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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골로새서 강해 제 6강 [할례와 세례] 본문

십자가마을 수련회/17겨울(골로새서)

골로새서 강해 제 6강 [할례와 세례]

정인순 2017. 1. 14. 16:10

 

   음성6   

 

녹취:오용익

 

2017 십자가마을 겨울수련회 - 골로새서강해 제 6강

[할례와 세례]

(강의 : 이근호목사)

 

이 시간에는 골로새서 2장 11절을 보겠습니다.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 다음에 할례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아니고 12절에 보면,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바 되고”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 세례라는 것을 설명하면서 어디서 그 근거를 끄집어내느냐 하면, 할례에서 그 근거를 끄집어냅니다.

 

할례 안에 담겨 있던 하나님의 그 지시사항, 창세기 17장이지요, 할례 받지 않으면 거룩한 백성이 되지 못한다는 그것을 할례언약이라 하는데 하나님의 그 할례의 약속을 하는 취지와 그 취지의 완성이 이 세례를 통해서 구현되었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현되었다고 한다면 이 과정에서 뭐가 나오는가? 뭐가 생산돼요.

 

이 강의의 제목이 <복음의 생산>이지요. 복음의 생산입니다. 또는 성도의 생산, 새 성도, 또는 새로운 피조물의 생산이지요. 그러면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고 세례도 세례요한을 보내서 세례를 하게 했으니까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내려주신 법과 법 사이에서 하나님이 필요한 것들은 모조리 다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자기 솜씨를 발휘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는 어디에 끼어들어야 되는가 하는 그 문제가 있겠지요. 처음부터 할례에 끼어들려고 하니까 이것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해당되고, 우리 이방인 입장에서 세례에 끼어들려 하니까 할례를 모르면 세례에 못 끼어들고, 대체 어느 대목에서 우리가 끼어들어서 이 언약의 혜택을 누릴 수 있는 대상자가 될 수 있느냐를 생각하기 마련이지요.

 

물론 이 질문이 바람직한 질문은 아닙니다만 우리가 그렇게 생각은 할 수 있잖아요. 생각하는 것은 자유니까 그렇게 생각한다 그 말이지요. 성경에서 세례 나오고, 할례 나오고, 그리스도 나오고, 그 다음에 십자가로 승리했다 하니까 그 승리에 우리가 참여하고 싶고, 그래서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 되고 싶은 의욕들은 다 있는 거예요.

 

아주 단정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할례나 세례는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무에서, 없음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면 없음에서 나온다는 말은, 존재의 밑, 인간이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에 감추어져 있는 어떤 밑이 있는데 그 밑에서의 작용이 존재세계 속에 이것을 드러내게 되면 이것이 할례가 되고 세례가 되는 겁니다.

 

이 존재, 이것이 ‘있음’이니까 우리는 이스라엘을 있음으로 생각하지요. 이스라엘 있음을 밑에서 밀어붙여 버리면 여기서 무슨 현상이 나오는가? 할례를 행해야 하는 할례언약이 일어나는 겁니다. 없음에서 이스라엘에게 할례언약을 행한 겁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은 무슨 뜻도 모르고 그냥 하라고 하니까 그냥 하는 거예요. 할례를 행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것은 무엇을 뜻하느냐 하면, 있음이 없음의 지시를 등에 업었는데 결국은 이 없음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이 할례가 이스라엘을 잠식하고 없앰으로서 할례는 세례로부터 완성을 보이는 겁니다. 이게 뭔 뜻이냐 하면, 할례를 행했는데 신명기 뒷부분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는 왜 마음의 할례를 안행하지?”(신 10:16) “육신의 할례를 시키는 대로 했는데요?” “아니. 그게 다가 아니거든? 마음의 할례를 행해야지.”라고 한 거예요.

 

그러면 우리 이스라엘 입장에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뭐라고 반박하겠습니까? “진작 그렇게 해야지요. 처음부터 마음의 할례를 행하라고 하지 이제 와서 왜 그렇게 하십니까?”라고 한다면 하나님 쪽에서 이렇게 답변해요. 할례를 행하라는 것을 던져놓으면, 그 할례가 없음에서 나오게 되면, 할례 행함을 함으로서 비로소 밝혀지는 죄들이 있어요. 악한 죄들이 나옵니다.

 

율법을 지킴으로서 율법을 지키기 전까지는 발각되지 않는 죄가 율법을 지킴으로서 발각되는 죄가 있어요. 그 죄는 뭐냐? 갑자기 율법 받고 난 뒤에 교만해졌다, 그런 말이 아니고 할례언약을 받게 되면 그 다음부터 모든 하나님의 지시명령이 어디에 준해서 주어지느냐 하면, 할례에 숨겨진 취지에 준해서 계속 명령이 하달되는 겁니다.

 

예를 들면, 어떤 교인이 있는데 어느 날 자기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거예요. 그때부터 그 교인에게 목사는 뭐라고 하느냐 하면, “십자가를 아는 양반이 왜 그렇습니까? 십자가를 안다는 양반이 그런 것 때문에 불평하십니까? 주님은 그것보다 고생했는데, 복음전하다가 돌에 맞는다고 불평하기 있기요?” 그렇게 나온다는 말이지요.

 

“주님께서는 목숨을 바쳤는데 애 하나 세월호사건으로 물에 빠졌다고 그걸로 자꾸 시비 걸래요?” 이런 말과 똑같은 거란 말이지요. 차라리 십자가를 몰랐으면 애 잃어버렸다고 원망하고, 집에 불났다고 원망하고, 가정에 문제 있다고 원망하는 것이 나의 정당한 권리처럼 여겼는데 십자가를 알고부터는 그렇게 정당한 권리조차 숨겨진, 잠재되어 있던 죄악이라는 사실이 들춰지게 되는 겁니다.

 

“목사님, 그렇게 훌륭하게 하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교회 없습니다. 내가 지어낸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십자가 아는 교인이 그래서 되겠어요?”라고 말을 할 수 있는 목사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렇게 하려면 목사 본인이 그 교회를 사면해 줘야 돼요. “나는 죄인이기 때문에 그동안 여러분에 많은 민폐를 끼쳐서 죄송합니다.” 하고 물러나 줘야 돼요. 그것도 매주 마다.

 

자기가 간섭이나 해댈 입장에 있지 않습니다. “십자가를 남에게 이야기하는 너는?” 이런 말이 대번 나오거든요. “십자가 아는 사람이 그렇게 하느냐고 닦달 내는 너는? 너는 십자가를 안다는 이야기인데 십자가 안다는 꼬라지하고는!” 이렇게 되거든요. 양자물리학에 이런게 있어요. 하나의 입자가 있다면 그 입자 속에 힘이 작용하면서 필드를, 하나의 장을 형성합니다. 이것이 교재에 나와 있거든요.

 

그런데 교재에 안 나오는 이야기가 있어요. 여기에 힘이 작용할 때 이 힘이 원 발원지, 여기서부터 바깥으로 나오는 것이 아니고, 단지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이 필드의 힘이 도착지점과 원발산지까지 다 추궁을 하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최종 마지막 입자가 되어버리면 여기에 접근하는 힘이 무한대기 때문에, 실제 관측과 안 맞기 때문에 끈 이론이 여기서 나온 겁니다.

 

물리학의 끈 이론을 말하는 겁니다. 뭔가 무한대의 힘으로 작용 받게 된다면 이런 일은 없다. 어떤 면적의 끈이 있어서 그 중간과정에서 숨은 차원이 있다. 7차원이 있다고 하는데 이 말이 뭐냐? 십자가를 언급했으면 언급한 사람은 갑이 되는 것이 아니고 네가 언급한 내용에 본인이 추궁을 당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에 대해서 언급을 할 수 있는 자격자는 누구밖에 없습니까? 예수님밖에 없지요. 그러면 예수님은 안 보이는데요? 교회에 예수님이 안 보인다고요. 허연 영감이 도포입고 있다든지 그런 것이 안보이잖아요. 그러면 예수님의 현재성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수님의 현재성은 바로 성령이지요. 그래서 성경대로 모든 교인들과 성도는 누가 관리한다? 목사가 관리하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관리하는 거예요.

 

그러면 그 교회 목회는 누가 합니까? 목사가 하는 것이 아니고 친히 성령께서 목회를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디모데 3장에 나오는 감독된 자는 무슨 역할인가? “이렇게 하는 그것이 감독된 자의 입장에서 죄인입니다.”를 보여주는 입장에서 감독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겁니다. 문장이 좀 길지요? 집사로 세움 받은 사람들은 집사가 되어봐야, 성경에 나오는 대로 집사는 이러이러 해야 된다는……, 집사는 술에 인 박이지 말아야 한다는 식으로 나오는 것이 있어요.

 

집사가 되어봐야, 집사 되기 전에는 남의 이야기인데 집사 되고 난 뒤에는 그 말씀 앞에서 자기를 비춰볼 때 집사 될 자격도 없고 권한도 없는 존재, ‘그 죄인이 나구나.’ 하는 자를 교회에서 집사로 세워야 되는 거예요. 햇권사 세울 때도 마찬가지고, 부목사 세울 때도 마찬가지고, 목사 세울 때도 마찬가지고.

 

“여러분이 목사 세웠으면 이제 이 목사라는 것이 얼마나 목사 입장에서 죄를 짓는가를 이제부터 똑똑히 보시기 바랍니다.” 하고 그렇게 선포를 해야 되고 교인들은 거기에 맞받아서 “목사답지 않으면 다음 달부터 월급 없습니다.” 하고 맞받아 나와야 돼요. “……의수히 드리고……” 그런 것 있으면 안돼요. 위임식 할 때. 의수히 드린다는 것 잘 모르지요? 아시는 분은 아실 것인데.

 

당회장 위임식 할 때 노회장이 와서 당회장 세워놓고 교인들 선서시키는데 마지막 하이라이트가 그 대목이에요. “사모한테 한복 한 벌, 목사한테 양복 한 벌 주고 생활비는 의수히 드리고” 정한대로 빠지지 않고 드리겠다는 뜻이에요. 옛날 교회 다닌 사람은 다 그런 아련한 추억들이 있지요. 그게 하이라이트에요. 그 이야기 하려고 위임식하는 거예요.

 

교인들은 죄인들의 모임입니다. 말씀에 의해서 하는 거지요. 이게 복음의 생산, 성도의 생산입니다. 하나님께서 법을 주셨는데 그 법의 입안자와 그 법을 제시하는 분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경유해서 교류해야 된다는 겁니다. 만약에 교인이 나가면 주께서 보내신 것이고 교인이 왔다면 주께서 오게 하신 거예요. 그 다음 주에 안보이더라도 상관없어요. 그 다음 주에 안 보이는 것은 주께서 안 오게 하신 거예요.

 

너무 왔다 갔다 하면 교인들이 보기에 약간 어지럽기는 해요. 하지만 그걸 통해서 뭔가 붙잡으려고 하고 안 떨어졌으면 좋겠다는 그 욕심, 괜히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통해서 그런 욕심이 있음을 들통 내게 하는 작용을 주께서 그 교회에 목회라는 이름으로 실시하시는 겁니다. 주일 날 했는데 제가 생각해도 너무 재미있어서 여기서 써먹어야 되겠어요. 시편 4편 7절이요.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여기에 응용문제 막 나올 수 있지요. 교인 갑자기 50명이 오는 기쁨과 주께서 평소에 내 맘에 두신 기쁨 중 어느 것이 큽니까? 그러면, “교인 50명 와도 별거 아닙니다.” 하면 이것은 한 6천명 모이는 교인들이에요. 그런데 25명 모이는 교회에 50명이 오게 되면 ‘와! 재정 자립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이 들 수 있겠지요. 그것은 평소에 주께서 내 맘에 두신 기쁨보다도 50명이 오는 기쁨이 더 크겠지요. ‘이제 쨍 하고 해 뜰 날 왔네.’ 이렇게 된다 이 말이지요.

 

제가 주일날 써먹었던 것은, 교인들에게 40억, 50억 나눠주면서 ……, 5천원 나눠주면 “주께서 주신 기쁨이 더 큽니다!” 이렇게 나오니까 아예 50억이나 60억을 주면서 “50억을 받을 때의 그 기쁨과 주께서 마음에 두신 기쁨이 어느 것이 더 기쁩니까?”라고 물어보지요. 그러면 이론상은 “주께서 주신 기쁨이 더 기쁩니다.” 하지만 시험을 해보자는 말이지요.

 

갑자기 그 집이 불이나면서 50억이 날라 가보세요. 괜히 10미터 앞에서 조작하다가 들통 나버렸지요. 이게 시편이거든요. 시편 이전에 창세기에 할례언약이 있는 거예요. 육신의 할례언약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점차점차 내부로 침투해서 마음의 할례를 행했느냐를 추가적으로 시편 4편 7절 같은 말씀으로 계속 투입하게 됩니다.

 

그러면, 아, 내가 끊어내야 될 것을, 고추만 끊어냈지 다른 것은 전혀 손도 안대고 있다는 것이 점점 더 들통 나는 겁니다. 그러면 왜 여자는 할례가 없는가? 물론 아프리카 무슬림에 그런 것이 있지만 여자는 왜 할례가 없는가? 여자는 남편을 쳐다보는 입장에 있어요. 저 남편이 얼마나 어설프고 엉터리인가를 지켜보다가 그게 엉터리인 것을 알고 바꿔치기 할 예비단계에 놓인 사람이 여자에요.

 

‘잘하는가 한번 보자.’ 우병우처럼 이렇게 팔짱 끼고 ‘주의 말씀대로 잘 하는가 보자.’ 하고 보는 거예요. 그러면 뻔하지요. 못하잖아요. ‘그렇지. 우리 신랑은 주님밖에 없어.’ 그렇게 되는 겁니다. 담요만 저희끼리 덮는 것이 여자가 아니에요. 다시 정리하겠습니다. 육체의 할례가 나중에 마음의 할례까지 온다는 이것은 결국 뭐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왔는데 그것이 어디까지? 자기 백성의 마음까지 침투한다는 것을 할례라는 상징물로서 구약에서 그림자로 보여준 거예요.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셨다. 믿자. 열두 제자 중에 믿은 사람이 아무도 없어요. 다 실패했습니다. 목자를 치니 양들이 흩어졌다는 거지요. 그 말은 뭐냐 하면, 앞당겨서 필름 빨리 감아버리면 예수님이 목자라고 하는 그 뉘앙스 속에 있는, 양들이 다 떠나가고 홀로 남을 목자라는 그 의미를 예수님만 아는데 그 주변에 있는 열두 제자는 아무도 모르는 거예요. 오해하고 곡해하고 있었던 겁니다.

 

육신대 육신의관계가 그런 거예요. 오해의 관계입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은 자기를 늘 조작하기 때문에 자기에게 필요한 의미와 개념만 둘둘 감겨 있어요. 구멍 난 스타킹처럼. 전체를 덮을 필요 없지만 나한테는 유리해 보이는 그런 의미만 있는데 주님은 전체의미를 몰고 왔잖아요. 그러니 어설프게 덮으면 안 덮이잖아요. 너무 누락된 부분이 많고 빠진 부분이 많아가지고.

 

“아, 예수님은 나하고 계속 사귈 분이 아니야. 떠날 분이야. 도망치자. 나 저사람 모른다. 나 저사람 저주한다.” 베드로가 그렇게 이야기했다는 말이지요. 자기가 감고 있는 의미로서 주님을 몽땅 다 함유하기는, 주님을 다 이해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말이지요. 그러면 방법은 뭡니까? 주님께서 오시면 되는 거지요.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목숨까지 내놓겠습니다.” 자기 딴엔 다 내놓았는데 그 의미가 주님의 취지를 덮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요한복음 21장에서 주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여름에는 요한복음을 해버릴까요? 요한복음 21장에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한 거예요. 베드로가 가만히 들어보니까? “예,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못해요.

 

자기가 아는 의미는 제한되고 주께서 먼저 사랑이라는 말을 끄집어낼 때는 나를 온전히 덮고도 넉넉하게 남아 있는 그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뭐라고 하느냐 하면, 자리를 넘기지요.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비겁하기는 참. 한 번 더 물어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께서 아실 줄 믿습니다.” 바통을, 주도권을 넘겨버려요.

 

또 세 번째 묻고 난 뒤에 “너는 네가 원치 않는 길로 갈 것이다.” 다시 말해서 “너는 평소에 네가 원하는 길로 가고자 안달이 났었어. 내가 그런 너를 그냥 방치하지 않을 거야. 왜? 나는 네가 모르는 새로운 의미, 천국을 완성하고 영생을 주는 의미는 나만 갖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베드로가 3년 동안 배웠다고 그것을 써먹고 있는 것이 아니에요.

 

매일매일 배우는 겁니다. 지금껏 써먹었으니 얼추 어지간하면 통하지 않겠는가? 그런 것 없습니다. 주께서 허리띠 쥐고 매일같이 가게 되면 예상하지 못한 새로운 주님의 의미가 느껴지지요. 그것이 바로 사도바울이 했던 기도입니다. 에베소서 3장을 볼까요?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 기도내용이 뭐냐? 18절에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왜? 의미가 우리보다 크니까.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넓이, 길이, 높이, 깊이, 3차원이지요.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미 완성했기 때문에 모든 의미는 완료 상태에 들어갔어요. 충만해요. 충만한데 우리가 조금만 지금 먹고 주님 안다고 우기고 있는 겁니다.

 

어린 애들, 철없는 예닐곱 살 애들보고 씻으라고 하면 춥다고 대충 물 찍어서 시늉만 내잖아요. “에라, 이놈아.” 하고 양동이로 물을 부어버리지요. 그 양동이에 이름을 ‘충만’이라고 써놓았어요. ‘이거 나한테 유리한데. 이 말씀은 나한테 좋은데.’ 어디서, 하고 그대로 다 부어버리지요. 어푸, 하고 뒤집어 씌워지게 되면 내가 몰랐던 주님의 그 사랑의 깊이와 용서의 그 은혜로움을 더욱더 많이 알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환란과 곤고와 핍박과 기근과 적신과 위험과 칼, 계속해서 들이닥치지요. 이래도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여기서 주의 할 것은, 미리 아는 환란과 곤고나 핍박은 그거 핍박 아닙니다. 항상 우리가 소급해서 일이 다 끝나고 난 뒤에 돌아보니까 과거의 모든 것들이 환란과 핍박과 기근이고 적신이고 위험이고 칼이었습니다.

 

내 힘으로서는 빠져나올 수가 없었던 상황, 그것이 어려운 일도 될 수 있고 더욱더 어려운 위협은 거기에 빠질 수밖에 없는 유혹으로 다가온다는 것이 더 끊기 힘든 거예요. 주님 주신 기쁨보다도 포도주가 갑자기 생산량이 늘어나는 그 기쁨이 주의 기쁨을 취소시키는 현상 속에 우리가 놓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거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육체 바깥에서 우리의 내부로 온다면 우리 내부한테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겁니까, 라고 물으면 성경대로 답해야지요. 골로새서 2장에 나옵니다.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위해서 목욕탕에 갈 필요가 있을까요, 없을까요? 목욕탕 갈 필요가 없어요. 우리가 마음의 할례를 행하기 위해서, 또는 다른 말로 세례를 행하기 위해서 우리 쪽에서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 행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 하면, 성령을 통해서 창세전의 비밀을 알 수 있는데 그 비밀은 우리가 해내지 못하는 것을, 너무나 친절한 우리 주님께서 우리가 무거워서 벗어나지 못한 그 짐들을 주께서 공생애를 통해서 다 벗겨내는 과정을 우리에게 알려줬습니다. 14절에 봅시다.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라고 되어 있어요.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못 박음을 당했지요. 본인이 “못 하나 주세요.” 해서 장도리 가지고 본인이 못을 쳐댄 것이 아니잖아요. 로마 군병들이 십자가에 못을 박았지요. 지금까지 배운 것 복습해 봅시다. 시간이 완성이 되고 멈추게 되면 뭐만 남아 있다? 시간이 거두어지면 성질만 남아 있지요. 성질의 특징은 무한반복이지요.

 

십자가의 무한반복이 되게 되면 앞으로 역사가 얼마가 진행되든지 관계없이 택한 백성에게는 십자가가 반복해서 주어지는 겁니다. 그러면 십자가가 반복할 때는 어떻게 되느냐? 주님이 십자가에 당한 것이 아니고 주님이 자기 자리에다가 자기가 목수가 되어서 자기가 졌던 십자가에 어떤 내용이 중첩되어 있고 주름져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치는 거예요.

 

일종의 공고판입니다. 보란 듯이. 옛날 관원의 이방이 사또가 전하는 전달사항을 붙여서 광고하잖아요. 이런 인상 가진 사람은 현상금 20냥, 하듯이 십자가에 공고를 하시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고 알고 있는데 예수님의 육체를 잠간만 싹 내려 보니까 예수님 육신 뒤에 뭐가 있는가 하면, 율법을 찢었다는 것이 걸개처럼 걸려 있어요.

 

걸개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는데 광주에 가보면 알 수 있어요. 광주 민주화운동 할 때 걸개를 많이 했어요. 거는 그림을 걸개라 합니다. 걸개처럼 죽 달아놓았다는 말이지요. 그게 골로새서 2장에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걸려 있으면 말씀의 완성단계에서는 이것이 무한리필, 무한반복이 되는 거예요. 내가 행할 수 있는 할례는 없고 내가 행할 수 있는 세례도 없어요. 우리가 할 수 없기에 주님께서는 그 세례와 할례를 다 행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세례도 뭔가 절차가 있어요. 율법을 제거하려면 주님께서도 아버지의 지시에 따른 절차가 있습니다. 제일 먼저 나온 절차가 물세례입니다. 그 다음에 나온 것이 불세례에요. 불세례에서 세례요한이 말한 불세례는 유황불 떨어지는 것이고 예수님의 불세례는 십자가 죽음을 이야기합니다. 의견이 달라요.

 

그 다음에 나오는 순서가 성령세례입니다. 물과 피와 성령, 이것은 우리가 하지 못하는데 예수님이 대신 했던 거예요. 어디서?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제로. 그래서 적그리스도냐 아니냐 하는 것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는 것을 부인하는 자는 적그리스도가 된다는 말은, 예수님이 그냥 육신이 아니고 육신으로 하신 일이 있어요. 우리가 하지 못한 일을 주께서 대신, 물세례, 불세례, 성령세례를 이미 다 치러버린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목사님, 좋기는 좋은데 우리가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성령세례라는 것은 예수님께서 노리고 침투하라고 보낸 거예요. 그 침투한 근거가 뭐냐 하면, 새언약입니다. 새언약과 옛언약의 차이점은, 옛언약은 언약이 있고, 율법이 있고, 인간 쪽에서 다가가는 거예요.

 

아까 이야기했지요. 제사할 때 제사의 특징이 뭐라고 했습니까? 예물 들고 내가 성전에 찾아가는 거예요. 찾아가는 반면에 새언약은 율법을 우리 마음속에 새겨버립니다. 이게 예레미야 31장 31절에 나와요. 새기는데도 조건이 있어요. 새기는데 아무한테나 주는 것이 아니고 다윗언약에 해당되는, 진짜 다윗언약의 자손에게만 새겨버립니다.

 

왜냐하면 그게 다윗언약이 완성이기 때문에. 다윗언약이라는 것은 쉽게 말해서 왕과 그 백성의 관계입니다. 백성은 하나도 없어요. 왕이 먼저 등장해서 백성을 새롭게 생산하는 언약이 다윗언약입니다. 백성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새언약대로 성령을 보내지요. 새언약의 백성을 만들기 위해서 성령 보낸다는 구절이 어디에 예언되어 있는가?

 

이게 에스겔에 예언되어 있습니다. 메시아가, 다윗이 다시 오셔서 성령을 보내주게 되면 바짝 마른 뼈인데 말씀과 성령이 와버리니까 막 살아나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의 군대가 되는 겁니다. 바짝 마른 뼈에요. 그걸 누구보고 이야기하느냐? 인자야, 라고 장차 오실 예수님이 호칭을 사용합니다. 너에게 일어난 그 일은 장차 예수님이 오셔서 할 일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아까 이 자리에 안계셨지요? 아까 질문을 하려고 했는데요.” 이처럼 다윗언약이라는 것은 노리고 들어가는 겁니다. 질문이 뭐냐 하면, 남편 돈 잘 벌어오고 남들 보기에 행복하게 사는 가정의 문제점이 뭐냐 하는 질문이었어요. 여러분, 이 질문에 대한 답변 알아요? 세 번이나 했는데 이제는 다 알겠지요. 전체성을 모르고 자기 나름대로의 의미로 둘둘 감아서 자기주도권을 쥐고 있는 것이 문제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는 그것이 문제지요.

 

계속해 봅시다. 언약에 있어서 왕이 먼저 등장해요. 왕이 먼저 등장하는데 왕이 해야 될 일이 있습니다. 뼈로 죽었던 이 백성의 책임을 왕이 대신 담당을 해줘야 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다윗언약 자체가 왕 개인 한 사람보고 하지 죽은 백성보고 계약을 안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천국은 한 사람보고 계약을 하지 그 한 사람 빼놓고 다른 사람은 다 물러가 있어야 돼요.

 

물러가 있는 것이 아니고 죽어 있어야 돼요. 그래서 로마서 1장에 복음을 설명하면서 복음이 뭐냐? 예언된 그 다윗 왕이 육신으로 오셔서 죽었다가 부활했다. 이게 로마서 1장에 나오는 복음입니다. 이게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구약을 토대로 확고하게 하나님의 약속은 변개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는 거예요. 하나님은 다윗언약을 성실히 지킨다고 시편 89편에 나와 있어요. 다윗언약은 영원함이라.

 

그 다윗언약의 영원함을 에스겔에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백성을 끄집어낸다고 했지요. 누가복음 1장에서는 가난한 자에게서 끄집어낸다고 되어 있어요. 다윗의 후손이 오게 되면 권세 있는 자를 쳐부수고 가난한 자를 권세 있게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 대목을 촛불집회에서 써먹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해요.

 

촛불집회에 이 본문이 왜 있는지 모르겠어요. 갖다 붙이면 다 되는 줄 알고 있어요. 왕이 죽고 난 뒤에 부활하고 난 뒤에 하나님이 다윗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왕과 결부된 새로운 백성들을 성령으로 찾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먼저 왕이 부활되고 그 다음에 백성들이 부활되어야 돼요. 이게 다니엘 12장에 나와 있거든요.

 

이렇게 되면 이게 마지막 때가 돼요. 마지막 때란 더는 하나님의 계약은 없다는 거예요. 이 다윗언약의 오실 분으로서 모든 것을 끝내버립니다. 사도행전 17장에 보게 되면, 사도바울이 설교한 대목인데요. 오늘날도 이렇게 설교했으면 좋겠습니다만, 30절에 보면,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을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여러분, 들어보면 어떤 느낌이 듭니까? 만약에 여러분이 불신자라고 치고 어떤 아저씨가 와서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했지만 이제는 정신 차리고 회개하라.” 했다 치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좀 건방지다는 생각이 안 듭니까? “네가 알기는 뭘 알아? 세상에 사람이 너밖에 없어? 그리고 더 나아가서 네가 무슨 권리로 전세상의 모든 민족과 역사를 총괄해서 정리할 자격자가 되나? 민족마다 역사가 따로 있고 종교가 따로 있고 신이 다 다른데 네가 그것보다 초월적인 위치에 있어서 거기서 이런 건방진 소리를 할 수 있는 권한을 누가 너에게 위임했나? 네가 유엔사무총장이라도 되나? 그럴 수가 있나?” 그 말입니다.

 

초반에 이런 이야기 할 때부터 어떻게 됩니까? 거부반응이 오지요. 그 다음에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그 다음에 뭐예요?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네가 사람이라고 생각해? 너는 사람 아니야.” 그런 뜻이에요. 건방에 곱하기 건방이에요. 다른 사람이 들으면 뭐라 합니까? 교만에다가 곱하기 교만이에요.

 

“너만 생각이 있고 너만 판단력 있어? 우리도 다 생각이 있어. 우리도 공자 있고 맹자 있고 다 알만큼 아는 사람이야. 경험도 있어. 심판을 해도 내가 알아서 심판해. 네가 심판하는 것이 아니야.”라고 대들 수밖에 없지요. 이 말은 뭐냐 하면, 예수님이 살다 가신 그 동일한 세계, 동일한 단일현실에서 사도바울도 똑같은 비난과 미움과 핍박을 경험케 하고요,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 이런 경험과 핍박에 화목제물 되게 하신 우리를, 성도를 집어넣습니다.

 

이렇게 건방떨지 않으면 성도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마치 드론을 띄워서 위에서 보는 전체성을 가진, 우리 집은 행복해, 그것 말고 세상을 볼 때 전체를 볼 수 있는 안목이 있는 사람만 이 사도바울의 말이 교만한 것이 아니고 이게 정당하다는 것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면 드론을 띄우자는 말입니다.

 

드론 띄우고 촛불집회 위로 가보자는 말이지요. 그게 정의인지, 민주주의가 정의인지, 평등이 정의인지 한번 보자 이말입니다. 사도바울은 평등이 없어요. 민주주의 아닙니다. 독재도 이런 독재가 없어요. 끝났다! 끝났다! 끝났다! 독수리가 날면서 하는 소리(계 8:13)와 똑같은 겁니다. 마지막때 하는 거예요. 그런 용감함을 좀 누리시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거예요.

 

이 말하면 독선적이라든지 “너는 평소부터 교만한 줄 알았는데 더욱더 교만하네.” 이런 소리 들으면 그동안 쌓아놓은 나의 위신과 체면과 자존감은 다 어디서 찾지, 이렇게 벌벌 떨지 마시고요. 그렇게 하면 우리가 너무 조심스럽게 살아가잖아요. 이왕 건방지다는 소리 듣는 것 화끈하게 드론을 한 500미터쯤 띄워버리세요.

 

31절에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직장에서 어떻게 하느냐? 결재 판을 올릴 때 마음속으로, 진짜 올리면 안 되고요, 마음속으로 사도행전 19장 31절을 적어서 올리는 거예요. ‘이거나 받고 천당이나 가라.’ 하면서.

 

“부장님, 결재 올립니다.” 결재를 올리면서 올리는 자기 정신은 드론을 띄워버리는 거예요. 드론 띄우면 그 부장 머리 빠진 것 다 보이지요. 인간 아니지요. 부장이라고 하는데 인간은 아니에요. 왜? 심판의 대상이기 때문에. 알지 못하던 시대, 된장인지 뭔지 아무것도 몰라요. 회개하라는 말도 못 들었어요.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만한 뭘 줬다? 증거를 줬다.

 

믿을 만한 증거를 줬다는 말은 다른 증거는 없다는 말입니다. 다른 간증 들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다른 증거, 간증이 왜 위험한가 하면, 이게 납득이 되고 설득이 되기에 위험한 거예요. 성령이 와서 믿어야 되는데 성령 없어도 믿을 수 있는 이야기를 해버려요. “기도 많이 했더니 부자 되었습니다.” 이것은 성령 없이도 평소에 노리던 거잖아요.

 

주님 주신 기쁨보다 돈 챙기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평소에 노리는데다 간증을 해버리니까 ‘야, 이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면 뭔가 행운이 찾아오겠구나.’ 이렇게 해서 끌어 모아봐야 그것은 쓰레기교회에요. 그것은 교회 아니지요. 점집이고 절간이라니까요. 자기생계에는 도움이 되겠다마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1차 작업은 일단 끌어 모아놓고 2차로 복음으로 공략하겠습니다.”

 

사람이 바보입니까? 처음에 했던 이야기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람이 헷갈리지요. 그러면 자칫하면 이렇게 돼요. 죽을 자를 살리고 살릴 자를 죽이는 에스겔에서 나온 그 고발에 그 목사가 당하는 경우가 되는 겁니다. 그런 꼼수를 쓰는 이유를 대라고 나와요. 그런 꼼수를 써야 될 뭔가 노림수, 그 이유를 대보라고 하면 “하늘나라 확장을 위해서 했다.”

 

“아닌데? 하늘나라 확장이라는 것은 사도바울처럼 이런 설교를 해야 되는데 너는 왜 그런 꼼수를 썼는가?” “하늘나라 확장하면서 커미션 챙기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솔직하게 고백하게 되지요. 고백한다고 구원받는 것은 아니지만. 여행사 차리고 커미션 챙기는 것과 똑같은 거잖아요.

 

계속 세례에 대해서 합니다. 다윗언약에서 백성을 만듭니다. 백성은 죽어 있기 때문에 행함의 여지가 없어요. 뭔가 꿈틀거리면서 “주님이 저기 계시네. 인내하고 찾아가야지. 주여, 5미터, 4미터, 3미터…….” 이럴 수는 없습니다. 주님께서 손 내밀고 있는데 “가까이, 더 가까이……” 그런 것은 없어요. 직접 주님이 우리 속에 반도체 칩 심듯이 장착해서 탑재를 시켜 버립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의미는 혼란에 빠집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말씀, 사도행전이나 골로새서 2장의 말씀이 전에는 문자로 왔던 것이 우리 내부에서 살아서 좌우로 발길질을 해대요. 임산부 안에서 아기가 발길질을 하듯이 말씀이 우리를 가만두지 않고 발길질을 해버립니다. 그러면 어떤 현상이 나오느냐? 본인이 만들어가는 인생이 아니고 어떤 낯선 영이 들어왔는지 내 인생을 내가 어떻게 책임진다는 것을 포기해야 될 입장에 있습니다.

 

“주님 뜻대로 하시옵소서.” “안 그래도 뜻대로 하고 있다.” “뜻대로 하시옵소서.” “자꾸 그런 말 하는 것이 수상한데 가만있어라. 입 다물고 있어. 내가 뜻대로 할 테니까.” 뜻대로 하시옵소서, 라고 하는 것이 너무 심하게 몰고 가지 마옵소서, 라는 연막을 치는데 “가만있어라. 모든 것을 뜻대로 할 테니 모든 뜻에 대해서 너는 범사에 감사하기만 하면 돼.”

 

그렇게 될 때 그 사람은 남들 앞에서 내가 어떻다는, ‘나’라는 이 주어자리를 포기하고 주께서 나로 하여금 이렇게 했습니다, 하고 자기는 목적어나 서술어자리에 가버려요. 그러면 문장의 1형식이 주어 + 동사로 되어 있고 2형식이 주어 + 보어로 되어 있고 3형식이 주어 + 동사 + 목적어로 되어 있거든요. 이 언어의 의미에서 주어 자리에서 주님이 주어자리를 차지해 버리면 내가 어떤 목적이 되든, 어떤 보어가 되든지, 어떤 동사가 되든지 간에 주님의 사람의 되는 식이 다윗언약의 완성이고 이것이 세례입니다.

 

세례를 고린도전서 10장에서는 이렇게 되어 있어요. 2절에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모세에게 속하여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지요. 세례를 몇 번 받았습니까? 한 번 받았지요. 여기서 몇 명이 받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 번 받은 세례에 다 같이 포함이 되지요. 이것을 가지고 로마서 6장에서는 ‘연합’이라고 합니다.

 

모세한테 모세외의 모든 사람이 연합이 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세례를 받아버리면 믿음도 하나요, 소망도 하나요, 주도 하나요, 그 다음에 뭐가 나와요? 세례도 하나요, 이렇게 되는 거예요. 네 세례 따로 있고 내 세례 따로 있고, 유아세례 따로 있고 유아세례 안 받은 사람 따로 있고, 그런 것은 없어요. 세례는 하나입니다.

 

“그러면 세례는 언제 받습니까?” 그것은 질문자체가 잘못된 거예요. 하나기 때문에, 종결되었기 때문에 시간자체가 날라 가버리고 남은 것은 세례의 성질과 성격이 무한리필로 우리 인생을 주께서 원하는 인생으로 만들어 가시는 겁니다. 세례 속에 있는 것이지 세례를 언제 받았느냐 하는 시간개념은 여기서는 성립이 안돼요.

 

“그러면 목사님, 우리가 세례를 받아야 됩니까?” 하는데 “내가 세례를 받아야 합니까?” 여기서 ‘내가’는 어느 자리에 있습니까? 주어 자리에 있지요. 이 질문자체가 성립이 안됩니다. 그러면 교회에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 다시 말해서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은 물세례를 받으세요.”라고 나오지요. 전통적으로 그렇게 나오지요.

 

“성령세례 받았는데 왜 또 물세례를 받습니까?”라고 성경깨나 봤던 이 똑똑이가 겁 없이 목사님에게 질문한다는 말이지요. 성령세례를 받았으면 되었지 왜 물세례를 따로 받아야 되느냐고 물으면, “성령세례 받은 티를 내기 위해서 물세례 받습니다.”라고 이야기하겠지요. 그러면 그 똑똑이가 또 가만있지 않습니다. “티는 왜 내야 됩니까?”

 

티는 왜 내야 되느냐 하면, “교회는 모두 물세례 받은 사람이 성도의 연합이기에 상징으로 받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목사님은 점점 땀을 질질 흘리기 시작합니다. 그다음에 무슨 질문이 또 나올지. 그러면 그 똑똑이가 또 질문해요. “그러면 성령세례 받아놓고 물세례를 안받으면 성도가 아닙니까?” 이렇게 나와요.

 

제가 지금 누굴 예를 들고 있는지, 안 그러면 가르치는지, 혹은 선동하고 있는 것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만, 그렇게 질문 받으면 목사님은 좀 더듬더듬 그러지요. 더듬거리면서 “꼭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 대 인간의 연합에 있어서는 같이 물세례를 받아줘야 분위기가 썰렁하지 않고 다 화목합니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똑똑이가 진짜 똑똑한데 “제가 알기에 성도라 하는 것은 성도끼리 직접 연결되는 것이 아니고……” 뭐로 연결한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연결하는데 목사님의 말을 들으면 어떤 친목차원에서, 교인들이 서로 친하게 지내자는 차원에서, 너 받았으니까 같이 받아서 우리는 한 그룹이라는 것을 그냥 확인하는 차원으로 받으라는 그런 이야기입니까?”라고 물어요.

 

그러면 그 목사님이 참다 참다 육의 열매가 나오지요. “받기 싫으면 안 받아도 됩니다.” 하고 휙 돌아서지요. 속으로 ‘줘도 문제라.’ 하면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하면, 교회가 뭐라고 했던가요? 교회는 그리스도 몸이지요. 그 그리스도 몸을 가시화시키려고 했던 거예요. 왜 가시화시키려고 하느냐 하면,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은 신을 찾아가는데 물질이나 체계를 더듬어서 가는 거예요.

 

왜? 금송아지 습관이 있기 때문에. 교회에 있으면 안심이 되고 거기서 심리적으로 안정을 얻는 거예요. 교회가 아니고 집에 있으면 교회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도 댕겨야지.” 월세 내는 홀에 들어간 거잖아요. 좀 괜찮은 데는 고딕식 건물에 가잖아요. 거기 갔다 온 것과 집에 가만히 있었던 것과 심리적으로 차이가 있다는 것은, 평소 습관이 물질적인 것, 체계적인 것, 법적인 것을 가지고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스스로 자신이 매개물로서 채택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이게 뭐가 문제냐 하면, 본인이 신을 찾는 것을 유지하고 간직하겠다는 거예요. 이렇게 돼버리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하면, 교회 다니는 내가 교회 안다니는 사람을 폄하하게 되고 질타하게 됩니다. 내 기준에 의해서 다른 사람을 모독하게 되고 판단하게 돼요. 그것이 바로 고린도교회에 일어났던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원칙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뿌리는 자도 있고 물주는 자도 분명히 있어. 하지만 백날 뿌리고 뭘 줘봐야 모든 주어자리에는 누가 있다?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 이 원칙을 고수하지 않는 한 너희들이 성만찬을 하든 뭘 하든 처음부터 너희들은 성령의 성전 됨을 모르는 것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면 사도바울이 고린도교회 목회를 잘했습니까? 쫓겨났습니다. 그리고 가짜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어요. 그러면 교회가 무너졌습니까? 하늘나라 확장에 지장이 되었습니까? 그게 바로 하늘나라 확장의 방식입니다. 가짜임을 들통 내는 그것이 복음의 위력이에요. 이제 실제적인 문제. “그 이야기는 무슨 취지인지 알겠는데 그러면 세례 받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입니까? 앞으로 교회에서 세례 준다는데도 받지 말까요?” 이렇게 하는데 제가 분명히 정답을 내리겠습니다.

 

연약한 사람을 위해서 감당할 수 있는 법은 감당하세요. 감당해야 그 사람에게 그 다음 진도를 나갈 대상이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시키는 대로 세례는 받았지만 사실은 이게 의미 없거든요.”라고 말을 건넬 수가 있는 거예요. 그게 바로 십자가를 경유하는 형제사랑이거든요. 형제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일단 형제사랑으로 치는 거예요.

 

그렇지 않고 퇴박을 놓는 거예요. “이게 뭐야? 이거 엉터리 아니야?” 이렇게 되면 나만 잘났다는 자기 신앙을 자랑하는 거예요. 주님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신앙을 자랑질 하기 위해서 교회 꾸준히 출석하는 사람이 돼버려요. 얼마나 남에게 인정받고 싶으면 교회 가서 그 짓 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런 일조차도 주께서 그때그때 성령께서 지혜를 주십니다.

 

저녁 먹고 계속 해야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