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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립된 체계 (삼상 8장 10-19 절) 대전- 31강
이근호
2017년 10월 31일 본문말씀: 사무엘 상 8:10-19
(삼상 8:10)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삼상 8:11)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삼상 8:12)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삼상 8:13)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삼상 8:14)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5)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삼상 8:16)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삼상 8:17)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 (삼상 8:18) 그 날에 너희는 너희가 택한 왕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되 그 날에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응답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니 (삼상 8:19) 백성이 사무엘의 말 듣기를 거절하여 이르되 아니로소이다 우리도 우리 왕이 있어야 하리니
사무엘 상 8장 10절부터 11절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고 되어 있지요. 왕의 제도 이 대목에서 진도가 잘 안 나가고 있지요. 그 이유가 있습니다. 원래 인간 세계에서는 인간들이 처음부터 왕국이 있다고 인간들의 나라들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성경에서는 창세 전부터 오직 하나의 나라를 하나님께서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신약에 와서 나타난 것이 하나님의 나라이지요. 하나님 나라가 뭐로 구성되느냐 하면 사건으로 만들어 져요. 그냥 하나님 나라가 있다가 아니라 있음으로 사건으로 내용이 채워져야 되는데 그 사건이 어떤 사건이냐 하면
하나님 나라 (십자가 사건) ⇑ 죽음(저주) ⟶ 생명 없음 ⟶ 있음
<인간이 천국가는 방식> 살아있다 ⟶ 천국 있음 ⟶ 있음
죽음에서 생명으로 또는 없음에서 있음으로 두 가지 요소가 하나님 나라의 내용으로 채워져야 되는데 그 내용은 바로 사건을 통해서 채워지게 되어 있어요. 인간들이 생각하는 것은 죽음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여기 살아 있다에서 출발해서 가는 곳을 천국 또는 하나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인간들의 생각으로 내가 살아있듯 하나님도 살아 있을 것이다. 그렇게 가는 곳이 하늘나라이고 없음에서 있음이 아니고 있음에서 있음으로 가는 나라를 사람들은 천국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것이 천국이 아니고 이것은 허망한 것이고 악마가 배후에서 인간들을 현혹시키기 위해서 만든 것이고 진짜 천국은 살아있는 것이 어디로 가야 하냐하면 죽음으로 가야하고 죽으면 뭐도 같이 날라가냐 하면 살아있는 내가 나중에 천국 간다. 이런 천국도 죽음 안에서 소멸되고 깨져야 되고 소실되야 되요. 사람들은 살아있는 내가 누구를 믿느냐 하면 예수를 믿고 천국 간다고 생각하는 거에요. 예수 믿는 자가 누구지요? 내가 예수를 믿는 거지요. 이것을 하나님은 없애 버리는 겁니다. 그런 예수가 내가 예수 믿는 것을 후원해주고 호응해주는 예수이기 때문에 이건 가짜 예수가 되요.
가짜 예수여서 그 자리에 부처를 넣어도 괜찮고 온갖 신이나 메시야를 다 집어넣어도 중요한 것은 부처나 예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누가 중요하냐 하면 내가 여기 계속 살고 싶다가 내가 원하고 있는 욕망에 의한 천국은 살아있는 한 계속 있지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살아있는 있는 것을 죽여야 하는데 죽일 때는 이유가 있어야 해요. 그것은 죄로 인해 죽여 버리십니다. 내가 살아 있다라고 할 때 그냥 살아있는 것이 아니고 조인으로서 살아있기 때문에 죄 값은 저주이다라고 해서 주님께선 저주 받는 죽음에 집어넣는 거지요. 이 저주의 죽음을 아까 사건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살아 있는 인간이 천국에 가고 싶다라든지 하나님을 만나고 싶다라고 할 때에 살아있는 인간이 천국에 가는 방식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 했는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풀어서 천국 간다 이 방법은 유대인들이 그렇게 생각했어요. 유대인들은 기적을 원해요. 또 한 가지는 사람에겐 이성이 있으니까 연구를 많이하고 똑똑해야 되고 지식을 많이 확보하는 양에 따라서 천국이 뚜렷해지거나 그렇지 않다 둘 중 하나에요. 인간은 지식과 지혜로 성인들의 불경 뿐만 아니라 성경까지 섭렵해서 많이 아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확률이 높아진다고 여기는 이방인들이에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점은 유대인들은 옛날 조상 때부터 하나님을 만날 땐 기적으로 만났습니다. 홍해가 갈라져서 통과 했지요, 시내산에 자기 민족만 가서 모세가 단독으로 면회 가서 십계명이라는 돌판을 받았고 그것도 기적인 것이 하나님이 직접 쓰신 돌판을 받았고 언약궤 중심으로 요단강 건넌 것도 기적이고 성전 만든 것도 기적이고 여리고 성 무너진 것도 기적이고 여호수아를 보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전쟁 시에 모든 성들을 섬멸 할 때도 기적이고 그 때는 변변한 칼이나 무기도 없고 사사기까지 그 때는 이스라엘 백성은 철을 다루는 대장간이 없어 블레셋에서 농기구를 수입했어요.
따라서 아무런 무기가 없는데 누가 도와줬나하면 대 자연이 도와줘서 승리했습니다. 우박이나 태양이 멈춘다든지 물론 약간의 농기구는 있었겠지만 어쨌든 대 자연이 도와줘서 가나안 땅에 입성할 때 그렇게 점령했거든요. 그러면 대 자연이 누구의 말을 듣느냐하면 하나님의 말을 듣지요. 하나님께선 이쪽 이스라엘에게는 언약을 주었고 자연에겐 언약대로 도와주라고 지시를 하셨고 언약이라는 말은 사전에 그 땅을 너희가 들어갈 땅이야라고 약속을 하신 거에요. 하나님이 스스로 자기에게 약속을 한 것입니다. 그 땅에 필히 너희를 들어가게 하리라고 약속을 했습니다. 약속을 믿은 사람이 두 사람이 있었지요. 여호수아와 갈렙. 그래서 여호수아가 앞장서서 간 거에요.
언약이라는 것은 항상 이것을 생각하면 되요. 상자라고 생각하면 되요. 당기는 상자. 아이들이 노는 썰매 있잖아요. 썰매 위에 애를 태우고 끌면 미끄러지겠지요. 밑에 까는 것, 이게 바로 언약입니다. 그래서 구원 받는 것은 언약이 가는 그대로만 가면 천국입니다. 옛 언약과 새 언약이라 하지요. 구약과 신약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이 마지막에 깔아 놓은 썰매가 뭐냐하면 내 피와 내 살이에요. 그런데 살이라는 것은 피를 흘리기 위한 용도이니까 싹 빼버리면 예수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이 됩니다. 예수님의 피가 깔려 버립니다. 그 위에 있는 인간의 종교적 행함은 의미가 없는 거지요.
제가 지난 설교에서 거울 앞에선 아무런 인간의 재롱에 같이 춤추지 않습니다. 거울은 그냥 본인이 비추고 싶은 대로 되비출 뿐이지 거울 쪽에서 말을 한다든지 하는 것은 백설공주에서나 나오는 이야기지 그냥 밋밋하지요. 하나님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재롱이라든지 헌금이나 전도나 봉사 그런 것은 무의미 합니다. 하나님은 언약보고 구원 하시지 우리의 재롱 잔치나 교회에서 벌이는 전도 잔치보고 구원하지 않습니다. 이 방법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의 방법을 고수 하지 때문에 그래요. 어린 양의 피를 보고 넘어 가지 그 안의 가족들을 보고 넘어 가지 않습니다. 인간성이 좋다거나 좀 배웠다고 고려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신앙생활 몇 년 했는가. 교회에 나온 지 일주일 됐는가 15주 됐는가를 묻지 않습니다. 항상 언약의 썰매처럼 실린 데로 가면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썰매가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고 썰매가 이 세상에 와서 빠져 나가는 방식을 사용해요. 이것을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하고 이게 곧 썰매처럼 되는 거지요. 그러면 성도의 특징이뭐냐하면 내가 믿는 사람이 성도가 아니고 주님이 그 안에 성령으로 오셔서 예수님의 공생애에 대한 면면을 성도의 몸을 통해서 되비춰 주는 것. 이게 성도입니다. 예수님이 공생애 했던 코스를 성도의 삶을 통해서 비춰주게 되어 있어요. 그럼 이건 행함이 아닙니까? 하는 데 행함이 아니지요.
이것은 일방적으로 뽑아내는 거지요. 우리는 수면 내시경하고 있는 것 같아요. 의사가 입 벌리고 온갖 거 다 검사하고 끝나고 나면 멍하니 회복실에 가서 눈 뜨지요. 그렇게 편하게 인생 살면 좋겠는데 편하게 못 사는 이유가 믿음이 없어서 그래요. 믿음이 없다는 말은 우리 나름대로 고집이 있다는 거에요. 고집이 있어서 내 인생을 내 쪽으로 억지를 부리는 겁니다. 주님의 story 스토리를 주일날은 서사라고 했는데 주님의 이야기가 나와야 될 몸을 가지고 우리는 나의 이야기, 우리 집안 이야기, 내 잘남의 이야기가 계속해서 억지 부리는 겁니다. 사도행전의 구조가 뭐냐하면 처음에 베드로 나오지요. 다음에 사도 바울 이야기 나오고,
처음에 야고보 이야기, 베드로, 사도 바울 이야기가 사도행전에 1부, 2부, 3부로 끝나 버리는데 1부, 2부, 3부에 해당되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어요.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여 주지요. 성령께서 그렇게 하시지요. 야고보도 복음 전하다 죽었지요. 스데반 집사도 복음 전하다 죽었지요. 이게 바로 예수님의 공생애가 아닙니까? 이 죄 많은 세상을 우해 버림받은 그런 이야기를 야고보나 베드로와 사도 바울에게 줍니다. 특히 베드로나 야고보 사도 바울에게는 그 당시에 예수님을 죽였던 정치적 세력이 강력하게 학대를 하지요. 그 학대하는 이유가 딱 하나 밖에 없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죽었다가 살 수 있느냐 그 문제입니다. 그 이유로 학대를 하는 거에요.
오늘 날 대한민국에선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해도 대전 경찰서에서 조사 안 하지요. 물론 북한에선 문제겠지만 아무 문제없지요. 복음을 안 전해서 그래요. 교회에서 딴 소릴 해서 그래요. 교회에서 하는 이야기나 세상의 마귀가 하는 이야기가 똑같기 때문에 그냥 터치 할 필요 없어요.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은 살기 위해 하는 모든 것은 다 거짓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 뭔가 하는 것은 해봤자 비 현실적인 행동을 보여주는 겁니다. 그리고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말은 한 마디로 죽자는 이야기에요. 죽어야 산다는 겁니다. 이것을 주일 낮에는 자기를 미워해야 한다고 표현 했어요.
모든 문제는 자기를 미워하지 않아서 생기는 겁니다. 자기를 미워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기의 결정과 자기의 선택을 미워하지 않았다는 거에요. 오죽 하면 제가 심수봉의 노래까지 거론하지 않았겠습니까? 남자의 작별이 미워요. 남자의 약속이 미워요. 남자의 눈물이 미워요하고 나오잖아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하지 못해요. 대표적인 것이 자식이고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복음을 방해하고 있는 겁니다. 모든 인간은 죽는 것이 자연스러운데 오히려 우리는 사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마귀로부터 계속 세뇌당하고 있던 겁니다. 교회 와서 비는 것도 죽으려고 비는 것이 아니고 전부 살려고 비는 거지요.
기도 제목을 내 자식이 스데반 집사처럼 죽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를 들러본 적이 없는데 다른 분들은 들어 보신 적 있습니까? 스데반 집사처럼 죽어도 곱게 죽지 말고 돌에 맞아 죽게 하옵소서! 그것도 백주 대낮에 차에서 머리 받혀 김주혁처럼 죽게 하옵소서! 그런 기도는 안하지요? 일찍 죽게 해달라는 그런 기도 안했잖아요. 김무생은 자기 아들을 위해 어떻게 기도 했는지는 모르지만 사람들은 죽는 것을 불행이라고 여깁니다. 불행이라 여기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처벌하는데 있어 인간이 가장 싫어하는 방식으로 처벌해요. 예수님을 곱게 안 죽입니다. 수치스럽게 옷도 다 벗기고 보란 듯이 우리에게 까불면 이렇게 당한다는 것을,
무섭지! 무섭지! 그러니까 말조심하고 우리한테 복종하란 말이야! 라는 식으로 죽여 버린 것이 십자가 사건이에요. 그런데 성도는 뭐로 기뻐하냐 하면 십자가를 기뻐해요. 이것은 뭐를 포기 했다는 거냐 하면 기적적으로 구원되기를 포기하고 내가 원하는 기적, 내가 기대하고 있는, 내가 기도해서 응답을 기다리는 놀라운 행운을 포기했다는 말이고 신학 공부하고 성경 공부 많이 해서 구원 받겠다는 것을 포기하는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십자가의 구원의 능력이다. 기적을 포기하고 지혜를 포기하란 말이죠. 기적과 지혜는 내가 살게 만들어요. 살아 있는 나를 더욱더 살게 만들지만 십자가 사건은 살았다고 하는 내가 실상은 죽은 자라는 것을
예수님의 안목에서 확인시켜 주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나는 죽었고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 있느니라 했고 달리 말하면 주께서 나를 날마다 죽이시는 이유는 내 안에서 그리스도의 생명이 날마다 튀어 나오게 하기 위함이라. 밥을 먹고 설걷이 할 때 엄마! 또 설걷이 하네! 하면 네 눈에는 지금 엄마가 설걷이 하는 것처럼 보이냐? 주님이 설걷이 한다. 이게 무슨 말도 안되는 황당무개한 이야기이냐는 식으로 되지요. 내가 바이올린 켜는 것처럼 보이냐? 주님이 바이올린 켠다. 주님의 지체가 현장에서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에요.
그러면 제가 이렇게 정답을 말씀드렸습니다만은 막상 주님의 뜻으로 성도가 설걷이 할 때는 예수 믿은 내가 설걷이를 해버려요. 본인이 예수를 안 믿어요. 구원은 받았는데 본인이 믿음이 없는 거에요. 믿음 없는 체로 그것을 불신앙이라고 하는데 믿음 없는 체로 구원을 받아요. 믿는 다는 것은 거짓말이에요. 내가 주님을 안 믿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겁니다. 왜냐하면 절대로 주님의 구원에 내 믿음이 들어가지 않도록 삭제 시킵니다. 왜? 내 믿음이 들어가면 내가 선행해서 내가 살아있어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도행전 8장에서 진도를 자꾸 못 나가는 이유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는 것은 이미 계획이 잡혀 있는 것이고요
다만 이 계획에 환경과 무대 제공으로 이 세상이 있는 겁니다. 따라서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가 우선이고 그 다음에 우리가 태어나서 보는 산과 강 들판이나 건물과 나라와 민족은 하나의 보이지 않는 나라를 위해서 저주 받은 죽음과 없음에서 있음의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무대 장치 (미장센)라고 하는데 연극 무대에서처럼 하는 장치를 하는 거에요. 셑트를 만든 거에요. 무대 장치를 만든 겁니다. 여기에 등장하는 배우들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이스라엘이 배우로 할 역할이 뭐냐하면 하나님께 멸망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율법 지킨다고 하다가 내 속에 있는 죄가 율법을 만나고 율법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사람만 지킬 수 있는데 하나님이 누군지도 모르면서 율법을 주시니까 자기 안에 내장된 숨겨진 원리대로 믿는다고 하다가 멸망당하는 역할이 이스라엘입니다. 그 원리를 규범이라고 하고 ‘독자적 규범 체제’를 따로 갖춘 거에요. 규범이라고 하는 것은 법의 체제이지요. 오늘 본문에서 왕을 세운다는 말은 王 자체가 주변에 뭐를 제공하냐 하면 법과 규범을 제공하는 겁니다. 그리고 이 백성들은 법과 규범을 따라서 자신의 미래와 운명을 전부 일임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날아가 버리냐 하면 사랑을 숫자로 표현하면 (사랑 =2)거든요. 보통 사람들은 혼자 경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잘못이에요.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은 혼자 도 닦아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원에 가서 되는 게 아니고 사랑은 상대가 있어야 되요. 혼자서는 안 되고 둘이 있어야 되요. 두 명 사이의 관계를 사랑이라고 합니다. 지난 오후 예배에 그런 이야기를 했잖아요. 내 조건을 따져 하는 것은 2가 아니고 1이 되어 버려요. 상대방을 내 의지대로 함몰 시키니까 2가 아니고 1이 되는 겁니다. 보통 사랑으로 결혼한다고들 하는데 전에 광주 주례 할 때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그건 사랑이 아니라 본인의 열정이다라고 했는데 진짜 사랑은 열정이 식어야 되요. 열정이 식는다고 바로 사랑이 되지 않고 존경으로 바뀌어야 됩니다. 1에서 1을 부숴 버리고 1을 나누어서 2가 되야 돼요. 1은 독재입니다. 전제주의라고 하지요.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상대가 나를 위해 존재해야 되요. 말이 상대이지 2가 아니고 결국 1로 귀환되거든요. 1로 환원되어 버리거든요. 예수를 사랑한다? 거짓말입니다. 나로부터 출발해서 나로 끝나서 2가 안되요. 그래서 인간은 2가 안되요. 가끔은 되요. 지난 오후 예배 때 뭐라 했냐 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갑자기 내 조건과 관계없이 낯설게 다가 왔을 때, 그것을 반했다라고 했거든요.
낯설게 다가오려면 내가 먼저 이런 여자를 좋아한다고 하다가 갑자기 등장하는데 헉! 이론 순간 우리는 그 사람 앞에 내가 모든 게 파괴되는 겁니다. 내 조건이 함몰되는 거에요. 아직도 그런 사람 기다리는지 모르지만 저럴 수가! 그것을 김수희라는 가수가 잘 이야기했어요. 그대 앞에만 서면 왜 작아지는가~ 지금 존경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대 앞에만 서면 내가 작아진다는 거에요. 그대 뒤에 서면 안 보이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 거에요. 그대 앞에만 서면 자진해서 작아지고 싶어! 내가 그 사람 앞에 추잡하고 거추장스럽고 꼴사납고 그대만 존재한다면 나는 죽어도 좋아!
애만 있으면 엄마는 몸매가 좀 뚱뚱해도 괜찮고 애만 잘된다면 스타일이 망가져도 상관없다고 애가 2살 때까지는 그런 착각들을 하지요. 애가 3살만 되도 요가하고 정신없어요. 펑퍼짐하게 애 잘 때 같이 자고 애가 남긴 것까지 다 먹어 그렇게 되는데 뱃살은 다 트고 어떻게 보상 될지. 그렇게 저는 사랑이라하지 않고 존경이라 하는데 나보다 우선되는 겁니다. 그런데 존경이 오래 안 가요. 이 땅에서의 시간이라는 것이 인간은 본색을 드러내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짧게 존경이 되지만 그 다음 부터는 내가 그 만큼 존경해 줬으면 저쪽에서도 존중해줘야 하는데 한번 존경했었다고 나를 우습게보고 종 부리듯 부릴 때.
뭔가 손해 본 듯한 주고받은 게 있어야 하는데 존경했는데 입 싹 씻고 그 다음부터 함부로 대하는 거에요. 예를 들어 나는 상대방이 기분 좋으라고 칭찬을 해 줬는데 자기가 잘나서 칭찬한 줄 알고 당연히 생각하고 칭찬이 열 개가 갔으면 적어도 두 개는 와야 되는데 30분 동안 칭찬해도 한 개도 안오고 당신은 왜 칭찬안하나? 하면 “나는 경상도 사람이다!”경상도인 게 자랑도 아니고 “꼭 말로 해야 되나?”말로 듣고 싶은데 안 해줘요. 이러한 정량적인 양적으로 저울을 달아서 재보는 균형이 안 맞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랑이 아닌)열정에서 존경으로 끝납니다.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존경에서 사랑이 되려면 예수님을 존경했던 사람들이 그 중에서 12제자 중 가롯 유다입니다. 얼마나 존경했으면 스승을 팔아먹은 나 자신이 미워서 자살 했잖아요. 그런데 그것을 사단이 그렇게 하게 했다는 거에요. 예수님 당시에 가장 의로웠던 사람들이 누굽니까? 바리새인 이지요. 그럼 바리새인이 사단입니다. 이제 사단의 특징을 아셨지요? 사람들이 사단을 잘 모르는 것 같은데 교회에 가면 다 있습니다. 다 모여 있어요. 당회장 사단부터 장로 사단, 봉사 많이 하는 사단 새끼들이 우르르 다 모여 있습니다. 왜냐하면 독자적 규범 체제이거든요. 어떠한 법이 있어요.
이 법은 눈에 보이는 왕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당회장 이지요.) 반드시 행함으로 실천해야 될 규범이에요. 이 규범이, 만약에 교회에서 법을 만들어 놨는데 교회법에 십일조를 해야 된다고 할 때 서리 집사에서 장립 받으려면 (십일조를 해야 된다는)법을 세워놨는데 만약에 그 법을 안 지켜버리면 전통적인 독자적 규범 체제가 와해되어 버려요. “저 사람은 십일조 안 해도 장립 집사 됐는데 나만 손해 보는 것 아닙니까?” 이렇게 되어버린다니까요. 인간의 행함은 반드시 버리는 게 아니라 그 실적에 자기 자신을 거기에 담아 버려요. 십일조를 하게 되면‘내가’한 것이 반드시 붙어 버린다는 거에요.
그래서 법이 있고 왕이 있을 때 왕은 내가 뽑은 왕이 되는 겁니다. 왕과 백성들 사이에 서로가 서로에게 2가 아니고 1의 관계에요. 왕은 왕대로 1이고 백성은 백성들대로 1이에요. 갈등이 생기게 되겠죠. 8장 10절부터 17절의 십일조 해야 하는 데 까지 쭉 나오는 데요 왕의 제도가 뭐냐하면 결론부터 이야기하게 되면 그 제도는 2가 될 수 없고 1이 된다는 주님의 취지입니다.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 부장을 삼을 것이며”너희의 아들로 즉 1인자(왕)의 부하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그것을 누구 좋으라고 만들게 하냐 하면 1인자를 만족케 하려 했지요.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왜 줍니까? 봉급주기 위해서지요.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그런데 오늘날 목사에게 주지 않지 안습니까? 목사에게 주는 게 아니고 교회에게 주지요. 그것은 교회가 1로 만든 이상적 규범 체제이니 때문에 그래요. 체제라는 것은 결국 평소에 내가 생각했던 하나님의 나라를 말하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하늘나라가보고 싶은 거에요. 보이지 않는 추상적인 관념적인 하늘나라는 싫어요.
그러면 내가 십일조를 했는데 십일조를 한 교회가 커지더라 하면 어떻게 이야기하느냐 하나님께서 팍팍 기적으로 내가 다니는 교회를 키워주게 되면 누구라도 비난 못할 하나님 자체로 보는 겁니다. 그래서 목사들은 그것을 알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말을 써요. 확장이라는 말은 뭐냐하면 폐쇄 공간 또는 독자적으로 격리된 공간을 따로 만들어서 그것을 격리됐으니 폐쇄 됐을 게 아닙니까? 여기에서 여기까지 경계선을 쳤으니까 이것을 그들은 눈에 보고 싶은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는 겁니다. 그 당시에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로 보는 겁니다. 우리나라도 왕이 있다!
만약에 누가 어떤 교회에 와서 십일조를 했는데 그 다음 주부터 십일조를 하던 교인이 다른 교회를 갔다고 하면 좋아라 합니까? 하늘나라 확장하라고? 안 좋아 하지요? 어~어! 집사님~ 집사님 하지만 사실은 어~어! 돈~ 돈하고 따라가 붙잡거든요. 왜 그렇게 그 사람을 붙들려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자기의 공간, 폐쇄된 공간과 격리된 공간을 절대화 시키려 하기 때문이죠. 자기가 그 교회에 당회장이잖아요. 그러면 자기는 눈에 보이는 주의 사가가 돼 버리는 겁니다. 살아 있는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을 대리하는 대리자 노릇을 할 수 있는 거에요. 이런 집단적 공간의 대표적인 모델이 이천 년 동안이나 이어졌던 천주교입니다. 교황이 있잖아요.
사람들은 교황이 있다는 것이 심리적 안정감을 줘서 천주교에 등록합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면 너무 추상적이라 모호해요. 하늘나라도 우리가 믿도록 해 줬을 것이고 눈에 보이는 어떤 규범이 있을 것이고 보이는 법적 체제가 있을 것이고 그것이 격리된 공간된 체제를 구성하게 돼서 여기에 등록하면 하늘나라 직행이다. 여행사처럼 이런 간판 걸고 하는 겁니다. 교회라는 것도 그렇고 그러면 이언 폐쇄된 눈에 보이는 공간을 인간은 누구나 선호하거든요. 여기에서 우리가 자유로울 수 있어요. 아니라 할 수 있어요? 못하지요. 못하기 때문에 주님께선 성도로 하여금 자기 나름대로의 우리끼리는 성도다, 진짜 성도끼리 모였으니까 진짜 하늘나라라고 할 수 있는 은근히 기대하는데 그것을 파괴시켜 버립니다.
이게 고마운 거에요. 파괴시킨다는 말은 내가 사랑했던 내 교회가 파괴되는 거에요. 이것은 자기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겁니다. 자기 자신의 선택과 결정을 주께서 없애버리는 겁니다. 내가 헌금하고 봉사했던 교회가 산산조각 났을 때 비로소 교회에 가리워졌던 내가 진작 추구해야 했던 십자가 사건이 다시 한 번 우리 속에 반복되지요. 사도행전에서 야고보, 베드로, 요한이 소속 되었던 교회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이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버리면 두 번 째, 세 번째. 네 번째 교회들이 등장해 버려요. 일곱 교회 등장 하듯이 그런데 주께선 오직 하나의 교회, 하나의 하늘나라만 필요하신 겁니다.
예수님의 나라뿐이고 예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야지 그들은 교회 유지하려고 지키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그러면 목회자나 감독과 장로는 왜 세웠는가? 목회자는 바로 이러한 교회가 하늘나라가 아니라는 것을 전하기 위해 세운 거에요. 여러분들이 기대하는 이 교회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이 교회에 와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봐야 됩니다. 그래서 고린도 교회는 모일 때 마다 뭐를 하냐 하면 이미 지나간 사건이라고 여겼던 떡을 떼는 사건, 예수님 잡히시던 그 날 밤에 일어났던 사건을 재현 해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공생을 시작하려고 세례 요한에게 받던 그 물 세례도 했어요.
그런데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나는 두 사람 외에는 세례를 준 적이 없다. 그리고 성만찬도 결국 말씀이 완성되고 난 뒤에는 그것도 의미가 없는 거에요. 왜냐하면 성만찬 자체에서 예수님의 사건이 이제는 성경 완성에 사도 이후에는 성경 자체 말씀이 스스로 운동력이 있어서 스스로 사건을 만들어 내는 겁니다. 그러면 한 번 정리해 봅시다. 인간은 하나님과 자기의 이해관계를 자기중심의 1의 관계로 만드는 작업에 격리된 공간을 찾는데 주님께선 사건을 통해서 파괴시켜 버리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오늘 강의가 어떤 의미에서 어려운데 왜 어려우냐 하면 우리 같으면 아예 격리된 공간도 허락 안하고 파괴도 안 시키면 되는데 허락해놓고 파괴시켜 버리십니다.
그건 왜냐하면 아까 했듯이 인간을 그냥 없애는 것이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인간을 죽일 때 죄가 있는 곳에 하나님의 의도 함께 있기 때문에 죄와 의라는 언약을 드러내기 위해서 인간으로 하여금 원하는 데로 해주고 그것을 파괴시키는 순간순간 주님의 십자가가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지난 낮 설교에서 제가 그런 설교를 했거든요. 성도라는 것은 그 자체가 온전하지 않아요. 육에서 영으로 다시 영에서 육으로 순환되는 겁니다. 예로 사도 바울의 육신의 가시라고 하는 데 삼층천을 봤을 때 신났지요. 나는 인간의 언어로 말할 수 없다. 그 세계에 너누 놀라서 내가 몸 밖에 있는 지 몸 안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자아를 초월했었던 하나님의 기적이 갑자기 육체의 가시가 와 버린 거에요. 가시는 육체에 박혔지요.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몸이 아프다는 사실을 부정 할 수 있습니까? 없지요. 지금 어금니가 아픈데 온유하고 자비하라! 형제를 사랑하라! 찡그려 가면서 아픈 건 아픈 거에요. 이번 달 월급이 안 나왔다. 온유하고 평안하라 말이 안 되는 겁니다. 하던 계약이 틀어졌다. 그리고 지금 애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중이다. 너무 좋아해서 곧 결혼하기로 했던 29살 인 아가씨는 부산에서 촬영하다가 사랑하는 애인 김주혁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온유합니까? 화평할 수 있습니까? 성경에서 아무리 자기를 부인하고 미워하라 하지만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 사랑에는 나를 대신해서 나의 전부를 줘도 아깝지 않는 사람이 갑자기 죽었을 때 예수의 위로가 무슨 소용이 있고 복음이 위로가 되겠어요? 영에서 항상 육으로 드러나게 하십니다. 지난 낮 설교에선 이것을 강력 모터라고 표현 했잖아요. 믹서기 확 돌려 버리면 표면에 육적인 것이 다 드러나 버립니다. 믹서기 안에 쓸데없는 배설물들이 다 있잖아요. 믿지 않는 것, 나 밖에 모르는 것이 표면에 다 드러나 버립니다. 영에서 육으로 왜 가도록 하십니까? 복음 들을 땐 기쁜데 또 돌아서면 육으로 가는 게 뭡니까? 그 육에서 영으로 다시 영에서 육으로 가는 모든 과정에 불가능한 구원을 성사시키기 위해서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과 언약은 절대 네 힘으로 안 된다는 거에요. “내가 영이니까 성령 받아서 충만해야지!”그 유지하려는 것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어떤 것으로도 안되요. 처음에 신학교 들어갔을 때는 막 눈물 흘리고 웁니다. “주여! 이 한 몸 바치겠습니다.” 그랬던 그 신학생이 중간고사에 컨닝하고 난리도 아니에요. 4학년 쯤 되면 컨닝도 안합니다. 족구하고 놉니다. 다 소용없어요.. 교회를 키우는 데 있어 이 땅의 신학이 아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닫고 동기생들하고 놀기 바빠요. 그런데 신학생의 특징이 있어요. 1학년 때는 바짝 얼굴이 창백해요. 3학년 쯤 되면 얼굴이 다 살쪄있어요. 놀아도 너무 놀았거든요.
중들의 특징도 다 살쪘다는 거에요. 머리만 깎고 있어도 돈이 되기 때문에 백성들이 알아서 무당을 만들어 주니 무당 짓을 안해도 다 찾아오는 거에요. “제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우리 자식은 어떻게 되겠습니까??하고 전부 찾아오니 교회도 마찬가지이고 주의 응답이 어떻습니까? 헌금하면 복 받겠습니까? 원상회복 되겠습니까? 은행 대출해서 찾아오니 채우는 것은 마귀가 다 채워줍니다. 어차피 교회도 그 장사하거든요. 복 팔아먹는 장사 아닙니까? 이것이 폐쇄적 규범 체제이다. 이 체제를 허락하시고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중간에 뭐가 튀어 나옵니까? 사건을 통해서 언약이 하나 둘 씩 풀어져 나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나오는데 첫 번째 언약이 사울과 사무엘의 만남. 9장에 보면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했는데 준수하지만 겸손해요. 나 같은 것은 왕감도 못된다고 굉장히 겸손하다고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왕의 제도를 알게 해 주셨잖아요. 인간의 죄를 누가 먼저 만드시냐 하면 하나님이 먼저 만들어서 인간 속에 삽입시켜 버립니다. 이것을 주일 낮 설교에선 독감 예방 주사라고 했지요. 독감 병균을 미리 집어넣는다고요. 우리가 의인 되고자 하는 것에 주께서 아예 죄인 되라고 원천적인 죄를 아예 집어넣어 버려요. 이렇게 집어넣게 되면 여기서 뭐가 날아가냐 마면 사단의 명줄이 끊어져요.
(삼상 9:1) 베냐민 지파에 기스라 이름하는 유력한 사람이 있으니 그는 아비엘의 아들이요 스롤의 손자요 베고랏의 증손이요 아비아의 현손이며 베냐민 사람이더라
(삼상 9:2) 기스에게 아들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
사단의 무기가 뭐냐하면 내가 지금보다 얼마나 더 착해질 수 있고 의롭게 될 수 있느냐? 경건하게 될 수 있느냐? 이것이 사단의 무기입니다. 이것을 설명해 드리면 왜 사단은 자꾸 우리에게 착해지라고 하냐하면 착함과 의로움에 대해선 신도 그것을 보고 터치를 못해서 존재인 우리를 계속 살게 만들거든요. 착함을 죽이면 안되잖아요. 하나님은 착한 분인데 착함을 부정해 버린다는 것은 잘못된 하나님이잖아요. 그것 하나 믿고 사단은 계속해서 이렇게 하면 착하게 되고 사는 것에 유리하게 된다. 이것을 교회에선 행운이라 하고 축복이라고 합니다. 모든 행운을 어디에 유리하다? 내가 생존하는데 유리한 것을 행운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 행운을 눈에 보이는 물체로 표현한다면 돈이에요. 돈이 생기면 지금보다 살 수 있는 확률이 높아집니다. 그래서 축복을 달라는 말은 달리 말하면 돈 벼락 맞게 해 주시옵소서! 돈만 주시면,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이상으로 좋다는 식으로 하지요. 김 마담! 요번 일만 되면 다이아 반지 사줄께! 허장강이 나오는 옛날 영화 보면 그런 장면이 있어요. 남자의 허세 아닙니까? 결혼하면 손에 물 안 묻히겠다고 하면서 하는 옛날 버전이고 요새 버전은 설걷이 하다가 뼈 부러져 기브스하고 일을 너무 시켜 병석에 눕기까지 하고 남편과 자식 섬긴다고 골병들고 남편은 친구들하고 낚시하고 놀러가기 바쁘고 술 먹고 하는데 술은 혼자서 못 마셔요.
반드시 상대가 있어야 되요. 그래서 어떤 명분을 만들어서라도 혼자 안 먹고 둘이 같이 먹어야 술 맛이 나는 모양인지 케이블 tv에 나오는 정치이야기는 안주감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기 =1 자기만을 위하는 것. 그런데 여기에 대해 주님께선 1은 네가 아니고 내 존재가 1이고 넌 존재도 없고 하나의 받침 만드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있습니까? 하나의 무대 장치라니까요. 우리 몸이 주께서 활약하시는 현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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