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홍민희 강남-요한복음 18장 1절(사랑의 전달) 180904a-이근호 목사
자, 오늘은 요한복음 17장 26절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건 일방적인 예수님 이야기죠. 예수님께서 그렇게 하겠다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만약에 자 여기 구제품이 있다 가져가라 라고 하신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님이 준비한 것을 우리 쪽에서 달려가서 그걸 꺼낼 방법이 없어요. 여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 자 가져가! 해도 우리가 무슨 수로 가져옵니까? 가져올 수가 없는데. 예수님의 사랑이라는 것은 그 사랑을 형성하는 그 요건 중에 하나가 사람들이 예수님을 떠밀었잖아요.
사람들 속에 있는 속성이 예수님을 밀쳤다 이 말이죠. 예수님을 밀쳤는데 밀친 그 당사자를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아이고 미안합니다 우리의 사랑을 몰라봤습니다 내가 다가설 수 있는 그러한 능력이 우리 안에 과연 여전히 남아있을까를 생각해보세요. 없어요.
우리가 예수님을 미워할 때는 자신의 있는 가진 것을 다 종합해볼 때 예수님은 그다지 우리에게 필요치 않고 우리를 괴롭게 한다 해서 예수님을 떠밀고 우리 인간세계 밖으로 추방을 시켜놨는데, 이제 와서 무슨 마음이 들어가지고 아! 우리가 실수했습니다. 우리가 죽이지 않을 분을 죽였습니다. 자 가자 예수님한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얻으러 가자 우르르 몰릴 수 있는 그런 색다른 요소가 우리에게는 남아있지 않아요. 전부를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서 결론 내린 결론이 예수님은 죽어 마땅하다는 결론이거든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이 있다 해봤자 소 귀에 경 읽기처럼 우리한테는 그것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어떤 연결고리는 전혀 없습니다. 그럼 방법은 뭐냐 하면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사랑을 만드는 그 사랑을 우리에게 친히 가져오는 방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26절을 보면서 그리고 18장을 보면서 뭐를 생각했느냐 하면 예수님은 어떤 식으로 우리에게 사랑을 제공하느냐 그것을 우리가 알아야 해요. 적어볼께요.
자, 우리 쪽에서는 주님의 사랑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방법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사랑을 전달하시는가? 이게 요한복음에 남은 예수님의 과제가 되는 겁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기도, 기도 내용에 보면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라고 그 요한복음 17장 16절에 나오지요? 그렇잖아요.
제 말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분명히 16절에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분명히 되어 있지요? 지금 거짓말하는거 아닙니다.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러니까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라는걸 그걸 너희도 느끼지? 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냐하면 이거는 순수하게 예수님 본인 혼자 그렇게 결정 내린거예요. 이 말 듣자마자 그래 나 세상에 안 속했어 하고 유유자적하게 살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낙오자 될까봐 벌벌 떨거든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 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님 개인의 소견이다 이 말이죠. 주님께서 혼자 단정한 그 내용을 봤지? 그래서 너희도 알아서 느껴라 하고 할 수가 없어요 우리는. 우리는 이 세상 없이는 못 삽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이 세상 사람이에요. 물론 세상에서 나를 실망케 하면 마지막에 번개탄 피워놓고 죽는 순간 죽는 순간도 아마 죽으면서 세상 원망 많이 할걸요. 나 같은 인재를 못 알아보다니 하면서 그렇게 죽을 수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원망하는데.
어쨌든간에 예수님의 일방적 생각을 그거는 주님의 생각이고 우리의 생각은 그게 아닌데 주께서 이렇게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말을 이미 단정하시고 그 다음에 절차가 뭐냐 하면 그렇게 단정한 것을 자기 백성에게 전달하는 것만 남아있어요. 전달하는 것만 남아있다 이 말이죠.
이런 것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같이 너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했다는 이것을 만약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전달하고자 할 때에 우리가 기분 좋아요? 아니면 반갑습니까? 아니면 별로 반갑지 않아요? 어떤 마음입니까? 뭐 돈이나 좀 주시지 뭐 쓸데없이. 우리가 원한적도 없는데 왜 쓸데없이 그걸 주실려고 합니까 라고 별로 달갑지 않지요.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예요. 26절 봅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나한테 있다. 아버지의 사랑이 나한테 있다. 이제 그 사랑을 내 백성한테 내가 전달하겠다. 그거는 주님의 뜻이에요. 우리는 아버지의 사랑을 그다지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주겠다는 거예요. 그리고 가져가라해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에 나 말고 내가 나보다 더 월등한 사랑을 찾아서 나서고 싶은 생각이 우리에게는 전혀 없습니다. 그런 의사는 없습니다.
주님을 사랑해도 그것이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조건하에 주님을 사랑하지 내 사랑 포기하고 주님께 가지 않아요. 그러면 여기서 주님께서 어떻게 전달하느냐. 그 이야기하기 전에 그러면 사랑이 뭐냐. 사랑이 뭐냐. 주님이 확정한 사랑이 뭐냐면 일체감이에요. 일체감. 분명히 둘인데 하나예요.
그게 어디 나오느냐 하면 창세기 2장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다음에 여자를 만들었죠. 자, 여자는 뭐냐 남자는 뭐냐 분명히 누가 봐도 그거는 두 사람이에요. 두 사람인데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볼 때, 이 두 사람이 한 사람으로 볼 때 서로 객관적으로 볼 때는 떨어져있어요 떨어져있다고요.
잠을 자고 떨어져 자고 밥을 먹어도 각자 밥을 먹고 밥을 떠서 남에 입에 집어넣는 그런 일은 없다 이 말이죠.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생활에 그런게 있어요. 숟가락으로 남 입에 넣어주고 남이 자기 입에 넣어주고 얼마나 불편합니까. 자기가 퍼 먹으면 되는걸. 뭘 남을 배려한다고 그런건 요양병원에나 그런게 있어요. 요양병원에나. 요양병원은 아침에 난리도 아니에요. 밥 먹는데.
이 둘 사이에 분명히 둘인데 누가 봐도 둘인데 하나라고 규정하는 겁니다. 그러면 두 사람이 둘이라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이게 둘 사이에 사랑이 있음이라는 것을 빠트리게 돼요. 두 사람 만들어 놓고 부부라고 하면 안돼요. 하나를 해놓고 하나를 둘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분명히 둘이라도 이것이 하나이다.
그러면 그 하나에서 둘 사이에 결코 둘이 아니야 라고 할 수 있는 어떤 요소가 있어야 될 게 아닙니까. 그 요소를 가지고 바로 사랑이에요. 그 사랑을 아담이 뭐라고 하느냐 하면 내 살 그 다음에 살 중에 살이죠. 맞지요. 자기 갈빗대에서 나왔으니까. 내 살 중에 살이라는 말은 영어로 하면 in 이죠. 어디 안, 안에 있는거예요. 당신은 내 안에 있다는 겁니다. 비록 떨어져 있더라도 내 안에 있는거예요.
그걸 저는 일체감으로 봅니다 일체감. 부부 그렇게 사십니까? 한국에 들어간다. 너나 가라. 일체감이라 하는 것은 너도 안 보고 나도 안 보고 제 3의 하나에다가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겁니다. 자기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 그걸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그대 앞에서 나는 소멸되는 거예요. 그대 앞에서. 김수희가 이야기 했잖아요. 그대 앞에만 서면 나는 왜 이리 작아지는가. 그대 앞에서 왜 작아지는가.
사랑이라 하는 것은 조건이 뭐냐. 반드시 둘이 형성돼야 되고 그 다음에 둘이 끝이 아니예요. 시작은 둘이고 끝은 하나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지금 나는 내 중심으로 살잖아요. 그럼 뭐가 누락되느냐 하면 사랑이 없어요. 하나에서 나와서 하나로 돌아가기 때문에 사랑이라는게 없습니다. 그냥 정복욕이죠 소유욕이죠. 저거 내거야 하는 소유욕이죠.
저는 그 결혼식할 때 반지 하는거 아주 저는 반대합니다. 그 반지가 마치 코 꿰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반지를 줌으로서 너는 내거야 라는 그런 의식처럼 느껴져서 아주 거부감을 가집니다. 그래서 저는 제 아내한테 반지 준 적 없습니다. 돈이 아까워서 그랬겠지. 왜 소유를 해야돼요? 왜 소유해야 됩니까? 차라리 소유 당하는게 낫지요. 소유해서 뭐 이렇게 부릴려고? 종으로 삼으려고 하녀로 삼으려고 하는 겁니까?
편하게 네 인생 내 인생 살면 돼지 왜 상대방을 관여하고 간섭하고 왜 그런거예요? 그런 것을 저는 아주 못마땅해 해요. 사랑이라는 것은 내가 있는 이상은 사랑은 필요 없어요. 모든 것이 내 앞에 꿇어야 되고 내 앞에 벌벌 기어야 되고 그게 선악과 따먹은 인간의 악마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2장 이야기하는 겁니다. 제가 3장 이야기 하는거 아닙니다. 2장 이야기하는 겁니다. 2장을 딱 보게 되면 그 일체감, 사랑이란 것이 있기 위해서 나 말고 누가 있어야 돼요. 그렇다면 그 나 말고 누가 등장하는가.
주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어떻게 사랑을 전달하느냐 할 때 주님께서는 본래의 아담으로 우리에게 등장하는 거예요. 우리의 짝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라고 요한일서 4장에 우리가 사랑을 한 게 아니예요. 그럼 사랑에도 우선순위가 있다는 말이죠. 우리가 주님을 사랑한 게 아니고 그러면 사랑이 아니예요. 그건 예수님마저 소유하려는 소유욕이고 종교적인 탐욕이 되는 겁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어느 분이 등장해야 돼요. 내가 그 분을 사랑한 적이 없다는 것을 알려주는 그 분.
그러면 그걸 어떻게 알아요? 그쪽에서 우리한테 필이 꽂혀야 되지요. 네가 사랑한 것이 아니고 내가 너를 사랑했다가 했다라고 외치면서 다가와야 되겠지요. 예수님 앞에서 이뻐보이려고 할 필요 없어요. 왜냐하면 우리가 이뻐보이지 않더라도 재롱부리지 않더라도 이미 주님은 우리한테 꽂혔습니다. 아무것도 안 한 우리한테 꽂혔어요. 왜냐하면 다가오심 자체가 주님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인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의인을 사랑하면 주님의 사랑이 아니지요. 죄인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그 죄인과 예수님을 자기를 뭐로 보느냐 동질화시킨 겁니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이것은 터무니없는 사실이죠. 어떻게 원수를 자기의 한 몸으로 삼습니까? 원수인데. 원수 잖아요 원수. 원수잖아요. 우리는 하나님께 원수된 자 잖아요 로마서 5장 10절에. 그런데 어떻게 원수를 자기 몸으로 삼습니까?
자기를 핍박하고 자기를 내치고 자기를 꼴보기 싫다고 자기를 도망친 자를 어떻게 자기 사람으로 삼드냐 이 말입니다. 그 찾아올 때 새삼스럽게 우리 잘 해보자고 찾아오는게 아니예요. 이미 그 자기 신부가 행했던 모든 죄를 대신 다 치뤄놓고 오는거예요. 그것을 값을 치뤘다고 하죠 값을.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고 치룬 흔적을 지니고 십자가입니다. 흔적을 지니고 대신 다 해결했음을 통보하면서 우리에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뭐냐 하면 너는 내 안에서 하나의 원래부터 하나였었어 하면서 오는 겁니다. 그걸 에베소서 1장에서는 ‘예수 안에서 예정’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서 창세전부터 예정된 자’
그러니까 성경이 우리 이야기가 아니고 주님 자신의 이야기예요. 예수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이야기는 예수님이 하나 빠트림 없이 예수님이 알아서 그것을 다 구현해내요.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지키려고 하면 떼찌! 손 떼!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하지 마! 주의 증인이 되리라 했거든요 그런데 주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그런 짓 하지 마 주의 증인 되는 짓 하지 마. 내가 되게 해줄게 내가 되게 해줄게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사랑이 정말 주님의 이러한 엄청난 사랑이 우리한테 꽂혀서 우리가 원하지도 않았는데 찾아오신거예요. 그래서 이사야에 보면 뭐냐, 구하지 않았는데 ‘나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 내가 찾아냄이 됨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사야 65장인가 그렇게 되어 있지요? 65장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이렇게 되어 있지요? 나를 구하지 않는 자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이유는 바로 이사야 61장에 보면 하나님의 성령이 오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이 오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목사님 저 성령 받았어요? 안 받았어요? 저 안 받은거 같기도 하고 받았다면 어떤 흔적 티가 납니까? 라고 물으면 내 쪽에서 아무것도 한 것도 없는데 주님께서 다 이루었다 하시면서 나 내 잃어버린 내 자식 찾으러 왔어. 주인이 와서 자기 물건 찾아갈 때 그 주인을 만난 그 물건, 잃어버린 양이라고 해요. 잃어버린 동전 또는 탕자 그걸 찾아냄을 당할 때 그게 바로 성령 받은거예요. 뭐 뜨겁다 머리에 열이 난다 그런거 가지고 하지 마시고 아무것도 안 해도 돼 라는거예요.
교회 안가도 되고 헌금 한 푼 안 해도 되고 선교 전도 안 해도 되고 기도 안 해도 되고 성경공부 안 해도 되고 이렇게 안 모여도 되고 뭔가 그냥 나는 내 식대로 살아갔는데 그걸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너는 처음부터 창세전부터 너는 나의 신부였어 라고 내 사랑이였어 라고 찾아오는 것.
어화둥둥 내 사랑이야. 그 다음 가사가 뭐냐 하면 앞을 봐도 이쁘고 뒤를 봐도 내 사랑이라고 하잖아요. 옆을 봐도 마찬가지고 너무나 일방적이죠. 어떤 사랑 받을 조건을 구비한 적도 없는데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사랑을 하니까 우리는 그냥 받기만 했을 뿐. 그냥 받기만 했을 뿐이에요. 해준 거 없이 그냥 받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게 성령 받은 거예요. 그게 성령 받은 거예요.
그리고 성령 받고 난 뒤에 더 따로 또 해야 될 어떤 과제 같은 것 없습니까? 없어요. 우리 쪽에서 할 것은 없습니다. 그 이유가 있어요. 성령께서 신랑이 우리에게 찾아왔을 때 아담이 자기 신부를 찾아 왔을 때 그 신부가 어떤 신부냐 하면 이미 죽은 자로 간주를 하고 찾아와요 죽은 자. 죽은 자로 간주한다는 것은 생명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 철저하게 무능한 자 그게 죽은 자예요. 선악과 따먹은 날에는 그 뒤에는 정녕 뭐라고 했습니까? 죽었지요.
선악과 따먹도록 허락해가지고 인간을 죽은 자로 만들었어요. 아무리 살아있어도 나이 들면 다 죽어요. 우리는 이미 죽음이 우리 안에 들어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동하며 내세우는 것은 그게 죽음의 흔적들이에요. 육체의 열매가 다 죽음의 흔적들이에요. 뭘 해도 거기에 우리가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담긴 채 행동하게 되어 있습니다.
행동해놓고 어떤게 죽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되느냐 하면 주의 말씀에 의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아는 거예요. 이것은 주의 말씀에 위반되지요.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했는데 이미 알아 버렸잖아요. 그러니까 너는 산 자가 아니라는 거예요. 스스로 산 자가 될 수 없는 거예요.
기도할 때 달라고 기도하지요. 달라고 기도 왜 하겠습니까? 그냥 달라고 기도하는 그것이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예요. 그러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달리 기도하면 되지 않겠느냐 생각하겠지요. 달리 기도하는 방법을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기도할 때 주여 안 줘도 됩니다. 기도 원대로 해주지 마세요. 이럴꺼면 아예 기도하지 말지 뭐 때문에 하겠어요. 수고스럽게. 달라고 하는 의도가 있기 때문에 기도하거든요. 다급하다는 거예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면 세자로 이것을 ‘절실함’ 입니다 절실함, 절실함.
이번 한국이 아시안게임 때 한국이 야구 대표팀이 금메달 땄잖아요. 대만한테 2:1로 졌지요. 그런데 금메달 땄잖아요. 왜? 절실함 때문에. 손흥민이가 왜 그렇게 설쳤습니까? 군대에 안 가려고. 이 절실함이에요 절실함. 살면서 자기 하는 행세 보니까 지옥 갈 게 분명하거든요. 그럼 무슨 절실함이 생깁니까? 어쨌든 저쨌든 도를 아십니까든 뭐든 간에 구원을 받아야겠다는 그 절실함이 사람들로 하여금 교회로 이끈거예요. 교회로 모인겁니다. 그러니 이게 교회가 지옥의 단체지요.
절실함들의 집합소예요 절실함들의 집합소. 거기는 느긋한 사람 오게 되면 이상하게 봐요. 느긋한 사람이 오면. 너 뭐 믿고 느긋하냐? 십자가 믿고 느긋하다 하면 이해가 안돼요. 너는 왜 그렇게 절실함이 없어? 안 해도 되거든. 무슨 배짱이 똥배짱이 저란 배짱이 다 있냐 말이지 너 그래서 벌 받는다! 너 그래서 저주 받은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야 이런 식으로. 구원 받았는데 저주 좀 받지 뭐.
제가 전에 강의 때 그런 이야기 했거든요. 셜교 시간에 했는가? 살면서 힘들잖아요. 하지만 지금 우리 주변에 유황불에 들어간 사람도 많이 있잖아요. 그거 생각해보면 살면서 고생하는거 그거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금 뭣도 모르고 유황불 가는 사람들 많은데 그 사람들 들어갔다 못 빠져 나와요. 까짓것 고생 좀 해도 괜찮아요. 소위 가진 자의 여유 아닙니까. 이 동네 일층만 내려가 보세요. 일층에 화장실만 있는게 아닙니다. 문 열고 나가면 지옥 갈 사람들 거기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몰라요 그 사람들은 지옥가는 줄 모른다니까요.
그리스도가 안 찾아온거예요. 교회를 안다녀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안 찾아온거예요. 그리스도가. 그리스도가 찾아오게 되면 내가 하는 그 짓이 그것이 바로 죄가 된다는 사실. 그리고 우리는 헛짓 외에는 할 게 없어요. 모든게 헛짓이에요. 헛짓인데 그게 그렇게 귀엽대. 아 귀엽다면 너무하고 그게 이쁘대. 그것마저 이쁘답니다 주께서. 왜? 우리한테 꽂혔으니까.
죄 지어 죄 지어. 왜냐하면 이미 다 해결했기 때문에. 그래서 주님은 가능성 있는 사람을 찾아오는게 아니고 가능성 없는 죄인을 부르러 온 겁니다. 아픈 사람을 부르러 왔어요 아픈 사람을. 병원에 올 때 팔이 부러져서 발은 괜찮은데 팔이 부러져 온 사람이 더욱 더 의사가 필요한 사람이겠어요? 안 그러면 팔 부러지고 다리 부러져서 기어오는 사람이 더 의사를 의사답게 하겠어요?
주님께서는 팔 부러지고 다리 부러진 정도가 아니고 아예 시체가 오는걸 봐요 시체가. 어이구 김 시체 최 시체 와요 시체 이리 와 이리 와. 죽은데서 살려주시는 거예요. 주님이 주시는 능력은 능력 중에 일부를 떼어주시는게 아닙니다.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은 하나밖에 없어요. 죽은 자를 살리는 거예요. 로마서 8장 11절. 성령이 그리스도의 영의 임하면 죽은 자도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있으면 너희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라 이러잖아요.
그 말이 뭐냐 하면 네가 무슨 짓을 해도 너는 내가 보기에 너는 죽은 인간이라는 것을 너도 동의하라는 그 뜻이에요. 동의하라는 그런 뜻이에요. 자꾸 이 솜씨 어떻습니까 자꾸 솜씨 부리지 말고. 어떤 솜씨 부려도 내가 보기에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성령의 오심이 그만큼 귀한겁니다.
다시 한번 오늘 본문으로 돌아가 봅시다. 아버지와 부탁해서 우리와 사랑을 만들어 놨는데 사랑은 일체감입니다. 일체감의 특징이 뭐냐 하면 상대를 나의 개체로 보지 않는거예요. 말이 좀 어렵기 시작하지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했느냐 하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라고 했거든요. 아버지와 내가 하나다. 그럼 그 사랑의 원천은 뭐냐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사랑이에요. 사랑은 여기 있다는 말은 이 세상에 없는 거예요.
그러면 아버지와 내가 하나가 된다는 말은 이 땅에서는 이 죄된 세상에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과 자기를 하나로 보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이 없어요. 사랑이 없는 인간이 예수님을 사랑한다? 그거는 빈말입니다. 예수님을 이용하는 거지요. 나 잘 되기 위해서 내 이익을 위해서 이용하는 것이지 절대로 예수님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 땅에 없어요. 없고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사랑입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면 여러분이 또 반발하기를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을 우리한테 주게 되면 우리한테 사랑이 있잖아요 왜 없다고 이야기합니까? 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서 입에서 근질근질 할거예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아버지가 우리에게 오게 되면 우리가 사랑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우리는 죽은 자가 되어 버려요. 죽은 자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을 소지하는게 아닙니다. 소지할 주체가 이미 죽어 있어요.
이 일체감 이 일체감을 세상에다가 그대로 줘버립니다. 그런데 일체감을 할 때 아버지의 존재와 예수님의 존재가 하나가 됐다 우리가 편하게 그렇게 생각 하는데 좀 더 깊이 들어가 봅시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사랑의 그 절정이 마감이 최종인 것이 살아있는 예수님과 살아있는 아버지 사이에 성립되는게 아니예요. 그거는 하나의 약속이 되는 거고.
언제 아버지의 사랑이 빛나느냐 하면 예수님이 이 땅에 와서 이 땅의 환경에 의해서 십자가에 죽을 때 그 때 비로소 아버지의 사랑이 온전하게 다 이루어지는 겁니다. 죽을 때. 죽음이 끼어들지 않는 사랑의 온전한 사랑은 없어요. 아버지의 뜻에 의해서 죽을 때 사랑은 활짝 피는 겁니다.
세상에서도 남녀가 사랑할 때도 상대방이 있다면 나는 살았다는걸 느끼지 않고 죽어도 괜찮다 할 정도로 일체감을 느낄 때 우리는 사랑을 느낀다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대만 살아도 나는 없어도 상관 없다는거예요. 그런걸 체험해야 알지. 아마 결혼초기에는 이런게 다 있었을 거예요. 신혼여행 갔을 때는. 그럼 돌아올 때는 딴 생각이지만. 갈 때는 그런 생각 있었을거예요. 죽어도 좋아 그런 생각이 든다 이 말이죠.
이 일체감이 사랑이다 여기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 사랑을 이것을 자기 백성에게 전달하죠. 전달하는데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전달할 때에 인간에게 이 죄 많은 자기 백성에게 이 사랑을 어떻게 집어넣느냐 하는 겁니다. 집어넣을 때 이렇게 집어넣어요. 새로운 현재를 구성해서 집어넣어요. 새로운 현재. 이게 시간 요소에 들어갑니다.
새로운 현재가 들어가요. 그럼 새로운 현재하고 옛날 현재하고 차이점이 뭐냐 하면 옛날 현재는 인간이 자기 몸 중심으로 흐를 때 현재라고 합니다. 인간의 현재라고 하는 것은 과거가 있고 그 과거를 기억을 할 때 기억하는 지금이 현재라고 이렇게 생각할 때 현재라고 느끼거든요.
그 말은 인간이 현재를 느낀다는 그 말은 자기가 내가 현재를 느끼는 나는 살아있다고 보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그런 이야기 했죠.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고 있는 나는 의심할 수 없다. 이 본인이 살아있다고 본거예요. 그게 철학의 한계예요. 그러나 주님은 인간을 뭐로 봅니까? 살아있다고 보지 않고 죽어있다고 보는 겁니다. 데카르트가 왜 자기가 살아있다고 보느냐 하면 달리 나를 규정해서 다른 외부의 절대적 기준이 없어서 그래요. 나를 측정하는 기준을 내가 내 안에서 끄집어내는 겁니다.
마치 물에 빠졌을 때 자기 신발끈을 가지고 그걸 잡아당기면 신발끈을 잡아당기는 자기 그 본인이 잡아당기는 그 힘에 의해서 바깥으로 튀어 나옵니까? 지가 제주도 은갈치입니까? 벌떡벌떡 튀어서 물 위로 나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모든 과학과 모든 철학이 자기가 자기를 이끄는 거예요. 그 과학이라는 것이 그런겁니다. 어떤 과학도 죽음을 연구하는 과학은 없어요. 일단 살았다고 치고 더 살려볼라고 애쓰는 겁니다. 그래봤자 죽어요. 그래봤자 죽고
이 현재라는 것이 새로운 현재가 들어갑니다. 새로운 현재가 들어가게 되면 인간의 현재는 내가 여기 있다 또는 내가 여기 살아있다 내가 여기 있다를 기준으로 해서 과거에 이렇게 살았고 앞으로 미래는 이렇게 전개되었으면 좋겠다 라는 그 의도가 있어요 그 의도가 있는 한 나는 살아있어요. 새로운 현재라는 것은 인간의 현재를 묵살을 만들어 버립니다. 묵살을 만들고 새로운 현재는 무슨 현재냐 하면 하나님의 하신 일 예수님의 하신 일의 그 업적을 그 다음에 방사하는 것.
‘방사’ 라는게 뭐냐 하면 어떤 것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으로 확 퍼뜨리는걸 말하죠. 그리스도의 몸은 죽었다가 부활함으로서 영원히 살아있지요. 그 살아있는 기능이 확 방사가 될 때 그 자체가 뭐가 되느냐 영원한 현재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영원한 현재예요. 영원한 현재. 예수님이 영원한 현재 되심. 그 영원한 현재 속에서 사랑을 담아요. 그게 그래야 되요. 그러면 기존의 있는 5월 6일날 은혜 받아서 구원 받았다든지 이런 인간이 그렇게 하는데 인간이 달력에 표시할 수 있는 그런 시간은 없어지기 때문에 결국은 이건 뭐냐 하면 인간 자체를 뭐로 보느냐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고 죽은 인간으로 보는 거예요.
인간이 죽어버리면 뭐도 죽겠어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그의 과거 이야기나 현재 이야기나 미래에 대한 기대도 이 인간이 죽음으로서 그것도 다 죽은 이야기가 돼요. 헛소리 되는 겁니다 헛소리. 그걸 가지고 ‘망상’ 이라고 하는 겁니다. 망상 또는 꿈. 인간의 현실은 뭐냐 인간이 말하는 현실은 곧 꿈이에요. 그걸 지난 시간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걸 네 자로 가상현실이라고 했지요 ‘가상현실’ 이 세상은 가상현실, 꿈이에요.
이게 왜 꿈이냐 하면 인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를 규정할 때 남들을 경유해서 자기를 규정해요. 남들을 경유해서. 어떤 사람을 만날 때 아 저 사람은 많이 본 사람이다 라고 할 때 저 사람을 어디서 봤더라? 미국에서 봤나? 할 때에 갑자기 그 사람이 문제가 아니고 내가 옛날에 버지니아에 갔던 나를 경유해서 파악한다니까요 경유해서.
얼마 전에 우리 어머니 모친께서 돌아가셨는데 모친께서 돌아가실 때 마지막 병든 모습이 기억나는게 아니고 어머니가 한참 아름다웠을 때 지금 생각하면 50대 중반 그 때 모습이 계속 남아있어요 그 때 모습이. 50대의 어머니의 모습이 계속 남아있어요. 그렇다면 어머니를 생각할 때 그때 나는 몇 살이겠어요? 그때는 나는 한 10대나 20대쯤 되겠지요? 23살 차이니까. 그 정도 되겠지요.
그때 내 모습은 기억이 안 나는데 하여튼 우리 어머니는 저런 모습이야 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는 그 때 나는 갑자기 졸지어 젊은 내가 되는 거예요 젊은 내가 되는 거예요. 내가 보고 싶은 그것을 현실로 하는 순간 그 현실의 구성원이 되는 겁니다. 그게 바로 망상이에요. 인간은 망상 외에는 할 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어요.
애가 전교 1,2등하는 아이인데 갑자기 중간고사 봤는데 전교 15등으로 떨어졌어요. 그러면 엄마가 화가 나지요? 왜 화가 나느냐 하면 엄마가 알던 내 자식은 전교 1등 아니면 2등이에요. 그런데 현실은 뭐냐? 전교 12등이에요. 그럼 그 현실을 받아들이면 될 게 아닙니까? 아 주께서 12등 하게 하셨구나 받아들이면 되는데 화가 왜 납니까? 왜 내가 아는 현실에 부합이 안 되느냐고 화가 난거예요. 너는 1등이야 1등 해야 돼 1등. 실수하면 2등 넌 1등해야 돼.
딸을 시집 보내놨는데 이혼해서 왔어. 엄마가 친정 엄마가 화가나. 왜? 너는 내 생각에 그런 딸은 없다는 거예요. 엄마가 지금 착각하고 있는 거예요. 엄마 현실을 직시하세요. 아니야 나 직시 못해. 왜? 그 현실 없으면 내가 나를 미워할거야. 나 이렇게 착한 딸을 두었다는 그것이 자기를 규정했는데 딸이 그렇게 자식이 그렇게 되어 버리면 내 꿈을 펼쳐라가 아니라 내 꿈이 망가졌잖아요. 그 보상 누가 할거예요? 그 만회 누가 할거예요? 분노하지요.
타인은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이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내가 꿈꾸는 현실 내가 기대하는 현실을 위해서 너는 내가 원하는 자리에 배치되어 있어야 된다고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우리는 순간순간 자기를 위한 현실을 구상합니다. 시간과 공간을 통해서. 좋았던 기억 편집하고 나빴던 기억은 잊어버리려고 애를 쓰고. 나쁜 기억은 무의식 중에 들어가가지고 나중에 꿈으로 튀어나와가지고 놀라게 만들고.
좋았던 기억은 모아가지고 남한테 보란 듯이 남한테 과시하는 용도로써 그걸 술 먹으면서 그걸 퍼뜨리고 나 이 정도 되는 사람이라고. 계속해서 조작하는 거예요. 꿈을 가지고 또 꿈을 가지고 또 조작해요. 나중에 자기가 조작한 꿈인지 자기가 몰라요. 심지어 자기가 있던 그 꿈 꾼거 가지고 그거 조작해서 해버리면 원래 있지도 않은 가짜 꿈이 꿈 속에 나타나요. 진짜 개판이다 완전히. 구라를 했든 거짓말을 했든 과거 이야기가 나중에는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이 안돼. 하도 구라를 많이 퍼뜨려가지고 어느 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분간도 안돼요.
그러면 주님께서 사랑을 어떻게 전달하느냐는 겁니다. 그런 인간밖에 안되는데. 주님께서는 말씀을 하세요. 말씀은 언어지요 언어. 언어에 담아서 합니다. 언어에 담아서 이야기를 할 때는 왜 언어에 담아서 하느냐 하면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을 아까 이야기했어요 인간이 살아있다는 것을 어떻게 한다? 타인을 통해서 경유해서 자기가 살아있음을 확인한다 했지요? 물론 망상이고 꿈이지만.
저 사람과 더불어 나. 좋은 사람과 함께 있는 나는 얼마나 행복하냐 이것을 나는 현실로 보겠다 이게 인간의 고집이에요. 저 사람과 더불어서. 그러면 저 사람과 더불어 하면 여기서 저 사람과 관계를 맺어야 되겠지요. 그 관계가 뭐냐 하면 대화입니다 대화. 대화할 때는 뭐가 도구로 사용된다? 언어가 되지요 언어. 언어가 되지요. 그러니까 살아있는 인간은 타인을 통해서 현실을 구성하면서 뭐를 동원시킨다? 언어를 동원시키는 겁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사랑을 전달할 때 이 인간들이 자기 망상을 구성하기 위해서 언어에다가 주님의 이 사랑, 영원한 사랑을 여기에 담아버려요. 담습니다. 언어는 뭐냐 하면 언어는 쉽게 얘기해서 봉투입니다 봉투. 봉투 안에 뭐가 들어있겠어요? 의미가 담긴 봉투입니다. 그러면 봉투를 열고 안에 의미를 챙기면 되잖아요.
그런데 주님이 주신 언어는 예수님이 자기가 십자가에 다 이루었던 것을 언어라는 봉투에 그 내용을 담아서 준다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들은 예수님의 언어를 지켜보려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지키자 해가지고 봉투를 열고 보게 되면 그 내용은 어떤 소식이냐 하면 이미 너는 죽었고 네 안에 누가 산다? 내가 사는게 등장했다 이 말이죠. 어머나 왜 이러지 뭐 이런 내용이 다 있어. 뭐 이런 희귀망측한 이야기를 다 했지. 이거 설교하면 교인 다 떠나고 한명도 안 오는데. 갈라디아서 2장 20절 그냥 넘어가자. 여러분 그냥 안 들은 척 하세요. 십자가 눈앞에 보이는 것 그것도 넘어갑시다.
그런 뭔가 평소에 남하고 결속을 했던 이야기 있잖아요. 서로 사랑합시다. 형제를 도웁시다 이런 이야기는 평소에 내가 나의 현실을 구성하기 위해서 남을 꼬시고 남을 내 사람 만들기 위해서 동원되었던 그 내용을 성경에서 찾아가지고 서로 협조하고 배려하고 서로 도와줘서 이상적인 나라를 만듭시다. 그걸 마가의 다락방 마가의 원시 공동체라고 해요.
공동체가면 목회하는 사람들 갑니다. 그 공동체가 어떤 공동체인줄 알아요?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뭐 다 이야기 끝났지요 뭐.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무슨 뜻입니까? 재산 바쳐라 이 말이죠 교회에다가 공동체에다가. 여러분 초대교회 안 되면 여러분 지옥갑니다 한마디 딱 던지고 초대교회 딱 보니 뭐 나와요?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미국 와서 돈 몇 푼 남지도 않았는데 교회 와서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말라니까 다 내놓으라는 말인가?
거기다가 사도행전5장 보세요. 아나니아 삽비라 이야기 나오지요? 아까워가지고 반 내다가 졸지에 부부가 사이좋게 한 날에 죽었어요. 장례 치뤘습니다 하루에 18만원이니까 둘이하면 36만원. 다 치룬거예요 그냥. 아 그게 성경에 있잖아요. 그러면 목사가 여러분 이상적인 공동체 원하지 않습니까? 우리 교회가 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성령의 공동체 되기를 싫어해요? 이것이 구원 받는데 여러분 안 할렵니까? 하고 싶습니다!
그러면 내 것을 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서로 서로 하고 원시 공동체 사회라고 하는 겁니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역사 유물론적 단계에서 제 5단계 공산주의 사회 그 전에는 사회주의고 자본주의는 붕괴되고요. 노예 제도에서 이렇게 바뀌어서 온거란 말이죠. 이 공동체는 이번 주일날 하려고 준비하고 있어요 공동체가 도대체 뭔지.
사랑을 봉투에다가 넣었는데 그 봉투에 내용을 보니까 기존에 있는 이 현실, 이 현실 자체를 뭐로 보느냐 하면 다 쓰잘데기 없는 망상으로 만들어버리는 내용이 들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그 말씀을 주의 말씀을 지킬 수 있습니까? 못 지킵니까? 이거는 지키면 안돼지요. 지킨다는 말은 그 내용이 모자라니까 내가 손 좀 더 봐서 완전케 하겠다는 그 의미가 있잖아요. 손대면 안돼지요.
주님은 인간을 죽이는게 아니에요. 죽이는게 아니고 죽음을 생산하지요. 말씀을 통해서. 주님은 죽이는 것이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죽음을 생산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고집이 있어가지고 안 죽었다고 우기잖아요. 안 죽었다고 우기는데 주의 말씀이 딱 오게 되니까 너는 이미 죽었고 이미 죽었고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이미 죽었고 누구하고 비교해서 죽은 거에요? 누구하고 비교해서? 옆 사람하고 비교해서? 아니예요.
예수님과 비교해서 이미 우리는 죽은 거예요. 죽은 증거가 뭐냐 하면 예수님의 시간 주님의 공간과 떨어져 있기 때문에. 주님의 시간과 공간과 떨어져 있는 거예요. 선악과 따먹고 난뒤에 모든 인간은 죽은 거예요. 낙원에서 쫓겨나면 그건 죽은 거예요. 뭐 이야기가 복잡하지 않아요. 간단한 거예요. 영역이 다른 거예요 영역이. 사는 자리가 달라서 죽은 거예요. 숨 쉬는데 아 이거 따지지 마세요. 숨 쉬고 안 쉬고 상관없어요. 그렇게 영역이 다르게 되면 그 다음에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무리 아담이 자식을 낳아도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었더라 죽음을 생산해내는 겁니다 그 죽음을.
죄의 삯은 사망이죠. 죽었다고 아쉬워하지 말고 그 죄가 이미 너를 접수하고 점령하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하는 겁니다. 네가 죄를 지었다고 따지는게 아니에요. 죄가 우리를 통해서 죄가 스스로 자기의 현존을 우리를 통해서 알리는 겁니다. 우리는 그냥 나팔이에요. 죄가 나올 뿐입니다.
기드온 전쟁할 때에 기드온 전쟁의 특징이 뭐냐 하면은 기드온 300명이 전쟁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냥 도구였고 통로에요. 기드온 300명이 준비한 무기가 뭐였습니까? 횃불이고 항아리죠 나팔도 있었지만. 그러면 횃불은 어디에 숨겼다? 항아리 속에 숨긴 거예요. 항아리 속에 숨긴 거예요. 그리고 전쟁은 이미 엄청난 미디안에 그날 밤에 꿈에 이미 하나님이 공격해서 완전히 혼란케 했습니다.
그 전쟁의 방법이 뭐냐? 현실을 고수한 인간에게는 꿈으로 대결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꿈이 예수님의 꿈이라고 여기는 현실이고 우리가 현실이라고 우기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 위치를 바꿔버린 겁니다. 벌써 어렵지요? 주와 객을 뺑 돌려버린 거예요 위치를. 뺑 돌려버리는 겁니다. 생명과 죽음을 뺑 돌려버려요. 돌리듯이 돌려버려요. 객이 주 자리에 주가 객 자리에 들어가는 겁니다.
미디안 전쟁에서 핵심은 뭐냐 하면 수십만의 군대가 있다라고 여겼잖아요. 그 자체가 그 자체가 개꿈이에요 그게. 그 자체가 개꿈이라고. 그리고 기드온은 뭐냐 하면 에이 300명이 뭐야. 300명 가지고 어떻게 이겨? 라고 하는 그 300명이 주에 의해서 그게 현실로 만들어 버리는 거예요 현실로. 꿈이 현실을 이기는 전쟁입니다.
그리고 현실은 꿈에 의해서 개판되는 거예요. 완전히 패배하는 거예요. 주님의 시간이 인간의 시간을 이기는 겁니다. 우리는 망상 속에 살면서 자기 출세하려고 애쓰죠. 지금 죽어 있는데 무슨 꿈을 꾸느냐 하면은 더 살아볼라고 합니다. 죽은 자의 사명은 하나만 하면 돼요.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죽은 자 티를 내면 되요. 그 사명은 주님이 이렇게 합니다.
네가 죽었으면 네가 어디서 죽었는지를 죽음을 끄집어내면 되는 겁니다. 우리를 쪼개서 수술해서 이것 때문에 죽었다고 끄집어내면 되는 거예요. 그 수술을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냐 하면 바로 다윗이에요. 시편 57편에서 다윗은 간음죄에다가 다윗은 살인죄를 저질렀잖아요.
주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내가지고 당신이 그 사람이라고 할 때에 주와 객을 바꿔서 다윗이 성령에 의해서 바꿔치기한 거예요. 내가 죄 진게 아니고 모친의 죄가 나를 수술한 거예요. 나를 이용한 거예요. 모친의 죄가 나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한 거예요 그 모친의 죄가. 그 모친의 죄를 그렇게 하게 하신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그것이 언약입니다. 언약의 활동이에요.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의 활동이 우리에게 오게 되면 다윗과 똑같은 경우가 우리를 통해서 반복됩니다. 내가 죄 진게 아니고 죄로 하여금 죄를 드러낸 거예요. 내가 죽는게 아니고 죽음이 내 안에서 드러나는 거예요. 그런데 내 힘으로 바꿔치기 못하는데? 주님 나라의 성령이 오니까 바꿔치기 한 거예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우리가 구원받은 거예요.
주께서 원하는 것을 끄집어내는 생산체제로써 우리가 주님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의 활동하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로마서 14장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라고 사도바울이 이야기 하잖아요.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 살아도 주의 몫이고 죽어도 주의 몫인데 관계 없는 내가 망상 밖에 모르는 내가 왜 거기에 내가 죽는다고 길길이 날뛰냐 이 말이죠. 나하고 관계없는데. 내 죽음이 나와 관계 없어요.
왜? 나는 이미 죽은 자이기 때문에 주께서 어떻게 쓰실거냐 하는 문제는 내 몫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하실 몫이에요. 그동안 오래 살려줬잖아요. 그만하면 됐지 뭐 더 꽂아가지고 제발 요양병원 가가지고 코에 뭐 집어넣을까요 하지 마세요. 그 집어넣으면 못 뺍니다. 빼면 살인죄가 되거든요. 애초에 그거 집어넣지 마세요 이렇게 해야 돼요.
어떤 그 우리 어머니 돌아가신 옆에 보니까 그걸 꽂아가지고 25년째 꽂고 있어요 25년째. 병원에서 돈 꼬박꼬박 다 받아 가지고. 그걸 왜 꽂아요?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그걸 음식을 못 삼키면 고삐를 끊으라는 신호입니다. 내가 다 쓸 것을 다 썼다는 이야기인데 그걸 인간들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그걸 꽂아가지고 음식은 주니까 죽지는 않지요. 얼마나 아프다고요. 무진장 아프다는 거예요.
그걸 집어넣고, 빼면 의사가 살인죄 걸리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그거 빼지도 못해요. 돈은 계속해서 자식들 돈은 계속 넣는 겁니다.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 이 과학이 문제예요. 왜 죽은 인간을 살리려고 하느냐 이 말이죠. 누구의 증인되느냐가 중요하지. 지옥같은 날씨도 이렇게 더운데 살아서 뭐할거예요. 에어컨 켜봐야 아파트 단지가 다 정전되는데. 죽었는데 어떻게 쓰실 것인가 그건 주님께 맡기고 우리는 10분 쉬시면 돼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