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이미아
232강-YouTube강의(과학의 한계)180501-이 근호 목사
232강, 제목은 ‘과학의 한계’입니다. 옛날에는, 이스라엘 당시에는 우상이라는 것이, 모든 민족에게 신이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이 가짜 신을 겨냥해서 주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주시기 이전부터 인간에게는, 모든 인간을 통합해서 같이 공용이 가능한 사상이 있음을 내비쳤습니다. 이게 가짜 신이죠. 우상이고 헛된 신인데.
그러면 오늘날에는 이 가짜신이 누구한테 자리를 넘겨주고, 그 가짜신이 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것을 오늘날에는 그 우상의 역할을 과학사상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 입장에서 우상이죠. 달리 이야기해서 각각 민족마다 신이 있는데,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신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이 가능한 신들을 이방민족들은 섬겼습니다.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은 대화가 가능하고, 타협이 가능하고, 의견 조율이 가능한 신. 그런 신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확정된 계획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인간이 요구하는 대로 뇌물 받고 뭘 들어주기도 하고 복 주기도 한다는 그런 신을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편하게 믿었어요. 어차피 거래니까요.
그리고 신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인 자기한테 도움을 주지 않으면 신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니까, 다른 신, 도움 줬다고 소문난 신한테 바꿔치기하고 갈아타기 하면 되니까, 인간이 신을 섬기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특히 한 민족이나 한 가정에서 신을 믿으면 삼, 사대 째 아무 의문 없이, 거리낌 없이 우리 가정의 신으로서 수용을 하는 거죠.
그 신을 중심으로 해서 그 가정의 개성이라든지 정체성이 확정이 되고 확립이 되었습니다. 그걸 큰 단위로 이야기하면 국가의 신으로 규정되는 거죠. 근데 오늘날에는 이런 신들이 이 지구상에서 거의 다 추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신이 우선적인 생활의 표준이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신의 자리를 대신했느냐 하면, 바로 과학 또는 과학정신이 신을 대신했습니다. 옛날의 우상과 오늘날의 과학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삶의 윤택과 이익과 편리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신, 그 신을 인간이 선호했다는 말입니다. 그건 뭐냐 하면 인간은 지금 현 상태에 자족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인간은 신을 닮아가면서, 신이 갖고 있다고 상상이 되는 그 무한한 능력을 자기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신과 협상에 나섰습니다.
근데 그 일은, 이제는 구태여 신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스스로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을 믿는다는 것은 과학적인 입장에서는 미신을 믿는 겁니다. 미신이라는 것은 필요 없다가 아니라 구태여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 꼭 그렇게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선택의 관한 문제라는 것이죠.
아쉬울 때 또는 배부를 때, 여유 있을 때 신을 찾는 것은 하나의 고상한 취미로는 용납이 되지만, 과학이 있는데, 과학이 진리를 파악했는데, 이 과학문제나 장래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신에게 달려드는 것은 그건 옛날 사람들이죠. 요즘 현대인에게 안 맞는 겁니다. 그런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과학 또는 과학사상을 하면서, 과학이 우대받고, 인정받는 것은 정말 인간이 원했던 그 실적들을 과학이 증명을 해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에는 신의 분노와 신의 성질에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그 자연현상이, 이제는 그야말로 다 개 짖는 소리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과학적으로 따져보게 되면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협박하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인간 속에 영혼이 있다는 것을 파헤쳐보니까 영혼은 없고, 인간 속에 세포가 있는 거죠. 그 세포를 현미경으로 발견했고. 그래서 현미경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이 눈으로 보고 또는 귀로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고, 냄새 맡아지고, 입으로 맛볼 수 있는 이런 오감. 이런 오감에 의해서 마음속에 어떤 인상이 성립되는데, 그 인상을 추리면 그게 바로 개념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관념이 되는 거죠.
인간의 감각에서 인상까지, 감각이 본 것을 그대로 글로 표현해낼 때, 그것만이 믿을 수 있는 거고, 그걸 근거로 해서 추상적인 기능이 더 붙을 수 있는 관념 같은 것은 더 믿을 필요가 없는 거죠. 믿을 근거도 없고. 예를 들면 흄이라는 사람은 심지어 수학까지도 믿을 수 없다고 했어요. 정의는 물론이고, 사랑, 신, 이런 것은 과학자로서 볼 때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이렇게 본 겁니다. 증명이 안 되니까.
그래서 과학이 모든 것의 진리를 이렇게 정립을 했는데, 그러면 이 과학의 감각이라든지 인상, 이 근거는 무엇인가를 또 사람들은 이렇게 또 추적을 해봤는데, 그걸 실증주의 또는 논리실증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이 뭘 감각을 했고 뭘 파악했으면 기록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기록하는 그 명제, 진술하는 그 명제는 어디까지나 이거는 사람마다 다 다르고, 더 간소하고, 간편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거는 주관적인 서술에 불과하다. 그거까지 따질 수가 있는 겁니다.
열 사람이 현미경보고 열 사람이 이야기를 했으면 동일한 진술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 사람의 느낌, 지난밤에 부부싸움 한 것까지 영향을 미치고, 자기 몸의 컨디션, 이런 것에 따라서 진술하는 것이 변덕이 되고, 심지어 전에 진술한 것과 십년 전에 진술한 것이 같지가 않아요. 않기 때문에 결국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현 형편에서는 다소 필요한 것이지만, 과학조차도 그게 계속 필요하다고 하는 것에는 보장은 할 수 없다.
그런데 과학만큼 정확한 것은 없으니까, 결국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은 허무하다는 거예요. 허무하고 믿을 수 없다. 회의주의라고 합니다. 의심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 현세의 사람들은, 과학이 확실하지만 그 과학이, 과학에서 무시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 눈물, 아픔, 그리고 예정, 그런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늘 확고하게, 필요할 때마다 늘 제공해주는 그런 것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심한 허무주의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그 과학이 내세우는 그 증명이 뭐냐 하면 측량하는 것, 측정하는 거죠. 지난주에 교인이 몇 명 왔고 이번 주에는 몇 명 왔으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하나님의 복을 양적으로 측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보편적으로 그렇게 납득이 되는 거예요. 기도를 했더니만 수입이 늘었다든지, 어떤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을 어떤 양적으로 측정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 그 눈에 보이는 것이 변화가 있는데, 그 변화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양적으로 늘어났을 때, 나는 나의 힘이 늘어남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나에게 안정을 준다. 그것이 바로 신이라고 생각하고, 그 신의 내용에다가 뒤늦게 하나님, 삼위일체, 성부성자성령, 예수님까지 다 갖다 붙이니, 이것은 과학을 믿는 신자지, 그거는 천국 가는 신자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