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창세기 15:8-11 / 제물 본문
제물
이근호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녹취:오용익 67강-창 15장 8-11절(제물)161221-이 근호 목사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기 15장 8-11절입니다. 구약성경 17페이지입니다.
창 15:8-11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년 된 암소와 삼년 된 암염소와 삼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찌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우리는 지금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만나는 광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 시대에 아브라함 곁에 사는 이웃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아브라함은 눈에 분명히 보이고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만은 압니다. 하나님과 이런 대화를 주고받고 있음을, 지시와 명령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브라함 본인은 압니다.
그러면 그 이웃 사람이 아브라함에게서 어떤 특이성을 나중에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게 뭐냐 하면, 성도로서의 삶입니다. 성도로서의 삶이라는 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윤리나 도덕이 아니고 특이성이에요. 윤리 도덕은 예상이 가능합니다. ‘저 사람은 하나님을 믿었으니 착하게 살 것이다.’ 그것은 특이성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아는 범주 안에서 예상할 수 있는 바입니다. 아브라함이 행동을 보여주는 이것은 상상도 못할, “진짜 이것은 광기 아니야? 미친 것 아니야?” 할 정도로 특이성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노아와 동행했을 때 노아가 보여준 특이성은 노아 빼놓고 다른 사람들이 감히 예상도 못할 특이성을 보여줍니다.
비도 오지 않는데 방주 만들기. 미쳤다는 말 외에 달리 할 말이 없지요. 이러한 특이성은 하나님에 의해서 지시를 받은, 그리고 하나님에 의해서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의 특이성이 되는 겁니다. 흔히 성도의 삶이라는 것은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것을 두고 언급하는 것 같은데 막상 그것은 종교일 뿐이지 진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모습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어떤 특이성을 갖고 있는가? 9절에 보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지시를 내리는데 그 지시내용이 너무나 구체적입니다.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하여 제사를, 그 때는 번제니까, 그 제사를 드려야 되는 겁니다.
제사를 드려라. 제사 드리는 이것이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의 약속이 됩니다. 그걸 방금 제가 특이성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약속이 되거든요. 약속이라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하면, 이렇게 생각하면 제일 쉽습니다. 하나님과 아브라함 사이에 공통점 만들기를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했다는데 있어요.
내가 아는 것 끄집어내고 하나님이 아는 것 끄집어내서 그것으로 공통점을 구성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아! 너와 나 사이에서만 아는 공통점이 있어.” 그런데 그 공통점은 지금 너한테 없는 공통점이거든요. 없으면 공통점이라는 말을 할 이유가 없는데, 없는데 생기도록 만들어놓고 “어? 너에게 그게 생겼네?” 이렇게 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만들어놓고 “네 안에 그런 게 생겼어? 그게 바로 너와 나의 공통점이다.” 해서 끄집어내버리면 그것이 하나님의 약속이 되고 언약이 되고 그게 계약이 되는 겁니다. 하나님의 계약,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인간을 결속시키기 위해서 공통점 안에서 매치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언약이고 계약입니다.
이 언약의 특징은 두 가지가 있지요. 하나는 일방적으로 줬다는 것. 인간 속에는 그게 없다는 것과, 두 번째는, 그 공통점인 언약은 절대로 인간에게 의존적이지 않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인간이 실패한다 할지라도 언약은 그 실패를 딛고 굳건히 일관되게 완성을 향하여 질주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개인구원은 전혀 그 언약 속에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약속이 약속답게, 언약이 언약답게 구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일의 목적이지 나 구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에요. 탈락시키더라도 언약만 완성되게 되면 하나님은 좋다 하시고 영광 받으시는 겁니다. 자기 사적인 개인구원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 드린다고, ‘아마 하나님은 이걸 좋아할 걸?’ 자기 속에 있는 것을 끄집어내서 하나님생각과 내 생각이 합치되었다고, 공통점이라고 내놓는 경우는 하나님께서 거부하십니다.
그것이 가인의 제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으려는 인간 안에는 하나님이 원하는 바가 일체 들어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 들어있지 않은 정도가 아니지요. 반대하는 것이 들어 있겠지요. 나중에 보면 나옵니다만. 그러면 공통점이 뭐냐?
오늘 본문 9절에서 공통점을 제시한 겁니다. 하나님 쪽에서 일방적으로 제시한 겁니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만나기위해서는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와 3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그리고 새끼를 취할지니라.” 그렇게 되어 있거든요. 이것이 하나님께서 제시한 약속이고 언약이라면 여기서 우리는 물어야 돼요. 왜 직접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상대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제시한 제물을 중간에 놓고 아브라함을 만나는가 하는 거예요.
하나님이 사람하고 상대했으면 사람하고 직접 이야기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왜 중간에 사람이 아닌 동물제물이 개입이 되고 그 공통점 안에서 아브라함도 하나님도 왜 거기서 만나는가? 만남의 장소를 하나님이 왜 일부러 만드시느냐 하는 겁니다. 그것은 인간 쪽에서는 이해가 안 되지요.
멀쩡한 인간 놔두고 짐승을 통해서 만난다는 것이. 짐승은 인간을 대변해주는 거잖아요. 인간은 대변할 것 같으면 괜찮은 천사로 대변해주면 좋겠는데 천사는커녕 인간보다 못한 짐승을 우리의 대변자로 만나시니까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되게 무시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하는데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로마서 8장 20절과 21절에 보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 말은 뭐냐? 결국 인간은 썩어져서 흙에서 나온 인간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어요.
우리는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상대할 때 인간을 과정으로 상대하는 것이 아니고 그 인간의 끝장, 마지막의 그 인간이 하나의 물체, 또는 물질로 변했던 그 인간을 상대로 하나님께서는 공통점을 일방적으로 제시하는 거예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어가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죽은 존재에요. 지금 하나님은 죽은 아브라함을 살리려고 합니다.
죽은 아브람을 영원히 사는 아브라함으로 바꾸려고 하는 겁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구원하는 것은 아브라함이지 아브람을 구원하지는 않아요. 그런데 아브람에는 아브라함 요소가 전혀 없습니다. 아브라함을 구성하는 요소에는 아브람에는 전혀 없어요. 전혀 없다면 어떻게 아브람이 아브라함이 되는가?
하나님이 원하는 공통점이 개입되지요. 그 개입되는 것이 3년 된 암염소, 3년 된 암소, 3년 된 수양과 산비둘기, 집비둘기새끼, 이것들이 들어가는 거예요. 우리 같으면 “아브라함아, 너는 그렇게 해서 구원 못 받는다. 정신 차리고 회개하고 반듯하게 살면 구원해줄게.” 이렇게 하겠는데 절대로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대구모임에서 했지만 단절성 때문입니다. 끊어지게 되어 있어요. 육은 육이에요. 육이 영이 되는 법이 없어요. 육이 구원받고자 한다면 육을 영으로 전환할 수 있는 장치가 하나님의 언약이라는 이름으로 새롭게 주어지게 되고, 주어진 언약의 장, 그 필드 안에 아브라함은 초청을 받아야 되고 가담이 돼야 돼요.
그러면 아브라함이 구원 받는가? 구원이 목적이 아니고 언약이 이루어져요. 인간구원이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기가 내세운 언약을 완성시키는 것이 목적이지 구원이 목적이 아니에요. 그렇다면 육의 사람이 영적 사람이 되는 요소가 결국 그 제물 안에 비밀이 담겨 있다는데 그 비밀을 이 시간에 풀어 봐야겠지요.
그 비밀을 푸는 아이디어가 3년된 암소, 3년 된 암염소, 3년 된 수양, 여기에 적혀 있습니다. 이걸 풀어야 되겠지요. 이것은 그냥 이렇게 봐서는 안 풀리고요. 여기 있는 이 언약, 저는 공통점이라고 했는데, 인간이 하나님과 함께 만나는 자리, 공통점이 이 제물이 원형이 되어서, 원천이 되어서 민수기와 신명기로 확장이 되는 겁니다. 확대가 되고 구체화되고 내용이 점점 더 세밀하게 번식하게 돼요. 발달하는 겁니다.
그러면 이 내용이 뭐냐 하는 것은, 창세기 15장이니까 이 내용을 확대한 데서 의미를 찾아야 돼요. 확대된 그것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라고 했습니다. 거기에는 제사가 세밀하고 복잡하면서 엄청난 내용이 나옵니다. 프리즘에 빛을 비추면 프리즘 자체는 맨송맨송해도 비추게 되면 일곱 색깔이 나오지요. 사실은 수만 가지 색깔인데 우리 눈의 한계 때문에 일곱 색깔로 구분지은 거예요. 일곱 색깔 무지개.
그러면 레위기, 민수기에서 역으로 창세기 15장의 본문을 해석하면 되는가? 그게 다인가? 아닙니다. 창세기 15장은 창세기 3장보다 시간이 더 늘어났습니다. 창세기 3장의 내용과 나중에 나오는 레위기와 민수기의 내용의 그 틈 사이에 창세기 15장이 끼어있습니다. 전에 있던 약속과 후에 나오는 약속 그 둘을 가지고 이것을 설명해야 돼요.
그리고 하나 더 보탠다면 이 약속,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만나는 그 공통점 때문에 아브람이 아브라함으로 전환되는 계기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실체적으로, 이 역사상의 사건을 집어넣는데 그 사건이 뭐냐? 이삭의 출생입니다. 멀쩡한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마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 내치고, 나는 육은 상대하지 않는다는 표시로서 할례를 행하게 해버리고 남성 생식기의 끝을 잘라냄으로서 육에서 나온 자식 말고 약속에 의한 자식이 태어난다는 것이 이삭입니다.
그 이삭의 본 내용이 여기 나오는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 3년 된 수양과 그 뒤에 나오는 산비둘기, 집비둘기새끼, 여기에 함께 내용으로 채워 들어가는 거예요. 그렇다면 본문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것이 중요하지요. 암소, 암컷이지요, 암컷. 암컷은 무엇의 대비개념인가, 수컷의 대비개념입니다. 그러면 민수기와 신명기를 보자는 말이지요.
거기 보면 제사의 모든 주 제물은 뭐냐? 암컷이 아니고 수컷이에요. 여기 3년 된 암소라고 했는데 암소가 제물용으로 들어가는 경우는 성경 어떤 제사에도 없습니다. 분명히 암소로 되어 있는데 암소라 해놓고 막상 민수기와 신명기에 나오는 제물에는 암소가 한 마리도 들어가지 않아요. 암소를 바치라고 하는 대목이 없습니다.
****(참고, 본문 설교요약 중에서)
【아브람이 오늘 본문에서 받았던 제사에는 ‘암소’가 나오지만, 이 제물의 확장형이라고 할 수 있는 레위기나 민수기나 신명기 제사법에서는 제물로서의 ‘암소’가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인간이 배제되고 직접 언약궤와 단독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이끄심을 묘사하는데 있어서는 ‘암소’가 제물로 드려집니다. (삼상 7:10-14에서 벧세메스에서 인간의 도움 없이 스스로 언약궤를 이끌었던 두 마리의 암소) 인간의 일상적으로 실시되는 제사 제물로 규정된 바에 의하면 ‘암소’보다 하위 등급인 ‘암송아지’나 ‘암염소’가 나올 뿐입니다. (민 19장) 이 사실로 볼 때, ‘암컷’으로서 소는 제물 안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표현형이 됩니다. 이것을 표준해서는 암염소와 여기에 연계해서 수양이 나오고, 이들 제물은 모두 ‘3년’이라는 표현 안에서 같은 계열 안의 서열을 구성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3년’이란 시간으로 묘사된 하나님 쪽의 요소입니다. 이렇게 해서 후에 출현하는 ‘이삭’이라는 약속된 아들의 본질을 위해 나타난 세 명의 천사는 곧 오늘 본문의 나타난 제사제물이 인격화되는 과정을 설명하는데 기여하게 됩니다.】
그러면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히려 반대로 수컷이 들어갑니다. 수소, 수송아지, 수염소. 물론 민수기 19장에 보면 암송아지는 있지만 암소는 안 들어가요. 암소는 한곳도 없어요. 그렇다면 수소, 수염소, 숫양이 들어가는 대목은 어떤 대목인가? 희생제물로서 들어가는 제사, 쉽게 말해서 제사의 대부분 80퍼센트 이상은 수컷이 들어가요.
수컷은 쉽게 해서 그냥 남성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지요? 썩어질 물체밖에 안 되는 그러한 인간의 실체와 하나님 사이에서 인간을 대변하는 것이 그 인간실체보다 못한 짐승, 창조 6일째에 인간과 같이 만든 짐승이 개입되지요. 왜 인간하고 직접 상대하지 않고, 물론 나중에는 아브라함보고 이삭을 바치라고 하지만, 왜 이렇게 제물이 들어가야 되는지 이 대목에서 생각을 해봐야 돼요.
창세기 3장으로 들어가야 됩니다. 거기 보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서로 싸우게 되어 있어요. 여자의 자손과 뱀의 자손이라고 해도 같은 말입니다. 창세기 3장 15절이지요. 제 설교가 낯선 분을 위해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가 너(뱀이지요)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너의 후손(뱀의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이렇게 되어 있어요.
여기에 남자가 빠집니다. 여기서 여자의 후손이 딸일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요한계시록 12장에 보면, 여자의 후손이 딸이 아니고 아들로 되어 있어요. 그리고 뱀의 후손은 옛 뱀, 용이에요. 악마를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남자가 필요한 것이 아니고 여자가 필요했고 그리고 여자만 있어서는 안 되고 누가 필요한가? 뱀이 필요한 거예요.
뱀을 유인하기 위해서 선악과를 심어놓을 수밖에 없었고 뱀은 인간을 앞장세워서 그것을 따먹도록 주께서 허락하셨습니다. 창세기 2장에 보면, 아담을 먼저 만들고 그 다음에 여자를 만들었지요. 그렇다면 아담이 우선이고 여자는 보조밖에 안 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담은 죽기 위해서 만든 아담이에요. 그 남자, 남편은 흙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만들었고 그 이름이 아담, 흙이에요.
아담이 죽고 난 뒤에 여자한테 이름이 붙는데 ‘생명’이라는 이름이 붙어요. 원래 생명이라는 이름은 생명나무에만 붙어 있어야 되는데 생명나무로 가는 길을 차단시켜 놓고, 그 생명나무에서 부부를 쫓아내놓고 그 쫓겨난 부부 중에서 여성의 이름만 생명이에요. 이러면 저주받은 상황 속에서 생명이 뭔가 움튼다는 징후를 보여주는 겁니다.
생명이 어디 있습니까, 하는 말은 못해요. 왜냐하면 여자의 후손과 뱀의 후손이 싸우는 그 과정 속에서 그 때 그 때마다 생명이 분출되기 때문에 생명은 뭘 가지고 생명이라고 하는가, 이렇게 꼭 집어서는 표현을 못해요. 하나의 투쟁의 현장에서만 나오기 때문에. 그렇다면 처음에는 남자가 먼저 태어났고 그 남자가 잠들었을 때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들었지만 사실은 그렇게 만든 남자는 이 땅에서 죄짓고 죽으라고 만든 남자에요.
진짜 아담, 두 번째 아담, 마지막 아담은 누가 만드는가? 이것은 여자가 만드는 거예요. 여자가 없이는 메시아가 오지도 않아요. 그 만드는 과정에서 뱀과 치열한 싸움이 벌어지는 겁니다. 이 말은, 남자는 죽으면 그만이지만 여자는 죽어서는 안 된다는 거예요. 여자는 생명이라는 이름으로 계속 유지가 되어야 된다는 거예요.
누굴 대표해서? 하늘에 있는 어머니, 예루살렘을 대표해서, 그 생명나무를 대표해서 선악과 따먹게 한 그 원수를 향하여 전쟁을 벌이는 땅에 있어서 지칭되는 대표적인 은유, 상징이 여자입니다. 여자는 이 땅의 하나님의 이름이에요. 암컷이. 그래서 여자의 차원이라 하는 것은 영적인 뱀과의 차원이기 때문에 육에 속한 인간 역사에서는 항상 숨어 있는 존재에요.
실제적이 아니고 숨어 있어요. 실재적이지만 실제적은 아니고 숨어 있는 실재요, 구체적인 역사를 장악하는 것은 암컷이 아니고 수컷입니다. 희생한다는 것, 희생하는 담당자가 암컷 아니고 수컷 이라는 말은 그 배후에서 하나님을 대변하는 암컷, 암컷으로 대변되는 하나님 쪽에서의 언약적작용이 배후에 설정되어 있어서 그 설정된 것이 역사 속에서는 희생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겁니다.
왜 희생해야 되는가? 이 땅은 뱀의 천지기 때문에. 뱀이 이기고 인간이 패배한 그것을 계속해서 반복시켜 주는 거예요. 그것을 계속 반복시켜 줘야 그래야 이 땅에서는 여자의 후손의 원수가 계속 유지되어서 그들이 현실적으로 여자의 후손의 적들이, 예수님의 적들이 이 땅을 통치하고 있다는 면면들, 역사를 장악하는 권력의 현실이 계속해서 유지되어야 되고 그것을 융성하게 해줘야 돼요.
가인을 죽이지 않고 계속 살게 해서 그 자손을 번창시키듯이. 아벨은 죽여 버리고 가인은 안 죽이고 계속 살려주듯이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제사는 실제로 인간이 이 역사 속에서 해야 되니까 암컷은 숨어 있게 되고 수컷이 희생 제물로 등장하게 됩니다. 등급상 포괄적이고 전체적인 범위로 제사할 때는 수소나 수송아지가 들어가요.
이스라엘 전체, 혹은 이스라엘을 대표하는 제사장의 속죄제나 대제사장의 위임식을 할 때는 수송아지급이 들어가요. 그리고 그 보다는 낮은 단계, 족장들의 속죄제에서는 숫염소가 들어갑니다. 레위기 5장에 그렇게 되어 있어요. 오늘 본문에 나오는 수소나 수염소가 기본 모델이 되고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하나님의 원수인 뱀의 통치가 점점 더 구체화돼요.
그러면 거기에 따라서 대응하는 제사도 더욱더 구체화 되면서 공격하는 표적이 많아지면 그에 따라서 제사가 구분되고, 세밀화되고, 구체화되는 거예요. 적재적소에 다 집어넣기 위해서. 창세기 3장과 창세기 15장과 그 내용이 확대되면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가 되는 겁니다. 그런데 하필 오늘 본문에서 왜 하필 3년 된 암소와 3년 된 암염소냐 하는 겁니다.
이것 푸는데 굉장히 어려워요. 이것 풀려면 창세기 1장부터 풀어야 됩니다. 이 구체적인 인간세계에서 시간이라 하는 것은 그냥 덩그러니, 무심하게 강물 흘러가듯이 흘러가는 것이 아니에요. 시간은 어떤 인격체의 가슴에서 쏟아져 나왔다고 제가 이야기하면 믿으시겠습니까? 이걸 믿어야 해요. 시간이 특정 인물의 가슴팍에서 나왔다면, 그 심장에서 나왔다면, 그 본질에서 나왔다면 그것을 믿으시겠습니까?
그게 요한계시록 1장에 나옵니다. 과거에도 있었고 지금도 계시고 앞으로도 계실 분이라고. 창세기 1장의 시간은 인간과 따로 무심코 시간이 흘러가는 것처럼 인간 눈에는 보입니다. 그것은 이유가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보다 시간이 더 포괄적인 범주를 갖고 있기에, 인간을 덮어 쓰고 있기에. 시공간은 인간보다 더 커요. 우리는 시공간에 갇혀 있는 형국입니다.
인간은 맨날 성질 더러워서 매일 변해도 해와 달과 별, 이 햇빛과 공기는 끄떡없이 그대로 유지됩니다. 별은 그대로 있고, 달도 그대로 있고, 인간들은 집회한다고 난리고. “그럴 때마다 해와 달을 보자.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해와 달과 별은 한결같아요. 해와 달과 별은 인간이 사기치고 보이스피싱하고 남들 죽여도, 그 교도소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역시 환하지요.
인간이 자기욕구와 욕망을 못 이겨서 환장하고, 자기 성질을 못 이겨서 “나 죽어버릴까!” 이렇게 고함지르는 가운데서도 달은 빙긋이 웃고 있어요. 달 속에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교도소 가서도 구원받는 사람이 있어요. 드물기는 하지만. 궁창의 달을 보고, 별을 보고. 시편 136편.
인간이 자기 딴에 진리라고 하지요. 어떤 범위, 어떤 동그라미라도 그 안에서는 자기 타당성이 다 있고 이유가 있어요. 하지만 동그라미의 크기는 다 달라요. 하나님은 큰 동그라미인데 우리는 요만큼 동그라미 그려놓고 그 안에서 진리를 알았다고 하면서도 온갖 불평을 다 해요. 하지만 성령으로 주신 사랑의 깊이라 하는 것은 동그라미가 점점 넓어져서 큰 동그라미 안에서, 그 동그라미를 위하여 우리는 하나의작은 비눗방울로 있다는 것, 안개처럼 산다는 것을 깨닫는 그것이 사랑의 깊이에 풍덩풍덩 빠지는 모습이거든요.
믿음, 소망, 사랑,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큰 범위, 범주 안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어떤 분을 겨냥을 해요. 그러나 인간들은 시간은 시간대로고 자기는 자기생활 따로 해요. 인간이 시간을 조절할 능력도 없고, 시간에 얽매여서 시간의 스케줄 따라 밤에는 자고 낮에는 깨고,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히 모세의 인도함을 받는 이스라엘에게는 그 시간과 하나님과 관련성 있는 아이디어를 제공했습니다. 그게 뭐냐 하면, 1,2,3,4,5,6,7, 안식일을 주시는 거예요.
안식일을 줌으로서 안식이라는 것, 다시 말해서 일곱 번째 날에는 무조건 제사를 해야 되는데 그 제사를 받으시는 분이 1,2,3,4,5,6의 모든 생활터전을 장악하고 있고 지배하고 있다는 겁니다. 어디 안에서? 악마의 통치 안에서.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원수 안의 통치 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데 하나님과 인간의 공통점, 하나님의 언약이지요, 아브라함의 언약이고 모세의 언약이고 하나님의 제사 안에서 특별히 너희에게만 하나님의 안식을 허락하는 겁니다.
따라서 안식을 누리지 말고, 안식을 위한 삶이에요. 내 안식 말고 주님이 주시는 평화를 위해서 우리는 1,2,3,4,5,6이라는 힘든 노동의 생활을 하는 거예요. 누구 좋으라고? 주님이 만족하는 날이 안식일이거든요. 창세기 2장에 나오지요? 다 이루었다, 하고 스스로 자족하시고 쉰 날이 안식일이라면 우리보고 만족하라고 안식일을 주신 것이 아니에요.
6일 일했다고 몸이 찌뿌둥하다고 하루 쉬라고 하지 않습니다. 월화수목, 이 모든 날이 하나님의 희생덕분에, 제사의 희생덕분에 주어진 거예요. 그러면 3년이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3년과 암소, 다시 말해서 하늘에 속한 상징, 하나님을 대변해주는 그 암소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대변해주는 시간간격을 짚어버리면 그게 3년의 3이 돼버려요.
그게 왜 3이 되느냐 하면, 바로 제물제사대로 이게 인격화되어서 온 사람이 이삭인데 그 이삭이 올 때 천사가 세 명이 왔어요. 세 명의 천사가 와서 이 언약의 내용으로 완전히 품어져 있는 새로운 아들이 등장하면서 아버지 이름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뀌게 됩니다. 창세기 18장에 보면 그 이야기가 계속 이어집니다.
아브람이라는 육에 속한 이름이 아브라함이라는 영에 속한 이름으로 되면서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이 개입됩니다. 아브람이 아브라함 되는 데는 그냥 될 수가 없어요. 희생물이 개입해야 되는데 그 희생물이 3년 된 암소, 3년 된 암염소, 3년 된 수양이라고 했습니다. 이 암컷이 수양보다 등급이 높아요. 실제로 레위기에서 수컷이 들어가지만 아브라함시대에서는 이렇게 암컷이 등급이 높다고요.
그러면 인간을 육에서 영으로 바꿀 수 있도록 하는 언약의 구체화된 이 일에 대해서는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해내지를 못해요. 하나님이 개입해야 돼요. 세 명의 천사가 개입합니다. 18장에 보면 사람 셋이 등장해요. 2절에 “눈을 들어 본즉 사람 셋이 맞은편에 섰는지라.” 하거든요. 그냥 놀러온 것이 아니에요. 하나님의 개입의 정보를 준 거예요.
그게 뭐냐 하면, 네가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달라지기 위해서 너를 위해서 희생되어야 될 자식을 준겁니다. 그래서 창세기 22장에 보면 그 아들 이삭을 아버지가 잡아야 돼요. 자식 때문에 달라져야 될 아버지가, 내가 이렇게 달라진 것은 하나님께서 없는데서 너를 만들고 그 만들어진 너를 죽임으로서 내가 육에서 영이 되었다, 새사람 되었다는 그것을 보여주는 그것이 믿음이라는 말이지요.
믿음이란 하나님의 개입에 대한 인정을 말합니다. 수용하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사람 셋이 왔다는 이것이 뭐냐 하면, 하나님 쪽에서 전에 아브라함에게 제시한 그 제물의 약속과 연관해서 말만 던진 것이 아니라 그 말의 책임자, 실무자로서 세 명의 천사가 아브라함을 방문한 거예요.
17장에 가게 되면, 드디어 아브람의 이름이 아브라함으로 바뀌고 사래의 이름이 사라로 바뀝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과 아브라함이 공통점으로 만나기 위해서, 그것을 언약이라 합니다, 만나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하나님께서 개입하는 겁니다. 심지어 더 놀라운 사실은 10절에 보면, 다른 것은 다 쪼개도 새는 쪼개지 않거든요.
여기서 뭐가 또 중요한가 하면, 쪼갠다는 것이 중요해요. 새는 쪼개지 않는다는 말은 새는 제물의 등급상 제일 하급제물이에요. 하급제물은 쪼갤 필요가 없다는 것은, 하급제물이 희생제물로 들어가야 될 이유가 그 하급제물등급에서 찾지 말고 그 위의 등급에서 찾아야 돼요. 위의 등급이 뭐냐? 수양이지요. 산비둘기 집비둘기는 그냥 새니까 쪼개면 안 되거든요.
위의 등급은 수양이지요. 수양의 그 위 등급은 암소와 암염소지요. 암소와 암염소와 수양이 다 연결되어 있어요. 암소는 그냥 암소가 몇 년 된 암소? 반드시 3년 된 암염소입니다. 1년이 아니고 왜 3년인가? 시간이라 하는 것은 인간보기에 그냥 1,2,3,4,5,6 그냥 시간이지만 하나님은 천사를 이 땅에 보내면서 시간적 숫자를 가지고 몇 명이 찾아간다는 것을 이야기한 거예요.
제가 이 이야기를 몇 번 했는데 듣는 사람들의 표정을 보니까 아무도 안 믿어요. ‘세상에 알레고리도 저런 알레고리가 없다. 이근호 목사가 미쳐도 저렇게 미치다니. 이제 가도 너무 갔구나.’ 이렇게 생각들 하시는데 조금 설명 들으시면 제 말이 이해가 될 겁니다. 10절에 보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중간을 쪼개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중간을 쪼개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쪼갠 이유가 마주보게 하기 위해서 한 겁니다. 마주 봐야 될 이유가 뭐냐? 17절에 나와요. 쪼갠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가요. 새 등급에서는 이것이 성립이 안됩니다. 하급등급에서는 이것이 성립이 안돼요. 상급등급이 하급등급에 영향을 주고 그래서 하급등급은 지배를 받아야 될 입장입니다.
지금 설명은 레위기 민수기까지 다 동원해야 되거든요. 레위기와 민수기에 보면 그 때도 역시 새가 동원되는데 새는 가난한 사람들이 돈 없을 때 새를 바치도록 되어 있어요. 좀 사는 집은 양을 바쳐야 돼요. 그러면 가난한 사람들의 제물을 가지고서는 이 제사의 원뜻을 다 알 수가 없어요. 그 위 상급단계에 있는 제물을 통해서 알아야 되고 그냥 하급단계에서는 그냥 붙어서 도매금으로 넘어가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제물에 대해서 솔개가 달려들어요. 이게 새종류거든요. 새종류가 왔을 때 아브라함이 “훠이! 어디서 하급짜리가. 하급짜리는 여기에 붙으면 안 돼.” 이 모든 하나하나가 장차 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다 관련성이 있어요. 짧은 설교시간에 이것을 다 못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제물을 쪼갠다는 것은 하나의 하나님이 둘로 갈라지고, 둘로 갈라지면서 새로운 하나의 하나님, 그 전에 있지 않던 새로운 하나님으로 이 역사 속에 계시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겁니다.
하나님 사이가 갈라지는 것은 어디에 나오는가? 로마서 8장에 나와요. 32절에,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저주를 통해서, 십자가를 통해서 완전히 끊어져버려요. 내어버림을 당한 거예요. 저주해버린다고요. 저주했는데 어떻게 부활시키는가?
그것은 저주하고 난 뒤에 언약이 들어가요.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이거든요. 그래서 여호와라는 말이지요. 언약이 들어가니까 주께서 옛날로 다시 붙는 것이 아니고 떨어졌다가 새롭게 하나가 됨으로서 옛날에 없던 새로운 우주의 구조로 재구성이 됩니다. 그게 뭐냐? 예수의 나라가 돼요. 예수가 그리스도로, 주로 등극할 때 그것이 하늘의 아버지가 원했던 창조의 목적입니다. 모든 것이 주로 돌아갑니다.
하나의 제물인데 일부러 둘로 갈라지게 하고 그것을 마주볼 때 그 사이로 하나님이 횃불로 그 사이를 지나가요. 하나님이 개입함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본인 계획을 본인이 집어던져놓고 그 계획에 일체 다른 피조물은 손 못 대고 주님이 알아서 그것을 이루는데 다만 모든 피조물, 심지어 악마마저, 귀신마저, 뱀의 후손, 여자의 후손, 남자, 수컷과 암컷 다 전 세계의 모든 피조물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언약완성에 전부 다 관여하도록 조치를 하신 것, 그게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노아의 믿음 하나 드러내려고 전 세계를 물바다로 만드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든지 주를 사랑하지 아니하거든 저주를 받을찌어다.” 이 세상은 어느 누구도 동서남북 네 명의 천사를 보내는 거예요. 요한계시록과 스가랴에 그런 예언이 나오는 이유가, 이 세상 어느 구석도, 북한이든 필리핀이든 어느 구석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효능과 무관한 곳은 아무데도 없어요. 저주 받든지, 안 그러면 구원 받든지.
그래서 요한복음 5장에서, 죽은 자가 인자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성도는 주님을 믿으라는 것이 아니고 주께서 긍휼의 그릇으로 사용하는 것을 말씀을 통해서 늘 확인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아브라함 속에 이삭이 들어 있고, 아브라함은 제물이 되는 겁니다. 이 약속, 3년 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 그것을 역사 속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은 수양급이에요.
암컷 급은 이제는 하나님 급이니까 나타나지 않고 수양급에서 레위기에 민수기로 확장되는 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참여하도록 이스라엘 사람들을 하늘의 별같이 융성하게 하신 거예요. 남자만 40만이 애굽에서 나오는데, 시내산에서 제사하는데 동원되는 사람들로서 이스라엘을 불러낸 거예요. 결국 그 안에는 3년된 수양, 다시 말해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을 위하여 이스라엘이 없는데서 그렇게 만들어진 겁니다.
그 안에는 이 3년 된 수양과 3년 된 암염소가 들어 있어요. 이것이 희생되어야 할 이유는 이 세상은 뱀이 통치하고 악마가 통치하는 세상이기 때문에 희생 아니면 공통점이 없습니다. 십자가 안에서 예수님이 바로 이 모습, 예수님이 암컷이 요소를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희생함으로 말미암아 주님의 희생을 믿게 된 사람은 이 땅에서 산 제물, 수양의 운명, 수양의 길로 가서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새언약 안에 있는 성도입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이 주신 아브라함의 약속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이 주로부터 와서 주로 말미암아 주로 돌아가는데 목적이 우리 구원이 아니고 예수님을 주 되게 하시는 주의 목적인 것을 저희들이 이제는 믿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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