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주향 나 알기 (삼상 13장1-14절) 대전- 38강
이근호
2018년 5월 29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13:1-14
(삼상 13:1) 사울이 왕이 될 때에 사십 세라 그가 이스라엘을 다스린 지 이 년에 (삼상 13:2)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남은 백성은 각기 장막으로 보내니라 (삼상 13:3)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치매 블레셋 사람이 이를 들은지라 사울이 온 땅에 나팔을 불어 이르되 히브리 사람들은 들으라 하니 (삼상 13:4) 온 이스라엘이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의 수비대를 친 것과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들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함을 듣고 그 백성이 길갈로 모여 사울을 따르니라 (삼상 13:5) 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 그들이 올라와 벧아웬 동쪽 믹마스에 진 치매 (삼상 13: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 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삼상 13: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삼상 13:8) 사울은 사무엘이 정한 기한대로 이레 동안을 기다렸으나 사무엘이 길갈로 오지 아니하매 백성이 사울에게서 흩어지는지라 (삼상 13:9) 사울이 이르되 번제와 화목제물을 이리로 가져오라 하여 번제를 드렸더니 (삼상 13:10) 번제 드리기를 마치자 사무엘이 온지라 사울이 나가 맞으며 문안하매 (삼상 13:11) 사무엘이 이르되 왕이 행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니 사울이 이르되 백성은 내게서 흩어지고 당신은 정한 날 안에 오지 아니하고 블레셋 사람은 믹마스에 모였음을 내가 보았으므로 (삼상 13:12) 이에 내가 이르기를 블레셋 사람들이 나를 치러 길갈로 내려오겠거늘 내가 여호와께 은혜를 간구하지 못하였다 하고 부득이하여 번제를 드렸나이다 하니라 (삼상 13:13)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도다 왕이 왕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그리하였더라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왕의 나라를 영원히 세우셨을 것이거늘 (삼상 13:14) 지금은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바를 왕이 지키지 아니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여호와께서 그를 그의 백성의 지도자로 삼으셨느니라 하고
지난 시간에는 사울이 암몬을 크게 이겼습니다. 크게 이기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착각에 빠진 겁니다. 싸움 잘하는 왕을 얻었다. 이젠 거칠 것이 없다. 덤벼라! 이렇게 평소에 우리를 괴롭혔던 블레셋에 대해 복수해 나가자! 그래서 사울이 정규군을 모집해요. 상비군이라고도 하는데 농사짓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전문적 무사를 만드는 겁니다. 예전엔 용병을 사용했는데 그래서 임금이 돈이 필요한 겁니다. 돈을 주고 용병을 사서 평소에는 칼을 잡고 훈련을 시키다가 필요시에는 공격하고 빼앗게 해서 백성들의 신임을 얻는 겁니다. 오늘 날 교회와 같아요. 목사가 할 일이 뭐냐하면 교인들의 신임을 얻는 겁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는 교회라면 두 가지가 늘어나야 되지요. 교인 늘어나야 되고 헌금 늘어나야 되면 교인들은 그 목사는 대 환영입니다. 수단과 방법은 상관없이 기독교이냐 아니냐도 따지지 말고 우리가 목돈 내서 예배당을 꽉꽉 채우고 크게 지어서 대외적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를 보이자! 그래서 이 교회에 다닐 때 정신적으로 안정감을 얻겠다는 겁니다. 처음엔 100명이었는데 50명이나 10명 줄어 버리면 지금 내가 잘못된 교회에 다니고 있지는 않나하고 걱정이 되지요. 그런데 점점 커지게 되면 숫자가 많다는 것은 안정감을 주지요. 안정감을 증감시킵니다.
이 교회에 뼈를 묻어도 괜찮다. 하나님이 이렇게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있는데 내가 뭐를 의심하리오 이렇게 그 당시의 이스라엘은 블레셋과 비교하는 겁니다. 블레셋은 저렇게 나라가 크고 문명이 발달되었는데 왜 하나님과 함께하는 우리는 힘들게 살 필요가 뭐있나 그렇다면 우리가 좋은 쪽으로 하나님과 엮일 필요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정한 지도자가 있다면 그 지도자 덕분에 우리나라가 다른 나라를 이기고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보일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게 된 거에요. 그래서 왕을 구한 겁니다. 그냥 왕이 아니라 괜찮은 왕을 구하죠.
괜찮은 왕은 늘 시험대에 오르게 되는 겁니다. 얼마나 나라를 위해 잘 하는 지 보자! 나라를 위해 안정감을 주고 경제가 좋아지게 한다면 대통령 지지율 70% 나오게 하겠다는 겁니다. 뽑아 놨으니 우리의 기대에 부흥해야 한다는 이야기죠. 시험대에 오른 거에요. 결국 이것은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겁니다. 인생을 살면서 진리라는 것을 대단스럽게 찾을 필요 없어요. 인간은 어쩔 수 없다는 이것 하나를 혹독하게 경험하시면 진리를 파악한 사람입니다. 어쩔 수 없다는 말은 내가 군대에 안가고 싶어도 나라에서 가게하면 어쩔 수 없는 거에요. 이 세상을 탕유라고 했거든요. 위에서 쏟아지는 거대한 물줄기.
그 물줄기에 우리가 속해 있다면 떠미는 대로 살 수 밖에 없는 거에요. 반항이나 반발도 소용없습니다. 괜히 착각하는 거에요. 일시적으로 기도원에 가서 도피할 순 있어요. 그러나 기도원이 밥 먹여 주는 건 아니잖아요. 물론 밥 먹여주는 기도원도 있어요. 거기에 취직하면 되는데 그렇지 않으면 기도원에서 내려 와야 된다 말이죠. 내려오는데 아까 말했듯이 탕유이기에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해요? 내가 판단해요? 그건 진리를 모르는 겁니다. 남들이 욕을 하는데 내 판단이 무슨 의미가 있어요. 이것 하면 월급 줄께! 하는 데 거기서 아니요! 할 수 없어요. 제가 지난 설교에서 그랬잖아요.
그 사람이 물 컵 던지고 서류 던져도 집에 아이들이 입 벌리고 있는 이상은 좀 맞으면 어때! 월급이 나오는데 맞더라도 승진시켜주면 얼마든지 맞을 용의가 있어요. 뭐를 요구해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 없이는 취직도 어려워요. 세상은 어쩔 수 없는 거에요. 자식도 세상 물 먹으면 말 안 듣지요. 모든 구성원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는 겁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확인하고 싶어서 자기들이 하나님 믿는 것을 괜찮은 선택이라고 스스로 확신 갖기 위해서 실습에 나서는 겁니다. 계속해서 시험해 나가는 거에요. 광야에선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하지 마라고 했는데 인간은 이미 마귀의 부역자이기 때문에 실습과 시험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안 믿습니다.
지난 날 믿은 것은 소용없어요. 오늘 내가 하나님과 함께 인 것을 확인하고 싶은 겁니다. 그러면 그 측정 기준은 어디서 나오는 가? 거대한 세상의 흐름에서 나오지요. 여기서 성공하면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는 것이고 실패하면 하나님을 안 믿거나 버림받은 자로 본인이 그렇게 정하겠다는 겁니다. 아니 본인이 그렇게 안 정하고 싶어도 주변 눈 들이 안 그래요. 주변 가족들이 너는 교회에 다니면서 취직도 못하나? 너는 성가대도 그렇게 열심히 하는데 너 좋다는 남자 하나도 없나? 나이 35세에 시집을 못가는 이유가 뭐냐? 하는 기도가 부족했던지 네가 믿는 하나님이 엉터리든지라고 계속 외부에서 측정을 해댑니다.
거기에 누가 후달립니까? 우리의 연약한 마음이 무지무지 후달려요. 말씀을 봐선 아니지만 성경대로 산다는 것이 세상에서 통할 것 같습니까? 세상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안 통해요. 여기서 우리가 주의 일이 잘못 출발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주의 일은 우리가 하나의 역할로 들어가는 거에요. 주의 일이 아니다 맞다를 관찰하는 관찰자가 아니고 관리자나 시험관이 아니에요. 판단 자가 아니고 하나의 역할로 들어가는 겁니다. 무슨 역할이냐 하면 신, 구약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이 간단해요. 우리가 죄인의 역할로 들어가는 겁니다. 사람이 자기에게 죄가 있다는 것은 자긍심에 오점을 남기지요.
그래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려고 하느냐 하면 본인이 죄 짓는 것을 싫어해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뭐가 문제이냐 하면 이것이 자기 일입니까? 주의 일입니까? 자기 일이 되는 거에요. 이런 생각부터 뜯어 고쳐야 되는 겁니다. 내가 악을 싫어하고 선을 좋아하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고 (악을)내가 싫어해요. 왜냐하면 선악과를 따먹었기 때문에 선과 악의 갈등을 일으키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 일에서 바깥으로 스스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주의 일이다, 주의 영광이다 아무리 해도 돌아서면 자기 일을 구성하는 요건으로서의 예수이지 결국은 자기 일을 더 구성하고 싶은 거에요.
그러면 주의 일은 어떻게 하시냐 하면 자기 일에서 못 빠져 나오는 인간을 주의 일로 하나의 역할을 맡겨버립니다. 아까 자기 일은 뭐라고 했습니까? 스스로 내가 하나님을 믿겠다 안 믿겠다 측정하는 관찰자로 나서겠다는 내가 어느 날 보게 되면 이미 주의 일에 합류되어 있어요. 말려들어가 있어요. 그러니까 개인적으로도 어쩔 수 없지만 큰 범주에서도 인간은 어쩔 수 없는 거지요. 굉장히 낙관적인 사고방식입니다. 내가 인간된다고 해서 주의 일이 바뀌지 않거든요. 얼마나 낙관적입니까? 내가 못났다고 해서 주의 일이 실패하지 않아요. 내가 실수투성이로 했다고 해서 주의 일이 바뀌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실수하지 않고 건진다는 사실이 언제 가장 기쁘냐 하면 내가 마음먹고 어떤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십여 년간 공들였는데 결국 그 사람이 실패로 끝났을 때 우연히 요한복음 6장 39절을 봤을 때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일어버리지 않겠다는 그 말씀이 새삼스럽게 내 실패와 주님의 말씀이 맞닥들였을 때 “아하! 내가 무엇 때문에 조마조마 했고 가슴 졸였는지!”승부 걸 필요도 없는 것에 승부를 걸었던 거에요. 그 사람을 구원하면 신자이고 구원 못하면 신자가 아니라는 쓸데없는 헛개비와 승부를 건겁니다. 전도 뿐 아니라 자기 인생 전체를 걸고 승부를 두고 있어요.
(요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이번에 아들 장가만 보내면 나는 신도이다 이런 쓸데없는 곳에 자존심과 자긍심을 퍼 넣는 겁니다. 나중에 돌아보면 누가 장가를 보내고 다 했습니까? 주께서 다 하셨는데 이것을 주의 일로 보질 않고 내 자존심과 결부해서 내가 이런 큰일을 해냈다는 자부심을 챙기기 위해서 죄인으로 또 죄를 지어 버린 거에요. 아들 결혼 시킨 죄, 어떤 일을 해도 나의 영광과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우선이지요. 그래서 믿음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 할 때의 믿음이라는 것은 도저히 우리에게서 나올 수 없는 겁니다. 이미 우리는 내 일만 믿기로 작심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러면 오늘 사무엘상 13장에 나오는 철딱서니 없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암몬과의 싸움에서 이긴 것이 자신들에게 실력이 있다고 본겁니다. 이게 문제에요. 개뿔도 없는데 실력이 있다고 여긴 겁니다. 특히 20대 초반에 있는 젊은 애들은 자기 일 밖에 없어요. 부모도 안 돌아봐요. 큰 소리는 다치고 부모님 내가 호강 시켜드리겠습니다. 믿어 주세요. 지켜봐 주세요. 돈 벌어 호강 시켜드리겠습니다. 부모에게 호강시키는 것이 주의 일입니까? 자기 일입니까? 내가 효자라는 티를 내는 자기 일이지요. 온 관심이 자기에게 쏠려 있는 거지요. 사무엘상 13장에 나오는 이스라엘도 똑같아요.
실력이 있다는 것은 자기 고유의 것에 모이게 됩니다. 자기 고유의 것에 대해 주일 낮에 이야기를 했지요. 사도 바울이 복음을 계속 전하는데 튕겨 나오더란 말이죠. 사도 바울의 뭐를 건들었느냐? 라고 질문을 던져 놓고 답변은 사도 바울의 건드린 것이 나만의 것, 인간에겐 누구나 소중한 것 한 가지는 있다는 겁니다. 성령을 받고 은혜를 받고 십자가의 은혜를 알게 되면 정말 소중한 것이 성령이고 십자가라는 것을 알지요. 문제는 지식으로 안다는 겁니다. 지식으로 아는 것인지 실제로 성령 받아 아는 것인지는 그것 빼놓고 모든 것을 잃어 버릴 때, 제가 그것을 남는 장사라고 했잖아요. 귀찮은 거 잘 떨어졌다하며 속 시원해야 해요.
자기만의 것을 안전하게 키워주기 바래서 교회에 왔다면 그 교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교회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냐 하면 실력 발휘하는 겁니다. 당신이 정말 소중하게 지키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우리 교회가 시키는 대로 프로그램에 따라 와줘야 되고 그러면 효과 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사람은 자기의 소중한 것에 볼모가 되는 거에요. 자기를 부인하면 되는데 이것만큼은 내가 지키고 싶다는 거에요. 특히 결혼한 여자에게는 자슥이지요. 자식보다 더 소중한 것이 있을까요? 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요구한 믿음의 증표가 사랑하는 아들을 그것도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네 손으로 없애버리라는 거에요. 이게 주의 뜻입니다.
이것이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의 주의 뜻이에요. 뭐 예수를 믿어요? 참! 내~ 인간은 속여도 어디 주님을 속이려고 해요. 네 소중한 것을 네 손으로 없애버리라는 주님께서 이미 믿음의 기준을 제시해버렸는데 어떻게 주님의 요구를 “난 안 들을란다! 안 볼란다!”어떻게 이런 연출이 가능해요? 이건 심판 날엔 소용없어요. 구원받는 사람은 십자가를 통해서 주어진 성령을 통해서 십자가로 인도 받아요. 예수님께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점점 더 크게 봅니다. 그렇게 되면 십자가 피가 나보다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다음에 중요한 것이 나는 왜 존재하는 가?
정작 나보다 더 소중한 예수님의 십자가 언약, 십자가 피, 다 이루었다는 완성을 증거하기 위해서 우리가 참여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내 일은 없고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내가 수박을 먹든 참외를 먹든 모든 것이 누구의 일입니까? 주의 복음을 위해 수박을 먹고 참외도 먹고 하는 겁니다. 모든 발걸음 하나하나가 주의 일과 결부되어서 움직이는 겁니다. 그것을 고린도 전서에서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던지 주의 영광을 위해서라고 되어 있단 말입니다. 주의 일에 무엇이 죄가 되고 방해가 되냐하면 나의 일이 방해가 되지요. 그러면 주의 일을 하려면 나의 일이 없어야 될까요? 점점 커져야 될까요?
나의 일이 점점 더 심각하고 진지하게 다가와야 되요. 주님을 믿었는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벌어집니까? 불평과 회의(懷疑) 즉, 의심이 더 짙어지는 겁니다. 누구 말대로 내가 이럴려고 예수 믿었나!가 갈수록 더해져요. 왜냐하면 밥만 먹여주면 주께 감사합니다라는 것은 초짜 때이고 갈수록 자기의 욕구와 욕망이 커지기 마련입니다. 이것이 사무엘상 13장이에요. 암몬을 그것도 주의 능력으로 이겼잖아요. 이겼으니 또 하나님께서 필요할 때 이기게 해 주시겠지! 그 정도에서 멈춰야 되는데 주님이 도와준다는 것은 본인의 실력이 있다? 없다? 없는 거에요. 다시 말해 우리는 이 땅에 살 수 있는 능력은 일체 빠져 있어요. 없는 겁니다.
하루하루 살려 주시는 것은 주의 일을 하라고 살려주는 겁니다. 공장에 기숙사가 왜 있습니까? 공장 일을 하라고 있는 거에요. 놀라고 있는 것이 아니잖아요. 지금 우리가 있는 곳도 주님의 숙소가 아닙니까? 주님의 일의 숙소이고 우리는 주님의 공장의 일꾼들이에요. 어떤 일꾼이냐하면 남들은 자기가 자기 일을 하는 것을 정상으로 보는데 우리는 내일만 생각하고 가족과 내 일만 챙기고 돈을 얼마나 벌고 내 재산 챙기는 일을 인식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정도로 내가 이기주의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 이미 주의 일에 합류된 상태입니다.
여기 강 집사님 같은 경우엔 망치 들고 맨 날 손목 아파도 일해야 되는데 이게 바로 주의 일을 빙자한 내 일이되고 난 이런 식으로 평생을 살아왔어! 그래서 이 만큼 난 살게 되었어! 남에게 기죽지 않을 정도로 이게 나의 실력이지요. 주의 일을 하라고 인생을 그렇게 인도하셨는데 우리는 나의 일로 자꾸 이탈해요. 이런 게 탈선이지 뭐에요. 주의 일로 가다가 나의 일로 빠지거든요. 나의 일과 하나님은 전쟁이 나게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이 한번 도와줬으니까 옛날처럼 또 도와주리라고 생각을 했지요. 2절부터 보게 되면 “이스라엘 사람 삼천 명을 택하여 그 중에서 이천 명은 자기와 함께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일천 명은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한번 붙자! 이렇게 된 거에요. 건방 떤 거에요. 그러니까 5절에 보면 붙어 보자하니까 그 쪽도 모였는데“블레셋 사람들이 이스라엘과 싸우려고 모였는데 병거가 삼 만이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백성은 해변의 모래 같이 많더라”엄청나게 모였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은 도망을 갔어요. 6절을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좌측에는 지중해가 있고 (우측)요단강이 있으면 밑에는 갈릴리 바다가 있고 옆에 요나단이 있는 기브아가 있고 블레셋을 지금의 가자 지역이거든요.
팔레스타인 가자 지역이 지금 심각합니다. 이스라엘이 보급품을 끊어 버리니까 터널을 파서 보급품을 수송하고 그랬어요. 그래서 수용소나 다름없고 굶어 죽을 지경이에요. 이스라엘이 포위해서 그럼 왜 이스라엘이 공격하느냐하면 사무엘상 때문에 그래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약속의 땅인데 나가란 말이죠. 아니면 물 기르는 노예가 되든지 우리 땅에서 나가든지 하는 것이 우리 여호와의 뜻이다라는 거지요. 미국의 보수주의는 기독교는 세상의 모든 것은 성경대로 되니까 팔레스타인이 나가는 것이 마땅하다는 겁니다. 그럼 왜 유럽에선 팔레스타인을 편드느냐? 유럽은 기독교가 없어요. 인권 밖에 없어요. 인간의 권리가 최고이지 하나님 믿는 것도 취미에요. 오락이고 취미이지 그게 유럽이에요.
(삼상 13:7) 어떤 히브리 사람들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가되 사울은 아직 길갈에 있고 그를 따른 모든 백성은 떨더라
요단을 건너니까 갓과 길르앗 지역이에요. 어떤 이들은 도망가는 거에요. 그런데 아까 강의 시작 부분에서 어쩔수 없다 했지요. 인간은 믿음으로 살면 되는데 왜 안되냐 하면 인간의 믿음이라는 것은 거짓이고 실제로는 힘의 위세에는 어쩔 수없이 본능적으로 도망치게 되어 있어요. 힘 앞에서 고개 숙이게 되어 있고 항복하고 도망치게 되어 있는 겁니다. 우리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되요. 우린 그렇게 믿음이나 실력 있는 자가 아닙니다. 지금도 아직까지 여유가 있으니 성경 공부도 모이고 하지 집에 무슨 일이 있으면 금방 쫓아가야지 어쩔 수 없어요. 다만 주님께선 니 자신을 알아라! 이말 이에요.
젊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몰라요. 바깥만 보고 있어요.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 하면서 허풍들. 어제 뉴스를 보니 나이 70대 노인이 지역 심문에 같이 살 여자를 구한다 해서 한 사람이 왔는데 노인을 석 달 살고 죽였어요. 외로워서 살았는데 살다보니 귀찮거든요. 인간은 외로움에서 귀찮음으로 끝나거든요. 자기 자신을 너무 모른 거에요. 외로울 때 있을 거에요. 그런데 같이 붙어 있으면 귀찮다는 사실을 왜 몰랐어요. 연애는 하되 결혼은 해서 안되는 거에요. 좋다고 혼인 신고까지 했어요. 그런데 귀찮아 나가라 했거든요. 나가라 하니까 여자가 1억을 달라 했어요. 못 준다니까 칼로 여러 군데 찌르고 도망가다 잡혔어요.
큰 탕류에 같이 휩쓸리니까 본인이 누군지를 볼 기회를 놓치는 거에요.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에요. 이길 때는 집단으로 같이 이기니까 하나하나가 괜찮은 존재인줄 알고 있어요. 그런데 막상 위험이 닥치니까 혼자서 다 도망쳐버려요. 사울은 졸지에 쪼다 된거지요. 군대가 없으니까 다가 버리고 몇 명 남지도 않았어요. 그리고 “모든 백성은 떨더라” 벌벌 떠는 거에요. 자기들끼리는 좋았지요. 잔치 열고 그런데 자기들 보다 큰 집단이 왔을 때는 집단적으로 떠는 거에요. 전에는 누구 때문에 이긴 거에요? 사무엘 때문에 이긴 거지요. 이번 전쟁도 사무엘은 없었지만 요기내자! 우리에겐 실력이 있다, 우리 힘으로 이겨 나가자!
믿음으로 하면 물러 갈 것이다. 사탄아! 물러가라!고 했는데 (자기가 사탄이면서) 막상 마주치니까 벌벌 떨더라고 되어 있어요. 이 모든 일이 누구의 일이다? 주의 일이에요. 우리 주제를 파악하기 위한 주의 일이에요. 사람들이 본인에 대해 잘 모르게 되면 주의 일이 나에게만 영향을 주고 내 앞에 일은 주의 일이 끊어진 것처럼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나에게 또는 나라는 개별적인 주의 일은 없어요. 이들과 뭉쳐져서 주의 일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그 결과가 주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통해서 나는 나 밖에 모르는 죄인이다를 아는 것, 저 쪽은 주님이 없으니까 관심도 없어요.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이 전체가 주의 일이에요. 주의 일에서 우리가 한 발자국도 벗어나자 않는 것에 감사해야 됩니다. 나에게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것마저 주의 일이다. 내가 원한 것이 아니다. 블레셋이 포진해 있다가 공격에 나서는데 마치 산 옆에 해변가가 있어 쓰나미가 와서 파도가 치면 바닷물이 산 틈새로 다 들어가지요. 블레셋이 이스라엘을 공격하니 도망쳐 틈새 골짜기 마다 숨어 들어가요. 그러니 블레셋은 신났지요. 그러면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생각할까요? 안 할까요? 못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보다 자기들을 색출하는 저들이 생생하기 때문에 예배당에서는 하나님이 여기 계시다고 생각 들지요? 예배당 밖으로 문 열고 나가 보세요.
쌩쌩 바람이 불 듯 냉혹하고 차가운 이익만 챙기는 그 세상은 하나님이 전혀 없는 오직 인간들의 투쟁만 있는 냉혹한 경쟁의 장이에요.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이 있고 교회 밖에서는 하나님이 없고 하는 것처럼 살아서 되겠어요? 그래선 안 되겠지요. 예수님이 오실 때 아무도 못 알아봤어요. 왜냐하면 그들이 말하는 현실에선 예수님이 대단하게 오실 줄 알았어요. 초라하게 오실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예수님보다 초라한 분이 어디 있습니까? 하나님이지만 죄인으로 살았잖아요. 거기에 비하면 우린 형편이 나은 편이에요. 죄인인데도 밥 먹고 사니 나은 편이잖아요.
정말 주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형편이 떨어지고 더 떨어져도 우리 힘으론 알까 말까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초라하게 만드는 겁니다. 비참하게 만들어요. 하나님을 믿어도 말짱 소용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런데 그것이 주의 일이에요. 이럴 것 같으면 교회 안 가는 것이 낫다는 말이 저절로 고백되어 지도록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그 다음 8절을 보면 사울이 사무엘을 기다렸습니다. 기다렸느데 사무엘이 안 왔습니다. 7일 동안 기다렸어요. 어지간이 기다렸지요. 그래도 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이고! 할 수 없다. 지금 사울 왕만 초조한 것이 아니에요.
지금 적들이 색출에 나섰으니까 이스라엘 진영이 웅성웅성 동요가 일어납니다. 이래선 전쟁이고 뭐고 밥이 될 수 밖에 없는 위급한 처지라 여기에서 사울은 결단을 내립니다. 내가 제사장이 되어 제사를 드리리라. 그렇게 생각을 한 거에요. 사울이 생각한 제사는 하나님과 연결 취지의 제사가 아니고 정서를 안정시키기 위해서 보여주기 식의종교 행위를 한거에요. 심리적 안정감을 주기 위해 연출을 벌이는 의미에서 제사를 드리는 겁니다. 요즘은 교회 예배, 여기서 예배라 정서적으로 안정감을 주는 것이지 하나님과는 관련 없지요. 그래서 사무엘이 묻는 겁니다. 왜 시키지도 않았는데 제사를 드렸느냐? 굉장히 중요한 이야기에요.
왜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느냐? 제가 아까 전쟁은 누구의 일이라 했습니까? 주의 일이지요. 블레셋이 왔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도망가고 하는 것도 무슨 일에 속합니까? 주의 일이지요. 그렇다면 제사도 주의 일에 포함이 돼야 되지요? 위급한 상황의 전쟁에서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사울 왕의 생각이고 제사의 진짜 의미를 알리기 위해 이런 상황들을 만드셨다는 것은 바로 주님의 일이고 주님의 뜻이라고요. 개인적으로 얼마나 다급하고 힘드냐 는 것을 논할 문제가 아니라는 거지요. 전체의 일에서 하나가 빠지는 일은 없는 거에요.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해프닝은 주의 일에 요건이 되고 요소가 되요.
제가 미리 결론을 내렸습니다. 주의 일에 우리를 왜 합류시킵니까? 우리를 죄인되게 하는 겁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정작 중요한 것은 너의 행복이나 안정감이 아니고 소중한 것은 주의 은혜입니다. 죄인을 구원해주시는 주님의 일이 소중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한 번 승리했다고 자기들에게 실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실력이 있는 것이 나의 고유한 것이 되고 그러면 누가 소중해요? 실력 있는 나를 아끼고 싶고 지키고 싶고 키우고 싶은 가치 있는 나 자신을 지키고 싶은 겁니다. 우리의 하루하루의 삶이 주와 싸우는 전쟁 마당이지요. 눈만 뜨면 시작되는 전쟁.
본문을 보면 몇 일을 기다렸다고 되어 있습니까? 7일이지요. 여기서 주의 시간 개념을 봅시다. 광야에서는 죽음의 환경이기 때문에 시간이 흐르지 않아요. 그런데 광야에서 시간의 개념이 언제 주어졌냐 하면 그들이 (가나안 땅)을 40일 동안 정탐 했는데 하나님에 대해 불신했지요? 하루를 1년으로 잡아서 40년을 광야에서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해서 결국은 몰살 시킨 거에요. 다 죽인 겁니다. 왜 죽이냐 하면 40년 동안 하늘에서 뭘 줬냐하면 만나를 주었는데 만나가 없었으면 그들은 진작에 죽은 목숨이죠. 만나가 하루치 옵니다. 하루하루 주었던 만나는 공짜가 아니라 주님은 손해 보는 장사는 안 해요.
살려줬으면 거기에 대한 댓가가 있어야 되요. 그런데 그들은 살려 줬는데도 원망과 불신으로 바꿨잖아요. 그것에 대한 댓가로 만나는 이미 죽은 자를 만나의 투입으로 말미암아 살렸다는 사실을 그 취지를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빼내겠다는 겁니다. 40일 정탐했던 기간만큼 40일 몰살시킬 기간으로 이미 확정 지셨다는 겁니다. 그래서 결국 시간이란 사람을 죽이는데 소요한 기간. 이게 시간이에요. 그러면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은 뭡니까? 진작에 죽어야 했다라는 것을 우리를 통해 보여 주고자 해서 주신 일생이에요. 그들은 죽으면서 하나님께 불평했지요. 왜 불평합니까?
본인들이 감당이 안 되는 땅에 가게 했기 때문에, 그들은 못 간다는 말이죠. 만약 감당이 되는 땅에 가도록 했다면 그들은 뭐를 내세웠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힘으로 들어 갔다를 내세우게 되겠지요. 그래서 천국, 약속의 땅은 그것을 거부하는 거에요. 오늘 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이유가 뭐냐하면 조금이라도 내 기도, 내 헌금, 내 봉사, 내 충성, 내 순종으로 들어갔다는 그런 인간은 지옥 가야 마땅함을 알려줘야 하는 거에요. 내 성과, 내 실력의 결과로 이렇게 큰 예배당, 많은 교인과 많은 숫자의 헌금 등을 내세우면 안 되게 되어 있어요.
이야기 하면서도 가슴 아픈 것은 틀려도 한두 군데가 틀려먹은 것이 아니라니까요. 교회가 마치 마귀가 쳐놓은 늪에 빠진 것 같아요. 본인의 가치 본인에게 소중한 것, 본인의 고유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신이시여! 내 것 지켜달라고 요청하자고 모인 단체. 그래서 헌금을 목돈으로 내서 예배당을 지으니까 이번에는 우리 교회를 지켜주옵소서! 맨 날 하는 기도가 우리 교회를 지켜주옵소서! 우리 교회를 통해서 하늘나라가 확장되게 하옵소서! 맨 날 기도가 그래요. 그것 자기 자존심들 때문이에요. 자기 가치를 지키겠다는 겁니다. 우리 목사를 욕하지 마라! 우리가 뽑았다. 이것은 사울이잖아요.
하나님의 뜻은 뭐냐하면 그 인간의 일을 주의 일로 바꾸는 거에요. 주의 일로 바꾸어서 그들의 죄를 들춰내는 겁니다. (사무엘이)제사 드리고 난 뒤에 와요. 타이밍이, 사무엘이 언제 오는지는 몰라요. 다만 인간들이 죄 짓는 순간을 기다렸다가 타이밍을 멋지게 맞춰 오는 겁니다. 주의 은혜가 언제 오냐 하면 우리가 죄 안 지을 때는 안와요. 죄 짓고 난 뒤에 와요. 잘 됐다! 이제 걸렸다! 헌금 안 할 때는 안 옵니다. 헌금으로 목돈 냈는데 일이 안돼! 애가 아프다던지 할 때 주여! 헌금하고 십일조 했잖아요. 하면 찾아와요. 이제 걸려 들었어! 제가 아까 이야기 했잖아요. 교인들 오라고 열심히 했는데 있는 교인들마저 나갈 때.
그럴 때 이제 주님과 동업 못합니다라고 할 때 요한복음 6장 39절 나는 아버지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겠다는 말이 비로소 그 때 들어오는 거에요. 내가 실패자로 가담이 되야 비로소 주의 일이 나타나고 만약에 내가 나의 일에 성공해 버리면 뭐를 가리는 거에요? 십자가를 가리는 거에요. 결혼식장에서 그동안 이 신랑을 키운다고 밤낮으로 고생하고 아침에 도시락 준비해 주면서 이렇게 했는데 시어머니 될 분에게 절, 박수로 수고함을, 이 신랑을 키우느냐고 얼마나 고생하셨습니까? 이럴 때 주님이 재림해 버립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고 사고팔다가 완전히 작살나는 거지요.
우리가 하는 일이 맨 날 십자가를 가리는 그 역할을 하는 거에요. 세상 사람들과 같은 일을 해요. 다만 성령 받은 사람은 가리고 타이밍 맞춰서 주께서 질책하듯 찾아오지요. 성령의 객관적 사의는 뭐냐 의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다 이루었다는 차원에서 우리를 질책하는 겁니다. 이미 주께서 다 이셨는데 그게 소중한데 너는 무슨 딴 살림 차리려고 하느냐고 우리에게 찾아오는 겁니다. 7일 이라는 시간을 기다렸다가 제사를 지내고 난 뒤에 사무엘이 타이밍 맞춰 옵니다. “하나님은 왕을 버리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이 대목을 보면서 모든 사람들이 생각합니다. 아휴! 하루만 더 참지! 왜냐하면 사무엘이 7일 다음 날 왔거든요.
하루만 더 참지라고 하는데 하루 참았어도 사무엘이 절대로 안 옵니다. 또 그 다음 날 와요. 왜냐하면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이기 때문에, 십자가의 의미는 모근 제자들이 다 떠나가고 난 뒤에 아무도 예수를 믿을 위인은 없다라는 것을 다 밝히고 난 뒤에 심지어 베드로가 자기의 목숨을 받치겠습니다도 의미 없이 날아갈 그 때에 일방적인 주의 뜻에 의해 선택되어 천국 갑니다. 천국은 창세 전에 예정된 자가 가는데 그 고르는 과정의 작업에서 예수님과 같이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경험해야 되요. 내가 얼마나 못난 인간인지를,
그리고 얼마나 잘 난체 하면서 예수 믿는 것도 하나의 주특기로 여기고 써먹을 수 있는 실력처럼 여겨서 기도를 빡세게 해서 에너지 충전하듯 채워 놓으면 많이 쓸데 있는 것처럼 행운이 오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자기 만을 위해 살았잖아요. 첫째 시간이 끝나면서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어쩔 수 없어요.
10분 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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