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13:11-13 사랑과 평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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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
‘끝’이란 긴장되는 동시에 조금 그 시점을 지나가면 곧장 시시해져버릴 내용들입니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끝’을 조성해냅니다.
마치 인간은 평생 멈추지 않는 게임만 연속적으로 지나고 있습니다. 과연 더 이상 나의 의지로는 움직여지지 않아 보이는 저 ‘나의 시신’ 너머에 우리 자신들은 무엇을 또 고대해야 하나요?
주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이십니다. 살아 있을 때, 죽을 때나 예수님 앞에서는 한결같은 기준을 동원시키십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에게는 ‘시작’만 있다는 사실입니다.
‘끝’이 허락되지 않는 존재가 된 이유가 바로 예수님에게는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즉 내 인생을 내가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다른 분이 우리 자신들의 인생을 결정짓고 판단하고 평가내리십니다. 우리 인간들의 평가의 대상일 뿐입니다. 이 평가의 대상에 대해서 우리가 관여할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자신을 우리가 조성해온 대상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13절) 즉 하나님이 조성해놓은 대로 있게 될 것이다 는 겁니다. 그것도 ‘영원토록’ 말입니다.
믿음 있는 성도는 사도의 이런 발언을 이해합니다. 도저히 사람의 입에는 저토록 확정적인 발언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
뭔가 알기에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할 수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과 평강’입니다. 우리 인간들이 고대하는 사랑과 평강이 아닙니다.
원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바로 ‘사랑과 평강’입니다. 하나님의 속성이기도 합니다. 이 속성으로 새로운 세계가 둘러쳐집니다. 단순한 문안이나 안부가 아닙니다.
하나님 계획의 선포요 선언입니다. 모든 인간존재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관여당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성도는 이런 형편에 대해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사랑과 평강
2017년 12월 3일
본문 말씀: 고린도후서 13:11-13
(13:11)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13:12) 모든 성도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
특수한 개인의 특수한 경험은 타인에게 강요하기 곤란합니다. 왜냐하면 다른 이들도 모두 자신을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그런 의미에 가장 특별한 존재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남들이 생각에 대해서 참조는 하겠지만 일치된다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도 보편적으로 동일한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게 바로 ‘죽음’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각자의 삶을 살았지만 늙게 되면 차별없이 모두 ‘죽음’이라는 힘에 눌리게 됩니다. 이 보편성에서 거꾸로 자신의 특수함을 따지게 되면 살아 생전에 ‘혼자’가 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은 그런 특수성과 다른 특수성을 보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제’가 바로 그 자리에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이 아무리 훌륭하게 생애를 보냈다고 해도 거기서 ‘하나님의 사랑’이나 ‘성령’이 나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이 지닌 보편성을 인정해야 합니다. 이는 곧 자신의 특수성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개별적 특수성만 진정 특수함이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의 특별남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데서 세상 일반인들과 확연하게 차이납니다. 그리고 성령님은 다시 살아나심의 결과로 활동하게 됩니다. 바로 이 복음의 영향권으로 인해 사도 바울은 다른 사람이 듣기에 이상한 고백을 늘어놓습니다. 고린도후서 4:10-11에 보면,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자신은 ‘이미 죽은 자’라는 겁니다.
자신의 활동은 죽고 난 뒤의 활동이 아니라 ‘진짜 죽음덩어리’ 그 자체의 활동이라는 겁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숨끊어지는 것으로 여깁니다. 참으로 그럴 것같으면 성경을 들척거릴 필요가 없습니다. 괴로울 때 번개탄 피어놓고 자살하면 제일 속 편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의 죽음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사단의 죽음’을 말합니다.
사단의 죽음을 ‘두 번째 죽음’이라고 합니다.(계 21:8) 즉 사단은 사라지지 않고 영원한 저주를 받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서 ‘축복’ 뿐만 아니라 ‘저주’를 같이 언급하시므로서, 결코 인간 위주의 축복이란 아예 성경에서는 없음을 분명히 하십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특수하게 사랑하는 분이 오직 예수님 뿐임을 분명히 하기 위한 증거입니다.
따라서 축복과 저주도 인간 위주가 아니라 예수님의 아들됨을 알리기 위해 동원한 환경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의해서 부름을 받음으로 그 최후의 죽음에 미리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이미 죽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생명을 전파하는 기능을 발휘하면서 살아 있는 겁니다.
모든 성도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저주를 퍼붓는 겁니까?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3:13-16에 보면, “우리는 모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장차 없어질 것의 결국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려고 수건을 그 얼굴에 쓴 것 같이 아니하노라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 세상은 더럽고 추해서 자신이 어느 정도 더러운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점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오면서 산 밑의 백성들과 대비하면서 밝혀집니다. 모세 얼굴에게 비취는 영광을 사람들이 마주 대하지 못할 지경에서 모세는 수건으로 얼굴을 덮습니다.
이제 이 수건을 쓴 모세가 예수님에 의해서 이 세상에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리 이야기해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무슨 말씀인지 못알아 듣습니다. 심지어 제자들조차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자신들이 어느 정도 죄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5:22에 보면,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아니하였더라면 죄가 없었으려니와 지금은 그 죄를 핑계할 수 없느니라”(요 15:22)고 되어 있습니다.
즉 인간들이 나름대로 죄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인식에서 나온 죄입니다. 윤리와 도덕적 안목에서 나온 죄입니다. 이 도덕적 안목의 죄가 바로 배후에 사단이 조종하고 있는 겁니다. 자신들이 죄를 알기에 그 죄에 대해서 해결책을 찾고자 예수님을 믿겠다는 바로 그것이 곧 사단이 원하는 바입니다.
참다운 죄는 인간이 스스로 자기 문제를 해결해야 될 대상자라고 여기는 겁니다. 즉 이미 죽은 존재가 새삼 안 죽으려고 발바둥치는 것이 궁극적으로 죄가 됩니다. 구약에서 죄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겁니다. 속죄란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기 제단을 정결케하시는 바로 그 작업의 일환으로 주어지는 겁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 자리의 거룩이 우선이지 결코 인간 구원이 우선이 아닙니다. 그 거룩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이는 저주 안에다 생명나무를 새롭 심는 작업입니다. 즉 저주를 거두어서 그 속에서 하나님의 의를 발생시키는 작업입니다. 이는 저주받은 자가 곧 아버지로부터 사랑을 받은 축복받은 자의 등장으로 성사됩니다.
이 과정을 성령을 통해서 성도에게 주어지는데 성도에게 주어지는 사랑은 편파적인 사랑입니다. 사랑할 자만이 사랑하시는 일방적 사랑입니다. 이 사랑으로 인하여 그 어떤 사랑에 대해서도 하나님께서 질투하십니다. 이 편애적 사랑이 결과로 성도는 자신을 미워하게 됩니다.
이처럼 자기 미움의 장이 복음의 영향력으로 발산될 때, 바로 그것이 성령에 의한 교제입니다. 이를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란, 죄의 풍부를 의미합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입니다.(롬 5:20) 성령의 교제는 모든 인간적인 협력과 소통을 부숩니다. 왜냐하면 소통할 대상자는 인간들의 손에 맡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교회를 파괴시켜 나갑니다.
교회가 없어지므로서 비로소 교회가 그 현장에 작용했음을 보이게 됩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오직 주님에게만 매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