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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50:22-26 / 몸의 이중성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50:22-26 / 몸의 이중성

정인순 2019. 7. 24. 21:33

음성 동영상 Youtube

몸의 이중성 



이근호
2019년 7월 23일            



본문 말씀: 창세기 50:22-26

(50:22) 요셉이 그 아비의 가족과 함께 애굽에 거하여 일백십 세를 살며

(50:23) 에브라임의 자손 삼대를 보았으며 므낫세의 아들 마길의 아들들도 요셉의 슬하에서 양육되었더라

(50:24) 요셉이 그 형제에게 이르되 나는 죽으나 하나님이 너희를 권고하시고 너희를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정녕 너희를 권고하시리니 너희는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50:26) 요셉이 일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사람이 죽는 것은 흔한 일일수가 있습니다. 그렇고 그런 죽음 중의 하나이다 고 여길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이중적으로 사용하십니다. 하나는 생명나무의 의의를 담기 위한 몸이 있는 반면에, 선악과 과일을 따먹지 말라는 말씀의 위반을 나타낼 몸이 있습니다. 이 몸은 지옥 갈 저주의 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몸을 그냥 버리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 중앙에 두 개의 특별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중앙지점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개의 나무가 차지해 있습니다. 이 두 개의 나무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한 나무입니다. 생명과 죽음을 하나님께서는 계획하시고 마무리 짓겠다는 취지를 드러내는 나무입니다.

이 두 나무의 취지가 언약을 통해서 이스라엘에게만 전달됩니다. 다른 이방민족들에게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이방민족들에게는 오직 눈에 보이는 이 하나의 몸 뿐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서 이 땅에서 살다가 이 땅에서 죽으면 그만이 그 몸 뿐입니다. 이 땅 말고 다른 세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른 땅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이 있습니다. 이것을 ‘약속의 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애굽 사람들에게는 그저 옆 동네 정도로만 알 것입니다. 우르르 몰려가서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이웃 지역이라고 여길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 그 약속의 땅은 이 지상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하나의 땅 밖에 없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는 없는 땅이기 때문입니다. 그 땅은 이미 가나안 토착민들이 살고 있는 그들의 땅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그 강력한 토착민들이 다 물러나가야 비로소 보이는 땅이 ‘약속의 땅’입니다.

이 토착민을 물리치면서 인간의 능력을 개입되지 못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언약의 힘으로만 성사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죽이는 방식으로 요셉을 살려냅니다. 요셉의 몸이 이중으로 되어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의 몸이 있는 반면에 다른 한 몸은 언약에 의해서 쓰여지는 몸이 있습니다.

마치 사진을 찍고 난 뒤에 두 장의 종이가 생기는 것과 같습니다. 원판이 있는 동시에 인화지에 현상되는 종이도 생기게 됩니다. 원판은 육신의 몸이지만 그 육신의 몸은 언약을 품고 있습니다. 요셉의 이중성을 통해서 언약이 어떻게 생생하게 역사 속에서 살아있는가를 보이고자 하십니다.

그것이 ‘요셉의 뼈’입니다. ‘요셉의 뼈’는 요셉의 후손들에 의해서 강제로 애굽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권고에 의해서 기어이 그들은 이 애굽 땅을 포기하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야 하는 겁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데 요셉의 뼈가 구심점 역할을 하도록 하나님께서 작용하시겠다는 겁니다.

왜 그래야 할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하신 ‘생명의 세계’는 현 이 세상에서 ‘죽은 세계’에 ‘죽은 자’에 의해서 이끌려지는 세계이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한 예로서 노아의 경우를 생각해봅시다. 누가복음 17:26-29에 보면, “노아의 때에 된 것과 같이 인자의 때에도 그러하리라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더니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였으며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서 불과 유황이 비오듯하여 저희를 멸하였느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노아 입장에 서지 말고 그 당시 일반인들의 입장에 서서 봅시다. 각자 자신이 가진 모든 열정과 노력을 다 집어넣는 직업들이 있었을 겁니다. 그 직업의 입장에서 노아가 하는 것을 바라봅시다. 아무 소용도 없는 일을 노아가 하고 있는 겁니다. 이는 사회적으로 대화가 단절된 것이고 곧 ‘사회적 죽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노아가 이런 입장은 그 전에 가인과 아벨에게 있었던 일의 연장입니다. 가인은 아벨을 죽였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가인을 죽이지 않고 살려내시면서 그 후손을 번창시키십니다. 이는 곧 이 역사가 이어지고 살아있다는 것으로 과연 이 역사가 하나님으로부터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를 따져보게 합니다.

이 역사의 주인공은 현 살아있는 그들이 아닙니다. 그들에 의해 죽은 한 사람, 곧 아벨의 죽음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 역사는 존속되는 겁니다. 한 사람이 언약에 의해서 죽었다는 말은 모든 이들이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고후 5:14)

이 세상 사람들은 단 하나의 대지, 하나의 땅, 하나의 세상만 있을 것이라고 자부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사는 그 땅에 하나님의 계획이 담긴 ‘죽음 사건’이 담겨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그런 사건입니다. 마태복음 28:13-15에 보면, “ 너희는 말하기를 그의 제자들이 밤에 와서 우리가 잘 때에 그를 도적질하여 갔다 하라 만일 이 말이 총독에게 들리면 우리가 권하여 너희로 근심되지 않게 하리라 하니 군병들이 돈을 받고 가르친 대로 하였으니 이 말이 오늘날까지 유대인 가운데 두루 퍼지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 세상은 예수님의 ‘빈 무덤’이 무서운 겁니다. 오늘날 성도도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기에 아벨과 같은 신세에 있습니다. 성도는 자신들이 이미 ‘율법으로 죽었다’라는 사실을 압니다. 성도는 두 번 죽은 겁니다. 율법으로 죽고, 또 육신이 늙어서 죽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죽었음’을 아는 자들은 이미 언약에 의해서 자신의 몸이 쓰여지고 있음을 아는 자들입니다.

마치 요셉 같습니다. 로마서 7:4에 보면,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나무의 이중성→땅의 이중성→몸의 이중성→역사의 이중성→죽음의 이중성으로 이어지는 겁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 다른 세계가 있음도 믿기 힘들지만 더욱더 힘든 것은 이미 우리 몸이 율법에 의해서 죽은 몸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몸으로 우리의 요구나 욕망을 충족할 수 없다는 겁니다. 우리의 몸의 용도는 오로지 나무의 이중성에 있습니다. 죽어야 될 몸이기에 죽지만 생명나무에 의해서 그 죽은 몸이 언약의 살아있음을 증거하는 용도로 사용되어지는 겁니다.

율법으로 죽게 하고 그리스도의 언약을 증거하는 용으로 주님과 영원히 사는 겁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골 2:11-12)

이제 이스라엘은 요셉의 뼈 중심으로 나중에 이동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야 언약이 생생하게 살아 일하는 것이 역사 속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살아도 죽어도 주님의 언약대로 쓰여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