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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한윤범
20171211a 부산강의 : [시편]6(2편)-아들의 진노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시편 2편 7절에 보면,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이것 설명하려면 하나님의 언약 가운데 내용이 시편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그 점을 시원하게 설명해드릴게요. 하나님이 계시고, 여기에 땅 있고, 하나님이 언약 주셨고, 언약 안에 아들 들었고. 이 구조입니다. 하나님은 땅에 자신을 드러내는데 언약을 통해서 드러내는데 언약의 내용은 아들 주시는 겁니다. 아들이니까 사람이죠. 이 땅에 사람들이 많이 살 것 아니겠습니까?이 모든 사람은 사그리 소거되죠. 제거 대상되는 겁니다.
싹 밀어내고 아들 주시게 되면 아들의 종류가 둘이 돼요. 하나는 약속의 아들이 있고, 또 하나는 약속되지 않는, 한쪽이 약속의 아들이란 말은 다른 쪽은 비-약속, 약속되지 않는 하나님께서 생각하지도 않는 아들로 나눠지겠지요.
언약을 분석해보겠습니다. 여기선 아브라함언약, 이삭언약, 야곱 언약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에게 자식이 없습니다. 아버지는 있지만 자식이 없다, 아버지는 있지만 자식이 없다, 아버지는 있지만 자식이 없다. 어디에 문제가 있느냐? 여자에게 문제가 있어서 자식이 없는 거예요. 여자에게 문제 있어서 아브라함이 자식을 못 낳는다면, 언약은 어디 투입되느냐? 불임여성에다 언약이 투입되면 자식 없음에서 자식 있음이 되죠. 자식 없어야 되는데 자식 있고, 자식 없어야 되는데 자식 있는 겁니다.
이 방식으로 이 땅에는 하나님의 아들에 해당되는 사람이 없어야 되는데 언약이 투입되면 없어야 될 아들이 새로 생기게 되면서 약속된 아들과 비-약속의 아들이 생긴 게 되면서 약속된 아들과 비-약속의 아들이 구분되는 겁니다.
자세히 볼게요. 아브라함에게 자식이 없습니까? 새로운 여자, 여자2를 데려오게 되죠. 이름이 하갈입니다. 하갈은 아브라함과 어떤 관계냐 하면, 주인과 종(하녀)의 관계에요. 아브라함과 하갈 사이에 자식이 태어나게 되면 종의 자식이죠. 벌써 아들과 멀어졌죠. 종의 자식이란 지배받는 자식이에요. 이게 갈라디아서 4장에 나오는데 아브라함 언약을 둘로 나눠서 하나는 종의 언약과 아들의 언약이 나오는데 아들의 언약을 자유라 하고, 자유의 반대를 비-자유라 하는데 그냥 저주라 합시다. 이 저주가 율법에 의해서 받아요. 법에 의해서 저주받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인간 위주가 아니고 어떤 자를 저주하고 어떤 자를 자유케 하느냐 구분하기 위해서 아브라함 가계를 이용한 합니다. 같은 아브라함 자식인데 한 몸에서 나온 두 종류의 자식이 나오죠. 한쪽은 저주, 한쪽은 자유. 어디서부터 자유입니까? 저주로부터의 자유에요. 문제는 이미 자유케 된 당사자(이삭)가 이것을 믿느냐는 겁니다. 그리고 저주받은 자를 믿느냐는 겁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특징은 믿음의 조상이에요. 아브라함은 행위를 따지진 않습니다. 네가 이미 존재하고 있는데 이미 출생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앞으로 네가 태어나서 어떻게 할까, 묻는 게 아니고 네가 어느 소속인지, 어느 소속이라고 믿느냐로 모든 묻는 운명을 끝나버립니다.
내가 태어나서 부모한테 효도하고, 그런 행위 같은 걸 주절거리지 말라. 처음부터 소속 다르면 미래도 달라요. 그걸 제가 확정된 과거라 하는데 과거가 확정되면 미래도 확정되는 겁니다. 소속이 다르니까 행위도 일체 다 삭제시키고 소속이 다르니까 네가 자유케 하려고 태어난 것을 네가 믿느냐?
그래서 오늘날 성도에게 행위를 촉구하는 게 아니에요. 믿을 걸 안 믿고 자꾸 법적으로 믿으니까 주께선 사태를 일으키는 거예요. 온갖 바닥을 치는 사태를 일으켜서 목을 조르는 거예요. “ 금 네게 돈을 달라했어, 정성을 달라했어, 네 몸을 바치라 했어? 내가 지정한 확정을 왜 네가 안 받아들여, 이놈아.” 하고 목 조르는 거예요.
어제 낮 설교에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십자가란 하나님 외에 어떤 누구도 화목제물이 될 수 없다. 인간에겐 아무것도 안 받는다는 거예요. 화목제물에는 몇 가지 뜻이 있는데, 첫째는 인간에게 아무것도 안 받고, 두 번째는 인간은 화목제물 없이는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 천국 갈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겁니다. 천국 가기 위해서 내 쪽에서 뭘 내놓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화목제물로 확정한 입장에서는 곁다리를 걸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아무것도 안 받고, 어떤 행동도 안 받고, 어떤 순종과 결심도 안 받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진행한 거기에 공감하는 것, 그게 전부에요. 그게 믿음이에요.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보지 않으시고 그 믿음을 보시고, 그걸 의롭다 하셨느니라.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의로움으로 몰아세운 거예요.
이렇게 될 경우에 우리가 아무것도 할 필요 없다, 바치는 것도 소용없다, 선행도 필요 없다, 윤리도덕도 필요 없다. 그럼 우리가 할 게 뭐가 있느냐고 한다면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될 수 있어요. 이게 정리된다면 그건 바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알려준 것은 언약이 주어지게 되면 육적 내부에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집니다. 언약이란 앞에 스톱하는 것이 아니고 여기까지 침투되거든요.
언약이 들어오게 되면 여기서 새삼스럽게 뭘 할까요? 이렇게 되겠지요. 그런데 내부에서 주님께서 육을 배출하기 위해서 영을 집어넣는 작업을 우리가 하는 게 아니고 주께서 하십니다. 내부에서 바꿔치기하는 작업이 있는데 배출 되는 게 뭐냐 하면, 나 혼자 살래. 나 혼자 나를 지킬래. 이게 나올 때 주님 보지 않고 이걸 본다고요. 하나님 믿으면서 나 혼자 살려고 설쳐대고 만사가 귀찮아요. 아무도 오지 마. 자식도 다 보내고 나는 나 혼자가 제일 편해.
그것이 나오는 이유가 누가 침투했기 때문에 이게 이 자리에 있지 못하고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되면 “내가 뭘 할까?”에서 ‘내가’ 날아가 버려요. 주께서 나란 육체를 통해서 주님의 나, 주님의 주체가 내 안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게 되는 겁니다. 활동하면서 나라는 명칭을 붙일 필요 없다는 걸 깨닫게 돼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래서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뀔 때 언약이 투입되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면서 언약이 투입되는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예수님이고 야곱 안에 예수님이 중첩, 포개져 있는 겁니다. 하나는 법적으로 저주받을 야곱을 이제는 어떤 법에도 책임지지 않고 그 법과 상관없는 이스라엘로 안에서 작용하면서 야곱을 바깥으로 끄집어내요. 그 야곱은 뭘 쳐다보냐 하면, 자신이 바깥으로 끄집어낸 모습을 늘 쳐다봅니다. 쳐다보면서 주께서 더 이상 내가 주인공이 아니고 주님이 주인공 되고 나는 한 데, 추운 데 세상 바닥으로 쫓겨난 거죠. 마치 아브라함이 하갈을 쫓아내듯이 쫓겨난 겁니다. 우리는 껍데기에요. 포장지에 해당되는 겁니다. 둘 다 믿어요. 나는 포장지, 주님은 알맹이.
아이고, 오랜만입니다. 오늘 기분 좋아서 강의 새로 시작.
하늘에서 언약 주셨고, 땅에는 육적인 사람들로 이미 아담의 죄로 범죄 함이 있었는데 하늘과 관계되는 언약이 오는데 성부와 성자 관계에서 성자가 이 땅에서 오면서 성자가 성부의 뜻을 담고 내려오게 돼있어요. 내려오면서 이 세상 인간들 속에 끼어들면서 이름을 담고 오게 돼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나중에 주의 이름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진행 중이죠. 주의 이름은 언약이 완료된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주의 이름을 부를 때는 언약 진행이 종결됐다는 뜻이에요.
지금 시편 2편 7절하고 있는데 여기 보면, 너는 내 아들이라. 그럼 아들 안에 과거, 현재, 심지어 미래도 같이 다 포함돼있어요. 아들은 풍선이에요. 풍선 안에 결정된 과거, 결정된 현재, 결정된 미래가 풍선처럼 이 세상에 내려오는 거예요. 하나님이 아들을 낳았다. 내려오게 되면 미래니까 미래는, 언약이 완결되게 되면 저주받을 자와 복 받을 자가 완전히 구분되죠. 완전히 갈라지지요.
이 대목에 대해서 성경 찾아봅시다. 요한일서 3장 10절 누가 읽어보세요.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됐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죠. 질문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아니고 마귀의 자녀도 아닌 중립지역에 있는 사람이 있을까요? 이게 없어요. 그리고 요한일서 3장 10절부터 16절까지 보면, 여기 하나님 자녀들의 특징이 뭐냐 하면, 자신을 껍데기로 보는 사람이에요. 자신을 자기가 지키고 있으면 절대로 형제를 목숨 바쳐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내가 중요하고 내가 아까운데 왜 아까운 나를 남한테 줘요?
요한일서 3장은 신약이거든요. 신약에 확정이 돼버리면 주께서 어떻게 나를 사용할 것이냐? 이렇게 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껍데기를 아는 성도인데 돈 좀 있어서 친구와 골프를 친다면 그것은 형제를 미워하는 걸까요, 사랑하는 걸까요? 그게 사랑하는 거예요. 왜냐? 껍데기니까. 사랑의 주체가 내가 아닌 걸 아는 게 사랑의 완성입니다. “내가 너한테 가방 사줬으니까 너는 나를 사랑하라.” 이러면 사랑이 아니고 그걸 욕망이라 하거든요. 어제 오후설교에 잠깐 언급했는데 중요하기 때문에 다시 여기서 언급하겠습니다.
욕망과 충동의 차이점이 뭐냐 하면, 욕망은 대상을 내가 골라요. 대상을 예수님이라 합시다. 내가 천국 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욕망하면 그 예수님은 절대로 내가 욕망했다는 이유로 예수님이 항상 내 앞에 대상으로 계속 남아있어야 돼요. 내가 호출, 내가 불렀거든요. 내가 꽃이라고 의미를 주듯이 내가 부른 것은 절대로 내 안에 들어오면 안 돼요. 내가 주인인데 주인이 부른 대상이 내 안에 들어오면 주인이 바뀌게 되면, “내가 믿습니다, 내가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게 깨지면 원래 욕망의 취지가 날아가 버리잖아요. 그래서 예수 믿을 때 예수님께 잘해줘요. 십일조 하고 순종하고 선교사 순교까지 하지만 어디까지나 내 안에 들어오면 안 되고 대상으로 남는 겁니다.
남자가 여자를 사랑할 때 부부도 마찬가지에요. 나는 네가 예뻐서 결혼했다.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결정하지 네가 차고 들어오면 안 돼. 이건 사랑이 아니고 계속해서 부부생활하면서 너는 내 욕망의 대상이라는 거예요. 끝까지. 어디 건방지게 내 안까지 차고 들어와. 나한테 차고 들어오면 내 것이 훼손되잖아요. 내 고유의, 최후의 나의 것이 깨지면 이것은 나라는 의미가 날아가 버려요. 그러면 나는 무슨 재미로 삽니까?
모든 세상이 욕망에 의해서 살아요. 욕망은 항상 뭐가 남느냐 하면, 미흡함을 유발합니다. 예수를 믿는데 전에는 예수 믿어서 천당만 가면 됐는데 미흡해. 예수 믿고 기도 안수하면 병도 낫고. 병 낫게 되면 그건 안 돼. 병 낫겠다고 돈 2억 날아간 것, 어떻게 로또해서 다시 올 수 없겠습니까? 계속해서 욕망하죠. 그걸 히딩크가 한 이야기가 있어요. “나는 아직도 배고프다.”
그래서 남자가 시간 되고 돈 되면 바깥으로 도는 겁니다. 그런 남자를 붙드는 방법은 돈을 빼앗아 버리는 거예요. 못 돌아다니도록. 계속 미흡하니까. 여자는 그러죠. “당신은 나 보기가 꼴사납나. 왜 자꾸 바깥으로 도느냐?” 남자는 차마 말 못하죠. “내 욕망에 너는 미흡해.”라는 말을 어떻게 합니까? 졸혼하려고? 늘그막에 이혼 당하려고? 어떻게 그 말을 해요. 말을 못하죠. 좀 지겹네. 잔소리가 많아서. 이렇게 둘러대죠.
충동은 삼켜지는 거예요. 대상한테 삼켜지는 겁니다.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내 소관에서 날아가 버리는 거예요. 성령은 우리가 요청한 게 아니고 우리 욕망의 대상이 아닙니다. 우리는 삼위일체라 하니까 예수도 호출하고 성령도 호출해서 지 원대로 부려먹는 짓을 하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욕망이 아니고 충동이 돼버려요. 그 사람에게 욕망이 없느냐? 있어요. 욕망에 바가지를 뒤집어씌운 거예요. 이 충동이 예상 밖의 만족을 제공합니다. “예상 밖”이란 말이 중요한데 내가 예상한 것은 욕망이거든요. 이러면 감사하겠습니다. 이러면 인생, 예수 믿고 잘 살았다고 하겠다고 하는 계획이 있었는데 그 계획이 다 날아가 버려요. 이렇게 인도하시나?
미흡함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나는 내가 지킨다. 이게 문제가 되어서 미흡함이 되거든요. 여기서 욕망이 나오니까. 그래서 주님께서 바가지를 덮어씌우는 거예요. “인디언 밥!” 하면서 치는 것처럼. 일방적으로 하나님께서 외부에서 덮어씌워 치는 거예요. 그럴 때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 충동적이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충동은 사전에 어떤 계획 없었습니다. 나한테 일어난 어떤 일도 내가 예상한 것 아니었습니다. 그 말은, 나는 내가 지키는 게 아니었다는 뜻이에요.
그걸 염두에 두시고 더 어려운 게 있습니다만 7절 봅시다. “내가 영을 전하노라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는 것이 과거에도 유효하고, 시편 당시도 유효하고, 특히 신약 당시 예수님에게도 유효한 거예요. 왜냐하면 아들 안에는 시간이 결정된 채 풍선처럼 우리에게 섞여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풍선을 어떻게 믿는가? 그 사실에 대해서 생각해봅시다. 안에 언약의 내용이 있습니다. 언약의 내용은 아들한테 삼켜서 구원받는 것. 아들이 와서 우리를 덮치면 우리는 아들을 보여주는 껍데기가 되고 아들은 우리를 모든 것에 자유케 해서 죄 용서는 기본이고 모든 법에서 벗어나서 소속이 창세전부터 천국 소속인 것을 알려주는 데 어떻게 그 내용을 믿을 수 있느냐는 질문이 반드시 나오게 돼있어요.
특히 2016년 5월 4일에 믿었다고 생각했는데 2017년 7월에 요새는 생각도 안 나. 생각도 안 나니까 사람들은 안 믿고 있다고 여기는 거예요. 왜 작년에는 믿었는데 올해는 안 믿지? 그럼 이런 발상은 뭡니까? 믿기는 믿어야 되는데 내 인식이 따라가지 못하고 다른 데 팔다보니까 진짜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이 희미해지고 좋아지지 않는단 말이죠. 귀찮아지고 상투적이 되고 그런가, 이런 생각이 들지 그렇게 애달프거나 마음을 끌어당기는 요소가 안 될 때는 어떻게 하느냐는 질문이란 말이죠.
여기에 답변은 굉장히 간단해요. 인간이 있다면 아들이 우리보다 더 크거든요. 우리가 아는 이야기를 해봅시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받아들여서 그걸 하나님의 의로 바꾸는 능력이 우리한테는 없고 주님한테 있다고 했지요. 그러면 여기서 둘이 나옵니다. 우리의 죄를 하나님의 의로 바뀌는 거예요. 우리의 죄를 우리의 의로 바꾸지 않습니다. 이 의는 이미 날아갔기 때문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도 우리의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이게 한국교회가 안 되고 있어요. 자기 좋은 것은 자기가 다 갖고 있으려고 하는데 우리 의가 아니고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부터 말씀드릴게요.
하나님의 의의 대표자가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의가 뭐냐 하면 아버지 뜻에 순종해서 하나님의 의를 이룬 거예요. 예수님은 아버지 말을 순종해서 의를 이뤘지요. 여기서 인간은 빠졌지요. 이걸 믿어야 돼요. 하나님의 의는 우리 소관이다, 아니다? 우리 숙제도 아니고 우리 소관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하나님의 의는 예수님과 아버지의 관계기 때문에. 이 관계를 언약 관계라 합니다. 언약은 우리가 이룬 게 아닙니다. 화목제물은 인간이 아니에요. 화목제물은 유일하게 예수님만 화목제물이기 때문에 그 근처에 가지 마세요.
아버지가 아들을 통해서 모든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한 아들을 보내셨고 그 한 몸을 통해서 다 이뤘다는 것이 히브리서 10장에 나오잖아요. 내가 한 몸을 준비했으니 그 아들이 다 이루었다. 그런데 자꾸 얼쩡거리면서 저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건 믿음이 아니고 불신이잖아요.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는 우리가 손댈 게 없어요. 예수님께서 다 이룬 거예요. 문제는 죄거든요.
주님께서는 우리 의를 받아서 하나님 의를 이룬 게 아닙니다. 우리의 장점과 강점, 우리의 착한 점, 우리의 의로움 점을 받아서 의로 만드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의로운 게 없어요. 죄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스스로 의다, 착하다, 윤리적이다, 도덕적이다, 하는 것을 주께서는 무슨 작업을 하느냐 하면, 예수님과 아버지만이 의를 이뤘다는 것을 굳이 강조하기 위해서 나도 의를 이룬다는 것을 박살낼 특별한 파견의지로 찾아오는 게 있어요. 저도 착해, 저도 파키스탄 순교했습니다. 이따위 소리하는 걸 파괴시키기 위해서 굳이 그걸 노리시고 들어온 게 있어요. 그게 율법이었습니다. 말씀이죠.
내가 어떻게 하느냐고 질문했지만 제가 해답으로 제시하는 것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뭘 해주시는지 이야기하는 거예요. 죄를 유발시키는 겁니다. 죄를 유발시키는 방법이 뭐냐? 율법이고 말씀인데, 율법과 말씀의 완성이 바로 복음입니다. 십자가 복음이에요. 피 복음. 다 같은 이야기에요. 내 살과 내 피. 예수님은 피해자, 우리는 가해자 되는 그 복음. 이 복음에 근거해서 파생된 여러 가지 말씀들 의사도 바울의 명령이에요. 사도 바울의 모든 명령은 하란 말이 아니고 주님의 피 작업에 대해서 네가 이해하고 있는지 묻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천천히 해보겠습니다. 너무 어렵기 때문에. 율법과 말씀으로 우리 의, 우리의 착함을 죄로 바꾸는 작업을 해요. 법이 더한 곳은 우리로 하여금 저주 아래 있게 함이라. 죄를 더욱 더 죄 되게 하심이라. 그 말은 우리는 우리 의를 절대로 죄가 아닐 것이라고 장담하는 겁니다. 의니까 보상을 원하고 있어요. 그 보상의 기준은 내가 상상한 나에게 빠른 시간 내에 내가 원했던 소망을 충족시켜 달라는 겁니다. 이게 아까 이야기한 욕망의 요구지요.
욕망에서는 미흡함에 대해서 내 욕망을 무조건 만족시켜주옵소서. 내가 착할 테니까 내가 주님 말씀대로 의로울 테니까 착하게 살 테니까 내 욕망을 충족시켜달라고 우리는 굉장히 의롭게 살고 바르게 살고 착하게 살고 그리고 늘 참아야 하느니라. 조신하게 철저한 자기 관리, 자기 절제, 그리고 항상 침착하게 허둥대지 말고. 한 번 생각해보고 그 행동을 해야 되는지, 안 해야 되는지. 특히 현대사회에서 배려심, 내가 이런 행동할 때 얼마나 상처받을지 배려하는 것, 그렇게 하는 모든 행동은 우리가 갖고 있는 자체적인 의에서 파생되어 나왔다고 보는 거예요,
이 의와 우리를 완전히 배제하고 완성한 예수님과 아버지 사이의 의와 극한 대조시키는 거예요. 모든 사도 바울의 말씀 속에는 그 말씀을 하나님의 의로 지킬 것이냐,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의로 지킬 것이냐는 투쟁에 들어가는 겁니다. 그 투쟁의 결과가 오늘 시편 2편 9절 읽어보세요.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
하늘의 아들이 땅에 있는 율법의 저주받는 종년의 자식들이 하는 모든 것을 질그릇같이 다 부셔버린다. 저는 이것에 감이 안 왔어요. 옛날에 있던 박사교회 청통에서 대구 갓바위로 넘어오는 2차선 도로가 있는데 휘어져있어요. 거기에다 옹기들을 내놨어요. 내가 차로 몇 번이나 갔다 왔는데 운전할 때마다 움찔거려요. 만약에 운전 소홀히 해서 박으면 질그릇이 다 깨져요. 그때 시편 2편 9절을 생각 안 할 수 없어요. 한 개 오천 원 정도 밖에 안 하지만 박았다면 소리가 어떻겠습니까? 주님께서 차로 다 깨는 거예요. 뭐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언약에는 율법, 말씀 다 들어있죠. 언약이 완성된 게 복음이니까. 말씀으로 다 저주하는 겁니다. 질그릇 깨듯이. 아직까지 중요한 걸 이야기 안 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의를 로마서 10장 3절에서는 자기 의인데 자기 의는 하나님의 의와 대비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의는 로마서 10장에서는 예수님의 복음으로만 되고 그렇지 않는 것은 전부 다 자기 의가 되는데 자기 의는 율법에 의해서 구축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같은 율법이지만 율법 자체를 해석하는 당사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자기 의로 빠질 것이냐, 하나님의 의로 빠질 것인지 결정되는 겁니다.
오스틴이라는 언어학자가 뭐라고 이야기했느냐 하면, 바른 행위와 바른 매개행위를 구분했어요. 이 이야기해서 그 뒤에 많은 철학자들의 놀랐습니다. 뻔한 이야기인데 그동안 왜 몰랐을까? 바른 행위와 바른 매개행위를 구분하는 발상 자체가 아주 천재적으로 여겼습니다. 상당히 중요한 겁니다.
바른 행위란 전에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예를 들면, “내 신발이 낡았다.”라고 말합니다. 상대방이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어쩌라고?” “그래, 기다렸어. 사줄게.” 세 번째 하나 더 추가한다면 “그 신발의 노후에는 물리적 시간과 그리고 환경 탓입니다.” 지금 내 신발이 낡았다면 과학적으론 시간이 흘렀고 물리적 상황이 나빠서 그랬다고 보는 겁니다. 문제는 이 신발이 어디서 찾았느냐 하면, 뒷산 시신 속에서 찾았다면 범인 추적에 도움 되겠죠.
그런데 똑같은 한국말로 발언했는데 이게 헤어진 애인 같으면, “어쩌라고?” 계속 사귈 애인이라면, “그래, 사줄게.” 이렇게 되겠지요. 그래서 발언 자체 의미보다도 발언을 중간매개로 해서 본래 본심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언어분석 백날해도 소용없어요. 헬라어, 히브리어 천 독, 만 독해도 소용없어요. 왜? 그걸 보는 인간이 내가 성경을 본다는 자기의식을 본인이 지울 길이 없어요. “주여, 내가 성경보고 있습니다. 착하지요. 그러니까 내가 원하는 보상을 해주세요.” 이 생각을 지울 길이 없어요.
그래서 말씀이 들어오게 되면 죄를 없애는 것이 아니고 내 의를 인정해주는 게 아니라 계속 죄를 키우고 또 키우는 거예요. 오늘 강의제목을 이걸로 합시다. 누진세 있잖아요. 계속 죄를 키우고, 키우고 또 키우고. 갑자기 건장한 사람이 몸이 아프다. 왜 이렇게 합니까? 드디어 죄를 키운 데다 또 키운 거예요.
<말아톤>이란 영화가 있지요. 엄마와 마라톤 하는. 걔가 한 유명한 대사 있잖아요. “하나 언지고 또 하나 언지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을 함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가 하는 일에 각각 붙는 모든 이질적인 것들을 털어내는 작업을 위해서 붙는 작업을 병행하면서 털어내요. 붙이고 털어내고, 붙이고 털어내고. 얼마나 아플까요? 참 아파요. 의로운데 내 뜻대로 보상은커녕 전보다 사정은 더 악화되고. 분명히 착한 일했는데 갈수록 가는 길은 절벽이고 절망적이고. 참다 참다 못해서 불평과 불만. 내가 이러려고 예수 믿었습니까? 예수 믿으면 개다, 라는 데까지 나오는 겁니다. 누진되는 겁니다. 덮친 데 덮치게 만듭니다.
그 방법을 제자들에게 사용한 거예요. 결국 제자들 마지막 모습은 따라가다, 따라가다 십자가 앞에 튕겨 나오죠. 그래서 십자가를 믿을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그게 십자가의 효과에요. 십자가를 믿으라고 준 게 아니고 튕겨져 나오는 것. 억지로 말을 만들면 돼 튐, 돼 튕겨져 나오는 겁니다.
퍼스라는 미국의 기호학자한 유명한 이야기가, “인식은 기호를 매개하는 과정이다.” 이 말이 뭐가 중요하냐 하면, 기호는 인식을 매개하는 과정이 아니라는 겁니다. 상당히 어려워요. 기호를 매개하는 과정이라는 것은 기호가 먼저고 인식은 나중이라는 아주 충격적인 발언을 했고 그것이 옳다고 학자들은 아무리 따져도 이 말이 맞아요. 우리는 생각을 전달하기 위해서 언어를 사용하잖아요. 이게 우리 상식이잖아요. 그 상식을 완전히 뒤집은 거예요.
개, 멍멍, 예쁘다. “저 개가 누굴까? 우리 집 개 멍멍이네.” 할 때 이미 어떤 인식한다는 것은, 개를 인식하면서 어디로 가느냐 하면, 멍멍이라는 이미 존재하는 기호로 바뀌면서 오늘따라 예쁘네, 라는 인식으로 이어지는 거예요. 인식은 적당한 기호를 보여주는 껍데기로 수단으로 인간의 인식이 있단 말이죠.
사람이 먼저고 그 다음에 사회가 있다. 이게 보통 생각인데 그게 아니고 사회가 먼저고 그 사회에 맞춰서 살도록 요구받는 것이 바로 나의 자아란 말입니다. 이 발상이 불과 백 년밖에 안 돼요. 사회가 먼저고 우리는 그 사회의 부분이 되어서 우리는 이상하게 밥 먹는데도 불구하고, 실험해봅시다.
그냥 밥을 먹고 있다. 그런데 누가 창문을 열고 아저씨가 머릴 들이밀면 밥이 먹혀요? 이게 안 먹히죠. 과학적으론 말이 안 되는 거예요. 과학적으로는 음식을 숟가락이란 도구를 사용해서 집어넣는 걸 먹는다고 하는데 상대방의 시선이 있든 말든 그 행동을 하면 되잖아요. 그런데 쳐다보면 왜 밥을 못 먹어요?
심지어 혼밥, 혼술이 유행하지만 혼자 밥 먹는 게 밥을 먹는 게 아니라 입에 처넣는 거예요. 고문이에요. 그런데 사람이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으면 밥이 어디로 들어가는지 몰라요. 그리고 밥이 맛있어. 반찬 몇 가지 안 되는데 왜 그래요? 그것은 기호에서 내뿜는 새롭게 나를 그 순간 만들어내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예요. 장미가 있다면, “이것은 장미다”라고 이야기하고 난 뒤에 5초 후에 남들에게 이것은 장미라고 이야기했어요. 그러나 사실은 이건 틀린 겁니다. 5초 전의 장미를 이야기한 것 밖에 안 되니까. 나는 내가 장미라고 하면서 5초 전의 장미라고 이야기해야 옳다는 거죠.
그 말은 뭐냐 하면, 어떤 발언을 하는 당사자가 시간 따라 계속 변하고 있으니까 변하는 것은 고정적인 지시어, 나라고 하는 자체가 반칙이란 말이죠. 내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자꾸 내가 아프다, 나는 이걸 하고 싶다, 나는 저게 되고 싶다, 이걸 저한테 해주세요. “저가 누군데? 저가 5초 전의 저야, 지금의 저야?” “지금의 접니다.” “그럼 5초 후에 또 바뀌게 되잖아. 그때는 어떻게 할래?” 그때는 바뀐 내가 달라고 해야 되죠. 그러니까 부부도 마찬가지고 모든 관계가 쉬지도 않고 계속 변하고 있는 입장에서 도대체 뭐가 믿는 거예요? 두 시간 전의 믿음이 믿음입니까? 작년의 믿음이 믿음이에요?
그래서 사람들은 진짜 진리를 찾기 위해서 변하는 것 중에서 변하지 않는 걸 찾아내는 작업을 해 왔습니다. 지금 이 이야기가 죄와 관련돼있습니다. 인간의 죄가 뭔지 계속 이야기합니다. 그게 칸트가 이야기한 분석명제와 종합명제가 있는데 분석명제는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독신자는 홀로 사는 남자다.” 새로운 내용이 있습니까? 주어, 술어가 왔다 갔다 해도 마찬가지잖아요. 종합명제는 뭐냐? “독신자는 행복하다.” 이것은 그럴 수도 있고 안 그럴 수도 있지요. 실제 경험을 해봐야지요. 그래서 칸트는 둘로 나눴어요. 분석명제와 종합명제로 나눠서 이 세상은 두 개의 명제밖에 없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나오는 학자들이 이걸 거부했어요. 모든 것은 본인 생각하기 나름이다. 지금 철학자들이 뻔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어요. 이렇게 나누지만 본인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 다음 사람이, 본인이 누구냐? 본인은 어디서 만들어진다? 사회가 나를 인정해주는 그 바구니 안에서만 본인이 되는 거예요.
같이 밥을 먹을 때 기분 좋은 이유가, 내가 밥 먹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남 보기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밥을 먹어 줄 때 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고 있다는 것. 인정받는 포근함, 안도감, 넉넉함, 다 있겠지요. 이렇게 되면 타인이 든든하면 나는 신경 안 써도 덩달아 든든한 거예요. 그러니까 든든한 타인을 잘 만나야 되는데 이 타인을 붙잡지 못해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죄가 뭐냐? 죄의 결정은 종교입니다. 시편에서 계속 싸우는 것은, 자기 죄에 대해서 종교가 규정을 해요. 나는 죄인이다. 이게 바로 죄가 됩니다. 왜냐하면 발언 내용에서 발언 내용에서 그치기 때문에. 무슨 의도로 그런 발언을 했느냐? 매개 내용과 달라지게 만들어요. 누가? 예수님이 끼어들면. 네가 그런 자격이 있어요? 그걸 바꾸는 거예요.
그걸 지젝이란 사람이 발언의 주체와 발언 내용의 주체로 발전시켰습니다. 발언의 주체란 내가 말했다. 발언 내용은 그런 발언하는 너는 무슨 의도로 발언하는가? 그게 바로 주체가 되는데 그 주체를 우리가 몰라요. 내가 무슨 뜻으로 하는지 본인은 몰라요. 이런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철학자들의 결론은 뭐냐? 진리를 모르겠다는 거예요. 내가 무슨 의도로 하는지 자기 혼자 결정 못합니다. 날 인정해주는 다른 사람이 듣고 좋은 평가를 해줘야 됩니다.
모르기 때문에 모르는 것을 신으로 채우는 거예요. “신이시여, 제가 이런 발언과 삶을 이렇게 살아갑니다. 참 잘했지요?” 하면서 신을 요청하지요. 이걸 충동이라 했습니까, 욕망이라 했습니까? 욕망이죠. 이 욕망을 바로 주께서 건드려서 이 주체를 파괴시키는 겁니다.
10분 쉽시다.
20171211b 부산강의 : [시편]6(2편)-아들의 진노 (강의:이근호 목사)
지금 초점이 뭐냐 하면, 아들이 왜 질그릇을 깨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아들이면 날 믿으라 하면 되는 데 철장으로 꼭 깨뜨릴 필요가 뭐가 있느냐 말입니다. 12절에 보면, “그 아들에게 입 맞추라 그렇지 아니하면 진노하심으로 너희가 길에서 망하리니 그 진노가 급하심이라” 왜 이러한 급작스런 조치가 필히 취해지는 의도가 어디서 나오느냐는 겁니다. 아들에게 입 맞추어라. 그럼 입 맞춘 사람은 데려가고 나머진 저희들끼리 그냥 살도록 놔두면 되는데 입 맞춘 외에는 진노하심이 급하다.
그렇다면 아들 안에 뭐가 포함되느냐 하면, 하나님이 진노하시겠다는 내용도 아들과 공유하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어요. 풍선을 바늘로 터뜨렸는데 거기서 구원도 주어지지만 하나님의 진노하심도 같이 떨어지는 거예요. 풍선 안에 밀가루가 있다면 풍선을 터뜨렸을 때 얼굴에 허옇게 뒤집어씌우는 것처럼.
결국 제가 하는 말은, 이 세상에는 진노가 없다는 거예요. 진노가 없는데 진노가 수입되는 거예요. 그러니 십자가가 얼마나 과격합니까? 내가 온 것은 너희를 화평케 함이 아니고 불화하게 함이라. 인간이 요청하는 것은 자기 세계의 평화잖아요. 진노라는 것은 부정적인 거예요. 인간은 부정적인 걸 싫어해요. 왜냐하면 자기 자신을 잘 건사하고 유지하고 지켜내기 위해서는 나쁜 것, 부정적인 것, 지옥, 그런 이야기는 자꾸 밀어내게 돼요. 피 이야기, 역겨운 것.
인간들이 밀어내는 것에 대해서 주님께선 진노하심으로 마주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이 되려면 모세 율법에 의해서 조건이 있어요. 그냥 진노하면 안 되죠. 법에 위반했다. 첫째 시간과 간단하게 연결하면 이렇습니다. 죄에 대해서 인간은 두 가지 인식을 갖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 보는 죄와 인간들이 보는 죄 개념이 상충되고 있잖아요.
아들은 자기 몸의 증거를 위한 죄의 개념을 갖고 있다면, 인간은 자기 의를 유지하기 위해서 거기에 분류되어 거부했던 것이 죄의 개념입니다. 자기한테 불리하게 작용한다든지 자기를 힘들게 한다든지 자기를 만족케 못하는 것은 자기 취향에 안 맞는다든지 구미에 안 맞아 밀어내는 그것이 죄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인간에게 왔다가 부딪쳐서 튕겨져 나가면서 예수님을 튕겨낸 모든 것은 일괄적으로 인간들의 몰랐던 죄가 된단 말이죠.
첫째 시간 후반에 제가 이야기한 것은 어떤 식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을 지키려고 했기에 아들의 의견에 대해서 튕겨내느냐는 겁니다.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인간에게는 진노 자체가 없어요. 좋은 게 좋은 거예요. 불길한 것, 재수 없는 것, 인간은 본능적으로 배격하게 돼있습니다. 그걸 생물학적으로 이야기하면 인간의 자기 유기체 구성 요건입니다. 모든 것은 세포로 돼있지요. 세포는 암모니아, 탄소, 질소로 구성됩니다.
그러면 탄소가 있어야 유기체인데 과학자들은 처음에 탄소에서 어떻게 세포로 이전되는가? dna가 만들어져서 그렇다는 거예요. 그럼 dna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dna는 스스로 자기 융합, 자기 구성, 자기가 스스로 조직을 만드는 성질에 의해서 떠다니는 원소들이, 분자들이 스스로 결합해서 드디어 ‘나’라고 맺었다는 겁니다. 과학에서 학교에서 그렇게 배우고 있어요. 자기 융합과정.
친구들끼리 하나 됐는가? 마음에 맞으니까. 왜 마음에 맞는데? 그건 설명이 안 돼요. 자기들끼리 맞으니까 칠성파, 일진회. 자기 조직 되잖아요. 어른들은 그것을 파괴하려고 하겠지요. 파괴하면 할수록 점점 더 결속력이 다져집니다. 기성사회는 적이야. 이런 식으로 엇나가게 되지요. 그렇게 하나로 만드는 걸 자기 조직화도 되지만 단일화라 하는 거예요. 이런 성격은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성경에서는 세상의 모든 인간에게 공통성이 있는데 그게 사단의 마음이에요. 아담의 후손들의 공유하기 때문에 사단의 마음으로 단일화됩니다. 단일화에 대해 창세기 11장에 잘 나와 있습니다. 바벨탑 취지가 뭐냐 하면, 우리 이름을 하늘에 닿게 하자. 하나님께서 뭘 주목하느냐 하면, 어떻게 한 마음이 되었는지 따져보니까 언어가 통일되어 그런다는 거예요. 의사소통이 안 되게 찢어버린 거예요. 표현할 수 없는 매개체가 없게 만든 거예요. 아까 제 말이 맞지요. 인간은 기호에 따라 가지요. 인간은 사회적 존재니까.
하나님께서 단일화를 훼손시키는 겁니다. 사탄의 마음이 인간 속에 들어갔다. 사탄의 마음은 뭐냐? 사탄의 마음은 종말이 없다. 인간의 마음을 한 마디로 이야기해라. 그냥 끝이 없어요. 끝이 없는 걸 불멸, 이대로 영원토록 죽. 결혼식 주례에서 초점은 이 행복한 관계로 죽, 머리카락이 파뿌리가 될 때까지. 회사를 설립할 때 축사가 뭡니까? 이 조직 그대로 계속 번창하기를. 아이 이름 지을 때도 마찬가지죠. 이 번창이라면 그만큼 너는 아프지도 말고 상하지도 말고 죽지도 말고 늙어죽을 때까지 건강하게 잘 살아라.
이처럼 사탄은 모든 것을 단정 짓습니다. 지금 상태를 최종 상태로 규정하는 것. 이게 사탄의 마음이에요. 사탄의 마음이라고 해서 뱀 나오고 이런 게 아니고 지금 이대로 죽. 뭘 싫어하느냐 하면, 내 속의 변화를 없애버리는 거예요. 불멸이란 말이 적당하네요. 불멸 상태로 들어가는 겁니다.
그래서 사탄의 마음을 히브리서 2장에서 사탄의 마음의 특징이 뭐냐 하면, 죽기를 무서워하는 것이라 했어요. 죽음이 어때서? 성경에서는 죽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 있어줘야 그 다음에 부활이 있잖아요. 죽음 없는 부활 있습니까? 자기 십자가지지 않고 영생 갑니까? 자기 목숨을 미워하지 않고는 영생을 못 얻지요.
그렇다면 반드시 뭘 요청해요? 교체를 요청해요. 현재 우리 마음이 하늘나라에 적당하지 않은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럼 어디에 적당하냐? 지옥에 적당하고 불기둥에 적당한 거예요. 원래 지옥에 들어가는 것이 요한계시록에 21장에 둘째 사망 나오고 20장에 유황불 나와요. 유황불에 누가 들어가느냐 하면, 사탄이 들어가요. 사탄의 마음과 같은 마음이 줄줄 따라 다 들어가요.
아이가 공놀이하다가 공 따라 달리는 기차가 있는지도 모르고 들어가면 끔찍하죠. 그야말로 기가 날아갈 정도에요. 오늘날 세상 사람들, 교회도 교인도 마찬가지고. 복음을 멀리하고 세상을 따라가는 것은 저주의 바퀴에 기어들어가는 거예요. 뭣도 모르고. 나는 술이 좋아. 그 술이 갖고 노는 공이라니까요. 나는 여자가 좋아. 나는 낚시가 좋아. 낚시 좋아하다가 주일에 교회도 안 가고. 복음 이야기보다 다른 게 더 좋다고 빠져버리면 굴러가는 공 따라 아무것도 안 보이는 거예요. 이게 20대입니다. 당기는 대로 끌리는 대로 딸려갈 뿐이에요.
아가씨들 20대 배낭 하나 메고 유럽가지요. 그걸 누가 부러워하느냐 하면, 재수 없이 20대 초중반에 결혼한 아이 낳은 여자들이에요. 내가 미쳤다고 결혼 일찍 해서 놀 것 못 놀고 할 것 못하고, 후회한다고요. 북유럽에 뭐 있다고 남들 가니까 다 따라간다고요. 그게 복음에서 멀어지는 거예요.
사탄의 마음은 지금 이대로 나한테 손대지 말고, 간섭하지 말고, 나한테 잔소리하지 말고, 제발 안 건드렸으면 좋겠다. 모든 남편의 소원이 있습니다. 잔소리하지 말 것. “내 일은 내가 충분히, 네가 무슨 말하는지 이해하는데 한 마디만 하고 나머진 나한테 맡겨줘. 한 소리 또 하고, 한 소리 또 하고. 제발 잔소리 좀 하지 마라.” 그럼 아내 쪽에서 뭐라 합니까? “두 번, 세 번 해도 안 하데?”
잔소리하지 말라는 게 바로 사탄의 마음이에요. 안 듣겠다는 데 기어이 하는 것도 사탄의 마음이에요. 뭘 얻겠다는 거예요, 도대체? 둘 다 내가 원하는 상태 유지함. 남편은 지금 이 상태로 내가 알아서 유지함. 그게 사탄의 마음이에요. 필요하면 내가 요청할게. 그게 바로 욕망이죠. 욕망은 이 상태를 변경하는 게 아니고 이 상태의 미흡함을 충족하는 거예요.
여러분, 변경과 충족이 다릅니다. 사각형이 있는데 모서리가 좀 깨졌어요. 그러면 이건 미흡함입니까, 다 바꿔야 됩니까? 이것만 치우면 되잖아요. 나머지 대부분은 든든하죠. 불멸이죠.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면, 자아란 덩치 그대로 아무 문제없는데 다만 사는 데 불편할 때는 인테리어만 바꾸면 돼요. 결혼하는데 남편/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인테리어만 바꾸면 돼요. 그래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일곱 번 결혼했지요. 모서리 부분만 바꾸면 되니까. 왜냐하면 이걸 지키기 위해서 모서리 부분을 보충하든지 채우면 되니까.
이런 마음으로 교회에 옵니다. 목사가 설교를 합니다. 지가 안 되는 부분만 교체하면 되지 자기 덩어리를, 자기 전체를 부인한다는 것은 용납이 안 돼요. “나를 죽여주옵소서.”는 아니에요. 이제 괜찮은 인간으로 더 살게 해 주옵소서, 라고 교회 오는 거예요. “다른 건 괜찮은 데 이 대목이 좀 문제니까 신이시여, 이 대목 수리해주세요.” 이렇게 교회 오고 말씀을 듣고 한다니까.
이 전체를 공격하면 그때부터 죄가 나오지요. 사실은 복 된 사람입니다. 근원적인 죄. 시편 51편에 제가 설교 시간에 했습니다만 다윗이 이스라엘 왕이지요. 방금 한 이야기를 그대로 해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덩치가 이렇다. 이스라엘의 단일화가 왕입니다. 다윗이 왕으로 있으면서 모서리 부분을 걱정하는 거예요. 나단 선지가가 하는 말이, 이스라엘 내에 욕심 부리는 사람이 있어서 너무 야박하게 구는 사람이 있는데 손님이 왔을 때 자기 양은 놔두고 한 마리밖에 없는 하인의 양을 잡아서 대접했습니다. 그런 싸가지 없는 못된 인간을 어떻게 할까요? 그 인간은 죽여 버려라. 이스라엘에 그런 인간이 있다니. 법적으로 하면 네 배로 갚게 돼있어요. 속건제 법에 의해서. 이스라엘을 흠집 내는 거죠. 이스라엘 전체는 계속 불멸해야 되고 계속 유지해야 되고 그 책임자가 단일체로서 자기를 왕으로 생각한 거죠.
그런데 나단 선지자가 뭐라고 합니까? 진짜 이스라엘은 눈에 없는 이스라엘, 여호와 하나님인데 지금 다윗은 자기 정당화, 자기 의를 주장하기 때문에 마치 남 이야기하는 것처럼 한 거예요. 선지자도 인간이니까 니가 뭘 알겠나 하고.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여기에 다윗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당신에게 여자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밖에 없는 밧세바를 건드렸고 밧세바를 온전히 차지하기 위해서 우리야 장군을 살해했지요.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했고 우리야 장군 살인하고 횡재한 사람이에요. 내가 주님을 가리고 있었던 거예요. 이스라엘을 가리는 역할로 이스라엘 왕으로 그 직무를 수행한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진짜 이스라엘 하나님이 원하는 것은 이스라엘을 가리는 당사자가 누구다? 당신이 바로 그 사람이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한 당사자임을 알 때 그 사람은 복권 열 장 당첨된 것보다 더 땡잡은 사람이에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나는 죄를 지은 게 아니에요. 내가 그동안 내 의로 주님의 의 작업을 훼방한 거예요. “머리 치워!” 머리를 치워준 것에 대해서 감사하죠.
내가 가로막는 내 머리를 주님께서 손을 벌려서 “어디서 십자가 앞에서 되지도 않는 자기 의로 얼쩡거려? 나와, 나와.” 치워주는 것, 치워주면서 바라보니까 이미 자신은 구원받을 걸, 하나님의 의 작업에 합류된 작업으로 같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 내 의가 필요치 않았어요. 따로 챙길 내 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챙긴 의로 단독적으로 구원받는 줄 알았어요. 천당 가는 줄 알았어요. 모든 교회가 하는 마귀 짓이 그 짓 아닙니까. 불멸이고 인간은 계속 자기 인테리어만 하는 그에게 진짜 성령이 오게 되면 네가 바로 그 사람이다. 와~~~ 다윗은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내가 처음부터 죄인이었다는 겁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말씀은 언약이죠. 언약에 대해서 두 개의 해석이 있습니다. 내가 하는 해석은 사탄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것이고, 내가 하는 해석을 누가 동조하느냐 하면, 주변의 사회, 국가, 교회, 종교단체, 모든 것이 내가 하는 해석에 인정해줬어요. 왜냐하면 나는 그들의 인정을 받고 싶기 때문에. 내가 잘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나를 남들이 인정해준다면 그들의 입맛에 맞게 모든 걸 할 수 있어요. 따라서 그들이 내민 게 기호였고, 언어였고 나는 그 언어에 맞추어서 인식과 의식을 그들과 같이 불멸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 이게 바로 사탄이란 왕, 사탄이 이 세상의 왕이거든요. 왕한테 묶여있었던 거예요. 단일화에 한 마음으로 묶여있었고 바벨탑으로 등장한 겁니다.
그런데 이것뿐이에요. 없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옵니다. 와서 아들의 해석이 주어져요. 아들이 해석은, 이 안에 들어있는 것을 죄로 규정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만이 의가 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만이 아버지를 알아요. 아버지를 창세전부터 알았던 그 관계가 의라는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나쁜 짓하나 안 하나 관계없이 왜 죄가 되느냐 하면,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아버지를 모르기 때문에 거기서 나올 수 있는 것은 의에 대비되는 죄만 나오죠. 죄가 나오니까 하나님의 의는 죄에 대해서 진노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래서 아들은 무엇을 노리고 이 땅에 오느냐? 이 풍선은 진노를 담고 이 땅에 온 거예요. 와서 진노를 퍼붓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바로 진노 또는 저주 속에서 구원이에요. 그림을 이렇게 그리면 안 되겠지요. 그래서 자기가 저주받아 마땅함을 아는 자만 구원된 자가 돼요. 예수님이 세상 보는 눈과 일치된 관점이기 때문에 그 사람만이 구원이 되는 겁니다. 이게 누가복음 18장에 나오죠. 구원받은 사람은 감히 얼굴을 쳐다보지 못해요. 누가복음 18장 13절에,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게 뭐냐 하면, 동일한 세상에서 똑같은 세상이에요. 다 같이 진노 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니까 구원받겠다는 그런 꼼수를 쓰지 마세요. 누가 손대느냐 하면, 주님이 와서 손을 대야 낮은 자가 높아지는 거예요. 그리고 상대적으로 높다고 여기는 자를 주께서 낮추는 작업은 누구 몫이냐? 내가 알아서 하는 몫이 아니고 주님이 알아서 해줘버려요. 이걸 믿느냐는 겁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이런 작업에 대해서 아무도 안 믿는 것을 감사해야 돼요. 내가 예수 안 믿는 것을 감사해야 됩니다. 무슨 되도 않는 소리냐 하면, 내가 믿어버리면 믿음 앞에 내가 안 떨어지고 계속 붙어있기 때문에 나중에 화근이 돼요. 작년엔 믿었는데 올해는 안 믿는 맨날 변할 수밖에 없는 내가 믿음 앞에 있으면 내 기분 따라서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고 이것은 본인이 정신병자 될 지경에까지 빠져버립니다. 기도원에 가는 사람들 정신병자들 아닙니까.
기도원에 다닌다는 것은 환자라고 보시면 돼요. 얼마나 자기를 못 버렸으면 기도원에 갑니까. 얼마나 악바리, 자기 불멸, 사탄의 마음을 포기 못했으면 기도해서라도 자기욕망의 미흡함을 채우려고 무슨 그런 집착을 마귀가 아니면 누가 줬겠어요? 자기가 자기를 손대려고 한단 말이죠. 고치지도 못하고 손대서 버려놓지만.
주님께서 하시는 방법은 이겁니다. 끝까지 우리는 자신에 대해서 손을 대고 자기를 책임지려 합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손목을 자르든지 끝까지 암세포가 퍼지게 만들어요. 암세포가 여기 있다고 합시다. 이것만 썩었지 나머지 몸통은 숨 쉴 만하다고 하지요. 이번에 낚싯배 빠졌을 때 세 명 살았지요. 배안에 에어포켓에 목 내놓고 두 시간 동안 버텼다는 거예요.
인간들은 숨 쉬 만하면 예수 믿어요. 그러니까 이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정말 혼줄 나야 발길을 끊어요. 예수 안 믿죠. 아직 예수 믿을 여력이 있으면 예수 믿어요. 신을 요청한다니까. 종교를 요청해요. 내가 아직도 환란 가운데 믿나이다. 이것 좀 포기하면 안 됩니까? 예수 안 믿어도 믿는 자 되면 안 돼요? 성질 같으면 쥐어박고 싶다. 좀 믿지 말란 말이죠, 예수를. 왜 그렇게 본인이 본인을 살리려고 애를 씁니까. 안 믿어도 되는데 왜 구태여 내가 믿어야 됩니까? 그러니까 사탄한테 시달리고 또 시달려도 사기꾼한테 속아서 돈 다 빼앗겨도 또 하는 거예요.
주님께서 암세포를 온 천지에 퍼지게 합니다. 퍼지게 하는 방법이 말씀이고, 말씀은 십자가 사건에서 나와요. 갈라디아서 5장에 나오죠. 정과 욕망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과거, 현재, 미래를 완전히 종결시켰어요.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가 달라지지만 달리는 기차 위에 주님께서 십자가가 배트맨처럼 올라타서 12객실이든지 11객실이든지 관계없이 계속해서 쑤셔 들어갑니다. 정과 욕심은 다 죽었잖아. 그런데 아직도 네가 널 관리하고 있느냐, 이 바보야.
쑤시면 우리는 진노의 지식이고 저주의 자식임을 인정하면 되잖아요. 진노에서 무슨 믿음이 나오고 저주에서 무슨 믿음이 나오고 사탄의 마음에서 무슨 착함이 나옵니까? 안 나오면 안 되면 되잖아요. 말은 참 잘한다만. 안 나오는데 무슨 소망, 사랑이 나옵니까? 목사님, 가만있다가 지옥 가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천국 갈 자격이 안 돼요. 그래서 보내면 가면 되지 군소리하면 안 돼요.
그럼 아무것도 안 하면 어떻게 됩니까? 감사가 나올 뿐이죠. 아무것도 안 했는데 밥 할 수 있도록 고무장갑 마음을 주셔서 설거지 하게 하시고 아무것도 안 했는데 자식 사랑하는 마음 주셨고,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개 키우고, 고양이 키우고. 이게 주께서 계속해서 네가 한 게 아니다, 라고 때리면서 우리를 부리시는 거예요. 감사가 안 될 수가 없지요. 뭐든지 기대 안 하고 예상 안 하니까 감사 안 할 수 없어요. 감사를 빼앗는 것은 예상하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미흡함이 발생시키거든요. 너 정도 같으면 저 정도는 가져야지. 나의 불멸성 계속 고집 부리게 만들어요. 사탄의 마음이.
그러면 사탄의 마음을 없애야 되지 않습니까? 천만의 말씀. 사탄의 마음을 주께서 더 확실하게 더 노골적으로 이게 사탄의 마음이라고 갈 때까지 가게 만듭니다. 세리, 창녀, 강도, 가난 한 자, 절음발이, 소경, 이걸 한 그룹으로 봅시다. 문둥병 빠지면 안 돼. 저주받은 문둥병. 상대적으로 괜찮고 착하고 건강하다, 저주 없다는 사람이 있겠지요. 주님께서는 이들을 찾아갔지요. 12년 동안 하혈하는 병든 사람, 귀신 들린 자들을 찾아간다고요. 이들은 나는 괜찮지. 제자들이 그런 착각했어요. 저 사람은 날 때부터 자기 죄 때문에 소경 됐습니까, 부모 죄 때문에 소경 됐습니까? 이런 이야기.
주님은 어디 계십니까? 주님은 건강한 자에 있어요? 세리 이쪽에 있어요? 주님이 이쪽에 있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뭘 소망해야 돼요? 주님 계신 곳에 와야지요. 어떤 많은 죄를 지었으면 저렇게 집안이 폭삭 망하냐. 이렇게 저주할 게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의 비를 받기 위해서 이쪽으로 가도록 해야 된단 말이죠.
여기에 들어가려는데 바리새인이 막을 쳐놨어요. 윤리와 도덕이라는 차단막을 쳤어요. 주님은 바리새인한테 버림받고 윤리도덕, 자기 의의 차단막을 뚫고 이쪽 사람들, 세리, 창기를 건지게 위해서 이쪽으로 와버렸단 말이죠. 그러면 그 코스가 우리가 밟을 코스에요. 따라서 우리는 윤리도덕이란 그 막을 피로 구멍을 뚫고 관통을 해버려요. 어제 낮 설교에 약간 언급했어요. 윤리도덕을 통과하면 윤리도덕을 찢어버리면 법의 저주에서 벗어난 거죠. 왜냐하면 피 자체가 확정된 죄인이잖아요. 피 앞에서. 이미 확정적인데 거기에 윤리도덕을 첨가될 하등의 이유가 없지요.
지금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데 내 앞에 깃털 하나 얹어있습니다. 그러면 깃털이 무거워서 비행기가 내려앉습니까? 비행기는 나의 몸무게를 감당하고 뜨게 하죠. 깃털 하나 의미 없지요. 이미 우리는 죄인인데 주님께서 피로 말미암아 죄인을 주님과 함께 천국을 향해 창공을 날고 있죠. 그런데 묻어있는 윤리도덕 죄는 손가락으로 튕겨버리죠. 그것 때문에 피의 능력을 모독하거나 의심하거나 회의를 품거나 하면 안 되겠지요.
이미 확정된 죄인, 세리, 강도. 주님께서 네가 오늘밤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강도에게 이야기했다고요. 강도를 놀리면 안 돼요. 강도는 주와 함께 있습니다. 피와 함께 있어요. 피를 믿는다는 것은 윤리도덕을 뚫고 지나가는 중이에요. 그러면 피를 통해서 보게 되면 그동안 우리가 왜 예수님께 감사하지 못했느냐? 마귀가 준 윤리도덕 때문에 감사보다도 초조와 불안과 협박을 받고 있었어요. 마귀로부터 협박받고 있었어요. “너 그렇게 나쁜 짓해놓고 성한가 보자. 그렇게 못된 짓해놓고 네 장래가 잘 되는가 보자.” 계속해서 공갈 협박을 하는데 협박은 그냥 공갈이에요.
상주시에서 5킬로미터 가면 저수지가 있어요. 저주지 이름이 공갈지에요. 중국 빵에 공갈빵이 있어요. 뭔가 들어있는가 싶어보면 아무것도 안 들어있어요. 문경 가는 길에 공갈지가 있어요. 내가 열 번 넘게 갔어요. 공갈이란 힘도 없으면서 발목 잡는 거예요. 우리 옛 사고방식이 뭐냐 하면, 나의 자존심과 체면이잖아요. 나의 불멸성, 내 덩치를 유지하려는 그 옛 속성을 계속 발목을 잡고 옛날처럼 해라. 윤리도덕은 외부에서 오거든요.
“남들한테 욕 얻어먹으면 인간 아니잖아.” “원래부터 인간 아니야. 왜 이래. 살인하고 간음한 사람이야. 나, 다윗이야.” “너 죄 지으면 안 되잖아?” “원래부터 죄 지었어.” “하나님께서 너한테 제사와 번제를 드리라 했잖아.” “주께서 제사와 번제란 말은 했지만 주께선 번제도 원하지 않고 원하는 것은 상한 심령을 원하더라.” 뚫고 지나가는 겁니다. 그럴 때 갑자기 몸무게 70킬로가 0으로 줄어들어요. 그동안 얼마나 마음고생 했습니까?
자식 잘못되면, 내가 성경읽기를 두 장 읽던 걸 한 장으로 줄었더니만 이런 벌을 내리는구나. 자식 안 되는 것도 내 책임, 남편 안 되는 것도 내 책임. 천주교에서 하는 것 있잖아요. 내 탓이요, 내 탓이요. 원래 못 해야 당연한데. 자식이 안 되거든 원래 지 모습 찾아가고 있는 거예요. 건방 떨다가 자기 본모습 찾아가는 거예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난 거예요. 누구한테도 책임지지 말라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가는데 여기서 신나는 게 있어요. 주님께서 완성된 자기 백성을 윤리도덕을 뚫고 지나가게 되면 그동안 끈질기게 사탄이 윤리도덕으로 계속 따라붙습니다. 그 따라붙는 게 세밀함이에요. 이게 끝까지 따라붙어요. 아주 세밀하게 따라옵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누구와 식사할 때 특히 상견례 할 때 조신하게 했다.
상견례 마치고 난 뒤에 “내가 사돈 앞에 실례 되는 것 없었지, 잘했지?”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때 물수건으로 자주 닦지 않았는지 머릿속에서 세밀하게 구성이 되는 거예요. 헤어지면서 다음에 좋은 만남이 있기를 바랍니다. 분명히 인사하고 헤어졌는데 이제 보니까 저쪽에서 인사할 때 각도가 47.5도였는데 나는 건방지게 고개만 까닥 35도만 했는데 그걸 아내가 보고, “당신 평소 태도로 볼 때 그럴 줄 알았어.” 이게 잠을 이루지 못하는 거예요. 걱정이 돼서. 자기 딴에 윤리도덕으로 피했는데 이놈의 마귀가 얼마나 지독한지 계속해서 더 세말하게, 세밀하게 시비 거는 거예요.
끝까지 네가 벌 받을 이유 있다고 찾아오는데 그때 대체 방법은 뭐냐? 도대체 나는 왜 두려워하는가? 이 문제입니다. 이게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이유도 없이 두려워해요. 이 두려움이 어디서 오느냐는 겁니다. 사탄조차도 주님의 종입니다. 주님에 대한 고귀함과 감사가 온전히 안 나오니까 주님께서 발동기를 더 돌린 거예요.
더 두렵고 무섭고 공포에 시달리게 만들어서 그런 상황에서 또 다시 십자가를 바라볼 때 십자가는 전보다 더 환하고 박하사탕보다 더 시원하게, 무릎에 멍들 정도로 치면서 “바보야, 내가 또 속았구나. 다 이뤘다는 걸 또 속았구나.” 하고 전보다 십자가가 크게 다가오도록 주께서 그렇게 유도하고 인도하신 겁니다. 사탄마저 배후의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공로를, 정과 욕심을 없애란 말이 아니고 이미 죽었다는 거예요. 죽은 유령 붙들고 살지 말고 이미 죽었단 사실이란 말이죠.
죽여야 된다. 자꾸 마귀는 네가 알아서 죽여야 돼. 십자가를 네가 믿어야 돼. 바라봐야 돼. 죽어 없는 자아를 다시 끄집어내서라도 내 쪽에서 또 내가 뭘 따로 실시하도록 하면 우리를 쫓기고 또 쫓기고 불안하고 제대로 했나? 십자가를 제대로 믿나? 제대로 하나님 앞에 감사했나? 감사가 모자라는구나. 감사를 채우려면 어떻게 하지? 계속해서 자기에게 기대를 걸게 하는 거예요. 믿음이란 그냥 가만히 있으란 거예요. 가만히 있고 주님께서 벌이는 요리나, 자기 인생을 실컷 맛보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의존교회 강의에서 제가 마지막에 이런 이야기했는데 마지막으로 “인생은 농담처럼, 그리고 남의 일처럼 사세요.” 왜냐하면 내 일이 없기 때문에. 몸이 아픈 게 문젠데 인생이란 전혀 심각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심각하게 만드는 게 마귀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다 부수고 진노 참 잘하셨습니다. 지금도 하고 계신 것을 감사합니다. 진노 앞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저희들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