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11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95강 / 마태복음 24:22 / (다른 세상 만들기) / 171226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태복음

95강 / 마태복음 24:22 / (다른 세상 만들기) / 171226

정인순 2017. 12. 27. 00:10

 

 

  음성2

 동영상2

 

녹취:주향

다른 세상 만들기 (마 24장 21-25 절)
대전- 95강

이근호


2017년 12월 26일
본문말씀: 마태복음 24: 21-25


(마 24:21)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마 24:22)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마 24: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마 24: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마 24: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리스도라 하는 것은 구원자를 이야기합니다. (구원자를 찾는다. = 종말의 현상) 징후, 징조가 된다는 밀입니다. 내가(여기 있다)에서 다른 나라(천국)에 가겠다는 이야기이죠. 왜 (여기)에 살면 안 되느냐? (여기)가 갑자기 살기 힘들어 졌어요. (여기)에선 고통스러우니까 (저기=천국)로 가겠다는 겁니다. 방금 제가 구원자를 찾는 것이 종말의 징조라 했지요. 이 공식이 굉장히 중요한데 몇 년부터 몇 년까지가 종말이 아니고 구원자를 원하면 다 종말의 징조가 되는 거에요.

나이가 80정도 되면 검버섯이 피부에 점점 생기고 새치도 하나 둘씩 생기잖아요. 구원자를 찾는 일이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종말의 징조가 되는 거에요. 이미 종말로 들어 선 겁니다. 몇 년부터 몇 년까지 2020년? 이러지 마세요. 어려워서 살려 주세요하면 그것이 종말의 징조가 되는 겁니다. 종말이 언제 부터인가? 이것이 조심해야 되고 어려운 겁니다. 이것이 왜 어려우냐 하면 사람들의 생각에는 세상에서의 삶이 고통스럽다든지 힘드니까 힘듦에서 벗어나면 힘 안들고 편하다가 되잖아요. 이 발상 자체가 잘못되었어요. 왜냐하면 하나님은 힘든 이곳에 천국을 만드시기 때문에 현재 사람들이 아는 세계, 이것을 다른 말로 현실 이라고 합시다. 현실 속에 다른 세계를 만드십니다.


이 세상에서 돌아가는 방식과 전혀 안 통하고, 전혀 공통점이 없는 방식으로 다른 세계를 만들어요. 그러면 그 세계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하는 것은 이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 지느냐를 알게 되면 그것과 정 반대로 생각하면 되겠지요. 왜 정 반대이냐하면 십자가 사건 때문에 그렇습니다. 십자가 사건의 특징이 뭐냐하면 첫 째는 아무도 몰랐다에요. 몇몇은 알았다하면 안돼요. 아무도 몰랐다! 모든 인간은 그 새로운 세계에 대해서 보탬이 된 적도 없고 협조한 적이 없다가 돼야 되요. 인간은 서로 공통적인 요소가 있잖아요. 한 사람, 한 사람 네 명이 있다면 네 명 중에 공통적인 요소가 이 세상을 형성하는 거에요.

이 공통적인 요소를 언어라 합니다. 언어 속에는 글자도 있지만 숫자도 있어요.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제일 먼저 숫자부터 배우잖아요. 숫자를 배워야 나중에 장사라도 하지요. 적어도 구구셈은 할 줄 알아야 손님들에게 안 당하잖아요. 숫자라는 것은 공통적인 약속입니다. 약속은 교환이에요.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으면 잘 사는 겁니다. 영덕에는 대게가 잡히지요. 안동에는 삼베인데 서로 교환해서 나눠야 되지 아니면 맨 날 삼베 옷만 입으면 굶을 수 도 있고 대게만 먹고 벌거벗고 다니면 안 되잖아요. 인간 사회는 장터를 통해서 교환이 되요. 교환을 통해서 서로 필요한 것을 얻기 위해 B.C 3300년경 전에 만든 것이 언어입니다. 서로 장사하고 무역하기 위해 만든 것이 숫자입니다.


우리가 인간 세상에 대해 잘 알지요. 인간 세상이란 나를 살리는 것, 끝. 내가 살아 온 방식으로 나를 살리는 것. 줄 것 주고 받을 것 받겠다는 겁니다. 피아니스트 선우 예본 콩쿨에서 우승해서 너는 왜 피아노를 하냐고 하니까 생계형으로 한다는 거에요. 콩쿨에서 돈이 안 나오면 집이 가난해서 피아노를 계속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피아노치고 돈 받고 철저히 자본주의지요. 어떤 인간도 창기가 아닌 자가 없어요. 몸 바쳐서 돈 버는 겁니다. 몸 바친다하니까 논개가 생각나는데 논개는 몸 바쳐서 나라 구하겠다고 했는데 왜 나라를 구해야 하나? 그 나라가 자기의 장터이니까.


이것을 주일 낮 설교에는 소속감이라 했어요. 낮 설교가 정말 어려운 설교였어요. 인간은 소속감이 있으면 거기서 자아가 형성돼요. 세상을 보는 비판의 눈도 자기 소속에서 나와요. 자기 소속을 대변해서 세상에 대해 비판하는 것도 소속을 지키는 것이 자기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같은 교회 집사라고 잘 지내다가 권 씨는 양반이 아니다하면 십자가에서 피로 같이 은혜 받고 좋아하다가 안동 권씨 나오면 다 깨져요. 소속이 자기는 안동 권 씨라는 거지요. 예수 피 소속이 아니고 안동 권 씨 소속이라는 거에요. 서로 친하게 지내다가 연대, 고대 나왔다고 서로 싸우고 이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인간이라는 것은 철저하게 세상이 생산한 거에요. 환경에서 생산되지 본인이 세상을 이용할 입장이 못 됩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어떤 병원이 미국에서 고가의 장비를 들여왔다면 돈을 주고 사왔으니까 이제 미국의 회사를 볼일 없다고 생각하는데 오래 사용하다보면 고장이 나잖아요. 그러면 부속은 어디서 구해요. 판매한 곳에서 기사가 와야되고 부속도 가지고 와야 되잖아요. 결국 뭡니까? 물건을 파는 게 아니고 그 쪽 세계가 이 쪽 세계를 종속시키는 거지요. 그 쪽의 힘을 파는 거에요. 권력을 판 거에요. 그렇게 엮이는 겁니다. 이 장터 의식 때문에 총각, 처녀들이 결혼을 안 해요.

자기 소속을 더 키울 수 있는 여자를 얻고 남자를 얻어야 돼서 그렇게 되요. 그래서 세상은 언어로 되어 있는데 언어에는 권력, 힘이 실린다. 왜냐하면 아까 교환하다고 했는데 교환하다고 하니까 왠지 동등해 보이고 균형 있어 보이지요. 아닙니다. 언어에는 명령자가 있고 명령 받는 자로 구성되어 있어요. 그 사이에 있는 것을 법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줬잖아요. 왜 주었냐?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던 사람들이라 그렇습니다. 육의
몸, 명령에 이미 길들여져 있어요. 법이 없으면 뭘 할지도 모르는 자들이에요. 율법이 오기 전에 그들은 맹탕이 아니였습니다.

애굽에서 신을 섬기던 방식 그대로 그것이 법인줄 알고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출애굽기 32장 8절에 우상 만들어 놓고 금 송아지 만들고 섬기는데 하나님께서 그 법을 적용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섬기는 그 권력 배후에 출애굽기 32장 8절에 자기를 위하여라고 되어 있어요. 출애굽기 20장 4절도 봅시다. 십계명이 나오는데요. 사람들이 십계명을 그렇게 많이 설명 하면서도 이것을 놓쳐 버려요. 너를 위하여. 무슨 뜻이냐 하면 십계명을 주실 때 먼저 정신을 이야기 하신 것이 있지요. 출애굽기 20장 2절에 어떤 하나님이라고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


(출 32:8)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령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예배하며 그것에게 제물을 드리며 말하기를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출 20:4)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출 20:2)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하나님은 사건이잖아요. 법이 아니고 사건이다는 말이죠. 애굽에서 종 되었던 곳에서 건졌다라는 것은 사건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십계명을 줄 때 동일한 사건을 내용으로 담아서 십계명을 지키라는 말입니다. 종이면 애굽의 종이지요. 애굽은 힘이잖아요. 종으로 생활할 때 무엇으로 전달 받았습니까? 언어로 전달 받았어요. 법으로 전달 받았어요. 이제는 기존의 세상 법에 지시 받던 식으로 인생을 살았던 너희들을 건진 동시에 너희는 그 세상에서 종이었다고 규정해 버리시는 겁니다. 세상 법에 종이었다. 법의 종이었어요. 종이었다는 말은 법이 더 세고 종은 법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아무리 학대를 당해도 반항하지 못했어요. 사회학자 중에서도 깨인 사람이 있는데 힘들다고 반항하는 것이 아니다, 소속에 이미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힘들다고 반항하지 않아요. 먹을 것을 더 달라, 세금을 삭감해 달라 그 정도이지 정권 교체는 상상도 못하는 겁니다. 히브리인들이 애굽의 바로에게 온 것은 힘들지 않음을 요구했지 정권을 달라고 요청한 적은 없어요. 왜냐하면 이미 종 되었기 때문에 이 세상의 종이 되어 버렸거든요. 십계명을 지킨다는 것도 그 사건을 사건답게 증거 하는 것 또는 사건의 능력을 방출하는 의미로 십계명을 지켜야 겠지요.


그러면 십계명 사건의 전과 후가 있는데 전에는 내가 ~한 종이었는데 지금은 거기에서 자유하다는 거잖아요. 십계명의 열 번째는 탐내지 말라고 했지요. 탐내지 말라를 지키려면 우리가 탐을 내는 게 아니고 탐심의 종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되겠지요. 사건이 오기 전에 우리가 법을 지킨다는 애굽적 사고방식이고 생활 방식이었는데 십계명 사건 앞에서 중립에서 벗어나서 사건되기 이전의 상태의 위치로 가야 되겠지요. 나를 위해서 나는 이 법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를 공경하되 나를 위해서 공경했다. 부모를 위해서가 아니고 나를 위해서, 간음을 하지 않거나 살인하지 하지 않는 것도 나를 위해서였다.

이것이 바로 십계명을 위반하는 겁니다. 모든 바탕이 나를 위해서였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애굽의 법이 아닌 새로운 법이 아니고 법을 지키는 사람을 어디를 경유하게 하냐하면 죽음으로 통과시키시는 겁니다. 죽음으로 통과시키게 되면 그들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먼저 통과해야 되는 것이 애굽에서 나올 때 죽음의 사건이 있었잖아요. 죽음의 사건을 반복하는 것이 십계명을 지키는 거에요. 그 죽음의 사건에 참여하기 위해서 제사법이 주어지는 겁니다. 제사법이 동행한다는 것은 그때의 하나님이 동행한다는 것이에요. 십자가 지신 분과 늘 함께 하는 것.


지난 주일 설교 때는 몇 십 년 만에 너무 고요했어요. 자고 있다는 것이 아니고 제가 너무 심하게 몰아부쳤나? 끝 시간에 는 이왕 시작한 거 갈 때까지 가보자고 했는데 인간은 저주 받을 수밖에 없어요. 왜 저주 받아야 되느냐면 이미 율법을 통해 인간은 그것을 못 지킨다는 것이 마지막 때를 통해서 다 들어 났어요. 드러난 상태를 악한 세대라고 합니다. 악한 세대에서 우리의 몸은 이미 저주 받아야 되는 몸이라고 규정 되면서 우리 하나하나가 아담의 일부로, 개별자로 확연히 폭로가 된 거에요. 죄를 지어서 죄인이 아니라 아담이기에 아담의 후손이기에 법을 위반할 수밖에 없고 저주도 와야 된다는 겁니다.

이 사실이 누가 왔을 때 확인 됐냐하면 아담의 몸에 누가 관여를 했냐하면 하나님 되시는 예수님이 아담의 몸으로 오셨잖아요. 그러면 이 악한 세대에서 기쁜 소식이 뭐냐하면 예수님께 자기 몸을 드렸다 말이죠. 그리고 부활하셨잖아요. 빠져나갈 구멍을 주셨잖아요. 예수님의 죽이시는 죽음에 동반하면 되요. 이미 법 앞에서의 저주가 되었으니 우리는 죽은 몸이 되는 거에요. 연말에 크리스마스 날 대전 중심가에 돌아다니면 자기가 살아있는 몸 인줄 아는데 배추 속 넣고 김장하는 것도 주님 보시기에 저주의 법 앞에서 죽은 몸이다는 말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오셔서 죽었잖아요.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해서 우리의 본 모습을 보여 준 거에요. 몸을 가진 인간은 저렇게 아버지에게 저주 받는구나라고 알려 줬으면 이미 우리는 운명하신 거에요. 제가 예를 들었었잖아요. 이불이 있는데 왜 작나 하면 아이가 있어서 다 빼기고 발이 나와 시원한데 다 덮어 주듯이 예수님의 피 묻은 담요가 덮어주는 거에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덮어주는 거에요. 장례식 치루면서 입관 예배 할 때 하얀 천으로 다 덮어 주잖아요. 이게 바로 복음이란 말이죠. 이것만 자랑해야 된다는 말이에요. 복음이 뭐냐하면 기존의 이 땅에 법에 저촉을 안 받아요. 이게 중요한데,

기존에 땅에서 어떤 짓거리를 해도 복음을 위반한 짓거리가 아니라고 이미 분리되어 있다는 말이죠. 복음을 위반한 것이 아니라고 분리되어 있어요. 대표적인 것이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자 있잖아요. 주님께서 지난 낮 설교를 그대로 적용시켜요. 이 중에서 죄 없는 자가 돌로 쳐라해서 모든 인간을 율법 안으로 다 집어 쳐 넣어요. 하고 땅에 글씨를 쓰셨어요. 자신들은 깨끗하다고 여기고 자신들보다 더러운 짓 한 사람을 돌로 치려고 하다가 보니까 주님이 쓰시는 말씀을 보니 자신들이 쳤다가는 그 다음 차례는 누구이다? 자신들이 친 돌로 당할 차례이기 때문에.


비겁한 인간들! 치고 자신들은 빠지면 되는데 안 치고 안 당하겠다는 거에요. 늙은이로부터 젊은이까지, 여기서 늙었다라는 말은 누적된 죄가 많다는 거에요. 죽을 때까지 계속 누적되는 거에요. 아무도 없다는 말은 예수님 앞에서 남을 이 아무도 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정죄 할 수 있는 사람은 예수님 밖에 없어요. 예수님이 여인을 정죄 할 때는 다른 법을 적용시키시는 겁니다. 예수님을 아는 법. 그 사람을 용서하는 법이 아니에요. 이게 어려워요. 너를 용서해 줄께가 아니라 예수님께 종속되는 법을 준 겁니다. 왜냐하면 살아있으면 또 죄를 져요. 따라서 예수님께 종속되야 되요.


요한복음 8장에 보면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다른 말로 하면 진리 안에 들어온다. 너는 내 안에 들어 온다 내 안까지 들어와! 내 품에 안겨! 이것을 사도 바울은 예수 안이라고 이야기 하는 거에요. 그렇다면 사단이 어디까지 쫓아오겠습니까? 사단은 뭐를 쥐고 있어요? 이미 선악과 구조를 심어 줄 때부터 인간이 사단에게서 못 벗어나는 이유는 선과 악 두 개의 주체로 되어 있거든요. 다시 말해서 온전한 주체가 아니다라는 말이죠. 아무리 선을 행해도 선을 행하고 나면 과제가 또 주어져요. 보다 더 철저하게 선해야 되는데,

만약에 고아를 돌본다. 몇 명? 다섯 명인데 일곱 명이었으면 어땠을까? 일곱 번 용서해 줬습니다. 일곱 번 용서 할 사람도 없겠지만 일곱 번 용서했다고 합시다. 일곱 전 용서 할 때 일곱 사람을 용서하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한 사람을 계속 일곱 번 용서해주는 거에요. 일곱 번 용서해 준 다음 여덟 번 용서해 줬으면 어떨까? 더 선하지 않을까요? 예수님께선 몇 번 용서하라 했지요? 일흔 번씩 일곱 번에까지라도 하라 했으니까 490번 용서했다고 칩시다. 그런데 이게 족할까요? 491번째가 남아 있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의 양심에 호소하고 사단에게서 못 벗어나는 요소이지요.


선과 악 사이에 분리되어 있는 두 개를 바라보면서 그 사이에 끼여 있고 법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되어 있기 때문에 사단에게서 벗어날 수 없는 겁니다. 이런 것을 자랑하는 것이 바리새인인데 그래서 그들에게 산상설교를 이야기 한 겁니다. 마음속으로 간음 한 것도 간음이다라는 법을 더 강화? 숙제를 더 줘 버렸어요. 아까 말했듯이 오른 손이 잘 못 했으면 잘라 버리고 오른 눈이 잘 못 했으면 빼어 내버리라 했으니까 오른 손 자르고 오른 눈 빼고 잘랐습니다하고 오면 뭐라 합니까? 그 다음에 “오른 발가락 잘라라!” 완전히 다 잘라도 안돼요.


(마 5: 29) 만일 네 오른 눈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마 5: 30)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져지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왜냐하면 이미 아담의 몸은 사단에게 종속되었기 때문이에요.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낯선 몸을 제공하시는 겁니다. 친숙한 것이 아닌 낯선 이에요. 우리는 무엇에 익숙합니까? 몸이 살아가는 모습이 친숙해요. 그게 뭐였다? 지금까지 이야기 한 것이 법이죠. 법은 교환이고 약속이고 서로 간의 교류이지요. 간장 있으면 빌려 주세요해서 빌려 줬는데 다음에 필요한 것을 아쉬울 때 서로 주고받는 사이에 알게 모르게 서로 교류가 되는 거에요. 언어라는 게 그래요. 그런데 사회는 불균형하기 때문에 같은 명령을 해도 먼저 명령한 사람의 명령이 먹혀들어간다니까요.


자! 불이 났습니다. 내가 만약에 현장 검증 책임자입니다. 그러면 현장 검증을 할 때 관계자 외에는 출입금지라고 되어 있다는 말이죠. 여기서 관계자가 누구냐 하면 현장검증 할 수 있는 자질을 가진 특수 장비를 사용할 수 있는 자이고 나머지는 대통령이라도 오면 안 되잖아요. 그런데 국회의원이 거기에 왜 옵니까? 자기가 전문가도 아닌데 왜 왔냐 하면 충북 경찰청장에게 전화가 와서 왔다는 말이죠. 이게 바로 세상이잖아요. 법대로 만 됩니까? 힘 있는 자가 법을 위반하면서 법이 하나 더 추가 됐지요. 어떤 법이 추가 됐습니까? 현장 검증을 할 때 관계자 외에는 출입하지 마라 단, 그 지역의 국회의원은 빼놓고.

그렇게 법이 추가 됐지요. 그러니까 법은 정의를 외치지만 법은 가진 자들의 권력을 계속 지속하기 위해 생성되는 거에요. 교회의 법은 뭡니까? 복음의 법 밖에는 없지요. 십자가 은혜 밖에는 없지요. 그런데 교회에 목사가 들어섰다 그 다음에는 (예수님의 법 + 목사 법)이 등장해요. 그런데 애굽에 살던 교인들은 이게 더 친숙해요. 목사도 우리와 같은 교인이라는 것이 오히려 낯설게 여겨지고 목사님은 기름 부음 받았기 때문에 주님이 알아서 할 문제이지 우리가 관여할 문제가 아니다. 이렇게 나오는 거에요. 그것 때문에 죽으신 분이 예수님인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배반한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지요.

교인들이 성경책도 안 보는 모양이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왜 배반했어요? 예수님보다 누가 더 힘이 세다? 그 당시에 예수님을 처단 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쪽이 예수님보다 더 힘이 세다고 본 겁니다. 본디오 빌라도하고 생각이 별로 틀린 게 아니에요.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되면 이상한 세계를 만들더라 이상한 세계를 이 땅에서 만들어요. 그러면 위에서 보면 세상에선 종말의 징후처럼 구원자를 원하지요. 그리스도를 원하지요. 23절을 봅시다.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고 했지요. 자! 그리스도가 한명입니까? 혹은 두 명입니까? 세 명입니까? 난리도 아니에요. 계속 나오지요.


그런데 그 그리스도는 본인들이 살기 힘들기 때문에 찾지요. 본인들에게 익숙한 세상을 붙잡기를 원하는데 지금 주어진 형편이 익숙한 세상에서 어렵게 만드니까 익숙한 세상을 계속 지속하기 위해서 저를 구원해 주세요라고 구원자를 부르는 겁니다. 요즘 이런 시대 대표적으로 유행하는 것이 지하 벙커 주택 구입하기. 지하 벙커로 들어간다고 그 삶이 현재와 같을까요? 다를까요? 생활하는 방식이 똑 같겠지요. 생수 마시고 라면 끓여 먹는다고 하던 게 달라지지 않고 똑 같이 하는 거에요. 그런데 예수님의 삶을 봅시다. 예수님의 삶이 낯선 입니까? 아니면 친숙입니까? 낯설지요?


같은 언어를 사용해도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는 말을 사용해 버려요. 설명을 해 주는데 설명을 해줘도 몰라요.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숱한 메시야, 그리스도가 등장 했다 치고 모든 것과는 차별되는 그리스도를 말해요. 모든 그리스도를 다 모아 놓고 고르기를 하는 겁니다. 그 중에서 유독 하나만 다르고 다른 것은 동일한 것이 어디 있을까? 찾는데 구약의 열왕기 상에 나오는 미가야 선지자 대 400명의 거짓 선지자였고 엘리야는 450대 1로 붙었습니다. 숫자가 1이잖아요. 엘리야 때 는 남은 자의 개념인데 본문 22절에 그 날들을 감하지 아니하면 모든 육체가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나 그러나 택하신 자들을 위하여 그 날들을 감하시리라


이제부터의 설명이 중요합니다. 남은 자라고 할 때 제가 남은 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면 아무도 남은 자가 될 수 없어요. 외부에서 깎아줘야 되요. 대리석을 (네모 반듯하게) 깎듯이 처음엔 다윗의 형상이 없어요. 그런데 석공이 자릅니다. 조각 들이 떨어져 나가지요. 나중에 완성품을 보면 다윗이 활 쏘는 모습으로 되어 있듯이 다듬어진 건장한 다윗의 모습이 나오잖아요. 우리에겐 소속감이 있어요. 기도 할 때 차마 하지 못하지만 은근히 원하고 바라는 게 있는 것이 뭐냐하면 이 세상 살 때 좀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나에게 누가 손 벌리지 않고 내가 자랑하고 싶은 일들이 많아지고 이왕 사는 거 편안하고 자랑하며 살 수 있는 것.


이 두 가지 외에 다른 거 더 필요한 게 있습니까? 편안함 속에는 건강도 포함됩니다. 편안하고 당당하게 자랑거리가 있다면 이 두 가지가 충족되는 것을 행복이라고 하지요. 신해철이라는 가수가 얼마 전에 수술 받고 죽었잖아요. 그 가수가 철학관에 갔는데 그곳에 간 목적이 인생은 왜 사느냐? 인생이 무슨 의미 때문에 존재하느냐? 그것이 알고 싶어 철학관에 갔었답니다. 결론은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 산다는 겁니다. 여기에 반대되는 것이 지난 낮 설교입니다. 저주를 증거하기 위해 인간이 태어났다는 것. 저주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저주를 증거하기 위해서 이게 저주이다 저주 받는 것을 보고 싶으면 내 상황을 봐라!

아담의 몸은 이미 흙이기 때문에 근거가 아담의 몸에 있어요. 우리는 제 2의, 제 3의 아담의 분신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태어난 목적이 처음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우리 몸을 통해서 전달 전달하기 위해서 이 땅에 태어나는 거에요. 어렵지 않지요? 분명히 정답인데 기분은 좋지 않아요. 죽기 위해 태어나는 겁니다. 죽음이 이미 셑팅되어 있어요. 어떻게 죽느냐를 보여주는 겁니다. 니가 죽어야 될 이유를 하루하루 살면서 보여줘라가 우리 존재의 의미에요. 아하! 이래서 진작에 죽어야 되는 구나! 사도 바울의 소원이 뭐였습니까? 진작에 죽는 거에요. 죽으려 하는데 자꾸 교인들이 발목을 잡으니까 “느그들 때문에 내 소원대로 못 죽잖아!”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 등에서 강도 맞으면 죽어야 되는데 바다에서 풍랑 일때는 빠져 죽었어야 되는데 복음 전한다고 풍랑이 일어나도 살아났어요. 희안해요. 모든 것이 죽어야 되는 사람에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낯 섬이에요. 반대에요. 전부 인간은 살아야지! 살려주세요! 교회에 가도 절에 가도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이왕 사는 거 자랑스럽게 살려주세요! 뭘 잘했다고 자랑해요? 다시 정리하면 선악과라는 마귀는 어떤 지접에 왔을 때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조성진(피아니스트)을 봅시다. 그런데 콩쿨 1등이라고 치고 이게 다 일까? 허무가 찾아오지요.

자살하는 사람이 밥 못 먹어서 자살합니까? 아니지요. 허무해서 죽잖아요. 그런데 본인이 허무를 따질 자격이나 됩니까? 주신 은혜도, 주님을 증거하기에 바빠야지 왜 나는 ○○ 이다를 왜 하냐? 말입니다. 이것 자체가 잘못이다. 어떤 누구도 사단에게서 못 벗어납니다. 우리로 하여금 세상의 연을 끊는 것도 조절하시는 분이 숨어 계시는 그리스도입니다. 반면 사단은 이러면 니가 잘된다. 지하 벙커 만들고 이렇게 기도하면 된다. 자꾸 내가 사는 방식에 대해서 탓하지 않고 지금 내가 이 땅에서 살겠다는 그 의지를 격려하며 사느냐고 고생 많이 했지? 이제는 아픈 것도 없고 눈물 나는 일도 없게 살 수 있는 곳이 있다고 소개하는 것은 전부 적 그리스도에요.


뭐를 경유하지 않습니까? 그 사람에게는 십자가가 필요 없어요. 그래서 오늘 날 교회는 십자가가 필요 없어요. 교인들 격려하기 바빠요. 고객들 만족시키기 바쁘다니까요. 어떤 분이 제게 메일을 보내왔어요. 자기가 사회단체의 모임이 있는데 그 모임에서 동성애를 반대하면 안됩니다를 신학자가 와서 강연을 하는데 어떻게 대비하면 됩니까?라는 질문을 했어요. 미국 여자 신학자가 강연을 하는 내용과 논문을 보내 줬어요. 그것을 어떻게 다 읽습니까! 그런데 이미 그런 쪽의 글을 십자가 마을에 올린 게 있어요. 데리다를 읽다, 바울을 안다는 것이 있어요. 그것이 그런 쪽의 내용인데 그들의 주장은 로마서가 이러니까 우리는 동성애를 반대하지 말고 한 형제로 받아줘서 옹호해야 된다라는 쪽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런 사람들에게 성경에 동성애를 하는 자는 저주 받는다고 이렇게 하게 되면 그 사람들이 뭐라는 줄 알아요? 그것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십니다고 이렇게 나온다니까요. 십자가 지는 마당에 동성애자라고 배타하지 말고 형제로 받아 줘야 된다는 거에요. 그런 논리를 들고 오는 겁니다. 그것이 이 시대에 교회들이 밉상 받지 않고 모든 것을 포용해야 하고 받아줘야 한다는 이 시대에 필요한 종교로서 자기 처신을 유지 할 수 있고 아직 기독교가 필요하구나를 호감을 줄 수 있다는 말이거든요.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일을 하게 되면 자기 일 밖에 몰라요. 주변에 어떤 사단의 일이 있는지 나와 직접 관련 되지 않으면, 내 아이가 동성애에 빠지지 않으면 동성애엔 관심도 없어요. 퀴어 축제를 하던 무지개 축제를 하던 그건 남의 일이고 나만 안 건드리면 된다 이렇게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성경은 그러한 사태를 우리에게 연관지어서 우리가 사는 세상의 폭을 넓혀봐라 너무 이기주의에 자기 자신만 알고 자기만 편하고 돈만 벌고 자랑만 하지 말고 그리스도께서 일을 어떻게 하시는 가? 성경을 통해 눈여겨 볼 필요가 있어요. 그런 (강연을)하는 신학자들이 사단이거든요. 적 그리스도이지요.


그 사람들에게선 뭐가 빠졌다고 했습니까? 십자가가 빠졌지요. 아까 갈라디아서 1장에 내가 전하는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고 저주 이야기를 하셨지요. 누가 이야기 했어요? 성령 받은 사도가 예수님의 종인 사도가 저주 이야기를 했잖아요. 저주를 앞장세워 이야기 했지요. 예수님은 심판주이지요. 저주를 주시는 분으로 오셨지요. 그러면 누구 편을 들어야 되요? 예수님 편을 들어야 되요? 인간 편을 들어야 되요? 예수님 편을 들어야 되지요. 그래서 저에게 질문 한 분이 그 사람은 인본주의네요. 그렇습니다. 인본주의입니다.


(갈 1: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갈 1: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어떻게 반박합니까? 해서 제가 두 가지 예를 들었어요. 첫째로 과학적으로 그 사람은 장애자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성애가 됐다는 과학적인 근거는 없습니다. 없는데 그 쪽에서는 과학을 들이대는 거에요. 그런 사람들은 D. N. A 가 잘못 되어서 그런 것이기 때문에 봐주자는 겁니다. 그런 근거는 없습니다. 사단적이지 과학적이 아니잖아요. 악마가 들어간 거에요. 두 번째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 중심이고 인간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십자가 앞에서 인간은 저주받아 마땅하다 다시 말해서 동성애는 저주 받아 마땅함을 보여주는 흔적이고 징후이다. 담배 피워도 천국갈 순 있어요.

하지만 담배 연기가 나쁜 것은 여전히 나빠요. 나쁜 건 나쁜 것이지 그 사람이 구원 받냐? 안 받냐의 구원에 관한 문제가 아니고 나쁘다고 이야기한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거에요. 이 세상에서 그 어떤 일을 해도 동성애를 안 해도 지옥 가고 해도 지옥 간다는 것을 전하는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일이지 지금 왜 인간 편에 서서 예수님을 이용하려고 하느냐 그런 식으로 제가 언급 했거든요. 진짜 그리스도인가 싶어서 시사 란을 찾아요.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고 주장하는 이만희나 신천지 등 몇 개파가 안되요.


나머지는 그리스도라 하면서도 입 다물고 우리는 그리스도가 아닌데 따라했는데 예수님 이 그리스도이지 그냥 따라했는데 하면서 적그리스도 짓을 하고 있는 거에요. 누구 편을 들면서 인본주의 쪽, 그 신학자가 내가 그리스도라 주장하겠어요? 내가 예수를 대신한다고 하겠어요? 아니지요. 천하에 귀한 예수님의 종으로 나타나 강연 할 거란 말이죠. 그럼 뭐가 문제이냐? 바로 기존의 친숙한 세상을 사는 사람을 그대로 옹호해줘서는 안됩니다. 예를 들어 비행접시를 위에서 보다 보면 둥글다고 합시다. 그리고 주변에 빌딩들을 보면 그 형태가 사각형들 사이에 원이 들어 있겠지요.


그러나 옆 모습을 보면 비행접시는 그 위에 떠 있고 어떤 것들과도 연결되어 있질 않지요. 이처럼 낯선 세계는 공중에 떠 있어요. 아래와 끊어져 있어요. 이렇게 끊어진 것은 인간의 행함으로 연결시킬 수 없어요.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될 뿐이고 성령은 악령과 싸워요. 그래서 이 세상은 악령의 지배를 받는다고 기정 사실화 시키는 것이 성령의 일이에요.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힘들다고 해서 벗어나려고 고생하고 가난하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은 아닙니다. 이 땅에서 사기 많이 당했다고 천당 가는 것 아니에요. 똑같은 인간들이에요. 전부다. 성령께서 우리를 꺼내줘야 되고 깎아줘야 되요.

그것이 아까 말한 남은 자입니다. 남은 자를 깎는데 주님은 인공 지능보다 더 철저해요. 정확하게 오차 없이 깎아 냅니다. 요한복음 6장 39절에“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중요한 것은 내가 구원 받았다가 아니고 주님 제게 무슨 놀라운 일을 하셨습니까? 나는 도저히 비행접시까지 못 올라가는데 비행접시에서 도대체 무슨 작업을 하셨기에 이렇게 됐습니까? 주님은 “네가 아는 법 말고 다른 법을 적용시켰다!”덮어 주는 것, 그냥 덮어 주시는 거에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게 하는 성령의 법이죠. 육의 법이 아니고 문자의 법이 아니고 성령의 법으로 이제는 내가 부르는 아버지를 너희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시는 거에요. 로마서 8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끊어 졌으니까 다른 사람은 우리의 삶이 예수님처럼 낯설어 보이는 거에요. 그것을 성경에선 고난이라고 합니다. 돈 없고 아파서 빌빌 거리는 것이 고난이 아니라 낯설어 보이는 거에요. 지난 낮 설교에서 어느 프로그램 이야기를 했지요. 암 4기에 걸린 부부 이야기, 교회 오빠라고 크리스마스 특집이라고 보여 주었는데 예상 못했어요.


성경 구절 예레미아 33장과 시편 이야기를 하니까 우리 교인들이 웃었어요. 얼마나 감사한지요. 수준이 그 정도로 넘어 섯구나! 옛날에 얼마나 써 먹었어요. 그 법에 종속되는 거에요. 내가 이 법을 지키면 잃어버린 친숙한 삶을 다시 회복해 주고 보상해 주면 시키는 데로 뭐든지 다 하겠습니다. 이게 적 그리스도에요. 단절이 아니고 행함의 연속입니다. 우리는 이미 몸을 지니고 있는 한 저주 받아 마땅합니다. 진짜 구원자가 오면 구원받은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저주에서 의로 바뀌는, 죄가 의로 바뀌는 놀라운 현상이 벌어져요. 죄 지었는데 의로 바뀌는 것.


주일 낮에 했던 이야기, 부목이란 것은 뼈가 부러졌을 때 연결시키시는 것으로 그 부분에 집중해야 됩니다. 나는 못하는데 주님이 화해케 하시려고 연결시킨 것입니다. “피로 우리에게 화목 제물로 주셨느니라”그래서 진짜 메시야는 사람들에게 아무 인기 없는 모습으로 먼저 피를 흘리고 그 피를 앞장세워서 성령이 주시면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낯선 세계에서 세상을 내려다 보며 살 수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세상에서 너무 개인적으로 편안한 것과 잘되는 것만 생각하지 말고 복음과 십자가 안에 들어가서 다시 세상을 보게 하옵소서! 우리가 어떤 세상에서 살아왔는지를 어떤 세상에서 구출되었는지를 지금 익숙해진 몸의 모습들이 마지막 때의 흔적인 것을 여전히 깨닫는 저희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