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10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에베소서 1:7-8 / 피로 말미암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에베소서

에베소서 1:7-8 / 피로 말미암아

정인순 2018. 12. 2. 14:45

음성          동영상   Youtube


에베소서 1:7-8      피로 말미암아



이근호


‘피'가 역사 속에 등장한다는 것은 역사를 절단 내겠다는 뜻입니다. 인간은 역사에 의존합니다. 이는 곧 과거 기억 속에서 꿈틀거리는 인생을 산다는 겁니다.


자기 기억을 벗어날 위인이 없듯이 역사 의식에서 잊고 살 사람도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시간과 공간에 갇혀 있는 입장에 있습니다.


즉 내가 있으니 시간도 있고 공간도 느낍니다. 만약에 내가 죽는다는 시간도 사라지고 공간도 같이 나에게는 의미 없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좋아도 일단 내가 여기 있다는 것을 빛낼 수 있어야 좋은 세상입니다. 좋은 집에 이사했지만 그날로부터 계속 가족끼리 싸우게 된다면 좋은 집이 무의미해지는 것과 같은 겁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에게 주시는 은혜는, ‘이미 죽은 자’로 만드는 조건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의 지난 과거나 기억에 억매일 필요 없게 만듭니다. 그것이 바로 ‘피’입니다. 죽음이되 그냥 일반적인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 자체를 절단 내고 무의미하게 만드는 증거로서의 죽음입니다. 나 하나 죽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가 실은 다 죽은 체로 살고 있음을 알려주는 기능으로서의 죽음을 말합니다.


하나의 죽음이 곧 보편적 죽음을 알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로 이 죽음을 반복하시겠다 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12:11에 보면, “또 여러 형제가 어린 양의 피와 자기의 증거하는 말을 인하여 저를 이기었으니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죽지 않으려는 이 세상에 대해서, 세상 전체의 실상을 말하려면 세상 속성이 집대성 그 어떤 증거가 발생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약에서는 ‘어린양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언약을 구체화시키십니다. 그리고 그 은혜의 절정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입니다. 더는 ‘살았다’라고 할 자가 없게 하십니다.


피로 말미암아


이근호
2018년 12월 9일                   



본문 말씀: 에베소서 1:7-8


(1:7)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1:8)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사도는 지금 우리 인간들이 도저히 알아 듣지 못할 말을 던지고 있습니다. 즉 사도의 말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자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없는 대상’을 향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미 인간들이 소위 ‘알아듣고 대처하는’ 원리가 따로 마음 속에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뭘까요? 이런 겁니다. “나는 부모없이는 못살겠다. 나는 친구없이는 못살겠다. 나는 회사없이는 못살겠다. 나는 가정없이는 못살겠다. 나는 나라없이는 못살겠다. 나는 구원없이는 못살겠다”는 식으로 살아갑니다. 즉 ‘나는 기어이 살아남아야겠다’에 필요한 것들만 이해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이 생긴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오실 때 일방적으로 어깨에 피를 미리 한 바켓을 장만해서 짊어지고 오신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죄사함’을 제공한다는 그 피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질까요? 그것은 인간들의 의도에 의해서 발생되는 겁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와있듯이 인간들의 의도는 정치적 의도와 종교적 의도를 나타냅니다. 정치적 의도란 곧 ‘안정된 국가가 우리를 살린다’를 취지로 움직이는 겁니다. 인간들은 개인적으로 자기마음대로 살고 싶지만 이웃이 있는한 말썽의 소지가 일어납니다. 이를 보다 큰 권세로서 해결 짓고 싶어합니다.

경찰이나 판사는 다 나라로부터 생활비를 받는 자들입니다. 이들로 통해서 자신에게 손해 본 것을 만회하려고 합니다. 곧 인간은 가정단위로서는 삶의 위협으로부터 다 보호되지를 못함을 알고 보다 큰 권세의 혜택 안에서 개인적인 안정된 삶을 보장받기를 원합니다. 이 정치적 의도는 바로 눈에 보이는 이 현실 안에서의 조치입니다.

종교적 의도란, 인간이 죽고 난 뒤에 보다 완전한 행복이 보장되는 삶을 영위하고 싶어합니다. 미리 신에게 잘 보여서 죽고 난 뒤에 천대받고 싶지 않은 겁니다. 즉 이 땅에서 살면서 나름대로 의롭게 산 사람이고 싶어합니다. 그래야 죽은 영혼의 질이 낫다는 평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해봅니다. 이것이 종교적 의도입니다.

이러한 정치적 의도와 종교적 의도가 합세해서 예수님만 만남으로서 비로소 여기에 ‘피’가 발생합니다. 즉 인간들의 자기 보존적 안전망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의도와 죽어서 구원얻겠다는 종교적 의도가 하나님을 죽게 하셔서 하나님의 피를 발생시킨 겁니다. 그러니 이 세상의 그 어느 인간이 스스로 정치적 의도와 구원적 의도를 포기하겠습니까!

그래서 모든 인간은 피 앞에서 ‘죄인’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해서 보는 ‘죄인’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방치하지 않으시고 심판하시고 저주하십니다. 즉 ‘이미 죽은 자’로 보시는 겁니다. 이러한 사실은 예수님이나 인간들이나 다같이 ‘율법 안’에 들어오게 될 때 알게 되는 현상입니다.

율법을 제시는, 그동안 평소에 인간들이 얼마나 자기 의로움이나 자기 변명이나 자기 정당성에 민감한지가 드러납니다. 즉 율법이 제시하는 모든 조항에서는 “∼하지 아니하면 죽는다”로 일관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복을 받는다는 조항이 있더라도 다음 어느 순간에 뭘 하지 않는다면 당연히 주어진 복도 무효가 되는 겁니다.

율법을 하나님이 주신 것은 모든 인간을 저주 아래 가두어져 있는 입장인 것을 통보하기 위함입니다.(롬 3:19) 율법 속에서 하나님되시는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처해있는 환경에서 ‘같이 죽기 위해’ 오셨던 겁니다. 즉 살고 싶어 환장하는 인간에게 “같이 죽어야 돼!”라는 식으로 발언하니 그 누가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인간들은 슬쩍 간 보듯이 한쪽 발을 종교의 세계로 쓱 집어넣습니다. 여차하면 얼른 발을 뺄 요량입니다. 왜냐하면 인간들의 평소 태도는 매일 아침마다 점검하는 것이 바로 “오늘은 나는 얼마나 손해 봤으면 얼마나 이익봤느냐”를 따지기 때문입니다. 이런 인간을 가지고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십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취시리라 하셨느니라”(엡 5:14) 즉 인간을 잠자는 자, 곧 ‘이미 죽어 있는 자’로 봅니다. 인간들이 하는 모든 짓이 주어진 율법의 범주 안에서 볼 때 죽은 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죽은 자는 기어이 살아남으려고 몸부림 치고 있는 겁니다. 손실과 이익을 논하면서 말입니다.

주님의 방식은 이러합니다. 마치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빙빙 돌리는 아버지의 안목으로써 일방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그 맺은 진 관계는 오직, ‘피로 말미암아’입니다. 다른 것은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 자신이 이미 죽은 자요 죄인이라는 점 때문에 발생된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을 얻는 겁니다.

에스겔 37:3-6에 보면,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하시기로 내가 대답하되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로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리라  너희 위에 힘줄을 두고 살을 입히고 가죽으로 덮고 너희 속에 생기를 두리니 너희가 살리라 또 나를 여호와인 줄 알리라 하셨다 하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인자야 누가 이들을 다시 살게 하겠느냐?”라는 식으로 질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자가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고 질문합니다. 이 뉘앙스는, 죽은 자가 다시 부활군이 되는 것은 이미 인간이 지식과 능력을 능가하는 일이라는 겁니다. 즉 인간들이 조목조목 따진다고 해서 그 이해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린자식이 아버지에게 매달려서 빙글빙글 도는 것이 아닌 겁니다. 일방적으로 아버지의 힘으로 어린아들이 매달려서 도는 것처럼, 우리 인간들이 예수님의 피를 믿어주므소서 구원되는 것이 아니라 그냥 ‘그 피의 능력’입니다. ‘그 피로 말미암아’입니다. 더 이상 아무 것도 필요치 않습니다.

율법 안에서의 완성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이 예수님의 희생의 혜택자가 필요했던 겁니다. 그래서 일방적으로 죄사함을 적용시켜 주신 겁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정보가 담긴 백업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스스로 늘 가짜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음을 시원하고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4강-엡 1장 7-8(피로 말미암아)

18120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에베소서 1장 7-8절입니다. 신약성경 310페이지입니다.

에베소서 1:7-8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대상을 향하여 계속해서 말을 던집니다. 인위적으로 발생될 수 없는 인물, 그런 인물을 향하여 이야기하는 겁니다. 한마디로 이렇지요. 내 말을 알아먹을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다는 자체가 인간세계에 인간으로 태어난 인간치고 이걸 수용할 위인은 없습니다.

수용도 하지 않으면서 마치 수용했다는 척 거짓으로 신앙을 흉내 내는 것. 같은 인간은 이것에 속아 넘어가는데 하늘나라에서는 통과가 안돼요. 끝까지 네가 가짜 신자라는 것을 천사들은 다 들춰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양쪽에 다 다리를 걸치고 있거든요.

그걸 고급스러운 용어로 간본다고 하지요. 간을 보고 있는 겁니다. 평소에 인간들이 ‘나는 이것 없으면 못 살겠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미 인간들은 ‘나는 이렇게 살련다.’가 이미 구성이 되어 있고 형성이 되어 있어요. 태어날 때는 부모 없이는 못살겠다. 조금 크면 친구 없이는 못살겠다. 더 커서 어른이 되면 회사 없이는 못살겠다. 그 다음에는 가정 없이는 못살겠다. 그 다음에는 나라 없이는 못살겠다.

나라 때문에 또 난리가 나잖아요. 나라 없이는 못살겠다. 나중에 약간 배부르다 싶으면 구원 없이는 못살겠다. 죽어서 지옥갈 수 없다는 식이지요. 이런 본성이 지금 속에서 화산처럼 늘 폭발하고 있어요. 건드리기만 해봐라. 그런 식이지요.

부모 있었고, 친구 있었고, 회사 있었고, 가정 있었고, 나라 있었고. 이제 나머지 하나 필요한 것, 곧 죽을 거니까 나머지 하나 필요한 것은 뭐냐? 천당, 구원이 있어야 되거든요. 이것 챙기겠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성경을, 사도바울의 편지를 알아먹지를 못하는 거예요. 아무리 해도 못 알아먹어요. 교회 장사가 될 리가 없습니다. 헌금이 나올 일이 없어요.

그래서 ‘교회? 에라 모르겠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따로 있구나. 부모 잘되고, 친구 잘되고, 회사 잘되고, 가정 잘되고, 나라 잘되고, 천당 보내주는 그걸 원했구나. 그래, 여러분, 기도하시면 복 받습니다, 여러분이 헌금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쪽으로 돌아서버리자.’라고 하는 것이 여러분의 눈에 들어왔던 교회들이었어요.

그리고 여러분이 전에 거쳐서 왔던 교회들이 그 짓 하고 있는 거예요. 오늘 본문에서 사도가 말하는 것은 뭐냐 하면, 그런 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알게 하고 그걸 팍 쑤시는 것은 뭐밖에 없느냐 하면 오직 “그의 피로 말미암아” 그 한마디입니다. 이 한마디, 송곳 가지고 팍 쑤셔서 치고 들어오는 거예요.

“피로 말미암아”가 무슨 뜻이냐 하면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아빠가 어린 애들하고 놀아줄 때 애의 두 손을 잡고 한 바퀴 빙 돌지요. 애들은 까르르 웃으면서 신나서 “또 해줘.” 하거든요. 돌면서 아빠의 입장, 아빠의 눈을 카메라로 본다면 뭐가 보이는가 하면, 애는 어디에 의지하느냐?

아빠가 애의 손을 잡고 빙그르르 돌거든요. 그럴 때 애는 아빠의 그 눈을 보고 있는 거예요. 지금 맺어져 있는 것은 아빠가 쥔 그 손밖에 없습니다. 아버지입장에서 애와의 그 관계는 뭐냐? 하나님이 자기자녀를 붙들고 빙그르 돌 때 오직 피로 말미암아, 피로 맺어진 그 관계만 형성돼요. 그 관계 외에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습니다. 묻지를 않아요. 오직 피관계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사도바울이, 애들이 아버지에게 두 손을 맡겼다는 것을 강조하는 거예요. 어디에 맡겼느냐?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그 피에 모든 것을 맡겨야 된다는 거예요. 부모가 애 손을 안 놓으니까. 피라는 것은 인간이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관계기 때문에 인간들이 아무리 앙탈부리고 노력해도 이 피관계가 끊어지지 않습니다.

로마서 8장에 보면, 환란이나 핍박이나 위험이나 곤고나 기근, 적신, 어떤 풍파나 역경들이 올지라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이야기했거든요. 끊어지지 않는다는 이 말은 주님이 붙잡아 두는,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다고 할 때 그 피 빼놓고 나머지 모든 것은 전부 다 버리라는 그 말입니다.

교회고 국가고 가정이고 친구고 회사고간에 그런 것은 다 없어도 되는 거라는 말이지요. 빙그르 도는데 그 피만 있으면 아무 문제없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우리는 회사가 잘 안되면 문제 있다고 보고, 가정이 어려우면 문제가 있다고 보고, 나라 어려우면 문제 있다고 보고, 나 천당 못가면 문제 있다고 보고.

전부 다 모든 것이 평소의 태도나 습관이 뭐냐 하면 뭔가 좋은 것을 삼키는 용도로, 삼키는 습관으로 살아온 거예요. 내 것 삼키는 것. 누구에게 두 손을 맡기는 것이 아니고 좋다는 것은 다 끄집어오는 거예요. 십자가고 복음이고 좋다는 것은 다 끌어와서 나중에 똥배만 나왔어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관계가 되어야 될 텐데 소유에 급급한 거예요. 뭘 더 소유할 것인가에 급급한 거예요. 주님은 “피로 말미암아” 이러는데 오늘날 교인들은 나로 말미암아, 내 행위로 말미암아, 내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열심히 말미암아 천국 넣어주소서, 구원해주소서, 그렇게 나오더라는 말이지요. 모든 인간이 그럴 수밖에 없어요.

태생이 아담의 저주받은 성질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에 내놓는 것은 오직 나만의 나밖에 없지요. 예수님이 십자가의 피를 흘렸다고 할 때 그것이 역사적 사실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이 실제로 일어난 역사적 사실, 마치 이순신 장군이 죽은 것처럼 역사적 사실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냐 하면, 옛날에 선악과 따먹은 그것도 같이 역사적 사실로 알라는 뜻이에요.

왜냐하면 첫 번째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었지만 두 번째 아담 되신 예수님은 피를 흘렸거든요. 그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잔소리만 하면 되지 피를 흘릴 이유가 없어요. 피를 흘렸다는 말은 선악과 따먹은 이상은 누구도 선악과의 의식에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부모가 있기에 우리 몸이 있는 거예요.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고 분명한 사실입니다. 선악과를 따먹고, 내가 나를 최고로 여기고, 나만이 오직 섬겨야 될 대상, 나는 나만 중요하다는 것이 너무나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반대로 가시는 거예요. 십자가에서 자기를 버리는 겁니다. “어느 쪽 할래? 버릴래, 아니면 너 섬길래?” 그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 섬김에 분이 안차서, 이게 자기 욕망에 안차니까 어디까지 가느냐 하면, 교회에 가서 자기 섬기는데 하나님 힘까지 보태려고 하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자신을 응원해요. 아무도 응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팀을 응원한다는 것은 곧 내가 좋아한다는 이유 때문에 응원하는 거예요.

남의 자식 응원하지 않습니다. 내 자식 응원하는 이유가 내 소유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에 그 자식을 응원하는 거예요. 인간은 내놓을 마음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를 포기할 의지는 전혀 없어요. 설교 다시 합니다만 사도는 이 세상에 있을 수가 없는 대상을 향하여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내 말을 알아들을 인물은 이 세상에 없는 겁니다. 그러면 사도의 말은 헛말이 되지 않느냐? 사도는 이 말이 완전히 헛말이 되고 아무짝에도 소용없이 되는 것을 충분히 각오하고 있습니다. ‘못 알아들으면 할 수 없지 뭐.’ 이게 사도행전 마지막에 나오는 사도바울의 태도에요. 너희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내가 이미 알고 전한다는 겁니다.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인물인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해서 내가 전한다는 거예요. 어쨌든지 저쨌든지간에 내 힘으로, 내 지식으로, 내 능력으로 천국 간다는 소리는 사도바울 앞에서는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 것은 교회 가면 통하지요. 교회가면 옹호 받을 거예요.

그러면 사도가, 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라고 한 것, 그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면서 피 한바가지 어깨에 짊어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아니잖아요. 그 피가 발생되는 현장을 주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만들어내시는 겁니다. 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말은, 그 피가 발생되는 현장에서 “인간들아, 너희도 한 몫을 하라.”하는 거예요.

예수님의 피 흘림이 있는 거기에 인간들은 어떤 것으로 거기에 뛰어드느냐 하면, 인간은 인간 나름대로 어떤 의도가 있어요. 그 의도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에 나옵니다. 그걸 간추려서 하면 이 이야기에요. 인간들에게는 이미 정치적의도가 있었고 그 정치적 의도를 통해서 종교적인 구원에 이르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다.

정치라는 것은 가정으로서 미처 보호받지 못하는 그것을 더 큰 힘으로 보호받기 위해서 만든 것이 국가라는 겁니다. 가정끼리 점잖게 살면 아무 탈이 없다고 생각하지요. 그런데 그 가정에 도둑이 와 보세요. 누가 잡아줍니까? 경찰이 잡아줘야 할 것 아닙니까? 경찰은 소속이 어디에요? 국가소속이거든요.

사람들은 자기가 잘날 때는 국가도 필요 없어요. 아쉬우면 미국으로 이민 가면 그만이니까요. 인간들은 뭔가 자체적으로 해결할 것은 자체적으로 해결해요. 하지만 이웃과의 관계가 있잖아요. 저쪽에서 내 돈을 사기 치면 사기당한 내 돈을 받아내야 되지 않습니까? 그러면 법원에 고소해야 되지요.

법원공무원들은 국가로부터 월급 받는 사람들이에요. 그 사람들은 사람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기능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파키스탄이나 네팔에서 우리나라에 일하러 왔다. 우리나라 말도 잘 못한다. 재판해봐야 소용없어요. 우리나라 시민권이 없기 때문에 법적으로 보호를 못 받는 겁니다. ‘더러워서 빨리 한국 사람이 되어야지.’ 법적으로 한국 사람이 될 때 비로소 보호를 받을 수가 있는 겁니다. 최저생계비도 받을 수 있고.

국가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한 최고의 안전망이 국가에요. 그런데 살아생전에는 국가가 필요하지만 죽고 나서 천국 보내고 지옥 보내고 하는 것은 국가도 못하는 거거든요. 그것은 누가 하느냐? 하나님이 하시는 거예요. 여호와 하나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살아 있을 때는 국가의 정치에요. 정치적 의도를 갖고 인간이 있어요. 제발 좋은 대통령이 나와서 우리 경제 좀 살려줬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하는 일이 나를 경제적으로 잘 먹고 잘살게 해주고, 잘 먹고 잘살면 우리가정은 행복해진다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 국가의 할 일은 그것이고 또 하나, 교회가 할 일은 하나님한테 잘 이야기해서 내가 죽더라도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대신 기도해주고, 헌금은 드릴 테니까 내가 복 받도록, 천국에 가서 살 수 있도록, 죄용서 받도록 교회가 좀 해달라는 거예요. 이게 인간이 할 수 있는 종교적의도와 정치적의도인데 이 가운데 누가 놓여 있느냐 하면, 내가 놓여 있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서 잘 먹고 잘살고, 내가 죽어서 천당 가는 것, 이 두 가지, 종교적의도와 정치적 의도를 예수님이 오셔서 쭉쭉 뽑아내지요. 약을 올리는 겁니다. “네가 평소에 어떤 마음가짐으로 사는데?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지?” 이렇게 쭉쭉 그들의 본색을 다 끄집어내요.

예를 들면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도 간음죄다. 이렇게 나오니까 그 이야기를 듣던 바리새인과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죽어서 천국을 가야되는데 죽어서 천국에 가려면 종교적인 의미에서 자기가 의로워야 되거든요. 자기가 의롭기 위해서는 “모세 말은, 그거 뭐 이혼증서 써주면 된다던데?”라고 자기의 속마음을 예수님의 유인책에 걸려서 다 내놓는 거예요.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지키면 복 준다 하던데?” 하니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맹세하지 마.”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면 된다던데?” “아니. 맹세하지 마.” 그쪽에서는 구시렁거리면서 “맹세한대로 지켰더니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이런 간증거리가 쪽쪽 뽑혀 나오는 겁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이 낯선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교회들이 하는 일이에요. 교회들이 하는 일이 아니고 교회오기 전에 이미 가정에서 그런 사고방식으로 자기 가족들을 건사한 겁니다. “네가 착하게 살아야 된다. 네가 착하게 안 살면 하나님께 벌을 받는다.” “엄마, 나 착하게 살았어.” “그래. 그것이 너의 의로움이야. 네가 의로우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셔서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돼.”

산타가 오기 전까지는 절대로 울면 안돼요. 선물이 없어요. 울면 나쁜 짓이고 안 울면 착한 짓이에요. 인간세계에서는, 내가 잘되기 위해서는 선을 행해야 되고, 내가 악을 행사하면 인생이 망가진다. 이게 인간들이 정해놓은 선과 악이요 참과 거짓이에요.

그러나 하나님은 숨겨진 것과 노출된 것, 숨겨진 그것이 노출된 것이 유일한 의고, 나머지 인간들이 했던 모든 것은 예수님을 죽게 만드는 아주 절묘한, 인간들이 미처 몰랐던, ‘아, 사는 것이 악이구나. 악으로서 살았구나.’ 악에 받쳐서 산다고 했지요. ‘악으로서 사는구나.’

내가 살겠다고 버티는 그 버팀 자체가 살 이유도 없는 것을 가지고 억지를 부리는 거예요. 그 두 진영에 있던 노골적인 본성, 정치적 의도, ‘나 잘되어야 되겠다.’ 그리고 종교적의도, ‘나 천당 가야 되겠다.’ 하는 이 의도와 진짜 하나님의 뜻과의 만남의 장에서 삐져나온 것, 흘러나온 것이 뭐냐 하면, 피,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사함을 얻는다는 거예요.

내가 피를 믿음으로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너는 그 피에 가담할 때 제 3자로, 구경꾼으로 관찰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피 생산에 네가 뛰어들어라. 네 종교적 의도와 정치적의도 자체도 예수님에 대한 모욕이고 무시와 멸시의 요소가 있음의 그 속에 뛰어드는 겁니다.

뛰어들면 나오는 것이 뭐냐? 피로 말미암아. 드디어 제대로 된 피가 나오는 겁니다. 말씀 다시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 피를 따로 만들어서 어깨에 메고 온 것이 아니에요. 이 땅에서 피를 만들어내고 그 만들어낸 그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 거예요. 인간이 드리는 헌금과 기도와 전도, 이런 것은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런 것 받고 애들 빙그르르 돌리는 것 하지 않습니다. 주께서 잡는 것은 곧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이에요. 교회도 필요 없어요. 피로 말미암아. 그러니 그 피 자체의 능력이 뭐냐 하면, 오라는 거예요. “그냥 네 하던 본색 그대로 나에게 오라. 네 고집 때문에 내가 못살겠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통보해줄게."

세금 내면 영수증 주잖아요. 우리가 살아가면 주께서 영수증 주는데 피라는 이름으로 영수증 되돌려주는 겁니다. 네 살고자 하는 고집 때문에 내가 피를 흘렸다는 것을 영수증으로 되돌려주는 거예요. 그 피로 말미암아, 그 피를 쥐고 있음으로 말미암아 네가 죄사함을 얻는 거예요.

나는 그 가운데 완전히 쪼다가 되는 겁니다. 인간은 아무도 사랑한 적 없고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응원하기 때문에 아무도 사랑한 적 없어요. 뭔가 도와준 적도 없고 헌금 한 적도 없어요. 우리 교회는 헌금한 것도 되돌려달라는 교회입니다. 맞잖아요. 헌금해놓고 돌려달라는 거예요.

간 본겁니다. 다리 하나 걸친 거예요. 그 교회가 내 소원대로 돌아가면 계속해서 있을 것이고 안 그러면 그냥 빠져나오기 아까워서 낸 돈 돌려 달라는 마음으로 왔던 거예요. 누구한테 준 적이 인간은 없어요. 인간은 뭘 줘도 자기자신에게 투자했지 누구한테 준 적이 없어요. 기도를 해도 누구한테 기도한 적도 없고 자기가 한풀이의 헛소리를 한 거예요.

여차하면 발 뺍니다. 인간은 손해 볼 마음이 전혀 없어요. 퀸이라는 가수가 요새 유명하거든요. <보헤미안 랩소디>라는 영화도 나왔지만 그 그룹의 노래에 사랑이 곧 내 인생이라는 노래가 있어요. 그 노래에 “Bring it back, bring it back” 돌려줘, 돌려줘, 당신 사랑한다고 내 마음이 아팠으니까 우리 이제 헤어지는 마당에 너에게 간 내 사랑을 돌려줘, 라고 하는 거예요.

Bring it back, bring it back, 돌려줘, 돌려줘. 그 가사를 보면 오늘날 교회와 어떻게 그렇게 똑같은가 말이지요. “목사님, 헌금을 내놓고 돌려달라는 그런 뻔뻔스러운 짓을 하겠습니까?”라고 저에게 너무 과도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물론 헌금 내놓고 돌려달라는 소리는 잘 하지 않지요. 아예 안내지요.

손해 볼 짓은 일체 안하겠다는 거예요. 잃어버려도 그다지 큰 손실이 안 나는 조건에서 그걸 계산하고 염두에 두면서 헌금한 거지요. 이게 피로 말미암아, 그 피 묻은 손에 의해서 빙빙 도는 겁니까? 사실은 우리 성도는요, 주님 손에 붙잡혀서 인생사는 것이 어지러워야 돼요. 오늘은 동쪽으로 돌다가 내일은 서쪽으로 돌다가. 주님께서 빙빙 회전목마를 돌리는 거예요.

이게 바로 성도입니다. 성도는 예수님의 피가 흘러들어가는 거예요. 그걸 투석이라 합니다. 주님이 흘린 피가 내 속에 흘러가는 거예요. 그러면 성도는 뭐냐? 백업입니다. 주님의 백업. 정보를 잃지 않기 위해서 따로 저장해두는 겁니다. 교회는 클라우드에요.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구름과도 같은 어떤 공간.

성도 안에 그리스도의피가 흘러가게 할 때 비로소 성도는 부활의 군, 부활군(群), 부활집단에 속하게 되는 겁니다. 사적인 부활을 제가 언급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군(群)이에요. 주님께서 예수님의 피를 언급할 때 어떤 관점으로 보는지? 아빠가 애 손 붙잡고 빙빙 돌 때 아빠의 카메라가 있다면 그 애를 어떤 식으로 보고 손잡고 빙빙 돌리는지 5장 14절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에베소서 5장 14절에서 우리를 잠자는 자, 죽은 자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은 성경을 안보는 겁니다. 성경자체가 우리를 죽은자로 간주하기 때문에 우리 쪽에서 성경이 싫어서 아예 안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내 부모 살리고, 내 친구 살리고, 내 회사 살리고, 내 국가 살리고, 내 가정을 살리는데 에베소서 5장 14절 같은 것은 아무 소용도 없고 희망도 없거든요. 어떤 즐거움을 주지를 못하거든요. 사람 자체를 개무시하는데 어떻게 이걸 들여다보고 은혜를 받는다고 할 수 있겠어요? 이 성경말씀이 싫은 거예요.

우리보고 ‘잠자는 자’ 죽은자라는 규정 자체가 싫은 거예요. 내 솜씨를 발휘하고 싶지 솜씨 발휘하든 말든 너는 이미 죽었어, 라는 그 뉘앙스자체가 우리는 싫은 겁니다. 살아도 소용없다는 소리가 듣기 싫은 거예요. 맨날 bring it back, 돌려줘. “하나님, 돌려주세요. 저의 지나간 인생, 망가진 인생 보상해주세요.”

맨날 돌려달라는 사고방식이에요. 돌려주면 어디에 모이겠어요? ‘나’라는 안에 모이겠지요. 인간은 삼키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자기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투석을 시작합니다. 더러운 피가, 아담의 피가 흐르고 있지요. 돌려줘, 라고 무장되어 있는 피. 항상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는, 오늘의 손실과 이익의 균형을 맞추면서 잠을 잡니다.

그러니 이런 지독한 환자의 어디를 손을 봐야 합니까? 성경에서는 죽었다고 되어 있는데 본인은 안 죽었다고 우기니 어떻게 하면 좋겠어요? 시편 30편 9절에 보면, “내가 무덤에 내려갈 때에 나의 피가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하도 인간들이 유익을 따지니까 주님께서 “좋다. 유익 한번 따져보자. 네가 살아가는 것이 ‘오늘 얼마나 이익이 있고 얼마나 손실을 봤는지 그런 것을 따진다면 좋다. 따져보자.”

소위 청춘을 뭐라고 합니까? 피끓는 청춘이라고 하지요.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자기 피를 자기가 간직하기 위해서 살아가요. 피가 흐르는 한 자기는 살아 있다고 큰소리치는 겁니다. 그래서 피가 조금만 나와도 아까워 죽잖아요. 그 피, 내 피 계속 흐르도록 하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받았던 모든 교육과 훈련은 내 피가 내 안에서 계속 돌게 만드는데 필요한 교육과 훈련들이에요.

피가 돌게 하려면 양식이 있어야 되고, 양식 사려면 돈이 있어야 되고, 돈이 있으려면 그만한 기술이 있어야 되고, 교육해서, 기술 배워서, 돈 벌어서, 그것 가지고 양식 먹어서, 그래서 계속 내 피가 내 안에서 돌게 하겠다, 라는 것이 우리의 일관된 겁니다. 그런데 성경 시편 30편 9절에는 그 피가 무슨 너한테 무슨 이익이 되느냐,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겁니다. 무덤에 내려가는데.

우리는 말합니다. “성경은 너무 극단적이야.” 예수님의 피 흘림이 극단의 극단입니다. “하나님? 하나님 보고 싶어? 아나 이거야.” 하고 피 흘린 거예요. 하나님이 오셔서 이 땅에서. 그것도 그냥 자살한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해서 피 흘렸습니다. “이래도 너하고 나하고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느냐? 이래도 내가 있는 세계, 하늘나라에 올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는 겁니다. 인간은 갈 수 없는 세계가 천국입니다. 넘볼 것을 넘봐야지요. 못갑니다. 주님께서는 죽은 자를 가져옵니다. 죽은자를 가져와서 왜 죽었는가를 계속해서 들춰내지요. 들춰내면서 무슨 작업을 하느냐 하면, 자기 피를 자기 백성의 피에 갈아 넣기를 하는 거예요. 투석하는 거예요.

투석하는 방법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의 잠을 자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추궁하는 식으로 투석을 하는 겁니다. 그 투석방법에 동원하는 것이 율법이에요. 하나님의 법입니다. 냉혹한 법이에요. 차가운 법입니다. 여러분이 구약성경을 보면 나오지요. 언제 적에 봤나 싶지만 보면 나와요.

이거 하면 죽이라. 저거 하면 죽이라. 신명기, 출애굽기, 민수기, 레위기에 보면 온통 하는 이야기가 뭐냐? 이거 건드리면 죽는다. 저것 건드리면 죽는다. 뭔가 부정한 것을 만나면 너는 죽는다. 죽는다는 이야기밖에 안 해요. 왜냐하면 인간이 매일 같이 살고자, 살고자, 살고자 하기 때문에 그래요.

끊임없이 살고자 하는 것이 인간이 자기를 응원하는 방법이고 아침마다 자기를 돋우는 방법이에요. 뉴질랜드 원주민이 마오리족이거든요. 제가 그 마오리족의 춤을 영상으로 봤는데 볼 때마다 못마땅해요. 마오리족은 귀한 손님이 왔을 때 춤으로 영접한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춤추는 모습이 어떤 모습이냐? “우! 우!” 아주 위협적이에요. 웃통 다 벗고 “우! 우!” 이것은 사람을 겁주는 것인지 환영을 하는 것인지 분간이 안돼요. 마오리족이 그 춤을 왜 추는가 하니까 인간의 기를 세운다는 거예요. 우, 우, 하면서.

우리 인간이 태어나서 매일같이 아침마다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오늘도 자기가 자기를 기세우기 하는 거예요. 우! 하면 된다. 우! 오늘도 살면 살 수 있다. 우! 우! 그 짓 하고 살아온 겁니다. 그런데 그 살고자 하는 그 의도 속에다 주님께서 율법을 계속 집어넣어요. 이러면 죽는다. 이러면 저주받는다. 온 율법을 다 지켜도 그 중 하나를 어기면 다 어긴 것이 된다.

폭탄이 심지 부분이 따로 있고 나머지 심지 아닌 부분이 대부분인데 율법이라는 이 폭탄은요, 심지 아닌 부분이 없어요. 밑이고 옆이고 위고 어디를 건드려도 나머지까지 다 폭발해서 나를 죽게 만드는 것이 율법입니다. 주님은 또 율법을 스스로 만들어요. 산상설교를 통해서.

산상설교를 통해서 율법을 만들어서 줘버립니다. 어떤 인간도 너는 살아갈 가치가 전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해요. 그래서 수요일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여러분이 기적이라는 것, 압도적인 기적을 자꾸 원하지 마세요. 진정한 기적은 뭐냐? 내가 여기 있다는 사실이 기적입니다. 없어도 되는 존재잖아요.

그런 것을 한 번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돈이 집에 없다. 그런데 돈이 생겼다. 와, 기적이다. 그러면 기적 좀 더 써보세요.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세요. 돈이 없는데 생긴 것이 기적이다. 말 안 듣던 애가 말을 잘 듣는다. 기적이다. 좋아요. 그것도 기적이라 칩시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 보세요. 좀 더.

내가 뭐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 나 자신이 있다는 것이 기적이에요. 없어도 되는데 이 땅에 태어나서 뭐가 있니 없니, 라고 생각하는 이런 소리를 내가 할 권한도 없고, 권리도 없는데 내가 있다는 그 자체가 기적이에요. 없어도 되는 것이 기본이라면 이걸 갖다 버려야 돼요. 갖다 버려도 괜찮아요.

주님께서 만든 것 그냥 갖다 버리지 않도록 하십니다. 갖다 버리는 것은 주님의 소관인데 어떻게 갖다 버리는가? 에스겔 37장에 보면 이렇게 갖다 버립니다. 4절에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찌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공동묘지에 가게 합니다. 노출된 그 시신들은 이미 뼈들이 되었어요. 그것도 이미 땡볕에 바짝 마른 뼈들이었습니다.

곧 흙이 될 거예요. 그 뼈들의 집합소에 가서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질문합니다. 에스겔아, 이게 뭐냐고 묻는 것이 아니에요. 그야 뼈지요. 그걸 묻는 것이 아니고 “이 뼈들이 살겠느냐?” 인간들은 내가 있다는 그 자체에서 기적이 멈춰버립니다. 내가 없었는데 있다. 이게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기적의 전부에요.

그러나 주님의 기적은 거기서 더 나갑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니에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너도 뼈라고 생각한다면, 이 뼈들이 살겠느냐고 묻는 것은, “인자야, 네가 천국 가겠느냐?”고 묻는 것과 동일한 질문이에요.

에스겔보고 그 뼈들을 목격하게 한 거예요. 우리 어머니 얼마 전에 돌아가셨을 때 파티마병원에서 장례 치렀거든요. 이것은 가상입니다. 실제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입관예배 한다고 식구들이 죽 서 있는데 그 때 주님 오셔서 “잠시 관의 문을 열겠습니다.” 하고 관 뚜껑을 열었어요. “이 고인이 살겠느냐”고 누구에게 질문한다면 우리로서는 답변할 것이 없어요.

왜냐하면 그 살게 하는 방법을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누가 살리겠느냐를 질문한 것이 아니고 이 고인이 살겠느냐고 질문하면 답변이 없다니까요. 왜냐? 우리가 아는 것은 살아 있는 나를 어떻게 더 살려볼까, 거기서 스톱이 돼요. 거기서 멈춰야 돼요. 어떻게 살릴 것인가 하는 것은 우리가 손댈 소관이 아닙니다. 내 소관이 아니에요.

사람이 내 소관이 아닐 경우에 우리는 모른다고 해야 돼요. 아는 것이 없어요.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인간은 자기 무지로 죽습니다. 아는 것만 알아요. 아는 것만 안다는 것이 변명일 수 있지만 그것은 진리가 아닙니다. 아는 것만 안다는 것은 인간은 곧 모르겠다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는 질문, 이 성경에 담겨 있는 내용은 우리가 모르는 것만 족족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만 들이댑니다. 그러면 우리는 삐지지요. 내가 아는 범위에서 나는 착합니다, 의롭습니다, 이 의로움 가지고 천국 간다고 자부합니다, 라고 한다면 “너는 네 한계를 몰라. 네가 모르기 때문에 네 의로서 천당 간다고 생각한 그것이 너의 착각이었어. 네가 예수 믿는다고?”

네가 아는 예수는 네가 알고 있는 범위 내에서의 예수지요. 예수님은 네가 안다는 그 범위 밖에 계시는 겁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이 말씀을 하시는 이유는, “이제부터는 네가 알고, 할 수 있는 것을 내가 탈취하고, 그걸 제거하고, 거부하고, 네가 할 수 없고, 네가 모르는 것을 내가 너에게 해 낼게.”

그게 바로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 내용이에요. 그 내용은 우리가 모릅니다. 신학을 하고 아무리 해도 피로 말미암아 왜 죄사함을 얻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어요. 모르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 겁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현실이에요. 모르는 것은 비현실입니다. 비현실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비현실적 존재가 되면서 우리는 주님의 비현실적 존재로 움직이는 하나의 작품이고 백업, 주님의 일의 정보가 보관되어 있는 존재가 되는 겁니다.

이런 성도는요. 우리가 미쳤다는 말 가지고는 모자라요. 미친 정도가 아닙니다. 내가 봐도 내가 이상해요. 정말 이상해요. 이럴 수는 없습니다, 정말. 나도 한똑똑이 하고 한착함 하는데 그게 아무짝에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그 많은 신학도, 그 많은 성경보기도 소용없다는 거예요. 새로 지음 받지 아니하면 이 사실에 공감할 수 없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얻는다는 논리가 나오는 이유는 예수님마저 율법 속에 들어왔거든요. 율법에 보면 율법의 완성이 피흘림에 있어요.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율법 속에 들어왔고, 그 율법의 완성이 어린 양의 피, 제사로 완성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피 흘림으로서 모든 율법을 다 이루신 거예요. 그 율법 속에 자기 택한 백성을 집어넣어요. 예수님이 율법 속에 들어갈 때는 억울한 분으로, 희생양으로 들어가지만 자기백성,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인간이 율법 속에 들어갈 때는 저주받아 마땅한, 그러니까 맨 날 잘난 척만 해요.

맨 날 잘난 체 하고, 버티기만 하고, 나는 이것 없이는 못산다, 나는 그래도 이만큼 남보다 착하다, 남보다 조신하게 살아간다, 이런 율법의 저주받을 짓거리만 하면서 같이 율법에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주님이 흘리신 피는 희생의 양이기 때문에, 세상 죄를 짊어지는 어린양이기 때문에 뭐가 필요하냐 하면, 희생의 양의 효과를 누려야 될 대상자가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그 대상자로 하여금 율법 속에 들어와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저주받아 마땅한 인간이라는 것을 그들만 인지하도록, 그들만은 늘 이것을 분명하게 절감할 수 있도록 투석이 계속 되는 거예요. 우리 속에 살고자 하는 그것이 계속해서 저주를 유발할 수밖에 없는 요소라는 것을 성경말씀과 율법을 통해서 계속 되뇌어 줍니다.

“교회 다닌다고요? 교회 다니면 지옥 가겠네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못 알아듣는 거예요. 교회 다니는데 왜 지옥을 가요? “예수 믿습니다.” “예수 믿으면 지옥 가겠네요.” 이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는 거예요. 내가 예수 믿음으로가 아니라 ‘피로 말미암아’라니까요.

여러분이 말귀를 좀 잘 알아들으셔야 돼요. 잘 듣고 계시는데 제가 너무 과도하게 해서 미안합니다. ‘피로 말미암아’라는 것은 내 손을 떠났다는 거예요. 처음부터 설교 다시 합시다. 엄마 아빠가 애 손잡고 일방적으로 빙빙 돌리는 겁니다. 그 돌리는 관계가 ‘피로 말미암아’ 돌려요. 다른 것 필요 없어요. 헌금 기도 그런 것 필요 없습니다. 피로 말미암아 빙빙 돌리는 거예요.

놔 버리면 원심력에 의해서 튕겨 나가지요. 애는 손 놓으면 그만 튕겨나가는 것도 모르고 재미있다고 까르르르, 까르르르, 더 돌려달라고 하지요. 재미있으니까. 우리 인생 재미있게 삽시다. 재밌게 살려면 예수 피 말고 다 무의미하게 봅시다.

그런데 반대로 인생 살면서 피 빼놓고는 다 이야기하잖아요. 왜? 자기 잘났으니까. 나 잘난 것만 이야기하잖아요. 손 놔버립니다. 지옥까지 떨어지지요. 여러분, 그동안 화냈고, 분노했고, 그리고 행복했다고, 즐거웠다고 하는 그 모든 것이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 내가 경험한 범위 내에서 조작된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조작된 것까지 버리지 아니하고 우리 가운데 계속 투석을 합니다. 외부에서 집어넣는 피로 말미암아 내 내부의 죄, 그 피로 말미암아 내가 구원받았다는 종교적인 의식, 주님께서는 그 종교적인 의식에 속아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것마저도 죄라면 네가 어떻게 할래?”

우리는 이렇게 답변하면 돼요. “어차피 죄 외에는 별로 내놓을 것이 없기에 주께서 알아서 쓰시옵소서.” 그게 바로 주님 앞에 손목 붙잡힌 사람의 태도입니다. 피를 고백하든 십자가를 고백하든 그것마저 죄라는 것을 너무나 가볍게 여기고, 그야말로 이것은 내가 생각해도 미친 정도를 넘어서, 이것은 미친 것도 아니에요. 미쳤다고 하는 그 표현으로 다 표현을 못한다니까요.

미친 것이 아니고 그저 이상한 거예요. 어떻게 그걸 알아요? 피로 말미암아 죄사함이 내 안에서 생산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겠습니까? 다만 성령을 통해서 이 본문에 동의할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버지, 저희들 뭣도 모르면서 안다고 여겼습니다. 우리가 대체 알 필요도 없는 존재인 것을, 그것을 몰랐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될 필요도 없는 존재인 것을 몰랐습니다. 진정한 기적과 진정한 축복은 주님에 의해서 다루어지는 우리 자신인 것을 이제는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