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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취:이명직
가락-요한복음14장16절(보혜사)
170606a-이 근호 목사
자, 오늘은 요한복음 14장 16절. 14장 16절에 보면 뭐라고 되어 있느냐 하면,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14:16) 17절에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7)
이렇게 되어 있죠?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성령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령이 오시게 될 때에 현상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은 세상이 저를 받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현상이 야기 된다는 겁니다. 성령이 오게 되면. 보통 사람들이 성령 이야기 할 때 그냥 성령이 이렇다 설명을 하잖아요.
그렇게 되면 이게 너무 추상적인 내용이 돼요. 그래서 아주 문제를 간단하게 생각해 봅시다. 성령 받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납니까? 이게 더 확실하죠. 성령을 받았을 때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성령은 이런 분이고 뭐, 삼위일체 중에 삼위 한분이고,.” 이렇게 골치 아프게 하지 말고 “성령을 딱 받았다!” 이런 말입니다.
뭐, 아로나민 골드를 먹을 때와 먹지 않을 때에 차이가 날까요? 안 날까요? 확실히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아니 광고에 그래 광고에. 아로나민 골드를 먹을 때와 먹지 않을 때와 차이가 난다는 거예요. 피곤이 막, 안 먹으면 피곤을 못 견딘다는 겁니다. 그러면 성령을 받을 때와 받지 않을 때 차이점은, 뭐가 달라지면 이게 달라져요.
‘관심사’가 달라집니다. 성령을 받게 되면. 성령을 받지 아니하면 관심사가 어디에 관심을 두게 되느냐 하면은, 성령을 받지 않는 자는 어디에 관심을 두게 되느냐? 성령을 받지 않으면 여기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어요. 어디에? ‘소유’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소유에. 인간은 자기의 자신을 스스로 개선하는 방식이 뭐냐 하면은 소유하면서 개선을 해요.
성령도 소유하고, 예수도 소유하고, 삼위일체도 소유하고 하여튼 좋다는 것은 무조건 다 소유합니다. 아로나민 골드도 소유하고 하여튼 좋다는 점은 보약도 먹고 다 소유함으로써 그 소유가 집결된, 소유함에 모여진 집결된 이 장소가 개선할 여지를 두고 희망을 꿈꾸고 있습니다. 사람이 관심이 있다는 말은 뭐냐? 갖고 싶다는 거예요.
갖고 싶지 않은 것은 관심이 없는 거예요. 만약에 어떤 사람이 나보고 “목사님, 진돗개 드릴까요?” 하면 “나 관심 없어! 나 개 딱 싫어하거든.” 그런데 같은 개인데 대게를 준다? 아! 이거는 감사하죠. 왜? 갑자기 대게에게 관심사가, 대게에게 관심을 둔다 이 말이죠. 사람이라 하는 것은 대외적으로, 바깥에 표현을 할 때 평소에 나는 뭐를 갖고 싶었다? 거기에 관심을 두게 되어 있습니다.
이제부터 어려워져요. 뭐냐 하면은, 성경에서 말하기를 성령이 오신다고 했거든요. 그러면 오신다고 했을 때 우리가 마중을 나가려면, 성령을 은근히 관심 가지고 소유하고 싶어서 기대를 갖고 있을 때 성령 자체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게 아니겠습니까? 성령에 대해서. “안 그래도 성령 받고 싶어서 내가 얼마나 힘들이고 애썼는데, 성령 주신다고요? 그 귀한 선물을 주시다니 기다릴게요!” 이렇게 된다 이 말이죠.
그런데 저한테 진돗개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누가 달라했어요? 그냥 오신데! 그냥 오시니까 이 경계선에서 주님은 이 땅에 성령을, 모든 사람이 자기 소유에 관심 있고, 성령을 주신다 하니까 이 경계선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겠어요? “뭐지? 왜 오지? 아, 오시면 왜 옵니까?” 그러니까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그 다음에 뭡니까?
여기에(성경) 그대로 하면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받지도 못함이고. 그러니까 성령에 대해서 알지도, 받지도, 보지도 못한다는 말은 이미 다른 꿍꿍이속으로 이 세상이 꽉 차있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성령이라는 것은 뭐냐 할 때는, 이 세상을 뭐하냐 하면 이거죠. 이 세상을 고발하는 겁니다.
인간이 평소에 자기가 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는 것을 마이웨이라 하는데 내 방식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자기 자신이 근원적으로 그것을 탓하거나 부정할까요? 자기가 이만큼 사는 것이 따지고 보면 얼마나 공들여왔습니까? “자식 네 명이 있다.” 얼마나 공들였어요? 자식들 참, 엄청나게 공들인 거죠.
우리교회 어떤 반주자가 애기를, 딸을 낳았는데, 나이 많아 딸을 낳았는데 이야기 들어보니까 그렇게 운대요. 왜 우느냐? “얘가 뭔데 내가 이렇게 힘들어야 돼?” 이제 한 달 됐는데, 애 키우는 게 자기는 처녀로 있으면서 경험하지 못한 아주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당하니까 평소에 하는 생활방식은 뭐냐 하면은 희생이 아니고 자기 단도리거든요.
“이거 내꺼! 이거 내꺼!” 자기 챙기기에 급급하면서 처녀로 살다가 집에서 애 낳고 애는 시도 때도 없이 밤낮으로 울어재끼죠. 귀뚜라미도. 울고 달래줘야 되고, 달랜다고 뚝 그치면 그게 기계지 인간이겠습니까? 온갖 뭘 해도 계속 울 때에 “왜 내 인생이 이런 식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 뒤죽박죽이 되어야 되느냐?”
그 상황을 자기 인생에다가 담을 자리가 없어요. 왜? 자존심이 있거든요. 항상 깔끔하고 깨끗하고 그런 게 있는데, 모든 지저분하고 다 이렇게 자기가 완전히 뭉개지는 자기의 모습을 보면서, 자기한테 너무 실망스럽고 억울하기도 하고 이래서, 이럴 때는 할 방법은 뭐 밖에 없습니까? 혼자서 우는 방법 밖에 없죠. 여러 번 운다는 거예요. 그것을 남자는 모르리~ 정말 모르리.
여자가 해산하는 고통뿐만 아니고 애 키우는 고통이 얼마나 어려운지 남자는 모르지. 요즘은 이제 남자도 애를 같이 키우기도 하잖아요. 옛날에는 애 키우는데 남자가 끼어들고 그런 건 없어요. 남자는 애 울면 애 가지고 문 열고 바깥에 던지기 바빴지. 그만큼 이렇게 자기가 단단하게 고정돼 있는 인생에 대해서 갑자기 난데없이 누가 외부적으로 왔을 때에 이것은 반드시 여기에서 허물어지는 경계선이 있어요.
부부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좋다고 말하는 그들은 뭐라고 이야기 하느냐 하면 사랑이라고 이야기해요. 사랑도 뭔지 모르는데 하여튼 일단 좋다는 거예요. 둘이 있을 때 좋은데 막상 살아보니까 조종할 요소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조종할 요소. 변기 뚜껑 열고 오줌 누는 것부터 해서 양말 벗어서 거꾸로 하지 말고 반드시 해야 되고, 조종할 요소들이 너무 많은 거예요.
그런데 왜 그게 괴로웠냐 하면은 이러다가 내가 단단하게 고정돼 있는 이건 나만의 것, 얼마나 끌어 모았어요? 나만의 소유. 이 내 것을 저 상대방 때문에 내 인생을 변질시켜야 될 어떤 위험한 것을, 위기를 느끼는 거예요. 그런데 사람이 제일 위험할 때가 뭐냐 하면 내가 아닌 내가 되는 거. 내가 아닌 내가 되어버리면 그걸 뭐라고 하냐 하면 그걸 정신병자라고 합니다.
그 산후우울증이 올 수도 있어요. 내가 아닌 나. 그 유명한 말 있잖아요. 내가 이러려고 사냐 하는 거. 내가 왜 이러려고 사느냐 이 말이죠. 내가 생각하는 나는 따로 있고, 그리고 현실의 나는 내가 원치 않는 나로 달라질 때에 그 갭, 그 간격을 뭐로 메꿔야 되는데 뭐, 쇼핑으로 메꿀까요? 뭐, 취미생활로 메꿔? 어떻게 메꾸냐 말이죠. 그래서 여자가 결혼을 하는 게 좋고요, 결혼했으면 애 낳는 게 좋아요.
그게 뭐냐 하면, 이거에요. ‘해석하는 나’와 ‘해석되는 나’와 이게 하나가 아니고, 이게 여기에 큰 갭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겁니다. 해석되어진 나와 해석하는 나, 젊을 때는 비슷해요. 젊을 때는. 고집들이 있어서. 그런데 막상 사회에 나가면 해석하는 나와 해석되는 나와 합치가, 일치가 안돼요.
그럼 일치가 안 되면 그럼 뭘 포기하겠어요? 나를 포기하고 현재 되어지는 이것을 그냥 수긍해야 되겠죠. 그런데 수긍할 수 있는 인간은 없습니다. 모든 인간은 극도로 반항해요. 수긍을 하는 게 아니고. 자꾸 괜찮았을 때를 향하여 미련을 버리지를 못합니다. 그러면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현실은 다를 때에 그 중간의 갭을 그건 누가 메꿔준다고 생각하느냐 하면은 바로 교회가 그것 때문에 있는 거예요.
가서 요구를 하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지금 이 모습은 내가 원치 않는 내 모습이니까,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빨리 단결해서 하나 되게 해주신다면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 뭔들 못해드리겠습니까?”하고 하나님에게 거래에 나서고 흥정에 나서는 겁니다. 그거 아니면 교회 갈 이유가 없어요. 그렇잖아요? 교회 왜 갑니까?
미흡한 게 있어서 가고, 미흡하기만 하면 돼요? 그 미흡한 거 채워줬다는 소문 듣고 가는 거예요. “기도를 하든지, 헌금 하든지, 봉사 하고 말씀공부 하게 되면 네 소원 들어 준다더라.” 라는 그거 듣고 가는 거예요. 누가 그렇게 이야기 하지 않아도 그렇게 믿고 싶어! 그렇게 믿고 싶어 와서 뭐라고 하면, 상시 들어가요.
믿습니다가 되는 거예요. 이거 얼마나 안 믿어지면 믿습니다가 들어가겠어요. 그러니까 교회 가서 주님 생각 하는 게 아니에요. 자기 생각을 하면서 교회 가는 거예요. 자기 생각하면서 해석되어지는 나 말고 지금 내가 해석하고 싶은 나, 그 나를 하나의 이상, 모델로 삼아서 아예 오기를 부리는 거예요. 오기를. 절망하지 않고 희망을 갖고 오기를 부리는 겁니다.
거기에 누가 보조를 맞춰 주냐면 목사가 보조를 맞춰주지요. 성경구절을 가지고 맞춰줍니다. “이렇게 기도해서 이런 효과 본 사람이 이렇게 많이 있습니다.” 특히 그 유명한 구절이 뭐냐, 과부 이야기 알죠? 과부가 재판장에게 갔는데 귀찮다고 “내일 오시오!” 하니까 “아닙니다! 들어줘야 합니다!” 이렇게 간절히 했더니만 귀찮아서라도 응답한다. 그런 구절이라든지,
사무엘상 1장에 나오는 한나가 자식 없어서, 아들 없어서 그렇게 서러움 받을 때 얼마나 기도했으면 그 제사장 엘리 제사장이 “아줌마 술 먹었어요?” 할 정도로 했겠어요? 그만큼 정신없이 기도했다는 거예요. 그러나 어쨌든 간에 정신없이 했든 뭐든 그건 과정이고 중요한 것은 결과물이잖아요.
결과물에 누굴 낳았어요? 사무엘을 낳았잖아요. 사무엘만 낳았습니까? 다른 아들도 세 명인가 낳았잖아요. 세 명인가, 뭐 몇 명인가? 여러 명 낳았거든요. “이야~! 이 하나님 좋은 하나님이구나! 이런 하나님을 안 믿다니!” 그 다음부터는 어떻게 합니까? 계속 하나님 앞에 해가지고 하나님 앞에 기도의 응답받은 성과를, 그다음에 뭡니까?
성과를 내가 소유하게 되면 나는 졸지에 주위사람에게 무슨 사람으로 인정받느냐 하면은 무슨 사람이 돼요? 믿는 자. 다른 말로 하면 능력 있는 자가 돼요. 능력 있는 자, 믿는 자가 돼 버리면 이건 바로 내가 해석하고 싶었던 그 목표를, 내가 교회에서 달성하게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게 주님 사랑입니까? 어때요? 이게 주님 사랑입니까? 아니면 자기 사랑이에요? 자기 사랑이죠.
지금 방금 하는 이야기 가운데서 인간이 이렇게 해석하고 해석 받는 이게 본심인데, 그 이야기부터 해서 그 이야기 할 때 성령이, 성령 이야기가 들어갔어요? 안 들어갔어요? 안 들어갔지요? 기도해서 응답받는데 성령이 왜 들어갑니까? 자기가 말씀 지켜서 복 받는데, 말씀 지키면 복 받는다면서요? 말씀 지켜서 복 받는데 성령이 왜 들어가요?
선교해서 선교회비 냈는데 거기에 성령이 왜 들어갑니까? 십일조해서 십분의 일 떼서 하는데 성령이 거기 왜 들어가요? 거기에 성령 안 들어가도 사람이 계산도 못합니까? 백만 원 같으면 십 만원. 내잖아요. 여기에 성령이 들어갈 틈이 없어요. 그 정도는 내가 할 수 있어요. 십분의 일 계산 그 정도는 나정도 머리가지고 되거든요. 여기 성령이 왜 들어가요?
아니, 딱 깨놓고 말해서 외부 도움 받아서 할래요? 아니면 본인이 할래요? 어느 것이 평소의 내가 사는 생활방식에, 나한테 딱 적합합니까? 내가 나한테 물어보고 내가 결정하는 게, 내 의지로 결정하는 게 편합니까? 아니면 찡찡거리며 이것도 못한다. 저것도 못한다. 늘 이렇게 귀찮게 물어보는 게 그것이 내 평소의 생활에 적합합니까? 어느 쪽입니까?
사람이 지가 할 것은 지가 해야, 지 자존심이 계속 살아나게 되어 있거든요. 제가 지난 주일오후에 이런 설교를 했잖아요. 바리새인들이 왜 천국 문을 안 들어가는 이유는 그게 닫혀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게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안 들어가는 거예요. 활짝 열려있기 때문에. 열린 문을 그냥 들어가면 이거는 자기의 뭐가 빛이 안나요?
자기의 행함이 빛이 안 나잖아요. 자기 행함이 빛이 안나버리면 주께서는 뭘 안 물어요? 내가 얼마나 내 인생 이만큼 살았는데, 내가 내 인생 이만큼 공들였다는 것을 자랑할 기회조차 부여받지 못하죠. 그렇죠? 그냥 열린 문에 그냥 들어가 버리면 내가 쪼다가 되고 바보가 되도 구원받는 셈이 되잖아요. 이게 싫은 거예요.
예수님은 뭐라고 하냐하면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 보다 먼저 천국 간다고 하죠. 그러면 그 소리를 들었으면 바리새인들이 그 소리를 진지하게 들으면 뭐해야 됩니까? 세리와 창기가 되려고 애를 써야 돼요. 왜냐하면 인간은 자기 인생밖에, 자기 인생만 사랑하잖아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창기가 천국 간다고 하니까, 자기가 자기를 사랑하기 때문에 죽어서도 사랑해야죠.
그러면 천국 가는 방법은 뭡니까? 세리 되고 창기 되는 방식을 하면 될 텐데 안 그러지요? 그럴 수 없죠? 예수님을 죽여 버리잖아요. 마태복음 19장에 부자청년이 분명히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이미 방법을 이야기해줬습니다. 모든 걸 팔고, 가난한 자에게 주고, 그러면 뭐가 돼요? 이젠 부자 아니죠? 다 줬으니까 부자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미 자기의 방식이 뭡니까? 나는 어릴 때부터 십계명 지켰다 했죠? 그러면 십계명 지킨 것이 영생 얻는데 보탬이 된다? 안 된다? 그것마저 공중에 찢어 버려야 돼요. 자기 과거의 성적표 있잖아요, 성적표? A⁺ 있는 거, 우수수수 하는 그거 찢어 버려야 돼요. 그런데 그거 찢은 순간 자기가 자기 인생을 공들여 살아온 그 인생 자존심도 같이 찢겨버리고,
해석하는 나도 같이 찢겨버리는데, 누구 좋으라고 내가 내 인생을 찢어버립니까? 그렇게 할 사람은 없지요. 아무도 없지요. 천국 문을 열어놓았을 때 인간이 얼마나 성깔이 더럽고 못됐는지가 다 드러나는 겁니다. 얼마나 자기 행함, 자기 공로, 자기 성과, 죽자고 평생 그것만 쥐고 살아간다는 것이 문이 활짝 열려 있음에도 안 들어감으로써 그게 다 노출되는 거예요.
다 드러나는 겁니다. 그러고 보니까 참, 교회라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곳이고, 교회 다니는 우리 자신들이 내가 다니는 교회를 위험하게 빠뜨리는 하나의 요소로서 작용할 수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지금 오늘 본문대로 하게 되면 간단합니다. 성령이 오되 아무도 못 알아본다. 일단 그렇게 정리해봅시다. 왜 못 알아봅니까?
아까 이야기 했죠. 인간은 자기 소유에게만 관심이 있기 때문에 자기소유가 되지 않는 데는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나라는 인간이 이런 소유가 중첩 되어있기 때문에. 중첩. 소유가 중첩 되어있어요. 중첩이라는 말을 했으니까 중첩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려운 말인지 좀 설명을 해드리겠습니다.
보통 중첩이라는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니에요. 기왓장을 중첩했다 하면 기왓장을 하나 놓고, 기왓장을 또 하나놓고 이렇게 되죠. 우리 외손녀가 어느 날, 어제인가 화상통화를 해보니까 사과를 먹는데 사과를 보통 이렇게 하나 먹잖아요. 그런데 사과를 두 쪽으로 겹쳐서 먹어요. 그래서 “왜 저렇게 두 개로 겹쳐서 먹지?” 하니까 내 딸이 하는 말이 어제 햄버거를 가지고 이렇게 자기가 먹어보니까 그것을 보고 사과도 햄버거처럼 이렇게 먹는다는 거예요.
“이거 참 부모 하는 걸 그대로 하는구나.” 이랬는데, 이게 흔히 아는 중첩입니다. 중첩인데,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중첩이 이런 내용이 아니에요. 중첩이라는 것이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양자물리학에서 중첩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양자가 중첩되었다는 말은 어느 한쪽이 이렇게 있고, 양자 하나가 있고, 양자, 초립자가 하나 있고, 여기도 하나 있는데, 이게 거리가 한 250만km라고 합시다. 거리가.
그러면 누가 봐도 이거는 따로 놀죠? 25m도 아니고 250만km니까 이건 전혀 완전 딴 공간이잖아요. 그런데 한쪽을 작용하면 한쪽이 같이 움직이는 거예요. 이게 양자 세계에요. 이걸 이용해서 만든 게 양자 컴퓨터라 하는 게 만들어졌습니다. 이것을 양자물리학에서 중첩이라고 해요. 중첩.
중첩 또는 얽힘. 비슷한 말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볼 때는 어디서 일할지 모르기 때문에 확률로 이야기해요. 확률로. 이걸 양자 컴퓨터에서는 큐비트라고 0과 1을 하자. 이것을 큐비트라고 하는데 큐비트란 의미가 뭐냐 하면은, 1이면 1이고 0이면 0이고, 1이면 1이잖아요. 0도 아니고 1도 아니고 확률상 1되고 확률상 0되는 그 양자현상을 이야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이게 존재적 개념이 날라 가 버리고 뭐로 바뀌느냐 하면은 기능적 개념으로만 바뀌어져야 돼요. 양자물리학이나 이게. 지금 성령을 이야기하면서 이걸 설명 할 수밖에 없어요. “저 사람 구원받았습니까?” “예, 성령 받아서 구원받았습니다.” “그러면 저 사람은 어디에 가도 성령이 하는 일이 나오겠네요?”
이렇게 했을 때에 “그 사람이 구원받았고 성령 세례 받았기 때문에 뭘 해도 성령의 일이다.” 이렇게 돼버리면, 어떤 오류에 빠지냐 하면은 그 사람이 나쁜 짓을 해도 이게 성령의 일이 돼버려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렇지요? 내가 이 컵에 물을 마신다면, 방금 이 물은 내 안에 들어왔지요?
그러면 나는 무슨 티를 내야 되냐 하면은 이 물을 마셨다는 티를, 내가 서울 가나, 대구 가나 어디에 가도 티를 내게 되어있다는 것이 우리들이 하는 존재론적 관념이에요. 존재 안에다가 뭐가 하나 들어가게 되면 그것은 못 빠져나오고 어딜 가도 그 티를 내게 되어있다. 인간성 좋은 인간은 어딜 가도 인간성 좋다. 보통 그런 이야기하잖아요. 가정교육 잘 받으면 어딜 가도 가정교육 잘 받았다. 이런 이야기하잖아요.
그걸 인간들이 그런 존재적 관점을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사람들이 무엇을 보느냐 하면 성경을, 주님께서 어떻게 활동하느냐는 관심 없고, 내가 이 말씀대로 과연 실천에 옮길 수 있는 하나님의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이 성경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내 안에 내가 소유하면 되는데, 그럼 소유하려면 뭐냐 하면은 전에는 성령 못 받아서 율법을 못 지켰는데, 이제 성령을 받게 되면 나는 어디서 뭘 해도 성령 받은 티를 내게 되고, 그 성령 받은 티가 바로 모든 말씀을 다 지킨 게 된다.
그렇게 되면 나는 뭐가 돼버려요? 뭘 해도 성령의 일을 하니까 나란 존재는 뭐냐 하면 그게 바로 위대한 절대적 신이 되는 거예요. 악마가 인간에게 심어준 그 심보가 뭐냐 하면은 선악과 따먹는 날에는 뭐가 된다? 니가 뭐된다? 신이 되고 싶은 거예요. 제가 이렇게 하면 “목사님, 겸손한 사람 있잖아요?”하는데, 그 겸손이 신이 되는 하나의 요건으로 들어간다고요. “부족 합니다~”
이게 하나의, 부족함을 모르는 사람들은 더 월등한 신의 자리에 오른 게 됐다니까요. 쉽게 말해서 나한테 어떤 소리가 나오고, 어떤 반응이 나오고, 어떤 태도가 나오든 그걸 뭉치면 뭐가된다? “역시 나는 하나님 맞아! 역시 나는 완벽해! 난 절대자야!” 내가 절대자 된 사람이에요. 자기가 절대자 될 때까지 인간은 만족함이 없어요.
모든 불만은 뭐냐? 절대자가 못 되서 불만이에요. 주식을 하나 샀다고 합시다. 샀다. 샀는데 과연 이게 주식이 안 오르면, 그건 천만 다행이죠. 아, 역시 내가 뭐가 아니구나? “신이 아니구나. 역시 하나님하고 나는 동기생이 아니고 하나님이 날 안 도와주시는구나.” 이러면 되는데, 했는데 마침 오른다?
“이야~ 이거 하나님도 나를 알아보네?” 자기가 갑자기 순간적으로 절대자 된, 미래를 미리 예측한, 절대자 된 그 재미로 인생을 살아가는 겁니다. “비록 일곱 번 실패해도 여덟 번째는 성공하겠지!” 그 재미로 살아가요. 인간은. 인간은 자기가 스스로 신 됨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누가 아느냐? 철학자들도 이미 알고 있어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화가 나듯이 이야기합니다. “인간은 존재자에 불과합니다. 이 사람들아!” 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인간은 존재자입니다. 존재 플러스 자(존재+자)입니다. 존재자, 놈 자(者)자를 써서 존재자입니다. 그러나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존재자가 아니고 바로 존재입니다. 그런데 존재자는 존재를 모릅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제발 자신을 좀 낮추세요!” 이게 하이데거 철학입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가 뭐냐 하면은 안다고 우기기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는 겁니다. 안다고. 그런데 안다고 우기는 게 누구 중심으로 알아요? 자기중심으로 알잖아요. 자기중심으로서 알게 되면 거기서 필히 뭐가 나오느냐면 범죄가 나와요.
세상의 모든 범죄는 뭐냐? 자기밖에 몰라서 그래요. 자기밖에 몰라서. 술집에서 술 먹으면서 소리 크게 외치는 거. 이게 소리 외치면 다른 사람의 음파에 너무, 이야기하는데 지장이 된다. 이걸 알면서도 크게 합니까? 아니잖아요. 시비 붙지요. 다투지요. 쌍방구타. 경찰서 가는 거죠. 세상의 모든 범죄는 누구밖에 몰라요? 나밖에 몰라요.
“내가 너 사귄다고 돈 투자하고, 가방 사주고, 여행 보내주고 했는데 이제 와서 다른 남자 만나서 왜 나를 떠나? 너 떠나려면 내 손에 죽어라!” 이게 뭡니까? 지가 그 사람한테 해준 것 밖에 모르지요? 자기밖에 모르잖아요. 그러면 한번 물어봅시다. 그런 범죄를 안 저지르면 본인은 압니까?
그걸 범죄 대기자. 또는 잠재적 범죄인이라 해요. 아직 자극을 못 받아서 범죄를 안 저지르고 있는 것뿐이지,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질지를 몰라요. 그래서 하이데거는 그걸 가지고 “당신들은 자기밖에 모른다.” 그게 존재밖에 모른다. 자기는 존재자인데, 존재자를 마치 천상천하 유아독존. 존재자인데 존재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 증거가 뭐냐 하면은, 세상 돌아가는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돌아가야 돼요. 만약에 지금 내가 경기도 안성 땅에다가 농사를 지었다. 농사를 지었는데 올해는 농사 빚 갚고, 농협 빚 갚고 하려고 하는데 비가 안와? 비 안와서 기분 좋아요? 지금 비 안 오면 기분이 그렇게 좋습니까? 이게 만약에 성령 받은 기능인이라면 비오고 안 오고가 누구 소관입니까? 주님 소관이죠?
그럼 주님이라는 것이 존재입니까? 기능입니까? 주님은 존재죠. 주님 살아 계시잖아요. 실제로 존재하잖아요. 그러면 주님 존재하고 내 존재하고 이게 뭐냐? 경쟁 관계에 있잖아요. 경쟁 관계. 비 안 왔다? 나는 농사지었으니까 비가 왔으면 싶은데, 주님께서, 이 충청도에 비가 안 오잖아요. 그러면 우리는 기분 나빠 해야 될까요?
성경에 나온 대로 범사에 감사해야 될까요? 뻔한 답변을 알면서도 제가 묻는 이유가 뭡니까? 그 답변을, 정답을 여러분 입으로 해보세요. 해볼 때 껄끄럽게 정답이 안 나와요. 정답이 나오느냐고요? 껄끄럽게! “아! 난 그 질문하기를 기다렸습니다.” 이게 아니잖아요. 지금. “아이 씨~ 뻔히 알면서 왜 물어요? 난처하게.”
이게 존재 경쟁이라 해요. 존재경쟁. 제자들이 예수님을 왜 안 믿었습니까? 그들은 예수님이 자기 존재를 신으로 만들어 줄줄 알고 믿은 거예요. “예수님! 우리 가운데 하늘나라 가면 누가 높습니까?” 항상 지향하는 게 뭐냐 하면은 누가 잘났나? 누가 높으냐? 그 누가 잘났나? 누가 높으냐? 하는 것은 어디서 배운 버르장머리입니까? 어디서 배운 거예요?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이 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겁니다. 이 세상이 다! 아까 쉬는 시간에 말했지만 그게 구조잖아요. 구조가 낳은 자식이 우리 존재가 됐다는 말이죠. 제가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은 “우리 정신 차리고 이제는 제대로 삽시다!” 지금 이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에요. 성경에는 그런 이야기가 없어요.
“제대로 삽시다!”하면 제대로 산 사람이 뭐가 됩니까? 두 자로 하면? “제대로 삽시다!”하면 그게 두 자로 하면 뭐가 돼요? 일본 가시기 전에 정답 맞춰야 되는데? 그게 ‘존재’에요. 존재. 또 존재를 그렇게 비교하면서도 우리 존재를 포기 못한다니까요. 그렇게 사는 괜찮은 존재가 누구라고요? 나! 이게 바로 해석하는 주인공, 나에요. 이걸 주체라고 해요. 나, 주인. 교회 다니고 성경 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결국 다시 내던져 돌아오는데. 아까 양자, 얽힘. 또는 양자, 중첩. 얽힘, 중첩은 좀 다르지만 같다고 봅시다. 전문 물리학자 공부할 게 아니니까. 양자 이것은 확률적으로 태어나는 거. 확률적으로. 그러면 우리는 하루를 살면서 성령의 일을 할 거냐? 아니면 내 육체의 일을 할 거냐? 하는 것은 결국은 뭡니까? 내가 미리 짐작할 수 있어요? 없어요? 짐작이 안 됩니다.
때가 되매. 때가 되매 그런 현상이 일어날 때에 “내가 했다!”는 내 존재를 내비치지 마시고요. 내 존재는 죽은 걸로 보세요. 나는 죽고 내안에 누가 산다? 예수님이라는 존재가 나를 가지고 주님의 존재를 확인하고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 주의 증인되기 위해서 나라는 것을 기능적으로 사용하시는데, 그 기능적으로 사용하시기 위해서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고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오신분이 누구냐?
바로 지금 제가 이야기 하려는 성령입니다. 성령. 누가 “성령이 무엇이냐?” 묻거든요. ‘소속’이라고 이야기하세요. 소속. 제일 알기 쉬운. “성령은?”하면 뜨겁다! 뜨거운 거 하지 말고, 그건 난로가가 뜨겁고, 성령은 “와와 라라~” 이런 거 하지 마세요. 벙어리 되지 마세요. 발악하지 말고, 성령은 그냥 소속이다. 소속. 내가 소속된 영역이 성령이죠. 그리스도 안.
내가 거기에 소속되게 되면 나는 내 존재를 증거 하기 위해서는 더는 못삽니다. 못 살고, 주님이 나에게 행하신 것을 위해서 살게 됩니다. 주님이 현재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열두 제자들이 사도행전 3장에 보면 성전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를 낫게 했잖아요. 낫게 했을 때에 누가 봐도 현상적으로 누가 낫게 했습니까?
뭐 몇 마디 말하고 일어나라 하니까 일어나고, 그 일어나라는 명령은 누가했어요? 제자들이 했지요. 누가 봐도 제자들이 능력으로 했어요. 그런데 막상 제자들에게 이야기 하니까 누구한테 돌립니까? “내가 안했어요.” 내가 안했고 그리고 주님을 소개하지도 않았어요. 왜냐하면 주님께서 앉은뱅이하고 직접 매치 해가지고 주님이 앉은뱅이를 걷게 했고, 우리는 그 옆에 구경하는 구경꾼이죠. 사도들이. 목격자가 되는 거예요.
어떤 기이한 현상, 예상 못한 현상이 일어났을 때에 “그럴 줄 알았어! 주님이 살아계셔서 그 일을 할 줄 알았어!”라고 증거 할 수 있는 이 사람들이 뭐하는 사람들이냐? 바로 성령 받은 사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특징이 뭐냐 하면 “내가 했다!”가 안 나와요. “내가 주님한테 하청 받아가지고 내가 했습니다!”가 안 나와요.
주님한테 하청 받아서 내가 하는 게 아니고, 아예 주님이 내 안에서 일을 하시는 거죠. 저 부산에, 우리가 부산에서 공부하고 난 뒤에 단골로 가는 쌈밥집이 있어요. 그 집에 가면 메인 코스가 나오고 골라잡아서 할 수 있는 각자 취향대로 하는 게 있는데 “막국수 잡수실 랍니까? 뭐 드실 랍니까?” 그 중에서 통밥이 있어요. 또 알밥도 있고. 나는 막국수나 쟁반국수 이런 거 먹는데, 통밥이 뭐냐 하면은 대나무 통에다가 밥 담은 거예요. 그러면 우리는 뭐냐 하면은 이 대나무에요.
내용은 뭐였어요? 주님의 구조. 아까 말한 구조 또는 주님이 하신 언약. 말씀이 담기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앉은뱅이를 낫게 했다? 그러면 앉은뱅이가 낫는다는 것은, 이걸 언약적으로 보면 때가 되매, 확률적으로 때가 되매, 앉은뱅이가 앉은뱅이 돼야 되고, 때가 되매 앉은뱅이 갖다가 사도라는 것을 주님께서 만나게 해가지고, 사도의 말을 듣고 주님을 믿어서 그때부터 이제는 앉은뱅이가 아니고 걷게 되는 그런 이벤트를, 누가 목격했다? 이 대나무되는 사도들이 목격을 한 거예요.
근데 사람들은 누가 했다고 합니까? 사도들이 경건과 능력으로 했다고 하잖아요. 그럴 때 사도들은 어떻게 합니까? “내가 한 게 아니고 주님이 이야기 했다.” 이렇게 되는 거잖아요. 그러면 주님이 증거 하는 방식은, 성령이 와서 주님을 증거 하는 방식은 이미 공식이 나왔네요. 어떻게 합니까? “나는 아니요!” 반드시 이게 들어가야 돼요.
“나는 아니요!”라고 들어가야 돼요. “나는 아니요!” 어떤 분이 우리 교회 와서 기도를 하셨는데 멀리 계신 분이거든요. 울진에 사시는 분이에요. 일부러 왔어요. 그래서 전부터 아시는 분이라서 억지로 기도를 부탁해서 짧게 한다고 하시는데, 그만큼 짧게 할 줄은 몰랐는데 하여튼 짧게 했어요. “예수님은 생명이다.” 이렇게 했어요.
그 분한테 미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주님은 생명이다.”라는 말은 틀린 말은 아닌데 그 앞에 뭘 하나 달았으면 좋겠다. “나는 어두움이요. 나는 죽음이요. 주님은 생명이다.” 주님은 진리라 할 때는 반드시 앞에 뭘 달아야 되나? “나는 거짓이요. 주님은 진리입니다.” 그리고 주님이 그리스도 몸이라 할 때는 “현재 모인 이것은 교회가 아닙니다.”라는 말을 목사가 꼭 해야 돼요.
“현재 우리가 모여 있죠? 간판 달았죠? 이거 교회 아닙니다. 교회는 그리스도 몸입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해야 돼요. 그래야 각각 기능, 그 순간 그 기능이 나오도록 해 주는 것을 기대해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겁니다. 자, 그러면 이렇게 했는데, 다시 한 번 여러분 아시겠죠? 정리하는 의미에서.
만약에 성령을 안 받았다고 칩시다. 안 받고 난 상태에서 성경보고, 교회 만들어서 천국 간다고 사람들에게 소개해서 모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어떤 고백이 나오겠어요? 제가 하는 건 이런 이야기입니다. “관심사가 엉망이면 나오는 것도 당연히 엉망이다.” 이말 맞죠? 관심사가 엉터리에요. 그러면 나오는 것도 뭡니까? 엉터리죠.
자, 그렇다면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 관심사가 어디 있느냐 이 말이죠. 성령을 안 받은 상태에서 관심사는 이것뿐입니다. ‘개인구원’입니다. 개인구원. 개인구원을 다른 말로 하면, 교회에서 나온 신학을 가지고 무슨 신학이라고 하냐면, 이걸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라고 합니다. 개혁주의 신학. 전에 그 복음 전한다고 소문난 김성수 목사라는 그분이 복음 전했잖아요.
그분이 그 내용을 보면 어디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개혁주의 신학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거예요. 그러나 교인들은 딴 건 다 좋은데 개혁주의 신학 전체를 포기하는 것은 교인들이 용납이 안 되는 겁니다. 왜? 개혁주의 신학을 만약에 빠져나와 버리면 그들이 은근히 기대했던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괜찮은 목사 만나서, 괜찮은 목사, 복음 받아서 괜찮은, 남 보란 듯이 “한국교회 한번 봐라! 이런 교회도 다 있다!” 지 교회 자랑하고 싶은 그 욕구와 욕망을 가져갈 수가 없어요. 진짜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이 땅에 괜찮은 교회 하나 좀 있어야 되는 게 마땅한 논리고, 그렇다면 그 교회를 누가 할 것이냐?
복음 전하는 목사가, 바르게 전하는 목사. 한국교회 썩은 것을 도려내시고, 이 땅에 진짜 구원의 소식을 전하는 그 목사가 와서 주게 되면, 그야말로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통하는 진짜 교회가 될 거라는 그 희망, 그 희망을 교인들이 포기할 수가 있겠어요? 여러분, 지하철에 공익광고가 있어요. 지하철에 가면.
111 이라는 광고 봤습니까? 지하철 타시면 나오는데, 111 이라는 그 광고. 수상한 사람이 있으면 여기에다 신고하라고, 111에다가 신고하라는 하는 광고 기억 안 납니까? 사람들 시커멓게 실루엣 그려놓고, 이렇게 하얀 111 틈으로 이렇게 해놓고, 위에서 광채가 비취는 그 광고요. 이야기 듣고 지하철 한번 타보세요. 이런 게 있어요. 제가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은 바로 그 서머나 교회 있죠?
서머나 교회가 바라는 게 이거에요. 하나님의 그 진리가 우리 교회에 빛의 후광처럼 촤악 비취기를 바라는 겁니다. 그리고 이런 교회에, 아까 성령은 뭐라고 했어요? 소속이죠? 이런 교회에 소속 했다면 나는 이건 뭐, 나의 미래, 나의 구원은 따놓은 당상인거에요. 땡잡은 거죠. 그리고 거기에다가 또 김성수 목사님이 뭐 합니까? 헌금 같은 거 안 해도 된다고 하니까 이건 뭐, 돈까지 챙길 수 있고, 헌금 부담 없지, 목사님 혼자 고생해서, 공부해서 설교 한 시간 반씩 했는데, 전도 안 해도 “소문 듣고 왔어요.”
해서 조회수 만 얼마해서 꾸역꾸역 들어오지, 그런 사람들이 자진해서 돈을 냅니까? 교회 운영비에 대해서 앞장서서 사람이 걱정할 필요 있어요? 없어요? 없지요? 있는 교회는 자꾸 가기만하고, 자꾸 빠져나가고, 일본가고. 걱정되잖아요. 세상에 이런 좋은 일이 어디 있어요? 이런 좋은 일이. “고생 너 혼자해라.
우리는 그냥 그 쇼에 관람, 박수치고 잘 합니다!”하고 박수 쳐주면 되는데, 그것까지 부정을 해야 돼요. 복음은. 그것까지! 그것까지 건드려야 되거든요. 그게 과연 건들일 수 있었는가요? 아니면 못 건들었나요? 건드리는 시늉만 했는가? 진짜 건드렸느냐? 이거는 주께서 아시겠죠. 나는 아는데, 나는 못 건들인 걸로 나는 알고 있거든요.
설교 딱 보면 알잖아요. 교인들이 호응해줬다는 것을 저는 알아요. 주의 뜻도 아니면서 괜찮은 교회 해보겠다는 일반 교인들의 여망에 부응했다는 것을 알아요. 알지만 아닌 척 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이런 것은 미국에 있는 성현경 목사도 마찬가지에요. 설교 너무 좋다? 이 말을 제대로 들어야 돼요.
“괜찮은 교회는 누구나 한두 군데는 있어야지!” 이렇게 해석해서 들리는 거예요. 그런데 만약에 저런 교회에 등록 해버리면 뭐가 빠지냐 하면은 “나는 죄인이요!”가 누락이 돼버려요. 아까 제가 뭐라고 이야기 했습니까? 교회 이야기할 때 뭐라고 했어요? 주님의 몸이 교회라면 나는 뭐다? “내가 생각한 그 교회는 어떻게 완벽에, 완벽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춰도 그것은 교회가 아닙니다!”라고 고백이 나와야 돼요.
그러나 우리 마음속에 “아! 이렇게 교회는 많은데 내 몸, 내 마음하나 안심하고 다 던져놓고 나중에 눈떠보니까 천국오고, 이런 괜찮은 진짜 제대로 된 교회, 백퍼센트 다 신뢰하고 믿고, 마음 놓고 뭘 해도 나중에는 결국에는 천국에 골인되는 그런 교회 하나 내가 소속되면, 내가 얼마나 좋겠나?”하는 그런 바람이 있죠? 그 바람이 뭐냐 하면은 개인구원 욕구에요. 그게.
그게 개인구원 욕구라고요. 그게 바로 개혁주의 신학이고. 이렇게 하시면 이렇게 구원받습니다. 그런 공식들을 가르치는 거예요. 그건 뭐 속독, 글씨 빨리 읽는 것만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그거 배우게 되면 그 배우는 소유가, 그게 배우면 누구한테 소유되겠어요? 소유? “저 정보 괜찮네?” 내가 또 소유하겠죠?
그러면 난 소유하고 중첩 되겠죠? 차곡차곡 쌓이겠죠? 그러면 그 공들였던 게 아까워서 어떻게 그게 내가 세리 되고 창기가 되겠습니까? 그게 아까워서. 그거 써먹을 수 있는 천국 문을 찾아다니죠. 내가 이정도로 믿음이 좋고 이런 기도 잘한다를 티내고 그걸 칭찬해줄 수 있는 그런 단체, 교회를 찾아가겠죠. 그런 교회 가야 칭찬 받으니까.
성령이 왔다는 것은요. 예수님 오신 것과 똑같아요. 예수님 오셨을 때 아무도 예수님을 못 알아봤어요. 왜냐하면 이사야 53장보면 그게 예언이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양 같아서 딴 짓하고 있었는데 하나님은 누구하고 계약했더라? 우리는 딴 짓하고 있고, 하나님은 자기 종, 목자하고 채찍질하고 때리고 맞아가면서 이렇게 해가지고 거기에 피를 맞음으로, 채찍에 맞음으로 낫기는 누가 나았어요?
딴 짓하고 있는 우리가 나음을 입고 구원을 받은 겁니다. 그러면 이 말씀이, 이 예언이 그대로 오늘날 성령을 통해서, 주님을 통해서 적용이 된다면, 우리는 바로 이점이 성경에서 납득이 돼야 돼요. 우리가 도대체 어느 정도 개판이기에 하나님은 예수님하고만 약속을 했는가? 그리고 그 개판이라고 말하는 그 내용 중에 하나가 바로, 괜찮은 교회에 소속 돼서 구원 받겠다는 내 개인적인 구원의 여망.
자기 주제파악도 못하고, 자기가 어떤 인간인줄도 모르고, 무조건 이제는 내가 괜찮은 보험회사 들듯이 미리 당겨서 내가 챙겨놓으면, 무슨 일을 해도 다 안심된다하는 자기심리적인 안정감을 얻기 위해서 이런 시도하는 그것이 바로, 그게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한 죄가 된다는 것을 사후적으로 우리가 그것을 인정해야 돼요. 사후적으로.
결국에는 존재 아닙니까? 내 존재. 존재가 있으니까 사랑하죠. 그거 사랑해보니까 주님 사랑은 뒷전이고 내 사랑이 우선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복음전하는 목사가 복음 전할 때에 한번 생각해봐야 돼요. 저 사람의 이야기 중에서 내가 어떤 요소 때문에 내가 저 사람에게 동감하는가? 만약에 교인이 성령을 받았다 합시다. 이제는 어렵지 않아요.
성령을 받았다하면, 아까 성령은 뭐라고 했습니까? 소속이라고 했죠? 새로운 소속.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소속. 그렇다면 이 새로운 소속이 오면 기존의 소속은, 이 존재 소속은 포기해야 돼요? 포기 안해야 돼요? 자동적으로 밀려오게 되면, 성령이 오게 되면 우리는 하나의 통밥처럼 우리는 하나의 중심이 아니고 변두리로 밀려가면서 우리는 이 소속을 날마다 포기해야 되겠죠.
그냥 억지로 포기하느냐? 아니면 수고하면서 포기해야 되느냐? “내가 뭘 해도 죄인입니다.” 다윗처럼 말이죠. “내가 상한심령입니다.” 죄인이면서 포기하겠죠. 그러면 성령 받은 목사가 복음을 전하면 둘 다 공통점이 있어요. 뭐냐 하면은 설교하는 게 이게 의가 아니라는 사실, 내가 목사 하는 이게, 내가 전도하는 이게 의가 아니고 이것마저 죄라는 사실.
그리고 듣는 나도 더욱 더 죄를 죄 되게 하기 위해서 지금 그걸 듣고 있다는 사실. 그럼 그렇게, 그런, 이런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는 것은 소속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만 의인이고, 예수님만 주님이라는 존재라고 붙일 수 있는 분. 존재라고 붙일 수 있을 경우에만 이게 뭐가 붙을 자격이 되냐 하면은 이름이 붙을 자격이 있어요.
이미 이름이 흙인데 다른 이름은 필요 없어요. 박 머시기, 뭐 문재인 이런 거 필요 없어요. 그냥 흙이에요. 주님께서 “아이고, 이름 잘 지었다.”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흙 주제에 이름은 디게 이쁜거 짓네. 뭐, 김 꽃봉오리? 김 꽃봉오리는 흙이 안 됩니까 여러분? 우리 이름은 이미 주님의 이름이 확정되면 우리의 이름은 이미 확정 되었어요. 우리는 그냥 흙이니까, 아담이니까 흙으로 돌아가요.
“그럼 나는 왜 여자 됐어요?” 여자 적 기능하라고 여자 된 거고, “나는 왜 남잔가?” 남자 적 기능하라고 된 거에요. 기능하라고. “왜 태어날 때 우리 집은 재벌이 아닌 거야?” 재벌 아닌 집에 태어나서 기능하라고 재벌 아닌 집에 태어난 거예요. “나는 왜 재벌이냐?” 뭐 그런 사람 없습니다만, 재벌 집에서 마음껏 누리면서 예수 믿으라고 재벌인 거예요.
그러니까 부자 청년은 내가 뭐 부자고 어떻고 자꾸 자기 존재에다 관심 두니까, 주께서 그것을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꾸는 겁니다. 존재에서 기능으로 바꾸는 거예요.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산다 할지라도, 그거는 네 일이 아니고 누구일이다? 주의 일이에요. 어디에서 어떻게 결혼을 해서 살든지 간에, 뭐 도쿄를 가든지 간에 주의 일이에요.
그게 내 존재를 위한 일이 아니고 주님이 나와 함께 있음을, 나는 들러리고 주님의 존재를 드러내기 위해서 일어나는 현상이 된다는 거죠. 그러니까 어디에 가나, 내 주 모신 곳이 어디에 가나 뭡니까? 하늘나라죠.
10분 쉽시다.
녹취:이미아
서울 의존교회 170609a (실패)-이 근호 목사
디도서 2장 9절부터 10절을 보겠습니다.
9절,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10절, 떼어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방금 읽었던 이 본문을 우리가 보면서 우리 구주 하나님이 여기에 개입되지 아니하면 성립될 수 없는 말씀을 주신 거예요. 이렇게, 이렇게 하라 그리하면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한다. 이렇게, 이렇게 하면 빛나게 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거론하지 않으면 이렇게, 이렇게 안 되는 이야기를 내가 했다는 거예요.
더 알기 쉽게 말씀드려서, 하나님 보시기에 선한 일을 한다는 것은 이건 기적에 속한다는 것입니다. 기적에 속한다. 인간의 능력으로 해낼 수가 없다. 이걸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인간의 능력으로 해낼 것 같으면 하나님이 구태여 여기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요. 하나님이 끼어들 필요가 없다 이 말입니다. 너희끼리 잘 해놓고 나한테 검사 맡으라는 이런 식이 되어버리니까.
늘 하나님한테 곁눈질하면서, 지금 이게 옳습니까? 그릅니까? 라고 물어본다는 것은, 지금 내가 잘하고 못하고의 그 판단 기준을 내 쪽에서 내가 내릴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런 답변을 해야 해요. 왜, 내가 생각한, 왜, 내가 지어낸 그런 교훈을 가지고 그걸 지켜서, 그걸 하나님께 숙제라고 내놓지 못할 이유가 뭐냐?
내가 보기에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행동을 가지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그런 행동에 대해서 자기가 충실했고 그것을 잘 정리해가지고, “하나님 저는 이렇게 살았습니다.”라고 하나님한테 가지고 나오는 것이 왜 거부당하느냐 이 말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말씀에 개입하시는 이유는 바로 인간은 자기 원천과 관련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훈으로 받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말씀을 주셨는데 그 말씀을 통해서 움직이다보니까 인간은 자기 원천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자기 근본, 원천. 근데 그 근본, 원천은 인간들이 평소에 살아가면서 관심도 안 가질뿐더러, 그게 나한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본래의 자리를 꼭 알아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본래의 자리를.
만약에 어떤 집의 딸이 시집을 갔는데 애기를 낳았다. 그래서 아버지가 딸한테 “니가 시집가서 딸을 낳아보니까 아버지의 심정을 알겠지?”라고 했어요. 그런데 딸이 하는 말이 “뭐? 뭔데? 나는 그냥 아버지의 심정하고 관계없이 딸을 낳았는데요?” 이렇게 하면 아버지 쪽에서 “니가 자식을 가져보니 니 원천을 알겠느냐?” 그럼 딸이 “그래도 모르겠는데요? 아버지가 뭣 때문에 질문을 했는지, 그 취지를 모르겠어요. 아버지 지금 나한테 시비를 거십니까? 뭡니까?”
그러니까 아버지가 하는 말이 “니가 옛날에 왜 저를 낳았냐고 질문한 적이 있잖아?” “몇 살 때요?” “열두 살 때” 다 잊어버렸으니까 대화가 끊어지죠. 아버지는 “니가 열두 살 때 아버지는 왜 저를 낳았습니까? 라고 했을 때 내가 답변하기를 니가 나중에 시집가서 자식을 낳아보면 안다.”라고 했다 말이에요. 근데 열두 살 때 한 이야기를 스무 살 때 알 수 가 있나요. 다 잊어버렸죠.
그러나 아버지는 그걸 기억하고 있었던 겁니다. “니가 자식을 놓게 되면 비로소 아버지가 너를 키우느라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알게 될 것이다.”라고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딸 낳고 난 뒤에는 자기 딸밖에 몰라요. 아버지의 심정은 오히려 더 모르죠. 자기 딸 챙기기 바쁜데 언제 아버지 심정을 압니까?
인간 사회에서 은근히 그런 교훈 같은 것을 기대하지 마세요. 인간사회란 기적 없이 움직이는 겁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자기의 행함을 자랑하면서 움직이기 때문에 구태여 하나님의 기적을 거론하지 않더라도 자기가 보기에 나는 반듯하게 살면 나는 반듯하게 사는 거예요.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을 보게 되면 “종들이 자기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라는 말씀이 있으면 “하지 뭐. 까짓것 월급 준다는데 못할 것 없지.”이래 된다 이 말이죠. 월급 준다는데 고개 숙이고 순종하죠. 하지만 그것은 이 본문 말씀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에요.
왜냐하면 이 본문 말씀을 진짜 행하게 되면 너의 숨어있는 원천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왜 자꾸 원천, 원천, 원천이라고 하느냐 하면 인간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이 지금 행한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네가 원래 어떤 존재인가를 결부시켜서 하나님은 자신을 드러내요. 그 증거가 어디에 있느냐, 그 증거가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잖아요.
그럼 아기예수로 태어났을 때, 사람들이 아기예수를 보면서 자기들이 누군지를 알까요? “그거 참 아기 귀엽네.” 그럴 뿐이지 자기 자신을 알까요?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셨다.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사람들은 뭐라고 오해를 하겠습니까? “저 분은 육지고 바다가 하여튼 물만 보시면 뛰어들어서 걷기를 좋아하시는 그 정도로 대단한 분이다. 사람을 초월하는 분이다.” 그렇게 생각하겠죠.
근데 그게 인간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이지, 진짜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그 의미를 보여줄 수 있습니까? 예수님이 물 위를 걸으면 사람들이 뭐라고 하겠습니까? 손들고 “주님! 저도 물 위를 걸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한다 이 말이죠. 또 예수님이 병을 고치면 “예수님만 병 고쳐서 폼 내지 말고 저도 병 고쳐서 폼 나게 한 번 살아봅시다.”라고 손들고 그걸 거론하고 싶다 이 말이죠.
예수님이 천국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면 사람들은 뭐라고 합니까? “그 좋다는 천국에서 저희들 가운데 누가 제일 높습니까?”라는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이 말이죠.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이 사람이 된 취지냐 이 말입니다. 스타가 되고 영웅이 되고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이 된 그 취지가 거기에 있습니까?
전에도 언급한 것 같은데, 주님께서는 인간이 원하는 더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빼기(-)를 하셔요. 빼기. 빼기를 하시는 거예요. 사람은 자기가 현재 자기가 생각하는 이것이 원천이라고 생각하고, 여기에 계속 추가, 추가해서, 추가적으로 그걸 담으려고 하는 거예요. 식당가서 주는 반찬 먹으면 되는데 꼭 반찬 더 달라고 하는 사람이 있어요. 주인 입장에서는 반찬값이 더 많이 들어가죠.
그게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내가 이렇게 되었다. 왜 내가 이렇게 되었지? 라는 생각은 안 하고, 이왕 이렇게 된 거, 계속해서 내가 원하는 초인적인 것, 멋있어 보이는 것,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요건과 요소들을 계속 끌어당겨서 그걸 부풀게 해가지고 이만큼 더 건지고 갖기를 원하는 겁니다.
그게 소유욕인데, 계속 좋은 것은 다 소유하고 싶어요. 남이 천국 간다고 하니까, 남이 장에 가니 자기도 거름지고 장에 간다는 속담처럼, 자기도 천국 간다고 우기고. 남이 기도해서 응답받았다고 하니까 자기도 막 기도해가면서 응답받았던 그 응답이 막 나오기를 간절하게 기도하죠. 기도하는 목적이 저 사람처럼 되기를 기도하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 나는 어디서 왔는지, 그런 것에 대해서 기도합니까? “주님이여! 저는 어디서 왔습니까?”라는 이런 기도를 할 수만 있다면, 그건 기도하기 전에 이미 은혜를 받았어요. 이미. “주여, 제가 누굽니까?” 자문자답해가면서, “내가 누굽니까? 나는 어디서 왔으며 나는 왜 만들었습니까?” 이런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참, 주 안에서 기도하는 사람이죠.
근데 “단무지 하나 더 주세요. 고추 더 주세요. 국물 더 주세요. 밥 하나 더 주세요.” “밥 추가되면 천원인데?” “에이, 그럼 안 할게요.” 계속해서 더 있기를 원하는. 그러다 뚱뚱보 돼가지고. 근데 우리가 추구하는 것이, 원천을 모르게 되면 남들이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게 되어 있어요. 남들이 좋아하는 것. 내가 있으면 남들이 얼마나 부러워하겠나? 그걸 추구하게 돼요.
자기의 원천에 대해서 안다면 더하기가 아니고 뭐라고 했습니까? 빼기죠. 이런 것이 그동안 나의 원천을 가렸군요. 내가 이런 것을 은근히 기대하고 노렸기 때문에, 내가 누군지에 대해 완전히 블라인드blind, 장님이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내가 앞으로 어디 가서 살 사람인지도 모르고, 천국 가서 산다면 이미 이 땅에서 천국 생활을 해야 될 텐데, 말은 천국 간다고 하면서도 생활하는 꼬락서니를 보면 전부다 지옥에서 놀던 가락들을 보여준다 이 말입니다. 지옥에서 놀던 가락들을.
사람이 끌어 모으는데 급급하다보니까 성경말씀에 뭘 하라, 하라고 나오면, “이거 하면 나한테 보너스 더 주겠습니까?” 이래 나온다 말이죠. 하나님이 내신 숙제를 해서 숙제를 한 그 보상으로 정작 내가 원하는 것을 챙기겠다. 챙겨보겠다. 이런 식으로 성경말씀을 대하니, 그게 자기 좋아라고 말씀 지키는 것이지, 자기 비대해지기 위해서 말씀 지키는 것이지,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거든요.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면, 하나님이 하늘에 그냥 가만히 계셔서 쳐다보기만 한다고 보지 마시고, 실제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은 평소에 아버지의 교훈을 어떤 식으로 준수했는가를 봐야죠. 그걸 봐야죠. 그분은 십자가 지심으로써 인간의 원천을 보여주셨습니다. 물 위를 걸을 때도 있었고 병을 고칠 때도 있었지만, 그거 한다고 마귀가 “어머나 놀라라!” 하지 않습니다.
정말 마귀가 계속해서 예수님에게 협박, 공갈하면서 말리고 싶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마귀가 말리고 싶었던 것. 그거는 십자가 지면 안 된다는 겁니다. 십자가 지면 안 된다. 정말 희한하죠. “십자가에서 죽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누가 말렸습니까? 베드로가 말렸는데, 베드로보고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습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이 “죽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해놓고는 가룟 유다한테 들어가서 예수님을 죽이죠. 그렇잖아요. 죽으시면 안 되면, 그러면 살려주든지. 마귀 입장이 왜 왔다 갔다 해요. “분명히 니 입장을 이야기해봐. 니 뜻이 주님 죽이는 거야? 아니면 살리는 거야?”라고 마귀한테 물어보세요.
마귀는 구태여 하나님이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는 주의에요. 인간이 바르게 살아서 하늘나라에 가면 되지, 구태여 하나님이 인간의 더러운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이미 이 땅이 악마가 사람들을 철저하게 세뇌를 시켜놨어요.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이미 사람들에게 통보를 했다니까요. 구원의 방법에 대해서.
구원의 방법이 뭘까요? 율법 지키면 의인이 되고 구원받는다. 이미 악마가 온 인간들 마음속에 그걸 다 집어넣은 겁니다. 이 말은 뭐냐 하면 어떤 희망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거예요. 나는 선을 행할 수 있다. 아, 이것, 이것 하라고 하네. 내가 그걸 지키면 나는 선하다. 하나님이 구태여 이 땅을 방문할 필요가 없잖아요. 말씀만 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 그러면 되지, 말씀 줘놓고 안 돼! 하고 내려오게 되면 말씀 준 취지가 모호해져버려요. 말씀 준 취지가.
그래서 사탄은, 악마는 뭐냐 하면 인간들끼리 할 수 있다 이 말입니다. 할 수 있으니까, 인간들이 할 수 있는 것을 방해 안 한다면 예수 당신을 처단하지 않겠다. 그러나 예수님이 당신이 오시는 목적이 만약에 우리 인간과 관계없이 따로 논다면, 중요한 말씀이에요. 예수님하고 우리하고 생각이 섞이지 않고 따로 논다면, 따로 노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거함으로써 전처럼, 오직 인간의, 인간만을 위한, 인간에 의한 세계가 줄곧, 쭉 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뭐냐 하면 “저도 따로 놀래요.”라는 그런 마음으로 예수를 믿어야 해요. 그럼 “저도 따로 놀래요.”라고 하면 주님께서 “니가 어느 동네에서 살았는데 따로 놀라고 하느냐?” “저는 이런 동네에서 살았습니다.” “그게 어떤 동네인데?” “말씀을 지켜서, 의롭게 되어서, 그것으로 구원받겠다는 그 동네에 살았었는데 이제는 따로 놀래요. 나는 그들과 안 놀래요.”하고 나오게 되죠. 그러면 예수님을 구박하던 그 구박이 이제는 누구한테 쏠리게 되죠? 마귀가 이제는 졸개들을 통해서 인간을 구박하게 되는 겁니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말씀을 바르게 지켜서 착한 일 하는 것 그 외에는 천국 가는 길은 없다. 니 정신 차려라 이놈아! 정신 차려! 말씀이 있잖아. 경전이 있잖아. 아니 경전 말씀이 없더라도 니 양심이 있잖아. 니 원래 선하고 착해. 왜 착한 것을 그렇게 썩히느냐? 그 착한 것을 어디에 써먹으려고 썩히느냐? 착한 것을 말씀 앞에서 마음껏 니가 발휘를 하게 되면 니는 얼마든지 누가 보기에도 깜짝 놀랄만한 훌륭한 사람이 될 텐데. 그건 누구나 다 동의하고 모든 사람이 다 인정하는 그 길을 놔두고 뭣 때문에 딴 쪽으로 자꾸 머리가 돌아가느냐 이 말이죠. 신명기 봐라. 지키면 뭐 준다? 복 준다 했잖아. 근데 복 주는 방법을 이미 하나님이 줬는데, 왜 니가 말씀 지켜서 복 받는 방법 말고 왜 다른 방법을 자꾸, 자꾸 고집을 부리느냐?”
그리고 마귀는 이야기합니다. “이 세상에 천국 가 본 사람 없어. 아무도 없어. 그냥 시도하는 거야. 확률상. 협력해서 의논하고.” 천국 가 본 사람이 없다는 거예요. 없으니까 누구나 장담 못하는 이런 입장에서는 가장 가능성 있는, 가장 천국에 합당한 행위는 뭐냐, 말씀 주고 말씀 받아서 바르게 사는 거라는 거예요.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귀가 이야기 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런 생각을 열두 제자, 베드로가 갖고 있었던 거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나는 죽어야 된다고 하니까, 베드로 입장에서는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말씀 지켜서 구원받겠다는데,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선한의지를 마음껏 발휘해서 깜짝 놀랄만한 착한 일을 하겠다는데, 예수님이 “나는 죽어야 된다.”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니까, “왜 그래야 되는데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불행과 비극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라고 그렇게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사탄아 물러가라!” 이래 나온 거죠.
지금까지 한 것은 뭐냐 하면 더하기가 아니고 빼기라고 했죠. 빼기는 뭐라고 했죠?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가리는 것이 내 안에 어떤 것이 있었는가를 이제 빼내가는 거예요. 이번 달 월급이 올랐다. 그럼 월급이 올랐으니까 이걸 나는 뭐로 보느냐 하면 행운 또는 복으로 본 거예요.
복으로 봤는데 이 복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예수 믿는 행위 때문에 복을 얻었다는 거예요. 예수님의 바른 복음을 알아서 복이 왔다는 거예요. 이게 뭐냐 하면 바로 빼기를 더하기로, 나한테 수입이 더 늘어난 그것을 주님께서 빼기를 하는 것의 방향과 정반대방향으로 가고 있는 겁니다. 방향이 수상한 거예요.
지금까지 한 것을 다시 한 번 이야기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디도서 2장 9절부터 하신 말씀인데, 이 디도서 2장 9절부터 나오는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우리를 빛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죠. 그렇다면 이 말씀은 무엇과 관련이 되어 있느냐 하면, 우리가 그동안 스스로 가리었던, 덮고 있었던 그것이 제거되고 우리의 원천이 노출되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이야기했죠.
그렇다면 그 하나님의 교회라는 것은, 그 하나님은 그냥 저 하늘에 멀리 있는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 하나님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 왔을 때에, 나타난 진짜 하나님은 어떤 모습이었느냐 하는 겁니다. 더하기였습니까? 빼기였습니까? 자기 목숨을 더 유지하려고 왔습니까?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려고 왔습니까? 자기 목숨을 잃어버리려 왔죠. 그 분이 누구라고요? 하나님이죠.
교회에서 뭘 가르쳐야 돼요? 하나님을 가르쳐야 되죠.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냐, 빼앗기는, 이 땅의 더러운 악마의 무리들한테 모든 것을 몽땅 빼앗기는 하나님이었죠. 그러면 그 하나님을 우리가 믿는다고 하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 자신이 그 하나님과 정반대로, 정반대가 마귀죠. 마귀가 원하는 대로 살아왔음을, 교회 가서 말씀을 보고 그걸 알아야 되겠죠.
그럼 알면, 우리가 그동안 하나님 잘 믿었던 것이, 공들였던 것이 날라 가버리고, 껍질이 벗겨지고, 빼앗기겠죠. 빼앗기게 되면 우리의 원천이 드러나는 겁니다. 우리의 원천이 뭡니까? 바로 주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죠. 그러면 죄인한테 주님께서는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니가 이 말씀을 지키라고. 죄인에게. 죄도 아니고 의도 아닌, 중립적인, 중성적인 인간에게 준 것이 아니고, 죄만 있는 인간에게 이 말씀을 준 거예요. 죄만 있는 인간에게.
그럼 죄만 있는 인간에게 이 말씀을 주니까, 결국 이 말씀이 작용하게 되면 죄가 더욱더 죄로 드러나겠죠. 죄가 더욱더 죄로. 그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의 입을 막고 우리로 하여금 뭐 아래에 있게 함이라? 저주아래 있게 함이라. 너희들의 죄가 더하기가 아니고 빼기다 이 말이죠. 교회 갔을 때는 주님이여, 오늘도 뭘 벗겨주시렵니까? 이래 되죠. 그러나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오늘도 뭘 추가해서 챙겨주시겠습니까? 이래 생각한다 이 말이죠. 복음을 모르면.
빌리 엘리어트, 라는 영국 영화가 있어요. 그 영화의 내용이 뭐냐 하면 빌리라는 소년은 원래 아버지가 권투를 가르쳤습니다. 권투를 가르쳤는데, 빌리라는 애는 억지로 권투를 하죠. 억지로 하다가 성장하면서 자기는 자꾸 발레 하는 것이 마음에 드는 거예요. 결국 이 빌리라는 소년은 유명한 발레리노가 되었다는 그런 영화입니다.
근데 저는 이 영화를 이렇게 한 번 생각해봤어요. 빌리라는 소년이 억지로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권투를 하는데, 영 권투에 재미가 없어요. 자기는 발레를 하고 싶어요. 그래서 아버지한테 권투를 안 한다고 하고 발레를 했는데, 발레에 소질이 있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보니 소질이 없어요. 그래서 발레 했다가 성공도 못하고, 권투도 안 되고, 그냥 살다 죽었어요. 영화를 이렇게 만들면 영화 보러 오겠어요? 안 오겠어요? 안 오겠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영화라는 것이 인간을 속이고 현실을 속인다 이 말이죠. 권투 억지로 시켰는데 권투 안 하고 발레해서 성공한 사람이 몇 퍼센트 되겠어요? 노래 내서 히트 친 사람이 몇 퍼센트 되겠어요? 거의 없죠. 그러나 인간은 대부분의 실패를 현실로 안 보고, 그저 일부 성공한 것을, 그걸 현실이라고 우기는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고 살아가고 있어요. 오늘도.
1억을 투자해서 가게를 차린 사람들 중에서 1년 안에 24,000개가 부도가 납니다. 투자를 1억이나 했는데 장사가 안 돼서 문 닫는 가게가 우리나라에서 24,000개에요. 1억 투자해서 이윤 남기고 성공한 것이 24,000개가 아니고, 반대라니까요. 이게 팩트에요. 24,000개가 팩트에요. 이게 현실이고 사실이에요. 이 현실이 그렇다는 것을 인간이 억지로 그걸 감추기 위해서 영화를 보고 드라마를 보면서 대리만족을 보는 겁니다. 거기서 희망을 찾는 거예요. ‘비록 실패했지만 언젠가는 저 영화처럼 성공하겠지.’ 현실에 살면서도 현실을 모르는 척 하는 이 억지, 언제까지 억지스럽게 살 거예요?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것은 너는 처음부터 성공한 권리가 없다는 겁니다. 성공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일러주기 위해서 오셨어요. 성공어림 반 푼 어치도 없다. 니 자체가 성공할 존재가 아닌데 뭘 성공을 원해? 그거 통보하러 오셨어요. 그거 통보하러. 근데 열두 제자는 예수 믿고 천국 가는데 성공하려고 하는 거예요. 구원에 성공하려고. 3년 따라 다녔으니까 무슨 좋은 게 있지 않겠는가? 어디 좋은 게 있어요? 자기들은 예수님 배반하고 다 도망쳤는데.
예수님이 우리보고 니는 성공할 권리가 없다는 말은, 예수님이 우리를 꾸준히 볼 때 우리의 원천을 보는 겁니다. 원천. 인간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너라는 인간이 어디서 나왔는가? 그것을 바로 말씀을 가지고 드러내고 폭로시킵니다. “종들로 자기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하고 기쁘게 하고”라는 말씀이 나오면 사람들이 이것을 보면서 무엇을 먼저 설정하느냐 하면, 종으로서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한 자신의 모습을 먼저 떡하니 상상하게 됩니다. 먼저 상상하게 돼요.
상상한다는 말은, 이게 현실이다? 현실이 아니다? 그거는 현실에 없는 건데, 자기 안에서 일방적으로 상상한, 상상의 세계를, 허구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종들로서 자기 상전에게 범사에 순종하고 기쁘게 하고” ‘야, 바로 이 말씀에 딱 맞는 사람이 나잖아!’라고 일방적으로 설정을 그렇게 하고 맙니다. 그러니 그 사람은 자기의 원천을 뭐로 보느냐 하면 말씀대로, 종으로서 상전에게 순종하고 범사에 기쁘게 하는 그것을 나의 본모습으로 보는 거예요. 나의 본모습으로.
그게 본모습이라면 그 사람은 죄인이 아니고 의인이죠. 의인인데 주님이 왜 오셨겠어요? 의인일 것 같으면 주께서 십자가지실 필요가 없잖아요. 격려차 위문공연이나 벌이지 왜 오셨습니까? 올 필요가 없다 이 말이죠. 하나님의 교훈도 필요 없고, 하나님의 교훈이 빛날 필요가 없죠. 빛나도 누가 빛나요? 자기 자신이 빛을 내고 있는 겁니다.
자, 그러면 이 말씀에 담긴 내용이 뭐냐, 왜 이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못 지키게 하고 다시 십자가로 데려갈 수밖에 없는 말씀이 되느냐, 그것은 인간의 행동 하나하나에, 본인은 이렇게 오해를 하죠. 내가 지금 하는 행동 하나하나 그것만 내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인간이 행동 하나하나를 할 때는 자신의 모든 과거가 얽혀있는 관계들, 그리고 자기가 아는 사람들, 그리고 습도와 날씨, 바람, 풍속, 자기의 장기, 위, 컨디션, 허파의 컨디션이라든지, 이 모든 것들이 다 얽혀서 행위가 드러나요.
자, 피아노에서 도라는 것을 땡하고 쳤습니다. 그게 도인지, 시인지, 레인지를 어떻게 알아요? 레가 아니니까 도죠. 솔이 아니니까, 미가 아니니까. 미치고 도 쳐보세요. 소리의 높이가 다르잖아요. 그러면 도를 치는 동시에, 이걸 도라고 이야기하는 동시에 이거는 레는 아니고, 미는 아니고, 파는 아니고, 솔은 아니고, 라도 아니고, 시도 아니라고 하는 것을 알고 도를 치는 겁니다.
연주자가 도를 치면서 시를 치면 연주 자체가 틀린 연주잖아요. “청중 여러분! 저는 악보대로 정확하게 도를 쳤습니다.” 그렇게 되죠. 그러면 이거는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인간이 행동 할 때 뭐를 이미 염두에 두고 있습니까? 이미 내가 하는 행동의 옳고 그름을 판정하는 판정환경이 이미 전제로 깔고 행동에 나서는 거예요. “제가 하는 행동이 맞아요? 안 맞아요?”라고 누구한테 자꾸 물어보는 식으로 하는 겁니다.
그러면 남들이 그 행동을 옳다, 그르다, 라고 그렇게 이야기를 하겠죠. 니 행동은 옳은 행동이야, 나쁜 행동이야, 라고 이렇게 하겠죠. 그렇게 남들이 이야기 해주는 거예요. 남들이. 왜냐하면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고 평소에 남들이 옳다고 하는 것들 중에서 흉내를 내고 모방을 하면서, 당신들이 이렇게 한 것을 옳다고 했으니까 나도 같이 끼어들어서 하면 옳은 사람이 되겠죠? 라고 이미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교육받고 그걸 자진해서 흉내 내고 싶어서 그렇게 살아온 거예요.
그럼 여기서 사람들이 옳다고 말하는 기준이 뭘까요? 그것은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거예요.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추상적이고 내용이 없어요. 선과 악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이익이 되려면 선은 우리에게 이익을 주고 악은 우리에게 손실을 준다. 이렇게 될 때 구체화가 되는 겁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은, 내 몸은 내가 지킨다는 본성을 갖고 있어요. 내 몸은 내가 지키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여기에 면역이 형성됩니다. 면역이. 면역이라든지 뭐 이런 것이 형성되어가지고 이익 되는 것은 받아들이고 손실되는 것은 거부하게 되어 있어요. 우리의 몸이. 나쁜 병균이 오게 되면 백혈구가 이걸 몸 바쳐서 막게 되어 있습니다. 몸 바쳐서.
근데 이 몸이 말하는 이익이라는 것은 내가 속해 있는 나 이전에 먼저 여기에 존재하고 있던, 형성되어 있던 그 사회에서 이미 결정된 거예요. 이 사회라고 하는 것은 무슨 체제냐 하면 협력체제입니다. 협력체제. 공장을 가거나 또는 여자가 시집을 갈 때, 그 시집은 어떤 체제입니까? 협력체제죠. “아이고, 이거 여왕마마 오십니까?”라고 이래 안 하거든요. “공주마마 오십니까?”라고 이래 안 하죠. “밥 할 때 숟가락 좀 놓고, 새댁이라고 한복 입고 폼만 잡지 말고, 옷 갈아입고 시아버지한테 국도 끓이고 솜씨 한 번 부려봐.” 이렇게 협력체제에요.
무엇을 위한 협력입니까? 이미 기존에 정립되어 있는 집안, 가정. 이 가정의 우애를 훼손하지 않고 연대성을 더욱더 강화하기 위해서, 협력하기 위해서 며느리가 하나 들어온 거예요. 그게 그 가정의 뭐가 되느냐 하면 이익이 되는 거예요. 이익이. 여기서 문제 하나 낼게요. 살림은 잘하는데 그냥 직장이 없는 며느리가 들어왔다. 1번, 살림은 잘하는데 직장이 없어요. 그냥 살림만 잘해요. 2번, 살림은 못하는데 변호사다. 3번, 직장도 없고 살림도 못하는데 예쁘다.
그 셋 중에서 누가 사랑을 제일 많이 받겠습니까? 그거는 보나 마나에요. 그런 프로 있잖아요. 며느리는 셋인데 시아버지는 다섯 명이 나와서 며느리 골라잡는 프로그램이 있어요. 여러분들은 성경공부 한다고 보지도 않겠지만. 그런데 거기서 누가 제일 인기가 있는 줄 알아요? 변호사에요. 살림 못해도 돈만 있으면 언제든지 요리사 하나 둘 수도 있고. 얼굴 예쁜 것도 자꾸 보면 별로에요. 나중에는 돈 많이 주는 손이 얼굴을 대신해줍니다. 봉투~ 봉투~ 열렸네! 이게 얼굴을 대신해줘요. 이미 그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기 때문에, 돈이 있으면 못하는 게 없기 때문에, 돈은 모든 것을 교환할 수 있고, 획득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는 겁니다.
얼굴 이쁜데 시집와서 얼굴 너무 이쁘다고 폼 잡다가, 폼을 너무 많이 내다가 몸이 아프다. 이거는 갖다 내버릴 수도 없고. 천덕꾸러기죠. 그럼 친정어머니가 “아이고,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우리 딸이 젊을 때는 건강했는데 왜 그러는지 모르겠어요.” “그럼 시집와서 잘못됐다는 말입니까?” “아이고, 죄송합니다.” “와서 살림도 못하는 게 만날 콜록콜록 기침해가지고.” 뭐 좀 하라고 하면 기침을 해대 싸서 그냥 들어가서 약 먹고 침대에 누워있으라고 한다면, 이거 뭐 시어머니가 며느리 수발이나 들고 있을 군번이냐고, 짜증이 난다 이 말이죠.
뭐 종이 상전한테 순종한다고요? 사장이 월급만 많이 줘보세요. 순종하지 말라고 해도 순종해요. 이미 순종할 때 노림수가 있는데 그게 뭐 순수한 거예요. 이미 이 세상에서는 누구나 상전한테 보너스 많이 타게 되면 남들이 참 복 받았다고 이렇게 해줄 것이라는, 이런 은근한 자기 노림수가 있다니까요. 노림수가. 그걸 관심사라고 하거든요. 모든 자신의 관심사가 말씀을 대하는데 이미 선입관으로 그게 발휘가 돼요. 관심사가.
교회 오면 말씀 지키라고 목사가 한 소리 하면, “예. 지키겠습니다.” 그냥 지키는 것이 아니에요. 관심사를 내다보고 하는 거예요. 관심사를. 결혼식 때 신부 친구로서 축가를 부르러 간다. 뭐 명분은 좋죠. ‘돈만 은행계좌로 부치고 가지 말지. 뭐 귀찮은데.’ 그렇게 하고 있다가, 신부한테 물어보는 거예요. “신랑이 뭐하는 사람인데?” “신랑이 의사다.” “그럼 친구들은?” “전부 다 의사다.” “그러면 가야지.” 남의 결혼에 관심사가 달라요. 관심사가.
교회 나올 때에 사람마다 관심사가 다르다니까요. “예수님 믿고 말씀 지키면 뭐 줄래요?” 관심사가 달라요. 그 관심사가 한마디로 말해서 뭐냐 하면 바로 나한테 이익이 된다는 겁니다. 그럼 나라는 것은 뭐냐 하면 내가 속해 있는 그 주변에서 나를 나라고 봐줄 때 내가 되는 거예요. 그 소속에서. 그 소속이 요구하는 것을 내가 충족할 때 그게 내가 인간답게 살아갈 수 있고, 인정받는 거예요. 주위사람들한테 인정받는 거예요. 내가 누군지를 몰라요. 내가 누군지는 남들이 알려줘야 내가 누군지 알아요. “저 어때요?” 이거잖아요.
여자들이 화장하고 옷 입을 때 신경 쓴다는 것은 무슨 말입니까? “여보! 이 옷 어떠노?” “그 옷 괜찮네.” “그럼 이 옷은?” “그것도 괜찮아.” 근데 나갈 때 보면 이 옷도 아니고 저 옷도 아니고 딴 옷 입고 나와요. 왜 딴 옷을 입습니까? 옷이 자기한테 이익을 주기 때문에. 어떤 이익? 남한테 좋은 평판을 받는 거예요. 그럼 남한테 좋은 평판을 받는다는 것은, 나는 그 사회에 소속된 사람으로서 관계가 굳건해진다. 이 말입니다. 굳건해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면서 두 가지가 서로 모순되는 것을 찾아내야 해요. 하나는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위해서 산다는 거예요. 첫 번째, 인간은 자기만 챙긴다. 또는 자기만 위한다. 같은 말이에요. 남들은 나를 위하는 도구가 된다 이 말입니다. 두 번째는, 인간은 혼자 살 수가 없어요. 이게 모순되는 거죠. 자기만 챙기면 혼자 산속에서 살든지. 자기만 챙기면. 근데 혼자 못 살아요. 짝이 있든지, 그리고 대인관계가 성립이 됩니다. 짝, 대인관계.
하나님의 말씀은 바로 두 번째를 강조하는 거예요. 뭐냐 하면, “같이” 또는 “함께” 하나님의 말씀은 혼자서 이루는 것이 아니고, 같이 이루고 함께 이루는 겁니다. 오늘 본문 9절에 보면 “종들로는 자기 상전에게” 이 말씀이 이루려면 종은 상전의 입장을, 상전은 종의 입장을 생각해야죠. 둘이 뭐에요? 하나의 짝을 이루잖아요. 하나의 짝을 이룰 때 그 사이에서 뭘 보느냐 하면 사랑을 보는 겁니다.
사랑이 혼자서 하는 것을 봤어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자기 외를 사랑할 수 있느냐를 보는 겁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얼마나 자기만 사랑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나만 생각하고, 나만 사랑하는 내가 나보다 더 남을 사랑한다는 게, 그게 과연 성립이 되느냐를 보는 거예요. 말씀을 통해서. 만약에 정말 내가 한방에 반해버렸어요. 충격 받을 정도로 반해버렸어요. 그 순간의 상태를, 자기마음 상태를 조사해보면, 나는 없어요. 나는 없어도 괜찮아요. 그대만 있다면.
그대 앞에만 서면 왜 나는 작아지는가, 라고 하죠. 작아지는 것이 아니고 작아지고 싶어요. 내가 내 사랑을 보는데 내가 장애물이 돼요. 이 순간을 사랑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 순간을 사랑하는 거예요. 그걸 사자성어로 “영구 없다!”가 되는 거예요. 나는 없는 거예요. 나는 없어도 좋아요. 나 같은 것 없어도 좋아요.
엄마가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아들이 밥 떠먹는 것을 보고 엄마는 밥을 안 먹어요. “엄마! 왜 밥을 안 먹는데?” “나는 안 먹어도 좋아. 니 입에 밥 들어가는 그것만 봐도 좋아. 나는 안 먹어도 배불러.” 숟가락에 밥 뜨면 반찬 하나 올려주죠. “내가 알라(어린아이의 경상방언)가? 오늘은 늘 알라이고 싶다.”
이 세상이라는 것은 자기밖에 모르는데, 이상하게 어떤 특정한 순간이 오게 되면, 어떤 계기가 되게 되면 자기를 자발적으로 없애버리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나를 없애버리는 겁니다. 내가 있음에 상대방의 그 빛이 가려진다고 생각할 때, 자기가 그 앞에 있다는 그 자체가 싫어질 때가 있어요. 이것이 자기를 부인한다는 겁니다. 자기를 부인한다고 하는 것이, 부처처럼 자기만 도 닦고, 거울보고 도 닦는 것이 아니고.
누구 앞에 섰을 때,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다. 주님 앞에, 십자가 앞에 섰을 때, 나의 모든 것이 나에게 미움이 되는 거예요. 미움의 내용이 되는 겁니다. 그것은 죽어도 좋은 거죠. 이러한 사랑을, 두 개(자기만 챙긴다. 혼자서는 못산다.)를 합쳐서 표현하게 되면 주체이동이 되는 겁니다. 인간이 태어나게 되면 주체는 누가 주체입니까? 본인이 주체죠. 본인이 주체인데, 여기에 사랑이 오게 되면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주체가 되죠. 그러면 시키는 대로 하겠죠.
그래서 오늘 본문에는 없지만 “종들로는 자기 상전에게”라고 할 때, 에베소서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주 안에서 순종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상전을 대할 때, 성도라면 주님을 대할 때 너는 어떤 자세로 임하느냐? 그 자세를 그대로 상전한테 하라 이 말입니다. 근데 사실은 이게 인간적인 행함으로써는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주님 앞에 섰다가 상전 앞에 서버리면, 상전이 상전 값도 못하는, 뭐 되지도 않는 인간이라고 이렇게 느껴지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일어나거든요. 그래서 이게 불가능한 거예요. 주님 앞에 서면 자기를 잊어버리지만, 상전 앞에 서면 ‘니가 지금 돈 좀 있다고 유세하냐? 갑이야?’ 뭐 이런 식으로. 같은 인간이라고 그런 마음이 싹 가셔버리는 겁니다. ‘니가 뭔데 내가 너한테 기고 빌어야 돼? 에이! 내가 더러워서 월급 때문에 다닌다.’ 이래 나온다 이 말이에요.
주 안에서라는 말이 또 있죠. 그 앞에 보면 아내들이여 남편에게 순종하기를 누구에게 하듯 순종하라? 주님께 하듯이 순종하라. 근데 그 남편에게 주님께 하듯이 순종합니까? 안 되는 이유가 주님을 만나 본적이 없어서 그래요. 주체가 이동했다가 다시 남편 앞에 서게 되면 더 성질나서 더 굳건하게 돼버려요. ‘내가 평생 니한테 시집와서 니 때문에 얼마나 고생했는데?’ 이런 생각이 막 든다 이 말이죠. 없는 주체까지 증강이 되고 강화가 되고 이러죠.
그래서 제가 이걸 쉽게 하기 위해서 주 안이라는 말을 뭐로 보느냐 하면, 주 안에서를 주님의 사랑 안에서, 제가 이걸로 바꾸고 싶어요. 주님의 사랑 안에서로 바꾸어버리면, 아까 세상적 유행가에서는 그대 앞에 서면 작아진다고 하는데, 이게 작아지는 정도가 아닙니다. 주님 사랑 앞에서 우리는 뭐가 되느냐 하면 죄인이 돼요. 죄인이. 죄인이 된다고요.
그럼 주님이 우리보고 니가 상전 앞에 서라고 하는 말은, 너에게 잠재되어 있는 그 죄를 니가 상전 앞에서 마음껏 노출시키라는 이 말입니다. 말씀이. 말씀을 줌으로써 우리를 더욱더 죄인 되게 하고, 입을 막고 저주아래 있게 하거든요. 이 말씀이. 이거는 뭐 십자가 지나 안 지나 마찬가지에요. 모든 말씀은.
모든 말씀은 우리의 원천과 관련되어 있고, 우리가 몰랐던 그 원천은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으로 옴으로써, 물 위를 걸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병 고쳐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십자가에 죽음으로써 우리 자신이 저렇게 저주받을 죄인이라는 것을 안다 하잖아요. 아까 그 이야기했죠? 주님이 오심으로써 우리의 원천이 발각되었잖아요. 그 발각된 원천을 유지하는 것이 사랑이다 이 말이죠. 사랑.
그러면 내가 상전 앞에 섰을 때에 “니가 뭔데?”가 아니라, “참, 고맙습니다. 저를 취직시켜줘서.”라는 이런 마음으로 한다 이 말이죠. “사장님! 참 고마워요. 원래 법정 최저시급이 6,470원인데, 우리 사장님은 얼마나 자비로운지 4,300원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가 이렇게 취직이 안 됐으면 4,300원도 못 받을 뻔했는데, 최저임금까지는 못 가더라도 그래도 4,300원이나 주다니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습니다.” 하는 이런 마음이 들까요?
이 세상에, 이 서울에 직장이 딱 한 군데라면 그런 마음이 들어요. 근데 옆에 직장은 6,000원을 주거든요. 그러니까 이 문제 때문에 안 되는 거예요. 그거는 10분 쉬고 해봅시다.
서울 의존교회 170609b (실패)-이 근호 목사
짝을 이루어야 되고, 반드시 관계성이 형성되어야 해요. 관계성 속에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자기 혼자 도 닦는 것은 사랑이 아니에요. 그러면 사랑을 하게 되면 주체가 이동해가지고 내가 뭐가 되느냐 하면 내가 종이 되고 상대방은 상전이라는 역할을 하게 되어 있어요. 상전이라는 역할, 나는 종이 되는 역할. 그런데 그 상전은 또 뭐가 있어요? 또 상전이 있겠죠. 이게 에베소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상전된 자는 종을 다룰 때 함부로 다루지 마라. 왜? 너에게도 상전이 있잖아? 누구? 주님이 있잖아요. 상전은 주님 앞에서 주님이 상전이 되고 자기가 종이 된다면, 나는 주님 앞에 이런 종의 입장에서 자기 회사에 가서 자기를 사장님! 사장님! 이라고 부르는 사람들 앞에서는 무슨 역할? 상전 역할을 하고, 자기 부하직원은 종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근데 그 종의 역할을 하는 사람이 자기 집에 가면 아버지라고 또 상전으로 받들잖아요. 그리 되죠.
그리고 나는 이러이러한 인간이 아니라, 그때그때 주어진 상황 따라서 맡은 배역을, 누구에게 고정된 배역이 아니고, 누구나 다 경험할 수 있는 배역들로 이 말씀을 준 겁니다. 누구나. 그러면 회사 사장이 주님을 상전으로 섬길 때, 그 상전과 종 사이에 아까 뭐가 있어야 된다고 했습니까? 사랑이 있어야 된다고 했죠.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이 아들을 데리고 갑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요. 제물로 잡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잡는 역할이고 아들은 죽는 역할이죠. 근데 아버지가 아들을 잡아 죽이는 역할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은 어떤 식으로 이 땅에 관계로 이어지는가, 그것을 보여주는 역할을 맡은 거예요. 아브라함은 무슨 역할? 하나님 아버지의 역할을 맡았고. 이삭은 무슨 역할? 이 땅에 아버지의 명 따라 오신 예수님의 역할은 맡은 거예요.
그래서 아브라함이 누구냐, 이삭이 누구냐, 그 관계, 아브라함과 이삭 사이에서 누가 나오느냐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 또는 하늘나라의 원천이 나오는 거예요. 본래 숨겨져 있는, 본래 내용이 나오는 겁니다. 종과 주인도 마찬가지죠. 종이 상전에게 순종함으로써, 이 사이에서 사랑이 나오죠. 사랑.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입니다. 종이 상전에게 순종하면 그게 완성이 아니고, 그 관계 속에서 사랑이 나오는 겁니다.
근데 사랑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뭐가 이동한다고 했습니까? 주체가 내 쪽에서 사랑하는 사람 쪽으로 이동한다고 하죠. 그럼 나는 여기서, 그 사람 앞에서 나는 없는 존재여도 괜찮아요. 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없는 존재여도 괜찮아요. 군에서 휴가 나온 아들이 밥을 먹고 있다면 나는 안 먹어도 괜찮아요. 안 먹어도 배불러요. 정말 그런 느낌이 든다니까요.
아들이 군에 가서 죽어 와가지고 죽은 시체 앞에서 밥 먹어 보세요. 이것은 먹고 싶지도 않을뿐더러, 충격 받죠. 근데 아들이 죽었는데 엄마가 왜 충격 받습니까? 너무 매정한 질문입니까? 애 하나 또 놓으면 되지. 왜냐하면 그 관계 속에서 뭐가 형성되었습니까? 아들이고 엄마기 때문에 그 둘 사이에서 생기는 그 사랑을 날려버렸기 때문에 그래요.
사랑을 날려버리면, 그 사랑한테 나의 모든 것을 바쳤는데, 그 사랑이 날라 가버리면 자기가 밥 먹을 이유가 없잖아요. 밥 먹고 내가 살 이유가 없잖아요. 그 아들의 죽음으로 내가 날라 가버렸으니까. “이 땅에서 살고 싶지 않다. 죽고 싶다.” 이래 되죠. 그래서 부부가 같이 살다가 한쪽이 죽으면 다른 한쪽 배우자는 우울증에 걸리거나 치매에 걸립니다. “아이고, 내가 영감 없이 왜 사노?” 그래서 만날 누구한테 묻는 게 “댁에는 영감이 있습니까? 남편 있습니까?” 치매 걸린 분이 만날 이거 묻는 거예요.
여기서 우리가 정리할 수 있는 것은, 나라는 인간의 원천이라고 하는 것은, 나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뭔가 짝을 이루어서 어떤 관계를 맺게 하고, 그 관계 맺음 속에서 비로소 내가 몰랐던 나의 원천을 거기서 나오도록 그렇게 하는 겁니다. 종과 상전 가운데서 자기 자신이 없어도 좋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그 사람은 원천을 발견한 사람입니다.
그럼 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경우는 어떤 경우냐 하면은, 바로 상전 앞에, 종 앞에 자기가 죄인으로 등장하는 거예요. 종이 죄인으로 등장한다면 그럼 상전은 뭐로 등장해야 됩니까? 오늘 강의의 핵심이에요. 이거 알면 다 알았어요. 뭐로 등장해야죠? 그렇죠. 오랜 만에 고함지릅니다. 짝을 이루었을 때, 사랑 앞에서 양쪽 다 죄인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을 부르러 왔다. 그래서 이 말씀을 주신 거예요. 니 주제 파악하라고.
근데 우리는 이 사실을 모르고, ‘주님은 뭐 상전보고 순종하라고? 내가 보니 꼬라지가 아닌데 순종하라고? 내가 당신 맘 같아서는 한 대 패고 싶은데 주님이 순종하라고 하니까 순종합니다.’ 이런 노동자가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은 뭡니까? 죄인 되는 거예요? 어떻게 됩니까? 이거는 누가 상전인지 분간도 안 돼. 사실 뭐가 빠졌어요? 사람과 사람만 있을 뿐이지, 그 관계가 사랑의 관계로 형성이 안 된 겁니다. 사랑의 관계로.
사실은 누구나 이런 말씀을 주면, 누구나 틱틱 거리면서 해요. ‘아니, 뭐 사장이 사장 값을 해야지. 시간당 3,000원 주는데 그걸 꼭 사장이라고 해야 되느냐? 최저임금도 안 되는 것을 가지고. 지는 골프치고 놀러 다니고, 그 돈은 우리에게서 착취하고, 나쁜 자본가! 나는 서러운 프롤레타리아!(자본주의 사회에서 생산 수단을 가지지 못하고 자기의 노동력을 팔아 생활하는 임금 노동자)’
이러면 무슨 사랑이 되겠어요? 자기 혼자 그렇게 시작하는데, 성령이 오게 되면 ‘왜 저런 악덕업주에게 걸리게 했을까?’ 이걸 생각하죠. 왜? 내가 바로 죄인인 것을, 내가 누구한테 이것 해달라고, 저거 해달라고 요구할 입장이 못 된다는 것을. 주께서 그 십자가 사랑으로 용서만 해줘도 나는 그걸로 충분한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내가 속해 있는 이 세상의 원리와 법칙에 따라서 내가 어떤 행동을 함으로 내가 뭘 노리느냐 하면 나의 이익을 노리고자 한 거예요. 나한테 어떤 이익이 있느냐?
“주여, 나는 종인데, 우리 사장님한테 순종함으로써 종인 나한테 뭘 추가적으로 내가 원하는 것을 주시겠습니까?” 자기이익을 노린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이익이 되면 뭐라고 했습니까? 선이고. 손실이 되면 그걸 악이라고 보는 겁니다. 인간들이 여기에 푹 빠져있거든요.
“착하면 이익이 더 되는 것이 많이 올 것이고, 악하면 있는 것도 빠져나갈 것이다. 그러니까 내 귀한 소유가 빠져나가는 것을 사전에 예방하는 차원에서 나는 이 말씀에 순종해야 되고 착한 일을 해야 된다.” 이러면 그 관계 전체가 사랑이 나올 데가 없어요.
사랑은 뭐냐, 쉽게 말해서 누구한테 반해버린 겁니다. “니 나한테 반했나?”라는 이런 것이 있잖아요. 반해도 그냥 반한 것이 아니고, 홀딱 반했어요. “당신을 살린다면 내 목숨을 바치겠습니다.” 뭐 이런 것. “나는 진즉에 죽어도 괜찮은데 내가 죽어서 당신만 살릴 수 있다면 아낌없이 제 목숨 바치겠습니다.” 이게 세상 쪽에서 말하는 사랑의 극대화에요. 이게 로마서 5장에서 나옵니다. “선인을 위해서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거보다 더 나가요. “니는 목숨 바쳐도 소용없어. 왜? 원래부터 너는 원천이 죄인이었으니까.” 지난 가락강의에서 했잖아요. 베드로가 목숨 바치겠다고 하니까, 목숨 바쳐서 주님 따르겠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근데 주님께서는 그 사랑을 인정했어요? 인정 안 했어요? 인정 안 했어요.
“니는 목숨이 어떤 목숨인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하늘나라에 니 처소 없어.” 처소 없는 거예요. 아주 보통 무시당한 것이 아니에요. “내 목숨 값이 그거밖에 안 됩니까?” “그러면 뭐 더 쳐줘? 니 죽어가는 목숨이야. 죄가 나오는 목숨인데 뭘 더 쳐줘? 니는 그 목숨 가지고 세상에 나가서 예수 믿으니까 나한테 이익이 온다고 그런 것 기도했고, 그런 것을 원했잖아?” 이렇게 나오시는 거예요.
여러분 구약에서 기도할 때 이렇게 모델로 정해놨습니다. 부르짖음이라고 했어요. 이 부르짖음은 애굽에서도 그렇게 그리고 사사기에 보면 약속의 땅에서도 부르짖었죠. 그러니까 부르짖을 때 어떤 상황이었기에 부르짖었습니까?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면 부르짖습니까? 안 부르짖습니까? 그냥 기도하죠. “좀 도와주시면, 조금만 도와주시면 제가 하나님께 영광 돌리겠습니다.” 이러잖아요. 뭐 그다지 아쉽지 않아요.
근데 이 부르짖음은 어떤 경우냐 하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다 털어서 내놓았는데, 깜깜해! 끝났어! 그럴 때 부르짖는 거예요. 그럼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해요? 기도할 때 누구 이름으로 한다? 기도할 때 주의 이름으로 하잖아요. 그러나 실내용은 항상 누구 이름으로 하냐면, 자기 이름으로 이렇게 시동을 걸어요.
“오늘도 바쁜데 내가 시간 짬 내서 주님께 기도하니까 이 성의를 보시기 바랍니다.”라고 자기 이름으로 시동을 걸어요. “저 기도하는 폼이 어떻습니까? 옆에 사람은 30분하고 끝났는데 저는 35분 초과하고 있습니다. 바쁜데도 35분 동안 했으니까 가상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온갖 것을 생각해요.
하고 있는데, 기도 중에 전화가 와서, 어머니가 위독하시다는 전화를 받으면, “주님! 어머니를 살려주세요. 제가 그동안 어떻게 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살려주신다면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다르구나, 그 사람 기도빨이 있다고 한다면 주님께 영광되잖아요?”라는 이런 계산을 하다가, 어머니가 점점 더 악화된다고 하면 그때는 “쭈여! 쭈여!” 부르짖겠죠.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 제가 더 어쩌라는 말입니까?”
그때는 이제 임재범의 고해가 나오는 겁니다. “어찌합니까? 어떡해할까요?” 이게 부르짖는 거예요. 부르짖는 것. 부르짖는 것이 뭐냐 하면, 모든 결과에 대해서 군말하지 않고 받을 준비가 되어있다고 하는 거예요. 이게 부르짖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예상한 것은 다 실패로 끝났으니까.
그래서 오늘 이 말씀을 주신 것은 뭐냐 하면 제발 성공하지 말고 뭐 하라는 말입니까? 제발 인생 실패를 목적으로 해서 살라는 겁니다. 실패를 해서. 강의실패, 설교실패, 목회실패, 뭐...항상 실패를 목적으로 해서. “니 장래 희망이 뭐고?” “실패.” 실패를 목표로 해서 사세요. 인생을. 그래야 인생사는 맛이 납니다. 실패를 하세요. 실패를.
내가 실패가 뭔지도 모르는 그런 실패가 주어지기를 간절히 부르짖으세요. 그게 자기의 원천을 아는 사람입니다. 자기 주제파악을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시는 것은 우리로 실패케 해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내가 순종하면 주께서 복주겠지, 라는 그것을, 성도라면 그것이 실패로 끝나요. 성도라면.
실패로 끝날 때,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내가 누구고? 도대체 내가 어떤 존재야? 기도도 안 먹힐 정도로 내가 그 정도 밖에 안 되는 쓰레기였어?” 주님께서 “고뤠?” 바로 그거에요. 쓰레기로 이만큼 인생 키워온 거예요. 살게 하신 거예요.
근데 인간이 어떤 이익을 원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뭘 뜻하느냐 하면 “나는 이익을 챙길만한 그만한 자격이 됩니다.”라는 헛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그 헛꿈을 삭제시키고, 그걸 도려내고, 빼내고, 그걸 완전히 들추어내야 해요. 왜? 지금 주님의 사랑이 거기에 깔려있으니까. 인간의 헛꿈에 십자가복음이 완전히, 철저하게 차단되어 있기 때문에 그래요. 주의 증인하라고 하니까 자기 잘난 증인하고 있는 거예요. 주님께서 그걸 봐줄 수가 없죠.
그러면 이제 문제는 뭐냐 하면 실패의 형편이라는 것은, 어떤 것을 가지고 실패라고 하느냐, 이런 문제가 있을 거예요.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은 주님이 생각하는 개념과 정반대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돌아가셨거든요. 우리가 실패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은근히 노렸던 것이 안 될 때 그걸 실패로 보잖아요. 내가 은근히 노리는 것.
부자 되고, 유명인사 되고, 내가 지나가면 부럽다 하고, 칭찬해주고, 특히 많은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고, 나를 위해주고, 나를 도와주고, 나를 격려해주고, 그걸 성공이라고 봤다 이 말이죠. 그럼 우리가 생각하는 실패는 뭡니까? 아무도 나를 돌아보지 않고, 아무도 관심두지 않고, 이런 것을 실패로 보잖아요.
하나님께서 그 실패를 반대로 뒤집습니다. 반대로 뒤집어요.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실패를 상정할 때는, 인간이 실패 했다 했을 때, 인간은 그 다음 나오는 여러 가지의 결과들을 예상을 합니다. 일단 나는 우울해. 나는 좌절했어. 나는 절망했어. 나는 비극이야. 나는 곧 불행이야. 실패했기 때문에 이런 것이 당연히 따라온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은 실패케 함으로써 이걸 반대로 뒤집습니다. 왠지 기뻐. 그리고 감사가 나오고, 행복해요. 즐거워요. 개뿔 아무것도 없으면서 자유를 느끼고 자유를 만끽해요. 이것이 어디서 나오느냐 하면 죄인인 내가 주님의 성령과 함께 있으면서 그동안 성령의 모든 이러한 선물을,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 이런 은사들을 내가 가린 거예요. 내가 엉덩이로 깔고 앉은 거예요.
주께서는 이것을 실패한 죄인으로 제킴으로써, 비로소 주께서 주시고자 하는 기쁨과 행복과 감사, 온유와 화평과 자비와 양선을 우리에게, 이거 준비했다고 하시면서 그걸 다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러면 전에는 돈이 있어야 웃음이 났는데, 이제는 돈이 없어도 웃음이 나는 그런 사람으로 변화가 일어나요. 그 중심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 내가 죄인이니까, 내가 죄인이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다룬다 하더라도, 그것도 범사에 합력하여 선이 된다는 사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내가 욕심내고 끼어들기 하다가 뒤에 트럭이 와서, 나의 과격한 운전으로 말미암아 트럭이 기우뚱하더니만 그 트럭이 내 차를 덮쳤다. 덮쳤는데, 잘못은 내 쪽에서 했고, 아무 잘못도 없는 트럭 운전사한테 피해를 줬는데, 그 트럭에 하필 자갈이 실렸다. 그 자갈이 덮쳐서, 나는 완전히 자갈에 깔려가지고 죽을 뻔 했다. 그런데 그 트럭운전사가 삽을 들고 와가지고 자갈을 파헤쳐서 나의 목숨을 건져냈을 때, 무슨 소리나오겠어요? 고맙습니다만 나오겠죠. 이게 감사잖아요. 이거는 생각도 못한. 그게 감사입니다.
이 감사가 뭐냐 하면, “나는 이렇게 안 구해줘도 되는데, 그냥 이 참에 더는 못 살도록 죽여도, 사형시켜도 상관없는 존재인데, 이렇게 덤으로 또 살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죄의식과 더불어서 감사가 나올 때, 그 트럭운전사는 일시적으로 오늘 본문에 의하면 나의 상전이 되고, 나는 그 분의 종이라도 좋소. 나는 이 순간 당신의 종이 될지라도 나는 그걸 감지덕지로 받아들이겠소. 이렇게 되는 겁니다.
어떤 회사에서 사장님이 고민을 하고 있는데, 인턴사원이 와서 말을 했어요. 그 말을 딱 듣는 순간 그 아이디어가 사장이 고민했던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줬을 때에, 그때 그 순간 그 사원이 인턴으로 보이겠습니까? 회장으로 보이겠습니까? “아이고, 고맙습니다. 회장님. 오늘 내가 점심 낼게. 네가 그때 그 말을 안 했으면..내가 그 생각을 우에 못 했노? 그 쉬운 생각을 왜 못했을까?” “아이고, 사장님 딴 거 신경쓰다보면 생각 못 하죠.” “글쎄, 너 때문에, 네가 계기가 되어서 문제가 해결됐으니까 밥 사줄게.” “아이고, 상전이신데요?” “아니야. 오늘은 니가 상전이야. 내가 종이고.” 자진해서 상전으로 인정합니다.
그러면 그 인턴이 사장되고 자기는 인턴이 됩니까? 그거는 아니죠. 그 순간에 새로운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는 거예요. 어떤 것을 계기로? 내가 갑자기 그 사람의 종이 됨으로써. 그러니까 이 맡은 종이라는 배역은, 이거는 사장이라고 해서 이 말씀에 해당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이 말씀은 수시로 우리의 말씀으로 적용이 되어야 됩니다. 사장인척 하지 말고, 갑질하지 말고, 니는 항상 나는 을이 되어도 좋다는 그런 마음으로 살아가야 돼요. 그런 마음으로.
이 말씀에 해당되는 성경구절을 대라고 한다면 요셉이야기가 적절하다고 봅니다. 요셉의 특징은 억울하다는 겁니다. 요셉은 처음부터 억울해요. 꿈을 꿔서 꿈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이 형들의 심기를 건드렸잖아요. 그런데 또 하나님께서 장단을 맞춰주네. 애굽의 노예상인이 하필 왜 지나갑니까? 물론 죽을 뻔 했다가 살려줬지만.
어떤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노예로 팔려갔는데, 그것도 억울한 거예요. 한 번 삐딱하게 일이 잘못 꼬여가지고 그 다음부터는 자기 인생을 책임진다든지, 개척한다든지, 어떤 주체로서 행사하지 못하고, 자기 인생을 이끌고 가는 주체는 어떤 외부인이에요. 근데 외부인이 아니고 하나님이십니다. 시편 105편에 보면 말씀이 응할 때까지 요셉은 착고에, 수갑 채워야 한다고 했거든요.
보이지 않는 주님이 주체가 되고, 나는 주님이 만들어내는 작품으로써 요셉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하여튼 요셉이 보기에 억울해요. 그 일을 열심히 했다 이 말이죠. ‘아이고, 주께서 알아서 하는 인생인데, 내가 군말할 게 뭐 있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했잖아요. 열심히 했으면 좋은 자리를 줘야 하는데, 여기에 또 보디발의 아내가 끼어드네. 타이밍 맞춰서.
그 보디발의 아내 때문에, 그 욕심 많은 여자 때문에, 주인한테 사랑받다가 졸지에 그 사랑마저 날라 가버렸어요. 그 남편이 오해를 해가지고. “내가 너한테 잘해줬더니만 이게 어디서 내 아내까지 넘봐! 나가!”라고 해가지고 감옥에 갔어요. 감옥에. 여러분들이 모르는 것 같은 이야기를 제가 지금 하고 있는데, 감옥에 갔거든요. 얼마나 억울합니까? 이게 남의 이야기니까 우리가 웃으면서 듣지, 본인 인생이 그렇다고 한다면, 여러분들은 진짜 청와대에 신고를 했을 거예요. 억울하다고.
그런데 요셉은 군말하지 않고 종노릇하면서, 근데 하나님께서 준비한 게 있어요. 바로왕의 신하들을 거기다가 딱 줍니다. 그러면 이야기가 그쯤 되면 주께서 이제는 좀 시청자를 고려해서 숨통이 트이게 해야 될 게 아닙니까? 드라마를 좀 보려고 하면 숨통이 트여야 하는데, 이제 되겠다, 요셉이 억울함을 풀겠다, 라고 했는데, 그게 아니고 요셉의 꿈을 해몽해줄 술 맡은 관원장이 잊어버려요. 대번에 그때 채널 다 돌아갑니다. 드라마 꼬아 싸서 짜증나 못 보겠다. 나 안 봐. 시청자를 우롱해도 이럴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이쯤 되면 뭔가 좋은 것이 나와야 볼 마음이 있는데, 갈수록 태산이라. 잊어버렸어요. 억울하다고 하니까 그걸 잊어버렸어요. 근데 하나님께서는 바로의 꿈을 꾸게 해가지고, 그때 신하가 아차! 내가 잊어버렸구나. 그제야 이야기하네요. 그러면 우리 입장에서는 뭐냐, 잘 됐네! 라고 할 수가 없어요. 왜? 잃어버린 청춘은 누가 보상해주나요?
여기서 오늘 강의에서 제일 어려운 대목이 나옵니다. 내가 주체가 되어서 어떤 역경을 딛고 결국에 내가 영웅이 된다면, 그러면 이거는 이 세상나라의 드라마고 세상나라의 신화고 소설입니다. 열심히 견뎠더니 봐라. 복 받잖아. 이런 거. 욥이나 요셉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안 돼요.
어떻게 해석하느냐, 요셉이 처음부터 오해했어요. 내가 주체가 아니고 나를 나답게 하는 주체는 따로 있었는데 그 주체를 찾아나가는 여정. 엄마 찾아 삼만리. 찾아가는 여정이에요. 찾아가면서 아들이 바꿔야 돼요. 나는 억울하다. 나는 분하다. 이게 나중에는 뭐로 바뀌어야 하느냐 하면 이게 뭔가 내가 잘못생각한 구석이 있다는 겁니다. 내 인생을 내가 챙긴다는 자체가, 이게 뭔가 나에 대해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거예요.
바로 왕의 꿈을 해석하고 요셉이 국무총리가 되고 난 뒤에, 다시 뒤를 돌아봅니다. 보게 되면 그래야 했었어. 그래야 됐었어. 더 낮아졌어야 되고, 더~ 더 낮아졌어야 하고, 이 억울함을 받아야 마땅하고, 이래야 됩니다. 왜? 이 관계가 하나님이 숨겨놓은 바로 세상을 구원하는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게 사랑이에요. 내 것, 내 인생, 내 청춘 돌려달려고 하는 것이 처음부터 오해였다는 겁니다. 내 청춘, 내 인생이 있어요? 없어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서, ‘그래. 이 말씀 지켜서 내가 바르게 살아야지.’라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오해라니까요. 우리가 요셉이 되겠다는 이런 생각을 가지는 것은 인정을 하겠는데, 그게 날라 가버려야 돼요. 말씀을 못 지키고 죄인 됨으로써, 나로 하여금 인생 살게 하는 주체는, 이 말씀을 지키게 하는 주체는, 내가 아니고, 내가 지켜서 복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미 이 말씀을 나를 통해서 말씀대로 실천에 옮기시는데, 성취시키는데, 성취시키는 그 모습이 뭐냐, 우리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시고, 주님은 그 죄인을 건지시는 구원자라는 그 사랑의 관계가 진정한 우리의 주체로서 자리 잡게 됩니다. 우리는 그 사랑을 증거 하는 증인이 되고요. 그것이 바로 10절에 보면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는 거예요. 9절에서 10절 넘어가는데 한 시간이 넘어요.
자, 그러면 봅시다. 11절,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2절, 우리를 양육하시되. 이제 은혜라는 말, 양육이라는 말을 아시겠습니까? 내가 기대하고 내가 나한테 이익이라는 생각으로 하는 양육이나 은혜는 애초부터 없습니다. 내가 되고 싶은 나를 만드는 그런 은혜는 없어요. 예상 밖의 기쁨과 행복과 그걸 제공하는 ‘나’가 되는 거예요. 그걸 누리가 되는 ‘나’, 그걸 발산하는 ‘나’라는 말이죠.
바로 이해를 못하시는 것 같은데, 우리가 생각하는 행복은 뭐냐 하면 돈이 한 달에 적어도 수 백 만원이 되어야 되고, 집도 있어야 되고, 이런 조건들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잖아요. 그런 조건들이. 근데 그런 조건들을 누가 갖고 있어요? 우리가. 어디서?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것이 부러워서, 그 조건을 내 조건으로 만들어서 요구를 하게 된 거예요. “이럴 때만 은혜고 이럴 때만 양육이라고 저는 간주하겠습니다.”라는 선입관이 있다 이 말이죠.
그런 선입관이 있는 상태에서 말씀을 주니까, “그럼 이 말씀 지키면 내가 정작 요구하는 것을, 원하는 것을 주시겠습니까?”라는 그런 거래와 흥정적인 사고방식 가지고 은혜를 논하고 양육을 논하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에 있어서의 선과 악은 뭐냐 하면 우리의 소유가 아니에요.
우리를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겁니다. 우리를 죄인 됨으로 드러나게 하고 주님은 의인이 되어서, 의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이 구조, 이 방정식, 이 원칙이 드러나는 것이 주님의 목적이에요. 주님의 목적이라고요. 이런 목적에 나의 이익이 어디에 있습니까? 없어요.
누가복음 18장에서 세리가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할 때에 주님께서 뭐라고 했습니까? “니가 의인이다.”라고 했죠. 그러면 그 성경을 봤으면 우리가 교회 가서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이여, 오늘도 말씀을 통해서 내가 죄인 되게 해주시고, 내가 뭐가 문제가 되어서 이렇게 주님의 의를 가리고 또 내가 은근히 기대하고 은근히 노리고 있는, 이거는 안 되겠습니까? 이거 주시면 참 좋겠는데요? 하고 그 노리는 바가 어느 죄에서 나왔는지를 찾게 하옵소서.”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을 아는 목사님이 설교하기를 당신이 말하는 죄는 어떤 한 계명을 지켜서 죄가 아니라, 그 계명을 계기로 해서 나머지기 모든 행동도 그 죄를 드러나게 하는데 다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겁니다. 우리는 두 가지, 세 가지 죄를 짓는 것이 아니고, 항상 한 가지 죄만 짓는 죄인이이에요.
살인했다, 간음했다, 부모공경 했다, 이게 여러 가지 죄가 아니고 단 한 가지 죄에요. 욕심이 잉태한즉 뭘 낳고? 죄를 낳고. 욕심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 죄 밖에 없어요. 욕심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는 것. 그러면 우리가 죄를 안 지어야 되는 것이 아니고, 욕심에서 나왔다면 욕심을 없애버리면 되잖아요. 이게 불교 아닙니까?
불교의 문제점이 뭐냐 하면, 부처의 문제점이 자기 욕심을 없애겠다는 것이 욕심인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 문제점이에요. “니 욕심 없애서 뭐하려고 하느냐?” “내가 의인되고자 합니다.” “그러니까 니가 잘못이다.” 누가 의인된다고요? 누구 앞에 뭐가 붙어요? 내가. 내가죠. 성경에는 나라는 것은 파생된 것이지, 이 세상이 내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에요.
이 세상이 내 중심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언제 아느냐 하면, 바로 사랑을 할 때 알아요. 그 사람 때문에 잠을 못 자요. 왜? 보고 싶어서. 이거 뭐 체험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해서 미안합니다만. 그대가 보고 싶어서 잠을 못 자요. 여러분, 사랑하는 사람들끼리 여행을 갔다. 처음 한 이틀 동안은 좋다고 하죠.
제가 아는 어떤 사람이 있는데, 평생 취준생입니다. 취직준비생. 42년 동안 아직도 취직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 사람은 그동안 뭐했는가 하면 피리불고, 색소폰 불고, 자기 취미 생활 다 한 거예요. 마을 이장인데 일도 안 하고 남 간섭하는 이장. 평생 결혼했는데 돈 벌어본 적이 없는 가장. 풀피리 불고, 색소폰 불고, 또 난蘭치고, 서예하고, 노는 게 취미에요. 노는 것을 연구하는 사람. 지 한 몸 노는데 연구하는 사람. 자기 부인은 그런 남편 믿다가 자식들 굶어죽을까 싶어서 억지로 떠밀려서 공장에서 일하는 사람. 그 사람이 또 뭘 하는가 하면 꽹과리도 쳐요.
그래서 아내가 오후에 일하고 오면 파김치 되잖아요. 여러분들도 성경공부 하러 오면 돈 번다고 일하고 와서 파김치 된 것을 제가 알아요. 들어오면 “우리 마누라 돈 벌어왔다. 신난다!”하고 지는 꽹과리 치는 거예요. 그럼 마누가 화가 나서 남편 목을 치거든요. 그러면 남편은 “얻어맞아서 더 기분 좋다!”하고 또 꽹과리 쳐요. 평생을. 이게 누구냐 하면 개그맨 김신영 고모부에요. 방송에 나와서 그런 이야기해가지고, 저거 참 대표적인 한량이다. 대표적인 한량들은 그렇게 살아요.
그러고 보니까 우리 주위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우리 친구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평생을 기타 치면서 놀고, 마누라는 서점하고. 자기는 돈 번 것으로 놀러가고. 도박 이런 것은 아닌데, 고상하게 노는 것 있잖아요. 고상하게. 더 미운 것. 고상하게 노는 것, 선비. 우리 동창생 중에 그런 사람들이 많아요. 돈은 못 벌고 머리는 있어가지고 선비노릇 하는 사람들. 마누라만 죽죠. 주위에서 이혼하라고 그렇게 해도 이제 거기에 이력이 나가지고 이혼을 못해요.
그런데 그 이야기를 쭉 듣고 생각해보니 이게 남자만 그런 게 아니고 여자도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옛날에는 애 놓는다고 일을 안 했지만, 요새는 애 하나 놓고, 둘 놓고 그 다음부터는 놀아요. 뭐하고 노는가, 고상한 취미생활하면서 놀아요. 어떨 때는 성경공부하고 놀고. 그래도 되나? 배운 게 있으니까 남편 무시하고 남편한테 잔소리만 늘어나고. 잔소리가 더욱 품위 있게, 깊이 있게 돼요. 사람 가슴을 후벼 파고 찌를 수 있는 칼날이 더 예리해진 잔소리가 튀어나오기 시작하는 겁니다. 주로 집에서 노는 아줌마하고 아저씨들 보는 tv가 케이블tv. 하루 종일 해요. 케이블tv. 정유라와 최순실은 거기에다 시간 때우기 좋은 놀이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계가 전부 다 자신의 이익과 관련이 되어 있어요. 어쨌든 간에 나는 살아남아야 되겠다는 것. 어떤 경우에라도 나는 살아남는데 절대로 성공해야 되겠다는 거예요. 성공해야 되겠다. 그러면 이것은요, 이런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이용해먹는 거예요. 하나님을 자꾸 이용해먹는 거예요. 그건 은혜가 아닙니다. 그건 양육도 아니고. 그 자체가 욕심이에요.
12절을 봅시다.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이 세상, 그 다음에 뭡니까? 정욕이에요. 욕심이에요. 하나님은 아십니다. 나라는 인간을 채우기 위해서 내용물이 전부 다 세상에서 온 욕심이, 내가 마중을 나가서 내가 챙긴 것들이 오늘날 나라는 것을 규정시킨 거예요. “나 이정도야. 나 이정도 되는 사람이야. 나 골프 칠 줄 알고...” 이게 이 세상 욕심이에요.
근데 이 말을 제대로 이해 못하면 뭐냐 하면,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라고 하니까, “그렇다. 나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골프도 안 치고 차도 안 사고 세상의 모든 것도 안 하고 산속에 가서 기도나 해야지.”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그게 세상 욕심이에요. 그게. 어떻든 저렇든 간에 나는 기어이 구원받는데 성공하겠다는 개인구원 욕심을 갖고 있는 거예요.
아까 쉬는 시간에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영생주기로 작정했다고 했죠. 주님이 주체가 되어서 요셉을 만들고 욥을 만들어 갔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욕심이 나가지고 내가 어떤 수작을 부려서 내가 요셉이 되고 욥이 되고 싶은 거예요. 기어이 성공하는, 딴 건 몰라도 구원에 성공하는 사람이고 싶어 하는 거예요. 마귀가 딴 게 아니에요.
그게 바로 마귀 모습이죠. 오라 하지도 않았는데 지가 가겠다는 거예요. 무슨 행패가 이런 행패가 있습니까? 초청장 주지도 않았는데 지가 가겠다는 거예요. 부자가 영생 얻겠다고 오겠다고 하는 겁니다. 모든 것을 팔라고 하니까 삐져가지고 갔어요. 부자가 진짜 모든 것을 팔고 따라오겠다고 하면 주께서 다른 숙제를 냈을 겁니다. “코끼리 손 해가지고 백만 번 돌고 오너라.”
기어이 넣어주지 않는 겁니다. 왜냐하면 천국 가는 것은 내가 알아서 간다는 그 악마적인 원리를 가지고 주님한테 왔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니는 나하고 살 인간이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천국은 죽어서 가는 것이 아니라 벌써 가야 돼요. 그러면 어떻게 가느냐, 그것은 우리의 원천이 폭로당해서 간다고 이야기했죠.
원천이 폭로당할 때, 어떻게 폭로 당하는가, 이걸 한 번 생각해보세요. 달걀. 계란이죠. 요새 한 판에 만원한답니다. 안 먹으면 되지. 뭐. 이 계란을 안 먹음으로써 그때 계란 먹었던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었던가를, 계란 먹는데 실패함으로써 다시 한 번 감사하게 되죠.
계란에는 뭐가 있느냐, 껍질이 있어요. 자, 껍질은 왜 있는 겁니까? 영원히 계란으로 살라고 있는 거예요? 안 그러면 깨어지라고 있는 거예요? 껍질은 왜 있습니까? 임시로 막아놓은 거죠. 그냥 계란으로 왔다가 그냥 계란으로 가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계란으로만 있으라고 한 것이 아니고 나중에 뭐가 되라고 있습니까? 닭이 되어야 될 게 아닙니까? 닭이 되려면 뭘 깨야 돼요? 껍질을 깨야 되죠.
어떤 사람은 그 안에 있는 알맹이가 껍질을 깬다고 하는데, 알맹이가 그 껍질을 깰 능력이 있으면 지가 처음부터 닭으로 오지, 껍질 깨고 하는 그런 수고를 지가 왜 하겠어요? 주님이 계란을 깨는 힘을 주십니다. 그게 어디에 나오느냐, 시편 104편에 나와요. 이거는 지금 이야기 안 합니다. 왜냐하면 수련회 때 해야 돼요. 수련회 때 할 거예요. 세상의 모든 만물은 주님에 의해서 조정 받게 되어 있어요. 모든 게. 인간이고, 동물이고, 풀이고, 해고, 달, 별, 전부 다.
시편 104편을 봅시다. 뭐, 선척이 거기 다니고 악어가 그 속에서 놀고, 동물들이 다 나옵니다. 27절에 이것들이 다 주께서 때를 따라 식물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라고 해놓고, 28절, 주께서 주신즉 저희가 취하며 주께서 손을 펴신즉 저희가 좋은 것으로 만족하다가 29절, 주께서 낯을 숨기신즉 저희가 떨고 주께서 저희 호흡을 취하신즉 저희가 죽어 본흙으로 돌아가나이다 30절, 주의 영을 보내어 저희를 창조하사지면을 새롭게 하시나이다
이게 뭐냐 하면 이 모든 게 주의 신이, 주의 영이 세상 만물을 다 키우고 자라게 하신다 이 말입니다. 언제까지?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주님이 오시고 난 뒤에는, 그들은 다 멸망해야 돼요. 이 세상은 다 멸망해야 돼요.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들이 나타날 거예요. 동물이니, 식물이니, 라고 하는 것은 이 지상에서 하는 거고. 어쨌든 새로운 피조물이 등장한다고 하니까, 그거는 우리가 알 수가 없죠. 로마서 8장에 나오잖아요. 함께 탄식하고 썩어짐의 종노릇한다. 썩어짐의 종노릇.
예수님 오시고 난 뒤에는 이 세상은 손을 놔야 돼요. 모든 자연의 끈은 다 끊어져야 해요. 자연의 끈은 다 끊어져야 합니다. 자연의 끈이 끊어진다는 노래 가사가 있어요. 대중가요가 아니고 오페라 아리아에 나옵니다. 마술피리. 마술피리에 나오는데, 조수미가 불렀던 밤의 여왕 아리아가 있어요. 랄랄랄랄랄랄랄랄라~♬ 따따따따따따땃따~♬ 이런 게 있잖아요. 세계적으로 두 사람, 세 사람 밖에는 부르지 못했던 고음이 있어요. 그 가사가 뭐냐 하면 자연의 모든 것은 다 끊어진다. 물론 엄마, 딸, 뭐 그런 이야기고, 엄마가 악마로 변해서 나온 이야기지만. 엄마의 딸의 자연적인 관계를 이야기하는 거지만. 그게 독일의 가사에 보면, “자연의 끈은 끊어지고”라고 나와요.
자연의 모든 끈은 주님이 오시면 다 끊어져요. 주께서 올라가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마련되면 다 끊어집니다. 우리도 그 마지막 때에 이미 놓여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미 실패한다는 것을 너무 서럽게 생각하지 마세요. 오히려 실패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아는데 오히려 성공한 셈이 돼버립니다. 주의 십자가를 통해서 내 자신이 누군지를 제대로 알았으니까. 이제 이 땅에서 자식 키우고 사는 것이 몽땅 다 주님께서 주신 은혜가 되고 감사가 될 뿐이죠.
그게 뭐냐 하면, 그걸 경건이라고 하고, 세상 정욕을 버린 것이 되고, 근신함과 의로움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골프를 쳐도 괜찮아요. 주께서 주신 나이스 샷! 주께서 주신 들판에서 마음껏 뛰놀면 되죠. 골프치고. 주님 주신 돈 가지고 골프 치는 것이 뭐 어때서요?
골프채가 어디 마귀입니까? 마귀 아니거든요. 그런데 치다보면 슬슬 욕심이 난다고요. 72홀을, 82홀 돌아도 괜찮은데, 그래도 선수는 아니지만 72홀을 언더로 한 번 쳐봐야지. 2언더파 이런 식으로. 그러다가 슬슬 욕심나게 되면 내기하고 되고 이제 난리가 나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신 것에 대해서는 내가 주의 종이다, 나는 죄인이다, 하고 감사히 받으면 그게 은혜가 되는데, 그러니까 받을 만 하잖아. 죄인이니까, 죄인에게 복 줬으니까, 나는 죄인이라는 자격으로 받겠다고 하면 그거는 은혜가 아니고. 죄인이 어디 벼슬입니까? 갑자기 왜 죄인이라는 것을 자랑 질 하고 있어요? “니 죄인 돼봐라. 복 받는다.” 이러면 또 다들 죄인 되려고 난리라. 죄인 되는데 성공해서 복 얻는데 성공하려고.
이게 아까 이야기한 인간이 자기 이익을 노리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평생에 우리 힘으로 우리 자신을 이렇게 다룰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이 오게 되면, 니는 종으로서 상전에게 순종하라고 하면, ‘순종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아! 맞다. 내가 순종 못하는 죄인이구나.’라는 이것을 다시 한 번 깨닫는 겁니다.
남편 사랑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고 하면, ‘이거 안 되는데, 안 되는데.. 아! 내가 죄인이구나.’ 아내 사랑하기를 주님이 교회를 위해서 목숨 바친 것 같이 하라고 하면, ‘저거 뭐 했다고 내가 목숨 바쳐? 만날 집에서 빙빙 놀았는데 뭐라고 목숨 바쳐? 아하! 내가 말씀에 입각해서 보니까 내가 죄인이구나.’ “여보! 오늘은 내가 설거지 할게. 오늘은 당신 손에 물 안 묻힌다.”라고 하고서 고무장갑 끼고 설거지 해놓죠. 그러면 아내가 와서 “이것도 설거지라고 했어? 내가 할게. 시킨 내가 잘못이지.” 아내가 다시 하게 해서 또 두 번 일 만들게 하고. “주여 이 정도로 설거지도 못하는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혼자 감사하세요. 아내는 고생하고.
어쩔 수 없이 이 땅에서는 내가 행해서 죄인 될 수 없고, 그때 그때마다 말씀이 우리로 하여금 나의 원천을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잘해보고자 하겠다는 것이 뭔가 노림수가 있고, 뭔가 기대가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이 나의 이익을 노리는 얄팍한 지식인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아서, 있는 그대로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신 은혜인 것을 감사케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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