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254강, 255강) 자살, 행복 181016 본문
녹취:이미아 254강-YouTube강의(자살)20181016-이 근호 목사
제 254강, 제목은 ‘자살’입니다. 성경에 자살하면 제일 유명한 사람이 등장하죠. 가룟 유다죠. 그러면 구약에는 없었는가? 그보다 좀 더 유명하지만 구약에도 엄연히 자살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도 자살시도를 하고픈 사람들이 여럿이 나오죠. 모세도 그렇고 엘리야도 그렇고. 예레미야도 그렇고.
근데 본격적으로 인간이 자살을 분명히 했던 사람은 역대상 10장 4절에 나오는 사울 왕입니다. 그 사람의 최후에 대해서 나와 있어요. 사울 왕을 보통 인간들하고 우리가 달리 봐야 합니다. 사울 왕은 본인이 왕이 되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 아니에요. 하나님에 의해서 왕이 된 사람이거든요.
그리고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서 왕이 될 때, 누가 요청한 사람들이 있죠. 기존의 이스라엘 사람들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가 왕 되기를 거부해서 사무엘에게 요청해서 우리도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울이라는 그 존재위상에 뭐가 이렇게 함축되어 있는가 하면은 우리는 이스라엘의 특이성을 우리가 못 받아들이겠다는 내용이 들어있어요.
이스라엘의 특이성이라는 것은 이스라엘과 다른 민족의 차이점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 말을 아주 쉽게 이야기하면, “나는 예수 믿고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이것은 바로 오늘날 교회가 되겠죠. 성도가 되겠죠. 나는 예수 믿고 살겠다고 하는 교인이 되죠. 성도가 아니고 교인이에요.
자, 사람들이 어느 쪽이 자기 장래가 보장된다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내가 예수님 믿었으니까 구원받겠다고 하는 그것보다도, 교회 등록하고 교회 다녔으니까 더 구원의 보장이 확고하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혼자 예수 믿었을 때에 평소의 인간의 버릇은 뭐냐, 남들이 인정해줘야 그 다음에 스스로 자기가 확신을 갖거든요.
그런데 혼자 예수를 믿어버리면, 혼자 예수를 믿겠다고 우겨버리면 남들이 인정을 안 해주면 흔들리게 마련입니다. 혹시 나 혼자 착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그런 흔들림이 있겠죠. 그런데 교회 다니면서 예수 믿게 된다면 주변사람들이 우와~ 하고 인정을 해줄 때 본인이 안심이 되겠죠. 그 인간의 심리적인 그러한 방식이 구약 이스라엘에도 똑같이 있었던 겁니다.
다른 이방민족은 그들에게 왕이 있어서, 이방민족의 왕이란 신의 아들들이에요. 하나님이 있고, 이방민족도 하나님 믿으니까, 하나님 믿고 자기 민족을 하나님이 책임을 지는데, 그 증거가 뭐냐 인간의 왕을 세움으로서, 그 왕이 신의 아들의 됨으로서 그들은 안심 놓고 우리 민족은 만유의 신이 돌봐준다는 의식이 강렬했던 겁니다.
바로 이스라엘이 그들 다른 민족과의 특이한 차이점이 있어야 돼요. 인간의 왕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친히 지켜준다는 것이 돼야 돼요. 근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걸 그다지 좋게 생각하지 않았던 겁니다. 우리도 다른 민족처럼 왕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이 하나님에게 기도하니까, 하나님께서 응답하기를 “왕을 세워줘라. 그리고 그 왕의 끝이 어떻게 끝나는지를 다 같이 한번 지켜보자.”라는 취지로 왕을 세운 거예요.
그 마지막 취지가 역대상 10장 4절에 있으니까, 제가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블레셋과의 마지막 전쟁 가운데 사울과 요나단이 쫓기고 있는 대목입니다. 3절부터 보면, “사울을 맹렬히 치며 활 쏘는 자가 사울에게 따라 미치매 사울이 그 쏘는 자를 인하여 심히 군급(마음이 급해서)하여” 4절, “자기의 병기 가진 자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찌르라 저 할례 없는 자가 와서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 그러나 그 병기 가진 자가 심히 두려워하여 즐겨 행치 아니하매 사울이 자기 칼을 취하고 그 위에 엎드러지니” 5절, “병기 가진 자가 사울의 죽음을 보고 자기도 칼에 엎드러져 죽으니라” 6절, “이와 같이 사울과 그 세 아들과 그 온 집이 함께 죽으니라” 이렇게 되어 있죠.
사울이 옆에 있는 병기 가진 자보고 칼을 빼어 나를 치라고 했습니다. 간접적인 살인이죠. 그 살인이 원활치 않으니까 어떻게 했느냐 하면 그 칼 위에 자기 몸을 덮쳐서 스스로 칼에 찔려 자살을 했어요. 근데 자살을 할 때 이유가 뭐냐 하면 “저 할례 없는 자가 나를 욕되게 할까 두려워하노라”입니다.
그러면 자살의 원인은 뭐냐 하면 자기는 이스라엘의 왕이라는 겁니다. 왕의 자존심과 체면이 계속되고 있죠. 그런데 저 할례 없는 이방민족이 나를 쳐서 소위 할례 있는 나라, 하나님 믿는 민족의 그 우두머리 왕이 맥없이 저들한테 처참하게 당했다는 이것을 자기는 왕으로서 욕되게, 체면구기는 일로 여겼던 겁니다.
그래서 이 사울 왕이 자살하는 이유가 남의 손에 죽느니 차라리 내 손에 내가 알아서 내 의지와 결단으로 하는 이것이 내 입장에서는 덜 욕되는 일이라고 생각한 거예요. 그러면 자살은 뭐냐 하면 자살을 통해서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인간은 죽을 때까지 자신의 가치와 자신의 명예와 자기의 위신을 죽는 순간까지라도 포기 못하겠다는 것이 자살로 이어진 겁니다.
그러면 이 땅에서 아직 죽지 않았지만 평소에 길을 가면서, 일을 하면서, 직장생활 하면서, 집에서 주부로서, 자기의 위신과 자존심과 가치를 계속 고수한다면 그 사람은 항상 잠재적 자살인이 되는 거예요. 그게 바로 사울 왕을 통해서 하나님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바로 창세기 3장 이후에 죄라는 것은 내 가치를 내가 포기 못하겠다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쏘아대는 그 모든 말씀의 핵심은 하나같이 뭐냐 하면 니는 가치 없다는 거예요. 니는 니 위신과 체면을 보전할 수 있는 어떤 권한도 없다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님은 말합니다. “날 봐라! 나 너희들 손에 처참하게 죽잖아. 봐!” 이게 바로 진리의 길이라는 거예요. 이게. 근데 너희들과 나를 비교해봐라.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이 말입니다.
곧 죽는 마당에도, 어떤 경우에도 나는 욕되게 여길 대상이 아니라는 그것! 그 배후에 누가 그렇게 했겠어요? 자살의 극치는 가룟 유다입니다. 가룟 유다 속에는 악마가 들어있어요. 결국은 가룟 유다가 모든 인류의 대표자입니다. 마귀 들린 자의 마지막 모습은 장렬한 자살, 대범한 자살, 다른 말로 하면 용기 있는 자살, 죽을 때만 그런 게 아니고 살아있을 때도 자신의 가치를 포기 못하겠다는 그 장렬함, 그게 바로 자존심으로 똘똘 묶여져있는 거예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신을 묶고 있는 그 자살동기에서 어떤 인간도 자력으로 헤어날 수가 없습니다. |
255강-YouTube강의(행복)20181016-이 근호 목사
제 255강, 제목은 ‘행복’입니다. 행복하니까 옛날 가수가 불렀던 노래가 생각이 나요. 조경수가 부른 ‘행복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또 한대수의 ‘행복의 나라로’라는 노래도 있거든요. 행복을 제목으로 걸고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우리 인간들이 다 이것을 추구하잖아”라고 노골적으로 제시하는 거죠. “니 인생 행복 할래? 불행 할래?”라고 묻는다면, 묻는 사람이 실없는 사람이 되겠습니다.
행복을 가진 사람을 나와 보라고 그래요. 그것도 오랫동안. 그러면 나는 한평생 행복했다고 우기는 사람들이 아마 10퍼센트 이상 나올 겁니다. 그런데 그들의 거짓말은 어디에서 들통이 나느냐 하면 마지막 죽을 때, 그리고 암에 걸려서 죽었을 때, 아프게 죽을 때 행복하냐 이 말입니다. 행복 하냐, 불행하냐를 인간에게 물을 질문이 아닙니다.
행복했느냐, 불행했느냐 하는 질문은 되는데, 행복 하고 싶어요? 불행하고 싶어요? 하는 질문은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난 것이 지 맘대로, 지 뜻대로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던져진 존재거든요. 그러면 행복과 불행은 어떻게 결정이 되는가? 비교해서 돼요. 비교해서.
아프리카 어느 나라에 한 동네에 차가 한대밖에 없어요. 근데 거기에 현대 중고차를, 덜덜거리는 그 중고차를 겨우 고쳐서 어떤 청년이 그걸 타고 다닌다면 그 청년은 그 동네의 대단한 유지가 되겠죠. 왜냐하면 차가 한대밖에 없기 때문에. 그것도 관용차 한대밖에 없기 때문에. 우리 집에 차가 있다고 한다면, 이거는 뭐 타는 사람이 상대적으로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겠습니까?
여러분 한번 물어볼게요. 에베레스트 산에 아예 안 올라가는 사람이 행복합니까? 올라간 게 행복해요? 해발 8000미터에 그것도 14번. 어느 것이 행복합니까? 아예 안 올라간 게 행복하죠. 근데 8000미터를 14번, 그것도 산소통 없이 올라갔다는 것은 계속해서 사람들이 행복하지 않은 것까지라도 행복을 개발하고 싶은 거예요. 이거는 내가 행복하다는 거리를 지가 스스로 만들어서 상대방 앞에서 “너희들 이거 못하잖아? 이거. 산소통 지고 올라가기도 힘든데 산소통 없이 갔잖아.” 이거 자랑질 하는 겁니다.
아주 더 알기 쉽게 이야기를 할게요. 연못이 있는데 어떤 사람이 산소통 없이 연못에 14번 들어왔다가, 연못 깊이가 50미터인데 50미터 짚고 올라오는 경우를 14번 했다고 칩시다. “대단해요!” 그러죠. 근데 15번째 죽었다면, 그 사람이 그동안 14번 한 걸 가지고 행복할까요? 제가 이야기하는 것은 그거에요. 마지막 죽는 순간에 과연 인간은 행복하냐 이 말입니다. 죽는 순간까지 행복했더라도 죽는 순간에 행복하냐 이 말입니다. 정말 그 죽는 순간에 더 살고 싶지 않은 자신이 있느냐 이 말이죠.
여기에 에피쿠로스학파나 불교에서 여러 가지 이론을 내세워요. 살아있으니까 행복하고, 죽으면 아직 안 죽어봤으니까 행복하고, 몰라도 되니까 행복하고, 이래나 저래나 행복하다는 이게 에피쿠로스학파하고 불교의 이론입니다. 살아있으니까 별소리를 다해요. 막상 죽는 사람에게 그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우리가 살아있다는 자체가 불행입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내가 원치 않는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불행한 거예요. 그래서 인간들은 불행한 것은 어떤 식으로 했느냐, 감추기로 작정했습니다. 자기 불행한 것을. 감출 때 어떻게 하느냐 하면 행복의 강도를 키우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행복과 불행은 원래 그냥 주어진 것인데, 인간은 성질이 급해서, 운명이 주어진 것을 도저히 자존심 상해서 내가 못 기다리겠다는 거예요. 내 손에서 행복과 불행을 만들어내겠다는 겁니다. 그 만들어내겠다는 그 리스트가 5가지가 되는데, 제가 읽어보겠습니다. 누가 행복하냐 하면, 첫째는 당신은 누구로부터 존경받고 있습니까? 체크, 존경받고 있으면 0, 안 받고 있으면 ☓, 누구로부터 존경받고 있습니까? 여러분들은 존경받고 있죠? 팬들 많잖아요? 또 일본까지 가서 존경받으시고.
두 번째 마음 터놓고 자신의 비밀을 다 말할 상대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으면 0, 없으면☓, 지금 두 번째까지 이야기를 했지만 이거는 행복이 아니고 나의 행복이죠. 나의 행복. 나의 행복을 보편화시키는 겁니다. 내가 행복하면 너도 이런 행복을 할 것이라고 보편화시키는 겁니다.
첫 번째는 누구로부터 존경받습니까? 누가 자기를 존중해주고 존경해주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 혹시 있다면 행복하다는 거예요. 마음 터놓고 자기의 비밀을 다 이야기할 수 있는 상대가 있다면 행복하다는 겁니다. 흔히 말하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라는 뜻이에요. 다른 말로 하면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는 거예요. 특히 부부사이에서는 사랑하고 있습니까? 라고 묻는 것은 실례가 되죠. 왜냐하면 서로 사랑 안 하고 있기 때문에. 한 때 사랑했기 때문에.
세 번째가 자기만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게 뭐냐 개성발휘입니다. 니 이거 못하지? 그지? 이런 요리, 음식 맛 못 내잖아? 이런 음식 맛은 나만 낼 수 있어. 신당동 떡볶이 맛은 며느리한테도 안 가르쳐 줘. 왜? 이럴 때 행복하다는 거예요. 나만의 특허, 또는 특화된 것. 천상천하유아독존, 이 세상에서 자기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자기는 행복하다는 거예요.
1번, 2번, 3번 보세요. 세상에! 이기주의도 이런 이기주의가 없어요. 자기밖에 몰라. 쉽게 말해서 나밖에 모를 때 가장 행복하다는 뜻이에요. 따라 올 수 없을 정도로 독보적인 존재가 될 때에 그게 최선의 행복이라는 겁니다. 창세기 3장 그대로에요. 악마의 심성 그대로입니다.
네 번째가 뭐냐, 새로운 일을 배우고 있습니까? 짜장면 집 50년 했다. 지겹다. 그거 때려치우고 택시운전 한다. 이게 새로운 일이에요. 교사 퇴직하고 난 뒤에 이제는 딴일 한다. 파리바케트 빵집 열었다. 이게 행복이라는 겁니다. 지겹다는 거예요. 처음 할 때는 좋았는데.
직장생활 10년 다녀서 승진했다. 과감하게 때려치우고 있는 돈 해서 가족끼리 3년 동안 한 2억 들여서 세계 한 30개국 돌아다니는 것. 200개국 다 돌아다니지 어디서 뭐 30개국 돌아다니는 그것 가지고. 근데 그게 행복이라는 거예요. 애들에게 새로운 것을 경험하게 해준다는 겁니다. 하여튼 핑계를 꼭 갖다 붙여요. 싱가포르에 가서 애들한테 새로운 경험을 해주는 것, 행복하십니까?
첫 번째는 누구로부터 존경받습니까? 두 번째는 맘 터놓고 비밀을 말 할 상대가 있습니까? 사랑하느냐 이 말이죠. 세 번째 자기만의 일, 특화된 독보적인 존재라는 자격증을 갖고 있습니까? 네 번째는 새로운 일을 개척하고 있습니까? 모험가들이 이런 일을 많이 하고 있죠. 조금만 하면 식상하다는 겁니다. 다섯 번째가 자기만을 위한 자유시간이 있습니까? 그러면 행복하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이 모든 것을 여러분들이 하지 않더라도 방문 잠그고 잠시 이것을 상상해보세요. 상상한 한 5분정도는 행복의 극치를 느낄걸요? 그러니까 행복이라는 것은 상상하기 나름이에요. 이 다섯 가지. 물론 방문 잠그고 있는데 밥 먹으라고 부모님이 문 두드리면 곤란하죠. 자기만의 시간을 깨니까. 자기만의 자유시간이 있습니까? 자기만의 상상하는 시간이 있습니까? PC방이 적당할 거 같은데. 노래방이나.
근데 이 행복의 조건에 뭐가 빠졌는가 하면은 죽는 순간이 빠진 거예요. 죽는 순간이. 그렇게 내가 행복하기를 추구했는데, 그 내가, 내 주체가 시름시름 암 세포에 의해서 점령당하다가 결국은 신음과 고통으로 죽을 때, 그 지난날 이런 행복을 얼마나 누렸고 얼마나 상상했습니까?
죽는 그 순간, 숨을 멎는 그 순간에 우리는 다른 세계에 도착됩니다. 심판의 세계입니다. 행복? 애초부터 인간의 행복은 없습니다. 악마가 준 망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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