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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마가복음 10:23 / 자기 고소 / 170526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마가복음

마가복음 10:23 / 자기 고소 / 170526

정인순 2017. 5. 27. 09:10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서경수

광주 강의(2017. 5. 26) 39-1


 


마가복음 10장 23-25절 봅시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 하시니 제자들이 그 말씀에 놀라는지라 예수께서 다시 대답하여 가라사대 얘들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기준은 예수님이 정하십니다. 예수님의 취지에 부합되지 아니하면 천국에 못 갑니다. 그래서 교회가 노는 동네가 되면 안 됩니다. 교회에 왔으면 교회를 대체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예수님 말씀입니다. 교회 와서 놀다가 집에 가면 안 되고, 말씀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교회만 붙들고 있으면 안 됩니다. 교회를 유지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 말씀이 있기 때문에 교회를 유지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때는 말씀을 몰랐을 때이고, 막상 말씀을 알게 되면 말씀 안에서 교회가 새롭게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럼 처음 교회에 올 때 그 교회를 A라 하고, 말씀 안에서 새롭게 발생되는 교회를 B라고 한다면, B(진짜 교회)에 의해서 A(건물 교회)가 시시해 져야 합니다. A를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내가 A를 가지고 있는 거예요. 말씀 안에서 B가 등장하게 되면 교회는 내가 갖는 것이 아니고 나를 발길로 차는 과정을 통해서 교회가 성립된다는 것을 압니다.


 


나를 찰 때는 내가 예전에 갖고 있던 교회관도 같이 차여야 됩니다. 그리고 처음에 교회를 생각할 때는 이 교회가 유지되어야 하고, 교회가 없어지면 내가 구원 받을 기회도 상실된다고 여겼는데, 말씀 안에서 교회를 발견하니까 이 교회는 주인이 따로 있어요. 머리 되시는 분이 계십니다.


 


내가 교회를 만들고 유지하려는 것이 오히려 주님의 교회를 훼방하는 짓이 됩니다. 이것을 지난 수요일 설교에서 ‘공무집행 방해’라고 표현했어요. 주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방해하고 있어요. 평소에 우리들이 교회를 아끼고 지키려 하는 것이 주님의 일(교회를 생산하는 일)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그럼 ‘방해하지 않으면 될 것 아닌가?’라고 하는데, 내가 아는 교회에서 주님이 아는 교회로 옮길 때에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성도는 자신을 고소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회개하는 거지요. 회개를 사람들은 반성으로 알기 때문에 제가 고소라고 했습니다. ‘나는 문제가 있는데 무엇이 문제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사람이 이 땅에 살면서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고생하기 싫어요. 그리고 안 늙고 싶어요. 그런데 늙어가고, 근심되고, 미래에 닥칠 일을 염려하게 되지요. 사람이 미래를 생각하는 이유가 과거가 주는 고통을 잊기 위함입니다. 미래라는 가상적 결과에 마음을 두면서 줄곧 이어져 오는 과거가 주는 무거운 짐을 벗으려 하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지금 고생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면 왜 고생하지요? 왜 죽지요? 성도는 이 모든 이유가 나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요. 성도만 자신에게 문제가 있어서 이런 일이 발생한다는 것을 압니다. ‘내가 지금 징벌을 받고 있구나.’ 라는 거지요.


 


벌을 받고 있다는 것은 죄가 있기에 벌을 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성도가 주님 앞에 나올 때 자신을 고소하는 거예요. 그런데 성도가 이렇게 알고 있는 것은 사실 잘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죄가 있어서 벌을 받는 것이 아니고 처벌을 드러내기 위해서 죄가 만들어집니다.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만들어 내기 위함입니다. 왜냐? 피조물은 해야 될 역할이 있어요.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위해서 인간은 죄를 지어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 죄 짓는 것은 옛날 언약이라고 하고, 새언약은 예수님이 십자가 지신 거예요.


 


새언약을 위하여 옛언약이 미리 이 땅에 주어졌습니다. 그 기획은 조금도 차질이 없습니다. 인간은 죄를 짓게 되어 있는데, 이미 인간 자체가 악마에게 장악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은 자기가 죄를 지어야 된다는 생각은 못하고, 죄가 있기 때문에 처벌받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처벌받고 고생하는 것에 대해서 본인이 상당히 아쉬워하는 거예요. 고생을 해도 내가 하고, 힘든 것도 내가 힘들다는 거예요. 이런 생각을 하는 순간 우리는 공무집행 방해가 됩니다. 왜냐? 이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잊어버립니다.


 


자아는 뭔가? ‘나’지요. 내가 누군가를 알려면 나에게만 관심을 가져서는 몰라요. 나를 아는 것은 논리적으로 따져서 아는 것이 아니고 체험을 통해서 알아요. 즉 자신이 체험을 한 것을 차후적으로 판단하면서 나를 규정해요. 체험이 먼저 있고, 나중에 이 체험을 설명하고 싶어 해요.


 


체험은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했는데, 나중에 그 체험을 자신의 체험으로 정리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누구냐?’라는 것에 대한 답변은 계속해서 오류가 발생합니다. 왜냐? 체험된 것을 하나로 묶기 위해서 나를 집어넣었는데 마치 내가 의도해서 그 경험을 한 것처럼 몰아갑니다. 이게 오류예요.


 


내가 어떤 여자를 사랑하다면, 내가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 여자가 있는데 ‘그 여자만 사랑하게 되더라.’ 이것은 피동적입니다. 그러면 나에게 사랑을 준 자가 누구예요? 그 여자에게 물어보세요. ‘당신이 내 사랑을 받으려고 유혹했지?’ 여자는 전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사랑하고 싶어서 사랑했구나.’ 라는 오류가 발생합니다. 오류란 설명이 안 되는데 억지로 설명하려다 보니 나를 주인공으로 내세울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언어의 조작이에요. 언어는 항상 사후적이에요. 체험이 먼저 있고 표현은 이후에 붙이게 됩니다. 마치 부드러운 천에 털이 하나 붙어 있다면, 우리는 털이 붙어있다고 생각하고 그 털을 제거하려고 합니다. 그러면 털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있는 천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어요.


 


언어로 무엇을 표현하다보면 거기에 합치된 의미를 뽑는 것이 아니고 비슷한 것이 잡혀서 올라옵니다. 이 때 그 사람이 소속된 언어 세계가 나옵니다. 이 언어 세계가 사후적입니다. 그렇다면 결론은, 인간은 언어 안에 살고 있었던 거예요.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 안에 살고 있었던 겁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어떤 사람과 버스를 같이 타고 왔어요. 내가 먼저 저 사람에게 말을 붙여볼까 생각하다가 포기했어요.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중심이에요. 이런 사람의 언어는 어떤 표현이 나와도 자기중심일 뿐입니다. 그런데 성령 받은 사람의 언어는 예수님 중심으로 나오게 되어 있어요.


 


언어 세계는 구조적으로 이미 짜여 있고 그 구조 안에 인간이 있어요. 내가 구조를 만드는 것이 아니고 그동안 구조가 나로 하여금 이런 체험을 갖게 했고, 그 체험에 대해서 안 믿는 사람은 ‘내가 체험했다’고 나오고, 성도는 ‘주께서 이런 체험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의 구조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의 주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천국을 염두에 둔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기존의 권력체계 안에서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어요.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자기 식으로 이해해요. 즉 예수님 말씀이 자신들에게서 나온 체험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 말씀을 정확히 파악할 수 없어요.


 


그리고 자신을 내려놓지 않고 쥐고 있는 채 모든 개념을 수용하려고 해요. 주님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지만 인간들을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요. 그런데 주님은 왜 이런 말씀을 주시는가 하면, “너 스스로 너를 고소해 봐라.”는 것입니다. 고발, 고소를 성경적 용으로 바꾼다면 ‘고백, 자백, 회개’입니다.


 


자백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백한다는 것은 내 중심의 사고와 삶이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전제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지요. 이런 예가 누가복음 에 나오는 세리입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이 세리와 비교되는 인물은 바리새인이지요. “나는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교회가 공무집행 방해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교회에 왔으면 이제 교회를 잊어야 할 텐데 계속 교회에 집착하고 있으니 천국에 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제가 오늘 교회 사진첩을 봤어요. 제 젊은 시절의 모습도 있어요. 그리고 교회 왔다가 떠나간 사람이 여러 명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어요.


 


그 사진과 동영상을 보면 성탄절 행사에 아이들이 발표하는 장면도 있는데,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발표를 준비시키면서 무슨 생각으로 그 일을 했는지 궁금했어요. 이제 교회를 떠나간 그들이 당시 십자가와 복음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들은 어떤 단체에 소속됨으로 안정된 구원관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 아닌가? 복음 전한다는 교회에 소속되면 내가 구원 받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란 생각을 했을 것 같아요. 이게 제 생각입니다. 그 많은 사람들, 속리산에 놀러가서 같이 식사를 했던 사람들,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 사람들이 또 다른 교회에 갔을 거예요. 왜냐? 어딘가에 소속해야 하니까. 메슬로우의 욕구설에 의하면 첫째 욕구가 생존의 욕구, 둘째 욕구가 소속의 욕구입니다. 이것은 성령을 받지 않아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주장입니다.


 


내가 교회를 안다는 것을 분석해 봅시다. 나는 교회에 소속되어 있다. 누가 질문합니다. “당신은 교회에 소속되어 구원 받았다는데 교회가 무엇입니까?”라고 하면,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교회를 설명할 거예요. 교회는 성만찬, 세례식, 교육, 전도, 예배, 설교, 봉사가 어울어져 있다고 대답합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이 체험한 것들입니다. 이 체험 하나하나에 개념을 붙인 거예요. 이 개념들을 모아 더 큰 개념인 교회가 만들어졌고, 본인은 그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거예요. 이런 사람들에게 묻고 싶어요. “복음 전하는 교회라고 생각해고 그 교회를 다녔을 것인데, 복음이 무엇입니까?”


 


정답은 이것입니다. 복음이 나를 오류 있다고 고소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실컷 놀고, 아이들은 재롱잔치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죄라는 것을 깊이 아는 거예요. 그러면 복음을 믿는 사람이 우리교회 다니다가 안 나오는 경우는 한 가지 밖에 없습니다. 이근호 목사가 자신에게 더 깊이 죄를 지적하지 않아서 떠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교회를 떠나간 사람들의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근호 목사는 계속 죄만 지적해서 더 이상 듣고 있을 수 없어서 떠났다.’는 거예요. 복음 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고, 그러면 교회는 커질 것이고,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커진 교회에 소속되었기에 오늘 죽어도 천국 갈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내다보면서 교회를 다녔는데 교회가 커지지도 않고, 목사는 늘 죄만 지적하고 그래서 그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거지요.


 


그리고 교인들이 교회가 커지기를 원하는 것은 결국 경제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 목사님이 전하는 복음이 참 복음이라면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이고, 그러면 자연적으로 교회는 커질 것이고, 커지면 각 교인이 분담할 돈이 줄어들지요. 예전에는 5만원 내서 유지되었다면, 사람이 많으면 1만원만 내면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커지면 정보의 양이 많아지고, 아는 사람이 많아지면 생활에 편리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교회에 치과의사가 있다면 우리 아이 충치 치료를 염가에 할 수 있는 등 여러 장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목사가 자꾸 부정적 이야기를 하니까 교회가 커지지를 않아요. 그래서 다른 교회로 간 거예요.


 


언어란 그냥 체험이 아니고 일이 끝난 후에 표현한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에는 반대가 됩니다. 말씀을 주실 때 예수님 본인의 체험으로 전환시킵니다. 아버지와 맺은 계약이기에 예수님은 반드시 실천하십니다. 그래서 말씀을 주신 후에 체험에 나섭니다. 체험에 나서게 되면, 인간의 체험은 나 위주의 체험이라면 예수님의 체험은 예수님 위주의 체험이니까 똑같은 단어를 사용해도 의미가 다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제자들은 점점 격차가 벌어집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난 뒤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회상해 보면 자신들이 과거에 예수님을 알았다고 여긴 것은 사실 고소당할 감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라고 하는 거예요. 사도행전 2장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이 “어찌할꼬”라는 말을 합니다. 이런 말을 한 이유가 뭡니까?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하니까 “어찌할꼬”라고 했어요. 그러면 “어찌할꼬”라는 회개를 유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예수님만 체험했던 십자가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어찌할꼬”라는 말은, ‘이렇게 하면 되겠네.’가 아니라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더 이상 없다는 것을 표현한 거예요.


 


주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된다는 것을 압니다. 전혀 다른 노선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어찌할꼬”라는 반응이 나오는 겁니다. 이런 자들에게 베드로는 “죄 사함을 받으라.”고 했어요. 그러면 이 베드로의 말을 그들은 거부할까요, 받아들일까요? 받아들일 수밖에 없어요.


 


여전히 자기 가치를 붙들고 있다면 희망을 가질 것인데, “어찌할꼬”라는 말은, 이제 더 이상 나에게는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안 거예요. 이런 상태에서 “죄 사함을 받으라.”고 나오니까 기쁨으로 받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내가 할 수 있다’는 자체가 예초부터 죄에 해당되는 것이었지요.


 


인간들에게 어떤 체험이 주어지면 그것이 자신이 의도한 일이 벌어졌다고 오해를 합니다. 그렇다면, ‘어찌할꼬 - 죄 사함 - 회개 - 구원’ 이렇게 되면 과거의 모든 체험이 내가 잘되기 위해서 한 체험이 아니고, 나를 죄인으로 몰고 가기 위해서 주께서 일으킨 체험이 된단 말이지요.


 


그러면 ‘어찌할꼬’라는 이 고백조차도 나의 체험이라고 오해한 데서 바뀌어 주께서 하신 체험 안에 우리가 초대받은 겁니다. 이것을 ‘예수 안’이라고 합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는, 그 이전에 우리는 ‘아담 안’에 있어야 돼요. ‘아담 안’에 있다가 ‘예수 안’으로 바뀌는 겁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하는 이야기는 ‘너희는 중립 지역에 있었던 적이 없었다.’는 겁니다.


 

과학은 관찰에서 성립됩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그 당시 사람들에게 놀라움을 준 것은 다른 사람이 갖지 못한 망원경을 가지고 있었어요. 망원경으로 보니까 원 운동이 아니고 회전 운동이고, 목성에 위성이 2개나 있는 것을 확인했어요.


 


그러면 망원경은 도구이고 확인한 것은 갈렐레오가 두 눈으로 확인했어요. 이것이 바로 관찰의 자리입니다. 블렉홀을 증명하는 증거는 하나도 없어요. 호킹 박사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블렉홀이 있다고 믿는 이유는, 주변이 어두운데 바깥에 있는 별들이 가운데로 몰리는 것으로 봐서 중간에 중력조차도 잡아당기는 어떤 지점이 있다는 것입니다.


 


블렉홀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블렉홀은 보지 못했지만 양쪽에 중력을 봤어요. 이것이 관찰의 자리입니다. 복음이 있지만 사람들은 안 보이기에 안 믿어요. 보면 믿겠다는 거예요. 본다는 것은 누가 보는 거예요? 본인이 보지요. 그런데 철학자들은 거기에 반대하는 거예요. ‘과학자들이여! 당신이 보는 것이 아니라 보여진다.’고 합니다.


 


빛이 없다면 볼 수 있습니까? 못 보지요. 시신경이 없다면 볼 수 있습니까? 못 보지요. 인간의 눈 안에는 오프 셀(off cell)이 있는데, 단절된 세포란 뜻인데, 이게 뭐냐 하면, 빛이 없고 어둠이 있을 때 그 어두움을 포착해 내는 세포가 활성화 돼요. 즉 오프 셀이 활성화 됩니다. 그러면 빛이 없는 어둠 속에서 어둠의 세계를 새롭게 관찰하게 됩니다.


 


빛이 없기 때문에 비로소 등장하는 어두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요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이 세상을 ‘어두움’이라고 하셨어요. 우리 생각에는 어두움이라고 하면 아무것도 볼 수 없어서 더듬어야 하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땅에서 밝게 보면서 잘 살고 있어요.


 


이번 여름수련회는 열왕기상을 강의합니다. 교재를 다 섰고 서경수 목사님께 넘겼습니다. 너무 일찍 올리면 사람들이 안 볼 가능성이 있기에 적당한 시점에 올릴 거예요. 제목은 ‘은밀한 나라’입니다. 열왕기에 보면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갈라져요. 왜 갈라졌을까? 한 나라가 둘로 갈라졌으니까 나라가 두개가 되지요.


 


하나가 둘 되는 나라를 하나님은 언약에서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면 왜 나라가 둘로 갈라졌는가? 그 두 개의 나라가 은밀한 나라를 가리는 역할을 합니다. 천국은 은밀해야 돼요. 그것을 위해 전면에 나서는 나라가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입니다.


 


전면에 나서는 나라는 왕들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은밀한 나라는 선지자의 나라입니다. 선지자의 나라는 그냥 보이는 것이 아닙니다. 선지자가 왕의 권세에 희생을 당하고 고난과 핍박을 받을 때만 비로소 등장하는 나라입니다. 이것이 은밀한 나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천국이 왔다고 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면, 예수님이 가지고 있는 그 나라 안에 고소당해야 마땅한 자기 백성을 대신해서 자기가 고소당하는 입장이 되어 영글어져 가는 나라입니다. 천국이지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말은 고소당하는 거예요.


 


보통 누구를 고소할 때는 그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고소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반대입니다. 스스로 고소당함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이 품고 있는 죄를 바깥으로 새삼스럽게 생산합니다. 그러면 두 개의 죄가 충돌합니다. 인간들이 생각하는 죄와 예수님이 고난 받으면서 고난과 결부되어 있는 낯선 죄가 섞이게(mix) 됩니다.


 


인간들이 죄를 안다는 것은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고, 구분할 수 있기에 더욱 더 예수님을 핍박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2장 말씀처럼 “어찌할꼬”가 안 돼요. 관찰의 자리에서 내가 판단하겠다는 거예요. 내가 누구냐? 체험한 것이 많은 나. 강의 초반에 했던 내용과 연결이 되지요?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고소하기 위해서 제자들에게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을 다 끄집어내 봐라.”는 식으로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그러면 듣는 자들은 그 예수님이 사용하신 단어를 각자 해석해 나가겠지요. 그것이 바로 마가복음 10장 23절에 나옵니다. “예수께서 둘러보시고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도다.”고 되어 있지요.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심히 어렵다.’고 하신 예수님 말씀을 듣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재물이 없는 자는 천국에 들어가기 쉽다.’고 이해할 수 있어요. 만약 우리가 제자들 입장이라면 ‘천국 가기 쉽네. 재물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가 되면 되잖아. 아마 주님께서 그런 취지로 말씀하신 것이겠지?’ 이렇게 받아들이겠지요.


 


그런데 현장에 있던 제자들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26절을 봅시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제자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에 대해서 ‘인간이 천국에 가는 것은 어려운 정도가 아니고 아예 불가능하구나.’라고 이해한 겁니다.


 


지금 우리가 이해한 주님 말씀은, 재물 없으면 천국 가기 쉽다는 것이고, 제자들은 천국 가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고 받아들인 거예요. 이 차이는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언어+아우라’입니다. 문자 외에 강하게 오는 느낌을 제자들은 받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런 식으로 몰아가신 이유는 제자들로 하여금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점을 확실하게 심어주기 위함입니다.


 


제자들이 나중에 성령 받은 후에 사도가 되어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의 취지를 그제야 제대로 알게 됩니다. ‘천국은 인간들이 갈만한 곳이 아니다.’ 왜냐? 천국은 없어요. 천국은 예수님이 만들어내시기 때문입니다. 있으면 들어가면 되는데 없는 것을 예수님이 오셔서 만들어 나갑니다. 아버지와 협력해서 천국을 만들어 냅니다.


 


제자들은 계속 오해했어요. ‘제 목숨 바치면 천국 갈 수 있습니까? 주님을 위해 가족을 버리면 넣어줍니까?’ 라는 질문에 ‘너희들이 들어갈 처소는 없다.’는 것이 예수님 답변입니다. 이 말씀을 처음부터 하셨으면 제자들이 혼란이 없었을 텐데, 왜 나중에 하셨는가?


 


베드로가 ‘제 목숨 바치겠나이다.’라고 할 때 ‘처소 없다’는 말씀을 하실 것이 아니라, 제자들을 부르신 직후 이 말씀을 하셨으면 좋지 않았을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그럼 왜 나중에 처소가 없다고 하신 것일까요? 그 이유는 천국은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고 주님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없는 나라를 제자들과 상대하면서 아버지 뜻을 이루면서 만들어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언약의 나라입니다. 언약이 완성될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 천국이에요. 그 전까지는 천국이 없어요. 그런데 구약의 유대인들(그리고 오늘날 신학자들)은 천국을 이렇게 이야기해요. ‘천국은 하나님이 통치하는 나라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개념들을 바탕으로 하나님을 이해했고, 천국을 이해했어요.


 


유대인들 생각에, 지금 하나님이 자신들을 다스리고 있으니까 이스라엘이 준 하나님의 나라로 본 거예요.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나라인데 메시야가 와서 마무리하면 완벽한 하나님 나라가 된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이런 이스라엘을 심판의 대상으로 본 거예요. 즉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의 나라로 본 거예요.


 


인간들이 기껏 생각하는 것이 이런 개념인데, 예수님은 ‘바리새인보다 더 의롭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하셨어요. 이런 충돌이 일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침노한다’고 했지요. 전쟁이 벌어져야 합니다. 문제가 어디에서 생긴 것입니다. 바로 ‘언어’이해입니다. 인간의 언어는 체험에서 나왔어요. 체험을 당해놓고, 돌아서서는 ‘내가 체험했다.’고 합니다.


 


10분 쉽시다.

 


 

광주 강의(2017. 5. 26) 39-2


 


첫째시간을 요약해 봅시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이 자신에게 고소합니다. 여기서 진리가 새롭게 밝혀져요.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하는 순간, 이미 예수님은 자기가 죄인이 된 것을 압니다. 그러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죄를 지었으면 징벌을 받으면 되지 않는가?’ 이런 생각을 하지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으면 된다.’는 생각은, 어서 죄의 짐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이런 생각을 하는데, 죄와 징벌의 관계에서 진리가 나와요. 즉 예수 그리스도가 나온 거예요. 선악과 따먹어서 죄를 지었고, 그 죄에 대해 징벌을 받는데, 징벌을 받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서 윤리와 복음의 차이점이 나옵니다. ‘나쁜 짓했으면 벌 받아야지.’ 그리고 ‘벌 받은 후에는 당당하다.’ 이것이 주님의 진리입니까? 진리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나로 시작해서 나로 돌아가는 순환구조는 진리가 아닙니다. ‘내가 나쁜 짓했고, 내가 벌 받았고, 그래서 나는 죄의 짐에서 해방되었다.’ 이것이 나의 순환구조잖아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야 돼요. ‘내가 죄 지었는데 예수님이 대신 십자가 지심으로 내가 의롭게 되었다.’ 이러면 나에게서 출발해서 나에게로 돌아와요. 이건 진리가 아닙니다. 그러면 2,000년 신학 역사를 새롭게 써야 합니다. 내 구원 받기 위해서, 내 행복을 위해서 죽어서 천당 가려는 성경 해석은 성경을 훼방하는 요소입니다. 마귀적이지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우리가 있는 것이지 우리를 위해 예수님이 계신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나로부터 시작해서 나를 위해 모든 것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죄를 지었기에 나에게 불행이 왔구나. 그러면 빨리 예수님의 십자가로 죄 용서 받아서 안식을 누려야지.’ 이렇게 나오는 거예요.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때문에 비로소 발각된 죄입니다. 내 중심의 죄에서 예수님 중심의 죄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그 전환되는 방법은 뭔가? 주님이 자신을 고소한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고소하고 소송을 걸어야 합니다. 소송을 건다는 말은 ‘어찌할꼬’가 되는 겁니다.


 


평소에 ‘어찌할꼬’가 되지 않으면, 우리는 과거야 어떠했던 미래만 잘 되면 된다는 생각을 갖습니다. 사람이 미래를 생각하는 것은 과거의 상처와 부담에서 벗어나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미래가 닫힌 상태가 아니고 열린 거예요. 영국의 철학자 칼 포퍼가 [열린 사회]를 주장하면서 마르크스를 공격했어요.


 


지금도 칼 포터의 생각을 많은 학자들이 따르고 있어요. 대표적으로는 정치 철학자 낭시에르가 있는데, 이 사람은 ‘간접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직접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다. 누구를 중간에 끼어들게 하지 말고 직접 우리가 외쳐야 된다.’ 그래서 낭시에르의 사상은 촛불로 이어집니다. 우리나라도 광화문에서 촛불 집회를 하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왜 촛불을 들고 광장에 모였습니까? 가능성 때문이죠. 내일은 오늘보다 나을 가능성입니다. 더 좋은 내일을 위해서 지금의 괴로움을 견딜 수 있어요. 희망만이 고통을 견딜 수 있는 힘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여부에 따라 현재가 결정됩니다. 만약 희망이 없으면 죽습니다.


 


어릴 때 미국으로 입양을 가서 나이 40이 되었는데 양부모가 시민권을 주지 않아서 한국에 돌아와서 자살한 사람이 있어요. 이 사람은 한국말도 못하고 아무 희망이 없어서 자살했습니다. 이 사람에게는 “어찌할꼬”라는 것이 없고, ‘내일은 잘 되겠지.’가 있었던 거예요. 이게 자기 정당성이에요.


 


지금은 못났지만 언젠가는 해 뜰 날이 온다는 겁니다. ‘어찌할꼬’가 아니고 계속 희망을 갖는 거예요. 이건 자기가 자기에서 소송을 거는 것이 아니고 변호하는 거지요. 저는 이것을 ‘핑계’로 봅니다. 인간들은 입만 열면 전부 자기변명과 핑계입니다. ‘어찌할꼬’ 하면서 완전히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고, 손톱만큼이라도 희망을 가지고 있어요.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긴 이유는 사단이 들어와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사단을 빼고 가룟 유다 본인이 선택한 것은 무엇입니까? 배신이지요. 예수님에 대해서 은근히 기대를 했는데 예수님이 가룟 유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거지요. 이건 다른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 모두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었습니다. “예수님이 임금이 되면 우리도 한 자리 주세요.”하면서. 그러면 예수님은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자인 것처럼 유도하신 거예요. 왜냐? 그래야 제자들의 본색이 드러나기 때문이지요. 희망이 있으면 ‘어찌할꼬’라는 말을 하지 않습니다.


 


성경에 제자들이 자랑하는 장면이 나오지요. “주의 이름으로 귀신들도 우리에게 항복하더이다(눅10:17).” 이들은 좋아하고 기뻐했지 ‘어찌할꼬’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잡혀 죽는다고 하시니까 베드로가 한 말은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했고, 예수님은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마16:23).”라고 했어요.


 


이 말씀의 의미를 베드로는 몰라요. 나중에 성령 받은 후에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의 취지가 뭐냐 하면, 인간의 무지몽매함을 예수님은 자기 몸에 다 담았어요. 그리고 예수님은 자신이 자신을 소송했고 고발하고 고소한 겁니다. 고소한 이유는 징벌을 받기 위함이 아니고 진리를 도출해 내기 위해서입니다.


 


진리 혹은 길, 또는 생명이지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이것을 예수님은 끄집어내는 겁니다. 이것을 위해 예수님은 스스로 고소하고 죄를 유발합니다. 그러면 죄의 격에 맞는 심판이 나옵니다.


 


인간들은 죄가 무엇인지 안다고 생각합니다. 죄에는 반드시 징벌이 따릅니다. 그러면 인간들은 죄 지은 만큼 벌을 받을 것이라 여깁니다. 누가복음 18장에서 바리새인들은 금식하고 십일조도 했지요. 반면에 세리는 불의, 간음, 토색을 했어요. 그러면 바리새인이 징벌을 많이 받을까요, 세리가 징벌을 많이 받을까요? 바리새인의 생각에는 당연히 세리가 징벌을 많이 받지요.


 


이 상태는 자기 고소가 없지요. 자신이 정당하고 의로운 만큼 징벌은 줄어드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은 스스로 자신을 고소합니다. 고소거리가 만들어지고 이 세계에 들어온 사람이 누구냐 하면 세리입니다. 세리는 감히 고개도 못 들고 “주여, 저는 죄인입니다.”라고 했지요. 그런데 예수님은 세리를 향해 ‘이 사람이 저희보다 의롭다.’고 하셨어요. 이 말은 천국 간다는 말입니다. 바리새인은 지옥 갑니다.


 


바리새인은 간음 안 해서 지옥 가고, 십일조 해서 지옥 가고, 금식해서 지옥 가는 거예요. 그러면 목사가 복음 전할 때 무엇을 이야기해야 됩니까? ‘간음합시다.’라고 해야 합니까, ‘간음하시 맙시다.’라고 해야 합니까? ‘간음하지 말자’고 해야지요. 왜? 그게 죄가 되니까. 간음 안 하는 것이 죄가 되기 때문에 그래요.


 


‘십일조 하세요.’라고 해야 돼요. 왜? 그게 죄가 되기 때문에. 세리는 “어찌할꼬”라고 했어요. 이 말 속에는 자기가 아무리 노력해도 죄 지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요. 그래서 고개를 들지 못한 거예요. 자기에게 만약 가능성이 있다면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졌겠지요. 그러나 세리에게는 일체 그런 것이 없어요.


 


예수님의 자기 고소는 일종의 블랙홀과 같습니다. 여기에 빠져 들어가야 구원 받아요. ‘예수 안’에 있다는 말은, 예수님의 자기 고소에 합류하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은 예수 믿고 이미 구원 받은 상태에서 죽을 때까지 회개해야 합니다. 구원 받기 전에는 회개할 수가 없어요. 회개는 자기 고소지요.


 


자기 고소를 한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란 전제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그러기에 “봐주세요.”가 아니고, “나는 이런 존재입니다.”를 드러내는 거예요. 자신은 처분대상일 뿐입니다. 처분대상이 “내 아이가 공부를 못합니다. 집에 먹을 것이 없습니다. 관절이 아픕니다.” 이런 소리를 할 수 있습니까? 못합니다.


 


성경을 왜 예수 그리스도 중심으로 봐야 하지요? 예수님 중심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소고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후에 왜 자기 고소를 해야 하는가? 사단의 일은 고소하는 것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종이고, 종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합니다.


 


노예와 자유민의 차이는 고대 로마법에 보면 잘 나타나 있는데, 로마 사람들 중 자유민들은 가면을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집안 모든 식구들은 가면을 보면서 가면과 자신의 차이를 줄이도록 노력하는 거예요. 가면은 성인들이나 훌륭한 분들의 형상으로 만들어요.


 


자신은 부족한 자이지만 가면의 얼굴은 훌륭한 분입니다. 그러면 자신과 가면에는 차이가 있지요. 가면을 보면서 자신의 이상으로 삼고 집안의 가훈이 되는 겁니다. 로마 시대 연극을 할 때는 배우들이 가면을 쓰고 했어요. 옛날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가면을 쳐다보는 것이 있어요. ‘내가 어떻게 역할을 잘 해서 가면과 내가 합치되는가?’ 이게 스토아철학에서 나온 거예요.


 


스토아철학은 신이 모든 사람에게 배역을 맡긴 거예요. 배역과 자신이 합치되지 않지만 합치되려고 노력하는 가운데 인간의 영혼은 정화된다고 보는 거예요. 사도행전(17:18)에도 스토아(스도이고)철학자가 나옵니다. 스토아철학과 연결되는 것이 프뉴마, 하나님의 영, 신에 의해서 그렇게 된다고 본 겁니다. 영혼이 잘되는 것이 하늘나라와 합치된다는 것입니다.


 


자유민의 가정에는 가면이 있고, 이상이 있는 반면에 노예는 가면이 없어요. 자신의 이상이 없어요. 노예는 본인의 미래를 생각할 권리가 없습니다. 주인이 다루는 도구이기 때문이지요. 노예 검투사들이 반란을 일으키다가 3,000명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했어요.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그들은 도구에 불과한 거예요.


 


노예는 주인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자입니다. 본인의 위상이 없어요. 노예가 있다는 것은 주인이 있다는 말이지요. 즉 노예는 어떤 일을 해도 모든 공로는 주인에게 돌아가는 것입니다. 노예가 영광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기에 노예는 이미 죽은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단의 종으로 봤어요. 어둠의 권세 아래 있는 종으로 본 거예요. 그 관점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활동하셨어요. 그런데 제자들은 자신을 사단의 종으로 보지 않고 사단과 투쟁중이며 그런 능력과 지혜가 있다고 생각했어요.


 


자기 고소를 하게 되면 여기서 법이 나와요. 이 법이 진짜 율법이에요. “모세는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이렇게 말한다.”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지요. 이게 무슨 말인가 하면, ‘아버지와 나 사이에서 나오는 법에 입각해서 나는 이야기하는데 너희들이 아는 모세는 이런 식으로 이해했을 거다.’라고 이야기하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이 모세의 법대로 살 수 없는 이유는, 모세의 법을 예수님이 가져가면 모세의 법이 나옵니까, 예수님의 법이 나옵니까? 예수님의 법이 나오는 거예요. 모세의 법을 예수님이 가져가는 순간 모세의 법은 더 이상 없어요. 예수님을 통해서 완성된 모세의 법이 나오지요.


 


모세의 법은 인간들이 전혀 이해를 못합니다. 그럼 모세의 법은 무엇 때문에 있는가? 예수님이 자신을 고소하기 위해서 모세의 율법이 필요합니다. 이것이 갈라디아서 3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어 의인이 되었어요. 그런데 시간적으로 보면 아브라함이 먼저 있고, 예수님은 이후에 계신 분입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브라함을 살려요. 아브라함의 자손이 몇 명입니까? 한 명입니다. 예수님이죠. ‘내 자손이 나를 살린다.’는 것을 아브라함이 믿었기에 의인이 된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기대한 자손은 어떤 분입니까? ‘어찌할꼬’죠. 내 스스로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본인이 알지요.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아브라함 자손이 많이 등장할 것 아닙니까? 그러면 이들을 한데 묶어야 돼요. 묶는데 필요한 것이 모세 율법입니다. 하나로 묶으면 이게 개인 구원이 아닌 집단 구원이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하나라도 어기면 다 어긴 셈이 돼요. 이것을 알기 위해서 ‘간음하지 말라’와 ‘살인하지 말라’가 두 개의 율법이 아니라 하나의 율법이라야 한다는 논리가 나오는데, 아무리 따져도 둘이 하나가 되는 이유가 나오지를 않아요.


 


그럼 어떤 경우에 하나가 될 수 있는가?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으로 나를 고소하면 우리는 법 안에서 할 말이 없는 저주 받을 자가 되고 말지요. 로마서 3장에 나오는 것처럼. 율법 중 어떤 조항이라도 나에게 다가오면 나는 고소당해도 마땅한 존재가 됩니다.


 


고소당한 자는 내가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생각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아브라함 입장이 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내 자손을 통해서 나를 의인되게 하는 작업을 실행할 것임을 믿는 겁니다. 이것을 이삭 바치는 사건을 통해서 알게 되었어요.


 


“아브라함아, 네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창22:2).”고 하셨지요. 사전에 ‘수풀에 양이 있을 것인데, 그 양을 바치라’고 했으면 아무 걱정 없이 갔을 거예요. 그러나 그 말은 나중에 하셨지요.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셨어요. 아브라함에게 이삭은 메시야입니다. 이삭이 죽어야 하나님이 주신 아브라함 언약이 이뤄지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기 위해서 없는 자식을 낳게 했다는 겁니다. 그럼 아브라함의 역할은 뭔가? 주께서 제물을 준비한 것까지 하신다는 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이게 바로 ‘어찌할꼬’입니다. 자기가 자기를 고소하는 거예요. 내가 구원 받기 위한 어떤 시도도 있을 수 없다는 겁니다. 이걸 아브라함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미 구원 받은 자는 그가 무엇을 해도 그것이 죄가 됩니다. 자기 고소가 되어야 진리, 법이 나옵니다. 내가 지킨 법이 아니고 주께서 다 이룬 법, 십자가의 복음이 계속 나오는 겁니다. 이 일에 마귀가 협력을 하지요. 마귀는 옛언약에 준해서 성도를 고소합니다.


 


십자가가 복음이죠? 십자가 사건을 계속 반복하기 위해서는 십자가 사건에 관련된 모든 일들은 계속 일어나야 되지요. 서로 사랑했던 사람이 해어졌어요. 여자가 차고 남자는 차였어요. 남자가 생각하기를 ‘깨끗하게 잊자. 지난 일은 다 잊고 다른 여자를 사귀면 된다.’고 했는데, 막상 이별 후에는 이별의 아픔을 겪어요.


 


이별은 한 번입니다. 단회성이죠. 그런데 이별 후에 매일 고통이 찾아와요. 이게 바로 십자가의 반복성입니다. 이걸 고맙게도 마귀가 도와줍니다. 바리새인이 법을 거론했지요. ‘나는 십일조도 하고, 구제도 하고, 세리와 같지 아니하고 --’ 이것은 자기 정당성을 주장하는 겁니다.


 


자신이 정당하다는 것은 처벌과는 점점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은 미래가 활짝 열린 거예요. 나쁜 짓보다 착한 일이 많으면 벌보다는 상을 받아야지요.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자신의 선행을 나열한 거예요. 이렇게 되면 자기 고소가 되지 않고, 자기 잘난 척을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인간은 자신이 정당하기 때문에 이 땅에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겁니다. 왜 그리 말이 많아요? 헤겔은 말하기를,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을 때 내가 된다.’고 했어요. 왜 삽니까? 남한테 인정받기 위해서 살아요. 인간의 모든 행동, 말이 남으로부터 인정받기 위함입니다. 남에게 인정받을 때 내가 됩니다.


 


왜 사회가 형성되는가? 서로가 서로를 만날 수밖에 없어서 사회가 된다는 겁니다. 가출한 청소년이 왜 얼마 후에 집으로 돌아옵니까? 친구가 날 반겨줄 것이라 생각하고 가출을 했는데, 그 친구가 살기 힘들다고 집으로 돌아가니까 자기도 결국은 집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어요. 탕자처럼 가출해 봐야 인간이 됩니다. ‘어찌할꼬’가 없으면 인간이 안 됩니다.


 


사람들은 늘 자기 할 말을 준비해요. 남들이 내 행동이나 말에 대해 공격하면 내가 방어할 것을 늘 마련해 놓습니다. 가족과 떨어져 지내면 허전합니다. 인정 해줄 대상이 없기 때문이지요. 그 허전함을 매우기 위해 개나 고양이와 같이 삽니다.


 


관행이 인간을 만듭니다. 지속되어온 행동이 나의 정당함을 인정받으려는 몸부림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자기 고소입니다. 자기 정당화와는 정 반대인 자기 부인으로 주님은 가시면서 당신을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르려면 나는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존재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이 하신 말씀이 “약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막10:25).”고 했어요. 이 말씀을 제자들은 불가능으로 이해했어요. 이것을 바꿔 말하면, 제자들은 천국 가는 일에 신경 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있는 것이고, 나는 꼭 천국에 가야겠다.’ 이런 의미입니다. 이것은 자기 고소가 아니고 자기 정당성을 외치는 것입니다.


 


마치 베드로가 ‘목숨 바쳐서라도 주님을 따르겠습니다.’라는 것이지요. 이런 발상이 왜 나오지요? 주님을 놓치지 않겠다는 것이고, ‘나는 주님과 함께 있을만한 존재다.’라고 여기는 거예요. 그러나 주님 대답은 ‘너는 나와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6절을 봅시다. “제자들이 심히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한 취지가 무엇입니까? ‘주님은 구원 전문가니까 알아서 구원시켜주세요.’라는 뜻입니다. ‘당신은 우리를 천국에 넣어줄 책임이 있지 않습니까?’라는 취지란 말이지요.


 


구원 문제에 있어서 누가 중요하단 말입니까? 예수님이 중요한 거예요, 구원 받을 자신이 중요한 거예요? 자신이 중요하지요. 그러니 이 길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과 다른 길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고소해서 죄인이 되는 길로 가고 있어요. 그래서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사단의 일을 생각해요.


 


제자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는 자체가 그들은 예수님과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답변은 무엇입니까? “사람으로는 할 수 없다.”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입을 다물어야지요. 사람이 무엇인가 구상한다는 자체가 사람이 할 수 있다는 전제로 구상합니다.


 


구원을 생각한다는 자체가 잘만 하면, 누가 조금만 도와주면 나도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까? 믿음이 아닙니다. 생각지도 못한 것이 나와야 믿음이지 내가 생각하고 소망한 내용은 믿음이 아닙니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었지요. 하인들은 예수님의 명령에 의해 물을 떠서 손님들에게 가지다 주었어요. 그런데 그 물이 포도주로 변했어요. 그 때 손님들의 반응은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숨겨두고 이제야 좋은 포도주를 내놓았네.”라고 했어요.


 


물을 떠온 하인들은 알지요. 좋은 포도주를 숨겨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물을 포도주로 바꾸셨다는 것을. 이 ‘하인’ 대신 ‘성도’를 그 자리에 집어넣어 봅시다. 그러면 성도는 ‘내가 천국을 소망했기에 구원 받은 것이 아니고 순전히 주님의 능력이 나를 구원했다.’는 것을 압니다.


 


하인들은 알지요. 포도주가 아니라 물을 떠다 주었다는 것을. 그렇다면 하인들은 물이 포도주로 바뀔 것을 예상했습니까? 전혀 예상 못했어요. 오늘날 우리가 구원 받을 줄 예상했습니까? 내가 예수 믿음으로 좋은 나라 천국에 간다는 것은 예상했지만 주님이 생각하는 구원은 예상 못했지요.


 


따라서 우리는 거짓 믿음을 유지해야 돼요. 우리가 유지하기 전에 고맙게도 마귀가 행함으로 구원 받는 논리를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이번에 일이 잘 풀린 것은 내가 부모에게 효도를 해서 된 일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예수님은 말씀하셨지요. “네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그런데 마귀는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알게 만들어요. 구제 한 후에 스스로 티를 내게 합니다. 한만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부풀려서 아예 광고를 합니다. 우리는 이 재미로 살아요.


 


나의 모든 말은 내가 이 땅에 살아야 할 정당성이 있다는 것을 변명합니다. 이 일을 마귀가 도와줍니다. 그래서 내가 부풀려지면 주님은 바늘로 터뜨립니다. 그 때 ‘어찌할꼬’가 나옵니다. ‘아, 이게 바로 죄였구나.’ 이미 구원 받았기에 주님께서는 ‘어찌할꼬’가 나오는 경우의 수를 계속 만들어 나가십니다. 그러니 십자가 은혜만 감사할 뿐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하든대로 살게 하옵소서. 늘 하든대로 내 자랑하고, 행한 일에 보상을 기대하고, 남에게 인정받고, 믿음 좋다는 소리 듣고, 하나님이 함께 있다는 것을 으스대면서 사는 그것이 바로 십자가 앞에서 자기 고소감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