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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고린도전서 10:5-7 / 거울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10:5-7 / 거울

정인순 2015. 8. 30. 16:06

 

 

이근호

 

음성 동영상 유튜브

 

고린도전서 10:5-7 거울

 

거울의 기능은 반사하는 겁니다. 먼저 실제로 실체가 마련됩니다. 그리고 거울은 그것을 반사하는데 개수로 무한대로 만들어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원본의 가치를 소실되는 것이 아닙니다. 도리어 절대적입니다. 원본만 사라지면 그 많은 투영체는 일시에 없어집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의 거울의 세상이라면 세상을 세상으로 유지하게 하는 원판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사건입니다. 이것만이 영원하며 이 그리스도 사건의 작용에 따라 순식간에 사라질 것들이 주위에 배치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없어질 투영체를 마치 실체인 것처럼 여겨서 거기에 매달려 살아갑니다. 이게 바로 광야에 들어오기 전의 삶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는, ‘거울’이라고 간주되는 사건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바로 그 지점이 원본임도 아울러 말하고 있습니다. 광야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바로 세상을 지탱하는 원본이라고 말합니다. 따라서 애굽의 화려한 시절은 광야에서 일어난 사건 여부에 따라서 순식간에 사라질 환영(幻影)같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점을 애굽의 사람들은 모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알지 못한 일단의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서 강제로 광야까지 들어와서 ‘원본 만들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반사되어 나온 사건들로 인하여 오늘날 이 망상의 세계가 영원히 의미를 부여받게 된 것입니다.

 

헛되고 헛되게 보이는 그 광야에서 일어난 일로 통해서, 도리어 충실한 의미가 꽉 채워졌다고 간주한 나 중심의 일들이 다 허망한 일로 판명납니다. 이것이 시간을 초월해서 작용하는 ‘거울의 효과’입니다. 이 ‘효과’ 안에 놓여 있을 때만 경우에만 약속의 나라는 우리 안에서 실제적인 나라로 나타납니다. 이 효과로 인하여 우리 자신이 알고 있는 우리 자아는 실제하지 않는 환상의 일부임을 압니다. 자신에게 속고 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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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

2015년 9월 6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10:5-7

(10:5)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10:6)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 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10:7)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사람들이 성경을 필요로 하지 않는 이유는 본인이 ‘인간’이라는 점에서 성경 몰라도 달라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간’이란 실은 기존의 인간 세상에서 그렇게 인정해주는 것이지 하나님께서 인정받은 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기존 인간 세상의 일부로서 돌출된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속하면서 늘어진 혹 하나가 곧 각자 우리 자신들입니다. 일종의 ‘돌기’같은 겁니다. 따라서 우리 자신들의 뿌리는 전체적인 인간 세상에 속합니다. 따라서 거기서 나를 ‘인간’이라도 대접하고 인정하다면, 나 자신의 인간여부는 만족스럽게 확정된다고 여깁니다. 즉 친구들이 나를 인간으로 인정하고 가족 식구들이 나를 인간이라고 인정하고 이웃이 나를 인간으로 인정해주는 자연스레 내가 나를 인간이라고 우겨도 무리가 아니라고 여깁니다.

하지만 출애굽 사건이 발생되었습니다. 다같이 애굽나라 사람이라고 여겼지만 이 애굽이 너무나도 이질적은 두 요소로 분류됩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사람 취급해주지 않습니다. 출애굽기 1:16에 보면, “가로되 너희는 히브리 여인을 위하여 조산할 때에 살펴서 남자여든 죽이고 여자여든 그는 살게 두라”고 했습니다.

한쪽이 다른 한쪽을 죽여도 무방하다는 겁니다. 마치 아파트 단지 내에서 개나 고양이는 사람으로 취급해주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개 죽였다고 살인죄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 갈라짐을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유발시켰습니다. 그 이유는, 기존의 인간과 ‘다른 사람’이 되지 아니하면 천국 갈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드리는 다른 인간이란 ‘출애굽 사건’이 내장된 존재를 말합니다. 출애굽 사건의 의의가 없으면 하나님께서 천국에 들어갈 만한 사람으로 간주해주지 않습니다. 애굽인과 히브리인을 구분지어 분류하시는 작업은 인간의 아이디어가 아닙니다. 인간들의 아이디어는 이러합니다.

착하게 살면 천국가고 악하게 살면 지옥간다입니다. 로마시민의 갖추어야 하는 네 가지 r시본 덕이 있어야 한답니다. 지혜, 용기, 절제, 덕입니다. 하지만 출애굽에게 소개하는 천국은 ‘어린양의 피’입니다. 이 얼마나 차이나는 이야기입니까. 달라도 너무나도 다른 인간상입니다.

윤리와 도덕으로 무장한 인간은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다음과 같이 됩니다. 이사야 40:3-7에 보면, “외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케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작은 산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않은 곳이 평탄케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대저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힘차게 입성하시는 그 길에서 모든 인간 존재는 들에 무심히 핀 들풀에 지나지 않습니다.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낮아집니다. 즉 모든 존재가 다 똑같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겁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는 교회라면 필히 서열을 중요시합니다.

하지만 그 좌중에 주님이 계시는 교회라면 모든 직분과 상관없이 똑같습니다. 다같이 살 권리 주장 못하는 같은 입장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입장을 지니시고 신약 때 메시아계서는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 중에 섞여 들어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달했습니다. 이해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라 현 인간 세상이 얼마나 스스로 착각들을 하고 있는지 들어내기 위해 말씀하셨습니다.

즉 “너희들이 나를 죽여라. 그래서 너희들이 얼마나 인간 못됨을 드러내라”는 식으로 이 세상에서 말씀을 던지신 것입니다. 혼인에 대해서 주님이 언급을 하자 제자들의 반응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연고 외에 아내를 내어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 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마 19:9-10)

또한 부자에 대해서 언급하자 제자들의 반응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제자들이 듣고 심히 놀라 가로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마 19:23-25)

오늘 본문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들어와서 비로소 자신들이 우상숭배자라는 사실을 하나님으로 지적받습니다.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고전 10:7)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 이름을 부르면서 뛰놀았던 그 상황은 모세가 부재(不在)한 상황이었습니다. 이로서 다같이 애굽을 떠나 왔지만 이스라엘 내부에 둘로 나뉘어집니다. 하나님과 독대한 모세의 입장에 서 있는 자와 그렇지 않고, 자신들의 의견 소통으로 도달한 결론에 동참하는 자들로 나뉘어집니다.

모세가 없는 사이, 모세가 시키지도 않는 일을 자생적으로 실시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의 의도는 출애굽기 32:8에 잘 나와있습니다. 하나님의 시선으로 봤을 때만 드러나는 평입니다. “그들이 내가 그들에게 명한 길을 속히 떠나 자기를 위하여 송아지를 부어 만들고 그것을 숭배하며 그것에게 희생을 드리며 말하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라 하였도다”

여기서 ‘자기를 위하여’라는 대목이 나옵니다. 자기를 위한다는 것은 ‘자기 존중’이라는 말입니다. 인간들은 궁극적으로 ‘자기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하는 이타(利他)적 존재입니다. 즉 자기를 버려서라도 자기를 위해, 자기 것을 위해 희생하는 자들입니다. 자기를 위해 자살할 수는 없어도 사랑하는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어이 살아남아서 자식을 위해 희생하고자 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자기 교회, 자기 나라, 자기 가정, 자기 조직체를 위해 아낌없이 희생합니다. 이게 바로 본인으로서 도저히 알 수 없고, 모세의 안목, 즉 하나님의 안목이 아니면 도저히 알 수 없는 ‘우상숭배’의 진면목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지리”고 하십니다. 그냥 죽으라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죽게 되는 죽음 사건이 유발시켜라는 말입니다.

즉 “나는 죽어 마땅합니다”를 통해서 성도는 광야 사건(=십자가 사건) 자체를 위하여 자신이 존재함을 압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우리 자신이 끝까지 우상숭배자임을 십자가 앞에서 고백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