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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갈라디아서 3:14-17 / 다수와 단수 (430년 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갈라디아서

갈라디아서 3:14-17 / 다수와 단수 (430년 후)

정인순 2018. 3. 18. 13:53

음성         동영상

 

 

갈라디아서 3:14-17     430년 후

 

이근호


430년 후에 주셨다는 ‘그 율법’으로 인하여 그 전에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제시하는 것은 ‘본격적인 율법’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율법인 것’과 ‘율법 아닌 것’으로 하나님쪽으로 분류를 하신 이유는, ‘인간’과 ‘인간 아닌 자’를 분류하는 것과 결국 관련 있습니다.


‘약속된 인간부류’와 ‘약속이 아닌 인간 부류’를 따로 이 세상에 생산하시는 겁니다. 마치 과수원에서 시장에 내다 팔 과일 가운데 ‘상품화 될 과일’과 ‘상품화 될 수 없는 과일’을 미리 선별하는 것과 같습니다.


과수농부에게 있어 사전에 알 수가 없고 결과를 보고 비로소 판단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인간 아닌 자’를 인간처럼 만들어 세상에 내어놓으십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고난을 인간들 속에서 그려내기 위함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약속과 그 성취에 있어 집요하게 방해하는 세력이 꼭 필요했던 겁니다.


약속 성취란 그 반대 세력의 활발한 공격을 거치면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이러한 일련의 일들은, 약속 성취에 대해 그 어떤 피조물도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기 못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일을 계획하시고, 시작하시고, 진행하시고, 마무리 지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임을 끝까지 분명히 해두기 위함입니다.


직물은 두 가닥의 실이 직조해서 생겨나듯이, 하나님만의 공로라는 직물을 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서슴없이 ‘피해자’라는 실로서 가담하고, 모든 피조세계는 ‘가해자’라는 실로서 가담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해서 ‘약속’을 미리 주게 되면, 피조세계는 이 약속의 훼방하기 위해 움직이게 됩니다. 이 조심스러운 파장은 국가적 차원으로 움직이게 해서 조직적으로 힘을 모으게 되는데 ‘율법’이 가미되므로서 이 작업이 노골화됩니다.


즉 이스라엘 내부에서부터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훼방토록 하시는 겁니다. 약속과 율법, 둘 다 하나님께로 나왔지만 약속에 대한 인간들의 오해는, 율법에 대한 인간들의 오해를 통해서 그 증거들을 남깁니다.

 

 다수와 단수 

이근호

2018년 3월 25일       

        

본문 말씀: 갈라디아서 3:14-17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3: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3: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3: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사도는 지금 쓸데없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들어도 그만 아니 들어도 그만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는 ‘최종 통일성’을 미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말하는대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미 이대로 되고 있도록 확정지어졌다‘를 말하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런 하나님의 원리 앞에서 ‘인간의 최선’이란 무용지물입니다. 사도는 자신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이 근심하고 걱정한다는 것은 여전히 ‘나의 일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통일된 원리가 작용하게 되면 ‘있음’이라는 의식 자체가 잘못되었음이 드러납니다.

창세기 22:7에서,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인간 세계에서는 매사가 있음과 있음의 연합으로 진행됩니다.

그들은 이것을 ‘현실’이라고 합니다. 만약에 이 ‘있음’과 ‘있음’의 뭉치에 ‘없음’이 개입되면 그들은 이것은 ‘현실성없다’고 단정짓습니다. 사도는 지금 ‘현실성 없는’ 이야기를 세상을 향해 쏟아내고 있습니다. 즉 세상으로부터 ‘사기다!’라는 소리를 듣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이야기를 내놓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네들이 아는 그 현실을 유일한 현실을 이해서 ‘뭔가 손에 잡혀야 믿을게 아니냐’는 식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이미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의식으로 본인들이 다루어지고 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즉 낙원에서 쫓겨나야하는 사고방식으로 지금 에덴동산의 침투를 노리고 있는 겁니다.

그 사고방식이 뭘까요? 이 점을 유일하게 파악할 수 있는 조건으로 사도는 십자가 사건을 제시합니다. “십자가가 눈 앞에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라고 다꾸칩니다.(갈 3:1)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위해 각가지 소품들이 동원됩니다. 가시면류관, 채찍,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는 명패 및, 뺨 때리고 옷 벗기는 로마군병들, 나무 십자가 형틀, 연도에 서서 울고 있는 예루살렘 아줌마들, 무서워서 배신하는 제자들 등등

이들 뿐만 아니라 재판장 및 그 재판에 적용되는 법률들, 모세율법에 대한 해석들도 소품으로 투입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평소에 인간들이 어떤 방식으로 ‘갈 수 없는 나라’에 가고자 시도하는지를 격돌하시는 형태로 남긴 흔적입니다. 즉 대적되는 두 질서가 십자가를 통해서 마주치고 그 본질을 드러내고 있는 겁니다.

원래 본질이라는 것이 따로 주어지지 않으면, 세상에서는 자체 내에서 본질을 끌어옵니다. 이렇게 되면 자신들이 괴물인지 아닌지를 모릅니다. 형태가 모호해서 잘 보이지 않을 때는 대조되는 색조를 배경으로 해서 뒤에 깔게 되면 정체가 확연히 드러나지요. 십자가 앞에서 인간들의 평소의 노림수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바로 ‘악마의 정신’ 곧 ‘선악정신’입니다.

윤리와 도덕적으로 인격이 승화한다든지 함양이 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안을 악마로부터 인간으로 전통적으로 인수받고 있었던 겁니다. 그러나 그 ‘전통’이라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대변됩니다. 그들에게 성전이 있기에 성전붙들고 구원받고자 했고, 선지자 있기에 선지자를 통해서 구원받고자 했습니다.

율법이 있기에 율법을 지켜서 구원받고자 했습니다. 이들이 주장은 바로 ‘이스라엘’이라는 그 민족 자체가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는 택한 민족이라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서 430년 후에 율법이 주어지는 것은, 이스라엘이 국가로 성립한 그 타이밍에 맞추어서 제공된 겁니다.

즉 이들의 집단구원 취지로 인하여 ‘아브라함의 복’ 혹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어떻게 잘못되게 해석되어있는지를 보시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힘주어서 이야기합니다. ‘여럿’이 아브라함 자손이 아니라 ‘하나’라는 겁니다. 이는 모든 존재를 바 배제하시는 식으로 그 ‘한 분’이 등장하시는 겁니다.

즉 믿음의 대상은 ‘존재의 형식’이 아니라 ‘부재(不在)’의 형식입니다. 우리 인간들의 구원욕구를 달성하기 위해 믿고자 덤벼드는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게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을 바치게 하시지 않고 ‘이스마엘’에게 불과 나무를 짊어지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삭이나 아브라함이나 다 ‘없음의 세계’ 속으로 몰아세우신 겁니다. 오늘날 교회가 전통으로부터 온 겁니다. 예수님으로 온 것이 아니라 인간의 교육과 양육으로 인하여 전수된 교회들입니다. 그들은 인간들이 믿을 만한 것들을 모두 교회 안으로 집어넣어서 교회 등록이 곧 천국 등록이 되도록 권한을 확장시켜 왔습니다.

대중들은 돈을 지불해서 예배당 유지비용과 구색맞쳐 목사를 데려다놓고 자체적으로 교회법을 만들어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라고 우기면서 빵과 포도주를 도입하고, 물을 뿌리거나 잠그게 하므로서 죄 씻음을 연출합니다. 즉 교회는 ‘연극단체’입니다. 믿을 만한 요소로들 현실 안에 생존을 시도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다수→단수’의 취지가 살아나지가 않습니다. 왜 인간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고 구원될 수 없는 자들인지가 나타나지가 않습니다. 다수의 인간들이 사라지므로서, 그리고 부정되므로서 배후에 가리워서 나타나지 않은 십자가 지신 예수님의 취지가 나타나도록 성령께서 작용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늘 성도를 추궁하십니다. 확정된 선고를 가지고 성령으로 통보해주십니다. 인간, 즉 있음의 존재는 당연히 망해야 합니다. 이 세상과 더불어 망해야 합니다. 망하는 식으로 구원받기에 성도의 기쁨과 감사는 머리 끝까지 이르러야 합니다.

도중에 걸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땅에서 함께 저주받으신 심판주라는 사실을 잊었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성령을 통해서 자신이 망하고 있는 추이를 중계방송하는 삶을 보여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만 증거해야 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누가 사기꾼이지 분감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