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72강, 273강), 도구와 수단, 기분의 오류 190402 본문
녹취:이미아 272강-YouTube강의(도구와 수단) 20190402-이 근호 목사
제 272강, 제목은 ‘도구와 수단’입니다. 도구와 수단이라는 것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사용하는 거죠. 목적이 없다면 도구와 수단이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도구와 수단을 사용하게 되면 기분이 좋아요. 그러나 누구의 도구와 수단이 된다면 기분이 되게 나빠요.
우리 인간은 자기가 최고기 때문에, 누구로부터 부림을 받는 것, 누구한테 내 목적은 일체 인정받지 못하고 타인의 목적에 놀아나는 것을 굉장히 역겨워하고 본능적으로 우리는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때에도 수상해요. 하나님을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용할 가능성이 굉장히 농후합니다.
그런데 이 성경이 앞부분은 이스라엘 역사고 뒷부분은 교회이야기인데, 이 앞부분의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위상이 뭐냐 하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와 수단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순한 양 같으냐? 어림도 없죠. 하나님의 도구와 종이라고 아들이라고 자부하지만 은근히 자기 내부적으로, 자기의 은근한 자기만의 어떤 위상과 자기의 가치를 나타내기 위해서 챙기고, 챙기고 싶은 것이 있겠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렇게 데리고 다니시면서 바로 그 점을 들통 내는 겁니다. 네 안에 너만을 위해서, 너의 자존심을 위해서 챙긴 그 목적과 목표를 내가 기어이 밝혀내고 말리라. 그렇게 인도해요. 인도하실 때, 그 중의 하나가 신명기 12장에 나옵니다. 신명기 12장과 13장에 나오는 것을 대비해보면, 대비해볼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12장, 여기에 무슨 내용이 나오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는 목적이 나와요.
너희 하나님 여호와에게는 너희가 그처럼 행하지 말고(4절),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너희 모든 지파 중에서 택하신 곳인 그 거하실 곳으로 찾아 나아가서(5절), 너희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의 십일조를 드린다(6절). 뭐 이렇게 나와 있어요. 약속의 땅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하는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자기 거처, 하나님의 자기 거하실 곳을 약속의 땅에다가 해서, 그걸 약속의 땅으로 차지하시려고 하시는 거예요. 그럼 여기서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런 목적 같으면 하나님께서 그냥 가시면 되지, 왜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느냐를 우리가 생각할 수 있거든요. 그거는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이름이 거하는 곳은 텅텅 비어있는 곳이 아니에요. 누굴 빼내고 거기다가 자기 백성을 집어넣는 방식을 사용하는 겁니다.
취직을 할 때, 그냥 취직하는 것이 아니에요. 멀쩡하게 있는 사람을 빼내고, 마치 이빨 하나 빠진 것처럼 빼내고, 거기에다가 임플란트나 금니를 심듯이 누구하나 집어넣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순진한 젊은 사람들은 취직하고 난 뒤에 대개 미안해요. 있는 사람 빼내고 자기가 들어갔으니까. 특히 두 사람이 친구라면 그 다음부터 친구하고 이야기를 못합니다. 미안해서 이야기를 못해요. 그리고 빠진 사람은 내 대신 친구가 들어갔다는 것 때문에 괘씸해서 이야기 안 해요. 10년, 15년 친구가 갑자기 원수가 됩니다. “그 자리 내 자리인데 니가 왜 차고 들어가느냐?”
그래서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날아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요. 하나님의 방식이 그 방식이에요. 현재 우리 안에 내 이름이 있어요. 그리고 내가 하는 행동은 무슨 중심이냐 하면은, 내 이름이 이만큼 고귀하고 가치가 있다, 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쥐고 있는 처소가 우리 마음의 처소입니다. 약속의 땅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그 이름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자기이름으로 바꾸시는 거예요. 바꾸시는데, 거기에 내 이름이 빠지고 주의 이름이 들어가는데 쓰여 지는 수단과 도구가 바로 이스라엘이 되는 겁니다. 말이 좀 복잡하죠. 더 쉽게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뭐라고 오해를 하느냐 하면은 저쪽에 있는 젖과 흐르는 꿀이 있는 땅을 내 땅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내 땅. 이스라엘 자기 땅으로 여기는 겁니다.
그러면 그 땅은 누구의 이름이 있느냐 하면은 이스라엘 이름이 거기에 그대로 살아있는 채로 거주하게 돼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을 쳐들어가면서, “그 땅을 너희에게 줄게.”가 아니라 “그 땅을 너의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꾸겠다.”라는 거예요. 그러면 그 땅을 점령하는 전쟁가운데서 이스라엘 백성의 자기 실력이라든지 자기 솜씨가 개입될 여지가 있겠어요? 없겠어요? 없지요. 내 지혜와 솜씨로 그 땅을 차지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내 솜씨와 지혜가 만약에 가미가 된다면 그 땅은 내 이름도 같이 빛내야 할 땅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거하실 곳이 아니고 니가 거할 장소죠.
여기서 한 번 강의를 정리해봅시다. 인간은 무엇을 원한다? 무엇이 목적이다? 내 이름이 거할 곳이 나에게 은근히 잠복되어 있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입니다. 내 이름을 영원히 둘 수 있는 곳. 내 이름, 내 가치, 내 존재감, 이런 것이 영원히 안치되어 있고 영원히 보장되어 있는 곳, 그것을 교회에서는 사람들에게 천국이라고 합니다. 이 천국을 보세요! 얼마나 엉터리입니까? 이스라엘 같은 것은, 신명기 같은 것은 전혀 생각도 안 하고 있어요.
현재 이 땅에서 내 이름을 위해서 살다가, 그 행세, 그 버릇을 그대로 어디로 가지고 간다? 죽어서도 계속 이어지게 연장해서 연속적으로 그것을 고수하겠다는 것이 바로,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행복이 영원히 보장되는 그곳을 천국이라고 해요. 사실은 유토피아에요. 이상세계. 인간이 범죄하고 난 뒤에 희망의 안식처. 뭐 그렇게 묘사해도 됩니다. 이것 다 가짜고 악마의 함정입니다. 함정에 빠진 거예요.
인간의 이러한, 자기 이름을 영원히 빛낼 곳을 찾으면서, 그것을 하나님 쪽에서 제공해주기를 간절히 빌고 있고 기도하고 있죠. 그 기도의 내용을 보세요. 내 이름이 다치지 않고 내 가치가 영원히 보존되고 높임 받는 곳을 찾고 있습니다. 거기에 도와주는 자가 누구냐 하면은, 신명기 13장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1절), 네게 말하기를 네가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좇아 섬기자 하며 이적과 기사가 그 말대로 이룰지라도(2절),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3절).
그대로 이룰지라도 어떻게 한다? 절대로 그 말에 혹하면 안 된다고 하는 거예요. 그대로 이룰지라도. 목회자가 신학교를 졸업해가지고 목회를 처음 할 때 뭘 노립니까? 간판 걸고 교회되고 난 뒤에, “하나님이여! 갑자기 놀라운 병 고침과 부자 되는 기적들이 일어나게 하옵소서.” 이렇게 하죠.
자, 몸이 건강하고 부자가 된다는 말은 결국 혜택을 누가 입는다는 말입니까? “교회에 출석하신 여러분들이 혜택을 입을 수 있는 멋진 교회를 우리 시작합시다.”라는 쪽으로 지금 PR을, 광고를 하고 있는 거예요.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로 갑시다.” 그런 식으로 목회 안 하죠. 신학교 처음 나와 목회하는 사람을 무시하는 것 같아서 좀 미안하기도 한데.
돈 들여 가지고, 뭐 돈이 없으니까 보증금 이천에 월세 한 백만 원 해가지고 홀을 하나 빌리잖아요. 그래서 대한예수교 장로회 해가지고, 원래 개업할 때는 꽃도 많이 들어오고 손님들 막 와요. 힘 북돋아준다고 떡도 하고. 근데 그때만 하고 그 다음 주 부터는 다 빠지잖아요. 다 빠지고 앉아서 목사가 뭐 할 건데? 사모하고 애 둘 하고 해서 네 명 앉아있는데. 일주일 동안 놀았어요? 열심히 새벽마다 기도하고 전단지 만들어가지고, “행복한 교회입니다. 여러분의 영원한 이름, 영광을 보장해줍니다.”
행복이 뭡니까? 내 이름이 잘되는 것이 행복이지 남의 이름이 잘되는 것이 행복이 아니잖아요. 내가 잘돼야 행복이에요. 그런 것을 보장해주는 교회가 새롭게 왔으니까, 일단은 설교 한 번 들어보시면 아, 이런 설교도 있구나! 할 거라고 선전하잖아요. 그래서 그 목사가 노리는 것이 뭡니까? 그래서 이 교회가 자신의 정신적인 안식처가 되기를 원하는 겁니다. 내가 진짜 목사 맞다. 진짜 주의 종 맞다. 이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교회를 시작한 거예요.
그게 뭐냐, 신명기 13장에 보니까 이게 뭡니까? 그게 바로 거짓선지자들, 악마의 앞잡이들입니다. 아예 악마의 앞잡이가 되려고 신학교 들어가기 위해서 빡세게 공부하고 기도하고 결심내서 들어간 겁니다. 교회는 주의 이름이 있는 곳입니다. 두세 명이라도 내 이름, 자기 이름을 포기한 사람과 함께 주께서 계시는 그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273강-YouTube강의(기분의 오류) 20190402-이 근호 목사
제 273강, 제목은 ‘기분의 오류’입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몰입할 때 결과는 망칩니다. 성경을 볼 때에, 성경은 우리가 압니다. 예수님 중심이라는 것은 뻔한 이야기고 누구나 알아요. 근데 그 예수님을 구약에서는, 다윗언약에서는 그 예수님 중심이 오기 전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은 왕이라고 해요. 왕.
구약은, 다윗언약에서 백성들의 개개인의 기분과, 사람은 기분에 따라서 살잖아요. 기분과 왕이 무슨 뜻을 갖고 있는가를 아주 극한적으로 대비시킵니다. 잠언서 16장 10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와요.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
오늘날은 민주주의 사회에요. 각자의 가치를 서로가 인정해주자는 그런 정치제도거든요. 그런 정치제도는 그런 정치제도가 좋다고 연구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경제가 자본주의 경제가 되다보니까 할 수 없이 그럴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 왜 자본주의 경제일 수밖에 없었는가? 옛날에는 자본주의가 없었을 때는 왕의 제도가 있었는데 왜 지금은 자본주의 제도가 있느냐? 인구가 늘어나서 그런 겁니다.
늘어난 인구를 왕 하나가 통치를 못해요. 그럼 왕이 통치를 못하면, 인구가 늘어나게 되면 그것을 다 입히고 먹여야 되죠. 그럼 뭐가 되어야 되느냐 하면 분업이 되어야 해요. 분업이 되면 각자의 전문분야가 새롭게 등장하는 겁니다. 전문분야가. 인간이 모든 특정분야를 다 알 수가 없어요. 우리나라 사극을 보면 임금님이 온갖 전문가죠. 군사, 경제 뭐 모르는 것이 없어요. 전부 다 자기가 알아야 돼. 북한 김정은이하고 똑같아. 군대도 갔다가 봉제공장도 갔다가 이거는 뭐, 양어장에도 갔다가 근처 식당에도 갔다가 이거는 뭐, 뭘 알아요? 아무것도 몰라요.
그래서 불어나는 인구는 그만큼 양식이 많아지니까 인구가 팽창했고요. 그 팽창한 인구가 더욱더 팽창하다보니까, 이게 무슨 위주냐, 각자 자기 집에 사는 것이 아니고 자기 전문직업, 직장에 따라서 집을 옮겨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걸 가지고 도시화라고 합니다. 도시집중화. 도시화. 아무리 나라가 잘 살아도 늘 가난에 쫓길 수밖에 없는 것은 이게 인구증가와 도시집중화입니다. 지금도 촌에 가면 빈집이 많거든요. 서울은 집값이 비싸죠. 촌에는 집이 그냥 비어있어요. 고양이 집인지, 쥐 집인지, 새 집인지, 그냥 날짐승만, 멧돼지만 왔다 갔다 해요. 집에 사람이 없어요.
그러면 왜 촌에서 안 살고 도시에 가는가? 도시에 가야 돈벌이가 있잖아요. 그러한 것이 자본주의고 민주주의거든요. 특정직업을 갖고 있어야 돈벌이가 되니까. 그렇다면 인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누구한테 몰입해야 돼요? 내 인생은 누가 책임진다? 내가 책임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24시간 누구 기분과 누구 마음에 몰입해야 돼요? 내 마음과 내 기분에 몰입을 해야 된다고요. 혼자서 울고불고 TV보고 책보고 맨날 혼자 하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이렇게 사는 것이 하자가 없고, 남들이 다 그렇게 사니까 인간이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성경을 펼치고 성경말씀을 듣기도 전에 이러한 처지에 대해서 하나님이 좀 도와달라는 거예요. 내 기분을 풀어 달라, 개인적인 기분을 풀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매달리고 뭐 이런 식이다, 이 말이죠.
근데 그 순간 뭘 놓친 거예요? 잠언서 16장 10절의 말씀을 놓친 거죠?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왕의 입술에 있다고 했죠. 그럼 왕의 입술이니까, 자, 왕과 어디 자신을 한번 비교해봅시다. 왕 키가 165cm다. 근데 내 키가 170cm이다. 그럼 내가 왕보다 더 높네요? 키가 크니까. 그리고 왕은 발음이 좋지 않다. 근데 나는 발음이 좋다. 그럼 내가 왕보다 더 질 좋은 인간이네요? 자, 왕은 위장이 안 좋다. 나는 위장이 튼튼하다. 그러면 여러모로 보나 내가 왕보다 더 높네요? 뭐 그런 겁니까?
왕은 또 성질이 고약하다. 나는 점잖다. 그럼 인간적으로 봐도 내가 왕보다 더 우수한 인간이네요. 그러면 내가 왕 할까요? 내가 왕을 하겠다는 이 말이 바로 민주주의 사고방식이에요. 하나님에게는 그런 게 없어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왕을 주신 것은 왕이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나기 때문에 왕을 주신 것이 아니고, 왕 자리 자체에서 뭐가 샘솟듯이 터져 나오느냐 하면은 하나님의 계시가 터져 나오기 때문에 그 사람을 왕이라고 지정한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백성, 십만 명, 백만 명 다 떨이로 합쳐도 누구하나 보다 못하다? 왕 하나 보다 못하다. 왜냐하면 왕은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중재자이기 때문에. 중보자이기 때문에. 그런 자리가 없다면 하늘에서 계시가 내려오지 않는, 중요한 지점에 왕이 있어요. 그렇다면 성도의 삶은 간단한 겁니다. 나 안쳐다보고 누구 쳐다본다? 예수님 쳐다본다. 이게 성도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님 안 쳐다본다. 왜? 내 쪽에서 기분이 안 좋아서 예수님을 볼 여유가 없어요. 왜 안 쳐다봅니까? 기분이 영 엉망이라서 안 쳐다본다는 거예요. 그리고 기분 좋을 때만 예수님 쳐다보겠다는 거예요. 여기서 예수님께서 가신 길과 오늘날 우리가 가고자 하는 그 길을 한번 대비해보세요. 아까 272강처럼 내 이름을 빛내기 위한 길과 인간이라는 피조물은 오직 주의 이름을 빛내기 위한 그 길과.
주의 이름을 빛내면 끝은 천국이고 영생이고, 내 이름을 빛냈다면 아무리 주위에서 동조를 하고 위로를 하고 격려를 해도 그거는 지옥가고 있는 중이에요. 천국 가는 사람의 특징은 뭐냐 하면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거든요. 부인을 해도 부인할만한 건덕지가 있어야 되거든요. 뭐 아무 때나 중처럼 “나는 부족하다.”라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니고, 뭘 쳐다보는 순간 자연스럽게 나는 안 쳐다보는 어떤 분이 독보적으로 내 기분을 덮쳐야 돼요.
내 기분에 좌지우지 하지 않아야 되고, 유동적인 내 기분을 완전히 개무시 할 수 있는 어떤 특정분의 말씀. 그것이 바로 주님 입에서 나온 십자가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에서 눈 돌리면 우리는 또 기분 따라 살아요. “아! 오늘 기분 잡쳤다.” “아! 오늘 기분 붕 뜬다.” 뭐 기분 좋을 때는 기분 좋다고 해야죠. 하지만 그것이 다시 내 것으로 소지돼서는 안 되거든요. 기분이 좋다면 그 기분을 주신 주님을 독보적으로, 내 존재보다 주의 존재를 더 우선시하는 관계가 다시 정상적으로 형성돼있어야 되는 겁니다. 이거는 기분이 아니고요. 실제고 현실입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정리할 수 있는가? 내 기분을 망치게 하는 그 모든 사태가 왕 되신 주님이 나 여기 있다는 시그널이었다. “나 여기 있잖아! 니가 고민할 것도 없는 것을 가지고 왜 고민하느냐? 나 여기 있잖아! 니가 중보자가 아니고 내가 중보자야! 니가 구세주가 아니고 내가 구세주고! 니가 너의 심판자가 아니고 내가 심판자야! 심판해도 주님이 하시고 구원해도 주님이 하시는데, 왜 니가 너를 가만두지 못하고 심판하고 정죄하고 지적하고 자책하고 왜 그러느냐?” 이 말이죠.
기분에 울고 기분에 웃었다가 하는, 그것은 바로 주의 말씀 말고 홀로 서려는 마귀적인 습성이 발휘돼서 그래요. 자, 정리해봅시다. 마귀는 우리의 기분에 치중하게 만듭니다. 니 기분이 어떠냐? 컨디션이 어떠냐? 계속해서 거기에다가 몰두하게 만들어요. 그러나 성령은 이런 마귀를 이깁니다. 어떻게 이기느냐 하면은 너는 말씀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받는 빈 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거죠.
그래서 잠언서 16장 10절, “하나님의 말씀이 왕의 입술에 있은즉 재판할 때에 그 입이 그릇하지 아니하리라” 이 말은 우리가 하는 것이 왜 그릇되느냐 하면은, 우리는 기분에 따라 살다보니까 너무나 사적이고, 소위 쉽게 말해서 너무나 민주주의에요. 그리고 너무나 자본주의에요. 개인주의로 우리는 훈련받았고 양육 받았고 그러한 분위기 속에 너무 젖어들었어요.
이제는 왕 중심주의로 바꿉시다. “나는 주님의 백성이고 주님은 영원한 나의 왕이십니다. 주는 나의 그리스도십니다.” 이런 식으로 바꿔서 살도록 성령께서 이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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