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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고린도전서 3:6-9 / 자라게 하시는 분 본문

신약 설교, 강의(이근호)/고린도전서

고린도전서 3:6-9 / 자라게 하시는 분

정인순 2014. 11. 23. 16:12

 

 

이근호

음성             동영상  

 

고린도전서 3:6-9  자라게 하시는 분

 

하나님의 구원 작업이 마치 농부가 농사짓는 일과 같습니다. 여기에 관여해서 종사하게 된일군들이 있는데 그들이 바로 사도요 같은 성도들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고백 속에서 그 동안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드러냅니다. 즉 자신들은 자기 구원에 대해서 아무 것도 한 게 없다는 겁니다.

 

분명히 주변에 예수님의 소식을 가져다 전달해 준 이들은 많지만 그들도 한결같이 공통적으로 고백하는 바는, 자신들이 타인의 구원에 대해서 주도적으로 관여한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눈에 보이는 사람들끼리의 세계를 성도는 일체 인정하지 않습니다. 인간들은 아무리 서로 협조하고 협력해도 서로가 서로를 자라게 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는 인간 외에 믿을 만한 마땅한 의지처가 없음을 매일같이 확인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요행을 기대하나 결국 소정의 결실을 맺는 것은 자기 하기 나름이다 는 사실을 늘 확인되는 가운데 인생살이를 하고 있습니다. 믿을 자는 오직 자기 자신 외에는 없음이 날이 갈수록 확신이 듭니다.

 

‘우리 끼리’ 말고 달리 도와줄 곳은 없다는 겁니다. ‘나는 오직 신의 도움과 신의 기적만 믿는다’고 광고하고 다니는 것은 타인으로부터 종교적 동정을 받아서 타인의 수확을 그저 얻어내려는 수작이요 상술이요 사기술의 일종입니다. 사도는 아뭇소리 안했습니다. 단지 지금도 묵묵히 하나님이 일하시고 친히 구원을 주도하신다는 사실을 증거할 뿐입니다.

 

따라서 교회라는 것이 상당히 위험한 곳이라는 사실을 사도 바울은 경고하고 있습니다. 서로에게 자기 공적을 챙기지 맙시다. 주님이 하신 일을 ‘내가 했다’고 주장해서는 아니됩니다. 사도들은 타인들이 자신들의 성과를 논하는 현장에서 극구 ‘보이지 않으신 주님께서 해내신 일’이라고 증거하는 기회로 삼았습니다. 참으로 성령 받은 자들은 다 이와 같습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근호

 

자라게 하시는 분

2014년 11월 30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3:6-9

(3: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3:7)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

(3:8) 심는 이와 물 주는 이가 일반이나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3: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성령을 받았는지 아니받았는지를 계속되는 사도의 말씀에 비추어서 파악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 7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라는 말을 할 수 있어나 성령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아무 것도 아니다’ 속에 자신도 포함시켜 놓는 안목을 지닌 자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2장부터 줄곧 성령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은 그냥 곱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부를 겨냥하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2:11에, “사람의 사정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는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사정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성령받기 전에 인간 내부에 이미 따로 영이 따로 작용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영은 성령이 오기 전까지는 그 티가 전혀 나지를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최선의 노력과 지혜를 다 동원해서 바르게 살면 된다고 여깁니다. 불교에서는 8정도라는 것이 있습니다.

① 정견(正見):올바른 이해 ② 정사유(正思惟):정견에 따라 철저히 실천하겠다는 각오 ③ 정어(正語):거짓말, 중상하는 말, 모욕하는 말 따위를 삼가하는 것 ④ 정업(正業):생명을 해치거나 도둑질을 하거나 부정한 성행위를 하지 않는 것. ⑤ 정명(正命):불교의 가르침에 부응하지 않는 직업은 택하지 않는 것. ⑥ 정정진(正精進):나쁜 마음가짐을 피하고 바른 마음가짐을 계발하는 것. ⑦ 정념(正念):신체와 감정과 사고의 움직임에 대하여 깨어 있는 것. ⑧ 정정(正定):바르게 집중하여 명상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게 바로 육입니다. 자기 역사(歷史)는 자기 하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바르게 살면 바른 역사가 만들어지고 흉하게 살면 나쁜 역사가 만들어진다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게 살게 되면 오늘 본문 3:7의 말씀처럼 ‘아무 것도 아닌 게’ 아닌 것이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자라게 하는 바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생각해놓으신 ‘자라게 하는’ 질(質)이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악령이 지배하는 그 성도의 내부에 성령이 오시게 되면 그 사람은 비로소 자기 중심에 자리잡은 자신의 육이 발각되면서 외부로 그 정체를 노출시키게 됩니다.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성도는 비로소 자신이 근원적으로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자백하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인간 내부에 유령하는 존재가 들어 있다는 말입니다. 이 유령은 자꾸만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의식하고 비교하게 됩니다. 이런 자가 성령을 받게 되면 신앙의 문턱을 넘어서게 됩니다. 문턱을 넘는 순간부터 그 사람은 말씀의 관람자가 아니라 아예 말씀 속으로 들어가 있게 됩니다.

이때부터 이 사람은 혼란에 싸이게 됩니다. 그냥 편하게 성경을 보면서 참한 자기 역사(歷史)를 만드는데 유용할 말씀들을 뽑아서 괜찮은 자아성을 수립하려고 시도해보다가 더 이상 그런 짓들이 악령이 시킨 짓이라는 사실을 접하게 됩니다. 즉 말씀을 지켜서 진즉 본인이 원하는 것을 하나님으로부터 얻어보려고 하다가 실패로 끝나버리게 된 것입니다.

말씀 속에서는 더 이상 말씀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 사람을 가지고서 말씀대로 움직여주기 때문입니다. 영적 세계에 진입하지 않으면서도 진입한 티를 내면서 살려는 사람은 부지런히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쓰게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기죽지 않으려는 시도의 일환입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학생이 선생님에게 주눅 들지 않는 방법은 선생님이 내놓는 숙제보다 더 많은 양의 숙제를 해서 더 이상 자신에 대해서 간섭하지 않도록 사전에 차단하는 방식을 채택하는 것과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내가 어느 정도까지 착하게 살 수 있는지”를 늘 자신의 능력을 측정하고 테스트해 보는 방식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대로 자신의 위상을 모르고 있다고 봐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 자신보다 더 우리 자신이 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직접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 본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직접 하나님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저질러놓은 죄를 우리 대신 가지시고 아버지 앞에 섰습니다.

그리고 그 죄에 합당한 저주를 받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바로 이 모습이 제대로 된 우리 자신의 실정입니다. 따라서 성령을 받은 자만이 더 이상 자기의 역사를 자기 손으로 다듬지 않게 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우리가 예상 못한 그 난처하고 낯선 지경까지 몰아넣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덩달아 우리 내부에서 올라온 악령이 준 습성에 준해서 예수님을 원망하면서 그 예수님과의 관계의 밧줄을 끊으려합니다. 끊으세요! 끊으려하는 순간, 비로소 우리가 느끼는 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협이나 칼이랴”(롬 8:35)

즉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으로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새삼 알고 감사하게 됩니다. 바로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은 우리는 천국 백성되게 하십니다. 이것이 진정 ‘기르심’입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는 이 방식을 ‘만나’로 가지고 실행에 옮기십니다. 만나의 특징은 저장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저장이 용납되지 않는다는 말은, 애굽식으로 우리의 몸을 위한 우리의 양식을 하나님께서허락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즉 하나님의 양식은 우리 몸을 위함이 아니라 예수님의 몸을 위한 예수님의 양식입니다. 그래서 만나는 안식일에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처소에서 조금도 나오지 못하게 만듭니다. (출 16:29)

안식일이라는 말씀의 완성은 우리 인간 소관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주되심과 관계는 실행입니다. 바로 이 말씀 실행이 우리의 모든 언행을 다 감싸주시고 덮어주시는 솥뚜껑 역활을 하면서 하나님 보시기에 ‘안식에 성공함’을 이루게 하십니다. 즉 우리 인간이 이 세상 어디에 살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우리의 처소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헤어지고, 만나고, 또 헤어지고, 만나고 하는 일들의 연속선을 꿈꾸지만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판을 만들어내십니다. 이 판에서 우리 성도는 하나의 무늬로 자국을 남깁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아니요’가 성립되는 겁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는 늘 원망하고 늘 주님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앙탈을 부리면서 그 와중에서 주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새롭게 다가오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