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과 믿음
71강 / 사도행전 28:26 (실현) / 150331 본문
녹취:주향
대전-행28장절23-31절(실현)71강 - 이 근호 목사
사도행전 28 :23-31
사도행전28장까지가 끝이죠! 왜 끝이냐 하면 사도 바울이 죽으니까! 사도 바울이 죽었다는 말은 우리가 생각하는 현실에서 사도 바울이 복음만 남겨 두고 사라집니다. 사도 바울은 날 찾지 말고 내가 사라지고 사라진 뒷자국에 남겨진 복음을 보라는 겁니다. 나는 일시적이지만 복음은 영원하다. 그것을 언급하는 겁니다.
그러면 복음은 어떻게 만들어 지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성 하셨지요! 십자가에서! 그 적용의 지평이라 할까요? 그 적용되는 환경은 어떻게 되느냐 거기에 사도 바울이 참여를 한겁니다. 예수님과 사도 바울의 관계가 예수님과 믿는 자의 관계로써 미리 모델로 보여 준거죠
그래서 사도 바울의 인생이 가는 길은 우리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해서 사도 바울이 살았던 것이 우선이 아니고 사도 바울은 복음으로 인해 사도 바울이 되었듯 사울에게 주어진 복음으로 인해 이제 사울이 아닌 바울로 살아야 되요. 그러면 사울에서 바울로 변하게 하는 것이 복음이라면
여기 바울 안에 뭐가 들어 있냐 하면 사울도 들어 있고 바울도 들어 있는데 사울은 육이 되고 바울은 영이 되는 거지요! 영이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것, 예수님의 소유 이런 겁니다. 따라서 아까 이야기 한 것처럼 바울의 인생은 개인적인 인생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의 형태, 모델로 미리 앞당겨 보여 준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란 뭡니까? 라고 물으면 이 원칙에 따라서 육과 영으로 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요. 영으로만 되어 있는 것이 성도가 아니라 육과 영으로 되어 있습니다. 육과 영으로 되어 있어서 성도는 그 둘 다를 알 수 있지요. 뭐가 육인지를 알고 뭐가 영인지를 아는 겁니다.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보냐! 육과 영에 대해선 몰라요! 육과 영에 대해서 모른다면 아는 건 뭐냐 하면 “자아” 밖에 없지요! 자아만 알지요! 그 자아 밖에 모른다는 것이 누구냐 하면 사울입니다. 사울이 바로 그랬거든요! 자아 밖에 모르던 사울에게 복음이 들어오니깐 사울이 육과 영의 결합체로 된겁니다.
따라서 자아 밖에 모르던 사울이 육과 영으로 바뀌었다면 여기에 무엇이 개입되었냐 하면 복음이 그러 했고 그 복음이 바울의 입에서 어떻게 전달되었냐 하면 사도행전 28:26-27까지가 전달됩니다. 이렇게 되어 있거든요.
(행 28:26-27) 일렀으되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 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을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 하였으니 이것이 이사야 6장에 나오는 대목인데요.
이것이 이 시대에 예언 됐다는 겁니다. 따라서 오늘 강의 초반은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구약의 예언이 신약에 어떻게 구체화 되는가를 그 정황을 잘 포착을 해야 되겠지요! 구약에 어떤 말씀이 있으면 이 말씀을 우리의 자아가 이것을 어떻게 지키냐 이건 아니에요.
구약의 말씀을 우리가 지켜서 실현시키는 이게 완성이 아니고 구약의 말씀을 누가 가져가느냐! 중간에 들어오시는 분이 있어요. 중보자 되시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가져가십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이 말씀을 가져가시는 동시에 가져가면서 무얼 이루느냐 이 말씀을 실제적으로 실현 시키고 완성을 시켜 버려요.
그러면 완성을 시켜 놓게 되면 말씀을 완성 하신 분 예수님! 그리고 완성하지도 못하고 실현 할 수 있는 능력도 없으면서 말씀을 가지려고 당기는 인간. 그 인간과 예수님의 간격, 균열, 차이, 벌어짐, 틈. 그 틈을 유발시킴으로 인해 천국과 지옥으로 구분되어져야 사람들의 갈라짐이 복음이 전해지는 현장에서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 중요해요.
나중에 죽어서 가보면 알겠지? 천당가는게! 아니에요. 나중에 죽어서 가는 게 아니고 복음이 전파되는 현장에서 결정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26절이 뭐냐하면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깨닫지 못한다는 단정적인 말로 언급을 한것은 “너희가 들었잖아!”
너희가 들었는데도 못 깨닫는 것을 봐서는 제대로 말씀의 효과를 보고 있다는 겁니다. 말씀은 너희들이 실현하라고 준게 아니고 지옥 갈 사람은 지옥에 간다라는 사실을 정립하고 확실하게 확정짓는 효과가 이미 말씀안에 들어 있는 겁니다.
그 이유에 대해 왜 그러냐고 묻는다면 이 말씀을 다른 분이 가져갔기 때문이에요. 그 다른 분이 누구냐하면 예수님이 가져갔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져가신 말씀은 필히 깨닫지 못한 사람이 등장해야 되는거예요. 복음의 자리에 구원받지 안아야 될 사람도 있어줘야 되요. 그래서 구원되지 않아야될 사람은 기여히 구원 받지 않아야 그게 전도입니다.
예를들면 어떤 사람이 큰 죄를 지었어요 그래서 마지막에 사형당하는 순간에 목사나 신부가 와서 그에게 회개를 촉구합니다. 지금까지 당신은 이러 이러한 죄를 지었고 피해를 주었고 피해입은 사람들이 울고 있고 이러저러 해서 오늘 당신이 사형당하는데 하지만 당신이 지금사형당하지만 당신의 영이 천국에 갈 수 있는 마지막기회가 남아있다. 당신이 행한 것에 대해 회개합니까? 회개하고 예수님의 사죄함을 받아들이면 당신은 구원받습니다. 이건 누가 들어도 땡잡는 기회에요. 마지막이고 자기는 사형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에 이걸 받아들이면 되잖아요!
그런데 사형수가 말하기를 “아니요! 나는 끝까지 다시 태어나도 그 짓을 할겁니다. 나에게 그런 설교 따위는 하지 마세요!” 이렇게 말할때 이 사람의 능력 이상의 능력이 이 사람에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방금 제가 사형수의 예를 들었지요? 사형수라고 국한하지 말고 저 아래 시장통의 상인들을 이야기하는 거예요.
상인들에게 이야기 하면서 장사하시는데 실은 우리가 죄인으로 태어났는데 예수 믿고 영접하시면 구원받습니다 하면 “아니요! 나는 장사하렵니다!” 라고 하는 거 하고 똑같은 거예요.또는 교사, 판사, 의사, 국회의원, 대통령 누구나 마찬가지에요. 심지어 기존의 목사도 마찬가지 입니다. “무슨 일 하십니까? 목회합니다.” 목회하면서 지옥가거든요! 그런데 목회하면서 지은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으세요!”라고 할 때 믿을리가 있습니까? 목회하기도 바쁜데 어디 예수를 믿어요? 예수 믿으면 목회가 안되는데! 예수 믿으면 사도 바울처럼 살아야 되는데 이게 가능합니까? 자기의 자리가 없어지는데 안되지요!
보세요!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같으면 저 사람은 좀 더 죽을 때가 되서 이야기해야 되는데 라고 생각 하는데 예수님은 나이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으시고 적극적으로 사도 바울을 보내셔서 자기가 완성한 말씀을 가지고 그냥 현장을 순회 재판소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 천국과 지옥. 심판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심판이 이르렀음에라는 말이 맞아요.
요한복음 3장에 보면 중요한 대목인데 3:18절에 보면 사람들에겐 16절이 더 유명한데 18절과 같이 연결해서 묶어 봐야 하는데 “ 저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이니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믿지 아니함으로라고 되어 있지요?
이것은 믿을 만한 것. 더 이상 추가적으로 믿을 필요 없이, 이미 주어진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이미 인간들은 받았어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이미 받았어요. 그거 알고 추가적으로 뭘 알아야 하는게 없다니까요! 이미 받아버렸어요!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않는 경우는 이미 심판을 받았다는거예요.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말은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소리지만 안 믿는 자에게는 심판 선언문이에요. 판사가 내리는 선언. 아들을 주셨기 때문에 “너는 멸망자다!” 라는 뜻이에요.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주셨기 때문에 이 세상은, 너는 멸망당하는 것으로 최종 확정 되었다 이런 이야기입니다.
특히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를 믿는 자라고 했지요 이 말은 뭐냐하면 우리 쪽에서 하는 어떤 행함도 주께서는 일체 돌아보지 않는 거에요. 일체 우리의 행함 없이, 우리의 행함을 묻는게 아니고 독생자의 행하심으로 모든 게 마무리 되었어요. 이미 끝났어요. 게임 오버. 혼인잔치 끝나 버렸어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상태에서 아무리 행해도 그것은 저주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으면 될게 아니냐?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라 하는 것은 독생자가 오셔서 우리에게 낯선 것을 제공 할 때에 그 낯선 것에 의해서 독생자가 믿어지게 되어 있어요.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 자동적으로 능력을 갖춘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독생자가 오셔서 독생자를 믿을 수 있는 능력마저 제공하고 난 뒤에 결국은 믿어지도록 하는 조치를 해 놓고 그렇게 독생자의 마무리 작업이 되는거고 독생자의 마무리 작업도 독생자가 하는 행함속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지 아니하려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를 믿지아니함으로 벌써 심판을 받는 것이다. 독생자 안에는 심판의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요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와 악함으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이라.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조건하에만 이것이 들춰지냐하면은 빛이 세상에 왔다는 조건하에서만 이게 드러나요. 예수님이 오시지 아니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선을 사랑하지 악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악을 쓰면서 반발할걸요.
우리가 왜 악을 좋아해요? 우리는 선만 좋아하고 선을 추구하고 좋은것만 찾고 추구하는 거예요. 그러나 예수님이 오시니까 악한것만 추구한다는 사실이 폭로 당합니다. (요 3:20)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함이요
이 말은 오늘 본문을 설명하는데 하나의 포인트가 되기 때문에 먼저 이 부분을 설명해 드려야 겠네요.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렇게 되어 있는데 이 말씀이 언뜻보면 사실은 우리가 아는 논리로 보면 순서가 바뀌어 있지요? 빛으로 오지 않을 때 그걸 무엇으로 보냐 악으로 보는 것이 우리의 상식이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안되어있고 악을 행하기 때문에 빛을 미워하게 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선 새삼스럽게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지 않아요. 다만 너희는 이런 인간이라고 확정된것을 통보하러 오셨지 부탁하러 오신게 아니예요. 바르게 살아라! 이런 부탁을 한게 없어요.
전에도 이야기드렸지만 주님은 구원을 거래하지 않습니다. 흥정하지 않아요. “부탁하는데 제발 좀! 나를 믿어줘!” 이렇게 고개 숙이지 않아요. 주님은 인간에게 고개 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간이 도리어 거짓말을 하거든요. “나는 악하지 않다” 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이래도 악하지 않느냐고 이야기 하십니다.이래도 네가 악하지 않다라고 주장할 수 있느냐 하시지요.
(요 3:20-21)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함이요 진리를 쫓는 자마다 빛으로 오나니 이는 그 행위가 하나님 안에서 행한 것임을 나타내려함이라 하시니라. 진리를 쫓는자가 있어야 구원받을 사람이 있게 되요.
진리를 쫓는자의 특징이 뭐냐하면 그 행위가 하나님안에서 행한것임을 나타내려함이라 본인이 행해서 진리를 쫓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그의 안에 들어가서 그 사람을 하나님안에 집어넣고 그 자리가 본인자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자리로 바꾸어 놓으시고 그렇게 해놓고 빛으로 오게 하기 때문에 그 행함은 본인의 행함이 아니고 그것이 “믿음”이 되는 겁니다.
모든 걸 주께서 행하셨잖아요! 진짜 성도는 짜증내게 되요. “주께서 다 주셨는데 왜 자꾸 내가 행했다고 합니까?” 남들이 보면 미친사람같아요. 주께서 행하셨잖아요. 피아노를 잘 치니까 관객이 앵콜! 앵콜! 하면 피아노 뚜껑을 확! 닫으며 “그것 보세요 주님께서 피아노 잘 치게 하셨는데 왜 내가 쳤다고 관중이 오해하잖아요! 이거 어쩌면 좋아요? 나 미치겠네!” 이런식이에요.
자! 이러한 내용을 사도행전으로 가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상당히 어려운것은 왜냐하면 사도바울이 이사야 6장에서처럼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는도다 이 말은 뭐냐하면 그들이 깨닫지 못해요.
그런데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을 언제 알게 되느냐하면 그들에게 복음을 들려주는 그때 복음이 판정을 해줘야 되요. 본인이 깨달았다, 안깨달았다의 판정은 주님께선 인정하지 않습니다. 복음이 판정해 줘요. 복음이 말하기를 이는 깨닫지 못했다라고 선언을 해버리는 겁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인간이 취한 선악과 때문에 그렇습니다. 선악과를 아는 지식 때문에 그래요. 사람들이 알고 있는 선과악은 서로 반대 개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선과악을 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하나님께선 “선과악을 안다”라고 하는 자체를 “악”이라고 규정한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렇게 생각지 않고 “선” 따로 있고 “악” 따로 있다라고 생각해요. 인간들은 선과악이 따로 있고 반대 개념을 가지고 서로 섞이지 않는다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선 선과악전체가 같이 하나로 공존한다라고 하나님께선 선언하시는 겁니다. 그 근거는 뭐냐하면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만드신거예요.
생면나무를 못 따먹게 하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생명나무를 못 먹게 된 것은 무조건 “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악이냐! 선이냐! 하는 것은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따져 지는게 아니고 외부에서 결정을 지어 버리는 겁니다.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것은 내부적으로 아무리 선한것이 있더라도 이것은 “악”이 되는 거예요!
그러면 외부적인 것을 알면 되지 않냐? 그런데 생명나무라는 것이 이미 차단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추방되었기 때문에 인간은 외부에서 나를 어떻게 보는지를 몰라요. 모르기 때문에 자기 자신의 자아를 알기 위해서는 내부적으로 선과악을 따져서 될수있는데로 ‘선’쪽으로 많이 가려고 하고 ‘악’은 멀리 함으로써 자기를 보다 선한 사람으로 규정해놓고 그걸 ‘자아’라고 하는 몸부림 외에는 없는 겁니다.
따라서 이러한 자아로 선을 가까이 하고 악은 멀리하겠다는 이러한 생각에 하나님의 말씀을 줘 버리면 인간들은 그 말씀을 가지고 지키면 ‘선’이 되고 안 지키면 ‘악’이 된다라고 또 오해를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주님께선 어떻게 하시느냐! 이 자체가 ‘악’이라고 하셨지요? 주님께선 ‘악’이라 하기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 또는 예수님을 인간속에 집어 넣어버려요. 집어넣어서 인간들은 이미 자기가 선한 쪽에 서 있잖아요! 그렇지요? 악을 미워한다 말이에요. “나는 악이 싫어!” 그래야 자신이 선한 사람이라고 티가 나니까 부자 청년처럼
그 악한 쪽에 주님과 복음이 와버려요. 그러니까 바르세인들이 뭐라고 하냐하면 주님을 율법의 위반자라고 한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사도 바울이 하는 일이 그들이 알고 있는 율법을 위반하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 하셨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 했다. 창조하신 이유는 뭔가? 하나님을 섬기게 하기 위해 인간을 창조했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다 고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선한 것이다. 고로 우리는 하나님을 섬겼다. 고로 우리는 선하다라는 구조속에서 예수님은 뭐라 하시냐 하면 ‘나’를 섬기라고 한거예요.
그래서 바르세인들이 당신이 하나님이라면 섬길께. 왜 자신들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선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선한 중에서 예수님이 메시야라면 섬길께. 그런데 예수여 네가 메시야라는 것을 우리에게 증명해봐라! 이렇게 나온거예요.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나를 악하다고 하는 이야기를 함으로써 이미 증명 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내린 결론은 간단해요. 예수 당신은 죽어 마땅하다고 하는 거예요. 죽어마땅하니까 이것은 결국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한 사람이 되요. 그러면 그것을 궁극적 ‘악’이라고 하고 극한 ‘악’이라고 해요. 사탄이죠. 하나님을 모독한,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모독하니깐 결국 하나님을 참칭이라 하는데 거짓으로 위장하는 것. ‘참칭’
예수님이 죽으셨던 이유가 하나님을 모방하고 하나님도 아니면서 하나님 같은 티를 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서 죽인거예요. 죽일 때 나무에 달아 죽인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 보는 거예요. 왜냐하면 저주받은 자는 나무에 달려 죽는다는 신명기의 말씀이 성취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신21:23) 나무에 달려 죽는자마다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래서 예수님이 나무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그들이 보기에 하나님에 대한 그들이 보기에 제재로 된 자기들의 조치인 동시에 하나님의 적절한 조치가 예수라는 가짜 메시야에게 적절하게 취해졌다고 보는 겁니다. 지금 많은 불신자들도 이러한 바르세인들이 취한 행동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그냥 좋은 사람인줄 알지만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쁜 점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한 것. 그게 가장 나쁜 점이거든요. 같은 인간이라고 했다면 얼마든지 소통하면서 존경할 마음이 있었는데..왜? 착하니까! 산상수훈 보세요! 얼마나 착합니까?
그런데 본인이 하나님이라고 참칭(거짓으로 자칭하고) 더 나쁜 것은 세상의 모든 신들은 가짜고 오직 자기를 믿어야만 영생을 얻고 자기를 믿지 아니하면 저주 받는다고 하기 때문에 이것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악행을 저지른 거지요. 만약에 예수님이 세종대왕 앞에 나타난다면 세종대왕은 예수님을 죽일 수 밖에 없어요.
아마 이순신장군 앞에 예수님이 나타난다면 일본 장수를 처단하듯이 예수님도 같이 남해 바다에 수장시켜 버리고 이 미친것이 거북선에 왜 타서 설치냐고 하겠지요! 모든 세상은 나를 위해 만들어졌고 이렇게 말하면 바로 죽여 버립니다. 하늘 아래 임금은 둘이 될 수 없다고 하며 죽여 버렸을거예요.
“난 선조 임금님만을 섬겨야지 예수를 섬길 마음이 없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이순신장군에게 “네가 바로 마귀의 자식이다”라고 하지요. 다시말해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인간들이 선과악이라는 구조를 만들었거든요. 선과악은 구조적으로 이미 대립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 구조를 이미 아시고 주님께선 악한 구조속으로 뛰어 드신거예요. 따라서 이 구조가 인간에게서 나온 구조이기 때문에 인간이 스스로 그 구조를 부숴버리지 않는 한 절대로 예수님의 말에 동의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그 구조를 망치려하면 인간은 그 구조에서 어느 쪽에 서 있습니까? 선한 쪽이잖아요!
간단히 말하면 선과악을 말한다는 그 자체가 이미 내가 선하다는 전제하에 있기 때문에 그럼 의미를 두고 있는 것이라는 겁니다. 내가 선과악을 말한다는 자체는 그만큼 자신이 선하다라는 뜻이예요. 그런데 거기에 주께서 말씀으로 우리 내부로 들어와 버린다니까요. 우리가 말하는 악한 쪽으로 들어와 버려요.
그러면 주님 보시기에 가장 악한 것이 뭐냐하면 ‘나는 예수를 믿는다’가 가장 악한 것이예요. 왜 나는 예수 믿습니까?. 왜 믿어야 되요? 그 정도로 내가 착하기 때문이에요. 주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내가 예수 믿는다는 그것마저도 악하다고 인정하고 예수 믿는다? 그럴리는 없다고 여기시는 거예요. 내가 예수님을 믿어주면 예수님이 얼마나 좋아 하실까? 그게 바로 악한 짓이에요. 이야기 끝났어요.
주어 자리에 서술어를 집어넣으면 자기가 목적이 되면서 실체가 주체로 바뀌어요. 예를 들면 ‘나는 의사다’에서 ‘나는’은 주어고 ‘의사다’는 술어잖아요! 나를 설명하잖아요 그런데 ‘나’를 ‘의사’자리에 집어넣으면 ‘의사는 곧 나다’그러면 이 세상의 모든 의사는 ‘나’가 되니까 ‘나’말고는 의사가 세상에선 없지요. 진짜 의사는 나 밖에 없어요.
사람들이 ‘나는 남자이다’라고 대개들 말하잖아요? 실은 많이 양보를 한거예요. 사실은 그게 아니고 ‘나만 남자이다’ 이런 뜻인데 차마 솔직하게 말은 못하고 예들 들면 ‘나는 가수다’에서 실은 그 뜻이 아니고 “나만 가수다”예요. 나만 가수인데 예의상 남을 배려하는 입장에서 나는 착하니까 사실은 나도 가수다 이렇게 이야기하는게 솔직한게 아니고 나만 가수예요. 다른 사람은 덜 가수예요.
십자가마을에서 복음을 들었다가 나간 사람들의 특징이 뭐냐하면 ‘너만 목사냐’ 이근호 너만 목사냐 라는 말은 뭐냐하면 무슨 뜻입니까? 평소에 나만 목사다라는 것을 이미 그것을 갖고 있는 거고 그것을 건드리니까 네가 목사가 아니라 내가 진짜 목사이다. 저보고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언제든지 누가 나를 건드리기만 하면 가만 두지 않겠다라는 뜻입니다.
남자 형제가 둘이 있다고 합시다. 아버지가 무심코 얘야! 아들아! 하고 저녁 때 맛있는 것을 큰아들에게 주면 동생이 “나도 아들인데..” 사실은 나도 아들이다가 아니라 나만 아들이죠! 속으로는 “아버지는 형을 몰라! 형이 얼마나 다른 짓을 하는가를 몰라! 진짜 내가 사랑하는 아들인데..”
인간이 선악과를 따먹고 난 뒤에 왜 생명나무를 따먹지 말아야 하는가 하면 생명나무는 진짜 아들만 따먹어야 돼요. 아들 아닌 다른 사람이 따먹으면 안되요. 하나님의 아들에게만 따먹으라고 생명나무를 주신 겁니다. 그러면 생명나무를 못 따먹게 했다는 것은 아들이 아니라는 말이 되거든요!
아들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뭐가 되었냐하면 ‘나도 신이다’라고 하는데 사실은 ‘나만 신이다’라고 하는 식으로 이미 인간 자체가 변했어요. 변했다는 사실을 본인은 모르지요! 모르니까 일단은 생명나무를 못먹게 해서 알려주고 그 다음에 그 생명나무가 선악과 속에 들어오므로 말미암아 선악과가 들어와서 자기 속에 들어온 그 진리를 포착하는 순간 자기는 왜 생명나무를 못 따먹는가를 들통나게 만드시는 작업에 하나님은 무사히 성공하신 겁니다.
구멍을 낸 거예요. 인간 자아 속에, 그 주체 속에 구멍을 낸 겁니다. 선하다고 추구하는 그 속에 뻥! 하고 빵구가 뚫린거에요. 지난 낮 설교 기억나지요? 법이 살아 있으면 ‘내가 죽었다’라는 것. 내가 펄펄 살았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전부다 치워버린 거예요. 치워버리니까 혼자 기살고 잘난거예요.
바이올린 신들리듯 켜는 거예요. 그런데 연주 끝나서 박수를 받고 난 뒤에 오는 허무함과 허탈감. 뭐야! 이거 잘 한다고 천국 가는 것도 아닌데 이게 하나님께 영광도 아닌데 그냥 타인이 있기에, 남이 있기에 남 보란듯이 그들의 욕망을 흉내낸 거예요. 그들이 원하는 욕망을 비슷하게 맞춰주려고 애쓴거 뿐이거든요.
왜? 타인의 욕망을 자꾸 그리워하느냐 하면 나는 나만이 신인데 신의 내용이 뭔가 구멍이 났어요. 그 구멍을 타인의 욕망으로 자꾸 메꿔야 일시적으로 내가 진짜 나만 바이올리니스트고 나만 피아니스트고 ‘나만 최고다!’라는 것이 일시적으로 되는데 그게 새로운 타인이 등장하게 되면 그것이 시들해져 버려요.
“아이고! 저건 나에겐 없는건데! 저건 내가 구경도 못해 본건데! 저것마저 채워야 내가 새로운 만족과 기쁨을 얻을건데! 이렇게 되는 겁니다. 도대체 욕망이라는 것이 나에겐 없어요. 그런데 등장하는 순간 나는 가만히 있게 되면 욕망도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음 또는 가만히 있다라는 일종의 동사형을 취해요.
나는 가만히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갑자기 남이 들어오게 되면 나는 가만히 있었거든 이라고 갑자기 앞에 ‘나’가 붙어 버려요. 타인이 등장하게 되면 순간적으로 타인이 ‘나’라는 주체를 다시 부각시킨다니까요. 그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고 있느냐라고 생각하면서 타인을 보게 되요.
누군가 우리집에 왔다. 내가 지금 옷을 제대로 입었나? 방 청소는 했나? 갑자기 바빠져요. 왜? 저 사람이 나를 볼 때 내가 어떻게 보이느냐? 순간 내가 어떤 행동에 나서는 거예요. 아무도 집에 오지 안왔다면 그런 행동도 하지 않았을거에요. 집에 개와 함께 있던지 아니면 어질러 놓았든지 괜찮아요. 아무도 없으니까!
그래서 부부끼리 서로 편한점이 뭐냐하면 같이 있어도 남이 아니라는 거지요. 그런데 애인 사이는 서로 뽀뽀도 하고 그렇지만 부부는 그렇지 않아요. 재미없어요!. 새로운 욕망을 유발시키지 못해요. 모르죠 또 화장 진하게 하고 안하던 짓을 하면 몰라요. 남자는 끈임없이 바람을 피게 되요. 안 피우는건 여건이 안돼서 그렇지요.
그런데 그것에 반해서 여자는 같은 남자에게서 끈임없이 새로운 것을 요구하지요. 왜? 남편을 위해? 아니지요! 내가 얼마나 매혹 덩어리인지를 증명할 증거를 찾아요. 이애도 나한테 안 반해? 이런식으로 맛있게 요리해 주면서 이래도 나에게 안 반해? 특별식 잡채 해주면서 이래도 나에게 안 반할꺼야? 둘이서 영원히 하나되지 않습니다.
그야말로 누가 이야기 했습니까? 엄정화 나온 영화 ‘결혼은 미친짓이다’ 라고. 몰라요. 알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도 결혼을 해야 되고 또 하게 되는 이유는.. 아무도 결혼 하려 하지 않으려 하는데 어떤 타인이 커플로 등장하는 순간 “내가 화딱지 나서 결혼하고 만다” 송일국처럼 이쁘장한 아들 셋 낳고 이휘재가 아들 둘 낳으니 나도 쌍둥이 낳을거다!. 꼭 이렇게 유발시키게 되있어요.
이슬람 체제를 붕괴시키는것은 다름아닌 연예인 이영애에요. 대장금에 나오는. 이란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대장금 연속극, 드라마입니다. 백날 종교적으로 기독교가 어떻고 해도 필요 없어요. 드라마 보여 주게 되면 미얀마, 태국 아이들이 다 이슬람 두건 덮어 쓰고 춤추고 있다는 거예요. 새로운 것은 어떤 국가의 정책도 북한의 이데올로기도 소용없어요.
새로운 것을 막을 수 있는게 아무도 없습니다. 물건은 항상 새로워야 팔리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없는 소비를 만들어서 내서라도 물건을 팔아대잖아요. 그래서 있는 물건은 폐기 처분하고 새로운 물건 만들고 삼성 그룹에 있는 사람들이 왜 밤 늦게 까지 일하는데요? 일을 그렇게 시키는 이유가 뭡니까? 크리에이트. 새로운 것을 창조하기위해서지요. “너희가 창조를 해라!”
자! 오늘 본문에 있던 사도행전28장 이야기는 늘 이렇게 테두리를 만들어 버려요. 우물을 만들어요. 그런데 우물 속엔 아무도 가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말씀이 오는 곳엔 항상 싱크홀을 만드는게 말씀입니다. 푹! 꺼지게 만들어요. 선과악이 있었던것이 전체가 악이 되어 버려요. 말씀 전하는 앞에서 전부다 악이돼요.
따라서 그 악중에 하나가 뭐냐하면 예수 믿어서 구원받겠다는 그 구원의 탐욕. 나는 예수 믿어서 영생얻는다. 영생 얻겠다는 탐욕도 악으로 규정해 버립니다. 이 백성에게 가서 말하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부지 알지 못한다 여기서의 주체가 누구에요? 여기 깨닫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것은 서술인데 서술의 주체는 누굽니까? 세자로 “이 백성”
이 이 백성이 깨닫지 못해요. 그러면 백성은 누가 만듭니까? 아까 처음에 강의 했지요? 모든 말씀은 누가 사져간다? 예수님이 가져가지요! 예수님께서 누굴 만듭니까? 이 백성을 친히 만들어 내요. 어떻게 사람들이 생각하는 이 백성을 거부함으로써 예수님에 의해서 친히 만드시는 백성으로 말씀이 완성했으니까 완성항 것을 솔솔 풀어내게 되면 그 완성된 보따리 속에 뭐가 포함되어 있어요?
예수님이 만들어 내신 진짜 백성이 거기 있지요. 그 사람들이 무엇을 믿느냐하면 “주여! 저는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하겠습니다”라는 고백을 만들어 내면서 그 사람은 백성입니다. 주님께서 성공하신 거지요. “주여! 저는 예수를 믿지 않습니다.” 이게 바로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믿음인데 우린 또 다시 세상으로 돌아서게 되면 자아가 다시 주체의 자리로 가버려요. “주여! 제가 믿잖아요!” 갑자기 내가 믿어서 내 영생을 얻는 것처럼 이제 예수 믿었으니깐 난 착해졌으니깐 나의 착함으로 내 구원을 마무리 지으려고 하는 속내를 또 드러낼때 그게 바로 성도 안에서 반드시 나와줘야 되는 육이 되는 겁니다.
“아! 이것 때문에 주께서 내 대신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야되고 대신 저주 받아야 되는 구나! 내가 예수 믿어서 구원 받겠다는 그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 받을 짓이 되었기에 주께서 피 흘리시고 그 피 흘리신 안에 완성하시고 그 속에 나 같은 인간도 값없이 구원해 주셨습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이번 주일 낮 설교에서 했지요! 방향성을 이미 죄로 씻음 받고 난 뒤에 다시 출발해야 된다는 거죠. 그것을 이용하지 않고 그렇다면 구원받는 것만 그러아냐 아니예요. 그동안 구원도 예수도 모르고 자기 마음데로 망나니처럼 살았던 모든 것까지 소급해서 다 주님이 깔아 놓은 카펫트에요.
그것마저 전에 예수믿지 않고 절에 다녔던것 까지 전부다. 절에 가야만 했고 절에서 음식 먹어야만 했고 절에 가서 이름써서 등 걸고 향 피우고 했어야만 했어요. 강도는 반드시 강도가 되어야만 하는 겁니다. 그 옆에 구원 받지 못한 강도 있지요?
구원 받지 못한 강도의 주제가 뭡니까? 주님께 “당신이 나를 구원해 주면 당신을 믿겠다” 했잖아요. 얼마나 정확합니까? 보세요! 오늘날 교인들이 하는 것과 똑같잖아요! 당신이 나를 구원 했기에 나는 당신을 믿습니다라는 그런 조건하에 살잖아요! 그게 오늘 나를 구원했기에 당신을 믿습니다.
이게 듣기에는 굉장히 복음적이지만 사실은 그게 아닙니다. 주께서 나를 구원했기에 비로소 나는 구원받지 못할 사람인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야지요. “아이고! 정답이 굉장히 길다.” 왜 이렇게 복잡하냐 하면 우리가 이방인이기 때문에 일단은 이스라엘 속에 들어가야해요. ‘이 백성’이라고 여기는 사람 속에 들어가서 다시 튕겨나가는 작업을 해야 돼요.
이스라엘은 애초부터 튕겨 나갔고요 우리는 튕겨난 경험을 못했기 때문에 들어갔다가 튕겨나오고 튕겨나온 자리에서 주님이 찾아와서 구원받고, 지난 설교에서 진짜 어려운 대목은 주님께서 찾아오신다는 대목, 우리 이 장로님이 기도 잘하셨잖아요. 맞아요. 찾아 오셔서 구원하시는 것 맞습니다.
그런데 어려운 대목이 뭐냐하면 찾아와서 구원하셨는데 지금은 우리가 주님을 찾아가야 되는 위치에 있다는게 어려워요. 우리에게 주님을 발견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어요. 그러면 주께서 찾아오시는건 알겠는데 찾아오셨기 때문에 주께서 발견해야 되는 일이 새롭게 생겼다니까요.
찾아오셨기에 주께서 가는 그 길을 가게 하시는 겁니다. 어떻게 가느냐 하면 어떤 (디즈니) 만화영화에 주인공이 쥐(마우스)인데 그 마우스에게 좋은 일이 생긴건지 뉴욕의 큰 빌딩들을 공사중인데 주인공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눈 앞에는 바로 건물옥상 끝인데도 모르고 계속 걸어가는 거예요. 그 만화영화를 보던 얘들이 “야! 저러다 떨어진다~ 떨어진다~” 가슴 졸이는데 공사중인 건물의 크레인이 마침 와가지고 떨러지는 순간에 딱! 받아줘요
그런데 정작 본인은 몰라요. 계속 따라가다 보면 크레인이 움직여 돌거든요 그렇지만 크레인의 길이가 짧아서 또 떨어지게 생겼어요. 그러니까 또 다른 건물의 크레인이 와서 순간 받아주고, 받아주고 계속해서, 우리 성도의 인생이 이렇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거리만 바라보고 있는데 그때마다 수호천사가 와가지고 딱! 딱! 받아줘요.
그런데 가끔은 뒤 돌아보게 돼요. 뒤 돌아보면 모든 것이 은혜에요. 분명히 지옥가야 하는데 지옥갈수 밖에 없는 모습을 보여 주니까 세상의 부귀영화에 빠져서 지옥에 가야 하는데 우리의 구원함이 아니라 주님이 자기 자존심을 거는 거예요. 주님의 자기 자존심 때문에 우리를 놓칠 수가 없어요.
왜? 말씀을 완성했지 저 인간을 아까 마우스(쥐)같이 철딱서니 없이 그냥 세상 부귀영화만 바라보고 있는 인간을 건지긴 건져야 하는데 우리에게 무슨 거래를 할 수 없어요. 왜 아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우리는 멍청하기 짝이 없어요. 그냥 육신적으로 살 뿐이에요. 우리 하고 싶은 데로 하나님이 그때마다 옆에 있는 공사장의 크레인으로 받쳐주지만 좋은 지도 몰라요.
멍청하게 계속가고 있으면 하늘의 천사들이 놀라지요. “야! 떨어진다” 애탄다고 할 때 탁! 받쳐주고.. 광야. 광야가 그런 모습이에요. 백성들이 원망하면 갑자기 바위에서 물 내주고 고기 먹고 싶다하는데 정육점이 어디 있어요. 메추라기 날아와서 먹게 하고 꼭 크레인이 와서 마우스를 받쳐 주는 것 같이 딱! 딱! 받쳐 주는 거예요. 그때 보는 사람들이 아슬아슬 하지요.
그런데 이미 도착한 사람들이 있어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은 지켜보고 있는거예요. “아이고! 나하고 똑같이 오네!” 엘리야, 모세 변화산에 나타났던 사람들 “아이고!” 베드로도 “분명히 저기서 떨어질텐데..” 예수님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할 때 또 받쳐 주잖아요. 그러니까 막 사세요!
왜냐하면 우리는 막 사는 것 밖에 다른 걸 할 재주가 없어요. 할 줄 아는 게 그것 밖에 없는 거예요. 사도행전 주제는 뭐다? 우리로 하여금 막 사는 인간을 주께서 살아계셔서 우리를 말씀으로 건지셨다. 그래서 주님은 주가 되시고 우리는 주가 아니다라는 것이 사도행전끝 부분에 보면 그렇지요!
사도행전을 보면서 보던 사람은 생각할거예요. 사도 바울이 어떻게 되었어요? 어떻게 죽었어요? 이미 사울은 죽은 자에요. 사람들은 그것을 같은 인간들끼리이기 때문에 같은 욕망을 가진 타인들, 타인이 살아있으니까 자기가 살아 있는 게 보이는 거예요. 그게 아니면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을 몰라요.
그냥 남이 살아있으니까 그렇지 남이 없을 때는 거울 보면 되지요. 거울 속에 있는 게 타인이에요. 거울 속에 타인과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상상적 동일시라고 하는데 제게 바로 ‘나’라고 하는 거지요. 이미 그런 의미에서 자의식, 자아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여야 ‘나’라고 아는 거지요.
자기의 전체적인 모습은 자기가 들여다봐서는 몰라요. 거울을 봐야 돼요. 거울을 보면 내 모습이 다 비취잖아요. 그것이 하나의 내가 되는 자리를 마련했다는 뜻이죠. 내가 만약에 남이 입은 옷을 보고 입게 된다면 여기서 남이 입은 옷이 뭡니까? 남도 보기에 좋아 보이는 옷이 되겠지요! 남이 입은 옷이 왜 좋아 보입니까? 그것은 이미 내가 저걸 입게 되면 이런 모습일거라고 생각해 놓고 그걸 가지고 타인을 모델로써 대입을 시키니까 좋아 보이거지요.
남이 입었던 옷을 기억해 놓고 나중에 동대문 시장에 가서 사는 거에요. 백화점에 있는 것은 비싸니까 못 사고 일주일만 지나면 동대문에도 똑같이 나오니까 거기서 사 입은 모습이 좋아 보이는 거예요. 그게 진짜 내 모습이라는거에요. 점점 공주가 돼가는 거에요. ‘나’라는 상상적인 그 형태에서 변하는 게 없어요. 삼각형 같은 모양에서 변하는 게 없어요. 삼각형안에다 집어넣는 겁니다. 그러니까 남이 살아있으니 좋아 보이잖아요.
그런데 병실 침대 누워서 시름시름 하면 안 좋아 보이잖아요. 죽어 가는 건 내가 아니고 쌩쌩 기계체조 막 하고 활짝 웃으며 아름다운 밤입니다 이럴 때 바로 이게 내 모습이다라는 겁니다. 항상 꿈꾸는 겁니다.
지난주일 오후 설교에 편집. 자기가 원하는 타인을 꿈속에 집어넣고 자기가 보기 싫으면 빼기도 하고 그래서 프로이드는 꿈 자체를 편집한 거예요. 무의식이 설명이 안 죄니까 아는 의식 서계를 가지고 스토리를 만들어서 편집한 것이 꿈이 되는 겁니다. 꿈의 해몽은 아무 것도 없어요.
꿈의 해몽은 무의식을 해몽하는 것이 아니고 의식을 재편집한 게 꿈의 해몽이에요. 속지 마세요. 진짜 꿈은 성경의 요셉의 꿈, 낯선 꿈, 바깥에 구멍을 만들어 놓고 구멍에서 예수님께서 가져오는 이 계시가 우리를 살리는 겁니다. 이로써 사도행전 다 끝났습니다. 10분 쉽시다.
대전-마18장 6-7 절 (관찰) 62강 - 이 근호 목사
(마 18:6-7절) 봅시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이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을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도다
이 말씀은 조건이 있어요.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라고 그랬지요? 그러니까 이 말씀은 뭐냐하면 나를 건드리면 너희들이 감히 상상도 못할 형벌이 미리 준비되어 있다는 거예요. 여기에 보면 ‘실족’이라는 말을 했잖아요. 그 실족의 반대말이 나와요.
반대말은 5절에 나옵니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영접과 실족을 대비를 시켰다는 말은 영접과 실족을 형성시키는 중간에 어떤 분이 계시다는 겁니다. 그 분이 누구냐 하면 바로 예수님이 되겠지요? 자!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는 이유가 뭐냐하면 “나 예수 믿습니다”는 예수 믿는 게 아니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행하심을 믿어야지 행하심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지 “나 예수 믿습니다”는 믿는 게 아니에요. 왜냐하면 인간은 그동안 우상을 섬긴 것이 자기가 관찰자의 입장을 유지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고 믿겠다는 거예요. 보고 믿을 만하면 믿고 안 믿을 만하면 안 믿겠다는 겁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계시는 자리와 자기 자리에 이미 거리가 떨어져 있지요? 보고 믿겠다. “아이고! 나는 저 ‘신’ 말고 이 ‘신’ 믿을까? 이것은 자기가 분석하고 관찰하고 있다는 거예요. 자기는 자기 관찰의 자리, 분석의 자리는 어떤 영향도 안 받고 독자적으로 나의 결정에 의해서 나의 책임하에 있어서 이 자리를 유지 하겠다는거에요.
그러니까 어떤 신을 선택하든지 신을 관찰하겠다는 말은 내 자리는 그러면 그럴수록 견고해지고 단단해 지겠지요? 어린아이는 특징이 뭐냐 하면 자기의 자리가 단단하지 않아요. 아주 보들보들해요. 젤리같아요. 조금한 영향에도 형태가 바뀌어 버려요. 그런데 주님께서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니 이 말은 뭐냐하면 굳어지기 전에 내 안에 들어왔다. 가 되요.
사실 어린아이가 주님 앞에서 칭찬 받은 것 같지만 이 어린아이가 나중에 어른되면 어떻게 됩니까? 마찬가지예요. 똑같이 책망받는 제자들과 같이 돼버려요. 그래서 어린아이를 책정하신 것은 이미 굳어진 상태에선 주님 앞에서 영접을 하던 뭘 하던 이것은 성립이 안 되는 겁니다.
왜? 굳어졌다는 것은 자기의 자리가 따로 있다는 말이고 따로 있다면 예수님을 그냥 믿는게 아니고 자기가 분석하고 선택해서 관찰하고 이모저모 따져보고 믿는 게 되는 겁니다. 여기서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우상에 관한 것인데 우상이라는 말을 나타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처음 거론 하셨기 때문에 사실은 우상적인 신이 아니고 사람들은 그냥 신을 믿어요.
나는 우상 믿을래! 하는 사람 없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나 모든 선지서에서 우상을 헛된 것으로 보는 겁니다. 그러면 그 말은 신이 헛되다라는 말은 그런 헛된 신을 선택했다 본인 자체가 헛된 선택을 했다는 말이고 선택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말이 되거든요.
그러니까 관찰해야 되는데 제대로 관찰을 못한거예요. 신을 믿는 본인이 헛된 짓을 했기 때문에 헛된 신을 믿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신을 믿을 때 거리를 두고 관찰을 해서 믿거든요. 관찰해서 믿는다는 것은 존경할만하고 섬길만해서 믿는 겁니다. 섬길만하다는 것은 그 만큼 신이 바보라는 뜻입니다.
시어머니가 늘 때마다 맛있는 걸 해다 주면 좋아하고 잘 섬기지요? 왜? 김치도 담아주고 애도 봐주고 잘해주면 그런데 시어머니가 그렇게 하다가도 싫어지는 때가 언제냐하면 나의 감추고 싶은 은폐하고 푼 것을 폭로해서 남들에게 떠벌이고 나에게 지적질 할 때 나도 숨기고자 하는 건데 그걸 공개하고 지적질 할 때 아무리 김치를 담아다 줘도 이젠 어머니 오지 마세요라고 하는 거지요.
그 말은 멀찌기 떨어져 있어야 섬기지 너무 내 속에 깊숙이 들어오면 싫은거예요. 왜? 나는 나에 의해서만 다져지고 만들어지는 그 자리를 누구한테도 공격당하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시어머니가 바보이다란 말뜻은 고마운데 진실된 나의 내면을 파악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보다 더 나를 모르니까 바보라는 겁니다.
바보이기 때문에 존경하고 섬기는 겁니다. 섬길만 한거예요. 왜 바보이거 어리숙하기 때문에 모든 걸 모르기 때문에 소통도 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남녀 사이에도 너무 알면 소통도 안되요. 서로 잘 알면 싸우게 되는 겁니다. 약간의 거리가 있을 때 관계가 오히려 좋은 겁니다.
그래서 너무 알려 하지 말라는 거고 어떤 질문을 할 때 “질문이 너무 실례되는 것 같은데 제가 그것까지 말해야 됩니까?” 이렇게 나오지요. 그러면 상대방에서 우리 사이에 서로 감출게 뭐가 있느냐 하면 그럼 상대방은 “당신 것 먼저 이야기하면 나도 이야기 할 께 ”이렇게 되는 겁니다.
주께서 어린아이를 거론하신 것은 어떤 인간도, 어떤 어른도 주님을 영접하지 못한다. 그럼 영접 못하는 것은 뭐냐 결국은 내가 관찰하는 한 그것은 모두 어린아이를 실족케하는 결과를 낳습니다. 결국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무엇을 모르느냐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철저하게 저주하고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는 사실까지 포함해서 믿질 않아요.
나에게 잘 해 주면 믿을 용의가 있지 나를 철저하게 파괴시킬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그런 말씀을 하신 이유가 뭡니까?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음 바다에 빠뜨리는 것이 나으니라 (6절) 연자 맷돌을 매고 빠져 봐야 되는 거예요. 그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느냐 하면 주님에 의해서 목에 무거운 것을 달고 빠져서 아무리 헤엄쳐도 나보다 더 무거운 연자 맷돌 때문에 아무리 허우적대도 빠져 나올 수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알게 되는 거고 다시말해 나의 선택과 관찰의 대상이 아니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그게 영접입니다.
그러면 어린아이를 물속에 집어넣느냐 어린아이는 자아가 형성되지 않았고 관찰하지 않잖아요? 분석하지 않잖아요? 그냥 주님 품안에 주님의 일부로써 포함시키잖아요. 그런데 어른인데도 그런 사람이 있어요. 백부장, 백부장이 마태복음 8장 초반에 등장해서 신앙의 메뉴얼처럼, 대표적 사례로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나이다. 이건 줏대가 없어요. ‘나’라는게 없어요.
가라하면 가고 오라하면 오는 것이 원래 군대 생활이 그런 것이지만 사람이 뼈도 없는 오징어처럼 흐물흐물해요. 가라하면 예~, 오라하면 예~, 살아라 하면 예~, 죽으라 하면 예~,미국가라면 가고 한국 오라면 오고, 그런데 주님은 이만한 믿음 못봤다 최고의 믿음이라고 하잖아요. 하나님께서 백부장이 믿음이 있어서가 아니고 믿음 속에 빠진거예요.
믿음이라는 깊은 바다에 빠져 버린 겁니다. 이제는 내가 감히 주제넘게 주님께 주님이여! 이것 해주세요! 저것 해주세요! 하고 입을 뗄 입장이 못 된다는 거예요. 왜? 나는 주 앞에서 저주를 흠뻑 받아도 마땅한 깊은 바다에 맷돌을 매고 빠져도 되는 존재임을 알기 때문에 이것이 태평양이던 대서양이던 “주님 마음대로 하세요!” 이런 식이니까
자기가 빠진 깊이만큼 전부다 주님의 은혜와 사랑의 깊이에 푹 빠진셈이 되는 겁니다. 흔히 소설에서 표현한걸 보면 얼마나 사랑했으면 장신의 눈동자에 빠지고 싶다. 그러잖아요. 눈동자에 빠지게 되면 어떻게 되요? 그 사람의 일부가 되어 버리지요. 일부가 되면 본인은 어디 있습니까? 없어요.
그게뭐냐 하면 천국에서의 ‘자아’입니다. 천국에서의 자아가 그런거예요. 자기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주변의 둘러쌓인 환경을 언급하지요!. 내가 이렇다가 아니라 나를 둘러 싼 환경이 이렇다고 하는 겁니다. 주님이 좋고 천국이 좋은 것을 이야기하지 내가 이러해서 좋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다.
사마리아 여인 속에서 생수가 나오잖아요! 사마리아 여인이 마지막에 한 이야기가 뭡니까? “나는 메시야를 만났다!” 라는 거예요. 그 만큼 지금 자기는 주님께 푹 빠진 겁니다. 그리고 자기한테서 계속 생수가 나와요. 생명이 나온다고요. 이건 주님을 만났다는 증거예요. 주님 안 만났으면 내가 나오는 거예요.
“내가 뭐 어때서?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할 만한 나이인데 내 나이가 어떤데? 남자 6~7은 계속 사귈 수 있다” 그런데 사람이 바뀌니까 자기 자체가 주님의 우물이 되니까 메시야를 끄집어내는 거예요. 나는 메시야를 만났다. 그것을 주님은 뭐라 하냐하면 그 ‘때’다 때가 돼야 된다. 이것을 다음 낮 설교에 하려고 준비하고 있습니다.
제목이 ‘몸’인데요 몸은 뭐가 만드냐 ‘때’가 만들어요. ‘때’와 ‘안’ 예수 안과 때에 의해서 몸이 새롭게 만들어 져요. 그래야 이 몸에서 자아가 안 나오고 주님만 나오지요. 7절에 봅시다.{ 실족케 하는 일들이 있음으로 인하여} 세상에 뭐가 있다고 했습니까? 화가 있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취지는 모든 사람을 물에다 집어넣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화내심, 분노를 표현하는 겁니다.(요3:16) 이 본문을 정리하면 하나님의 분노가 독생자를 통해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흠뻑 젖어서 나오는겁니다. 사랑은 뭐냐? 분노다. 사랑은 ○○이다. 이것을 알아맞추는 사람이 있을까? 사랑은 하나님의 분노다.
“내 자식 어디 갔지? 어디를 쳐다보고 있어?”라며 화 내시는 게 사랑이다라는 겁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은 영접이라고 이야기 했고 자기 자아를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실족이라고 이야기함으로써 인간이 자아가 없던적이 없었으니까 다시말해 실족케 하는 일이 없을 수는 없으나, 이 말은 모든 인간은 어쩔 수 없이 화를 자초할 수 밖에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화를 면해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전부다 사람마다 연자 맷돌을 목걸이로 하나씩 해주는 거예요. 빠져 죽으라고 ‘화’라는 바다에 빠져 죽으라고 하심에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는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 흠뻑 빠진, 영접하는 사람인거예요. 그래서 어른되어서 예수님을 영접했다라는 말은 어린아이는 아무것도 몰라서 그렇지만 어른되어서 영접했다는 말은 제가 바로 빠져 죽어도 마땅한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하는 하나님의 사람이다라는 겁니다.
그 다음 봅시다. 8절 만일 네 손이나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이게 누구에게 이해가 되겠어요? 7절 말씀에 의하면 누구에게 이 말이 이해됩니까? 목에 연자 맷돌을 매고 있는 사람에게는 충분히 이해가 가지요. “제발! 이 손과 발을 좀 잘라 주세요. 하지요.
왜 내게 저주받을 일이 와야 되느냐를 이제야 알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 손이 문제였고 이 발이 문제였군요! 주의 뜻이라면 주의 영광에 가린다면 자르신다 할지라도 저는 오히려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하는 사람을 언급하고 있는 거예요.
이렇게 설명하니 쉽지요! 문제는 쉬운데 현실에서는 실제로 현실이냐는 그 문제입니다. 말은 쉬운데 이게 현실감이 떨어지냐 하면은 내가 관찰하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예수를 믿어 볼까? 믿을 만할까? 예수님을 한번 섬겨봐?“ 주님! 저에게 한번 마음에 드는 이야기해 보세요!” 이렇게 나오니까 주께서는 이것도 의도해 이런 말들을 쏟아 내지요.
그럼 “에이! 그럼 난 주님 안 믿어!” 아까 처음에 사도행전 이야기 했지요. 너는 너 자신에 의해서 구원이 방해된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내가 왔다는 겁니다. 구원을 누가 방해 하느냐? 구원 받고 싶어하는 내가 내 구원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누가 천국가는 것을 방해 하느냐? 천국가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이 나의 천국을 방해하고 있는 거예요.
지난 낮 설교에서 기도한다고 하는 그것이 기도가 아니요라고 말했잖아요!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는 이 말은 소매치기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 보고 하는 이야기입니까? 우리 보고 이야기 하는 거죠? 지난 낮 설교를 하면서 참 설교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고 설교하면서 다 설명을 못해드린 것에 대해 참 아쉽다고 생각했어요. 혼자..
뭐가 아쉽냐 하면은 죄의 항목을 이야기하면서 왜 그것이 죄가 되는가에 대해 딱 한마디하고 후딱 지나가 버렸어요. 한마디하고,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 하고 이 뭐가 있느냐 하면 자기 의미를 집어넣으면 모든 게 악이 됩니다라고 이야기했어요. 이게 녹취보면 나와 있어요.
뭐가 악이냐 하면 자기 의미를 집어넣으면 모든 게 악이 되요. 간음이든 살인이든 도둑질이든 마찬가지예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런식으로 기존에 내가 알고 있는 의미를 집어넣으면 악이 되어버리는 이유가 내가 아는 의미를 선악과 구조에서 나온 의미입니다.
선악과 구조의 의미이고 진짜 말씀을 주신 것은 생명나무에서 낯선 의미를 가지고 계신데 그 의미를 나의 선악과 구조. 악은 버리고 선은 취하겠다는 이 구조에다가 강제로 집어 당기니까 이게 엉터리 해석이 되어 버리는 겁니다. 내가 이런 죄를 안 지어야지! 하는 그것이 바로 악이 되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여기에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이란 말씀을 생명나무 식으로 풀이하면 이렇습니다.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할 때 여기서 ‘네’는 너 자신이라고 생각하거라이고 만약 아직 범죄가 안 일어났거든 아직 너 자신에 가까이 안간 거예요. 깊은 바다에 빠져야 하는데 아직 5m밖에 안 빠졌어요.
더 내려가게 되면 네 손과 네 발이 범죄케 해야 되고 손과 발뿐만 아니고 잘려도 다 잘려야 돼요. 죽어 마땅해야 돼요. 그럼 죽어 마땅한 것을 왜 살려 내느냐? 주님의 말씀에 대한 확실성을 위하여 살려 내는 거예요. 이 말은 뭐냐하면 내가 주님을 관찰한 게 아니고 주님 쪽에서 관찰 대상으로 삼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한 겁니다.
우리가 관찰하기 이전부터 주님께서 우리를 관찰하시기 위해서 태어나게 하신 거예요. 태어나게 해 놓고 주의 깊게 관찰하는 겁니다. 비이커 안에 세균하나 넣어 놓고 대장균이 36˚실온에서 얼마나 빨리 번식하는지 쳐다보고 있는 거예요. 말씀대로 번식하는지를..
9절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이 말씀을 하신 것은 바로 바르세인을 대상으로 말하잖아요. 바르세인들은 지금 어디를 가고자 하는 겁니까? 자기 몸을 영생의 나라에 집어넣으려고 하지요. 집어넣으려고 하는 그것을 아까 첫째 시간에는 그걸 ‘구조’라고 했지요!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하는 모든 언어와 모든 가치는 구조적으로 반드시 깔리게 되어 있어요. 악은 버리고 선은 택하는 구조. 그런데 그들의 구조에 의하면 뭐냐하면 꼬리는 잘라내도 몸통은 들어가도 된다는 구조 입니다. 왜 이런 구조를 만든 것이 본인이거든요.
본인이 이 구조 안에서 악을 버리고 선한 사람이 되어서 영생의 나라에 들어가고자 시도했기 때문에 그 구조를 주님께선 그대로 활용하고 계신 거예요. 그들의 버젼에 맞추어서 활용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야기하시는 겁니다. 뭐라고 하시냐 하면 너희들이 알다시피 영생의 나라는 뭐가 없다? 죄가 없어야 되지요!
죄가 없어야 되는데 만약에 눈이 범죄하면 어떻게 한다? 너희들 구조에 의하면 눈이 범죄하면 빼어 버리고 영생하는 게 나은 게 아니냐? OK? 동의해? 동의하지? 이렇게 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구조세계, 구조 틀, 선과악의 구조틀에 즉, 이 땅에 오셨습니다. 뛰어 들지요. 이 구조를 누가 만들었냐 하면은 인간 자아에서 만들었습니다.
자아가 이렇게 만들지요. 관찰하고, 분석하고, 오늘은 악했을까? 선했을까? 자아가. 주님께서 이 안에 들어 왔다는 말은 그 구조안에 들어 오신거에요. 그 안에 들어가면 주님은 그들의 논리를 따르십니다. 그들의 논리에 의하면 완벽한 선이 될 경우에만 영생을 얻기 때문에 만약 네 신체 가운데서 조금이라도 눈이 범죄하면 눈을 빼어 버려야 된다는 말이죠.
이런 예수님의 주장에 바르세인들은 동의 못하지요. 왜 동의 못합니까? “아니고! 이 예수라는 작자 이 바보야! 눈이 범죄한 게 아니고 마음이 범죄한거야! 너 몰랐어?”이렇게 나올거란 말이죠. 그렇다면 그것이 주님께 걸려 든거지요! 결국 뭡니까? 인간의 마음을,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이 조정이 안되지요.
안되는데 그들은 어떻게 선과 악이 동시에 나오냐는 겁니다. 선이 나오든지 악이 나오든지 둘 중에 하나만 나와야 되는데, 마음은 하나인데 선과 악이 같이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그들은 마음으로 악은 싫어하고 선을 원하거든요! 그런데 악을 싫어 한다는 말이 그들은 악을 알고 있어요? 모르고 있어요?
이미 악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악을 싫어 한다는 말을 하잖아요! 그러면 악을 싫어한다고 해서 악이 안 나오냐고 주님께선 이렇게 묻는 거예요! “너희가 악을 싫어하지?” 그러면 싫어한다고 해서 악이 안 나오냐는 말입니다. 싫어해도 악이 나오지요! 악이 계속 나오잖아요! 악이 나온다는 말은 악이 들어 있다는 말이죠!
악이 들어 있다면 죄인이라는 뜻이지요! 그럼 죄인은 영생 못 얻는데 ? 어떡하면 좋아요? 이 문제를? 그들은 말합니다. “선하려고 애썼잖아요!”또는 “악을 버리려고 노력했잖아요! 최선을 다했잖아요!”라고 하잖아요. 그럼 최선을 다해서 선이라고 여기면 어떻게 된다? 지옥 불에 안 가잖아요 그런데 지옥가는것은 누가 결정한다고요? 바로 예수님!
주님이 결정한다. 누가 지옥가는가가 궁금하지요? 바로 노력해서 영생에 들어가려는 너희들이 예수님 보기에 지옥간다에요. 차라리 어린아이가 들어간다. 왜냐하면 어린아이는 자기가 판단하고 관찰하지 않아요. 그냥 주는 대로 시키는 대로 해요. 그냥 주는 대로 지옥가라면 지옥가고 천국가라면 천국가고 주는 대로 받아요. 그게 영접이에요.
주는 대로 주님을 영접하는 거예요. 그러나 자아가 있는 자는 특징이 뭐냐하면 그렇게 영접한 자를 실족케하는 식으로 자기 자아 가치를 유지하려 해요. “너는 왜 나처럼 안 돼?” 남을 배타하면서 자기 자아를 구축하려 합니다. 그 배타시 하는 자리에 누가 있느냐? 주님이 계셔서 인간에게 밀려서 십자가에서 죽는 그 길을 지금 이런 말을 토하면서 그 길로 가고 있다는 겁니다. 아주 논리가 복잡해요. 주님은 인간의 구조를 사용하시면서 그 구조를 따로 뽑아내신다는 방법을 사용하신다는 말입니다. 따로 주어지는 게 아니고 그들의 구조 속에서
즉 구조 안에서 한 장인데 갑자기 습자지가 한 장 인줄 알았더니 두 장이에요. 옛구님 혼자 분리가 되요. 같은 종이라고 여겼던 12제자가 전부 다 떨어져 나가요. 베드로는 세 번 씩이나 모른다고 하고 난리 났어요. 다 떨어져 나가요. 오직 주님 혼자 가요. 아무도 영접 할 수 있는 능력 없었다. 아무도 어린아이 될 사람 없다. 이 어린아이 같이 되지 않으면 천국에 못 간다고 했지만 아무도 어린아이 될 수 있는 어른은 없는 거예요.
그러면 주의 말씀은 헛소리냐! 아니에요! 주께서 완성하신 그 마음이 어린이가 되어서 천국가는 게 아니고 천국 간 사람이기 때문에 어린아이 되게 하셔서 그 어린아이가 되게 한 것이 주님께서 미리 만들어 준 것을 인식하는 그 길을 찾아오고 발견해서 오도록 그렇게 하시는 겁니다.
10절에 봅시다.{삼가 이 소자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마라} 그러면 소자가 어디 있습니까? 오늘 강의 중 가장 어려운 부분인데 정답은 소자는 없습니다. 소자가 몇 살입니까? 모릅니다. 소자가 없다라는 것은 결국 이 말씀은 주님에 의해서 다시 소자가 만들어지는 한에서만 소자가 있게 되는 거지요!
그것이 예수 안에서 우리가 구원받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내가 된거에요. 성도가 된거지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이지 어린아이같은 마음을 갖추어서 구원 받는 게 아닙니다. 이미 구원 받았기에 어린아이 마음이 되게 하셨고 어린아이의 마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인식하도록 그런 환경들이 조성되는 겁니다.
그래서 아까 제가 인간은 육과 영이 다 있다고 했잖아요! 그래서 그런 마음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성경이 어렵지 않아요. 뭐냐하면 “아~하! 주께서 이런 식으로 만들어 주시는구나! ”이렇게 되는것이지 “내가 지켜야 되는구나!”가 아니라 “이게 현실이네!” 나의 한 달 수입이 얼마고 우리 집에 누가 찾아오고가 현실이 아니고 성경 말씀이 현실이에요.
“오늘 강아지가 왜 조용하지?” 강아지가 조용하다는것이 현실이 아니고 왜냐하면 지금 강아지가 조용하잖아요! 이게 관찰 된거예요. 인간은 자기가 관찰한 것을 현실로 해버려요. 편집을 해서 우리는 관찰할 자격이 없어요. 다만 주님을 경유해야돼요.
지금 강아지가 짖지않고 조용하지요? 하면 주님은 “그래서? 뭐? 어쩌라고! 그게 현실이 아니야! 뭐가 현실이냐 하면 강아지가 조용하다고 관찰하는 네가 현실이야!” 그러니까 강아지가 조용하네라고 생각하는 순간 이게 무슨 의미일까? 라고 하는 그것이 주님을 생각하도록 유발된 환경이 강아지를 조종한 거예요. 제가 이렇게 복잡하게 설명했지만 보통은 복잡하지 않아요.
평소에는 “아~ 심심해!” 이러 잖아요! “아~ 따분해! 어디서 전화 안오나?” 주여! 이게 무슨 의미지요? 반대로 “정말 밥 먹을 시간도 없네! 아~ 왜 이리 바쁜지 몰라! 전화 그만하자! 엄마! 나 무지 바쁘거든!” 주여! 이게 무슨 의미입니까? 이렇게 주님을 바라보도록 그때마다 성령께서 개입을 하신 거예요.
그게 성도의 특징이에요. 그냥 살아가요! 살아가는데 가끔은 하늘을 보자! “볼 이유가 없는데요?” 해도 생각나게 되고 주님을 경유하게 되는 현상, 이게 아주 특이한 현상이에요. 소자예요. “주께서 나를 관찰하고 계신 것 맞지요?” 주님의 관찰은 아담 때부터 있었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주님께서 관찰하고 계신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관찰 할 때만 주님이 현재가 되지요! 우리가 주님을 생각하지 않을 때 주께서 관찰 한다는 말은 주께서 관찰 한다는 말은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하나님의 현존하시고 하나님이 거기 계시는 거예요. 축복이라는 게 다른 게 아니고 주님이 여기 계심을 아는 게 축복이에요.
피아노를 잘 치는 것이 축복이 아니고 주님이 거기 계신다는 것. 그러면 소자가 되고 소자는 관찰의 자격이 박탈됩니다. 사람은 왜 관찰하면 안 되냐 하면 하게 되면 걱정해요. 만약 좋은 것이 있으면 저게 언제까지 좋을 런지! 나쁘면 언제 이 고난이 빨리 지나 갈 건지? 항상 새로운 시간개념을 집어넣고 현실개념을 집어넣기 때문에 주님을 경유하지 않기 때문에 고민과 스트레스가 생겨요.
주님의 현존이라는 말은 목에 연자 맷돌이 있는데 거기서 빠져 나올 걱정을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어요! 그 뒤에 봅시다. 10절{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이 말이 무슨 이야기냐 하면 천사들이 우리를 지킨다라고 하면 우리가 수월할텐데 천사들이 우리를 지킨다는 말을 이 쪽에서 하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우리가 천사들을 찾아다니느냐 바빠서 그래요. “천사! 빨리 나와 봐!” 우리는 이렇게 자꾸 관찰하잖아요! 왜? 내 중심이기 때문에 그래요. 내가 소자가 아니고 어른이거든요. 내가 자꾸 어른 되려고 하다 보니까 우리는 내 자아의 자리를 포기 하려고 생각 안해요.
내 것을 사수하고 지키는 것이 존재의 속성이기 때문에, 그런데 본문에 보면 천사가 어떻게 합니까? 천사가 우리보고 나와 보세요! 이렇게 하지 않고 어떻게 한다고요? 우리를 아예 제껴 버리고 천사는 누굴 바라본다? 주님 앞에서 천사들이 일일이 보고 하지요. 천상회의에서 “제가요 지금 이러이러합니다.” 라고 천사가 주님 앞에서 계속 이야기합니다.
(계 4:6) {보좌 앞에 수정과 같은 유리 바다가 있고 보좌 가운데와 보좌 주위에 네 생물이 있는데 앞뒤에 눈이 가득 하더라} 에서 앞뒤에 뭐가 있어요? “‘눈이 가득 하더라’ 에서 왜 ‘눈’이겠어요? 왜 귀가 가득하더라 하지 않고 왜 눈이겠어요? 이 지상의 모든 것은 천사의 관찰범위 안에 속합니다. 완전히 인공위성이에요. 온 지구를 다 포착하고 있는 관찰위성이에요.
그래서 아까 첫째 시간에 했듯이 우리가 모든 것은 하나님안에서 행하는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안에서 행하기 때문에 (요:3:16)의 어디가 해석되냐 하면 (계22:12)이 가능해져요.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대로 갚아 주리라}이제 ‘아멘’ 되십니까? 이게 ‘아멘’ 안 되면 곤란한데요.
행한데로 갚아주고 보상해준다는데 이거 해석을 어떻게 하실래요? 누구 안에서? 하나님 안에서 행한 거예요. 주께서 어떻게 관찰하고 있으니까? 관찰된 모든 것이 소급해서 네가 행한 게 아니고 주께서 행한 것이라고 이렇게 전부다 의미를 변화시켜줘요. 천사가 관찰해줘요. 어려서 코 후비고 오줌 싼 거까지 전부다. 주께서 그렇게 하게 하신 거예요.
그걸 제가 주의 일이라고 자주 언급하잖아요. 소급해서, 사후에, 일이 다 터지고 난후에 소급해서 다 보는 거예요. 강도가 구원 받은 것도 다 그것 때문에 구원 받은 거예요. 강도 해야만 구원되고 강도해야만 지옥 가는 거예요. 강도 자체는 의미 없어요! 천국 지옥을 결정하는 게 아니고
나의 의미가 개입되면 전부다 ‘악’이 되고 주의 의미가 개입되면 전부다 하나님의 “의‘가 되는 겁니다. 진짜 성경 쉬워요. 더 이상 쉬울 수가 없어요. 정말 쉬워요. 어떻게 더 이상 쉽게 할 수가 없어요. 오늘 본문(마:18:12)은 제가 이 말을 하고 싶습니다. 너희 생각에는 어떠겠느냐 이게 동의가 되냐는 말입니다. 너희 생각은 어떻느냐? 예! 그러내요.
너희 생각에는 어떻느냐는 이 말은 바로 이제부터 너희 생각은 없다는 겁니다. 나의 생각이 너희의 생각이 되는 때가 올거다라는 말입니다. 그때 가서 마태복음18:12절을 다시 보라! 너희 생각은 어떠하뇨 다시 보게 되면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 이 성경을 다시 보라는 얘기지요!
그러면 “아~하! 우리 생각을 묻는 게 아니구나!” 주님 생각을 집어넣고 주님 생각을 회수해 가시면서 우리가 그냥 딸려 온 거예요. 주님의 마음에 합한 것으로 간주되어 딸려 온거에요. 우리 생각이 아니였고 전부다 주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우리 마음을 회수하면서도 회수 할 내 마음이 사실은 없지요.
항상 뭔가 내것이라고 여겨 놓고 돌아보면 다시 거기서 빈 구멍이 생겨요. “이게 아닌데, 이게 다가 아니야! 이게 뭔가 아니야!” 항상 결핍을 느끼고 자주 그런 걸 느낍니다. 결핍을 내가 왜 느끼냐 하면 쾌락의 잉여라고 하는데 넘치는 쾌락이 나로 하여금 현실에 만족치 못하게 만드는 거에요.
그래서 선한 일이든 악한 일이든 어떤 일에 몰두하게 되면 전부 쾌락으로 빠져요. 선하게 빠지는 걸 가지고 자학적이다. 악한 일에 빠지는 것을 타학적이다라고 합니다. 따지고 보면 둘다 자학적이에요. 전부다 철저하게 자기를 치고 때리고 처음에는 재미있어 악한 일을 하는데 나중에는 그 악한 일을 하면서 수고하는 자기 자신을 때려줘야 아픈데서, 미처 평범할 때 느끼지 못한 아픔이 나오는 겁니다.
대표적인 것이 구제하기, 봉사하기, 나중엔 기계처럼 되버려요. 기계적으로 새벽 기도 나가기, 기도 두 시간 안하면 그만 안두기, 계속 착한 일 찾아하기, 봉사하기, 공부도 계속 공부하기 이런 것. 너희들 생각에는 어떠하뇨?
다시말해서 이것은 주님 생각이 어떠한지 관찰하지 말고 현재 너를 관찰하는 것이 주님을 관찰하는 것이다. 멀리 찾지 말고 현재 네 마음이 내 마음으로 바꾼 너의 마음, 너의 생각이 어떻느냐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막 살라는 말이죠. 막 사는 그 것이 주님께서 일으키신 사건인데 그 사건을 네가 어떤 평가를 내리겠냐는 말입니다.
그 대표적인것이 뭐냐하면 “그러면 내것이 없잖아요! 바로 그거다!” 내것이 없어져야 하는 그 마음이 네 마음이란 말이죠. 그래서 나온 게 어떤 사람이 한 마리 양을 잃어버리는 것. 어떤 사람에게 양이 백 마리 있었습니다. 양이 백 마리가 있었는데 주님께선 한 마리가 있었다고 안 하시고 양이 백 마리 있었는데라는 말을 하지요.
그러면 사람들의 구조, 바르세인의 구조 다시 이야기 합니다. 바르세인의 구조가 뭐라구요? 선악과 선과악을 체택할 때 아까 선이 어디에서 나왔다? 자기의 마음에서 나왔지요? 그러면 악을 죽이고 선을 자기가 영생을 얻는다고 생각 했지요? 그러면 많은 쪽이 선한 쪽이라 하면 되는 거지요?
그러면 양이 백 마리 같으면 목자가 제대로 된 목자가 만약에 천국엘 간다면 적어도 51마리 살리면 괞찮은 거예요. 왜 51마리 보다 49마리가 더 많으니까! 그렇잖아요? 아니 백 마리에서 한두 마리 잃어버린들 어때요? 사람이 천사도 아니고 한두 마리 잃어버린들 어때요? 그것과 상관없이 천국 가는거예요. 왜? 99마리나 잘 돌봤기 때문에 천국 가는 겁니다.
예수님이 이야기 합니다. 백 마리 양이 있는데 제자들에게 묻습니다. 한 마리를 잃어 버렸다. 목자가 어떠하겠느냐? “아이! 그냥 가지요!” 왜 백 마리에서 한 마리 정도는 잃어버려도 괜찮습니다라고 그러면 주님께서 아마 양의 수를 더 늘여 버릴거예요. “자! 양이 천 마리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를 잃어버렸다. 어떻게 하겠는냐? 아니고! 999마리나 있는데 그냥 가지요!
그러면 양이 만 마리가 있었다. 그중 한 마리를 잃어 버렸다 어떻게 하겠느냐? 그야 당연히 무시하고 그냥 가지요!“ 그런데 진짜 목자는 만 마리가 아니고 십만 마리, 십억만 마리가 있어도 잃어버린 한 마리 양을 찾아 나서고 99999마리 양은 나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게 되있어요.
왜 그 양에게는 무엇이 있기 때문에 ‘잃어버림’이 있기 때문에, 그러면 주님은 어느 곳에 마음이 있습니까? 잃어버린 경험이 있는 자에게만 주님이 내주한다고 확정지을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매일 같이 우리는 잃어버려야 되지요! 잃어버리려면 매일 같이 우리 속에서 뭐가 나옵니까? 죄가 나와야 되겠지요?
그래서 우리는 육신이 살아 있어야 되고 육신이 살아있어서 계속 잃어버린자가 돼야 하지요? 그리고 심지어 이런 말도 하지요! “주여! 제가 예수 믿는다는 탕자의 짓을 했습니다.” 라는 고백을 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맏이는 뭐가 문제였습니까? 가출하지 않은 것이 문제예요. 그러면 그 뒤에 가출 하면 되잖아요? 안돼요!
그 뒤에 가출할 때 탕자라는 타인이 등장해서 그것을 모방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거예요. 두 번 다시 탕자하면 안돼요. “에잇 때찌 이 놈! 탕자는 탕자했다는것이 그걸 모델로 삼으면 탕자 아니면 구원 받겠다 이건 완전히 우리나라 흥부전하고 똑같이 되는거에요. 놀부가 그 짓해서 이미 흥부가 했던 일을 자기가 흉내내서 한 것이 문제라는 겁니다.
예전에 (마르셀)뒤샹이란 사람이 최초로 (남자용)소변기를 받침대 위에 놓고 전시하자 세계적인 작품이 되었지요! 그 다음에 다른 사람이 따라 한다고 해서 이제 안 알아줘요. 최초가 아니라서, 항상 주님의 일은 처음이자 끝이에요. 그걸 흉내 내면 안돼요! 내가 전에 예수 믿었던 것을 오늘 흉내 내면 그걸 믿음이라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새로운 걸 하면 되지않나? 새로운 것을 우리는 할 능력이 없어요. 어떻게? 우리의 죄가 발견될 때, 죄가 새로움을 만드는 재료가 되기에 왜? 그래야 회개가 되니까! “아! 탕자군요!” 집에 돌아와도 계속 탕자이어야 되는, 만약에 탕자가 집에 돌아 왔는데 탕자가 아니다하면 그때부터 가락지와 옷은 본인이 돌아온 값을 하고 있는거에요.
“내가 참 잘 돌아왔지! ” 자기 의가 되어 버려요. 동네방네 본인 자랑한다니까요! 아버지 자랑하는게 아니고 “참! 내가 타이밍 잘 맞춰왔지!” 나 때문에 아버지가 좋아하신다 이런 식이에요. 그러니까 아까 제가 그랬잖아요. 주어 자리와 술어 자리가 나는 탕자다에서 주어 자리에 술어를 넣어버리면 나만 탕자다가 되어 버려요.
하여튼 인간은 안돼요! 인간은 끝까지 성령께서 붙잡아 줘야 되지! 이것은 인간 스스로 안돼요! 자!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길을 잃었는데 나머지 99마리는 두고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안 찾지요! 찾는다고 한다면 양의 수를 천 마리로 늘이라 하십니다. 그래도 찾겠습니다라고 하면 “이 오기 봐라!” 그럼 만 마리로 더 늘이겠다 하시지요.
주님께서 양이 두 마리 있는데서 하나를 잃어 버렸다! 찾겠느냐? 안 찾겠느냐? 하면 찾겠습니다. 그러면 얘기가 안되니까 열 마리로 늘이겠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아니한 아흔 아홉 마리 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그러면 아흔 아홉 마리의 역활이 뭡니까? 맡은 배역은 주께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라는 역활에 충실해야 되겠지요!
그래서 이 세상에서 지옥가냐 천국가냐 다 배역을 맡은 겁니다. 주께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신이 버린 남자, 신이 버린 여자, 예수 안 믿는 판사, 예수 안 믿는 변호사, 의사, 국회의원들의 별명을 신이 버린 남자, 신이 버린 여자, 사실은 우리도 신이 버린 사람으로서 우리는 비이커안에 박제 된거지요!
제가 불신자들이 하는 것중에서 가장 짜증나는 것 하나가 병에 뱀을 하나 집어넣고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완전히 이건 술에 박제 되었잖아요! 이게 바로 성도예요. 꿈틀대봤자 죽은 자에요. 그 안의 알콜이 뭐냐하면 주의 사랑이예요. 주의 피 안에 박제, 주 안에서는 술 맛 좋다! 하시는 거예요. 이게 예수 안에서의 구원입니다. 오늘 강의 제목을 뱀술로 할까요? 오늘 강의 끝내겠습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잃어버린 양으로서 살아야 하는데 우리는 육신 때문에 내 욕망에 새로운 현실을 만들고 그것에 울고불고 하고 있습니다. 주여! 성령께서 개입해서 관찰하지 말고 관찰 당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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