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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갈라디아서 6:11-13 / 육체의 자랑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6:11-13 / 육체의 자랑

정인순 2018. 10. 14. 14:39

음성               동영상

 

 

갈라디아서 6:11-13     육체의 자랑

 

 

이근호


종교의 시작은, 자기 안에서 ‘신의 법’을 만들려고 하는데 있습니다. 그 ‘신의 법’은 인간이 최종 수행할 수 있다는 수준입니다.


‘신의 법’을 만드는 이유는, 신마저 인간들의 열정에 호응하라는 겁니다. 신은 본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신을 만들어냅니다.


대화의 통로를 인간쪽에서 마련해놓는 것이 마음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이러니 결국 ‘신’이란 인간의 호응에 부응하는 식으로 나타난다는 겁니다.


즉 인간이 신을 부르면, 신은 인간의 부름에 ‘쪼르르’ 달려와야 하는 양상입니다. 물론 이 때, 인간들은 전혀 다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에 나타난 하나님은 그런 신이 아닙니다. 두렵고 무서운 신입니다. 경악스러울 정도입니다. 그동안 인간들 세계에서 대단히 심각하게 여긴 모든 문제나 사건들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이야기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이는 짐승이라도 산에 이르거든 돌로 침을 당하리라 하신 명을 저희가 견디지 못함이라 그 보이는 바가 이렇듯이 무섭기로 모세도 이르되 내가 심히 두렵고 떨린다 하였으나”(히 12:20-21)


즉 참된 하나님 앞에, 인간은 다쳐야 마땅한 존재로 부각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등장하시면 졸지에 인간은 ‘육체’가 됩니다.


쉽게 말해서, 화산분화구가 신의 세계라면 인간의 육체란 그 속에 빠질 때의 결과는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이 뻔합니다.


아무리 마음이 살아있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할지라도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 분화구의 화염이 장차 하늘로부터 떨어진다고 성경에서는 말씀하신 약속입니다.


인간은 한 줌의 재로서 살아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 인간이 할례라는 율법을 붙들고 구원을 받아내겠다는 것이 자신과 하나님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하는 소리입니다.


하나님께서 할례 언약을 주신 이유는, 메시아의 십자가 죽으심의 내용을 ‘할례의식’ 속에 담아내고자 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화산분화구 안에서 인간의 자랑이 무용지물인 것처럼 십자가 앞에서도 역시 인간의 자랑은 무용지물입니다.


 

 육체의 자랑

 

이근호
2018년 10월 21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6;11-13

(6: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6: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6:13)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스스로 자기 몸에 자신이 손을 대겠다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인간으로 스스로 변모 시키겠다는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사도는 지금 성도들에게 이것하라 저것하라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말씀으로 심판하고 있는 겁니다. 즉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옛 것과 새 것 사이의 대비입니다.

“내가 이렇게 이런 실적을 이루었다”라고 여기는 것과 “나는 가만히 있는데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런 일을 하게 하셨다”의 대비입니다. 견줌입니다. 할례 언약을 통해서 유대인들은 전 세계 민족과 자신의 나라와 비교하는 근거가 됩니다. 즉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참 하나님과 관계있는 자는 우리 유대인들 뿐이라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하나님과 연결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는 것은, 우리 유대인들이 이 말씀대로 실천에 옮길 역량이 있다고 하나님쪽에서 인정해서 그러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이런 유대인들에게 예수님이 다가 오시니 유대인들은 또 오해하기를, 예수님 말씀까지 자기네들이 지킬 수 있다고 여깁니다.

예수님의 12제자가 대표적이지요. 하지만 급기에 예수님께서 성전의 무용론을 끄집어낼 때에 유대인들의 참았던 울분은 터지고 말았던 겁니다. 자신들의 고유한 가치와 전통과 중요성을 지켜내기 위해 예수님을 자기네들 눈 앞에서 없앨 수 밖에 없었습니다. 갈라디아서 6:6에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되어있습니다.

이 말씀은, 인간들이 쉬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장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신 말씀입니다. 즉 인간은 본인이 본인을 늘 사기치고 살아가는 겁니다. 자기를 좋게 보는 겁니다. 자신에게 기어이 살려낼 만한 어떠한 가치가 있다고 여깁니다. 추상적이고 하늘에 상상해놓은 관념적인 하나님을 설정해놓았다고 한다면 그 하나님과 자신들이 관계는 자신들이 자신만만한 방식으로 설정할 것이 뻔합니다. 

즉 그 어떤 경우라도 본인들이 아주 지옥에서 탈락할 리는 없는 방식으로 하늘과 땅 사이를 걸쳐놓을 것이 뻔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죽으신 예수님’으로 대비시키십니다. 즉 “너희들이 죽였던 그 분을 하나님이 친히 살리셨다”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나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인간의 고유 가치를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얼마나 반(反)-하나님적인 존재인가를 알리기 위함입니다.

그들의 율법 지킴은 결국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함입니다. 이 의식으로 인하여 그들은 감히 십자가를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는 겁니다. 십자가로 인하여 핍박받는 것은 곧 자신들이 일상을 살아가는 원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들은 늘 자기 자신의 역량이 어디까지 인지를 평생을 두고 수시로 실험합니다.

그러다보니 그런 개인들이 집단인 교회에서 목사는 그런 고객들이 말하고 싶은 것은 대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겁니다. “이렇게 섬기시면 여러분은 복받습니다”라고 말입니다. 그러니 교회가 사기집단인 겁니다. 불교의 사찰과 같고 목사는 무당짓해야 그 자리를 버틸 수가 있습니다.

인간은 행복을 얻기 위해 이 땅에 등장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추구하는 것은 지속적이지 못합니다. 인간은 ‘가눌 수 없는 영혼’입니다. 늘 비틀거립니다. 자기가 어디까지 대단해 질 수 있는 실험에 방해물을 걱정해야 합니다. 즉 자기 인생이 누가 끼어들어 찰싹 달라붙어 안 떨어지는 경우를 말합니다.

마치 살아 있는 낙지가 빨판을 앞장 세워서 나의 기를 빨아먹는 식으로 내 인생에 끼어들 때, 사람들을 이 징그럽고 지긋지긋한 한 이(異)물질을 어떻게든 밀어내려고 애를 씁니다.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은 세상 모든 것이 일단 ‘나’라는 것이 있고 그 ‘나’가 움직인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세상의 관행된 언어습성에서 비롯된 비현실적 의식입니다. 예를 들면, ‘번개가 친다’고 할 때 언어의 주술구조에 익숙한 우리들은 주체로서의 번개가 따로 존재하고 그것이 치는 동작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존재하는 것은 번개의 순수사건으로서의 잠재적 역량들과 그것의 한 조각이 순간적으로 현실화된 하나의 ‘번개침’이라는 사건일 뿐입니다.

번개라는 고정된 실체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번개침의 반복은 가만 속의 실체로서의 번개가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사건의 한 조각, 잠재적 역량으로서의 번개가 허상으로서의 가면들로서 현실화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고정된 실체로서의 ‘나’가 미리 있어서 그것이 공부하고 밥 먹고 사랑하고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하는 나, 밥 먹는 나. 사랑하는 나, 기뻐하는 나, 슬퍼하는 나라는 반복하는 허상으로서의 ‘나’라는 것의 무한한 연속적 변주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즉 십자가를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사랑’이라는 사건을 유발하시고 그 사건 안에 우리 성도를 만들어내신 겁니다. 시작과 끝에 대해서 인간은 모릅니다. 단지 예수님에 의해서 끼어들게 된 것 뿐입니다. 성도는 ‘중간존재’입니다. 그저 사랑하게 되니 사랑할 뿐입니다.

요한복음 20:15-16에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로 알고 가로되 주여 당신이 옮겨 갔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 말로 랍오니여 하니 (이는 선생님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 그녀는 그냥 예수님이 보고 싶어 울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누구를 찾느냐?” 성도는 이것으로 충분합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합니다. 내가 단독적으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목하고 사도가 주목하는 것은 예수님과 성도 사이의 관계입니다. 성도 개인 역량의 대단함이 아닙니다.

이 사랑의 관계를 위해서 주님은 성도는 최적화된 ‘지금의 상태’를 만드신 것입니다. 이 조건으로 충분합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 그 어떤 조건들에게 받아들이십시오.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마저 최적의 조건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우리  자신을 탓하지 말고, 실수를 저주하지 말게 하옵소서. 주님의 사랑의 관계에만 우리가 주목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310강-갈 6장 11-13(육체의 자랑)

1810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갈라디아서 6장 11-13절입니다. 신약성경 309페이지입니다.

갈라디아서 6:11-13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 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사도는 지금 대결구조로 가져갑니다. 어떤 대결구조냐 하면, 인간이 몸으로 할 수 있는 것과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을 대비시킵니다. 그리고 시비 겁니다. 사도는 지금 누구한테 명령을 하는 것이 아니에요. 심판하고 정죄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어떤 누구로부터도, 어떤 인간에게도 개인적인 과제를 안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부지런히 뭔가 열심히 해 왔다는 것, “주여, 이것 받으소서.” 이것을 하나님께서는 굉장히 거북하게 여기시고 그걸 내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나 잘하라는 말이지요. 네가 솜씨 발휘하지 말고, 교회 와서 재롱잔치 하지 말고, 어떤 테크닉, 기술발휘하지 말고, “내가 준 것 있잖아. 내가 준 것.”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인하여 뭔가 달라진 것을 보이라는 말이지요. 뭘 꼼지락하는 그것을 내놓지 말고. 할례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내 몸에 뭘 가하는 거예요. 문신 새기듯이. 내가 나의 몸을 다루는 겁니다. 그러지 말라는 겁니다. 천국 가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주님께서 이 땅에 올 필요 없어요.

그냥 인간보고 “하늘에 하나님이 있다고 상상해라. 너희들 상상 잘하잖아. 상상해라. 상상했지? 그러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그 방식도 너희들이 뽑아내. 너희들이 상상해봐. 잘하잖아. 착하면 복 받고 나쁜 짓 하면 벌 받는 것 잘하지? 그거 해.”

그렇게 해서 추상적인 존재자, 추상적인 개념으로서의 하나님을 설정해놓고 지상에서 자기가 자기채점에 들어갑니다. 평가에 들어가시지요. 자기가 스스로. 나쁜 짓 하면 스스로 자기를 채찍질하고, 좋은 일 하면 우쭐대고.

사도는 이야기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올 필요가 없다는 거예요. 실제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왔을 때 평소에 사람들이 어떤 하나님을 갖고 있는가가 들통 났습니다. 하나님이 이야기하셨다는 그 율법 책을 들여다보다가 이제 예수님께서 이야기하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다 예수님까지 추가합니다. 더 보태요.

그렇게 보태서 평소에 자기가 하나님을 섬길 때의 그 방식을 가지고 그대로 예수님한테 행세를 해요.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이 하는 것을 보고 궁지에 몰아넣지요. 이것까지 할 수 있느냐, 라고 계속 추궁합니다. 나중에 그들이 감당이 안 되는데 감당이 안 된다는 말은 추상적인 하나님 앞에서는 자기가 의롭다고 자부할 수 있었는데 예수님이 쏟아내는 그 율법과 말씀 앞에서는 자기 의로움이 자꾸 삭감이 되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거기서 대책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눈앞에서 사라지게 하는 겁니다. 없애는 거예요. 이것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다 그래버려요. 모든 인간이 거기에 합세했다는 것은 모든 인간이 전부 다 똑같은 본질, 동질성을 갖고 있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사도에게 찾아와서 사도가 예수님을 통해서 알았던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면서 대결구조에 나서는데 그 대결구조가 뭐냐? 동일한 것이 어떻게 동일한 것으로 변화 되었는가, 그걸 내놓으라고 묻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뭐로 보느냐? 옛것으로 규정해버려요. 옛것으로.

옛것으로 규정하고 예수님이 제공하는 것을 새것으로 규정해버립니다. 옛것은 아무리해도 구닥다리밖에 안돼요. 옛것밖에 안돼요. 술이나 개선정도밖에 안돼요. 차를 정비소에 맡기는 정도밖에 안 된다 그 말이지요. 새로운 차는 아니에요.

사도가 이야기하는 것은 뭐냐 하면, 옛것 가지고 절대로 도약될 수 없는 영역, 그런 것에서부터 새로 주어진 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새 차, 새로 뽑은 거지요, 새로운 것, 사도는 그 두 개를 가지고 대비시킵니다. 옛것은 대표가 뭐냐 하면, 할례 받은 것으로 봐요.

여기서 할례 받았다는 것은 할례의 율법만 지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를 변화시킬 수 있는 모든 시도를 할례언약이라는 대표율법을 앞세워서 뒤에 줄줄이 다 꿰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스라엘 천 사오백년 역사가 할례 받았다는 것을 가지고 다른 민족과의 차별화를 시켜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할례를 행하라고해서 했기 때문에 다음부터 우리 민족이 하나님에 대해서 독점적이라는 사실. 이것은 누구의 하나님이 아니라 오직 택하신 자인 우리 이스라엘만을 위한 하나님이다. 따라서 그 하나님과 우리사이는 거미줄처럼 율법이라는 것으로 연결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줬다는 것은 우리가 율법 지킬만한 역량이 있다는 것을 아울러 언급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생각한 거예요.

법을 줬을 때는 실효성 있는 실적을 남길 것을 하나님께서 기대하고 나에게 율법을 줬다는 겁니다. 그만큼 우리에게는 역량이 있다는 거예요. 역량이 있는 것을 썩힐 수는 없지 않습니까? 해보는 거예요. 해보는데 어떻게 하느냐? 자기도 알아요. 완벽하게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요.

완벽하게 할 수는 없지만 최선의 노력은 할 수 있다고 보는 거예요. 이 최선의 노력을 하겠다고 나서는 그 마음가짐, 그 의식자체가 하나님께서 귀엽게 보시고 예쁘게 보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속성이고 그것이 공통점이라고 그들은 생각한 겁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그들을 상대로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준 것은 여러분의 마음이 썩었다는 것을 이야기해준 거라는 거예요. 다르지요? 다르지요. 네 주제파악을 그렇게 못하느냐는 거예요. 아무도 옆에서 자기 이야기 안 해주니까 자기가 잘난 줄 알아요. 자기가 우아한 인생을 사는 줄로 알고 있어요.

죄란 비현실이 아닙니다. 죄란 인생을 비틀거리는 영혼으로 만들어요. 저는 그걸 가눌 수 없는 영혼이라 하는데요.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늘 안정성을 훼손시킵니다. 불안불안해요. 인생이라 하는 것, 누가 인생이 뭐냐고 묻거든 간단하게 이야기하면 돼요. 내 것 지키는 것. 그게 인생입니다. 내 것 지키는 것이 인생이에요.

그 다음에 “왜 지킵니까?”라고 물으면 “가치 있거든요.”라고 답변해요. “내 것을 왜 지키느냐?” “나는 가치 있거든.” “어디에 근거해서 가치 있는데?” “그것은 묻지 마.” 내가 그렇다면 그렇다는 겁니다. 그 다음부터는 대화가 끊어집니다. 그래서 인간은 평생을 살면서 하는 짓이 뭐냐 하면, 내가 과연 어느 정도까지 지킬만한 가치가 있는지 실험에 나섭니다.

계속 실습하고 실험하는 겁니다. 본인이 괜찮은 존재라는 것은 내 마음이 그렇게 생각한 것이니까 실전에서 그걸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거기서 나오는 이야기가 인생 1막 나오고 인생 2막 나오고, 인생 이모작이니 그런 소리가 나오는 겁니다. 뭐하는 거예요? 실험해보겠다는 거예요. 뭘 위한 실험인데? 나 잘났음을 실험해 보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실험의 결과는 내가 내 것을 어느 레벨까지 지킬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 늘 이것은 불안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궁극적으로 나만 챙기는데, 그것이 확실하고 옳다는 것을 지키고 싶어서 아까 이야기한 그 추상적인 하나님 앞에, 이 정도로 나를 가치 있게 지켰으니까, 교회 나올 정도로 지켰으면 보통 잘 지킨 것이 아니잖아요, 하나님이 내가 죽으면 천당 보내줄 것이라고 자기들끼리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6장 7절에 보면, 스스로 속이지 말라고 했지요. 사도가 이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은 매일같이 자기가 자기에게 사기를 쳐요. 하루하루 삶이 자기사기 치는 겁니다. 내가 원하는 나일 것이라고 계속 사기를 치는 거예요.

그런 인간들이 원하는 교회는 뭐냐? 무당집이에요. “나 예쁘다고 해 줘. 성경말씀에 근거해서 나 복받을만한 가치 있는 존재라고 나에게 이야기 좀 해줘. 나는 누구에게 위로받고 싶어. 위로받고 싶으니까 교회가 목사부터 시작해서 교인들, 옆에 있는 집사님이 내가 받고 싶은 위로를 좀 해 달라.”

이것은 교회 와서 본인이 본인에게 사기 치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가 할 일은 뭐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무당 짓 하는 겁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바쳤으니까 복 받습니다. 교회 왔으니까 복 받습니다.” 계속 그들이 원하는 사기를 목사가 대변해주고 그것으로 자기는 생계를 유지하는 겁니다.

그래서 교회가 뭐냐? 사기집단이에요. 캐나다에서 함께 복음을 나눴던 분이, 큰 교회 다녀야 생계가 유지되니까 다니면서 하는 이야기가, 목사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전부 다 개소리라는 거예요. 사기 복 많이 먹었다. 이제 그만하라는 거예요.

그 말이 맞아요. 계속해서 자기 자신을 다듬고, 가꾸고, 윤기내고, 페이퍼로 문지르고, 반짝반짝하게 만드는 것, 그거 외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게 없잖아요. 지금까지 그것만 했잖아요, 그것만. 기름 바르고, 윤활유 바르고. 가끔은 거울 앞에서 미켈란젤로의 다윗의 동상처럼 폼 잡다가 풀고.

거울의 원리라는 것이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더러운 것을 비췄는데 신선하게 보이는 것이 거울의 원리입니다. 거울의 효과에요. 내 자신을 진정으로 비추기 위해서 거울을 봤는데 거울이 기대이상의 효과를 주는 것. 대표적인 것이 <백설 공주> 거든요.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냐?”

거울이 백설 공주 계모한테 아부 안할 수가 없어요. 안 그러면 거울이 깨지는 수가 있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는 왕비님이 제일 예쁩니다.” 거기서 그만 입을 다물었으면 참 좋았겠어요. “그런데 이 세상 밖에서는 왕비님보다 더 예쁜 사람이 있습니다.” 그 때부터 계모가 화가 나서 독사과 들고 갔는데 그 독사과는 자기가 먹어야 돼요. 백설 공주 먹이지 말고.

왜 백설 공주를 온 민족, 2백 5십여 개의 국가 애들이 다 좋아하고 그게 계속 유지되느냐 하면, 거울아, 거울아, 하는 그 거울효과 때문에 그렇습니다.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자기를 규정하고 굳히거든요. 남들이 뭐라고 하느냐, 거기에 맞춰서 자기 자신을 조정해나가는 것이 인간입니다.

목표를 네 쪽에서 만들어내라는 거예요. 인간의 주체라 하는 것, 자아나 주체가 다 ‘나’라고 번역이 되는데, 자아, 주체, 다 같은 말이에요. 주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진짜 나가 아니에요. 남들의 욕망, 타인의 욕망에 맞춰주려고 노력하는 그게 나라는 겁니다.

어릴 때는 부모가 요구하지요. 교회는 목사가 요구하지요. 커서는 자식들 눈치 보이지요. 며느리 들어오면 며느리가, 시아버지가 시어머니를 대할 때 어떻게 대하는가, 그래서 며느리 눈치 보거든요. 며느리 한번 씩 집에 들르게 되면 골치 아파요. 집안청소, 화장실청소까지 다 해야 돼요. 며느리 온다고. 손님도 그런 손님이 없어요.

가고 나면 휴, 기가 다 빠져있어요. 어떤 예술가가 결혼을 했는데 그 예술가는 늘 실험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끄집어내서 돌발적인 작품을 만드는 사람인데 그 사람이 기독교방송에 나와서 신학토론프로 사회도 봤던 사람이에요. 여러분이 잘 아는 낸시랭이라는 사람인데. 기독교방송에 단골로 계속 나왔어요.

그 사람이 결혼을 하는데 남들이 다 말리는 사람하고 했어요. 왜냐하면 본인 인생은 실험하는 것이 예술가의 임무기 때문에. 안 된다, 못한다, 저건 인간도 아니라고 하니까 더 도전의식이 발동되는 거예요. 지금은 못 떼 내서 환장을 했어요. 지긋지긋하고 질겁한 겁니다.

이것은 낸시랭뿐 아니고 모든 사람은, 자기가 혼자 살았는데 누가 하나 기어 붙으면 이것은 벌레가 들어온 거예요. 산 낙지 알지요. 나 혼자 사는 인생에 누가 딱 들러붙어버리면 내 피를 뽑아내는 것 같아요. 그래서 같이 산다는 이것은 어쩔 수 없어서 사는 것인 양 사는 겁니다.

빨판 붙어 있어 보세요. 산후우울증 왜 생깁니까? 아가씨 때 혼자 살았잖아요. 결혼해서 애 낳았다. 애는 자기 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떨어져도 애가 안 떨어져요. 엄마, 하고 찾아옵니다. 자기 친구하고 놀고 싶을 때, 백화점 가고 싶을 때, 못갑니다. 애가 달라붙어가지고.

산후우울증이에요. 떼어놓지도 못하고. 자기스타일 다 구기지요. 사람은 혼자 살고 싶어 해요. 자기 가치에 의해서. 그런데 누구하고 결혼을 한다든지, 애를 낳는다든지, 친구를 만난다든지 할 때는 어느 정도까지는 용납되지만 그 이상 들어오는 이것은 자기 피 빨아먹으려고 빨판 앞장세워서 들어오는 산 낙지처럼 간주되는 거예요.

남이야 떼어내면 되지요. 자식은 그러지도 못해요. 어릴 때 들러붙는 것은 예쁘기라도 하지요. 커서도 들러붙는 것은 죽이지도 못하고. 이걸 성경에서 뭐라고 하느냐? 옛언약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태를. 인간이 자기 의와 자기가치에 전부 다 몰입하는 거예요.

그게 본성이고 고칠 수가 없어요. 끊임없이 남들이 뭐라고 하면 자기 잘났다고 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타인을 향하여 사기를 쳐야 돼요. 내 자신이 아닌 다른 자신을 가지고. 이걸 두고 아까 이야기했지요. 가눌 수 없는 영혼이라고. 늘 비틀거리고 있어요. 술 안 먹었어도 벌써 비틀거리고 있어요.

술을 먹는다는 것은, 술을 먹고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에요. 나빠 있는 것을 술이 깨우쳐 주는 겁니다. 술은 나쁜 마음의 뚜껑을 여는 거예요. 취중진담이 아니고 취중더러움이에요. 취중에 더러운 것은 다 끄집어내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강의에서 그랬어요. 술 먹는 사람, 담배피우는 사람, 낚시하는 사람과는 결혼하지 말라고. 책임질 수 없는 말을 함부로 했어요. 왜냐하면, 술 먹게 되면 허세와 허풍, 나 아닌 내가 되고 싶은 것을 착각을 해서 막 쏟아내거든요. 허세와 허풍, 이것은 정말 때려도 못 고쳐요.

담배라 하는 것은 자기 몸에 해로운 것을 스스로 끊지 못할 정도로 정신자세가 희미하다는 거예요. 낚시는 자기만 놀겠다는 거예요. 낚시나 사냥 이런 거요. 왜 술을 먹는가? 가눌 수 없는 영혼 그것을 잡아보려고 술을 먹는 거예요. 자기 자신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준 것은 네 주제파악 하라는 거예요. 주제파악이 안된 인간은 내가 개선의 여지가 있고, 지금은 죄를 짓지만 하나님 보시기에 착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자꾸 염두에 두는데 그것만큼 그 인간이 자기자신을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내가 개선될 여지가 없어요, 인간은. 인간은 더 훌륭한 사람 될 여지가 없습니다. 성경 백독을 하고, 신학교 가서 목사가 되어도 인간은 안 달라집니다. 열 두 제자가 달라지지 않았어요.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받은 겁니다.

인간은 어떤 점에서 달라지지 않느냐? 그래서 자꾸 예수님께서 약을 올리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이렇게 했잖아요. 아까 교독문 봤잖아요. 이게 뭐냐 하면, 인간은 행복하라고 이 땅에 태어난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이만한 가치에, 이만한 행복의 자리가 나에게 마땅히 보장되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이것조차도 자기를 모르고 있으니까 사기 치는 거예요. 그 사기단체가 교회 아닙니까? “여러분 기도하시면 복 받습니다.” 이거 전부 다 사기거든요. 자기주제 파악하라고 주께서 말씀 줬는데 오히려 자기를 위선자로 만드는데 일조를 하는 동네가 교회가 되고 말았어요.

행복한 자리요? 행복한 자리는 없어요. 행복하려고 교회 나왔다? 이것은 절에 가야 돼요. 무당집, 대나무 꽂힌 그런데 찾아가야 돼요. 갓바위 있잖아요. 여기 지나서 조금만 더 가면 돼요. 차가 좀 밀리지만. 사람이 얼마나 자기위주였으면 교회 나오고 심지어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계속해서 자기 속으로 동굴을 파놓고 기어들어갑니다.

이것은 사명감 상실이에요. 옛것은 내 것 지키기가 옛것입니다. 새것은 뭐냐 하면, 지킬 필요가 없다는 것, 이제 내가 살아가는 그 기능과 모든 역할은 타인, 주님 이죠, 주님에게서 우리에게 제공된 것이라는 것이 새것이에요. 오늘 본문 내용이지만, 네가 네 몸에다 할례라는 율법부터 시작해서 모든 법을 네가 개선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놓아버리라는 말이지요.

어떤 영역에. 그게 무슨 영역이냐 하면, 십자가영역이에요.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12절에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제가 지난 시간에, 사는 것이 어거지라고 했지요. 어거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그 다음에 나오는 말이 이상해요.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고 되어 있어요.

이게 뭐냐? 아까 백설공주 이야기하면서 거울효과라고 했는데 거울은 그 거울을 보면서 뭔가 기대를 하면서 봐요. 거울을 보는 순간 내가 원하는 스케일과 장면이 거울에 떠올라서 내가 생각하는 것이 실제하고 일치되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서 거울을 보는 거잖아요.

그런데 예수님의 거울효과는 뭐냐? 더러운 모습을 비췄는데 거룩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분이 이 땅에 왔는데 그 거룩한 분이 세상에서는 더러운 분으로 다뤄지고, 인식되고 취급받아요. 왜냐하면 각자가 가짜거울을 다 장착하고 있으면서 예수님을 바라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려우면 좀 더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예수님 바라볼 때 그냥 바라보지 않고 내 안에, 평소에 나는 잘났다는 것을 확인해줄 거울을 장착하고 나를 잘났다고 봤는데 그 거울이 포함된. 같이 한 덩어리가 되어 있는 내가 예수님을 바라볼 때, ‘나는 이렇게 잘났는데 저 양반은 왜 저렇게 밖에 안 돼? 저 양반은 내 행복의 자리를 보장 못해준다는 사람이기에 나는 저 사람과 상대 안하겠어.’ 인간 속에 이미 사기 치는 거울이 내장되어 있기에 그런 겁니다.

내 자존심이 나의 괴물이에요. 내 자존심이 나의 괴물입니다. 주님께서 진짜 우리 모습 보여주려고 왔는데 방해하는 요소가 있어요. 날마다 나에게 거짓을 고하는 거울이 주님과 우리 사이에 칸막이로서 방해를 놓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면 그것보다 편한 것이 없어요. 그것은 가눌 수 없는 영혼이 아니고 안정된 영혼입니다.

아무것도 아니기에 아무것도 아닌 채로 하루하루 살면 됩니다. 그걸 뭐라고 하느냐? 최적화라고 해요. 최적화. 지금 내가 살아가는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최적화된 거예요. 더 이상 기대할 필요조차 없어요. 필요한 것은 주께서 주실 겁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주께서 새로운 사명을 주실 거예요.

지금 내가 하는 것은 안정된 사명이 안정된 나의 정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주님 뭐 할까요, 이런 것. 내가 어떻게 주님한테 예쁘게 보일까, 가 아니라 “주님, 저 뭐하면 돼요?” “애 있지?” “예” “애 키워라.” “알겠습니다.” “저녁 때 되면 밥해라.” “예, 알겠습니다.”

주의 일이 그렇게 어렵습니까? 미흡한데 주의 숙제는 있고 그걸 메우려 하니까 힘들잖아요. 주께서는 목표를, 숙제를 주는 것이 아니고 현재 네가 처해 있는 이것이 너의 숙제가 아니고 주께서 네 안에서 자기 숙제를 한 그 결과물이 지금 네 모습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되면 남과 비교할 이유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지요. 그리고 남하고의 비교뿐만 아니라 내가 되고 싶은 나와 현재의 나를 비교하지 마세요. 그것은 오는 복도 차버리는 거예요. 그래서 이것은 누가 가르쳤냐 하면 주님이 가르쳐 준 거예요. 주님의 사명은 뭐냐? 쓴 잔을 마시는 겁니다. 죽는 것이 주님의 사명이었습니다.

이것을 알아듣는 사람, 이것을 알아먹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에요. 오늘날 사람들이 각자 자기 일만 챙기기 때문에 점점 더, 소위 복음 알아도 평소의 육적인 본성, 내 것만 챙기고 돌아서겠다는 그 본성 때문에 복음을 알아도 복음마저 자기 소유화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사명감은 없고.

그걸 저는 바짝 마른 육포라 하는데 육포가 물기가 다 빠졌잖아요. 그것 빨아먹어 보세요. 나는 별로 맛없어요. 현대인의 살아가는 모습이 육포 같아요. 바짝 메말라버렸어요. 자꾸 피하기만 하는 거예요. 지난 수요일에 그런 이야기 했습니까?

신앙과 신앙 아닌 것의 차이점에서 신앙 아닌 것은 뭐냐? 나 이렇게 살아왔습니다, 하는 것이 신앙 아닌 겁니다. 지난 수요일에 그걸 문화라 했거든요. 오늘날 교회가 문화인들이라고요. 교회가 문화센터가 되었다고요. 신앙은 뭐냐? 나 저분 때문에 이렇게 살아갑니다. 그 분을 소개하는 것이 신앙이라고 했지요.

만약에 미국 가서 영어를 잘 못해도 “익스 큐즈 미? 웨어 이즈 더 시티 홀?” 영어회화에서 제일 기본이 뭐냐? 시청 찾는 거예요. 시청이 어디입니까, 묻는 것이 영어회화책에 나오거든요. 익스 큐즈 미, 실례합니다만, 하면서. 요새는 성도라 해서 신앙에 대해서 물으면 길 안 가르쳐줘요. 이야기를 안 해요.

왜? 각자 사명감이 없어가지고 나 편하면 그만이라는 겁니다. 소위 교인들도 마찬가지에요. 그것은 십자가를 오해해도 보통 오해한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는 새로운 영역인데 그 영역은 내가 내 것 지키는 것은 이미 끝난 시절이에요. 지키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어떻게 나를 다룰 것인가 하는 겁니다. 누구 때문에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오늘 본문으로 다시 돌아와서 사도바울은 옛것과 새세계를 날카롭게 대비시킵니다. 대비시켜서 십자가 안에 있는 것과 십자가 밖에 있는 것은 이런 차이가 난다는 것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이미 십자가 안에 들어온 사람은 십자가 밖의 이야기에 대해서 들을 필요가 없지 아니하냐, 그런 소리를 하겠지요.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는, 절차라는 겁니다. 항상 절차가 뭐냐? 십자가 밖의 이야기부터 출발해서 십자가 안의 이야기까지 연속해서 결말을 짓는 식으로 복음이 설명되는 겁니다. 나 복음 안다, 십자가 안다, 이렇게 하면 그건 십자가 모르는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알게 할 때에 “너 정신 똑바로 차려라. 네가 이런 것을 알고 있지? 그러니까 이제는 이런 사람이 되라.” 이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네가 뭘 알라는 말이 아니고, 네가 뭘 연구하라는 말이 아니고, 주님이 주신 그 원칙이 이제부터는 너를 덮쳐서 다루겠다는 겁니다. 그것도 반복적으로 매일같이 다루겠다는 거예요.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지요? 그래서 쉬운 예를 들겠습니다. 번개가 친다 할 때 우리의 보통 언어적인 습관이 뭐냐? 번개가 친다 하면 번개라는 실체가 있고 그 번개라는 실체가 친다는 동사를 유발시켰다고 하는데 번개가 친다는 말은 그런 뜻이 아니고 그냥 번개 친다, 가 하나가 되어서 어떤 사건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내가 사랑한다. 나라는 주체는 여기 있고, 내가 사랑할 때만 내가 사랑한다, 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잘못된 착각이라는 말이지요. 내가 기뻐한다, 내가 좋아한다, 내가 배고프다, 내가 배부르다, 전부 다 이게 언어적 습관 때문에 우리 자신을 호도하고 있는 겁니다.

그냥 배고픈 거예요. 내가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사랑한다, 가 아니에요. 그냥 사랑이 일어난 거예요. 그냥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워요. 그리고 보기만 해도 미워요. 이것은 무슨 이유가 없어요. 나라는 주체가 있어서 사랑할까, 말까, 그게 아니라니까요.

미운 것은 미운 것이고 미움이 새로운 주체, 자아를 만들어낸 거예요. 밉다는 사건, 사랑한다는 사건이. 이렇게 하면 또 “이 목사는 또 철학이야기 한다.” 철학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 것이 오늘날 모든 교회가 철학 이야기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철학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있지요? 여러분들이 이렇게 하세요.” 그게 철학이에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그게 데카르트의 철학이에요. 한 번도 철학을 빠져나가 본 적이 없어요. 왜? 자기가 전부니까. 누가 누구보고 철학이야기를 한다고 해요?

성경은 철학이야기가 아니라 언약이야기를 합니다. 언약은 뭐냐? “가만있어라. 내가 쳐들어갈게.” 이게 언약이거든요. 지금까지 악마가 쳐들어와서 우리로 하여금 내 자존심 지키는데 전력을 다하게 만들었잖아요. 그것은 옛시대고 새시대에 예수님이 오시면 “가만있어. 그냥 지내. 그냥 살아! 내가 너 다룰게.” 이게 철학입니까? 이게 새언약이지요.

요한복음 20장 15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스쳐 지나가기 쉬운 말씀인데요. 예수님 부활하고 난 뒤에 막달라 마리아가 찾아왔어요. 보니까 예수님의 시신이 없거든요. 막 울어요. 15절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그 다음에 나오는 말씀 “누구를 찾느냐”

예수님이 막달라 마리아에게 이야기한 거예요. “막달라 마리아야 누구를 찾느냐?” 바로 이 관계가 신앙입니다. 이게 하나님의 의입니다. 예수님과 막달라마리아의 사이에 있는 그 브릿지, 다리, 그 관계.

사도가 찾는 것은요, “훌륭해라. 여러분이 대단한 사람 되세요. 기도 잘하는 사람 되시고 뛰어난 사람이 되세요.” 그걸 요구하는 것이 아니고 “당신은 지금 누굴 찾고 있습니까?” 그걸 사도가 보고 있는 거예요. 사도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그겁니다. “당신 혼자 있지 말고 당신과 예수님사이의 관계가 현재 형성되어 있습니까?” 그걸 보는 겁니다.

그것은, 그 관계는 내 소유물이 아니에요. 나 저 관계 가져야지, 그러지 마세요. 그거 자기 잘난체 하는 겁니다. 우리는 주님의 사랑의 그물망에 갇혔어요. 춘향전에 그런 대목 있잖아요. “이리 오너라 업고 놀자. 앞태를 보자. 뒤태를 보자.” 하잖아요. 아장 아장 걸어봐라. 걸음걸이까지 다 보자는 거예요.

아장아장 걷든지 기어서 걷든지, 앞태를 보든지 옆태를 보든지 그 전체가 뭐냐? 사랑이라는 사건이에요. 그게 주님이 우리 성도에게 준 사건이에요.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사랑사건 속에 우리를 집어넣어버렸어요.

그러니까 막달라마리아가 우는 겁니다. 누구 보고 싶어서? 주님 보고 싶어서 우는 거예요. 여기에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무슨 신학이 필요합니까? 여기에 무슨 교회가 필요해요? 교회는 부동산을 가질 때부터 이미 교회는 망했어요. 부동산 가지면 나중에 지분 따지게 되고, 주식 따지게 되고, 소유자 따지게 되고.

교회는 그냥 주님 사랑에 밀려서 왔다가, 주님 사랑의 그 사명감으로 왔다가 주님 사랑 없어지면 그냥 헤어지는 거예요. 목사 밥벌이 해주려고 애쓰지 마세요. 자기가 자기 밥벌이 하려고 애쓰다 보니까 그런 식으로 목사에게 동정하지 마세요. 목사 죽여 보내는 것이 목사에게 최고의 대우입니다.

“그렇게 좋다면 천국에 먼저 가라. 인간아!” 무당 찾는 교인들이 산에 있는 절간, 사찰 말고 땅에 있는 사찰 만든 것이 교회입니다. 복 받으려고. 행복하려고. 누구 맘대로 행복해요? 자기 주제도 모르고.

다시 보겠습니다. 참 어려운 대목인데요. 12절에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사도바울이 계속해서 ……, 참 어려운 이야기인데 짧게 하겠습니다.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이 말은 뭐냐?

갈라디아서 4장을 봅시다. 26절, 이것은 손 안대고 싶지만, 정말 어렵지만 해야 되겠다 싶어서 하게 돼요.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하늘에 우리 어머니가 있다는 말은 지상에 우리아버지가 없다는 말이에요.

날 나 되게 하는 자를 지상에서 찾지 말라는 이야기에요. 결국은 이 땅에 있을 필요도 없는, 이 땅에 살 필요도 없는 남의 자식이 온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이게 지속성인데요, 계속해서 어떤 기능이 발휘되는 그 지속성이라 하는 것은 중간에 끼어들게 되면 지속성을 파괴시킵니다.

시작과 끝은 인간의 몫이 아니에요. 인간은 누군가 시작한 분이 있고 누군가 끝을 맺는 분이 있음을 알리기 위해서 인간이 중간에 끼어든 거예요. 인간은 중간존재입니다. 자기의 뿌리나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인간은 모르는 것이 당연한 거예요.

모르면 입 다물고 있어야지요. 오늘 아침에 캐나다에서 누가 이런 질문을 했어요. 미켈란젤로가 천재라고들 하는데 목사님 강의에서 미켈란젤로는 자신이 저주받은 자라고 했다는데 왜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라고 질문을 했어요. 강의시간에는 미켈란젤로를 강의하는 것이 아니라 설명을 안했어요.

미켈란젤로가 남들이 보기에 남들이 생각하지 않는 것을 목표로 잡아서 개발하는 예술가입니다. 그래서 천재라 한 거예요. 그런데 미켈란젤로도 처음에 거기에 말려들었어요. 남들이 천재라 하니까 자기가 천재인줄 알았어요.

그런데 미켈란젤로가 나중에 모든 예술을 다 그만둡니다. 내가 남의 헛소리에 말려든 이런 죄인이라는 사실, 내가 한 모든 것들이 전혀 가치 없는 저주받은 것들만 내놨다. 남들이 우샤우샤, 하는 것에 말려들어서 내가 저주받은 존재라는 것을 잊어버린 것에 대해서 회개하면서 죽었어요.

세상이 그렇게 인간을 버리게 만든 거예요. 물론 그 순간 자기는 버린 것이 아니겠지요. 구원받은 거지요. 그러면서 또 질문이 뭐냐? 아인슈타인 경우는요? 아인슈타인은 복음을 모르니까. 남들이 천재라니까 그냥 천재인줄 아는 거예요. 남들이 하니까 나도 그런 줄 알고 있는 거예요.

천재면 뭐합니까?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인데요. 천재면 어리석은 것과 점점 멀어지잖아요. 아가서 준비하면서 제가 느낀 것이 있습니다만. 가장 야한 야동이 뭐냐? 그것은 과학이에요. 사람을 샅샅이 다 분석하기 때문에.

이번에 겨울수련회에서 아가서 할 것인데 속으로 지금 수위를 어느 정도로 조절해야 될지 고민 아닌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그냥 막 나갈지. 막 나갈 가능성이 많습니다만. 한글로 번역된 것을 보니까 그런데 원뜻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엄청나요. 엄청난 야동입니다. 아가서가.

그런데 그것 가지고 시험 들고, 엄마야, 부끄러워, 이러면 이것은 어떤 선을 못 넘은 거예요. 율법에 속한 겁니다. 뛰어넘을 수가 없는 거예요. 부끄럽다고? 부끄러워하는 네가 더 부끄러워. 이것 감당 안 되지? 감당 안 되는 거예요.

십자가 안에서는 어떤 조건도 철폐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해야 돼요. 어떤 조건이라도 오라. 어떤 조건도. 인생에 날 부끄럽게 만들고, 날 망신스럽게 만드는 어떤 조건도 오라고 우리는 요청해야 돼요. 그걸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감당하는 것이 아니에요. 주께서는 감당할 수 있는 걸로 간주하시고 여러분 인생 가운데서 여러분을, 어떤 때는 패배했다, 사업 실패했다, 나는 신앙 다 떨어졌다, 나는 믿음도 없다, 어떤 조건들도 여러분에게 다 주실 거예요.

그러면서도 내가 나 지킨다는 것이 죽을 때까지 나를 힘들게 하는 괴물이라는 것을 알게 만들 겁니다. 더 이상 내가 나를 지킬 필요가 없어요. 그런 영역으로 도약되어야 된다는 것이 사도바울이 이야기하는 겁니다.

핍박, 십자가 믿으면 그 당시 핍박 받았거든요. 핍박 감당해라 그 말이지요. 누구 좋으라고 핍박 안 해요? 누구 지키라고 핍박 안 합니까? 13절에 보면, “너희로 할례 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라.” 그리고 이 말은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큰 글자, 아주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육체 자랑하는 그것, 지긋지긋하다. 내가 보기에 지긋지긋한데 제발 너희들이 너희들 자신을 보기에도 내 자신의 가치와 고유한 의미와 내 자존심 지키는 그것, 네가 스스로 너한테 제발 지긋지긋해라. 너와 너 자신하고 갈라서라. 내가 지키는 나와 주님께서 알아서 감당하는 너와 갈라서라.”

그 갈라서는 대목이 제가 아까 이야기한 요한복음 20장 15절의 말씀입니다. 주님 보고 싶어서 우는 막달라마리아처럼, 주님과 나 사이의 그 관계에 사도바울처럼 여러분도 같이 늘 주목하면서 “주여, 오늘은 뭐할까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그동안 우리가 뭐하고 살았습니까? 남들 시선 의식한다고 평생을 다 허비하고 남하고 견주고 밑가지 않는 것을 자랑거리라고 내세우려고 우리는 힘든 인생을 살아왔었습니다. 이런 어리석은 짓을, 이 지긋지긋한 짓을 이제는 멈추게 하시고 나에게 달라붙은 자존심이라는 괴물을 떼 내게 해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