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다니엘 / 스가랴 수련회 2강 본문
2 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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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십자가마을여름수련회 (강의:이근호 목사)
앞에 있는 그림이 첫째 시간에 말로 많이 설명했는데 역시 말보다도 그림이 낫다 싶어서 이렇게 해봤습니다. 온갖 성경 말씀을 나라는 것이 면적을 가져버리면, 내가 지킬 때 내가 구원받는다.라는 논리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을 정면으로 위배돼요.
온갖 성경 가운데 누가 포함되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도 포함되고 하나님도 계시다 이 말이죠. 하나님도 계시고 성령님도 계시고. 모든 나 빼놓고는 다 그렇고 그러한 나보다 덜 중요한, 안 귀한 그런 존재로 결국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온갖 성경이 나한테 왔다고 한다면 나에게 어떤 문제가 발생되면, 죽는다든지, 아프다든지, 안 그러면 정신 이상자 된다든지 이렇게 해버리면 모든 성경말씀은 다 허깨비죠. 이렇게 되면 이게 바로 회개거리에요. 바로 이걸 회개해야 돼요. 여기에서 이렇게 바뀌는 것이 회개입니다.
하는데 어느 인간이, 여러분 고등어 구울 때 고등어가 알아서 돌아눕진 않잖아요.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요. 앗 뜨거워라. 꼭 사람이 돌려줘야 되잖아요. 그래서 이 몸을 납작하게 이쪽으로 돌려주는데 여기에 누가 도와주는가? 짐승들이 도와줘야 됩니다. 예를 들면 다니엘의 느부갓네살 왕 시대에 보면, 두 가지 사건 나오죠. 하나는 세 친구에 관한 이야기인데.
몸을 둘로 나눠요. 하나는 일 번은 불타는 몸과 두 번째, 불타지 않는 몸. 불타는 몸과 불타지 않는 몸을 확인되려면 어디에 집어넣으면 됩니까? 간단한 문제에요. 불 속에 집어넣으면 돼요. 또 하나 예를 들면, 굶은 사자가 안 먹는 몸, 사자가 먹는 몸. 이것 확인하려면 어떻게 합니까? 누가 나를 사자굴에 집어넣어줘야 되는데 나를 사자 굴에 집어넣어주는 역할을 아주 충실히 해야 될 분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짐승 분들. 적그리스도. 얼마나 고마운 줄 몰라요.
왜냐하면 그분들이 안 계시면 내가 누군지를 몰라.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지, 이렇게 살아가는지 몰라요. 내가 옆으로 살아가게 되면 여기에 누구 오게 되면, 온갖 성경이니까, 모든 성경은 누굴 위해 증거함이라? 예수님을 증거함이죠.
그러면 예수님이 옆으로 있으니까 필름이고 막이잖아요. 통과해버리면 이 몸을 가지고 불 속에 집어넣을 때 우리 몸은 누구와 함께 있습니까? 예수님 몸이 함께 있으니까 우리가 불타는 몸이 아니고 누가 불타는 몸이다? 예수님은 불타는 몸이 아니에요. 왜냐? 예수님이 불을 만들었거든. 예수님 자신이 불만들 때 불타는 몸을 만들겠습니까? 안 만들지. 예수님이 사자에게 안 먹히는, 사자의 입도 다물게 하는 몸을 갖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 우리 생각하기를 그 예수님 믿으면 참 좋겠다. 하는데 그러면 안 돼요. 그러면 또 내가 되잖아요. 옆에 있는 예수 믿는 사람 참 좋겠다. 이래 되면 또 이렇게 된다고. 나는 튼튼한 몸, 안 죽는 몸 이러면 안 돼요. 하나의 종교가 되니까 안 된다 이 말이죠. 계속해서 불에도 넣든지, 물에도 넣든지 그리스도만 존귀하면 저는 오케이입니다. 그렇게 돼야 된다고. 뭐가 왔다갔다한 것 같은데 아, 사자가 왔다 갔구나. 이번에 불이 왔다 갔구나. 왔가갔다 하는 데 왜 이렇게 많은지 몰라. 이렇게 돼야 돼요.
그러면 문제 나갑니다. 여러분 불이 왔을 때 불타지 않는 몸이 낫습니까 아니면 예수님 믿는 몸이 되는 게 낫습니까? 예수님 믿는 몸이 낫지요. 만날 불 안 탄고 시험하다가 만날 뛰어다니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잖아요. 그때부터 베드로가, 야 물이다. 하고 물만 보고 환장했습니까? 걸어보려고. 안 그랬다 이 말이죠.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을 때 특징이 뭐냐 하면, 이렇게 내가 걷는다가 아닙니다. 어, 걸어지네.죠. 그냥 주님만 바라보고 가니까 남들 보기에 그냥 가는 거예요.
우리의 몸은 뭐가 자꾸 통과하고, 바람이 불면 바람이 와 있고, 비가 오면 그냥 통과하는 몸이에요. 통과하다 보니까 이 몸이 되는 겁니다. 통과가 결국은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몸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사사기 보면 꼭 능력 없는 자를 택하여 능력 있는, 행함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구원해주잖아요. 능력 없는 자들을 통해서 능력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오히려 구원할 때 거기서 그들은 회개가 일어나요. 야, 우리가 우리의 행함을 의지했구나. 하는 회개를 유발시키죠.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죠.
삼손이 힘 셀 때 얼마나 사자 끊고, 나귀 뼈다귀로 삼천 명 죽이고 얼마나 신났습니까. 지금 만약에 삼손보고 살라 하면 만날 장미란하고 둘이 붙어서 이거 들고 했을 거예요. 하지만 삼손의 의는 나실인이라서 하나님께서 바치는 몸이에요. 그런데 자기는 오해해서 나에게 힘이 있으니까 모든 것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몸으로 착각을 한 겁니다.
결국은 마지막에 기어이 하나님은 나실인답게 만들었어요. 눈 빠지고 눈알 다 빠지고 할 때 그야말로 제대로 몸 바쳤습니다. 삼손 손해 봤습니까? 손해 본 게 아니에요. 제대로 이렇게 있다가 블레셋 나라 때문에 이래 선 거예요. 섰으니까 주께서 그것을 통해서 이스라엘이 구원받은 겁니다.
그래서 세상 역사라 하는 것은 이미 책에 기록된 대로 하기 때문에 무엇과의 싸움이냐 하면, 책에 기록된 대로 구원받는다? 아니다? 자기한테 어떤 원인을 제공할 경우에만 그 원인이 터져서 결과가 이루는데 그 결과가 구원의 결과다. 그 둘의 싸움입니다. 그래서 그 둘의 싸움에서,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분명히 서경수 목사님이 광고했지만 강사님은 늦게 오신 분을 위해서 항상 새롭게 하는 버릇이 있으니까 일찍 와달라고 했는데 그것 뭐 지키겠습니까? 그냥 새로 시작하면 되지.
요한계시록에 있어서 반드시 역사의 비중에서 묵시로 올라갈 때 그냥 역사에서 묵시로 올라가는 게 아니고 반드시 알파요 오메가, 시작과 끝을 다 이야기해요. 끝부분에 대해서 점선으로 남겨둬요. 그러면 시작부분에 요한계시록 1장에서 3장까지는 실제 역사 있었지요. 실제로 역사에 있었던 일곱 교회 나오죠. 이 대목이 이만큼 나옵니다.
그 다음에 4장부터 7장까지는 여기는 벌써 일곱 인이 나오는데 일곱 인이 묵시 쪽에서 요한계시록 20장 마지막에 나오죠. 생명책으로 잡아당기는 힘이 작용하기 때문에 이쪽이 이만큼 밀리게 돼있어요. 밀리면 이것보다 역사 쪽에서는 많이 생략을 하고 이쪽부분에서는 점선보다 더 많이 가면서 여전히 여긴 점선이 있고 이만큼 또 점선이 남지요. 그래서 4장에서 7장까지 일곱 인 이걸 봐도 전체 시작과 끝은 역시 또 다 이야기해요. 다 이야기하면서 강조점은 점점 묵시 쪽에 강조가 무게를 두고 성경이 이래 한다고.
이러한 방법은 또 마찬가지로 8장에서 11장, 이것도 다음에 일곱 나팔, 일곱 대접, 중간에 있는 여자의 후손 마찬가지고. 전쟁이 일어났고 마지막에 강가에서 한판 붙고. 전부 이야기가 다 있는데 점점 올라가면 올라올수록 역사부분은 거의 생략돼있고 나중에 묵시부분에서 바짝 강조가 되면서 역시 이 전체 길이는 시작과 전체를 다 보여주는 거예요. 이걸 제가 김치냉장고에 박스를 층층이 쌓는 식으로 돼있다. 이런 것이 예수님의 종말에 관한 예언도 꼭 이런 식으로 돼있어요.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초반에 끝장낼 것 같은데 뒤에 미진하게 남아 있고, 왜 남느냐 하는데 이게 자꾸 이쪽으로 강조점을 두면서 역사를 안 붙이면서, 역사와 묵시의 연결은 우리가 연결시키는 게 아니고 이미 하나님의 계시 안에, 하나님의 계시가 바람이라면 바람 속에 역사와 묵시가 연합되어서 그 자체가 바람으로 우리에게 오게 돼있습니다. 우리는 이래 서 있는 게 아니고 이래 서있기 때문에 바람이 잘 통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침에 눈을 떠서 항상 생각할 것은 큐티, 성경 묵상하는데 딴 게 아니에요. 오늘은 어떤 말씀이 나한테 체험되느냐? 그것 찾으면 돼요. 여기 내가 행함을 가미하는 것이 아니고 행함의 주체는 하나님이 주체에요.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하신 것이 나한테 어떻게 되는가?
만약에 어떤 특정 누가 생각나 기도하고 싶다. 그러면 내가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아, 오늘은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게끔 하셨구나.라고 느끼는 겁니다. 그러면 기도응답대로 과연 어떤 사람이 문제가 일어나면, 그것은 바로 나한테 기도를 시킨 주께서 그분에서 일을 시켰구나. 이게 사도행전에 보면 고넬료하고 베드로하고 특징이 뭐냐? 양쪽 다 천사가 임했다는 겁니다. 만날 때 서로의 행위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둘 다 쳐다보면서 만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자칫하면 면상을 받는 수가 있어요. 주께서 만나게 해줬군요. 고넬료도 주께서 했군요. 베드로도 주께서 했군요. 주께서 우리를 만나게 하신 겁니다.
전도는 인간이 못합니다.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해도 되게 돼있어요. 로마서 10장에 나오죠. 보내심을 받지 않고야 누가 전파하겠느냐. 보세요. 하나님이 안 놀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몸을 이렇게 하면 만날 하나님이 일하는데 만날 이렇게 하니까 자기가 일 안 하면 하나님 일 안 한 게 돼요.
자기는 심심하니까 등산가고, 목사가 되서 월요일부터 낚시 놀러가고, 목사 쉽다. 하루 일하고 육일 놀고. 어떤 사람이 계산을 해봤어요. 한 주일에 설교 세 번 하는데 4주 같으면 열두 번 하는데 월급은 이백사십 만원 받으면 설교 하나에 이십 만원, 괜찮은데.
그러니까 나머지 시간은 이건 자기 시간인 거예요. 여러분, 자기 시간이라는 게 없습니다. 왜? 나라는 게 없기 때문에.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라 하잖아요. 그런데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이 이렇게 해서 자기 부인이 통과해서 저기 행함을 주장하는, 그림 지워버렸네. 아깝다. 다시 그리면 이렇게 말씀이 올 때는 책에 기록된 대로 구원한다, 예정된 자만 구원한다고 오는데 이쪽의 우리 막 옆에는 강력하게 행하지 아니하면 구원 못 받는다. 행함을 주장하는 측이 강력하게 받치죠.
그러면 우리를 통해서 누가 누구를 공격하느냐? 주님께서 우리를 공격 안 합니다. 우리는 마귀인데 공격 대상도 안 돼요. 누굴 공격합니까? 저쪽 편에 있는 행함, 해야 된데이. 선악과 따먹었잖아. 따먹은 선악과 활용해야지. 사람이 선악과를 활용해보면 죄가 뭐가 되느냐 하면, 악은 사라지고 악이 없는 의의 자리에, 선의 자리에 자기를 자아를 거기에 앉히는 이게 죄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반대로 사라진 악을 십자가를 통해서 만날 다시 집어넣어요. 왜? 너는 죄인이다. 이번에 내가 구제를 했는데 제대로 했거든요. 금식할 때 머리에 기름 발랐거든요. 그래서 저는 의인입니다. 우리는 항상 선악 중에서 악이 없어진 그 자리에 나를 내세움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여전히 나는 의인인 것으로 남한테 뽐내고 싶어서 살아가는 겁니다.
의인이 되면 남한테 뭘 청구하느냐 하면, 빚을 청구할 수 있어요. 어떤 교회에서는 내가 의인되었기 때문에 이만큼 부흥됐다. 빚을 청구합니다. 빚을 청구하는 걸 가지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이걸 군주라 해요. 군주라 하는 것은 백성들에게 빚을 청구하고, 백성들은 과거를 통해서 주신 은혜에 대해서 보답해야 될 의무를 가질 때 이게 군주와 백성의 관계에요. 이게 다니엘에 나오는 모든 짐승을 대표할 때 항상 군주를 가지고 대표해요.
권력이라는 게 뭐냐 하면, 이겁니다. 권력이란 동일성 찾기에요. 세 사람이 있다 합시다. 세 사람 있으면 권력이 어떻게 되는지 알아요? 두 사람은 의견이 같고, 한 사람은 다를 때 권력이 어느 쪽으로 갑니까? 하나는 배제하고 두 사람에게 옵니다. 다수결의 원리죠. 두 사람이 있습니다. 두 사람 중에서 어느 것이 권력이 올 때는 아까 빼낸 그 사람이 두 사람 중에서 어느 쪽에 표를 던지느냐가 준결승 거치고 결승 거쳐서 최후의 권력자 됩니다.
그래서 그 세 사람은 그로 인하여 권력이 발생되는데 그 권력의 특징은 뭐냐 하면, 집중됐다는 거예요. 어디에? 집중이란 것은 두 개에서 집중이란 말을 할 수 없어요. 집중이란 반드시 하나에 집중 되면서 다른 사람들은 노는 것이 아니고 그 집중된 권력에 대해서 동의하게 되는데 그게 뭐냐? 동일성. 내가 찬성한 동일성. 이게 바로 정치입니다. 교회정치고, 세상 정치에요.
이것이 병원, 학교, 군대, 형무소, 기업체, 교회, 심지어 가정 모든 조직에 전부다 이것이 다 집어 들어가요. 집어 들어가면 여기서 군주가 발생되고 군주는 다른 사람의 대체물이 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자아 속에는 이 군주의 이미지가 여기에 들어와서 결속이 되죠. 그래서 군주가 앞으로 돌격! 하면 이 사람 목숨 걸고 돌격합니다. 왜? 동일성이니까, 당기니까.
아빠가 매일같이 술 처먹고 들어온다. 엄마가 매를 맞는다. 딸이 하나 있다. 세 사람 가운데 권력이, 딸이 어느 편에 서느냐? 엄마 편에 서 버리면 권력 추가 엄마 쪽으로 쏠리게 되죠. 딸은 그때부터 딸 개인의 정체성을 날아가 버리고, 엄마에게 협조하는 제2의 자아가 새롭게 생성되는 겁니다. 그러면 자기가 아르바이트해서 돈 벌면 엄마한테 줘요. 줘도 좋아요. 왜? 엄마는 나의 군주니까. 그러면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을 찾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몸둥아리 있다는 부담에서 떨어버리고 싶은 거예요. 일 니가 다 해라. 친구 아이가. 니가 다해라. 나는 너한테 협조함으로써 난 놀란다. 협조해주고 너 왕 되게 해주고 난 빠질게. 난 놀게. 넌 시키는 대로 해라.
이럴 때 이것이 바로 빚이고, 빚과 빚 사이에서는 의무가 있는데 의무는 여러분 잘 아시는 한 자로 법라는 거예요. 하나님은 군주지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은, 나는 하나님 법에 동의하겠습니다. 동의하면 그냥 동의한다고 하면 안 되지요. 법대로 실행해야 돼요. 법대로 실행하지 않으면 뭐가 발생되죠? 채무. 뭔가 내가 갚아줄 채무가 남아있죠. 그 채무에 대해서 이행하지 못할 때 벌 받는 것도 감수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야죠.
할 때 군주가 가만있으면 안 돼요. 너의 벌을 내가 탕감해줄게. 할 때 이때는 새로운 그 법에 의해서 결속이 되는 겁니다. 군주는 시혜(은혜를 베푸는 것)를 해주고, 내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혜택을 받았구나 하는 이러한 관계가 법이 있는 모든 관계에 다 포함되는데 심지어 이거는 바로 성경 내에 있는 모든 군주들, 모든 기독교 국가 이천 년 모든 역사에서 교회 내에서 이것이 실시되고 있습니다. 이것 사기입니다.
법이라 하는 것은, 우리가 이렇게 있지 않고 만약에 이렇게 있다면, 지금 녹음 듣는 사람은 이렇게, 저렇게를 모를 거예요. 삐딱하게 서지 않고 바로 서 있으면 행함으로 빚 갚겠다는 거죠. 그러면 우리 배후에 누가 있습니까? 악마가 있죠. 악마가 있으면 빚도 갚지 못하고, 못 갚으니까 어떤 하나님이냐 하면, 최선을 다하여 빚 갚아 줬으니까 당신은 나를 용서하란 말이야. 당신은 그 다음에 중요한 것 뭡니까? 나를 용서하란 말이야. 왜? 나는 최선을 할대로 다 했고 안 되는 걸 어떻게 해. 안 되니까 우리는 연약한 인간이니까 하나님이 되었으면 사랑해 보란 말이야.
볼테르란 사람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예수님은 죄 씻는 전문가라 했습니다. 이발 하는 사람은 이발하는 전문가, 미장원은 파마하는 전문가, 예수님은 죄 씻어주는 전문가. 기독교를 그렇게 봤어요. 완전히 농담으로 보는 거예요. 조롱하면서.
당신은 군주잖아. 일반 사람들 다 그랬습니다. 모든 서양역사가 다 그래요. 저쪽에서 몽고족이 쳐들어온다. 아이고. 우리 군주 뭐하십니까? 영국국가가 뭐예요? 여왕이여, 영원하라. 하나님이 여왕과 함께 계시소서. 이것 아닙니까. 미국국가 내용은 뭡니까? 남북전쟁. 깃발을 뽑아라. 그런 내용인데 영국은 여왕이여, 하나님과 함께 하소서. 이 말입니다.
여왕과 나는 일체감을 느껴서 당신이 어떤 외적이 왔을 때 그걸 해주면 당신을 위해 아낌없이 모든 해주겠다. 하지만 당신은 평소에 우리에게 뭘 했냐? 모자란 부분을 용서하고 시혜하고 은혜로 덮어주는 일을 하는 그것이 바로 기독교국가의 할 일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제가 아까 뭐라고 했느냐 하면, 내가 이렇게 버티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란 말이야. 이렇게 나오니까 문제 되는데 이렇게 돼버리면 우리 뒤에 누가 있습니까? 마귀가 행함을 가지고 있지요. 그러면 이 행함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공격해요? 어떤 특정인을 구원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먹은 그걸 근거로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아니라 창세전에 예정된, 사랑받기로 작정된 자는 무조건 구원한다.라는 하나님의
그러니까 죄 있으니까 구원하란 말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를 죄인으로 만든다 이 말입니다. 죄를 만들기 위해서 우리를 만들어낸다 말이에요. 하나님께서. 죄를 드러내기 위해서. 고함지른다고 옳은 소리 되는 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를 위해서 없던 죄인이 만들어져야 돼요. 침묵의 시간이 잠시 흘렀는데. 동의를 못하겠다는 이야기인지.
여러분, 야곱의 형 이름이 뭡니까? 에서지요. 에서가 왜 태어나야 되는 겁니까? 에서는 미움이라는 것을 하나님은 누구, 누구를 미워한다는 그 문장, 그 사실을 규정하기 위해서 에이, 말만. 진짜데이. 에서 봐라. 구원받고 싶어도 저주받잖아. 맞잖아. 봐라. 결국 하나님이 누구를 사랑하고, 누구를 미워한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에서는 반드시 이 땅에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반대로 야곱도 태어나야만 하는 겁니다.
야곱이 선악과를 따먹고 죄를 얼마나 졌는지 관계없이, 전혀 어떤 행위를 했던 관계없이 사랑받기로 했다면 자기 행위에 대해서 묻거나 따지지 않고 명단에 있다는 것 때문에 그냥 건짐으로써 하나님의 자신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그는 태어나야만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은 결국 인간의 피조물이란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보여주기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지 피조물 자신의 체면, 위신, 자존심 그거는 전혀 하나님의 고려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목사님. 자존심 부리면 안 됩니까? 하세요. 고려 대상이 안 된다니까. 하지 말래. 자존심 부리고, 체면 하고, 교회 안 나오고, 세 번씩 부인하세요. 하더라도 점점 더 하면 할수록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우리가 까불면 까불수록 주님의 창세전에 예정된 사랑만 빛이 날 뿐이에요.
불신자가 죄 지으면 죄의 재미에 빠지지만 신자가 죄 지으면 회개거리만 늘어납니다. 그렇다고 신자가 죄 안 지을 수 없고. 산다는 자체가 죄니까. 둘 다 죄 짓는 건 마찬가지에요. 선악과 따먹은 게 죄에요. 그게 실수였습니다. 괜히 독약을 왜 먹어요. 독약 먹고 난 뒤에 죽으면서 나 죽습니다. 주께서 죽는 걸 문제 삼는 게 아니고, 독약을 왜 마셨어. 독약을 문제 삼는 거예요. 따먹지 말라는 독약을 왜 먹었어. 나 죽습니다. 너 말고, 독약 보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래서 여기서 다니엘에서의 이러한 법이 등장하고 법에 자발적으로 복종해서 법을 지키는데 지키다가 못 지키면 그 영혼만큼은 시혜, 혜택을 입어서 뭔가 모든 것을 다 덮어주는 그런 식의 군주적인 그런 하나님을 인간들이 원했던 겁니다. 어떤 때? 삐딱하게 서는 게 아니고 이렇게 설 때.
그렇다면 이렇게 서지 않고, 이렇게 서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모든 율법이나 모든 것은 우리를 통과해서 우리 배후에 계시는 우리와 함께 계시는 바로 주, 주께서 주와 둘 사이에 하는 이게 중요해요. 우리는 뭐냐? 셔틀콕이에요. 우리는 그냥 탁구공에 지나지 않는 거예요. 실컷 둘이 게임하시는 거예요. 얘, 죄졌습니다. 보내면 주께서 스매싱해서 때리고. 보내면 때리고. 둘이 잘들 노셔요. 성부와 성자끼리. 성령께서는 거기서 중계방송하고 있는 거예요. 많이 맞았습니다. 또 맞았습니다. 용서받았습니다. 회개합니다. 회개도 소용없습니다. 또 죄 짓습니다. 그런 식으로 중계방송해요.
그래서 게임이 잘 안 된다 하면, 마귀 빨리 도와줘라. 마귀가 와서 행함 자랑하다 얻어터지고. 제가 아침에 했지요. 어떤 교회 안 나오는 그분을 위해서 사십일 동안 기도해도 교회 안 나오다가 에이 기도 이제 안 한다. 하면 그 다음주에 나온다고.
하여튼 하나님께서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로가 탁구 치는 사람에게 가지 않고, 주에게 가지 않고, 탁구공에게 가는 일은 하나님은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탁구공이 되었다는 그 사실, 이거는 선악과 따먹은 인간이 나는 주님의 탁구공라고 아는 것은 성령 받은 기적이 아니면, 십자가의 복음이 아니면 이건 알 수가 없어요.
그러면 아까 식사 때문에 늦었던 70이레 하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다니엘 9장에 나오는 70이레를 제가 미리 당겨서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론 때문에 그래요. 인간의 몸, 인간의 시간은 심리적으로 과거에서 현재 그 다음에 미래로 나아간다. 어거스틴도 이렇게 이야기했고 대부분 사람들이, 시간은 과거에서 현재, 미래로 나아간다.라고 생각한 겁니다.
그럴 때 이것이 잘못이다. 왜냐하면 과거, 현재, 미래라 하는데 이 과거는 현재가 볼 때 많은 과거 중에서 현재가 마음에 드는 것, 기억 남는 것을 골라서 과거라고 따로 추려놓은 것에 불과하다 말이죠. 그 과거가 그 과거가 아니에요. 현재가 자기가 만들어낸 과거에요.
미래라는 것도 마찬가지에요. 현재 자기가 기대하고 싶은 것, 이걸 예지라고 하는데, 미리 예상하고 싶은 그런 미래인데 이 예상하는 것도 그냥 허허벌판에서 예상하는 것이 아니고 꼭 뭘 근거로 하느냐 하면, 과거에 자기가 경험했던 걸 가지고 이게 좀 모자라니까 이것 보충했으면 좋겠다.라는 쪽으로 미래를 생각한단 말이죠.
제가 우리 중고등부 설교할 때 이 기장론을 설교해서 애들이 이해됐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했다고. 고3인데 공부를 너무 잘해. 그래서 내년엔 서울대학 간다 했는데 아빠, 엄마가 낚시 갔다가 배가 뒤집어져서 두 분 다 돌아가셨어요. 그러니까 아빠, 엄마 없으니까 친척도 없으니까 그만 대학을 못 가고 그냥 사업체 들어갔단 말이죠.
분명히 전에 있던 과거가 현재 있잖아요. 현재 있을 때는 내가 서울대학 가리라고 미래를 생각했는데 막상 여기에 사건이 터지니까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현재를 재조정 들어가는 거예요. 여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고, 그래 나는 사업체 가서 여기서 공부해서 과장 될 거야. 지금 현재에서 새롭게 구성하는 또 미래가 또 있는 거예요. 일방적이죠.
그런데 엄마, 아빠가 그때 둘 다 옛날에 수영 선수 출신이 되어서 헤엄쳐서 나왔어요. 나오면서 뱃머리에 맞아서 둘 다 기억상실증 걸렸어요. 자기 자식인 줄 몰라서 둘이 살았네. 그런데 우리 자식 있나? 자식 있는지 모르겠는데. 자식 없는 걸로 하자. 둘이 서울 가서 재벌 되었다고. 완전히 막장 드라마죠.
재벌 되어서 나중에 친구 분이, 야, 너 아들 하나 안 찾느냐? 아들 누구? 사진 보니까 아들 있단 말이에요. 어디 있는데? 구미 있더라. 구미 공장가서 아들 찾는 거예요. 조금 있으면 과장된다 했는데 과장이 아니고 재벌 2세 돼버렸다고요. 재벌 2세가 되어서 이제부터 네가 회사를 책임져라. 하고 좋아서 포도주 마시다가 아빠, 엄마가 엎어져서, 당신 누구시죠? 이게 막장 드라마가 오늘날 우리 인생 드라마에요.
시간이 지나가면 누가 따라가느냐 하면, 자기 몸이 따라가요. 전부다 일방적으로 자기 위주로, 자기 편한 위주로 다 해석을 해버려요. 그래서 이런 시간관을 너무 자기 일방적이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현재라는 것은 현재가 아니고 과거가 없으면 현재가 안 되니까. 전에 있던 A라는 현재를 위에 있는 미래가 현재를 밀어내는 거예요.
우리 몸은 실제로 미래로 가고 있어요. 과거라 하는 것은 없어지는 게 아니고 누적이 돼요. 일층, 이층 누적이 되는데 이 과거는 옛날 짧은 과거는 A1이 있고, 먼 과거는 A2가 있고, 더 먼 A3 자꾸 누적이 되는 겁니다. 누적이 되서 현재가 되면 현재는 수직적으로는 과거가 쌓여있고, 미래적으로 자꾸 밀려서 앞으로 사선으로 새로운 미래로 밀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현재가 되면 현재란 순간에 순간적으로 현재는 사라지고, 미래하고 밑에 깔아 앉은, 침하라 하는데 현상학에서. 밑에 깔아 앉은 둘로 짜그라지죠. 없어지죠. 그렇잖아요. 어떤 순간이 오게 되면 0.1초라도 그 순간에 졸지에 과거가 돼버리고, 졸지에 미래가 돼버린다 말이죠. 또 새로운 미래를 꾸민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미래라 하는 것이 현재는 없는 거거든요. 미래는 현재 없고, 과거는 지나갔으니까 없고. 과거 없고, 현재 없고 없어지는 것 둘 다 쪼개지니까 안에 현재가 있다, 없다? 없는 거예요. 현재도 없고 과거도, 미래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그럼 그때그때 뭐냐? 나라는 것은 내 이미지에요. 순간순간 이미지란 말이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럼 아무것도 없는데 내가 있잖아. 그걸 뭐라고 하느냐? 사건이라 하죠. 사건은 분화구 같아서 사건은 뭔가 자꾸 나오는데 이게 없는데서 나와요. 이게 무에서 창조인데. 아무것도 없는데서 나와야 이게 사건 되는 겁니다. 성경 전체가 그래요. 예상치 못한 데서 터져 나올 때 그게 사건이 되는 겁니다.
미리 알면 뭡니까? 내 몸에서 나온 거죠. 알았다, 알았다. 저건 아는 거야. 전에 예상했거든. 인간은 미래를 예상하면서 열 개 예상해서 그 중에서 한 개 맞는 게 아닙니다. 항상 우리의 미래는 무에서 새로운 사건화 되어서 우리에게 오게 돼있어요. 그렇게 되면 우리 몸은 예상한 몸이 아니고 누군가 무에서 나를 만들어내는 그분의 소유가 되면서 그분이 하는 말씀의 사건화가 우리 몸이에요. 그 다음에 다음 사건 또 우리를 기다리고 있죠.
내 것이라고 할 게 없어요. 내 것이라고 한다면, 두 가지 있어요. 하나는 뭐냐? 규정하는 나와 규정되는 나 그러니까 나는 예쁘다. 아름답다. 신비롭다. 이게 규정된 나잖아요. 너는 참 착해. 너는 예뻐. 너는 공부 잘해. 남으로부터 규정되는 나도 그렇게 동의해. 규정되는 나죠. 그렇다면 규정되는 나 있고, 그럼 그렇게 규정하는 너는 뭔데? 내 안에 내가 두 개 있죠. 내 안에 내가 너무나 많아. 가시나무 새. 왜 많은지 몰라.
이게 사건 때문에 이렇게 돼요. 사건 되면 뭐냐 하면, 내가 알고 있던 나와, 내가 예상 못한 나로 둘로 나눠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는 유에서 유를 만드는 나가 있고, 무에서 새롭게 인식된 나가 있어요. 무에서 새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나를 다루는 방식이고, 내가 나를 다루는 방식은 있는 나를 더 아름다운 나, 멋있는 나, 착한 나로 만들어내요. 이런 나가 두 개 있다고.
나가 두 개 있으면 성경해석을 어떻게 할까요? 성경해석도 몇 가지? 두 가지.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건 해석과, 또 하나는 내가 나한테 원인이 되어서 내가 원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다는 거예요. 행함을 주장하는 나, 두 가지 있겠죠. 둘 사이는 하나의 필름이 되서 한쪽은 행함 주장하는, 선악 주장하는 악마 쪽이고, 이쪽은 주께서 사건 만들어 준 걸 인식하는 것은 주께서 나의 주인이라는 것이 성령의 역사죠.
그럼 나는 뭐냐? 나는 빠지고 성령과 악령, 둘이 싸우는 거예요. 영적 싸움이 그런 거예요. 영적 싸움이 내가 싸우는 게 아닙니다. 두 분 싸우도록 비켜주는 게 영적 싸움이에요. 잘 한 번 싸워보세요. 둘이 재미나게 싸워봐라. 너는? 나는 하나의 사건이지. 내가 여기 있다는 사건이니까.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았을 때 일 번, 아프다. 이 번, 반항했다. 삼 번, 다시 돌 던졌다. 사 번, 그들을 용서하소서. 몇 번입니까? 스데반 집사는 성령이 충만했어요. 이렇게 선 게 아니고 삐딱하게 섰거든요. 자기 몸이 스티로폼이 아니니까 아프긴 아프겠지요. 성령께선 자기를 가지고 뭘 하느냐 하면, 저들이 하는 짓을 알지 못하는 걸 용서하시는 것이 주님이라는 걸 보여주는 그러한 도구로써 스데반 집사는 돌 맞는 이벤트를 벌인 거예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가 안 됐다. 동정하는 건 그 사람 모독하는 겁니다. 사건이 일어났는데 무슨 동정해요. 바람에 착한 바람이 있고, 나쁜 바람이 있습니까? 나라는 게 있을 때 착한 바람, 나쁜 바람 있지 그냥 바람이 와서 통과해버리면 착한 바람, 나쁜 바람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말 잘못한 것 같은데 이상하게.
성령이 착하다 하는데 성령은 착하지 않습니다. 그냥 성령일 뿐이요. 성령의 도구일 뿐이요. 성령이 무슨 착합니까? 어디 감히. 어떤 부자청년은 말하기를 주님은 선하십니다. 웃기고 있네. 그 부자 청년이 주님은 선합니다.라고 말한 이유가 뭐냐 하면, 주님을 선하다고 이야기했으니까 저도 선하지요. 끼어달라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 사람을 배제하면서 너의 논리라면 난 선한 사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너는 너 자신도 분간도 못하면서 네가 알고 있는 선을 나한테 적용시킨 거예요.
진짜 선은 뭐냐 하면, 네 모든 것을 팔고 나를 따라오너라. 바람이라면 따라 가겠는데 이래 서 있는 게 아니고 이래 서 있으니까 근심하여 돌아가니라. 그럴 때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 개역개정) 할 때 제자들이 아주 실망해서, 그럼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사람은 할 수 없으되, 삐딱하게, 이래 돼있는 것을 이래 하는 것은, 사람은 못하고 주께서 하시죠. 너는 이미 죽은 자고 너는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에스겔에 보면 두 가지 성전이 나와요. 성전의 특징이 뭐냐? 사람을 죽이는 데입니다. 교회가 성전이라고요? 그렇게 되면 참 좋겠어요. 교회 들어오려면 휴대폰 놓고, 유언장 쓰고 그래 놓고 들어가면 성전이죠. 다시 이야기합니다. 성전은 사람을 죽이는 데입니다. 성전을 복 받는 데가 아니에요.
다시 유에서 유로 다루는 인간을 자기를 어디 집어넣는다? 무로 다시 원위치하는 거예요. 원점으로 돌리는 거예요. 원점으로~ 다시 무로 돌리는 거예요. 그게 성전이에요. 왜? 성전에 누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탁구 치는 두 분이 계시니까. 온다. 공 하나 온다. 조지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새 교인들은 탁구채 자기가 들고, 주님이여 한판 칩시다. 제가 얼마나 기도 잘 하는지. 얼마나 응답받는지 해봅시다. 주여! 하고 있다고. 니, 지금 뭐 하노? 다른 교회에서 그렇게 하던데. 그 다른 교회가 뭐냐 하면, 과거입니다. 다른 교회처럼 우리 교회 부흥된다. 이래서 자기 주위에 시간관이 또 형성돼버렸어요. 스데반 집사가 날아가 버렸어요.
이 시간은 내가 살아있으면 시간은 없는 거예요. 내가 죽어버리면 모든 게 주님의 시간이 되는 겁니다. 순서대로, 하나님 말씀대로 이뤄지는 거예요. 그런데 내가 살아가면 시간은 없는 거예요. 시간을 뺀 신학은 신학이 성립 안 됩니다. 시간을 뺀다는 건 인간의 행함을 빼버려요. 인간의 행함을 빼버리면 신학 자체가 성립이 안 돼요. 왜냐하면 신학이라 하는 것은 어떤 특정 사람을 신자 만들기 위한 스킬, 기술이거든요. 나 따라 오시면 구원됩니다. 그걸 체계적으로 모아놓은 것을 조직신학, 신학이란 말이죠.
그런데 유에서 유를 성전에서 할 수 없다 이 말이죠. 무로 돌리는 데는 성전이 필요한 거예요. 그래서 다니엘서에서 70년 포로로 잡히기 전에 성전이 없어졌잖아요. 성전이 없어지고 난 뒤에 에스겔 42장에 보면 새로운 성전이 나오는데 특징이 뭐냐? 크게 쓸게요. 새로운 성전이 뭐냐 하면, 물 흐르는 성전이에요. 이런 성전 봤습니까? 가만있는데 물 흐르는 성전 봤어요? 청계천입니까? 청계천에 교회 세웠어요? 물 흐르지 않는 성전은, 성전이 아닙니다. 부동산은 성전이 아니에요. 물이 흘러야 성전입니다. 그것도 가만있는데.
그게 바로 에덴동산 중간에 강이 있지요. 그처럼 자동적으로 물이 흘러서 자동적으로 흐르는 물은 어떤 물이냐 하면, 모든 물을 마시는 자는 사는 물이에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나와요. 요한계시록 22장에 보면 그 출처가 한 곳입니다. 어딥니까? 어린양의 보좌에서 물이 흐르죠.
그런데 에스겔 42장에 예언된 것은 물이 흐르는 성전인데 포로로 잡히고 난 뒤에 인간들이 지은 성전은 무슨 성전입니까? 물 같은 소리하고 있네. 물 퍼붓는 성전이죠. 초막절에. 요한복음 7장에서. 얼마나 그리웠으면 실로암 물가에서 바께스로, 요새 같으면 119 소방차 호스로 부우면 되는데, 그걸 일일이 바께스로 퍼부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참석했어요. 안 간다 하다가 가서 뭐 하노? 물 붓습니다. 이게 물이가? 마셔봐라. 사는가. 그럼 어쩌란 말입니까? 나를 믿는 자는 너 안을, 그러니까 이래 서면 안 되죠. 삐딱하게 서면, 너 안을 성령이 목마르지 않는 샘이 계속 나오는 성전 되게 해줄게. 바리새인들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습니다. 왜? 법으로 만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법이 임하게 되면 채무관계죠. 율법을 최소한도 지키면 나머지 모습은 봐줘서 그냥 용서해준다는 식이에요. 지킬 건 지키고 안 될 때는 회개하면 회개한 만큼 채워준다는 겁니다.
물 흐르는 성전, 그 성전을 어떤 인간도 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성전을 만나는 것은 누가 와야 되겠습니까? 요한복음 4장에 사마리아 여인이 왔을 때 그 물은 때려치우고 내가 물 줄게.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 줬지요. 그러면 이 성전과 누굴 만나야 돼요? 인자와 만나야 되겠죠. 이 성전을 짓는데 7이레고, 여기 만약에 인자가 와서 성전 새로 세울 때 1이레죠. 그럼 62이레는 뭐냐? 간격입니다. 7과 1의 만남을 이어주는 간격이에요. 7로 했던 게 역사잖아요. 이 역사는 부셔져야 돼요. 제가 아까 요한계시록 했잖아요. 역사에서 묵시로 끌어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7, 1에 대한 해석은 역사적 해석을 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됩니까? 안 해야 되죠. 왜? 이걸 해석하는 인간 몸은 어떤 구조였다? 인간 몸의 시간관에서 70이레를 해석하기 때문에 그 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사건이 아니라니까. 그냥 역사로 해버리면 이미 역사를 해석하는 자기 몸이 있잖아요. 무슨 해석을 끄집어내든지 다 거짓말이라니까요. 세대주의, 헹스텐베르크, 칼빈 어떤 자의 해석도 전부다 아니란 말이에요.
꿰맞춰 보려고 7이레가 어디까지고, 이게 고레스다, 아니다. 느헤미야다. 안티오크스 4세가 어디 쯤 되는고? 저기 쯤 되나? 예수님이 1이레가 십자가냐? 아니다. 세례다. 아니다. 디도 장군에 의해서 파괴된 예루살렘이다. 난리 나요. 자기들끼리 계산도 안 맞거든.
이레 해석은 몸을 가진 이상은 해석이 안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너는 가만있어. 내가 해석하고 해석한대로 이룰게. 그게 뭐냐? 기존의 역사적 성전은 하늘의 성전을 위해서 자리를 내줘야 돼요. 만들게 하면서 그건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하는가? 70이레를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아니고, 층으로 해석해야 되죠. 아까 같이. 처음부터 끝까지 7이레. 창조죠. 성전이 준공될 때까지 이쪽에 나머지는 비워놓죠. 그 다음에 62이레. 62이레 해서 이쪽에 점선이 있고, 이 끝에 점선이 있어서 1이레로 미루는 역사, 미루는 기능을 하고, 이쪽에 한 이레는 이미 지나간 역사는 다 아는 거고, 여기는 묵시로 인자가 등장해서 모든 죄가 용서되는 그 시점입니다. 그러면서도 전체가 한 통속이 되니까 이걸 달리 그리면 이렇게 됩니다.
여기 인자가 구름 타고 계시면 이게 7이레고, 62이레, 1이레고, 1이레 반 틈에 인자가 등장하는 거예요. 그래서 역사는 수평적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수직적으로 인자 올 때를 밀어내면서 그걸 앞당겨서 짬짬이 이 계시를 보여주는 거예요. 해석은 위에서 해석을 해야지 밑에서 인간들이 해석해버리면 기껏 수직적으로 올라가지 못하고 수평적으로 내려가는 해석밖에 못한다 말이죠. 그때 70이레가 언제고? 계산한다고.
이러한 수직적 계산을 해줘야 요한계시록 해석과 꼭 마찬가지고, 예수님의 종말의 해석과 마찬가지인 겁니다. 결국 이것은 70이레, 62이레 모든 것이 한꺼번에 다 보여주는 몸이 무슨 몸이냐? 바로 예수님께서 인자라는 호칭을 가지고 오신 그 몸, 그 몸 안에 성전 세우고, 십자가에 부셔지고, 다시 사흘 만에 부활한 이 모든 70이레가 예수님의 3년 인생 가운데 다 포함됐습니다.
그리고 넓이든 전체가 다 포함돼요. 왜? 올라가니까. 인자 안에 올라가니까. 나중에 와보면 시작과 끝이요 하다가 저쪽에선 이것도 시작과 끝이요 하다가 나중에 예수님 자체가 알파요 오메가요 그런 의미가 있는 겁니다.
여기까지. 시간 됐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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