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음성 동영상
이근호
고린도전서 2:1-2 현재의 십자가
구원받는데 있어 외부의 정보가 주입되어야 성사된다는 말은 실은 외부의 간섭을 수용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간섭을 받아들이게 되면 그동안 자기가 자기를 지키기 위해 동원된 모든 것에 대해 점검을 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지속적인 점검받음은 늘 ‘자기 부인’ 상태에 놓여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단순히 과거 사건을 기억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도리어 기억 자체를 부정을 요구받습니다. 예를 들면, 코 앞에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의 과거사를 계속 언급하면 듣는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이 사람이 나의 과거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지금의 나를 사랑하는지 분간이 안 된다”고 헛갈리게 될 것입니다. 과거를 언급한다는 것은 지금의 상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즉 과거 속에 사는 자는 그 사람을 기억하는 자기 자신이 주인공이 됩니다. 지식이라는 것이 항상 그런 식으로 작용합니다. 지식을 소지한 본인을 결코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있어 십자가는 과거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로운 현재를 만들어냅니다. 사람들은 현재를 자신이 구성한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십자가의 능력은 인간들이 생각하는 그런 현재를 밀어내고 다른 현재에 몰아넣어버립니다.
주인공을 늘 예수님 쪽으로 전환시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어떤 예수님이냐 하면, ‘십자가 못 박힌 예수님’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님께서 그 현장이 과거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현재 사건이 되면서 그 사건에 적용을 받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성도가 자기 행함과 지식으로 스스로를 지켜 나가는 모든 시도는 십자가 못 박힘 앞에서 죄악된 것으로 발각당합니다.
하루하루 열심히 살되 그 열심히 사는 모든 것이 십자가 앞에서 죄가 됩니다. 이로서 성도는 늘 십자가 능력을 입고 사는 자가 됩니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이근호
현재의 십자가
2014년 10월 19일
본문 말씀: 고린도전서 2:1-2
(2: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2: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말이란 소위 살아있는 인간들 세계에서 통용하기 위한 의사전달의 수단입니다. 따라서 말의 가치를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복음의 작렬하는 영역에서는 그 말의 능력마저 부정당합니다. 즉 말 솜씨, 말 재주로 달라붙은 능력은 구원의 능력이 아니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말이란 말하는 자의 재주가 발휘되게 마련이고 이는 곧, 살아 있는 자가 살아 있는 자를 살린다든지 전도해서 구원시키는 행위가 정당화되고 맙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살아있는 것들의 능력을 부정해버립니다. 도리어 살아 있는 자들이 ‘살아있음’을 보이는 그 힘에 의해서 떠밀려 죽어버린 그 ‘죽음’의 힘만 인정합니다.
그렇게 되면 인간들은 그 죽음 앞에서 ‘영원한 죄인’으로 고정되어버립니다. 인간들이 떠밀었던 그 분이 도로 사셔서 소위 ‘산 자들의 집합’이라는 이 세상에서 찾아들면, 인간들이 그동안 자기가 자기를 살리려 한 시도가 다 거짓된 것임이 들통 나 버립니다. 인간들은 자신의 행함을 매개로 해서 자신을 구원과 영생의 나라로 가고자 시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뵙고자 하는 모든 인간들의 시도는 모두 하나님에게 퇴출당하고 오직 예수님만이 하나님께서 정당한 일로 받아들이십니다. 인간들이 예수님을 내치므로서 인간 세계의 바닥을 노출시키게 됩니다. 이 세상은 원래부터 죽음을 내장재로 사용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2:17에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일체 없을 것 같은 완벽한 삶의 주거환경인 에덴동산 안 가운데 벌써 ‘죽음에 관한 요소’가 잠복하여 숨쉬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죽음을 내치면서 항상 다음과 같은 각오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가는 것은 다 내 덕이다. 내가 나서지 아니하면 아무도 나를 살릴 수 없다. 내 행함과 내 노력과 나의 열심과 나의 노동이 여태껏 나를 내었다”고 말입니다. 곧 자신이 자신을 살리는 중보자 노릇을 해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앞으로도 줄곧 그렇게 살아갈 것입니다.
즉 살아있는 것을, 살아있는 내가 중보자로 나서서, 그 매개적 활동으로 이미 살아있는 나를 계속 살아내겠다는 식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자연스럽게 주님의 중보자 기능은 천시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들의 이런 보편적 행위는 ‘예수님의 죽으심’의 원인으로 작용되었음을 십자가 의의와 그 부활로 증명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에 최종 힘을 실어주면서 상대적으로 인간의 모든 시도와 행함이 일시적이고 잠정적인 현상에 불과함을 알려줍니다. 2절에서 ‘∼외에는’는 표현은 그동안 예수님을 세상에 떠밀게 만든 모든 것들은 십자가 앞에서 삭제나 배제 대상이 된다는 점을 말해줍니다.
즉 인간은 자신을 매개로 하여 스스로를 구원코자 하는 모든 시도가 다 허사임을 말해줍니다. 그 근거는 바로 십자가가 인간의 구원 욕구가 일어나는 그 지점을 폭격하고 늘 파괴시키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구원 받을 자격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인간에게는 본질이라는 게 없습니다.
인간은 한시적인 존재며 누구의 기능을 ‘보충하기 위해 대리물’로 등장된 존재입니다. 인간 스스로는 무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인간들 손에 의해 살해당하므로서 비로소 인간에게 의미가 발생합니다. 죽어야만 하는 자들이 살아야만 하시는 그 분을 살해한 것입니다. 이로서 구원에 관한 문제는 벌써 인간의 세계에 해당되지 않는 일이 되어버렸습니다.
인간은 원인도 이유도 모르는 채 허송세월하다가 죽이면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인간 상황에서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사건에 다른 의미를 부여한 사건임이 성도에게 알려집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지어 죄 속에 있음을 아시고 그 죄를 씻기 위해 자기 아드님을 대속물로 내어주신 사건이 또한 십자가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십자가 사건이라는 동일한 사건은 하나님 입장과 사람들의 입장에 그 안에서 같이 만나게 됩니다. ‘죽으셨던 분’으로서 찾아오심은 죄를 용서했음을 통보해주시는 차원에서 찾아오시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자기 죽음이나 십자가 죽음으로부터 끊임없이 도피하려는 택한 자들을 다시 십자가 죽음 안으로 기어이 잡아당기는 능력을 성령님은 발휘하게 됩니다.
이는 곧 성령님은 결코 모든 움직임이 인간의 행함으로 귀속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고 방치하지 않고 정죄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이스라엘은 아이성이라는 작은 성 공략에 나서게 됩니다. 물론 승리는 전번 여리고성 함락처럼 당연하게 주어진다고 여겼습니다.
그런데 패배했습니다. 여호수아를 비롯한 이스라엘은 자체적으로 그 요인을 알지 못했습니다. 나중에 하나님께서 개입해서 보니 아간이라는 자가 여리고성 전쟁의 전리품을 비자금으로 숨겨두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전쟁에서 자신의 공로와 의미를 따로 챙겨두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간을 돌로 칠 것을 명령했던 아간은 죽었습니다. 그리고 난 뒤 아이성을 함락되었습니다. 바로 이와같이 일방적으로 사람에 의해서 죽었던 분의 죽음 능력에 대해서 소위 살아있다고 자부하는 인간의 능력은 그 능력과 섞이거나 마주해서 처리할 수가 없는 그런 성질의 능력입니다.
아간이 삭제당하고 난 뒤에 남는 것은 바로 희생물의 피로서 구체화 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곧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그 능력만이 손상되지 않고 남게 됩니다. 이러한 인간 행함에 대한 삭제 능력이 계속 발휘되는 현장이 바로 성도의 자리입니다. 성도는 마지막에 자기 자신마저 삭제 당하게 됩니다.
그래야 ‘∼만’이라는 말씀이 반복해서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 외에는 일체 알지 않기를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이유는, 인간들은 스스로를 구원코자 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평생 불교 신자, 곧 나는 나의 행함으로 믿음, 행함으로 말씀을 행한다 는 그런 주관으로 살아가게 되는데, 결국에는 이 모든 것이 죄임을 폭로되는 능력은 오직 십자가 죽음의 능력만입니다. 이 작용이 늘 속에서 터지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믿고 행하는 것 모두가 우리가 이미 죽은 자임을 보여주는 말씀으로 들리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