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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레위기 19:1 / 죽음 놀이 / 180406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레위기

레위기 19:1 / 죽음 놀이 / 180406

정인순 2018. 4. 7. 08:5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한윤범

20180406a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죽음놀이
(강의:이근호 목사)


오늘은 레위기 19장 할 차례입니다. 레위기 19장 1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희’라는 말은 생각해봐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특정 개인을 부르는 게 아니고 어떤 집단을 구원합니다. 집단, 단체를 구원할 때는 모델이 있어야 되겠지요. 하나님과 너희라는 집단 사이에 한 분을 대표해서 그 한 사람이 말씀을 대신하게 되면, 모세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알아듣는 무리, 그게 너희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면 쉬운데요. 사람이 자기 내부에서 올라오는 자기 생각을 안 믿고 자기 바깥의 어떤 사람에게 자기 운명을 맡긴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모험입니까? 보통 큰 모험이 아니죠. 사람은 자기 쪽으로 방향이 정해져있어요. 모든 걸 내 쪽으로 끌어 모으는 거예요. 애들 보면 그런 게 많잖아요. 맛있는 게 있으면 할아버지가 맛 좀 보자고 하면, 안 돼! 앞의 방향이 저쪽이 아니고 내 쪽으로 오게 돼있습니다.

원래 인간은 자기밖에 모르게 돼있어요. 방향을 내 쪽이 아니고 저쪽으로 가져간다는 것은 사실 인간으로선 가능할까, 생각해봐야 돼요. 한 가지 예를 들면, 교회에 교인수가 많은 게 좋습니까, 아니면 그 교회에 사도 바울이 방문하는 게 좋습니까? 주의 종 사도가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준다면 그 순간은 교인수가 몇 명인지 생각이 안 나지요. 사도 바울에게 마음을 빼앗겨 버리면 방향이 내 쪽에서 사도 바울 쪽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럴 때 우리는 사도 바울에 속한 ‘너희’가 되는 겁니다.

너희란 말은 무엇을 전제로 하느냐 하면, 너희가 O가 되려면 나는 X가 돼요. 내 생각 안 하고 주님께서 보내신 분의 말씀이 더 중요한 거예요. 교인수가 중요한 게 아니고 말씀이 있느냐가 중요하죠. 우리 집 한 달 수입이 얼마인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 집에 늘 말씀이 있느냐, 믿느냐가 더 중요한데 그 사람은 너희에 속해요. 너희란 말을 볼 때 너희의 반대말이 문법적으로 우리가 되지만 사실 우리가 아니고 너희의 반대말은 나가 돼요.

이런 이야기를 왜 초반에 하느냐 하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고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하나님께서 누구에게 말씀을 한다는 것은, 너희는 하나님 것이지 너희가 흔히 말하는 나, 너희가 너희들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내가 내 자신의 것이 아니란 뜻이에요. 그렇다면 여기 거룩하란 말은 뭐냐 하면, 이걸 쉽게 풀이하면 인간이 평소에 어떤 걸 내놓지요? 보통 자기 것을 내놓지요. 더 쉽게 이야기하면, 당신은 무엇에 그렇게 진지합니까? 당신이 인생 살면서 가장 진지한 게 무엇이냐고 묻게 되면, 그것은 평소에 그 사람이 내놓고 싶은 것에 대해서 그렇게 진지하게 돼있어요.

인간에게 뭔가 내놓고 싶은 게 있다는 자체가 인간이 문제가 있다는 겁니다. 인간은 나에 대해서 내놓을 게 없어야 돼요. 너희에 대해서 내놓을 게 있어야 되지 내가 나만이 따로 챙긴 게 나오면 안 되는 겁니다. 그것은 레위기 19장에 하나님께서 너희라고 한 말에 부합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 너희라고 시작했다는 말은, 여기에 대해서 우리가 나의 것으로 마중을 나와서는 안 된단 말입니다.

사람은 앞에 있는 모든 것을 끌어당기는 방향성을 갖고 있다고 했지요. 우리가 평소에 남한테 이야기하거나 내놓는 게, 내놓는다는 말은, 버스 타면 남의 이야기가 본의 아니게 들리는 것, 벤치에 앉아서 사담하는 것 들었을 때 두 사람이 이야기할 때 서로서로 내놓는 게 있어요. 자기 이야기죠. 그가 왜 자기 이야기냐 하면 평소에 그 사람이 거기에 진지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자식문제에 대해서 이야기 나온다는 것은 평소에 관심사가 자식한테 꽂혀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런데 레위기 19장에서 하나님이 원하는 거룩은 뭐냐 하면, 내가 끌어 모은 것을 내놓으란 말이 아니고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서 관심 있습니다, 방향이 끌어 모은 게 아니고 주의 말씀에 끌려가기를 원합니다. 끌려가는 그 모습이 나오는 그것이 바로 거룩입니다. 거룩은 분리란 뜻이고 다른 민족과 차이 난다는 뜻이거든요. 이 세상의 모든 민족과는 달리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님 앞에 끌리는 것을 좋아해야 돼요. 주님 앞에 끌어당기는 걸 영광으로 여겨야 된단 말이죠. 감사히 여겨야 되고.

세상 사람들은 거기에 대해서 끌어 모은 것을 감사하지요. 챙긴 것을 감사하고. 자기 것이 든든하다는 것에 대해서 진지하고. 만약에 박근혜 전 대통령이 성도라면 주께서 나로 하여금 징역 24년 살게 만들고 180억 벌금으로 내게 하신 것에 대해서 감사해야 되는 겁니다. 얼굴 초췌하게 있을 게 아니고. 방글방글 명랑해야 돼요. 진짜 교도소에 있는 걸 산뜻하게. 내가 원했던 게 아니잖아요. 주께서 원한 거잖아요.

내가 원한 것과 주께서 원한 것 사이에서 누가 이겼느냐? 주께서 날마다 내가 원하는 걸 해주지 않은 그것에 대해서, 주께서 이긴 그것이 바로 감사할 일이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인생이란 자기가 실패한 이유만 안다면, 그 사람은 성공한 인생이기 때문에. 내가 이 땅에서 실패해야 될 이유, 쉽게 말해서 주님은 죄인을 부르러 왔다는 거예요. 내가 이 땅에 죄인이었다는 사실을 확정짓는 그 근거만 안다면 그것보다 더 성공한 사례가 있을까요? 그게 최고로 성공한 인생이에요. 인생 성공이란, 내가 실패해야만 할 이유, 정당성을 발견하는 것이에요.

왜냐하면 그동안 실패한 이유는 바로 내 것을 따로 챙기려고 하는, 하나님의 뜻과는 배치되는 짓을 평생토록 해왔기 때문에. 처음부터 내 것이라는 것을 주께서 허락한 적이 없거든요. 주께서 허락한 적도 없는데 내 속에 있는 마귀 말만 믿고, 네 것 네가 챙겨야 돼. 착한 네가 챙겨야 되고 너의 선함으로 챙겨야 돼, 라고 나오니까 인간은 자기 존재의 정당성, 자기 의를 위해서 계속해서 챙겨온 거예요. 그것이 자기 진정한 관심사가 되었고 그걸 이야기로 만들어서 남한테 자랑 질했고. 그건 어디까지나 나에요. 너희가 아니고.

3절에 보면,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고 돼있지요. 모든 인간의 존재의 원인은 자기한테 것이 아니고 바깥 상황, 바깥 사회에 있습니다. 울산에서 23살 먹은 사람이 버스를 박고 버스를 밀어붙였다는 거예요. 그래서 버스가 현대자동차공장 담벼락에 충돌해서 2명 죽고 5명 다쳤어요. 2명 죽은 원인이 뭡니까? 본인한테 있는 거예요? 왜 버스 타고 삐딱하게 앉았어. 왜 버스 탈 때 사고 날 걸 미리 예상 못하고 딴 생각했느냐? 그래서 네가 부상당할 만하다. 그렇게 책임 물을 수 있습니까? 없잖아요. 이 세상의 모든 원인은 우리한테 있는 게 아니에요. 처음부터 우리라는 것은 일시적 존재기 때문에, 순간적 존재기 때문에 우리한테 책임을 물을 수 없다는 거죠. 바깥에 있는 거예요.

원인 바깥에 있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처음부터 나의 것이란 성립될 수 없다는 것과 같은 말이에요. 나의 것이 있다고 하니까 나의 것이 철저하게 안 다치는 쪽으로, 안 다치는 결과를 내기 위해서 괜찮은 원인들을 계속해서 생각하는 합니다. 그것은 다 세상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래요.

23살 먹은 청년이 내가 탄 버스를 밀어낼 줄 어떻게 알았겠어요. 다친 사람, 죽은 사람 아무도 몰랐지요. 두 사람 죽었는데 버스 탄 게 죽을죄에요? 사람들이 죽을 때는 그만한 상응하는 사회적 범죄를 저지를 때는 사형에 해당된다고 하는 게 원칙이죠. 그런데 버스 탄 게 죽을죄입니까? 아니죠. 그러면 일반적 상식과는 안 맞는 거예요. 사람 죽여도 요샌 사형 없잖아요. 그런데 버스 잘못 타서, 그것도 대전 버스도 부산 버스도 아닌 울산 버스.

사람이 죽는 것은 로마서 6장에 보면, 죗값으로 죽는다 했는데 그 죄가 뭐냐는 겁니다. 그 죄는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나의 것을 위하여 내가 살다보니까 나의 것에 원래 주인의식이 없는 거예요. 쉽게 하겠습니다. 복수 또는 보복이죠. 보복이란 어떤 때 성립하느냐 하면, 내 것이 있을 때 복수와 보복이 가능해요. 내 것이 없다면 복수와 보복이란 성립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을 죽였다. 민수기에 나오거든요. 안식일에 나무하는 사람은 돌로 쳐 죽이라고 했어요. 그러면 안식일에 나무하는 것에 대해서 왜 주님께서 처벌하느냐 하면, 돌에 맞아 죽은 사람이 그 사람 인생이 아니고 누구 인생이냐 하면 주님의 인생이기 때문에 주님이 보복하는 거예요.

아벨이 죽었잖아요. 하나님께서 땅이 호소해서 가인을 찾아옵니다. 복수죠. 아벨은 아벨 것이 아니에요. 주님의 것입니다. 로마서 14장에 보면, 성도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했거든요. 주의 것이니까 주의 것이 거룩하지 않을 때는 누가 처벌할 권한이 있느냐? 하나님이 처벌할 권한이 있어요. 그리고 그 처벌은 처벌해달라고 해서 처벌하는 게 아니고, 인간은 쥐도 새도 모르게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계속해서 주님의 변치 않는 원칙에 의해서 처벌이 이뤄졌고 결국 죽음으로 끝나는 겁니다. 갓난아기부터 해서 전부 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무지무지하게 성실해요. 참 부지런하고. 자기 일에 게으름이 없습니다. 또 빈틈이 없고. 하나님은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립니다. 그 정도로 성실합니다. 성실하신 하나님. 철저하게 보복과 복수를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안식일을 지키라 했어요. 누가 다른 사람에게 명령한다는 말은, 자기 것일 경우에는 명령이 돼요. 부모가 자식한테 명령하는 이유는 남의 자식이 아니고 내 자식이기 때문에 그렇잖아요.

안식일을 지키라, 거룩하라는 말을 다른 말로 하면, “너는 내 거야”란 뜻이에요. 얼마나 감사할 일입니까. 말씀을 주신다는 게 이 정도로 고마운 일이에요. 말씀을 줄 때는 태도가 말씀 준 방향으로 나가야 되겠지요. 평소에 인간들의 방향은 뭐든지 끌어 모으는 방향에서 말씀이 왔을 때는 방향이 반대로 바뀝니다. 끌어 모으는 게 아니고 그냥 가져가세요, 하는 거죠. 마음껏 사용해주세요, 마음껏 다루어주세요, 라고 자기를 패배하는 태도를 갖추게 됩니다.

그래서 제가 아까 물었잖아요. 교회 교인수가 많은 게 좋습니까, 말씀이 있는 게 좋습니까? 교인수가 많으면 우리교회 교인수 많다고 다들 끌어 모을 생각을 하지만 말씀이 있으면 말씀만 있으면 좋사오니, 이렇게 되니까 니 것, 내 것, 우리 것이 없고 다 같이 주님 보시기에 너희가 되어서 나를 챙기는 것에서 내가 손을 놔도 되는 그러한 상황이 일어나죠. 그 방향성이 바로 기존의 상식적인 방향과 다른 구별되다, 거룩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3절에 나와 있는 부모를 경외하고 안식일을 지키란 말을 설명해드리겠습니다. 제가 아까 이야기했지만 이 세상에 원인은 나한테 있는 것이 아니고 나 바깥에 있는 상황 또는 사회에 있다 했지요. 그럼 부모는 ‘나’가 아니잖아요. 부모는 나 바깥에 있는 어떤 인물이죠. 그게 상황이죠. 내가 이 땅에 있다는 것은 나 이전에 부모가 먼저 있고 그 다음에 내가 있는 겁니다.

부모를 경외하란 말은 뭔 뜻이냐 하면, 나는 나에 대해서 관심사가 떠나라 이 말이에요. 자기의 원천을 찾아가는 거예요. 자기의 본래 모습이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립니다. 얼굴을 돌리는 거예요. 나의 원천, 나의 기원, 나의 시작, 나의 뿌리, 그것을 잊지 않고 생각해야 된다 이 말입니다. 자식이 부모에 관심을 둔다는 말은 부모에서 멈추지 않겠지요. 부모의 부모, 계속하게 되면 누구한테 관심을 두겠어요? 하나님, 부모를 말씀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에 관심이 있겠지요. 그러면 부모를 경외하라는 그 말씀 안에 자신의 뿌리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부모 경외와 더불어 주어진 게 안식일을 지켜라.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은 창세기 1장에 나온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그 다음에 모든 걸 만드시고 만족하셔서 안식일을 만들었거든요. 그러니까 안식일이란 인간이 존재하게 된 그 원천을 안식일로 묘사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떤 게 안식일이냐 하면, 나의 것을 다 빼앗아 원래 주인에게 되돌려줄 때 그게 바로 안식상태가 되는 겁니다. 내 몸, 내 인생을 내가 다루는 것이 아니고 주님께서 다루시는 상태가 안식상태가 됩니다.

그러면 우리 자신에 머물면 안 되겠지요. 자신에게 머물러 있으면 안 빼앗기려고 할 테니까 주님한테 못 물려주잖아요. 내 것인 데 왜 돌려줍니까, 이러면 안식이 아니란 말이죠. 안식을 한다는 것은 평소에 내 몸을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그 자체를 잊어버려야 되고 또는 몰라야 되겠지요. 잊어버리는 게 안식이고 모르는 게 안식이에요. 안식이 되면 바보, 등신이 되는 거예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인생 힘들게 살고 직장, 가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로 힘들게 살다가 잠에 곯아떨어지게 되면 그건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바보, 등신이 되는 겁니다. 잠자니까 모르게 돼있지요. 수면내시경 해보세요. 아이큐 150 넘어도 수면내시경 하는 순간에 바보, 등신 돼버려요. 몰라요. 그 과정이 불연속 돼버려요. 나는 지금 깨어있다. 마취제 들어간다. 정신 차려야지 하다가 깨면 다른 방에 옮겨져 있어요. 내 기억에 단절이 생겼어요.

주님께서 안식에 이르게 하는 방법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고집스런 나의 기억을 단절시켜버려요. 이건 노선의 문제거든요. 나라는 노선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갑니다. 가다가 중간에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나라는 노선에서 성령님의 노선으로 가요. 성령님은 원래적인 분이에요.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원래 계셨던 분이에요. 하나님이 안식 만들 때 거기에 계시던 분입니다. 원래 노선이 따라오다 내가 스무 살 때 잘 나갔고 나이 사십에 성령세례 받았다. 낚아채는 거죠. 독수리가.

낚아채면 내 기억 속에 예상 못한 일이 벌어져요. 어떤 현상이냐 하면, 내가 평소에 꾸준히 해왔던 나의 버릇은 어떤 일을 행하면 그것은 원인이고, 그 원인의 결과를 내 바구니에 다 담았어요. 나라는 위상과 내가 설정한 나의 영역을 채우는 데 급급한 거예요. 대표적인 것이 결혼해서 아이들 많이 낳는 거죠. 3명, 4명 낳을 때 옆집에 배급 주려고 낳습니까? 얘가 강아지입니까? 나눠주려고 하는 게 아니잖아요. 다섯, 여섯 되도 나는 외롭게 살아서 얘 키우는 게 재밌어.

그러다가 성령세례를 받으면 내가 해서 원인-결과 자체가 무의미해지는 거예요. 의미가 없고 성령이 찾아오게 되면 그 순간부터 새사람 되는 게 아니고 처음부터 소급해서 의미가 제공됩니다. 내 노력이었다고 여겼던 것도 내 노력이 아니고 주님이 허락하신 거구나, 라는 것을 소급해서 알게 돼요.

그러면 내 기억이란 노선에서는 나에게 모든 걸 회수하다가 성령이 임하게 되면 나에게 회수한 것 몽땅 주님 앞에 반납하게 되지요. 사나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얘가 다섯이든, 여섯이든 관계없어요. 주님께서 돌려드리게 되는 겁니다. 성령이 임하게 되면. 다 바치게 되죠. 왜냐하면 주님의 허락이고 주님의 뜻에 의해서 아이가 다섯이고 여섯이고 생겼으니까 몽땅 주의 것이라고 돌려주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 속에는 두 개가 있어요. 나의 기억이 있는데 성령께서는 십자가 피를 앞장세웁니다. 나의 기억에 있는 내 소원, 내가 잘하려고 한 모든 것이 예수님의 피를 흘리게 한 죄에 해당됨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피를 모르면 죄를 몰라요. 피를 모르는 상태에서 십자가를 모르는 상태에서 복음을 모르는 상태에서 죄라는 것은 또다시 자기 자신을 잘난 척하고 있는 겁니다. 나는 내 죄를 압니다. 매일같이 반성합니다. 자책합니다. 두 번 다시 그런 짓 안 할게요. 지저분한 짓 다신 안 하겠습니다.

이건 어떤 의미에서 나는 다시 괜찮은 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 있다고 남한테 떠벌이고 있는 거예요. 뭐가 진지합니까? 자기 잘남이 진지한 거예요. 무슨 이야기를 합니까? 나는 다시 새사람 될 수 있다는 것을 남한테 이야기하는 거예요. 이거는 예수님이야기 아닙니다. 십자가이야기 아니죠. 괜찮을 자기 장래를 미리 당겨서 자랑 질하는 겁니다.

두 노선 가운데 어느 게 안식일입니까? 안식일은 본래적이라 했지요. 창세기 2장 초반에 안식일 나오지요. 천지창조가 완성됐을 때 안식일이라 했단 말이죠. 하나님도 안식하고. 하나님의 안식이란 너는 네 것이 아니고 본래 나를 위해서 만들어졌음을 다시 원래 위치로 되돌아왔다는 걸 알 때 우리는 마음에 안식을 느끼는 겁니다.

원인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우리 인간에 일어나는 모든 원인은 누구한테 있습니까? 나한테 있습니까, 아니면 사회에 있어요? 사회에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 받으면 더 나가야 돼요. 사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게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울산의 버스가 차에 받혀 밀려서 담벼락에 부딪쳐 두 명 죽였다는 그 사람은 참새도 주께서 허락해서 죽이듯이 그 순간에 하나님께서 죽게 하신 겁니다.

가족들은 그 점에 대해서 그 부모가 만약에 그렇게 돌출했다는 걸 안다면 그 가족들도 정신 차리고 내가 내 자신에 머물러 있다면 이건 살아도 죽은 상태라는 거예요. 이미 죽은 상태라는 걸 자식들은 감 잡아야 돼요. 성경에서 죽음이란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걸 말합니다. 끊어졌다는 말은 인간 쪽에서 요구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 쪽에서 듣지 않는 그런 것이 죽음 관계에요. 기도를 해도 안 듣고 열심히 해도 안 듣지도 않고. 인간의 모든 것을 일체 듣지 않는 상태가 죽음 상태에요.

“너는 너 혼자 살지 찾기는 왜 찾느냐?” 이런 식이에요. “니가 그렇게 잘났으면 평소에 네 힘으로 잘 살데, 왜? 살아 봐.” 주님으로부터 배척당하고 배격당하고 배제당하는 그게 바로 죽음이에요. 눈꺼풀 깜빡거린다고 산 게 아니에요. 홀로 살면 죽은 상태에요. 연예인들 혼자 살고 엄마들 나와서 지켜주는 프로 있지요. 죽은 자식들 부모가 지켜보고 있는 거예요.

우리 각자에 cctv가 달렸다고 봅시다. 내 모든 일상에 대해서 다 지켜보고 있습니다. 주님이 지켜본다는 사실에 대해서 굉장히 고마워하고 감사한다면 그 사람은 열린 상태거든요. 연결된 상태기 때문에 그런 상태를 살았다고 하는 거예요. 그건 죽어도 산 거예요. 버스 사고 나도 죽어도 산 거예요. 그런 성도를 안식이라 해요. “이제 그만 됐다. 고생 많이 했다. 이제 천국 와서 편히 쉬라.” 이렇게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자기 일 안 했고 주의 일했기 때문에. 주님과 통하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주의 일인 것을 본인이 알잖아요.

미천한 인간에게 주의 일을 맡겼다는 그 자체가 본인의 입장에선 굉장히 감사히 여기고 영광스럽게 여기는 겁니다. 감지덕지하게 여기는 거예요. 그게 열린 상태고 그게 주인을 알아보는 상태죠. 이사야 1장에 나오지요. 소도 지 주인을 안다고. 그 말을 왜 하느냐 하면 서로 통하는 사이가 안 됐단 말이에요. 소도 주인을 알건만 너희는 자식이라도 아비를 잊어버렸다. 이건 관계가 끊어진 상태에요. 끊어졌다면 원래 창조의 원리에 의해서 주님의 심판과 저주와 보복과 복수가 멈출 날이 없지요. 계속.

아까 이야기했지만 주님께선 성실하다고. 주님은 쉬는 날도 없어요. 토일 안 놉니다. 주무시지도 않아요. 하나님께선 졸지도 않으셔요. 주님한테 졸음운전 같은 것 없지요. 시편 121편에 나오지요. 눈을 들어 산을 보라. 우리 도움이 어디서 오는가. 산? 아니야. 여호와 하나님께로 온다. 벌써 열려있지 않습니까.

안식일을 지킨다는 말은 이미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에 솔깃하고 내 쪽에 끌어 모으는 게 아니고 오히려 안식일뿐만 아니고 모든 말씀이 끌린다는 말은 이미 그 사람 안에 주의 안식이 성사되고 있는 과정 속에 있습니다. 그 사람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안식이에요.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안식상태가 되는 겁니다. 연결된 상태, 범죄 하기 전의 원래 상태에 관계로 이어졌기 때문에 안식상태 놓여있습니다.

신약에서 그런 게 있지요. 이 땅에서 성령으로 하나님 안에 들어오지 아니하면 죽어서도 천국 갈 수 없습니다. 지옥 갑니다. 하나님께서 죽고 난 뒤에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 묻는 게 아니고 살아있으면서 계속 물으시는 겁니다. 네가 네 위주로 사느냐, 아니면 말씀이 들리는 쪽으로 얼굴 돌리며 사는지 계속해서 묻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힘으로 자기가 자기 위주를 포기하고 주님 위주로 살 수 있는 위인이 있는가? 없습니다. 없다면 어떻게 우리가 구원받는가? 구원은 계약이 있어야 됩니다. 언약에 의해서 성사돼요. 우리는 계약자가 아니고 계약의 결과물이지 계약자는 따로 있어요. 그러면 구약의 계약자가 누구냐? 모세입니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입니까? 아닙니다. 노아입니까? 아닙니다. 그러면 계약자가 누굽니까? 계약자는 바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이름이 구약에서 계약자가 돼요. 그리고 신약에 오면 계약자가 예수님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와요.

보시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나님께서 자찬했던 경우는 만족스럽다는 증거는 바로 안식의 만족이었습니다. 안식에 만족했는데 뱀이 와서 안식을 흩트려버렸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계약을 동원시키는데 그 계약자가 누구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분, 하나님의 이름이 되면 그냥 하나님이 아니고 아버지가 돼요. 아버지와 하나님의 이름 되시는 분이 창조 전에 예정하신 계약을 지상에 펼칩니다. 부챗살 펼치는 것처럼, 함축된 것, 주름진 것을 펼치는 것처럼 활짝 펼치게 됩니다.

펼칠 때 노아언약, 모세언약, 아브라함언약이 그 내용이 돼요. 펼칠 어떤 원리로 펼치는지 줄줄 나오는 겁니다. 펼칠 때 핵심이 있어요. 핵심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전쟁에는 반드시 두 개의 상대자가 있어야 되지요. 한 상대자는 여자의 후손이에요. 여자는 사람이죠. 사람이 있어야 후손이 있을 게 아닙니까? 하나님의 이름이 여자의 후손으로 등장합니다.

두 번째는 뱀의 후손이죠. 뱀도 뱀의 역할 해야 될 사람이 있겠지요. 그래서 전쟁을 하는데 이 전쟁이 시작되는 것은 바로 계약되시는 하나님의 이름이 전쟁을 통해서 인간세계 속에 찾아오십니다. 찾아오시면 분류현상이 일어나는데 그 분류현상을 오늘 본문에선 거룩이라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레위기 처음에 제사 나오지요. 출애굽기에 보면 제사 지내는 제단에 누가 관여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관여하게 돼있습니다. 출애굽기 20장 24절.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내가 무릇 내 이름을 기념하게 하는 곳에서 네게 강림하여 복을 주리라”

지금까지 공부한 걸 복습해봅시다. 하나님께서 이런 지시와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이스라엘은 이스라엘의 것이 아니고 누구 것이다? 하나님, 자기 것이다. 소유니까 명령과 지시할 수 있는 거예요. 명령과 지시한다는 그 자체가 네 쪽의 자체적인 것은 받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지시에 의한 그것만 받지 너란 이름으로 받는 게 아니에요. 우리 이름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하시는 일을 하나님이 받아요. 그래서 제가 어느 설교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한다는 말을 한 겁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창조한다. 또는 하나님은 스스로 자기 일을 발생시킨다. 같은 뜻입니다. 이제 감이 오십니까? 하나님은 자기 일에 대해서 누구의 협조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 스스로 일하셔요. 그 일에 대해서 그게 하나의 전쟁이란 말이죠. 계속해서 악마는 인간을 앞잡이로 세워서 인간으로 하여금 계속 부추겨서 인간 쪽에서 에덴동산 가라. 인간 쪽에서 하늘나라를 가게 하거든요. 천국 문을 두드리는 노크를 하게 한단 말이죠. 누구 노래처럼. (Bob Dylan)

인간 쪽에서 천국을 시도하는 거예요. 시도할 때 누구 좋으라고 시도하는 거예요? 바로 이 세상사는 게 답답하니까 죽어선 좋은 데 가야 되잖아요.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가치를 천국까지 드높이기 위해서. 그걸 창세기 11장에서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죠. 바벨탑 만든 취지가 그것 아닙니까.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도록 계속해서 자기를 포기할 줄 모르는 거예요. 내가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라는 거예요. 과연 그런가요? 내가 잘되는 것이 나한테 좋은 동시에 하나님도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 것으로 끌어 모으는 그것을 마귀로부터 배워서 포기를 못하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이름만 받아요. 우리 것은 안 받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뭘 해야 되지 않습니까? 그 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 “내게 토단을 쌓고 그 위에 너의 양과 소로 너의 번제와 화목제를 드리라” 제사 드리는 일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는 겁니다. 그게 신약에 오면 결국 예수님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바로 피 제사 아닙니까. 내 살과 내 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

신약에서 예수님이 친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 되기 위해서 그 형식이 구약 때부터 꾸준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진행돼온 거예요.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일을 담아내는 그릇 같은 역할을 하게 된 겁니다. 자기 것을 하면 안 돼요. 하나님이 택한 백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시와 명령이 계속 하달됩니다. 하달되어 구성되고 만들어진 모든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뭘 했다는 게 아니라 그런 형식으로, 그런 방식으로 장차 하나님 자신이 그 방식대로 모든 계약을 완성하고 성취한다는 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보여준 겁니다.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라고 할 때 그 부모와 하나님과 관련돼있는 거예요. 부모는 그 부모한테 계속해서 저주받는 게 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하나님의 언약이에요. 왜 하나님의 언약이냐 하면, 언약이 없는 신은 우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살아있는 하나님은 그냥 하나님으로 나온 적이 없어요. 반드시 언약을 앞장세워서 옵니다. 그리고 그 언약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마다 전쟁이 일어나요.

여리고성이 버티고 있다. 어떻게 함락시킬 것인가?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 아이디어에서 나오면 안 돼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함께 동행하는 자리에 있어야 돼요. 그것은 제사장이 언약궤를 앞장세워서 총 열세 바퀴 돌았더니만 여리고성이 저절로 그냥 무너진 거예요. 요단강 물이 불었다. 요단강이 평소에는 안 그런데 갑자기 물이 불었어요.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제사장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한 복판에 서있을 경우에만 물은 그 순간 스톱이 돼요. 스톱이 되니까 길이 나오지요. 그 길을 이스라엘 백성이 통과했잖아요.

만약에 언약궤가 그때 없었으면 요단강을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갈 수 있습니까? 못 들어가지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가잖아요. 그러면 언약궤가 이스라엘 백성들 마음속에 있다고 한다면 그들은 뭘 느껴야 돼요? 나는 절대로 천국 갈 수 없는 백성이었는데 내 속에 있는 언약궤, 언약 때문에 나는 이미, ‘이미’가 중요해요. 이미 천국에 들어왔다는 것을 신약의 성도들은 새 언약이 있으니까 십자가 있으니까 성령을 받았으니까 그걸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증거가 아니고 하나님의 일은 이렇게 이뤄지고 이런 결과를 내었다는 사실을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증거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막힌 요단강은 어디 있습니까? 어디 있는 게 아니고 요단강 같은 상황이 매일같이 주어지죠. 여리고성 함락하니까 그 다음부터 이스라엘 백성들 사고방식이 뭡니까? 갑자기 여리고성 무너지니까 언약이 있어야 될 자리에 우리는 여리고성 함락했다는 자기 체면이 있어버렸어요. 그 다음 성이 아이 성, 작은 성이에요. 우리 힘으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 들어가지 않고 이미 큰 성도 함락했는데 작은 성 정도야 우리 힘으로. 그러다가 그들은 아이 성을 점령하지 못했잖아요.

결국 아간을 돌무더기 만든 후에야 아이 성을 함락하지요. 희생이 필요한 거예요. 우리는 쉽게 하나님 없는, 쉽게 돌아선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희생물을 제공하는 그런 상황, 사태가 계속해서 매일같이 우리에게 들이닥쳐야 됩니다.

 

 20180406b 울산강의-레위기 19장 : 죽음놀이
(강의:이근호 목사)


두 번째 시간 시작하겠습니다.

안식일 지키라. 부모를 공경하라. 4절을 봅시다.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며” 이렇게 돼있지요. 이 말씀은 뭐냐? 벌써 인간들은 헛것에 경도돼있다, 경도란 말은 기울어져있다는 말이에요. 이미 헛것에 푹 젖어있어요. 헛것이 뭐냐? 이 세상 자체가 헛것이에요. 이 세상을 볼 때 헛것으로 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사람들이 기억하고 생각하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만 인간 속에 가득 차있게 돼있어요.

그래서 흔히 하는 말이, 내가 죽고 난 뒤에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되면 어떤 직업을 갖고, 누구와 결혼할 건가? 그런 이야기를 심심할 때 하잖아요. 이 세상 끝나고 그 다음 생을 이야기할 때 다음 생이 주가 되는 게 아니고 이 세상이 주가 되어서 죽고 난 뒤에 다시 태어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이 하는 말이, 이 지긋지긋한 세상에 뭐하려고 다시 오려고 하느냐?

그런데 그 질문이 별로 설득력이 없는 이유가, 그 다음에 생에 대해서 아는 바가 없어요. 죽고 난 뒤에 세상이 어떻게 가는지 아는 바 없고 이야기해도 모르고 이야기해준 사람도 모르고 하니까 기껏 알고 있는 이 세상이 전부에요. 그래서 이 세상에 실패했으면 그것은 나 자신이 실패했기 때문에 이 세상에 대한 복수하듯이 다음 생에는 부잣집에 태어나서 보란 듯이 하겠다. 그리고 난 너 만나서 결혼생활 엉망 되었기 때문에 네 앞집에 태어나서 보란 듯이 너 심술 나도록 멋진 여자 만나서 잘 살아보겠다는 이상한 소리나 하고 있지요.

다음 생이란 게 인간에겐 없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죽기 때문에. 아까 이야기했잖아요. 살아있어도 죽은 거잖아요. 그걸로 끝이에요. 그 다음 생은 없습니다. 인간의 부활은 없고 부활이 있다면 예수님의 부활이에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그리스도 형상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면 부활이 있고 나의 형상으로 태어나는 부활은 없습니다.

아브람의 하나님은 없어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죠. 그렇게 되려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일단 바뀌어야 돼요. 일단 바뀐다는 말은 죽어서 바뀐 게 아니잖아요. 아브람이 살아있을 때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었잖아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뀔 때 하나님의 언약이 개제합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에요.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어야 하거든요. 아브람은 죽은 거고. 이걸 보여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제물을 준비해요. 그 제물이 외형적으로 이삭을 준비했지요. 이삭이 죽었다가 어린양 덕분에 다시 살아나죠. 이삭이 죽었다가 살아난 이것이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되는 그 안에 담긴 취지입니다.

이름이 바뀌었단 말은 인간의 이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뀐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주도하에 아브라함은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지어준 이름으로 살아간다는 말은, 아브라함의 이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에요. 아브라함의 이름이 내다본, 아브라함의 이름이 약속한 약속대로 오실 분이 아브라함의 유일한 자손, 예수님입니다.

그러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뀔 때 누가 개제했단 말인가? 하나님의 계약, 언약이 들어간다 했지요. 그 언약을 주도적으로 실시하는 자가 누구라 했습니까? 하나님의 이름이죠. 신약에서는 주의 이름이죠.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것은, 주의 이름의 작용으로 아브라함 안에 아브라함이 죽었다가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죽었다는 말은 죽을만해서 죽은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이 살아나야 될 이유는 없어요.

학생들 까불잖아요. 한 대 얻어맞지요. 왜 얻어맞습니까? 까불까불해서 얻어맞는 거예요. 얻어맞을 때는 뭐냐? 칭찬받을 일은 없어요. 내가 때릴 때 참 힘들게 잘 참았다는 그런 칭찬 같은 것 없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죽으라고 태어난 거예요. 그 다음에 죽고 난 뒤에 살아난 것은 인간의 이름으로 살아난 게 아니고 주님이 그 안에 있는 사람만 주의 이름을 증거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을 살려내는 겁니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를 창조하고 스스로 생산하는 거예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그 사람 속에 있을 때는 죽었다가 살아난 분의 영 때문에 인간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이지 본인이 가치 있어서 살아나는 건 아니에요. 살아있을 때 주의 성령을 받지 않으면 못 살아갑니다. 살아날 수 없어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거든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영이 있으면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의 영 때문에 그 인간은 죽었다가 살아나야만 하고 다시 부활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꼭 부활돼야 돼요. 왜냐하면 그 안에 주님이 게시기 때문에. 사람을 죽였는데 어떻게 되나? 사람을 죽이든 간음을 하든 도둑질을 하든 상관없어요. 대통령하든 관계없어요. 대통령 해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징역 24년 살아도 구원되게 돼있어요. 안에 성령이 있으면.

그런데 교회 보세요. 빌면 복 받습니다. 예수 믿으시면 구원받습니다. 이런 이야기한단 말이죠. 그건 우상숭배에요. 그 행동한다는 자체가 나는 헛되지 않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인생 자체가 헛된 거예요. 안개에요. 헛되면 헛된 것으로 자기를 포기해야 돼요. 등신 돼야 된다니까. 그게 안식이에요. 자기한테 미련두면 안 됩니다. 자기한테 애착하고 집착하면 안 돼요. 모든 범죄는 자기한테 애착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거예요.

신명기 1장을 봅시다. 45절. “너희가 돌아와서 여호와 앞에서 통곡하나 여호와께서 너희의 소리를 듣지 아니하시며 너희에게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의 약속의 땅에 들어갔는데 갈렙과 여호수아 빼놓고 전부 다 반대했어요. 그래서 못 들어간다고 하니까 그제야 들어가겠다고 싸웠는데 대패했거든요. 그리고 난 뒤에 아모리 족속이 벌 떼같이 와서 완전히 쫓아내서 후퇴했어요. 그들이 너무 슬퍼서 여호와께 통곡하니까 그 통곡소리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서 받아줬습니까, 거절했습니까? 거절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그들이 가야 할 길을 그들이 지금 모르고 있는 거예요. 천국이 어떤 세계인지 어떤 인간도 몰라요. 천국은 예수님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가는 방법도 몰라요. 모르는데 성령이 오니까 뭘 아느냐 하면, 갈 수 없는 곳에 주께서 나를 데려간다는 사실을 느끼게 되지요. 이 세상에서 분리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못 가요. 나도 이 세상 사람이에요. 못 들어가는데 성령이 찾아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는 …….

못 들어가는 것을 어떻게 갈 수가 없어요. 그 천국은 아무도 못 들어갑니다. 갈 수 없는, 불가능이죠. 매일 삶이 불가능의 연속이에요. 성경 봐도 못 들어가고, 기도해도 못 들어가고, 예배참석해도 못 들어가고, 성경공부해도 못 들어가고. 어떤 방법으로도 들어갈 재주가 없어요. 그걸 혹독하게 매일 삶을 통해서 알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그렇게 사는 성도의 관심사가 뭡니까? 나는 못 들어가는데, 이게 관심사지요. 그런데 못 들어가는 게 굉장히 슬픕니까, 명랑해요? 되게 명랑한 거예요. 나 천국 못 간다. 왜 이렇게 기분 좋은지. 이렇게 되는 거예요. 난 뭘 해도 천국 못 가. 믿어도 안 돼. 예수 믿어도 천국 못 가. 싱글벙글, 싱글벙글. 그걸 새삼스럽게 알고 매일같이 경험하는 거예요. 그 불가능을. 성령이 없는 사람은 그걸 못 느껴요. 성령이 있는 사람만 그 불가능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게 바로 주의 증인이죠. 아무것도 할 수 없지만 내게 능력 주는 자 안에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특정 일이 아니고 지금껏 되어진 모든 것이 내 일이 아니고 주의 일이었다는 겁니다. 주의 일이니까 내가 주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완전히 사로잡아서 주의 일에서 빠져나오려야 해도 못 빠져나오게 주께서 매일같이 이끌고 계시다는 겁니다. 그 주의 일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나는 천하에 쓸데없는 자에요.

그래서 성도한테 다음 생애란 없습니다. 물론 불신자도 다음 생애는 없어요. 다만 주님의 생애만 있어요. 이미 주님이 자기 세계 안에 집어넣은 거예요. 노아가 방주 안에 들어오는 것처럼. 제가 언제 그런 설교했는지 모르지만 노아가 방주 안에 있다. 그러면 방주 바깥의 풍경은 다 물에 잠겨있지요. 그게 노아가 방주 안에서 알게 된 안목이지요. 바로 그 안목으로 지금 우리가 이 세상을, 울산바닥에서 사시면 되잖아요.

십자가 안에 있지 않으면, 성령 안에 있지 아니하면, 같은 말이에요. 왜냐하면 갈라디아서 6장에 보면 십자가로 인하여 세상은 죽었고 너희들 보기에 나는 죽은 자라 했으니까. 십자가 안에 있으면 방주 안에 있는 겁니다. 동동 뜨지요. 막걸리 집에서 담글 때 쪽박이 동동 뜨지요. 그처럼 일엽편주처럼 그냥 동동 떠다니는 거예요. 그러면 그 바깥은 다 죽은 자에요. 살았다는 이름은 있지만 다 죽은 자입니다. 신나지 않습니까? 기 살지요.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게 그 길이었고, 성령 받은 사도가 가는 길이 그 모습이었고,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은 모습이 바로 그 안목을 유지하고 있었던 겁니다. “예수님이여, 저들은 저들의 죄를 알지 못합니다. 저들은 죽어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살아있다고 우기기 때문에 그들의 죄를 용서해주옵소서.” 자기가 죽어가면서도 오히려 살았다고 우기는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그때 스데반은 성령에 충만, 성령에 휩싸였다, 이래 보시면 됩니다.

이렇게 되니까 이 세상이 고요할 이유는 전혀 없지요. 세상이 풍랑이치고 파도가 치고 치면 칠수록 뜬다, 뜬다, 뜨는 기능은 더 부각이 되겠지요. 물도 하나 없는데 방주 안에 있으면 얼마나 입맛 없습니까. 온 세상이 물로 덮일 때 방주의 가치는 월등하지요.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성령이 주는 기쁨이라는 거예요.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에요. 성령이 주는 기쁨이에요. 하나님이 가졌던 기쁨을 그냥 대가 없이 그 안에 모이게 되는 기쁨, 주님이 주신 기쁨 안에 덜렁 납치되어 그 안에 노는 기쁨, 세상의 모든 걸 알게 된 기쁨, 성령이 주는 기쁨입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네가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했어요. 따라서 성령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끌어 모으고 끌어 모아도 안식이란 게 없습니다. 안식이란 어떤 영역이지요. 내가 쉬는 게 안식이 아니고 영역, 세상에서는 갈 수 없는 영역 속에 이미 포함된 상태가 안식입니다.

그래서 안식의 영역 안에서는 모든 것이 평준화돼있어요. 어떤 평준화? 못난이 삼형제, 다 못난 수준의 평준화. 잘남의 평준화가 아니고. 개인, 개인적으로 모두가 못남의 평준화에요. 재벌이라도 못났고, 거지라도 못났고. 안식의 세계에서는 그래서 잘난 척할 필요가 없는 세계. 아마 거기서 잘난 척하려면 자기 못난 걸 자랑해야 돼요.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랑했잖아요.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고 죽은 자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고, 죽은 자 같으나 산 자요, 가난한 자 같으나 부자요.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옴으로 죽은 나를 통해서 늘 이렇게 예수님의 생명이 발산되고 있다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사도 바울의 노력으로 된 겁니까? 사도 바울의 성실로 된 거예요? 사도 바울의 기도로 된 겁니까? 아닙니다. 성령이 임해서 그런 거예요.

다시 레위기 19장 4절에 보면,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며” 할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떻게 일을 하셨느냐? 하나님의 것이 아니 것을 마주치게 만들어요. 이걸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복음이 뭐냐고 할 때는 반드시 복음이 아닌 것이 무엇인가와 대비해서 드러나게 돼있어요. 복음은 무엇으로 인하여 반대를 당하고 있는지를 느낄 때 비로소 그 현장에만 복음이 느껴져요. 복음의 반대세력을 만났을 때.

그러면 첫 번째 강의와 연관시켜 봅시다. 복음이 아닌 게 뭐였던가요? 복음이 아닌 것은 바로 나로부터 출발한 것. 나의 행함, 나의 기대, 나의 소망, 죽어서 천국 간다고 하는 열의, 열망, 열심, 전부 출발지점이 나거든요. 나로부터 출발한 그 나는 사실은 집약된 나에요. 악마가 나를 앞장세운 거예요. 연필 깎으면 연필 끝이 뾰족하잖아요. 나는 결국 뾰족한 첨단, 그게 바로 나란 말이죠. 그 첨단은 폭도 없고 면도 없어요. 그냥 점으로 나오지요.

결국 인간이 구차한 변명을 하고 이유를 대더라도 마지막 나오는 그거에요. “너, 왜 그런 짓하냐?” “내가 하고 싶어 했다, 왜?” 결국 이게 나와요. “내 돈 주고 내가 하는데 니가 왜?” 결국 첨점, 마지막 모든 논리, 인류평화, 남을 위해서 하다가 마지막엔 달랑 나만 남아요. 자기를 쪼갤 수 있는 비책이 없습니다. 불교 중처럼 머리 깎고 도 닦아도 도 닦은 나, 열반에 이르렀다는 그것도 나, 먼지 하나가 됐는데 그것도 나.

모든 것이 나로 귀결되는, 쪼개고 쪼개도 결국 나만 남았다는 말은 그동안 그걸 덮고 덮은 모든 근사한 것, 그럴싸한 윤리와 도덕이 나의 가치를 확대한 것이에요. 자기한테 손해 보는 윤리도덕은 안 하잖아요. 자기 명예를 나타낼 때는 윤리도덕을 동원시킵니다. 나 같이 착한 사람 나와 보라고 이러잖아요.

어떤 나라가 윤리도덕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나라가 옆 나라와 전쟁하게 되면 자기 나라 윤리도덕을 포기하겠습니다, 아니면 옹호하겠습니까? 전쟁이 일어날 때 윤리도덕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오직 내 나라 지키기, 그게 바로 내가 들어가야 최종적인 목적이 되고 이유가 돼요. 사람 사는 명분은 하나밖에 없어요. 나 잘되기 위해서. 나 잘되기 위해서 하는 그것이 결국 자기를 망치는 가장 기본적인 원인입니다. 자기를 망치는 이유가 자기가 잘되는 것을 목적으로 삼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면 이런 자에게 주님이 찾아왔다. 왜 찾아왔습니까? 나 잘되기 위해서 찾아오십니까, 나를 망치려 하심입니까? 아예 딸딸 긁어서 바닥을 긁어서 나를 망치려고 나를 실패자로 만들고 망하게 하시려고 주께서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려는 게 아니고 죄인을 부르려 온 거예요. 그 죄인이 의인 될 때 인간은 더 이상 나 잘났다는 것이 속아져야 되고 바닥나야 되고 일체 나 잘난 것이 없어야 돼요.

그래서 로마서 3장에서 율법이 온 것은 우리로 하여금 입을 막고 저주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 우리의 의가 하나도 남김이 없게 만들기 위해서 오신 거예요. 왜냐하면 내 이름은 나를 구원 못하기 때문에. 우리 이름은 계약 상대자가 아니기 때문에. 아까 했지요. 하나님이 계약 상대자는 누구다? 우리 이름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의 이름이에요. 이름과 그 다음에 아버지하고 계약해서 천국을 만드는 겁니다.

우리가 가야 될 곳은 내 이름이 가야 될 곳이 아니고 주의 이름만 가셔서 만든 그 처소, 아무도 모르지요. 인간들은 자기 이름으로 사니까. 아무도 모르는 비밀스런 그곳을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가만히 그것도 강제로 질질 끌어서 매일같이 우리 삶속에 불가능과 불가능의 허들을 계속 주셔서 주께서 친히 뛰어넘게 해서 깜짝깜짝 놀라게 하시면서 남이 가지 않는 그 길을 우리로 하여금 가게 하십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건 천국 간다가 아니라 이게 적당해요. 빼내 가신다. 강제로 납치하는 거죠. 그동안 우리 주인인 마귀를 꽁꽁 묶어버리고 도둑처럼 오셔서 성령께서 우리를 자기 백성이라고 데려가는데 강제로 데려갈 때 데려가는 방법은 우리 이름은, 우리 행함은 일체 인정하지 않고 배제해버리고 오직 주님의 자신의 이름으로만 끌고 갑니다. 그러면 끌려가는 상태가 어떻게 되느냐? 항상 우리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그러한 장벽이 우리에게 주어지죠. 홍해도 그렇고, 여리고성도 그렇고, 요단강도 그렇고.

사업이 어렵고, 가정이 어렵고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구원에 있어서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도리는 구원에 가는 것이 아니고 오직 구원되지 못한 일을 한다는 것을 깨닫는 방식의 장벽을 말하는 겁니다. 제가 흔히 말하는 교회에서 간증하는데 암에 걸렸는데 나았다, 가정이 불행했는데 기도했더니만 나았다, 사업이 어려웠는데 기적적으로 일어섰다, 교회가 다 망했는데 갑자기 부흥됐다는 걸 말하는 게 아니고 구원에 있어서 날이면 날마다 우리의 어떤 행함으로도 구원에 실패한다는 사실을 더욱 더 깨닫게 하시는 장벽들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얼추 이 정도했으면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내가 그런 짓을 하다니, 이런 것 있잖아요. 자기 자신의 선행과 자기 자신의 믿음에 자신감이 있었는데 어떤 사태가 일어나서 자기 자신의 믿음을 믿는다는 자체가 이건 얼토당토 않는 엉터리란 걸 깨닫게 하는 거죠. 제 말이 어렵다는 표정을 짓는데 쉽게 말하면 이렇습니다. 제가 강남강의에서 그런 말했는데 우리의 인생사, 일대기라 하지요. 만약에 여러분들이 잠을 자는데 악몽이다. 악몽일줄 몰라요. 꿈꿀 때는 그 자체가 현실의 전부입니다. 악몽인 줄 언제 아느냐 하면, 꿈에서 깨어날 때 식은 땀 훔치며 그게 악몽인 줄 알잖아요.

그러니까 성령을 받게 되면 우리가 인생을 아무리 길게 살아도 그게 악몽이란 사실을 일찍부터 우리가 알게 되는 겁니다. 사람 사는 게 악몽이에요. 악몽이라면 툭툭 털고 미련 없이 악몽이니까 깨나면 속이 시원하지요. 죽는 것이 속 시원해요. 이 세상 자체가 사는 게 악몽이기 때문에. 이 세상은 전부 꿈같은 거예요. 꿈도 그냥 꿈이 아니라 악몽이에요. 내 위신, 내 가치, 내 의미를 위해서 얼마나 우리는 자기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고 힘들게 불안 불안하면서 살아갑니까?

사람이 나쁜 짓을 했다고 칩시다. 보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넘어가는 게 아니에요. 혹시 봤으면 cctv 계산해서 했는데 혹시 주차한 차에 cctv 있으면 어떻게 할 건데? 혹시 내가 꿈에서 무심코 한 이야기를 누가 듣고서, “너, 지난여름에 무슨 짓했어?”라고 물으면? 그러니까 계속 좇는 거예요. 인간은 자기 가치를 손상시킬 일을 잊지 않고 생각나는 것도 괴로울뿐더러 그걸 남이 알까 겁나서 계속 좇기는 겁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은 남이 알아도 내 꿈속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뿐이고 꿈꾸는 나도 배역을 맡은 있다가 없어지는 등장인물이고. 이러나저러나 다 꿈속 같은 거예요. 24년 동안 교도소 생활하고 180억 벌금도 다 한낱 꿈같은 겁니다. 그래서 시편에 그런 말 있지요. 네가 세상 끝나는데 잠자는 것 같더라. 꿈같다는 말과 같은 이야기에요. 하룻밤 자고 난 뒤에 꿈이었구나. 악몽이었구나. 그게 현실이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이게 바로 성령 받은 사람이 순간순간 느껴야 될 일입니다.

시장에 가서 콩나물 값으로 싸우고 옆집과 전기세로 싸워봤자 꿈속의 한 장면이에요. 싸울 때는 실컷 싸우데 최종 의미는 두지 마세요. 어차피 이기나지나 꿈이기 때문에. 그런다고 이걸 감당 못하는 사람들에겐 이야기하지 마세요. “엄마, 이번 성적 또 내려갔어.” “걱정하지 마. 다 꿈이야.” “여보, 나 사표 냈어.” “그것도 꿈이야. 놀아.” 이렇게 적용시키면 곤란하겠지요.

인간은 누구나 다 나름대로 사연이 있습니다. 문제는 나름대로의 사연 있다는 게 문제에요. 그 사연들이 개별자라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성도는 성도끼리 집단적으로 일반적이고 일치된 통합된 사연이 있어야 돼요. 그 사연이 뭐냐 하면, 갈 수 없는 곳에 지금 가고 있다는, 말도 안 되는 감격, 희열이 있어야 돼요.

그래서 ‘너희’라는 것은 밀봉된 공동체입니다. 밀봉이란 폐쇄된 거죠. 닫힌 겁니다. 하나님 말씀은 이스라엘 자체가 밀봉된 거예요. 자기들 밖에 오직 언약의 상대자 하나님 말씀만 받은 겁니다. 그래서 개한테 진주 던지지 마세요. 돼지한테 보석 던지지 말고. 그들은 그 가치를 몰라요. 자기는 그게 꿈인 줄 모르고 전부인 줄 알고 사람 죽이고 술 먹고 울고불고 난리입니다. 남자들이 주로 울 때가 언제냐 하면, 꼭 술 먹고 울어요. 뭐 그리 한 맺힌 게 많은지. 성도가 울 때는 내가 꿈인 줄 모르고 그게 현실인 줄 알고 후회스러워서 울지요. 아무것도 아닌데.

그래서 4절에 “너희는 헛것을 위하지 말라 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니라” 제가 강의 처음에 그런 이야기했지요. 누가 지시를 한다는 것은, 이미 내 것이 내 것이 아니란 뜻인 줄 알라고 했지요. 오늘 제목은 한 자입니다. 꿈. 누가 나한테 지시한다는 것은 내 것이 아니에요. 그런데 평생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내 것이라 여기고 나 잘되기 위해서 원동력을 스스로 나에게 제공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내가 열심히 부지런히 설치면 나는 살고 게으르면 굶어죽는다. 이게 체질화돼있지요.

그런데 주님의 지시가 오게 되면 일하게 한 것이 바로 주님께서 일하게 하신 거예요. 왜 일하게 하셨는가? 네가 착각 그만하라고. 네가 사는 모든 것이 성령이 오게 되면 주님의 말씀이 오게 되면 충만하게 되면 돌아보면 전부 다 착각과 착각의 연속이었다는 것을 계속 깨닫는 순간 이거는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모든 것을 다 알게 해주셨다는 환희가 밀려오도록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을 실패했음을 통해서 기쁨을 샘솟게 만들기 위해서 주께서는 매일같이 실패하는 우리 삶을 용인하시고 용납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말씀을 받았고 그 말씀대로 그들은 헛것을 섬기고, 안식일을 섬기지 않았고, 부모를 공경하지 않았고, 자기 본색을 유감없이 다 드러냈습니다. 그러다 그들이 언제 이걸 아느냐? 실패했을 때 그들은 울면서 반성하지요. “주여, 우리가 여호와를 버렸나이다.” 얼마 가지도 않지만 하여튼 울면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음을 왜 진즉에 그것을 개무시했는가, 왜 나는 인생에 나 혼자 있다고 생각했는가? 지금까지 인생의 굽이굽이를 주께서 이끌어왔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해서 내 인생 이만큼 됐다고 왜 그런 헛된 망발을 했던가, 라고 후회하는 순간 그 사람은 말할 수 없는 기쁨이 주어집니다.

5절 봅시다. “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아까 한 걸 다시 하게 되면, 하나님의 이름이 이 땅에 나타날 때는 어떤 형식으로 나타납니까? 제단이 있고 제단 위에 희생 제물이 모습으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희생 제물에 하나님의 이름이 임재하기 때문에 그래요.

세례요한이 이야기했습니다. 보라. 저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다. 희생제물과 어린양, 공통점이 있어요. 그 공통점은 죽음입니다. 이 말은 헛된 세계, 꿈같은 악마의 세계에서 유일하게 생명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의 모습으로만 나타난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을 사랑해야 된다는 뜻이에요. 예수님의 죽음을 사랑함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우리 자신의 죽음을 사랑하게 되죠.

그걸 마태복음 16장에서 이렇게 했어요.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라. 이 말은 뭐냐? 너의 죽음이 너를 살린다는 것을 네가 계속 유지하라 이 말이죠. 하나님은 나를 죽이고 그 죽음 속에서 우리는 살 수 있다는 거예요. 생명이 있다는 겁니다. 주님을 죽이는데 매일같이 죽이죠. 특히 월급날은 더 죽이죠. 월급 주니까. 이것 먹고 또 죽으라는 거예요. 월급 받고 맛있는 것 먹고 죽어라. 골프 치고 죽고, 여행 가서 죽고.

그러니까 여행 가고, 골프 치고 그 모든 것이 죽는 행위인 줄 알고 감사하라 이 말입니다. 유원지 가서 보트놀이하다 죽는 게 아니고 보트놀이 그 자체가 죽음이고. 제목 바꿔야 되겠다. 꿈에서 죽음놀이. 사는 것 자체가 죽음놀이에요. 자기를 부인하란 말이에요. 보트 타는 것도 주께서 허락한 일이기 때문에 나는 그 앞에서 이미 죽은 자가 되고 죽은 자가 보트놀이하고 있는 거예요. 죽은 자가 영화 관람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생명이란 내가 죽었다는 모습으로 증거 되기 때문에 그래요.

제자들이 성령 받기 전에는 그걸 못했습니다. 어떻게든 예수님 붙들고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걸 봤느냐? 살려주는 것에 대해서 굉장히 고맙게 생각했지요. 오병이어, 물에 빠져가는 것 살려냈지요. 귀신 쫓아냈지요. 성전세 대신 냈지요. 베드로 장모 살아났지요. 물이 포도주 됐지요. 소경이 눈을 떴지요. 앉은뱅이가 걸었지요. 문둥병자가 나았지요. 전부 다 공통점이 뭐예요? 죽을 뻔했는데 살아났다는 거잖아요.

그런데 십자가에 가까이 가면서 이제는 반대가 됩니다. 마르다, 마리아의 오빠 죽었잖아요. 나사로가 예수님을 소홀히 대해서 죽었습니까?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예수님은 죽고 난 뒤에 갔어요. 믿음이란 뭐냐? 나는 진즉에 죽어야 돼, 이걸 인정하는 게 믿음이에요. 죽고 난 뒤에 갔어요. 마르다, 마리아가 멱살 쥐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대들었다고요. 예수님은 이야기합니다. “오빠는 살아있다.” 마르다는, “오빠는 죽었습니다.” “살아있다.” “죽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아있다. 살아있다는 겁니다. 나흘 만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지요. 그전에 이미 나사로는 살아있었던 겁니다.

결국 예수님이 살려줄 것이라고 생각했던 열두 제자들은 예수님이 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 곁을 다 떠나고 말았지요. 우리가 죽으려고 예수님 따라다닌 건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 위해서 따라다녀야 되는 거예요. 살기 위해서 날 찾지 말고 나와 더불어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에 보면, 한 알의 밀알이 썩지 아니하면 열매가 없듯이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자라야 그 목숨이 살리라. 자기 목숨을 미워하란 말이죠. 죽어 마땅한 목숨이라고 죽기 전에 그걸 받아들이란 말이죠. 자기 목숨을 자기가 살려내려고 하지 말란 거예요.

사도 바울의 소원은 죽는 거였어요. 그래서 주와 함께 거하는 그거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맹랑한 게 아니고 명랑해요. 세상 보기엔 맹랑하지만 본인은 아주 명랑합니다. 쾌활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걸 할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의 끝은 죽음이죠. 그건 자기가 원했던 바잖아요. 죽는 게 원했던 바기 때문에 못할 일도 없고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몇 번 맞았습니까? 39대를 다섯 번 맞았어요. 사도 바울은 그걸 은혜라 했어요. 강도의 위험과 여행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거짓 형제의 위험을 은혜라고 본 거예요.

아까 방주 이야기했지요. 파다가 치면 칠수록 방주의 가치는 오히려 더 확실하고 더 크게 기쁨을 준다고요. 자기 살고자하는 미련, 자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자기를 놔버릴 때 예상 못한 기쁨이 오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사실은 기쁨을 먼저 얻었기 때문에 아쉬움 없이 자기 자신을 그냥 내팽개쳐도 돼요. 도둑놈이 와서 나를 죽이든 살리든 다 가져가도 주님 주신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없어요. 이 기쁨이 얼마나 큰지.

이 기쁨은 바로 말씀을 통해서 옵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라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세상의 기쁨을 좇아간다는 말은, 내가 내 식으로 내가 원하는 내 인생을 살겠다는 식으로 소소한 기쁨이라도 챙긴다고 하는데 소소한 기쁨을 챙기겠다는 생각 자체는 큰 기쁨을 받은 적이 없다는 뜻이에요. 큰 기쁨이 없기 때문에 소소한 기쁨, 돈 버는 재미, 아르바이트 해서 그것도 편안한 아르바이트 해서 세상에 이런 기쁨이. 큰 기쁨이 오게 되면 그 기쁨은 기쁨도 아니에요. 해 앞에서 촛불이 의미 없듯이 큰 기쁨 아닙니다.

화목제를 드린다고 하는데 화목제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이야기합니다. 이 일의 마무리가 우리 힘으로 마무리된 게 아니고 제사 드리는데 제물, 주의 이름으로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이름 안에서 이미 우리는 화목 속에 놓여있음을 고백하는 것이 화목제에요. 로마서 3장에 보면, 십자가에 대해서 화목 제물이라 했어요. 25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예수님께서 그 피로 화목 제물 되셨다 이 말이죠. 따라서 화목 제물 되시는데 인간이 보태준 게 있습니까? 예수님이 스스로 결정했고 스스로 갔지요. 그것을 바로 믿음이라 합니다. 이제 믿음 아시겠지요. 믿음이라는 것은, 내가 하지 않은 일을, 예수님이 하신 일로 인하여 우리가 여기 있음을 받아들이는 게 믿음이이에요. 그러니까 믿음의 내용은 내 일이 아니고 예수님의 일이에요. 예수님이 하신 일이에요. 예수님이 끝장낸 일이에요. 예수님이 다 완료시킨 일이 믿음의 내용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만 화목 제물이 아니고 우리도 예수님이 하신 일 때문에 합류가 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극히 작은 소자한테 한 것이 곧 나한테 한 것이라고 이야기했지요. 예수님 외에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 자가 지극히 작은 소자에요. 재산이 240억 정도, 땅 십만 평, 건물 서너 개, 그게 있다할지라도 부동산을 믿는다, 안 믿는다? 안 믿어요.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이 아니고, 하여튼 있다할지라도 안 믿어요. 오직 그리스도가 하신 일만 믿는 것, 그게 지극히 작은 자에요. 그 사람한테 한 것은 곧 예수님 자신한테 한 것이다.

오늘 본문 19장에서 주님께 계속 이런 지시를 한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너희만 거룩하니까 살면서 당당하란 말이에요. 주눅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세상은 우릴 무시하겠지요. 무시하는 것도 방주 바깥에서 일어나는 파도에요. 격랑. 그들은 살려고 하기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겁니다. 저주받고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미 살았기 때문에 죽어도 괜찮아요.

이러한 고백을 가족들은 알아줄까요? 안 알아주죠. 그러니까 천하 자식이나 아비나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않다고 한 거예요. 가족들 인생에 대해서 너무 책임감 느끼지 마세요. 엉뚱한 기쁨을 찾고 있는데 언제까지 도와줍니까? 못 도와줘요. 성공하겠다고? 그게 지 기쁨인데. 주님의 기쁨이 돼야지요. 자식이 구원받는 건 주님 소관이지 부모 소관 아닙니다. 부모가 돼서 어떻게 자식을 팽개치느냐? 내가 성실합니까? 주님이 성실하잖아요. 나까지 성실하면 안 되지요. 그게 믿음이잖아요. 그만큼 자식 키운 것도 누구 솜씹니까? 주께서 하신 일입니다.

제가 왜 이런 이야기하느냐? 자식들이나 부모들 수시로 바라보면 기쁨이 없어지고 초조함과 불안하고 걱정근심만 와요. 그럼 주님이 성령이 근심하십니다. 이제는 주님 하신 일에 보편적으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입장에서는 되어가는 모든 것이 주의 뜻대로 되어가기 때문에 지레 겁을 먹거나 염려하거나 되도 않는 기대나 목적을 너무 강하게 집착해서 이것 안 해주면 안 되겠다는 그런 식으로 스스로 한을 유발시키는 짓은 하지 마세요. 케세라세라, 될 대로 되라는 말이 있잖아요. 정말 될 대로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예’가 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몸이 내 것이 아니고 주의 것인데 세상 걱정 혼자 다하고 있습니다. 주여, 이런 못난 우리에게 화목 제물 되신 주님을 다시 한 번 새롭게 부각시켜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