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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에베소서 5:28-33 / 부부 사랑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에베소서

에베소서 5:28-33 / 부부 사랑

정인순 2019. 12. 22. 14:41

음성          동영상     Youtube

에베소서 5:28-33    부부 사랑 


이근호


 사랑이란 관심 갖는 겁니다. 관심을 주고 받으려면 ‘나의 고정함’을 고집해서는 아니되고 변화의 여지를 열어놓아야 합니다.

물론 스스로 자신에게 변화를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변화되지도 않으면서도 변화되었다고 우길 소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처분에 맡겨야 합니다.

그 타인이 바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겁니다. 안심놓고 나의 변화를 일임해야 합니다. 따라서 부부 사랑의 조건은 복음이요 말씀입니다.

복음을 주고 받고 말씀을 주고 받아야 합니다. 복음은 초월적 률이요 이미 확정된 원칙입니다. 수정되지 않습니다. 부부 서로가 이 복음에 종속되는 것을 반겨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부부간의 사랑이 교회됨의 원칙과 충돌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원칙은 종말을 세상에 한껏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7:29-31에 보면,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그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 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 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 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 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부부는 종말 형편을 즐겨 받아들이고 더불어 소실되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 종말의 증상 중의 하나가 바로 부모와의 이별이요 자식과의 이별입니다.

혼인은 자식은 부모를 떠나야 하고, 각자의 몸은 같은 인간에게 운명이 맡겨져서는 아니된다 는 겁니다. 각자의 육체를 통해 종말 현상이 발산되어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의 사랑이란 상대를 나의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소모되는 대상이 아니다 는 겁니다. 사랑은 혼자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서로의 관계에서 나타납니다. 상대를 다루고 있는 복음 작용을 귀하게 생각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거기에 관심이 꽂혀야 합니다.



부부 사랑

2019년 12월 29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5:28-33

(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5:29)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5:30)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5:31)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5:32)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5:33)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기 같이 하고 아내도 그 남편을 경외하라

사도에게 있는 부부란 한시적 역할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천국에서는 더 이상 시집이나 장가가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마 22:29-30)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서 남자/여자의 성별 구분을 갖게 했을까요? 그것은 첫 번째 아담이 지니고 있는 육적인 속성의 한계를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즉 결혼해서 자식을 갖게하므로서 그 와중에서 인간들이 하나님의 뜻과 목적으로 잃는 쪽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인간들은 자기 만족과 그 만족의 극치를 예상합니다. 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하고 그 행복의 출처를 가정, 혹은 가정화목에다 둡니다. 쉽게 말해서 가정 화목을 추구하면서 인간들은 지옥하고 있는 중입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가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최종적으로 ‘교회’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능력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논리의 비약’입니다. 사도바울의 말투는, 말씀의 세계란 인간의 논리에 잡힐 수 있는 내용이 아니라는 겁니다. 그것이 바로 말씀의 세계입니다. 야고보서 1:18에 보면,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거듭남’도 우리 인간의 노력으로 되어지는 것이 아니랍니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벧전 1:23) 그렇다면 부부가 한 몸이 되는 매개인 ‘사랑’도 첫 번째 아담 계열에 속한 육의 몸에서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오히려 이 육의 사랑은 참된 사랑에 의해서 쉬지 않고 제거당할 대상이 됩니다.

아담→남/여→새 아담(예수님)의 절차는 숨겨놓은 하나님의 창조 계획을 인간계에 드러난 겁니다. 이 절차의 더 깊은 내용은 다음과 같은 원칙을 쏟아놓습니다. ‘아담→하와→자식’. 즉 아담의 모든 것이 없었던 아내, 하와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하와를 통해서 자식이 낳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아담이 기존의 첫 번째 아담이라는 점입니다. 따라서 영원한 아담, 참된 아담의 등장은 이 옛 아담 계열의 반대로 진행됩니다. ‘자식 →하와 →아담’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 먼저 나서 그로 인하여 왜 교회가 주님의 영원한 신부(新婦)인지가 알려지고 그 다음에 완성된 주님이 참된 남편이었음을 드러냅니다.

이 천상 계열의 등장은 치열한 옛 아담의 행복 욕망만 치열하게 전쟁을 벌리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염두에 두는 것은 행복한 가정을 어떻게 하면 꾸려갈 수 있느냐 합니다. 하지만 이런 예상과 기대의 바탕에는 자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제거대상인 것을 감안하지 않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배우자를 사랑하려고 애씁니다. 누구를 위해서 말입니까? 본인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다음의 말씀과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마 10:36-37)

사람들이 사람을 찾는 이유는 단 하나, 자기 내부의 불편함을 타인을 상대로 해소하기 위해서입니다. 마치 무당들이 한 맺히고 억울한 사람의 귀신을 빙자해서 누구를 만나도 복수하듯이 말입니다. 인간들에게 있어 타인은 먹잇감입니다. 남들에게 참으로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처럼 행동하지만 실은 자신이 공들여 놓은 먹잇감이 놓칠까봐 노심초사하는 겁니다.

사람들의 이러한 태도는 ‘일관성 작업’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일관성 작업’이란 계획성 있게 자기 의지를 통해서 결정과 선택에 나서면서 주변에 있는 변화나 있는 것들은 자기 중심으로 체계를 잡고 조직으로 구성하려는 시도를 말합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항상 예상합니다.

그러나 그 예상으로 인해 늘 공포에 시달리게 됩니다. 반면에 말씀에 의해 진행되는 ‘교회 만들기=아내 만들기’ 작업은 사랑에 의해 등떠밀리는 식입니다. 어디까지 등떠밀까요? 즉 이 사랑이 참된 사랑인지 아닌지는 어디서 판단될까요? 아가 8:6에 보면, “너는 나를 인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 같이 잔혹하며 불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랑의 무게와 죽음의 무게가 같음을 알아야 하는 자리까지 인도됩니다. 사랑이 있다면 죽어도 상관없다고 속 시원하게 고백하게 만드는 겁니다. 이 사랑은 인간의 의도나 예상과 의해서가 아니라 우연히 찾아옵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전 3:8)

이 아담 계열과 천상의 계열이 같이 만나는 현상이 아브라함이 자기 며느리감을 고르는 대목에서 잘 나타납니다. 창세기 24장-25장에 걸쳐서 보면, 아브라함은 물론 자기 나름대로 예상은 합니다. 아들 이삭의 며느리감은 고향에서 얻고 싶다는 겁니다. 그러나 과연 누가 며느리가 되는지는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찾아든 약속에 준해서 실시되는 것을 압니다.

‘순적히’라는 단어(창 24:12)가 그것을 말해줍니다. 리브가는 단순한 며느리가 아닙니다. ‘천만 인의 어미가 되고 하나님의 원수의 정체를 드러내는 사명을 감당할 자식을 낳아야 할 여인입니다.(창 24:60) 이 두 가지 예언은, 리브가가 불임여성인 것으로 증명되고(창 25:21), 또한 태 중에서부터 원천적으로 갈 길이 달아야 한 두 운명의 아들을 한꺼번에 출산하므로서 증명됩니다.(25:23)

이러한 약속을 근거로 해서 마태복음 1장의 등장하는 자가 있었으니 바로 마리아와 요셉입니다. 부부 관계의 성립이 우선이 아니라 난데없이 성령으로 임신하고 출산되는 그 자식이 마리아와 요셉으로 하여금 하늘에 속한 성도로 만들어줍니다. 마치 이삭이 지니고 있는 선입견으로 인해 야곱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가는 순간, 자식으로 인해 전에 있던 자아가 아니라 다른 자아로 거듭나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는 자신을 과거완료로 봐야 합니다. 이미 옛 아담에 속한 몸체를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그 몸체를 죽음에 넘기고, 약속에 준한 죽음 안에서만 약속에 의해서 부활되게 합니다. 성도는 이미 죽은 자이기에 더 이상 잘잘못을 묻지 않습니다. 이게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요일 4:18)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유익에 매달리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