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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믿음

'잠언'속의 그리스도 17 - 재방송 / 141013 본문

구약 설교, 강의(이근호)/잠언

'잠언'속의 그리스도 17 - 재방송 / 141013

정인순 2014. 10. 13. 23:35

음성

 

동영상1             동영상2

 

 

[14 대구강의] '잠언'속의 그리스도 17 - 재방송
                                                                                
                                                          14,10,13  강의 이근호,  정리 구득영

 

오늘은 교재 62페이지부터 살펴보자.

** 가난의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 그런 환경을 조성하신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 난데없는 공포와 두려움 !!

여기에 보면 '공포' 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어제 낮 시간에도 그런 이야기를 했지만, 우리가 태어나는 곳은 '나'와, 그리고 살아가면서 발견하는 것은 외부의 자연환경인데, 그래서 우리는 그 속에서 적당히 살아가면 된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디선가 난데없이 그만 공포가, 즉 두려움이 찾아오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그 두려움의 정체를 모르는데, 만약에 그것을 알게 되면 그 근원지를 폭파나 정복을 하면 되는데, 그러면 두려움이 없어질 것인데, 하지만 우리는 그 근원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몸 자체가 다른 요소에 의해서 작용을 받고 있기 때문인데, 즉 "몸의 주인이 나 자신이라고 여겼는데, 그런데 이 몸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라는 것이다. 

 

 

◈ 두려움의 원인은 '있음'에 있어, 그러나 !!

우리의 몸 자체가 발산하는 욕망자체는 '나' 라고 해서 저지할 수 없는데, 그 대표적인 게 "미워한다, 사랑한다" 라는 것이데 말이다. 누군가가 미울 때는, 물론 그 이유가 있을 때도 있지만, 아무런 이유도 없이 미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데, 그 방법이 무엇인지 지금부터 살펴보자는 말이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아무리 많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찾아오는 공포와 두려움, 그러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고 하니, 그것은 바로 '있음'에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있다' 라는 것에서 공포가 찾아오니, 불교에서는 어떻게 하는가? 그 '있음'을 없애는 방향으로, 그렇게 해서 욕심을 없애려고 한다는 말이다.

 

 

◈ 인간은 죽음도 없어 !!

어제 낮 예배시간에 "인간은 죽음도 없다" 라고 했는데, 그런데 불교에서는 뭐라고 하는가? "죽으면 그만이다" 라고, 즉 "인간은 이 땅에서 살 때까지만 고생하고 죽으면 그만이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힘이 좀 들어도 그때까지만 참으면 된다는 말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이런 불교적 사고방식으로 살아가고, 그런 자들이 태반인데, 즉 "그래, 살만큼 살다가 죽어서 천당에 가면 그만이다. 그러니 이 땅에서 살 동안만 참고 견디면 된다" 라고 말이다.

그러니 불교사상과 동일하다는 것인데, 즉 "지금 있는 것 때문에 힘이 드니, 그것을 없애면 힘이 들지 않지 않겠느냐?" 라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죽음이 없다" 라는 것인데, 그러니 큰일이 났다는 말이다. 죽으면 좀 쉬려고 했는데, 죽으면 그런 공포에서 좀 벗어나려고 했는데 말이다.

왜 장례식장에 가면 보통 뭐라고 하는가? 나이가 든 어머님이 돌아가시게 되면, "모친요, 이제 편히 쉬이소" 라고 하는데, 물론 그것은 유족들을 위로하는 말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죽음이 없다고 하면 어디서 위로를 받느냐는 것이다. 죽음이 없다는 것은, 이 골치 덩어리 몸을 계속해서 끌고 간다는 것인데 말이다.

 

 

◈ 편히 쉬는 사람들은 따로 있어 !!

마귀는 "죽음 뒤에서 편히 쉰다" 라고 하지만, 사실은 죽음 뒤에서 편히 쉬는 사람들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 땅에 살면서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의 경우에만, 이 땅에 살아서도 행복이지만 죽어서도 행복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자들은, 이 땅에서도 고통이지만 죽어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스스로 죽어도 고통이고, 그냥 죽어도 고통이고 말이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사라질 줄 알지만, 천만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죽고 난 뒤에 고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데, 살았을 때의 고통과는 족히 비교도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있다' 라는 것 자체가 우리게 커다란 짐이 부여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 괜히 태어났어 !!

그래서 욥이 뭐라고 하는가? "괜히 태어났다" 라고 하는데, 즉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사실 그런 말은 하나마나한 것인데, 이미 태어났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이다. 무를 수 있는 것이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이렇게 고민한다는 것도 이미 태어났기에 하는 것인데, 그러면 이 문제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다. 죽어도 안 되고 말이다.

우리가 산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매일같이 "밥줘, 돈줘, 이뻐해줘" 라고, 몸이 그것을 요구한다는 것이다. 특히 나이가 들면 몸이 요구하는 것이 심심하다는 것인데, 우리 어머니의 경우에도 매일같이 하시는 말씀이 심심하다는 것인데, 남편이라도 살아있으면 몰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심심하다' 라고 하는 원인은 무엇인가? '나의 있음' 인데, 자기가 없으면 심심하지 않다는 것이다. 자기가 있으니 누군가가 같이 놀아주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으니까 심심하다는 말이다. 그러면 같은 할머니를 만나면 되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그런 할머니는 재미가 없고, 영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돌아가신 영감을 다시 살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예수님이면 몰라도 말이다. 

나이가 80이 넘어가도 우리의 몸은 동성이 아닌 이성을 원하는데, 아무리 할머니라도 같은 할머니는 밀쳐낸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몸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몸을 전혀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알아서 조절할 수 있으면 참으로 좋겠지만, 우리의 몸은 그러한 조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무조건 우리의 몸은 있는데, 그렇게 몸이 있고 난 다음에 자아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아가 몸을 다독거리는데, "니가 지금 나이가 몇 살인데 영감을 찾노?" 라고 말이다. 그러면 몸이 뭐라고 하는가?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에 딱 좋은 나이인데"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과거까지 담겨있는, 그런 기억의 몸이니 말이다.  

 

 

◈ 주님의 것으로 있다 !!

그러면 이런 몸에 대한 해결책이 무엇인고 하니, 여기에 대해서 성경말씀은 뭐라고 하는가? 우리는 이 '있음'을 전혀 감당하지 못하는데, 그런데 주님은 여기에 무엇을 하나 붙이는데, 즉 "주님의 것으로 있다" 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니 몸이 있는데, 너는 그것이 감당이 안 되지? 니가 니 몸을 감당하려고 하니 문제가 된다" 라고 하신다는 말이다. 

이번 미국강의에서 마지막으로 설교한 것이 무엇인고 하니까, 맨하튼 교회에서 했는데, "손을 빼라" 라고 했다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것에서 손을 놓으라는 것이다. 특히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그러면 자기 몸이라고 해서 자기가 알아서 관리하겠다는 것이 얼마나 주제 넘는 짓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자기 분수도 모르면서 말이다. 이 몸은 지금까지 주님께서 관리하셨고, 당연히 주님의 뜻대로 관리가 되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것'으로 있는데, 그것을 간추리면 "주님과 함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쉬운지 모르는데,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데, 어떻게 말인가? 이 몸을 주셔서 함께 하신다" 라고 하면, 그야말로 간단하다는 말이다. 그렇지요?

그러니 이런 몸이 있다는 것은 주님이 계신다는 의미인데, 즉 "몸이 있다. 주님이 계신다. 그런데 그냥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이 몸을 주님이 관리하면서 계신다" 라고,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우리의 몸을 통해서 주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라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몸을 주셨다는 것이다.

 

 

◈ 우리의 '있다' → 예수님의 '있다' !!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몸은 보이지만, 주님은 보이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면 우리의 '있다' 라는 것에서, 예수님의 '있다' 라는 것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느냐는 것인데, 그 연결점만 알면 문제는 해결이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요한계시록 1장 1절에서 3절을 보자.

(계 1:1)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계 1:2)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계 1:3)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 예수님을 본 사도요한 !!

여기 3절에 '예언의 말씀' 이라고 되어있는데, 그러면 요한계시록도 당연히 포함이 되고, 나머지 모든 성경도 해당이 된다고 보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언의 말씀이 있는데, 예언의 말씀이 있으면 그 말씀을 주신 분도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이다. 

그리고 2절에 보면, 사도요한이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라고 하는데, 그러니 사도요한은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요한계시록 1장부터 아주 화려하게 나오는데, 그래서 13절 이하에 보면,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라고 한다는 것이다.

(계 1:13) 촛대 사이에 인자 같은 이가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 1:14) 그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계 1:1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으며
(계 1:16) 그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고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더라
 


◈ 예언의 말씀이 있으니 !!

그렇게 분명히 보았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계신 것이 맞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보이면 있다고 하니 말이다. 사도요한에게는 예수님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계시는데, 그리고 누구도 있는가? 사도요한 본인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있고, 사도요한이 있고, 그 가운데 뭐가 있는고 하니, 예언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에서 '없다' 라는 것은 전혀 없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있고, 사도요한이 있고, 그 가운데 예언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눈에는 예수님이 보이지 않으니 어쩔 수가 없는데, 다만 우리의 몸이 있으면, 예수님과 우리 몸 사이에서 그 연결고리의 역할을 하는 예언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사도요한과 예수님 사이에 말씀이 있듯이 말이다.  

 

 

◈ 있음의 물결이 요동치는 세상 !!

그래서 이 세상은 있음의 바다, 있음의 물결이 요동치는 세상,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영원한 말씀인데, 그래서 1장 8절에 보면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이고, 전능한 자라는 것이다.  

(계 1:8)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제가 목요일에 뉴저지에서 강의를 하면서 이 대목을 했는데, 누가 있다는 말인가? 예수님이 계시는데, 이전에도 있었고, 또한 장차 영원히 계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은 '있다' 라고 하지만, 나중에 늙어서 죽게 되면, 우리는 '있다'에서 '없다'로 빠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사야 40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물론 다 아는 말씀이지만 강조하는 의미에서 한 번 찾아보겠는데, 40장 6절에서 8절을 보자.

(사 40:6) 말하는 자의 소리여 가로되 외치라 대답하되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가로되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사 40:7)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 이 백성은 실로 풀이로다
(사 40:8)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 시드는 풀, 영원한 말씀 !!

여기 6절에 "내가 무엇이라 외치리이까?" 라고 하는데, 즉 "내가 무엇이라고 외치면 주의 뜻에 부합이 됩니까?" 라는 것인데, 주의 뜻에 부합되는 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오늘날 우리가 외쳐야하고 말이다. 우리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 … 하나님의 말씀은 영영히 서리라 하라" 라고 하면 된다는 것이다.

성도가 되어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즉 성도가 해야할 일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저에게 수시로 묻는 것이 그것인데, "목사님, 무엇을 하면 됩니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면 됩니까?" 라고 말이다. 거기에 대해서 이렇게 이사야 40장에서 우리에게 해답을 주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들어 가는 풀이요,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이루어집니다" 라고 말이다.

 

 

◈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

강의처음으로 다시 돌아가서, 우리에게 이렇게 몸이 있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데, 즉 '나' 라는 있음이 말이다. 몸이 있으니까 "심심하다, 배가 고프다, 자고 싶다, 놀고 싶다, 갖고 싶다, 부자가 되고 싶다" 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루종일 찡찡거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만족시켜주면 행복해질 줄로 알고 그렇게 해보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찡찡대는 것이 더 심해진다는 것이다. 이제는 감당이 되지 않는데, 자기의 요구를 자기가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는 입장이라는 말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 혼자 살면 모르겠는데, 그게 아니라 라이벌들이 같이 살아가기 때문에, 자기 뜻을 이루려고 하면 저쪽에서 브레이크를 건다는 것이다.

가을이 되면 금강산에 가고 싶은데, 그런데 누구 막는가? 인민군이 막는다는 것이다. "아주머니 동무, 어디를 가십니까?" 라고 하면서 들어가지 못하게 한다는 말이다. 버스 안에서도 오줌이 마려우면 당연히 누고 싶은데, 하지만 누려고 하면 주위에서 말린다는 것이다. 그래도 누면 경찰에 신고하면 벌금 5만원을 내야하는데, 공공장소에서 그런 짓을 하면 안 된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왜 자기 마음대로 하면 안 되는가? 만약 대한민국에 혼자 산다고 하면, 그 어디라도 오줌을 시원하게 눌 수 있다는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으니 말이다. 그러니 "도대체 왜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는가?" 라는 것이다. 거기에 대한 정답은 무엇인고 하니, 주께서 풀은 시들라고 하면서 압박을 가하신다는 것이다. "니 마음대로 하면 안 돼. 쓸데없는 짓은 그만하고 시들어라" 라고 말이다.

그러니까 "내가 여기에 있고, 내가 내 뜻대로 한다" 라는 것은 전혀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까, 그것은 바로 자기가 누구인지 몰라서 객기를 부리는 것인데, 그러니 아무리 "나는 부자가 되고 싶다" 라고 해도, 주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그것은 니 마음대로 안 된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부자도, 가난한 자도, 역시 시드는 방법 !!

부자들의 경우에는, 부자가 되고 싶다고 해서 부자가 된 것이 아니라, 부자가 되어야만 하기에 부자가 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부자라는 것이 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가로막는데, 부자가 되고 난 다음에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 라고 하는 말씀이 즐겁게 들릴 부자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마 19:24)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

물론 부자가 된 것이 축복이라고 칭찬을 해줄 때는 좋은데, 그런데 이런 말씀은 부자가 되면 듣지 않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 말씀이 들리는 부자는 어떠한가? 부자가 된 상태로 천국에 간다는 말이다. 그러니 참으로 부러운데, 부자이면서도 천국에 가니 말이다. 하지만 그 부자도 풀이 시들어 가는 방법 중의 하나인데, 즉 부자가 되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도 있는데, 그런 사람은 가난을 통해서 시들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즉 이사야 40장 8절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그 사람은 가난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부자나 가난한 자나 모든 것이 운명이고 팔자라는 것인데, 암에 걸려서 40일 만에 죽는 것도 팔자라는 말이다. 물론 암 근처에도 가지 않고 천 수를 누리는 것도 팔자이고 말이다.

어떤 드라마를 보니,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해있는데 어린 아들이 와서 뭐라고 하는고 하니까, "아빠, 백 살까지 살아야 돼. 얼른 나아서 나와 놀아줘야 해" 라고 하는데, 그러면 만약에 복음을 아는 아빠라면 뭐라고 해야하겠는가? "야야, 백 살까지 사는 것은 아빠 마음대로 하는 게 아니야. 아빠는 그냥 풀이야. 백 살에 시들든 90살에 시들든, 그것은 보이지 않는 분이 다 알아서 하시는 거야" 라고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분이 예언의 말씀을 준비했는데, 그 말씀에 닿게 되면 "아하, 내 마음대로 하는 몸이 아니구나. 내 몸의 소유권을 가지고 계시는 분은 따로 있구나" 라고, 그것은 말씀에 박치기를 한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우리는 그런 관계에 놓여있다는 것이다.  

 

 

◈ 십계명은, 치환시키기 위해서 !!

제가 어제 오후시간에 십계명을 이야기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까, 십계명이 있다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는 언제나 자기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그런 모습으로 치환시키기 위해서 십계명이 있다고 했다는 것이다. 물론 돌아서면 또 마찬가지이겠지만 말이다(ㅋㅋ).

예를 들어서, "탐내지 말라" 라고 하면, "하나님, 저는 탐을 내지 않았습니다" 라고 하면서 갑자기 '저' 라는 것이 튀어나온다는 것이다. "하나님, 제 몸은 제가 관리를 하는데, 십계명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조심하면서 살아갑니다. 주님의 말씀을 생각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탐내지 말라고 하면 탐내지는, 그런 인간입니다" 라고 하면서, 마치 자기 몸이 자기 몸인 것처럼 건방을 떨면서 나서는데, 그것이 바로 걸려든 것이란 말이다. 

십계명을 지키는 자기 몸이 자기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주님의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 친히 십계명을 지키신다는 말이다. 그렇게 지킨 열매가 무엇인고 하니, "주여, 제가 죄인입니다" 라는 것인데, 주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로 하여금 죄인이 되게 하기 위함인데, 그러면 율법이 우리 마음 앞에서 멈춘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게 되는가?

"주여, 제가 주님의 말씀에 입각해서 탐내는 몸을 지니고 있습니다" 라는 고백, "주께서 이 몸을 죄인의 몸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라는 고백, "저는 어머니의 태 중에서부터 죄인이었습니다" 라는 다윗의 고백, 바로 그 고백이 다윗만의 고백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고백할 수 있게 하셨다는 것이다. 물론 주께서 말이다.

 

 

◈ 이제는 십자가로 고백을 !!

그러면 다윗 때는 다윗언약으로 그런 고백을 했다면, 이제 신약시대는 십자가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 다윗언약은 지켜도 아직 구원이 되지 않은 상태이지만, 십자가의 언약이 오게 되면, 거기에 닿는 순간 이미 구원을 받은 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효과는 영원한데, 그래서 죽을 우리 몸도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살려주신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들여다보고 있는, 잠언을 비롯해서 요한계시록이나 이사야서가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렇게 어렵다고 하는 성경말씀도, 이렇게 막상 결론부터 듣게 되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 오히려 간단하다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누구의 몸이란 말인가? 우리 자신의 몸이 아니라, 주님의 몸이라는 말이다.

 

 

◈ 아하, 이게 신앙생활이구나 !!

바로 그 몸을 통해서, 몸은 비록 시들지만 말씀은 영원한, 즉 말씀이 영원하다는 것을 드러내는 방법 중의 하나가 우리의 몸을 시들게 하는 것인데, 그런 작용을 우리가 지금 살아생전에 목도하고 있는데, 그러면서 주님의 하신 일을 증거하도록 주께서 인도해주신다는 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렇게 궁금하게 여겼던 신앙생활이란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해도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하면 어쩔 수가 없는데, 그런데 마귀가 꽉 차있을 때는 이런 말을 듣게 되면 뭐라고 하는가? "그래도 내 몸은 내가 알아서 관리한다. 나의 자존심 때문이라도 나는 이 몸을 도저히 놓지 못하겠다" 라고 나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머리가 나빠서 신앙생활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 아니라, 마귀로 인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악마가 유혹한 결과라는 말이다.

 

 

◈ 제발 도를 닦지 마세요 !!

그래서 제가 항상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고 하니, "교회에 와서 제발 도를 닦지 마세요" 라는 것인데, 즉 "기도한 덕분에 일이 잘 되었습니다. 또한 성화가 되었습니다" 라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식도 다 주님의 몸인데, 자기 자식이 의사가 되고 또 판사가 되어도, 그렇게 판사가 된 것이 복이 아니라, 판사 노릇을 하면서도 시들어버린다는 것을 미리 간파하는 것이 곧 복이란 말이다.

주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진짜 복을 받은 것인데, 그 말씀이 자기 몸에 꽂혀서 말씀을 주신 분과 자기가 연결이 될 때, 주님이 영원하신 것처럼 그 사람도 영생 중에 영원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영생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산다고 영생이 아니고 말이다.

 

 

◈ 여전히 공포스러운 인생 !!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난을 주시던 부자가 되게 해주시던, 우리 인간에게 찾아오는 공포는 여전히 공포스럽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공포 가운데서 인간은 무엇을 감 잡아야 하는고 하니, "이 몸이 없어지면 공포로부터 벗어나겠지" 라는 것은 착각인데, 그것은 말씀에 입각하면 올바른 해결책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몸이 있기에, 그리고 그런 몸이 있어야 자기가 살아가니 당연히 몸을 아끼고 싶은데, 하지만 계속해서 몸을 쥐고 그 몸에게 "내 다리를 내놔라" 라는 식으로 공포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 공포는 바로 "내가 죽는다" 라는 공포인데, "나는 더 살고 싶은데, 이대로는 죽기 싫어" 라고 하면서 몸부림을 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만 자기가 암에 걸렸는데, 다행히 보험을 잘 들어서 돈도 들이지 않고 다 치료해서 안심을 하게 될 때, 하지만 그게 항상 안심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 다음에 또 병에 걸리면 이번에는 집을 팔아서라도 고치려고 하는데, 그러면서 자식들에게 "야들아, 내가 살고 싶다. 그러니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다오" 라고 하는데, 하지만 무슨 그런 기도가 다 있느냐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으로 이름'을 것을 뒤에 갖다 붙이지만, 그것은 자기를 위한 기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
 
미국의 뉴저지 교회에서 11시에 예배를 드리면서, '주기도문'에 대해서 설교를 했는데 말이다. 아마도 아직까지 들어보지 못했지 싶은데, 앞으로 차근차근히 들어보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주기도문 앞에 무엇이 나오는고 하니,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는 하지 말라"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마 6:7) 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저희는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마 6:8)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 먼저 이방인들의 기도는?

그러면 이방기도는 무엇인가? 자기 이름으로 하는 것이 곧 이방인들이 하는 기도라는 말이다. 그들이 기도하는 목적이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자기를 살리기 위해서 기도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저것이 있어야 합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주님이 다 알고 계시니 그런 기도는 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하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가? 기도할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동안 우리는 누구를 위해서 기도했다는 말인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꾸준히 기도를 해왔는데, 그런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니, 기도할 내용이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에 주어진 것이 무엇인고 하니, 바로 '주기도문' 이라는 것이다. 즉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라고 되어있는데, 즉 '나' 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 라는 말이다. 그 '우리'는 '나'를 고수하는 사람에게는 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 '우리' 안에 '나' !!

왜냐하면, 여기 '우리'는 '나'를 경유해서 우리로 가는 게 아니라, 진짜 있음, 즉 어제도 있었고 오늘도, 그리고 영원히 있는, 그 있음이 만들어내는 '우리' 라는 말이다. 그러니 '나'로부터는 '우리'로 갈 수가 없고, 예수님이 먼저 '우리'를 만드시고, 그 '우리' 안에 '나' 라는 것이 새끼를 치게 되는데, 그때 '나'는 주님이 책임을 지기 때문에,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그런 걱정이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무엇을 입을까? 먹을까?" 라는 것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할 게 없지 않느냐고 할지 몰라도, 하지만 '우리' 속에 있는 '나'는 기도할 게 있는데, 그게 바로 주기도문이라는 것이다. 주의 이름이 거룩하게 하옵시고, 그리고 우리가 받은 주님의 용서를 남에게 드러나게 하옵시고, 그리고 매일 찾아오셔서 일용한 양식을 주심에 대해서 감사하게 해달라고 말이다.

(마 6:9)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마 6:10)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마 6:11)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마 6:12)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마 6:13)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 주님, 왜 이틀 분의 식량을 주십니까?

그래서 제가 이 주기도문을 설교하면서 뭐라고 했는고 하니, 만약에 우리에게 한 달의 식량이 있다고 하면, 주님은 매일 오실 필요가 없고 언제 오면 되는가? 마치 정수기 코디나 집세를 받는 집주인처럼 한 달에 한 번만 오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이 정말 그런 분이고, 우리에게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주님, 왜 우리에게 이틀 분의 양식을 주시는 횡포를 부리십니까?" 라고 할 수 있는데, 여기서 '횡포' 라고 했는데,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지금 자기에게 식량이 이틀 분이 있으면 주님은 내일 하루 동안은 오시지 않겠다는 것인데, 그렇게 주님을 매일 볼 수 없다고 느끼게 하는 횡포가 곧 이틀 분의 양식을 주시는 것이란 말이다.

오늘 하루치만 주시면, 주님이 매일 오셔서 매일 만날 수가 있는데, 물론 야단도 맞지만 말이다. 그렇게 주님을 매일 보고 싶은데, 그런데 주님이 오지 않는 날이 있다는 것, 그것이 너무 힘들다고 하는 기도를 할 수 있어야, 그것이 바로 주기도문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 내 몸은 내 것이다 !!

이와 같이 우리가 평소에 생각하고 일어나는 모든 문제의 원인이 무엇인고 하니, 그것은 딱 하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내 몸은 내 것이다" 라고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것이 성경말씀에 비추어보면 전혀 비현실적이라는 것이다.

이제 여러분에게 가난의 공포가 좀 줄어들었는지 모르겠는데, "내가 가난하다"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가난하게 만들어서 가난하다는 것이다. 그렇게 가난하게 이 땅에서 시들어버리는 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비록 그 가난해도 그런 사람에게는 주님이 박혀있기 때문에, 죽고 난 다음에는 주님의 품속에서 영원한 안식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거지 나사로처럼 말이다. 그런 자에게 주님은 "니가 가난하게 산다고 참 고생했다. 거지로 산다고 고생했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 부자로 산다고 참 고생했다 !!

그러면 부자로 살다가 구원을 받은 자에게 주님은 뭐라고 하시겠는가? 당연히 "니가 부자로 산다고 고생했다" 라고 하시는데, 여러분은 부자가 좋아 보일지는 몰라도, 막상 부자가 되면 그렇게 않다는 것이다. 주위에서 자기를 이용해먹으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는데, 하루가 멀다하고 보증을 서달라고 오고 말이다. 또한 꽃뱀도 설치고 말이다. 물론 제가 부자가 아니라서 잘은 모르지만, 상상해보면 그렇다는 것이다(ㅋㅋ).  

예를 들어서, 자기 호주머니에 백만 원짜리 수표가 몇 장 들어있다고 생각해라는 것이다. 그게 없으면 밤에 기차를 타도 편안하게 자면 되는데, 그게 있으면 불안해서 잠이 오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얼마나 피곤하겠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평생을 그렇게 산다고 한 번 생각해보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이기려고 사치를 하게 되는데, 비싼 옷을 사고 보석을 사고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고 해서 어디 위로가 되겠는가?

그러니 마음이라도 가난하게 살아봤으면 참 좋겠는데, 그래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는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라고 하셨는데, 그 다음에 놀랍게도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그런 자에게는 이미 천국이 있다는 말이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 천국은 작업이다 !!

어제 오후시간에 여기까지는 미처 설교를 하지 못했는데, 즉 "천국은 작업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작업인가? 옛 것과 새 것을 곡간에 내어놓은 충실한 집사들의 작업이란 말이다. 그러니 천국은 "여기에 있다. 저기에 있다" 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과정, 즉 작업이라는 것이다. 영어로 하면 'ACTION' 이라고 할 수 있는데, 어떤 액션인고 하니까, "내가 이런 구석에서 살면서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을까?" 라고 하는, 그 과정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작업이라는 말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니가 전에는 돈을 자랑하고 문벌을 자랑하고 학식을 자랑했는데, 하지만 지금은 돈이 없어도 괜찮고, 가난해도 괜찮고, 학식이 없어도 괜찮습니다" 라고, 즉 "그렇게 바꾸어주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라고 나오게 된다면, 그렇게 보여주는 것이 곧 천국의 활동성이고 작업이라는 말이다. 양쪽을 다 보았으니, 즉 "과거에는 이랬는데, 지금은 이렇다" 라고, 그렇게 양쪽을 다보고, 또한 이동하게 하는 과정을 주님이 보여주시는데, 그것을 증거하는 것이 바로 천국의 작업이란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에 대해서 "이것이 어떻게 육에서 영으로 옮기는 것과 같습니까?" 라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신 생애라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 이 땅에 태어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전 생애를 우리 몸을 가지고 반복하신다는 말이다.  

 

 

◈ 한 편의 영화를 느긋하게 관람하면서 !!

아주 쉬운 예를 들어보면, 우리가 극장에 영화를 보러 가는데, 그런데 그 극장이 영화를 상영하지 않으면 무엇과 같은가? 그냥 빈 창고와도 같다는 말이다.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데, 그냥 앞에 허연 천만 커다랗게 걸려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가 상영되면 어떠한가? 온갖 활동사진이 다 나타나게 되는데, 말도 타고 총도 쏘고, 그야말로 분주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우리 인생 자체가 요란스러운데, 주님이 활동하시는 것이 말이다. "너희의 이런 죄도 용서함을 받았다" 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것을 주님의 공생애를 사시면서 사람들과 충돌하고 다투었던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반복상영을 하시는데, 물론 우리는 구원을 받았기에 그야말로 느긋하게 관람을 할 수 있고 말이다.

 

 

◈ 인생은 즐거운 재방송 !!

오늘 강의제목이 바로 이것인데, 즉 '재방송' 이라는 것이다. 재방송의 의미가 무엇인가? 이미 결과가 끝났다는 것인데, 다 안다는 것이다. 이미 필름을 다시 돌려서, "내가 10대에는 이랬고, 20대는 저랬고, 30대는 요렇게 까불었고, 40대는 이렇게 놀았네" 라고 하면서 말이다. 자기가 마치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 것도 모르고 설치고 다녔음을 바라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영화를 이미 다 찍어놓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다시 돌려서 본다는 느긋한 마음으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신앙생활인데, 물론 그게 우리의 일상생활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러니 전혀 초조해하거나 불안해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 충돌, 충돌, 충돌 !!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실 때 곱게 오셨는가? 충돌을 하셨는가? 물론 충동을 하셨는데, 그러면 그런 예수님의 생애가 우리 속에 반복이 되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의 옛 사람과 새 사람이 항상 충돌을 일으키는데, 그런데 즐겁게 충돌한다는 것이다. 즐겁게 말이다.

왜냐하면, 게임이 이미 끝났는데, 누가 승리하는고 하니, 새 사람이 항상 승리하기에 말이다. 그래서 옛 사람이 아무리 고집을 부려도, 우리는 전혀 조급해하지 않고 여유로운 마음으로 승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주님께서 관여해주신 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론보다도 실제로 성경말씀을 살펴보면, 그게 변화산의 경우인데, 거기서 베드로가 변화하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무엇이라고 하는가?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여기에다 짓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우리도 그 말씀을 보고 "나라도 그렇게 했겠다" 라고 하면서 공감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철없는 베드로, 그리고 철없는 나", 그렇게 반복이 된다는 말이다.

그리고 베드로는 예수님이 성전을 지키는 군병들에게 잡혀가자 무엇이라고 했는가?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저주한다" 라고 했는데, 그때 닭이 운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보면서 역시 공감을 하게 되는데, "베드로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도 그렇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우리는 이미 지나간 것을 다시 보면서, "그렇게 나는 주님을 부인하고 나만 살려고 했는데, 그런데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용서해주시니 얼마나 고마운가?" 라고 하면서 느긋하게, 그야말로 이미 다 끝난 드라마의 재방송을 보듯이 그렇게 보면 된다는 것이다. 

 

 

◈ 철없는 베드로, 철없는 부모, 그리고 철없는 '나' !!

그리고 예수님이 12살 때 유월절에 되어서 부모가 성전으로 데리고 갔다가 잊어버린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엄마는 예수님을 찾아서 야단을 쳤다는 것이다. "어디 그렇게 혼자 돌아다니는가?" 라고 말이다. 그때 예수님은 뭐라고 하시는가?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라고 하는데, 물론 부모는 그게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말이다.

(눅 2:48)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은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눅 2:49)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자기 자식으로 여기고서 소유화를 시키는데, 그것은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자식을 자기 것으로 여기는데, 그런데 어느 날 아들이 와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부모는 무엇을 깨닫는가? "주님께서 자기 택한 백성은 모두 건지시는데, 괜히 걱정을 했구나" 라고, 그렇게 다시 느끼게 된다는 말이다.

자식의 운명은 부모가 기도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쥐고 계시는데, "멀리 떨어져 있는 딸을 위해서 기도했더니만, 그 자식이 잘 되었다" 라는 착각, 그야말로 엄청난 착각인데, 주님의 기도로 잘 되고 있는데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부모의 기도로 무사히 잘 살고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자기가 새벽마다 기도해서 말이다.

그러니 부모가 되어서 얼마나 철이 없는지 모르는데, 기도하는 자신도 역시나 시들어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시들게 될 때, 그런 착각을 하게 하신 것도 역시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뒤늦게 깨닫고 감사하게 된다는 말이다. 즉 "주님, 부모의 기도는 물리치시고 주님의 기도로 여기까지 오게 하셨으니, 그 은혜를 어떻게 감당하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말이다.

 

 

◈ 중보기도와 도고 !!

히브리서 11장 25절의 말씀을 미국에서 강의하면서 참 은혜를 많이 받았는데,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그랬지만 말이다. 여기에 보면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라고 하는데, 물론 주기도문도 그렇고 말이다.

(히 7:25)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주님은 이렇게 살아서 지금도 열심히 기도하고 계시는데, 그런데도 우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내 기도를 덕분에 내가 산다" 라고 여긴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이 구절을 미국에서 그 교회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여러분들은 과연 이 히브리서 11장 25절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기는 믿습니까?" 라고 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중보기도는 주님만 하실 수 있지 우리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도고' 라는 것이 있는데,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말이다. 그런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예수님에게만 적용되는 중보기도라는 말을 사용하느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남을 위해서 기도하는 자기 자랑을 싶어서 그렇게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따라서 진짜는 무엇인고 하니까, 주님이 이렇게 기도하고 계신다는 말이다.

그러니 중보기도와 우리 기도의 차이점이 무엇인고 하니까, 우리의 기도는 우리 자신의 잘난 것으로 끝나고 말지만, 중보기도의 경우에는, 오직 주님의 기도만이 응답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의 기도를 끊어버리는 작업이 일어나게 될 때, 그것만이 중보기도이고, 그것은 오직 주님만이 하실 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설교하면서 그 교회의 주보를 보니, 뒷면에 광고란에 "중보기도를 합시다"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가 뭐라고 했는고 하니, "여기에 대한 수습은 당회장 목사님이 하시고, 저는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나중에 광고시간에 부목사님이 그 부분을 바꾸어서 읽는데, "다같이 도고를 합시다" 라고 말이다. 얼마나 고마운지 모르겠는데, 물론 나중에 당회장에게 호출이 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는데 말이다(ㅋㅋ). 

(녹취자 - 목사님, 질문이 있습니다. 예수님만이 중보자이시니, 중보기도는 당연히 그분만이 하실 수 있는 기도라고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웃을 위해서 기도할 수 없는가? 아마 거기에 대해서 우리나라 개신교에서는 '도고' 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 같은데, 중보기도와 구별해서 말입니다. 그런데 이게 카톨릭에서 건너온 개념으로, 그들은 중보기도나 도고를 같은 의미로서 사용했던 것 같습니다. 특별히 죽은 자를 위한 기도로 말입니다. 그리고 이 '도고' 라는 것은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데, 한자가 궁금해서 네이버와 다음을 검색했는데, 놀랍게도 단어 자체가 아예 없습니다. 그리고 도고가 영어로 'intercession' 인줄 알았는데, 도고라는 표현은 보이지 않고 중보기도로 나오네요.)

 

 

◈ 다시, '내 몸은 내 것이다' !!

다시 강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제일 큰 문제가 무엇인가? 우리의 지금 이 몸이 주님의 것인데, 그런데 우리는 자꾸만 이 몸을 자기 것으로 여기면서 "주여, 이 나이에 시들면 어떻게 합니까?" 라고 하는데, 그러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는가? "니가 무슨 권리로 그런 주장을 하노? 내 것을 내가 가지고 가겠다고 하는데, 니가 왜? 심보가 정말 더러운 심보네?"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자꾸만 "이것은 내 몸이다" 라고 하면서 자기 것이라고 우기니 무엇이 따라오는가? 알 수 없는 공포와 두려움이 계속해서 엄습해온다는 것이다. 그게 마귀가 주는 것인데 말이다. 아무리 문을 잠그고 꼭꼭 숨어있어도 그야말로 귀신같이 찾아온다는 말이다. 물론 귀신이 마귀의 부하이니 그렇겠지만 말이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어떻게 했는가? 문을 꼭꼭 걸어 잠그고 숨어있었는데, 그러면서 당연히 무서워서 벌벌 떨었다는 것이다. 그때 주님이 찾아오셔서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무엇인고 하니까, "애들아, 평안하냐?" 라고 했는데, 평안할 리가 있느냐는 것이다. 언제 로마군병들이 쳐들어와서 체포할지 모르는데 말이다.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당신은 벌금 3천 만원 !!

아까 장로님께서 문자로 뭔가 공포스러운 소식이 왔다고 하는데, 그게 무엇인고 하니, "이제부터 대한민국에서 예수님만이 구원자이고 다른 구원자는 없다고, 그런 주장을 하는 사람은 벌금 3천 만원을 내야한다" 라고, 그런 법률안이 국회에서 계류 중이라는 것이다. 물론 예를 들어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런 법률을 누가 입안을 하고 제정을 하는가? 주님이 그렇게 하시는데, 누가 믿는 자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런데 만약에 그 법안에 대해서 "여러분,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다른 종교도 인정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만 고집하면 안 됩니다. 그래도 그렇게 하면 경고처분만 하고, 벌금은 없습니다" 라고 하는 것이 첨가가 되어있으면, 우리는 괜히 안심이 되는데, 왜냐하면 벌금을 내지 않아도 되지 말이다. 즉 돈을 안 내도 된다는 것이다.

 

 

◈ 결국은, 돈이 무서버 !!

그러니 결국 우리는 무엇이 무섭다는 말인가? 법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주님이 무서운 것도 아니고, 돈이 없으면 죽는다고 하는, 즉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안 된다고 하는, 그러니 결국은 돈이 무섭다는 것이다. 심지어 벌금을 낼 돈이 3천 만원이나 있으면서도 말이다. 그런데 그것을 몽땅 벌금으로 내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 때문에 3천 만원이나 잃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 몸은 누구의 것이란 말인가? "내 몸은 내 것이다" 라는 것인데, 그러면 도대체 이게 뭐냐는 말이다. 결국 돌고 돌아서 또 "내 몸은 내 것이다" 라고, 그렇게 되고 만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법률을 제정하신 주님을 찬양해야 하는데, 왜냐하면 우리는 돈 없이 시들어버리면 그만이니 말이다.

 

 

◈ 주여, 하루빨리 데려가소서 !!

그래서 사도바울의 소망이 무엇인고 하니까, "주여, 하루빨리 저를 데리고 가소서" 라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위해서 간곡히 기도했는데, 그러면서도 "하지만 주님의 뜻이라면 더 살아도 괜찮습니다" 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와는 정반대의 기도라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는 무엇인가? "주여, 어떻게 하든 이 몸을 살게 하소서. 하지만 주님의 뜻이라면 죽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말이다. 그러니 완전히 순서가 정반대라는 것이다.

(고후 5:8)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니라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라고 했는데, 그게 무슨 의미인가? 그것은 바로 "무서움, 그게 뭐지? 두려움, 그게 뭐야?"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바로 내 구원을 방해한 훼방자이다" 라는 것이다. 그러니 자기의 구원을 방해한 것은 곧 자기 자신, 즉 '자아' 라는 말이다.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 '에고'와 '셀프' !!

이번에 제가 미국에서 했던 첫 강의의 주제가 무엇이었는고 하니, 자아와 자기를 구분했다는 것이다. '에고'와 '셀프'를 말이다. 자기, 즉 '나' 라는 것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데, 그런데 건방지게 자아가 나서서, 그 자아가 영원한 것처럼 자기, 즉 '나' 라고 행세를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것을 바꾸어주시는데, "니 몸은 니 것이 아니다" 라고 말이다.

그렇게 강의를 했더니만 당회장 목사가 알아듣지 못하겠다고 하는데, 그런데 나중에는 그것을 이해하는 눈치였다는 것이다.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분들도 이해하지 못했는데, 그래서 제가 친절하게 다 설명을 해주었는데 말이다. 그러면서 계속해서 강의를 해나가니, 비로소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 교재 63페이지를 보자.

** 기계는 중심성이 없습니다. 그냥 돌아갑니다. 중심이 필요하지 않고 진리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말이 없어집니다. 허공을 향해서 자기 독백만 되풀이될 뿐입니다. '삐~삐~', 표준화된 기계로 사는 것이 그들의 소망입니다.

 

 

◈ 기계가 기계를 낳고 !!

사람은 기계인데, 그래서 기계가 기계를 낳고, 기계가 기계를 낳는다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았는데, 그게 바로 기계가 기계를 낳은 것이란 말이다. 그렇게 계속해서 기계를 낳게 되면 쓰레기가 되어서 지옥에 갈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 기계가 천국에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전혀 갈 수 없는데, 그런데 천국에 가도록 해준 것이 바로 마태복음 1장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일단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3절까지 보자.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여기 2절에 보자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라고 되어있는데, 그것을 바꾸면, "기계가 기계를 낳고, 기계가 기계를 낳고, 기계가 그의 형제 기계를 낳고" 라고,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다 죽으니 말이다. 기계는 정지되면 그것이 곧 죽음이란 말이다.

 

 

◈ 다말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마리아에게서 !!

그런데 여기 3절에 보면, "유다는 다말에게서" 라고 되어있는데, 기계와 기계의 연결고리로만 되어있는데, 그런데 여기에 '다말에게서' 라고, '에게서' 라는 것이 나온다는 말이다. 이 다말은 이방여인인데, 여기 마태복음 1장에는 '에게서' 라는 것이 4번 나오는데, 즉 "다말에게서, 룻에게서,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마리아에게서" 라고 말이다. 이분들이 소위 '여성 4인방' 이라는 것이다.

마리아가 누구에 의해서 임신을 하게 되었는가? 성령인데, 그러면 성령은 이 땅의 사람, 즉 기계인가? 기계가 아닌가? 성령은 당연히 기계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결국은 '에게서' 라는 것에 붙어있는 사람은 누가 관리한다는 말인가? 성령께서 관리를 하시는데, 물론 아브라함과 이삭도 성령이 관리를 하셨지만 말이다.

지금 우리가 지상에 깔려있는 흐름, 즉 기계의 노선과 천국에 가는 노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즉 기계가 기계를 낳고, 기계가 기계를 낳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창세기 5장에 보면, "아담이라는 기계가 셋이라는 기계를 낳고 8백년이 지난 이후에 죽었고, 그리고 셋이라는 기계는 에노스라는 기계를 낳고 807년 이후에 죽었고" 라고 하는데, 그러니 결국 기계가 기계를 낳고 죽는다는 것이다.

 

 

◈ 죽은 다음에 부활하신 분은 누구인가?

그런데 24절에 에녹이 나오는데, 그는 어떻게 되는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갔다는 것이다. 여기서 한 집사님에게 물어보겠는데,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말이다.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이 다 죽었는데, 죽은 다음에 부활하신 분이 계시는데, 그분이 누구인가? 바로 예수님인데, 지금 여러분이 웃는데, 그것은 안다는 의미인데 말이다. 그래서 우리 어머님도 가끔은 웃는다는 것이다(ㅋㅋ).

(창 5:3) 아담이 일백삼십 세에 자기 모양 곧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창 5:4) 아담이 셋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5) 그가 구백삼십 세를 향수하고 죽었더라
(창 5:6) 셋은 일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창 5: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
(창 5: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창 5: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창 5:23) 그가 삼백육십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창 5: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우리가 기본으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우리가 복음을 들어본 적도 없고, 여기서 지금 처음 듣는다고 여기자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분은 죽지 않고 부활하셨다" 라고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이냐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기계에 불과하고 결국 멈추어서 죽어버리기에 전혀 희망이 없었는데, 그런데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해서 어떻게 되는가? 에녹처럼 '죽었다' 라는 것에서 벗어나는 노선이 따로 있다는 것을, 그것을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하심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고, 또한 믿게 되었다는 말이다. "아하, 그렇구나" 라는 것이다.

 

 

◈ 그러면 어떻게 가는가?

그러니 이 땅에서 부자가 되는 것이 희망이 아니라, 참된 희망은 주님과 합류하는 것인데, 즉 주님의 세계에 가는 것이란 말이다. 그러면 문제는 "어떻게 가는가?" 라는 것인데, 뭔가 다리가 있든지, 그런 연결고리가 있어야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지금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은 기계밖에 없는데, 즉 "늙어죽고, 늙어죽고" 라고 말이다. 그러니 온 천지에 공동묘지가 가득하다는 것이다.

요즘 땅이 모자라서 정부에서는 화장을 장려하는데, 그런데 에녹은 그런 시체조차도 없다는 것이다. 즉 죽음을 보지 않고 갔다는 말이다. 그러면 여기서 "어떻게 갔는가?" 라는 것이 핵심인데, 히브리서 11장 5절에서는 에녹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라고 한다는 것이다. 즉 에녹은 믿음으로 천국에 갔다는 말이다.

(히 11:5)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기웠으니 하나님이 저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니라 저는 옮기우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 하늘 작살에 맞은 에녹 !!

그런데 문제는 무엇인고 하니, 죽은 자에게는 믿음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을 맛보지 않고 가게 한 믿음은, 에녹의 믿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시는 예수님의 믿음이 미리 앞당겨져서, 마치 화살을 쏘듯이 에녹에게 쏘았다는 것이다. 왜 어부가 작살을 던지면 거기에 꽂혀서 고기가 딸려오지 않은가? 그렇게 하늘에서 에녹에게 작살을 쏘아서, 에녹에게 제대로 꽂히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때부터 에녹은 장차 오실 분이 죽었다가 삼일만에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즉 영생이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서 에녹은 어떤 기능을 하게 되는고 하니, 죽지 않아야 될 역할을 감당하게 되고, 그래서 죽지 않고 천국에 갔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하나님의 계시인데, 그 말씀이 바로 지금 주님과 우리 사이에, '주님의 있음'과 '나의 있음' 사이에 '말씀의 있음'으로서, 그렇게 연결이 되어있다는 것이다. 

 

 

◈ 마태가 전한 복음 !!

그렇다면 마태복음 1장에서 이야기하는, 즉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또 이삭이 야곱을 낳고, 그렇게 기계가 기계를 낳고 하는데, 그런 와중에 무엇이 들어있다는 말인가? 하늘에서 작살을 날리는데, 그런데 마태복음 1장에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보다도, 땅에 있는 것을 가지고 하늘로 연결하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에게서' 라는 것인데, 그런데 여기에 해당하는 자들이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나같이 다 여자인데, 그래서 여자의 후손 계열이 되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 여자들 중에서 '에게서' 라는 여자의 대표자는 다말도 아니고, 룻도 아니고, 우리야의 아내도 아니고, 마지막 네 번째인 여자가 다리가 되는데, 그 여자가 곧 '마리아' 라는 것이다.

이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를 했으니, 이 마리아의 배를 째보면 그 안에는 예수님이 들어 계시는데, 그러니 예수님이 곧 여자의 후손이란 말이다. 바로 그 예수님에 의해서 이 기계에서 하늘로 간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태가 전한 복음이란 말이다.

그야말로 기쁜 소식인데, 즉 예수님이 오셨는데, 그분은 남자가 없이 여자의 몸을 통해서 오셨는데, 그 여자가 택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늘까지 연결시켜 준다는 것이다. 작살을 던져서 당겨 올리는데, 그리고 이전에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이런 일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라는 것이다.

 

 

◈ 꺼벙한 남자, 똑똑한 여자 !!

간단히 말해서, 남자는 멍청했는데 여자가 똑똑했다는 것이다. 여자 하나를 잘 만남으로서 그 여자로 인해서. 그 여자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여자가 되어서 말이다. 즉 다윗은 구원을 받지 못하는데, 우리야의 아내를 만남으로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에게서' 라는 여자를 만나려면 마리아를 만나야 하는데, 그냥 마리아를 만나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배를 쪼개서 그 안에 계신 분을, 즉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는데, 누구든지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에게서'에 해당이 되어서, 기계와 같은 죽음에서 벗어나서 영생의 나라에서, 기계가 아닌 참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마 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마 1:2)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를 낳고
(마 1:3)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마 1:4)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마 1: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마 1: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 1:7) 솔로몬은 르호보암을 낳고 르호보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사를 낳고
(마 1:8) 아사는 여호사밧을 낳고 여호사밧은 요람을 낳고 요람은 웃시야를 낳고
(마 1:9) 웃시야는 요담을 낳고 요담은 아하스를 낳고 아하스는 히스기야를 낳고
(마 1:10) 히스기야는 므낫세를 낳고 므낫세는 아몬을 낳고 아몬은 요시야를 낳고
(마 1:11)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에 요시야는 여고냐와 그의 형제를 낳으니라
(마 1:12) 바벨론으로 이거한 후에 여고냐는 스알디엘을 낳고 스알디엘은 스룹바벨을 낳고
(마 1:13) 스룹바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리아김을 낳고 엘리아김은 아소르를 낳고
(마 1:14) 아소르는 사독을 낳고 사독은 아킴를 낳고 아킴은 엘리웃을 낳고
(마 1:15) 엘리웃은 엘르아살을 낳고 엘르아살은 맛단을 낳고 맛단은 야곱을 낳고
(마 1: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 내가 아닌 다른 분이 하셨습니다 !!

이렇게 보면 신앙인의 특징은 간단한데, 즉 "나 말고 다른 분을 소개하는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권사님의 경우에, "권사님은 어떻게 그렇게 자기 관리를 잘 하셨습니까?" 라는 소리를 주위에서 듣습니까? 아니 듣고 싶습니까? (ㅋㅋ) 만약에 누군가가 그런 소리를 한다면 "제가 아니고 주께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라고, 즉 신앙인라는 것은 "내가 기도했더니만, 내가 봉사를 했더니만 잘 되었습니다" 라는 게 아니라, "내가 아닌 다른 분이 하셨습니다" 라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 권사님 : 제가 아니고 다른 분이 하셨습니다.
* 불신자 : 그 다른 분이 누구입니까?
* 권사님 : 그분은 예수님입니다.
* 불신자 : 아니 예수님은 눈에 보지 않는데, 어떻게 그런 망상을 하십니까?
* 권사님 : 그게 망상이 아니고, 그분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 불신자 : 왜 말씀을 주셨습니까?
* 권사님 : 그분의 말씀은 영원하고, 나의 몸은 시들어 갑니다.
* 불신자 : 그런데요?
* 권사님 : 그렇게 시들기 전에 주의 말씀을 증거하라고 저를 찾아오셨습니다. 
* 불신자 : ? ? ?

이제 교재 64페이지를 살펴보자.

** 지혜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비교되는 가운데서, 비교하는 싶은 가운데서 나옵니다.

 

 

◈ 예수님은, 수모와 모멸 가운데서 !!

그러니 지혜라는 것은 어리석은 자와 똑똑한 자, 그런 가운데서 나온다는 것이다. 왜 그런고 하니까, 지혜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핍박을 받게 되어있는데, 그 핍박을 지난 주일 낮 시간에는 뭐라고 했는고 하니, 모멸을 받는다고 했는데 말이다.

주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자들을 편히 쉬게 하는데, 그 방법이 뭐라고 했는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배우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에게 무엇을 배운다는 말인가? 예수님께서 우리가 이 땅을 어떻게 통과하셨느냐는 것이다. 핍박과 모욕과 모멸을 받으면서, 그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다 받으셨다는 말이다. 그러니 "너희도 그렇게 모욕과 모멸을 받으면서 살아라" 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것이 어떻게 되는가?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모욕과 모멸을 받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짐은 더욱 더 무거워진다는 것이다. 존재의 가벼움이 아니라, 산다는 것 자체가 힘든다는 것은, 그것은 남의 시선을 너무 의식하기 때문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이다.

타인의 시선이 곧 공포인데, 그게 두려움이라는 것이다. 즉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두려움이란 말이다. 그것을 피하려고 산 속에 삭발을 하고 들어가고, 자살을 한다는 것이다. 수녀가 되고 비구니가 되고, 그리고 목사를 하려고 하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해결책이 아니라 도피라는 것이다.

미국에 이민을 가신 분들 가운데 많은 분들이 도피성인데, 이런 이야기를 하면 또 뒷말이 생기지 싶은데 말이다. 아무튼 그분들은 "나는 미국이 좋아요" 라는 것보다도 도피하는 경향이 많다는 말이다. 하지만 어디 도피를 한다고 해서 해결이 되겠는가? 안 되는데, 왜냐하면 수고하고 무거운 짐은 여전하기에 말이다. 

미국을 가든 어디를 가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래, 수모와 모멸을 받겠다" 라고 하는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면, 그게 곧 해결책이란 말이다. "그래, 나는 이것밖에 안 돼. 그래, 나도 여기서 이렇게 힘들게 살아" 라고, 아예 수긍을 해버리자는 것이다. "주여, 이렇게 나오시면 좀 곤란합니다" 라고 반응하지 말고 말이다.
 


◈ '케라' 인생을 살아야 !!

세상에 별난 인생은 없는데, 고생하지 않는 사람도 없고 말이다. 모두들 고생인데, 미국에서 고생하고 한국에서 고생하고 말이다. 고생을 그렇게 하는데, 하지만 마음이 편한 사람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경상도 표준말로는 '케라' 라고 하는데, 땅을 판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렇게 해버려라" 라는 말이다. 즉 "마음껏 나에게 퍼부어라. 나는 원래 그런 인간이야" 라고 하면서 살아가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것이,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한 만큼 온전한 사람이 되고 멋진 사람이 된다고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신앙생활을 제대로 한 사람은 날이 가면 갈수록 '케라' 라고 한다는 말이다. 즉 "그 어떤 비난도 나에게 퍼부어라. 나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 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식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셨는데, 동생들이 "형님, 이제 뜰 수 있습니다. 지금쯤 출사표를 내시죠" 라고 했는데, 그게 요한복음 7장에 나오는데 말이다. 그러자 예수님은 뭐라고 하셨는가? "케라. 나는 그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그 길을 갈 뿐이다" 라고 하셨다는 것이다.

(요 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요 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요 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요 7: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 예수님의 몸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몸 !!

그러면 예수님의 몸은 누구의 몸이란 말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몸인데, 그렇다면 예수님은 그게 되는데 왜 우리는 안 되느냐는 것이다. 하지만 성령이 임하게 되면, 안 되는 우리를 되게 하시는데, 동시에 우리는 무엇이 안 되는지, 그것도 같이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서, 옛것과 새 것, 안 되는 것과 되는 것, 그게 둘 다 우리 안에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렇게 안 되는 것을 되게 하신 주님께 감사합니다" 라고 하면서, 오직 주님만 자랑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것을 교재 64페이지에 보면 아주 어려울 말로 이야기를 했는데, 지금부터 남은 시간에는 좀 어려운 것을 해보겠는데 말이다. 먼저 교재 64페이지를 보자.

** 로마서 6장에 보면, "함께 장사되고 함께 부활했다" 라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연합, 즉 세례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겁니다. 

(롬 6: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롬 6: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 '연합', 혹은 '세례'에 대해서 !!

지금부터 연합, 혹은 세례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리겠는데, 어제 오후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부부가 같이 산다고 해서 한 마음이 된다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예수님과 한 마음이 되고 싶습니다" 라고 해도, 과연 그게 가능하겠는가? 우리의 힘으로 그렇게 될 수는 없다는 말이다.

 

 

◈ 왜 우리는 예수님과 한 마음이 되지 못하는가?

그러면 여러분은 그 원인에 대해서 한 번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즉 "왜 우리는 예수님과 한 마음이 되지 못하는가?" 라는 것이다. 한 마음이 되면 참 좋겠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바로 우리 속에 '기억'이 들어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기억이란 것이 들어있기에 말이다.

 

 

◈ 이 집사님은 어떤 분일까?

제가 미국에 가면서,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하기 이전에 먼저 상상을 했는데, 이제 만날 사람이 어떤 분인지를 말이다. 그렇게 상상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한국에서 공항에 마중을 나올 미국에 있는 이 집사님과 전화통화를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막상 마주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런 상상이 모두가 다 날아가고 마는데, 그러면 그동안 자기가 가지고 있던 기억은 아무런 소용이 없어지고 만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직접 당사자를 만나니 말이다. 그러니 그동안의 기억은 없어져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다음부터는 어떤 기억이 있게 되는가? 이제는 만났으니까, 만나고 난 그 다음의 기억이 여전히 지금 이 순간에도, 제가 이렇게 한국 땅에 있는 순간에도 저의 기억 속에 살아있다는 것이다. 잊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그 기억이 유지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도 한 마음에 되지 못하는 것은 기억 때문이라고 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우리 자신의 몸이 가지고 있는 기억이 있는데, 그러면 그 기억으로 생각하는 예수님은 과연 가짜인가? 진짜인가? 100프로 가짜라는 것이다.

 

 

◈ 아하, 내 몸이 생각하는 예수님이 아니었구나 !!

계속해서 설명하면 너무 힘이 드니까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드리겠는데, 우리가 예수님을 만났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그 예수님이 자기 몸이 생각하는, 자기 몸이 원하는 예수님이 아니란 사실을 깨우치게 될 때, 그게 예수님과 연합된 사람이라는 것이다. 자기 기억 속의 예수님이 아님을 말이다.

그러면 예수님이 오실 때, 그 예수님의 기억은 무엇인가? 우리 죄를 위해서 행하셨던 모든 것이 있는데, 이제 이 둘이 드디어 만나게 되는데, 그렇게 만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고 하니, 우리 기억 속에서는 자기의 죽음은 성립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항상 내가 사는 것을 위주로 해서 모든 것을 기억하기 때문에 그렇다" 라는 말이다.

우리가 경험했다고 해서 기억하는 게 아니라, 경험한 것들 중에서 "왜 내가 더 살아야 하는가?" 라고 하는 이유와 정당성을 확보하는 용도로서, 그렇게 필요한 것만을 기억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내가 이렇게 잘났으니, 남은 죽어도 나는 죽으면 안 돼" 라고 말이다.

그런데 주님이 오시게 되면, 주님은 십자가를 가지고 오셔서 그 십자가를 지게 되는데, 그 십자가가 무슨 십자가인가? 자기는 이미 죽은 것으로 되어있다는 것이다. 지금 어렵다는 표정들인데, 지금 제가 하는 설명이 어려운지, 아니면 이런 사실 자체가 어려운지 모르겠는데 말이다. 

 

 

◈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

지금 제가 하고 있는 설명은 전혀 어려운 게 아닌데, 즉 "십자가에서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다" 라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5장 14절에 보면 분명히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라고 되어있다는 것이다.

(고후 5:14)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그런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죽은 기억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성령을 받아서 주와 함께 있는 사람은 무엇인고 하니, 십자가 앞에서 자기의 삶은 스톱이 되는데, 즉 "나의 삶은 이것으로 끝!", 그렇게 된다는 말이다.

 

 

◈ 아하, 이게 나의 죽음의 자리구나 !!

우리는 늙어서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죽음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았을 때, 그 예수님이 계시는 자리가 곧 우리 자신이 있을 자리라는 것이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하는 그 자리가 말이다. 그 자리가 곧 우리가 그런 소리를 들어야하는 자리고, 동시에 그 자리가 우리가 저주를 받는 자리고, 또한 죽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러니 죽음이라는 것은, 아버지로부터 최종적인 평가를 받는 자리, 즉 "너는 지옥에 가야 돼" 라고 판정을 받는 자리라는 것이다. "땅! 땅! 땅!" 이라고, 즉 "너는 지옥행이야. 너는 버림을 받아야만 돼" 라고 말이다. 그런 판정을 받는 자리가 곧 우리 자신이 죽는 자리라는 것이다. 그것을 우리는 성령을 통해서 미리 앞당겨 알게 되는데, 그리고 또한 느낀다는 것이다. "주여, 이렇게 나만 위해서 살다가는 버림을 받는군요" 라고 말이다.

 

 

◈ 주님으로 인해서 긴 그림자가 !!

그런데 그 끊어짐 이음새를 누가 이어주는가? 주께서 죽었다가 사흘만에 다시 부활하셨는데, 그렇게 돌아가셨다면, 그리고 이제 다시 산다면 누가 사는 것인가?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 자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 용서가 되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영생을 받을 이유만 계속해서 차곡차곡 쌓이게 되는데, 그것으로 인해서 긴 그림자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십자가에서 예수님도 죽고 우리 자신도 죽는데, 우리 자신의 긴 그림자가 생기게 되는데, 주님과 함께 있는 그림자가 길게 늘어뜨리게 된다는 말이다. 그러면 그 그림자 속에는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고 하니, 우리는 죄를 짓고, 그리고 주께서는 그 죄를 용서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를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다는 말이다.

7살 때에 친구와 싸워서 코피가 나게 했다면, 주님께서는 이미 7살 이전에 십자가를 통해서 그 죄를 용서하셨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를 짓게 하시고 용서하시고, 또 짓게 하시고 용서하시고, 바로 그렇게 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앞까지 이끌어오셨다는 말이다.

 

 

◈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

"목사님, 그렇다면 도대체 누가 예수님과 연합이 되고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물으신다면, "내가 나 된 것은 주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사도바울의 고백, 그것이 바로 정답이라는 것이다. 그것도 진정성이 있게, 진심으로 말이다. 

(고전 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지금 제가 미국에 갔다와서 누구를 욕하는 것이 아니라, 저에게 남아있는 기억을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기억은 솔직한 저의 체험이었고, 그 체험은 '잘했다' 라고 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서 이미 용서하신, 그 용서된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는 5년 전에, 10년 전에 얼마든지 누구를 미워할 수 있는데, 분명히 미워했는데, 그러면 그 미워했던 이야기를 왜 하느냐는 말이다. 이미 주님의 용서로서 처리가 된 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마음껏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용서를 받은 것이기에 말이다. 

권사님의 경우에, 만약에 권사님이 내년까지 사신다면 또 내년에 죄를 지을 것이 분명히 있지 싶은데, 그런데 이렇게 그 죄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무엇인고 하니, 이미 십자가로 말미암아서, 즉 이미 역사를 초월하신 그분에 의해서 생각이 나도록, 즉 "나에게 이런 죄가 있었는데 십자가로 용서하셨다" 라고 하는, 그 용서했음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우리로 하여금 그 죄를 기억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렇게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시면서, 주님의 십자가로 마감이 되면서, "주여,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라고 하는 고백이 터져 나올 때, 그 사람은 누가 뭐라고 해도 주님과 함께 연합이 된 사람이고 영생을 얻은 사람이라는 말이다.    

 

 

◈ 니가 어제도 그랬잖아 !!

만약에 우리가 말을 실수했다고 해서 겁을 낸다고 하면, 저도 좀 실수를 한 것 같은데 말이다(ㅋㅋ). 그러면 "실수를 하지 않을 것을, 조심할 것을" 라고 하는데, 그러면 그 순간 무엇이 찾아오는가? 공포와 두려움이 찾아왔는데, 그러면 자기 몸은 누가 관리하는가?

만약에 자기가 알아서 관리한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일곱 귀신이 다 달려드는데,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니잖아. 어제도 니가 그랬잖아" 라고 하면, 우리는 겁이 나서 살 수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행동을 올바로 하지 않아서 자식이 취직을 하지 못하는구나" 라고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매사에 벌벌 떨면서 살아가는데, 알 수 없는 공포가 계속해서 밀려온다는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복음을 안다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복음을 모르는 식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는데, '재방송' 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그림자 속에 함께 놓여있다는 말이다. 우리가 어떤 짓을 하고 어떤 실수를 하든지 간에, 저처럼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도 없지 싶은데 말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가지고 겁내고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분들이 이런 소리를 들으면 나를 얼마나 욕하겠노?" 라고 하게 되면, 그것은 자기 자존심이고 자기 잘남을 증거하는 것이지, 주님의 증거하는 모양새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야말로 실수투성이이고, 사실은 실수를 한다는 말 자체가 건방진 소리인데, 사실은 실수뿐이라는 말이다. 죄를 짓는다는 말도 역시 건방진 소리인데, 우리는 죄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로 인해서 상처를 받은 사람이 한 두 명이 아니고, 우리가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간에, 우리의 '있음' 자체로 말미암아서 피해자가 발생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일일이 찾아가서는 미안하다고 사과를 할 수도 없고,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일인데, 그저 못난 인간을 기어이 살려냈다는 식으로 십자가만을 알게 하시고 또한 믿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니 도대체 이런 횡재가 어디에 있느냐는 말이다.

 

 

◈ 봐라, 여기 못자국이고 창자국이다 !!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벌벌 떨고 있는데, 제일 먼저 주님이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그동안 잘 있었나? 평안하지?" 라는 것인데, 즉 "두려워하지 마라. 걱정하지 마라. 내 손과 내 옆구리를 봐라. 못자국이고 창자국이지? 이게 다 너희들을 위한 것이야" 라고 하시면서 자기 몸을 내미시는 주님의 의도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실수를 하지 마라" 라는 것이 아니라, "성화를 하라. 하지 마라" 라는 차원이 아니라, 오로지 예수님만을 자랑하고, 그 예수님만이 진정한 있음이고, 우리는 그런 예수님만 증거하다가 사라져서, 천국에서 다시 재회하게 되는, 그러한 몸으로 주님이 관리하고 있음을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다는 것이다.

 

 

◈ '성령을 받았다' 라는 의미는?

이제 마지막으로 이것만 하고 마치겠는데, 그러면 "성령을 받았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이냐는 것이다. 우리가 소유할 수 없음을 기본적으로 먼저 말씀을 드리겠는데, 우리는 무엇이든지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머리카락도 소유할 수 없는데, 그런 아름다움을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냥 아름답다는 말이다. 머리카락이 있는 것이지, 소유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뭔가 소유하려면 '나' 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 '나' 자체가 없기 때문에 말이다. 그러니 그냥 당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이 있다는 것은, 성령이 덮쳤다는 말인데, 그렇다면 성령이 덮치게 되면 어떻게 되는지, 그 대목을 살펴보자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인데, 7절과 8절을 보자.

(고후 4: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고후 4: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 우겨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

여기 7절에 보면,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라고 되어있는데, 즉 그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러니 하나님 안에 우리가 들어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살아가고 있는데, 지금 제가 던진 질문이 무엇인고 하니까, "성령을 받았다" 라는 것이 무엇이냐고 했다는 것이다. 즉 성령을 받았으면 그 티가 나는데, 그것이 무엇이냐고, 제가 지금 자문자답을 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 답변이 바로 8절인데,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여도" 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실 때 무엇도 함께 온다는 말인가?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는 사태가 온다는 말인가? 오지 않는다는 말인가? 그런데 우리의 생각은 무엇인가? "하나님이여, 성령이 오시는데,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됩니다. 성령을 받았는데 왜 이렇게 힘든 일이 생깁니까?" 라고 한다는 것이다. 아닌가요? (ㅋㅋ)

"목사님, 성령을 받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질문할 때는, 그 속에는 무슨 의미가 들어있는고 하니, "성령만 받으면 그야말로 만사형통이지 않습니까?" 라는 것이 내포되어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도바울은 그게 아니라는 말이다. 성령을 받게 되면 어떻게 되는고 하니, 일단 먼저 사방에서 우겨쌈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다음에 무엇인가? "싸이지 아니하며" 라고 한다는 것이다. 어려운 일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오는데, 그런데 자기 혼자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 안에 있으니 어떻다는 말인가? 환란과 핍박과 곤고와 기근과 적신이 와도, 그런 일이 생기더라도, 그야말로 재수에 옴이 붙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의 사랑은 전혀 이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사람이 바로 성령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 꼬이지 않은 인생이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

제가 이렇게 힘들게 말했으니 이해가 되었지 싶은데, 그렇지요? "주여, 성령을 받게 해놓고 왜 이렇게 힘들게 하고 흔들어댑니까?" 라고, 즉 "사업도 안 되고, 집안 일은 꼬이고, 몸도 아프고, 정말로 못살겠습니다" 라고 하는데, 하지만 그렇게 우겨쌈을 당해도 싸이지 않고, 그것을 뚫는다는 말이다.

다말이 평안하게 살았는가? 인생도 그렇게 꼬인 인생이 없다는 것이다. 여자로서, 도대체 시아버지와 그게 무엇이냐는 말이다. 룻이 고요했는가? 우리야의 아내인 밧세바가 평안하게 살았는가? 그렇다고 마리아가 신세가 좋았는가? 전혀 아니라는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싸여도 싸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 인생은 재방송, 느긋하게 !!

그리고 8절에서 계속해서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라고 하는데, 무엇 때문에 그렇게 낙심을 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그것은 곧 성령에 의해서, "내 몸은 내 몸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나에게 이런 고난이 닥쳤군요" 라고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수모와 모멸과 핍박에 대해서 어떻게 하겠는가? "다 오너라. 내가 담당하겠다" 라고 나와야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내게 배우라" 라고 했으니 말이다. 그러니 우리가 예수님에게 배운 것처럼 모든 수모와 모멸을 다 받으라는 것이다. 받는 것 자체가 재방송인데, 그야말로 느긋하게 받을 수가 있다는 말이다.

 

 

기도하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입만 벌리면 실수하고 죄를 짓습니다. 또 입만 벌리면 자기 자랑하고 남에 대해서는 시기하고 질투하고 험담을 늘어놓습니다. 기껏 한다는 것이 그런 것밖에는 할 줄 모르는 저희들인데, 그런데 그것이 십자가의 긴 그림자 속에서 주님의 용서가 무엇인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오늘도 실수와 죄로 범벅된 인생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주께서 그렇게 하신 것이, 풀은 말라도 말씀은 영원하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한 표준적인 재료라고 하면, 그리고 그 일에 증거라고 하면, 그것을 감히 감당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비옵나이다. 아멘