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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여호수아 10:6-8 / 기브온 구출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여호수아

여호수아 10:6-8 / 기브온 구출

정인순 2018. 12. 9. 16:28

음성           동영상     Youtube


기브온 구출



이근호
2018년 12월 9일          



본문 말씀: 여호수아 10:6-8

(10:6)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에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언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서 우리를 구조하소서 산지에 거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

(10:7)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와 용사로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10:8)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의 한 사람도 너를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우리는 매사에 결정합니다. yes, 아니면 no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yes, no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사에 yes와 no를 하십니다. 여기서 과연 우리의 yes가 주님의 yes와 일치하느냐 하는 겁니다. 우리 인간들은 자기 내부정리를 본인들이 알아서 결정하고자 합니다.

소위 말하면 나름대로 ‘순수’입니다. 하지만 ‘순수’가 곧 우상숭배로 이어진다는 사실을 아셔 야 합니다. 순수에 농락당하면 아니됩니다. 순수가 최후의 유혹이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결코 순수하면 아니됩니다. 순수가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왜냐하면 순수에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순수를 달성하기 위한 시도 자체가 순수를 공격하는 바가 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스라엘 중에 애굽에서 살았던 사람은 여호수아와 갈렙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모든 사람들은 광야에서 태어난 자들입니다. 즉 이동식 주거형태를 갖추고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압니다.

광야의 사막이나 혹은 남의 지역에서 경험이 얼마나 위험한 지를 말입니다. 젖과 꿀의 고귀함을 아는 자들입니다. 이들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은 최소한 물과 식량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제사를 요구하셨습니다. 그것으로서 제사지내고 하나님께 감사하는데 하등 지장이 없다는 겁니다.

이 수준을 유지하는 것이 실은 ‘순수’입니다. 반면에 한 장소에 영구히 정착하게 된 정착민들이 섬기게 되는 하나님은 곧 계속해서 “더 다오”를 요구하게 됩니다. 즉 자신의 바닥을 모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서 미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이질적 요소’를 주입하게 하십니다.

그들이 바로 ‘기브온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헤치는 사람들인 것처럼 이스라엘인들은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이들에게 이스라엘의 적들이 쳐들어 왔습니다. 그러니 기브온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형편을 돌볼 책임이 이스라엘에게 당연히 있는 것처럼 이스라엘에게 도움을 요청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도 이스라엘의 요청과 차이나지 않는 차원에서 도와주게 됩니다. 시작은 이질적이었지만 이스라엘 왕이 되시는 하나님께서 마무리는 이스라엘과 동질됨을 선언하는 셈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곧 모든 인간에게는 ‘이질적’인 것을 통해서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게 하시는 원칙이 작용합니다.

과연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존재입니까? 과연 우리가 하나님과 맞상대할 입장에 있을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어느 정도로 이질적이고 적폐적인 존재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yes와 no 사이에는 우리는 no에 해당되는 자들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이 적폐를 몸소 껴안게 하셨습니다. 이 원리는 예수님 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에게도 다 적용됩니다. 고린도후서 12:7-9에 보면,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름대로 순수함을 추구했습니다. 단순히 개인적인 자랑거리를 위함이 아니라 당연히 주님의 일에 지장이 되는 요소를 자기 몸에서 제거되고 싶을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 바울이 생각은 yes입니다. 하지만 이 인간적인 yes는 하나님에게 no가 되었습니다. 즉 가시 빠진 사도 바울이 아니라 가시가 있는 사도 바울이 주님이 원하시는 바이라는 겁니다.

사도는 고집스럽게 세 번씩이나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사도가 새롭게 알게 된 것은 이것입니다. ‘사단의 가시’ 즉 적폐를 안고 살아가는 것이 곧 ‘주의 일’이라는 겁니다. 가시없는 사도바울은 존재하지 말아야 했던 겁니다. 우리는 특정 인간, 특정 부류의 사람이 ‘꼴보기 싫다’고 거부하지만 우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그런 대우를 받아야 될 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거쳐보면서 그들이 감사해야 될 수준은 바로 ‘먹는 것, 입는 것으로 족한 줄로 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사단의 가시’가 박히므로서 알게 된 것은 ‘이 은혜가 내게 족하다’는 겁니다. 바로 하나님이 벌리시는 ‘순수’를 위한 전쟁을 이런 전쟁입니다.

광야의 정신을 상실하는 순간, 우리는 적과 원수가 뒤바뀌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모든 인생들은 나름대로 다 사연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 예수님마저도 이 세상의 죄를 몸에 지녔다는 사실을 잊지 맙시다. 우리 소원대로, 우리 욕망대로 다 성취하면서 살 수는 없습니다.

만약에 자기 자신의 욕구대로 순수를 찾는다는 이는 계속해서 추가적인 법적 조항을 스스로 키우는 바가 됩니다. 더 철저하게, 더 완벽하게, 더 순수하게 될 시도하게 됩니다. 그래도 늘 정신적인 공허감은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에게 적이 됩니다. 사정없이, 어쩔 수 없이 들어오게 된 비순수함이 차라리 우리 자신의 본질을 대변해주게 됩니다.

즉 내가 no라고 규정하면서 배척한 그것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의 본모습을 찾게 되는 겁니다. 성도는 마치 해변가에 줄지어져 있는 모래사장과 같습니다. 모래사장은 바로 옆에 바다를 접하고 있습니다. 모래사장이 먼저 바다보고 파도를 밀어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쉴새없이 바다로부터 파다가 모래사장을 덮치게 됩니다.

이처럼 우리네 인생이라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바다로부터 쉴새없이 파도가 덮치고 다시 쓸려 내려가는 장소입니다. 나쁜 것이 밀려왔다고 해서 좌절할 문제도 아니고 잠시 좋은 것이 밀려왔다고 해서 계속해서 내 것이라고 붙잡아 둘 상황도 아닙니다. 주님의 일이란 우리 자신이 적폐임을 공개하시는 쪽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곁에 바짝 하나님이 작용이 늘 일어나는 그런 공유의 공간임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송민선

214강-여호수아 10장 6~8절(기브온 구출)

201812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여호수아 10장 6~8절입니다. 구약성경 333페이지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길갈 진영에 사람을 보내어 여호수아에게 전하되 당신의 종들 돕기를 더디게 하지 마시고 속히 우리에게 올라와 우리를 구하소서 산지에 거주하는 아모리 사람의 왕들이 다 모여 우리를 치나이다 하매, 여호수아가 모든 군사의 용사와 더불어 길갈에서 올라가니라, 그 때에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이르시되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그들을 네 손에 붙였으니 그들 중에서 한 사람도 당할 자 없으리라 하신지라”

여호수아를 보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평생토록 지금까지 해본 적이 없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여호수아와 함께 있는 이 사람들은 애굽에서 살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정착 생활이라는 것이 뭔지를 몰라요. 정착 생활하는 사람들은 가나안 사람들이죠. 본토박이.

거기에 대해서 여기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착이 아니고 이동중에 있던 사람들입니다. 이동하고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정착한다는 것이 얼마나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준다는 것은 이동 중인 사람만 알아요. 정착하고 있던 사람들은 그것을 모릅니다.

따라서 정신적으로 어떤 차이를 보여야 하는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이제 안락한 정착에 왔을 때 그 감격과 감사가 이스라엘에게는 있어야 하고 그 가나안 땅 입장에서 그 토착민들은 원래 인간 사는 것이 자기 땅에서 이렇게 사는 것이라고 별로 대수롭지 않고 그게 정상인 듯 그렇게 생각할 겁니다.

이동중에 있다는 것은 안정적인 자기 정착지가 없다는 거죠. 그럼 이동중에 광야에서 또는 전쟁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속속들이 그 폐부, 마음 심층을 전부 들추어 내주는 경로가 될 거예요. 과정이 되고. 인간은 ‘하나님, 하나님’ 하며 찾지만 역시 연료와 식량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하는 겁니다.

사람이 정착하면서 여유롭게 살면서 하나님 섬기라고 하면 그걸 왜 못 섬기겠어요. 남아도는 시간 재미도 없고 심심하니 하나님 섬기는 것도 좀 멋져 보이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늘 떠돌이 생활하는 것에 있어서는 하나님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내 몸 하나 누울 곳 있는 거.

아프니까 청춘인데 그 청춘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살찐 사람들이 없다는 거, 살찐 사람들은 보통 30~40대가 되면 드디어 불기 시작하는 겁니다. 물에 빠진 카스테라처럼 퉁퉁 부어있죠. 그런데 20대는 아무리 먹어도 정서적으로 불안하니까 스트레스를 받아서 살이 찌지를 않는 겁니다.

제가 결혼할 때 몸무게 53킬로 나갔거든요. 지금은 상상이 안 되죠. 꿈같은 시절이라. 그렇게 바짝 말라 있어서 처남이 아주 반대했습니다. 저렇게 여윈 사람에게 내 동생 못 준다고. 그러면 뭐 결혼을 지금 해야 하는가요? 그처럼 생각하는 것이 많고 장래가 불확실하니까 어쩔 줄을 모르는 거죠.

그럴 때 욕심 욕망이라 할까요, 사실 욕심 욕망 근처도 안 갔지만, ‘이것만 허락해 주시면 더는 소원 빌지 않겠습니다. 더는 희망이 없겠습니다. 이것만 허락해 주소서’ 하는 게 뭐냐 하면 방 하나 얻고 취직자리 하나 얻는 거. 그거죠.

이동식 주거방식에 있어서 가장 낮은, 인간에게 최소한 하나님께서 이 정도만 허락해 주면 정말 큰 은혜라는 것을 몸소 체득해야 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토착민의 특징이 뭐냐 하면 가진 것 더 키워달라고 신을 믿는 민족들이에요.

은혜를 아는 쪽과 은혜를 모르고 건방 떠는 족속과 싸움 전쟁, 이건 하나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은혜를 아는 쪽이 승리를 가져갑니다. 중요한 것은 이스라엘이 그 은혜, 그 낮아진 마음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 유지하기 위해서 삶과 죽음을,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을 그들 속에 집어넣었으니 그들이 6절에 기브온 사람들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합류했다는 것이 이스라엘에게 긍정적일까요? 부정적일까요?”라고 물을 수는 있어요. 순수 혈통은 아니거든요. 이건 완전히 다 작살 내야 할 사람이 마치 암세포처럼 자기 내부에 쑥 들어왔을 때 이걸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의 문제가 새로운 독소 조항처럼 나쁜 조항처럼 여기 이스라엘에 끼어든 겁니다.

제가 어떤 여자 의사 선생님께 들은 이야기인데 수면 내시경 하지 말고 그냥 생으로 내시경 하게 되면 정말 아파요. 그런데 제가 그걸 당했거든요. 그 여자 의사분에게. 너무너무 아파요. 그런데 다 조사를 하고 난 뒤에 그 여자 의사분이 하는 말이 “목사님, 아프지요? 아프지만 나 같은 의사도 의과 대학에서 이것이 얼마나 아픈지를 몸소 다른 동료를 통해서 이미 다 경험을 해 봤어요”라는 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의사가 일방적으로 아프게 할 때, 자기는 아픈 것도 모르니까 일방적으로 한다는 그런 생각은 없고 실제로 의과 대학에서 실습하면서 동료들끼리 생판, 내시경을 입 벌리고 정신 바짝 차려있는 상태에서 다 들여다보고 한 거예요. 그게 환자가 얼마나 아픈지를 몸소 아는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기브온 토착민을 집어넣은 것은 순수 혈통에 못 미치고 상당히 껄끄러운 어떤 가시 같은 것이 몸에 들어온 거지만, 그 가시가 있음으로써 오히려 이스라엘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정신을 상실하지 않게 하는 요소로서 계속 작용하는 겁니다. 이 비슷한 예가 고린도후서 12장에 나오죠.

사도바울처럼 성령 받고 예수님의 살아계심 부활을 직접 경험했던 천하에 무서울 거 없고 내게 능력 주신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자부했던 그 사도바울에게 자기의 소원대로 뜻대로 뽑아낼 수 없는 게 있었어요. 그게 뭐냐 하면 가시가 박혀 있는 거예요. 사도바울도 한 고집해요.

한번 빼달라고 해서 안 되면 포기하면 될 텐데, 삼 세 판이라고 무려 세 번이나 기도해요. 이거 빼달라고. 쉽게 말해서 이것 때문에 복음을 못 전한다는 구실로 삼아서 그거 빼달라고 그렇게 애를 쓴 겁니다. 그걸 상당히 어렵게 말하면 ‘이질적’이라는 거예요. 나답지 않은 거. 나답지 않은 것이 내 속에 들어온 거예요.

동질이 아니고 이질적인 것이 들어 온 거예요. 뭔가 몸 안에, 신발 안에 모래 들어온 것같이 들어 온 겁니다. 기분 같으면 확 털어버리고 싶은데 하나님께서 안 털리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 정답을 알게 되었죠. 이 가시가 없었더라면 몰랐을 정답을 사도바울은 고백해 냅니다. 내가 은혜받아서 하나님 앞에 뭔가 일 더 하는 것이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는 거예요.

족한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주의 일이라는 거예요. 이것 빼내고 지금보다 더 많은 성과를 내는 것이 주의 소원이 아니고, 지금 박혀 있는 가시도 이게 의도적으로 박혀 있게 된 것을, 이것을 나의 일부로 수용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갖는 거. 이 가시가 아프거든요. 아픈데 아파야 할 존재인 것을 내가 수긍을 해야 한다는 겁니다.

요새 우리 장로님 아가 키운다고 가시가 들어왔죠. 딸이 아이가 둘인데 하나를 더 낳았어요. 번갈아 가면서 아이 키운다고 애를 먹어요. 농사 짓는 건 일도 아닌 거 같아요. 아이 보는 거에 비하면. 가시입니다.

그처럼 어떤 인생, 어떤 집안이든 사연 없는 사람은 없어요. “아프냐? 나도 아프다” 하거든요. 모든 사람이 아파해야 할 이유는 바로 이 땅이 이동해야 할 땅이고 우리가 원하는 식의 정착지를 주님께서는 허용한 적이 없다는 겁니다. 어쨌든 간에 기브온 사람이 들어왔다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껄끄럽고 부정적인 요소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부정적인 요소가 하는 일은 뭐냐. 이게 좀 어려운데요, 이게 뭐냐 하면 하나의 이스라엘 국가 속에서 천민,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요소가 들어오게 될 때 그러한 천민과 가난한 사람과 정말 눈에 거슬리는 사람이 그것이, 눈앞에서 어떤 수용소를 만들어서 단체로 지하에 집어넣든지 아니면 북한이나 히틀러처럼 다 죽이든지 뭐 이렇게 아예 노숙자도 없고 거지도 없는 깔끔한 사회인 것을 국제 사회에 보여주면서 우리 인민 사회주의가 잘산다는 것을 좀 티를 냈으면 좋겠는데... 그들은 다 수용소에 가 있거든요.

여러분의 상식이 어떤 상식인지 모르겠지만 히틀러가 국가를 찾고 제일 먼저 하는 조치가 유대인 조지는 것이 아니었어요. 뭐냐 하면 자국민들 가운데서 정신병자, 가난한 자, 특히 여호와증인들을 가스실로 보내 죽이는 거였어요. 남의 민족 죽이는 것이 아니고 자기 민족, 국민을 죽이는 것이 히틀러가 했던 초창기 작업이에요. 자기 국민들.

여호와증인을 왜 죽이느냐. 무정부주의거든요. 무 국가주의. 미쳤다고 전쟁에 가서 피를 흘리느냐고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죠. 그리고 동성애, ‘정신병자도 아니고 이런 게 다 있어’라는 식으로 잡아다 죽였어요. 히틀러는 한 마디로 ‘다 죽여’예요. 데려다 다 죽여.

왜 그걸 없애야 하느냐면 그런 요소가 없을 때 나머지가 깨끗한 정부, 깨끗한 나라라는 이미지가 살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데 히틀러가 몰랐던 것이 있어요. 히틀러가 그렇게 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없애고자 하는 그것이 정치하면서 필수적으로 쏟아져 나오는 적폐라는 거예요.

적폐가 없으면 안 돼요. 적폐가 있음으로써 자기 한계, 자기의 부족함을 느끼는 계기가 되고 기회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여호와증인, 이단들, 기독교도 이단이고 그런 사람들을 왜 두었겠어요? 왜 같은 인간인데 정신병자고 동성애고 왜 두었겠어요? 제거하는 데 급급하지 말라는 겁니다. 제거하면 너도 제거되어야 한다는 거예요. 너 자신도.

왜 하나님께서 기브온 사람들을 이렇게 주었느냐 하면, 인간들의 무엇을 지적하기 위해서냐 하면 개인적인 인간들의 나라가 되면 그 안에서 ‘Yes’ 와 ‘No’ 가 성립되어요. 이거는 되고 이거는 아니라는 것이 자체적으로 성립이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들은 자기 세계가 자기 구미에 맞는 세계가 되게 하기위해서 자체적으로 무엇을 가동하느냐 하면 ‘Yes’ 와 ‘No’를 가동해요.

이거는 해도 되고 이거는 해서는 안 된다는 법칙과 규칙을 가동하게 되는 겁니다. 이게 정착민들의 특징이에요. 정착민들은 뭔가 꿈을 그리고 있습니다. 완벽한 사회를 그리고 있어요. 완벽한 세상에 대해서 그게 하나의 희망처럼 되어 있어요. 그걸 결벽증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 밖에 나가면 손 씻으라고 하죠. 참 기특한 일이죠. 여러 가지 만지다 보면 균을 옮길 수 있으니까. 그런데 문제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손을 씻었다면 Yes, 손을 안 씻었다면 No가 되거든요. 그다음에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부인이 있다가 “손은 그렇게 씻으면 안 돼요. 비누로 싹싹 씻어야죠.”라고 돼요.

손 씻는 것이 점점 더 세밀화되는 겁니다. 손을 씻되 손가락 사이까지 비누칠해서 싹싹 씻는 거죠. 그러면 남편은 밖에 나와서 비누칠해서 손 싹싹 씻습니다. 그걸로 끝납니까? 아니요. 그게 자기로서는 분명히 Yes인데 아내가 보니 No예요. 왜? 너무 빠르다는 겁니다. 적어도 30초간은 싹싹 씻어야 해요.

이게 이스라엘처럼 이동하는 경우에는 맘을 낮추게 되면 그 까짓것 손 안 씻어도 입는 거 먹는 것으로도 정말 빌어먹어도 감사한데 이게 정착이 되면 법들이 점점 증가하고 늘어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다고 하는 것은 교회 다니면서 거룩하려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 듣고 자기가 거룩해 지면 거룩해질수록 자기가 Yes or No의 그 조항을 자기가 계속해서 개발해내요. 발명해 냅니다.

이런 경우가 주위를 보면 다 보여요. 손흥민이라는 토트넘에서 뛰는 한국계 축구 선수가 있어요. 얼마 전에 100골을 넣었거든요. 차범근 100골 신기록과 동등하게 되었어요. 오늘 아침 또 넣었어요. 어제 넣고 오늘 또 한 골 넣었어요. 그러면 102골이 되는 겁니다. 이게 손흥민이라는 선수에게 무슨 압박을 가하느냐 하면 계속해서 골 넣는 기계가 되라는 것을 압박을 해요.

그게 바로 정착민의 특징이에요. 교만의 극치를 달리는 겁니다. 거룩의 극치가 아니라, 착함의 극치가 아니라 주제 파악과 점점 더 멀어지는 거예요. 잠언서에 나온 것처럼 “다오, 다오” 뭘 자꾸 달래. 계속 “주세요. 더 주세요” 차라리 반대로 나가야 옳다는 겁니다.

이 기브온 사람들이 요구해요. “우리가 이렇게 다른 옆에 있는 족속들에게 당하게 생겼으니 당신이 와서 우리를 보호해달라”라고 해요. 처음에 기브온 사람들은 이런 요구를 할 권리도 없고 자격도 없어요. 그냥 속여서 들어온 겁니다. 이질적이라고 했지요. 그런데 이질적인 것이 갑질하는 거예요.

오늘 설교를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은 죽이지 않습니다. 죽는 것이 무섭다는 말은 뭐를 놓친 거냐 하면 주님이 죽이기까지 사랑한다는 말을 놓쳐서 그래요. 사랑을 놓쳤기 때문에 죽는 게 두려운 겁니다. 하나님은 죽더라도 천국 보내요. 하나님께서 두 번째 죽음, 그러니까 영원한 멸망을 보내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싸움이 일어나요. 나의 Yes or No와 주님의 Yes or No가 경쟁이 붙고 싸움이 붙는다고요. 그러면 우리는 Yes or No를 고집하지 말고 아예 No 하는 것이 우리의 본성이라고 자기를 고백해버립시다. 뭐든지 우리는 주님 말씀에 No라고 할 수밖에 없는 그런 속성을 지녔다고 인정해버리자는 말이죠.

그러면 전쟁은 누가 하느냐 하면 나에게 들어온 암세포와의 전쟁이 아니라 차라리 그 암세포를 닮으라는 그 주님의 뜻에 대해서 우리가 대들고 있는 거예요. 네가 귀찮아하고 밀어내고 네가 싫어하고 저런 인간은 때려 죽여야 한다는 그 인간과 네가 어쩌면 그렇게 닮았느냐에 동의하라는 겁니다.

우리나라 KTX에 철도 사고율이 세계적으로 가장 적어요. 제일 적으니까 KTX 직원들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겁니다. 감사해야 해요. 그런데 강릉선 탈선사고가 있었거든요. 뭐 인원수를 빼서 그렇다는 둥 이런저런 말이 많이 있거든요. 저는 늘 감사하고 있거든요. 사람이 만든 기계가 고장이 안 날 수 없는데 고장률이 적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나님이 지켜줬기 때문에 그래요.

기브온 같은 사람들이 매일같이 우리에게 들어옵니다. 그 말을 비유로 하면 이렇습니다. 우리는 모래사장이에요. 그리고 주님은 모래사장과 붙어있는 바다입니다. 모래사장이 파도에게 나를 치라고 요구한 적 없습니다. 바로 옆에 붙어있으니까 파도가 바람 불어서 계속해서 모래사장을 덮치고 다시 쓸려가고 덮치고 쓸려가고 합니다.

바다는 모래사장에게 이질적인 거예요. 우리가 원치 않는 겁니다. 요구한 적이 없어요. 요구하지도 않는데 주님께서는 세파를 계속해서 우리에게 몰아치십니다. 우리는 당하기만 하고 있죠. 그런데 갑자기 안 좋은 게 다가오면 짜증나지만 갑자기 좋은 게 다가오면 마치 이 모래사장이 그런 것을 간직할 자격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돼요. 왔다가 빠져나가는데.

마치 좋은 것은 왔다가 빠져나가면 안 되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해운대구에 우리나라에서 제일 비싼 아파트들이 있어요. 80층은 물론이고 100층까지 올라가고 있어요. 내일 또 그 동네 갑니다. 아파트를 사놨다면 감사하겠지요. 그런데 값이 떨어지면 감사 안 합니다.

이게 뭐냐 하면 이 세상이 파도가 와서 옆에 있는 우리를 늘 덮친다던가 매일같이 우리가 요구한 적도 없는데 매일같이 파도가 와서 모래사장을 한바탕 요란을 떨고 쓸고 내려가거든요. 그래도 모래사장이라도 남아있는 것이 천만다행인 줄을 아셔야죠.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증인 되는 거예요. 파도가 와서 쓸고 지나간 그 여분의 것, 누가 와서 나를 늘 손대고 다루고 있다는 것을 늘 바라보는 것.

지금 이스라엘은 모래사장이고 하나님은 바로 바다입니다. 바다가 되어서 정착하지 말고 이 땅에서 눌러앉지 말라고, 결국은 주님 나라가 이미 체험되고, 그걸 선취라고 하는데 미리 체험하는 나라가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승리하게 하는데 이 승리는 바로 기브온에 의해서 유발된 전쟁을 벌이게 되는 겁니다. ‘하나님, 내가 전쟁 이길까요?’라고 우리부터 시작하지 않았어요. 주님부터 우리에게 이질적인 것을 집어넣고 그것 때문에 고민하게 만들고 걱정하게 만들고 다시 한번 정착이라는 그 의지가 뭔가 잘못되어 있다는, 눌러앉을 입장 아니라는 거를 깨닫게 해서 먹는 거, 입는 것으로 족할 줄 아는 것을 유지하라고 우리에게 이질적인 가시를 늘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적폐요소를 우리 안에 주신 것은 우리가 죄를 지어서 잘못해서가 아니라 의도적인 것임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싫어하는 그 인간과 우리가 다를 바 없음을, 우리가 그만큼 건방 떨고 교만에 처했다는 것을 날마다 깨달아서 주신 은혜에 족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