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취:이미아
222강-YouTube강의(전부와 부분)180220-이 근호 목사
222강, 제목은 ‘전부와 부분’입니다. 보통 부분은 전부보다 작고, 전부는 부분들의 총합이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거기서 잘못된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개혁주의 사상에는 주권사상이라는 것이 있어요. 주권사상이라는 것은 바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끝.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 될 것 같으면 부분에 해당되는 우리 인간들이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그런 논리가 되죠.
이렇게 돼버리면 뭐가 빠지느냐 하면 죄라는 것이 성립이 안 돼요. 하나님이 원해서 하신 일인데, 그게 죄가 될 리가 없다는 겁니다. 자기가 자기 성질대로 막 살아놓고, 이거는 죄가 아니라고 우길 수 있는 근거가 뭐냐 하면, 하나님은 모든 일에 다 계획하시고 뜻이 있어서 펼쳤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책임을 나한테 물을 수 없지 않는가? 하나님의 뜻이니까, 라고 자기정당성을 그렇게 주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고방식 밑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하나님은 전부고 우리는 부분이다, 라는 그런 생각이 있어요. 근데 그런 사고방식으로서는 창세기 1장 26의 말씀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창세기 1장 26을 보게 되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이래 되어 있죠.
‘우리’는 하나가 아니고 ‘다수’, 또는 ‘복수’, ‘여럿’을 이야기하죠. 근데 뭘 만들었느냐 하면 사람을 만들었어요. 사람을 만들 때, 사람이 몇 명이냐 하면 달랑 하나입니다. 아담 하나에요. 그렇다면 인간 안에 뭐가 포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의 형상이 포함이 되어 있다고요. 인간이라는 하나에 다수의 형상이 여기에 담긴 게 돼버려요.
상당히 불합리하죠. 인간은 하나인데? 차라리 이렇게 이야기하면 좋지 않을까요? 하나님은 한 분인데 우리는 여럿이다. 이러면 우리가 이해가 되죠. 하나님의 형상이 여러 사람에게 골고루 분배가 되어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 이러면 되는데, 오히려 하나님의 다수의 형상이 오직 하나 인간에게 다 쏟아 부었다고 한다면, 도대체 인간 안에는 몇 개의 형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삼위일체라면 세 개의 형상을 갖고 있는 겁니까? 삼위일체가 맞는다면 세 개의 형상이 있는 셈이 되잖아요. 그러면 네 개는 왜 안 될까요? 그래서 이게 전부와 부분에 대해서 새로 정리가 되어야 해요. 뭐냐 하면 전체라는 것을 인간이 생각할 때, 인간의 눈에 띄는 모든 다수의 것을 인간이 모두 끌어 모은다고 해서 그게 전체(전부)가 아닙니다. 전부라고 할 수가 없어요.
이것을 제가 이런 취지로 이야기하는 이유는 주권사상이라는 자체가 이단적인 발상이다 이 말이죠. 주권사상. 주권사상이라는 것은 아까 처음에 이야기했듯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라는 그것이 어디서 나온 발상이냐 하면 인간은 다수고 하나님은 한 분이기 때문에, 인간은 부분이고 하나님은 전부기 때문에 인간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 플러스(+), 플러스, 플러스해서 다 집합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이런 논리에요.
그러니까 인간은 아무리해도 하나님의 뜻을 모르니까, 모르는 부분은 그냥 하나님의 뜻에 맡기자. 그게 하나님이 원하는 바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방향이 뭐가 되냐 하면 “나는 부족하다. 나는 작다. 나는 조금밖에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부를 알고 계시니까, 조금밖에 모르는 우리 자신의 생각을 접고 그냥 전부를 아시는 하나님께 맡겨버리면 그게 하나님께 영광이 되지 않겠느냐?”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거예요.
이런 생각이 무엇을 놓치느냐 하면 하나님의 우리 안에 모든 것을 집어넣었다는, 하나님 쪽에서 내려온 그 방식을 완전히 도외시하고 거부하는 거예요. 결국은 나는 부족하니까 봐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결국은. “연약한 인간이 뭐 이렇게 해도 그냥 눈감아 주실 수 있는 그런 자비로운 마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잖아요? 어디 되도 않는 인간을 밟습니까? 그러니까 뭐 좀 봐주세요.” 이런 식으로 어물쩍 그냥 넘어갈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아담에게 일어난 창세기 2장, 3장을 보게 되면 그 하나님의 하나님 됨이 인간 밖에 있는 위대하고 거대한 일에서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고, 아담 안에 꼬깃꼬깃 담겨있는 거기서 하나님의 뜻이 이렇게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주권사상에서 사람들이 제일 오해하는 것은, 그 마귀라는 것이 인간하고 상대 안 해도 되잖아요. 영이니까.
근데 왜 마귀가 아담을 구태여 유혹을 하겠다고 그렇게 벼르고, 기어이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선악과를 따먹도록 그렇게 미혹했느냐 이 말이죠. 그건 아담 안에 뭐가 있기 때문에 그래요. 아담 안에 뭐가 들어있을까요? 진짜 하나님의 뜻이 아담 안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게 심어져 있는 거예요.
그걸 악마가 알아요. 아담을 유혹하는 것은 아담을 유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원천을 건드리는 겁니다. 왜? 인간은 하나님의 ‘우리의 형상’이거든요. 다수, 보통 우리가 전부라고 하면 하나인데, 이거는 전부가 하나가 아니라 다수가 전부고, 부분이라는 인간은 일(1), 하나가 돼요. 모든 것이 된다고요. 우리가 알고 있는 주권사상을 반대로 뒤집어야 되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은 전부에 관한 일들이에요. 부분에 관한 일이 아니고. ‘나 하나 뭐 이래 주께서 무시해도 되겠지.’ 그런 것 없습니다. 자, 또 하나 예를 들게요. 누가복음 15장에 백 마리의 양이 있습니다. 백 마리의 양인 줄 몰랐죠. 아흔 아홉 마리 밖에 없죠. 아흔 아홉 마리 양끼리 가면서 아흔 아홉 마리의 양이 그게 전부라고 본 거죠. 하나 둘 셋... 아흔 아홉이니까.
근데 아흔 아홉을 전부가 아니라고 들통 내는 발언이 있어요. 그게 뭐냐, “나의 잃어버린 양”(눅15:6)라고 했거든요. 그럼 아흔 아홉을 놔두고 한 마리의 양을 찾아간다고요. 그러면 남아있는 아흔 아홉 같으면 하나에 비하면 구십 구배나 양이 많다고 생각을 하죠.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사는 99+1=100, 이렇게 해서 그걸 전부로 보는 것이 아니고, 그 잃어버린 양 하나를 전부로 보는 거예요. 아흔 아홉은 놔둬버리고, 그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한테 초점을 맞춘다고요.
그게 뒤의 탕자비유에 나옵니다. 탕자비유에서 나오는 그 탕자에게 아버지의 전부가 다 있어요.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도망쳤던 그 탕자에게 아버지의 전부가 다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그 아들, 탕자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어요. 집나간 아들은 두 아들 중에 하나가 아니에요. 아버지의 전부가 가출한 겁니다. 전부가. 그 가출한 아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맏이라는 존재의미가 없어요. 아버지의 존재의미도 없습니다. 아버지라는 것도 존재의미가 없어요. 아버지의 아버지 됨의 의미도 몰라요.
마지막으로 또 하나 이야기할게요. 아브라함이 자기를 복의 근원이라고 생각했죠. 그러나 아브라함의 복의 근원은 아브라함이 전부가 아니에요. 아브라함이 자기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쳐야 합니다. 이삭이 전부에요. 아브라함은 이삭을 보여주기 위한 부분으로서, 먼저 선행해서 이 땅에 태어난 겁니다.
하나님은 어디에 있느냐?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 하나님이에요. 예수님이 하나님입니다. 예수님이 전부에요. 그 외에 하나님은 없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라는 것도 예수님만이 알고 있는 것이지, 인간이 예수님 빼놓고 달리 하나님을 거론한다는 것은, 그것은 예수님의 아버지가 아니고, 인간의 악마적 사고방식에서 유출된, 유발된 상상의 가짜하나님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