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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40:22-23 / 잊혀진 자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40:22-23 / 잊혀진 자

정인순 2018. 9. 19. 21:51

음성          동영상

 

 잊혀진 자

 

이근호
2018년 9월 19일                 

 

 

본문 말씀: 창세기 40:22-23


(40:22) 떡 굽는 관원장은 매여 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40:23)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요셉이 꿈을 해몽해주면서 복원될 왕의 신하에게 자기 사정을 알리고 고향으로 되돌아가기를 부탁한 적이 없습니다. 요셉으로서는 할 수 있는 대로 다 해봐야 합니다. 더구나 술맡은 관원장은 자기로부터 도움을 받은 사람입니다. 따라서 최소한의 보상을 해주기를 요셉은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 보니 ‘술 많은 관원장’은 요셉을 잊었습니다. 술 맡은 관원장 입장에서는 복권이 된 이상 더 이상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이미 요셉을 통해서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여겼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알고 지내던 요셉을 더 이상 챙겨 줄 필요가 없었던 겁니다.

술 맡은 관원장에게 요셉이 부탁하면서, 요셉은 자신을 ‘히브리인’으로 소개했습니다. 즉 애굽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노예로 팔려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요셉의 도움 요청은 애굽 사람의 입장에서는 크게 자기 나라에 도움 될 일은 아닌 겁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전에 자신이 지내던 그 자리로 되돌아간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요셉은 전에 살던 자기 동네로 되돌아가면 그것으로 요셉을 통해서 나타낼 하나님의 뜻의 전부일까요? 아닙니다. 요셉은 그냥 자기 동네로 되돌아가면 아니됩니다. 애굽의 통솔자가 되어야 합니다. 곧 아버지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았던 그 야곱의 언약의 취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요셉의 역할입니다.

이는 요셉의 개인적인 여망과는 상관없습니다. 요셉은 개인적으로 자기 억울함을 풀고, 술 맡은 관원장과 같이 원대복귀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사적인 간절함을 잊어버립니다. 이것은 바로 요셉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시도가 다 끊어짐을 말하는 겁니다.

이런 요셉의 입장이 오늘날 성도의 입장입니다. 성도란, 본인들이 설쳐서 구원받는 자들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이 설칠 수 있는 모든 것이 무용지물임을 경험해야 될 자들입니다. 인간들은 누구나 미래의 자화상을 미리 구상하고 달성하고자 합니다. 장차 ‘천국에 가 있는 자기 모습’을 사람을 보고 싶어합니다.

뿐만 아니라 장사하는 사람은 손님으로 들끓는 가게의 사장인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교회 목사는, 교인들이 미어터지는 그런 교회에서 자신이 설교하고 인도자로 행세하는 그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청년들은, 장래의 아내와 더불어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이런 꿈들을 하나님께서 허락해주게 되면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현재 자신에게 가다지 큰 하자가 없는 존재로 인식한다는 겁니다. 즉 하나님 알기 전에도 자신을 괜찮은 존재인데 거기에다 하나님마저 인정하고 천국가니까 더욱 더 우수한 존재라고 자부하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셉에게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이,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께서부터 받은 언약의 결과라면 그 동일한 원리들이 성도에게도 그대로 적용되고 발생되는 식으로 오늘날 성도가 천국 가는 겁니다. 즉 성도라면 자신의 행함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차단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뭔가 행한다는 것은 그냥 행하는 것이 아니라 기대와 희망을 가지고 행하게 됩니다. 이것은 자신이 아직은 자신의 권한으로 행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즉 내가 내 것을 처분한다든지 투자해서 어떤 결과를 낼 그만한 능력 정도는 자신에게 있다고 자부하는 겁니다.

요셉도 그러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는 그럴 가능성을 삭제하십니다. 시편 102:20-21에 보면,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여호와의 이름을 시온에서, 그 영예를 예루살렘에서 선포케 하려 하심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진정 사람이 아니라 그리고 인간 본인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구원된 자는 필히 ‘여호와의 이름의 행하심만으로 구원되어야 하고 이를 위해 그 당사자는 자력으로 시도할 그 어떤 여지가 없을 지경으로 죽은 자같은 상황에 놓이게 된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구사하는 계획이나 설계가 없다는 말은 철저하게 수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자신을 괜찮은 존재로 좋게 보기 때문입니다. 지금 자신이 이해하는 그대로가 곧 하나님의 원하는 뜻과 일치된다고 우기고 싶은 겁니다. 그러나 실제로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은, 인간이 기대하는 모든 것을 무산시키고, 부정해버리고 그 인간을 통해서 정작 하나님이 원하는 일의 결과를 비로소 생산케 하시는데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원’이라는 것은 요셉 개인의 구원으로 여기시지 않고, 이스라엘과 애굽을 대비시키시는 차원에서의 구원입니다. 바로왕이 애굽을 대표한다면, 지금 이 요셉은 장차 애굽에서 등장할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대변하고 있습니다. 애굽과 이스라엘은 결코 사이좋게 존재할 나라가 아닙니다.

시편 83:4에 보면, “말하기를 가서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이스라엘 빼놓고 전 세계의 모든 나라는 동일한 본성에 의해서 주도권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내용이 시편 2:1-4에 나옵니다.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하늘에 계신 자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저희를 비웃으시리로다” 이러한 열방들의 본성에 대해서 메시아는 그들 나라를 모조리 박살냅니다.

요셉과 같은 성도들이 들어가는 나라는 그냥 세상 나라 중의 하나가 아니라 천국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내 나라’, ‘네 나라’로 나뉘어지지만 성도에게는 ‘천국’과 ‘지옥’으로 세상이 나뉘어집니다. 요셉의 부탁을 듣고서는 요셉을 잊어버린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이 지니고 있는 꿈의 세계, 곧 천국을 모릅니다.

마치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아홉 문둥병자와 같습니다. 그들은 예전처럼 몸만 건강하면 그것이 하늘의 축복인줄 알았습니다. 곧 이 세상에 속한 ‘자기 수정’이 안 되고 있었던 겁니다. 하나님께서 요셉을 통해서 ‘자기 수정’을 시도합니다. “너는 지금 감옥에 갇혀 있는 바로 그 상태가 말씀에 응하고 있는 상태‘이기에 네는 꼭 그래야만 하는 코스를 밟고 있다”는 겁니다.(시 105:19)

오늘날 성도가 이런 코스를 밟아 구원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자신의 가치를 고집하지 않게 하옵시고, 죽음에 처해서 주님만 쳐다봐야하는 입장인 것을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녹취:오용익

156강-창 40장 22-23절(잊혀진 자)

180919-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40장 22-23절입니다. 구약성경 62페이지입니다.

창 40:22-23

“떡 굽는 관원장은 매달리니 요셉이 그들에게 해석함과 같이 되었으나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오늘 제목은 “잊혀진 자” 곧 요셉을 두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세상에서 잊혀진 자가 된다고 해서 하나님으로부터도 잊혀진자라고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합당한 사람이냐 하는 것은 성경에서 말해주고 있고 오늘 그 성경 대목 가운데 요셉이 주인공이 되는 겁니다.

요셉이야기가 어떤 특정 개인 이야기가 아니고 오늘날 우리의 이야기가 되어야 되는 겁니다. 특별히 요셉이 어떻게 했다, 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요셉을 어디로 몰고 가고, 요셉이 어떤 상황 속에 처해지는지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성경을 보게 되면 오늘날 사람들은 무슨 잔소리를 늘어놓는 것처럼 생각해서 거부반응을 굉장히 많이 일으킵니다. 물론 주님께서 그것마저 아십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에 대해서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을 아시는데, 그 거부반응을 아시면서도 요셉같은 사람으로 바꿔치기 해주시는 겁니다.

요셉처럼 훌륭하다는 말이 아니라, 요셉을 요셉이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요셉을 천국백성으로 만들 때 어떤 원칙과 원리가 여기에 작렬하는지 성경을 통해서 보고 들으라는 이야기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창세기 40장 14, 15절에 보면, 요셉이 술 맡은 관원에게 특별히 부탁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당신이 득의하거든 나를 생각하고 내게 은혜를 베풀어서 내 사정을 바로에게 고하여 이 집에서 나를 건져내소서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요 여기서도 옥에 갇힐 일은 행치 아니하였나이다.”

요셉이 간절한 마음으로 술 맡은 관원에게 부탁하는 대목입니다. 왜 떡 맡은 관원에게 부탁하지 않고 술 맡은 관원에게 부탁하느냐? 그것은, 둘 중 한 사람은 죽고 한 사람은 계속 살 것임을 이미 요셉이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렇게 부탁할 때 그냥 부탁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희망을 가지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요셉이 이렇게 술 맡은 관원장에게 사정사정 하는 것에 대해서 같은 인간으로서 충분히 이해하고 동조합니다.

그런데 23절에 보면,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라고 되어 있어요. 이 대목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요셉을 너무 괴롭히지 않는가, 하는 약간의 불만 같은 것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지요. 드라마에 주인공이 나올 때 약간 꼬이게 하는 것은 좋아요.

꼬아야 재미가 나니까요. 드라마 보면 출생의 비밀을 가진 억울한 사람이 바꿔치기 당해서 고생고생 하는 것, 나중에 후반부에 가서 잘되는 쪽으로 나오지요. 그런데 꼬아도 너무 꼬아버리면 짜증나서 드라마 안봅니다. 보는 사람들 힘들게 하게 되면 오히려 더 스트레스 받지요.

요셉의 이야기를 보게 되면, 나도 요셉처럼 되어볼까, 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그만 생각을 철회할 가능성이 있어요. 하나님께서 요셉을 괴롭혀도 너무 괴롭히는 거예요. 억울하잖아요.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하나님에 의해서 살아가는 사람 같으면, 하나님 정도 되면, 그 억울함을 풀어줘야 하나님을 믿는 보람이라든지 하나님 믿는 든든함 같은 것을 느끼겠지요.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내 뜻대로 안 될 때에 과연 하나님을 계속 믿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리고 내가 믿는 것이 헛믿음이 아닌지, 내가 엉뚱한 하나님을 믿고 있는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이 계시기는 할까, 내가 상상해서 하나 걸쳐놓고 하나님을 믿는 것은 아닌지, 회의와 의심이 들 수밖에 없어요.

하나님께서 요셉으로 하여금 또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그러한 갈등을 유발하는 그것이 도대체 하나님에게 무슨 이익이 있다고 인생을 살면서 이렇게 힘들게 하는지, 그런 생각을 누구나 가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요셉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요셉의 자기 억울함을 풀어주는 그것이 요셉 본인의 뜻이지 하나님의 뜻이 아니거든요. 하나님은 본인의 간절한 뜻을 일체 들어주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요셉의 본인의 간절한 소원을 들어줘버리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내가 생각하는 나 요셉은 하자가 없고 문제가 없는 존재, 그렇게 돼버려요.

무슨 말이냐 하면, 나는 내가 보기에 별 문제가 없고 그다지 나쁘지 않게 평범하면서도 착실하게 살아왔다고 자부하는데, 그것도 착하지만 거기다가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약속까지 믿으니까, 현재 하나님 안 믿어도 될 정도로 괜찮은 존재였는데 하나님을 믿으니까 더욱더 훌륭한 존재가 되어서 가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내가 동업자가 되었으니 하나님께서 내 뜻을 이루어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그런 소박한 인간들의 뜻을 왜 안 이루어주느냐 하면,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을 하나님께서 바꿔놓기 위함입니다. 내가 여기 있고 내가 소원하는 것, 내 미래에 소원하고 있는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원하는 내 모습일 것이라고 일치시키는 경향이 있어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겁니다. 하나님의 뜻은, 예를 들어 요셉 같으면, 요셉아, 네가 너를 모른다는 거예요. 오늘날 우리 같으면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을 몰라요. 우리가 생각하는 우리 자신, 또는 요셉이 생각하는 요셉은 하나님이 원하는 요셉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어떻게 하겠다든지, 우리를 어떻게 하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요. 하나님의 관심은 뭐냐 하면, 요셉에게 뒤집어씌워진 언약이라는 것, 하나님의 언약에 관심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 관심이 있어요.

다시 이야기합니다만, 요셉에게 주어진 꿈은 아버지 야곱에게 주어진 언약의 내용을 요셉에게 주면서 꿈으로 나타난 겁니다. 철없는 요셉에게 언약이 결합되면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에 준한 참된 천국백성은 어떤 사람인지를 철딱서니 없는 요셉을 통해서 제대로 보여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려면 요셉에게 자기수정, 자아에 대한 수정, 자기변화가 일어나야 됩니다. 현재 나는 괜찮은 존재이기에 하나님이 나를 도와줄 거라는 생각 그 자체, 그런 요셉 본인의 자아, 그것은 진정한 요셉이 아닌 것으로, 요셉이 엉뚱한 요셉을 생각한 것으로 여겨야 된다는 말이지요.

진짜 요셉은 요셉이 몰라요. 그것은 언약에 의해서 생산되어야 될 문제지 요셉이 미리 짐작하고 알고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23절에서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잊게 만들어요.

요셉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나름대로의 혜택을 줬거든요. 혜택을 줬는데, 그래서 어느 정도 보상을 기대하는데 주님께서는 그 보상을 끊어버립니다. 다시 말해서 요셉이 스스로 처분할 수 있는 자기 것이 아무것도 없게 만들어요.

뭔가 움직거리려고 한다면 종자돈이라도 있어야 되잖아요. 요셉의 처지는 자기가 도움을 줬던 사람에게 얼추 희망을 가졌다 그 말이지요. 그런데 그 희망을 하나님 쪽에서 끊어버렸습니다. 희망을 끊으니까 요셉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요.

그게 바로 요셉이, 나는 요셉이라는 것을 제거하는 하나님의 언약적방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찾아오게 되면 우리가 갖고 있던 모든 기대와 희망과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어떻게 해서 보다 나은 미래를 설계하고 계획하는 그것, 그 모든 것을 전부 다 무산시켜 버리는 겁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요셉의 사적인 뜻을 반영할 의사가 전혀 없어요. 요셉은 요셉에게 뒤집어씌운 꿈이 실현되어야 될 하나의 도구지 요셉 본인의 개성이라든지 계획이라든지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하나님은 아니에요.

설교 다시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요셉을 주목하는 것은 요셉을 언약사람으로 만드는 겁니다. 언약사람으로 만드는 것은, 요셉이 여기 있고 요셉에게 언약을 추가해서 주면 언약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요셉이, 나 여기 있고 그 다음에 언약이 주어졌다, 여기서 그 주어진 언약이 요셉이 알고 있는 그 요셉 자신을 없애버리는 식으로 언약이 달성되고 실현되는 겁니다.

사람이 본인이 있는 이상은 본인의 희망과 기대 같은 것을 추구하기 마련이에요. 인간은 육이니까. 인간은 육인데,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육을 내쳐도 되는데 내치지 않고 하나님의 언약이, 약속이 육을 가지고 언약 안에 있는, 약속 안에 있는 본래 하나님이 원하는 약속과 천국을 육의 사람을 통해서, 육의 사람을 가지고 교제하거나 대화하면서 거기서 이 세상에 없는 새로운 진짜 하나님의 약속을 생산해 내는 겁니다.

그런 관계 속에 요셉이 놓여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요셉뿐만 아니고 오늘날 성도라는 사람이 요셉과 똑같은 과정을 겪게 되는 겁니다. 어떤 과정? 내 뜻과 희망이 전부 다 작살나는 것, 내 소원은 인정하지 않는 것. 내가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를 내가 알아서 하는 것을 주께서는 철저하게 차단시켜 버립니다.

저는 요즘 들어서 지옥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는 네 나라와 내 나라를 가름하잖아요. 우리는 남쪽 대한민국, 저쪽은 북쪽. 나는 대한민국, 너는 북한. 내 나라 네 나라, 이렇게 되는데 성경에서는 네 나라 내 나라를 구분하는 것이 아니고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합니다.

천국과 지옥이 되려면 하나님의 언약이 임한 사람은 새삼 네 나라 내 나라를 따지는 그 자체가 지옥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안목, 그 눈이 열려야 돼요. 둘 다 정상이라고 해 봐야 둘 다 지옥 갈 사람들이 지옥에서 만난 거예요. 백화원이라든지, 백두산관광이라든지, 평양에서 만나든지 어디서 만났든지 그것은 요셉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냥 지옥에서 옆 동네 지옥으로 잠시 만나러 간 거예요.

그런데 문제는 그 뉴스가 온 국민을 현혹시킨다는 겁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백날 노래 불렀더니만 드디어 하나님께서 우리가 철야 기도한 그 응답으로 우리국민을 통일시키는구나.’ 그렇게 돼요. 지금 요셉이 남북통일을 원합니까? 요셉이 남북통일을 원하는 거예요?

물론 요셉은 억울하니까 이렇게 옥에 갇히지 않고 고향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그런 정도의 요셉이라면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꿈을 주지도 않았고 아예 애굽에 팔려오지도 않았어요. 창세기 40장 15절 보게 되면, “나는 히브리 땅에서 끌려온 자”거든요.

히브리 땅에서 요셉 혼자 끌려왔다가 도로 고향인 아버지 집으로 간다면 그 가운데서 언약이라든지 하나님의 꿈의 의미는 다 없어지는 겁니다. 소용없게 돼요. 적어도 꿈에 의해서 애굽까지 왔다면 요셉을 통해서 뭘 이야기해야 되느냐 하면, 애굽나라와 히브리민족, 장차 이스라엘과 어떠한 연관성을 가지느냐? 어떻게 서로 대립적인 속성의 나라인가를 요셉을 정탐꾼으로 해서 먼저 시범적으로 보여주는 기능을 충분히 해야 되는 겁니다.

애굽나라는 그냥 애굽나라가 아니에요. 애굽나라는 이스라엘을 이 땅에서 말살하는 속성을 가진 나라가 애굽나라입니다. 시편 83편 4절에 보면 그게 나와 있어요. “저희를 끊어 다시 나라가 되지 못하게 하여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다시는 기억되지 못하게 하자 하나이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시편 2편에 봐도 이방인들 편에서는 상당히 낯선 이야기가 나와요.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 기름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 맨 것을 끊고 그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도다.”

애굽을 대표자로 해서 이스라엘 빼놓고 모든 열방이, 그들의 국가가 내부적으로 어떤 속성을 갖고 있는데 그 괴물적인, 악마적인 속성이 뭐냐? 이스라엘을 통해서 오는 메시아와의 관계성을 끊어버리자 하는 경향성, 지향성을 가지고 세상 모든 나라가 움직이고 있습니다.

월드컵에 참석하는 나라도 2백 개가 넘어요. 월드컵이 그냥 축구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축구하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에요. 축구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메시아와의 관련성을 우리가 못 본 척 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말자는 속성으로 월드컵 벌리고 있는 겁니다. 세계올림픽 하고 있는 거예요. 남북정상회담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그 메시아는 시편 2편에 보면, 철장으로 온 세상을 다 박살낼, 토기를 깨듯이 싸그리 다 박살낼 심판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을 통해서 일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요셉을 통해서 애굽의 속성이 뭔가를 근거정도는 밝혀져야 되는 겁니다.

왜 아브라함언약에서 애굽에 갇혔다가 4대만에 나와야 되는지, 창세기 15장에 나오는 그 예언 따라서 지금 요셉이 애굽에 팔려왔으니까 요셉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장차 이스라엘이 다 들어있어요. 이스라엘국가가 들어있고, 그리고 요셉을 감옥에 집어넣은 그 애굽의 제도와 애굽의 모든 정서는 장차 요셉에 의해서 멸망당할 나라의 모습을 보여주는 겁니다.

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봅시다. 왜 술 맡은 관원장은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어버렸느냐? 이게 오늘날 우리의 모습하고 동일해요. 지금 술 맡은 관원장이 같은 교도소에 있는 젊은 사람, 착실하게 보이는 히브리 노예, 그것까지 지금 신경 못씁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전에 바로왕에게 잘못한 것이 있어서 빨리 복권되기를 원하는 거예요. 전에 잘나갔을 때처럼 최측근으로 권력행사하고 자기가문의 영광이 되는 것, 그것을 소망하고 있는 겁니다. 국가라는 것이 원래 그래요. 국가라는 것이 국민들을 교육할 때 조상들의 지혜를 받아서, 애들에게 가르쳐서, 선조보다 더 훌륭한 국민들을 만들어서 보다 나은 국가를 형성하는 것이 오늘날 국민교육이잖아요.

조상의 지혜를 받아서 선조들보다 더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이게 국가가 계속 후손들에게 가르쳐야 될 교육의 모토가 되는 겁니다. 누가 봐도 지당한 그 사고방식이 하나님의 꿈에 의해서 개입된 요셉 앞에서는 의미가 없는 거예요.

요셉은 끊어짐이에요. 지상에서는 네 나라 내 나라 있고 내 나라 네 나라 있지만 야곱의 언약에 의하면 지옥 아니면 천국, 천국 아니면 지옥이에요. 네 나라 내 나라 그게 천국 아닙니다. 천국 가려면 요셉같은 경험을 해야 돼요. 세상에 있는 모든 미련들이 다 끊어져야 됩니다.

그런데 이 술 맡은 관원장은 일단 자기가 살게 된다니까 기뻤고, 그 다음부터 자기가 그리워하고 기대하는 것은 빨리 복권되어서 옛날처럼, 잘 나가던 그 때처럼 임금 앞에서 총애 받고 살아가는 그것이 소망인 거예요.

이것은 술 맡은 관원장과 요셉을 대비해볼 때 술 맡은 관원장을 너무 탓하지 마세요. 사적으로 자기 원하는 그것 생각한다고 바빠요. 오늘날 우리하고 똑같습니다. 모든 인간은 나름대로의 기대하는 바가 있어요. 저는 그걸 4자성어로, 물론 4자성어도 아니지만, ‘보고 싶다’ 그렇게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인간들은 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부러운 것이 있다고요. 장사하는 사람은 손님들이 마구 밀려들어오고, 밀려드는 손님들 다 처리를 못해서 직원 한 다섯 명 두고, 자기는 뒤에서 카운터 보면서 흐뭇해하는 그런 미래의 사장으로서 성공한 그것을 자기가 ‘보고 싶다’가 되는 겁니다.

개척교회 목사는 교회 열었더니만 교인들이 차고 넘치고, 헌금도 주체를 못하도록 들어와서 예배당 넓히고 또 차면 또 넓혀서, 거기서 설교하면서 흐뭇해하는 그런 당회장이 ‘보고 싶은’ 거예요. 또 교회 와서 어떤 총각이 아가씨를 봤다면 그 아가씨와 결혼해서 아파트 장만하고, 애 낳고, 아내가 앞치마 두르고 “다녀오세요.” 하면 자기는 가방 하나 들고 행복해 하면서 출근할 때면 그 때 애는 아빠 출근할 때 뽀뽀뽀, 노래 불러주는 그것이 ‘보고 싶은’ 거예요.

보고 싶다, 보고 싶다, 하니 김범수가 부른 노래가 있어요. 죽을 만큼 보고 싶은 거예요. 그리워하는 것, 보고 싶어 하는 것, 이거 없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심지어 개도 사료를 보고 싶어 할 것인데.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가 보고 싶고, 엄마가 보고 싶고, 형제들이 보고 싶은 거예요. 자기는 너무 억울하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뭐냐? 그 ‘보고 싶다’를 사정없이 끊어버리는 겁니다. 자기가 베푼 은혜도 아무 보상이 없어요. 하나님의 개입입니다. 왜냐하면 네가 그냥 돌아가게 되면 애굽은 애굽대로 그냥 있고 히브리사람은 그냥 히브리사람으로 가버려요.

거기서 어떤 언약적인 실제성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요셉은 요셉본인이 보고 싶고 되고 싶은 것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것은 요셉뿐만이 아니고 모든 성도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이 성도입니까? 그렇다면 여러분은 뭘 해야 되느냐 하면, 여러분은 내 쪽에서 뭘 해보고자 하는 그 모든 것은 절대로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몰아넣는가? 하나님께서 어디까지 몰아넣느냐 하면, 시편 102편 20절에 보면 이런 끔찍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참 이것은 끔찍한 이야기에요. “이는 갇힌 자의 탄식을 들으시며 죽이기로 정한 자를 해방하사.”

하나님께서 우리를 가지고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를 가지고 하나님이 원래 약속 속에 들어있는 개념들, 이 지상의 인간들은 모르고 하나님만 알고 있는 그런 개념들을 육적인 우리를 가지고 하나님이 새삼스럽게 생산해내는 거예요.

구원이 무엇이며, 교회가 무엇이며, 천국이 무엇이며, 하나님의 의가 무엇이며, 사랑이 무엇이며, 은혜가 무엇이며, 천사가 무엇이며, 주님이 무엇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성경책을 보고 아는 것은 일체 인정하지 않아요.

그것은 나의 ‘보고 싶다, 되고 싶다, 하고 싶다, 그리워진다, 나의 소망, 기대’ 그것과 결부되기 때문에 그런 것을 주께서 다 차단시켜 버립니다. 내 소망 이뤄지기 위해서 하나님 계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하나님께서 모든 행함을 다 끊어버려요.

기존의 국가운영이라든지 기존의 세상의 눈에 보이는 것들은요, 심지어 인간의 종교라는 것도 먼저 인간이 행함을 내놓지 아니하면 되는 일이 없어요. 굿을 하든지, 철야기도를 하든지, 헌금을 하든지, 봉사를 하든지 뭐든지 먼저 행함이 던져져야 그래야 영적이든지 신령한 것이 생긴다는 거예요. 계시도 철야를 하든지 나무뿌리를 뽑아야 계시 받는다고 그렇게들 이야기하잖아요.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하나님의 권능을 세우신다고 했거든요. 젖먹이가 무슨 기도를 할 줄 압니까? 어린아이가 무슨 기도를 할 줄 알아요?

지금 이 술 맡은 관원장은 자기가 놀던 나라로 되돌아왔어요. 자기가 놀던 나라, 자기가 살았던 그 나라로 되돌아간 겁니다. 요셉도 그런 사람이 부럽지요. 자기가 도움을 준 사람, 술 맡은 관원장은 복권되었는데 자기는 복권이 안 되고 있잖아요. 자기는 다시 고향으로 못 돌아가고 있잖아요.

속에서 뭔가 상당히 억울할 거예요. 하나님이 나를 너무 심하게 다룬다, 섭섭하게 한다는 그런 생각도 들 수 있을 거예요. 오늘 본문 보세요.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었더라.” 이게 술 맡은 관원장이 못돼먹어서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일부러 기억나지 않게 개입하고 말았습니다. 요셉이 나름대로 자기의 괜찮은 미래를 위해서 뭔가 시도하는 것을 아예 끊어버리기 위해서.

천국은 요셉의 꿈의 나라지 요셉의 나라가 아니거든요. 요셉이 섭섭했다고는 나와 있지 않지만 섭섭했다고 치고요. 요셉이 그렇게 소원했으니까요. 그걸 봐서 요셉 속에 섭섭한 마음이 있다 치고 요셉에게 섭섭한 마음이 있었다면 요셉이 모르는 것이 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현재 요셉이 감옥에 억울하게 갇혀 있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요셉답다는 사실을 요셉 본인이 안 받아주고 있습니다. 모든 도움을 요청할 데가 다 차단되었다는 그 사실, 그 사실이 지금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기에 가장 합당한 모습인 것을 요셉은 받아들여야 돼요.

그게 시편 105편에 나옵니다. 18, 19절에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 말씀이 저를 단련하였도다.” 천국 가는 사람은 이래야 돼요. 천국 가는 사람은 천국이 내 나라 되면 안 됩니다. 천국은 내 나라가 아님을 알아야 돼요.

그래도 천국 간다면 그 ‘나’라는 나를 잊어야 돼요. 내가 아는 나가 아니라 주님이 찾아와서, 말씀이 찾아와서 그 말씀이 응하면서 비로소 새롭게 등장하는 나, 그게 바로 영원히 주님과 함께 살 나가 되는 겁니다.

내가 되고 싶고, 내가 보고 싶고, 내가 하고 싶고, 내가 뭔가 원하는 그런 나, 그것은 주님께서 원하는 바가 아니에요. 그것은 잘못된 겁니다. 요셉이 왜 이런 어려운 지경에 빠졌는가? 왜 이렇게 하나님께서 요셉을 기억지 않고 잊게 했느냐를 알기 전에 먼저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어떻게 생각하느냐를 아셔야 되지요.

왜냐하면 술 맡은 관원장이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그대로 대변해주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길가에서 담배 피우는 사람들 보면서 담배꽁초를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봐요. 담배를 다 피우고 휙 하고 던져버려요. 아마 청소하는 사람들의 제일 많은 쓰레기가 담배꽁초일 겁니다.

담배꽁초를 왜 버립니까? 뽑아낼 니코틴 다 뽑아냈다는 그거거든요. 써먹을 것 다 써먹었다는 말이지요. 마치 플라스틱주스 빈 컵 같아요. 홀딱 뽑아내고는 갖다 버리는 겁니다. 술 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더 이상 볼 필요조차 없는 거예요.

그래서 요셉은 자기가 도움을 준 이 술 맡은 관원장에게 철저하게 버림받은 거예요. 배신당한 겁니다. 천만다행이에요. 왜냐하면 술 맡은 관원장이 가는 나라가 뭐냐 하면, 애굽이거든요. 애굽은 어떤 속성이 있느냐?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장차 야곱을 통해서 생길 이스라엘 나라를 공격하는 속성으로 꽁꽁 묶여진 나라가 애굽나라입니다.

북한, 북조선이나 남한이나 전부 다 마찬가지로 애굽나라에요. 자기에게 필요치 않으면 언제든지 버리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요셉 속에 뭐가 있느냐 하면, 그 나라를 통솔해야 될 통솔자로서 요셉이 거기에 등극하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통솔자냐? 나이 서른여섯 먹고, 머리 뒤로 돌려서 밀고, 뚱뚱한 몸집을 해야 통솔자입니까? 세상의 통솔자는 인간의 행함이 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만이 온 우주의 주가 되고 통솔자가 된다는 것을 요셉을 통해서 미리 보여주고 있는 겁니다.

일체 인간의 힘이라든지, 인간에게 기대하거나, 인간으로부터 얻을 생각이나, 세상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만이 이 세상의 진정한 통솔자가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요셉의 꿈의 내용입니다. 요셉의 꿈은 쉽게 말하면 엘리야가 타고 하늘로 올라간 불마차라고 보면 돼요.

엘리야가 불마차 타고 하늘로 올라갈 때 지상의 것들은 불마차 위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니고 심판의 대상일 뿐이에요. 시편 118편 8, 9절에 이런 말씀 나옵니다. “여호와께 피함이 사람을 신뢰함보다 나으며 여호와께 피함이 방백들을 신뢰함보다 낫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요셉이 새로운 요셉이 되려면 이러한 내용이 꽉 들어 있어야 되는 겁니다. 요셉이 나름대로 뭔가 행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 다 차단시켜 놓는 거예요. 요셉이라도 왜 아는 사람 안 찾아가겠습니까? 애굽의 빽 있는 사람들이요. 그것을 주께서 기억지 않게 했다니까요?

요셉이 자기의 소원대로 나아질 수 있는 어떤 경우의 수도 주께서 일부러 다 차단시켰어요. 그게 바로 성도의 살아가는 길이고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길이 그 길입니다. 우리는 이 나라 저 나라로 가는 것이 아니에요.

우리는 천국에 가야 되는데 천국은 이 세상에 없는 나라에요. 없는 나라 가려면 이 세상 사람들처럼 뭔가 행함으로 시도하는 그러한 원칙은 우리 속에서 삭제되어야 되고 우리 속에서 빠져야 됩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천국 가는 사람과 이 세상 사람과의 차이점을 예수님께서 기적을 통해서 이렇게 보여줍니다. 누가복음 17장 11절부터 보게 되면,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에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촌에 들어가시니 문둥병자 열 명이……”

한 명도 아니고 열 명이었어요. “열 명이 예수를 만나 멀리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하거늘 보시고 가라사대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은지라.”라고 되어 있어요.

그들이 복귀하기를 원하는 것은 문둥병 들린 상태에서 옛날처럼 깨끗한 몸이 되는 그것을 소원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본인들은 문둥병 들릴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스스로 자기를 오인했지요. 제가 오인이라는 말을 썼습니다.

제가 만약 문둥병 걸린다면, 나는 너무나 훌륭하기 때문에 이런 지독한 병에는 안 걸려야 돼, 라는 생각을 내가 스스로 문둥병 걸리면서 갖게 된다는 겁니다. 비록 그 병을 하나님께서 걸리게 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극렬하게 반발하고 반항합니다.

“하나님이여, 이럴 수가 있습니까?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데 왜 저에게 이런 지독한 병이 걸리게 합니까?” 이렇게 된다고요. 질병뿐만이 아니고 인생도 마찬가지에요. “왜 이렇게 내가 힘든 인생을 살게 합니까?” 이게 오늘날 요셉과 마찬가지거든요.

그게 천국 가는 필수 절차인데 그들은 그냥 깨끗한 자기소원, 내가 되고 싶은 것, 나는 건강한 사람 되고 싶다는 것을 소원했고 주께서는 그 소원을 들어줬어요. 그들의 소원을 들어줬지만 그 뒤에 나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만이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예수님의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것도 사마리아인이에요. 유대인들이 저들은 지옥에 간다고 아주 단정 지은 사마리아인이 예수께 나왔습니다.

주님께서 묻습니다. 열 사람이 깨끗함을 입었는데 나머지는 다 어디 갔느냐, 라고 물어요. 뻔히 아시면서 묻는 겁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 돌린 자가 없다. 다시 말해서 다시 주님께 돌아온 자만이 몸 깨끗해졌느냐 아니냐의 여부를 떠나서, 그 사람만이 천국에 들어갈 사람이라는 겁니다.

주님께서 오신 것은 우리가 소원을 들어주러 온 것이 아니에요. 그런 종교는 많아요. 기독교나 천주교나 다 그런 종교예요. 그러나 종교가 인간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수정되어야 돼요. 구원받고자 하는 내가 수정되어야 돼요.

나는 천국 가 있는 내 모습을 그리워하는 것, 이것은 잘못된 거예요. 그것은 내 소원이지 주님 소원은 아닙니다. 우리가 과연 천국 갈 자격이 있는지를 스스로 물어봤습니까? 물어봤냐고요. 자기 잘났으니 천국 가야 된다는 그 말입니까?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우리가 꿈을 향하여 갈 수 있는 모든 것을 차단시키고, 그런 가능성이 없게 하는 그것을 시편 102편에서는 갇힌 자라고 했고 죽이기로 정한 자, 우리는 이 땅에서 죽어 마땅한 자, 절망 가운데 죽어도 할 말이 없는 자 되게 하시는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가 크게 감사되는 순간입니다.

오늘 본문의 요셉은 극히 피동적으로, 수동적으로 움직여요. 주께서 요셉을 바꾸기 위해서 그런 겁니다. 뭘 로 바꾸느냐? 뭘 해도 감사하고, 뭘 해도 고마운 그러한 사람으로 바꿉니다. 요셉이 지금 옥에 갇혔는데 요셉이 여기서 탈출할 생각을 하지 말고, 여기서 벗어날 것을 생각하지 말고 지금 갇힌 이 상태가 하나님 보시기에 가장 말씀이 말씀답게 꼭 필요해서, 적절해서, 주께서 의도적으로 가두어놓은 이 상태임을 요셉은 감사해야 됩니다.

그리고 앞일은 주님의 꿈이 알아서 하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이 우리를 다뤄야 되는데 우리는 주객이 반대가 되어서 우리 소원대로 주님이 움직여줄 것을 건방떨면서 요구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떤 자리의 어떤 존재인지, 우리가 이 세상 사람이라서 지옥갈 수밖에 없는 그런 인간을 위하여 십자가의 은혜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잊지 말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