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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49:13-15 / 스불론, 잇사갈에 대한 예언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49:13-15 / 스불론, 잇사갈에 대한 예언

정인순 2019. 5. 29. 22:21

음성 동영상 Youtube

스불론, 잇사갈에 대한 예언


이근호 

2019년 5월 29일    

본문 말씀: 창세기 49:13-15

(49:13)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49:14)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49:15)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스불론에게는 다른 지파와는 달리, 단출하게 소유하게 되는 결과물이 예언의 내용이 됩니다. 거기에 비해서 다른 지파들은 겪여야 될 삶의 여정과 성격을 예언의 내용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예언의 다양함에 대해서 자식들이 미리 골라잡은 대상들은 아닙니다. 그것은 야곱의 유언이 일반인의 유언방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즉 자식들은 지금 아버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질서를 마주하고 있는 겁니다. 야곱의 인생은 개인적인 인생에 머물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이 집약해서 아브라함에게 찾아왔고, 이삭에게도 찾아왔고 야곱에게도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질서는 아들인 이삭을 통해서 드러났고, 이삭에게 주신 하나님의 질서, 곧 언약은 아들인 야곱을 통해서 나타났고, 야곱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12아들로 통해서 발산되게 됩니다. 도대체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그 내용이 무엇인가는 12아들의 삶을 통해서 이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전체 이스라엘이 하나의 주체로 형성됩니다. 이러한 경향은 일반 인간 세계에서 통용되는 대인관계가 아닙니다. 사람들은 사람들을 상대하여 자기 세계를 구축하고 자기 주체를 다듬고 정돈해나갑니다. 하지만 이러한 관계는 결단코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애초부터 인간과 인간은 하나된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람하고 상대해서 관계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상대로 새로운 관계영역을 구성하게 됩니다. 진정한 관계의 끊어짐은 하나님께서 염두에 두신 그 관계에서만 성립됩니다. 인간대 인간의 관계에서는 진정 ‘끊어짐’이 성립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인간대 인간에게서는 진정한 관계가 성사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진정 자기를 떠나서, 자기가 빠진 상태에서 관계가 성립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아예 없었을 때, 하나님께서 먼저 관계를 형성하기 위해 인간을 만드신 겁니다. 따라서 진정한 인간다움이란 하나님께서 내민 관계로 엮여질 때만 합당합니다. ‘관계 끊어짐과 관계 이어짐’도 모두 하나님께서 내민 관계성이 기준이 될 때만 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바로 진정한 관계 성사를 위해서 주어진 겁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후, 나름대로 이야기가 있는 관계를 이어가지만 그 결론은 항상 자기 의미로 마무리됩니다. 예를 들면, 교회 나와서,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아야지만 천국간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면, “주님, 저 이래서 죄인입니다. 따라서 그 죄를 예수님의 피로 용서해주옵소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일의 마무리는 인간의 자기 주체성을 지키기 위한 일로 마감됩니다. 즉 ‘용서받을 수 없는 존재’가 예수님의 피로 ‘용서받은 존재’가 되었다는 겁니다. 결국에는 자기 스토리로 마감되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끊어진 관계’는 그대로입니다. 따라서 야곱에게 찾아든 하나님의 언약(약속)은 개인적 주체성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내용들입니다.

하나의 주체, 곧 이스라엘이란 전체 테두리 안에서 개인적인 기대나 만족이라는 것이라는 것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개인의 속성이나 성격을 최종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야곱 언약 안의 내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노력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예언이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다른 지파가 받은 예언의 내용을 부러워해서도 아니되는 겁니다. 개인적인 욕구만족을 위한 유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와 있는 스불론의 예언과 잇사갈의 예언의 비교해봅시다. 스불론은 최종 소유하게 될 토지만 소개되어 있습니다. 도대체 어떤 수고와 인생여정을 겪여야 그것을 쟁취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전혀 예언되어 있지 않습니다.

반면에 잇사갈은 세상 살아가면서 어떤 성격의 인생을 살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스블론이 소유에 대해서 언급했다면 잇사갈은 이스라엘 속한 사람으로서의 성격을 나타냅니다. 쉽게 예를 들자면, 어느 부모가 자식 자랑하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큰 아들은 대기업에 들어갔고, 둘째 아들은 공부하는데도 힘들었고, 그동안 병치레를 여러 차례를 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지금 둘째 아들은, 지금의 직업이 뭔지를 전혀 안 알려주고 겪였던 인생사를 말합니다. 일반인들의 입장에서 그 인생과정에 대해서 듣고 싶지도 않을 겁니다. 인간들이 관심두는 것은 그 인간이 얼마나 고생을 했느냐가 아니라 그 결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것을 갖고 있느냐 여부입니다.

이러한 인간성은 하나님의 언약으로부터 끊어진 증거가 됩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은 진정한 하나님과의 관계보다는 ‘나 잘남’으로 모든 변화와 과정이 마무리되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의 자기 주체성 확립에서 항상 ‘직접성’이 작용합니다. ‘직접성’이란 눈에 보이는 대로, 귀에 들리는 대로 자신이 선택할 것으로 대상을 골라놓고, 정리하고서는 선택에 나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직접성’이 별 문제없어 보이지만 다니엘 3장에서는 이 ‘직접성’의 문제가 확연하게 노출되어 있습니다. 다니엘 3:20-21에서 “군대 중 용사 몇 사람에게 명령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결박하여 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지라 하니라 그러자 그 사람들을 겉옷과 속옷과 모자와 다른 옷을 입은 채 결박하여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졌더라”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는 이유 때문에 다니엘 세 친구는 바벨론왕으로부터 형벌을 받게 됩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눈에 보이는 것은 신이 아님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그 벌이라는 것이 바로 ‘직접성’ 차원에서 인간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벌이 준비됩니다. 평소보다 더 극렬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마련했습니다.

눈에 직접적으로 보이는 처벌법입니다. 이때, 다니엘 세 친구는 이렇게 대응합니다. 인간들의 ‘직접성’에 매이지 않는 신앙을 나타냅니다. 따라서 다니엘 세 친구는 ‘보이지 않는’ ‘직접성이 아닌’ 세계에 속한 사람으로 행동합니다. 그랬더니만 그 불 속에 네 번째 인물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자기 주체성을 위하는 사는 사람이 아니었던 겁니다. 덮쳐진 언약의 위력에 휩싸여서 예수님과 더불어 있음을 증거하는 ‘주의 일’로서 살고 있었던 겁니다. 잇사갈은 한가해 보이는 양 우리 사이에서 짐에 억눌린 고된 인생을 살아야 될 팔자입니다. 남의 반찬 칸을 부러워할 필요없습니다. 그 고되 인생이 곧 증거해야 될 주님의 성격이기 때문입니다. 곧 주님을 증거하는 자가 주님의 성격과 주체성이 발산되는 주의 백성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우리의 소유가지고 주님을 증거하려 말고 인생 여정을 통해서 주님의 여정을 증거케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189강-창 49장 13-15절
(스불론, 잇사갈에 대한 예언)19052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9장 13-15절입니다. 구약성경 78페이지입니다.

창세기 49:13-15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대목은 야곱이 마지막에 죽으면서 아들들 모아놓고 유언하는 대목입니다. 나는 이렇게 죽는다는 겁니다. 보통 죽으면서 하는 유언은 부탁하는 것인데 야곱은 부탁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죽고 난 뒤에도 여전한 것이 있다, 꾸준한 것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야곱이 자기 인생을 비춰볼 때에 내가 선택하고 내가 결정한 인생을 살아온 것이 아니고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 준 약속의 그 꾸준함, 그것이 계속해서 자기를 덮쳤고 자기를 덮친 그 꾸준함이 야곱 자신을 통해서 그 깊이가 더해지면서 열 두 자식이 태어났다는 그 자체도 하나님의 꾸준한 일관성 있는 계획이 포함이 되어 있었다고 야곱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제발 부탁한다는 그런 것이 아니고, 그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유언이고, 내가 없어진다 할지라도 나에게 주께서 행사하신 그 일은 너희 시대에서도 여전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한 겁니다. 방금 그 꾸준함, 그것을 두 자로 하나님의 ‘언약’이라고 해요. 언약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약속이라고 해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인간의 결정권, 오기, 열심, 부지런함을 능가하거든요. 이 말이 잘 이해가 안 되신다면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부탁한 것이 따로 없어요. 내가 죽고 난 뒤에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은 어디에 근거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죽고 난 뒤에 하라는 말이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는 조건하에 부탁한 겁니다.

그 함께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냥 ‘제발 부탁이다. 이것 좀 해라.’ 그것이 아니라 내가 뭔가 온전하게 완료시킨 일이 있다는 거지요. 언약을 다 이루었다는 겁니다. 약속을 다 이룬 거예요. 그것도 혼자서 이루신 겁니다. 어디서 이뤘느냐 하면, 바로 십자가에서 이룬 거예요.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언약을 이룰 때에 옆에 있는 두 강도는 주님의 언약 이루는데 전혀 힘 보태준 것이 없어요.

십자가에 있으면서 옆에 있는 강도하고 이야기한 적 있지만 주로 누구하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분과 이야기했습니다. 그분이 누구냐? 예수님의 아버지에요. 예수님의 아버지하고,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하나님하고 차이점이 뭐냐? 세상 사람들의 하나님은 있지도 않은 하나님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상상해서 조작한 거예요.

지어낸 하나님이고 예수님의 아버지는 진짜 계신 아버지에요. 인간이 상상해서 지어난 그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들이 만든 가짜신의 이름에 의해서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을 당한 사건이 십자가사건입니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언약을 수행하신 분은 예수님뿐이고요. 예수님 외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도 모르고, 아버지도 모르고, 그저 창작하고 상상한, 자기가 환상으로 꾸며낸 그 일이 진짜인줄 알고 착각하면서 살아온 자들이에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이 다 도망쳤습니다.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과 열 두 제자의 생각이, 3년 동안 따라다녔으면 비슷한 정도는 되어야 되는데 전혀 비슷하지를 않았습니다. 오죽 했으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 나 있는 곳에 못와.”라고 단정 지었겠습니까?

네가 나의 수제자였지만 나 있는 곳에는 못 온다. 제자들이 새로운 일을 구성할 필요는 없어요. 예수님이 다 이룬 일을 증거만 하면, 목격했다고 그것을 증거 하면 그만인 겁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똑 마찬가지에요. 야곱이 열 두 제자에게 예언을 한다는 것은 부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너희들이 하나 안하나 필히 그런 운명과 그런 일을 당할 것이라고 그냥 던지는 겁니다.

지금까지 한 것을 정리하면, 이것이 뭐냐? 야곱도 하나님이 주신 언약 안에 휩싸였고, 야곱의 아버지 이삭도 휩싸였고, 그 아버지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주신 계시 안에, 예언 안에 휩싸인 겁니다. 이걸 가지고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야곱언약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 그 언약의 구체적인 증거는 뭐냐? 그 자식 대에 와서 드러나는 거예요.

아브라함 언약은 이삭을 통해서, 이삭언약은 야곱을 통해서, 야곱언약의 그 확실한 실제성은 열 두 자식을 통해서 그들의 생을 통해서 보여지게 되고 발산하게 되는 겁니다. 그걸 오늘날 성도에게 적용시켜 봅시다. 우리가 성도냐 아니냐를 어떻게 판정하느냐? 메가폰 들고 큰 소리 친다고 성도 아닙니다. 교회 출석한다고 성도 아니에요.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중에 계속 냄새나듯이, 그걸 성경에서 향기, 향수, 향내라 하는데, 계속해서 그 십자가 복음이 향기처럼 우리 몸에서 저지할 수 없을 정도로, 말릴 수 없을 정도로 계속 발산되는 겁니다. 몸에 향수 뿌리가 나가보세요. 향수 뿌린 채로 어떤 모임에나 나가보면 온 몸에서 다 나오지요.

옷에 향수 뿌리면 펄럭거리면서 주위에서 사람들이 ‘이게 무슨 냄새지? 이것은 내가 아는 남자의 향수냄새인데?’ 옛날 나온 cf처럼 그렇게 될 거예요. 복음은 멈출 수가 없어요. 말릴 수가 없습니다. “나 복음 안 믿겠어. 나 예수 안 믿겠어. 작정했어.” 해도 성도라면 그게 펄펄 나오도록 되어 있어요.

만약 어느 교회 가서 어떤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듣게 되면, 설교는 성경 그대로 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향수가……, ‘복음은 아닌 것 같아. 굉장히 수상해. 교회 한 번 잘해보려고, 키워보려고 수작 같기도 하고, 자기 사람 만들려고 하는 정치적인, 보듬어 주겠다는, 위로해 주겠다는 인간적인 것도 같고, 어쨌든 간에 십자가 냄새는 안 나는 것 같아.’라는 것을 성도는 후각이 발달해서, 성도가 개거든요, 후각이 발달해서 대번에 냄새가 나요.

‘어떻게 꼭 집어서 말할 것은 없는데 이상하게 분위기가 복음이 아닌 것 같아. 왜 인간의 행함이 거기에 들어갈까? 저것은 아닌데. 반박은 안 되는데 이상하게 인간의 행함이 자꾸 거론되는 것 보니 이것은 지옥행이구나. 지옥으로 사람들을 데리고 가는 목사다.’ 하는 것을 우리가 감 잡을 수 있는 겁니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지옥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야곱의 자식들에게 예언을 했고 언약을 했다는 말은, 하나님이 원래 원했던 인간상이 그 인간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이런 거예요. 보통 사람들은 남과 사귄다, 하나 되었다가 찢어졌다느니 그런 이야기들을 하잖아요. 그런데 하나님의 언약에 입각해서 생각해 보면 인간은 누구와 하나 된 적도 없고요, 사귄 적도 없어요.

좋은 관계 이룬 적도 없습니다. 심지어 부부라 할지라도. 내가 너 되고 너 나 되는 법은 없어요. 왜냐하면 각자도생이에요. 너무 고급스러운 문자를 썼는데 인간은 따로 따로 놀아요. 자식도 부모도 마찬가지에요. 인간이 없을 때 하나님이 계셔서 인간을 만들었거든요. 그래서 관계라는 것은 내가 있기 전에 관계가 먼저 있는 관계만이 끊어짐이 성립이 됩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누구와 사귀고 싶다. 좋은 관계 유지합시다. 이제부터 오늘 만남 1일로 합시다. 우리 만난 지 백일입니다. 백날 그렇게 해도 관계를 맺은 적이 없어요. 그리고 인간은 만난 적도 없기에 헤어짐도 없어요. 그냥 각자 자기 길을 갔을 뿐이에요. 여러분, 버스 타기 위해서 버스정류장에서 같이 만났다고 해서 그게 식구입니까? 아니잖아요. 버스를 타기 위한 목적 때문에 우연히 만난 것이지 각자 다른 번호의 버스를 타고 다 헤어지지 않습니까?

인생도 마찬가지고 부부도 마찬가지고 모든 인간관계는 절대로 하나로 결속된 적이 없습니다. 누가 누굴 만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 결정에 의해서 사귀기도 했고 내 결정에 의해서 저 사람과 좋은 관계를 맺기로 했다는 것은 자기 결정이지요. 순전히 자기결정이에요. 서로, 우리 좋으니 서로 사귀자고 해도 그 결정도 독자적인 결정이에요.

내가 너와 사귀기로 했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생각이고 “그래. 오케이, 콜!” 해도 그것은 본인생각이에요. 따라서 원래적인 인간의 관계는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인간 대 인간이 아무리, 아버지 하나님, 할아버지는 우리 편이다, 백날 해도 그것은 인간이 자기 위주기 때문에 결코 그 사람과 온전한 관계는 형성된 적이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래서 사람에게 날 배신했다고 그렇게 욕하지 마세요. 뭐가 있어야 배신이라고 하지요. 서로 이용하겠다고 만났는데 무슨 배신이 성립됩니까? 외로워서 만났는데 그 외롭다는 것도 욕심이잖아요. 외로우니까 날 지켜 달라는 그것도 욕심이에요. 자기 외로워서 남 이용하는 것밖에 더 돼요?

어떤 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인데요. 레슬링 선수입니다. 금메달 딸 때 위암 4기였어요. 위암 4기가 진통제 먹고 금메달 딴 거예요. 따자마자 입원해서 죽었습니다. 그 때 엄마가 하는 말이 “네가 왜 나를 놔두고 먼저 가느냐?” 한 거예요. 오늘 본문대로 하면 하나님의 언약대로 가는 겁니다.

인간 대 인간의 만남이라 하는 것은 그냥 직접적으로 만나는 경우는 없어요. 하나님이 조정해서 잠시 아들로, 잠시 부모로, 잠시 부부로 만났을 뿐이에요. 따라서 오늘 본문에서 야곱의 아들과의 결속은 내가 내 몸으로 낳았다고 아들이 아니에요. 언약으로 재결합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이게 중요한 거예요.

예수님과 아버지는 죄를 지으면 아버지라도 아들이 아니에요. 하지만 언약을 이루면 아들이 되는 거예요. 부모자식과의 원형은 하나님과 예수님이 그 원형이 되고 모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6장에 보면 부모를 공경할 때 ‘주 안에서’ 공경하라고 했어요. 다시 말해서 언약에 의해서 부모관계로 맺어졌음을 인정하고 믿으라는 그런 뜻입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주 안에서 부부지 주님 빼버리면 부부 아니에요. 서로 삶의 편리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그냥 같이 동거하기로 작심한 거예요. 자기계약입니다. 그런데 야곱언약이 오늘 성경에 나와 있지요. 만약에 성경을 덮어 보세요. 성경을 덮어버리고 성경을 모른다고 한다면 인간은 어떻게 사는가? 인간은 인간만 상대해서 살아요.

그런데 성경을 보고 복음을 듣게 되면 아하, 우리는 인간을 상대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상대자로서 이 땅에 태어났고 지금껏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게 언약관계입니다. 그러면 언약관계에 대해서 이쯤 이야기했으면 여러분이 뭘 감 잡아야 되느냐 하면, ‘아하, 언약이라는 것은 내 중심을 아예 배격하는구나. 내 중심을 용납하지 않는구나.’ 하는 것이 어떤 느낌으로 와야 돼요.

언약 자체는 하나님을 위하여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나를 위한 일은 언약이 용납하지 않습니다. 언약이 그것을 가만두지 않아요. 언약이 가만두지 않는다는 말을 쉬운 말로 고치면, 이 세상에 내 일이라는 것은 아예 없다는 겁니다. 내 일은 없어요. 내 일도 없고, 날 위한 내 중심을 위한 일도 없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그 언약의 완성이 하나님이 나라 천국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교회에 사람들이 올 때 뭘 기대하고 오느냐? 천국 가려고 오잖아요. 천국 가려고 온다면 온 사람 본인이 뭔가 바뀌어져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어디서 어디로 바뀌어야 되는가? 자 바뀌기 전부터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에 왔습니다. 목사님이 이런 설교를 합니다. 예수님이 피를 흘린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피 흘렸다고 이야기를 해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뒤에 그 사람이 ‘아, 내가 예수 믿어서 그 피 흘림으로 용서를 받게 되면 나는 죄 없는 상태가 되어서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간다.’라는 계산이 딱 서는 거예요. 그런 계산이 서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주님이여, 제 죄가 이런 것이 있으니 제 죄를 용서해 달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속으로 주님에게.

그게 뭐냐 하면, 언약을 모르는 일이고 그게 자기일이에요. 예수님이 계신 것이 내 죄 용서하기 위해서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면 일의 마무리가 뭐로 끝나느냐 하면, 내 용서 받은 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 돼요. 내가 용서받은 일로 하나님의 일이 마무리가 된다는 그 문장에서 용서라는 말을 빼도 되는데 빼면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일의 마무리는 나로 와서 마무리될 때 나는 그걸 인정하고 믿고 기뻐하겠다는 심보를 노골화시킨 겁니다.

오늘 좀 어려워요. 십자가 피가 죄를 용서한다고 하니까 주여, 제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라고 하는 거예요. 우리가 흔히 그러지 않습니까? 교회가 그것 때문에 장사가 되고 이런 생각이 들 수가 있거든요. 그러나 성경의 언약은 우리를 소환하는데 어떻게 소환하느냐 하면, 예수님 안으로 소환해요. 마무리가 나의 이야기로 마무리 되는 것이 아닙니다.

어디로 마무리 되느냐 하면, 내가 이 땅에 태어나서 용서받으려고 설쳤고, 까불거렸던 그것 조차도 그게 주님의 스토리라는 것으로 마무리 되어야 돼요. 다시 말해서 용서자체가 주의 일의 끝이 아니라 용서받은 자로 예수님 안에 갇히게 만드는 겁니다. 그걸 ‘예수 안’이라 해요. 예수님 안에 결합되는 겁니다. 종속되는 겁니다.

그러면 용서를 받는 것이 아니고 내가 주와 함께 죽게 되지요. 죽게 되면 뭐는 없어져요. 용서 받은 나를 따로 상정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성령이 와야 이 사실을 알 수 있어요. 성령이 안 왔다 칩시다. 그러면 성령이 안온 상태에서 교회 나왔다면 그 교인은 모든 나의 이익과 내가 만족하는 천당 가기, 나 복 받기, 이런 기대를 잔뜩 가지고 교회에 와요.

그러면 목사님이 설교하고, 성경 해석하면 그 중에서 내가 이용하려고 하고 내게 필요한 것을 담아내려고 분주하지요. 정신적으로 막 바빠요. 주여 믿습니다, 믿습니다, 막 자기 쪽으로 담으면서 다지는 거예요. 이게 웬 떡이냐 하고. 그렇게 해 봐야 나중에 ‘나 구원받았다’가 나와요. 평소에 나 중심으로 살던 그것이 예수님을 믿는 행위를 내가 함으로서 결국 내 목적달성을 해버린 거예요.

이것은 결코 신자가 아니에요. 결코 성도가 아닙니다. 바로 열두 제자가 그 짓 했어요. 성령이 오기 전에. 예수님 이용해서 천국에서 높은 자리 앉으려고 했던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열 두 제자나 선지자들은 ‘아, 내 일이라는 것은 애초에 없었고 내가 인생을 어떻게 살든 그것이 전부 주의 일, 주의 언약을 증거 하기 위해서, 주님과 우리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 그 관계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주께서 일관성 있게 일을 꾸몄구나.’

꾸몄는데 그 꾸민 일이 예전부터 성도에게 일관성 있게 주어진 거예요. 그걸 언약이라 했고 요새말로 새언약이지요, 십자가 복음, 십자가 복음의 세계, 예수 안에 있는 주님의 속성과 그 성격을 그 선택한 바구니에 담아서 그 안에 있는 자들이, 우리 예수님은 이런 분이라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서 살게 하신 거예요.

그걸 오늘 본문에 적용하면, 열 두 아들들은 이스라엘, 다시 말해서 야곱이 언약을 받아서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잖아요, 이스라엘이라는 그 판, 바구니, 열 두 지파로 구성된 그 바구니, 1이 12가 되고 그 12가 결국 하나가 되거든요, 1을 집어넣어서 우리가 모르는 새로운 하나의 덩어리 하나가 된다는 말이지요. 이스라엘이 되는 거예요. 내가 들어가서 이스라엘 되는 거예요.

내가 십자가 안에 있음으로서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중의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리스도 몸의 지체 중에 머리카락 하나가 되는 정도로. 그렇게 어떤 판, 테두리를 형성하는 겁니다. 그 테두리를 형성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우리의 삶은 뭐냐? 각자 각자 예수님의 뜻을 증거 하는 동일하지 않는 각종 속성들이 나오는데 그 속성들이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니고 있는 예수님의 성격과 예수님의 본질에서 파생되어 나온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야곱이 받았던 그 언약이 열 두 아들의 예언으로 파생되어 나오는 거예요. 파생이라는 말이 어려우면 쉬운 말로, 여러분이 도시락을 알지요. 도시락에 보면 반찬의 칸이 있잖아요. 반찬 칸이 보통 세 개, 5천 원짜리 넘는 도시락은 반찬 칸이 한 네 개정도 나오잖아요. 그 칸마다 반찬이 다 다르잖아요.

단무지도 있고, 김치도 있고, 떡갈비도 있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칸마다 반찬이 다 다르지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 도시락 뚜껑을 덮어버리면 전부 다 한 테두리 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3절부터 보면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 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스불론이라는 반찬 칸과 그 다음에 잇사갈 반찬 칸이 달라요. 다르지만 이게 한 도시락 안에 들어 있어요. 그렇다면 이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언약의 다양성, 그 다양성이 다시 모아지면 야곱에게 주신 야곱언약의 속성이 어떠하다는 사실이 스불론과 잇사갈을 통해서 발산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스불론은 잇사갈을 부러워하면 안되고 잇사갈은 스불론을 부러워하면 안돼요.

그러면 우리가 봐야 될 것은 뭐냐? 이게 각 칸인데 스불론 칸은 어떤 속성을 발산하고 있고 잇사갈은 어떤 속성을 발산하고 있는가의 그것만 알면 되겠지요. 그리고 이 스불론이 보여주는 이스라엘의 속성과 잇사갈이 보여주는 속성은 모두 다 이스라엘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 공통적으로 적용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됩니다.

다시 말해서, 나는 스불론이니까 잇사갈하고 관계없겠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그렇다면 이 스불론과 잇사갈의 차이점을 봐야 되는데 스불론에게 준 예언은 다른 열 한 아들에게 준 예언과 아주 독특하게 다른 점이 있어요. 어떤 결과물을 줍니다. “스불론은 해변에 거하리니 그곳은 배 매는 해변이라 그 지경이 시돈까지리로다.” 끝.

다른 열 한 지파의 특징은, 네가 어떤 활동을 하고 어떤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네가 이런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행함에 대해서 죽죽 예언을 해놓은 것에 비해서 이 스불론 지파만은 본인들이 뭘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고 본인들이 뭘 소유할 것인가, 그것만 달랑 이야기해 놓았어요.

스불론과 잇사갈의 차이점. 스불론에 비해서 잇사갈은 어떤가 하면, “잇사갈은 양의 우리 사이에 꿇어앉은 건장한 나귀로다.” 이걸 쉽게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부모에게 아들 둘이 있어요. 아들 둘을 친구에게 설명하면서 “우리 큰 아들 이번에 대기업 들어갔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둘째 아들은 요새 고생 많이 하는데 이빨이 아프다고 하던가? 그리고 사업하다가 사기를 당해서 경찰서 들락거린 적도 있어.” 이렇게 하는 거예요.

둘째 아들에 대해서는 어떤 과정을 말하고 있는데 큰 아들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공부를 어디서 얼마나 했으면 대기업에 들어갔는지의 그 과정은 다 생략해 버리고, 우리 큰 아들 대기업 다니면서 살고 있어, 라고 하면서 그 중간과정을 이야기를 안 합니다. 왜? 큰 아들 역할은 대기업 들어갔다는 그것으로 끝났기 때문에. 뭘 소유한 것으로 끝나버려요.

그러나 나머지 잇사갈과 열 한 아들은 그들이 소유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고되고 힘든 인생을 살아왔는가, 그 과정에 주목하라고 과정에 대해서 나열되어 있습니다. 특히 잇사갈은 어떠냐 하면, 건장한 나귀지요. 뭔가 큰일 할 것 같지요. 15절에 보면 “그는 쉴 곳을 보고 좋게 여기며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고”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 다음에 “어깨를 내려 짐을 메고 압제 아래서 섬기리로다.”

한마디로 고된 생활을 하고 있는 중, 이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아마 열 두 아들 보고 열 두 아들에 해당되는 내용들을 카드처럼 해놓고 큰 아들부터 네 맘에 드는 것으로 골라잡으라고 한다면 잇사갈에게 준 내용은 아무도 고르지 않을 것이고 아마 막내아들 베냐민 차지가 될 거예요. 내가 선택해서 골라잡은 것이 아닙니다. 제가 설교 처음에 했지요.

자신도 모르게 그냥 치고 들어오는 것, 일관성 있는 뭔가가 있어요. 내 힘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언약이라는 내용이 나를 덮쳐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있어요. 이 스불론은 해변에 터전을 잡을 것이라고만 이야기가 나왔을 때 보통 사람에게 물어요. 둘 중 어느 것이 나으냐고. 인간의 본성상 인간은 소유를 원합니다.

어떤 인격을 원하는 것이 아니에요. 소유를 원해요.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느 것이 가치 있느냐 하면, 인생이 어떻게 힘들든 어렵든지 간에 그 과정에서 하나님의, 주님의 인격을 드러내는 인간, 주님의 인격을 드러내는 그 인간이 주님의 증인으로서의 합당한 인간이에요. 소유라 하는 것은 우상화되거든요.

말을 좀 어렵게 해 볼까요? 사람이 뭔가, 이걸 직접성이라 하는데 직접적으로 뭘 갖고 보게 되면 그걸 갖고 싶다, 버리고 싶다는 둘 중 하나에요. 이걸 직접성이라 합니다. 사람이 선택할 것을 본인이 정하기 위해서 눈으로 보면서 직접 그 대상과 가까이 하는 것, 그걸 직접성이라 해요. 모든 인간은 그렇게 살아가거든요.

이 직접성의 문제가 뭐냐? 아무리 고르고 아무리 그것을 얻기 위해서 노력해도 모두 나 잘남, 내가 이렇게 노력했음, 내가 이렇게 힘들게 했음, 그래서 나 가치 있음을 증거 하는 자기증거로 귀환돼요.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면, 인생의 스토리가 있다면 그 스토리가 자기가 주인공으로 마감되는 스토리를 할 뿐이라 그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이스라엘 아니거든요. 그것은 뭐냐? 그것은 이방인이에요. 사사기에 들어가 보면 스불론, 잇사갈, 양쪽 다 이방민족과 싸웁니다. 이방민족과 싸운다는 것은 언약적속성, 주님의 속성이 없는 쪽과 주님의 속성을 발산해야 될 이스라엘과의 싸움입니다. 네 성격 말고 주님에 의해서 주신 성격이 우리의 성격이 되고 우리의 주체가 되는 거예요.

그래야 내가 혼자 살지 않고 어떤 테두리 안에 살고 있다는 것, 예수 안에 살고 있다는 것이 주님이 나타내고 싶은 바거든요. 네 인생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대목이 다니엘 3장 19절입니다. 그 대목을 읽어보겠습니다. “느부갓네살이 분이 가득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향하여 낯빛을 변하고 명하여 이르되 그 풀무를 뜨겁게 하기를”

이 대목은 교회를 좀 다녀본 사람은 알다시피 우상에게 절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니엘 세 친구가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극렬한 불속에 들어가는 징벌을 받는 그 대목이에요. 그러니까 바벨론 왕이나 그 백성들은 뭘 보느냐 하면, 직접성을 가지고 우상에게 절을 하느냐 안하느냐는 그걸 바라봐요. 그리고 바벨론왕이나 그 많은 신하들, 다니엘 세 친구를 공격하는 자들은 뭐냐?

우리가 세상을 판단할 때는 직접 눈에 보이는 식으로 판단하는데 너도 우리하고 똑같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것으로 징벌을 만들어요. 펄펄 평소보다 용광로의 온도를 7배나 높여서 더 뜨겁게 하는 겁니다. 이 쪽 눈에 보이는 우상에게 절하지 않는다고 해서 눈에 보이는 무서운, 누구나 들어가면 타버리는 무서운 용광로 불을 피워놓고 눈에 보이는 신에게 절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다 같이 겁을 내고 있는 저 풀무불 속에 들어가라고 한 거예요.

그러니까 그 세친구가 유명한 말을 해요. 다니엘 3장 17, 18절에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찌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래서 그 눈에 보이는 직접성속에 들어갔어요. 들어갔는데 그 때 바깥에서 아무도 보지 못하는 네 번째 분이 그들을 마중 나왔다는 말이지요. 직접성이 전부가 아니었던 거예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직접성이라 하는 것은 항상 결정과 판단을 내가 내리기 위해서 모든 것을 직접성으로 판단하기 마련이에요. 왜? 자기 선택이 옳았다는 자기 잘남과 자기정의, 자기 가치를 증거 하는 증거물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다니엘 세 친구는 그냥 들어갔지요. 들어가니까 거기에 네 번째 사람, 천사 같은 사람과 같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그동안 보지 못했던 느부갓네살 왕이 보면서 “불 속에서 사람들이 안타죽고 네 번째 사람과 같이 앉아 있네?” 그렇게 되어버린 거예요. 자, 신앙이 뭐냐는 거예요. 신앙이 뭐냐고 이야기해도 소용없습니다.

왜냐? 우리는 너무 성질이 급해서 말만 떼면 “믿습니다.” 하는 거예요. 그것은 직접성이에요. 뭐냐 하면, 신앙이라 하는 것은 내가 믿는 것을 주께서 완전히 긁어내는 거예요. 내가 믿을 만 해서 믿는 것은 다 깡그리 거부하는 겁니다. 그것을 인정해주지 않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잘났음을 증거 하는 용도로 돌아오기 마련이기 때문에.

‘나 역시 선택 잘했어. 나 믿음 좋지.’ 그걸로 돌아올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을 전부 다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에요. 아무것도 안하고 해변가에 토지 얻는 그것 할래, 즉 “스불론 될래, 잇사갈 될래?” 전부 다 스불론 된다 하지요. 왜? 결국 마지막에 해변가에 토지를 얻을 거니까. 소유하니까. 그만 자기의 본심이 그대로 노출된 거예요.

또 어떤 바보 같은 사람은, “주여, 스불론에게 해변의 토지를 줬듯이 우리 집에도 열심히 기도하오니 해변가의 맨션아파트나 콘도를 주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나올 거예요. “야곱이 믿는 하나님을 저도 같이 믿으니 이런 스불론의 축복을 저에게도 주옵소서.” 그 사람에게 잇사갈의 축복을 줘버려요.

고된 짐을 지는 것. 양들과 나귀는 대조적입니다. 양은 편안하게 아무 짐도 없이 놀고 있습니다. 양들 사이에서 나귀가 되어서……, 자기 딴에는 건전하다고 여겼지만 사실은 속았지요. 토지를 보고 아름답게 여기면서 ‘여기가 좋사오니’ 하고 눌러 앉았는데 그것이 무거운 짐이 가중되는 자리인줄은 상상도 못했지요. 고된 인생, 그 고된 인생이 바로 이 나귀 같은 분, 우리 주님이고 그 주님이 가는 길을 우리가 그대로 언약 안에서 이어받게 되는 겁니다.

주님이야 뻔히 아시고 고된 길 가셨지만 우리는 천방지축 아무것도 모르고 스불론 되겠다고 온갖 수를 부렸지만, 그렇게 소유가 되어버리면 주님의 성격이 네 삶을 통해서 남에게 알려지지 않게 돼요. 나 주님 잘 믿어서 복 받았다는 자기 잘남만 나타나지 주님이 이런 분이라는 것, 주님의 성격을 보이지를 못하는 거예요.

소유보다 주체가 주님의 주체로 달라지는 것이 복입니다. 뭔가 소유해봤자 그것은 또 소유하고 싶어요. 소유는 우리로 하여금 허무를 가중시킵니다. ‘애걔? 이게 다야?’ 그렇게 되어버려요.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의 그 고된 인생을 함께 누린다는 것은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함께 있다는 것, 이제는 내 이름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주의 이름으로 벌써 개시했고 주의 이름의 사람 천국 생활을 이미 시작했다는 것을 우리는 삶을 통해서 발견해야 됩니다.

우리의 성질대로라면 우리는 어디로 가느냐? 스불론의 축복에 꽂히지요. 해변가에 네 토지가 있다. “스불론아! 너는 해변가에 네 토지가 있을 것이다.” 얼마나 간편합니까? 하지만 그 사람은 아무것도 보여주지를 못합니다. 저 누구에요, 라는 것에 대한 응답이 없지요. “저 어떤 사람입니까?” 응답이 없어요. 그냥 과정은 생략해 버리고 결과만 덜렁 줄 때 그것은 과연 주님과의 관계가 이어졌는지 끊어졌는지를 모르지요.

따라서 우리는 오히려 스불론을 거쳐서 잇사갈로 나와야 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그러면 잇사갈처럼 일하면 스불론처럼 복 주느냐? 그런 원인과 결과는 끊어졌습니다. 왜냐? 도시락 반찬 칸들이기 때문에. 이쪽 칸이 이쪽 칸을 넘보면 안돼요. 욕심내면 안돼요. 스불론이 어떻게 살아갔는지 잇사갈은 알 필요 없습니다.

주어진 예수그리스도의 성격대로 주께서 그 사람을 사용한대로 살면 돼요. 어떤 고생을 했던 간에 이러한 고생마저, 이러한 어려움마저 주님의 살아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역할이다. 그렇게 하게 되면 그것이 이스라엘이라는 한 우리에 함께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입니다. 어디를 쑤셔도 “그리스도께서 이 일을 하게 하셨다.”

이것이 바로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아니고 성도의 그 안에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맺어진 관계입니다. 언약에 의해서! 부부가, 네가 잘났다, 내가 잘났다, 하지 말고 ‘이런 일도 주께서 하게 하셨다.’ 소주 네 병 먹고 들어와서 엉뚱한 짓 할 때 “당신 또 술 처먹고 들어 올거야?” “주께서 마시게 하셨다.” 이렇게만 한다면 술 마셔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저 자기 쪽의 스토리, 자기 이야기 마무리 하려고 이용할 대로 이용하는 얄팍한 수를 쓰는 저희들, 이것이 나의 성격이고 더러운 성격이지 주의 성격이 아닌 줄 압니다. 이제는 어떤 일을 당하든지 주께서 주님 안에 있음을 증거 하기 위해서 시킨 일로 여기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