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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살아난 나사로 190630 본문

주일학교 설교(이근호)/주일학교 설교

살아난 나사로 190630

정인순 2019. 6. 30. 13:50



살아난 나사로 190630


음성


 

설교:이근호

녹취:정인순



죽었다가 살아날 수가 있겠습니까? 만약에 어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나면 여러분들이 그걸 보고 “나도 죽을래.” 하고 나설 수 있겠어요? 어떤 사람이 죽었는데 살아났어요. “나도 죽어볼래. 나도 죽어볼래. 나도 죽여줘요.” 이렇게 나올 수 있겠어요? 사람이 이렇게 제일 무섭고 무서운 것 중에서 최고 무서운 게 뭐냐 하면 사람이 죽는다는 거예요. 내가 없어지는 거예요. 내가.


여러분 만약에 집에서 강아지 키우는데 강아지가 만약에 없어져보세요. 강아지 없어지면 여러분들은 그 강아지를 굉장히 아끼고 좋아했는데 강아지는 누구보다도 내 말 잘 들었기 때문에 학교 갔다 오면 그 강아지부터 찾았는데 그 강아지가 어느 날 “아빠, 엄마, 강아지가 어디 갔어?” “강아지? 오늘 저녁 되면 안다.” “왜?” 저녁에 “맛있는 국물 끓여놨단다. 개탕. 보신탕 끓여놨단다. 이게 바로 강아지의 배 부분이야. 이건 다리 부분이고.” 이렇게 하면 기절할 거예요.


그것처럼 죽는다는 것은 헤어지고 사라지고 내가 믿을 수 있는 모든 것이 없어지는 거예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자기를 제일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제일 귀한 게 누구냐 하면 본인이기 때문에 동시에 내가 죽는 걸 제일 무서워하는 거예요. 귀하디귀한 내가 죽어버리면 나는 이제 사는 보람이 없잖아요.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가 죽는 것을 제일 무서워해요. 누가 와가지고 “니 돈 낼래? 죽을래?” 하면 우린 뭐라 합니까? “죽을래.” 이렇게 해요? “돈 줄게.” 이렇게 해요? “돈 줄게” 이렇게 한다 말이죠. 그만큼 돈보다도 자기 죽는 게 더 무서운 거예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실 때 예수님을 좋아했던 가족이 있었어요. 오빠가 있었고 여동생 둘, 부모는 안 계시고 가족 세 명이 있었는데 그 세 명 다 예수님을 굉장히 좋아했어요. 무지무지하게 예수님을 좋아했어요. 그래서 예수님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우리 가정에 복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 오빠 같은 경우에는 예수님을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남들한테 좋은 일 많이 했기 때문에 우리 오빠는 절대 죽을 일 없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 오빠가 아프니까 이건 우리 오빠가 죄를 지었구나. 몰래 주님 앞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그렇다. 이때는 약이 뭐냐? 예수님 불러서 예수님이 남한테 그렇게 병을 잘 고치니까 예수님을 빨리 부르는 게 최고다. 해서 오빠가 아프기 시작할 때부터 예수님 수소문 해가지고 예수님을 모셔오기로 했어요. 예수님하고 잘 아는 사이니까요. 보통 사이가 아니니까. 최측근이죠. 예수님의 가장 측근이단 말이죠. 예수님 본인도 좋아했으니까. 

 

그래서 예수님한테 “예수님이 사랑하는 나사로가(오빠 이름이 나사로거든요) 나사로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누이동생 마르다 마리아가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렇게 이야기를 했다 이 말이죠. 마르다 마리아 생각에는 오빠 죽는다 소리를 하게 되면 주님께서 만사를 제쳐놓고 후다닥 빨리 말 타고 자기 집에 올 줄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빠 죽는다는 소식을 듣고 “그래? 많이 아프겠다.” “곧 죽어가요.” “곧 죽겠지. 알았어. 간다고 이야기해라.” 그리고 난 뒤에 오빠는 더욱 아프고 오빠가 드디어 숨이 끊어졌습니다. 오빠가 죽었습니다.


죽으니까 누이동생이 예수님한테, 희망을 걸었던 예수님한테 아무 대책도 없지요. 오빠는 죽었지요. 화가 난 거예요. 예수님한테 화가 난 거예요. 그리고 난 뒤에 예수님께서 딱 생각한 거예요. “지금쯤 나사로가 죽었을 거야. 가자!” 하니까 제자들이 있다가 “죽었으면 끝난 이야기인데 왜 갑니까?” “아니야. 나사로는 죽은 게 아니야.” “방금 죽었다면서요?” “너희들에겐 죽었는데 내 눈에는 그건 잠자고 있는 거야. 죽은 것이 잠자는 거야. 가자. 잠 깨우러 가자.” 이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마르다 마리아 집에 갔어요. 그 집 근처에 목사님도 가 봤습니다. 마르다 마리아 집에. 갈릴리 근처에 있어요. 가봤는데 지금 집은 안 보이고 터만 남아있는데, 갔거든요. 갔는데 마르다, 언니 마르다가 예수님 붙들고 화가 난 거예요. “진작 오시라고 전갈 보냈는데 왜 이제 와가지고, 오빠 이미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 더 이상 필요 없습니다. 예수님 필요 없어요. 죽었는데 이제 와서 지금 장례 치른 지 나흘 되었는데 지금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걱정하지 마라. 오빠는 다시 산다.” 이렇게 이야기했거든요. 그러니까 마르다가 하는 말이 “흥! 살겠지요. 마지막 때 천사가 올 때 마지막 때 세상 끝에 무덤에서 부활해서 살겠지요. 그게 뭐 좋아요? 지금 살아야지. 죽고 난 뒤에 무덤에서 부활 되는 것은 다 부활 되는 건데 뭐 그리 좋습니까?” 이렇게 하고 있는 거예요.


옛날 사람들은 죽어서 다시 부활 되는 것을 믿었어요. 예루살렘 근처가 뭐로 포위 되어있느냐 하면 무덤으로 포위되어 있어요. 무덤으로. 목사님이 그 수천의 무덤을 사진 찍어왔어요. 그 사람들은 왜 거기 있느냐 하면 나중에 메시아가 하늘에서 하나님이 오시면 무덤이 열려가지고 그들은 부활 된다고 지금 그들은 대기 상태에 있다고 무덤에 있었어요. 사람들 참 어리석게도.


그래서 마르다가 대들었던 거예요. “마지막 날에 살 줄은 그 정도는 저도 압니다. 왜 이제 왔어요? 아프다고 미리 얘기했는데.” 그렇게 하니까 예수님께서 도리어 슬퍼하면서 “마르다야!” “왜요?” “니 날 믿나? 안 믿나?” “믿습니다.” “믿는 태도가 말씨가 왜 그래?” “믿나? 안 믿나?” “믿습니다.” 예수님께서 차분하게 “나를 믿는 자는 죽어서도 살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는 법이 없다.” 마르다가 “흥! 그런 이론은 누가 모릅니까?”


그리고 난 뒤에 이번에는 마리아가 나타나가지고 “예수님, 너무 슬퍼요. 왜 이제 왔어요?” 하고 우니까 옆에 있는 친척들도 같이 우니까 예수님이 그게 안타까워서 “이들이 이렇게 없었는가?” 하고 같이 예수님도 우시네. 울음바다가 되었어요. 실컷 울고 난 뒤에 “가자.” “어디로요?” “너희 오빠 죽었다면서? 죽었으면 묻힌 데가 있을 게 아니냐?” “이미 시신 된 지 나흘 되어가지고 이미 끝났습니다.” “가자!” 가니까 무덤이 있어요. 돌무덤이 이렇게 있단 말이죠.


돌무덤이 있으니까 예수님께서 “저 돌문을 좀 치워줘라. 돌문을 치워라.” 치우는 사람이 돌문을 밉니다. 그 돌무덤이 갈릴리 바닷가에 있어요. 돌무덤을 미니까 “아휴! 냄새!” 죽은 지 나흘 되니까 사람 썩는 냄새가 나는 거예요. “아휴! 냄새!” 억지로 참고 이렇게 해가지고 낑낑 하고 열어놨단 말이죠. 열어놨을 때 시체밖에 없으니까 “예수님께서 이미 죽었는데 왜 저렇게 하나?” 하는데 예수님이 부릅니다. “나사로 거기 있나?” 사람들이 “아휴, 죽었는데 뭘 알아듣길 해.” 속으로 “말도 되는 소리를 해야지. 죽은 사람이. 죽은 지 나흘 되었는데, 죽은 지 15분 같으면 몰라도. 나흘 되었는데, 썩은 냄새 나는데.” “나사로 거기 있나? 준비 되었나? 그러면 나와!” 나사로가 걸어 나오는데 죽은 사람을 베로 꽁꽁 묶었기 때문에 꼼짝 못하고 뛰뚱 뛰뚱 살아나오는 거예요. 사람들이 “으악!” 경악을 해서 “와!” 예수님 보고는 안 놀라고 죽은 사람, 죽었다가 살아나온 사람 보고 놀라고 있어요.


그만큼 사람들이 예수님을 얼마나 우습게 여겼단 말이죠. 살려준 예수님 보고 “으악!” 이래야 되는데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게 한 사람 보고 “으악!” 하고 있으니까 본인들이 얼마나 무식하고 본인도 누군지도 모르고 있다는 뜻이에요. 예수님께서 “나사로 힘들겠다. 누가 가서 저 묶여있는 것 풀어줘라. 붕대 같은 거 풀어줘라.” 푸니까 나사로를 만났어요. 나사로가, 그제사 마르다 마리아가 “오빠! 오빠!” 끌어안고.


예수님께서 일부러 아플 때 안 갔어요. 왜 일부러 안 갔느냐? 아플 때 가게 되면 예수님이 병 고치는 정도, 병 고쳐주는 사람으로 알았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아픈 걸 다 알고 죽기를 기다렸지요. 모든 사람이 절망하기를 기다렸어요. “끝났어. 끝났어. 예수고 누가 와도 소용없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때 주님께서 오빠를 살려줬는데, 이게 우는 장면이고요. 이 뒤에 장면은 뭐냐? 유령 같이 “으악!” 하고 놀라는 장면이에요. 실제예요. 이게 팩트예요. 실제 사건이에요. 실제 사건. 예수님이 이 정도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이 이 정도예요. 부처는 여러분을 지옥 보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죽었다가 살아나게 하신 거예요. 여러분도 이 예수님을 믿으면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예수님을 너무 쉽게 약하게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 나보다 더 소중한 분이 예수님인 것을 이제는 받아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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