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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232강, 233강) , 과학의 관계, 상관없는 관계 180501 본문

유튜브 강의(이근호)/유튜브 강의

(232강, 233강) , 과학의 관계, 상관없는 관계 180501

정인순 2018. 5. 2. 09:34

232강     음성                동영상


 

233강     음성                 동영상

 

 

 녹취:이미아

232강-YouTube강의(과학의 한계)180501-이 근호 목사

 

232강, 제목은 ‘과학의 한계’입니다. 옛날에는, 이스라엘 당시에는 우상이라는 것이, 모든 민족에게 신이 있어서, 하나님의 언약, 하나님의 말씀이 가짜 신을 겨냥해서 주께서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해서, 이미 하나님께서 말씀주시기 이전부터 인간에게는, 모든 인간을 통합해서 같이 공용이 가능한 사상이 있음을 내비쳤습니다. 이게 가짜 신이죠. 우상이고 헛된 신인데.

 

그러면 오늘날에는 이 가짜신이 누구한테 자리를 넘겨주고, 그 가짜신이 다 없는 것처럼 보이는가, 그것을 오늘날에는 그 우상의 역할을 과학사상이 대신하고 있습니다. 우상이라는 것은, 물론 이스라엘 입장에서 우상이죠. 달리 이야기해서 각각 민족마다 신이 있는데, 신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과 신 사이에 직접적인 연결이 가능한 신들을 이방민족들은 섬겼습니다.

 

연결이 가능하다는 것은 대화가 가능하고, 타협이 가능하고, 의견 조율이 가능한 신. 그런 신을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름대로의 확정된 계획이 없다는 겁니다. 인간이 원하는 대로, 인간이 요구하는 대로 뇌물 받고 뭘 들어주기도 하고 복 주기도 한다는 그런 신을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편하게 믿었어요. 어차피 거래니까요.

 

그리고 신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인간인 자기한테 도움을 주지 않으면 신이 한 두 가지가 아니니까, 다른 신, 도움 줬다고 소문난 신한테 바꿔치기하고 갈아타기 하면 되니까, 인간이 신을 섬기는 데는 별다른 어려움은 없었습니다. 특히 한 민족이나 한 가정에서 신을 믿으면 삼, 사대 째 아무 의문 없이, 거리낌 없이 우리 가정의 신으로서 수용을 하는 거죠.

 

그 신을 중심으로 해서 그 가정의 개성이라든지 정체성이 확정이 되고 확립이 되었습니다. 그걸 큰 단위로 이야기하면 국가의 신으로 규정되는 거죠. 근데 오늘날에는 이런 신들이 이 지구상에서 거의 다 추방이 되고 말았습니다. 신이 없다는 말이 아니고, 신이 우선적인 생활의 표준이나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무엇이 신의 자리를 대신했느냐 하면, 바로 과학 또는 과학정신이 신을 대신했습니다. 옛날의 우상과 오늘날의 과학이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삶의 윤택과 이익과 편리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신, 그 신을 인간이 선호했다는 말입니다. 그건 뭐냐 하면 인간은 지금 현 상태에 자족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인간은 신을 닮아가면서, 신이 갖고 있다고 상상이 되는 그 무한한 능력을 자기 것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신과 협상에 나섰습니다.

 

근데 그 일은, 이제는 구태여 신이 아니더라도 인간이 스스로 그 일을 해낼 수 있다고, 그렇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거의 모든 사람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신을 믿는다는 것은 과학적인 입장에서는 미신을 믿는 겁니다. 미신이라는 것은 필요 없다가 아니라 구태여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것, 꼭 그렇게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 선택의 관한 문제라는 것이죠.

 

아쉬울 때 또는 배부를 때, 여유 있을 때 신을 찾는 것은 하나의 고상한 취미로는 용납이 되지만, 과학이 있는데, 과학이 진리를 파악했는데, 이 과학문제나 장래문제에 대해서 그렇게 신에게 달려드는 것은 그건 옛날 사람들이죠. 요즘 현대인에게 안 맞는 겁니다. 그런 인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과학 또는 과학사상을 하면서, 과학이 우대받고, 인정받는 것은 정말 인간이 원했던 그 실적들을 과학이 증명을 해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전에는 신의 분노와 신의 성질에 따라서 이루어졌다는 그 자연현상이, 이제는 그야말로 다 개 짖는 소리에 불과하고, 아무것도 아니에요. 과학적으로 따져보게 되면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협박하는 논리가 성립이 되는 겁니다.

 

인간 속에 영혼이 있다는 것을 파헤쳐보니까 영혼은 없고, 인간 속에 세포가 있는 거죠. 그 세포를 현미경으로 발견했고. 그래서 현미경을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뭐냐 하면, 그것이 눈으로 보고 또는 귀로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고, 냄새 맡아지고, 입으로 맛볼 수 있는 이런 오감. 이런 오감에 의해서 마음속에 어떤 인상이 성립되는데, 그 인상을 추리면 그게 바로 개념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관념이 되는 거죠.

 

인간의 감각에서 인상까지, 감각이 본 것을 그대로 글로 표현해낼 때, 그것만이 믿을 수 있는 거고, 그걸 근거로 해서 추상적인 기능이 더 붙을 수 있는 관념 같은 것은 더 믿을 필요가 없는 거죠. 믿을 근거도 없고. 예를 들면 흄이라는 사람은 심지어 수학까지도 믿을 수 없다고 했어요. 정의는 물론이고, 사랑, 신, 이런 것은 과학자로서 볼 때에 믿을 수 없는 것이다, 라고 이렇게 본 겁니다. 증명이 안 되니까.

 

그래서 과학이 모든 것의 진리를 이렇게 정립을 했는데, 그러면 이 과학의 감각이라든지 인상, 이 근거는 무엇인가를 또 사람들은 이렇게 또 추적을 해봤는데, 그걸 실증주의 또는 논리실증주의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게 뭐냐 하면 사람이 뭘 감각을 했고 뭘 파악했으면 기록을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기록하는 그 명제, 진술하는 그 명제는 어디까지나 이거는 사람마다 다 다르고, 더 간소하고, 간편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거는 주관적인 서술에 불과하다. 그거까지 따질 수가 있는 겁니다.

 

열 사람이 현미경보고 열 사람이 이야기를 했으면 동일한 진술이 나와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그 사람의 느낌, 지난밤에 부부싸움 한 것까지 영향을 미치고, 자기 몸의 컨디션, 이런 것에 따라서 진술하는 것이 변덕이 되고, 심지어 전에 진술한 것과 십년 전에 진술한 것이 같지가 않아요. 않기 때문에 결국 과학이라고 하는 것은, 현 형편에서는 다소 필요한 것이지만, 과학조차도 그게 계속 필요하다고 하는 것에는 보장은 할 수 없다.

 

그런데 과학만큼 정확한 것은 없으니까, 결국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상은 허무하다는 거예요. 허무하고 믿을 수 없다. 회의주의라고 합니다. 의심을 할 수밖에 없어요. 그러니 이 현세의 사람들은, 과학이 확실하지만 그 과학이, 과학에서 무시하는 그 사랑이라는 것, 눈물, 아픔, 그리고 예정, 그런 것은 과학적으로 증명이 늘 확고하게, 필요할 때마다 늘 제공해주는 그런 것이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심한 허무주의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그 과학이 내세우는 그 증명이 뭐냐 하면 측량하는 것, 측정하는 거죠. 지난주에 교인이 몇 명 왔고 이번 주에는 몇 명 왔으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복이다. 하나님의 복을 양적으로 측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거예요. 보편적으로 그렇게 납득이 되는 거예요. 기도를 했더니만 수입이 늘었다든지, 어떤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을 어떤 양적으로 측정이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저 눈에 보이는 것, 그 눈에 보이는 것이 변화가 있는데, 그 변화라는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이 양적으로 늘어났을 때, 나는 나의 힘이 늘어남으로 이해하고, 그것이 나에게 안정을 준다. 그것이 바로 신이라고 생각하고, 그 신의 내용에다가 뒤늦게 하나님, 삼위일체, 성부성자성령, 예수님까지 다 갖다 붙이니, 이것은 과학을 믿는 신자지, 그거는 천국 가는 신자라고 할 수가 없는 겁니다.

 

 233강-YouTube강의(상관없는 관계)180501-이 근호 목사

 

233강, 제목은 ‘상관없는 관계’입니다. 북한 말에 “일 없습네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일 없다는 말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상관없습니다. 괜찮습니다.”라고 좋게 이야기할 수도 있고, 안 그러면 거절의 의미도 있죠. 도와드릴까요? 일 없습니다. 나는 당신 일에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은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납니다. 그렇게 되는 거죠.

 

이 말은 오늘날 하나의 생물체가, 보통 유기체라고 하는데요. 생물체가 태어나면서부터, 세포도 그렇지만, 자기 자신을 가두어두는 막 같은 것이 형성되어 있어요. 모든 생명체에. 우리 몸은 피부라는 것이 있습니다. 막 같은 것이 있어서 피부가 있죠. 피부가 있으면, 피부의 바깥과 피부의 안이 확연하게 구분이 됩니다. 피부 바깥은 남의 세계고, 피부 안은 나의 세계가 됩니다.

 

그러면 그 피부 안에 모안 둔, 가두어둔 그 안에 있을 때에, 그 안에서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자의식을 생산해내는 일이 그 안에서 세포들이 협동해서 이루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외부에서, 피부를 통해서 병균이 들어왔을 때에는 백혈구가 와서 이걸 막는다고 의학에서 그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목숨을 바쳐서 막아요. 그걸 면역이라고 하는데, 면역이라고 하는 것은 따로 지킬 것이 있고, 따로 챙길 것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런데 물질이 있는 우리의 피부나 세포, 몸만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것에 덩달아서 우리 마음도 그렇습니다. 마음도 그러니까, 나라는, 지금 나를 지키려는 이 자아가 팽창하고 이걸 사수하는데, 새롭게 들어오는 그 힘이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이냐, 아니면 방해가 될 것이냐를 알아서 측정하게 되어 있어요.

 

이 이야기는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지키는 것이 본성이라 이 말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지키지 누가 지켜주겠습니까? 내가 스스로 지키는 것이 본성이라 이 말이죠. 이게 본성이 될 때에, 나 말고 다른 쪽이 왔을 때에 동지 아니면 적, 아니면 그 중립지역, 동지가 될 수도 있고 적이 될 수도 있는, 유보된 가치로서 대상을 바라보게 되어 있습니다. 항상.

 

이 말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중심으로 타고났다는 그걸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자기긍정이죠. 자기지킴이 타고났는데, 어떻게 자아가 나에게서 예수님 쪽으로 건너갈 수가 있습니까? 못 건너가죠. 믿는다는 말을 제대로 이해해야 돼요. 믿는다는 말은 이용한다는 말과 같은 말로 우리는, 내가 그렇게 해석을 해버려요.

 

성경에서 믿는다는 말은 나를 죽이는 거예요. 나를 믿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미 우리의 본성부터가 나 위주로 살면서 “믿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도와주세요.” 또는 “당신을 이용하겠습니다. 그러니까 당신은 알아서 내가 이용하는 대로 그냥 가만히 계세요.”라든지, 협조해달라는 그런 요구에 불과한 거예요.

 

믿음으로 기도한다는 말이 뭔 뜻이에요? 당신 것을 빼낼 테니까 당신은 거기에 대해서, 내 일에 대해서 협조해달라는, 그런 내용 외에는 뭐 다른 내용이 있겠어요? 누굴 위해서입니까? 나를 위해서죠. 근데 성경 전체를 보세요. 모든 피조물은 누굴 위해서? 하나님을 위해서 있지, 피조물을 위해서 하나님이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도대체 성경대목에서 뭘 믿는다는 말이죠?

 

결국은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인간은 아무리 자기를 낮추고 자기를 비워도, 자기를 낮추고 비울 수 있는 그런 인간이 아니라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할 때에, 그것은 누구하고 비교하는가 하면 예수님과 비교하는 거예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의와 죄라는 것은, 자기한테 유리하면 의라고 보고, 자기한테 손실이 오면 이건 나쁜 것이라고 봐요. 악한 것으로 보고 죄로 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인간이 생각하는 그 의와 죄조차도 이건 원래 하나님이 생각하는 의와 죄가 달라요.

 

그러니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본다고 할지라도 그거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이 자기위주에서 어떻게 벗어납니까? 교회 나오라고 하면, “교회 나가면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습니까? 내가 교회 나오는 그런 행위를 할 테니까, 그럼 교회는 반대급부로 나에게 무엇을 제공할겁니까?” 이래 나올 게 뻔하다 이 말이죠. “교회 나오시면 천국 줍니다.”이렇게 하면 또 오해가 되는 거죠. “아, 나는 내 위주로 멀쩡하게 있으면서 추가적으로 천국을 또 추가해서 받는구나.” 이렇게 돼버리면 그게 무슨 천국이겠어요? 지옥이겠죠.

 

사무엘하 22장에 보면, 다윗이 말년에 하나님께 찬송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 찬송하는 대목을 보게 되면, 4절에 “내가 찬송 받으실 여호와께 아뢰리니 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얻으리로다” 5절, “사망의 물결이 나를 에우고 불의의 창수가 나를 두렵게 하였으며” 6절,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도다” 이렇게 되어 있어요.

 

찬송하는 이 내용은 다윗에게, 자기의 우여곡절이 많았던 인생을 다 살아오면서, 결국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먼저 제시한 것이 있어요.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었고 언약이었습니다. 그걸 다윗언약이라고 하는데, 다윗언약을 하나님 쪽에서 먼저 제시했기 때문에, 다윗은 그 언약 앞에서 언약을 받고 난 뒤에 뭐가 들통이 나느냐 하면, 나는 아무리 해도 나 밖으로 나갈 수 없는 존재라 하는 것이 아주 철저하게 파헤쳐지는 겁니다. 발각이 돼요.

 

아, 나라는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놓지만, 그 약속을 성취할 수 있는 그 능력도 없고, 그러한 자질도 안 된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언약을 가지고 자기에게 다가오실 때, 그걸 절실하게 느끼게 됩니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못난 나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줬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에 있어서 못난 인간이 기여할 바는 전혀 없음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내가 내 구원받는데 있어서, 못난 내가 내 구원에 협조하거나 도움을 줄 수 있는 요소는 일체 없음을 깨닫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찬송을 하는 것은, 다윗의 마지막 때에, 그러한 마음가짐을 가질 때에, 비로소 하나님의 원수가 누구며, 하나님의 원수에게서 자기를 구원하는 데에 있어서 하나님의 도움이 절대적이라는 사실, 모든 시작과 끝을 하나님의 개입으로 마무리 지었다는 이 사실에, 다윗은 찬양하면서 고마워하면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바로 언약 안에 있는 후대의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고백으로 나타나야 되죠. 하나님의 언약이 덮쳤다. 그러면 제가 아까 이야기한 것처럼 갈수록 나는 못난 자가 돼요. 무능한 자가 되고,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는 겁니다. 아무것도 아닌. 바닷가에 모래알처럼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남한테 쓸모 짝 있는 인간은 아니에요. 다른 사람하고 동일해요. 저 사람도 못났고 나도 못났어요.

 

다 같이 못났는데 창세전에 선택했다는 이유 때문에 하나님의 일에 동참하게 되고, 참여하게 된 거예요. 협조한 것이 아니고 참여하게 된 거예요. 도움 되라고 뽑힌 것이 아니고, 도움이 되지도 못했는데 일이 다 마무리 되는 것을 통해서, 오직 모든 일의 시작과 끝이 언약 속에 계신 분.

 

바로 찬미 받아야 될, 찬송 받을 역사를 두신 그분이 되고, 그분 앞에서 우리는 내가 알지 못했던 주님의 원수를, 우리는 그 원수 속에서 못 빠져나왔는데 빠져나온, 구원이니까, 흉악한 죄에서 구원되었다는 사실을, 빠져나왔다는 그 말끔함, 깔끔함을 원 없이 찬미하죠. 이것이 다윗의 찬송이고 오늘날 우리가 해야 될 찬송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