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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창세기 21:27-34 / 영생의 하나님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창세기

창세기 21:27-34 / 영생의 하나님

정인순 2017. 5. 24. 21:28

 

 

영생의 하나님

 

음성                     동영상


이근호
2017년 5월 24일 

               

본문 말씀: 창세기 21:27-34


(21:27)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

(21:28)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21:29)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21:30) 아브라함이 이르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21:31)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 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21:32)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 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갔고

(21:33)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원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21:34) 그가 블레셋 사람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냈더라

‘어긋남’, 성도는 이 세상을 불신자들과 함께 살면서 쉴새 없이 ‘어긋남’을 경험해야 합니다. 동일한 대지 위에서 함께 살아가지만 불신자들은 자신의 운명과 대지의 운명에 대해서 아는 바 없습니다. 단지 항상 고정적인 변화만 보여주는 이 대자연 안에서 자신의 생계만 유지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 나오는 하나님의 뜻은 달리 말씀하십니다. 이미 인간들은 생명으로부터 철저하게 차단된 처지라는 겁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기거하는 이 대지도 무성(無性)의 땅이 아니라 저주를 내뿜는 곳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인간들은 왜 이 땅이 저주를 내뿜게 되었는지를 알지 못하고 그저 자기 목숨만 부지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4장에 나오는 가인은 자기 눈에 동생 아벨만 보입니다. 그래서 몰래 동생을 살해합니다. 하지만 거기에 목격자가 있었으니 곧 ‘땅’이었습니다. 땅이 하늘을 향해 고자질을 하였고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는 곧 땅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본연의 역할을 따로 가지고 작용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흙으로 돌아갑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저주밖에 없는 이 대지에 여인의 이름은 ‘생명’, 곧 하와가 됩니다. 곧 저주 속에서도 생명이 나오게끔 하나님께서 친히 땅의 세계에 관여하고 개입하시겠다는 말입니다. 땅 속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개입에 의한 사건의 함축이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지상에 펼쳐집니다.

저주 없는 곳에 영생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저주 속에서만’ 영생이 나오도록 하나님께서 개입하십니다. 따라서 언약의 출현에서 저주성이 필수적 배경이 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언약’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맹세’라는 단어도 나옵니다. 그런데 이 ‘언약’과 ‘맹세’라는 단어에 대해서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은 각기 다른 취지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은 찾아온 것은, 가인처럼 땅을 바라보는 이해에 있어서 자기 보전과 자기 안전을 위함입니다. 아브라함이라는 낯선 여행객의 등장으로 인해 졸지에 자기 집안의 여인들이 임신을 못하게 되는 불상사를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아비멜렉의 평소의 윤리관과 신앙관으로서 자기 행위와 그 징벌에 대해서 도저히 매치가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를 건드린 것이 아니라 건드릴 ‘뻔’했을 뿐입니다. 하지만 그 행위로 인한 징벌은 대가 끊어지는 저주입니다. 이로서 아비메렉은 아브라함의 초월적 존재성을 인정해야 자신 집안의 재앙이 멈춘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즉 ‘자기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차원’에 소속된 존재로 아브라함을 이해하는 겁니다.

하지만 아비멜렉에게 필요한 것은 여전히 ‘자기 것’이요 ‘자신이 그 땅에 살던 방식’입니다. 이 상황을 안정되게 가져가기 위해 아비멜렉은 먼저 아브라함을 찾아와 정치적 협상을 맺게 됩니다. 즉 우호적인 정치 관계를 형성하므로서 더 이상, 낯선 저주를 맞지 않고 사전에 방비하는 조치를 취하게 됩니다.

그러나 동일한 언약, 동일한 맹세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다른 의미를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아브라함 의도해서 아비멜렉 집안에 태가 닫힌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을 앞장 세워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스스로 달성해나가신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입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아비에게 자식이 없다는 말은 곧 현 아버지가 언약의 하나님이 보시기에 사실상 ‘죽은 존재’라는 겁니다. 아버지의 가치 여부는 아버지의 착함 여부가 아니라 자식을 통해서 거꾸로 아비의 본질을 정하게 된다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아브람’ 시절 때에, 그는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식은 ‘약속의 자식’이 아니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부부를 통해서 ‘저주 속에서 영생 생산’ 작업을 하시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은 결코 아브라함 부부의 뜻이 아닙니다. 아브라함 가정은 그저 하나님의 언약 성취의 일환으로 사용하시는 겁니다. 아비멜렉은 이러한 내용은 알지 못합니다.

27절에서, 아브라함은 도박이 아비멜렉에서 소와 양을 줍니다. 이것은 일종에 평화를 위한 뇌물적 성격이 강합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새끼 양 7마리’를 따로 준비해둡니다. 이것은 따로 아비멜렉에게 제공합니다. 의아해하는 쪽은 아비멜렉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냐?”라는 겁니다.

아브라함의 뜻은 이러합니다. 동일한 ‘맹세’, 동일한 ‘언약’처럼 보이지만 아브라함은 자기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간 대 인간으로 인해 생겨난 일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개입으로 의도해서 만들어진 일이라는 겁니다. 즉 ‘어긋남’이 있는 겁니다. 언약을 이 저주의 세상 안에 형성하기 위해서 ‘제물’ 성격을 지닌 암양 7마리를 아비멜렉에 제공한 겁니다.

그 ‘암양 7마리’는 아브라함 자신의 위상을 대변해주는 겁니다. 아브라함은 이미 하나님의 언약 완성 일에 참여하고 있는 중입니다. 아브라함이 아비멜렉과 헤어지고 홀로 있을 때, 그는 에셀나무를 심으면서 독자적으로 하나님과의 언약 관련성을 나타냅니다. 이 때는 아브라함은 ‘영생’을 말합니다.

아비멜렉은 이 저주스러운 땅에서 본인이 어떻게든 잘 살고, 살아남으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이 땅에서 생산되는 그 영생의 구심점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압니다. 마치 통일 신라시대 경덕왕 때, 왕의 지시로 큰 종을 만들던 중들이 어느 가난한 집에서 시주대신 갓난 아이를 하고 기증받아, 그 아기를 끊는 금속에 같이 넣어 종을 만든 격입니다.

누구에게도 만족스러운 종소리를 내지만 그 종소리 속에는 떠나온 어미를 “에밀레∼ 에밀레∼”하면서 구슬프게 울고 있는 아이의 울음소리를 감안해서 들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브라함의 운명은 ‘아브라함 자손’인 예수님에게 달려 있는 겁니다. 아브라함이나 예수님이나 모두 언약 안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 세상 사람들은 기대한 ‘목표’를 갖고자 하지만 언약 안의 사람들은 본인들 자기가 이미 달성된 목표입니다. 아담도 따먹지 못하고 쫓겨나게 했던 그 영생을, 언약의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미 ‘영생의 사람’이 되었다면 자기네 처지에서 무슨 난리를 쳐도 상관없습니다.

영생은 인간이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이나 권리가 아닙니다. 말도 안 되게 충격적인 하나님의 일방적 배려입니다. 따라서 성도가 영생 작업의 일환으로 이 저주의 땅에 등장된 그 자체만으로 감사할 따름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것마저 언약 증거의 일환임을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녹취:오용익

89강-창 21장 27-34절(영생의 하나님)170524-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21장 27-34절입니다. 구약성경 26페이지입니다.

 

창 21:27-34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두 사람이 서로 언약을 세우니라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아브라함이 가로되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하고 두 사람이 거기서 서로 맹세하였으므로 그곳을 브엘세바라 이름하였더라 그들이 브엘세바에서 언약을 세우매 아비멜렉과 그 군대장관 비골은 떠나 블레셋 족속의 땅으로 돌아갔고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원래 이 땅이라 하는 것은 창세기 3장 이후에 비극의 장소입니다. 저주받을 곳이지요. 아담이라는 것이 분명히 사람이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돌려보냅니다. 그만큼 이 땅이라 하는 것은 그냥 가만히 있는 땅이 아니고 뭔가 움직거리는 땅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그 땅에서 일어나는 일관된 하나님의 일이 마지막까지 어떻게 이어지는가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그 땅을 창세기 3장하고 똑같이 자기생존을 위해서 투쟁하는, 생계와 목숨 부지를 위해서 환경으로 존재하는 땅으로서 이해하게 되지요.

 

어차피 인생은 태어나면 결국 죽게 되어 있는데 죽게 되어 있다면 왜 죽는지 왜 태어나는지……, 내가 죽는 이유가 이 땅에서 주어지거든요. 땅 자체가 저주받은 땅인데 이 땅의 저주가 어디서 왔는지, 왜 왔는지, 누구 때문에 왔는지, 땅이 저주받는 것이 무슨 계기가 있어서 그런지,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어요.

 

이왕 태어난 것……, 자기들 눈으로 보니 땅은 늘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이거든요. 땅에서 어떤 변화라는 것이 없고 그냥 정기적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 질서가 잡히니까 잘 이용만 하게 되면 평생 밥은 먹고 살겠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런데 밥 먹고 살아봤자 죽잖아요. 죽으면 흙 되잖아요.

 

내가 밥 먹고 살겠다는 그 의지와 우리를 흙으로 돌려보내는 땅의 의지가 왜 어긋났는지를 사람들은 모릅니다. 창세기 4장에 보면 형 가인이 아벨을 죽였는데 가인의 입장에서는 자기가 죽인 아벨과 자신, 그 둘의 문제라고 생각했지 목격자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땅이 목격자가 된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했지요. 그 당시 흡사 cctv가 있었던 것과도 같습니다. 땅 자체가 cctv 역할을 한 거지요. 네가 이 땅에서 하는 일을 다 안다. 땅이 하늘을 향하여 호소했더니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가인에게 찾아와서 네 동생을 왜 죽였느냐, 라고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가인 입장에서는 동생만 움직이고 동생만 상대하면 된다고 생각했는데 땅 상대하는 방법을 몰랐어요. 자기가 속해있는 이 대지, 이 토지를 어떻게 상대하는지를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저주했다는 말이 무슨 뜻이냐? 그 저주뒷면에 땅을 통해서 다른 일을 기획했다는 것을 아울러 이야기합니다.

 

제가 아까 아담이 흙이 된다고 했지요. 아담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아담은 이름 그 자체로. 그런데 그 부인의 이름은 흙이 아니고 하와에요. 생명이 되는 겁니다. 생명이라는 것은 생명나무에서 따먹어서 생명 얻는 것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데 저주 속에서 생명이 나오리라는 이것은 인간들은 감히 생각 못하고 하나님만 실시할 수 있는 다른 계획이 저주받은 이 땅 위에서 개시가 되었다고 보시면 되는 겁니다.

 

땅은 저주받은 것 맞아요. 그런데 저주 속에서 상상도 못할 영생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오늘 본문 3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 이렇게 영생에 대해서 거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생 주시는 하나님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영생주시는 하나님이라고 고백을 하는 그 순간에는 아브라함 혼자 그 고백을 하고 있어요. 그 전에 27절, 28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찾아왔거든요. 아비멜렉이 찾아왔을 때는 영생하시는 하나님을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냥 아비멜렉과 언약을 맺었지요.

 

그런데 아비멜렉이 자기부하장군 비골과 함께 떠나고 난 뒤에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 영생 주시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거예요. 이 말은 뭐냐? 하나님의 이 땅에서 영생 얻는 그 방식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알고 있다는 겁니다. 반면에 아비멜렉은 동일한 사건 속에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영생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고 다른데 관심이 있는 겁니다. 가인처럼.

 

어디에 관심이 있느냐? 이 우물에 대해서 관심이 있어요. 우물이라는 것은 물이 나오는 곳입니다. 그 물이 왜 필요하냐? 저주받은 이 땅에서 물이 없으면 인간은 못살지요. 인간의 75퍼센트가 수분으로 되어 있으니까 물이 없으면 못삽니다. 세포 하나하나에 물이 다 포함되어 있으니까. 목마를 때는 마셔야 되지요.

 

물이 없다는 말은 죽음을 의미하고 우물이 확보된다는 말은 살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 수준이 아비멜렉 수준이에요. 지난 시간에 그 아비멜렉의 종들이 아브라함이 파놓은 우물에 와서 물을 도둑질 해갔습니다. 도둑질 해놓고 다른 이유 때문에 아비멜렉이 비골과 함께 찾아와요.

 

이 말은 뭐냐? 아비멜렉입장은 이곳의 토박이입니다. 자기 땅입니다. 자기 땅에 자신이 온전히 통치할 수 없고 지배할 수 없는 이질적인 가정이 들어왔습니다. 그 가정이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 같으면 그냥 무시하고 내 말 들어, 이렇게 하겠는데 그 아브라함 때문에 난데없이 자기집안의 여자들이 임신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비멜렉이 “당신 선지자지요.” 이렇게 나온 겁니다. 아비멜렉이 아브라함 때문에 낯선 세계를 경험하게 된 겁니다. 그 낯선 세계는 아비멜렉에게 생전 겪어보지도 못한 두려움과 공포로 다가온 거예요. 무서운 거예요. 잘못 건드리면 화가 자기에게 임하는 겁니다. 이 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봅시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으면 교회라는 것도 필요가 없고 제가 설교할 이유도 없어요. 예수님이 안 오셨으면 그냥 인간들끼리 재미나게 살면 되는 겁니다. 물론 교회 만드는 것은 자유에요. 교회 만들어서 재미나게 살면 되니까. 친목단체 만들어서. 그러나 그것 때문에 교회가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는 이 세상을 공포로 몰아넣기 위해서 교회가 있는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됨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이미 마지막 때라서 누구도 예외 없이 불심판의 대상이 되고 만 겁니다. 누가복음 18장에 그 이야기를 했지요. 두 사람이 성전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하나는 바리새인 다른 하나는 죄인이었다는 말이지요.

 

예수님이 거기에 나타나지 아니했으면 그냥 성전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잘 난체 하는 장소가 되고 말아요. 예수님이 오지 않았더라면 바리새인이 누가 봐도 천국 갈 만한, 그 정도로 경건한 사람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그 현장에 나타난 것입니다. 그게 화근이 되는 거예요.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교회가 하나님 이야기만 하면 돼요. 교회가 하나님 이야기만 하게 되면 이것은 바리새인을 양산하는 것과 같아요. “여러분, 우리를 하나님이 만드셨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잘 믿읍시다. 말씀이 여기 있지요. 지키고 순종합시다. 그러면 복 받습니다.” 아무 문제없어요.

 

하나님 믿는 성전, 예배당 크게 지으면 돼요. 그런데 거기에 조금이라도 십자가복음이 전파가 된다면 이것은 큰 문제입니다. 하나님만 이야기하면 하나님 믿는 놀이동산, 친목단체가 됩니다. “여러분 속에 하나님을 섬길 수 있는 잠재력이 있고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걸 발휘해서 살아계신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께 영광 돌립시다.”

 

이러면 설교가 사람들에게 아무 부담을 주지 않아요. 자기선행을 끄집어내는 이것도 자기자랑의 일종이기 때문에. 착한 일을 합시다, 라고 하면 착한 일 하면 되고요, 순종합시다, 하면 순종하면 되는데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이 전파되어 버리면 “여러분은 뭘 해도 죄가 됩니다.” 이렇게 되거든요.

 

그러면 교회가 화근이 돼요. 따라서 교회가 되려면 예수님 십자가 이야기를 하지 말고 하나님 이야기로 일관해야 됩니다. 하나님 바르게 섬기자는 행함만 매치시키면 돼요. 그러면 교회는 얼추 장사가 됩니다. 그런데 십자가 복음을 전해버리면 그들은 극도로 분노하게 되어 있어요.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이 어느 정도로 평소에 자기관리에 철저했느냐 하는 것은, 아브라함을 만남을 통해서 티가 나버렸어요. 나는 당신의 아내를 취할 뻔 했지 취하지는 않았다는 거예요. 얼마나 평소에 자기관리, 쉽게 말해서 신을 섬기는 방법, 신의 화를 안 당하는 방법, 신을 잘 섬기는 방법에 대해서 이미 나름대로 정리가 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거라는 거예요. 그러나 나쁜 짓 까지는 안했고 나쁜 짓을 할 뻔 했는데 거기에 대한 결과는 자기 집안 여자들이 임신을 못했어요. 자기집안 여자들이 임신을 못하는 것과 아비멜렉이 나쁜 짓을 할 뻔 한 그것과 매치가 안 되는 거예요.

 

나쁜 짓을 했다. 그야말로 타인의 아내를 범했다면 이것은 자기가 기존에 갖고 있던 하나님 섬김에 부합이 되는데 자기가 생각하는 윤리적 기준에 부합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재앙이 떨어지니까 이게 연결이 안 되는 거예요. 연결이 안 되니까 아비멜렉은 감을 잡은 거예요.

 

이 사람은 보통 사람이 아니다. 따라서 평소에 하던 내 선행으로 원상회복시킬 수가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아브라함은 이 낯선 이방인에게 부탁하는 수밖에 없어요. “당신은 선지자입니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상의 하나님, 내가 알지 못하는 그 이상의 비밀을 홀로 간직하신 분이니 우리집안 여자들이 임신을 못하게 된 그것은 내가 해결할 문제가 아니고 당신이 해결할 문제입니다.”라고 해서 아브라함이 기도를 해서 다시 태가 열렸거든요.

 

이럴 때에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누구냐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평소에 하던 대로 내가 이 땅에서 이질적인 사람과 합세하면서, ‘한 번은 저 사람이 기도해서 봐줬지만 앞으로도 계속 어떤 재앙을 내릴지 모르니 어떤 조치가 여기서 있어야 한다.’고 해서 지난시간에 살펴본 대로 정치적 협상에 나선 겁니다.

 

우리 서로 바르게 하도록 하자. 정치적 협상을 하는데 아브라함이 “바르게 하는 것은 좋은데 당신 종들이 내 우물 건드렸다.” 하니 “그런 일이 있었군요. 그러면 서로 영토 침범 않기.” 그러니까 이 아비멜렉이라는 사람은 아브라함의 세계에 오고 싶은 것이 아니고 평소에 하고 싶은 대로 줄곧 하고 싶은 거예요.

 

다만 갑자기 돌발 사태로 낯선 사람이 등장해서 평소에 자기가 살아가던 질서에 뭔가 혼선, 혼란이 왔으니 그 혼란을 다시 질서로 바꾸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아브라함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자기에게 유리하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과 협상을 하는데요. 그것을 맹세라고 이야기하지요. 본문에서 브엘세바라는 뜻이 맹세의 우물이라는 뜻인데 브엘세바라는 이 맹세에 대해서 같은 맹세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아비멜렉이 이해하는 맹세라는 것은 정치적 협상력을 말하는 것이고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맹세는 따로 있어요.

 

언약도 마찬가지고요. 언약이란 맹세와 같은 말이에요. 아비멜렉이 생각하는 언약은 따로 있고 아브라함이 생각하는 언약은 따로 있습니다. 아비멜렉은 이 위험한 인물과 좋게 지내자는 정치적인협상 카드인 반면에…… 뭐, 개성공단 재개한다, 그런 식이겠지요, 협상카드인 반변에 아브라함은 아비멜렉과 만나는 이 모든 일에 하나님이 개입한 사건으로 보자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언약 안에, 맹세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 하면, 하나님이 개입했던 증거물로서 그 안에 사건들이 함축되어 있는 거예요. 함축된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는데 그게 뭐냐? 다음 시간에 할 22장과 관련되어 있는데요, 그게 뭐냐? 아비멜렉이 나 아브라함을 만나고 나서 자식을 못 낳았다는 거예요. 태가 닫혔다는 거지요.

 

아버지에 있어서 자식을 낳는데 태가 닫혔다는 말은 아버지 본인이 죽은 존재라는 뜻이에요. 아버지가 자식을 못 낳는다는 말은 그냥 단지 자식 없는 아버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식을 낳아서 계속해서 하나님의 복을 받는다는 증거가 되는데 자식이 없다는 말은 살아도 산 인간이 아니고 지속적인 하나님의 축복이 끊어진 저주받은 존재라는 것이고 그 증거가 자식이 없는 거예요.

 

자식이 없음으로서 아버지 본인, 아비멜렉 본인이 내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를 아브라함이 오기까지는 몰랐어요. 아브라함이 나타나서 자기 태가 끊어지고 난 뒤에는 아, 아브라함을 개입시킨 그 아브라함의 하나님 입장에서 나는 자동적으로 복 받는 존재가 아니고 저주받을 존재라는 사실을 그는 깨닫게 됩니다.

 

기존에 자기가 알고 있던 하나님과 다르지요. 기존에 아비멜렉이 알고 있던 신이 있다면 그것은 착하게 살았기에 자연 자식은 복으로 주어진다고 생각한 겁니다. 자기는 잘났다는 그 말이지요. 의롭다 그 말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을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지요.

 

만나고 난 뒤에 아, 내가 믿는 신의 입장에서는 내가 멀쩡한 자이지만 저쪽 신, 아브라함의 신의 입장에서는 죽은 자가 되는 거예요. 물론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정치적 협상으로 맹세하고 난 뒤에는 여전히 자기자리로 돌아갑니다.

 

우물이라는 것, 물이 있어야 돼요. 그냥 목숨 부지하는 거예요. 아까 제가 이야기한 창세기 3장에 왜 태어나는지, 왜 죽는지 모르고 그냥 이 땅에서 밥이나 먹고 살면 그게 복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데 아비멜렉과 만나는 아브라함입장도 마찬가지에요.

 

아브라함이 ‘어딜 감히 내 아내를 건드릴 뻔 했어? 혼 좀 나봐라. 하나님이여, 저 아비멜렉집안의 태가 닫히게 해주세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사전에 기도한 적이 없어요. 놀라기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브라함이 복을 받는다는 것은 다시 한 번 자기 위상을 생각하는 거예요.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을 때가 21장이거든요. 이삭이라는 자식을 주면서 왜 그 전에 이스마엘이라는 자식을 허용을 하셨느냐는 말이에요. 그것은, 아브람은 죽은 자며 아브라함이 되어야 산자가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람과 아브라함의 차이점이 뭐냐? 아브람 때는 이스마엘이 있었지만 아브라함 때는 이삭이라는 자식이 있음으로서 아브라함이 되는 겁니다.

 

내가 이 땅에서, 이 저주받은 땅에서,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런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네 조상이 죄를 지었으니 너는 죽어라.” 이렇게 돼버리면 하나님의 그 다음 계획은 없어요. 그런데 아담의 아내 하와 그 이름이 생명이라는 말이지요.

 

어떻게 죽음의 땅에서, 저주의 땅에서 생명이 나오느냐? 그 계획은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 자신을 선택해서 아브라함인생 가운데 그것을 실어버린다고요. 갈대아우르, 자기고향을 떠나게 만듭니다. 갈곳을 잃어버려요. 떠나는 순간부터 나그네가 되었습니다.

 

이 지상에서 나그네가 된 거예요. 오늘 본문 마지막 31절을 봅시다. “그가 블레셋 족속의 땅에서 여러 날을 지내었더라.” 블레셋 족속의 땅이에요. 자기 땅 아닙니다. 오래 있다고 해서 자기 땅 되는 것이 아니에요. 어차피 아브라함은 나그네입니다. 나그네라는 말은 이 땅에 자기 땅이 없다는 뜻이에요.

 

저주받은 땅에 자기 땅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영생을 만들어낸다? 영생은 생산되는 것이고 만들어내는 거예요. 믿음은 발명되는 것이에요. 영생은 발명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서 되는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한 설교가 유튜브에 올라가 있는데 어떤 사람이 불만을 터뜨렸어요. 나보고 사기꾼이라고 하는 거예요. “이 사람은 기적으로 구원 받는다는 말을 하는 것으로 봐서 이것은 사기꾼이다. 왜냐? 로마서에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내용이 다 기록되어 있는데 성경에 기적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이 없는데 왜 기적으로 구원받는다고 하는가? 그러니까 사기꾼이다.”

 

이런 식으로 사기꾼이라는 말을 서너 번이나 써 놓았어요. 짧은 글이지만 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기적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을 사기꾼이기 때문에 하는 소리라고 보는 그 사람의 주장은 뭐냐? 그냥 성경보고 이해하면 구원받는다는 거예요. 기적이 필요 없다는 거예요.

 

성경 글자 알고 그 내용 받아들여서 구원받으면 되니 기적이 왜 필요하냐? 그것 때문에 나보고 사기꾼이라고 욕을 하는 거거든요. 그 사람은 자기 구원받기 위해서 성경이 있는 줄로 알고 있는 거예요. 아브람에게 약속의 자식을 준다고 할 때 아브람이 약속의 자식을 자기 종 하갈을 통해서 만들어줬잖아요.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는 기적이 아니지요. “자기는 자식 낳을 생산능력이 있고 자기 아내는 이미 태가 죽었고, 그런데 여종 하갈은 태가 살아있어서 생산할 능력이 있으니까 둘이 동침해서 이스마엘 낳았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다.” 무조건 뒤에다가 하나님의 은혜를 붙이면 되니까. “은혜로 낳은 하나님의 자식이다. 그러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이스마엘을 의도적으로 낳게 하신 이유가 뭘까요? 우리의 모든 인식자체가 내가 살고자 하는 구원중심으로 보는 이것이 이 땅의 산물이라는 거예요. 다시 말해서 우리는 영생을 어떻게 얻습니까, 하기 이전에 우리는 그럴 권리나 자격이 없다는 겁니다.

 

우리는 저주의 땅에서 태어나 저주받아 마땅하고 지옥가야 마땅한 거예요. 하나님 믿어줘서 구원받는 것이 우리의 권리가 아니고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어드밴티지가 아니에요. 우리가 활용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이미 생명나무에서 쫓겨난 입장에서는 영생을 얻었다 하는 이것은 터무니없는 축복이에요.

 

달라고 요청할 있는 입장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줬다는 말은 영생 얻고 무슨 일이 벌어져도 군소리하지 말라는 뜻이에요. 몸살 걸려서 링거 맞고 그래도 할 수 없어요. 영생 얻었으면 집안에 불이 나고 서문시장 홀랑 다 타도 괜찮아요. 자기가 찍은 사람이 대통령 안 되고 떨어져서 미국으로 도망갔다고 해도 괜찮아요.

 

우리 집안에, 우리 혈육에, 내 인생이 뒤죽박죽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그 말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이 아비멜렉을 놀리려고 하는 것이 아니에요. 네가 나를 못 알아보다니 혼나봐라, 라는 그런 개념이 아니고 아브라함이 놀래요. 내가 의도한 벌칙이 아닌데 왜 저 집안에 태가 닫혔느냐.

 

자식이 없다는 것은 아버지가 죽었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이스마엘이 있다는 말은 아브라함은 죽은 자에요. 내가 죽은 자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내가 산자라는 증거는 뭐냐? 하나님이 개입해야 돼요. 이삭, 없는데서 자식이 태어나야 비로소 그 자식 때문에 죽은 이 아버지가 산 아버지가 되는 이것이 저주의 땅에서 하나님의 영생 생산하기, 영생 만들기입니다.

 

이것은 정치적 협상이 아니에요. 27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양과 소를 취하여 아비멜렉에게 주고.” 이렇게 줬잖아요. 이것이 정치적인 뇌물이에요. 좋은 게 좋은 거라고 받자. 그 뒤에 또 따로 줘요. “아브라함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으니” 이렇게 또 따로 떼놓는다고요.

 

29절에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물어요. “아비멜렉이 아브라함에게 이르되 이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음은 어찜이뇨.” 아까 준 그 양과 소는 뭐고 왜 또 일곱 암양 새끼를 따로 놓습니까, 라고 물으니까 아브라함이 “너는 내 손에서 이 암양 새끼 일곱을 받아 내가 이 우물 판 증거를 삼으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것이 뭐냐 하면, 이 땅에서 자기가 저주받은 것도 모르고 그냥 밥 먹고 살고 목숨 부지하면 그것으로 된다고 여기는 그 모습이 저주에요. 영생은 상상도 못하는 거지요. 땅에 속한 인간들이 기껏 얻고자 하는 것이 뭐냐 하면, 우물이니까 그 우물에 대해서 자기 종들이 건드렸고 그 우물에 대해서 맹세한다는 것은 우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거예요.

 

아비멜렉입장에서 우물은 자기생존에 필수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 우물을 뭐로 바꾸느냐 하면, 영생을 주셨다는 하나님의 증거물로 삼아버리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여호와를 모르는 사람과 같이 어떤 협상을 하고 맹세를 하고 약속을 하게 되면, 이 언약이라 하는 것은 묶이는 거예요.

 

쉽게 말해서 만난다는 말보다 더 세게 얽혀있는 관계는 이제는 헤어질 수 없다는 관계에요. 만났다는 그것보다 헤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 관계를 더 강하게 표현한 거예요. 아브라함이 따로 떼어놓은 일곱 양 새끼는 아브라함 자신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영생을 위해서 바쳐진 아브라함자신의 제물화, 이 현실세계에서 너는 나와 관련성이 있어서 이 땅에 언약이라는 것, 맹세라는 것을 경험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겁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원래 영생이란 생명나무에 있어요. 그런데 저주받은 이 땅에서 생명을 끄집어낸다는 것은 엄청난 희생이 따르기 마련이에요. 요한복음 8장 56절에 보면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아브라함이 예수님과 관련성이 있습니다.

 

더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이 아브라함 보고 “너는 곧 나다.” 이렇게 보시면 돼요. 그 시대에 나가 되는 거예요. 세속적인 사람 아비멜렉에게 따로 암양 새끼 일곱을 드린다는 것은, 너는 모르지만 이 땅에서 생명, 영생이라는 것이 너와의 만남을 통해서 만들어지는 거예요.

 

희생입니다. 아비멜렉은 아무것도 몰라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알아요. 아브라함은 지금 아비멜렉과의 언약을 맺었는데 오늘 본문 33절에 따르면 “아브라함은 브엘세바에 에셀나무를 심고 거기서 영생하시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으며.”라고 한 거예요. 아비멜렉이 자기군대장관 비골과 함께 떠나고 난 뒤에.

 

그러니까 이것이 어긋나는 겁니다. 언약을 맺고 맹세를 해도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이 나에게 저런 선물을 준 것은 서로 좋게 지내자는 정치적 타협이구나.’라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또다시 저주받을 일은 없겠지. 왜? 자기가 맹세했으니까.’라고 생각하는 것은 이 땅에서 자기 목숨 부지하는 그것만 목적으로 사는 거예요.

 

아비멜렉은 자기의 목적하는 바를 위해서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었고 아브라함은 본인이 목표에요. 누구 목표? 하나님이 본인을 목표로 만든 거예요. 아비멜렉은 자기가 예상하고 기대한 목표를 아브라함을 통해서 가졌고 아브라함은 주께서 아브라함을 하나님의 언약 사람으로 만드는 겁니다.

 

천국가기 위해서 예수를 믿어주는 것은 천국 가고 싶다는 자기목표를 위해서 예수를 이용해 먹는 것이고 진짜 성령을 받은 사람은 본인이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사람이 되는 거예요. 천국가고 자시고, 구원받고 안 받고 그런 문제는 이미 성도에게는 신경 쓸 문제가 아니에요.

 

주께서 자기를 언약사람으로 만들어내잖아요. 잘 이해가 안 되시는데 이해가 되도록 말씀을 드릴게요. 신라의 35대왕 경덕왕이 있어요. 경덕왕 때 아버지 성덕왕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서 중들이 종을 만들었는데 쳐보니 소리가 제대로 안 나는 거예요. 그래서 “듣기 싫다.” 하고 임금이 주지 불러서 화를 냈어요.

 

종소리가 저래서 짜증이 나니 제대로 만들어 보라고 봉덕사 주지에게 시켰어요. 중들이 나가서 종을 만들 경비마련을 위해서 시주를 받는데 하루는 가난한 집에 가니 시주할 것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제 애를 하나 드리겠습니다.” 이정도 이야기하면 무슨 이야기인지 감 잡으시겠지요.

 

그래서 애 하나 바쳤어요. 중이 그것은 안 될 말이라고 하니 그 가난한 집에서 하는 말이, 계시를 받았는데 그 애는 부처님을 위해서 바쳐야 될 애라고 한 거예요. 그 애를 종 만드는데 불속에 집어넣고 종을 만들었더니 종소리가 얼마나 청아하고 좋은지 경덕왕이 만족한 거예요.

 

종을 칠 때마다 거기서 에밀레, 에밀레, 하고 애우는 소리가 들렸답니다. 종 안에 애의 목숨이 들어 있는 겁니다. 하나님께서 이 저주받은 땅에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사건으로 개입해야 되고, 그 사건으로 함축된 것이 언약이고, 아비멜렉은 언약을 맺어놓고 무슨 뜻인지도 모르는 거예요.

 

마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죽이기는 했는데, 그들이 언약에 참여했는데,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먹고 그래서 예수님이 잡혀죽게 되었는데, 그래서 생긴 것이 새언약이고 내 피와 내 살인데 그런 짓을 한 인간들은 자기 땅에서 밥이나 먹고 잘 살면 그것이 복인줄 알고 주님은 죽어야 그것이 영생이고.

 

이 사실을 아브라함 때 미리 알려준 겁니다. 언약은 맺었어도 언약에 대한 개념이 달라요. 어긋납니다. 아비멜렉과 그리고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은 이것을 영생의 생산으로 본 겁니다. 내가 영생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영생하는 작업에 내가 하나의 재료가 되는 거예요.

 

재료가 된다는 이 사건의 일관성은 어디까지 이어지는가? 요한복음 8장 56절에 보니까, 아브라함이 예수님 보기를 원했다가 보고 기뻐했다는 신약성경까지 계속 가는 거예요. 그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가 이사야 26장 18절, 19절에 나옵니다. “우리가 잉태하고 고통하였을찌라도 낳은 것은 바람 같아서 땅에 구원을 베풀지 못하였고.”

 

우리가 잉태해서 자식을 낳아봐야 바람같이 헛방이다. 그러나 19절에 보면 “주의 죽은 자들은 살아나고.” 육에서 낳는 자식은 다 헛방이지만 주께서 오시면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다는 거예요. 이게 바로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이게 맹세에요.

 

아브라함 자신이 제물이 되어서 아브라함 시대에 아브라함은 언약의 중심으로서 등장한 겁니다. 그 땅은 블레셋 땅이고 남의 땅이고 저주받은 땅입니다. 하지만 저주받은 땅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셨는데 아브라함이 희생이 되어서, 아브라함이 가진 것을 저쪽에 줌으로서 주께서는 아브라함 중심으로 그 시대에 아브라함언약을 이루어나가실 때 그 결과는 뭐냐?

 

상상도 못한, 아브라함도 따먹지 못한 영생이라는 것, 영생 주시는 하나님의 일관성, 이것을 아브라함은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주의 성도들이 자기 살고 싶은 꿍꿍이 때문에 예수님, 하나님, 부르지 말고 주께서 먼저 우리에게 희생양, 영생을 줬다는 사실을 저희들이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