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홍민희 강남-요한복음 21장 12절(꿈속에서) 190618a-이근호 목사
자, 시작하겠습니다. 요한복음 21장 12절 그리고 13절 14절까지 제가 읽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와서 조반을 먹으라 하시니 제자들이 주님이신 줄 아는 고로 당신이 누구냐 감히 묻는 자가 없더라. 예수께서 가셔서 떡을 가져다가 그들에게 주시고 생선도 그와 같이 하시니라. 이것은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것이라.”
이 본문에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났을 때에 그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과 돌아가시기 전에 예수님과 그런 신체적인 연속성을 또는 동일성을 갖느냐 갖지 못하느냐 하는 그 문제를 예수님이 스스로 문제 제기하시고 스스로 정답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시 전에 예수님과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난 뒤의 예수님이 동일한 예수님입니다. 왜? 고기도 같이 잡수시고 떡고 같이 먹으니까 동일한거에요. 동일한 예수님의 신체를 갖고 있으나 제자들은 그 예수님 돌아가시기 전의 예수님과 후의 예수님을 동일하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자들 자체에게 문제가 있는거에요.
그 문제가 뭐냐 하면 그 문제에 대해서 요한복음 20장에서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하는 거기서 이미 주께서 그 내막을 소개했어요. 믿음이라는 것이 형식적 의례적인 요소를 두고서 믿는 것 이게 인간의 한계입니다. 인간의 종교의 한계입니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요소를 두고서 믿는거에요. 이게 교회사에서 그동안 교회 이천년동안에 계속 교회가 추구한 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을 믿고 예수 믿을만한 그런 형식적이고 의례적 의식이죠. 제사방식 이런 것. 이런 것을 두고서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하고 하나님께 믿습니다라고 시도 해온거에요. 거리를 두고서.
내가 믿어야할 분은 저쪽에 있고 내가 믿는 주체는 나는 여기 있고 중간에 거리를 두는거에요 거리를. 거리를 두는 이 믿음에 대해서는 주님께서는 생활 밀착형 신앙을 줘버린거에요. 생활밀착형. 그럼 뭘 빼는 거에요? 그 거리를 빼는 거에요.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요소를 빼는 겁니다. 몇 시에 기도해야 되고 몇 시에 뭐 헌금은 따로 해야 되고 이런 모든 요소를 빼버리고 생활 속에 직접 주님께서 거리를 없애버리는 식으로 믿음을 줘버립니다.
그 믿음을 제가 좀 함축해서 표현한다면 이렇습니다. 믿음이 필요 없는 신앙. 함축해서 이야기합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거리를 두고 믿는게 믿음이거든요. 어떤 사람이 만약에 나 당신 좋아합니다 믿습니다라고 할 때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좋아한다고 하면 우리는 용납이 돼요. 그런데 좋아합니다 해놓고 10m 에서 5m 좋아합니다 3m 좋아합니다 10cm 이러면 막 땀 냄새나고 막 이러면 우리는 밀치죠.
좋아하는건 좋아하는건데 너무 가까이 하지 마세요라고 우리는 밀어내잖아요. 우리 약간 떨어져서 믿읍시다. 약간 떨어져서 사랑합시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상대방을 좋아하는건 좋은데 너무 사생활까지 너무 깊숙이 개입을 해버리면 이게 부담이 되고 감당이 안 됩니다.
내가 나인지 내가 저 사람 것인지 분간이 안되잖아요. 내 것이 없어질 때는 우리는 위기를 느낍니다. 내 것. ‘나’라는 어떤 것이 뭔가 이렇게 마련이 되야 되지 ‘나’라는 댐이 무너져버리면 우리는 살 이유가 없어집니다. 그래서 하지요. 친구도 좋지만 너무 많이 알려고 하지마라. 너 너무 많이 알려고 하면 다친다. 다치죠.
이것은 뭐 사람뿐만 아니고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예수님도 마찬가지에요. 예수님이 우리 복주는 것은 좋은데 너무 가까이만 오지 마세요. 감당이 안 됩니다. 주님이 너무 가까이 오면은 내가 나만의 생활이 이게 파괴되고 날아가버리면 내가 살 이유가 같이 덩달아 파괴되어버리잖아요.
사람은 뭐 좀 고민해야 재미있지 않습니까? 뭐 내 문제도 좀 고민하고 그 고민이 속 시원하게 해결될 때 “그래! 사는 맛이 이거야.” 뭐 이런게 있는데 나를 너무 가까이 찾아와서 내 것 자체가 소실되어 버리면 고민거리도 없다면 그건 왜 삽니까? 사는 재미가 없잖아요. 희망하고 성취되고 또 희망하고 성취되고 사는 재미가 바로 여기서 사는 재미가 있는 거에요.
내가 기대하는대로 이루어질 때 “그래! 나는 아직 여기 있어. 나는 여기 있는거야. 나 분명히 살아있어.” 내가 기대할만한 것을 자꾸 찾아요. 내가 기대할만한 것을 찾고 내 뜻대로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숨통이 트이죠. 사는 숨통이 트여지는 겁니다. 아직 9승에 머물러있는 류현진. 10승을 내다볼 수 있어요. 16살 밖에 안 되는 이강인. 나중에 20살 되면 메시가 될지 날두형님이 될지. 호날두가 될지 모르거든요.
그런 희망 품고 직장에서 오는 모든 괴로움을 이강인과 류현진에게 쏟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게 뭐냐? 도박이고 도박이 주는 효능, 특히 도박이 심하면 다른 것으로 바뀌죠. 주식. 주식, 도박하고 같은거거든요. 도박, 주식 같은 겁니다. 주식은 좀 고상한 거고 좀 유식해보이고 도박은 이거는 막무가내고요.
홧투는 뭐 생각하는건 귀찮아. 딱 해가지고 그냥 가자. 희망이 중요하니까. 희망이 중요하지 내가 희망을 품는다는 것 내가 살아가는 보람이 있다는 것 이 도박보다 좋은게 어디 있어요. 도박보다. 아가씨들이 30대 아가씨들이 직장생활하면서 연차내가지고 배낭 매고 북유럽 여행가는 것은 이건 희망. 혹시 아나? 꿈에 예상치도 못한 이상형 남자를 만날지. 이래가지고 스페인 돌아다녀가지고 유해진 만나고 돌아다니고. 온 천지 돌아다니면서 헝가리 가서 물에 빠지고 하지요.
희망이라는 것은 나의 세계의 파괴요 나의 세계의 부풀기. 나라는 것이 도대체 어디까지 확대될 수 있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나만의 것, 거기서 나만의 것을 꼭 쥐고있어야 되는거에요. 그래서 우리는 이 나의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는 무슨 행동이 나오느냐 하면 괜찮은 분을 우리가 믿기로 작심합니다.
나 이제 오늘부터 예수 믿기로 작심했다. 나 하나님 믿기로 작심했다. 왜? 그게 내 희망사항 중에 희망 wish list 내가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등장했기 때문에. 예수님 믿는 그것이 내가 앞으로 내가 더 잘 되기 위한 하나의 요소가 된다고 희망을 갖고 싶어. 다른데 희망 없거든. 하나님 믿는데 희망 갖고싶어 라고 해서 믿는거에요.
그래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거리를 두고 믿는게 믿음이죠. 오늘 요한복음 21장에서 여러분들이 21장에서 내용이 뭡니까 라고 묻는다면 누가 봐도 알 수 있는 딱 한마디로 뭐냐 하면 제자들이 있는데 주님이 찾아왔다 그 이야기거든요. 21장 이야기가.
제자들은 그냥 있는데 제자들은 예수님과 관계를 끊었어요 이미. 있는데 그냥 예수님이 그냥 찾아온거에요. 20장 한번 봅시다. 20장 28절에 봅시다. 27절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이게 뭐냐 하면은 일단 예수님하고 도마하고 이야기해가지고 인간에게 믿는다는 의미는 이렇게 통용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 믿는다는 의미가 뭐냐 하면 내가 믿는다는 거에요. 인간에게 믿는다는 것은 앞에 뭔가 생략되어 있는데 생략되어있는 것을 집어넣으면 누가 믿는다? 내가 믿는다. 내가 믿을만한 누구를 믿는다는 거에요. 이게 인간의 믿음의 한계고 전부에요. 이것 벗어나는 것은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는 여기에다가 뭘 집어넣느냐 하면 인간의 믿음의 한계가 어디서 왔느냐 하면은 바로 인간의 육체 육신을 본인이 만지고 보고있다는 그 점. 보고있다는 그 점이 인간이 자기 믿음의 한계에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다시 이야기합니다. 앞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내가 믿는다’를 인간이 자기가 포기를 못해요. 내가 믿는다.
내가 믿으면 그건 믿음이 아니에요. 그럼 내가 믿는 믿음을 내가 믿는 믿음이 믿음이 아니고 믿음도 아니고 잘못되었다고 이야기하려면 주님께서 뭐냐 하면 인간의 육체에서 할 수 있는 한계가 뭐냐? 보고 믿거든요. 그래서 예수님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보지 않고 믿는게 믿음이다 라고 했을 때 이건 결국은 뭐냐 하면 곧 “인간의 육체는 이런 정도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얘들아” 라고 한거에요.
그러니까 예수님이 요구하는 것은 네 육체의 한계를 벗어나서 믿는 믿음을 가져야 이게 진짜로 나와 너 사이에 관계다 라고 하는 겁니다. 무슨 수로 인간이 자기 육체를 벗어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21장에 와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인간은 실현할 수 없기 때문에 누구 쪽에서? 주님 쪽에서 실현하시는 거에요.
그 방법은 뭐냐 하면 보고 저쪽에 계시고 우리는 이쪽에 있어서 거리를 띄워두고 믿겠습니다 하는 그것의 거리를 없애버리는 거에요. 없애는 방법은 뭡니까? 주님께서 우리 안에 들어와 버리는 겁니다. 주님께서 들어와버릴 때 ‘아 주님은 아마 귀신일거야 유령일거야’ 라는 생각을 할거란 말이죠.
육체를 가지고서는 그럴 일 없어. 인간의 육체는 거리를 띄우고 보고 믿는게 이게 육체가 할 수 있는 전부의 최고의 믿음인데 육체를 가진 이상은 믿음은 성립되지 않는다에 대해서 주님께서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육체를 가지고도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생산해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육체를 가지고 그냥 제자들에게 찾아온거에요.
그게 뭐냐 하면 오늘 본문 14절에 와서 떡도 같이 먹고 생선도 같이 잡수시는 겁니다. 그럼 예수님은 육체는 육체성 그대로 있지요? 떡을 먹고 생선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인간이 떡을 먹고 생선 먹는 것과 동일한 육체를 갖고 있다 이 말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귀신 믿듯이 믿자 지금 이런 믿음이 아닌거에요.
귀신 믿듯이 믿자하면 자칫하면 영지주의가 되고 요한일서에서 주의사항 했잖아요. 예수님의 육체로 오신 것을 인정하지 않는 자는 그게 바로 적그리스도라고요. 그러면 육체로 온걸 믿지. 육체로서 믿어버리면 우리는 믿음이 아니고 보고 믿는 믿음밖에 안된다니까요. 거리를 두고 믿는거에요. 교회역사를 통해서 교회는 어떤 식으로 인간을 속여왔습니까?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형식과 또 뭡니까? 형식 가지고 그냥 형식 가만 둡니까? 피아노만 두고 피아노만 두고 예배드리면 예배에요? 피아노를 뭐 띵띵띵 쳐야될게 아닙니까? 형식 + 뭐라고 했습니까? 의례 또는 의식. 찬송 부르기 4절까지, 기도하기, 대표기도 누구하기, 어느 특정 장소에 모이기, 특정 시간에 모이기.
이게 전부다 주님을 믿을 때 하나님 믿을 때 우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런걸 집어넣고 그 집어넣은 것을 행함으로 우리는 믿음 있는걸로 치자고 교회는 그렇게 사람들을 속여온거에요. 생활밀착성 믿음이 아니라니까요. 거리를 두고 믿는거에요. 그래서 주님한테 이거이거 했습니다. 뭐 수련회했습니다. 뭐 십일조했습니다. 선교비 냈습니다. 이런 식으로 하는거에요.
제가 지난 낮설교에 ‘범죄와의 전쟁’ 그 내용 이야기 했지요. 최민식. 느그 서장하고 밥묵고 등밀고 느그 서장하고 손톱깎고 나 이정도야. 그렇게 제가 예를 들었지요? 나 교회와서 십일조했고 나 기도했고. 그런데 그걸 뭐라고 한다 했죠? 허당이라고 했죠 ‘허당’.
그래서 주께서 행하는 것은 뭐냐 하면 거리를 줄이는 믿음, 그 믿음을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뭐라고 썼어요? 여기 한번 주일학교 애들처럼 다같이 읽어 봅시다. 시작. ‘믿음이 필요없는 신앙’. 믿음이 필요 없는 신앙이에요. 여기 필요없는게 중요해요. 믿음이 필요없어요. 구태여 내 쪽에서 믿을 필요가 없다니까요. 내 쪽에서 믿는다는 것은 거리를 이미 주님 여기까지만 오시고 더 이상 오시면 안 됩니다 되는 거에요.
인간의 육체가 ‘나’라는 육체가 늘 보고 있기 때문에 보는 믿음은 믿음이 아니라면 보지않고 믿는 믿음이라면 이거는 인간의 육체의 능력을 육체의 한계를 넘어서는 믿음이죠. 그러면 그 믿음은 주님께서 우리가 열심히 충성 봉사하는게 아닙니다. 흔히 목사들이 21장 이야기하면서 시몬 베드로야 네가 날 사랑하느냐 이 대목 가지고 얼마나 이 대목 청년회 헌신회 할 때 얼마나 인용합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여전도회 헌신예배.
이거 설교하고 난 뒤에 끝나고 돈 걷고. 이거 얼마나 해댔습니까. 그 설교에 모든 설교가 이구동성 하는게 뭐냐 하면 이제 주님을 사랑하자 이 이야기하고 있어요. 주님을 사랑하자고요. 베드로처럼. 주님이 찾아왔다는 것은 이제는 네가 네 육체를 네가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사용하겠다는 겁니다.
내가 사용하고 네 육체에다가 내가 한 그 모든 것을 내 육체로 사용하고 예수님이 하신 모든 그 성공한 것을 거기에다가 다 집어넣겠다는 겁니다 그 내용을. 그러면 그 내용을 좀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이겁니다. 역사에 대해서 비역사로 찾아오신 분. 인간의 육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항상 자기 스토리를 구성하게 되어있어요.
이것은 본인이 하고싶어하는게 아니고 스토리가 구성되는데 이것은 스토리 구성 되는게 왜 그러느냐 하면 기억 때문에 그래요. 계속 인간은 자기 과거 현재 미래를 예상하고 과거는 자꾸 생각이 나고 이게 하나의 연결된 스토리가 있거든요. 인간은 자기 역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기 자신으로 봅니다. 자기 자신의 본질로 보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구강의 때도 했지만 자기 역사의 본질이 선악과를 따먹었거든요. 그럼 여기서 뭐가 나오느냐 하면 자기 역사의 본질에 대해서 뭐로 평가 하겠어요? 선이냐? 악이냐? 평가하겠지요. 그럼 선이냐 악이냐 평가하니까 이 자체가 이 인간의 기억 속에 나는 좋은 인간인가 나쁜 인간인가 그게 유지된다는 말은 아직도 선악체제에서 구출됐어요? 안됐어요? 안된거에요.
그런데 그게 뭐라고 하느냐 하면 그게 ‘역사’라 하거든요. 사람들은 역사를 뭐로 보느냐 하면 이걸 현실로 봅니다. 현실. 현실로 보기 때문에 사람들이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이유가 자기 현실을 고수하다 보니까 자기의 괜찮은 스토리를 유지하다 보니까 같은 말로 자기 역사를 고수하다 보니까 같은 말로 자기 현실만이 진짜 현실로 고수하다 보니까 예수님의 그 잔소리에 예수님의 그 지적질이 무엇을 훼손한다고 보는거에요?
나의 괜찮은 역사를 나의 괜찮은 가치를 훼손한다고 보고 밀쳐버리니까 돌아가신 거에요. 뭐 남 얘기할거 없지요. 12제자. 12제자가 예수님을 떠났잖아요. 뒤에 제자라는 말이 부끄러울 정도입니다. 원래 제자가 되려면 스승이 있는 조건하에 제자가 되는데 스승 없이 자기들끼리 스승입니까? 스승이 없는 제자가 어디 있어요?
제자들이 스승을 내쳤다 이 말이죠 제자들이. 나 몰라라하고 비겁하게. 가룟 유다가 주동되고 나머지도 마찬가지에요. 도망을 친거에요. 제자 그만 할래 이 말 아닙니까. 그러니까 그들은 제자는 뭐냐 하면 스승과 제자 사이를 거리를 둔거에요. 스승답게 행동하면 내가 스승으로 인정해 드리겠습니다 하는 조건하에 계속 스승으로 대우한거에요.
그런데 그 스승이 내가 원하는 스승이 없을 때는 나는 언제든지 그 스승을 떠날 그런 인간의 본성을 발휘한겁니다 제자들이. 그걸 가지고 저는 뭐로 보느냐 하면 자기 건전하고 자기 고상한 역사를 사수하려면 결국은 누굴 결별해야돼요. 누구하고? 예수님하고 결별해야돼요. 예수님하고 보고 믿겠다고 거리를 둔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 쪽에서 언제든지 철회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내 쪽에서.
교회라는게 뭡니까? 교회라 하는것은 자기 역사 자기 스토리 내 인생에 대해서 계속 좋은 쪽으로 좋은 쪽으로 역사가 써나가는 조건하에 나는 교회를 다닐 용의가 있습니다. 이게 교회 아닙니까? 그렇지요? 교회에서 사람이 날 놀린다. 미쳤다고 그 교회 다닙니까? 안 나오죠. 내 역사에 유리하게 작용할 조건하에 교회 나와요.
이 말은 내 조건에 유리하다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이렇습니다. 나는 시시한 인간되기 싫다는거죠. 시시한 인간되기 싫다. 다른 말로 하면 유명한 그다지 유명한 사람되면 귀찮으니까 그냥 대충 어쨌든 간에 유명한 사람이 부럽다는 것. 유명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은근한 그런 마음이 있어요.
유명하다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우리가 속한 현실 세상 조건에 맞아 떨어졌다 이 말이거든요. 이 세상 조건에. 그런데 여러분들이 우리 잠시 하나님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 말 듣겠습니까? 아니면 전혀 이름도 없는데 바른 소리하는 사람 말에 기울이겠어요? 여러분들이 하나님이시라면.
사람들에게 높임 받는 그 사람 편에 서시겠습니까? 아니면 높임 받는 것 때문에 무시당해가지고 시시하게 처리하는데 도저히 참을 수 없어 진리를 외치는 그 사람 말을 듣겠어요? 어느 쪽이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이라면. 안 유명해도 괜찮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왜 자꾸 우리는 유명한 것을 부러워합니까? 내 자식이 유명해지고 내 친척이 유명해지고.
우리나라 20세 이하 월드컵 가운데서 최준하고 이강인 그것밖에 생각 안나요. 그 애 또 있다 빛광연하고. 왜? 언론에 안 나오니까. 다른 사람은 안 유명해요. 얼마나 우리가 이 땅에서 사람에게 높임 받는다는 것이 이게 하나님에게 미움 받는 조건이라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수용했습니까?
주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지만 그 보지 않는다는 것이 유리하다는 뜻이 아니고 소위 너도 나도 보이기를 힘쓰는 가운데 처져버린 사람들의 목소리. 그들의 존재의 의미. 거기에 귀 기울이냐를 우리에게 묻는 거에요. 큰 교회 목사 유명. 나도 어떻게 유명해졌는가? 유명하다는 말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세상이 끼어들었다는 거에요.
끼어들어서 눈치를 누구 눈치 보느냐 하면 주님 눈치 보는게 아니고 하나님께 복 받아 가지고 세상에서 떠들 수 있는 꺼리를 만들겠다는 거에요. 하나님께 복 받아가지고. 나 이 정도야 라고 세상에 나설만한 어떤 꺼리를 만들고 싶다는 거에요. 어떤 작은 차가 와서 내 큰 차를 받아버리면 흠집은 나도 수리하면 그만이에요.
그런데 트랙터가 와서 거대한 트랙터나 트럭이 와서 나를 받아버리면 우리는 흔적 없이 찌그러지잖아요. 그게 밀착성 믿음이에요. 생활밀착성. 완전 주님이 와서 찌그러져버린 거에요. 뭐 믿음이고 자시고 뭐 건질게 있어야 건지지. 유명하고 싶어도 뭐가 있어야 유명하죠. 할 때마다 박살내고 할 때마다 박살내는데요.
왜 이렇게 나를 괴롭히고 나를 천식이고 기침이고 왜 이렇게 하게 하십니까? 네 몸 아니거든. 그게 밀착성 믿음이거든요. 질문 자체가 잘못됐다는 거에요. 왜 제가 감기 걸립니까 질문해서는 안 되고 이번 차례는 감기입니까? 이래야돼요. 이번 6월달은 감기로 보내기로 작정하셨습니까? 오! 네가 믿는구나. 생활밀착성 믿음을.
감기 안 걸려서 멀쩡한게 기분 좋아요. 감기 걸리면 사람이 찌질해지고 행동에 뭐하나 반듯하게 행동 못합니다. 머리가 아픈데 뭐 신경쓸게 어디 있어요.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그것 조차도 주께서 나를 활용하시고 사용중이라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그게 바로 유령처럼 믿는게 아니고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에요.
이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다. 소자 없는 믿음이 좋은 믿음이 아니고 소자를 소자로써 우리를 작은 자로써 지극히 작은 자로 다루신다 그런 관계성이 바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에요. 왜? 세상 사람은 지금 큰걸 다 보기 때문에.
다시 이야기합니다.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이게 자기 스토리를 만들어요. 자기 스토리를 만들면 스토리가 원해 간격이 생기기 마련인데 여기 시작부터 끝이 생기거든요. 그런데 비역사라고 하는 것은 그걸 완전히 무시해버립니다. 시작 끝이 없어요. 그건 왜 그러느냐 하면 시작 끝을 예수님이 시작하고 예수님이 마감하는데 네가 그렇게 시작 끝을 만들면 안된다는 겁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고 하시고 제자들에게 맡기지 아니하시고 제자들은 할 능력도 없으니까 예수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육신, 육체를 가지고 실제로 육체를 가지고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육체로 말미암아 육체의 요소가 우리 제자들의 요소 속에 육체 속에 이것이 들어오게 되요. 예수님이 여기 오늘 본문에 여기 14절에 보면 몇 번 나타났다고 했습니까? 세 번째지요? 첫 번째는 제자들의 문에 요한복음에 보면 첫 번째는 제자들이 문닫고 벌벌 떨 때 찾아왔고 두 번째는 도마한테 찾아왔고 세 번째는 여기에 찾아오신거에요.
그런데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는 하면서 첫 번째는 성령 이야기하셨어요. 성령이 네게 오실 것이다. 두 번째는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믿음이다. 그러면 성령이 오셔서 그 다음에 우리를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주신다. 이게 성령 오셨다 첫 번째. 두 번째는 보지 않는 믿는 이야기.
세 번째는 뭐냐 하면 이 두가지를 합쳐서 성령께서는 이런 패턴으로 일할 것이다. 제자들이 그냥 자기들끼리 고기잡는데 쳐들어온거죠. 갑자기. 쳐들어왔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어디계시다가 오신거에요? 예수님께서 어디 계시다 오신거에요?
자, 제자들 7명이 여기서 고기를 잡고 있습니다. 고기를 잡고 있는데 이 순간 나타나기 5초전에 나타나기 5분전에 예수님 어디 계십니까? 어디 계시지요? 다시 이야기할께요. 제자들은 자기 기억 속에 자기 육체가 있는 이것을 가지고 뭐로 봤습니까? 이걸 현실로 보죠. 현실. 이걸 현실로 봤지요.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 생각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다고 되어 있지요. 자기들 현실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은 죽은거에요. 죽었는데 첫 번째 두 번째 오실 때 죽으면 안 나타나야 돼요. 그런데 주께서 나타났잖아요.
현실의 죽음에 안 나타나는 것이 현실의 원칙인데 공식인데 현실에서 죽으신 분이 부활해서 나타났다 이 말이죠. 그러면 이 말은 뭐냐 하면 그들이 갖고 있는 현실관을 포기를 해야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겁니다. 포기를 하게 되고 주님이 죽으셨지만 지금은 살아계시다는 것을 지금 현실에 넣으려면 이렇게 그냥 더하기 플러스해서 보태서 할 수는 없고요.
뭘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냥 보태버리면 수월하게 보탤 수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 현실관 때문에 죽었으니까 죽으셨기 때문에 이 죽으신 분이 나타날 때는 이 현실관을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을 해야 되죠. 부정을 하는 방식으로 결합이 되는 겁니다. 그럼 이 현실은 뭐냐? 꿈이죠. 꿈이죠. 오늘 제목은 “꿈속에서”에요. 제자들은 현실로 보지만 주님은 꿈 같은거에요.
그들의 스토리 역사, 역사라는 것 현실이라는 것 전부다 꿈속에서 복작복작거리는 것이고 꿈속에서 구성된겁니다. 그들이 꿈을 꿈인줄 모르고 현실이라고 우기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현실 밖으로 나가버리신 거에요.
나가버리시고 안 찾아오시면 그만인데 세 번씩이나 찾아왔다는 말은 결국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이 모든 현실이 일종의 연극 무대가 되어 버리고 주님은 연극 무대를 조종하는 뒷부분에 계시다가 인간들이 이해하는 무대에 오신거에요. 무대 뒤에 연출자로 계시다가 온거라 이 말이죠. 예수님이 계신 것이 진짜 현실이라면 이쪽은 뭡니까? 그냥 무대죠. 가상무대. 그냥 꿈속인겁니다. 꿈속이에요.
이 무대에서는 보는게 전부에요. 보는게 전부고. 그리고 이 세계에서는 자기의 역사 아까 기억 속에서 내가 얼마나 선하냐 악하냐 그 논리 외에는 다른 논리는 통하지 않는 세계. 그냥 그 꿈속에 있습니다. 그 꿈속에 있으면서 그들은 이유도 모르는 채 죽습니다. 이유도 모르는 채 죽어요.
그들이 예수님을 자기 현실을 현실답게 고수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걸음아 나 살려라 하면서 버렸어요. 그런데 주님께서 죽고 난 뒤에 안 찾아오면 자기는 최선의 노력 인간으로서 할 도리는 다 했다고 자부하겠는데 찾아옴으로 말미암아 그들이 예수님을 무서워서 예수님과 같이 있다는게 무서워서 도망쳤다는게 그게 뭐가 되느냐 하면 무의미가 되요. 무의미.
그걸 제가 꿈이라고 했잖아요. 꿈은 뜻은 뭐냐? 헛방이죠 헛방. 꿈은 백날 해도 그거 아무 실용성 없잖아요. 꿈은 개꿈으로 끝나지 않습니까? 그렇잖아요? 아무 의미 없는거에요. 그 꿈속에서 그들은 뭐라고 외치느냐 하면 제발 살고싶다고 외치는 거에요. 꿈속에서. 왜 살고 싶으냐? 죽음이 목을 졸라. 매일같이 죽음이 목을 졸라. 숨이 막히도록.
남자 여자 어린아이 할 거 없어요. 헝가리에서 죽이고 세월호에 빠져서 죽이고 그것보고 무서워서 물조심하라고 하고. 여자가 밤늦게 다니다가 뭔가 당하게 되면 그걸 보는 모든 사람은 뭐라고 합니까? 야 이 세상이 이렇게 험하니까 너는 일찍 들어오너라. 일찍 들어오라는 말은 죽기 싫다 이 말이거든요.
죽기 싫다는 그걸 그들은 생생하게 실감나는 현실로 보지만 그들은 지금 꿈속에서 죽기 싫은거에요. 꿈속에서. 뒤통수 때려가지고 꿈속에서 깨어나면 참 좋겠는데. 꿈속에서 살고 싶고 꿈속에서 죽기 싫고 꿈속에서 출세하고 싶고 꿈속에서 승진하고 싶고 꿈속에서 감기 낫고 싶고 꿈속에서 알레르기 없애고 싶고. 전부다 모든 돌아가는 것이 한낱 꿈에 불과한거에요 꿈에.
인간은 역사라고 하지만 주님보시기에 꿈인거에요. Dream. 꼭 자신있는 영어만 해요. 이 문제를 주님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 주님께서 이렇게 해결하십니다. 제자들이 한 곳에 모여 있을 때 고기잡을 때 주께서 사전에 예고 없이 쳐들어왔다는 말. 그것은 뭐냐 하면 그걸 가지고 현장성입니다 ‘현장성’.
현장성이라고 하는 것은 누가 작살나고 날라가느냐 하면 스토리와 다른 말로 하면 역사죠. 역사성이 역사라는 것이 무의미해져버려요. 역사가 무의미해버려요. 류현진이라는 투수가 저는 중계방송 안봅니다만은 예를 들어서 야구 하면서 4회까지 2:0으로 이기고 있다고 칩시다. 그건 모르지만 하여튼 2:0이라고 칩시다.
할 때 잘하면 뭐하겠다는거? 10승하겠다는 이렇게 되죠. 잘하면. 잘하면 실수 없고 뒤에 선수들이 잘하면 10승하겠다라고 생각하는데 2:2 됐잖아요. 수비실수 때문에. 10승하겠다 할 때 이게 예고죠. 예고, 기대죠. 그럼 이건 뭡니까? 이거는 현재 상황은 2:0이지만 계속 앞으로도 2:0으로 나갔으면 좋겠다죠? 그럼 이거는 이미 어디서 벗어났느냐 하면 현장성에서 오바하고 있는 겁니다. 현장성에서 오바하고 있는 거에요.
우리 아들이 있는데 아들이 늘 모의고사하면 전교 1등. 전국수석해도 0.1%. 이대로 가다가는 서울대 또는 서울의대 들어가겠다라고 하지요? 기대하지요? 막상 수능 쳐서 본고사에 조져버렸는데요. 한칸 밀어썼는지 해가지고 재수한다고 할 때 결국 이것은 뭘 하느냐 하면 그 사람이 꿈속에 있으면서도 꿈을 뭐라고 여기느냐 하면은 황당하게도 꿈을 뭐로 봤습니까? 현실이기를 간곡히 원하고 있는거에요.
그러면 주님께서 그건 꿈은 꿈이야라고 하는 방법은 뭐냐 하면은 현장성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거에요. 내일 일은? 내일 염려는 언제 하라고 했습니까?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고 했지요? 오늘 이야기하셨죠? 주님께서. 그럼 내일 안됐지요? 그럼 염려하란 말입니까? 염려하지 말란 말입니까?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에요. 내일 되면 또 바쁜데 그게 아예 염려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오늘 염려는 내일 하라니까. 오늘은 내일 염려하지 말라는 거에요.
그게 현장성이에요. 현장성은 뭐냐? 인간은 애초부터 무능하다는 겁니다. 무능한거에요. 철저하게 무능한겁니다. 이 무능을 이 현장성을 너무나 이게 듣기 싫어서 나름대로의 미래를 개척하는 것, 그게 바로 종교라는 거에요. 기독교, 불교, 천주교, 이슬람교. 이게 종교가 뭐냐 하면 현장성에서 자기가 획득한 그 재료를 가지고 그 정보를 가지고 내 운명은 아마 몇 년 후에 죽으면 그렇게 될거야라고 예측하는 거에요. 그렇게 되면 자기 역사를 그대로 고수하게 되지요.
이 말은 뭐냐. 아니야 아니야 이건 절대 꿈이 아니야 이럴거라고요. 꿈이 아니라고 누가 이야기합니까? 인간들 못난 인간들 자기끼리 이야기 하고 자기끼리 협의하고. 종교라는 것은 누가 만드느냐? 인간이 만들어요. 어떻게? 서로 협의해서 만들어요. 주님은 종교라는 것을 만든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종교가 하나의 중간의 하나님과 신과 인간 사이에 중간에 거리를 두게 하는 하나의 요소가 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용납한 적이 없습니다.
펜팔하고 글로써 글 남기고 주고받고 메시지 남기고 그런건 좋아요. 그러나 현장에서 딱 보면 그 얼굴이 그 얼굴이 내가 예상한 얼굴이 아니다 이 말이죠. 요새는 화상통화 있어서 좀 확인이 됩니다만은. 전에 화상통화 안될 때 펜팔은 누구 것 베껴가지고 얼마나 이쁘게 써요. 그러고 만나보면 여자나 남자나 서로 상상한다고요.
아 글 보니까 글을 보면 그 사람을 안다고 키는 180이 될거고 쭉 이렇게 하는데 막상 현장성 딱 와보니까 현장에 둘 다 카페에 앉았는데 서로 다른 사람 찾고있어요. 저렇게 뚱뚱할 리가 없을거야. 저렇게 대머리는 아닐거야 이러면서 찾고 있다 이 말이죠. 장미꽃을 들고 만납시다 이렇게 하는데 만약에 여자 쪽에서 먼저 남자 장미꽃을 보고 자기의 꿈에 그리던 것과 다르다면 장미꽃 몰래 쓰레기통에 갖다버려요. 오늘 안 나온걸로 쳐요.
네가 뭔데 내 역사성에 훼방을 놓느냐 이런 식이에요. 네가 뭔데. 인간이나 제자들의 꿈을 확 깨놓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입니다. 설마 죽을 줄은 몰랐죠. 내가 죽으신 분 따라가려고 내가 3년동안 했다는 내 처지가 내가 바보같아서 실망스럽다. 이게 제자들의 마음가짐이에요.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나 우리나 항상 일관되게 생각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은 현실이고 그리고 나는 그냥 있는 것이 아니고 건전하게 선하게 존재하고 나는 내 탓 할게 없다는 것을 전제로 깔고 그 다음부터 신을 찾고 메시아를 찾는 거에요. 그게 종교라니까요 그게. 나는 하등의 문제가 없고 문제 있더라도 뭐 좀 있겠지. 그러나 반성하면 된다는 겁니다. 나한테는 문제가 없다는 거에요.
참 그래서 이 종교세계에서 주님이 찾아오면 되는데 주님이 찾아오게 되면 약속대로 찾아와요. 약속대로 찾아오게 되면 약속이 유일한 약속의 전개가 유일한 현실이 되는 겁니다. 그리고 약속이 오게 되면 이 약속은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으로 오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짓거리를 해도 이게 하나의 죽음 속에서 꿈꾸는 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요.
그리고 우리가 이게 이제 내 믿음은 아까 뭐라고 했습니까? 내 믿음은 믿음이 아닌거죠. 믿음이 아니라도 기분 좋은 이유는 약속이 필요한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님 쪽에서 먼저 우리에게 찾아들었기 때문에 구태여 고물같은 더러운 꿈같은 꿈에서 꿈꾸던 갖고 있던 그런 것은 이건 꿈이니까 버려도 되는 거에요. 믿음을 자기 믿음을 버리는게 믿음이 되는 거에요. 내 믿음을 주저없이 버릴 수 있는 자유를 얻는겁니다.
제가 지난 낮설교에 그런 이야기했잖아요. 이미 신약에 있어서의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응답받은 후에 하는 기도라고요. 기도라는 자체가 응답의 일부에요. 기도 자체가. 그걸 성령으로 하는 기도인데. 기도가 되려면 이건 여러분들이 아셔야 되는데 기도가 되려면 진짜 기도 되려면 그 기도 내용과 뭐가 같이 가느냐? 내 귀한 목숨과 이게 동등해가지고 맞바꿀 수가 있는 내용이여야 돼요.
나는 기도 응답받아서 내가 살겠다는 그런 식으로 하게 되면 그건 목숨을 안 내놓은 기도란 말이죠. 목숨을 안 내놓고 기도한다는 것은 이거는 얍삽한 짓이라니까요. 목숨을 내놓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그 기도는 내 목숨을 유지하겠다는 거에요. 내 건전한 스토리, 역사를 계속 쥐고 있겠다는 꼼수에 지나지 않아요. 이것이라면 제 목숨도 내놓겠습니다 하는 기도가 되어야 그게 기도가 되는 거에요.
그럼 내 목숨 내놓는다하는 것은 내 목숨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나는 이래도 저래도 상관없습니다 주여 저한테 어떤 일이 일어나도 상관없어요. 주의 약속만 이루어진다면 그까짓 것 제 목숨같은건 마음껏 사용해주옵소서 이게 바로 기도다 이 말이죠 이게. 주님의 밀착성 믿음으로 쳐들어왔기 때문에 그런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은 베드로보고 하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거거든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네 인생 거덜내자는 겁니다. 도망쳐도 소용없다. 내가 너 끝까지 찾아갈거야. 도망쳐도 소용없어요. 나는 너 끝까지 네 육체를 내 식사 떡을 먹고 생선 먹듯이 너도 동질성을 유지한 다시 말해서 구원받기 전의 육체와 구원받은 후의 육체가 동일하게 연속성을 갖출 수 있다는 것을 내 쪽에서 증명해줄게. 주님 쪽에서.
죽고 난 뒤에 주님 만납시다. 아니 그거 필요 없어. 죽기 전에도 주님과 함께 있음을 내 쪽에서 손 대가지고 그렇게 작용하도록 해줄게. 그게 주님의 전략이에요. 찾아오신 이유가 그렇습니다. 저는 그걸 인수인계라고 하는데. 주님께서 몽땅 인수인계 예수님께서 육체로 있으면서 당했던 모든걸 이제는 누구 차례다? 제자들 차례로 하게 하시는 겁니다.
그 방식이 요한복음 14장에 취지가 있어요. 14장 18절 누가 한번 읽어보세요.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주님께서 뭐라고 합니까?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는다. 그런데 이 제자들은 자기를 고아라고 여겨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제자들 편에서 예수님을 믿을까 말까 본인이 결정했기 때문에. 믿기 전에도 고아 아니였고 빠이빠이 할 때도 고아 아니에요. 고아라는 관점은 어떤 관점이냐 하면 예수님의 관점. 그걸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약속’, 예수님의 말씀의 관점에서.
요한복음 14장 18절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으려면 제자들은 일단은 예수님 약속 안에서 뭐로 바꿔야 됩니까? 고아로 바뀌어야 되요. 고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에 어느 누구도 일가 친척이 없어야 되요. 다시 말해서 이미 이들은 예수님에 의해서 이 땅에서 아무 아는 사람 없이 이미 죽은 자가 되야 되요. 그 죽은 자가 뭐냐? 꿈에서 벗어난 자에요. 꿈에서 벗어난 자.
꿈에서 벗어난 자로 꿈인줄 모르고 현실이라고 우기던 그 속에 같이 섞여 살면서 예수님이 하는 일을 계속 해나가시는 겁니다. 그들 안에서. 그 제자들 안에서 주께서 일하시는 겁니다. 그게 바로 성령의 패턴이에요. 성령께서 일하시는 패턴은 뭐냐 하면 우리를 항상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기 위해서 나는 너를 사용한다는 겁니다.
우리 일가친척 우리 형제만 5명인데 고아 아닌데. 고아야. 왜? 다른 동네 식구기 때문에 패밀리이기 때문에 고아인거에요. 이 땅에 너같이 아는 사람 아무도 없는거에요. 그래서 교회는 뭐냐? 교회는요 기적이에요. 이렇게 설교하면 좀 알아들으세요가 아닙니다. 알아듣는다는 것이 알아듣는다는 것을 기대하게 되면 자칫하면 교회가 현실 돼요.
교회는 꿈이어야 되요. 꿈이기 때문에 꿈속에서 약속만 현실로 도드라져야 되지 교회라는 어떤 형식체가 있어 버리면 또 이건 믿음이 하나님과 나 사이에 예수님 사이에 교회라는 것이 중간 매체로 들어가가지고 보고 믿고 교회에 보고 믿는 것 밖에 안 되니까 그건 안 되지요.
항상 성령께서 간단하게 말해서 계속 꿈이 꿈이라는 사실을 계속 우리에게 각인시키고 확인시키고 증명하는 식으로 주께서는 성령께서는 일하십니다. 이건 꿈이다. 켁켁 기침 나오는게 이게 꿈이래. 이게. 기침 나는데 이게 꿈이래. 이게 되지도 않는 이야기가 어디 있습니까 하는데 그건 내가 기침한다 하면 현실이지만 주께서 기침케 하신다면 그거는 주께서 하셨다는 것이 약속으로 꿈이 아닌 것 속에 주께서 하심이라는 유일한 현실이 삽입되어 있고 섞여있는 거에요. 주께서 하심이.
한달째 기침하는데 안 나으면 어쩌지? 죽으면 되지. 죽으면 돼 기침하다 죽으면 되죠. 왜? 왜 죽어야 됩니까? 어차피 꿈에서는 꿈에서 이미 꿈이 아닌 사람은 이 세상에서 이미 꿈에서는 죽는 사람으로써 다뤄지기 때문에 그래요.
사도 바울의 소망이 뭐였습니까? 꿈에서 깨어나게 하소서. 이 지긋지긋한 꿈속에 벗어나서 어서 주와 함께 만나고 싶다. 현실이 있는데 이 땅에서 이미 죽었고 우리의 생명은 하늘에 있는데 주의 뜻에 의해서 계속 꿈속에서 꿈같은 세상에서 계속 사는거에요.
다시 한번 정리해봅시다. 이 세상의 특징은 뭐가 없다? 역사성이 있다 없다? 역사성이 없어요. 왜? 주와 함께 있기 때문에 역사성이 없는데 우리는 꿈인지를 모르는 순간 뭐가 등장합니까? 아이고 난 내 인생 이렇게 살았는데 내 인생 이렇게 조지면 안되는데 앞으로 잘 되야 될텐데 앞으로 좋은 색시 만나서 더 멋있게 살아야 하는데 계속해서 자기 자신이 그만한 권한이 있고 그만한 자격이 있고 그만한 정도로 건전하고 우수한 존재라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못 놓고있는 거에요.
더 하다가는 무슨 소리할지 모르겠습니다만은 일단 10분 쉽시다.
강남-요한복음 21장 12절(꿈속에서) 190618b-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하겠습니다. 세상이 꿈이라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상당히 거부반응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데 어린 사무엘 한번 봅시다. 어린 사무엘이 엘리의 종으로 들어가고 일종의 제자지요. 엘리 제사장이 다 가르칩니다. 제사장은 이렇게 되야 되고 성전은 이렇게 봉사해야되고 다 가르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엘리에게 맡겼으면 사무엘의 후계자로 키우면 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엘리 제사장이 엄연히 있음에도 불구하고 엘리 제사장은 역사를 생각하고 현재 이것을 현실이라고 생각하겠지요. 엘리 제사장을 통해서 사무엘에게 지시하는 것이 아니고 곧바로 하나님이 사무엘에게 지시하지요. 어디서 지시합니까? 꿈이죠. 꿈에서. 꿈에서 자는 꿈에서 사무엘에게 이야기했다고요.
요셉이 아버지한테 독식했지요. 사랑을 독식했습니다. 그러면 사랑받고 있으면 그게 현실이죠. 아버지는 요셉을 사랑하고 형들은 요셉을 미워하고. 그들이 아는 현실은 그게 현실이에요. 인간은 육체와 육체의 부딪힘이고 아까 말씀드렸듯이 현장에 가면 부딪힘 있잖아요. 그게 인간의 전부에요.
그런데 요셉에게 갑자기 무엇이 난입해요? 뭐가 옵니까? 꿈이 오잖아요 꿈이. 그러면 거기서 요셉이 정리하는 것은 뭐냐? 요셉이 꾼 꿈이 현실일까요? 아니면 그것은 개꿈이라고 반대하는 것이 그게 현실일까요? 어느 것이 현실입니까? 요셉의 꿈으로 현실이 재편되지요. 그렇게 되면 요셉의 형들과 야곱과 요셉의 형들은 본인이 하나님에 대해서 오해했음을 자인해야지요. 오해. 오해했음을 자인.
그러니까 내가 잘못 생각했다는 말은 전제가 뭐냐 하면 나는 철저히 현실주의자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내가 잘못을 인정해야 되요. 나는 철저히 현실주의자다. 모든게 다 그래요. 나는 철저히 현실주의자인데 이것이 현실이었다? 아니다? 이것 자체가 현실이 아닌거에요 이게.
그런데 아니다라는 것이 슬프고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고 반갑고 고맙고 감사하고 즐거운거에요. 기쁜거에요. 왜? 내가 살아온 모든 것은 하나의 개꿈인 것을 미리 앞당겨서 알아챘기 때문에. 꿈이 아닌 것은 뭐냐? 나를 가지고 사용하시는 그 주의 일이 되는 거에요.
내가 몇 년도에 태어났고 어느 대학 나왔고 어떻게 직장 생활했고 언제 죽었다. 이것이 전에는 누구 스토리였어요? 나의 스토리인데 주님의 그 현실이 들어오면 이게 누구 스토리 입니까? 나하고 상관없는 주님의 일을 나라는 육체에다가 집어넣은거에요. 다른 말로 주님의 육체와 내 육체가 하나가 될 수 있음을 하나 될 수 있음을 내 쪽에서는 증명 못했지만 주님께서는 나의 육체를 가지고 충분하게 증명을 해낸거에요. 그게 주님의 솜씨고 주님의 능력이고 주님의 결과물입니다.
그렇다면 내 믿음은 뭐냐? 누구 믿음입니까? 내 믿음입니까? 주님 믿음입니까? 주님 믿음이죠. 그럼 내 사랑은 내 사랑입니까? 주님 사랑입니까? 주님의 사랑이죠. 우리가 주님 사랑하는데 내 사랑이 필요 없습니다. 내가 주님 믿는데 내 믿음이 필요 없고 내 소망이 필요 없어요.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이 고기 잡는데 찾아왔다 이 말입니다. 고기 잡는데. 뭉쳐있는데 그냥 찾아온거에요.
첫 번째도 뭉쳐있는데 찾아왔고 두 번째도 뭉쳐있는데 찾아왔어요. 우리 예수님 부활하시는데 주님 어디쯤 살아계시는가 우리 같이 찾아 나가보세 이렇게 제자들이 했어요? 안했어요? 한 적이 없지요. 꿈은 꿈속에서만 헤맬 뿐이기 때문에 그래요.
그런데 그들은 꿈이라고 생각 안하지요. 그냥 현실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예수님은 이미 죽은 자가 되어 버리고 죽은 자가 이 현실 속에 다시 온다는 것은 그들의 현실관 속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대구강의에서 앞에 계신 장로님께 물었거든요. 그 예를 다시 한번 정리해볼께요.
우리 목사님한테 연배가 비슷하니까 목사님께 물어볼께요. “목사님 바다 위를 걷습니까? 바다 위를 걸을 수 있어요?” “제가요? 못 걷지요.” “지금 그 솜씨로 안 되지요? 헤엄도 못 치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못 걷지요?”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사람이 물 위를 못 걷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게 바로 꿈속에 빠져 살기 때문에 그래요. 베드로는 걸었잖아요.
자, 그렇다면 그 문제를 물위를 못 걸었다면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는게 가능합니까? 이거는 불가능한거에요. 그런데 교회마다 세워놓고 가능하다고 다 가르치는 거에요. 믿으면 된다는거에요. 이런 사기가 어디 있습니까? 이런 사기가. 모든 교회는 꿈꾸고 있는거에요 꿈.
꿈은 꿈속에 있는 겁니다. 뭘 해도 그건 소용없는 거에요. 믿음이 그들의 믿음은 가짜 믿음이에요. 왜? 교회라는 것을 중간매체로 해가지고 주님과 거리를 두고 하기 때문에 그래요. 진짜 주님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뭐가 필요 없습니까? 교회가 필요 없지요. 왜?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교회이기 때문에. 교회 두 군데 만들 이유가 없잖아요.
교회가 기존의 교회는 필요 없고 교회 역사라고 하는 것도 의미 없고. 무슨 역사가 있어요. 주님과 함께 있는 것이 그 자체가 종결인데 무슨 역사가 있습니까. 현장성인데. 교회의 내일은? 내일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내일되면 주님이 알아서 하면 내일 있고 주님이 알아서 하면 모레 있고 그렇지 내일을 우리가 미리 걱정합니까?
내일 모레 라는 역사를 의식한다는 자체가 아직도 우리는 꿈속을 헤매고 있는 거에요. 그러면 꿈속을 좀 헤맵시다 하는데 문제는 꿈속을 그냥 헤매는게 아니고 죽음이 협박을 하니까 문제 아닙니까. 하루하루가 행복하면 좋겠는데 그게 아니고 내일 되면 너 이거 안하면 죽어. 모레 되면 너 이거 안하면 죽어. 죽음이 막 우리 목을 조아요.
우리는 발악을 해가지고 헤매고 있고요. 왜? 아직도 죽음의 협박에서 못 벗어나서 그래요. 그걸 아주 고상한 말로 가위 눌렸다. 가위 눌렸다 이렇게 이야기해요. 가위 눌린거에요. 보니까 그게 꿈인데 우리는 꿈인줄 모르고 꿈속에서는 진짜 현실이거든요. 뭐 난리도 아니야. 남편이 헝가리에 가서 빠져죽었다. 아! 이럴수가. 나중에 성령받고 난 뒤에 그것도 하나의 꿈이었는데.
그러면 안 빠져 죽었다는 말인가? 이렇게 하는데 그 사람은 물에 빠져 죽고 우리는 살았다가 아니라 빠져 죽은 사람도 처음부터 이 세상에서 죽은 자고 안 빠져 죽은 우리도 죽은 자고. 망대에 무너져서 18명 죽은 자도 죽은 자고 그걸 쳐다보고 있는 우리도 죽은 자고. 제천에 목욕탕 죽은 아줌마 몇 명 죽은 자도 죽은 자고 아직까지 살아있다고 여기는 우리도 이미 죽은 자고. 그게 사도 바울의 편지에 나오잖아요. “이미 너희는 죽었고”
우리는 그걸 좀 이렇게 뭐로 봅니까? 수사적인 의미로 비유로 의미를 보지요. 비유 아닙니다. 주님의 안목에서 볼 때 그게 진실한거에요. 자,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 그 다음 문제는 더 어려운 문제 나가봅시다. 아까 사무엘 이야기 좀 더 해야지요. 사무엘은 직접 꿈을 통해서 등장했기 때문에 졸지에 사무엘에게 하나님께서 나타남으로서 노선이 하나의 역사 노선이 하나로 알았는데 하나가 아니라 이게 둘이 되고 말았어요.
엘리 계통과 사무엘 계통. 엘리 계통은 나중에 철길 따라가보니까 이게 막혀있어요. 그 앞에 가가지고 “나 돌아갈래!!” 해도 끝났어요. 거기는 길이 없어요. 길이 없다고요. 그러면 사무엘 노선은 뭐냐? 사무엘 노선은 이 길은 땅의 길이 아니고 하늘로 올라가는 길이에요. 사무엘 노선은 뭐냐 하면 항상 둘을 남긴다. 하나의 자기의 그림자를 모형을 남겨요.
사무엘 노선에서 한쪽 노선은 뭐냐? 사울 노선이고 또 한쪽은 뭐냐? 다윗 노선입니다. 다윗 노선인데 다윗 노선도 둘로 갈라져요. 진짜 다윗은 죽고 다윗 언약의 다윗의 자손은 다윗은 죽는데 다윗 자손은 안 죽어요. 그러면 다윗은 다윗 자손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죽었다가 살아나신 다윗 자손의 덕분으로 죽은 다윗이 다시 예수님 십자가 덕분에 이게 살아나야 되는 거에요. 그 노선입니다.
엘리야와 모세가 자기들은 죽었는데 변화산에서 그 사람들은 예수님하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 이야기 내용이 뭐냐 하면 “예수님이 죽으셔야 우리가 제대로 삽니다”라고 하는거에요. 아브라함이 죽었지만 예수님 때 보기를 기다렸다가 예수님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되게 즐거웠했다는 거에요.
이런 이야기는 마치 무슨 이야기와 같냐 하면 사람이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와 똑같은 취지입니다. 이게 성경에 다 깔려있거든요. 지금 성경 이야기하고 있어요. 교회 이야기하고 있는게 아닙니다. 교회는 개꿈이니까 그건 이야기 할 가치도 없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은 믿음이 필요 없는 신앙이어야 돼요. 내가 주님을 믿을 필요가 없는 신앙이어야 돼요. 그것은 찾아오셨기에 가능합니다. 찾아오셨기에. 찾아오게 되면 제자들이 있는 장소는 뭐가 됩니까? 현장성. 거기는 현장, 누굴 위한 현장입니까? 나를 위한 현장이 아니고 주께서 일하시는 현장. 주께서 일하시는 현장이 됩니다. 장로님 현장 잘 알잖아요. 늘 현장 근무 하시니까.
딴거 생각할거 없어요. 주께서 지금 주께서 내 안에서 지금 나를 통해서 무슨 일을 하시는가 그걸로 되는 겁니다. 어떤 결과는 우리 소관 아니고 지금 관계성이 중요한겁니다 관계성. 이해하고 있다는. 그게 첫 번째 찾아올 때 성령이 와야 된다는 것과 그 두 번째 올 때는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어야 된다는 것.
세 번째는 그걸 실현시키기 위해서 내가 너희들이 내가 유령이 아니라 실제 육체로 옴으로써 육체를 가지고도 얼마든지 성령의 일을 할 수 있음을 예수님이 보여주시는 거에요. 그래서 세 번째 찾아오신 겁니다. 그리고 그다음에 네가 날 사랑하느냐고 묻는 겁니다. 내가 하는 일이 앞으로 너의 일이 될 것이라는 것을 언급하지요.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이제 따져야할 것은 꿈에서 현실로 어떻게 이동이 가능하느냐? 꿈이라는 것은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어떻게 현실로 이동하느냐? 이동 못 하지요. 왜냐하면 죽음이라는 장벽이 있어가지고 인간은 죽음 바깥으로 빠져나올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죽어야 된다는 이러한 죽어야 된다는 이 원칙의 적용을 받기 때문에 인간이 아무리 착하고 선해도 죽음을 유발하는 이유밖에 안돼요. 이게 이제 선악체계인데 산다는 것 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죽음을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뭘 보느냐 하면 자신의 인간의 한계를 제자들이 보여준거죠. 그러면 이 현실에서 다시 이 세상 꿈속에 어떻게 투입되고 장벽이 있는데 어떻게 투입되고 어떻게 가느냐? 이것은 바로 이렇게 됩니다. 이것은 말 그대로 하면 어렵기 때문에 일단 함축된 문장을 쓰고 제가 말씀을 드릴께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서 첫 번째 관계가 있고 약속의 관계. 두 번째는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가 여기서 벌어집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아버지가 아버지께서 아들을 버립니다. 버리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은 간격이 생기게 되겠지요. 이 간격에다가 예수님은 자기 백성을 여기다 집어넣어버리죠.
하나됨이 갈라져버려요. 갈라져버린 틈 사이에 예수님이 자기 백성을 넣을 권한을 부여받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왜냐하면 이 하나됨이 아버지의 뜻 성령의 뜻에 의해서 다시 합쳐지기 때문에. 하나되었다 벌어졌다 다시 합체되었다. 그 가운데서 자기 백성이 생산됩니다.
주께서 출발하시고 퇴장하면서 알 까듯이 성도가 나오는 겁니다. 그러면 성도는 이 세상에 이 꿈같은 세상에 성도가 없는 거에요. 누가 다녀가야 돼요. 예수님이 다녀가야 알까기처럼 성도가 있는 겁니다.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이 세상은 뭐냐 하면 자기 힘으로 이 죽음을 이기고 천국 가려고 애쓰는 종교들이 있겠지요.
그럼 그 사람들은 뭘 못하느냐 하면 우리가 무한하게 철저하고 무한하게 영원히 우리는 버림받아야 된다는 생각을 본인들이 하겠어요? 안하겠어요? 안하지요. 남들은 버림받아도 자기는 어쨌든 자기를 쥐고 있어야 이 쥐고 있는 이 패 가지고 천국이라도 가야되지 않겠느냐? 이 땅에서는 고생했지만 죽어서는 호강해야 되지 않느냐. 자기 패를 못 버리는 겁니다.
주님은 온전히 버렸는데 인간은 주님이 아니라서 버리지를 못하는거에요. 못 버리니까 구원이 안되는 거에요. 버리지 못하니까. 자꾸 구원받을 방법을 이야기해달라는 거에요. 어떻게 하면 성령받아서 거듭납니까? 어떻게 하면 기도에 응답됩니까? 자꾸 목사한테 찾아가가지고 요령에 요령을 달라고 하는거에요.
그래서 제가 주일날 설교에서 무당은 세상에 대나무 있는 것은 작은 무당이지만 교회는 그럴싸한 큰 무당집이라고. 인간의 욕망들이 구원의 욕망들이 다 모인 곳. 선교단체도 그렇고. 제가 주일날 실로암 논산 군부대 이야기 했는데 실로암 그 동영상 한번 보신적 있어요? 왼발 왼발 하는거 보신적 있습니까? 쉬는 시간에 그거 한번 보세요. 대단합니다. 캄캄한 밤에 2500명이 하는거 이거 한번 보세요. 은혜가 절로 되지요. 난리도 아니에요 그거.
내가 나한테 어떻게 조지고 내 행동을 어떻게 절제하고 관리해서 주께서 원하는 것 믿음 소망 사랑을 내가 어떤 짓을 하면 거기서 내 안에서 생산될 수 있습니까? 가르쳐주기만 하면 시키는대로 다 하겠습니다 이렇게 나오는 것. 이 말은요 예수님 내가 어떻게 하면 물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와 똑같은거에요.
베드로는 머릿속에 물위를 걷겠다는 생각조차도 없었기 때문에 물위를 걸은 거에요. 구원받겠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구원이 되는 겁니다. 구원은 누구 숙제냐 하면 내 숙제 아니에요. 주님이 자기 숙제하기 위해서 우리를 한거에요. 주님이 스스로 아버지한테 벌려놓고 그 벌어진 사이에 벌어진 사이에 십자가 아닙니까?
세상에 하나님께 버림받는 신이 어디 있어요? 그 신이 진짜 신입니다. 그 벌어진 것은 약속대로 언약대로 벌어진거에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벌어짐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관계는 끊어진거에요. 끊어졌는데 예수님이 자살했습니까? 사람들이 죽였습니까? 사람들이 유대인들이 죽였잖아요. 인류를 대표해서.
그렇다면 인간들은 뭐냐 하면 하나님과 예수님 사이에 영원히 갈라지게 한 영원한 철천지 뭐가 되느냐 하면은 범죄자가 되는 거에요. 범죄자가 갈 곳은 뭡니까? 지옥이지요. 인간들이 왜 예수님을 죽였습니까?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잖아요 악마. 그러니까 악마가 가는 곳은 지옥이잖아요 유황불이잖아요.
그러니까 인간은 모든 인간은 다 지옥가는 것이 당연한겁니다. 무슨 구원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세요. 십자가에서 죽인 인간이기에 모든 인간은 지옥가도 합당한거에요. 다시 말해서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버림받아도 합당하다 이 말이죠. 그런데 아버지께서 아들을 구원하지요. 버림받은 아들을 사흘만에 다시 데려오잖아요. 데려오면서 예수님께서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고 자기가 택하신 자를 뽑아서 예수님이 같이 가게 하십니다.
요한복음 5장 봅시다. 요한복음 5장 20절요. 21절.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지요. 자, 살린다는 말은 자기 아들이 멀쩡하게 있다는 말입니까? 죽었다는 말입니까? 너는 죽었다는 말이지요. 그게 너희들은 내가 죽었다고 할 때에 죽어 있어도 괜찮다는 말이에요. 너 원래 죽었으니까.
아버지와 아들이 벌어진 것을 메꾸는데 있어서 인간은 어떤 보탬도 도움도 되지를 못했어요. 인간은 배후에 악마가 있기 때문에 악마기 때문에 십자가 못 박는데 먼저 그렇게 성급하게 나오게 되어 있어요. 이것을 제가 이렇게 좀 성경적으로 함축하기 어려우면 쉬운 말로 이렇게 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의 필요할 때는 사람을 구해도 나중에 얼추 귀찮다 하면은 갖다 버릴 생각해요.
남자가 여자가 이쁘다고 결혼했잖아요. 아이 낳고 배 불룩해가지고 아이 잘 때 같이 자고 아이 먹을 때 같이 먹고 해가지고 몸이 찐다. 그러면 남편들은 여자를 갖다 버릴 생각한다니까요. 아 저 쓰레기 어디 갖다 버리지? 저 쓰레기 저거 어디 갔다 버리노? 옛날 사람들은 조선시대 옛날 사람들은 진짜 맨날 생각하는 것이 뭐냐? 남편들이 언제 갖다 버리나. 버리면 안되는데. 갖다 버릴데 어디 친정 있잖아요.
친정가면 뭐라고 합니까? 여자는 이미 시집귀신 됐다고 또 안 받네. 탁구공입니까? 핑퐁해요? 탁구공 칩니까? 친정가면 친정에서 구박해가지고 시집가고 시집가면 쫓아내고. 여자가 옛날에 공부를 했습니까? 문자를 압니까? 취직할 데가 어디 있습니까? 농사짓는 농경시대에는 농경집안적인 산업을 할 때는 많은 일손이 필요하기 때문에 여자들을 그냥 아이 낳고 아들 낳고 해가지고 또 평소에는 아들 낳고 난 뒤에 일주일만에 나왔느니 나흘만에 나왔느니 뭐 그렇게 하잖아요.
아들 낳고 호미질하고있다 안합니까. 요새는 상상도 못해요. 산후조리원 앉아가지고 하루에 200만원씩. 아이 낳고 난 뒤에 호미질하는 이유가 옛날 여자들은 남편 사랑 그런거 없어요. 자식 사랑도 없어요. 오직 시댁에 잘 보이느냐가 문제입니다. 믿으면 아멘하세요. 시갓집에 잘 보이느냐가 문제에요. 잘 보이려면 제사 음식을 잘해야 돼요.
제사 음식을 잘해 그 집안에 호적에 올라가요. 그 집 족보에 올라간다고 여자가. 그게 유일한 소망이었어요. 배운게 그것밖에 안 배웠어. 그게 이데올로기 아닙니까 그 당시의 이데올로기에요. 여자가 죽음이 목 조르니까 사는 방법은 시집이 이렇게 하니까 남자는 뭡니까? 남자는 이게 배 부르니까 보기도 싫고 아 저거 어디에 치워버리지? 치울 데도 없고 또 슬슬 다른거 생각하는거에요. 다른데 해가지고.
그래가지고 바깥에 아이 낳고 이러고 와도 어디 찔찔 거리노!! 남편이 하는 일에!! 하늘같은 남편한테. 그러면 여자는 여자의 일생 노래 부르고. 여자의 일생~~~소양강 처녀. 한 많은 대동강이나. 요새는 여자들이 배웠잖아요. 반대현상이 일어나요. 저 남자 어디에 치울까? 인간은 밀치게 되어 있어요. 필요할 때는 얻되 그 필요한 이유가 나한테 필요한거에요 나한테. 나한테 필요한거에요. 저쪽에 필요한게 아닙니다.
나한테 필요해서 얻었다가 이제는 필요가 뭐로 바뀌느냐 하면 귀찮음으로 바뀌어요. 귀찮을 때는 이제는 슬슬 떠미는 겁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다 이혼하지 왜 이혼 안 하느냐? 이 세상은 농경시대 아니고 자본주의 사회거든요. 돈이 문제다. 문제는 돈이 문제다. 저 남자 없으면 내가 어떻게 수입을 얻을 것이냐? 저 여자 없으면 내가 생활비가 더 많이 들 수가 있다.
돈이 문제거든요. 그리고 자본이 인간과 인간을 맺어주는 겁니다. 남자친구가 뭐 사주고 뭐 사준다고 좋다고 결혼해놓고 결혼하고 난 뒤에 아무것도 안사주면 그 다음부터 아침에 콩나물국도 안 끓여주고. 너는 내가 생각했던 그 남편감이 아니다. 이 한마디로 뭐냐 하면 서로 밀치고 있는거에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의 본성입니다.
지금 메시아 찾고 유대인들이 하나님 찾는데 메시아 오기를 기다렸잖아요. 누구한테 필요한거에요? 이 사실이 현실이니까 현실이기 때문에 이제는 죽고 난 뒤에 현실도 걱정이 되는 거에요. 이것도 현실이고 죽고 난 뒤에도 현실이니까 현실의 내가 천당 가야되지 않겠냐 천국 가야되지 않겠냐 이 문제에요.
이 문제를 누가 선택합니까? 내가 천당 가고 지옥 가는거 누가 선택해요? 내가 선택하죠? 그런데 요한복음 5장에서 누가 선택한다 합니까? 천국은 인간인 네가 선택하는게 아니야. 누가 선택해요? 그 모든 선택을 누구한테 일임했습니까? 예수님한테 일임한거에요. 그 예수님한테 일임했기 때문에 나의 선택은 소용없습니다를 인정하는 것이 바로 뭐냐? 예수님의 성령이 찾아온 사람이다 이 말이죠.
성경에 불의한 청지기 나오지요? 얼마나 큰 역설입니까? 불의해요. 불의한데 그 사람이 회사에서 쫓겨났기 때문에 뭐가 보입니까? 회사 바깥에가 보이는거에요. 회사 안에 있는 사람은 죽기 살기로 회사 안에서 시키는대로 해야 산다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에라이 모르겠다 이왕 쫓겨난거 마음껏 횡령이나 해먹자. 비로소 회사 바깥을 아는 거에요.
예수님은 세상 바깥을 아는 거에요. 이 세상이 꿈에 불과한 것을 아무것도 아닌 꿈에 불과한 것을.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에요.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천국이 결정된다는 거에요. 결정이 그렇게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자의에 의해서 선택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에요.
그럼 그걸 어떻게 아느냐? 예수님 찾아와야 되지요. 예수님을 아까 강의 처음으로 다시 돌아가봅시다. 예수님이 찾아오지 않고 예수님을 그냥 세워두고 내가 여기에 있고 거리를 두는 거에요. 교회 의식하게, 거리를 둔다면 예수님은 창세전에 선택해서 구원한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되느냐? 안 찾아오면 어떻게 되느냐 하면 그 선택을 내가 믿습니다가 되어 버려요.
그러면 이 사람은 예수님의 선택을 믿는게 아니고 내가 괜찮은 분 만났으니까 내가 저 분을 믿기로 결정했다. 자기 결정을 믿어 버리면 이건 하나의 개꿈이에요 개꿈. 치매걸리면 끝나는거에요 이거는. 이건 믿음 아니에요. 이것은 물위를 안 걸으면서도 나는 물위를 걷고있다 나는 물위를 걷고있다와 똑같은 거에요. 물위를 걷지도 못하면서. 우리는 물위를 못 걷습니다. 이게 뭐다? 이게 무능성이죠.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무능성을 뭐라고 했습니까? 아무도 모르네. ‘현장성’. 인간은 현장성 속에서 자신의 무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나는 그냥 인간일 뿐이다. 다른 말로 나는 그냥 죄만 지을 뿐이다라는 것을 계속 확인하는거에요. 내일은 내가 주제 넘는 일이다. 내일 것은 그거는 오늘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걱정해?
내가 죄인인 입장에서 내일을 걱정한다는 것은 안돼. 나는 현장에 투입되어서 현장을 구성하는 요소이지 내일까지 역사를 이끌 그러한 권한이 없음을 우리한테는 없음을 알잖아요. 현장성에 혼자 있습니까? 주님과 같이 있습니까? 같이 있기 때문에 내가 일을 만들지 않더라도 주께서 매일같이 하루 일과를 주십니다. 일거리를.
오늘은 실컷 외로워라 이런 것. 오늘 실컷 신세 한탄하라는 일거리. 신세 한탄을 하지말라는게 아니고요. 외로운데 안 외로울 수 있겠느냐 하는데 도대체 누가 그 일을 시키느냐? 이건 나의 선택이 아니고 주님의 선택이고 나의 결정이 아니고 주님의 결정이기 때문에 우리한테는 뭐가 없느냐? 선과 악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내가 잘했다 못했다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대구 강의 여러분들이 안 들으셨기 때문에 대구 강의 중요한 예를 한번 들겠습니다. 이런 예를 들었잖아요. 대구강의 하면서 어떤 남자가 여자한테 전화해서 여행가고 싶다 할 때 여자가 나 안가고싶다라고 하는게 정답일까요? 아직 연락이 안 왔다고 하는게 정답일까요? 주님한테 연락이 안 온거에요.
당신이 여행하든 말든 그거는 당신은 모르겠고 나는 주님 앞에서 그 남자하고 여행가라는 연락을 받아본 적이 없어요. 그러면 그거는 안 가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 하겠지만 마찬가지 아니에요. 만약에 내가 여행을 안 간다고 결정을 해버리면 여기서 뭐가 생기느냐 하면 내가 들어갔기 때문에 여행 안 가는게 잘했을까 못했을까? 못했을까 잘했을까? 여전히 선악체계에 이게 꽁꽁 묶여있게 되요.
아 그때 갈 걸 이렇게 된다고요. 결혼이라는 것도요. 인간의 본성을 필요할 때 원하고 노골적으로 갈라서 이런 소리는 안했지만 자꾸 밀어내는 거에요. 밀친다 했지요. 그런데 제가 이런 이야기하면 아 그래도 목사님 예수 믿는 사람 같으면 해놓으면 밀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게 되면 그건 신앙이 아니고 그 자체가 선이 되어버려요.
그러면 그 조금이라도 나는 당신 꼴보기 싫어 이러면 자기가 자기 탓하고 아이고 내가 미쳤어 미쳤어 미쳤어. 내가 성도답게 살아야지 왜 그런 악한 짓을 해. 이렇게 되어 버리면 그건 마귀가 그걸 보고 너는 아직 내 손아귀에 있어. 그러니까 선과 악, 악과 선 그 사이에 계속 헤매고있는 거에요. 자기 의와 자기 의 훼손되면 안 된다. 나는 우수한 존재니까 계속 헤매고있는 거에요.
주께서 하게 했으면 하면 되고 헤어지게 하면 헤어지면 되고 거기서 우리가 책임질 것 없습니다. 책임질게 없어요. 대통령 뭐라고 할게 뭐 있어요. 국민이 뽑았잖아요. 국민이 뽑았으면 국민 책임이지 대통령 책임 아니지. 주님이 뽑았잖아요 나를. 창세전부터. 뽑아서 꿈속에 살게 만들어서 예수님 죽이는데 한패 만들었고 우리도 주님 밀치고 주님 잔소리해서 안되겠다 밀치자 이 말이죠.
주님 내 기도 응답하면 신났지요. 그러나 응답도 한두번이지. 그 다음 응답 안 하면 어떻게 할거에요? 그때 응답 받았던 그것이 스토리가 되어 가지고 그때 좋았는데. 나 믿음 없나? 주님 나를 떠났나? 아 주님 떠났구나. 또 이렇게 그걸 죄악으로 보는 거에요. 죄악으로.
그렇다 하더라도 그것마저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한 주님의 약속은 우리 인간의 어떠한 발악이라도 전혀 영향 받지 않습니다. 기어이 고아같이 버려두지 않겠다. 네가 도망쳐도 밀쳐도 항상 밀쳐도 안돼요. 나의 밀침보다 주님의 버려두지 아니함이 더 쎄요. 아무리 밀쳐보세요. 밀침 당할 분이 아닙니다. 왜? 주님은 우리 모습보고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자기의 약속대로 이미 선택했기 때문에. 이미 자기 선택한 것을 빠져나올 수가 없어요. 인간의 선택에 대해서.
자, 그렇다면 여기서 다시 한번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해서 모든 인간은 어디로 간다? 지옥행입니다. 예수님 버림받을 때 여기서 무한히 갈라졌어요 무한히. 우리가 진짜 하나님하고 인간은 무한히 갈라졌음을 예수님의 십자가로 증명했습니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로 증명했어요. 그러고 난 뒤에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 성령이 오게 되면 오직 자기 백성만이 여기에 들어갑니다.
성경 에베소서 한번 찾아봅시다. 에베소서 3장 14절 어디서 많이 보던 구절 같은데 “이러므로 내가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15절 다 같이 시작.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각 족속 중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주신 아버지께. 그러니까 이건 오직 구원될 자에게 뭘 줬다는 말입니까? 주님의 이름을 주신거에요. 구약 이스라엘에게 주의 이름이 함께 있는 것처럼 이름을 주신거에요.
이름을 주셨다면 그것은 뭐냐? 성령의 역사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게 뭐냐? 16절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시오며”. 주께서 하신 일을 계속 하게 하시는 겁니다. 이래가지고 제가 이야기하는 취지를 잘 모를거니까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고린도후서 1장 같은 그런 경우 있지요. 이미 구원을 받고 구원을 이루신다 이런 대목 나오지요. 이루심. 구원을 받고 구원을 이루신다 대목 나와요. 그래서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 하면 구원을 이미 받아놓으면 구원을 이루신다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구원이 아직 이루신다 했으니까 아직 우리가 구원이 덜 된겁니다. 그러니까 예수 믿고 열심히 했으면 구원에 탈락되지 않게 애써야됩니다라고 이야기해요.
그런데 목사님은 맨날 이미 구원되었음만 이야기하고 구원이 아직 남아있다는 말은 왜 안합니까 이렇게 이야기해요. 그럴 때 여러분은 뭐라고 답변합니까? 지금 그 사람은 지금 구원문제 언급했잖아요. 그러나 모든 성경에 나오는 개념은 구원이든 영생이든 개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이야기한다는 것을 그 사람들은 모르고 있어요. 구원은 우리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버림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것은 남아있는게 없어요. 우리가 구원되겠다고 꼼수로 취해할 그런 능력 그런 권한도 없고 그런 자격도 없어요. 여기 고린도후서 1장 10절에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리라. 건지셨고 건지시리라라고 되어 있지요?
그럼 이 구원의 숙제는 누구 숙제입니까? 주님 숙제지요. 주님에 관한 주님이 하시는 구원이지 내가 하고 싶은 내가 원하는 욕구하는 구원은 아니잖아요.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꾸 뭘 생각한다? 역사를 생각하지요? 역사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해요. 왜? 인간 기억ㅊ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항상 뭘 하느냐 하면 어쨌든간에 나는 구원받아야지. 어떻게? 내 편은 내가 못 놓치는거에요. 내 편은 내가 못 놓치겠다고 자기가 붙드는 것은 그 누가 내가 계속 내 편 드는 이유는 내 편이 안 될 정도로 어떤 그분이 나한테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그분이 없기 때문에 이제는 아쉽더라도 내가 나를 안 붙들면 희망이라는 것이 좌절되기 때문에 가차없이 나만 붙들어야돼 나만. 어떻게든 잘 보여가지고 구원받고자 하는거에요.
이미 구원받았다가 아니고 아직 구원 남았다 두 개가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 두 개가 어떻게 원활하게 결합이 될까요? 우리 신학교 나오신 분. 우리 이미아 목사님. 이미 구원됐는거에요? 구원 아직 남아있는거에요? already 에요 not yet 에요? 두가지 다 있다고 하지만 안됩니다. 완료와 미완료 연결이 안돼요 이 자체가. 논리 자체가. 완료와 미완료가 연결 안 된다고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미 구원되었고 구원을 이루시리라 이게 어떻게 다른가? 제가 이렇게 논리를 하면 말이 어렵기 때문에 쉽게 하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택지 단지 만드는 사람이 주택하나를 구입을 했어요. 그럼 소유권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소유권은 어떤 사람에게 소유권이 있다고 합시다. 택지소유권이.
이게 이제 산을 깎아가지고 높이 축대 쌓아가지고 집들을 공사중에 아직 완성되지 않고 아직 짓고있다고 합시다. 그러면 이 집을 분양을 미리 받아놨어요. 완성 안됐지만. 그럼 이 사람이 가가지고 공사장에 올라갑니다. 그럼 공사장 사람이 여기 일반인은 출입하면 안되는데 왜 공사하는데 다치는데 여기 왜 오십니까? 내 집이 얼마나 잘 지었는지 한번 보러왔습니다. 이렇게 되겠지요.
이미 소유권은 누구입니까? 나한테 소유되었기 때문에 집을 짓는 것과 상관없이 소유권은 변합니까 안 변합니까? 10% 해도 내 소유고 90% 해도 내 소유지요. 다 지어서 불나도 내 소유 날라가는거에요. 그런데 소유권 없는 사람이 한번 보고 믿을게 올라오게 되면 아예 못가요. 왜냐하면 소유권이 없기 때문에 이 현장에 올라오면 안돼요. 이 현장에는 이미 소유권 분양받은 사람에게만 자기 집이지 내가 한번 보고 집 잘 지으면 내가 이거 살게 이런 사람은 오면 안 된다니까요.
구원받은 사람에 있어서 자기 소유권이 있는 사람이 택지 보잖아요. 그럼 이 소유권을 지금 집으로 하니까 소유권이 우리에게 있지만 이 소유권이 예수님한테 있다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이 소유한 사람은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집을 짓고 있다는 말은 이거는 이미 내가 미완료라고 할 권한이 우리한테 인간에게는 없어요. 미완료조차도 완료이기 때문에. 이루시는 것 조차도 우리 눈에는 그게 완료라 보여야 되요.
구원이 되었기에 사도 바울 말 그래도 구원이 되었기에 이미 되었기에 구원을 이루시는 겁니다. 말이 말로 하면 굉장히 어려워 보이지만 따지고 보면 굉장히 쉬운거에요. 우리 애가 키가 160되면 내 아들로 하겠다 이런거 없잖아요. 내 아이이기 때문에 160이 되고 165되도 역시 내 아들 내 아들이란 말이죠.
믿음이란게 뭐냐 하면은 내가 천당갈 수 있느냐가 아니라 주께서 나를 천국 보내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 이미 택해서 심판 죽어야 되는데 주님의 자기의 부활의 효과, 십자가의 효과를 증명하기 위해서 “야 너 와!” 와가지고 내가 십자가 공로로 유월절 피로 다 했다는 것을 네가 앞서서 증명해. “저 육체인데요.”
“육체 걱정하지마. 내가 네 육체를 내가 다루면서 발생하기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발생할게. 주님의 사랑만 발생할게.” 이래가지고 한다면 그 다음부터는 구원을 이루시리라 내 일이 아니고 내가 할 일이 아니고 주님이 해나갈 일을 이루는 거에요. 몸이 자라나느니라. 교회가 하나의 몸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그런데 내가 왜 거기 끼어듭니까? 자라나기 위해서 내가 뭘 하지? 왜 지가 고민하느냐 이 말입니다. 우리가 약속을 이룰 수 있습니까? 세숫대야에 하나 떠놓고 걸어봐라. 산에 가서 나무 하나 뽑아가지고 저 동해바다 빠뜨려봐라. 못하지요? 겨자씨만한 믿음도 없는거에요.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나무 뽑아서 바다에 빠지라 했잖아요.
도대체 우리는 겨자씨만한 믿음이 없어요. 아니 없어야 되요. 아니 믿음이 자체가 없어야 돼 믿음 자체가. 믿음 없는 신앙이 되어야 돼요. 믿음 다 긁어내야 돼요. 내가 믿는거 다 긁어내야 돼요. 왜 그러느냐? 우리는 꿈꾸는 외에는 아무할 것이 없기 때문에.
자, 우리는 꿈을 꾸면서 그걸 현실로 착각을 하지요. 꿈이라는 것은 주님의 안목에서 보면 꿈인데 주님의 안목을 생각 못 보면 유일한 현실이 돼요. 유일한 현실에서 할 것은 뭐냐?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따먹은 그걸 유지하기 때문에 내가 얼마나 선하냐? 내가 얼마나 우수한 존재냐? 내가 보기에 내가 나쁜 인간은 아니겠지 그걸 목표로 해서 계속 투쟁합니다.
이래서 내가 몸이 아프고 굶어 죽으면 남들이 나보고 네가 나빴으니까 벌받아 죽겠다 하겠지. 그게 꼴보기 싫으니까 남들 보기에 돈 부자되서 복 받았다 하겠지. 그래가지고 잘 되가지고 소고기 사먹었다 하겠지. 모르는거 보니까 개콘 안보네. 그러면 뭐하겠노. 소고기 사묵겠지 있거든요 옛날에. 기껏 해봐야 소고기 사묵겠지. 결국 해봐야 이만큼 나 잘난 체 역사 끄집어내고 이만큼 잘난 역사 보냈다고 하겠지요. 개척교회 12군데 하고 뭐 그게 내놓겠지요.
바로 요셉의 형들이 자기는 꿈인 줄 몰랐어요. 요셉도 그게 꿈인 줄 몰랐어요. 그래서 현실은 있고 그냥 꿈으로 덮어진걸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진짜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고 난 뒤에 이게 전복이 돼요. 역전이 되어 버려요. 마치 모래시계가 위 아래 아래 위가 완전히 엎어지는 것처럼. 완전 엎어지는거거든요. 위 아래가 완전히.
위 아래 위 아래 하잖아요. 위 아래가 완전히 엎어져 완전히 거꾸로 되어버려요. 요셉의 꿈이 진짜 꿈이고 우리는 현실이라고 하는 그 꿈을 극히 핍박하고 반대하는 그러한 성향 속에서 우리가 헤엄치고 못 빠져나왔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게 뭐냐? 야곱 언약을 통해 알 수 있는 우리의 바로 근원적인 죄입니다. ‘근원적인 죄’.
저는 그걸 원죄라는 말을 안 쓰지요. 원죄라는 말은 왜 안 쓰느냐? 근원적인 죄라는 말은 쓰지만 원죄라는 말을 왜 안 쓰느냐? 원죄라는 말을 쓰면 여기에 뭐가 나오느냐 하면은 자고죄가 자범죄가 또 튀어나와야 되요. 원죄, 자범죄 없습니다. 그냥 우리는 죄고 이 죄가 나타난게 자범죄에요. 죄 속에서 튀어나올 뿐이지 원죄 따로 있고 자범죄 따로 있는게 아니에요. 그냥 죄에요. 그냥 죄. 죄가 얼굴 내민게 자범죄라고 하는거에요.
근원적으로 우리는 우리가 죄 지었다 나쁜 죄 지었다 하지 마시고요 십자가를 보세요. 십자가를 보시면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이해한 사람 누가 있습니까? 누가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지요. 그럼 모든 인간은 십자가의 원수입니다. 로마서 5장에 원수된 자를 어떻게 했습니까? 원수되야 돼요. 원수 되는데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겁니다.
그러면 그 의 안에 뭐가 되어 있어요? 원수 되었음이 항상 이렇게 담겨 있어야 되요. 나쁜 인간이지만 덜 나쁘다 이러면 안돼요. 우리가 버릴 수도 없고 나쁘지만 못 버리시고 버려봐야 뭐 현실이기 때문에 나를 어떻게 버립니까. 몸 아픈 나를 가지고 안 아프다 안 아프다 이건 뭐 착각도 그런 착각이 없지요. 아픈 나를 버릴 수가 없어요.
버릴 수가 없는데 이 패를 주께서 이 육체를 성령을 주셔서 이제는 뭐냐?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전, 그리스도의 영이 하실 일을 보여주는 육체로 주께서는 인수인계를 시킵니다. 비로소 고아같이 버려두지 아니하시면서 내가 이룬 모든 것을 너에게 그대로 하게 하겠다.
그 다음에 진도 나가봅시다. 몇 분 안 남았지만 해봅시다. 잘 아시겠지요? 사무엘 꿈꾼거 잘 기억하세요. 사무엘 때문에 노선이 두 개 된다는 것. 우리는 보이는게 전부라고 했는데 성령이 오고 난 뒤에 갑자기 세상이 둘로 벌어지는 겁니다.
그 다음에 이제 그 다음에 나오는게 뭐냐 하면 15절에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여기서 생선 잡수시고 뭐 이렇게 하니까 또 신학적인 농담같은게 또 있어요. 예수님께서 용변을 보셨느냐 그런거 이야기하는데 이게 현실밀착형 믿음이 아니기 때문에 자꾸 믿을만한 것을 자꾸 남한테 제시해서 꼬셔가지고 안 믿는 사람을 믿고자 하는 짓을 무당집인 교회가 자꾸 그 짓 하는 거에요. 혹시 가시면서 실로암 있잖아요 그게 동영상 한번 보세요.
“그들이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이 대목 설명하고 마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을 언급했어요. 사랑하느냐 이렇게 했습니다. 사랑이라고 할 때는 항상 여러분들이 더 보탤 것이 없다 이렇게 보시면 좋아요. 사랑이라는 것은. 더 보탤 것이 없다.
아까 기도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기도라 하는 것은 내 목숨을 바꾸는 내용해놓고 목숨을 바꿔야 돼요. 기존 교회에서 장로님들 기도할 때 주여 어린 아이부터 어디까지? 당회까지 잘되게 해주세요 하고 있지요. 그럼 거기에 네 목숨 바칠래? 하면 아니 아니. 안 바치지요. 교회라는 것은 여차하면 튈 생각하는게 교회에요.
여러분들 사도행전에 교회가 흩어지지요? 흩어져야 교회입니다. 왜? 흩어져도 연락이 될 때 교회가 돼요. 모이는 것은 보고 모이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서로 이용해 먹을라고 모이기 때문에 이것은 그 교회 믿지 마세요. 믿을 단체가 못됩니다. 이번 주 10명 나왔잖아요. 다음 주 10명 안 나옵니다. 이번 주에 10명이나 나왔지요. 그 다음 주도 10이나 나와요. 그 다음 주 1명 안 나왔잖아요. 이거 당연한거에요. 당연한거라고요.
안 나와야되는데 10명이나 물위를 걷겠다고 10명 물위를 걷겠다고 10명이 나왔다 나무 뿌리 뽑았다 이런 기적이 어디 있습니까?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다음 주 안 나오면 어떻습니까? 내일 일은 염려하지 말라니까요. 현장성이다 현장성. 우리는 현장성에서 주님을 목격하면 그만이지 이 사람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한달동안 나온다 그런거 생각할 필요 없어요.
목사가 되가지고 교인수 생각하는 것은 나의 역사를 또 생각하는 그러한 비겁한 구실로 교회를 보고 있는거에요. 생각해서는 안돼요. 항상 교회는 흩어져야 돼요. 흩어져도 복음으로 연락하면 그것은 한 가정입니다. 제가 주일오후에 했지요. 교회는 가게가 아니고 가족이라고요. 같은 ‘가’ 자 돌림이지만 가족이에요.
가족은 미국에 있어도 가족이에요. 처남 올케 사이도 독일에 가도 처남 올케 사이가 돼요. 헤어져도 복음으로 연락 취하면 가족입니다. 모여 있는데 복음 생각 안하면 그건 원수들이에요 원수. 물론 원수를 심어놓는 것도 주의 뜻이기 때문에 그 현장성을 종료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은 뭐냐 하면 너 보태지 마라. 너 더 보태지마. 사랑 관계라고 하는 것은 더 이상 보탤 필요가 없어요. 사랑은 뭐를 떠나느냐 하면은 선과 악을 떠나는 겁니다. 그런 사랑 관계 구체적인 것은 로마서 10장에 나오지요. 오호라 곤고한 사람이다 할 때에 주 예수 이름으로 감사하라고 되어 있지요. 모든 율법의 완성을 뭐라고 했습니까? ‘사랑’.
이게 로마서 7장 초반에 나오지요. 아내가 있는데 남편이 있는데 율법으로 맺은 남편이 둘이 이혼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남편이 사랑으로 성령의 사랑으로 아내를 사랑한다면 더 이상 아내가 어떤 짓거리를 해도 남편은 거기에 대해서 그것조차도 뭘로 봐야 됩니까? 사랑으로 볼 수가 있어야 되요. 사랑으로. 그럴 자신 있습니까? 슬슬 밀치는거 아닙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목숨과 바꾸는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 뭐냐 하면 주님이 알잖아요 주님 사랑하는지. 그렇다면 네 목숨 내놔라. 네 목숨이 이 사랑을 훼방하는 거에요. 네 육신이 내 육신은 내 육신이다 하는 그것이 주님의 그 귀한 십자가의 피를 가로막고 모독하는 요소가 나옵니다. 모독할 수 있는 빌미가 돼요. 내가 육체는 내 것이다 하는 그것이.
내가 어떤 모습을 해도 그것조차도 사랑인데 그 사랑에다가 자꾸 내가 색깔을 칠하려고 해요. 나만의 개성이나 색깔을 자꾸 거기에다가 덧입혀버리면 안돼요. 여러분 모나리자 그림에다가 수염 그리면 됩니까? 안됩니까? 열 수도 없지요. 유리판으로 해가지고 경호원들 쫙 있는데 제가 가보니까 무서워서 모나리자만 특별히 거기 함부로 못가요. 거기에다가 막 진짜 그림에다가 수염 그리고 막 이렇게 하게 되면 안되지요.
십자가에다가 그렇게 수염 그리고 하지 마세요. 거기에다가. 십자가에다가 자기 십일조 봉투 걸고 이러지 마세요. 사랑은 그냥 사랑으로 온전히 남아야 돼요. 그 사랑은 예수님의 목숨을 바친 사랑이에요. 이거는 인간의 목숨 바쳐서 어떤 목사의 목숨 바쳐서 사랑 아닙니다. 자기 목숨 자살해도 사랑 아니고.
오직 주님만이 목숨을 바쳤어. 내 목숨이 거기에 들어가는게 아니고. 주님만의 목숨이기 때문에 그 사랑이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사나 죽으나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서 발생되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주님 찾아온 순간 현장성이 이루어지고 우리는 무능한 자가 된 것을 도리어 감사케 하옵소서. 우리가 설치면 설칠수록 주님의 사랑을 모독한다는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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