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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고린도전서 15:45-49 /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5:45-49 /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

정인순 2016. 6. 19. 18:06

 

 

이근호

 

음성 동영상 Youtube

 

고린도전서 15:45-49       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

 

‘첫 째’는 ‘둘 째’와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과 대비됩니다. 즉 ‘마지막’을 설명하기 위해 첫 발걸음을 뗐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을 제외 하고는 모든 전의 것들이 다 ‘첫 번째’에 해당됩니다. 왜냐하면 그 어떤 위치에 있던지 ‘마지막’을 그리워해야 할 처지에 있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이 없다면 첫 번 것도 없습니다. 모든 의미는 마지막에서 투입되어야 비로소 생겨납니다. 마지막과의 연결고리가 모든 첫 번째의 의미를 살려냅니다.

 

그런데 인간사에 있어 자기 자신을 시작점으로 하고 자기 자신을 마지막점으로 간주하면서 자체적 의미 생산에 몰두합니다. 즉 “나는 내가 여기 있음으로 그것이 의미의 전체다. 나는 나로 인하여 살고, 나는 나로 인하여 내가 죽는다. 내가 있을 때만 모든 것이 비로소 의미 있는 있음이 되고,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도 나와 더불어 사라진다. 하나님도 내가 여기 살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나를 배신하는 신은 신도 아니다”는 식으로 삽니다. 이는 본인이 그렇게 인식하든 아니하든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런 본성은 살아보면서 구체화될 뿐입니다.

 

사도의 복음과 부활 소식이 계속해서 인간 세계에서 거부당하고 무시당하는 것도 다 이런 이유입니다. 그들이 곧 시작점이고 그들이 곧 마지막점이라는 인식으로 단단히 무장된 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이들이 말하는 신앙생활, 종교생활이라는 것은 자신에게 있어 자신이 마지막인 존재임을 확인하는 작업에서 신이 얼마나 자신에게 협조해 줄 수 있는 지를 놓고 조율 중입니다.

 

이런 인간 세상에서 진정한 마지막이신 분이 방문했습니다. 이로서 인간들의 타고난 본성을 유감없이 그분을 내쳤습니다. 지금도 이 예수님의 소식은 복음 전달 현상을 통해서 내침을 당하고 있습니다. 거짓을 폭로하는 힘, 이것이 진정한 복음입니다. 이 세상이 실정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활발한 현재적 활동의 결과물로 계속 등장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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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사람과 마지막 사람

2016년 6월 26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5:45-49

(15:45) 기록된 바 첫 사람 아담은 산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15:46)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15:47)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15:48) 무릇 흙에 속한 자는 저 흙에 속한 자들과 같고 무릇 하늘에 속한 자는 저 하늘에 속한 자들과 같으니

(15:49) 우리가 흙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은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

지금 이대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라 바뀌어져야지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라는 겁니다. 이 ‘달라짐’을 유발하는 주도권은 달라져야 하는 인간에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살려 주는 영’이 따로 있습니다. 인간과 협조하거나 협력 체계가 성사되는 게 아닙니다. 일방적인 조치가 취해집니다.

이는 곧 ‘흙에서 산 영’이 된 인간에게는 자기를 자기가 스스로 살려내는 능력이 없음을 전제로 하는 겁니다. 이는 천국이란 인간의 기대와 바람으로 만들어진 나라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천국은 사람 좋으라고 사람들이 구상한 나라가 아닙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용도의 나라도 아닙니다.

하나님 좋으라고 일방적으로 만든 나라가 천국입니다. 따라서 천국에 들어가려면 점검 과정을 밟아야 합니다. 일종의 필터같은 작용자가 등장해서 이 여과작용을 통과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입성할 수가 없습니다. 그 필터로 오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과 합치된 마음이 아니면 천국은 못들어갑니다.

그런데 사람들보고 ‘바꾸라’라고 한다면 사람들은 자신의 현재 형편과 바꾸어진 형편을 미리 예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자신이 가능성에 입각한 연결 노선을 깔게 됩니다. 즉 “나는 이렇게 행동하면 목표점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의 상상은 현재 불만을 재료로 해서 나타나게 됩니다.

즉 일방적인 개인적인 열망에 미흡함이 있어 그것을 마저 채우기 위해 신을 찾게 마련입니다. 이것은 ‘변하는 것’도 아니요 ‘달라진 것’도 아니요 ‘바꾸어진 것’도 아닙니다. 미리 예상한 그 안에서만 왕복운동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상상력 안에서 말입니다. 진정 달라지기 위해서는 낯선 분의 개입이 있어야 합니다.

즉 ‘예수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예수님과 더불어 있어야 하는 겁니다. 내 쪽에서 예수님 쪽으로 다가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나 있는 곳까지 오셔서 접수하셔야 합니다. ‘살려내신다는 것’은 살려냄을 당하는 그 대상자가 계속 ‘산 영’으로서의 위상과 한계와 문제점을 계속해서 발휘하는 기능이 한참이어야 합니다.

‘산 영’으로서 인간은 흙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평생 발산합니다. 무슨 이유로, 무엇 때문에 ‘산 영’이 무기물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은 예수님의 방문으로 그 진실이 나타나게 됩니다. 이사야 6:9-10에 보면,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말씀을 주시는 겁니다. 이는 곧 인간들이 평소에 자신을 ‘산 영’으로서 그 정체성을 꾸준히 유지하고 사수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얼마나 비-복음적 요소을 뿜어내는지를 살피보시는 겁니다. 굿하는 것이 대표적인 겁니다. 길흉화복을 인위적으로 조작하기 위해 굿판을 벌리게 됩니다.

지정된 장소인 사당에서, 흥분된 자, 곧 샤먼(무당l이 앞장 서서 벌리는 종교적 축제는 지독한 자기 사랑의 발로입니다. 즉 안 망해겠다는 것입니다. 실패하지 않아야겠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도는 바로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조치하심은 늘 일관됩니다.

요한복음 6:65에 보면,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하나님 자신에게로 이끌지 아니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에게로 이끄시는 이유는,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곧 신은 가짜이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은 ‘나타나 분’이요, ‘사람들에게 죽음을 당한 분’이십니다. 이는 곧 이 세상에서 이질적으로 차이나는 다른 두 개의 ‘현실 구성’이 마련됨을 뜻합니다. 하나의 현실 구성은, 기존이 이미 있는 그 동질성을 줄곧 영원까지 이어보겠다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면 창세기 25:32-34에 나오는 에서가 그런 인물입니다. “에서가 가로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 야곱이 가로되 오늘 내게 맹세하라 에서가 맹세하고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판지라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서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경홀히 여김이었더라”

에서는 생각했습니다. 설마 장자의 위상이 팥죽 한 그릇으로 변동되리라고 짐작도 못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어떤 바꿈을 감안합니다. 장자 아닌 자가 장자되는 작업을 시도하게 됩니다. 야곱은 장자의 명분을 중요시했습니다. 이는 그가 ‘장자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는 움켜짐(붙잡음)과 거짓말과 빼앗음의 본성을 보여주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이 이름이 ‘이스라엘’로 바뀝니다.(창 32:35) 이 과정에서 그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죽음을 거치게 됩니다. 하나는 창세기 27:41에 나오는 형 에서로부터 오는 죽음입니다. 장자의 명분과 관련된 ‘하나님의 축복내림’으로서 유발된 죽음입니다. 또 다른 죽음은 창세기 32:30에 나오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유발된 죽음입니다.

“ 그러므로 야곱이 그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즉 자기는 늘 산 사람이 아니라 진짜 하나님으로부터 의 죽음을 통해 변화된 자임을 나타낼 자로서 자아입니다. 이를 통해서 ‘살려내시는 분’의 현존을 말해줍니다.

인간의 모든 시대는 다 ‘마지막’과 관련된 현재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실패하고, 죽기 위해서 이 세상에 나타난 겁니다. 에서처럼 자신의 것을 쥘려고 해서는 아니되고 야곱처럼 변화의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마지막 때를 보내는 성도는 자신의 존재성이 옅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비해서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희석되어 가는 중임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만 주시고 나머지는 다 빼앗습니다. 이런 마음이 바로 천국의 필터를 통과하는 마음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실패에서 오는 가벼움이 있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