ 잘났는데 뭘 고마워요? 잘났으면 나한테 고마워야지. 내 열심에 고마워해야지요. 자기가 못났기 때문에 고맙소. 가 되잖아요. 못났기 때문에. 잘났는데 무슨 고맙소. 고맙소. 안되잖아요. 고맙소가. 김우중이가 그런다 말이죠.

그런데 주님께서는 갑자기 이들이 하나님과 공통적으로 가져야 될 것이 이 사람들이 이방민족과 공통적으로 가져야 될 것이 그 사람들이 이방민족과 공통성을 다루는 순간 이방민족이 “야! 저기 우리 거다.” 이게 공통점이 뭐냐 하면 이방민족들은 힘과 말과 전차와 칼과 이런 것들로 자기를 지키는 그런 공통점이에요. 숫자 이런 걸로. 와락 달려들어서 접수하게 만들었지요.

접수하게 만들었는데, 그러면 목사님! 하나님은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은 선지자 안에 있지요. 하나님의 성신으로. 모든 것을 접수했는데 갑자기 미친 사람 기드온 같은 사람이 나타나 가지고 삼백명 가지고 몇 명을 이겼느냐 하면 13만5천명인가 그럴 거예요. 사사기 8장 10절에 보면,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13만5천명을 몇 명이 이겼어요? 이만이천도 많다 해서 보내버리고요, 달랑 최고 숫자 삼백명 딱 했어요. 삼백명이 무기가 뭐였습니까? 세상적인 무기는 없어요. 사사기7장에 보면 횃불하고 나팔을 불었잖아요. 삼백명이 나팔을 불 때 무기 어디 있습니까? 무기는 적군들이 자기들 무기가 있었지요.

적군을 죽이는데 적군들이 서로 갖고 있는 칼로서 서로 찔러 죽인 거예요. 그걸 가지고 자멸이라 해요. 자멸. 자멸하는 거예요. 이 세상 나라 모든 이 세상 나라는 자멸하는 과정에 있도록 지금도 주께서는 부지런히 그들에게 칼을 쥐어주는 서비스를 해주고 있어요. 니 죽으라고. 니가 니 죽이라고 카을 하나 다 주는 거예요. 왜? 세상은 힘을 의지하기 때문에. 펀드 의지하고, 은행 금융의지하고, 부동산 의지하고, 강남에 땅 집 사놓은 거 의지하고, 땅 막 집값 오르게 만드는 거예요.

극히 평범해 보이고 아, 사람 사는 게 그렇지 뭐, 별거 있어. 라고 만드는 거. 그거 배후에 주님의 부지런함이 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몰라요. 망하라고 주는 거예요. 망하라고. 물론 신자라도 있지요. 말은 안하지만 강남에 집 두 채는 갖고 있을 거예요. 지금. 한 채 빨리 요지 제일 똘똘한 거 한 채 파세요. 강남에 집 있을 거예요. 있더라도 중첩되거든요.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이다. 주의 것이라도 있으면 좋겠어.

이게 내 것이 아니고 이게 바로 이방나라와 통하는 요소를 내가 갖고 있어줘야 주의 임플란트가 사는 거예요. 왜 용서가 되어야 되는지, 왜 내가 죄인인지, 왜 내가 주님의 희생보다도 세상에 끌리는 몸으로 태어났는지, 죄인의 몸으로 오셔서 천국은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죄인의 몸 안에 있는 거예요. 죄인이면서도 죄인을 안다는 게 성도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걸 모르는데, 그게 천사를 만난 이질적 요소에요. 이질적인 요소. 아들인데 내가 남자인데, 내가 딸이래. 시온의 딸이래. 이건 뭐냐 주님이 내 안에 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중앙에 있고 나를 포함해서 세상 모든 것이 그 안에 이방적인 요소, 주님을 핍박하는 요소로서 활동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천국과 지옥을 갈음하는 기준이 돼요.

왜 그렇게 설명할 수 있느냐, 스가랴에 나오는 말씀 그대로 예수님에게 다 적용되기 때문에. 예수님의 공생애에 다 여기 결합이 되어있어요. 예수님은 이 코스대로 가요. 그래서 성전을 헐어버리라고 하는 겁니다. 물론 헐어버리란다고, “예, 헐겠습니다.” 하고 도끼 들고 망치 들고 부수지 않아요. 헐어버려라 하는 순간에 그들은 뭘 의지하느냐 어떤 특정지점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헤롯성전을 유지하고 있었음을 그게 모든 희망을 거기다가 걸었음을 그 본 모습을 주님 앞에 그대로 노출하지요.

이게 있으면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증겁니다. 이 예수야! 니나 건저라. 본 모습 드러낸 거예요. 그런 모습을 드러낼 때 그게 죄가 되고 죄가 드러내면서 예수님이 죽는 이유는 인간의 죄 때문이다. 이리 되는 거예요. 인간이 하나의 공통점으로 단결해서 살려고 하는 게 그게 죄라는 거예요. 이미 너희는 죽어있는데 이 세상에 자기가 죽어있다는 걸 누가 알리요.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홀로 가신 겁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뼈 발라내는 이야기했지요. 우리도 덕지 덕지 세상 것으로 가득 있는데 주께서는 뭐냐 우리 안에 피 있음을, 살과 피가 있어야 영생을 얻기 때문에, 살과 피가 이미 있기에 그것도 그냥 살이 아니고 피가 아니고 부지런을 떠시는 피와 살이 있기에 우리는 우리가 세상과의 공통점 자체가 주님을 죽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겁니다.

그 기능을 스가랴에서는 예수님이 스가랴가 예수님이 하는 게 아니고 스가랴와 천사들이 합세해서 하는 겁니다. 8절에 봅시다.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를 노략할 열국으로 영광을 위하여” 이 말은 너희를 노략할, 노략 당하게 만들었어요. 하나님께서 일부러 유대민족이 이스라엘 민족이 망하게 만들어 놓고 너희에게 침노해서 너희를 뺏은 그 민족 있지. 나는 그 민족의 침략행위로 내가 이 하나님의 영광 받겠다. 이리 나온 거예요. 작전이에요. 그런 작전이에요. 하나님한테 다 계획이 있었어요.

이스라엘은 그 가운데 큰 괴로움을 겪지만. 옛날에는 이게 땅이었어요. 요새도 마찬가지지만, 땅이 없으면요, 사람은 노예에요. 땅 없는 사람은 무조건 노예입니다. 땅이 없으면 땅을 내가 노동의 대가로 그 사람의 노동을 지불해야 그 사람이 나에게 잠 잘 수 있는 거처라도 제공하게 되어있어요.

이걸 약간 어려운 말인데요, 노동력을 파는 것. 이건 산업혁명 이후입니다. 노동력을 파는 것이 아니고 노동자를 팔지요. 나를 팔아요. 산업이후에 노동력을 판다고 되어있어요. 노동력을. 노동력을 상품으로 내세운다고 하는데 이게 자본가에게 노동력을 상품으로 파는 거예요. 시장에 내어놓는 거예요. 자기 영혼을 파는 게 아니고 나는 무슨 이런 재주가 있습니다. 살 사람은 사세요. 아침에 인력시장에 보면 나와 있지요. 나는 대패 잘합니다. 나는 목수 잘합니다. 이거 파는 거예요.

이것이 생각하는 그런 정상적인 경제활동이다. 라고 그 당시에 절대군주나 국가에서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자본이 늘어지니까 이 상품화된 이 상품이 노동력 시장에서 상품이 단가가 떨어지기 시작한 거예요. 떨어지면서 노동력과 가치가 떨어지게 되면 결국은 옛날하고 다를 바 없이 뭐냐 하면 이건 노동자 자체가 팔려나가는 겁니다.

8시간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같이 단란하게 뭐 가족끼리 카드놀이 한다. 이런 게 아니고 단가가 떨어지게 되면 식구들하고 같이 단란하게 저녁식사나 카드놀이나 TV시청할 시간조차 없는 거예요. 그 시간 찾다가는 당신 말고 나 다른 사람 쓸래. 야근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당신 나오지 마세요. 그 사람 쓸래. 이리되면 끝나는 거예요.

그러니 가정에서 이걸 여자들이 주로 할 수 있지만, 주로 결혼한 사람은 누가 하느냐, 남자들이 해요. 남자들이 해가지고 영혼 다 혼났어요. 다 뺏겼어요. 스트레스 막 받는 거예요. 그래서 집에 와가지고 스트레스 좀 풀려고 잘난 체 하면 이건 또 마누라가 바가지를 긁으니까 남자는 이 현대의 남자는 완전히 양쪽으로 납작하게 됐어요. 어디 숨 쉴 곳이 없어요. 숨 쉴 곳이.

내 가정은 노래 부르면서 편히 쉬려고 왔는데 쉬는 곳이 아니고 노동력을 또 팔아야 돼. 니만 일하냐 나도 일했다. 이런 식으로 나오니까. 애 좀 건드려가지고 자기 스트레스 풀려고 하니까 애는 문 잠가 버리고 들어가 버렸어. 자기 지성소 만들어버리고.

도대체 이 가정이 이 자본 때문에 망해져 버렸어. 자본 때문에 망했어요. 그래서 이익 남는 거 좀 나눠주자. 이게 사회주의 아닙니까. 이게 사회주의거든요. 국가는 소용없어요. 돈 가진 게 최고입니다. 그게 바로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요한계시록에 보면 그렇게 만들었어요. 모든 게 다 상품이에요. 영혼까지 안 팔린 게 없어요. 요한계시록17장에 보면.

그게 단일체계에요. 단일체계. 다시 말해서 인간세계는 어떤 것도 못 빠져나온다. 그런데 이미 성도는 스가랴 같은 성도는 벌써 빠져나왔는데. 빠져나왔다고 하니까 주위에서 뭐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그걸 끊어버리고 기름 부은 자 메시아와 끊어보자. 하려고 설치는데 이런 부지런함을 하나님께서 악마한테 부여해서 악마가 부지런히 이 천국과 지옥에 기준 되는 성도에게 공격하는 쪽으로 모든 것을 움직이지요.

모든 사람이 여기 동원하는데 니는 뭐냐, 이리 나오는 거죠. 그럼 우리는 뭡니까? “나는 예수 믿기 때문에 그런 소리하지 마세요. 나도 몰라.” 끝나는 거예요. “나도 몰라. 나도 너희들이 협박과 공갈에 이상하게 그게 겁이 안 나는 이유를 나는 몰라.” 베드로처럼 빌라고 하자. 비는 것도 없어. 그냥 죽여. 이리 나오는 거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심어놓은 새로운 예루살렘, 시온의 딸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이렇게 되었는지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는 일로 통해서 그대로 우리에게 반복해서 심어놓고 반복하는 그러한 부지런 때문인 것을 저희는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부지런함 가지고 짜증내지 말고 주께서 더 부지런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천국의 증인되게 했다는 것을 감사히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