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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욥기 3:20-26 / 내부 교란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욥기

욥기 3:20-26 / 내부 교란

정인순 2019. 12. 29. 22:01

음성 . 동영상 . Youtube

내부 교란  

 

이근호
2019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욥기 3:20-26

(3:20)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고

(3:21)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3: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3:23)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고

(3:24)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3:25)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3:26)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욥은 자꾸 하나님에게 묻습니다. “하필이면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십니까?” 그런데 이 소리를 듣는 목격자인 친구들은 의아해합니다. 욥도 처음에는 타인을 의식하는 발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욥 1:21)

마치 세상을 초월한 듯한 고백입니다. 그런데 이 고백을 악마도 같이 듣고 있음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악마는 인간의 내부를 압니다. 사태가 불리하면 인간은 그 현장을 떠나면 쉽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 둘이 있습니다. 하나는 인간의 신체요 다른 하나는 인간의 내부입니다.

악마는 욥의 신체를 건드렸고 이것이 욥의 마음에 교란을 발생시킵니다. 하지만 진리나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의도는 이런 정신적인 혼란 가운데서 욥은 멈추지 않습니다. 차분하게 그의 마음을 그는 정리합니다. 나름대로 해결책을 모색합니다. 내부 교린 속에서 규범을 만들고자 합니다.

그래서 내놓은 것이 바로 밤의 세계와 빛의 세계의 구분입니다. 욥은 자기에게 주어진 고통이 처음 시작된 지점을 찾고자 합니다. 거기에서만 자기가 고난받아야 될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고난의 극한 지점은 자기가 처음 출생할 때라고 여기는 수밖에 다른 수가 없었습니다.

즉 고난이나 고통은 내가 이 세상에 인간으로 출생한 그 시점부터 같이 발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인생살이 자체가 고문받는 것이고 고통이다는 겁니다. 이는 인생살이하면서 고통스럽지 않는 경우를 표준 삶으로 설정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욥은 말하고 싶은 겁니다. 욥은 자신이 빛과 어두움의 경계선까지 왔다고 보고 있습니다.

문제는 왜 인간에게 고난이 굳이 와야 하는지를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미 주어진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은 아마도 고통을 없는 시절로 되돌아 가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것은 바로 욥 자신이 ‘없다/있다’가 판가름된 그 순간일 것이라고 봅니다. 어두움에서 빛의 세계로 나오는 순간부터 고통이 원인없이 주어졌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욥이 여전히 신약성도의 안목과 차이나는 점이 발견됩니다. 욥은 단순하게 “이 고통은 내가 없어지만 그만 아니냐!”라는 식입니다. 즉 내 몸이 아프니 내 몸을 없애버리면 고통도 같이 사라질 것이라고 보는 겁니다. 육의 안목에서 자기 몸을 관찰하는 한계가 거기까지입니다.

하지만 신약성도의 출발은 엄마의 뱃속이 아니라 ‘주 안’입니다. ‘성령 안’입니다. ‘십자가 안’입니다. ‘새 언약 안’입니다. 모두 같은 뜻입니다. ‘주 안에서 성령으로 인하여’ 성도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 성도의 몸이 사나 죽으나 여전히 ‘주 안’에 놓여 있는 존재가 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으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니라”(롬 14:7-8)

즉 성도의 근원은 이 몸이 아니라 몸을 벗어나 ‘주님 안’ 혹은 ‘약속 안’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죽고 사는 것이 결코 성도의 운명을 결정짓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가 아프나 건강하나 상관없이 그것마저 ‘주님 안’에 있음을 증거하는 징조로서 작용하는 겁니다. 하지만 욥은 육체라는 한계에 봉착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아직 계시가 온전하게 제시되지 않는 시대적 한계입니다. 과연 우리 몸이 죽는다고 해서 더 이상 고통이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욥의 위치는 육과 영이 첨예화된 지점을 구성하고 있습니다. 고통이 출처는 인간의 육이 아니라 예수님의 메시야성입니다. 진정한 죽음과 진정한 고통과 진정한 아픔의 근원은 오직 십자가 사건에서부터 비롯됩니다.

욥기말고 구약 성경에 나와있는 이스라엘 역사는 이러한 육의 한계를 해답과 더불어 보여줍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 언약이 구체화 되면서 언약에 준해서 특별히 등장하는 인물이 있으니 바로 그런 자들이 ‘기름부음을 입은 자’들입니다.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나중에 왕까지도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되면,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사는 게 고통스러운면 이 한 몸 죽으면 그만이지’가 성립되지를 못합니다. 몸이 죽어도 심판은 본격화됩니다. ‘죽는다’는 것이 단순히 이 육체하는 제거되는 것이 아니라 ‘기름부음을 입은 메시야의 죽음’을 증명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메시야가 어떤 분이신지를 내다보는 고통을 이스라엘 나라는 겪게 됩니다.

이 메시야 의식이 없는 일반인들이 고난들을 어떤 식으로 대처할까요? 그것은 ‘내 운명은 내가 알아서 개척한다’는 식으로 버티게 됩니다. 이것이 악마가 욥을 통해서 나타나기를 은근히 고대하는 바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대놓고 욕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인생과 내 앞길은 내가 알아서 관리한다’는 욥 친구들이 의식이 더욱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겁니다.

사람이 힘든 일을 겪는다고 새사람 되는 것 아닙니다. 도리어 고집을 강화될 뿐입니다. 노인치고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고집도 같이 노골적이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사무엘하 1:21에 보면, “길보아 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지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라고 하면서 다윗이 애석해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기름부음’이란 이 세상의 변화와 그 의미의 초점에 해당되는 사람을 구별하면서 주어지는 신호입니다. 이 ‘기름부임’을 통해서 진행되는 약속 전개를 보면, 인간의 육체보다 먼저 정해진 뜻까지 연결되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즉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죽고 난 뒤 사흘만이 다시 살아남으로서 이 지상에서 파악불가능한 다른 세계가 지금 중첩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위치에 있는 사람입니다.

오늘날 성도가 이런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성도가 세상 사는 것 자체가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욥의 인식을 깍고 또 깍고 벗기고 벗겨서 나중에 더 이상 할 말이 없게 하시는 것처럼, 오늘날 성도의 자아의 막도 얇고 또 얇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마 5: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마음이 투명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녹취:송민선

11강-욥기 3장 20~26절(내부 교란)

201912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욥기 3장 20~26절입니다. 구약성경 764페이지입니다.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 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하나님에게 둘러싸여 길이 아득한 사람에게 어찌하여 빛을 주셨는 고, 나는 먹기 전에 탄식이 나며 나의 앓는 소리는 물이 쏟아지는 것 같구나, 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평강도 없고 안온도 없고 안식도 없고 고난만 임하였구나”

욥기 3장에 친구들 세 명이 오고 난 뒤에 욥의 입에서 나오는 고백들을 보게 되면 욥기 1장에 나오는 말씀, 사람들이 그렇게 위로 삼아 듣는 이야기인 21절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라고 했던 그 고백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믿음 되게 좋아 보이고 멋있어 보이잖아요.

이거 대외용입니까? 남들 앞에서 나 이정도라고 자랑질하는 거예요? 그리고 이런 고백을 했을 때 사탄이 욥을 유심히 조사하고 관찰하죠. 이게 자기 몸은 안 건드리고 재산 날라가고 자식 날라가니까 아직도 이게 숨 쉴만 한 모양이네. 이거 몸을 한번 쳐봐? 흔히 사람들이 그러죠. 돈 빼앗기는 것도 일부고 명예를 잃는 것도 일부인데 건강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하잖아요. 이건 욥에 나오는 사탄의 말이 아니고 사탄의 말씀 같아요.

사람이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숨 쉬고 있다는 것은 아직 살만하다는 뜻으로 보는 거예요. 사탄이. 다른 사람이 우리를 그렇게 보는 것이 아니고 남들도 그렇게 보는 거예요. 전부 다 사탄 밑에서 한통속 되었으니까. 전화해서 “집사님 편찮으십니까?”라고 물으면 “아이고, 죽을 지경입니다”라고 대답 나오면 아직 살만하다고 느끼는 거죠. 아직도 버틸만하다고 생각이 들죠. 말을 한다는 것은 아직 죽지는 않았다는 희망을 갖는 다는 뜻이잖아요.

욥을 보면서 사람들이 제일 헷갈리고 혼동하는 것이 욥은 이렇게 믿음이 좋았고 또 거기에 대해서 욥이 스스로 좋다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이정도 믿음을 보았느냐?”라고 사탄 앞에서 자랑할 것 같으면 우리도 이런 모방과 흉내를 내면서 빈손으로 왔고 빈손으로 갔으니까 모든 것은 하나님 것이라고 하는 이런 것은 김국환이가 이미 노래했잖아요. ‘타타타’에서. 이 노래 가사 보면 나와요. 디모데전서에서도 나오고. 흐름이 좀 이상한 데로 빠졌습니다만.

그냥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것이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에서도 이야기하잖아요. 그래서 흉내 낸다고 절에 가서 머리 깎고 들어가서 삼시 세끼 얻어먹으면서 하지만 실상 나갈 때는 벤츠 타고 내려오고 또다시 산으로 도 닦는다고 가고 ‘물은 물이요 산은 산이요’라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뭔가 세상을 초월했다 해탈했다고 하는 거들먹거림 같은 거죠. 거들먹거림.

‘내일 일은 난 몰라요. 주께서 내 손 잡아 인도하소서’라는 구절이 가스펠송 보면 얼마나 많습니까. 이 거들먹거림. 그러나 실제로 욥은 지금 거들먹거릴 여유가 없어요. 한때 거들먹거렸지만 지금 본인은 죽을 지경입니다. ‘아예 말도 하지마. 모든 게 다 귀찮아’라고 하죠. 욥에게 제일 귀찮은 것이 뭐냐 하면 본인이 제일 귀찮아요. 본인의 육신이 제일 귀찮아요.

욥의 이 모습을 보면서 어떤 신앙이나, 신앙의 모델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분주합니다. 2장 10절에 보게 되면 옆에 가까이 있는 아내가 뭐라고 뭐라고 잔소리를 늘어놓지요. 아침에도 이야기했지만 아내가 남편에게 하는 것은 남편 걱정이 아니고 자기 밥그릇 걱정하는 거죠. “당신이 이럴 것 같으면 차라리 죽어라”라고 하니까 10절에 보면 “그대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 중 하나의 말 같도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라고 이쯤 나오면 만약 그 뒷부분을 어떤 만화나 소설로 쓴다면 3장 같은 그런 내용은 없고 이제부터 역경의 사나이 의지의 신앙인 같은 이런 이야기만 줄줄이 나와야 합니다.

자멸하거나 자폭하는 내용은 없어야 한다는 말이죠. 보는 눈이 한둘이 아닌데. 지금 우리가 욥을 보고 있잖아요. ‘힘내라 힘. 잘한다. 좋다. 하나님 편에 선 사람 너밖에 없어. 이 세상이 다 마귀에게 속아 넘어가도 너는 굳게 강하게 버텨야 해. 우리가 응원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죠. 사람이 누구를 응원한다는 것은 자기는 더러운 물에 손대기 싫다는 뜻이거든요.

자기는 힘든 거 하기 싫고 남들보고 다 하라고 하고 그냥 박수나 치겠다는 그런 인간 심보거든요. 그래서 누구 하나 응원하는 것도 응원 하나로 그냥 때우려는 아주 얄팍한 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가만히 있는 아내가 욥에게 한마디 얻어먹었단 말이죠. 이 한마디는 뭐냐 하면 이거예요.

욥이 세상을 향하여 우리를 향하여 하는 이야기는 “건드리지 마라. 하나님이 건드리니까 너희들이 아는 체 어쭙잖게 교훈이라든지 위로의 말 하지 마라. 내가 너희들이 하는 위로책이나 방식을 내가 모르는 인간이 아니야. 알고 있으면서도 그걸 능가하는 내가 알고 있는 한계 그 너머에서 오는 사태를 나는 지금 특수하게 특별하게 당하고 있다. 내가 생각해도 내가 특이해. 그러니까 나도 나를 모르는데 너희들이 나를 안다고 쓸데없는 교훈 위로 그것이 오히려 아픔을 추가시킨다”라고 실제로 욥이 뒤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해요.

그러니까 하나님이 직접 치는 거예요. 욥이 제일 궁금한 것은 ‘왜 칩니까?’라는 거예요. 영어로 ‘Why me?’ ‘왜 저입니까. 왜 치는 겁니까?’입니다. 우리도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요. 월수입 천칠백에서 천 팔백쯤 갖고 저택은 한 200평 저택에다가 부동산은 던져놓으면 값이 올라가고 주식 하면 떼돈 벌고 아이는 알아서 공부를 너무 잘하고 몸은 아픈 데가 없고 그럴 때 여러분들이 해야 할 말은 ‘주여, 왜 왜 저에게 이런 모진 고난을 주십니까?’라고 나와야 해요. ‘왜’

왜 그러냐 하면 마귀는 고난만 주는 게 마귀가 아니에요. 마귀가 오히려 사람들을 미혹하는 방법은 고난과 전혀 거리가 먼 재개발하면 4억 남는 이런 거, 그런 소식들, 그냥 아파트 하나 사놨는데 재개발한다고 4억 남았다는 이런 거. 과징금 50% 뗀다는 이런 거, 예상 밖에 벌어지는 일들. 거기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왜 하필이면 저입니까?’예요.

분명히 수능 칠 때 내 아이들은 백날 해 봐야 그저 한 3등급 하면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정답을 표시할 때 줄을 바꿔 써서 1등급 나와버렸어요. ‘왜 저입니까? 왜 제가 서울대를 가야 하는데요?’라고 하는 서울대학생 봤습니까? 없지요. 그러니까 오히려 욥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욥의 오늘 본문을 보면서 우리가 추적할 수 있는 그러한 징조가 있어요.

그것은 3장 6절에 보면 “그 밤이 심한 어두움에 잡혔었더라면”이라고 나오고 4절에 보면 “그 날이 캄캄하였었더라면”이라고 하는 이 고백들을 쭉 들어보면서 같은 개념들이 반복해서 나오면서 현재 자기 심정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그거는 바로 밤이라는 겁니다. “밤이 심히 어두움에 잡혔더라면” 그다음 8절에 “익숙한 자가 그 밤을 저주하였었더라면” 그리고 그 뒤에 뭐냐 하면 욥은 밤을 시작점으로 봤거든요. 밤을 시작점으로 내가 엄마 태중에 있을 때는 아마 캄캄했을 것이다. 그때는 빛이 자궁까지 안 들어 왔으니까 그때 내 모습은 캄캄한데 휩싸였을 것이라고 보는 거예요.

제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했죠. 욥을 통해서 인생의 출생의 초기화를 보여준다고. 제가 미리 말씀드리면 욥이 지금 오해하고 있는 것이 뭐냐 하면 항상 태어남 앞에 ‘나’를 붙여요. 내가 태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신약의 성령 받은 성도는 내가 태어났다고 하지 않아요. 주님의 출생의 여진(지진날 때 파장), 주님의 출생에 의해서 그 여파에 의해서 발생 된 것이 나의 출생이 되는 겁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 안에서 태어났다고 해요. 그런데 지금 욥은 구약이기 때문에 나의 엄마의 모태에서 태어났다고 보는 겁니다. 육에서부터 시작을 해요. 욥은. 우리는 성령 안에서 시작을 하거든요. 지금 우리라는 말을 쓰기가 조심스러운데 제가 함부로 실례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어요. 성령 안에서 태어나고 십자가 안에서 태어나고 성령 안 십자가 안, 전부 다 같은 말입니다. 주 안에도 전부 다 같은 말이에요.

죽음에서 다시 태어난 거예요. 죽음에서. 욥은 굉장히 과학적 관찰력을 가지고 인식을 하고 있어요. 따져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이 고통을 없애려면 고통이 어디서부터 발생하는지를 알려면 내 몸이 시작한 그 시점으로 초기화로 돌아가서 고통이 그때도 고통이 있었는지를 한번 보자는 거예요. 욥의 이러한 추적, 자기의 출생을 상상해서 추적해 들어가는 이 방식은 오늘날 우리들에게 뭘, 어떤 도움을 주느냐 하면 빛의 세계와 어두움의 세계의 경계선에서 욥이 자기 자리를 현재 설정하고 있습니다. 상당히 어렵죠.

욥이 지금 어른이잖아요. 어른인데 머리로 상상해서 강제로 자기 자신을 어디로 몰아넣느냐 하면 자기가 현재 눈에 보이는 세계에서 나타날 때까지 그 원인을 계속 거꾸로 소급해서 추적해 보는 거예요. 나는 전에는 나였지요. 그런데 지금은 뭐냐 하면 고통받는 나예요. 고통받는 나라면 내가 고통받는다면 처음에 내가 태어날 때도 어떤 고통의 씨앗이 나와 동반해서 만들어졌을 것이라는 거고 그 고통은 어디서 왔는가. 그 고통은 어둠 안에, 엄마의 모태 안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부터 욥은 해결점이 안 나타나요. 고통이 어두움에 있었느냐 어두움에서 바깥세상 빛의 세계로 ‘응애’하고 출생했을 때부터 고통이 있었느냐 하는 그 점을 지금 따집니다. 오늘 본문 20~22절을 봅시다. “어찌하여 곤고한 자에게 빛을 주셨으며 마음이 번뇌한 자에게 생명을 주셨는 고, 이러한 자는 죽기를 바라도 오지 아니하니 그것을 구하기를 땅을 파고 숨긴 보배를 찾음보다 더하다가,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라고 되어 있어요.

눈을 다쳐서 병원에서 오랫동안 눈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그 의사가 아주 기쁜 소식 전하다고 하면서 “당신은 이제 다 나았으니 붕대를 풀겠습니다. 마음의 준비하시고 이제 붕대를 풉니다”라고 하면서 붕대를 푸는 순간 그 환자가 도로 자기 손으로 눈을 꽉 누르면서 “싫어. 이 빛의 세계가 싫어”라고 하는 거예요. 무섭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욥의 고백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는 뭐냐 하면 이 빛의 세계, 인간들이 마음껏 누리는 이 빛의 세계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고통이 함께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현실상입니다. 현실적인 문제. 다시 말해서 사는 게 고문이라는 뜻이에요. 고문받는 거. 이 땅에 사는 게 고문이라는 겁니다. 욥의 자기 아픔을 통해서 이 인간 세계에 고통은 어디서 오는 가를 추적하는 계기로 삼고 기회로 삼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욥이 하나 몰랐던 것은 ‘내가 태어났다. 이제 나는 죽고 싶다. 나는 고통스럽다’라고 했죠. 그러나 ‘태어남이 나를 밀어낸다. 고통이 나를 밀어낸다. 고난이 나를 밀어낸다’라는 것은 욥이 생각을 못 하고 있습니다. 그 태어남의 먼저 된 태어남, 고통의 먼저 된 고통, 죽음의 최초의 죽음, 그것은 십자가 오기 전까지 기다려야 해요.

예수님이 십자가 달릴 때 인간은 왜 난데없이 고생스럽게 인생살이를 해야 하는 가를 십자가 오기 전까지 해답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구약에 속한 욥기의 한계라고 할 수 있어요. 이러한 욥의 고백을 통해서 성령을 받지 않는 일반인들은 그 문제를 나는 멀쩡한데 그 바깥에서 뭔가 남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욥의 특이한 점은 남 탓으로 여겼던 것을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 내부 교란으로 보는 거예요. 그 내부 교란을 통해서 어떤 규범을 만들려고 해요. 자기의 고통을 중심으로 해서 진리가 무엇인가를 교본을 만들어요. 교본을 만들고 매뉴얼을 만드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욥기가 에스더 다음에 욥기 있잖아요. 욥기 다음에 시편, 시편 다음에 잠언, 잠언 다음에 전도서, 전도서 다음에 아가 나옵니다.

이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의 특징이 뭐냐 하면 구속사가 없어요.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이 그렇게 노골적으로 드러나지 않습니다. 마치 시간이 정지된 거 같아요. 이것은 바로 외부의 역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외부가 어떤 방향을 가지고 있는데 뭐냐 하면 외부의 문제가 아니고 내부의 교란, 심적인 갈등, 해답은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내부에서 어떤 징후가 징조가 일어나는 거예요. 진리에 의한 징후가 일어나는 거예요.

하나님과 나의 만남에서 어떤 외부의 것을 경유 해서 만나는 것이 아니고 내 내부 안에서 주께서 마귀를 보냈던 어떤 것을 했던 내 내부에서 뭔가 변화가 일어나도록 주께서 이렇게 조치를 했다는 것이 욥기, 시편, 잠언, 전도서, 아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시편 22편에 봐도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내부 문제로 들어가죠.

그리고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도 예수님이 그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이 말은 오늘날 성도라고 하면 남 탓하지 말고, 나는 태어난 집안이 잘못이다, 부모가 이렇다, 교회가 이렇다고 남 탓하지 말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내부적인 교란이 일어나야 해요. 내부적인 갈등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러죠. 사람이 고생을 많이 하게 되면 내부적 갈등이 일어난다고. 반드시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이 고생하게 되면 더 뻔뻔해지고, 발악하고, 반응하고, 고집이 셀 가능성이 더 많지요. 그러나 못 버티면 마트에 팔잖아요. 번개탄. 번개탄 펴놓고 차에 테이프 발라놓고 혼자 가든지 자식들이랑 같이 가든지 자살하면 그만이죠.

자살하면서 끝까지 버티는 것은 ‘나는 정당하다’ 입니다. 나는 정당하다. 꼭 자살한 사람만 뭐라 하는 게 아닙니다. 평소에 우리 모든 생활이 뭐냐 하면 ‘나는 정당하다’예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일기를 쓴다면 오늘 날씨 맑음, 내용은 ‘나는 정당하다’라고 쓰고 덮고 다음 날도 오늘 날씨 흐림, 내용은 ‘나는 정당하다’ 다음날 정당하다가 재미없으면 ‘나는 관대하다’라고 쓰고. 이게 자기 연민이죠.

자기 애착, 자기 집착. 일기라는 것이 다 그렇지요. 안네 일기부터 해서 모든 일기가 다 그렇잖아요. 우리가 일기를 안 쓴다뿐이지. 그러면 우리가 일기 대신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새벽기도 나오는 거. 마찬가지예요. ‘나는 정당합니다. 주여’ 버티기 들어가는 겁니다.

‘안티고네’라는 그리스신화에 비극이 있는데 최초의 비극이라고 하죠. 그것을 비극이라고 해서 국가냐 개인이냐 하는 최초의 주체 문제가 등장하는 겁니다. 그래서 철학이 그때부터 시작되는데요. 국가의 명령이, 제도나 규범이 우월하냐 아니면 내 내면의 소리가 더 우월하냐의 중요한 갈림길에서 문학이라는 것이 나오는 겁니다.

문학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외부에 대한 조직에 대한 국가에 대한 그런 세계에 대한 인간의 모든 외침이 문학이 되거든요. 그때 나라에서는 그 안티고네라는 여자가 나오는데 그 여자에게 오빠가 둘 있어요. 오빠가 꼭 남북으로 갈린 것 같아요. 한 오빠는 남쪽 사람이고 한 오빠는 북한 사람이에요. 서로 싸웠는데 현재 임금님은 북한의 임금님이에요. 그런데 안티고네는 북한에 살고 있습니다. 북한의 오빠는 국가에서 칭송하고 남쪽 오빠는 배신자라 해서 시체를 독수리 밥으로 던져버리든지 하고 절대 장례를 치르지 말라고 했어요. 그럴 때 누이동생이 그 국가의 법에 반발해서 왕에게 대듭니다.

이건 수련회에서 할 이야기인데요. 인간이 과연 국가에 대들 수 있느냐는 문제를 따지는 거예요. 에스더 할 때 그게 나올 거예요. 인간이 과연 국가에 대들 수 있느냐? 대통령에겐 대들 수 있어요. 촛불집회 해서. 그런 거 말고, 대통령에게 대드는 거 말고, 인간이 과연 국가에 대들 수 있느냐는 그 문제를 말하는 겁니다. 국가 없이는 못 사는데요? 남의 나라에 잡히는 데요.

안티고네는 그 배신자로 죽은 남쪽 오빠를 자기가 장례식을 보란 듯이 치러버려요. 왕이 그 누이동생을 불러다 지적합니다. 왜 법을 어겼느냐. 딱 두 가지 이야기합니다. “임금님, 인간은 사랑으로 사는 겁니다. 법으로 사는 것이 아니고 사랑으로 사는 겁니다”라고 하고 묻어준 두 번째는 이유는 “다른 사람 같으면 안 묻어줬는데 오빠니까 묻어줬습니다”라고 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아무리 국가가 억눌러도 혈육이라는 것은 끊을 수 없는 거예요. 혈육이라는 것은.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공포 속에 있어도, 깡패들 세계도 의리가 있듯이 인간은 사랑을 꽃피우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아셔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의’의 반대말이 뭐냐 하면 ‘의리’입니다. 하나님의 의의 반대말이 의리. 의리에 죽고 의리에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의 반대말이에요.

안티고네라는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의 운명은 내가 개척한다는 거예요. 내가. 왜? 인생의 주인공은 나니까. 그게 문학의 시작이고 철학의 시작이에요. 모든 학문의 시작입니다. 흔히 말하는 사람들이 마음속에 갖고 있는 마음 자세는 뭐냐 하면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진다는 거예요. 내가. 복음 들어 봤자, 성경 들여다 봤자, 이건 껍데기예요. 껍데기. 바람 불면 다 뜯겨 나가요.

진짜 안에 들어있는 것은 뭐냐 하면 내 운명은 내가 책임진다는 거예요. 내가 왜? 내가 주인공이니까. 운명은 내가 개척하고. 욥의 친구들이 그런 사람들이거든요. 그런데 욥은 그 사람들과 달라요. 자꾸 질문합니다. 3장 보세요. 끝까지 질문합니다. 왜. 왜. 왜...자꾸 왜를 이야기해요. 빛의 세계가 문제가 있으니까 나는 도로 도피하고 싶다는 겁니다. 자궁의 세계로. 어두움의 세계로. 빛은 위험하니까.

눈 치료하는 사람이 다시 자기 눈을 붕대로 다시 감아버리는 거예요.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욥이 모르는 게 있어요. 뭐냐 하면 욥은 인간이 태어났다는 말은 내가 없었던 때가 있다고 본 거예요. 욥의 잘못은 자기를 중심으로 해서 내가 존재한 때와 내가 존재하지 않는 때 두 줄을 봅니다. 욥이 뭘 모르느냐 하면 내가 존재하는 것과 주님이 존재하는 것을 놓친 거예요. 지금 계속해서 자기 생각만 하고 있는 거예요. 내가 없어지면 그만 아니냐.

옛날에 부모님이 자식이 애먹이면 가짜로 소화제를 독약이라고 속여서 하는 말이 “너 그렇게 내 말 안 듣고 공부 안 하면 이 약 먹고 콱 죽어버린다”라고 하거든요. 이게 표준말로 “내가 죽을 거야. 죽어버리면 좋겠어?”라고 하죠. “콱 죽어버릴까?”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주 안에 있지 않다고. 육으로 생각하니까 거꾸로 필름을 돌려도 내 육밖에 생각 안 하고 있어요.

살다가 힘들면 번개탄 피우면 그만이라는 그런 생각. 번개탄 피우는 대신 그것보다 앞선 징조가 뭐냐 하면 술 마시는 거예요. 그게 자기 죽음이에요. 자기 고통 해소책이고. 담배 피우고 술 먹고. 제가 돌아다닐 때 그냥 안 봐요. 누가 담배 피우는지 다 봅니다. 온 천지가 좀비예요. 전부 다 자살하고 있는 사람들 다 보여요. 죽으면 그만이지. 맨날 그거예요. 주님이 없어요.

이 욥의 한계를 뭐로 보여주느냐 하면 바로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사사기에 보면 거기에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있어요. 사무엘 상, 사무엘 하도 그렇고요. 사무엘 상은 주로 사울왕과 선지자 사무엘 이야기고요 사무엘 상이 끝나고 사무엘 하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다윗의 이야기가 나와요. 다윗 이야기가 나옵니다.

사무엘 하 첫 장에 보게 되면 거기에 참 특이한 것이 나와요. 어떤 특이한 것이 나오냐 하면 다윗이 그렇게 사울왕에게 시달렸으면 지긋지긋해서 콱 죽어버렸으면 했을 텐데 사무엘 하 보면서 사람들이 이 대목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이 그렇게 자기를 괴롭힌 그 사울, 그 사울 왕이 죽었는데 죽고 난 뒤에 다윗이 애통해서 대성통곡을 하는 대목으로 시작해서 사무엘 하가 시작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생뚱 맞는 느낌이 들어요. 왜 그런가? 다윗에게 이유를 물어봅시다. 물어보니까 사울은 그냥 사울이 아니고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거예요. 여기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메시아를 나타내죠. 사울 본인이 정신이 나쁘다 옳다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사울이 그렇게 나쁜 짓을 하는 기능조차도 기름 부음에 따라 나와야 할 내용이라는 거예요. 그 역할이라는 겁니다.

그런 기름 부음은 인간이 아무리 진리를 알고자 해도 그걸 파헤쳐도 모르는 것을 기름 부음은 기름 부음 받은 기능 안에 이미 인간은 죽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죽음 뒤에는 주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기름 부음을 통해서 미리 체험할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다윗의 생각입니다. 다윗은 선지자니까요.

지금은 인간 세계지만 나중에는 기름 부음의 세계, 메시아의 세계가 온다는 것을 지금 구약에서는 메시아 세계와 인간의 세계가 섞여 있고 중첩되어있는 겁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예수님의 성령 안의 세계와 인간의 자기 운명을 개척했다는 안티고네 같은 자기 자존심만 챙기는 세계가 중첩되어있어요. 그 세계는 서로 단절되어 있어서 인간은 출입구가 아니기때문에 연락을 왔다 갔다 할 수가 없어요. 왔다 갔다 하는 출입구가 없어요.

“그러나 기름 부음의 영이 오면 메시아의 영이 오면 아무도 너희를 가를 칠 필요 없이 너의 내부에서 메시아의 세계가 이미 거기에서 만들어질 것이다. 왜냐 하면 너는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고 나의 십자가로부터 태어났기 때문에 십자가로 다시 창조되었기 때문에 너의 안에는 십자가 들어있다”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마지막으로 마태복음 5장을 보겠습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보면 이런 말씀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라는 말씀, 청결하다, 투명하다, 점점 더 막이 얇아진다는 거죠. 하나님께서는 욥을 깎아 냅니다. “욥아 고통 줄 테니 할 소리 다 해라. 더 이야기해라. 더. 이야기가 멈출 때까지”

나중에 입을 막고 재를 뒤집어쓰고 “제가 유구무언입니다”라고 할 때까지 다 끄집어내요. 욥에서 나오는 끄집어내는 그것은 바로 인간의 한계, 인간의 지식의 한계, 철학의 한계, 과학의 한계입니다. 왜? 인간 중심인데 해결책이 없어요. 인간 중심으로 뭔가 하나님이 손대고 고통스럽게 살고 인생사는 게 고문 같은데 고통의 이유를 몰라요.

메시아께서 인간 속에 함께 들어오셔서 비로소 그 이유를 밝힙니다. 예수님이, 주가 주되기 위해서 벌려놓은 하나님의 월남치마예요. 펼쳐놓은 주름치마같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예수님 안에 통일 되게 하시고 사나 죽으나 일어난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서 주되기 위해서 일어난 일입니다.

따라서 내가 고통스럽다고 번개탄 피우고 자살한다고 해서 그 사람을 기다리는 것은 지옥밖에 없어요. 주님이 없는 세계가 지옥이거든요. 그러나 성도는 이미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중첩된 것을 압니다. 나에게 이렇게 내 뜻대로 안 되고 욥처럼 힘들게 이렇게 아파도 이것은 주님이 주님 되게 하기위해서 내 안에 분란을 일으키는 겁니다.

내 내부에, 나밖에 모르는 이 아담의 죄 속에서 교란을 발생시키는 이점에 대해서 욥은 짜증 내었고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이 주님이 사용하시는 몸인 줄 알고 귀한 줄 여기게 하옵소서. 내 뜻대로 안 되고 주의 뜻대로 되어 가는 것에 대해서 도리어 신기하게 여기고 기적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