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ice
Recent Posts
Recent Comments
Link
«   2025/04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Tags
more
Archives
Today
Total
관리 메뉴

복음과 믿음

출애굽기 34장 25절 / 죽음의 기호화 / 150904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출애굽기

출애굽기 34장 25절 / 죽음의 기호화 / 150904

정인순 2015. 9. 5. 16:24

 

 

이근호

 

음성1                   음성2

 

동영상1                동영상2 

 

녹취:한윤범

 

20150904a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죽음의 기호화

(강의:이근호 목사)

 

 

시작하겠습니다.

 

출애굽기 34장 25절부터 보겠습니다. “너는 내 희생의 피를 유교병과 함께 드리지 말며 유월절 희생을 아침까지 두지 말지며 너의 토지소산의 처음 익은 것을 가져다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전에 드릴지며 너는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지니라”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는 취지는 딱 이겁니다. 현재 돌아가는 세상이 너희들 세상이 아니라는 거죠. 인간들 세계 같으면 인간들이 행하고 익히 아는 것들만 막 쑤셔넣으면 돼요. 민주주의제도, 군대, 학교교육도 그렇고 내무부, 외무부, 문공부, 전부 인간들이 만들어낸 거잖아요. 상공부, 공장 세우고, 농사짓고. 농토 개간하고 학교 세우고 군대 만들면 천국 됩니까? 그건 하나님 나라 아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성경을 보는 이유가 현재 인간들이 만든 내 나라 만들기 위해서 성경이 있다는 애초에 그런 마음을 접어야 됩니다. 지금 살고 있는 내 나라, 아 대한민국, 내 나라, 내 겨레, 홀로 대한, 독도는 우리 땅, 영원하라 울산아. 그런 것 위해서 성경이 있는 게 아니거든요.

 

성경을 본다는 자체가 뭘 의미하느냐 하면, 현재 울산바닥 말고, 대한민국 말고 다른 나라에 살고 싶다는 마음으로 성경을 보셔야 돼요. 이 나라 말고, 가족끼리 살기 좋은 이 나라 말고, 국민소득이 몇 만 불인지 따지는 그 세계 말고 전혀 인간들이 꾸며낼 수 없는, 조성할 수 없는, 인간들이 수입할 수 없는 다른 나라 살고 싶다는 마음이 돼야 됩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 갖는다고 그 나라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사실은.

 

미리 결론부터 말씀드릴게요. 오늘 강의가 무지무지 어려워요. 여기 본문에 나오는 이 말씀, “너는 염소의 새끼를 어미젖으로 삶지 말라” 이 대목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누가 해석했습니까? 아무도 해석 못해요. 주석 보세요. 심지어 여기에 대한 책도 나와요. 전혀 안 맞아요. 오늘 본문이 짧지만 무지하게 난해합니다.

 

말씀이 난해한데는 분명히 이유가 있어요. 내가 잘 되기 위해서 말씀이 있다는 그 생각 자체가 말씀을 해석하는데 장해가 돼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주님이 좋으신 대로 그 나라 만들어 가세요. 이러면 말씀이 어렵지 않아요. 주님, 저 같은 것 신경 쓰지 마시고 주님이 만들고 싶은 대로 만드세요, 라고 하면 오늘 본문뿐만 아니고 성경 전체가 쉽습니다. 꼭 나를 개입시키니까 성경이 오해가 되는 겁니다. 저는요? 저는 어디 가야 되는데요? 저는 어떻게 되는데요? 이렇게 나오면 성경해석 처음부터 잘못됐어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하나님 나라는 ‘율법의 나라’거든요. 제가 아까 강의 처음 시작할 때 뭐라고 했습니까? 현재 인간의 나라는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요소로 가득 차 있다고 했지요. 국방부, 외무부, 상공부 있는 것철. 인간들이 할 수 있는 농토 개간하고, 바다 배 띄워 무역하고, 얘들 교육 시키고 어린이집하고, 이게 인간들이 할 수 있는 총집합이잖아요.

 

그런데 주여, 이 나라 살기 싫어요. 인간들이 조성한 이 나라 말고 다른 나라가 있을 건데 그 나라가 어떤 나라에요? 인간의 세계를 버리고 다른 나라가 옳은 나라라는 인식을 가져야만 오늘 본문이 해석이 됩니다. 그 나라는 제가 소개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율법의 나라에요. 인간들이 행할 수 있는 것의 총집합이 아니고 그 나라는 율법이 총집합이 되어 조성한 나라가 바로 성경에서 출애굽기에서 소개한 나라입니다.

 

따라서 출애굽기 34장 25절 내용이 뭡니까? 결국 율법에 관한 이야기, 하나님의 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이 법은 인간들과 사전에 조율이나 협의가 된 내용이겠어요? 협의가 되지 않지요. 협의가 되지 않은 내용이라면 인간이 이 율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없겠습니까?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왜 율법을 인간이 못 지키느냐 하면, 이미 인간이 율법 주기 전에 인간에게는 행함이 있었고 그 행함의 총집합이 인간의 나리거든요.

 

아주 쉽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율법이 없는 나라가 출애굽기에 나와요. 그게 애굽입니다. 그리고 애굽 외에 다른 나라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른 나라가 없기 때문에. 그런데 애굽에서 한 나라가 삐져나와요. 밀가루 반죽을 만들었는데 뚝 뗐을 때 혹처럼 늘어나서 떨어진 것, 반죽이 하나인데 중간에 잡아당깁니다. 이것 하나 생기고, 이것 하나 생기고. 밀가루 반죽을 하나님께서 잡아당기니까 혹처럼 떨어지면서 A와 B 두 개의 상응한 나라가 생겼어요. 이게 순서인데 밑에 순서를 더하게 되면, A란 나라와 B란 나라 사이에 전쟁이 있었더라. 전쟁의 나라에요.

 

그러면 화살표로 이렇게 되는 과정을 촬영된 필름을 거꾸로 돌려봅시다. 처음부터 애굽 안에 점선으로 무언가 들어있어요. 들어있는 이것을 잠재성 또는 잠재적 나라라고 봅시다. 이걸 눈치 챈 사람이 있었습니까? 아무도 없었어요. 모세도 몰랐지요. 히브리인들도 몰랐고. 애굽 사람들이야 이 나라가 전부니까.

 

정리해봅시다. 인간 나라의 특징은 율법이 없는 거예요. 그러면 인간 나라에 율법을 준 취지가 뭐냐? 잘 먹고 잘 살아라. 하나가 되어 살아라. 이게 율법을 준 취지입니까? 아니지요. 떼어내라. 혹처럼 떨어져라. 이별해라. 이별은 만남보다 참 쉬운 것 같아요. 떨어져 나오는 거예요. 떼어내는 거예요.

 

이게 떨어져나갈 때 제가 이야기한 주장에 의하면 율법이 개입되어야 나온다 했지요. 그러면 율법이 개입되지 않으면 떨어져나올 수 없을뿐더러 더구나 떨어져야 될 이유를 느끼지 못합니다. 이 땅에서 살면서 너무 고생했으니까 죽어서 좋은 곳에 가야지. 그런 것은 애굽 나라의 이시스 종교에 다 들어있어요. 이시스 종교가 부활의 종교입니다. 죽어서 이 세상 말고 다른 세계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중보자가 바로 바로 왕이 되는 거예요. 바로 왕이 신의 아들로서 현재 애굽을 통치할 뿐만 아니고 애굽에 있는 자기 백성을 죽어서도 부활의 세계에 넣어줄 수 있는 제사장 노릇을 하는 두 가지 역할을 다하는 것이 바로 왕입니다.

 

그러니 애굽 사람만 아니라 히브리 사람도 마찬가지지만, 고생 많은 세상 얼른 떠나서 천국 가고 싶어요. 그런 상품은 다 개발돼있습니다. 개발할 때 중보자 노릇하는 것 다 있습니다. 이 땅에서 죽어서 좋은데 가는 방법까지 개발돼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업보입니다. 착하게 살면 좋은 나라, 나쁜 짓하면 나쁜 나라 가게 돼요. 선을 쌓으면 좋은 나라 가고 악한 일을 많이 쌓으면 나쁜 나라 가게 되는 겁니다. 이미 누구 하나 거기에 대해서 이의 거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온 국민이 하나 같이 단결돼있어요. 왜? 다 선악과 따먹었기 때문에 선하면 천국에 가깝고 악하면 지옥에 가깝다는 것, 이것은 상식에 반하지 않는 정말 우리의 기본적인 본성에 합치가 되는 훌륭한 종교가 되죠. 그런 종교가 있는데 뭐 때문에 이미 부활로 가는 길이 있는데 뭘 가겠어요.

 

그러면 중보자가 하는 일은 뭐냐? 선악에 대해서 나름대로 법을 명령을 내려줘요. 너희들 선한 게 뭔지 모르지. 내가 왕이니까 내가 중보자, 신의 아들이니까 내가 너희에게 법을 줄 테니까 이 법들을 지키게 되면 너희들은 선한 쪽에 속하고 그렇게 되면 구원받는다는 겁니다.

 

애굽의 종교와 정치, 성속이 하나가 돼요. 정치, 종교가 하나가 되니까 이런 모습이 왠지 낯설지 않잖아요. 오늘날 교회가 바로 그거잖아요. “목사님, 우리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습니까?” 다들 교회 나올 때 그렇게 묻지요. 그러니까 물음 자체가 수상하고 엉터리인 거예요. “목사님, 우린 천국 못 가는데요? 왜 우린 쫓겨났습니까?” 이렇게 물어야 돼요. 쫓겨난 것은 일언반구 말하는 사람이 없어요. 나 같은 사람이 쫓겨난 것은 하나님의 행정적 착오나 실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죠.

 

그래서 이 땅에서 쫓겨난 것을 하나님의 실수로 간주하기 위해서는 눈물 나는 아주 허접스럽고 정말 불쌍한 표정을 지어야 돼요. 믿습니다. 부족합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고생고생하는 것에 대해서 주께서 미안한 감을 갖도록. 불쌍히 여길 수 있는 여지를 이 땅에 살면서 많이 유발시키는 겁니다. 이걸 사람들은 흔히 교회에서 순교, 고난, 희생, 봉사라는 말로 위장해요.

 

그러나 질문을 그렇게 하면 안 돼요. 이 정도 불쌍하면 구원받겠습니까? 이걸 개콘 용어로 하면 이케요? 이렇게 할까요, 그런 뜻이지요. 이것보다 더 내려놓을까요? 내려놓음. 이것보다 더 내려놓을까요? 교회에서 주을 위해서 이 정도 재산 바치면 되겠습니까, 이 정도 미움 받고 희생하면 되겠습니까? 이케요? 그것, 처음부터 질문이 잘못됐습니다.

 

주님이여, 우리가 어디서 문제가 되어서 마땅히 천국에서 차여야 마땅한 어떤 점에서 그런 존재로 살아가야 됩니까? 그래서 주님의 추방조치가 왜 합당한지를 알게 하옵소서. 그걸 다윗은 알아요. 모친의 죄 중에서 태어났다. 내가 죄를 지은 게 아니란 것. 바로 죄 지을 수밖에 없는 존재로 출생을 죄만 짓는 존재로 출발했다는 것을 우리의 원천, 기원, 우리의 처음 자리를 다윗은 발견했습니다. 나는 사람에게 죄 짓지 않았다. 참 아무리 생각해도, 에디슨이 전기를 발명해요? 놀라운 발명이라고? 콜럼부스가 뭘 발견했다고요?

 

우리는 자신의 원천을 발견했다고 하는데 사실은 우리 측에서는 발견 정도가 아닙니다. 이건 발명입니다. 이건 창조에 해당되는 거예요. 이건 도저히 나만 생각하고 나만 사랑하는데서 남은 다 죽어라 나만 살란다, 이러한 품성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서 주여, 마땅히 우리는 지옥 가야 될 존재로 태어난 것, 너무나 당연한 조치를 행사하셨습니다. 잘 하셨다는 이런 고백은 도저히 인간의 능력이 아니고 초월적인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고백이에요. 누가 그런 고백하겠어요. 할 수 없지요.

 

그래서 출애굽기를 하면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모세와 아론을 누가 반대했어요? 바로 히브리인들, 같은 동족들이 반대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돼요. 그들은 모세와 아론의 방식이 도저히 납득이 되지 않았어요. 그리고 도대체 애굽에서 나간다는 자체가 말이 안 돼요. 살던 동네, 부동산 팔고 어디로 간단 말인가? 갈 데가 있어야지. 갈 곳이 없어요.

 

그들이 요구했던 것은 어디로 나가는 게 아니에요. 그냥 울산바닥에서 잘 먹고 잘 살고 행복하기를 원했을 뿐이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부르짖었지 여기 말고 다른 데 갑시다. 이건 인간에게는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에요. 모세도 마찬가지에요. 모세가 왜 혁명을 일으키고 왜 애굽 사람을 쳐 죽였는데요? 탈출하기 위해서? 어림도 없는 소리죠. 내 나라, 내 민족 우리가 지키겠다는, 안중근 의사, 윤봉길 의사라니까. 의사가 왜 그리 많은지. 안창호라니까요.

 

그랬던 모세가 난데없는 율법을 받아요. 이것은 정말 아주 낯선 거예요. 정말 너무 낯설어서 무서운 것 있잖아요. 너무 이질적이어서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뭐 이런 게 다 있어. 그게 율법의 나라입니다. 뭔가 공통점이 있어야 되는데 그래서 내가 평소에 저것 원했어. 이제 믿고자 합니다. 믿을 내용이 전혀 없어요. 왜냐하면 내가 누굴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이익을 포기할 수가 없어요. 저걸 얻게 되면 나한테 이익이 온다는 마지막으로 환원된다는 걸 계산하고 타산을 맞추어서 내가 믿을래요, 라는 말을 한다는 것. 나한테는 손해가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래서 믿는 거예요. 그 믿음은 바로 애굽 사회, 인간이 만든 세계에서 통용되는 믿음이에요. 가짜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의 나라, 모세를 통해서 비로소 외부에서, 외부란 말도 되고 사실은 외계지요. 외계에서 투입된 것은 모세 본인도 안 믿었습니다. 모세도 못 믿어요. 나이 팔십에 그냥 살랍니다, 이렇게 나오지 뭘 해요. 누가 뭘 보낸 거예요. 서장훈이 광고한 스카이라이프라는 게 있지요. 하늘에 몽땅 다 있느니라. 푹 쑤시는 게 있거든요. 허연 도포 입고 키도 오죽 큽니까? 모든지 다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은 모세를 쑤셨고 모세는 백성들을 쑤시는 거예요. 백성들은 굉장히 낯설어요. 나가자는 겁니다. 어디로, 갈 데가 있어야 나가지요. 고생한 게 여기 다 있는데.

 

차이나타운에 중국 사람들 살고 있지요. 어떤 중국 사람이 인천바닥에서 살기 고생스럽지. 우리가 나가자. 제일 먼저 묻는지 뭐겠습니까? 지금 중국 사람들이 대대로 여기서 살았는데, 히브리 사람들이 고센 땅에 살았는데 나가기는 어디로 나가는데? 모세가 말하기를 몰라. 이게 말이 됩니까? 나갈 자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야 되잖아요. 모른다는 겁니다. 일단은 나가게 하신 분이 알려주신데. 어디 있다는 것도 말도 안 하고 찾아갈 수도 없어요. 왜 찾아갈 수 없느냐 하면 나가라고 하신 분만이 안다는 겁니다.

 

마치 예수님이 하신 것과 똑같아요. 주여, 어디로 가십니까? 베드로도 도마도 물었잖아요. 나만 믿어라. 이 말은 뭐냐 하면, 네가 은근히 기대하는 것은 꿈 깨라. 너로부터 시작한 희망과 기대는 나한테는 탈락이 되고 전혀 예상치 못한 다른 노선을 갈아타야 돼요. 갈아타는 노선이 어떤 선인지는 몰라야 되고. 왜 몰라야 되는가? 알게 되면 믿는 자신을 믿게 돼요. 나는 예수 믿는다는 것을 믿게 돼요. 그러면 탈락이에요. 내가 예수 믿는 것도 놔버려야 돼요.

 

정육점에 고기 거는 S자 갈고리 있잖아요. 이것만 보면 섬뜩해. 여기에 무생물로 변해버린 소고기, 돼지고기 목살이 달려있잖아요. 이게 그리스도 S자에 우리는 목덜미 꿰어 가야 돼요. 손님이 오면, 목살 드릴까요? 하고 목살 아닌 것은 한쪽으로 밀어버리잖아요. 이걸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밀고 당기고, 당기고 밀고.

 

이 S자가 신약에서는 예수님이지만 구약에서는 율법이라고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율법이 천국 백성을 생산해냅니다. 도저히 알지 못하는 인간에다 율법을 칩으로 박아 넣어요. 그걸 임플란트라고 했는데. 가락교회에서는. 그래서 너의 뿌리는 너의 존재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그 존재를 너의 뿌리를 하나님의 율법으로 바꿔치기 해야 된다는 거예요.

 

너의 뿌리가 어미였고 아비였고 아담이 뿌리였다면 이제 너의 뿌리는 예수님이 뿌리가 되지 아니하면 아들의 나라, 천국에 못 갑니다. 천국을 상상하지 마세요. 백날 상상해봐야 내 존재의 뿌리에서 나온 망상에 불과합니다. 망상과 실제 천국의 차이는, 망상 속에는 주의 분노가 섞여지지 않아요.

 

시편 90편에 나오는데 그 대목을 제가 잠간 읽어볼게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누가 주의 노의 능력을 알며”(10,11절) 그리고 8절에 보면,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이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 두셨사오니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면 우리의 평생이 일식 간에 다하였나이다”

 

주여 분노 중에 지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주님의 분노, 화내심, 분통 터뜨림, 심판이죠. 주님의 심판은 무엇을 색출해 제거해버립니까? 우리가 주님의 분노를 모를 때 나를 주인공으로 삼아서 드라마, 소설, 천국 가서 마음놓고 식구들과 살아야지. 모든 드라마적인 요소를 주의 분노로 전부 제거해버려요. 주의 심판 가운데 없애버립니다.

 

왜 없애느냐? 그래야 에덴동산에서 추방시킨 취지가 그거거든요. 처음에 에덴동산에서 나가라. 죽으라고 쫓아낸 거예요. 흙으로 돌아가는 게 죽음이잖아요. 선악과 따먹었으니까 너는 죽어야 돼. 죽일 때 장난삼아 죽이는 게 아니고 분노 가운데 죽이거든요. 분노하라고 그 뒤에 아담 자식들 낳게 한 거예요.

 

그런데 분노 중에 왔으면 분노로 뒤집어 써야 되는데 하늘 보니 별 있고 달 있고 별 하나, 나 하나 까불고 연애나 하고 있지 주의 분노가 안 보이는 거예요. 안 보이니까 일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처럼 천국 가면 더 행복하겠지, 그지? 천국 가서 행복하게 살자. 이건 니 생각이고. 주의 분노가 없다니까. 주의 분노가 없다는 것을 시편에서는 주의 분노 가운데 지나간다고 하지만 이걸 신약 용어로 하게 되면 십자가가 없는 거예요.

 

십자가가 뭡니까? 주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그 요소가 들어가야 돼요. 그것이 율법의 완성입니다. 주님의 저주와 분노가 십자가에서 최종적으로 다 들어난단 말이죠. 그 요소가 있으면서 우리가 생각했던 모든 것은 풍선이 터지듯이 우리 천국, 낙원 터져버려야 돼요. 십자가에서.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이 맞지요. 율법을 준 것은 죄를 더 생산하기 위함이라. 죄를 더 짓게 함이라. 왜? 죄를 더 지을 때 우리는 감히 천국 간다는 말을 내뱉을 수 없는 무자격자라는 것을 우리로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죄를 더 짓자는 말은 오해가 있는데요. 사실은 죄를 더 지는 게 아니에요. 이미 죄 아래서 죄를 짓고 있었어요. 그 죄가 매일같이 어느 정도 죄인가를 율법과 사도 바울의 권면과 말씀을 통해서 늘 깨닫게 하시는 겁니다.

 

디모데후서 3장에 보면 마지막 때에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고하고 교만하고, 이렇게 돼있지요. 이게 사도 바울의 권면이죠. 이 권면이 우리한테 오게 되면 나는 잘났습니다, 떳떳하다고 할 사람 아무도 없지요.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학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전부 다 지금은 안 하지만 오년 뒤에 십년 후에 얼마든지 나올 수 이야기잖아요. 지금 이 말씀 자체가, 우리가 육을 갖고 있잖아요. 육을 향하고 쏴대는 말씀이에요. 네 육에서 나온 죄로 인하여 죽어가고 있다는 겁니다. 왜요? 내가 말씀 전할 때 잘 들어라. 이러이러한 말씀에 비취어서 너는 죄인일 수밖에 없어. 그래서 사도 바울의 권면들이 많은 거예요. 하나님이 널 사랑하니 서로 사랑하라. 술 취하지 말고 성령에 취하라. 무시로 기도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하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범사에 감사하라. 어떻게 범사에 감사합니까? 얘가 아픈데 무슨 감사가 돼요.

 

모든 것이 뭐냐 하면, 이 말씀에 합치될 수 없는 몸을 갖고 있다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 네가 아무리 성실하게 노력해도 네 행함으로 네 몸을 천국에 집어넣을 수 없는 그런 몸으로 애초부터 이 땅에 태어났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네 행함을 의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신약으로 말하면.

 

이걸 구약으로 말하면, 너는 애굽 사람이지 하늘나라 사람 아니라는 거예요. 저, 하늘나라 사람 되고 싶어요. 되고 싶다고 되는 게 아니에요. 안 되면 어떻게 합니까? 출애굽 할 때 율법을 줘요. 율법이 칩처럼 새겨진다니까요. 거리에 어묵 줄 때 젓가락 안 주고 손으로 집어먹든지 젓가락을 주지 않잖아요. 어묵을 꿰는 꼬지를 주지요. 그 꼬지가 어린양의 죽음이에요. 거기서 율법이 나온단 말이죠.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에요. 왜 우리는 어린양의 피만 의지해야 되는가? 그걸 늘 매일같이 확인시키기 위해서 추가적으로 율법이 계속 주어지는 겁니다.

 

십계명으로 율법이 끝인 줄 알아요? 아니에요. 살아가면서 새롭게 알려지는 행동을 죄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거기에 맞춘 율법들이 계속해서 추가적으로 도입되는 겁니다. 그걸 언약이라고 해요. 언약은 지키라고 준 게 아닙니다. 네가 안 되는 교체작업, 내가 한다는 겁니다. 언약 주신 분이 알아서 우리를 바꿔줘요. 언약을 알고 지켜서 우리가 힘으로 바꿔지는 게 아니에요. 우리는 언약을 알고 추가된 언약 때문에 없던 죄까지 또 지어요. 왜? 본성이 죄 짓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인간이기 때문에.

 

쉽게 말해서 “너, 애굽에 살고 있지. 힘들지. 그냥 있어. 내가 끄집어내줄게. 그냥 살아.” 그러면 그들이, “끄집어내준데. 가자.” 이렇게 합니까? 안 하지요. 어떻게 하느냐? 애굽 사람들의 히브리인들을 밀어내도록 조치해요. “에이씨, 나가.” 누가 명령했습니까? 애굽의 수장되는 바로 왕이 대표해서 너희들 나가라. 나가기 싫어요. 꺼져. 꼴 보기 싫어.

 

요새는 그런 가정 없습니다만 못된 시어머니에게서 언제 나가는지 걱정하지 마세요. 시어머니가 나가라 할 때 그때 분가하면 돼요. 꼴도 보기 싫어. 나가. 그냥 나가라고 하겠습니까? 돈 주며 나가라고 하지.

 

하나님의 율법이 바로 입을 통해서 바로 왕을 앞장 세워서 나가라고 오히려 요청할 그 때를 율법이 만들어주십니다. 그걸 잠재성. 애굽이란 나라가 인간들은 애굽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나라라고 보지만 하나님은 그렇게 보지 않고 애굽이란 나라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언약을 이 땅에 구체화시키기 위해서 잠시 등장했다가 해체돼야 될 나라로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에요.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를 하나님이 알아서 언약대로 분리시키는 건 하나님이 하실 일이죠.

 

하나님께서 분리할 때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이 주어져야 분리가 됩니다. 나중에 이스라엘이 왜 망하는지 알아요? 율법이 주어져야 분리가 되는데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약속의 땅에 오고 난 뒤에 자신들이 율법을 지켜서 이스라엘을 유지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들은 망해버린 거예요. 율법을 지켜서 그 나라 하려니까 망한 겁니다.

 

율법을 주신 분이 율법을 행세해야 되는데 주셨으니까 알아서 십계명 지키고 알아서 제사 드리겠습니다. 그들이 제사 드려서 망했어요. 그들이 제사 드린 것 때문에 누굴 핍박했는가? 새로운 율법과 약속을 언약을 소개한 선지자를 지근지근 밟았습니다. 율법이 있는데 네가 왜? 율법 잘 지키고 있는데 네가 왜?

 

어떻습니까?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과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이 어디에 몰입했습니까? 율법 대로 제사 드리기에 몰입했지요. 율법 잘 드리고 있잖아요. 그들은 모세를 아주 높였어요. 모세 율법 대로 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고 했습니까? 내가 율법 준 사람이야. 내가 안식일의 주인공이야. 네가 율법 지킨다고 안식일에 손이 상한 사람, 몸이 아픈 사람을 고친 적 있나? 결과를 봐라. 안 되지. 영생 못 주지. 그러니까 하나님은 너희들 노선이 아니라 예수님 노선이라니까요.

 

다시 이야기합니다. 율법을 준 것은 인간들의 잠재돼있는 죄가 율법을 통해서 점점 더 구체화되는 거예요. 율법을 준 취지를 율법을 지키는 인간들이 얼마나 반발하고 싫어하는지를 싫어하는 요소가 인간 내부에 이미 태어날 때부터 장착돼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출애굽하는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는 겁니다.

 

출애굽할 때 중요한 요소가 있어요. 요소를 제가 몇 가지 적어볼게요. 역시 제일 중요한 것은 뭐냐? 어린양의 죽음이죠. 어린양의 피죠. 그러면 어린양의 피를 바르면 되는가? 아니에요. 그것만 있는 게 아니고 할례를 행해야 돼요. 그 다음에 누룩이 없는 떡을 먹어야 돼요. 이게 다였습니까? 중요한 게 있어요. 이것이 밤에 이뤄진다는 거예요. 밤은 인간들의 세계가 아닙니다. 천사들의 세계에요.

 

하나님께서 애굽에 모세 보낼 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그 다음에 야곱의 하나님이죠. 야곱의 하나님이 언제 찾아왔습니까? 밤에 찾아왔어요. 밤에 찾아왔다가 언제 떠나려 했습니까? 낮이 되려고 하니까 떠나고자 했어요. 떠나고 난 뒤에 드디어 새 날이 밝았습니다. 밤에서 아침이 되는 것, 이건 창세기 1장에 보면, 저녁이 아침이 되니, 그걸 한 날이라. 이 날은 하나님의 창조의 요소가 흠뻑 담긴 날입니다. 그 날을 창세기 1장에 보기에 좋았더라고 돼있어요. 우리가 아는 스물네 시간이 보기에 좋았다는 게 아니라 창조의 요소가 담겨있으면 보기에 좋았더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면 우리의 스물네 시간은 하나님 보기에 좋았더라입니까, 싫었더라에요? 좋았더라입니다. 그게 잠재돼있기 때문에.

 

울산은 울산시민이 만들잖아요. 이건 보기 싫은 거예요. 그런데 그렇게 보기 싫더라도 잠재돼있는 것은 뭐냐? 인간들이 울산 만들도록 그 바닥에 주님께서 의도적으로 그렇게 조성한 겁니다. 율법에 준해서 율법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거예요. 이 세상에 참새가 떨어지는 것도, 들풀이 자라는 것도 어느 것 하나 주님의 허락 없이 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항상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가 맞아요.

 

그런데 성경에 보면, 좋았더라는 대목도 있지만 그들을 후회하시니라. 또는 근심하신다고 돼있지요. 이것은 뜨물 걷어내듯이 걷어내면 되는 거예요. 안에다 하나님 말씀과 언약으로 된 그 세계를 인간들이 마귀로 하여금 죄로 덮치게 허락하셔요. 그 죄 진 것에 대해서 심판이 작용해서 그걸 드러내면 되는 겁니다.

 

홍수로 다 심판하면 남는 게 뭡니까? 노아언약만 남지요. 그렇게 해서 잠복돼있는 요소를 노아한테만 알려줍니다. 그게 노아언약이에요. 이 땅은 원래부터 행함이 아니고 은혜로 유지하게 돼있단다. 너만 알아라. 그리고 은혜를 모르는 사람들은 물로써 망한다. 그걸 네가 전해라. 그래서 노아가 전했더니만 자기 식구 빼놓고 몇 명 전도했습니까? 0명, 단 한 명도 전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노아가 하늘나라 가서 책망 받았어요? 한 구찌도 못하고, 영업사원 때려치워라. 이랬습니까? 노아야 보기에 심히 좋았더라. 한 명도 전도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참 보기에 심히 좋았다.

 

그것이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담은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은혜 입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천국에 못 온다는 것, 장차오실 예수님 마음속의 모습을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노아는 방주를 만듦으로 믿음을 표했다는 대목으로 그게 나타났지요. 노아가 방주 만드는 것은 곧 주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고, 거기에 옆 집 사람 한 사람도 오지 못하고 오직 노아 제 식구만 달랑 안은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취지를 흠뻑 그 시대에 보여준 겁니다. 택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못 온다.

 

이 말 들으니까 섭섭합니까, 갑자기 홀가분해지고 심령이 가뿐해지는 느낌입니까? 갑자기 몸무게가 확 줄지요. 20킬로 줄지요. 안 와도 돼요. 모든 설교는 안 올 사람은 오지 마세요. 그런 쪽으로 설교를 해야 돼요. 열면 닫을 자 없고 닫으면 열 자 없어요. 백날 오천 명 모아야 다 탈락입니다. 쓰레기만 모은 거예요. 어디 교회가 쓰레기하치장 노릇할 일 있습니까?

 

누가 구원되고, 안 되고, 합격이란 말하지 마세요. 그건 우리 소관 아닙니다. 합격자는 주님만 아시고. 복음만 그리스도의 모습만 보여주면 돼요. 오직 아버지에게 선택된 자 외에는 아무도 못 옵니다.

 

그 방주 기능을 모세 때는 율법으로 바꾸면 노아 외에는 방주 의미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요. 모세는 이미 주님과 독대했어요. 모세가 언약을 꿰고 십계명을 모세만 알아요. 다른 사람은 몰라요. 모세 저 혼자만 영광스럽고. 그래서 수건 뒤집어쓰고 내려왔는데. 이건 이야기한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모세만 알고 있는 그 내용을 다른 사람은 못 알아들어요. 그래도 전해야 돼요. 왜? 율법은 납득해서 알아서 오는 게 아니고 율법과 더불어 율법의 효과와 효능이 율법 외침과 더불어 그 현장에 덮치기 때문에. 잠재적인 능력이 드디어 분화구처럼 이제는 애굽의 지표면을 덮칩니다. 덮으니까 열 가지 재앙이 되고 말았어요.

 

바로가 자기 백성 안 보냅니다. 어딜 가, 하던 그들이 어떻게 됐습니까? 제발 가주세요. 충정어린 신하들이 그랬어요. 히브리인들 제발 내 보내세요. 이러다가 나라 말아먹겠습니다. 견딜 수 없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술사, 마법사의 선을 넘어버렸습니다. 이건 정말 우리가 아는 신을 초월한 일이기 때문에 감당 못합니다.

 

나가라고 하니까 모세가 하는 말이, 아직 마지막 한 재앙 남았습니다. 그 재앙이 뭐냐? 죽음이죠. 옛날 삼국시대나 옛날 역사에 구석기시대에 보면 순장 제도가 있어요. 무덤에 족장이 죽을 때 하녀들, 생사람을 양식 보름치 주고 묻어버립니다. 뭔 뜻입니까? 종은 소유잖아요. 주인 죽었으니까 그들은 주인이 없어요. 그러니까 주인 따라가야 돼요. 황천길 가면서도 주인을 모셔야 부활의 세계에 이르기 때문에. 부활 종교, 준비 다 돼있는 거예요. 옛날부터 있었던 상품이에요. 그러니까 중을 생사람 잡아버린 거예요. 주인 죽을 때 같이 죽어라.

 

자, 어린양만 죽습니까? 누가 죽어요? 애굽에 있는 모든 장자는 다 죽여요. 왜 장자만 죽입니까? 어린양의 정체가 하나님의 맏아들이기 때문에. 로마서 8장에 보면 맏아들의 형상을 본받기 위해서라고 돼있지요. 모세를 애굽에 보낼 때 먼저 하는 게 있어요. 이스라엘은 내 아들이다. 내 장자다. 아들이 복수가 아니고 단수에요. 그러니까 둘째 아들, 셋째 아들은 아들 아니에요. 첫 번째 아들만 아들이에요. 그것은 이스라엘 자체가 장차 이 세상에 하나님의 아들이 둘, 셋이 있는 게 아니고 독생자, 하나밖에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에 그러한 흔적을 남겼고, 특히 아브라함의 아들이 두 명, 세 명이 아니에요. 이삭, 사랑하는 독자를 바치라고 했거든요.

 

아브라함이 독자를 죽이는 것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을 죽이는 거예요. 아버지의 이름으로 아들 죽이는 것은 장자오실 예수님이 아버지의 아들로 오셔서 아버지의 이름으로 죽어야 된다는 사실, 다시 말해서 죽음 안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천국이 들어있기 때문에 자신이 산 채로 들어갈 수 있는 위인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율법 안에 들어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오뎅 꼬지의 의미가 뭐냐 하면, 죽음 없이는 어느 누구도 천국 못 간다. 산 채로는 못 가요. 살아있으면 천국을 상상하게 돼요. 자기를 주인공 삼아서. 내가 지금 살기 힘든데 좋은데 가야지. 이러거든요. 그 인간을 주께서는 죽여주시는데 율법으로 죽이시다가 마지막에는 십자가로 죽여 버립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가 있어요. 십자가가 동원되면 십자가는 우리를 죽이는 역할해요. 이제는 우리가 없는 거예요. 우리가 없고 우리 안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사는 거예요.

 

그래서 인간이란 이름은 사실은 복수, 다양성이지만 성경에서는 단수에요. 인간은 하나밖에 없어요. 아담1, 아담2, 아담3 인데 그게 아담이에요. 아담4, 아담5 이렇게 돼요. 그게 아담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죽입니까? 밤 되면 다 죽어요. 잠을 자기 때문에. 밤 되면 인간의 활동이 중지되고 의식으로 했던 것이 무의식 세계에 들어갑니다. 내가 자고 있다, 나는 자고 있다. 아직도 이건 의식 세계에요. 그러다 깨보면 벌써 아침이라. 그 틈 있잖아요. 내가(주체) 자고 있다는 자체를 삭제해버리는 그 시간, 온전히 본의 아니게 이건 살든지 죽든지 누구 손에 달렸습니까? 하나님 손에 달려있는 그 순간에 일을 저지릅니다. 어떻게? 그건 10분 쉬고.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20150904b 울산강의-출애굽기 34장 : 죽음의 기호화

(강의:이근호 목사)

 

 

지금 제가 어디까지 했느냐 하면, 밤 요소까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천사가 와서 유월절 넘어갈 때 천사 오는지 눈 부릅뜰 때 천사 봤겠어요? 인간이 개입하지 못하도록 어느 누구 눈에도 띠지 않는 방법으로 깔끔하게 처리했습니다. 이건 뭘 의미하느냐? 내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잡아낼 수 없어요. 구원 방식을. 그게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결과가 되고 난 뒤에 소급해서 파악하는 거예요. 내 행함으로 구원된 건 아니었구나. 이게 벌써 넘어선 거예요. 자기 행함마저 자기 가치, 의미, 체면마저 넘게 하셨어요. 어떻게? S자 갈고리로 내가 뛰어넘을 수 없는 나를 주께서는 말씀으로 넘게 해서 주여,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너는 뭐했는데? 자고 있었지, 뭐. 그게 나의 밤이니까. 나의 밤의 주님의 낮이 되고 우리는 아무것도 행할 수 없어요. 그렇게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은 유월절 방식은 하나님의 백성은 알아서 혼자서 온전하게 다 해요. 99% 주님이 하고 1% 남겨두고, 이런 것 없습니다. 주께서 건드렸다면 더 이상 우리가 우리한테 건드릴 게 없어요. 예수 믿고 난 뒤에 우리가 뭔가 손질해야 구원되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어린양 피로 했으면 그 자체로 완벽해요. 손대면 더 흠집만 나요. 손대면 지저분해져요. 도리어 주님의 십자가 공로를 가리는 역할밖에 안 돼요.

 

예수 믿었으니까 찬양해드리겠습니다. 찬양대 만들고. 그게 도리어 주님의 은혜를 가리는 역할을 해요. 이제 구원받았으니까 제가 헌금하겠습니다. 그 헌금이 주님의 십자가를 가려버려요. 열심히 봉사하겠습니다. 희생하겠습니다. 그게 더 가린다고. 열두 사도들, 주님 알고 봉사하러 갔습니까? 성령 받고 고기 잡으러 갔어요. 딱 맞아요. 그게 우리 모습이에요.

 

그런데 고기 잡으러 가서 정신 차려서 이래선 안 된다고 단결해서 교회 만들었습니까? 누가 찾아왔습니까? 바로 딱 그거에요. 주님이 찾아온 거예요. 자기 백성 놓치는 법이 없습니다. 아차. 요새 내가 정신 못 써서 널 데려간다는 게 빠뜨렸네. 이런 실수, 주님은 없습니다. 실수 안 하시는 분인 것을 믿읍시다. 자기 백성 빠뜨리는 법은 없습니다. 아버지께서 택한 자는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다 살린다 했거든요. 끝까지 찾아옵니다. 찾아와서 데려가서 쥐고 놓치지 않고 기어이 가게 하십니다.

 

그게 바로 밤에 다 이뤄져요. 우리는 낮에 살면서 사실은 밤이 운명을 쥐고 있다고. 내가 행할 수 없는 내가 행동할 수 없는 세계, 잠재적 세계가 구체적 울산바닥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해서 한 번 구원이 계속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이 뭔 뜻이에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다는 뜻이지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있으면 우리를 만들어내요. 늘. 나한테 함께 있는 것이 아니고 만들어주시면서 만들어진 그것을 너는 말씀대로 임마누엘 되는 것이라고 우리한테 알려주죠. 내가 구원받는 것도 내가 알아서 구원받는 것도 아니고 내가 구원을 원해서가 아니라 주님이 원해서 구원될 수밖에 없는 그런 피동적이고 수동적인 입장에 우리가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살아가면서.

 

나의 구원은 나의 숙제가 아니고 주님이 아버지와 했던 과제고 숙제입니다. 그 숙제를 왜 내가 해요. 얼마나 나를 믿고 주님을 안 믿었으면 그 숙제를 내가 하려고 합니까? 이케요? 저케요? 하면서. 더 낮아질까요, 더 부인할까요? 이런 식으로. 십자가 더 질까요? 자꾸 자기가 자기를 관리해서 구원하려는 그 시도, 그것 주님을 모독하는 거예요.

 

출애굽에서 그 다음에 나오는 요소가 뭐냐? 처음엔 죽음이죠. 모든 인간을 다 죽여 버립니다. 그리고 그게 밤에 이뤄지지요. 그 다음에 누룩 이야기하는데 누룩이 있어요, 없어요? 누룩 없음이거든요. 평소에 떡이란 우리가 애굽에서 이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서 필요해요. 뭔가 먹는다는 행위는 뭐냐 하면, 내 입에 들어가는 것이 나를 살려주는 행위거든요. 살려내는 요소를 집어넣었어요. 못이나 철, 의자 이런 건 안 먹어요. 뭔가 먹을 수 있는 것만 우리 속에 집어넣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뭐로 만드느냐? 우린 인간이거든요. 우릴 인간으로 만든 것이 아니고 누룩을 집어넣음으로써 율법이 들어오면 내가 율법화 돼요. 하나님의 율법 덩어리가 돼요. 율법 덩어리가 되게 되면, 나는 애굽 사람과 특이한 존재로 살아가도록 주께서 다른 제품으로 만들어버려요. 모든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떡을 먹고, 먹어도 맛있게 폭신폭신하게 먹기 좋은 걸 해야 돼요. 딱딱하고 맛없는 것은 먹지 말아야 되거든요.

 

저쪽은 폭신하고 말랑말랑한 것 먹으라고 해. 하지만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따로 분리시키는 겁니다. 누룩이 없는 떡을 먹어야 돼요. 떡을 먹는데 딱딱하잖아요. 맛이 없지요. 이것은 기존의 인간과 전혀 다른 별개의 인간으로 전환 중이라는 과정을 누룩 없는 떡으로 묘사해줘야 네 자체가 율법화, 말씀화가 되는 겁니다.

 

여기 염소 새끼를 그 어미의 젖으로 삶지 말라고 하지요. 염소 새끼와 어미는 평소에 같이 다녀요. 혼자 돌아다니는 새끼는 없어요. 엄마 옆에 같이 붙어있다고. 그래서 한 덩어리로 봐야 돼요. 이게 우리 보기에는 염소고 염소 새끼잖아요. 주님께서 이걸 율법의 기호로 바꿔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염소와 염소 새끼가 합쳐서 율법화 돼버려요. 그 자체가 율법화 되게 되면 그 안에 뭘 새기느냐 하면, 평소에는 같이 뛰어놀다가 죽는 순간에는 같은 육신적 차원이 개입하지 못하게 해라. 엄마의 젖이 새끼의 죽음 자리에는 엄마의 육신이 거기에 개입되지 못하도록 차단시키라는 것이 율법의 기능화가 돼버려요. 율법의 기능으로 쓰는 것입니다.

 

그러면 염소 이야기가 염소 이야기로 마치는 게 아니죠. 누구 이야기입니까? 바로 모세를 따르는 히브리인들을 기호화한 거예요. 네가 알고 있는 생존이란 이름의 생명에서 전혀 다른 생명으로 전환될 때 죽음을 겪어야 되는데 그 죽음에는 네 손을 떼는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겁니다. 그건 모든 율법이 주어져서 만들어진 죽음에는 우리 육신이 끼어들 자리가 없는 거예요.

 

엄마 염소의 젖으로 새끼를 삶지 말라. 그럼 이 말은 뭡니까? 다른 젖은 되는 거예요. 같은 덩어리는 죽어야 되는 시점에서는 떨어져나가야 되는 거예요. 죽어야 되는데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이 살고 싶다는 것이 죽는 것에 집어넣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살고 싶어, 살고 싶어, 짠 살았네. 이런 생명은 없어요. 이런 영생은 없어요.

 

살고 싶은 동일성이 주님이 허락한 생명의 세계에는 그 성질이 이어지지 않고 끊어져야 돼요. 끊어져야 창세기 3장 21절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생명나무에서 추방하는 그 취지가 여전히 천국 가서고 살아있기 때문에.

 

선악과 따먹었느냐? 예. 따먹어도 살고 싶지? 살고 싶습니다. 안 된다. 네가 그 상태로 생명나무를 따먹으면 안 돼. 생명나무로 가는 것을 차단시켜 버렸어요. 선악과 따먹고 생명나무 따먹는 그 목숨은 내가 원하는 목숨이 아니다. 원하는 목숨이 아니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서 네가 보기엔 인간이지만 내가 보기에는 인간이 아니야. 흙이야. 가서 네 주체 파악해. 나가. 그리고 흙이 되어라. 흙이 되라는 자체가 아담이 흙이에요. 그러면 흙이 돼야 돼요.

 

그럼 우리가 죽는 것도 사실은 기호에요. 무슨 기호? 주님의 약속이 약속대로 차질 없이 이뤄진다는 걸 표현해주는 그런 역할을 보고 있는 겁니다. 늙어 죽읍시다. 왜? 그것도 하나님 일이기 때문에. 우리가 늙어죽는 게 하나님 일이에요.

 

지난주일 낮 설교 내가 행동 잘못해서 식구들한테 많은 질타를 받았어요. 지난 낮 설교 혹시 동영상 보신 분 있습니까? 인간은 백날 해도 늙어죽는다는 표현을 하면서 보톡스 이야기까지는 좋았어요. 올리는 행동해서 인간이 어떻게 중력이 이기느냐는 이 소리해서. 우리교회 처음 나오는 교인이 깜짝 놀랐어요. 그분이 나중에 설교 마치고 난 뒤에 예가 너무 적나라합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중력에 의해서 주저앉아서 무너져야 돼요. 무너져주는 것이 주의 할 일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맡긴 사명이 주저앉는 거예요. 그게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우리는 죽어가면서도 살아보려고 누룩이 가득 들어있는 맛있는 폭신폭신한 파리○○○ 빵 막 먹잖아요. 먹기 좋은 것. 왜 먹습니까? 살려고. 그 빵을 사기 위해서 돈이 필요하고. 돈 버는 이유가 살려고 하는 거예요. 스물네 시간 그 외에는 아무 의미 없어요. 오직 그것 때문에 살아요. 그런데 그것을 주께서 강제로 율법화 시켜버려요. 네가 그게 목숨으로 보이나? 목숨입니다. 생명으로 보이나? 생명으로 보입니다. 아니야. 가짜야.

 

예수님의 생명이 들어와야 돼요. 그건 주님의 과제고 숙제거든요. 들어오는 장면에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게 아니고 아예 율법 자체가 우리 내부에 장착이 되고 탑재가 돼버려요. 탑재가 되면 주님께서 우리 안에 그걸 집어넣고 현미경으로 우리를 수술해버려요. 그러면 우리 안에 들어온 말씀이 만개가 돼요. 꽃봉오리 피듯이 하나하나 피우면 우리는 본의 아니게 우리가 영생의 사람이 되고 맙니다.

 

고린도전서 1장 8절을 보겠습니다. 제가 지난 수요일에도 그런 언급했는데 말씀이 참 좋아요. 말씀을 보고 질문 하나 던질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기다림이라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케 하시리라”

 

질문 들어갑니다. 예수 믿고 난 뒤에 오년 됐습니다. 복음 알고 오년 되었습니다. 그러면 그 날은 오년입니까, 한 날이겠습니까? 이게 한 날이 돼요. 왜냐? 시작이 밤부터 저녁이 돼야 아침이 되니까. 야이로의 딸이 죽었을 때 그 딸을 일으키면서 주께서 하신 말씀이 있지요. 죽은 자야 일어나라고 했습니까? 잠자는 자여, 일어나라. 아침이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거예요. 밤이 들어가지 않으면 아침이 나올 수 없어요. 밤은 그냥 들어갑니다. 밤에 들어가면서 우리의 모든 행위는 죽음으로 된 상태. 죽은 자가 스스로 살려고 애쓸 필요 없어요. 그걸 에스겔 37장에 보면 바짝 마른 뼈에요.

 

제가 원래 뼛국 안 좋아합니다. 조○○ 뼈다구 맛있게 먹긴 하지만 좋아하지는 않아요. 뼈에 살점 얼마 없고 뼈가 더 많은 것 같아. 그런데 그건 축축한 뼈거든요. 이 뼈는 바짝 마른 뼈거든요. 바짝 마른 뼈가 서울대학 나왔느니, 무슨 박사니, 한 달 수입이 얼마니, 손님이 하루에 몇 명 오니, 키나 몇 센티니, 미스코리아니, 전지현과 아는 사이니 그거 아무 필요 없어요. 전지현도 바짝, 박근혜도 바짝, 노태우도 바짝, 죽은 이순신도 바짝, 우리도 바짝, 너도 바짝, 바짝 마른 뼈에요. 희망 없습니다.

 

오죽 희망 없으면 물었겠습니까? 인자야 이들이 살겠느냐? 저 같으면, 참 기가 막힙니다. 살기는 어떻게 살겠습니까? 그런데 에스겔은 예언자가 되어서 주의 말씀이 임하면 능히 살 것입니다. 말씀이 임하니까 하나님의 신이 임하사 하나님의 군대가 되지요. 조마루 뼈다구 군대. 지 자랑하지 않습니다. 바짝 마른 뼈니까. 그게 복수가 아니고 아무리 숫자가 많더라도 단수입니다. 144000, 1을 다른 말로 하면 144000돼요. 숫자에 대해서 이번 겨울수련회 요한계시록 할 때 할 거예요. 아무리 숫자가 많아도 1이에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다양성은 오직 그리스도만 이야기할 뿐이에요. 몸도 하나 주도 하나요. 눈이 발더라 하지 말라. 모두 한 성령 받았다. 한 성령, 한 세례, 한 몸, 한 교회. 교회는 한 군데밖에 없어요.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를 경유해야 돼요. 우리는 기호입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기호에 불과해요. 우리 역할, 우리가 정하지 않습니다. 너는 방주 만들고 야곱아, 너는 손자한테 안수하고. 이게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믿음의 선진들이 한 거예요. 아브라함아, 너는 나그네 생활해야 되고. 나그네 생활했다고 더 상급 받고 방주 만들었다고 더 낫고 그런 것 없어요. 각자 역할이 다를 뿐이죠. 어떤 사람이 심는 사람, 어떤 사람은 물주는 사람, 하지만 자라게 하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어요. 그게 전부 다 하나 속에 있는 거예요. 교회 이름을 사실은 우리 교회보다 하나 교회도 괜찮아요.

 

다시 이야기합시다. 어미 염소와 새끼 염소는 붙어 다녀요. 하나입니다. 사실은 어미 몸에 붙어있는 새끼니까 하나로 붙어 다니죠. 하지만 새끼를 잡을 때 어미로부터 떼어내야 돼요. 왜냐하면 죽는 순간이기 때문에. 죽는 그 순간은 하나님의 율법의 완성이 개입돼야 돼요. 어미나 새끼나 하게 지냈는데. 어미가 새끼를 더 잘 알지. 아니요. 내가 나를 몰라요. 내가 나를 아는 것은 나는 무조건 살아야 돼. 이것만 알지. 나는 나와 헤어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제가 어제 가락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보통 성경말씀에 자기를 부인하라는 이런 게 있지요. 그래서 우리가 일상 살면서 일이 안 될 때 뭐라고 합니까?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 약간 용기 있는 사람은 하나님이여, 차라리 저를 죽여주옵소서. 그 소리해놓고 지가 생각해도 믿음이 너무 좋은 기라. 어찌 이런 좋은 믿음을. 사도 바울 같아. 사도 바울 소원이 죽는 거니까. 주여, 차라리 죽여주옵소서. 살기 싫습니다.

 

어떻게 보면 자기가 굉장히 대단한 사도 바울처럼 근사한 줄 알지요. 그런데 그 믿음이 허당이라는 것이 금방 드러나요. 니 안 죽이고 하나밖에 없는 니 딸 죽인다. 주여, 차라리 제가 죽겠습니다. 딸만큼은 살려주옵소서. 그러면 주님께서 그 딸 누구 딸인데? 주여, 그런 말 하지 마시고 무조건 내 딸은 내가 지킵니다. 모든 것은 다 주의 것이라며? 농담도 못합니까. 그런 소리 마시고 차라리 나를 죽이시되 딸만큼은 살려주옵소서. 결국은 자기를 죽여 달라는 것은 거짓말한 거예요. 딸은 여전히 내 소속이니까 자기 소유가 돼있어요. 그러니 인간이 자기를 부인한다? 백 프로 거짓말입니다.

 

누룩이 없는 떡을 먹는다는 말은, 이미 인간이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특별 생명을 기호화한 새로운 음식이 되는 겁니다. 이미 너는 죽어도 살았어. 네가 죽는 것은 죽는 게 아니야. 저녁 때 잠자는 거야. 안식하는 거야. 잠 깨면 천국에 도착할 거야. 이 말을 신약적으로 하면 굉장히 쉬워요. 죽을 때 그냥 죽지 말고 나와 함께 죽으면 나와 함께 살리라. 로마서 6장을 말씀을 이렇게 한 거예요. 왜냐하면 나보다 먼저 부활의 첫 열매되신 분이 있거든요. 그분이 뭐냐? 예수님만 사시면 예수님과 함께 붙어있는 사람들도 함께 살게 돼있습니다. 여러분 그 대목 기억나시죠.

 

여기에 문제가 있어요. 그 과정을 우리가 목격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사실. 내가 죽는 장면을 내가 옆에 서서 보고 싶어. 사후의 세계 같은 책들 보면, 어떤 사람이 교통사고 일어났을 때 자기는 분명히 몸은 죽었는데 죽고 난 뒤에 이상하게 죽은 시체가 사람들이 울고불고 경찰이 오고 하더라. 그걸 자기가 봤다는 거예요. 보고 얼마 후에 병원에서 깨어났다는 겁니다. 깨어나니까 너 뭐 봤노? 길바닥에 내가 누워있는데 어떤 사람이 깨어나라 하고 인공호흡하고 그러더라. 그걸 봤다는 거예요. 그런데 너는 기분 나쁘더냐? 아니. 빛 속에 있었어.

 

그러면 그 다음부터 그게 간증이 돼요. 역시 예수 믿는 사람은 죽어도 주님의 빛 가운데 거하는구나. 그렇게 믿는데 이게 구라가 돼요. 왜냐하면 불교신자가 고백하는 것도 똑같아. 이슬람교인도 똑같아요. 심지어 종교가 없어도 빛 가운데 있다가 되돌아 왔다는 겁니다. 여러분 죽으면 되돌아올 수 없습니다. 계곡이 있어서 되돌아오지 못합니다. 그럼 뭐냐? 죽음 대신 두 자로 졸도. 신경의학에서 그걸 졸도로 봅니다.

 

한쪽 뇌가 마비가 됐는데 한쪽 뇌는 가동이 되어 자기가 뭘 봤다는 것은 평소에 한쪽 뇌가 과거에 봤던 생활에서 나오는 이미지를 연장, 동일화 시켜서 말한 거예요. 다시 말해서 인간은 자기가 누군지 몰라요. 그냥 기억 속에서 조립과 편집한 외에는 없어요. 그래서 기억은 항상 가짜입니다. 참 기억이란 말 자체가 성립 안 돼요. 기억하는 순간 기억을 조작해낸 겁니다. 이건 간단한 실험으로 대번 알 수 있어요.

 

친구야, 반갑다고 동창을 만났는데 뒤에서 치는 거예요. 너도 왔나. 보세요. 자기가 관심 없으니까 옆에 지나가도 모르잖아요. 기억은 전부 다 일부러는 아니지만 항상 일부밖에 봅니다. 그리고 하나를 집중하면 나머지는 배경으로 빠지면서 잊히게 되고 내가 집중, 몰입한 것만 기억나게 돼있어요. 그런 체험으로 예수를 믿으면 그게 예수를 믿는 것이겠습니까? 예수 믿는다고 상상한 거죠.

 

그런데 오늘 본문에 뭐냐? 실제 상황이거든요. 애굽 나라와 이스라엘이 분리되거든요. 오늘 본문을 다시 봅시다. 34장. 유월절 희생을 아침까지 두지 말라는 것은 무슨 뜻이라 했습니까? 아까 어미젖으로 새끼를 삶지 말라는 것, 육신적으로 알고 있는 모든 이미지와 경험과 체험은 죽음이란 단절 앞에서 스톱이 돼야 된다는 것. 네가 알던 세계는 네가 앞으로 살아야 될 세계에서는 도저히 상상 못할 도저히 예상 못할 세계가 있기 때문에 이것은 네가 알아서 걸어갈 수 있는 게 아니고 누가 인도자가 있어야 돼. 중보자가 앞서 가야 비로소 거기에 참여될 세계가 너를 위해서 준비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어린양 죽고 난 뒤에 홍해로 인도하지요. 홍해에 운하 있습니까? 없지요. 홍해가 잘하면 헤엄치면 건너갈 수 있는 바다 같아요? 아닙니다. 물론 바다 깊이가 차이 나겠지요. 그러나 모세가 인도한 홍해는 아무리 봐도 죽을 수밖에 없는 파도가 치는 깊은 바다였습니다. 그걸 알고 히브리인들은 뭐라고 합니까? 우리가 죽을 데가 없어서 여기서, 여기까지가 끝인가 보오.

 

그러한 절망, 주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그 절망은 주님의 절망이 아니고 내 절망이죠. 우리가 절망을 주께 바치면 주께서는 그 절망으로 예상 못할 희망을 줘요. 그런데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께 절망 드리면 하나님께서 희망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아직 절망 드린 게 아니에요. 그 희망마저 절망으로 바꿔주시는 그런 사태가 일어날 거예요. 갑자기 치킨집이 안 된다든지. 깜깜해. 할 수 있는 모든 건 끝났어.

 

그게 바로 그렇게 보고 싶었던 십자가, 이제 그게 현실화 되었습니다. 십자가는 믿으라고 준 게 아니고 내가 십자가야. 나한테 일어난 사태가 십자가 사태에요. 어찌할 바를 모르겠어요. 그게 바로 강도질 하지 않은 강도가 되는 겁니다. 비로소 우리는 절망 가운데 강도가 되어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 눈을 돌려보세요. 나와 똑같이 망해버린 사람이 보이고 동질감을 느낄 거예요. 그 작은 소자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입니다. 니나 똑같구나. 똑같아요.

 

왜 우리는 사실은 그게 우리의 뿌리거든요. 우리의 뿌리는 살아있으면서 뿌리가 아니에요. 우리가 절망했을 때 그 시점이 뿌리에요. 우리가 뿌리의 자리에 도달했을 때 몽땅 죄를 씻어준다는 것이 비로소 은혜가 되는 겁니다. 베드로가 뭐라 그랬습니까? 발만 씻으니까 왜 씻기십니까? 그래야 죄 없어진다. 그럼 발만 씻지 말고 나머지도 씻겨주세요, 하고 옷을 울러덩 벗으려고 했을 거예요.

 

그런데 발만 씻겨도 다 씻긴 게 되죠. 이 말은 뭐냐 하면, 주님께서 사랑하시면 다 씻긴 것이 돼요.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손댈 것이 없이 완전하다는 것을 언제 방해하느냐 하면, 나름대로 내 사업과 내 인생을 꾸려나갈 수 있다고 자신감이 넘치니까 그런 주님의 은혜가 내 앞에 가려졌어요. 내가 잘났는데 주님께 기도할 게 뭐있어요. 이제 앞으로 내가 알아서 할게요. 저는 한 신앙하고 한 믿음 하니까 제가 알아서 제대로 해서 바르게 하겠습니다. 이러니까 그 다음부터 그 일이 또 절망으로 바뀌게 되는 겁니다.

 

내 인생 아니구나. 사나 죽으나 주의 것 맞구나. 이게 이스라엘의 기호화 또는 율법화, 이스라엘 전체가 율법화 되는 겁니다. 푹신푹신한 맛있는 빵을 먹지 않고 누룩을 먹는 자체가 이미 인간 자체가 다른 세계에 도달한 인간들만 행할 수 있는 율법이 임플란트처럼 탑재돼있는 인간들만 행할 수 있는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럼 요즘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해야 구원받은 티를 냅니까? 그건 막 사시면 돼요. 그게 뭡니까? 내 인생은 누가 뭐래도 내가 원하는 식으로 관리할 거야, 라는 식으로 사세요. 그리고 그것이 바로 평소에 늘 하던 십자가 죽게 한 죄가 된다는 것을 병행해서 아시면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럴 때 그것이 성도의 말씀화가 되는 거예요. 말씀을 지켜서 경건하게 되는 것이 말씀화가 아니고 나는 죄인 중에 괴수입니다. 주어진 말씀 앞에서.

 

분을 품되 해 지도록 품지 말라는 그 말씀 앞에서 우리는 도저히 그 말씀을 못 지킵니다. 특히 여름에는 해가 길어요. 성질날 때 기다렸다가 저녁 때 성질내고 그렇게 못합니다. 성질날 때 성질내고 꾹 참다가 해지거든 보자. 이런 것 없어요. 해지기 전에 풀어야 되는데 다 풀기는커녕 해지고 난 뒤에 퇴근하고 난 뒤에 본격적으로 설치려고 하는 데 그게 되겠어요.

 

그러니까 어떤 말씀도 우린 못 지켜요. 왜? 못 지킬 때 우리는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는 이미 기호화된 말씀화되고 복음화된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못 지킨다는 말이 서슴없이 나오지요. 못 지켰는데 이렇게 구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건 이미 건너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이에요. 면류관 반납하고 말이죠.

 

이 말을 한꺼번에 요약해서 말하면 뭐냐 하면, 죽음의 순간을 놓치지 말라는 그 뜻이죠. 새끼를 잡을 때 어미젖으로 삶지 말라는 것은 죽는 순간에 율법의 진수가 죽음과 더불어 결합이 되는 겁니다. 따라서 날마다 죽노라는 말 있잖아요. 고린도전서 15장에 나오는 말씀인데 이 말은, 내 인생은 내가 살고자 하는 모든 시도가 사실은 죄가 되고 주께서 그 죄를 없애기 위해서 날마다 죽이시는 그 작업이 살려내는 일환이 되는 거예요. 나를 살려내는 절차 중에 나를 살리는 절차가 있는 거예요.

 

다시 정리하면, 그러면 이 율법이 날마다 죽으라 하니까 날마다 죽으란 것을 행할까요, 어떻게 할까요? 날마다 안 죽습니다. 우리 속에 있는 성령께서 날마다 죽도록 그렇게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죠. 아브라함 평소에 믿음의 행동이 뭐있습니까? 없어요. 그래서 아브라함은 행함으로 구원받은 것이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받았다고 로마서 4장에 나오잖아요. 간단하죠. 뭘 행한 게 있어야 행하지. 아브라함이 아들 바쳤잖아요. 그건 주님이 행하신 거죠. 주님께서 말씀을 지킬 때에 말씀을 지킬 수 있는 능력까지 집어넣어준 거예요.

 

천사 셋이 아브라함을 찾아왔지요. 내년 이만쯤에 네가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할 때 텐트 뒤에서 누가 웃었지요. 늙은 나이에 무슨 얘를 낳아. 무슨 낙을 보겠다고. 사라가 웃었지요. 웃어서 천사가 삐져서 취소했습니까? 아들 있음이란 말은 지키란 말이 아니고 그 다음부터 얘 낳도록 열심히 애쓰란 말이 아니고 말씀과 더불어 능력이 같이 들어간 거예요.

 

하나님은 전지만 한 것이 아니 전지전능이에요. 그런데 우리는 전지만 되고 전능은 빠져있어요. 알기는 진짜 많이 알아요. 십자가로, 창세전부터 예정돼있습니다. 예정됐으면 뭐합니까? 예정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데. 벌벌 떨고 있는데. 예정된 대로 할 건테. 벌벌 떨기는 왜 떠는데?

 

우리는 전지밖에 안 돼요. 전지전능이 안 돼요. 안다고 될 문제가 아닙니다. 방법을 몰라요. 왜 방법을 안 알려주느냐? 우리는 죽는 게 방법이에요. 그냥 주께서 죽이시면 그게 주께서 실행한 방법이고 늘 죽어야 되는데 그날 걱정은 그날 하라. 하룻밤 자고 저녁에 죽으세요. 죽으시면 새 날을 주십니다. 아침에 다시 일어나지요. 그날 염려는 그날로 마감을 하세요. 새 날은 새로운 날이 주께서 또 하루치를 주시는 겁니다.

 

그게 광야에서 만나를 하루치만 주죠. 이걸 뭐라고 했습니까? 광야에서 인간은 존재가 아니고 하루치로 잘라서 사건화, 카스테라 자르는 것처럼 자른 거예요. 일주일에 한 경우만 이틀 치를 줘요. 그건 뭐냐 하면, 자르는 율법의 완성된 상태가 안식의 상태기 때문에 이틀 치를 줘요.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내일 더 먹고 살겠다고 분명히 사람 수대로 모아야 되는데 2.2리터 해야 되는데 5리터로 더 가져오면 거기서 난데없는 벌레가 생기죠. 벌레의 용도는 뭐냐? 썩게 할 기능을 갖고 있어요. 따라서 우리 몸이 썩어 들어가는 것은 이 몸은 교체가 돼야 되기 때문에 우리 몸은 썩어가야 돼요. 썩는다는 말은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뜻이에요. 불신자한테는 해당 안 되지만.

 

썩는 그런 역할도 하고 그리고 매일같이 주의 은혜로 새롭게 사는 역할도 하고. 이래저래 울산바닥에 살면서 바빠요. 주의 일한다고 바빠요. 매일같이 돈 번다고 바쁜데 그 돈 버는 게 주의 일이 되니까 얼마나 바빠요. 돈 못 벌어서 걱정하고 자식 걱정, 남편 걱정, 아내 걱정, 하세요. 그게 주어진 우리의 숙제니까. 하면서 그런 걱정과 우리가 되어가는 것은 아무 상관없이 우리의 진로는 다른 노선으로 주의 개입으로 하게 돼있다. 그 전체가 우리가 복음화 돼있는 전도하고 있는 중이에요. 예수 믿으라고 돌아다니는 게 전도가 아니고 우리가 사는 게 전도에요.

 

그렇다면 우리가 아침에 맛있는 빵을 먹었을 때 그 빵은 무슨 빵이 되겠습니까? 분명히 이스트를 넣었지만 그 빵은 주님이 주신 빵이기 때문에 우리는 매일같이 폭신폭신한 맛있는 빵을 먹으면서 무교병을 매일같이 먹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걸 먹는 순간 우리는 안식의 날에 포함이 돼있어요. 나이가 70, 80이라고요? 아니요. 천년이라고요? 아니요. 하루입니다. 그날에 매일같이 창조의 날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하루가 천 날, 천 날이 하루 같이 우리는 주님 주신 그리스도 날 속에 살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그리스도의 날이 마감될 때까지. 그 날은 우리 소관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 27절 봅시다. 너와 이스라엘과 언약을 세웠다고 했지요. 이제 이해되시겠지요. 이스라엘 자체가 언약이에요. 노아와 방주가 한 세트로 언약인 것처럼 이스라엘 자체가 율법, 이스라엘 합쳐서 언약이 되는 겁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나왔기 때문에 율법을 오해했습니다. 율법을 오해해서 기존에 애굽에서 알고 있던 목숨 유지한다고 하다보니까 하나님께서 교체해버려요. 어디에서? 광야에서.

 

그래서 애굽을 몰랐던 홍해를 몰랐던 사람들로 교체하는데 기간이 40년입니다. 왜 40년이냐? 원망의 세월아, 빠이빠이입니다. 40일 동안 정탐하고 원망했기 때문에 원망이 그들의 기호가 됐어요. 그들 자체가 내가 원망하는 게 아니라 원망 덩어리로 이미 기호화, 율법화 되었어요. 원망이 있는 자가 못 들어가는 나라가 약속의 땅이 됩니다. 원망하게 되면 내가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 원망 덩어리가 돼버려요. 원망 덩어리는 천국에 못 갑니다. 그렇게 되면 원망의 나라가 되니까 지옥이 되겠지요. 그러니까 원망을 하게 하고 그걸 없애는 작업, 그 작업을 새로 잠재돼있는 이제 광야에서 태어난 아이들로 교체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모세도 못 들어가죠.

 

모세가 못 들어가면 누가 지도자인가? 지도자는 없어요. 이게 중요한 거예요. 모세언약에서 모세는 지도자가 아닙니다. 여호수아? 여호수아는 지도자가 아니에요. 갈렙도 아니에요. 그럼 누구냐? 없어요. 모세언약이 지도자입니다. 이제는 지도자 없이 들어가 봐라. 보이지 않는 지도자가 지도자다. 이미 너희는 새롭게 기호화 되었으니까. 너희 자체가 율법화 되었으니까 들어가라. 누구 없이? 모세 없이.

 

여호수아 있잖아요. 여호수아는 자꾸 모세 이야기만 해요. 날 믿지 마. 나도 너희들과 똑같아. 하나님이 언약한 대로 이뤄질 걸 믿을 뿐이에요. 두 사람이 믿었지요. 여호수아와 갈렙. 믿는 사람 두 사람이 지도자가 아니고 두 사람이 모세언약을 경유한다고. 믿었으니까. 내 원대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언약대로 될 거야. 그래서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에 들어갔을 때 제일 먼저 누가 마중 나오지요? 하나님의 천사가 오지요. 신발 벗어. 꿇어 앉아. 이 땅은 여호수아 네가 하는 게 아니고 네 앞서서 천사가 전쟁해서 너한테 선물로 줄게. 됐나? 됐습니다. 되지 뭐. 갑자기 하늘에서 우박 떨어지고 알아서 다 한다고요. 참 이게 믿어지면 고맙겠는데. 내 인생 내가 하는 게 아니에요.

 

천사가 되게 바빠요. 우리는 잠자지만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분이 따로 있습니다. 천사는 야근 매일 해요. 밤을 관장하시니까. 우리는 그냥 아무것도 한 것도 없이 매일같이 얻어먹기만 하는 그런 처지에 있습니다. 그런 처지에 있으면 하나님이 손해잖아요. 아니에요. 우리가 얻어먹으면 얻어먹을수록 우리가 복음화 돼요. 신약이니까. 옛날에는 율법화지만. 이젠 복음이에요. 우리가 걸어 다니는 복음이 돼버립니다. 누가 두셨습니다.

 

너는 어떻게 구원받았는데? 십자가 복음으로 구원되었지. 그것 말고 네가 뭘 했는데? 난 아무것도 한 것 없어. 그냥 막 살았어. 이게 복음이에요. 그게 언약 완성이라니까요. 언약을 지킨 적 없습니다. 언약이 알아서 우리를 생산해냈지 우리가 언약 지킨 적 없어요. 언약이란 지키지 말라고 준 거예요. 언약은 따로 있어요.

 

오병이어 떡 먹었잖아요. 그것 큰 실수한 거예요. 떡 먹고 헤어졌잖아요. 요새 말로 병 낫고 절에 간 거예요. 병 낫고 지옥 간 거예요. 한 번 은사를 맛보고 지옥 간 거예요. 진짜 은사는 병 낫고 잘 되고 복 받는 게 아니에요. 십자가입니다. 주님의 살과 피, 그게 있어야 은사 받은 거예요. 제자들은 그걸 몰랐습니다.

 

어떤 분이 이런 질문을 해요. 이것만 하고 마치겠습니다. 이능우 집사님이 질문했지요. 베드로가, 영생이 말씀이 있는데 누구에게로 가오리까? 베드로가 알아서 갔습니까? 베드로가 몰라서 한 거예요. 베드로는 인간이기 때문에 안다는 것은 지가 경험한 것까지만 그걸 종합해서 편집해서 질문으로 나와요. 내일을 몰라요.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지는 것까지 알아요. 그 베드로 어떻게 됐습니까? 결국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지요.

 

그런데 베드로 하여금 왜 그런 고백을 하게 하는가? 베드로가 하는 고백마저 베드로가 기호화 되면 그게 말씀화 되고 율법화 되면 베드로에게 더덕더덕 붙어 있는 그 말씀을 본인이 지키는 게 아니고 꼭두각시고, 기호화 시킨 주님이 베드로에 장착된 말씀을 주님이 지켜서 베드로로 하여금 구원케 하는 작업을 하시는 거예요.

 

여러분은 지금 굉장히 바빠요. 우리는 왜 바쁜가? 주님 생각해서 바쁜 게 아니고 내 일 하느라고 바쁜데 그것마저 주님의 복음화 되도록 주께서 함께 따라 붙으면서 바빠요. 둘 다 다 바빠요. 임마누엘이라. 우리는 돈 번다고 바쁘고 돈 버는 그 죄를 의로 바꾼다고 바쁘시고. 우리는 맨날 돈만 생각하고 자기만 생각하면 돼요. 알아서 바꿔줘요. 안 믿어져요? 그럼 불신자에요. 진짜 그게 믿어져요? 그럼 신자가 되는 거예요.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무것도 필요 없어. 뭐 있습니까? 자기 인생을 책임지지 마세요. 자기 인생 책임지는 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겁니다. 가락교회에서 그런 이야기했거든요. 자기 인생을 책임지겠다는 것은 아직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미련을 갖고 있어요. 우리는 전적으로 죄인입니다. 괜히 꿈꾸지 마세요. 환상입니다. 나에 대한 환상, 미련, 자존심이 남아있어요. 그냥 사시고 그 냥 사시는 것도 주께서 일부러 그냥 사시게 하신 주님의 작업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가 이미 말씀화되고 기호화되고 율법화되고 그렇게 일을 벌이신 분이 우리 자신이 아니고 주께서 말씀으로 그렇게 집어넣은 것이고 십자가 지신 분이 한 패 먹도록 그렇게 하신 것을 이렇게 믿어지니 이것마저 성령의 은혜인 것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