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요한복음 12:35 / 자기를 향한 거절 / 161206 본문
녹취:이명직 가락-요한복음12장32절(자기를 향한 거절) 161206a-이 근호 목사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하시니” (요12:32) 자, 요한복음 12장 32절 한번 보겠습니다. 12장 32절에 보면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이렇게 되어 있지요. 이끈다는 쪽은, ‘수평적’으로 옆에 있는 것을 이끄는 것을 말하는 게 아니고, 땅에서 들린다고 했으니까, ‘수직적’으로 주님은, 인간들이 사는 이쪽 차원에서 벗어나는 겁니다. 빠져 나가는 거예요. 사람 사는 동네에서 이제 빠져 나오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자기 사는 동네에서 못 빠져 나와요. 왜냐하면 인간들이 눈에 보이는 것이, 인간들 보기에 전부이기 때문에, 전부거든요. 눈에 보이는 게 전부거든요. 이 전부에서 사람이 죽으면, 그냥 공동묘지에 그냥 죽지요. 조상들도 죽고, 그러니 이쪽 세계에서, 만약에 죽음을 통해서 만약 나간다고 하게 되면, 그쪽 세계도 사실은, 이미 사람들이 저승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다 생각해놓은 동네라는 것. 죽으면 저쪽 간다. 그리고 저쪽 가게 되면 다시 이쪽으로 못 온다. 그런데 이쪽으로 가끔 오는 길이 있는데, 그건 아마 귀신일 것이다. 그러면 귀신이 오게 되면, 흠칫 “당신 동네 아니에요. 저쪽으로 가세요. 빨리 죽은 자들의 모임에 가세요!” 보낸다. 이것이 인간들이 아는 세계의 전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할 때에, 그 당시 우리가 유대인이라면, 우리는 똑같이 질문하는 겁니다. “우리를 떠나서 가기는 어디로 가!” 할 때, 예수님의 답변이 그겁니다. “내가 아버지께로 간다.” 했거든요. 내가 저 세상에 간 게 아니고, 아버지께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요한복음이 참, 굉장히 어렵습니다. 자, 그 어려운 이유가 있어요. 그 어려운 이유가, 지금부터 이야기 할 테니까, 이거 뭐, 감당 안 되면 할 수 없어요. 이거는 어떻게 더 쉽게 할 수가 없어요. ‘옛 계약이 깨어진 상태에서 새 계약이 성사된다.’ 입니다. 옛 계약이 깨어진 상태에서, 옛 계약의 완성이 새 계약이 아니에요. 연속 되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연속 되는 게. 옛 계약이 깨어졌다 하는 것은, 여러분 어디서 생각해야 되냐 하면,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내려올 때 뭐를 깼습니까? 돌판을 깼지요? 그게 바로 계약이 깨지는 거예요. 그럼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아! 하나님의 내 구원도 이 계약으로 되는구나.’ 그때 이스라엘 백성은 알게 됩니다. 이게 계약으로 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계약에, 그 계약을 할 때, 그 계약서를 누가 작성했습니까? 그게 사람이 끼어들어서 작성했습니까?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혼자 했어요? 그래요. 하나님이 혼자 했지요. 여기서부터 어려운거에요. 구원이라는 것은 계약으로 되지요. 그런데 그 계약서를 누가 만들었다? 일방적으로 하나님이 혼자 만들었지요. 그러면 이 말은, 앞 뒤 말을 합쳐버리면 인간에게는 구원이 있다? 없다?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는 거예요. 인간이 구원 받겠다는 의도가 없다는 말이 아니에요. 인간은 너무 살기 힘들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좋은 나라를 만들어 주시고, 뭐 착한 사람은 천국에, 나쁜 사람은 지옥에, 이렇게 해주세요. 해주세요.” 라고 생각할 수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충분히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런 생각이 계약 속에 들어가느냐 이 말입니다. 그런 생각이. 계약서에 안 들어가요 그게. 계약서에 들어가지를 않는다고요. 왜냐하면 그런 생각은 계약 자체가 필요치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어린애가, 뭐 갑자기 어린애가 소아암에 걸려 죽어간다. 그러면 엄마가 뭐합니까? “엄마! 나 죽으면, 나 어디에 가는데?” 엄마가 “죽으면 너는 태어난 지 얼마 안돼서, 천사 같아서, 천사들이 모여 있는 하늘나라에 가는 거야. 거기 가면 먼저 죽었던 너희 할아버지, 할머니 다 있는 거야. 나도 곧 따라갈게. 걱정 하지 마! 아빠, 엄마 뒤따라갈게. 저 하늘나라, 저 푸른 하늘, 저~ 뒤에 보면 천국이 있어. 거기에 가!” 이렇게 이야기하잖아요. 그렇게 이야기 하지요. 그게 계약서에 나옵니까? 그게 계약에 안 나와요. 계약서에 그게 나오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생각하는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계약에 처음부터 들어가지를 않지요. 들어가지가 않기 때문에 뭐를 모르냐 하면은, 계약의 깨짐을 모릅니다. 계약의 깨짐을 몰라요. 이게 예수님에 대해서 인간들이 기본적으로 오해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계약 깨짐을 염두에 두고, 항상 깨진 계약을 딛고, 새 계약으로 나아간다는 취지로 모든 멘트를 날립니다. 모든 말씀을 주시는데, 인간들은 계약서 자체부터 생각 못해. 계약서 자체. 계약서 자체를 생각 못해요. ‘죄악으로 구원’ 받는 생각 못하고, 우리 품성, 우리 심성, 우리가 갖고 있던 양심. 이것을 어떻게 주물럭주물럭 해가지고 양심스럽게 하게 되면, 아무래도 저쪽으로, 죽고 난 뒤에는 좋은 나라에 가고, 양심이 더러우면 아무래도 나쁜 나라에 갈 가능성이 많다. 기존의 계약서 없이, 이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해보겠다고 그렇게 나서게 되는 겁니다. 오늘 본문에는 요한복음 12장 32절은 결국 어디에 나오는 이야기 입니까? 이것은 “들리고, 내가 내 백성을 이끌겠다.” 하는 것은, 그것은 어디에만 있는 거예요? 계약서에만 있는 겁니다. 어느 계약서? 그것도 새 계약서에만 있는 거예요. 새 계약서에 있어요. 그런데 그, 새 계약서의 원판은, 그게 옛 계약의 원판이 있어요. 있는데, 그 그림자는, 그 실제적으로 보는 것은 새 언약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여러분들이 오해하지 않기 위해서 미리 말씀 드리겠습니다 만은, 순서상 옛 계약이 먼저 있고, 이스라엘에게. 그 다음에 예수님이 새 계약을 맺었으니까, 옛 계약을 근거로 해서 새 계약이 오는 것처럼 여러분들 생각하시겠지요. 순서상 그러니, 역사적 순서가 그러니까, 구약이 먼저고 신약이 나중이잖아요. 그런데 성경의 내용은 그게 아니에요. 신약이 먼저 있고, 신약을 역사 속에 맛배기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그림자라 하는데, 신약의 내용을 역사 속에서 미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만든 게 뭐냐 하면은, 구약, 옛 계약입니다. 옛 계약이 원본이고, 신약이 완성이 아니라, 원본은 새 계약이 원본이고, 구약은 일종의 ‘사본’이라고 할 수 있어요, 사본. 그래서 사본에서 나오는 것은 ‘성령’이 안 나오고, 뭐냐 하면은 ‘성신’이 나와요. 성신은 온전한 구원을 줄 수가 없습니다. 온전한 구원을 안줘요. 성신 받았어도 구원 되지를 않습니다. 성신 받아도 악신 받을 수가 있어요. 그중에 누군지, 대표적인 사람 누굽니까? 다윗 오기 전에 사울 왕이죠? 왕 될 때, 성신이 임해가지고 사무엘처럼 막 예언 했잖아요. 그런데 다윗이, 백성들이 “사울은 천천이고, 다윗은 만만” 하니까 갑자기 악신이 걸려서, 창을 만들어 기타 치는 다윗을 향하여 벽에 박으니까, 다윗이 피하고, 살고. 그런 대목이 나옵니다. 그리고 난 뒤에 다윗에게 뭐가 임하냐 하면은, 성신이 임하게 되지요. 다윗이 성신이 임하는데, 그 성신이 임하니깐 그 다음은, 다윗은 어떻게 완벽했습니까? 메시야 다웠어요? 아니지요. 성신이 임한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했고, 그 남편을 미필적 고의에 의한, 고의가 아닌 척 하면서 살인해 버렸어요. 완전 범죄를 시도 한 거예요. 그러니까 성신이라 하는 것은 기능적이라니까요. 다윗이 보여줘야 될 게 뭐냐 하면은, 바로 저주를 보여줘야, 저주를. 저주를 보여줘야 돼요. 저주를 먼저 보여주고, 그 다음에 다윗이 보여줘야 하는 게 뭐냐 하면은, 저주 속에서 구원 받은 자신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순서가. 그러면 저주라 하는 것은, 무엇에 해당하는 사본이다? 구원에 대한 긴 그림자가 이 땅의 저주가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릴 때, 어떤 취지로 달렸어요? 아버지한테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한테? 예수님 십자가에 달릴 때 아버지한테 어떻게 되었어요? 네? 저주 받았잖아요. 저주 받았잖아요. 예수님이 십자가에 저주 받음으로서, 모든 인간은, 천국은 절대로 올 수 없는 존재인 것을 이제 확실하게, 확실하게 보여줬어요. 십자가를 믿는 다는 말은 뭔 뜻입니다? “아! 이 저주 받을 인간이, 구원을 내가 탐냈군요!” 그걸 자백 하는 게 십자가에요. 십자가를 믿어서 구원받는 게 아니고, 구원 받겠다는 이 지식이, 이 생각이, 딱! 저주에 합당한, 저주 받을 짓거리다 하는 것을 십자가를 들어서 발견하는 겁니다. 그 십자가 믿고 구원 받겠다는 선교단체나 그리고 이런 개혁주의 신학은, 몰라도 이거는 완전히 엉터리에요. 거짓말입니다. 본인이 십자가 믿고 구원 받은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다윗은, 바로 저주를 보여주는 겁니다. 기능이, 성신 받은 사람으로서, 저주. 내가 왜 저주 받아야 되는 존재인 것을, 간음과 살인에 의해서, 그리고 또 뭐냐 하면은, 인구조사에 의해서, 원래 인구조사가 20세 이상부터는 해도 괜찮아요, 그런데 20세 이하 까지, 그렇게 인구조사하면 안돼요. 20세 이하까지. 어린 아이까지 미리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인구조사를 했다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지요. 사흘 동안에 삼만 명을 작살내셨어요. 이제부터는 목사가, 자기 교회가, 얼마나 자기가 와서 부흥됐는지, 인구조사를 해가지고, 한 50명 교인인데 한 100명쯤 되가지고 “아이고, 목사님 100명이나 됐습니다.” “이렇게 부흥됐구나. 역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전했더니만 하나님께서 내 편이라고 팍팍 이렇게 사업을 밀어 주는구나.” 좋다 했는데, 그 교인들 버스타고 놀러가 버스 뒤집어져 버려서 70명이 죽어버렸어. 70명 죽으면, 숫자가 100명이었는데 70명 나가면 도로 마이너스 20명 되는 거예요. 이유는 목사가 교인숫자를 헤아려서, 그런 식이죠. 원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건 아니지만, 구약 자체가 사본이기 때문에, 신약의 사본이기 때문에, 원본은 신약이고 구약은 사본으로 구약이기 때문에, 구약에서는 그 원본에 갖고 있던, 그 완료된, 완성된 그 의미를 역사를 통해서 조금씩, 조금씩 모자이크처럼, 모자이크 처리하는 거 알지요? 분명하지는 않지만 윤곽은 희미하게 나타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거예요. 그러니 윤곽이기 때문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냐 하면은, 그 윤곽이라는 것 자체가, 구약 자체가 윤곽이라는 말을 아주 쉽게 이야기 하면 이것은 바로 행함으로 구원되는 구원 방식이에요. ‘행함으로 구원방식’ 구약에서 괜찮은 평을 받은 사람의 행동을 그대로 따라 하는 방식으로 구원을 얻겠다는 것이, 모든 인간이 자기 진짜 자기 모습을 모르는 인간들이 하는, 그게 한계라 볼 수 있어요. 왜냐하면 인간 자체가 사본입니다. 인간자체가. 원본은 누구에요?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모양새도 사람 아닙니까? 하는데,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사람이 아닙니다. 이미 인간은 선악과 따먹는 순간 ‘삐-’ 더 이상 인간이 아닙니다. 사람이 아니무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마음은 누구의 영을 받았는가? 거짓말하는 악마의 영을 받아서, 입만 끄집어내면 다 거짓말이에요. 입에서 끄집어내면 다 거짓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이 쓰는 모든 글자와 문자, 행동도 거짓이고. 어디서 원어 성경, 원어를 연구한다는 것도 그것도 거짓이에요. 거짓이 아닌 문자는 없습니다. 어떤 단어도 거기에 지시되는 물체와 합치되는 단어가 없어요. 이게 귤이라 하는, 이게 귤이냐? 귤이 하나밖에 없다면 합치되는 것 같은데, 이것과 다른 모양새에 약간 더 동글동글한 이런 게 있으면, 어느 게 귤이냐 말이에요. “아이고, 비슷무리하면 다 귤이에요.” 이게 뭐냐 하면은 바로 ‘유적 존재’라 하는 겁니다. 유적 존재. 개념이 실재를 떠나서 추상 개념화 시키는 새로운 부류가 윗층이, 다락방이 하나 생기는 거예요. 다락방이. 그만큼 어떻게 실재를 떠나서 추상이 된 겁니다. 이런 게 뭐에요? 이런걸 뭐라고 합니까? 삼각형이죠? 그중에 어느 게 삼각형입니까? 뭐 각도가 180도, 내각이 어떻게 변이 세 개, 삼각형이라 하잖아요. 진짜 삼각형은 어느 것 가지고도 삼각형이라 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삼각형이 이 세상에 네 개밖에 없다면, 네 개를 가지고 이런 형태를 가진 것을 삼각형이라 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삼각형은 어디에 있어요? 우리 머리에, 머리 안에 들어있지요. 머리 안에 들어 있는 거예요. 이걸 참고로 해서 우리 머리 안에 들어있어요. 이걸 영원한 신의 세계에 들어 있다는 사람이 플라톤이었습니다. “진짜 형상은 이데아 세계에 있고,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모방이다. 사본이다.” 그렇게 이야기 한 겁니다. 플라톤이. 그리고 결정적인 게 있어요. 뭐냐 하면은, 신은 영원하지요? 안 죽지요? 불사의 존재이지요? 그러면 신이 어떤 형상으로, 자기 형상으로 인간을 만들었잖아요. 그러면 인간은 하나님이 만드신 분의 형상으로 만들었다면, 인간도 죽어야 돼요? 안 죽어야 돼요? 죽어야 되잖아요. 그러니까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받아야 되는데,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받는다 해놓고 이게 불사의 존재가 아니고, 죽음이 왔다 이 말이죠. 그렇다면 진짜 안 죽는 인간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은 옛날부터 안 죽는 인간을 이렇게 했어요. ‘영혼’이라 해요. 인간은 육과 영혼으로 되어 있는데, 또는 육과 영과 혼으로 되어 있는데, 영혼만은, 육은 없어져도 영혼만은 불멸하다. 이게 동양철학도 그렇고, 그리스 철학도 그렇고, 플라톤, 뭐 아리스토텔레스, 모든 심지어 저, 아프리카 토속 종교도 이렇게 되어 있어요. 심지어 성경에도 나와 있지요. “영혼이 떠나시니라” 이런 식으로. 전도서에도 나와 있지요. 동물들의 혼은 위로 올라가고, 흙은 아래로 간다. 그래서 그게 인간들의 뭐냐 하면은, 기본적인 종교가 되고 말았어요. 기독교는 뭐냐? 예수 믿고 우리의 영혼은, 죄 용서 받는 영혼은 하늘나라 가고, 땅은, 몸은 지상에 흙으로 돌아가서 나중에 예수님 재림하시면, 우리 흙에 속한 형상이 하늘 속에 들어간다. 그러면 결국은 다 그 이야기를 해보면 뭐냐 하면은, 철학하고 전혀 별 차이 안 나지요? 그 영혼과 육으로 되어 있는데, 이게 죽을 때 떨어지고 나중에 다시 합쳐진다? 합쳐지든 말든 그건 나중 문제고, 하여튼 뭐든지 사람이 되니까 안 합쳐져도 괜찮아요. 천사처럼 살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 하는 거예요. 거기에 거울을 근거로 창세기 1장을 이야기해요. 창세기 2장에 보면 흙에서 ‘후~’하고 숨을 쉬니까 생령이 된지라. 그러니까 인간의 흙에다가 ‘후~’ 숨을 쉬니까, 숨을 ‘루아흐’ 숨을 쉬는 영이 있다. 그러니까 영하고 몸하고 맞으면 그게 인간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그게 인간입니까? 선악과를 알고 있으면 더 이상 인간은 끝났어요. 선악과를 알고 있으면. 불멸의 존재가, 영혼이 불멸할 존재라 할 때, 그 영혼이 불멸의 존재라 하는 것이 어디서 나오는가 하면은, 인간은 영혼이 불멸의 존재가 되는 게 아니에요. 아닌데, 우리가 몸은 떨어져도 보이지 않는 영혼은 산다 하는, 그 아이디어 자체도 이미 인간이 아닌, 범죄 한 인간으로서 나오는 아이디어에 불과한 겁니다. 이건 누구의 아이디어인가 하면은, 이것은 악마의 아이디어에요. 악마는 뭐만 피하면 되느냐 하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 그 새 언약이 원본이지요? 원본만 피하면 돼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빼고, 빼고, 모든 것은 다 악마가 용납을 하고 허용을 하는 겁니다. 사는 것이, 아담이 죄 짓고 난 뒤에 나온 생각이 뭐냐 하면은, 바로 그때부터 나온 게 ‘자의식’입니다. 자의식. ‘나는’ 이렇게 나오죠. 그런 ‘나는’이 성립되게 되면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누구냐, 두 번째는 ‘나’ 1인칭이잖아요. 그 다음에 나오는 게 뭐냐 하면은 ‘너는’ 세 번째 ‘그는’ 나오지만 그는 ‘너는’에 포함시키면 되요. ‘나’ 빼놓고 ‘너’거든요. ‘나’와 ‘너’가 이렇게 분류가 된다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는 이런 식으로는 만들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사본에 나온 거고, 그럼 원본은 뭐냐? 원본은 딱 이것밖에 없어. ‘나’ ‘너’가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 관계 밖에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은, 죽고 난 뒤에,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는 것은 이미 범죄 했는데, 하나님의 형상은 없어요. 지금 성도에게 주어진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예수님의 형상이에요. 왜냐하면 예수님 자신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골로새서 1장에 나오잖아요, 이번 수련회에서 할 건데 미리. 하나님의 형상을 독점했다. 독점했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이렇게 수리 하는 게 아니고, 어디 카센터에 가서, 이게 드라이브 하고 해서, 죽어 있는 형상을 ‘삐빅 삐빅’ 해가지고 이렇게 생기를 찾아내는 게 아니라, 아예 형상이 없어요. 있다면 마귀의 형상밖에 없지요. 아무것도 없어요.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 그리스도가 있었어요. 왜냐하면 처음부터 예수님만이 하나님의 형상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창세기 1장부터 하나님의 형상은 예수님이었고, 아담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었다는 말은 키가 몇 센치냐가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만이 창세전에 안고 있는 그 관계를, 관계성으로 아담을 만든 거예요. 그렇다면 아담이, 두 번째 아담인 예수님이 보여주는 관계는 뭡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요. 아버지와 아들 관계. 그렇다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원본 되는 십자가 이전에 구약의 사본에는 어떤 식이냐? 사본에는 바로 뭐가 왔느냐 하면은, 이렇게 왔어요. ‘언약’ 제가 처음 강의할 때 뭐라 했습니까? 언약 말은 안했죠? 뭐라 했습니까? ‘계약’ 계약은, 창세전에 아버지와 아들만 아시기 때문에 아무도 계약에 대해서 아는바 없습니다. 그 계약으로만 비로소 그 안에 구원이 있습니다. 그 인간에게는 구원이 없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아는바 없습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그 계약서가 덮치게 되면, 비로소 우리는 구원의, 이렇게 휩싸이게 되죠. 구원 작업에 놓이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구원이, 계약이 아닌 것들은 어디에 의해서 다 폐지 돼야 됩니까?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새 계약에 의해서, 계약서의 내용이 없는 것들은 다 폐기 돼야 되겠죠? 그래서 제가 문장을 하나 적어 보겠습니다. ‘진리는 모든 결과를 해체시킨다.’ 사도바울이 늘 평소에 이야기 했던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 당신이 이만큼 살아온 것에 당신이 얼마나 기여했습니까?”라고 누가 물으면 사도 바울의 답변은 뭡니까? “내가 나 됨은 귀한 게 아니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열심히 뭐 했고, 로마에 갔고, 편지 썼고, 고생, 옥에 갇힌 것은 뭐냐 하면은, 하나님의 그 계약에 의해서 내가 했다는 것은 전부 다, 모든 결과는 해체 돼야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해체 될 때, 죽을 때 해체 됩니까? 평소에 늘 해체 되는 겁니까? 평소에 늘 해체되는 거예요. 평소에 늘 해체돼요. 그러면 해체 될 때는 해체되는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해체되는 이유가 뭡니까? 계약서에 내용이 없는 거예요. 내가 기도해서 구원받는 게, 계약서 내용이 그런 게 없는 거예요. 내가 전도해서 복 받는 다는 게 계약서 내용에 없습니다. 그 없는 것을 뭐라고 하냐면, 그것을 죄라고 이야기해요. 그러면 이 강의를 들으면 결론 나왔지요? 뭐냐 하면은, 죄냐, 의냐, 구원이냐, 천국이냐, 율법이냐, 뭐냐, 모든 개념은 어디서 도출되어야 된다 말입니까? 계약서에서 나와요 계약서에서. 그것도 사본이 아니고, 원본 되는 원본 계약서에. 그 원본 계약서는 무엇으로 맺었습니까? 이제는 내 살과 내 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살과 피로, 십자가 사건으로 다 이루었다 이야기죠. 십자가에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장에 다 이루었잖아요. 그러면 그 계약서의 내용과 계약서에 내용이 없는 것들은, 죄라고 변형이 되면서 거부당해야 되겠죠. 그래서 성도의 특징을 저는 이렇게 봅니다. 오늘 제목을 이것으로 할까 생각하는데 ‘자기를 향한 거절’입니다. 누가? 내가, 나를 향한 거절. 누가 나를 이렇게 얼굴 돌리게 만드냐? 내가. 너는 아니고, 너는 빠지고 라고 내가 나에 대해서 거절 해져야 됩니다. 그게 바로 엘리야고, 모세고, 아브라함이고, 이삭이고, 야곱이잖아요. 야곱이 구원 받게 되는 것은 누구 때문에, ‘아브람’이 구원되는 것은 ‘아브라함’ 때문에 구원되는 거예요. ‘야곱’이 구원되는 것은 ‘이스라엘’ 때문에 구원되는 거예요. 그런데 야곱일 때는 이스라엘을 생각 했습니까? 안했습니까? 생각 한 적이 없지요. 아브람 때는 아브라함을 생각해 본 적이 없지요. 아브람의 뜻은 뭐냐 하면은 ‘나는 존경받을 아버지’라는 뜻이에요.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있는 거예요. 그런데 아브라함의 뜻은 뭐냐 하면은 ‘만인의 아버지’에요. 만인. 그러니까 아브람은 초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아버지다’에 초점이 있고, 아브라함을 초점은 ‘내 자식이 수타게 많다’는데 초점이 있는 거예요. 그러면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되고 싶다는 의지가 출중해서가 아니라 “나도 모르는데 왜 자식이 이렇게 많아?” 라는 그것을 근거로 했을 때 자식이 이렇게 많아진 것은, 나 아브람이 기여한 적이 없다는 그 고백. 그리고 자기를 향한 거절, 또는 다른 말로 자기를 향한 포기. 다 포기하지 마. 자기를 향한 포기. 그것을 어디에 담는다고요? 자기 이름에다가, 그것을 내용물로 담아버려요. “나는 내가 구원되었어도, 내가 복 받는데 있어서, 나는 아무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가 그게 안에 그게 내용물을 살릴 때 들어 가야돼요. 이 언약이 되려면 그렇게 실패하고 죄짓고 폐기 처분되는 게 그 내용물에 들어가야 된다고요. 갖다 버리는 게 아니고. 모세가 시내산에서 돌판 깨졌잖아요. 그 깨진 돌판 어떻게 합니까? 그 깨진 돌판의 취지가 “에이, 뭐 한번 실수 한 거니까, 넘어가자.” 그렇게 끝나는 거예요? 아니면 끝까지 깨진 걸 계속 가져갑니까? 그 깨진 돌판을 지상에서 다시 만들어요. 단 뭐는 빼고? 글자만 빼고. 그 깨진 글자 없는 돌판을 만들고, 그 깨진 돌판을 어디로 가지고 가느냐? 다시 모세가 들고 시내산에 올라갑니다. 그러면 손에 뭘 들고 있어요? “전에 주님 주신 돌판이 깨진 거, 다 사람 탓입니다.” 하는 증거물이 되겠지요. 이게 오늘 본문에 요한복음 12장 32절에 나오는, 바로 인자의 들림이, 예수님의 몸무게가 가벼워서 들리는 게 아니에요. 인자의 들림이, 밑에서 죄가 이렇게 역도기 들 듯이 그냥 밀어 올리는 거예요. 그 들림이. “잘 먹고 잘 살아라 나는 떠난다.” 이게 아니라, 들릴 때에, 예수님이 들림으로 말미암아 정말 이 세상은 일말의 구원 받을 권리나, 자격이나, 가치가 없음을, 유일한 증거물로서 주님이 들립니다. 그 들림이 바로 십자가에 죽으심입니다. 십자가의 죽으심. 어차피 십자가에 죽었다가 또 사흘 만에 부활하셔서, 그리고 40일후에 하늘로 올라가는데, 그 부활했다, 승천했다는 그 다음의 스케줄은, 십자가 안에 다 담겨 있는 의미입니다. 그 십자가 안에 그게 차곡차곡 채워서 다 들어있어요. 십자가 믿고, 부활 믿고, 이게 아니고, 십자가 안에 믿게 되게 되면, 십자가의 취지를 무산시키고 부활 취지로 넘어 오는 게 아니고, 부활 안에 그리고 승천 안에, 십자가의 의미를 그대로 그 유일한 내용으로 담아서 부활되고, 십자가, 승천 하는 거예요. 십자가의 그 의미를 모르면 부활도 안 되고, 그 의미가 안담기면 부활도 안 되고, 이게 승천도 못 하는 거예요. 어부가 바다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물을 던지고 난 뒤에 “한 두 시간 됐으니까, 건지자!” 해서 건졌습니다. 그리고 집에 ‘룰루랄라~’ 노래 부르고 왔습니다. 부인이 “고기 몇 마리 잡아왔노?” “난 고기는 잡은 적 없고 그물만 잡았다.” 이게 되겠습니까? 뭔가 그물을 들고 왔다는 것은, 그 안에 그물만 있는 게 아니고, 그 안에 어떤 의미가 함유된 채로 와야 되지 않습니까? 주님이 들렸다는 말은, 과연 이 세상은 악마의 세계이며, 그 악마의 세계에서 구원 받을 자는 아무도 없다는 그것을 분명히, 분명히,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할 정당성이, 분명히 다 확실하게, 공의롭게, 정의의 확립이 되어 있어야 돼요. 자, 한번 질문을 해볼게요. 다윗이 인구조사 했지요. 인구 조사할 때 20세 이하까지 다 인구조사해서 벌 받습니다. 20세 이상은 정치적으로 행정관리 하려면, 헤아리고 군대 조직도 해야 되고 해야 되니까 했는데, 그 세 가지 벌 중에서 제일 짧은 것을 했지요. 사흘 만에 전염병 퍼지는 거 했잖아요. 온역 퍼지는 거. 그런데 거기서 7만명이 죽었잖아요. “벌 받았으니까, 벌 받았으면 그러면 끝났네?” 아, 이게 문제에요. 여러분, 예수님 십자가 죽을 때 십자가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죽었잖아요. 그러면 “십자가에 죽었으면, 해결해 줬으면, 더 이상 우리가 십자가에 더 이상 구애될 필요가 없네요?” 십자가라는 게 죄 용서하기 위해서 처리하는, 그 뭡니까? ‘가습기’ “세균 없애는 살균 가습기 해가지고, 세균 날라 갔으니까 그냥 뭐 사용하면 되겠네요.” 만약 우리가 세균이라면 어떻게 할 거에요? 우리가 세균이라면. “십자가, 죄, 나는 중요한데 죄가 있어서 골치 아프구나. 예수님! 뽀빠이! 살려줘~” 했더니만, 예수님께서 ‘짠짜잔~’ “십자가 준비 됐느니라” “그러면 십자가가 와서 내 죄를 씻어주게 되면, 죄 없는 상태의 내가 되니까, 나는 구원 받는다.” 이거 맞아요? 틀려요? 뭐가 문제 입니까? 지금 내 구원을 위해서 십자가라는 가습기, 살균 가습기를 이용 한 거잖아요. 그러면 나는 처음부터 구원 받는 자가 돼버려요. 구원 받는데 그놈의 죄 때문에 구원 못 받은 거예요. 발목을 잡은 거예요. 그래서 죄만 떨어내면 이 몸은 그대로 구원 받겠다 하는 이 자의식의 심보가, 이게 바로 마귀가 앞장세운, 정확하게 마귀의 마음이에요 이게. 정확한 마귀의 마음이에요. 마귀, 그게 마귀의 구원법이에요! 마귀의 구원 방식이고. 그런데 인간들은 그 마귀의 구원 방식 외에는 납득이 안 돼. 그것만 이해가 돼요. 아이고, 직원들 다 갔나? 이렇게 고함질러도 되는가? 그런 쪽으로, 이게 교회 뭐 바르게 하고 목사가 돈 밝히고 이 문제가 아니에요 지금. 뭐, 목사가 너무 돈 밝히고, 여자 밝히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니까 지금요. 사람은 거 참! 복음은 모르는데 사람은 참 점잖다. 예수님이 점잖은 분이 아니잖아요. 예수님은 복음을 외치는 분이지, 점잖은 분이 아니에요. 뭐, 윤리, 유교, 유교 서당, 지리산 서당을 모셔 놓지. 아니면 성철 스님이나, 법륜 스님이나 그런 사람 모셔놓지. 그 인기 많던데, 아니면 봉은사 주지나, 할 거 뭐가 있어 그렇게 되면. 교회라는 것은 뭐냐 하면은, 왜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없는가를 내놓는 곳이에요 그게. 교회가 뭐냐? “우리가 이래서 구원 못 받는 겁니다.” 라는 것을 전부다 그 증거들을 ‘주욱~’ 이렇게 내놓는 거예요 내놓는 거. 교회에 크리스마스 트리가 있다면, 크리스마스 트리에 선물 걸듯이 걸으세요. “나, 이것 때문에 구원 못 받습니다. 이것 때문에, 어제 철야해서 구원 못 받습니다. 십일조해서 구원 못 받습니다.” 그런 걸 달아놔야 돼요. 주렁주렁. 예수님의 십자가는 죄를, 죄를 씻어주는 그러한 기계적 장치가 아닙니다. 장치가 아니에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십자가를 그런 식으로 받아들이고자 하느냐? 인간 자체가 어디에 갇혀 있느냐 하면은, 옛 사본에 갇혀있어요. 왜냐하면 옛 사본이, 사본인줄 모르고 그게 전부 인줄로, 원본인지 알고 있어요. 그 안에 뭐가 있느냐 하면은, 옛 사본에 이게 있어요. 갑자기 또 제목이 바뀌나? 할 때마다 바뀌네. 옛 사본에 법이 있습니다. 앞에 한 자가 붙인다면 뭐가 있느냐 하면, (율)법이 있어요. 율법은 딱 두 가지입니다. ‘하라’ 아니면 ‘하지 마라’ 하라, 하지마라. 율법 자체가 뭘 유인합니까? 행동을 보여라. 이것을 유인해줘요. 행동을 보여라. 그런데 그 법이 우리 바깥에서 법이 오는 것 정도가 아니고, 바깥의 법이 내 안에 있는 법과 같이 마주쳐요. 왜? 악마의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선악 체제가 있어요. 선악 체제적인 입장. 생명나무 못 따먹는 조건 있잖아요. 나는 생명나무를 절대 주지 않겠다고 하나님이 선언하게 만드는 그 장치. 그 장치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데, 그 장치를 향하여 법이 날아오니까, 우리는 뭘 동원시킬 수밖에 없습니까? 내 안에 있는 선악, 그 메카니즘. 선악 기재라 하는데, 메카니즘. 선악장치를 도울 수밖에 없습니다. 잘만하면 선이 되고, 못하면 악이 된다. 벌써 이 목적 자체가, 의도 자체가 같고, 그것을 가지고 율법을 마중을 나와요. 마중을 나오면 여기서 생겨나는 게 뭐냐 하면은, Baby one More Time 손가락과 손가락이 만나는 거. 글자가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냥. 손가락. 바깥에 있는 율법과 내 안에 있는 법이 만나는 거예요. “하나님!” 기다렸다는 거예요. “목사님! 하라, 하지 마라. 나 그 설교 얼마나 기다렸는지 몰라요.” 왜? 하라 하면, 하면 되고, 하지 마라 하면, 안하면 되거든요. 교회에 11시까지 오라 하면, 오면 되고, 남아서 오늘 청소 하라면, 청소하면 되고, 김장 하시라 하면, 김장 담으면 되는 거예요. 김장 담고 난 뒤에 아무 느낌이 없다. 그거는 인간이 아니무니다. 반드시 하게 되면 뿌듯함이 생기게 되어 있어요. 십일조하고 나 아무 감동 없다. 절대로 이런 인간은 없습니다. “쟤는 안했는데 그 어렵다는 십일조를 제가 했습니다.” 아직까지는 합니다. 조금 돈을 벌면 안하겠지만, 아직까지는 푼돈 버는, 아르바이트 하는 이 정도는 합니다. 아르바이트 하는 이거. 목돈, 나중에 전세금 올리고 이런다면 곤란 합니다 만은, 이거 푼돈은 합니다. 버틸 수 있어요. 하라, 하지마라가 마음 준비되어 있다니까, 빨리, 빨리 좀 이야기 해달라고 빨리. 그러면 빨리 이야기 하라, 하지 마라를 빨리 누가 지시하겠어요? 이것은 지도자가 있어야 돼. 지도자. 그럼 지도자 없는 교회는 교회입니까? 아닙니까? ‘삐-’ 교회가 아니라고 보는 거예요. 지도자가 없는, 그런데 로마서 8장이나 요한일서 2장 28절에서 누가 우리를 가르친다고 했어요. 누가? 누가 우리를 가르치지요? 성령이 가르치지요? 그런데 현실에서는 누가 가르치지요? 지도자가 가르치지요. 지도자가. 네? 지도자가 있는 곳에 모이는 거예요. 지도자가. 왜 모이지요? 하라, 하지마라를 지시받기 위해서. 왜 지시받아야 되지요? 지시에 따를 경우에는 내가 선한 쪽에 속한 존재인 것을 확인하는 희열과 기쁨을, 내가 누릴 수 있기 때문에 그래요. 우리는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그렇게 양육 받아왔습니다. 부모님은 어릴 때는 우리의 지도자였고 부모는 “밥 흘리면 안 돼. 똑바로 앉아. 아이고, 춤출 때 그래 춤춰야지, 아이고 잘한다. 박수해봐 박수? 짝짝짝! 옳지, 박수 잘한다.” 우리는 이렇게 당근과 채찍으로, 요새는 채찍도 없어. 순 당근, 끝까지 당근이지만. 정유라 보세요. 끝까지 당근이에요 당근. 말이나 타고 다니니, 말 타니까 당근 좋아하지. 당근으로 계속 해서 “우리 내 새끼 최고다.” 이런 식으로 계속 하지요, 이제는 결혼을, 4월 달에 결혼을 하지만, 계속해서 자식을 어릴 때부터 그런 식으로 “어이구, 내 새끼, 내 자식 최고다.” 과연 최고일까요? 네? 계약서도 없는데. 저 계약서에, 옛날 계약서에는 그렇게 보이지요. 사실은, 그 안에 사실은 새 언약이 녹아져 있는데, 우리 눈에 보이는 법으로 오니까, “이게 옳구나, 이게 주의 뜻이구나. 쉐마, 쉐마. 들으라, 들으라. 주의 말씀 잘 듣고 있습니다. 네, 잘 듣고 있습니다. 잘 듣고 있습니다. 십계명 지금 지키고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십계명 다 지켰나이다. 예수여!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으리이까?” 부자청년이 마태복음 19장에서 했던 거. 그 짓을 우리는 계속해서 유대인이 아니라도, 부자청년이 아니라도, 어릴 때부터 이거는 주눅들 정도로 계속해서, 지금도 반복해 오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고. 목사님한테 칭찬받으면 이번 한주는, 무슨 행운이라도 찾아올 줄 알고, 백날 기다려 봐요. 행운 오는지. 여러분, 돌발적인 차 사고나, 이런 사고나, 죽은 사람이 미리 알고 기도한적 있어요? 뭐, 비행기는 모르겠다. “비행기 추락합니다.” 하면 10초정도는 기도할지 모르겠지만, 놀러가서 춤추다가 진부령 그 코너 올라가는데, 넘어가는데 춤추다가 갑자기 이게 돼요? 그래서 사람들은 사전에 미리 교회 가서, 놀러가는 것이 이번에 나쁘다 싶거든요. 놀러가는 것은 나쁜 일이니까, 나쁜 일을 커버하기 위해서는, 여분의 선행을 많이 쌓아놓는 거예요. 조금 이렇게 상세히, 내용이 남도록. 그래서 수능 앞두고는 바짝 안 나가던 새벽기도 나오고, 뭐 이렇게 해서 선을 이만큼 쌓아놓아요. 왜? 지금 곧, 큰 나쁜 짓을 할 계획이 있기 때문에, 큰 나쁜 짓을, 3일 후에는 스페인에 놀러 가서 거기 교회도 멀겠다. 뭐, 하나님도 멀겠다. 그래서 술 먹고 띵가띵가 놀 생각하니까, 나쁜 짓을 막 하는, 미리 당겨서 하는 거예요. 이 구조가 선악 구조입니다. 여기에 법이 주어질 때, 그 법이 주어질 때는 법은 뭐냐? 그 선악에서, 너는 마음은 선인데, 내 속에 괴물이 있는 걸 몰랐어요. 법이 와야 알아요. 법이 오니까 탐 안내고 싶어도, 갑자기 “탐내지 마라”는 그 말씀이 내 안에 잠자는 괴물의 콧털을 건드렸거든요. 그때부터는 평소에 “귤 내건데요?” 이것도 탐심이라. 뭐, 탐심 아닌 게 없어요. 가만 보니까 모든 게, 눈에 들어온다는 뭔가 눈에 띄었다는 것이 내 욕망을 자극했어요. 차라리 안 봤으면, 그 가방, 그 옷, 그 명품을 탐내지 않을 건데, 내가 본 것 때문에, 내가 본 것 때문에, 거기서 탐욕이 발작을 일으킨 거예요. 그냥 안양 촌구석에, 안양 그 무슨 동인가? 안양 또 후진 동네 뭐지? 뭐, 충훈부? 충훈부 살다가, 따박따박 붙어있는 곳에, 곧 무너질 것 같은 그런데서 살다가, 그 사는 사람들 옷 모습 보세요. 전부다 뭐 고만고만하고 이렇게 입었는데, 갑자기 로또 당첨 돼서, 서초동 강남에, 청담동으로 이사를 왔다 해봅시다. 이사 와서 뭐, 마트나 가려고 하면 ‘쉭-’ 피하고, “어디서 저 촌놈이, 촌 같이 옷을 저렇게 입고 왔나” 이럴 경우에 갑자기 어떻게 됩니까? “아, 이래서 안 되겠다.” 이렇게 되죠. 그럼 그 순간에 뭐가 이렇게, 갑자기 양이 늘어나는 거예요? 내 욕심이, 욕심의 양이 조금 늘어난 거예요. 저 양반이 25명 중에서 20등 하다가 15등 할 때는 아, 이거 맨날 감사헌금해요. 그런데 갑자기 5등 하게 되면 15등 했던 시절이 원망스러운 거예요. 복음을 알아서 기뻐하는 것도, 사실은 탐심이라니까요. 그때 진작 알았을 걸, 아니에요. 복음을 알아서 나는 성공했다가 중요한 게 아니고, 복음 앞에서 나는 내 자신이, 그 과거를 원망할 쨉도 안 되는, 그 옛날보다 더욱 더 저질인 것을 새삼스럽게 발견하는 순간순간이에요. 발견하는 순간. 그때 옛날에 내가 교회 만들었던 것을, 얼마나 나 잘났고, 남의 지시에 따랐고 그래서 내가 말 들어서 “나 완벽해 이정도야 시키는 대로 다했어. 뭐, 뭐 또 이야기해봐 또 시키는 대로 다 할게.” 자기 잘난 자기 의를 포기를 못해서 생기는 현상이거든요. 맞지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그게, 그런 짓거리를 이제는 필요 없을 정도로, 필요 없을 정도로, 그런 생각을 안 할 정도로, 내가 모르는 계약서에 발을 들여놓게 된 거에요. 내가 본 계약서에. 그 계약은, 나를 제끼고 하는 계약이에요. 나를 제치고 하는 거예요. 그게 바로 뭐였습니까? 자기에 대한, 자기를 향한 거절. 자기를 향한 거절이에요. 주께서 내 피를 안 받아요. 주께서 내 몸을, 내 살을 안 받습니다. 그 뜻이 뭐냐? 내 살과 내 피로 계약서를 작성했다는 말이 그 말이에요. “네 살에 잉크 찍지 말아라” 하는 거예요. 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주님께서 들릴 때에, 그 들리는 밑을 한번 보세요. 모든 인간은 저주 받아 마땅함을, 저주를 끌고 들리는 거예요. 저주를 끌고 들리면, 그 주님이 내려올 때는, 저주에 대한 합당한 징벌을 가지고 내려오기 때문에, 이 세상은 완전히 불바다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는 왜, 이 괜찮은 세상이, 대통령이 나쁘다고 하야할 정도로 이렇게 민주화와 정의가 넘치는 이 세상이, 왜 하나님 보시기에는 소돔과 고모라 이상으로, 하늘의 유황불을 얻어맞아야 될 그 짓을, 촛불정도가 아니라 유황불. 유황불 다 맞아야 될, 왜 그 세상인 것은 바로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그게 또 세질 겁니다. 예, 10분 쉽시다. 가락-요한복음12장32절(자기를 향한 거절) 161206b-이 근호 목사 자, 그다음에 봅시다. 아까 마지막에 한 거, 들렸다. 들렸다 하는 것은, 세상이 어떤 세상인 것을 그것을 전부다, 의미를 포함하는 것을 가지고 어려운 말로 ‘함의’라고 합니다. 포함시키는, 의미를 포함시켜서 ‘주욱-’ 들어버리는 것, ‘주욱-’ 들어버리면 이 세상은 뭐냐 하면은, 31절에 보면 “이제 이 세상에 심판이 이르렀으니” 자, 심판이 이르렀다고 하니까, 여기서 일반적인 죄 속에, 계약서에 들어있지 않은 인간들, 우리 다 가짜잖아요. 가짜 인간들은 무엇을 소망하느냐 하면은, 저 미래를 소망하거든요. 미래에 대해 소망하게 되면, 여기에 뭐가 투입되느냐 하면은 ‘시간 의식’이 계획 돼요. 그러면 심판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심판은 세상 끝에 이루어지겠죠? 그러면 지금은 자기가 있는 곳을 아무리 둘러봐도, 세상 끝이에요? 세상 끝이 아니에요? 세상 끝이 아니지요? 그러니까 예수님의 말은 무슨 말이 돼요? 헛말이 되는 거예요. 말이 헛소리가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한테 당하니까, 자존심 상해서 큰 소리 한번 치는 구나.” 이렇게 생각 하는 거예요. “아이고, 예수라는 그분도 어지간히 답답하긴 답답했다. 아무리 말해도 안 먹어 주니까, 소금이라도 뿌리는 식으로 시기 질투하듯이, 그냥 큰 소리 치는 구나.” 이렇게 하는데, 주님 뜻은 그게 아니고 실제로 심판이 이르렀어요. 그러면 심판이 이르렀다는 말은, 아까도 이야기 했지만 무엇에 근거해서 심판에 이르렀습니까? 어디에서? 계약에 의해서, 언약에 의해서 심판이 이르렀습니다. 그 하나님의 계약에, 아까 전에도 했지만, 모세가 돌판 들고 왔는데 돌판이 깨어졌지요? 그러면 돌판이 깨어졌다는 말은, 하나님과 산 밑에 있는 자기 백성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겁니다. 끊어져버리면 하나님께서 계속 실시하고자 하는 계약 완성에 대해서, 이제 사람이, 대상이 없어 진거에요. 계약이 딱 끊어졌으니까. 그래서 중간에 누가 나서지요? 그 당시 중보자가 누구입니까? 모세가 나가지요. 모세가 나서서 하나님 앞에 아룁니다. 아뢸 때 근거가 있어요. “시내산 위에서 저와 함께 있었잖아요.” 다시 하면 “나는 저 사람들 중에 같이 있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모세 빼놓고 다 망했잖아요? 모세 빼놓고. 보편적으로. 전부다. 그래서 이 보편적이라는 말이, 보편적이라는 말은, 아까 질문 한 게 ‘모든’이란 말인데, ‘모든’이란 말은 보편적이다. ‘모든’이라는 말은 어떤 점이 유리하고 어떤 점이 불리할 수도 있고요. 망한다면 “저는 착해요” 라는 것이, 손 내봐. 다 망해요. 그런데 구원 받는 것이 모든 보편에 해당 돼버리면 어떻습니까? “저는 구원 받을 짓을 안했는데?” 이래도 구원을 받아버려요. 그래서 이 보편은 어디서 만들었느냐 하면, 보편이 그냥 생기는 게 아니고 처음에 ‘단독자’가 있어요. 단독자에 의해서 이렇게 확대되어서 보편자가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망하는 보편성의 단독자가 누구겠습니까? 처음에 죄를, 죄 지배 받도록 한 자가 누구에요? 아담이죠? 그래서 모든 후손들은 사실은 아담 안에 있다 하는 것이 좋아요. 아담 안에 있다. 이게 이해하기 좋습니다. 아담이 허리가 한 100인치 이상 되고, 몸무게가 한 200킬로 된다고 보세요. 통통하겠죠? 통통함 안에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인간들은 거기에 다 들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거기서 새끼 까면서 조금씩, 조금씩 이렇게 톡톡 던져놓으면, 그것이 구체화되는 거예요. 아담 자체가 사본이에요. 오실 아담의 표상이라 돼 있어요. 표상이라. 오실 예수님은 아담에게 있었던 그 조건, 아담이 아담으로서의 위상. 위상과 딱 맞는 위상으로서 오시는 겁니다. 그러면 아담은 한 사람이 범죄 해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이쪽에서는 한 사람이 대표자, 한 사람만 의가 되게 되면, 거기에 속한 보편자, 모든 사람은, 이것은 의인이 되는데 그 의인이 될 때 뭐가 되냐 하면, 바로 그것이 은혜로 의인이 돼요. 은혜로. 은혜로 의인된다. 그러면 아담이 범죄 해서 죄인된 것은 은혜라 하지 않고 뭐라 해야 합니까? 죄 왕 노릇이라 하지요. 죄가 우리에게 하게 하지요. 죄가 왕 노릇. 그러면 죄와 왕 노릇 하는 것이 구체적인 모습이 어떻게 나오는가? 그게 바로 행함으로 구원 받는 거예요. 행함으로. 그게 로마서 5장에 나와요. 로마서 5장은 4장부터 계속 하는 이야기가 뭡니까? 행함으로 구원 받지 못하고 무엇으로 구원 받는다? 믿음으로 구원 받는다고 할 때에, “내가 믿습니다.”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그 믿음이라는 것은, 믿어야 될 대상이 존재한다는 뜻이에요. 믿습니다. 믿습니다. 이게 뭐, 귤보고 믿습니다가 아니고, 내가 믿습니다를 준비할게 아니고, 내가 믿습니다. 하는 것도 이것이 어디에 포함 되냐 하면은, 내 행함에 포함 돼요. 왜냐하면 행함의 주체자가 나이기 때문에, 행함의 주체자가 나라면, 그것은 믿음도, 나하고, 그 믿음의 주체자가 내가 돼버려요. 그래서 믿음의 주체자가 내가 되는 게 아니고, 믿음의 주체자가 따로 있고, 그분이 우선이 되어서 그분 때문에 생긴 결과물로 함유가 될 때, 그것을 뒤돌아보면서, 회고해 보면서 그것을 믿음이라 하는 겁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지요? 아브라함은 아무것도 안하고 집에 팔짱끼고 있지 않았습니까? 가만히 있었어요. 그냥. 가만히 있었어요. 아브라함은 뭐가 바뀌었습니까? 가만히 있는 게 아니고 설쳐도 믿음이 된 이유가? 바로 자기 주체가 바뀐 거예요. 아브람이 행동 한 것도, 아브라함이 행동한 것으로 나중에 바꾸어 주니까, 내가 한 것이 나중에 예수님이 내게 하신 일로, 우리 성도에게는 그것을 바꾸어 줘요. 바꾸어 줘요. 이름을 바꾼다고. 대표자가 바뀌어요. 그러면 우리는 보편에 속해 있는 보편자에 포함이 되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전부다 어디에 있다는 말? 계약서 안에 다 담겨있다. 아직 계약서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이야기를 안했어요. 계약서의 이야기에서 들린다는 이것이 계약서의 완성 형태라는 이야기를 했지, 구체적으로 어떤 계약서, 어떤 내용이 완성과 연결 되는가 이야기는 안했습니다. 32절 다시 봅시다. “내가 땅에서 들리면” 이렇게 땅에서 들리지요? 어디서 들린다 했습니까? 땅에서 들리지요? 진짜 오늘 강의, 제가 생각해도 어렵습니다. 진짜 어렵습니다. 지난 시간에 들린다 할 때에 하늘로 올라간다는 이야기 했던가요? 십자가로 올라간다 이야기 했던가요? 한 달 전에, 기억이 안 나지요? 십자가에 달린 게 바로 들리는 겁니다. 그 근거가 어디에 있습니까? 요한복음 3장, 민수기에서, 요한복음 3장과 민수기에서 모세가 뭘 든다 했어요? 놋뱀을 들 때, 들린다 했지요?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가 지면에서 몇 미터입니까? 한 5킬로 돼요? 아니면 승천까지 한 3800킬로쯤 됩니까? 십자가가 몇 킬로입니까? 십자가가 몇 킬로 할 것도 없이, 몇 미터쯤 되겠어요? 안 높아. 높아 봐야 2미터 되겠지요? 2미터. 2미터 되면, 2미터 정도는 그거는 땅에 속하지 하늘에 속한 게 아니에요. 2미턴데. 그때는 2층 건물이 있지 않습니까? 2층 건물도 안 되는데 무슨 하늘이 되겠어요? 이 십자가의 위가 예수님 달린 곳이 하늘에 달 때, 비로소 밑을 땅이라고 할 수가 있거든요. 땅에서 들린다 했잖아요. 그러면 예수님 들리는 곳은 땅이다. 땅에 속한다. 안 속한다? 땅에 안 속하잖아요? 그러면 땅에 안속하면 뭐냐? 그게 하늘이 되는 겁니다. 그러면 무슨 하늘이 이렇게 가까운 하늘이 있어? 하늘이라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바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있는 이것이, 바로 하늘이 되는 거예요. 이것이 뭐냐? 이게 하늘이 되고, 이것이 하나님 나라고, 이게 천국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성도가 죽으면 이 나라 가는 거예요. 저 높은 나라 가는 게 아니고. 이, 고함질러도 되겠나, 모르겠다마는 뭐 하늘에서 이야기 하니 땅에서 좀 이해해야. 성령이 있는 곳이 하늘이에요. 로마서 14장 17절 하늘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롬14:17) 하늘나라는, 저 높은 곳에 있는 하늘나라는 성령 안이에요. 성령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 안, 다른 말로 하면 십자가 안, 다른 말로 하면 복음 안,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렇다면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어디에 있습니까? 진짜 쉬운데, 어디에 있어요? 땅에 있는 거예요. 죽어도. 땅에 있는 거예요. 죽어도 땅에 있는 거예요. 따라서 성령 안 받은 사람은, 사나 죽으나 땅에 심판이 이르렀잖아요. 그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습니다.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어요. 이미 예수님께서 저주 받음으로 말미암아 이 세상은 저주 받는 장소로서 확정이 되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이 땅에서 자살한다고 해서 구원 받는 거 아닙니다. 자살해도, 땅에서 땅으로 갈 뿐이에요. 뭐 연탄불이냐? 안 그러면 마포대교냐? 그거 의미 없어요. 안 그러면 넥타이냐? 번개탄이냐? 그거 의미 없습니다. 늙어 죽는 게 낫지. 예수님 안 믿으면 번개탄 피우나, 늙어 죽으나 땅에서 땅으로 가기는 맨 마찬가지에요. 90세 되가지고 80세 돼서 오라고 해도 안 간다 하는데, 뭐 100세에 가봤자 땅에서 땅으로 가는 거예요 그거. 그러니 법정 스님이니, 법륜 스님이니 뭐가 어떻게 누구의 멘토라니 뭐, 천주교 뭐, 천주교는 불교니까, 기존의 교회도 마찬가지고. 장례식에서 설교하면 가관이에요 가관. 그것도 세 번씩이나 해요. 입관예배, 발인예배, 하관예배, 세 번씩이나 죽으면 천국 간다고 노래를 되게 불러 싸면서 “요단강 건너서~ 님아 그 강을 건너지 마오.” 뭐 어디서 들었는지 또. 죽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니고, 살아서 구원 받지 못하면 죽어서도 구원 못 받습니다. 그리고 살아서 구원 받으려면, 내가 산 게, 사는 게 아니고 지금 내가 죽어있다는 것을 알아야 돼요. 죽어있는 나를 성령께서 데려가게 되면, 나는 산 사람이 되는 게 아니고, 죽은 자로서 성령 안에서 산 자가 돼요. 반드시 살았다 할 때는 앞에, 내가 살았다 죽었다 하면 내 개인을 주장, 겨냥해서 내가 살았나? 내가 죽었나? 이런 식으로 자꾸 나를 겨냥하는데, 성경에서의 구원은 나를 겨냥하는 것은 끝났고 이렇게 “네가 어디 안에 소속이냐”를 묻는 겁니다. 소속에 대해선 제가 캘거리, 뉴저지에서 제가 시카고에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분명히. 비행기타고 안가도 그냥 다 들을 수 있어요. 소속이, 소속이. 그 소속이 우리를, 죽은 우리를 매일같이 살리는 소속이에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고린도후서 한번 봅시다. 이것은 눈으로 봐야 돼요. 본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도 아니지만. 고린도 후서 한번 봅시다. 후서 4장 11절 누가 한번 읽어 보세요. 4장 11절. “우리 산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니라” (고후4:11) “우리 살아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스톱. “우리 산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기움은” 여기서 스톱을 한 이유가, 죽음에 넘기울 때 우리가 죽었습니까? 우리가 살았습니까? 내가 죽었습니까? 내가 살았습니까? 내가 죽었지요? 어디에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나는 날마다 죽고 내 안에 누가 산다? 그게 그리스도가 산다는 말을 하려면 반드시 뭘 먼저 깔아야 돼요? 방석을. 나는 이미 죽고, 어제도 죽었고 오늘도 죽었고, 내일도 죽고, 죽고, 죽는데 그냥 죽는 게 아니고 어디 안에서, 예수 십자가 안에서 나는 날마다 죽고, 그다음에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고 날마다 죽고, 그리스도 생명이 날마다 나에게서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계속 나오는 거예요. 그러면 이 목숨은 내 소유에요? 주님 소유에요? 주님 거예요. 사나 죽으나 주님 것이라니까요. 거기서 커피를 마시고 물을 마신다면 주님이 주신 생명으로 커피 마시고 물을 먹는 거예요.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럼 누구 아이에요? 주님의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 간 거예요. 아이가 다쳤습니다. 주님의 소유가 다친 거예요. 그래서 혹시 앞으로 촛불집회 하거든 플래카드 하나 쓰세요. “주님의 소유여, 하야하라! 주님의 소유여, 하야하라!” “뭐, 이상하게 이거는 당신은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해?” “나 들렸거든.” “난 어느 소속입니까? 하늘” 미쳤어. 하늘. “그럼 나는?” “너는 땅” “너 몇 미터인데?” “키 똑같애” “똑같은데 뭐, 왜?” “똑같더라도 성령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늘. 그 외에는 그 동그란 밖에는 땅” 이것이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우리보고 믿으래요. 자, 이것을 믿겠습니까? 못 믿겠습니까? 믿을 수가 없지요. 네, 믿을 수가 없어요. 이게. 믿을 수가 없어요. 왜? 너무 함축돼서 믿을 수가 없어요. 언어 자체가, 우리가 믿을 만한 언어를 주신 게 지금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말씀을 주신 이유가 뭐냐? 우리가 믿을 수 없는 존재에요. 이게 얼마나 기쁜 줄 모르겠어요. 만약에 믿을 수 있는 존재가 이것을 믿었다면, 우리는 그 구원 안에 뭐가 포함되겠어요? 나는 믿었거든? 이게 포함 될 거죠. 그게 계약서에 그게 안 들어갔어요. 계약서는 아버지와 아들 계약만 해요. 아버지는 성부고, 아들은 성자고, 아버지와 아들의 계약으로만 계약이 끝나버렸어요. 거기에 우리가, 구원 받으러 우리가 들어가는 게 아닙니다. 들어갈 수 없어요, 예수님의 생명이, 계약이 끝난 상태에서 나와, 끝난 상태에만 나오는 그 생명이, 어떤 자에게만 가느냐 하면은, 여러분 다 아시지만 어떤 자에게만? 죽은 자에게만 가요. 마치 에스겔 37장에서의 꼭 마른 뼈한테 가듯이, 죽은 자에게 뭐가 임하지요? 성령이 임하지요. 성령이 임하면 깨어날 때, 제일먼저 뭘 묻겠어요? “누가 저를 깨웠어요?” 이렇게 되겠지요. 바로 그게 성도의 고백이다 이 말이죠. “누가 깨웠어요?” 이게 바로 믿음이에요. 믿음은 믿습니다가 아니라 믿음의 내용이 뭐가 담겨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 지난 며칠 전에 낮 설교할 때, 믿음의 내용은 오직 예수님의 성육신 밖에 없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했거든요. 믿음의 내용은 오직 성육신 밖에 없습니다. 아니, 성육신이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애 밖에 없습니다. 녹취된 거 보세요. 나와요. 믿음의 내용은 예수님의 공생애 밖에 없습니다. (참석하셨지요? 기억 안 나시죠? 참석 하셨는데, 기억 안 나시는지 모르겠다.) 공생애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만약에 믿음의 내용에 들어가 버리면 이것은 나의 편지가 돼요. 나의 편지. 그런데 거기 보면 그리스도의 편지가 되어야지, 나의 편지가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럼 나의 편지라는 것은, 내가 주일 낮 설교할 때, 그 노래까지 짧게 불렀습니다만, 나의 편지가 되면 어떻게 되죠? 김광진의 편지가 됩니다.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백날 해봐야 결국은 지쳐요. 나중에. 자기가 자기 종교 활동에 나중에 낙오, 지쳐 버려가지고 “하나님, 더는 못하겠습니다. 배울게 너무 많고, 아직 공부할게 너무 많아서 못하겠습니다.” 파도, 파도 코 파는 것도 아니고 파도, 파도 우물 파듯이 팝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파는 게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왜 우리가 이게 믿음의 내용이 그리스도밖에 없는가를 더욱 더 깨닫게 만들어져요. 그건 누구 솜씨냐 하면, 주님의 솜씨지. 내가 나대서 설칠 솜씨는 아니 단 말이에요. 나대는 문제는 아니거든요. 자, 여기에 제 말이 맞는지, 제 말이 맞을 리가 있겠습니다마는, 40절 한번 봅시다. 40절에, 40절. 다 같이 한번 읽어 볼까요? 12장 40절. 시작.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요12:40) 잠깐, 잠깐만. 성경이 판이 달라가지고 그럼 제가 할게요.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눈을 뭐한다고? 멀게 하시고. 이게 바로, 이것이 하나님의 완성의 효과입니다. 그렇게 똑똑한 사람도 복음 전하니까, 봉사고 되고 말아요. 그 철학 박사, 법학 박사, 공학 박사가 심지어 목사, 신학 박사가 복음 전하니까 눈이 멀어져 버려요. 멀어야 돼요. 눈이 머니까, 그다음부터는 혹시 그 사람에게서 성령이 오게 되면 “나는 날마다 눈을 떴지” 이런 소리 안하겠지요. 네? “난 눈 바짝 떠서, 성냥개비 넣어서 눈을 번쩍 뜨는” 그런 소리 안하겠지요? “아, 눈이 멀었었구나. 바보도 이런 바보가 없네. 주여, 나 같은 인간을 구원하다니. 이것은 완전히 100퍼센트 주의 은혜입니다. 주님의 자기의 주되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저를 함부로 사용하신 것에 대해서 제가 너무나 황공스럽습니다. 함부로 사용해 준 것에 대해서 너무나 황공스럽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함부로 사용해 주시고, 더 나아가서 막 살기에, 막 살도록 해주시옵소서. 막 사용해 주시옵소서. 막.” 그래서 지난 낮 설교에 제가 결론적으로 세 가지를 이야기 했는데, 세 가지를 다 잊어버렸어요. 첫째, 순종하지 말 것. 악마하고 살 것. 끝에는 잊어버렸다. 얼마나 당당하고, 얼마나 자유로우면, 하나님의 종인 그 악마와 살아도 괜찮고, 순종 안 해도 괜찮고, 막 살아도 괜찮을 정도로 그렇게 살아야 돼야 합당하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 “저희 마음”을 뭐하게 만들고? 완고하게 만들고. 자기 딴에 내려놓고 또 내려놓아도 그게 주체가 내가 되면 완고입니다. 왜냐하면 계약서에는 내 사인이 안 들어 있는데, 마치 내가 천국 보내는 계약서에 나도 기여한 것처럼 행세하는 이 교만, 이 완고를 주님께서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53장에 보면 “누가 그를 믿었느뇨” 그렇게 되어 있지요? 그것이 예수님 오실 모습만 본 게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서도 “누가 믿었느뇨”가 그대로 적용 돼요. 예수님 행세만 보지 말고, 그 뒤에 어떤 사건, 어떤 기적, 심지어 12제자에게 병을 고치고, 권능을 줘도 12제자가 예수님을 못 알아 봤습니까? 예수님을 알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이게 얼마나 우리를 행복하게 만드는지 몰라요. 아무도 몰라요. 그 아무도 몰랐다는 것을 믿음의 내용으로 집어넣어야 된다니까요. “저, 주님을 알아 본적이 없습니다. 주님이 먼저 알아봤지요.” 이걸 믿음의 내용으로 집어넣어야 된 다구요. 그게 뭐냐면 모든 결과를 해체하는 그것을 버리지 말고, 해체된 그 상태가 믿음의 내용으로 다 들어가야 돼요. 그다음에,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즉각적인 하나님께서의 거부입니다. 적극적인 거부. 그래서 예수님의 십자가라 하는 것은, 하늘나라 가는 길은 없다는 것을, 어떠한 것도, 그 어떤 인간도 하늘나라 길이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어떤 신학자들은 어떤 뭐, 통로를 냈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철학가 중에 많이 있어요. 자, 37절 한번 봅시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요12:37) 붕붕 띄더라도 다 연결되어 있어요. 37절 “이렇게 많은” 그 다음에 뭡니까? 그게 이적이 아니고 표적이에요. 이적과 표적은 차이가 나요. 이적은 사람들이 보기에 신기한 일을 이적이라 합니다. 사람들 보기에 신기한 것. 표적은 전혀 신기하지 않아요. 그런데 거기에 뭐, 의미를 몰라요. 의미를 모르는 게 표적이에요. 예수님 오시는 게, 오셨다는 것이, 예수님이 목수된 게 표적입니까? 이적입니까? 이적도 아니고, 신기한 것도 아니지요. 그런데 예수님 그 자체가 표적이 되는 겁니다. 어떻게 표적이 됐나? 첫 번째 표적이 뭐에요? 가나안 혼인 잔치에서 고쳐주는 거죠. 엄마가 예수님을 못 알아봤어요. “예수여, 포도주 떨어졌다.” 슬슬 예수님이 이적에서 표적으로 나아갑니다. “여자여,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두 가지를 한번 차이가 나는데, 이 차이는 여러분들이 쉬워요. 자, 해볼게요. 첫 번째, 이 물건을 가지세요. 두 번째 문장, 이것 빼놓고 다 버리세요. 여러분 이 의미 차이는 쉽지요? 네? 이걸 가지세요. 하면 있는 것은 다치지 않고 더 추가해서 하나 더 들어오는 게 되잖아요. 이걸 가지세요. 그러니 성경에서 믿으라 하니까 사람들은 뭘 생각합니까? 이미 알고 있고, 나는 지금 판사고, 의사인데 그래서 교회까지 나가서 십자가까지 건져서 내 것으로 가져오는 거. 나는 지금 목사인데, 목사하고 있는데 거기다가 십자가 복음까지 더 추가해서 더 아는 거. 이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그런데 주님 말은 뭡니까? “십자가 있거든 나머지는 다 버리세요!” 버린다는 말은, 십자가와 관계 된 것을 다 이해하라는 말이에요. “다 버리세요. 거기에 의미를 두지 마세요.” 그런 뜻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교수 된 것도, 목사 된 것도 의미가 없는 거예요. 목회하는 것도 의미 없는 거예요. “왜 교회 3명밖에 안됩니까?” 이런 게 의미가 없는 거예요. “왜 내 몸은 아픕니까?” 이런 게 의미 없다 이 말이죠. “복음 알았으니까 몸을 더 건강히 해줘야지” 이것은, 있는 것에다가 더 추가해서 이렇게 한 거고 오해 한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와 아들 관계니까 계약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추가해서 보내놓고, 예수님만 들리게 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빼기 때문에, 그 원리, 아버지와 아들의 원리를 그대로 성도에게, 그대로 적용시켜서 신자 만드는 겁니다. 그렇게 신자를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그러면 빼는 작업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그 빼는 작업을 아까 읽었던 40절에서 그렇게 이야기 한 거예요. 그리고 아까 37절에서는 이적이 아니고 표적으로서, 봐도 의미가 모르도록. 계속 자기를 감추는 식으로 그렇게 해오신거에요. 자, 그러면 이제 35절 봅시다. 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12:35) 이렇게 되어 있죠? 제가 말 잘못 읽은 게 아니지요? 그대로 읽었죠? 그런데 세상의 물리하고, 물리 법칙과 어긋납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이라도, 빛이 성냥불이라도 있으면, 그만큼 더 밝아요. 그만큼 더 밝아요, 그렇죠? 물리적으로 그렇죠? 그런데 성경에서는 뭐냐 하면, 빛이 있는 만큼 더 어두워요. 그 빛 외부에는. 물리적으로 조용한데, 방울을 터뜨리면 어떻게 됩니까? 방울을 터뜨린 만큼 물리적으로는 약간 더 시끄럽겠죠? 그 소음만큼은. 그런데 표현할 때 어떻게 표현합니까? 방울이 떨어져도 들릴 정도로 그만큼 고요하다 하지요. 그냥 있으면 고요한 것을 모르는데 방울이 톡 터질 정도로 “이야, 그게 계기가 되어서 그런 일이 일어나니까, 그런 사건이 주어지니까, 아, 평소에 얼마나 고요했다는 것을” 확 드러나듯이, 그냥 사람이 살아가게 되면, 그냥 고만고만한 세상인데, 나쁜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고, 빛 된 삶도 있고, 어두운 것도 있는데, 막상 빛이 딱 떠버리니까, 전부가 그 예수님 빼놓고 전부가 다 뭐였다?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는 겁니다. 어떻게? 뭐 전기가 나갔어? 아니죠. 예수 그리스도를, 빛을 빛으로 알아보지 못한 게 이유 때이에요.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오늘 강의로 이야기 하면 계약 바깥에 있기 때문에, 계약 안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그래요. 계약 안의 내용을 모르기 때문에. 그러면 이 계약서가 있다는 것을, 계약서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야 되겠어요? 계약서가 있다는 것은 이미 알려 줬어요. 언제? 구약에. 누굴 통해서? 이스라엘 통해서. 그럼 하필 왜 이스라엘이냐? 이스라엘은 원래 없는 나라입니다. 지난 울산에서 한 강의를 잠시 여기서 해볼게요. 원래 애굽 나라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여기에 누가 사나? 히브리인들이 살고 있죠. 히브리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아니에요, 그냥 종족이지, 히브리 종족이라는 말이죠. 이들은 구원을 원하는 게 아닙니다. 학대 받기를 원치 않아서 그렇지요. 언제처럼? 자기의 과거처럼. 새로운 바로 왕이 등극하기 이전에, 요셉 때 잘해줬던 그때처럼, 그때는 히브리인들이 고센 땅이라 해서 애굽에서 제일 좋은 땅, 제일 토실토실한 땅, 이쪽 전체가 많은 그 땅에서 살고 있었어요. 그러니 얼마나 이게 뭡니까, 평화로워요. 굉장히 평화롭지요? 사람 몸 편하면 최고지 뭐 그렇잖아요? 몸 편하면 최고잖아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굴 보냈습니까? 여기에. 여기에 누굴 보냈습니까? 모세를 보냈어요. 그런데 모세가 자진해서 왔습니까? 뒤에서 발로 찼습니까? “누가 떠밀었어?” 발로 차 버린 거예요 “들어가!” “아, 나 못하는데?” “들어가!” “나 못하는데?” 못한다니까 누굴 하나 붙여줬지요? 아론. 모세 지시 받는 자. 둘이 왔어요. 히브리인들이 환영했습니까? 반대했습니까? 반대 했지요. 반대. 싫어했어요. 왜 반대 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들 해방하는 방식이, 그들이 납득이 안돼요. 일종의 아까 얘기한, 표적 같아. “에이, 이게 되는 소리를 해야지 말이 안 됩니다. 말이 안돼요.” “박근혜한테 5년 더 대통령 하게 합시다.” 이게 지금 말이 돼요? “5년 더! 5년 더! 5년 더!” 그것도 반대하는 쪽에 들어가서 “5년 더!” 촛불이 아니라 횃불을 흔들면서. 밟힐 것 같아요. “최순실을 국무총리로! 국무총리로!” 말이 안 되지요. 수용이 안 되잖아요. 바로 이 방식은, 그들이 익히 아는 방식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이게 땅이거든요. 땅 바깥에서 있는, 아까 하늘이 어디에 있다고 했습니까? 하늘이 어디 있다고? 예수님과 아버지 계신 곳. 계약에 있는 곳에, 계약이 있는 곳이 있거든요. 그쪽에 하늘이 있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쪽에서 방식이 이해가 안 되지요? 여기서 뭐가 일어나느냐? 여기서 구원이 일어나요. 구원은 이들이 구원을 몰라요. 구원 받겠다는 것은 이건 성립이 안돼요. 구원은 누구 먼저? 모세가 물에서 건너와서 주님께 갔다 오는 이 자체. 이 구원이 먼저 일어나고, 그 구원을 증명하기 위해서, 거기에 없는 것에서 만든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그 이스라엘에서 구원을 증명하기 위해서 이스라엘에서 뭐가 떨어져 나가야 됩니까? 뭐가 떨어져 나가야 돼요? 히브리적 사고방식이 어떻게 돼요? 떨어져 나가죠. 왜? 히브리 사고방식은 어디에 있던 사고방식인데? 애굽적인 사고방식. 그게 광야 40년이었습니다. 광야 40년이에요. 구원은 받은 채로 당하기는 굉장히 심하게 당하지요. 그렇다고 구원 안 받은 게 아니고, 구원은 받았는데 구원 받았기 때문에 심하게 당하는 겁니다. 뭘 바꿔야 돼? 아까 주체가 바뀌어야 된다고 했지요. 내가 아는 방식으로 약속의 땅이 아님을, 주님이 주체가 되는 방식으로 해야 되겠죠. 그러면 주님이 주체가 되는 방식 같으면 믿음이라는 것은 뭡니까? 주님이 주체라면 어떤 식으로 했겠냐에 대해서, 거기에 대해서 신뢰가 가야 되겠죠? 그러면 신뢰가 가려면, 뭘로 바꿔치기 해야 돼요? 내가 갖고 있는 것은 바깥으로 토해져 나와야 되고, 그 빈자리에 뭐가 들어가야 돼? 주님이 하신 방식이 들어와야 되잖아요. 그러면 내놓는 방식이 뭐냐 하면, 그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인생을 몰고 가지 않아요. 물이 없지요, 양식이 없지요, 자연적으로 뭐가 나옵니까? 원망의 이름으로 튀어 나오지요. 그 나오는 원망을 주께서 하나도 버리지 않고, 다 토닥토닥 다 주워 모아서, 딱 주워 모아서 그걸 근거로 주님께서는 은혜를 주십니다. 그게 은혜인데 밑에 뜯어보면 뭐가 들어가 있어요? 우리가 이렇게 원망했다가 들어있어요. 그것을 지명 이름으로 아예 박아버려요. ‘맛사’ 이렇게. 싸우다. 다투다. ‘므리바’ 이렇게 딱 그것을 지명을 해서, 너희들이 이렇게 못된 인간인데도 불구하고, 계약서에 있는 주님의 언약에 의해서 이렇게 구원 받았다는 거예요. 그래서 했던 계약의 내용이 뭐냐? 그것은 바로 십계명을 줍니다. 십계명 주는데, 십계명이 어떻게 돼요? 깨져버리지요. 그것이 깨졌거든요. 그 다음에 갈 때는 십계명도 주고 또 뭐도 주느냐 하면은, 십계명 깨졌기 때문에 깨질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 때문에, 십계명대로 못살기 분명하기 때문에, 거기에서 맞추어서 뭘 주느냐? 제사법을 세팅해서 줍니다. 제사법을. 제사법을 주게 되면, 그전까지는 제사법에는 번제 밖에 없었는데, 그때부터 화목제 등장하지요. 율법이 더 추가되면서 그다음부터는 그 율법에 위배 했을 때에 등장하는 제사법. 속죄제 나오지요. 속건제 나오지요. 번제, 화목제 사이를 쫙 갈라지게 하고, 그 사이에 속죄제, 속건제를 집어넣습니다. 순서는 속죄제부터 먼저, 속건제 드리고, 그다음에 번제 드리고, 화목제 드리고, 그렇게 드리고, 제사가. 그러니 이건 결국 뭡니까? 율법이 늘어났다는 말은 그만큼 너희들이 정확하게 이정도로 악하다는 것을, 내가 더 파내고 또 파냈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계속 보여주는 거예요.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계속 보여주는 것은 뭡니까? 너희들이 어떤 자들이었다는 것을 네가 모른다는 거예요. 네가 얼마나 구원과 상관없는 마귀 자식인 것을, 네가 지금 모르고 있다는 거예요. “네가!” 그러면 계속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는 상황을 주시는데, 그 상황이 올 때마다 아직도 끄집어 내지 않는, 이 애굽 살던 사고방식, 히브리적 사고방식을 어떻게 합니까? 또 방식을 또 동원하겠죠? 또 동원하겠죠. “뭐, 홍해 건너왔는데 뭐, 이제 구원 받았는데 뭐” 이렇게 되거든요. 홍해 건너왔는데, 그 다음에 요단강이 있다는 정보는 사전에 누구한테 준적이 없습니다. 누구한테 준적이 있습니까? 홍해 건너와서 들어가면 된다고 생각하지, 세상에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이게 갑자기, 개울가 같은 요단강이 하필이면, 홍수가 넘쳐서 의도적으로 “들어오지 마!” 막는 것 같아. 다시 한 번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는 죽었으니까, 모세는 죽어도 남는 게 있어요. ‘모세 언약’이었습니다. 그동안 모세가 인도한 게 아니고, 배후에 모세 언약이 인도했어요. 이걸 가지고 뭐라 하느냐? 수렴청정이라 해. 이게 성도의 사명입니다. 이걸로 하면 아바타. 아바타. 최순실의 아바타. 아바타. 껍데기만 인간이지, 속에는 다른 분이 들어가서 기계처럼 이렇게 조종 하는 거. 모세를 그동안 언약이 조종해 왔어요. 모세 언약이라는 그 피, 제사가 모세를 앞장세워서 모세로부터 무엇을 수납하고? 죄를 수납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뭘 하고? 죄 씻음을 제공해서, 모세 언약이 그 당시에 중보자 역할을 하도록 그렇게 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죽었잖아요. 죽었으니까, 이제 사람은 누구를 의지해야 돼요? 여호수아일까요? 아니면 모세 언약일까요? 여호수아면 안 됩니다. 모세 언약을 의지해야 돼요. 여호수아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역시 아바타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모세 언약대로 모세에게 약속한대로 들어가는 것이지. 여호수아가 나선다고 될 문제 아닙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정복하기 전에, 딱 칼 들고 나서니까 “신발 벗어라.” 그거 모세에게 있었던 똑같은 일이잖아요. “누구십니까?” “나는 이 땅의 군대장관이다.” 그럼 군대장관이 어디서 나왔어? 어디서 톡 튀어나왔습니까? 어디서 출연하신 분이에요? 약속의 땅에서 왔죠. 그럼 약속의 땅은 누가 선점했어요? 이미 하나님의 이름이, 천사들이 약속의 땅을 이미 선점 한 거예요. 그걸 본 사람은 갈렙과 여호수아는 봤고, 나머지 본 사람은 “아이고, 죽었다.” 이러고 있고, 옛날 나머지 산 사람은 애굽 사고방식 그대로 있고, 애굽 사고방식이 뭡니까? 그냥 눈에 보이는 대로 그냥 힘 있으면 되고, 힘없으면 지고 이거잖아요. 그런데 여호수아는 뭡니까? 계약서에는 그렇게 안 되었다. 계약서에는. 계약서에서는 무조건 이 땅은 주님께서 주게 되어 있는데, 왜냐하면 이 땅이 하나님 보시기에 죄를 저질러서 이 열족이 하나님께서 이 족속을 변변치 않은 우리를 가지고 정복하기를 지금 사용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런데 내 인생 따로 있고, 내 인생을 조종하는 주님 따로 있고, 그래, 주님과 우리 사이에는 주님은 의인이고, 나는 무엇이고? 맨날 뭘 해도 죄만 짓고, 뭘 하면 탐심이고, 뭘 하게 되면 죄고 그래요. 교회도 이렇게 텅텅 비면 “아, 오늘 좀 참석하지, 모처럼 귀한 거 준비했는데, 참석해주지” 이게 뭡니까? 보내고 안보내고 누구 소관이에요? 내 소관 아니거든요. 그런데 목사가 그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거예요. “오늘은 왜 앞줄은 텅텅 비었느냐?” 그래서 갑자기 안 보이는 교인이 또 몇 명, 새로 뒤에 앉아 있으면, 갑자기 열 내서 하게 되면, 저 멀리 있는 딸이 “아빠, 오늘 또 새 위원 나왔나?” 그런 건 아닌데, 뭐라고 하면, 또 톤이 높냐? 또 설교하다가 톤 맞춰야 되고, 마이크가 낮춰야 되는데 도저히 이거는 하다보면, 또 높아지고, 또 뭘 했길래 마이크 안 들린다 해서, 앞에다 대고, 아이고 주문이 너무 많아. 이 주제가 흐트러져 버릴 정도로, 정신 바짝 차리자! 하는 것으로, 그렇게 많은 것을 느끼잖아요, 그런데 이것 자체도 사실은 이렇게 한다고 구원 안 될 사람이 구원되고, 구원 될 사람이 구원 안 되고 그런 게 없거든요. 산다는 자체가 전부다 욕심입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다 했잖아요. 그러니까 욕심대로 살아야죠. 그래야 장성한 사망을 낳으니깐, 어차피 사망대로 하려면 본때를 보여야 되지 않습니까? 이것은 욕심이고, 아니고 그런 걸 어떻게 욕심쟁이인 내가, 그것을 어떻게 건방지게 판정해요? 다 욕심인데. 여호수아에서 모세 언약대로 하고, 그러면 여호수아는 뭘 하느냐 하면은, 민수기에 보면 전쟁하는데 웃기지도 않아. 이미 전쟁하기 전에 지도를 내놔요. 다음 지도 펴놓고, 전쟁하기도 전에, “저, 갓 지파는 이거, 르우벤 지파는 에덴 동쪽, 요단강 동쪽 이거 주고, 아셀지파 저리 가고, 유다지파 이거 하고.” 뭐 이건,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식이죠. 그런데 목사들도 또 그것을 이용해요. 예배당 짓지도 않았는데 벌써 지어놓고, 1층은 뭐하고 2층은 뭐하고 “돈 내세요. 돈 내면 장로 시켜줄게. 돈 내세요.” 그게 믿음입니까? 아까 믿음의 내용이 뭐가 포함 된다? 믿음의 내용은 뭐가 포함돼야 된다? 네? ‘예수님의 공생애’라고 했지요. 공생애는 뭘 보여줘요? 표적이죠? 표적은 뭐다? 우리의 눈이 감기고, 우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내용이 믿음의 내용이죠. 그래서 나 구원 받는데 내가 어떤 일도 기여한바가 없다가 나와야 되겠죠? 그렇게 하면서 교회 짓는 거면 내가 아무 소리 안할게. “여러분, 이게 바로 죄입니다. 예배당 짓겠다는 게 죄입니다. 그러니까 죄 지읍시다!” 이래서, 그렇게 교회 짓는 사람이 있는가 모르겠어. “빨리 헌금 하는 죄를 지으세요!” 헌금 요청하는, 그래서 돈이 모일까요? 네? “이거하면 여러분은 30배 갚아줍니다!” 이렇게 해야지. “빨리 돈 내는 죄를 지으세요!” 이래가지고 “이야, 우리 죄의 전당 짓자!” 이래서 예배당 짓는 사람. 내가 해볼까? 사람은요.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반드시 선악 체계가 죽을 때까지 있기 때문에, 뭔가 남이 칭찬해주고 뿌듯한 일을 하면, 그것이 나의 의로서, 옆에 딱 장착이 돼요. 안 그러고 싶어도 장착이 된다니까 “아! 나 왜 이렇게 착한지 모르겠어, 미치겠어, 요새. 나같이 착한 사람 또 있는지 몰라. 너무 착해서 바보 같아.” 이런 식으로, 상견례 하면서 “요새 시대도 그런데 너무 많이 하지 마시고, 적당선에서 혼수 적게 하고 이렇게 합시다.” 혹시 그런 이야기 안했어요? 그런 이야기 했어요? 혼수 안하기로 했어요? 안하기로 하고 난 뒤에 얼마나 뿌듯한가요? 자랑스럽고 그런 거 없었어요? 워낙 믿음이 좋으니 뭐, 사람이 누구 하나 교회 데려오고 뭐 하게 되면, 오늘도 참, 복 받을 짓을 했다는 생각 들겠어요? 안 들겠어요? 들지요? 그게 바로 자기 의 아닙니까? 그것 때문에 아직 우리가 안 죽고 살아 있는 거예요. 그것 때문에 우리가 죄인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것은 평생가도 못 고칩니다. 평생가도 못 고쳐요. 사람이, 성도는 오직 예수님의 피로만 구원 받아요. 자, 그 다음에 빛이라 했지요. 소속이라, 소속. 빛의, 이게 요한 일서 할 때 많이 했기에 넘어 갑시다. 자, 마지막으로 44절 봅시다. 아니다. 43절, 큰일 날 뻔했다. 42절, 43절 봅시다.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회를 당할까 두려워 함이라” (요12:42) 이게 믿음일까요? 믿음 아닐까요? 이게 믿음일까요? 요한복음에서 십자가 이전에 믿는다. 믿는다 이야기 많이 나와요. 그러나 그 믿음을, 믿음 아니라고는 할 수는 없어요, 뭘 보느냐 하면은, 믿음의 실체를 보여주기 위해서 깔아놓은, 일어나야 될 하나의 현상이다. 그게 이것도 하나의 표적으로 보시면 돼요. 예를 들어서, 모세 엘리야가 변화산에 나타났잖아요. 그게 예수님 믿는 겁니까? 할 때에 온전한 믿음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어떤 선지자도 천국에선 어린아이보다 못하기 때문에, 온전한 건 아니지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는 순간 그들도 갑자기 온전해져 버리거든. “아, 저 십자가 피가 우리를 구원했구나.” 엘리야 모세가 받아주잖아요. 그래, 이 사람들은 이제는 예수님과 엮었다고 보면 돼요. 뭐, 성령 오고 난 뒤에 믿음이 아니고, 엮었으니까, 마치 12제자도 마찬가지로 엮었으니까 이들은 앞으로 주께서 어떤 일의 조치에서 그 효과를 부여 받을 대상자가 되는 겁니다. 따라서 이들은, 그들이 아무리 베드로도 마찬가지지만, 그들이 예수님을 노골적으로 공개적으로 신약처럼 이렇게 믿는다는 소리 못해요. 신약도 마찬가지지만, 믿는 소리를 못하고 주절주절하고 벌벌 떠는 이유가, 이게 그 믿음이 부족한 게 아니고, 믿음의 내용이 아직 완성이 안됐어요. 완성이 안됐어요. 따라서 어떤 사람과 차별화 시키는 방식으로 그들은 믿는 사람은 많되. 많다고 해서 몇 되겠어요? 많되, 그들은 총회가 무서워서, 그래서 이 믿음은 십자가 이전의 있던 한시적인 믿음이라고 보면 돼요. 세상 권력이 앞에 쪽을 못서는, 그 앞에 벌벌 떠는 그런 믿음. 그러면 그것을 이기는 믿음은 어떤 믿음인가? 그걸 이기는 믿음은 스데반 집사가 받았던 믿음이지요. “죽여라~” 웃으면서 죽고, 기뻐하면서 죽을 수 있는 것. 그 스데반 집사님의 믿음은, 절대로 스데반 집사님의 믿음이 아니에요. 그것은 뭐냐? 성령의, 예수님의 믿음이지. 스데반 집사의 믿음이 아니에요. 그래서 스데반 집사처럼 믿음이 되려고, 자기도 순교하고 돌 맞고 하면 안돼요. “때려다오! 때려다오!” 이러면 안 됩니다. 기능이 달라요. 기능이. 그냥 집에서 TV보고 놀다 죽어도, 그게 스데반 집사 못지않은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그 속에 “너는 TV 보다가 죽어라. TV 보다가 깜짝 놀라고 죽어라.” 이런 거. 그게 그 기능이라면, 그 기능을 충분히 감수해야 되고, 어떤 사람은 “머리 해주세요. 김태희처럼 머리 해주세요.” 머리 하다가 죽을 수도 있어요. 그게 순교지요 뭐. 어떤, 기타 치다가 가는 사람도 있고, 뉴욕 모자 쓰고 죽을 수 있고. 성령 받았으면, 보편적인, 보편. 모든 사람이 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되서, 손가락이 발가락 따라갈 필요 없고, 눈이 발이 될 필요 없잖아요. 무엇을 보여주느냐? “이 구원에 대해서는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습니다.” 그걸 보여주는 겁니다. 그전에 우리는 뭘 해야 되느냐? 우리는 권력에 꼼짝 못하고 벌벌 떠는, 이런 경험도 주께서 일부로 우리한테 시킵니다. “그때 주님한테 고백해야 되는데, 내가 절에 갑니다. 내가 손들고 왜 바보같이, 왜 절에 간다고 했을까? 성철 스님 잘 압니다. 왜 그런 소리 했을까? 왜 바보같이” 주께서 그런 거 안 묻습니다. “그때 왜 예수님의 성화를 밟고 밟으라 해서, 북한의 김일성 앞에서 왜 밟으라 해서, 그것도 난 세 번씩이나 밟았다니까. 살려고” 예수님을 밟으라 해서 밟든, 성화를 밟든, 십자가를 부러뜨리든지, 십자가를 발로 부러뜨리던지, 이렇게 해도, 구원 받는 데는 아무 상관없습니다. 오직 십자가를 날마다 섬기는 사람이 지옥 갈 가능성이 있어요.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계약서 속에 우리가 끼어들 자리가 없는데, 따라서 주님만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모든 사람의 눈을 멀게 했는데, 우리는 자칭 똑똑하고 믿음이 좋아서, 내 결심에서 내 덕으로 구원 받는 것처럼, 매일 같은 착각이 우리를 괴롭힙니다. 이제는 그 괴롭힘에 그만 시달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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