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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마가복음 13: 26 / 재림 / 190426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가복음

마가복음 13: 26 / 재림 / 190426

정인순 2019. 4. 27. 0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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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미아


광주강의20190426a

마가복음13장 24-27절 (재림)-이 근호 목사

 

마가복음 13장 24-27절

 

24절,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절,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26절,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27절,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하나 등장합니다. 구름을 타고 오시는 그 존재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26절에 보니까, ‘인자’라고 되어 있어요. 인자. 사람의 아들이죠. 사람의 아들인데, 기존의 사람과 달리 사람의 아들로 왔다는 말은, 인자로 왔다는 말은 기존의 사람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정의 대상이 되는 거예요. 하늘나라에서 사람으로 간주하기에 곤란한 대상이 사람이다 이 말입니다. 부정의 대상이 돼요.

 

그러면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존재답지 못하다면, 그 기준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 기준의 용도로 오신 분이 바로 인자에요. 인자. 인자하고 사람하고의 차이점은 사람은 아담의 후손이지만 인자는 다윗언약에 준해서, 언약이 완성이 되었을 때 비로소 등장하는 사람, 그분이 바로 인자입니다. 그래서 인자가 하는 모든 말씀이나 그 행동이나 일은 항상 누구하고 극단적으로 대조가 될까요? 사람이 하는 일하고 대조가 되겠죠.

 

그럼 사람부터 따져야 돼요. 사람은 어떻게 사는가? 사람은 가능성을 내다보면서 살아요. 그럼 벌써 제가 가능성이라는 말을 했으니까, 그럼 인자는 무슨 일을 하실까요? 불가능성이죠. 불가능성을 제시하는 겁니다. 불가능성. 흉내 못 내도록 하는 거예요. 따라하지 못하게 인자를 이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겁니다. 인간은 항상 어디에 기준 한다고 했습니까? 뭘 한다고 했습니까? 가능성. I can do it! 나는 그것을 할 수 있다. 항상 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사람들은 가능성대로 사느냐, 인간의 기억과 체험의 근거해서 거기서 뭐가 도출하느냐 하면은 의미와 가치와 목표를 제시합니다. 기억과 체험에 근거해서 의미와 가치와 목표를 제시하는 거예요. 인간은. 만약에 여기에 애가 있는데 애가 4살이다. 그러면 4살의 애에게서 나오는 모든 의미와 가치는 자기가 1살부터 3살까지 기억하고 체험한 것들에 근거해서 말을 내뱉게 되어 있어요. 3살 먹은 애가 “어머님! 남북통일은 저래서는 안 되잖아요?”라고 이런 식으로는 안 해요. 3살 먹은 애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하겠어요? 안 하죠. 자기 관심사가 아니라는 거예요. 자기 관심사가.

 

인간의 기억과 체험이라고 하는 것은, 이거는 단독적이라고 하는 겁니다. 단독적. 외부에서 오는 것을 참조로 할 뿐이에요. 사람들은 오해하기를 누가 가르치면 가르친 대로 한다고 하거든요.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가르치게 되면, 가르침을 받는 학생의 기억과 체험을 통해서 본인만이 기억하고 있고 본인만이 체험하고 있는 것과 교류해서 수용을 해야 되죠. 교류해서. 주고받으면서. 주고받은 것을, 가르치는 사람 앞에서는 얼굴에 티가 안 나도록, 안 들키도록 하는 거죠. 고분 고분하는 것처럼. 좋은 인상을 남겨서 참 말 잘 듣는 착한 아이다, 착한 자녀다, 착한 학생이다, 라는 자기 이미지를 얻기 위해서 고분고분하지만, 뺄 것 다 빼고요. 버릴 것 다 버리고 그렇게 해요.

 

어린 아이들도 항상 자기기억, 자기체험에 근거해서 의미와 가치를 제시하는데, 이것 역시 바로 자아구축의 현장이기 때문에, 자기 몸이 자아를 계속 구축하는 현장이 되는 겁니다. 애들도 얼마나 거짓말을 했으면 유명한 동화 있잖아요. 양치기 소년. 그 교훈을 애들에게 가르치고 학교에서 가르치는 이유가 거짓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피노키오도 마찬가지고. 얼마나 애들이 주위에서 주어지는 어른들이 하는 모든 가르침 속에서도 자기화 시키는 거예요. 그게 자아화 한다. 자기화 시키는 거예요. 자기화.

 

그렇게 자기화 시킬 때에 엄마가 애를 가르칠 때는 어떤 식으로 가르칩니까? 예를 들어서 엄마의 나이가, 애가 3살 먹었으니까 36세라고 합시다. 엄마 나이 36세. 36세 때 자기는 똑바로 옳은 길로 가르친다고 하잖아요. 근데 36세 된 엄마가 똑바로 옳게 가르치지만 그것은 35년 동안 자기가 기억하고 체험했던 가치를 남한테 강요하는 거예요. 강요하는 겁니다. 그렇게 강요한 것은, 강요했던 이유가 뭐냐 하면은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이렇게 되었다, 라는 것.

 

따라서 이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이렇게 했더니만 이렇게 되었다는 것이 아까 말한 가능성이에요. 이렇게 했더니만 이렇게 되었으니까 이걸 그대로 내 자녀에게 해주면 내가 원하는 결과를 도출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이거는 엄마의 가능성이죠. 이 가능성을 애한테 강제적이든 회유적이든 어떤 식이든 이야기를 하면, 그 애는 그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다 동의하면서도 나중에 자아에 의해서, 몸이 자아구축의 현장이거든요. 인간의 자기 몸에 의해서 전부 다 개조가 되고 변질이 돼요.

 

그래서 이게 인생 자체가 위조인생이에요. 전부 다 위조지폐 남발하는 거예요. 예, 예 해놓고는 전부 다 거짓말이에요. 대화하는데, 10분 동안 대화하게 되면 보통 거짓말 세 번한다고 하거든요. 많이 봐준 거예요. 10분 대화에 거짓말 3번하는 것은. 20분하면 6번. 동방삭이처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거짓말이 점점 늘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오래 살면 기대를 안 하죠. 기대를 안 합니다. 니는 해라, 나는 내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는 따로 챙겼으니까 됐다. 뭐 이런 식으로. 니는 니대로 살고 나는 나대로 산다. 왜냐하면 자아구축 했으면 그걸로 남는 장사거든요. 자아구축 했으면.

 

그러면 자아를 형태화시키면 이렇게 돼요. ‘표면이 매끈하다’가 돼요. 인간의 정신의 표면이 매끈해요. 정리정돈 잘 되어 있어요. 이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매끈하다고 했지만, 정돈, 정리가 잘 되어 있어요. 이것을 가지고 주관이 뚜렷하다고 이렇게 이야기하는 겁니다. 주관이 뚜렷하다. 표면이 아주 윤기가 나요. 매끈해요. 그런데 주님께서 말씀하게 되면 그 정리정돈 된 표면이 전부 다 어떻게 되느냐 하면은 그 표면을 뜯어내버려요. 여자들 화장품 많이 바르잖아요. 그 화장품으로 피부가 윤기가 나고 촉촉하잖아요.

 

그런데 이 피부에 무슨 문제가 있어가지고, 뭐 이렇게 피부암에 걸렸다. 그러면 병원에서 이 매끈한 표면의 피부를 칼로 잘라내고 제키죠. 제키면 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혼돈의 근육질이 나오죠. 핏줄, 근육질, 신경조직, 뼈 조직, 막 나오죠. 그거 정돈이 되어 있습니까? 정돈 안 되어 있습니까? 섬뜩하죠. 흉측하죠. 아주 얼굴이 굉장히 이쁜 사람이다. 이쁜 사람인데, 어디 남편한테 망치로 얻어맞았는지 눈이 퍼렇게 됐다. 그러면 그 균형미가 다 깨지겠죠. 거기다가 수술을 한다고 이렇게 하고, 안 그러면 화상입어서 하게 되면, 그 매끈한 얼굴의 균형미, 아름다움 모습이 피부조직을 한 꺼풀 드러내게 되면 그 안에 뭐가 담겨있어요? 혼돈이 있죠.

 

결국 혼돈된 인간의 육질, 근육질이 매끈한 피부로, 마치 정돈된 것처럼 조작하고 위장해온 거예요. 비싼 화장품 발라가지고 한 겁니다. 겉만 좋으면 되니까요. 속은 겉 뒤에 숨어져있으니까요. 그런데 세월이라는 것이 참 야속하지, 점점 앞에 매끈했던 것, 윤기 나던 것이 세월이 지나가면서 이거는 가능성이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불가능성으로 바뀝니다. 불가능이 나이 한 60, 70만 돼도 자포자기 되죠. 바르지도 않고. 누구 만나야 한번 바르고. 며느리라도 온다고 하면 갑자기 입술에 빨간 것을 칠했는데, 빨강이 돋보일 때에 더 흉측해요. 섬뜩하다니까요.

 

방금 어디 괴기영화, 곡성영화 찍고 온 것 같아요. 차라리 그냥 평소대로 하지, 며느리 온다고, 사돈 온다고 입술 이렇게 바르니까, 입술만 딱 돋보이는 거예요. 방금 어디 생피를 먹은 것처럼. 드라큘라처럼 얼굴을 하고 있단 말이죠. 남편이 몇 번 말렸겠죠. 말려도 안 듣죠. 왜냐하면 그동안 정돈된 자아성 때문에. 나는 바르면 보다 더 이쁜 줄 알고 있어요. 그게 왜 그러냐 하면은 바르면 예쁘다는 것을 체험했고 그게 기억되어 있기 때문이거든요. 한번 공식으로 해봅시다. 원인과 결과에서 뭔가 립스틱 바르면 그 다음에 이쁘다는 것을 하나의 가능성의 공식처럼 사용하고 있었던 겁니다. 립스틱 짙게 바르는 것은 헤어질 때나 성질날 때나 립스틱 짙게 바르는 거죠.

 

주님께서 불가능성을 이야기할 때는 원인과 결과를 끊어버리는 겁니다. 이게 성령이 주는 자유에요. 나의 나 됨은 주님의 은혜라고 되어 있잖아요.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 그걸 이렇게 합시다. 나의 나 됨은 모르겠다, 라고 해야 돼요. 지금 왜 내가 이렇게 사는지, 내가 어떤 행동을 했더니만 이런 결과가 나왔다는 그 논리 고리를 작두로 끊든지, 안 그러면 칼을 갈아서 부엌칼로 하든지 해서, 좀 이렇게 끊어버리세요. 악한 내가, 내가 생각하는 악을 끊어버리면 곧 그게 선이다. 이게 악마가 인간에게 세뇌시킨, 정신적으로 장악하는 이게 상투적인 수법이거든요. 니가 악을 행하지 않으면 선이 된다는 겁니다. 왜? 선과 악은 니가 다 알고 있으니까.

 

선과 악을 아는 것이 악마가 들어왔다는 증거가 아닙니까? 그 증거에 의해서 우리 인간이 계속 휘둘리는 거예요. 우리 인간이. 인간이 하는 재주가 그 재주밖에 없어요. 악을 끊어서 선으로 합치자. 그럼 선하면 뭐하는데? 선을 하면 하나님이 봐주겠죠. 이게 뭐냐 하면 가능성이에요. 가능성에 계속 놀아나는 겁니다. 악마한테. 악마라고 해서 뭐 인상이 이상하고 그런 거 없어요. 악마가 오히려 양의 탈을 썼다고 했습니다. 악마가 천사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말이죠.

 

뭐, 여기 계신 분 다 천사 같으셔서 욕하는 것 같다마는. 그 천사를 끊어버려야 되는 거예요. 천사를 찾아 사바사바사바~~♬ 천사를 끊어버려야 돼요. 원인과 결과를 끊어버려야 돼요. 이렇게 했더니만 이렇게 나왔다, 라는 결과를 끊어버려야 돼요.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남편이 바뀐다는 고리를 끊어버려야 돼요. 여고학교 교문에 니가 지금 공부를 열심히 하면 남편이 바꿔진다. 남편이 달라진다. 요새는 달라졌죠. 남자에게 니가 공부를 열심히 하면 여자가 바뀐다. 니가 원하는 여자가 공부도 안 하는 주제에 너한테 찾아오겠어요?

 

다시 하겠습니다. 세 살이든 네 살이든 인간은 그냥 곱게 가는 것이 아니에요. 몸은 그 몸인데 자아가 날로 구축되는 식으로 가요. 그 자아라고 하는 것은 바로 기억과 체험에 근거해서 자기 의미와 가치를 추구합니다. 그것도 모자라서 뭘 추구합니까? 여기 뭐가 있습니까? 목표를 추구하죠. 목표를 교회에서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소망, 희망이라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희망이 없이는 못 산다는 말은 그만큼 나라는 인간은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으니까 무시하지 말라는 그러한 외침이거든요. 그것이 자아에서 나왔지만 자아의 정신적 표면은 매끄러워요.

 

뭔가 자꾸 단도리를 해가지고 자기 속에 있는 것을 안 들키도록 애를 쓰는데, 주님께서 와가지고 불가능성의 말씀으로 확 쑤셔버리면 우리 겉 표면에 있는 정신적인, 악을 버리고 선을 행했습니다, 라고 하는, 나는 거룩하고 경건합니다, 라고 하는 이것이 완전히 수술대에서 찢어내 버리면 속에는 손댈 수가 없어요. 그 혼돈과 혼란. 혼돈하니까 여러분 생각나는 것이 있죠. 창세기 1장 2절, 처음에 우주는 어땠습니까? 이 세상은 정돈되지 않았죠. 혼돈이죠. 혼돈이었습니다. 혼돈을 약간 예쁘게 포장한 것뿐이에요. 그 포장 뚜껑을 딱 열면 여전히 혼돈이에요.

 

그 혼돈이 선악을 앎으로 말미암아 이게 자체적으로 어떤 형식을 갖췄다고 이렇게 우기고 있는 겁니다. 혼돈이지만, 악을 버리고 선을 이정도로하면 얼추 괜찮지 않느냐고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자위하고 위로하는 겁니다. 선악을 알라고 누가 이야기 했습니까? 그건 하나님이 말렸잖아요. 하지 말라고. 근데 누가 부추겼습니까? 선악을 알라고. 악마가 그렇게 했잖아요. 우리는 악마의 친구에요. 악마의 친구가 돼버린 거예요. 이 말은 악마의 말만 듣고 그 외의 말은 안 듣도록 이미 우리는 악마화 된 대상이 된 겁니다. 악마가 가라 하면 가고 악마가 오라 하면 오는, 그런 대상자가 된 거예요.

 

선을 행하게 되면 우리에게 부수적으로 주어지게 되는 것은 복이다. 그 복이 뭐냐, 내가 잘되는 것이 복이죠. 내가. 내가 잘되는 것이 복이죠. 그러니까 인간은 내가 잘된다, 내가 살아야 된다, 나는 행복해야 돼, 이게 치명적인 약점이에요. 이게. 이게 약점이라고요. 우리는 그걸 목표라고 보지만 약점이 된 거예요. 내가 행복해야 돼. 나는 잘돼야 돼. 나는 평온하다. 평온하니까 이건 하나님의 복이다. 이렇게 되는데, 여러분 평안하다, 평안하다, 할 때 주님께서 갑자기 오시잖아요. 주님께서.

 

인간이 가능성에서 그려내는 목표나 희망은 그저 가능성과 가능성 사이에 단절이 아니고 계속 연속적인 거예요. 연속적인 것. 원인과 결과에서 이어졌다고 본 겁니다. 이게 이제 필연이라고 하는데, 주께서 일할 때는 이걸 혼돈과 혼란으로 만들어버리시는데, 이게 필연이 아니고 뭐가 되느냐 하면은 우연 또는 우발성이 되는 겁니다. 우리가 지금 앉아있는 게 주님의 우발성에 의한 결과물이에요. 주님의 우발성이기 때문에 내가 이렇게 와서 이렇게 왔다고, 그걸 연속적인 계기로 억지로 연결시키려고 하지 마세요.

 

그러면 우리는 그 가능성의 늪에서 못 헤어 나옵니다. 이런 결과를 얻기 위해서 나는 이렇게 하면 되겠지, 라는 그것도 가능성이잖아요. 이렇게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결과가 나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 결과를 해명하기 위해서 나 스스로 설득되기 위해서 내가 원인을 조작하는 거예요. 왜? 인간은 기억과 체험을 못 버리기 때문에. 기억과 체험이라는 것은, 이거는 어디까지나 과거 아닙니까? 과거하고 현재를 억지로 이어나가려고 애를 쓰는 거예요. 인간들이 악마의 사주를 받고. 그럼 누구만 좋은 거예요? 악마만 좋은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들로 하여금 자기 잘남과 자기 가치와 의미와 가능성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하는 한 악마는 자기 종 부리듯이 할 수 있는 겁니다.

 

그걸 로마서 6장에서는 죄의 종이라고 하는데, 인간을 죄의 종이라고 해요. 아담 자체를 죄의 종이라고 해요. 상당히 포괄적으로 언급하고 있죠. 죄의 종이라고 하는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악마의 종이죠. 종의 특징은 뭘까요? 종의 특징은 거기서 개인적인 자유가 허락됩니까? 안 됩니까? 안 되죠. 개인적인 역량이라든지 사적인 가능성 같은 것은 발휘되지 못하죠. 종이니까. 노예잖아요. 노예. 주인님이 따로 있잖아요. 그러니까 죄가 주인님 노릇하고 있는 거예요. 죄를 죄 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은 악마가 시키는 대로, 사주한 대로, 니는 이렇게 살아야 인간이라는 그 인간 자아성이 이미 확고히 되어 있고 구축되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악마가 제일 싫어하는 것 하나가 죽음이에요. 죽으면 모든 것이 무효화되잖아요. 무효화. 무효화되죠. 근데 인생이 죽잖아요. 그러면 인생 앞에다가 뭘 붙여야하느냐 하면은 그냥 인생이 아니고 무효인생이에요. 무효가 될 수밖에 없는 인생. 무효인생이라고 제가 글자를 썼잖아요? 이걸 지워버리면 뭐가 됩니까? 없잖아요. 인간은 자꾸 있음에서 있음을 끄집어내려고 해요. 왜냐하면 그래야 원인과 결과의 고리를 자기가 붙들고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의 일은 돌발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에 반드시 뭡니까? 없음에서 있음이 나오죠. 그 없음에서 있음이 나오기 위해서는 있음에서 있음이 나오는 이 논리 고리를 어떻게 해야 해요? 계속 차버리는 겁니다. “이렇게 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라는 것을, 계속 주께서는 이걸 부정하는 거예요. 거부하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성령의 일이에요. 성령님의 일은, 물론 성도에게만 해당이 됩니다. 성도만이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래서 성도를 영의 사람이라고 하거든요. 반대말이 뭐겠어요? 육의 사람. 성령 받은 사람은 영의 사람. 성령이 없는 사람을 가지고 육의 사람이라고 하는 겁니다.

 

사도바울이 성도를 언급할 때에 육의 사람부터 먼저 언급을 하는 이유가 영이라고 하는 것은 육이 없으면 설명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래요. 여러분, 빛만 귀한 게 아니에요. 그림자도 귀해요. 그림자 제키고 빛만 찾으면 안 돼요. 그림자와 더불어서 빛을 설명해야 됩니다. 그림자. 그림자가 그만큼 귀한 거예요. 예수님이 빛이죠? 우리는 뭡니까? 예수님의 빛에 의해서 우리는 뭐다?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예수님의 빛을 증거 하는 그림자가 되는 겁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얼마나 영광스러워요. 자기가 단독으로, 따로이 자기 내부에서 나의 빛, 나의 그림자를 분류하는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내가 주님에 의한 그림자라는 것을 아는 거예요. 전적으로. 몽땅 다. 올All. 모두가 그림자가 되는 거예요. 성령은 예수님의 영이기 때문에 빛으로 오잖아요. 빛으로 오게 되면 우리가 하는 시도가 있음에서 있음, 원인과 결과를 못 놓고 있어요. 이런 논리 구조를 못 놓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아까 오실 때 김밥 사오셨잖아요. 배부르죠. 배부른 이유가 뭡니까? 뭐라고 이야기하느냐 하면은, 내가 집어먹어서 배부르다고 하거든요. 이것이 잘못된 버릇이다 이 말입니다. 어떤 행동을 해서 배부른 게 아니라 배부르게 하신 거죠. 배부르게 하신 거예요. 김밥을 한 세 개 먹고 있는데 갑자기 북한에서 쳐들어온다. 배부르지 않죠. 왜냐하면 김밥이 안 들어가죠. 북한에서 쳐들어오면 빨리 목포에 가서 이사할 준비를 해야죠. 튈 준비 해야지 한가하게 김밥 먹을 정신이 어디에 있습니까? 불안해하는 아내 걱정해야 되고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러니까 김밥 먹고 배부르다고 하는 것은 한가로이 여유를 주신 분이 따로 계신 거예요.

 

우리는 그런 것을 다 따로 떼고 보죠. 왜냐하면 원인, 결과 내 가능성만 생각하다보니까, 변수로 제공된 모든 하나님의 은혜를, 다 떼고 가실게요, 해서 다 잘라버린 거예요. 자기가 이렇게 노력해서 이런 결과가 나왔다고 하니까, 그런 인간을, 그렇게 내가 단도리를 잘했던 내 가족이나 내 식구중 하나를 하나님께서 죽여 버리셨다 라든지, 뭔가 병으로 아파버리면 갑자기 우리는 악마의 모습이 발칵 나오죠. 분노가 나오죠. 더 이상 어떻게 하나님 앞에 잘해야 됩니까? 내가 이 가정 지키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어버리면 나는 더 이상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낙담케 하십니까?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일을 하신 성령님이 갑자기 욕 얻어먹게 되어 있어요. 갑자기 자식 죽게 한 성령님이 욕 얻어먹게 되어 있다니까요. 그 인간 살리기 위해서 애 죽였는데 이거 뭐 항의가 막 들어오는 거예요. 왜 내 세계를 건드리십니까? 이래 된 거예요. 니 세계가 악마의 세계라 이 말이죠. 악마의 세계에 보금자리 하나, 아파트 하나 분양받은 거예요. 그냥. 보통 박람회 할 때 칸막이를 뭐라고 합니까? 부스라고 하죠. 우리는 부스 하나 할당받은 거예요. 이 땅에서. 악마의 세계에서 부스 하나 할당받은 거예요.

 

그러니까 관심사가 뭐냐, 정치에 관심이 있는 거예요. 나라가 잘되어야 내가 잘된다. 이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무도 이야기해본적도 없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내가 갖고 있는 내 자아라는 것이 줄곧 이런 식의 기억과 이런 식의 체험을 내가 정리정돈해서 왔기 때문에 그래요. 그놈의 정리정돈이 문제라. 그 정리정돈을 왜 합니까? 깔끔 떨고 정리정돈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이죠. 깨끗하게 해놨는데 친척 동생이 와가지고 막 뛰어내리고 이거는 누나 곰 인형이라고 해가지고 막 집어던지고 하게 되면 얼마나 화가 나는지 몰라요. 니 오지 마라! 이 사촌들아 오지마라! 이렇게 하겠죠.

 

그런데 세 살, 네 살 먹은 사촌동생들이 와서 자기가 어지르는 것보다 더 심하게 어질러버리면 애들은 좋아합니다. 자기 어지른 것은 흠이 안 되는 거예요. 그것이 주님의 방법이에요. 니는 죄의 종이라고 함으로 말미암아 니가 얼추 죄를 지어도 그거는 내가 보는 죄에는 아직 멀었다는 거예요. 위로 삼아서 이야기한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래요. 우리가 우리를 용서 안 해서 문제죠. 주님은 우리 수준을 아주 엉망으로 보는 거예요. 전적 무능력, 전적 죄인이에요.

 

우리 자신이 자신을 몰라가지고 호들갑을 떨고 있는 겁니다. 아휴, 내 인생 이렇게 정돈해야 되는데, 아까 이야기한 부스죠. 내게 허락한 부스를 깨끗하게 정돈해야 하는데. 하나의 부스가 깨끗하게 되려면 옆에 있는 부스로부터 영향을 받아야 돼요. 인간은 혼자 사는 것이 아니에요. 지 깨끗하고 깔끔 떤다고 혼자 사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많은 변수들이 계속 들어오는 겁니다.

 

이걸 주입 또는 개입이라고 할 수 있죠. 뭐 어디 개입한다, 주입한다, 라는 말을 사용한다는 자체가, 내 것의 경계선, 바운더리boundary는, 따로 여기서부터 여기까지는 내 것입니다, 라고 일방적으로 우김이 있기 때문에, 개입이고 주입이라는 말을 우리가 사용하는 겁니다. 내 것인데 이게 왜 들어오느냐 이 말이죠. 주님께서는 그 내 것을 어떻게 해요? 내 것을 파괴해버리죠. 민수기 21장 6절인가 찾아볼까요? 누가 한 번 읽어보세요. “여호와께서 불뱀들을 백성 중에 보내어 백성을 물게 하시므로” 됐습니다.

 

백성들이 불뱀을 보고 싶어서 기도했습니까? 이거는 돌발사태죠. 우연적이죠. 그들은 기억과 체험에 의해서 자기 단도리에 열중합니다. 그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와 똑같아요. 주께서 주신다면 내가 원하고 있는 내 과거와 체험에 의해서 더 좋은 것, 복이라는 이름에 더 좋은 것을 주기를 원했는데, 막상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그들에게 주입시키고 개입시킨 것이 뭐였습니까? 불뱀이죠. 불뱀. 불뱀을 줬을 때에, 사람들은 이걸 싫어하는바 되어 있어요. 싫다는 말은 뭐냐 하면은 내 경계선, 바운더리에 구축한 것에 필요 없는 것이 들어왔다고 보는 거예요. 필요 없는 것.

 

근데 필요 있다, 없다 결정을 누가 해요? 자기 나이까지 자기에게 구축된 자아가, “이거는 들어올 필요가 없습니다. 이거는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본인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마귀나라 지옥 아닙니까? 지옥이거든요. 자기 경계선 쳐놓고 이 안에는 무조건 자기가 신이 되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고, 자기만의 세계, 자기가 황제가 되고, 자기가 교주가 되는 그 세계를 따로 구축하라고 배후에서 누가 이렇게 시켰습니까? 독립하자! 독자적으로 니가 최고다! 라고 누가 그렇게 한 거예요? 여러분이 했습니까? 누가 했어요? 악마가 그렇게 했잖아요.

 

그럼 주님은 언약을 가지고 누굴 공격하는 거예요? 악마를 공격하잖아요. 악마가 인간에게 저지른 그 원리와 원칙, 삶의 조건, 이런 것을 안 건드릴 수 없잖아요. 그게 뭐냐 하면 주입과 개입이에요. 불뱀이 외부에서 온다고요. 오늘 저녁에 여러분이 시험 한 번 해보세요. 여러분이 시험하면 안 되는데, 여러분이 침대에 주무시고 있는데, 옆에서 누가 못된 짓을 했는지 바퀴벌레가 한 열댓 마리 몰려와보세요. 그런데도 잠을 편안히 자면 그건 정말 성인군자고요. 장마철에 습기 찰 때, 화장실에서 올라오는 거머리 비슷한 거 있잖아요. 이런 거. 올라오게 되면 원치 않는 불청객이 오듯이 이렇게 하잖아요.

 

그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가르치는 방법이 불청객, 불뱀을 보낸 거예요. 불뱀을. 하나님이 제시한 것이 되어야, 거기서 벗어나는 치료방법이, 인간이 그동안 자기가 철석같이 신조처럼 지켰던, 신처럼 여겼던 그 가능성, 내가 이렇게 했더니만, 원인이 이런 결과를 낳았다, 라는 그 가능성이 불뱀 앞에서 어떻게 돼요? 이게 무용지물이죠. 그동안 인간의 가능성은 이거였습니다. 기도하면 그 다음에 뭐 받는다? 응답받는다. 이게 불뱀 앞에서 통하던가요? 안 통하던가요? 안 통하죠. 통할 수가 없어요.

 

주께서 주신 해결책은 뭐냐 하면은 제 3의 중개조건이에요. 제 3의 중개조건. 불뱀이 왔을 때 제 3의 중개조건이 뭐였습니까? 제 3의 중개조건이. 바로 놋뱀이었잖아요. 그 놋뱀이 요한복음 3장에서는 뭐라고 했습니까? 십자가죠. 그러면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는 우리 인생에서 뭣이 계속해서 들어와야 됩니까? 불뱀이 들어와야 돼요. 불뱀. 자식을 셋 낳았는데, 셋 다 불뱀1, 불뱀2, 불뱀3. 자식 둘인데, 둘 다 불뱀1, 불뱀2. 남편이 불뱀이고 아내가 불뱀이고.

 

원치 않는 불뱀으로 내가 구축한 내 자아의 행복, 내 의미, 내 가치. 그리고 거기서 형성된 유일한 내 목표와 내 소망과 희망을 깡그리 완전히 박살내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의 개입. 이게 사랑이겠어요? 이 바퀴벌레가. 고요한 나의 매끄러운 표면적을 완전히 좌절시켜버린. 악마는 뭐라고 합니까? 니가 기도 안 해서 그렇다, 니가 헌금 안 해서 그렇다, 니가 충성 안 해서 그렇다, 니가 나쁜 짓을 해서 그렇다, 계속해서 악마는 끝까지 셰퍼드처럼 물고 늘어지는 것이 뭐냐 하면은 논리구조에요. 원인과 결과. 가능성이라고 했죠. 이게 가능성 또는 합리성, 과학성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논리적 과학성.

 

이 원인에 의해서 결과가 나왔다. 따라서 니가 그런 결과를 해소하려면 뭐부터 바꿔야 된다? 원인을 바꾸면 결과가 바뀐다는 거예요. 계속 집요하게, 이거는 암 조직 같아. 끊임없이 우리를 물고 뜯습니다. 꽉 잡고 안 놓아주려고 하는 거예요. 연세가 많고 두 부부가 오랫동안 같이 해로하면 상당히 부럽죠. 그런데 인생을, 우리 인간으로 봐서는 세 살이 있어야 네 살이 있고 네 살이 있어야 다섯 살이라고 하잖아요. 그 사고방식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만약에 우리가 80에 죽는다고 한다면, 죽음이 있기에 79가 있고 죽음이 있기에 78이 있는 거예요.

 

출발점을, 스타트를 죽음에다가 두어야 돼요. 이게 인자의 모습, 인자의 방식이에요. 악마의 방식은 내가 이 땅에서 오래 살았는데, 오래 산 것을 주장한다고요. 그러나 마지막이 시작점이에요. 우리의 본 모습은 마지막에 드러나지 시작에 안 드러나요. 자식 낳아서 애가 이쁠 때 애가 얼마나 이쁘다고요. “아이, 이쁘다.” 그 이쁨이 이상하게 계속 오래가지를 않아요. 사그라들죠. 진짜 우리의 본모습은 우리가 손을 댈 수가 없습니다. 이걸 죽을 때 알지 마시고, 10대, 20대, 진작 알았어야 되죠.

 

그렇다면 내 기억과 경험과 무엇과 대치가 되느냐 하면은 주님의 십자가의 기억과 주님의 십자가의 경험과 이게 대치가 돼요. 서로 충돌을 일으켜요. 내 잘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어진 제 3의 중개적인 조건을 증거 하기 위해서 우리를 일찌감치 이 땅에, 1900 몇 년 도에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십자가 증거 하라고. 예수님 증거 하라고. 그렇게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고장 난 벽시계는 멈췄는데 이놈의 세월은 멈추질 않네.’ 혹시 이런 노래를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나훈아가 부른 거거든요. 제목이 ‘고장 난 벽시계’에요. 집에 있는 고장 난 벽시계는 고장이 나서 스톱이 되어 있는데, 왜 내 청춘, 내 세월은 자꾸 가느냐 이 말이거든요. 이게 얼마나 오해인지, 고장 났기 때문에 세월이 가는 걸로 느껴지는 거예요. 고장 났기 때문에.

 

주님의 세계에서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은 언약 흐름에 준하기 때문에 신약에 와서는 시간의 흐름이 없어요. 그 자체가 종말이에요. 그 자체가. 그 자체가 종말이고 그 자체가 더 노골적으로 말하면 죽음이에요. 죽음의 현상들을 마구마구 이 신약시대에 들추어주는 겁니다. 죽음의 현상들을. 죽는다는 것을 굉장히 섭섭하게 생각하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은 우리의 과거의 기억과 체험 때문에 그런 오해가 생기는 거예요.

 

그 과거의 체험의 가치와 의미가 뭐냐 하면은, 일단은 내가 살아야 가치와 의미가 있다는 거예요. 산다는 것은 있는 것이 계속 있음으로 간다는 겁니다. 모든 사건을 전부 다 연결시켜가지고 마치 필연적인 연속성을 유지하는 것처럼. 하나도 연속성이 없거든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주위에서, 예를 들어서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으로 걸어갈 때에, 얼마나 많은 사태들이 주님에 의해서 조정 받는지 몰라요. 그야말로 A라는 지점에서 B라는 지점까지 7.5미터라면, 7.5미터에 도착했다면 여러분이 무사히 오신 줄 아시기 바랍니다. 무사히. 3층에서 화분이 안 떨어져서 천만다행이고. 오다가 동창생 안 만나서 제대로 왔다고 생각하시고.

 

우리가 모르는, 우리가 뭘 알겠어요? 우리가 모르는 많은 변수들을 주께서 다 제켜주고, 그걸 다 막아줬기 때문에 우리가 7.5미터를 전진할 수 있었던 겁니다. 그럼 이거는 계속해서 주님의 간섭이 개입되는 현장이거든요. 시간이라는 게. 근데 우리는 멀쩡하다고 생각하니까, 세월이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세월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고, 이 세상에서는 계속해서 주께서 간섭하는 영역이지, 우리가 세월을 측정해서 이렇게 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아요. 흘러가기는 뭘 흘러가요.

 

제가 수요일에 설교했죠. 야고보서 4장 14절 이야기했죠. 인생은 뭐라고 했습니까? 인생은 안개라고 했죠. 자, 묻습니다. 세 살 애가 안개입니까? 안개 아닙니까? 세 살 애가. 안개죠. 그럼 열두 살은? 안개죠. 칠십 칠세는? 안개죠. 육십도? 안개죠. 안개 아닌 적이 없어요. 그럼 안개인데, 남자 안개 따로 있고 여자 안개 따로 있습니까? 그거 의미 없죠. 마지막에 천사와 같이 되면 남자, 여자 없어요.

 

그럼 뭐가 의미가 있느냐, 언약이죠. 그럼 언약에서 우리는 어떻게 됩니까? 언약에서 우리는 인자류가 되죠. 영장류 그런 것 말고.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하면은 오늘 본문 13장 27절에서 나옵니다. “또 그 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아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갑니까? 인간으로부터 인자로. 인자에 집합하죠. 인자류의 사람으로 달라지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변화시키려고 하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내뱉는 천국, 지옥, 구원, 이런 것들의 개념들이 전부 다 달라져야 해요. 우리 입장에서 하지 말고 주님 입장에서 다 달라져야 해요. 근데 우리는 아까 가능성, 체험, 기억, 여기에 무장되어가지고 내 입장에서 생각하는 천국, 지옥을 생각하는 거예요. 교회도 마찬가지고. 그렇게 생각한다 이 말이죠.

 

그럼 오늘 본문 26절에 보면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온다는데, 만약에 내 중심, 내 구원중심이 돼버리면, 구원중심이라면 예수님이 구름타고 올 일이 없어요. 그래서 내가 지금까지 본 중에서 재림에 대해서 설명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제가 아는 한. 제가 뭐 알겠습니까? 제가 아는 한 재림에 대해서 이야기 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어요. 전부 다 재림이야기하면 무엇과 연관시킵니까? 자기 구원과 관련되어 있어요. 그건 엉터리 재림이에요. 예수님이 오실 이유가 없는데 왜 오십니까? 재림이 만약에 돼버리면 재림이 되어야 다 이루었다가 돼요. 재림 이전에는 미완성이 돼버린다고요.

 

여러분, 그런 의문점이 없던가요? 십자가로 죽고, 죽고 난 뒤에 우리가 성령 안에서 예수님이 오시면 부활이 되잖아요. 그러면 그거면 됐지, 굳이 재림할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세상에서 죄 있는 우리를 죄용서 해주셔가지고,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에 합류해서, 죽은 자 가운데서 우리를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 몸의 부활,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로 구원한다. 아니, 그 이야기로 뭔가 모자랍니까? 그것으로 뭔가 부족한 거예요? 이 더러운 세상에 다시 오실 이유가 없잖아요. 어디 뭐 채무관계에 있습니까? 어디 돈 받으러 오신 거예요?

 

마치 뭐와 같은가 하면은 우리가 빚을 못 갚아서 악마한테 매여 있으니까, 악마는 채권자고 우리는 악마한테 빚을 진 채무자 입장이고. 주께서 오셔가지고 “니 얼마 빌렸노?” “예. 죽어도 못 갚을 죄를 졌습니다.” “그래. 내가 갚아줄게.” 그래서 우리가 십자가 피로 죄 값을 치르고, 드디어 우리가 죄 없는 상태에서 악마가 우리한테 요구할 수 있는 어떤 채무관계가 없다 이 말이죠. 악마가 우리에게 뭘 요구합니까? 율법에 의해서, 말씀에 의해서 우리의 죄를 지적하는, 그 지적할 수 있는 여지는 전혀 없는 거예요.

 

골로새서 2장에 나온 말이죠. 그 증서를, 채무증서를, 율법이란 증서를 찢어버렸다 이 말이죠. 그러면 우리는 죄 없는 상태에서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잖아요. 그렇죠. 그렇다면 거기에 재림이라는 것이 들어갈 이유가 없고, 여지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왜 예수님이 재림으로 또 오십니까? 우리는 지금 천국에 다 갔는데. “아이고, 빚 다 갚고 고맙습니다.”하고 있는데. “야! 손잡고 내려가자.” “어디로 내려갑니까?” “세상에 내려가자.” 그 더러운 세상에 왜 갑니까? 갈 이유가 없죠. 주님도 한 오지랖 하십니다. 이미 떠난 세상인데 멸망시키면 그만이지 왜 오셔야 됩니까?

 

오실 이유가 빠진 거예요. 주님이 하신 일이 빠졌다는 말은, 우리가 빼고 구축한 구원론이 엉터리 구원론일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한 거예요. 뭐, 이거 빼고, 구원받고자 하는 우리의 욕망 있잖아요. 그 욕망에 미쳐서 성급하게 성경구절 가지고 와서 땜질한 거예요. 방금 제가 욕망이라고 했죠. 욕망을 제가 초반에 뭐라고 했죠? 이걸 가지고 우리의 목표라고 했어요. 인간의 목표가 있는데 그 목표가 뭐냐, 결국 자아의 완전함, 자아의 편안함, 자아의 행복, 자아의 영원한 복락. 그러니까 내가 천국 가고 싶은 것은 누구 좋아라고? 내가 잘되기 위해서 천국행을 원하는 거예요. 완전히 빌고.

 

근데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인간은 달라져야 된다고 했죠. 자아 이 자체가 이게 어디서 투입이 된 거예요? 악마가 시킨 대로 형성된 자아잖아요. 이렇게 돼버리면 천국 가는 것이 뭐가 되느냐 하면 가능성이 돼버린다고요. 내가 예수 믿었다는 원인으로 말미암아 그 결과로 천당 가는 것이 돼버려요. 이거는 결국은 ‘라이언일병구하기’처럼, 내가 나를 구하는 방식인데, 이 모습입니다. 물에 빠졌는데 자기 운동화 끈을 잡아당기면 내가 물에서 빠져나옵니까? 자기 발만 떡 들리죠. 몸체는 더 엎어져 물속으로 더 들어가고. 뭐, 꼭 실험 안 해도 되겠죠. 욕조에 누워서 여러분 발을 한번 잡아당겨보세요. 외부인이 말고 스스로 자기가 땡겨 보세요. 안되죠. 불가능하잖아요.

 

자아가 아는 방식으로 구원론을 형성할 때는 뭐가 빠져있다? 재림이 빠져있는 거예요. 재림을 넣어버리면 지금까지 구원론은 잘못된 구원이라는 것이 들통 나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광주강의20190426b

마가복음13장 24-27절(재림)-이 근호 목사

 

첫째 시간에 나를 위한 천국관, 구원관은 예수님의 재림이라는 것이 불필요한 요소가 돼버려요. 자기만 달랑 구원받으면 되지, 우리가 떠날 세상에 다시 오실 이유가 뭐가 있느냐, 그래서 재림이 필수적으로 제시되지 못한 구원관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나의 구원에 있기 때문에, 출발하는 게 나의 구원에 있어요. 나만 구원받으면 그만이라는 거예요. 그럼 이것은 인간들이 근본적으로,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자라는 것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뭘 생각하라고 했습니까? 인간부터 먼저 생각하라고 했죠.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은 뭐부터 한다? 가능성이죠. 가능성이라고 하는 것은 있음에서 뭘 한다? 있음이죠. 바둑 두는 사람은 알아요. 바둑에 어떤 경우가 있더라도 두 집을 나면 삽니다. 바둑 게임에서 두 집 나면 살아요. 왜 그러냐 하면은 한 번 두고 한 번을 두기 때문에. 연달아 안 두기 때문에. 연달아 두게 되면 이거 잡고 이거 잡는, 다 잡아버리는데, 한 번 두고 한 번 두기 때문에 죽지를 않아요. 바둑은 뭐냐 하면 게임입니다. 인간이 만든 게임은 인간의 내부적인 소망이라든지, 인간의 성향, 이런 것을 게임을 통해서 그대로 다 보여주는 겁니다.

 

야구보세요. 포수로부터 퍼스트, 세컨, 서드로 해서 다 돌아오죠. 중간에 아웃되는 것을 뭐라고 합니까? 죽었다고 하죠. 한 점 나는 사람은 이게 사는 게 돼요. 인간의 본성은 그 게임을 통해서 반영이 되는데, 그 게임은 뭐냐 하면은 우리가 어떻게 하면 사느냐에 관점이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사느냐. 인간이 그게 달라져야 해요. 사느냐가 돼버리면 천국이라는 것도, 구원도, 내가 살아야 되겠다, 뒤에 객차 붙이듯이 갖다 붙이는 거예요. 이게. 내가 살아야 되겠다, 잘살되, 나는 죽어서도 잘살아야 되겠다, 이게 천국이잖아요. 이게 구원관이잖아요.

 

앞에 있는 것은 손도 안댔어요.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을 문제시하지 않았어요. 그럼 내가 살아야 되겠다고 할 때는 나는 인간입니까? 인자입니까? 인간이지 인자가 아니죠. 아담이죠. 예수님이 아니잖아요. 예수님께서 인자가 구름타고 온다고 한 것은, 바로 인간들의 게임화 된 이 세상의 삶, 모든 것을 전부 다 심판하는 겁니다. 인간의 구원관, 천국관, 지옥관, 전부 다 부정해버리는 겁니다. 인간이 끄집어내고 고대하는 그 모든 천국과 구원은 다 엉터리라는 겁니다. 기껏해야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아이디어에 불과한 거예요.

 

근데 아까 이야기했지만 인간의 본성에서 나온 것을 뭐로 한다고 했습니까? 게임. 모든 것을 게임화 시키는 거예요. 게임화. 대표적인 것이 뭐냐, 정치 아닙니까? 정치하는 게임에 관심 있는 사람들 전부 다 “유튜브 들어오시고 sns에서 글에 좀 좋아요! 눌러주세요.”라고 해요. 이게 뭐냐 하면 우리가 정치라는 게임을 하는데 재밌다는 거예요. 무슨 트랙? 패스트 트랙Fast Track(안건의 신속처리를 달리 부르는 말), 빨리하자. 30일이 지나면 자동적으로 법률안이 상정되도록. 이게 전부 다 인간이 정해놓은 거잖아요. 정할 때 주님한테 물어봤습니까? 인간이 인자한테 물어봤어요? 안 물어봤죠.

 

그럼 정치게임을 왜 합니까? 두 집 내서 살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일종의 바둑이고 장기라니까요. 이걸 비트케슈타인이 처음으로 이야기한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게임이다. 의미 없다. 게임이에요. 누굴 위한 게임이다? 나의 있음의 의미를 찾기 위한 게임에 불과한 거예요. 부모가 자식을 훈계할 때 그것도 게임이에요. 우리 가정을 영광스럽게 하는 게임에 니가 그 규칙을 따라 도! 이런 겁니다.

 

이게 뭐냐 하면 시편에 나오죠. 이게 전부 다 자기 영광성입니다. 자기 영광성. 인간이 자기 영광성을 취해버리면 누구 영광성이 죽습니까? 주님의 영광이 죽죠. 하나님의 언약과 인자의 영광이 죽죠. 그래서 인간이 하는 짓거리는 하면 할수록, 살면 살수록 계속해서 주님의 영광에 대한 모독과 훼손과 해방 쪽으로 사람들은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느 인간도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거예요. 왜? 자기가 벌인 게임에 몰두하고 있기 때문에 그래요.

 

게임은 뭐냐 하면, 게임이라는 말은 규칙이거든요. 규칙. 왜 규칙을 신봉합니까? 왜, 규칙이 없는 무규칙을 불안해해요? 내가 만든 게임이 잘 돌아가게 되면 거기에 헌신했던 나의 의미가, 그게 살아나기 때문에 그런 거죠. 그러면 그 게임에서 뭐가 필요가 없습니까? 예수님의 재림, 인자의 재림 같은 것은 필요치 않는 거예요. “기다려라! 내가 와서 데려갈게.” 이러면 그냥 십자가 부활도 빠져야 돼요. 왜? 재림만 있든지, 아니면 십자가 부활이 있으면 재림은 없어야 돼요. 인간들의 구원론에 의하면 그렇게 돼야 돼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이유는 인간의 모든 가능성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불가능성으로 볼 때에 이거는 허락되지 않은 것이라는 것을 선호하는 겁니다. 재림하시는 인자 안에 뭐가 들어있습니까? 본문에 인자가 재림하잖아요. 구름타고 오죠. 천사들하고. 그 인자 안에는 십자가도 들어있고 부활도 들어있고 재림도 들어있죠. 재림이 들어있는 인자하고 재림이 없는 인간하고 비교할 때, 하나님께서는 누굴 인정하고 누굴 부정하겠느냐? 인간을 부정하는 거예요. 이거는, 재림이라고 하는 것은 인자의 수준에서 볼 때에, 인간의 모든 구원관, 인간이 하는 것은 주께서 인정하지 않는 구원관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재림은 뭐냐, 결국 심판용이에요. 심판하기 위해서 하는 겁니다. 심판하기 위해서. 그럼 심판은 이미 십자가로 심판하지 않았느냐? 이렇게 하는데, 십자가에서 심판할 때 그 심판은 예수님의 죽음이었죠. 그렇죠. 예수님의 죽음은 어디까지 파생되느냐 하면은 이 죽음에 입각해서 전 세상을 심판하는 데까지 확대되어야 하는 겁니다. 먼저 심판받은 자만이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먼저 심판받은 자.

 

그러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했을 때, 이거는 뭐냐 하면은 예수님의 개인적인 부활이 되는 겁니다. 이 개인적인 부활에서 자기 백성에게, 온 세상에 대해서 뭐가 아직까지 있어야 되느냐 하면은 심판이 추가가 되어야 해요. 한 번 적어보겠습니다. 심판을, 제대로 된 심판을 경험한 분이 심판주가 된다. 제대로 심판을 경험한 이 분을 누구라고 하느냐 하면은 인자라고 합니다. 인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인자. 제대로 심판을 경험한 분이 그 다음에 이 세상을 전면적으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겁니다.

 

이게 누구 기준이냐 하면은 인자되신 예수님의 기준이에요. 인간들 중에 이 기준에 부합되는 인간들이 있느냐? 라고 묻는 겁니다. 없지요.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재림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런 점에서. 이걸 이해 못하면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죄용서 해주셔가지고 부활해서 신난다! 이래 돼버리면, 이 사람은 애초부터 심판의 대상이 안 되었다고 스스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변화의 조치가 없을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겁니다.

 

인간이라는 내 자신이 달라져야 되는데, 중간에 재림까지 거쳐야 완전히 달라지는데, 십자가에 죽고 부활되어가지고 나는 이제 새사람 되었어! 라고, 그 우기는 자아는 뭐냐 이 말이죠. 그게 미흡한 자아고 잘못된 자아라 이 말입니다. 그게. 인자라는 것은 재림이 필요해서 그런 게 아니고, 재림이라는 것은 우리 예수님의 인자됨, 그 자체 안에 아버지로부터 그런 요소가 전부 다, 스케줄이 다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재림까지.

 

왜 재림하십니까? 인자거든. 끝난 거예요. 니가 왜 재림이 있어야 됩니까? 라고 묻는다는 그 의도자체가 인자의 관점이 아니고 인간의 관점에서 인간 구원에 필요한 조치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느냐, 라는 자기생각에 노출된 거예요. 자기생각에. 쉽게 말해서 재림할 수 있는 재주가 없거든 입 다물라! 이 말이에요. 그리고 하나님께서 재림되지도 못할, 재림의 주인공이 되지도 못할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해서 그게 옳다고 허락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의 어떤 행동도 옳은 행동이 없어요. 왜냐하면 재림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럼 재림은 뭐냐, 전면적인 심판입니다. 전부 다. 이 전면적인 심판에 대해서 아까 제가 첫째 강의에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모든 가능성에 대한 파괴. 인간의 모든 가능성에 대한 파괴. 그럼 그 가능성에 대한 반대말을 아까 뭐라고 했죠? 불가능성. 인자는 불가능성만 이야기해요. 가능성가지고는 해석이, 파악이 안 됩니다. 인간이 가능성의 의도를 가지고 성경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어떤 것을 해석해도 엉터리에요. 내가 왜 전면적으로 심판을 받아야 할 자고 죽어 마땅한 자입니까? 라는 것을 아는 식으로 해석이 되어야 해요. 그런 해석이 아니면 재림할 이유도 못 밝혀낼 것이고, 십자가에 죽는 의미도 모르게 됩니다.

 

인간이 자기가 성경해석을 하듯이, 그냥 성경해석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성경을 해석할 때 인간은 반드시 뭘 동원한다고 했습니까? 자기의 가능성을 동원하죠. 그냥 말씀만 듣고 행해야 된다고 하니까, 행하는 자기 모습을 거기다가 집어넣는 거예요. 이 말씀은 내가 행할 수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게 했을 것이라고 여기는 겁니다. 이게 바로 가능성이잖아요. 이 가능성은 어디서 나옵니까? 인자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인간에게서 나온 거죠. 그 인간에게서 나온 가능성을 이야기할 때 주님께서는 “니가 재림 한 번 해볼래?” “내가 미쳤습니까? 재림을 왜 하게요?” “그러니까 너는 인간이지 인자가 아니야.” 하나님께서 인정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에요.

 

여기 24절 봅시다.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내지 않기 위해서 누가 빡세게 기도해서 이런 변화를 일으켰습니까? 어느 요술사, 마술사가 이렇게 했습니까? 없죠. 결국은 예수님께서 인자로 오니까, 인간은 가능성이 없으니까 무슨 성이죠? 결국은 불가능성이잖아요. 예수님은 불가능성에서 오는 거예요. 애초부터 불가능성에서. 모든 가능성을 다 부수면서. 니가 기도해서 해가, 별들이 땅에 떨어지게 해봐라, 이 말이죠. 못하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인간도 아닌 거예요.

 

기준이 뭐냐 하면은 인자라는 기준으로 보자는 거예요. 재림할 수 없거든 입 다물라! 라는 뜻이에요. 이 땅을 전부 다 심판하고 파괴할 재주가 없거든 입 다물라! 니가 행한 것은 주께 통하지 않는 행위를 해왔다고 생각하라 이 말입니다. 주께선 허락하지도 안했는데 본인들이 본인을 허락한 거예요. 인간들은 평소에 이 불가능성에 대해서 무슨 마음을 갖고 있느냐 하면은 공포심을 갖고 있어요. 불가능성에 대해서. 불가능성이 공포심이기 때문에 이걸 가능성으로, 스스로 위로하려고 하는 겁니다.

 

“목사님, 구원받으려면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성령으로 거듭납니까?”라고 묻는 그 질문의 의중이 뭐예요?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불가능성밖에 없으니 가능성으로 바꾸어주세요.”라는 그런 뜻이잖아요. 그거는 결국은 안 변해겠다는 뜻이에요. 지금 목소리 괜찮잖아요. 그렇죠. 다행이다. 안 변하겠다는 겁니다. 안 변하고 자꾸 죽겠다는 거예요. 십자가 껴안고 내가 주를 위해서 죽겠다는 거예요. 베드로처럼. 여러분, 죽는 게 변하는 게 아니에요. 왜 그런가 하면 내가 죽겠다고 할 때, 그 죽음의 의미를 누가 먼저 설정했어요? 본인이 설정한 죽음이잖아요. 주께서 그런 것을 허락한 적이 없어요.

 

인자의 이 땅에서의 출발점은, 인자가 인자로서 출발하는 증거가 뭐냐 하면은 바로 죽음이었습니다. 온전한 죽음인데, 이게 성경적으로 언약적 죽음이죠. 언약에 준해서 죽는 죽음이에요. 인자가. 그러면 인자에 합류된 이 사람을 성도라고 하는데, 성령 받은 성도, 성령께서 성도에게 찾아오는 이유는, 어디에 의미를 두느냐 하면은 언약 완료에 준해서 계속 그 사람을 다루기 위해서 오는 겁니다.

 

지난 낮 설교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죠. 성도가 성도끼리 서로 대화를 할 때는 미완료로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고, 완료를 가지고 주고받고 해야 된다고 했죠. 제가 그렇게 분명히 했죠. 완료를 가지고.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은 이런 뜻이에요. 성경에 보면 이웃을 사랑하라 또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이 있죠. 이게 불가능한 말씀이거든요.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 하느냐 하면은, 불가능한 말을 가능한 말로 하기 위해서 뭘 하느냐 하면은, 관용을 베풀어요. 관용을 베풀고 동정을 베풀고 도와주려고 하고, 어려운 것을 봉사하려고 하고. 이런 식으로 이웃사랑과 원수사랑을 내 손에서 불가능함을 가능함으로 바꾸려고 시도를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 관용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너무 가까이는 오지 마세요, 라는 표현이에요. 사랑은 해주되, 내가 거리를 조정해주는 거기까지만 오세요. 더 근접해버리면 내가 거북스럽습니다. 따라서 사랑은 해주되, 내가 사랑하고 있다는 티가 나는 그 거리가 있잖아요. 그 거리까지만 오세요. 그래야 내가 벌이는 이웃사랑이 내가 확인될 수 있기 때문에. 결혼을 했는데, 방귀를 안 텄다는 가정이 있거든요. 신혼이죠. 결혼을 했는데 방귀를 아직 안 텄다. 방귀를 아직 안 터서 화장실에 가서 뀌고 있다 이 말이죠. 트림도 안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남편이 아내 앞에서 옷을 못 갈아입는 사람도 있고. 뭐냐 하면 같이 살되, 너무 근접하지 마세요, 라는 것이거든요.

 

근접하면 뭐가 깨져요? 나의 바운더리가 깨지면서, 과거의 나의 기억과 체험에 있던 구축된 자아성에 대혼란이 일어나는 겁니다. 내 자아성에 혼란이 일어나면 자아성이 엉망진창이 되죠. 그러면 내가 누구를 사랑한다고 할 적에 내 자아성이 응당히 정돈된 상태에서 사랑이 사랑답게 전달돼야 하는데, 사랑하기 이전에 먼저 저쪽에서 나에게 쳐들어와서 이 구축된, 정돈된 자아상이 훼손돼버리면, 무슨 공식이 성립이 안 되느냐 하면은, “나는 주의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했습니다.”라는 건덕지가 발생되지 않는 거예요.

 

내가 말씀대로 지키는지 안 지키는지 내가 확인할 길이 없다 이 말이죠. 너무 가까이 와버리면. 사랑하는 것은 좋은데 내가 허락하지 않은 그 선까지는 넘어서지 마라는 겁니다. 선까지 넘어서지 마라. 이런 경우는 굉장히 많아요. 부부사이에 그런 것이 많습니다. 서로 신혼여행 갔다 와서 서로 사랑한다고 철석같이 이야기를 했죠. 사랑한다는 것에 남자들이 깜빡 여자한테 속아 넘어간 거예요. 사랑한다고 하면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줄 줄 알았죠. 여자도 속기는 마찬가지고. 이제는 내가 먹고 싶었던 소원, 된장찌개가 먹고 싶은데 당신이 된장찌개를 해주겠지. 왜? 사랑한다고 했으니까.

 

자, 남자나 여자나 사랑한다는 의미가 뭡니까? 나의 모든 것을 그대에게 드리리가 아닙니까?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별들의 고향.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잖아요. 나는 사랑했고 사랑받은 그 사람은 모든 것을 드렸으니까. 이제는 마음 놓고 내가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예요. 된장찌개를 끓여달라고 전에는 조심조심 이야기했는데, 이제는 사랑한다고 하니까, 백퍼센트 그 약속을 믿으니까, 내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지가 자발적으로 사랑했으니까, 이제 된장찌개 끓여달라고 해도 되겠지.

 

그래서 신혼여행 갔다 와서 “여보! 된장찌개 끓여줘?” “미쳤나! 니가 손이 없나, 발이 없나, 나 된장 냄새나서 된장찌개 안 좋아한다. 그냥 내가 아침에 토스트 해줄 테니까 토스트나 먹어라. 그거 싫으면 니가 해먹든지.” 그러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니가 나 사랑한다고 했잖아?” “그래 했지.” “사랑하는데 왜 안 해주냐?” “사랑은 하되 내가 구축한 이 자아,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구축한 경계선에 침범하지 않는 조건하에 사랑한다는 말이다.” “진작 그렇게 이야기하지.” “그러면 너무 말이 길잖아.”

 

사랑은 없습니다. 이게 아가의 주제에요. 어제 누가 뒤늦게 아가수련회 내용을 다 보고 그래요. “아가서 주제가 뭡니까?” 수련회강의를 다 보고 그렇게 물어요. 모르겠다는 거예요. 유행가만 나오고 모르겠다는 거예요. 아가의 주제는 사랑은 없다는 겁니다. 사랑은 없는 거예요. 왜냐하면 인간의 사랑은 항상 가능성에서 나 좋아라고 하는 사랑으로만 이해하거든요. 나한테 잘해준, 반대급부로 내가 잘되는 것이 사랑이에요. 하나님한테 잘해주면 나는 천당 간다. 이것만 사랑이에요. 재림이라는 심판성이 빠져있는 사랑이에요. 재림이라는. 우리가 인자가 아니고 인간이라는 것. 인간은 애초부터 구원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 그걸 놓쳐버린 사랑이에요.

 

그래서 제가 아가에서 분명히 했어요. 사랑은 내가 다가가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다가온다고 했죠. 다가오는 것. 기억 안 나시죠? 사랑은 다가오는 거예요. 그냥 덮치는 거예요. 나의 자아라는 경계, 바운더리가 아예 흔적도 없이 짓밟히는 것을 말합니다. 왜? 안개니까. 안개면서도 안개 아닌 척 하면서 말씀을 지키려고 했던 거예요. 안개, 소멸될 안개인데, 마치 우리는 소멸 안 되어야 할 사람인 것처럼 착각들을 하고 있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 자아가 나를 죽여서 부활하는 것은 감사한데, 내 자아만큼은 아예 심판의 대상으로는 안 봐줬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의 가능성을 약간 비출 수 있는, 구원의 어떤 여지가 있는 괜찮은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는 것이, 우리가 계속 살아온, 자아가 구축한 심보고, 우리의 버릇이에요. 자아가 만든 이 자아의 버릇이에요.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라는 말은 무슨 뜻이냐 하면은, 너는 너를 모른다는 뜻이에요. 그게. 니가 지금 원수를 사랑하겠다고 덥석 덤벼드는데, 그거는 니가 조작해놓은 자아고, 진짜 자아는 너 자신도 모르고 있다는 뜻을 의미하는 겁니다. 원수사랑은 누가 합니까? 누가 해야 할 몫이에요? 인간은 못하고 누가 해요? 인자가 해요. 심판이 바로 사랑이에요. 심판이. 재림이 사랑이었던 거예요.

 

주님은 우리한테 묻습니다. 니가 기도한다고 해가, 별이 떨어지나? 해가 빛을 잃나? 내가 무슨 재주가 있습니까? 그러니까 니가 하나님이 원하는 인간이 아닌 거예요. 그게. 내 위상, 예수님의, 인자의 기준으로 봤을 때 미흡하면 그거는 전부 다 인간이 아닌 거예요. 그거는 심판의 대상이 되는 겁니다.

 

재림이라는 것이, 시간적으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재림하시는 이유가 뭡니까? 라고 물으면, 인간은 십자가 부활이라는 이걸 통해서 자기 자신이 근원적으로 달라져야 한다는 사실을 몰라요. ‘내가 구원됐으면 나중에 주께서 알아서 재림하시겠지.’ 아니, 나중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고, 재림이라는 그것이 어디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까? 인자라는 요소에 포함되어 있죠.

 

그럼 인자라는 요소가 포함된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는 말은 무슨 뜻이에요? 진즉에 우리는 재림에 의해서, 우리는 진즉에 심판받아 합당한 존재인 것을 미리 인정하는 것을 의미하는 거예요. 자, 이거 한 번 봅시다. 제가 이걸 강의해도, 천식을 이겨가면서 강의해도 지금 감이 잘 안 잡힐 줄 믿습니다. 십자가, 부활, 그 다음에 승천하죠. 승천하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재림이라고 했잖아요. 재림인데, 여기서 승천하고 난 뒤에 뭔가 오는 것이 있어요. 인간 쪽으로 오시는 게 있어요. 성령이 오십니다.

 

성령이 오실 때는, 성령이 오고 난 뒤에 재림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여기 인자 요소에 포함된 요소가 아닙니까?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그분이 인자고, 부활하신 그분이 인자고, 승천하신 그분이 인자고, 재림하시는 그분이 인자죠. 이미 그것을 하나의 박스에 담고 성령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재림의 의미가 뭐냐, 우리는 마땅히 심판받아 합당하다. 우리는 인자가 아니고 뭐기 때문에? 그냥 인간일 뿐이기 때문에. 인간일 뿐이거든요. 인간은 주께서 원하는 않는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재림을 통해서 심판받아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재림을 생각 안 해버리고, 예수님 십자가, 부활, 승천, 성령이 와버리면, 이 십자가가 나를 위한 십자가, 이 부활이 나를 위한 부활, 나를 위한 승천으로 오해하는 거예요.

 

그 ‘나’가 뭡니까? 바로 내가 그토록 내가 구축한 나잖아요. 이게. 이거 내가 구축한 나 아닙니까? 우리는 나에 대해서 내가 구축하지 누가 구축하겠어요? 나의 기억과 나의 체험이 자연스럽게 지금의 나를 잉태했잖아요. 만들어냈잖아요. 타인이라는 것은 두 종류가 있어요. 내가 타인이라고 하는 타인이 있고, 타인인줄 모르게 그분이 오니까 비로소 그분 입장에서 내가 타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타인이 있어요.

 

평소에 우리는 나라는 바운더리, 경계선, 영역에 있기 때문에, 내 세계에 저 사람이 부합이 되느냐, 부합되지 않느냐를 따질 때 그 타인이 있습니다. 애 둘 데리고 딸내미가 목요일에 와가지고 퍼질러지면 분명히 딸이지만 타인이에요. 왜냐하면 뭘 내가 해줘야 되니까. 내가 뭘 해줘야 돼요. 편히 쉬도록 해줘야 되고, 신경 안 쓰이게 해줘야 돼요. 아무리 가족관계지만. 그러면 뭐냐 하면 좀 가줬으면 좋겠다, 다시 나로 환원됐으면 좋겠다, 시간을 보면서 주일이 빨리 왜 안 지나가나, 사위가 와서 빨리 안 데려가나, 라는 이런 생각이 든다고요. 왜냐하면 나를 잊지 못하니까. 내가 생각했던 ‘나’가 뭔가 방해를 받는다는 느낌이 든다고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하면은 아까 이야기했던, 잘해주는 거예요. 그걸 관용이라고 하죠. 관용. 잘해줘 가지고 내가 여기까지는 해주는데 이거 선까지는 넘어오지 말라고 하는 거예요. 된장찌개는 못 끓여주고 토스트는 해줄 용의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고 한 거예요. 토스트 해주고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라고 한 거예요. 근데 그 새댁이 처음에는 그걸 몰랐죠. 사랑할 때는 다 주고 싶었죠.

 

이게 아주 오묘해요. 내가 남편을 기쁘게 하고 남편이 원하는 것을 다 해줄게, 라고 했는데 막상 남편이 쑥 들어온 거예요. 된장찌개 끓여달라는 거예요. 된장찌개는 냄새나서 자기가 싫어해요. 싫어하는 것으로 쑥 들어온 거예요. 어떻게 합니까? 싫어하는 것을 억지로 해줍니까? 아니죠. “나는 청국장 못해주고 토스트 해줄게.”라고 할 때에, 자기가 이런 인간인줄 본인이 그때 새삼스럽게 알게 된 거예요. 새삼스럽게. “나 당신 원대로 다 해줄게. 다이아 반지 사줄까? 뭐 아파트 사줄까? 다 해줄게.” 그러면 상대방이 하는 말이 “그런 것 다 해줄 생각 말고 내가 좋아하는 개고기 먹을 수 있느냐?” “그건 안 되지. 그건 안 돼. 나는 개고기 싫어하니까.”

 

타인이 나에게 그렇게, 내가 생각한 타인이 아닌 돌발적이고 의외의 타인으로 쑥 들어올 줄을, 오늘 제목을 ‘쑤욱’으로 할까요? 쑥 들어올 줄을 상상도 못한 겁니다. 상상도 못한 거죠. “내가 허락한 그 범위 내에서만 내가 남이라고 해줄게. 내가 관용해주고 예의를 갖추어서 당신에게 해줄 수 있으면 해줄게.” 이거하고, 내가 설정한 타인 말고, 나라는 자아를 짓밟고 확 들어왔을 때에 그때 타인은 달라요.

 

그러면 예수님의 재림은 어느 쪽입니까? 우리가 설정한 타인이에요? 쑥 들어온 타인이에요? 쑥 들어온 타인이죠. 이게 성령을 통해서 재림이야기를 언급하니까, 왜 재림이 필요하지? 박살내는구나. 완전히 박살나는 것이 합당한 겁니다. 우리가 그렇게 봤던 아름다운 별, 해와 달 어떻게 됩니까? 24절에, “그 때에 그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25절,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애가 학교에 가서 감기에 걸려온 것이, 이게 호들갑 떨만한 일이죠. 그렇죠. 애는 내 자아의 바운더리, 내 영역에 속하고, 엄마는 그 애가 평소에 건강하면 내가 힘들지 않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애가 아프니까 내가 짜증이 나면서, 손 닦으라고 했는데, 똑바로 내가 시키는 대로 안 해서 그렇다고, 원인과 결과를 따져가면서 이렇게 하잖아요. 근데 애를 나무라고 있는데 갑자기 하늘에서 달이 떨어진다? 어떻게 됩니까? 애들한테 잔소리 할 때는 우리라는 바운더리, 우리 가족이라는 바운더리를 계속 유지해나가고 지속시키자는 그런 열정 때문에 걔에게 잔소리 하는 거예요.

 

그렇게 돼야 우리 가정의 훌륭한 자녀가 된다, 라고 하는데, 그런데 하늘에서 별이 떨어지고 해가 떨어져서 어두워지고 달이 빛을 잃고 권능들이 흔들리게 돼버리면, 우리끼리, 우리 가족이라는 이것조차도 이것이 인자 앞에서는 용납될 수 없고 허락될 수 없는 짓거리를 해온 거예요. 어떤 짓거리도, 인간으로 하는 모든 짓거리는 인자의 수준으로 봤을 때는 허락될 수 없는 겁니다. 그게 재림이에요.

 

앞으로 재림할 일을 미리 이야기함으로써, 뭘 통해서? 성령을 통해서 이야기함으로써 이 예수 십자가 믿고 부활을 믿는 것이 내 좋아라고 주어진 사건이 아니라는 사건이에요. 오직 누구 좋아라고 하는 겁니까? 제가 수요일에 이야기를 했는데, 이 모든 일이 누구 만족이에요? 주님의 자기만족이라니까요. 주님의 자기존재증명이에요. 전부 다. 우리가 안개니까. 우리는 개뿔도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깐 살았다가 없어지는 안개에요. 뭐, 누나 죽고 형님 죽어도 전부 다 소용없어요. 그냥 원래 처음에 태어날 때부터 그렇게 홀연히 소리 소문 없이 죽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살아있을 동안에 서로를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대방을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상대를 타인 또는 남이라고 하는 거예요. 남이라고 하는 것은 뭡니까? ‘나’가 설정되어 있는 거예요. 물론 남에서 점하나 떼면 님이 되죠. 님이 되던 남이 되던 간에 항상 자기 구심점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근데 이 ‘나’가 재림이 가능합니까? 하늘의 별을 떨어트리고 전체 우주를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까? 이 ‘나’가. 내가 그런 권한이 있어요? 없어요? 없죠. 없는데, 왜 큰소리치느냐 이 말이죠. 없으면서 내가 그렇게 한다는 것은 자기 주제파악이 안 되고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가 뭔지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너무 건방떨었다는 뜻이에요. 너무 건방지게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여러분, 연탄불에 오징어 한번 구워본 적이 있죠? 마른 오징어 구워본 적이 있죠? 연탄불에 들어가기 직전에는 오징어가 너무 딱딱해요. 쫙 펴져가지고. 몸통, 다리 열 개해서 늠름하게 있어요. 근데 연탄불에는, 불이죠. 심판의 불 앞에는 오징어가 돌돌 말려가지고 오므라들죠. 오므라들어요. 늠름한 자기의 위신과 품격과 품위는 없어져요. 우리는 주님의 재림 앞에 연탄불에 구워지는 마른오징어처럼 돌돌 말려가지고 하나의 연탄재와 합류가 돼버립니다. 연탄과 우리와 차이가 없어요. 동일합니다. 모든 게, 해와 달과 별의 신세와 우리가 똑같은 신세에요. 영광 다 잃고 빛을 잃어버려요. 우리 고유의 가치와 의미도 없는 겁니다.

 

결국 제 이야기의 모든 것은 출발을 어디서 합니까? 죽음부터 출발하는데, 그 죽음이 어디서 나오는 죽음이냐? 살다 죽는 것이 아니고 무슨 죽음이냐? 언약적 죽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모든 시작은 언약적 죽음. 언약의 시작은 죽음부터에요. 죽음. 레위기의 제사도 마찬가지고. 십자가의 절정에 이르는 것도 마찬가지고. 모든 이야기의 시작은 우리의 죽음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고, 예수님의 죽음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죽음부터 시작해서 그 죽음이 배경이 뭐냐, 재림에 있는 겁니다.

 

죽고 난 뒤에 재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돌아가시고 부활하고 그때의 스크린, 배경, 그 배경이 바로 뭐가 되느냐 하면은 그게 재림이라는 취지에 맞추어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먼저 죽으신 거예요. 언약에 의한 재림이기 때문에, 거기에 앞장서서 언약에 의한 죽음, 언약적 죽음은 십자가에 있는 겁니다. 스크린 하니까 생각이 나는데, 어벤져스4가 지금 개봉이 된다고 하는데, 65세 이상은 무조건 오천 원이에요. 조조든 뭐든.

 

이 세상 자체가 돌돌 말려야 돼요. 재림하면 모든 게 불로 불쏘시개가 되잖아요. 그 불쏘시개, 라는 그 연극무대에서 벌어지는 거예요. 그 연극무대에서 벌어진 거예요. 재림을 아울러서, 예수님의 모든 이야기는 재림을 아울러서, 전면적인 심판을 아울러서 하는 거예요. 세례요한은 이 점을 몰랐습니다. 세례요한은 뭘 몰랐느냐 하면은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준다고 했거든요. 세례요한이 이야기를 했잖아요. 성령과 불로서 세례를 주는데, 당장 그렇게 될 줄 알았어요. 당장. 자기가 물세례를 하는데 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과 불로서 주는 거예요. 당장 올 줄 알았죠.

 

성령과 불은, 이거는 바로 예수님의 재림을 염두 해둘 때, 마지막에 불세례가 주어지는 겁니다. 알곡은 하늘나라 창고에 쭉정이는 지옥불로 들어가잖아요.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시는데,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하기 전에 세례요한은 뭘 착각했느냐 하면은, 자기가 먼저 앞장서 오고 자기 뒤에 예수님 오시고 그 다음에 성령과 불로서 이렇게 온다고 한 거예요. 성령이 예수님한테 먼저 오신다는 것을 몰랐던 겁니다.

 

예수님에게 심판이 먼저 온다는 사실을 몰랐던 거예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인자거든요. 인자라고 하는 것은 나중에 있는 모든 요소들이 거기에 다 함축되어서, 벌써 짊어지고 같이 있는 거예요. 성령이 오셨으니까. 그럼 예수님의 스케줄은 뭐냐 하면은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스케줄을 가게 되죠. 마지막에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것도 성령을 통해서 재림하시는 거예요. 십자가 죽으심과 부활과 성령 모두가.

 

한 번 정리하고 난 뒤에 그 다음 진도 나겠습니다. 자, 인자 이전의 인간은 어떻게 살아간다 했습니까? 가능성을 보고 살아간다고 했고, 가능성은 어떤 합리적인 공식이 있다고 했죠. 원인과 결과를 자꾸 이으려고 했죠. 원인과 결과. 그래야 가능성이 있으니까요. 희망이 있다면 그냥 희망을 쳐다보고 있지 않잖아요. 내가 뭘 하면 저 희망을 얻겠느냐? 에요. 45억이라는 재산을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을까요? 주식 투자하는 수밖에 없겠죠. 그것도 부부가 같이. 얼마나 그거보고 부추겼으면 투자를 그렇게 또 하겠어요? 그렇게 날려놓고.

 

주식이라는 것이 뭐냐 하면은 남이 손해 본 것을 지가 끌어 모은 것이 자기의 이득이에요. 왜? 화투판에서 판돈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에요. 잃은 자의 것이 따는 자의 몫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식을 해서 돈을 벌겠다는 것은 내 대신 누가 눈물 좀 많이 흘려다오, 라는 요청이라는 말이죠. 이 말은 자기밖에 모르는 거죠. 그런 인간을 하나님께서 구원하겠느냐 이 말이죠. 구원 안 해주죠. 어떻게 합니까? 조건이 있죠. 변화되어야 해요. 달라져야 해요.

 

그럼 달라져야 하면 기준이 있어야 되는데, 뭐로 달라져야 합니까? 언약이 없는 인간이 언약이 있는 존재로 달라져야 되겠죠. 그럼 언약이 있는 존재의 기준이 등장했어요? 안 등장했어요? 등장했죠. 누굽니까? 인간이 아니고 인자죠. 다윗언약에 의한 다니엘과 시편, 다윗언약부터 나오는 인자에요. 시편, 에스겔, 다니엘, 전부 다 호칭이 뭐예요? 인자죠. 인자. 시편 8편에 보면 다윗보고 뭐라고 합니까? “인자가” 이래 되어 있죠.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 새로운 피조물을 만들어내겠다는 하나님의 뜻을 예언으로 먼저 담은 거예요. 내가 언약에 의해서.

 

그럼 인자 안에는 어떤 요소가 있는데, 어떤 요소가 있느냐 하면은 십자가 요소 있고, 부활 요소 있고, 그럼 승천 요소도 있고, 성령 부어주심도 있고, 그 다음 마지막에는 뭡니까? 재림하는 요소가 있죠. 이게 전부 다 무엇에 의해서 된다? 전부 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서만 되는 거예요. 근데 언약에 의해서 되는데, 이 언약은 싸움의 대상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언약의 후손으로 오시는 분은 누구하고 싸우게 되어 있어요.

 

누구하고 싸웁니까? 뱀의 자손과 싸우게 되어 있잖아요. 그 뱀은 현재 누굴 장악하고 있습니까? 인자를 장악한 게 아니고 인간을 장악하고 있는데, 뱀은 인자마저 자기 손에 장악하려고 광야에서 유혹을 했거든요. 시험을 했다 이 말이죠. 이 세상사는 자체가 시험입니다. 이게 유혹이에요. 새로운 가능성과 새로운 희망을 계속 제공하기 때문에 이게 시험이에요. 왜? 세상은 광야기 때문에. 시험과 유혹을 피할 생각을 하지 마세요. 뭐해야 하느냐 하면 삼켜야 돼요. “죽으면 죽으리라. 그냥 시험 들자.” 이래면 돼요. “시험을 피했기 때문에 복이 올 거다.”라는 이런 계산을 하지 마세요.

 

시험이 왔다는 말은 시험에 걸려들어서 우리는 멸망해도, 나는 마땅하고 당연한 존재라는 것을 수긍을 해야 돼요. 안 그러면요, 이 시험을 피하면 악마가 계속 죽을 때까지 쫓아다닌다니까요. 죽을 때까지. 애가 김치를 먹기 싫어하잖아요. 김치 먹기 싫어도 힘들지만 김치를, 그걸 먹어야 돼요. 삼켜야 돼요. 안 삼키면 엄마가 김치 숟가락 들고 계속 따라온다니까요. 계속 따라와요. 죄인인 것을 인정하는 기회를 놓치면 안 돼요. 내가 지금 멸망해도 마땅하다는 그 절호의 기회를 주시잖아요. 우리에게.

 

세상에서 사는 삶 자체가 뭡니까? 희망자체가 전부 다 유혹이라니까요. 잘 할 수 있어. 잘 될 수 있어. 너희 가정 행복할 수 있어. 이 교회 부흥될 수 있어. 너는 목사답게 신앙생활 잘 할 수 있어. 모든 게 유혹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은 우리의 자아는 그 유혹에 길들여진 자아기 때문에, 우리는 유혹이 없이는 살맛도 없어. 사는 재미는요, 유혹가지고 사는 거예요. 어떻게 장담할 수가 있느냐 하면은, 옛날이 좋았던 그 고마움은 세월가면 그 고마움이 다 고맙지 않게 돼요.

 

제가 이런 예를 여러 번 들었는데, 촌에서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와서, 가사는 기울어졌고, 나 아니면 이 집안은 못 산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해가지고 9급 공무원이 되었거든요. 옛날에 라디오가 있었어요. 언젠가 하면 1974년도, 제가 군에서 들었으니까. 라디오에 ‘인간승리’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9급 공무원이 되고나서 그렇게 감사했다는 거예요. 그 첫사랑을 계속 유지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만약에 나라에서 “니 60되도 9급으로 계속 전환해라.” 이래도 “예. 고맙습니다.” 이래야 돼요. 왜? 그 고마움이 있다면. 그 감사를 유지한다면. 근데 사람은 계속해서 살다보면 유혹이 오니까, 이제는 공무원 합격한 것도, 광고에서 하는 공무원 합격은 에듀윌이고 뭐고 어떻게 해도 다 짜증이 나요. 사표내고 싶고. 감사가 줄어들고 있어요. 감사가.

 

감사가 줄어드니까, 주께서 조치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있는 것도 빼앗아야죠. 있는 것도 빼앗아야 다시 한 번 정신이 확 돌아오는 거예요. 세상 자체가, 이게 있는 것도 빼앗길 때, 그 빼앗기는 그런 느낌이 들 때, 우리가 피하지 말고 거기에 뛰어들어보세요. “날 삼키세요. 유혹아! 날 삼켜라!” 내가 유혹을 이길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내가 깨달아야 돼요. 내가. 내가 알아야 돼요. 피하지 말고. “오늘도 유혹을 이겨냈습니다.” 이러면 마귀가 더 큰 유혹을 가지고 온다고요. “그럼 이거 한 번 또 시험쳐봐라.” 해가지고, 모의고사 더 어려운 것 가지고 들고 나온다니까요. 그러면 게임이 돼버립니다. 두 집 내고 살라고 하는 거예요. 바둑에서.

 

그런 속임수로 지금껏 우리가 살아왔어요. 내가 속임수를 요청했어요. 유발한 거예요. 유발자. 내가 시험유발자였어요. 내가. 세상은 어차피 재림에 의해서 작살나잖아요. 그러면 저 해와 달과 별은 또 유혹이에요. 전부 다. “나는 달에게 절하지 않는다.”라고 하지 말고, “달아! 니가 그렇게 청명하고 내 마음을 빼앗는구나! 그러니까 나는 지옥가도 마땅하지.” 이렇게. 이미 완료된 언약과 언약의 원인이 되어서 우리가 언약의 결과물로 매치시키면 되는 겁니다. 참 쉽죠잉~~

 

십자가와 부활과 재림과 우리 자신을 연류 시키면 돼요. 그게 바로 예수님의 증인이 아닙니까? 재림한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주님이 어디에 재림하는가? 그거 찾고 있어요. 주님이 어디에 재림하십니까? 어디에? 성경에 나옵니다. 누가복음 21장에 나옵니다. 이 지구상에. 쉽게 말해서 우리가 외면할 곳이 없는. 요한계시록 6장을 봅시다.

 

요한계시록 6장 12절에 보면, 내가 보니 여섯째 인을 떼실 때에 큰 지진이 나며 해가 총담같이 검어지고 온 달이 피같이 되며. 13절, 하늘의 별들이 무화과나무가 대풍에 흔들려 선 과실이 떨어지는 것같이 땅에 떨어지며. 14절, 하늘은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며. 15절,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각 종과 자주자가 굴과 산 바위틈에 숨어. 16절, 산과 바위에게 이르되 위에 떨어져 보좌에 앉으신 이의 낯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우라.

 

가리우라고 하는 것을 보니까, 결국 숨을 곳이 있다? 없다? 없죠. 성령을 통해서 이걸 우리가 접수하면 되는 거예요. 접수하면. 성령을 통해서 “주여, 어서 오시옵소서”라고 하면 된다 이 말이죠. “주여, 이 세상의 혼돈을 어서 들추어주옵소서”라고 하면 되는 거예요. 그게 뭐 어렵습니까? 유혹 피하지 말고 삼키고, 내가 멸망 받아 마땅함을 알면 되잖아요. 그게 언약활동이니까. 그게 십자가의 취지의 결과니까요. 죽어 마땅한 죄인이니까. 그걸 왜 굳이 피해서 의인되려고 그렇게 피할 길을 찾는 거예요? 그거 잘못된 겁니다. 우리 자신이.

 

예수님이 오실 위치가 뭐냐? 바로 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 이 세상 어디에도 피할 곳이 없어요. 재림까지 미리 성령을 통해서 알아버리면, 이 세상에서 우리가 붙들만한 가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심지어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이제는 그만 놔두세요. 놔두시고, 사람들이 우리에게 어떤 요구를 할 때, 관용하는 것으로 해서 자기 의를 챙기려고 하지 마시고. 쑤욱 들어올 때, 아, 주께서 쑤시는구나! 또 연탄불속에 오징어처럼 내가 기존에 아직도 유지되고 있는 이 자아의 건전함과 우수함을 또 작살내려고 오시는구나! 이게 성령께서 예수님의 재림을 미리 맛보게 하시는구나! 그런 각오로 수용하시면 되는 겁니다.

 

이왕 안개 되는 것, 몇 년 남았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편하게 삽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께서 하시는 일, 인자가 하시는 일, 누가 말리겠습니까? 우리가 자아 때문에 억지로, 억지로 버틴다고 살아왔습니다. 우리만 손해고 우리만 불행하고 우리만 힘들뿐인 것을 이제는 깨닫게 하옵소서. 지금 주께서 재림하셔도 반길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